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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인명사전/한 국 인 명/ㄱ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가실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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嘉悉(實)王

6세기경 가야의 왕. 당나라의 악기를 보고 우륵으로 하여금 12현으로 된 가야금을 만들게 하였다. 가야가 멸망하자, 우륵은 신라 진흥왕에게로 돌아갔다고 전하는데, 당시의 6가야 중 어느 가야인지 알 수 없다. 가보왕(嘉寶王)이라고도 한다.

강감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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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邯贊(948-1031)

고려의 명장. 옛 이름은 은천, 시호는 인헌, 본관은 금주이다. 삼한 벽상공신 궁진의 아들이다. 성종 때 갑과에 장원 급제하고 예부시랑이 되었다. 현종 1년(1010), 거란의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자, 고려에서는 강 조가 30만 군사를 이끌고 나가 싸웠으나 패배하였다. 당시에 많은 신하가 왕께 항복하기를 권했으나, 강감찬이 이를 반대하고 하공진을 적진에 보내 설득케 하여 물러가게 하였다. 현종 9년(1018)에 다시 거란의 성종이 소배압을 시켜 고려를 침공케 하자, 강감찬이 상원수가 되어 군사를 이끌고 나가 진격을 계속하는 거란군의 뒤를 공격하여 귀주에서 크게 이겼다. 이 싸움에서 거란군의 시체는 석천에서 반령에 이르기까지 들을 덮었으며, 강감찬이 수많은 포로와 전리품을 거두어 돌아오자 왕은 친히 나와 환영하였다. 추충협모 안국공신의 호를 받았다. 연로하여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자연과 글을 벗하며 여생을 보냈다.

강경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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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敬愛(1907-1943)

여류 작가. 황해도 출신으로 1931년 장편소설 <어머니와 딸>을 발표함으로써 작가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중앙 문단에는 나서지 않고 가정에서 글을 썼다. 뒤에 간도로 옮겨 갔다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작품으로는 <인간문제> <지하촌> <부자> <소금> 등이 있다.

강고내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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强固乃末

신라 경덕왕 때의 조각가. 본피부(지금의 경주군)에 살았으며 분황사의 약사여래 동불상을 제작하였다. 이 때가 바로 석굴암을 한창 만들 때였으므로 그도 이 사업에 종사했을 것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다.

강맹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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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孟卿(1411-1462)

조선의 명신. 자는 자장, 시호는 문경, 본관은 진주이다.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도승지를 지냈으며, 세조의 집권에 공이 있어 좌익공신의 호를 받고 영의정이 되었다. 담론에 능하고 학문이 깊어 황 희의 밑에 있을 때 매우 촉망을 받았다고 한다.

강민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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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民瞻(?-1021)

고려의 장군. 목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현종 때에는 여진의 침입을 막았으며, 강감찬 장군의 부장이 되어 흥화진에서 소손녕의 거란군을 격파하였다. 이 공으로 지중추 부사·병부상서에 올랐다. 본래 선비 출신으로 무예에는 능하지 못하였으나 의지가 강하여 거듭 전공을 세웠다.

강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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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善泳(1925- ) 무용가. 서울 출신. 본명은 강춘자(姜春子). 안성여자고보 출신으로 한성준에게 사사(師事)했다. 1943년의 제1회 무용발표회(부민관)를 출발로 8·15광복이 될 때까지 만주·일본 등지에서 무용공연을 가졌다. 광복 후에는 '강선영무용연구소'를 개설하는 한편 여러 차례의 신작무용발표회를 가졌다. 1960년에 파리 국제민속예술제, 1962년과 1964년엔 일본에서, 1968년엔 중화민국에서 공연, 1972년엔 뮌헨올림픽 한국 민속예술단 지도위원으로 세계 각지를 순회공연했다. 1965년 서울특별시 문화상(<장희빈>), 1965년 아시아 문화예술제 문화 부문 작품상 등을 수상, 주요 작품으로는 <수로부인(水路夫人)> <장희빈(張禧嬪)> <열두무녀도> 등이 있다. 무용협회 부회장 역임. 현 강선영무용단장.

강세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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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世晃(1713-1791)

조선의 서화가. 자는 광지, 호는 표암, 본관은 진주이다. 기로소에서 뽑혀 예조판서에까지 올랐다. 정조 때에 천추 부사로 베이징에 갔을 때, 그의 서화를 구하려는 사람들이 많았을 정도로 서화에 뛰어났다. 글씨는 전서·예서를 비롯한 각 체에 모두 능했고 그림은 특히 산수·사군자 등에 뛰어났다. 그의 화풍은 정 선을 계승한 것으로 담담하면서 격이 있고 개성이 뚜렷하였다. 그는 당시 화단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 후원자 또는 추진자로서의 역할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저서로 <표암집>이 있으며 그림으로 <난죽도> <산수도> 등이 있다.

강소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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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小泉(1915-1963)

아동문학가. 본명은 용률이며 함경남도 고원에서 출생하였다. 함흥 영생고보를 졸업하였으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돌멩이> <마늘 먹기> 등의 동화와 소년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함으로써 본격적인 아동문학가로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작품 속에는 아름답고 무한한 동심의 세계와 착하고 고운 소년 소녀들의 마음이 담겨 있다. 1963년 문예상을 수상한 후 간경화증으로 사망하였다. 1965년에 '소천문학상'이 제정되었다. 대표작으로 <꿈을 찍는 사진관> <꽃신> 등이 있다.

강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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强首(?-692)

신라의 유학자·문장가. 어려서부터 유학에 뜻을 두어 <효경> <곡례> 등을 공부하였으며 벼슬길에 오른 후 유명해졌다. 태종 무열왕 때에 당나라에서 온 난해한 국서를 쉽게 해석하고 그 답서를 유창하게 지어 왕의 신임을 얻었다. 재물에 뜻이 없어 집안이 가난하였는데, 이 사실이 왕에게 알려져 쌀 1백 석을 하사받았다. 문무왕 때에는 외교문서를 능숙하게 다루어 삼국 통일에 큰 공을 세우고 사찬 벼슬에 올랐다. 신문왕 때에는 처음으로 국학을 세워 여러 박사를 두었으며, 설총과 함께 9경으로써 제자들을 가르쳤다.

강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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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信哉(1924-2001)

여류 소설가. 서울 출생으로 이화여전을 중퇴했다. 1949년 <문예> 지의 추천을 받아 데뷔, 그 뒤에 꾸준한 창작 활동으로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그의 작품은 인물을 희화적으로 다루는 특징이 있다. 1959년 한국 문인협회상을 수상했고, 1967년 여류문학상을 수상했다. 대표작으로는 장편 <임진강의 민들레> <파도> <오늘과 내일>, 단편집 <젊은 느티나무> <여정>, 수필집 <모래성> 등이 있다.

강우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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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宇奎(1855-1920)

독립운동가. 자는 찬구, 호는 일우, 본관은 진주이다. 평남 덕천에서 출생하였으며, 소년 시절에 아버지를 따라 함경남도 홍원으로 가서 한학에 전념하여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쳤다. 을사조약 체결로 국운이 기울어짐을 보고 만주 북간도로 가서 지린성 동화현에 광동학교를 설립하여 동포 교육에 전력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선 총독 암살을 결의하고 폭탄을 구입하여 서울로 들어왔다. 내외 정세와 총독의 동정을 살피던 중, 하세가와 후임으로 사이토가 임명되어 부임한다는 것을 알고 사이토의 내한 당일 서울역에서 폭탄을 던졌으나, 사상자 37명을 내었을 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후 체포되어 사형당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강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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康元相

조선 말기의 의사(義士). 1907년, 나인영·오기호 등과 을사 5적의 암살을 계획하던 중, 권중현을 피살하려다가 체포되어 공모자를 밝히라는 혹독한 심문에도 답하지 않고 스스로 혀를 끊었다. 후에 나인영·전덕준 등과 함께 지도로 유배되었다.

강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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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瑋(1820-1884)

조선의 한학자. 자는 중무, 호는 추금·고환자, 본관은 진주이다. 어려서 민행로에게 배우고, 제주도에 가 있는 김정희를 방문하여 많은 감화를 받았다. 강화도 조약에 참석하였으며, 이후 일본과 청에 왕래하면서, 해외의 실태를 파악하여 국운 회복에 힘썼다. <황성신문>의 발기인 중 한 사람이며 국문 연구에도 전력하였다.

강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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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在求(1937-1965)

군인. 인천에서 출생하였으며 서울고등학교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대위로 진급하였다. 1965년, 월남 파병이 결정되자 자원하여 맹호 부대 중대장이 되었다. 출발 전, 홍천 부근에서 수류탄 투척 훈련을 실시하는 도중, 부하 사병이 실수하여 수류탄이 중대원 한가운데로 떨어지자, 몸으로 수류탄을 덮쳐 수많은 부하들을 구하고 사망하였다. 육군장으로 장례되었고 소령으로 특진되었다.

강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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康兆(?-1010)

고려 초기의 무신. 목종 때 중추원사가 된 후에 서북면 도순검사로 부임하였다. 1009년 김치양이 천추 태후와 통하여 낳은 아들인 목종을 왕위에 앉히고는 정치를 제멋대로 하자, 군사를 이끌고 개성으로 쳐들어가 김치양과 목종을 살해하고 현종을 왕위에 앉혔다. 1010년, 거란의 성종은 '강 조의 정변'을 구실로 고려에 쳐들어왔다. 강 조는 거란군에 대항하여 처음에는 이겼으나, 나중에는 사로잡히고 말았다. 거란의 성종은 신하가 되어주기를 권했으나, 거부하자 고문까지 하였다. 끝내 무릎을 꿇지 않자 그를 죽여버렸다.

강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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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必履(1713-?)

조선의 문신. 자는 석여, 본관은 진주이며 전라도 강진에서 출생하였다. 영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대사헌을 지냈으며 그 후 동래 부사가 되었다. 당시 통신사인 조 엄이 쓰시마에서 감저(고구마) 종자를 가지고 와서 동래와 제주 지방에 심게 할 때, 그는 감저 재배를 장려하였고, <감저보>를 저술하여 그 재배법을 일반에게 지도, 보급하였다.

강홍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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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弘立(1560-1627)

조선의 정치가. 자는 군신, 호는 내암, 본관은 진주이다. 강사상의 손자이며 참판 강 신의 아들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서장관으로 명에 다녀왔다. 1618년 명이 랴오둥 반도를 침범한 청을 토벌할 때 조선에 원병을 청하자, 그는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싸우다가 포로가 되어 청에 끌려갔다가 정묘호란 때 풀려나 귀국하였다. 그 동안 조정에서는 그가 청나라의 앞잡이라는 설과 10년 간 절개를 지킨 자라는 등의 시비가 많았다. 그 후 반역죄로 몰려 모든 벼슬을 빼앗기고 말았으나, 죽은 후에 벼슬이 다시 내려졌다.

강희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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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希孟(1424-1483)

조선의 정치가. 자는 경순, 호는 사숙재, 시호는 문량, 본관은 진주이다. 세종 29년(1447)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예종 때 남 이를 죽인 공으로 익대공신이 되었다. 성종 때에는 이조판서·좌찬성 등을 지냈다. 그는 서화와 문장이 뛰어났으며, 그가 죽은 뒤 서거정에 의하여 유고가 편찬되었다. 저서로 <사숙재집> <촌담해이> 등이 있다.

강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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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希顔(1419-1463)

조선의 명신이며 서예가. 자는 경우, 호는 인재, 본관은 진주이다. 세종 23년(1441)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직제학 등을 지냈으며, 그림에 능했을 뿐 아니라 글씨도 잘 썼다. 세종이 옥새의 글씨를 맡길 정도로 당시에 그를 따를 만한 사람이 없었다. 세조 때에는 사육신 사건에 관련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성삼문이 그의 뛰어난 재능을 아낀 나머지 변호해 주어 목숨만은 건졌다. 그는 집현전에서 성삼문·정인지 등과 함께 훈민정음에 대한 해석을 붙이는 일에 직접 참여하였으며 <용비어천가>에 대한 주석을 붙이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그는 시·글씨·그림의 3절로서 이름이 높았다. 대표작으로 <고사관수도>가 있으며, 저서로 <청천양화소록>이 있다.

개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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蓋鹵王(?-475)

백제 제21대 왕(재위 455-475). 휘는 경사이며 비유왕의 맏아들이다. 472년 위나라에 고구려 토벌의 원조군을 청했으나 실패하고, 고구려의 첩자인 도림의 계략에 말려들어 토목공사를 벌이는 등 국고를 탕진하였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받고 도망치다가 붙잡혀 죽었다.

개루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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蓋婁王(?-166)

백제의 제4대 왕(재위 128-166). 기루왕의 아들로서 132년 북한산성을 쌓았으며, 신라의 반역자인 아찬 길 선이 백제에 망명을 요청하자 이를 받아들여 신라와 반목하였다.

거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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居漆夫(?-579)

6세기 중엽 신라의 학자·장군. 성은 김씨이며 내물왕의 5대손이다. 처음에는 승려가 되어 사방으로 유랑하다가, 고구려로 가서 혜량에게 불경을 전하였다. 다시 신라로 돌아와 왕명을 받고 <국사>를 편찬하였다. 진흥왕 12년,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을 점령하고 공을 세워 상대등이 되었다.

거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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居陀知

9세기경 신라의 궁사. 진성 여왕 때 왕자인 양패가 당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 진성 여왕은 백제의 해적을 염려하여 활 잘 쏘는 사람 50명을 함께 보냈는데, 거타지도 그중 한 사람으로 뽑혔다. 배가 한 섬에 이르렀을 때 풍랑을 만나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않자, 섬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그 날 밤, 양패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활 잘 쏘는 사람 1명을 섬에 남겨두고 가면 풍랑이 가라앉을 것이라는 말을 하였다. 이에 거타지가 혼자 남아 있었는데, 한 노인이 나타나 자기 아들을 죽인 중을 죽여달라고 부탁했다. 거타지가 중을 처치하자, 노인은 자기 딸과 결혼해 주기를 바랐다. 노인은 딸을 꽃으로 변하게 하여 거타지의 품속에 넣어주었다. 거타지는 당으로 가서 양패 일행을 만나 무사히 귀국하였다. 그는 품고 온 꽃을 여자로 변하게 하여 함께 살았다고 한다.

검모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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劍牟岑

7세기경 고구려의 장군. 642년에 고구려가 당에 의해 멸망되자, 고구려 유민을 모아 당에 대항하고 많은 당의 관리와 승려를 죽였다. 보장왕의 서자인 안 승을 받들어 왕이 되게 하였으나, 안 승과 알력이 생겨 죽임을 당하였다.

견 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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甄萱(?-936)

후백제의 시조(재위 900-935). 아자개의 아들로 상주에서 출생하였다. 진성여왕 때 신라가 혼란한 틈을 타 여러 성을 점령한 후, 무진주(광주)에서 독자적인 기반을 닦았으며 완산주(전주)에 입성, 스스로 후백제 왕이라 칭하였다. 견훤은 중국에도 사신을 보내어 국교를 맺으면서 궁예의 후고구려와 자주 충돌하여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 후 왕 건이 세운 고려와도 서로 영토를 다투었으며 군사적인 우위를 유지하였다. 926년 신라 수도 경주를 침범하여 경애왕을 죽게 한 후, 경순왕을 세우고 철수하여 신라인의 원성을 샀다. 929년 고창에서 왕 건에게 패한 후 차차 형세가 기울어지자 유능한 부하들이 왕 건에게 투항하였다. 왕위 계승 문제로 맏아들 신검에 의하여 금산사에 감금되었다가 탈출하여 왕 건에게 투항하였다. 왕 건은 견훤에게 양주를 식읍으로 주었다. 936년 견훤은 왕 건에게 신검의 토벌을 요청하여 후백제를 멸망하게 하였다. 얼마 후 그는 황산사에서 등창으로 죽었다.

경대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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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大升(1154-1183)

고려의 장군. 본관은 청주이며 아버지가 부정하게 모은 재산을 모두 군대에 바치고 청렴하게 지냈다. 당시는 무신들이 정권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있었는데, 명종이 정중부 일파의 무단 정치를 싫어함을 알고 그들을 없애고 정권을 잡았다. 그는 자기 신변 보호를 위해 도방을 두어 사병 1백여 명을 거느렸다. 명종 13년 30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경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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景德王(?-765)

신라 제35대 왕(재위 742-765). 성덕왕의 아들이며 효성왕의 아우로 휘는 헌영이다. 신라의 여러 제도와 관직을 당 제도로 바꾸고 행정구역을 9주 5소경으로 나누었다. 그는 성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봉덕사 종을 만들게 했는데,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었으며 아들인 혜공왕이 완성하였다. 이 종의 소리는 맑고, 멀리까지 들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원래 이름은 '성덕 대왕 신종'으로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종인 동시에 국보(99호)이며, 후에는 봉덕사 종으로 불렀다. 경덕왕은 당과도 활발히 교역하는 등 산업 발전에 힘써 신라의 전성 시대를 이루었다.

경문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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景文王(?-875)

신라 제48대 왕(재위 861-875). 헌안왕에게 아들이 없자 헌안왕의 딸과 결혼하여 왕위에 올랐다. 신라가 혼란하여 중앙 귀족들이 음모와 반란을 일삼았으므로 수습에 힘썼고, 황룡사를 개수하였다.

경순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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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順公主

조선 태조의 셋째 딸. 태조의 계비 신덕 왕후 강씨의 소생으로 개국 공신 흥안군 이 제에게 출가하였다. 남편이 태조 7년(1398) 제1차 왕자의 난 때 방원의 손에 죽자 승려가 되었다.

경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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敬順王(?-978)

신라의 마지막 왕(재위 927-935). 문성왕의 6대손이며 이찬 효종의 아들이다. 927년 견훤에 의해 경애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당시 신라는 국력이 쇠퇴하여 국가의 기능이 완전 마비되었다. 민심이 왕 건의 고려에게로 기울어지자, 군신회의를 소집하여 고려에게 나라를 넘겨주기로 결정하고, 935년 항복하였다. 왕 건의 딸인 낙랑 공주를 아내로 맞고 정승에 봉해졌으며 경주를 식읍으로 받았다. 한편, 경주의 사심관에 임명되었는데, 이로써 신라 천 년의 역사는 끝이 났다.

경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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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왕이 열락에 빠져 나라를 망쳤다고 하는 경주 포석정 景哀王(?-927)

신라 제55대 왕(재위 924-927). 신덕왕의 아들이며 경명왕의 아우이다. 신라 말의 혼란기에 즉위하여 왕 건·견훤 등의 강대한 세력에 밀려 국가다운 면모를 갖추지 못하였다. 927년 포석정에서 연회를 벌이다가 견훤의 습격을 받고 죽임을 당하였다.

경의 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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敬懿王后(1735-1815)

조선시대 <한중록>의 저자. 영조의 아들인 장헌(사도 세자)의 비로, 본관은 풍산이며 영의정 홍봉한의 딸이다. 1744년 세자빈에 책봉되었고, 1762년 남편이 살해된 후 혜빈의 칭호를 받았다. 1776년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혜경의 호를 받았으며, 남편이 장조로 추존됨에 따라 경의 왕후로 되었다. 그가 쓴 <한중록>은 자신의 한평생을 돌이켜보면서 남편의 비참한 죽음에 대한 슬픔과, 자신의 외롭고 슬픈 생애를 소설 형식으로 쓴 작품으로 궁중 문학의 주옥편으로 평가된다.

경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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景宗(1688-1724)

조선 제20대 왕(재위 1720-1724). 숙종의 아들로 어머니는 희빈 장씨이다. 3살 때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어려서부터 몸에 병이 있었으므로 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김창집 등의 노론과 김일경 등의 소론이 싸움을 벌였다. 이 사건으로 김창집 등 4명의 노론파 대신이 죽음을 당하였다. 그의 재위 기간인 4년 동안은 당쟁의 절정기를 이루었다.

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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階古

신라의 음악가. 가야에서 망명해 온 우륵이 진흥왕의 명으로 가무를 가르치자 왕명으로 법지는 노래를, 만덕은 춤을, 그는 거문고를 배웠다. 재주가 뛰어나 자주 임금 앞에서 연주하였다.

계국대장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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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5)고려 충선왕의 왕후. 원나라 진왕의 딸로, 1296년 세자비가 되어 고려로 들어왔다. 충선왕이 자기보다 앞서 맞아들인 조비를 더 총애하자 시기하여 충선왕을 원으로 불러들이게 하였다. 충선왕의 아버지인 충렬왕이 그녀를 쫓아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정치적으로 많은 말썽을 일으키고 원에서 죽었으나 고려에서 장례지냈다.

계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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階伯(?-660)

백제 말기의 장군. 의자왕 20년 소정방과 김유신의 나·당 연합군이 백제로 쳐들어오자, 결사대 5천명을 거느리고 황산벌로 나갔다. 그는 싸움터에 나가기에 앞서 손수 처자식을 죽이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굳게 맹세하였다. 결사대는 신라 김유신의 5만여 군사와 네 차례나 싸워 이겼다. 이때 계백은 신라의 선봉인 관창을 사로잡았는데, 투구를 벗겨보니 아직 애띤 소년임을 알고 살려보냈으나, 다시 그가 선봉이 되어 쳐들어왔으므로 그를 베어 돌려보냈다. 이같은 관창의 용기를 본 신라의 군사들은 결사적으로 총공격해 들어왔다. 결사대는 필사적으로 싸웠으나 전원이 모두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계용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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桂鎔默(1904-1961)

소설가. 평북 선천에서 출생하였으며 <상환>을 <조선문단>에 발표하여 문단에 등장하였다. <최서방> <인두지주> 등 현실적이고 경향적인 작품을 발표하였으나 이후 약 10여 년 간 절필하였다. 1935년 인간의 애욕과 물욕을 그린 <백치 아다다>를 발표하면서부터 순수문학을 지향하였다. 비교적 작품을 많이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묘사가 정교하여 단편 소설에서는 압축된 정교미를 잘 보여주었다. 대표작으로 <병풍 속에 그린 닭> <상아탑> 등이 있다.

계월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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桂月香(?-1592)

조선 시대 평양의 명기. 당시 평안도 병마 절도사 김응서의 애첩으로, 임진왜란 때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장에게 몸을 더럽히게 되자, 적장을 속여 김응서로 하여금 적장의 목을 베게 한 후 자결하였다.

고경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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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敬命(1533-1592)

조선 시대의 문인·의병장.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霽峰). 1558년 문과에 급제하고, 1563년 교리로 있다가 울산 군수로 좌천된 뒤 파면되었다. 1581년 영암 군수로 재등용되고 이어서 종계 변무 주청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91년 동래 부사로 있다가 서인이 제거될 때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는데 이듬해에 임진왜란이 얼아나자 광주에서 모집한 6천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금산에 침입한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시, 글씨, 그림에 뛰어났으며 저서에는 <제봉집> <유서석록> 등이 있다. 후에 좌찬성 벼슬이 주어졌다. 시호는 충렬이다.

고국양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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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國壤王(?-391)

고구려 제18대 왕(재위 384-391). 소수림왕의 동생이며 요동을 정벌하고 남녀 1만 명을 포로로 하여 돌아왔으나, 연의 모용 농의 침입을 받아 요동을 내주었다. 386년 백제를 공격하여 국토를 넓혔으며, 392년 신라와 수교를 하였다. 불교를 널리 보급하여 문화를 발전시켰다.

고국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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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國原王(?-371)

고구려 제16대 왕(재위 331-371). 미천왕의 아들이며, 336년 동진에 사신을 보내고 342년 환도성으로 천도하였다. 같은 해 연의 모용 황이 침입하여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왕모를 인질로 데려갔으며, 미천왕의 묘를 파서 시체를 싣고 갔다. 또한, 많은 보물과 5만여 명을 포로로 하여 돌아갔다. 343년 동생을 연에 보내어 많은 보물을 바치고 미천왕의 시체를 찾아왔다. 평양의 동황성으로 다시 천도했고, 355년 왕모를 데려왔다. 백제의 근초고왕과 평양에서 싸우다가 죽었다.

고국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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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國川王(?-197)

고구려 제9대 왕(재위 179-197). 국양왕이라고도 한다. 신대왕의 둘째 아들로 신하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모든 일을 잘 판단하여 처리하였으며 관용과 용맹을 갖추었다. 191년 을파소를 등용하여 어진 정치를 하였고, 194년에 가난한 농민에게 양곡을 꾸어주는 진대법을 실시하였다.

고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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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相敦(1948-1979)

산악인. 제주도에서 태어나 충북 청주에서 자랐다. 청주상고를 졸업, 청주대학교 경영학과 2년을 수료하였다. 1977년 대한 산악연맹 회원으로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참가, 9월 15일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하였다. 그 후 1979년 알래스카 매킨리 원정대에 총무 자격으로 참가, 등정 후 하산하다가 자일 사고로 추락하여 사망하였다. 1979년 청년대상·체육훈장 청룡상을 수상하였다.

고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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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時彦(1671-1734)

조선의 시인·역관. 자는 국미, 호는 성재, 본관은 개성이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였으며, 한학과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역관으로서 벼슬이 2품에까지 올랐으나, 부모가 죽은 뒤 물러나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734년 사신으로 청나라에 가는 도중 병사하였다. 그는 경사에 밝고 한시에도 뛰어났는데, 특히 그가 세조 때부터 영조 때까지의 서민시를 수집하여 편찬한 <소대풍요>는 문학사 정리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저서로 <성재집> 등이 있다.

고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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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安茂

백제의 박사. 중국 한나라 사람으로 백제 무녕왕 때 들어와 오경박사로 있었다. 516년 일본에 가 있던 단양이와 교대하여 일본에 건너가 한학을 전하였다.

고 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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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雲(1495-?)

조선의 문신·화가. 자는 종룡, 호는 하천, 본관은 제주이다.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문장과 그림이 뛰어났다. 특히 호랑이를 잘 그렸는데, <맹호도>는 그의 대표작이다.

고 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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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銀(1933- ) 시인. 전북 옥구 출생. 1951년 해인사(海印寺)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었다. 58년 <현대문학>에서 시 추천을 완료받아 시작(詩作)에 나섰다. 60년대 초에 본산(本山) 주지, 불교신문사 주필 등을 지냈고, 환속하여 문필 생활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의 시는 75년 무렵 현실참여적인 데로 지향, 그 뒤 '자유실천 문인협의회' 대표로 행동면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저서로 시집 <피안감성(彼岸感性)> <해변의 운문집(韻文集)>이 있고, 에세이로 <한용운평전> <한국의 지식인> 등 비롯 여러 권이 있다.

고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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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爾王(?-286)

백제 제8대 왕(재위 234-286). 구이왕·고모왕이라고도 한다. 개루왕의 둘째 아들이며 초고왕의 동생이다. 왕위에 오르자 나라의 기초를 닦는 데 힘써, 260년 16등의 관제를 제정하고, 복장의 법을 제정하여 품계에 따라 각각 정해진 색깔의 관복을 입게 하였으며, 신라와 자주 싸워 변방을 넓히는 데도 힘을 기울였다. 국가적 체제를 확립한 최초의 왕이다.

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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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宗(1192-1259) 고려 제23대 왕(재위 1213-1259). 강종의 맏아들로 그가 즉위했을 당시 정권은 최씨 일파가 쥐고 있었다. 1218년 거란의 침입을 받고 이를 물리쳤으며 몽고의 침입에 대해서는 협약을 맺었다. 1225년 몽고 사신 저고여가 귀국 도중 도적에게 피살된 것을 구실로 하여 다시 침입하자, 강화조약을 체결, 각처에 다루가치(몽고의 지방장관) 72명과 약간의 수비군을 주둔케 했다. 1232년 강화도로 천도하여 몽고에 항거하였다. 1235년에 몽고의 제3차 침입으로 황룡사 9층탑이 소실당하였으며, 그 외에도 귀중한 국보를 많이 잃었다. 1252년 6차의 침입을 받아 남녀 2만여 명이 포로로 끌려갔으며, 태자의 입조를 약속으로 강화하여 사실상 몽고에 굴복하였다. 고종은 문화사업에 유의하여 <팔만대장경>을 조판하게 하였으며 유학을 장려하였다.

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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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宗(1852-1919) 조선 제26대 왕(재위 1864-1906). 영조의 현손인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로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나, 흥선 대원군이 모든 정사를 결정하였다. 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실권을 잡게 되었으나, 다시 왕비인 민씨 일파에게 실권을 빼앗기게 되었다. 고종은 대원군의 쇄국 정책을 폐지하고 문호를 개방하였으며, 신사유람단을 일본에 파견하여 여러 가지 문물을 시찰하게 하였다. 당시는 개화당과 사대당 사이의 대립이 심하였으며, 그 결과 임오군란·갑신정변 등이 잇달아 일어났다. 1894년 동학운동이 원인이 되어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김홍집 등 개화당이 집권하여 갑오경장을 단행하였다. 이로써 종래의 청의 굴레를 벗어나 독립국으로 되는 듯했으나, 실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일본의 억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897년 고종은 국호를 대한이라 고치고 연호를 광무, 왕의 칭호를 황제라고 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부당성을 세계에 호소하기 위하여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 준 등 특사를 보냈으나, 일본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일본은 이 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퇴위하게 하였으며, 고종은 그 후 덕수궁에 기거하다가 일본인들의 음모에 의해 독살당하였다. 당시는 조선말의 복잡다난한 시대로서 고종은 강대국들의 세력과 민비와 대원군의 세력 다툼 속에서 제대로 정치를 펴보지도 못하였다.

고종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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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從厚(1554-1593)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자는 도충, 호는 준봉, 시호는 효열, 본관은 장흥이다. 고경명의 아들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현령에까지 이르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며, 아버지와 동생 인후는 금산에서 왜군과 격전 끝에 전사하였다. 이듬해 스스로 복수 장군이라 부르며 각지에서 의병을 모아 싸웠다. 진주성이 위급해짐을 듣고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에 들어가 김천일·최경회 등과 함께 끝까지 싸우다가 남강에서 전사하였다. 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공민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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恭愍王(1330-1374)

고려 제31대 왕(재위 1352-1374). 충숙왕의 둘째 아들로 1341년 원나라에 갔다가 위왕의 딸 노국대장 공주를 비로 맞았다. 원의 지시로 충정왕을 폐하고 왕위에 올랐으나 원나라에 반항할 뜻을 갖고 있었다. 원에 다녀온 최 영·유 탁 등의 보고로 원이 쇠약해지는 것을 알고서 변발·호복 등 몽고풍을 폐지하였으며, 몽고의 연호와 관제도 폐지했다. 그 동안 내정을 간섭하던 정동행성을 없애고 고려의 옛 제도를 복구하였다. 또한, 원 황실과 인척 관계를 맺은 세도가 기 철 일파를 숙청하고,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원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았다. 1368년 명이 건국되자 명과 함께 원의 세력을 공략하였다. 그는 또 신 돈을 정치에 등용하여 귀족들이 불법으로 차지한 많은 토지를 소유자에게 되돌려주고, 죄없이 노비가 된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는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노국대장 공주가 난산으로 죽자, 모든 일을 신 돈에게 맡기고 그림 그리는 일로 나날을 보냈다. 다시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홍건적과 왜구가 자주 쳐들어왔다. 신 돈은 풍기를 문란하게 하고 여러 가지 불상사를 일으켰는데, 왕은 이 사실을 은폐시킬 의도로 밀고자 최만생을 죽이려 했다. 그러나 오히려 최만생·홍 윤 일파에게 암살당하였다. 공민왕은 글씨와 그림에도 뛰어났는데, 현존하는 것은 <천산대렵도> 한 점뿐이다.

공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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孔炳禹(1906-1995)

안과 의사. 평북 벽동에서 태어났고, 1926년 조선 의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신의주 도립병원 의사를 거쳐 경성의전 부속병원 안과에 근무했다. 당시 중심적 망막염에 관한 5편의 연구 논문으로 일본 나고야 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서울에서 개업하였다. 그는 또 한글 타자기에 관한 연구에 몰두하여, 이것을 완성했다. 저서로는 <안과학> <대한 색맹표> <대한 시력표> 등이 있다.

공양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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恭讓王(1345-1394)

고려의 마지막 왕(재위 1389-1392). 신종의 7대손으로 비는 노 진의 딸 순비이다. 창왕이 폐위되자 즉위하였으나, 이성계 일파의 압력과 간섭으로 우왕·창왕 부자를 살해하게 되었다. 이성계에게 실권을 빼앗기고 정몽주가 살해된 후, 이성계 일파에게 덕이 없고 어리석다는 이유로 폐위당함으로써, 고려는 34대 475년 만에 망하고 말았다. 그 후 원주로 추방되어 있다가 삼척에서 살해되었다.

곽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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郭樂園(1859-1940)

여류 독립운동가·민족운동가. 김 구의 어머니로 황해도 장연에서 태어났다. 김순영의 부인으로 아들 김 구를 성장시키는 데 헌신적인 노력을 하였다. <천자문>을 가르치고 <동몽선습>·<사서삼경> 등을 읽혔다. 82세로 중경에서 생을 마쳤다.

곽재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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郭再謙(1547-1615)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자는 익보, 호는 괴헌, 본관은 현풍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성일을 찾아가 의병을 모집하는 것과 군량미의 수집 등에 관해 많은 논의를 하였다. 서사원과 함께 의병을 모아 전공을 세웠으며, 정유재란 때에는 사촌 동생인 곽재우 등과 함께 화왕산성에서 많은 왜병을 물리쳐서 부호군에 임명되었다. 왜란이 끝난 뒤 제자들을 양성하는 일에 힘썼다.

곽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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郭再祐(1552-1617)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자는 계수, 호는 망우당, 시호는 총익, 본관은 현풍이다. 황해도 관찰사 곽 월의 아들로서 낚시질로 소일하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붉은 옷을 입고 선두에서 싸워 많은 전공을 세워서 '홍의장군'이라 불리었다. 정유재란 때는 화왕성을 지켰고, 그 후 절도사 등 많은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충현사라는 사당을 세웠다. 저서로 <망우당집>이 있으며, 그를 주인공으로 한 <곽재우전>이라는 군담소설이 있으나, 작자나 연대는 알 수가 없다.

관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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觀勒 백제의 고승. 무왕 때(602년) 일본에 건너가 천문과 지리에 관한 많은 책을 전하고, 백제의 불교를 전파하였다. 쇼토쿠 태자에게도 불경을 가르쳤으며 일본 초기 불교에 큰 공헌을 하였다. 삼론(三論)에 관한 연구가 깊었다.

관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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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昌(645-660)

신라 화랑의 한 사람. 품일 장군의 아들로 태종 무열왕 때 김유신을 따라 황산벌 싸움에 나아가 선봉으로서 계백 장군과 대전하다가 생포되었다. 계백은 나이 어린 관창의 용기에 감동되어 살려 보냈다. 관창은 "이기지 못하면 절대 살아 돌아오지 말라"는 아버지의 명으로 다시 백제 진영으로 쳐들어가 싸우다가 목이 잘리어 말 안장에 묶여 돌아왔다. 이를 본 신라의 군사들은 용감히 싸워 마침내 이겼다. 왕은 관창에게 급찬 벼슬을 내리고 후하게 장례를 지내주었다.

광개토 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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廣開土大王(374-412)

고구려의 제19대 왕(재위 391-412). 고국양왕의 아들로 그가 살아 있을 때는 영락 대왕이라 불리었다. 그는 연과 싸우고 동시에 백제를 쳐서 신라를 구하였으며, 일본을 격파하고 세력을 넓혔다. 404년 일본과 내통한 백제가 신라를 다시 공격하자, 신라의 요청으로 이를 물리쳤다. 당시 만주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고 한강 이북의 땅을 통합하여 고구려의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고구려의 가장 위대한 왕으로서는 물론 우리 민족의 영웅으로서도 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만주 지안현 왕릉 앞에 돌로 된 거대한 비석이 있는데, 이 비석에 광개토 대왕의 생애와 업적이 기록되어 있다. 크기는 높이가 약 627.5cm이며 넓이는 제일 넓은 곳이 195cm, 좁은 곳이 138cm로서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큰 비석이다.

광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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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宗(925-975)

고려의 제4대 왕(재위 949-975). 태조의 셋째 아들로 정종의 동생이다. 연호를 광덕이라 하였다가 다시 후주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권신·부호의 세력을 누르기 위해 근친 결혼을 장려하고 외척의 폐단을 없애려 하였다.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처음으로 과거제도를 실시하였다. 이 밖에도 관리의 복제를 정하고 개경을 황도로 개칭하였으며, 서경을 서도라 하였다. 또한 국토 개척에도 주력하는 등, 왕권 확립과 국력 증강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광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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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海君(1575-1641)

조선 제15대 왕(재위 1608-1623). 선조의 둘째 아들로 후궁 공빈 김씨의 소생이다. 선조에게 적자가 없어 임진왜란 당시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왕비인 인목 대비가 영창 대군을 낳게 되어 한때는 왕위를 이을 가망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선조가 갑자기 죽자, 즉위하여 왜란 때 없어진 사고(史庫)를 정비하였으며, <선조실록>의 간행 외에 국방에 주력하였으나, 당쟁에 휘말려 많은 실정을 하였다. 형제인 임해군과 영창 대군을 죽이고 인목 대비의 아버지인 연흥 부원군을 살해하였으며 인목 대비를 서궁에 감금하였다. 인조반정으로 강화도로 귀양갔다가 다시 제주도로 쫓겨가 거기서 죽임을 당했다. 15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문화 사업에도 힘을 기울여 <신증 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하였으며 경덕궁·인경궁 등을 세우는 등 업적이 많았다. 신세를 비관하여 읊은 시 한 수가 전해지고 있다.

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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具常(1919- ) 시인. 본명 상준(常浚). 함남 문천 출생. 일본 니혼대학 종교과 졸업. 1946년 원산 문학가동맹의 동인시집 <응향(凝香)>에 <길> <여명도(黎明圖)> <밤> 등을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했다. 1947년 월남, 서울에서 <백민(白民)> 등에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956년 6·25전쟁을 제재로 하여 쓴 시집 <초토(焦土)의 시>로 1957년 서울시문화상을 받기도 했다. 초기 그의 시의 저변에는 북한 공산치하의 비인간적 현실을 극복하고 상승하려는 동경(憧憬)과 히구(希求)를 볼 수 있었는데, 그는 인간과 세계의 비극적 심부에 있는 어둠·절망 등과 맞서는 카톨릭시인이기도 하다. 시집으로는 <구상(具常)> <초토(焦土)의 시> <까마귀> <구상연작시집> 등이 있으며, 그 밖에 평론집과 수필집 <침언부어(沈言浮語)>가 있다.

구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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丘仁煥(1929- )

소설가·국문학자. 충남 장항 출생. 서울사대 국어교육과 및 동 대학원 졸업하고 1962년 <현대문학>에 <판자집 그늘> <광야>가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그는 주로 인간생활의 저변을 통한 인간존재의 해명과 상실한 낙원을 갈구하는 현대인의 고민을 그리며, 간결한 문체와 고백체이면서도 3인칭의 주어와 주관적인 서술어로 이미지의 전환에 의한 상황적인 작품을 쓰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 <동굴 주변> <내일은> <산정의 신화> <별과 선율> <창문> 등이 있다. 이 밖에도 50여편의 문학 연구논문을 발표했으며, 창작집으로 <뒹구는 자화상> <벽에 갇힌 절규> 등과 <문학의 원리> <그날을 위하여> <자아완성과 여성파괴> 등을 발간했다.

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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弓裔(?-918)

마진·태봉의 시조(재위 901-918). 성은 김씨이며 신라 헌안왕의 아들, 또는 경문왕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그의 출생이 불길하다는 일관의 말에 따라 유모와 함께 도망하여 자랐는데, 이 과정에서 애꾸눈이 되었다. 10세가 되었을 때 자신이 왕자임을 알고는 학문과 무술을 연마하였다. 당시 신라는 나라가 혼란스러웠다. 궁예는 처음에는 승려가 되고자 세달사에 들어갔다가 그곳에서 나와 도적 기훤의 부하가 되었다. 그러나 기훤에게 실망하자, 양 길의 부하가 되어 철원 등 10여 성을 빼앗고 스스로 장군이라 하였다. 왕 건이 항복해 오자 그를 철원군 태수로 임명하고, 901년 왕위에 올라 국호를 후고구려라 하였다. 후에 국호를 다시 마진·태봉으로 바꾸었는데, 차차 세력이 강성해지자 날로 오만하여 백성들의 신망을 잃어갔다. 그리하여 918년 신숭겸·홍 유 등이 왕 건을 왕으로 추대하자, 왕위를 빼앗기고 도망가다가 백성들에게 맞아 죽었다.

권경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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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景裕(?-1498)

조선의 문신. 자는 군요, 호는 치헌, 본관은 안동이다. 김종직의 제자이며, 문과에 급제하여 연산군 때 정세가 변함을 보고 교리로서 제천 현감 등을 지냈다. 그 후 김일손과 함께 사관으로 있을 때,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역사책에 실은 것이 원인이 되어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일손과 함께 처형되었다. 중종 때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권 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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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近(1352-1409)

조선의 학자·명신. 자는 가원, 호는 양촌, 시호는 문충, 본관은 안동이다. 18세 때(공민왕 16) 문과에 급제하여 춘추관 검열이 되었다. 윤승순과 함께 사신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는데, 이때 가져온 문서의 글이 원인이 되어 유배되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태조 이성계의 명으로 중추원사가 되었다. 1396년 중국 명 태조가 자기에게 바치는 글을 잘못 썼다 하여 그 글을 쓴 정도전을 잡아들이라고 할 때, 대신 가서 해명을 잘 하여 극진한 예우를 받고 돌아왔다. 그가 지은 <입학도설>은 우리 나라 최초로 그림을 넣어 학문을 설명한 책으로 후에 이 황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정몽주 밑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고 문장에 능하였다. 저서로 <양촌집> <상대별곡> 등이 있다.

권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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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擥(1416-1465)

조선의 문신. 자는 정경, 호는 소한당, 본관은 안동이다. 문종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감찰을 지냈으며, 수양 대군과 함께 <역대병요>를 편찬하였다. 단종 때 김종서를 제거할 때에 앞장서서, 1등 공신이 되어 우부승지에 올랐으며, 세조가 즉위하자 이조참판이 되었다. 그는 수찬관으로 <국조보감>을 편찬하였으며, 활을 잘 쏘았고 문장에도 뛰어났다. 그러나 횡포가 심하고 많은 돈을 모아 탄핵을 받았다.

권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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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東鎭(1861-1947)

독립운동가.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 호는 우당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대한제국 정부의 육군참령을 거쳐 남원군수가 되었다. 갑신정변 때에는 손병희·오세창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3·1운동 때 독립선언문에 서명하여 3년간 투옥되었다. 출옥 후에는 '신간회'를 조직하여 부회장이 되었으며, 천도교의 장로로서 교세 확충에 노력하였고 민족운동의 지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권병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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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秉悳(1868-1944)

독립운동가.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 호는 청암, 본관은 안동이며 청주에서 출생하였다. 18세 때 동학교도가 되었으며 동학혁명에 참가하고 각처를 돌아다니며 역사학을 연구했다. 1908년 손병희가 일본에서 돌아와 천도교를 일으키자 이에 입교하였다. 천도교에서 시천교로 분리할 때 시천교 종무장을 거쳐 육영사업에 힘썼다. 3·1운동 때 독립선언문에 서명하여 2년간 복역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권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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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尙然(?-1791)

조선의 천주교 순교자. 전라북도 진산에서 출생하였으며 윤지충과 함께 천주교를 신봉하였다. 1791년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 천주교식으로 제사를 지낸 것이 군수에게 알려져 윤지충과 함께 구금되었다. 당시는 조정에서 천주교를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으므로, 도덕을 문란하게 한 자라 하여 사형에 처하였다. 이 두 사람의 순교 사건을 가리켜 '신해박해' 또는 '진산사건'이라고 한다.

권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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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寧大(1908-1985)

물리학자.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나 1933년에 일본 홋카이도 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한 뒤 1946년에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1960년부터 1969년까지 한국 물리학회 회장으로서 국내 기초물리학의 기반을 다졌으며, 이후 한국 에너지 연구소 학술 고문, 한국 과학사학회 회장 등을 지냈다. 우리나라 유일의 우주선 물리학자로 일컬어졌다. 저서에 <자연 과학 개론> <원자의 세계> 등이 있다.

권 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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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慄(1537-1599)

임진왜란 때의 장군. 자는 언신, 호는 만취당, 시호는 충장, 본관은 안동이다. 1582년(선조 15)에 과거에 급제하여 예조 좌랑·호조 정랑의 벼슬을 지냈고, 임진왜란 때에는 광주 목사로 군병을 모집하였다. 용인 싸움에서 패하고는 다시 광주로 가서 천여 명의 군병을 모집하여 남원 싸움에서 적을 대파하고 전라도 순찰사가 되었다. 전주에서 병사 만여 명을 이끌고 수원 독산에 진을 치고 적의 공격을 막았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어검을 하사하여 군율을 정리하게 하였다. 행주산성에서는 왜군 3만을 무찔러 큰 전공을 세우고 그 공으로 도원수가 되었으나, 얼마 후 도망하는 병사를 직결 처분한 죄로 해직되었다. 1596년 충청도 관찰사에 부임하였고, 다시 도원수가 되어 어마를 하사받았다. 죽은 후, 전공을 인정받아 영의정에 추증되고 영가 부원군의 추봉을 받았다.

권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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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哲身(1736-1801)

조선의 천주교 순교자. 이승훈의 전도를 받아 천주교에 입교한 후, 여주에서 이 벽·정약전·정약용 등의 남인 학자들과 서학 교리 연구회를 열어 신앙생활을 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 이승훈·이가환·정약종, 중국인 신부 주문모 등과 함께 체포되어 사형을 당하였다.

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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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9-1704)

조선의 문신. 자는 개옥, 호는 남곡, 본관은 안동이다. 현종 때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79년 허 목이 영의정 허 적의 아들 견의 불법한 행위를 공격한 사건으로 인하여 청남당과 탁남당 사이에 당파 싸움이 벌어지자, 도승지 민 암에 의해 청남당인 허 목의 당으로 몰려 유배되었으며, 그 후 다시 관직에 올라 호조참의에 이르렀으나 갑술옥사 때 다시 유배되었다. 예안에서 여생을 마쳤다. 그는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저서로 <노론주해> <남곡집> 등이 있다.

균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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均如(923-973)

고려의 명승. 성은 변씨이며 본관은 황주이다. 15세 때 부흥사 식현 화상에게서 학문을 닦았다. 그는 영통사에서 수도에 힘쓰는 한편, 불교 보급에 노력하여 <보현십종원생가>라는 11수의 향가를 지었다. 불교계의 종파 통합에도 힘을 기울였으며, 남악파와 북악파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광종 때에는 시관이 되어 유능한 승려들을 많이 선발하였다. 963년 왕이 그를 위해 세워준 귀법사에서 지내다가 사망하였다. 저서로 <오십요 문답기> <공목장기> 등이 있다.

근구수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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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仇首王(?-384)

백제의 제14대 왕(재위 375-384). 근초고왕의 맏아들로 고구려를 여러 차례 공격하였으며 동진에 사신을 파견하였으나 풍랑을 만나 오지 못하였다. 또 일본과도 국교를 맺어 중국의 문물을 전해 주었다.

근초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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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肖古王(?-375)

백제의 제13대 왕(재위 346-375). 비류왕의 둘째 아들로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쳐들어와서 약탈을 하자 태자를 보내어 이를 격파하였다. 다시 태자와 함께 3만의 병사로 고구려에 침입하여 평양성을 공격하고 고국원왕을 전사하게 하였다. 도읍을 한산으로 옮겨 한성이라 하였다. 또한 진에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하게 하였으며, 마한의 여러 부족 국가들을 통일하는 등 영토 확장에 주력하였다. 이 때부터 백제의 왕권은 점차로 전제화되어 부족연맹의 세력은 억제되고 부자 상속에 의한 왕위 계승이 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박사 고흥에게 <서기>를 편찬하게 하였으나, 전하지는 않는다.

금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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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1992)

작곡가. 호는 낙초(洛初). 경상남도 김해 출생. 1940년 일본 도쿄 음악학교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동래여자고등학교, 경남여자고등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면서 작곡 활동을 하였으며, 이때 <그네>를 작곡하였다. 56년 문교부(지금의 교육부) 편수관이 되어 음악 교과서를 만드는 데 힘썼다. 65년 영국 필하모니 관현악단 이사장을 지냈으며, 월간지 <음악>을 창간하였다. 그 후 교육부 국정교과서 편찬위원, 숙명 여자대학교 강사가 되었으며, 여러 음악 관련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저서로 <표준 음악 사전>, 수필집 <음악의 문> 등이 있다.

금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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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蛙(蝸)

동부여의 왕. 고대 난생 설화 중의 인물. 늙도록 자식이 없어 기도하던 부여 왕 해부루에게 어느 날 곤연 못가의 큰 돌 밑에서 온몸이 금빛으로 빛나고 개구리 모양을 한 옥동자가 발견되었다. 그는 곧 해부루의 태자가 되었으며, 해부루가 죽은 뒤 왕이 되었다. 뒤에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하백의 딸 유화를 만나 데려다가 깊숙한 방에 가두었더니 주몽을 낳았다고 한다.

기대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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奇大升(1527-1572)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자는 명언, 호는 고봉·존재, 시호는 문헌, 본관은 행주이다.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사관을 거쳐 사정이 되었으나, 훈구파에 의해 벼슬에서 물러났다가 선조 때 대사성이 되었다. 그 뒤 해직된 다음에 다시 부제학 등의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사퇴하고 고향으로 가던 중 병을 얻어 전라북도 고부에서 죽었다. 어려서부터 독학하여 고전에 능통하였고 문학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이 황의 제자가 되어 김인후 등과 왕래하면서 새로운 학설을 많이 제시하였다. 특히, 이 황과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해 8년 동안이나 논란을 편 것은 유명한 일이다. 이 일 이후로는 이 황도 그의 이론을 많이 따르게 되었다. 그는 글씨에도 재주가 뛰어나 종계변무의 주문(奏文)을 써서 3등 광국공신으로 덕원군에 추봉되었다. 저서에 <고봉집> <주자 문록> <논사록>이 있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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箕子

기자 조선의 시조로 전설적인 인물. 이름은 서여 또는 수유로 기나라의 왕으로 봉해져 기자로 불리었다. 중국 은나라 사람이라는 설과 우리 나라 사람이라는 설이 있다. 앞의 설에 대해서는 주 무왕이 은을 점령하자, 기원전 1122년에 동쪽으로 도망쳐서 단군 조선에 들어와 예절을 비롯하여 옷 짜는 법과 '8조 법금'을 가르쳤으며, 후에 한 무제가 임명하여 조선의 왕이 된 것으로 전한다. 이 학설은 중국의 역사에서도 앞뒤가 맞지 않아 인정되지 않고 있다. 한편, 뒤의 설에 대해서는 기자의 성이 기씨가 아니라 한이라는 성을 가진 우리 나라 사람이며, 기자가 동쪽으로 와서 대동강 유역에 나라를 세운 것은 당시 중국을 받들고 있던 사대사상에 젖은 고려 시대의 우리 조상이 꾸며낸 설이라고 한다. 현재는 이 학설이 크게 인정받고 있다.

기자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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奇自獻(1562-1624)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사정, 호는 만전, 본관은 행주이다. 성균관에서 공부하여 선조 때(1682) 문과에 급제하였다. 호조참판으로 진하사가 되어 명에 다녀온 뒤 좌의정 벼슬에까지 올랐다. 그는 선조의 사랑을 받아 정사를 함께 의논하곤 하였다. 선조가 세자인 광해군을 폐하고 영창 대군을 세자로 삼으려 하자 이를 끝까지 반대하였다. 1608년에는 유영경 등이 영창 대군을 왕위에 앉히려 하자, 이에 대항하여 광해군을 왕위에 올려놓는 데 공헌하였다. 1614년 영의정이 되었으나, 인목 대비를 폐하자는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에 반대하여 길주로 유배되었다. 1620년 광해군의 특명으로 덕평 부원군에 봉해지고 영중추 부사가 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 모의 때 김 유, 이 귀 등이 사람을 시켜 그의 뜻을 물었으나 신하로서 왕을 폐할 수 없다 하여 거절하였다. 인조반정 후 역모죄로 중앙에 압송되었다가 이듬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이들과 합세할 것이라는 모함을 받고 가족과 함께 몰살당하였다. 후에 이원익·이 귀 등의 상소로 관직이 복구되었다.

길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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吉善宙(1869-1935)

독립운동가이며 목사.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 호는 영계이며 평남 안주에서 출생하였다. 처음에는 불도를 닦으며 한의학을 연구하다가 기독교인이 되어 세례를 받았고, 1901년 안창호 등 17인과 함께 독립협회의 평양지부를 조직했다. 1907년 평양 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다른 6명과 함께 한국 최초의 목사가 되어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신앙 운동에 정진하는 한편, 교육사업에 힘써 숭실학교와 숭덕학교 등을 설립했다. 1915년 <만사성취>라는 한국판 <천로역정>을 저술하였다. 3·1운동 때 기독교 대표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여 2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였다. 그 후 전국을 돌아다니며 전국 교회 부흥운동을 일으키는 등 전도 사업에 이바지하다가 평안남도 고창 교회에서 설교 도중 뇌일혈로 사망하였다. 신설 교회 60여 곳, 2만여 회의 설교를 통해 구도자 7만 명을 냈다. 저서에 <만사성취> <해타론> <말세학> 등이 있다.

길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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吉再(1353-1419)

고려 말 조선 초의 학자. 자는 재부, 호는 야은(冶隱)·금오산인(金烏山人), 본관은 해평이다. 포은 정몽주, 목은 이 색과 함께 '3은'이라 불리고 있다. 11세 때 절에 들어가 글을 배우고, 18세 때 박 분에게 <논어> <맹자>를 배웠으며, 그 뒤 박 분과 함께 송도로 가서 이 색·정몽주·권 근의 제자가 되어 성리학을 공부하였다. 우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후에 성균관 박사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창왕 때에는 문하주서가 되었으나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조선이 건국된 후인 1400년(정종 2), 전부터 친하게 지내던 세자 이방원에 의해 태상박사의 벼슬이 내려졌으나,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 하여 거절하고 고향인 선산에서 후배 양성에 힘썼다. 그의 성리학은 김숙자·김굉필·조광조 등에게 이어졌다. 세종이 즉위하던 해인 1419년에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고려의 옛 도읍지 송경(지금의 개성)을 찾았을 때 읊은 시조 <고려 유신 회고가>는 유명하다. 저서에 <야은집> <야은 언행 십유> 등이 있다.

김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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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嘉鎭(1846-1922)

정치가·독립 운동가. 호는 동암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부수찬·사복시정·동부승지 등의 벼슬을 한 후 여러 해 동안 대사의 자격으로 일본에 가 있었다. 그 후 귀국하여 공조판서·농상공부 대신 등을 지냈고, 황해도 관찰사·중추원 의장·대한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후에 일본 정부가 남작의 작위를 주었으나, 이를 거절하고 3·1운동에 참가하였다. 독립단체인 대동단에 가입하여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1920년에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의 요인으로 활약하다가 병사하였다. 서예가로 유명하며, 시와 한학도 능하였다. 저서로 <근역 서화정> <한국통사> 등이 있다.

김개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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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開男(?-1894)

조선 말기의 동학 접주. 전봉준 다음가는 동학의 실력자이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초기에 김낙삼·김문행 등 1,300여 명을 이끌고 백산에 모인 뒤 남원을 점거하여 전라도를 통할하였다. 전봉준을 능가할 만큼 위세를 떨치며 독자적인 세력을 확장해 갔다. 그러나 당시의 동학혁명군 토벌 책임자인 홍계훈과 타협, 동학도를 박해하지 않을 것을 약속받고 전주성을 관군에게 내주고 군대를 해산시켰다. 그러나 청 및 일본의 군대가 간섭하게 되자, 다시 일어나 5-6만의 병력과 농민을 모아 남원에서 전주까지 진격하였다. 남원 부사 이용헌을 처단하고 자신이 그곳의 자치 책임자가 되어 새로운 제도를 실시하는 등 남원에서 강력한 실력자가 되었다. 전주 수비군 5천명을 이끌고 북상하여 공주 전투에 참가하였으나, 우금치 전투에서 크게 패한 다음 태인에서 체포되었으며, 전주 감영에서 처형당하였다.

김경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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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慶孫(?-1613)

조선 광해군 때의 도적. 서자 출신으로 서자에게는 벼슬을 주지 않는 데 불만을 품고 같은 서자 출신인 박응서·서양갑 등과 어울려 세월을 보내다가, 1612년 이들과 함께 조령에서 상인을 죽이고 금품을 빼앗았다. 이듬해에 잡혀, 영창 대군을 추대하기 위해 자금을 마련했다는 혐의로 주살되었다. 이 사건은 이이첨·정인홍 등 대북파가 김제남 및 소북파를 제거하기 위해 이들을 꾀어 허위 진술하게 한 것으로 이른바 '칠서의 옥'으로 불리운다.

김경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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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景承(1915-1992)

조각가. 경기도 개성 출생. 1933년 송도고보, 39년 일본 도쿄 미술학교를 졸업했다. 경성사범학교 및 여자사범학교, 그 후 정신·풍문·경기 중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1939-42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 총독상·창덕궁상 등을 수상했고, 43년 선전 추천작가가 되었다. 1947년 종합미술전 심사위원, 그리고 49년 이래 오랫동안 국전 창설위원을 거쳐 심사위원을 지냈다. 1954년 대한미술협회 회원, 1954년-62년 홍익대학교 교수 및 조각과장을 역임했으며, 64년에 이화대학교 미술대학으로 교직을 옮겨 동 조각과장이 되었다. 1948-68년 서울특별시 문화위원, 64년 3·1문화상 수상, 68년 애국선열동상건립위원회 전문위원장에 피임되었다. 1961년 동남아시아 9개국을 예방, 한국의 현대미술을 널리 소개한 바 있으며, 각종 기념동상의 건립에 많은 공헌을 했다. 대표작으로는 <이충무공동상> <맥아더장군상> <밴프리트장군상> <콜터장군상> <안중근의 사상> <김성수선생상> <김활란박사상> <에비슨박사상> <세종대왕상> <김구선생상> <김유신장군상> <목동> <유(流)> <희망> <사색> <평화> <정> 등이 있다.

김광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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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光均(1914-1993)

시인. 황해도 개성에서 태어났다. '시인부락'동인으로 모더니즘 시 운동에 자극을 받아 "시는 하나의 회화이다"라는 시론을 전개하면서 주지적·시각적인 시를 계속 발표하여 시단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고, 후진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사업가로도 활동하였으며, 시집에 <와사등> <기항지> <황혼가> 등이 있다.

김광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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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珖燮(1905-1977)

시인. 호는 이산으로 함북 경성에서 출생하였으며,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귀국하여 모교인 중동중학교 영어 교사로 있으면서 '해외문학' 동인으로서 외국 문학의 번역·소개에 힘썼다. 그 후 '시원'의 동인이 되어 시를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초기 작품의 경향은 시대적 고민으로 일관되다가 후기에는 인생 문제를 다루었다. 자유문학가 협회 회장 및 이승만 대통령의 비서 등을 역임하였다. 1957년,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시집으로 <동경> <마음> <해바라기> 등이 있다.

김굉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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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宏弼(1454-1504)

조선의 학자·정치가. 자는 대유, 호는 한훤당, 본관은 서흥이다. 일찍이 김종직에게 소학을 공부하였다. 평생 말하고 행하는 것을 소학에 따랐으며, 합천 야로원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무오사화(1498) 때에 김종직의 문인이라 하여 유배되었으며, 조광조에게 자기의 학문을 전하였다. 갑자사화 때에 처형당하였으며, 그 후 중종 때 도승지·좌의정, 선조 때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문묘에 종사되었다.

김교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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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敎獻(1868-1923)

대종교의 제2대 교주. 경주 사람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참의를 지냈다. 그 후 대사성을 거쳐, 1909년 규장각에서 부제학을 지냈다. 이듬해 대종교에 들어갔으며, 3·1운동 이후 교도들을 지휘하였으며 교단의 본사를 만주로 옮겼다.

김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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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絿(1488-1533) 조선의 문신·서예가. 자는 대유, 호는 자암, 본관은 광산이다. 부제학이 되어 좋은 정치를 시도하였으나 기묘사화로 조광조·김 정 등과 함께 투옥되어 귀양살이 끝에 돌아왔는데, 부모가 다 죽은 뒤였다. 아침 저녁으로 산소에 가서 통곡하여 풀이 다 말라버렸으며, 그 해에 병을 얻어 죽었다. 조선 초기 4대 서도가 중의 한 사람으로, 저서로는 <자암집>이 있다.

김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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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九(1876-1949) 독립운동가·정치가. 아명은 창수, 호는 백범, 본관은 안동이며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독학을 하다가 12세 때부터 한학을 공부하였다. 17세 때 소년 훈장이 되었으며, 동학당에 가입하여 동학혁명에 참가하였다. 1896년, 단발령에 반대하여 의병을 모으기 위해 안악으로 가던 도중, 일본 육군 중위 스치다를 죽인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1898년 탈옥하였다. 1909년 안중근 의사와 관련되었다는 혐의로 해주 감옥에 갇혔다가 석방된 뒤 안악의 양산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어 총독정치가 실시되자, 양기탁의 이름으로 서울에서 신민회가 열렸을 때 황해도 대표로 참가하였다. 남만주 무관학교 설립 기금을 모집하다가 안명근 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 17년을 선고받았다. 1915년, 가출옥되어 상하이에 망명하여 임시정부의 경무국장·내무총장·국무령 등을 역임하였다. 1932년 이봉창·윤봉길 의사 사건을 지휘하였으며, 장제스의 요청에 의해 난징에서 만나 중국 군관학교에 한인 무관양성소의 특설 허락을 받아 사관 100여 명을 양성하였다. 1940년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하였으며, 미국 교관을 청하여 광복군을 훈련시켰다. 8·15광복 후 귀국하여 '한국독립당' 창설과 함께 당수가 되었으며, 민족 통일 총본부 부총재·민주의원 총리를 역임하였다. 1947년, 과도 정부에 반대하고 남북 협상에 참가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48년, 남한만의 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자, 이에 굴하지 않고 민족 통일의 원칙을 계속 주장하였다. 1949년, 서울 경교장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저격당하였다. 저서로 <백범일지> 등이 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김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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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奎植(1877-1952)

독립운동가·정치가. 호는 우사, 본관은 청풍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미국에 유학하여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였으며, 한일합방과 동시에 해외로 망명하였다.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의 외무총장이 되어 파리 평화회의에 참석하여 일본의 한국 침략을 규탄하였다. 1921년, 독립군의 근거지인 만주로 돌아와 혁명군을 조직하여 총사령관이 되어 이범석과 함께 활약하였다. 1944년, 임시정부 부주석으로 있다가 귀국하여 반탁운동의 선두로 활약하였다. 1948년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김 구와 함께 남북 협상에 참석했으나 성과를 못 보았다. 그 후 정치활동에서 물러났으며, 6·25전쟁 때 납북되어 만포진에서 병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정확한 영어 발음으로 외국인을 매혹시켰으며, 셰익스피어의 권위자였다고 한다. 저서에 영문 시집 <양쯔강>이 있다.

김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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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奎鎭(1868-1933)

서화가. 자는 용삼, 호는 해강이며 남평에서 출생하였다. 중국에 유학하여 명승고적을 둘러본 후, 그곳에서 그림과 서예를 배웠다. 조선 말기까지 영친왕의 스승으로 있었으며, 시종원 시종장을 지냈다. 예서·행서·해서·초서 등에 능하였으며 묵화를 잘 그렸다. 우리 나라 최초로 '서화 연구회'를 조직하여 미술 발전에 공헌하였다. 산수화로는 창덕궁 희정당의 벽화가 유명하다. 그 밖에 <외금강 만물상도> <해금강 총석정도>가 있다.

김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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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均貞(?-836)

신라의 왕족으로 원성왕의 손자. 애장왕 때 대아찬이 되었고 헌덕왕 때 시중이 되었다. 웅천 도독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였으며, 희강왕이 죽고 왕세자가 없자 종제인 헌정의 아들 제륭과 왕위를 다투다가, 김 명·이 홍 등에게 피살되었다. 그 후 그의 아들 우징(신무왕)이 왕위에 오르자, 성덕 대왕으로 추존되었다.

김기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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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箕斗

조선 고종 때의 기계 제작가. 대원군의 명으로 강 윤과 함께 군용품으로 면제 배갑·포군의 철모·학우 조비선·목탄 증기갑함·수뢰포 등의 군기를 제조하였다. 1880년, 김홍집의 수행원이 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후에 그의 조카인 김재우도 구리와 피혁 다루는 법을 배우기 위해 일본에 파견되었다.

김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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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起林(1908-?)

함북 학성 출생. 호는 편석촌. '국인회' 회원. 니혼대학 문예 예술과와 일본 도후쿠제대 영문과 졸업. 1930년대에 모더니즘 시 운동을 주도한 이론가이자, 실제 창작을 실험한 시인이기도 하다. 6·25 당시 납북되었으며, 시집으로 <기상도>(1935), <태양의 풍속>(1939), <바다와 나비>(1946), <새 노래>(1948) 등이 있다.

김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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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綺秀(1832-?)

조선의 정치가. 자는 계지, 호는 창산, 본관은 연안이다. 1875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강화도 조약 이후 근세 한일 교섭상 최초의 통신사로서 일본을 방문하였다. 그는 참판을 역임했으며, 필명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시 <영매> 등의 작품이 전해지고 있으며, 그가 수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뒤 일기문 형식으로 쓴 <일동기유> <수신사 일기> 등은 일본에 대한 당시의 인식을 새롭게 하여 후에 '신사유람단'을 파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김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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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基鎭(1903-1985)

소설가·평론가. 호는 팔봉, 충북 청원에서 태어나 일본 와세다 대학을 중퇴하였다. 재건 국민운동 중앙회장을 역임했고 '백조'의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경향 문학의 선도자로서 일본 도쿄에서 조직된 '토월회'에도 관계하였다. 신문사 및 영화회사 일에도 종사했고, 1930년까지는 문예 평론가로서 크게 활약하여 경향 문학의 지도적인 평론 등을 집필하였다. 1936년 카프(KAPF) 해체기까지가 그의 문학 활동의 중요한 시기였다. 문화 훈장 국민장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소설 <결혼> <전도양양>, 수필집 <심두잡초> <김팔봉 수필집> 등이 있다.

김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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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基昶(1913-2001)

동양화가. 아호는 운포·운보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8세 때에 열병으로 청각을 완전히 잃었으나, 선천적인 재능과 인내로 이를 극복하고 김은호에게 동양화를 배웠다. 1932년부터 조선미술전에 출품하기 시작하여 특선을 하였고 추천작가를 지냈다. 1963년, 상파울루 국제 미전에 한국 대표로 출품했으며, 1965년 뉴욕의 '아시아의 집'에서 부인 박내현과 함께 부부 미술전을 열어 좋은 평을 받았다. 그는 동양화의 신경지를 개척하여 독특한 정취를 나타내는 그림을 많이 그렸고 외국에도 널리 소개되었다. 저서로 수필 <화방여적>이 있다.

김기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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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基瀅(1884-?)

독립운동가. 호는 해악, 별명은 현구이며 황해도 재령에서 출생하였다. 1914년, 만주로 건너가 문화 운동에 종사하였다. 1920년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 의정원 황해도 대의원이 되었다. 그 후 김 구·여운형과 '노병회'를 조직하였고, 한국 독립당 간부로 활약하다가 중경에서 죽었다.

김 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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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樂(?-927)

고려의 개국공신. 927년에 후백제의 견훤과 공산(지금의 대구)에서 싸우다가 포위된 왕 건이 위급해지자, 신숭겸과 함께 왕 건을 구하고 전사하였다. 고려가 개국되자 2등 공신이 되었고, 태조는 지묘사를 세워 그의 명복을 빌었다. 예종은 그와 신숭겸을 추도하는 향가 <도이장가>를 지었다.

김남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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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南祚(1927- )

시인. 경상북도 대구에서 출생하였으며,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문과를 졸업하고, 숙명여대 교수로 재직하였다. 여성다운 섬세한 정감의 세계를 세련된 언어 속에 담았다. 제1회 자유문학가 협회상을 수상했다. 저서에 시집 <목숨> <나무와 바람> 등이 있으며, 수필집 <구원의 연가> 등이 있다.

김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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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來成(1909-1957)

작가. 호는 아인으로 평양에서 출생하여 와세다 대학 독문과를 졸업하였다. 1939년 <조선일보>에 <마인>을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하였다. <백가면>과 <진주탑> 등 외국 탐정소설을 번안한 일련의 탐정소설을 발표하여 탐정소설가가 되었다. 1949년부터 4년 간에 걸쳐 한국일보에 연재된 <청춘극장>은 그의 대표작이며, 소설의 대중성과 예술성의 통일을 기도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1957년 <경향신문>에 <실락원의 별>을 연재하던 중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내성문학상이 제정되었다.

김 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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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0-1616)

조선의 문신. 자는 희옥, 호는 백암, 본관은 예안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형조참판에 이르렀다. 영월 군수로 내려갔을 때 단종의 묘를 배알하고 신위를 송부인과 함께 모시게 하여, 신임 군수마다 죽곤 하던 변을 막았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영남 지방의 백성들을 잘 다스려 우도 관찰사가 되고, 대사헌이 되어 '시무 16조'를 상소하였다. 광해군 때, 김직재를 무고하게 옥에 가둔 죄로 강릉에 유배될 뻔하였다. 저서에 <백암문집>이 있다.

김 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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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淡(1416-1468)

조선의 정치가. 자는 거원, 호는 무송헌, 본관은 예안이다.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천문에 뛰어나 집현전 정자로 있다가 간의대에서 활약하였다. 세종의 명으로 원의 수시력과 명의 대통력을 참작하여 이순지와 함께 <칠정산 내편>을 엮었으며, 회회력을 얻어 <칠정산 외편>을 편찬하였다. 충주 목사로 있을 때는 백성에게 고통을 주는 도둑을 잘 잡아 민심을 편안하게 함으로써 인망이 두터웠다. 저서에 <금문절공일고> 등이 있다.

김대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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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大建(1822-1846)

최초의 한국인 천주교 신부. 아명은 재복, 본관은 김해이며 경기도 용인에서 출생하였다. 세례명은 안드레아이며 천주교 신자인 아버지 김제준은 기해박해 때 순교하였다. 우리 나라에 최초로 들어온 프랑스 신부 모방의 주선으로 마카오 외방 전교회의 신학교에 가서 공부하였다. 그 후, 매스트르 신부 밑에서 신학과 신철학을 연구하였다. 천주교 박해가 계속되고 있는 고국에 몰래 들어오려 했으나, 감시가 심하여 실패하였다. 1845년, 페레올·다블뤼 두 신부와 함께 황해를 건너 입국하여 전교에 전력하였다. 이듬해 선교사의 입국과 청에 있는 선교부와의 통신 연락에 필요한 비밀 항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황해도 연안을 답사하려다가 등산진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9월 16일 새남터에서 사형당하여 25세로 순교하였다. 1925년, 로마 교황 비오 11세에 의하여 복자위에 올랐다. 1972년, 한강변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김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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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大問

신라 성덕왕 때의 학자. 탁월한 문장가이며 일찍이 당에 유학하였다. 704년 한산주 도독이 되었으며 많은 저서를 냈으나, 현존하지는 않는다. 저서로 <고승전> <화랑세기> <계림잡전> <한산기> 등이 있다.

김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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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성이 중건을 건의한 경주 불국사 金大城(700-774) 신라의 정치가·건축가. 745년 중시가 되었다가 사퇴하고 경덕왕에게 불국사·석굴암을 세우자고 건의하였다. 그리고 절의 설계 및 모든 것에 관여하였으나, 완공되는 것은 보지 못하고 죽었다.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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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大中(1925∼

)

정치가. 전남 신안 출생. 제15대 대통령. 1963년 경희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하였다. 1960년 민의원에 당선된 후 1971년까지 6,7,8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으며, 1971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공화당의 박정희(朴正熙)와 겨루었으나 패배하였다. 그 후 미국, 일본 등지에서 반체제운동을 주도하다가 1973년 국내로 납치(김대중납치사건)되었다. 1976∼1978년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투옥, 1980년 7월 내란음모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복역하던 중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1985년 정치활동을 재개하였으며, 1987년·199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패배하여 정계를 떠나 연구생활에 몰두하였다. 1995년 정계에 복귀하여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였으며, 1997년 12월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김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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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大賢(1917∼1985)

음악가. 함경남도 흥남 출생으로, 1942년 일본 도쿄 고등 음악학교 작곡과를 졸업하였다. 1945년 함흥 관북 관현악단을 조직했으며, 1948년에는 원산 실내악단을 지휘하였다. 1951년 해군 정훈에 음악대 창설부원으로 일했으며, 1955년 서라벌예술대학 강사가 되었다. 1958년 문교부 영화 음악상을 수상했으며, 1962년 경희대학교 음대 강사, 1965년에 숙명여대 음대 강사, 같은 해 서라벌예술대학 음악과장에 취임하였다. 1968년 음악협회 부이사장을 겸하였다. 작품으로는 가극 <콩쥐 팥쥐>, 교향시곡 <광복 10년> 교향곡 <성웅 이순신> 등이 있다.

김덕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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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德齡(1567∼1596)

조선의 의병장. 자는 경수, 본관은 광주이다. 성 혼의 문인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주의 광해 분조로부터 호익 장군의 호를 받았으며, 1594년에 의병을 정돈하여 권 율의 휘하에 들어가 왜군의 호남 진출을 막기 위해 진해·고성 지방을 방어하였다. 곽재우와 함께 여러 차례 왜적의 대군을 무찔렀고, 1595년 고성에 상륙하려는 왜군을 격퇴하여 큰 공을 세웠다. 전란 중에 반란을 일으킨 이몽학을 토벌하려다가 이미 진압되어 회군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신경행의 무고로 옥사하였다. 죽은 후 병조참의에 추증되고 벽진 서원에 모셔졌다.

김 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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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墩(1385∼1440)

조선 초의 천문학자. 본관은 안동이며 고려 김방경의 후손이다.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직제학을 지냈다. 세종의 명으로 김 조와 함께 천체의 현상을 관측하는 간의대, 물시계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보루각을 만들었다. 1434년, 동활자인 갑인자 주조에도 참여하였다.

김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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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東吉(1928- )

수필가·철학가. 평남 맹산 출생. 연세대학 영문과를 거쳐 미국 에반스빌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미국 인디애나 대학 대학원과 보스턴대 대학원에서 미국사를 전공한 후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5년 이후 연세대학교에서 교수를 지냈으며, 1980년 동 부총장이 되었다. 1992년 국민당 최고위원이 되고 제14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수상집으로 <길은 우리 앞에 있다> <대통령의 웃음> <링컨의 일생> <하늘을 우러러> <역사의 언덕> <어떤 사람이기에> <김동길전집> 등이 있다.

김동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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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東里(1913∼1995)

소설가. 본명은 시종이며 경북 경주에서 출생하였다. 대구 계성중학교에서 2년 간 공부하고 경신고교로 전학하였으나 중퇴하였다. 서라벌예술대학 교수·예술원 회원·한국문인협회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초기에는 우리 나라의 토속적 세계나 동양적 신비와 몽환의 세계를 통하여 작품을 전개시켰다. <무녀도>는 무당과 크리스트교의 대립을, <황토기>는 억쇠와 득보란 두 장사의 혈투를 그린 작품으로 둘 다 끝장이 나지 않는,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하는 운명적인 주제를 다루었다. 그러나 후기에 와서는 인간적 고뇌를 종교의 세계에까지 승화시킨 <등신불>을 비롯하여, 그리스도와 사반의 대립적인 인간상을 통하여 천상적인 구원과 지상적인 구원의 세계를 그린 장편 <사반의 십자가> 등, 대체로 인간의 구원을 주제로 삼았다. 그는 착실하고 정확한 문장가로도 이름이 높다. 1955년 자유문학상을, 1958년 예술원상을 수상하였다. 저서로 <귀환장정> <문학과 인간> <자연과 인생> <김동리 선집> 등이 있다.

김동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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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東鳴(1900∼1968)

시인·정치 평론가. 호는 초허이며 강원도 강릉에서 출생하였다. 도쿄 아오야마 학원에서 철학과 신학을 배웠다. <당신이 만약 내게 문을 열어주시면>이라는 보들레르에게 바치는 시편을 가지고 문단에 등장하였다. 일제 때에는 전원에 묻혀 시를 썼는데, 47편을 묶어 <파초>를 간행하였다. 1947년부터는 이화여자대학교에 재직하면서 과거의 시풍과 서정성에서 벗어나 현실과 정치, 사회적인 풍자와 관념에 치우치게 되었다. 1955년 시집 <진주만>으로 아시아 문학상을 수상하였고, 주로 동아일보를 통하여 예리한 정치 평론을 하였다. 1960년에는 초대 참의원에 당선되어 5·16 군사정변 전까지 정치 생활을 하였다. 저서로 <나의 거문고> <진주만> <목격자> <세대의 삽화> <적과 동지> <김동명 문집> 등이 있다.

김동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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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東三(1878-1937)

독립운동가. 본명은 긍식, 호는 일송이며 경북 안동에서 출생하였다. 1907년 고향에서 협동중학교를 세우고, 1909년 '대동청년단'을 조직하여 만주 통화현에서 이시영 등과 만주에 거주하는 교포들을 위해 논의하고, 교포들의 자치기관인 '부민단'을 조직하였다. 3·1운동 때에는 '한족회'를 결성하여 이상룡 등과 서로군정서를 조직하여 한족 대표 대회에 참석하였다.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안창호의 뒤를 이어 노동국 총판이 되었으며, 김좌진·지청천·황학수 등과 함께 임시 혁신의회를 조직하였다. 만주사변 후, 이원일과 함께 하얼빈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10년형을 선도받고 경성 형무소에서 복역중 옥사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김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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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東仁(1900-1951)

소설가. 호는 금동이며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일본에서 유학하여 그곳에서 주요한·전영택·김 환 등과 함께 순문예 잡지인 <창조>를 발간하여 리얼리즘이라는 근대 문예 사조가 처음으로 주장되었다. 1921년 이후, 자연주의적 작풍에 의한 단편을 계속 발표하고 예술 지상주의적 경향의 작가로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직선적인 성격과 탐미적인 경향으로 '한국의 와일드'로 불리었다. 1·4 후퇴 당일 서울에서 신병으로 사망하였다. 저서로 <약한 자의 슬픔> <광화사> <수양 대군> <운현궁의 봄> <적막한 저녁> 등이 있다.

김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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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東振(1913- )

작곡가.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났다. 1936년에 숭실전문 영문과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 고등 음악학교를 졸업하였다. 광복 후 평양 교향악단을 만들어 지휘자로 있었다. 월남하여 50년 해군 정훈 음악대 창작부장 겸 지휘자로 있다가 53년 서라벌예술대학 교수, 54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63년에 경희대학교 음대 교수를 거쳐 동 학장을 지냈다. 국민훈장 모란장, 3·1 문화상 예술상을 받았다. 가곡집 <내마음>, 오페라 <심청전>, 교향곡 <조국> <민족의 축원>, 교향시곡 <제례악> <만가> <양산가>, 가곡 <가고파> <봄이 오면>, 군가 <육군가> <6·25의 노래> <조국찬가> 등이 있다.

김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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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東煥(1901-?)

시인. 호는 파인이며 함북 경성에서 출생하였다. 서울 중동고를 마친 후, 도쿄 동양대학 문과에서 수업하였다. 1924년 우리 나라 최초의 서사시인 <국경의 밤>으로 시단에 등장하였으며, 민족주의적인 정열의 시인으로서 평가를 받았다. 한편, 조선일보·동아일보 기자를 거쳐 1929년 <삼천리>를 창간하였으며, 6·25전쟁중 납북되었다. 시집으로 <승천하는 청춘> <국경의 밤>이 있으며, 기행문 <나의 반도 산하> 등이 있다.

김두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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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斗樑(1696-1763)

조선의 화가. 자는 도경, 호는 남리, 본관은 경주이다. 인물·풍속·산수에 뛰어난 화원으로서 별제를 지냈다. 특히 용맹스러운 장수를 잘 그렸으며 웅장한 화풍이 특징이다. 작품으로 <추동 전원 행렵 승회도> <목우도> <월하계류도> 등이 있다.

김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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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斗漢(1918-1972)

제3대·제6대 국회의원. 김좌진 장군의 아들로 일제 말기부터 주먹의 힘으로 민족적·의협적인 행동을 해왔다. 광복 후, 한독당 재정위원·대한 민주청년 연맹 부위원장·대한 노조 총연합회 최고위원 등을 역임하였고, 또 반탁 운동과 노동 운동에 종사하였다. 제3대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하여 선거 소송, 오물 사건, 한독당 내란 음모 사건 등 계속적인 물의와 투옥으로 독특한 정치 생활을 하였다. 정계에서 은퇴한 후 사망했다.

김득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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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得臣(1754-1822)

조선의 화가. 자는 현보, 호는 긍재·홍월현, 본관은 개성이다. 화원으로서 초도첨사를 지냈다. 영조 때의 화가 정 선·심사정과 더불어 영조 때의 3재라고 불린다. 작품으로 <노안도> <풍속도> <파적> <설경산수도> <강변회음도> 등이 있다.

김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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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瑪利亞(1891-1945)

독립운동가. 황해도 장연에서 출생하였으며, 서울 정신여고를 졸업한 뒤 모교에서 교편생활을 하였다.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 히로시마 여학교를 졸업하고, 도쿄 메지로 여자학원 전문부에 입학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졸업을 며칠 남기고 귀국하여 독립 사상을 고취하다가 체포되었다. 출옥한 후 대한 애국부인회 회장이 되었으나 비밀 조직이 탄로되어 3년형을 받고 복역중 병보석으로 나와 상하이로 탈출하였다. 1923년, 미국으로 건너가 파크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귀국하여 원산의 마르다 윌슨 신학원 교사로 재직중, 1945년 병으로 사망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김만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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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萬重(1637-1692)

조선의 작가·문신. 자는 중숙, 호는 서포, 본관은 광산이다. 김익겸의 유복자로 어머니 윤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현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제학·판서를 역임하였다. 1689년 남인의 재등장으로 유배되었다. 조선 문학사상 획기적인 작품인 <구운몽>을 저술하였다. 이것은 한문체의 가사에 불만을 품고, 순 우리글로 쓴 것으로서 국문학사상 높이 평가되는 작품으로 인간의 부귀영화는 모두 일장춘몽이라는 것이 그 주제이다. 게일은 이를 영어로 번역하여 해외에 소개하였다.

김말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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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末峰(1901-1961)

여류 작가.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정신여학교를 거쳐 일본 교토 도지샤 여자 전문학교 영문과를 졸업했다. 중외일보 기자로 있으면서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1928년 결혼을 한 후 1933년 중앙일보에 처녀작인 단편소설 <망명녀>를 발표했고, 1935년 동아일보에 장편소설 <밀림>을, 1936년 조선일보에 장편소설 <찔레꽃>을 발표함으로써 대중소설 작가의 지위를 얻었다. 해방 후에는 사회 개선 운동에 앞장서서 박애원을 경영하는 한편, 많은 장편소설을 신문이나 잡지에 연재했다. 한국 예술원 위원, 한국 문학가협회 대표위원을 역임했고, 작품으로는 <화려한 지옥> <푸른 날개> <생명> <화관의 계절> 등이 있다.

김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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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命元(1534-1602)

조선의 정치가. 자는 응순, 호는 주은, 본관은 경주이다.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좌참찬에 이르렀다. 1589년, 선조를 몰아내고 정권을 차지하려 했던 '정여립의 반란'을 수습하였다. 임진왜란 때 팔도 도원수로서 서울을 지키다가 패퇴하였으며, 평양마저 함락되자 순안에 주둔하면서 왕의 행궁을 잘 지켰다. 정유재란 때에는 유도대장으로 공을 세운 후 우의정에 올랐다.

김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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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命煥(1913-1989)

명고수. 전남 곡성 출생. 아호는 일산(一山)이며, 20세기 후반에 우리나라에서 판소리의 북장단을 가장 오래 공부한 고수에 속한다. 전라남도 옥과에서 명창 장판개에게 판소리와 북을 사사했고, 20세 때부터 박판서·김정문·김봉학에게 전문적으로 북을 배웠다. 김명환은 고법뿐만 아니라 판소리 이론에도 남다른 조예가 있었는데, 임방울·이동백·송만갑·정응민과 같은 당대 최고의 판소리 명창들에게 소리를 배우기도 했다. 1978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59호 판소리 고법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김명환은 "고생을 하는 일이 있어야 예술이 나오지 생활이 풍부한 사람한테서는 안 나온다"라는 고통을 통한 참예술론을 폈으며, 평생을 이 예술론으로 일관했다.

김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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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泮 조선 초의 학자. 자는 사원, 호는 송정, 본관은 강릉이다. 정종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40년간 재직하면서 많은 명사들을 배출하였다. 김 구·김 말과 함께 '경학 3김'이라 불리었다. 만년에는 강서에서 빈곤하게 지내다가 죽었다.

김방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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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方慶(1212-1300)

고려의 명장. 자는 본연, 본관은 안동이며 신라 경순왕의 후예이다. 서북면 병마판관으로 있을 때 몽고군이 침입하자 위도에서 이를 막았다. 1270년 배중손 등이 삼별초를 이끌고 난을 일으켜 승화후 온을 왕으로 추대하자, 추토사의 명을 받고 그 무리를 쳤다. 이듬해에는 몽고군과 합세하여 탐라에서 계속 항거중인 삼별초의 남은 세력을 완전히 평정하고 시중에 올랐다. 1274년 충렬왕이 즉위한 후, 원이 일본을 정벌할 때 중군장으로 출정하여 쓰시마 섬을 친 다음, 일본 본토로 향하던 중 풍랑을 만나 되돌아왔다. 1278년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모함으로 귀양갔다가 풀려나왔다. 1281년 원이 다시 일본을 정벌하려 할 때 출정하였으나, 태풍을 만나 큰 손해를 입고 돌아왔다. 충선왕 때 벽상삼한 삼중대광에 추증되었다.

김백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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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白峰(1927- )

여류 무용가. 평남에서 태어나 일본 도쿄의 고등 여학교에서 배운 후, 4년 동안 최승희 무용연구소에서 무용을 배웠다. 1953년 서울에 김백봉 무용 연구소를 설립했으며, 1954년 한국예술무용연구소를 세웠다. 1958년 동남아 친선 예술사절단으로 순회 공연을 했고, 서울예술고등학교 강사·한국 무용가협회 이사·국제 극예술협회 상임위원 등을 역임했다. 1964년 경희대 부교수, 1966년 경희대 무용과 과장을 지냈으며, 서울시 문화상과 캄보디아 문화 훈장을 수상했다. 그의 창작 작품으로는 무용극 <우리 마을의 이야기>, 그랜드 발레 <비련>, 창작 무용 <지효> 등이 있다.

김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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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梵文(?-825)

신라의 반역자. 헌덕왕 때에 반란을 일으켰던 김창헌의 아들이다. 825년, 고달산의 산적 수신 등 백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난을 일으켜 북한산주를 치다가 패하여 죽었다.

김범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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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範禹(?-1787)

조선 정조 때의 천주교 순교자. 1785년, 이 벽·이승훈·정약전·정약용·정약종 등이 김범우의 집에 모여 설교하다가 발각되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양반들이어서 성명을 밝히지 않아 징계로 풀려났으나, 주인인 김범우만 잡혀 죽었다.

김병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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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炳魯(1887-1964)

법률가·초대 대법원장. 호는 가인, 본관은 울산으로 전북 순창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는 한학을 공부하고 18세 때는 서양 선교사로부터 수학과 서양사를 배웠다. 경술국치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서 메이지 대학 및 일본 대학 법과를 다녔으며, 재학중 우리 유학생들과 '금연회'를 조직하여 가난한 유학생들에게 장학금을 보조해 주었다. 귀국 후 경성법전과 보성전문 등에서 법학을 강의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한민당 창당에 앞장섰으며, 1948년 초대 대법원장이 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김병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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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炳淵(1807-1863)

조선의 풍자 시인·방랑 시인. 속칭은 김삿갓, 자는 성심, 호는 난고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김익순이 홍경래의 난 때 선천 부사로 있다가 항복한 것을 수치로 여겨, 일생을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단장을 벗을 삼아 각지로 방랑을 했다. 도처에서 독특한 풍자와 해학 등으로 퇴폐하여 가는 세상을 개탄, 저주 또는 비웃었다. 그의 수많은 한문시가 구전되고 있다.

김병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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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炳翼(1938- )

평론가. 경북 상주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과 졸업. 1969년 평론 <60년대 문학의 위치> <정치와 소설> <시작의 의미> 등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비평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C. R. 밀스의 사회학적 상상력을 배경으로 정치와 사회를 문학 속에 수용한다는 기본 입장에서 지성적인 사회비판과 문학성을 균형있게 조화시키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저서에 김주연(金柱演) 등과 공저인 <현대한국문학>을 비롯하여 <동아일보>에 연재되어 주목을 끌었던 <한국문단사>와 <지성과 문학> 등이 있다. 1983년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김병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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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秉祚(1876-1947)

독립운동가·목사.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 호는 일재이며 평북 정주에서 출생하였다. 1915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다. 3·1 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의 상임이사·임시 의정원 평안도 대표·사료 편찬위원·상하이 거류민단 의사회 의원 등을 역임하였다. 1924년, 만주 지안현에서 <대동역사> <독립혈사>를 간행하였으며 학교를 세워 청소년을 양성하는 한편 <한족신문>을 발행하여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8·15광복 후에는 조만식과 함께 조선민주당을 창설하여 반공운동에 투신했으며, 비밀 결사단인 광복단을 조직하여 지하운동을 하던 중 붙잡혀 평양에서 감옥살이를 하다가 시베리아로 유배당한 뒤 죽었다.

김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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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甫當(?-1173)

고려의 장군. 무신의 난으로 정권을 잡은 정중부·이의방 등을 몰아내고 전왕 의종을 다시 세우고자, 이경직·장순석 등과 모의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정중부가 보낸 이의민·박존위에게 경주에서 패하고 모두 잡혀 죽었다. 김보당이 죽기 전에 "문신으로서 이 모의에 가담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말함으로써 많은 문신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김복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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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復鎭(1902-1941)

조각가. 충청북도 충주 출신. 1917년 배재중학을 중퇴, 도일해 1919년 도쿄미술학교에 입학했다. 1924년 데이코쿠미전에 작품 <나상(裸像)>을 출품, 입선하였고 동년 졸업과 동시에 귀국하여 모교인 배재중학교원이 되었다. 한편 토월미술연구회, 청년학과(YMCA) 미술과, 경성 여자상업학교의 미술강사 등으로 후진 양성에 힘썼다. 1925년 제4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작품 <3년 전>을 출품, 3등상을 수상한 것을 필두로 제5회 및 제16회 선전에서는 특선, 제15회 선전에 입선되었다. 1930년 <중앙일보> 학예부장을 지내는 한편 '조선미술원'을 창립했고 1936년 법주사 대불을 착공하여 미완인 채 서울에서 사망했다. 옥고를 치르는 등 불우한 생활 가운데서도 한국의 근대조각을 개척하는 데에 크게 공헌한 선각자이며 연극과 평론활동에도 종사한 다재다능한 조각가이다. 작품 경향은 사실적인 표현으로 일관하고 있다. 작품으로는 <소년> <3년 전> <여인> <나부> <위리암선생> <법주사 석가여래입상> <다산 선생상> <소년> <백화> 등이 있다.

김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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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富軾(1075-1151)

고려의 정치가. 자는 입지, 호는 뇌천, 본관은 경주이다.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부시랑·어사 대부·평장사가 되었다. 1134년, 묘청이 주장하는 서경 천도 운동에 반대하였으며, 이듬해 묘청의 난이 일어나자 평서 원수가 되어 난을 평정하였다. 1145년 인종의 명을 받아 <삼국사기>를 편찬하였는데, 이것은 삼국과 통일 신라 시대를 통한 가장 오래 된 정사(正史)인 동시에 승 일연이 쓴 <삼국유사>와 함께 한국 최고의 역사책으로 알려지고 있다. 50권 10책으로 되어 있으며, 중국 역사책을 참고·인용하였다. 특히 삼국 통일의 기사에 <자치통감>을 그대로 옮긴 데가 있으며, 사대주의 사상 및 오류 등이 있어서 그를 비난하는 이도 있다. 1147년 낙랑군 개국후에 책봉되었다. 저서로 <삼국사기> <김문열 공집> <봉사어록> 등이 있다.

김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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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相玉(1890-1923) 독립운동가.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고학으로 배운 뒤 야학을 세워 가르치다가 일화(日貨) 배척을 목적으로 말총모자를 발명하여 공장을 세운 후 국산품 장려에 진력하였다. 1919년, 영국인 피어슨 여사의 집에서 '혁신단'을 조직하였으며 <혁신공보>를 발간하여 구국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듬해 상하이로 망명하여 의열단에 가입하고 일본 요인들을 암살할 목적으로 폭탄을 가지고 들어와, 1923년 종로 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일본 형사부장 등 수십 명의 일본 경찰관이 죽었다. 포위 경찰대와 접전하였으나, 최후 일발로 자살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김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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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相沃(1920- ) 시조 시인. 호는 초정이며 경남 충무에서 출생. 1939년 시조 <봉선화>를 <문장>지에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등장하였다. 1941년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낙엽>이 뽑혔다. 그는 시조 외에 동시·시 등 여러 분야에 뛰어난 재질을 발휘하였다. 섬세하고 영롱한 언어 구사가 특징이다. 시조집으로 <고원의 곡>, 시집으로 <이단의 시> <의상>, 동시집으로 <석류꽃> <꽃 속에 묻힌 집> 등이 있다.

김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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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尙容(1561-1637)

조선의 정치가. 자는 경택, 호는 선원, 본관은 안동이다. 영의정 김상헌의 형으로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이 되었다. 권 율을 따라 호남·영남 지방을 왕래했으며, 1598년 승지가 되어 사신으로 명에 다녀왔다. 광해군 때 도승지·대사헌·형조판서를 지냈으나 '폐모론'에는 관여하지 않았으며, 인조 때 우의정이 되었다. 병자호란 때 왕족을 모시고 강화도에 건너갔으나 적병이 강화성으로 쳐들어와 함락당하게 되자, 화약에 불을 질러 자살하였다. 문장에 뛰어났으며 명신으로 알려져 있다. 저서에 <선원유고> 등이 있다.

김상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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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尙憲(1570-1652)

조선의 정치가·학자. 자는 숙도, 호는 청음, 본관은 안동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수찬·교리를 지냈다. 인조 때에는 예조판서를 지냈으며, 효종 초에는 좌의정에 이르렀다. 병자호란 때 판서로서 비변사 당상을 겸하였다. 당시 청과의 화의를 극력 반대하여 작성중인 국서를 찢고 통곡하였다. 화의가 성립되자 청의 선양에 잡혀가 심문을 받았으나, 뜻을 굽히지 않으므로 그의 충절에 감동하여 돌려보냈다. 그는 명필로도 이름이 높았는데 동기창체를 잘 썼다. 그의 유적이 있는 곳마다 서원을 세워 그를 제향하였다. 저서에 <야인담록> <청음집> 등이 있다.

김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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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生(711-791)

신라의 명필. 어려서부터 글씨에 매우 뛰어났으며, 일생 동안 필법을 닦아, 예서·행서·초서는 그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고려 사신 홍 관이 송에 가서 김 생의 글씨를 내보이자 송에서는 왕희지에 비할 만큼 천하의 명필이라고 극찬하였다. 그 후부터 중국 사신은 김 생의 필적을 보배로 알고 구해 갔다 하며 '행동서성'으로 불렸다. 그가 직접 쓴 글씨는 남아 있지 않고 <이차돈 비> <백련사액> 등의 비문과 액자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김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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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性洙(1891-1955)

정치가·교육자. 호는 인촌이고 본관은 울산이다. 전북 고창에서 출생했으며, 1908년 일본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귀국하여 운영난에 빠진 중앙중학교를 인수하여 교장에 취임하였다. 1919년, 경성 방직회사를 창설하여 경제 자립과 민족 자본 육성에 노력하는 한편, 이듬해에 <동아일보>를 창간하고 제2대 사장에 취임하였다. 1932년,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를 인수하여 교장에 취임하였으며, 1935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손진태와 함께 골동품을 수집하며 외국 유출을 막았다. 광복 후에는 미군정청 수석 고문관을 지냈으며, 1950년 제2대 부통령에 당선되어 취임했다가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반대하여 이듬해 사임했다. 1952년, 민주 국민당 고문이 되어 야당인으로 활약하다가 병사하여 국민장으로 장례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김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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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誠一(1538-1593)

조선의 명신. 자는 사순, 호는 학봉, 본관은 의성이다. 이 황의 제자로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부제학을 지냈다. 1591년에는 통신 부사가 되어 황윤길과 함께 일본에 다녀왔다. 황윤길은 반드시 일본의 침략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으나, 김성일은 그와 상반되는 의견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처벌을 명하였으나 유성룡의 변호로 용서되어 초유사로 종군하여 진주성을 지키다 순직하였다. 저서에 <학봉집> <상례고증> 등이 있다.

김성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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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星泰(1884-1962) 민속 예술인. 경기도 양주에서 출생하였으며, 아버지로부터 산대춤을 배웠고 왜장녀역과 배춤에 능하였다. 1958년 전국 민속 예능 경연대회에서 공로상을 받았으며, 양주 산대놀이가 무형 문화재로 선정되자, 무형 문화재 제1급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김성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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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聖泰(1910- ) 작곡가.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연희전문학교를 마친 후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 고등음악학원 작곡과를 마쳤다. 1939년 경성보육학교 음악 주임을 지낸 후에 경성 중앙방송국 합창단을 지휘하였다. 예술원 회원·한국 음악협회 회장·서울대학교 음악대학장을 지냈고, 현재 <월간 객석> 발행인 겸 편집인·서울대 명예교수·예음 문화재단 이사장으로 있다. 문화훈장 대통령장·예술원상 등을 수상했다. 대표 작품으로 가곡 <동심초> <관현악을 위한 조곡> 등과 저서로 <악전> <화성법> 등이 있다.

김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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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聲翰(1919- )

소설가. 함남 풍산 출생. 일본 도쿄 대학에서 수업했으며, 해방 후 서울 문리사대·한국 외국어대학 강사를 역임했고 동아일보 논설위원을 거쳐 주필을 지냈다. 195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무명로>가 당선된 후 59년도부터 활동했으며, 단편 <바비도>로 제1회 동인문학상을 받았다. 또 제1회 자유문학상 수상자이다. 지적인 작가로 알려져 있고, 작품에 <암야행>(1951), <오분간>, 장편 <이성계> 3부작이 있다.

김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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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世中(1928-1986)

조각가. 경기도 안성 출생. 1951년 서울대 미대 교수가 되었다. 1952년 서울대 대학원을 수료하고, 1962년 한국 미술협회 부이사장, IAPA(국제 조형미술협회) 한국위원회 사무총장 및 국전 심사위원을 지냈다. 또 1969년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으며, 1969년 현대미술관 운영위원이 되었다. 작품으로는 유엔 탑, 광화문 충무공 동상 등이 있다.

김소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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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素雲(1907-1981)

시인·수필가. 본명은 교중이고 부산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일본에 가서 기타하라에게 배우고 한국의 민요를 일본에 번역·소개하였다. 저서로는 일역 시집 <조선 민요선집> <조선 현대 시집>, 수필집 <마이동풍첩> <삼오당 잡필> <하늘 끝에 살아도> 등이 있다.

김소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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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素月(1902-1934)

시인. 본명은 정식, 아호는 소월이며 평북 정주에서 출생하였다. 1917년 오산학교에 입학하여 스승인 김 억의 영향으로 시를 써서 뛰어난 재질을 나타내었다. 1920년 김 억의 주선으로 <창조>지에 소월의 첫작품인 <낭인의 봄> <그리워> 등을 발표하였고, 1922년 <개벽>지에 <진달래>를 발표하여 문단에 등장하였다. 이어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 <먼 후일> 등 주옥 같은 작품을 내었고, '영대'의 동인으로 활동하며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하였다. 그 외 <못잊어>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가는 길> 등의 시를 썼으나, 그 이후로는 민요풍의 서정시에 주력하였고, 33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 시집으로 <진달래꽃> <소월 시집> 등이 있다.

김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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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대한민국국악제에서 열창하는 명창 김소희 金素姬(1917-1995)

전북 고창 출생. 판소리 명창. 본명은 순옥(順玉)이며 소희(素姬)는 예명이다. 명창 송만갑 문하에서 소리를 공부했다. 김소희의 창법은 가성을 쓰지 않고 상·중·하청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점이 특징이다. 16세 때 서울로 올라와 활동했다. 한성준에게 살풀이를 배웠고, 1934년에는 정정렬 문하에서 판소리 공부를 계속했으며, 김종기에게 가야금, 거문고를 배워 소리, 춤, 기악을 두루 익혔다. 1936년에는 최초로 정정렬·임방울과 함께 나누어 부른 춘향가를 녹음했으며, 판소리 다섯 마당도 모두 녹음했다. 1939년부터 화랑창극단에 참여했고, 조선성악연구회에 가입했으며, 박귀희와 함께 여성국악동회를 조직했다. 1962년에 유럽, 1964년에 미국을 순회 공연하는 등 우리 전통 예술을 보급하는 데 이바지했으며 1964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의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김수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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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壽根(1931-1986)

건축가. 서울 출신. 1957년 일본 도쿄예술대학 건축과 졸업, 1959년 도쿄대학 대학원 다카야마연구실 석사학위 과정을 수료, 석사학위를 획득했으며, 1962년 동 대학원의 박사학위 과정을 수료했다. 1955년-1956년 도쿄의 마쓰다 건축설계사무소에 근무했으며, 1960년 국회의사당 건축설계안 모집에 응모하여 1등으로 당선했다. 1961년 이래 건축연구소를 자영하는 한편 홍익대학에 재직중, 1964년에 조교수가 되었다. 1961년 워커힐 설계위원, 1962년 서울특별시 도시계획위원, 자유센터 건설분과위원장, 1964년 대한체육회 시설분과위원 등을 역임하고, 1970년 일본 오사카 엑스포 70 만국박람회 한국관의 설계를 담당하기도 했다. 대표 작품으로는 <자유센터> <왕양빌딩> <우석대학 부속병원> <엑스포 70> <만국박람회 한국관> 등이 있다.

김수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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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首露王(?-199)

가야국의 시조(재위 42-199). 김해 김씨의 시조. 42년, 가야국의 북쪽 귀지봉에서 6개의 금알이 든 상자가 있었는데, 그 6개의 금알이 사람이 되어 6가야국의 왕이 되었다. 수로는 이중에서 제일 먼저 사람으로 변했기 때문에 '수로'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수장 구도간들이 왕으로 추대하여 나라를 세워 대가락이라 하였으며, 후에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을 비로 맞았다. 업적도 많았고, 158세나 살았다고 한다.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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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洙暎(1921-1968)

시인. 서울에서 태어나 연희대 영문과를 수학하였다. 작품은 모더니즘에서 차츰 생활적 경향으로 바뀌었다. 후배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1957년 한국 시인협회 작품상을 수상하였다. 수유리에 시비가 세워졌다. <달나라의 장난> <풀> 등 많은 시가 있다.

김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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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壽長(1690-?)

조선의 문인. 자는 자평, 호는 노가재이며 벼슬은 기성서리를 지냈다. 김천택과 함께 영조 때 국문학의 일인자로 이름을 떨쳤다. 만년에는 서울 화개동의 자기 집을 노가재라 부르고, 제자들을 모아 가곡의 창법과 악기 연주법 등을 가르쳤다고 하며, 시조의 창작과 가창으로도 유명하였다. 그의 시조 117수가 들어 있는 <해동가요>를 편찬하였다.

김수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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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壽恒(1629-1689)

조선의 문신. 자는 구지, 호는 문곡, 본관은 안동이다. 18세 때 사마시에 장원하였으며, 23세에 알성 문과에 급제하고 이어 중시에도 급제하여 통정·자헌 등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그는 서인으로서 1660년에 자의 대비 복상 문제가 일어나자, 송시열과 함께 기년설(만1년)을 주장하여 남인파를 눌러 윤선도 등을 귀양가게 하였다. 그 후 이조판서·좌의정을 지내고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80년 남인들이 정권을 잃게 되자, 영의정이 되었다. 이때부터 한동안 당쟁이 잠잠해지고 조정의 기강이 유지되었으나, '기사환국'으로 남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되자 유배되어 처형되었다. 저서에 <문곡집> 등이 있다.

김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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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壽煥(1922- )

종교인. 경북 대구에서 출생하였으며, 도쿄 쇼치 대학 철학과를 중퇴하고 카톨릭 신학부를 졸업한 뒤 천주교 신부가 되어 경북 안동교회 주임신부가 되었다. 카톨릭 시보사 사장·천주교 마산 교구장·천주교 주교 등을 거쳐, 1968년 천주교 서울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가 대주교가 승품되었다. 이듬해에는 로마 교황으로부터 우리나라 최초의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김순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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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順男(1917-1983?)

작곡가. 서울 출생.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음악 작곡가로 알려져 있으나, 월북 작곡가여서 작품 연주가 금지되었다가 1988년에 해금되었다. 경성사범학교 음악부 연습과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고등음악학교 작곡부에서 작곡을 공부했다. 도쿄고등음악학교 기악부에서 공부하며 일본현대작곡가연맹이 주최한 음악회에서 피아노 소나타를 발표했다. 1946년 당시 북한의 국가로 쓰였던 <인민항쟁가>를 작곡했고, 1948년 좌익활동을 한 혐의로 체포령이 내려져 월북했다. 평양국립음악학교 작곡학부장, 조선 음악동맹 부위원장 따위를 지냈고, 모스크바 음악원에 유학하기도 했다. 1953년부터 반동 음악가로 지목돼 모든 활동을 금지당했으나, 1964년에 복권되었다. 김순남은 음악에 민족성을 담았고, 사실주의 내용에 맞는 표현 기법을 사용했으며, 전통 장단과 음계를 사용하기도 했다. 주요 작품에는 가곡집 <산유화>(1947)와 <자장가>(1948)가 있으며, 피아노 소나타와 실내악곡이 많다. 그 밖에 관현악곡 <남녘의 원한을 잊지 말아라>, 교향곡 <태양 없는 땅>과 같이 정치색이 짙은 작품도 있다.

김승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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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承鈺(1941- )

소설가. 일본 오사카 출생. 서울대 불문과 졸업. 196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생명연습(生命演習)>이 당선됨으로써 문단에 등장하여, 1965년 단편 <서울, 1964년 겨울>로 동인문학상을 받았으며, 1977년 <서울의 달빛 0장>으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밖의 작품으로 <무진기행> <내가 훔친 여름> <다산성> <60년대식> 등이 있으며, 단편집에 <서울, 1964년 겨울> 등이 있다.

김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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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時敏(1544-1592)

조선의 무신. 자는 면오, 본관은 안동이다.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 판관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진주 목사가 되어 사천·고성·진해에서 왜군을 무찌르고 영남우도 병마절도사로 특진되었으며, 금산에서 적을 격파하였다. 그 해 겨울, 바다로부터 적의 대군이 진격하여 성을 포위하자 14일간의 격전 끝에 왜적을 물리치고 성을 순시하다가, 시체 속에 숨어 있던 한 왜병의 총탄에 맞아 중상을 입어 죽었다. 그 후 진주에 충민사라는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김시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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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時習(1435-1493)

조선의 생육신 중 한 사람. 자는 열경, 호는 매월당, 본관은 강릉이다. 5세 때 이미 <대학> <중용>을 익혀 신동으로 이름을 떨쳤다. 집현전 학사 최치운이 그의 재주를 보고 경탄하여 이름을 시습이라 지어 주었다. 1445년 21세 때 수양 대군이 단종을 내쫓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리를 듣고 세상을 비관하여 책을 불사르고 승려가 되었다. 양주의 수락·수춘의 사탄·해상의 설악·월성의 금오 등지를 방랑하면서 글을 지어 세상의 허무함을 읊었다. 47세에 안씨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으며, 세조 때 변절하여 여섯 신하를 일러바친 영의정 정창손에게 길에서 면박을 주기도 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와 사귀기를 두려워하였으나, 이정은·남효온·안응세·홍유손 4명만은 시종 변하지 않았다. 홍산의 무량사에서 죽었으며, 그의 유언대로 절 옆에 묻었다가 3년 후에 파보니 얼굴이 산 사람과 같았다고 한다. 남효온과 함께 영월 육신사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금오신화> <매월당집> <십현담 요해> 등이 있다.

김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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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湜(1482-1520)

조선의 성리학자. 자는 노천, 호는 사서, 본관은 청풍이다. 성리학에 밝았으며 중종 때 현량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성에 이르렀다. 조광조·김안국·기 준 등과 도학 소장파를 이루어 제도개혁과 교화 시험을 촉진하는 한편, 중종반정 때 공신이 된 훈구파 76인에 대한 공을 삭제하고, 토지와 노비를 빼앗는 등 과격한 정치를 하였다. 마침내 훈구파의 남 곤·심 정 등이 기묘사화를 일으키자 그는 거창으로 가서 <군신천세의>라는 시를 짓고 자살하였다.

김신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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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藎國(1572-1657)

조선의 문신. 자는 경진, 호는 후추, 본관은 청풍이다. 선조 때 생원이 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자기 아우가 적병에게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영남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왜군과 싸웠다. 이듬해 문과에 합격하여 검열을 지낸 뒤, 권 율의 종사관이 되었고 어사로 관서지방을 순시하기도 하였다. 당시 북인이 소북과 대북으로 갈라지자, 소북의 우두머리로 대북을 공격하다가 벼슬을 빼앗겼다. 그 후 다시 벼슬에 올라 호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정묘호란 때에는 금의 사신과 화의 조약에 대해 결정을 보았다. 병자호란 때 왕을 모시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였으나 용납되지 않았다. 1637년, 소현 세자가 인질로 선양으로 갈 때 모시고 갔다.

김안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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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安國(1478-1543)

조선의 명신, 자는 국경, 호는 모재, 본관은 의성이다. 조광조·기 준 등과 함께 김굉필의 제자로서 도학에 통달하여 지치주의 유학파를 형성하였다. 연산군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박사·예조참의를 지냈다. 한때 경상 감사가 되어 영남에 가 있을 때, 모든 읍의 향교에다 <소학>을 나누어주어 가르치게 하여 교화사업에 힘썼다. 다시 서울에 올라와 참찬이 되었으나, 이 해에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 일파의 소장파 명신들이 거의 다 잡혀 죽을 때, 겨우 죽음을 면하고 관직에서 쫓겨나 이천에서 후진들을 가르치며 한가히 지냈다. 후에 다시 등용되어 좌찬성·대제학 등을 지냈다. 저서로 <모재집> <모재가훈> <동몽선습> <여씨향약> 등이 있다.

김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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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安老(1481-1553)

조선의 권신. 자는 이숙, 호는 희락당, 본관은 연안이다.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을 지냈다. 기묘사화 후 이조판서로 승진되었으나 남 곤·심 정의 탄핵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심 정 일파의 축출에 성공하여 다시 예조판서로 등용되어 심 정·이 항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경빈 박씨와 복성군 미를 죽이는 등 여러 차례 옥사를 일으켜 허 항·채무택과 함께 '정유 3흉'이라 한다. 중종의 계비인 문정 왕후를 폐하려 하다가 유배되어 그 곳에서 죽었다. 중종의 딸 효혜 공주의 남편인 연성위 김 희가 아들이다. 저서로 <용천 담적기>가 있다.

김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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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閼智(65-?)

경주 김씨의 시조. 65년(탈해왕 9), 왕이 금성 서쪽에 있는 숲에서 닭 울음소리를 듣고 표공을 시켜 가보게 했는데, 금빛의 작은 함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밑에 울고 있으므로 왕이 친히 가서 열어보니, 용모가 아름다운 사내 아이가 나왔다. 이 때부터 시림을 계림이라 하고 왕이 이 아이를 길렀는데, 금궤에서 나왔다 하여 김씨라 했다고 전한다. 그의 7대손이 신라 왕실의 외손으로서 미추왕이 되었다.

김 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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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億(1893-?)

시인. 호는 안서이며, 평북 정주에서 출생하였다. 오산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게이오 대학 문과를 중퇴하였다. 1918년부터 <태서문예신보>를 통하여 투르게네프의 산문시, 베를렌·보들레르 등의 상징시를 번역하여 소개하였다. 또한 <창조> <폐허> 등에 신작시를 발표하여 신시 운동에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였다. 한편, 에스페란토어를 연구하여 많은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그에게 영향을 받은 김소월을 문단에 소개하였다. 6·25전쟁 중 납북되었다. 저서로 <해파리의 노래> <물망초> 등이 있으며, 번역서로 <오뇌의 무도> <야광주> 등이 있다.

김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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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連俊(1914- )

작곡가·교육자. 함경북도 명천에서 태어났다. 연희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60년 연세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캐나다 윈저 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 미국 서던일리노이 대학에서 명예문학박사, 프랑스 루앙 대학에서 명예음악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양대학교 총장, 대한일보 사장, 대한 체육연맹 회장을 역임하는 등 여러 방면에서 활동하였으며, 현재 한양대학교 재단 이사장으로 있다. 그동안 국민훈장 모란장, 미국 하원 공로패, 이탈리아 공로 훈장 등을 받았다. 저서에 <백남문집> <사랑의 실천>, 작곡집에 <김연준 가곡 1,500곡집> <성가곡집> 등이 있다.

김영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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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永郎(1902-1950)

시인. 본명은 김윤식이며, 전남 강진에서 출생하였다. 휘문고등보통학교를 마친 후 일본 도쿄 아오야마 학원에서 공부하였다. 1930년 박용철·정지용과 함께 <시문학>을 발간하였으며, 1936년 <영랑시집>을 출간하였다.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서정 시인이며 <모란이 피기까지는>은 그의 대표작이다. 광복 후 정치적인 혼란에 대해 비관하여 <대체 내 노래는 어디로 갔느냐> <한줌 흙> 등을 통해 민족주의적인 입장에서 정치적 의미가 있는 시를 썼다. 공보처 출판국장이 되었으나, 6·25전쟁 중 포탄 파편으로 죽었다. 시집으로 <영랑시집> <영랑시선> 등이 있다.

김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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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泳三(1927- )

정치가·제14대 대통령. 경남 거제에서 출생하였다. 경남중학교,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군 복무 후 장택상 국회 부의장의 비서관으로 발탁됨으로써 정치가의 길로 들어섰다. 1954년 고향인 거제에서 여당인 자유당 후보로 제3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 해 12월, 자유당 정부가 대통령 3선을 위한 개헌을 추진하자 그에 반대하여 탈당하였고, 1955년에 민주당 창당 발기인으로 참가함으로써 야당 생활을 시작했으며, 35년 간의 야당 생활을 통해 김대중씨와 함께 반독재·민주화 투쟁을 주도해 왔다. 1990년에는 3당 통합의 결단을 내려 민자당의 제2인자가 되었으며, 제1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통령에 취임한 후, '신한국 창조'의 기치 아래, 수십 년간 쌓여 온 부정과 부패를 척결하는 등 개혁 정치를 폈으며, 역대 정부가 실시를 미루어 오던 금융실명제를 단행하였다.

김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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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永旭(1948- )

세계적인 바이올린 연주자. 서울 출생. 4세부터 피아노를 치다가 9세에 바이올린을 시작했다. 1960년 연주회를 위해 우리나라를 찾았던 피아노 연주자 루돌프 제르킨은 그를 미국에 있는 커티스 음악학교에 입학하게 했다. 1965년 메리 위던 국제콩쿠르에서 최고상을 받은 것을 계기로 레너드 번스타인,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등의 지휘자가 이끄는 관현악단과 협연을 하면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현재는 독주자로서의 활동 외에도 독일의 데트몰트 국립음악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과 요요 마, 엠마누엘 엑스와 더불어 실내악 연주 활동을 하는 데에 힘을 쏟고 있다.

김옥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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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玉均(1851-1894)

조선 말기의 정치가·혁명가. 자는 백온, 호는 고우, 본관은 안동이다. 1872년 문과에 급제한 후, 1881년 일본을 시찰하였다. 이듬해 일어난 임오군란을 수습하기 위해 박영효와 함께 일본을 다녀온 후 개혁의 필요를 절실히 느꼈다. 홍영식·서광범 등과 함께 개화 독립당을 조직하여 민씨 정권을 타도하려 하였으며,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킨 후, 사대당의 중심 인물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으나, 청의 군대 출동으로 3일 만에 실패하여 일본 공사와 함께 일본에 망명하였다. 그 후 10년 간 일본 각지를 방랑하다가 1890년 수구당에 매수된 홍종우에 의해 상하이로 유인된 후 암살당했다. 그의 시체는 본국으로 옮겨져 양화진에서 능지처참되었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개화당 내각이 조직되자, 이듬해 김홍집과 서광범의 상소로 반역죄가 풀렸다. 저서로 <기화근사> <치도약론> <갑신일록> 등이 있다.

김옥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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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玉吉(1921-1990)

여류 교육가. 평남 맹산에서 태어나 이화여전을 마치고, 모교에서 근무하다 미국 웨슬리언 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1952년 이화여대 조교수·부교수·문과 학무과장을 역임하고, 1958년 미국 템플 대학 대학원에서 수학하였다. 귀국 후, 1961년 이화여대 총장에 취임하였고, 동 대학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 아시아 반공연맹 이사, 한국 4H 클럽 이사, 한국 연구원 이사를 거쳐 세계 대학 봉사회 한국 위원회 이사를 역임하고, 이화여대 총장을 재임하였다. 예수의 생애와 교훈에 관한 연구를 꾸준히 하였다.

김요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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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耀燮(1927- )

시인·아동문학가. 함북 청진 출생. 청진교원대학 수학. 1941년 <매일신보> 신춘문예에 동화 <고개 너머 선생>이 당선 되었으며, 이어 <연> <은행잎 편지>를 발표하였다. 1947년 시 <수풀에서>가 동인지 <죽순(竹筍)>에 추천됨으로써 문단에 데뷔했다. 1957년 마해송(馬海松)·강소천(姜小泉) 등과 한국동화작가협회를 발족하고 1961년 자매학교 결연운동을 벌였으며 1970년 계간지 <아동문학사상>을 발행하였다. 동화집으로 <오, 멀고 먼 나라여> <깊은 밤 별들이 울리는 종> <날아다니는 코끼리> 등 30여 권이 있다. 시집으로 <체중(體重)> <빛과의 관계> <달을 몰고 다니는 진흙의 거인> 등이 있다. 소천문학상, 5월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한국시인협회상 등을 수상했다.

김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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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容基(1908-1988)

목사·농촌 운동가.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나 광동학교를 졸업하였다. 1940년 경기도 양주군에 봉안 이상촌을 건설하고, 1955년 경기도 광주군에 가나안 농장을 설립하였다. 1962년 가나안 농군학교를 설립하여, 많은 농촌 일꾼을 길러 내는 요람으로 만들었다. 1962년 농림부 장관상·향토문화 공로상을 수상했고, 1964년 공군 참모총장 감사장과 협조 상패를, 1966년 막사이사이상 복지 부문상을 받았다. 저서로는 <참 살 길 여기 있다> <가나안으로 가는 길> 등이 있다.

김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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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1-1648)

조선 인조 때의 공신. 자는 관옥, 호는 북저, 본관은 순천이다. 아버지인 김여물이 임진왜란 때 전사했으므로 순절자의 아들로 참봉이 되었다. 1596년,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강계 부사 등을 지냈다. 1623년, 이 귀·이 괄 등과 함께 인조반정에 성공하여 벼슬이 대제학에까지 올랐다. 이듬해 이 괄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모시고 공주로 피란했으며, 정묘호란 때에는 강화로 왕을 모시었다. 환도 후 영의정이 되었다. 그는 문장과 필법이 뛰어났으며 저서로 <북저집>이 있다.

김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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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庾信(595-673)

신라의 장군. 김수로왕의 12대손으로 15세 때 화랑이 되어 낭벽성 싸움에서 처음으로 고구려 군사를 격파하였다. 그 후 백제 및 고구려와 여러 차례 싸워 공을 세운 후, 김춘추를 왕으로 세우고 삼국 통일을 이룩할 준비를 하였다. 666년, 소정방이 거느린 당의 13만 군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백제의 유민들이 곳곳에서 부흥운동을 일으켰으며 고구려는 이들과 연합하여 북한산주에서 기세를 올렸다. 668년, 다시 당 군사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그러나 고구려·백제의 영토가 모두 당의 지배에 들어갔을 뿐 아니라, 신라까지도 당의 지배하에 두려고 하자, 김유신은 당과 대항하였다. 그 후 당과 여러 차례 싸워 백제의 옛 터를 모두 탈환하고 대동강 이남의 땅을 도로 찾았으나 고구려 땅의 대부분은 잃고 말았다. 문무왕은 그의 공적을 높이 사 태대각간의 벼슬을 주었으며 죽은 후 흥무 대왕이라 추증하였다.

김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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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裕貞(1908-1937)

소설가. 강원도 춘천에서 출생하였으며,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중퇴하였다. 1933년 이효석·현진건·이 상·이무영 등과 종래의 카프 문학에 대항하여 순수 문예운동을 표방하는 '구인회'를 조직하였다. 193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나기>, 중외일보에 <노다지>가 당선되면서 문단에 등장하였다. 도시 서민층의 생활을 풍자적으로 그리고, 농촌의 토속적인 인간상을 형상화하여 우리 나라 단편 소설의 새 경지를 개척하였다. 단편 소설로 <금따는 콩밭> <산골 나그네> <동백꽃> 등이 있다.

김 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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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堉(1580-1658)

조선의 학자·정치가. 실사구시의 선구자로 자는 백후, 호는 잠곡, 본관은 청풍이다.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동지사로 청에 다녀왔다. 소현 세자가 선양에 인질로 잡혀갔을 때 보양관으로 따라갔다 온 뒤 우부빈객이 되었다. 1650년, 대동법 실시 문제로 김 집과 논쟁을 벌이다가 퇴직하였다. 그 후 효종 때 다시 영의정이 되었으며, 충청도 관찰사로 있을 때 공물법을 폐지하고 그 대신 곡물과 천으로 세금을 내는 대동법을 실시할 것을 주장하다가 실패했다. 그러나 마침내 1651년 충청도에, 6년 뒤에는 전라도 연안 지방에 실시하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한흥일이 구해온 서양의 새로운 달력을 보고 우리나라의 구식 달력을 개정하자고 건의하여 1653년부터는 '시헌력'이라는 새 달력을 시행하였다. 교통수단에 있어서는 수레를 만들어 그때까지 말로 운반하던 불편을 없애고 논에 물을 대는 데도 수차의 사용을 주장하여, 1644년 황해도와 평안도에 실시하게 하였다. 한편, 1651년 상평통보를 만들 것을 건의하여 서울 서북 지방에서 쓰게 하였다. 그의 이러한 경제학은 후에 유형원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저서로 <황명기략> <송도지> <팔현전> <국조명신론> 등이 있다.

김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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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允經(1894-1969)

국어학자. 호는 한결, 경기도 광주 출생으로 연희전문학교 문과와 일본 릿쿄 대학 사학부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 배화여고와 정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된 후 광복될 때까지 옥살이를 하였다. 광복 후 조선어학회 상무 이사가 되었으며, 연희전문학교 교수를 거쳐 한양대학교 문리과 대학장으로 있었다. 1963년, 문화 훈장을 받았으며 평생을 한글 연구와 후배 양성에 바쳤다. 저서에 <조선 문자 및 어학사> <나라 말본> <용비어천가 강의> 등이 있다.

김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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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允植(1835-1922) 조선의 정치가·학자. 자는 순경, 호는 운양, 본관은 청풍이다.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한 후 황해도 암행어사가 되었다. 1881년, 영선사로서 청에 갈 때 60여 명의 젊은이들을 데리고 가서 신식 무기와 과학 기계의 제조법을 배우게 하였다. 또한 어윤중과 함께 이홍장을 만나 한미 수호 조약 체결을 토의했다. 이듬해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청의 군대를 요청하여 난을 가라앉히고, 강화에 진무영을 설치하여 신식 군대 8백여 명을 길러냈다. 189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김옥균 일파를 제거하여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이듬해 러시아와 수호 통상 조약을 맺어 거문도 사건을 처리하였다. 1887년, 민비의 친러 정책에 반대하여 민영익과 함께 대원군의 집권을 모의하여 유배되었다. 1894년, 김홍집 내각의 외무대신이 되어 개혁정치에 힘쓰다가, 1896년 아관파천과 함께 친러파 내각이 성립되자, 민비의 시해 음모를 사전에 알고도 방관했다는 탄핵을 받아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1907년 특사로 풀려났다. 경술국치에 협력한 공으로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의 칭호를 받았으나, 3·1운동이 일어나자 조선 독립 청원서를 일본 정부에 제출하여 작위를 박탈당하였다. 당시의 손꼽히는 문장가로 청아하고 고귀한 멋을 풍기는 간결한 문장이 특색이다. 저서로 <운양집> <음청사> <속음청사> 등이 있다.

김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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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允植(1936- ) 평론가·국문학자. 서울 출생. 서울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62년 <현대문학>에 <문학사 방법론 서설(序說)> <역사와 비평>으로 추천을 받아 문단에 데뷔. 이후 <최재서론> <임화연구> <해외문학파고> <30년대 소설론의 양태> 등을 발표했다. 그의 비평활동은 1960년대 작가들의 문학사적 의의를 밝히는 일선비평적인 측면과 개화기 이후의 한국비평사를 다시 복원하는 학문적인 면을 다 같이 포함하고 있다. 현재 서울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저서로 <근대한국문학연구>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 <한국현대시론비판> <김윤식선집> 등이 있다.

김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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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應河(1580-1619)

조선의 무신. 자는 경의, 본관은 안동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동생 응해와 우애가 지극하여 향리에서 칭찬이 자자하였다. 25세 때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으며, 박승종이 호남 지방 관찰사로 내려갈 때 비장으로 따라가 근엄하게 행동하였다. 광해군 때 명의 건주위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우리나라에 군사를 청하였다. 이에 김응하는 강홍립의 부하로 명나라 장군 유정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건주위 정벌에 나섰다. 유정이 패하여 자살하자 김응하는 부하 3천을 거느리고 적의 군사 6만과 대치하여 고군분투하다가, 별안간 태풍이 일어나 모래 속에 휩싸이게 되자 군사들이 흩어졌다. 그는 홀로 싸우다가 적병에게 포위되어 전사하였다. 명 황제가 요동백을 봉하고 처자에게 백금을 내려주었으며, 우리 조정에서도 영의정으로 추증하였다.

김응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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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應煥(1742-1789)

조선의 화가. 자는 영수, 호는 복헌, 본관은 개성이다. 화원으로서 상의별제를 지냈다. 1788년, 정조의 명으로 금강산을 구경한 후 그림을 그리고 돌아왔다. 이듬해, 어명을 받고 지도를 만들 목적으로 몰래 일본에 건너가려 하다가 부산에서 병사하였다. 이 때 김홍도가 어린 나이로 수행하였는데, 장사를 치른 후 혼자 쓰시마 섬에 가서 지도를 그려 왕에게 바쳤다. 작품으로 <칠보대>가 있다.

김인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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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仁謙(1707-?)

조선의 문인. 영조 때에 진사로 사신 조 엄을 따라 일본에 다녀온 후, 그 기행을 율문시로 쓴 <일동장유가>를 지었다. 이 기행 가사는 한국 문학사상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김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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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仁問(629-694)

신라의 장군·외교가. 자는 인수이며 태종 무열왕의 둘째 아들이다. 진덕 여왕 때에 왕명을 받고 당에 가서 좌령군위장군이 되어서 돌아와 장산성을 쌓고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백제의 거듭되는 공격으로 위급해지자, 다시 당에 가서 나·당 연합군을 조직하는 데 성공하였다. 660년 소정방·김춘추와 함께 백제를 멸망시키고 각간이 되어 당에 머물렀다. 668년 귀국하여 당의 군사와 함께 고구려를 쳐서 정복하였다. 그 후 당에 머물면서 양국의 국교를 조절하다가 그곳에서 병사하였다. 그는 유학의 대가로 이름을 떨쳤으며 음악과 글씨에도 능하였다.

김인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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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麟厚(1510-1560)

조선의 문신·학자. 자는 후지, 호는 하서, 본관은 울산이다. 김안국의 제자로 성균관에 들어가 이 황과 함께 학문을 닦았다.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에 등용되었다. 명종이 즉위하고,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이유로 장성에 돌아가 성리학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 황의 이기 일물설에 반대하였으며, 이기는 혼합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에 정통하였다. 저서에 <하서집> <주역관상편> 등이 있다.

김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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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一鏡(1662-1724)

조선의 문신. 자는 인감, 호는 야계, 본관은 광산이다. 1702년 과거에 급제하여 세자 시강원 문학·지평을 역임하였다. 숙종 때, 소론으로서 동부 승지가 되었으나 집권층인 노론에 의해 부사과로 전직하였다. 1720년 소론이 뒷받침하던 경종이 즉위하자 동부 승지가 되었다. 이듬해 노론 정권은 집권 연장을 위해 연잉군(후에 영조)을 세제로 책봉하게 한 뒤 경종의 병약함을 이유로 대리청정을 실시하려 하자, 이조참판으로서 소론의 영수 조태구 등과 함께 이를 반대하여 대리청정을 취소하게 하였다. 또 이진유·윤성시 등과 함께 노론 4대신을 탄핵하여 귀양가게 한 다음, 소론 정권을 수립하였다. 1722년 환관 박상검·문유도 등을 시켜 왕세제를 죽이려다 발각되자 이들을 죽여 증거를 없앴다. 그는 또 노론이던 목호룡을 매수하여 목호룡 자신이 백 망·정인중 등과 모의하여 경종을 시해하려 했다고 거짓으로 꾸며 일러바치게 했다. 이로써 신임사화가 일어나 유배중이던 노론의 4대신이 죽음을 당했으며, 수백명이 살해·추방되었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노론의 재집권으로 유배되었다가 신임사화가 거짓으로 꾸민 것이 드러나 왕의 심문을 받고 참형당하였다.

김일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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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馹孫(1464-1498)

조선의 학자. 자는 계운, 호는 탁영, 본관은 김해이다. 김종직의 제자로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춘추관 기사관이 되어 <성종실록>의 사초(史草)를 썼다. 연산군 때에 훈구파의 이극돈이 사국당상관이 되었는데, 김일손이 쓴 사초 속에 세조의 왕위 찬탈을 풍자한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연산군에게 고하여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김일손과 김종직을 비롯한 영남학파의 여러 학자들이 처형을 당하였다. 중종 때 도승지에 추증되었으며, 저서에 <탁영집>이 있다.

김자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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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慈璟(1919- )

여류 성악가. 경기 개성 출생. 1935년 원산 누씨고등여학교를 거쳐 1940년 이화여전 음악과를 졸업하고, 이화여고에서 교편을 잡았다. 1941년 서울 부민관에서 제1회 독창회를 개최하고, 한국 최초로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상연하였다. 이화여전 음악과 교수로 있던 중 미국의 줄리어드 음악학교에서 연구를 하고, 1950년 뉴욕 카네기 홀에서 독창회를 열었다. 귀국하여 다시 이화여대 음악과 교수가 되었고, 수차례 독창회를 열었다. 한·이 협회 부회장 겸 감사·이화여대 성악과장·음악협회 감사를 역임하고, 김자경 오페라단을 창립, 단장이 되었다.

김자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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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自點(?-1651)

조선의 정치가. 자는 성지, 호는 낙서, 본관은 안동이다. 문벌에 의해 등용되어 병조좌랑이 되었으나, 광해군 때 대북파에 의해 쫓겨났다. 1622년 이 귀·김 유·최명길·이 괄 등과 함께 광해군을 축출하고 인조를 추대하였다(인조반정). 그 공으로 1등 정사공신이 되어 도원수가 되었으나, 병자호란 때 토산 싸움에서 참패한 죄로 벼슬을 빼앗겼다. 1640년 인조의 딸 효명 옹주를 손자며느리로 맞게 되자 다시 세력을 잡고 사은사로 청에 다녀왔다. 1646년 소현 세자빈 강씨를 모함하여 죽이고 강씨의 세 아들을 제주도로 귀양보냈다. 그러나 1649년 즉위한 효종에게 파면당하자 앙심을 품고 조선이 북벌을 계획하고 있다고 청에 밀고함으로써 청은 이 사실을 확인하려 하였다. 이에 효종의 기민한 수습으로 잘 무마되고 김자점은 유배되었다가 처형되었다.

김장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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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長生(1548-1631)

조선의 학자. 자는 희원, 호는 사계, 본관은 광산이다. 처음에 송익필에게 예학을 배우고 후에 이 이에게 성리학을 배워 예학파 유학의 거두가 되었다. 선조 때 벼슬길에 올라 참봉·현감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호조정랑으로 명의 군량미 조달에 공을 세웠으며, 정묘호란 때 양호호소사로 군량미를 조달하는 데 힘쓰면서 청과의 화의에 반대하였다. 이듬해 형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후배들을 가르치는 데 힘써 송시열·송준길 등의 유학자를 배출하여 서인을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를 이룩하였다. 저서에 <경서판의> <가례집람> <송강행록> 등이 있다.

김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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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在魯(1682-1759)

조선의 정치가. 자는 중례, 호는 청사, 본관은 청풍이다.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수찬 등을 지냈다. 1716년 옛 선비들에게 없는 죄를 거짓으로 꾸며 벌을 주었던 소론의 유봉휘·정 식 등을 탄핵하여 파직하게 하였다. 경종 때 이조참의·대사간·개성부 유수 등을 지냈으나, 신임사화 때에 귀양을 갔었다. 영조 때 풀려나와 대사간이 되어 소론의 과격파 김일경을 사형시키게 하였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재등장하자 파직되었다가 이듬해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다시 충주 목사로 기용되어 난을 수습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 후 지춘추관사로서 실록도청 당상을 겸직하면서 <경종수정실록>을 편찬하는 데 참여했고 신임사화로 죽은 김창집·이이명의 억울함을 풀어주었다. 1738년, 판중추부사로 청에 가서 <명사(明史)>를 얻어왔다. 1740년 영의정에 올랐고, 관직 생활의 절반은 모두 대신으로 있으면서 노론의 선봉자로 활약했다. 저서로 <천의소감> <난여> 등이 있다.

김재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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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載瓚(1746-1827)

조선의 정치가. 자는 국보, 호는 해석, 본관은 연안이다. 영조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순조 때 영의정에 이르렀다. 홍경래의 난 때는 흉흉한 민심을 수습하고 이를 평정하여 기근과 병란으로 인한 혼란된 세태를 안정시켰다. 저서에 <해석일록> <해석집> 등이 있다.

김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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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淨(1486-1520)

조선의 정치가. 자는 원충, 호는 충암, 본관은 경주이다. 중종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순창군수가 되었다. 조광조와 함께 미신 타파와 시골에서 서로 돕고 살도록 하기 위해 향약을 시행하도록 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와 함께 제주도로 유배되어 사약을 받고 죽었다. 저서에 <충암전집> <제주풍토기> 등이 있다.

김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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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正國(1485-1541)

조선의 유학자. 자는 국필, 호는 사재, 본관은 의성이다.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관찰사에 이르렀으나,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벼슬에서 물러나 고양의 망동에서 팔여거사라 칭하고 강론과 저술에 열중하였다. 1537년 다시 벼슬에 올라 경상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시문이 당대에 뛰어났으며, 죽은 후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저서에 <성리대전 절요> <사재집> 등이 있다.

김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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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廷漢(1909-1996)

소설가. 부산 출생. 동래고보를 거쳐, 1932년 일본 와세다 대학 부속 제일고등학원 수학. 1936년 단편 <사하촌>이 조선일보에 당선됨으로써 문단에 등장. 이때부터 <옥심이>(1936), <향유기>(1938), <그러한 남편>(1938), <기로>(1938), <월광한>(1940), <낙일홍>(1940), <추산당과 곁사람들>(1940), <묵은 자장가>(1941) 등의 단편 소설을 발표하였다. 이후 1960년대 후기에 와서야 오랜 침묵을 깨고, 낙동강변에 사는 가난한 어촌민의 생활과 수난을 생생하게 그린 중편 <모래톱 이야기>를 발표함으로써 문단의 큰 주목을 받았다. 1969년 단편 <수라도>로 한국문학상을 수상하였다. 부산대학교 교수·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을 역임하였다. 단편집 <낙일홍>과 <인간단지>(1971)가 있다.

김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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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正浩(?-1864)

조선의 지리학자. 자는 백원, 호는 고산자, 본관은 청도이다. 황해도에서 출생하였으며 정밀한 지도의 작성에 뜻을 품고 전국 각지를 두루 돌아다니며 30여 년간의 노력 끝에 <청구도> 2첩을 완성하였다. 그 후 <청구도>에 불만을 느끼고 다시 전국 각지를 답사하여 <대동여지도> 2첩을 완성하였다. 이어 <여지승람>의 잘못을 고치고 보충하기 위하여 32권 15책의 <대동지지>를 썼으며 <지구도>도 만들어 냈다. 그가 <대동여지도>를 손수 그려 목판으로 만들어 흥선 대원군에게 바치자, 그 정밀함에 놀란 대원군은 나라의 기밀을 퍼뜨렸다는 죄목으로 목판 지도를 불태우고는 감옥에 가두었다. 그 후 심한 고문을 받고 죽었다.

김정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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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貞欽(1927- )

물리학자. 평안북도 용천 출생. 서울대학교 문리대 물리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61년 미국 로체스터 대학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고, 고려대학교 강사를 거쳐 교수가 되었다 1972년 천문학회 감사, 1973년 물리학회 이사, 1978년 이론 물리 및 화학 연구회 부회장이 되고, 1982년 과학 저술인협회 회장에 취임하였다. 저서에 <자연과학 개론> 등이 있다.

김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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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正喜(1786-1856)

조선의 문신·서예가·금석학자. 자는 원춘, 호는 완당·추사, 본관은 경주이다. 순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규장각 대교를 지냈으며 충청우도 암행어사를 거쳐 이조판서에까지 올랐다. 24세 때,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청의 베이징으로 가서 그곳의 대학자인 옹방강·완 원으로부터 재능을 크게 인정받았다. 한편, 금석학과 서예·도서·시문·묵화에서 독창적이며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금석학이란 쇠붙이나 돌에 새겨진 글을 연구하여 역사적인 사실을 밝혀 내는 학문으로서, 김정희가 남긴 금석학의 가장 큰 업적은 1816년 당시까지 '무학 대사의 비'라고 알려져 있던 북한산 비석을 '진흥왕 순수비'라고 밝힌 것이다. 순수비를 밝혀낸 과정과 그 사실적인 증명은 그가 저술한 <금석과안록>에 기록되어 있으며, 그의 학문 태도를 밝힌 글로서 유명한 <실사구시설>은 과학적이며 객관적인 방법으로 진리를 탐구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는 중국의 소 식·구양 순 등의 글씨를 연구하여 독특한 추사체를 이룩하였으며, 난초·대나무·산수화 등도 잘 그렸다. 저서로는 <금석과안록> <완당집> 등이 있으며, 그림으로 <묵죽도> <묵란도> 등이 있다.

김제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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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悌男(1562-1613)

조선의 문신. 자는 공언, 본관은 연안이며 선조의 장인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연천 현감을 거쳐 이조좌랑으로 있을 때, 그의 딸이 선조의 계비(인목 대비)가 됨으로써 연흥 부원군이 되었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후, 인목 대비가 낳은 영창 대군을 왕위에 올리려 한다는 이이첨 등의 모함으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의 아들 셋도 화를 입었고, 부인과 어린 아들 천석만이 화를 면하여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인조반정 후 관작이 복구되고 왕명으로 사당이 세워졌다.

김조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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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祖淳(1765-1831)

조선의 문신. 자는 사원, 호는 풍고, 본관은 안동이다. 정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제학에 이르렀다. 순조의 장인이 되어 영안 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안동 김씨 세도 정치의 기초를 마련했다. 후에 세자 교육의 책임을 맡았으며, 정순 대비의 명으로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30여 년 간이나 어린 순조를 보좌하여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천성이 어질고 너그러운 탓으로 그의 소실인 기생 나합의 손아귀에 국가가 농락되는 등의 폐단이 있었으며, 그의 집권으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어 한 나라의 정치가 일가의 부귀영화에 이용되어 이후 국정은 몹시 어지러워졌다.

김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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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宗瑞(1390-1453)

조선의 무신. 자는 국경, 호는 절재, 본관은 순천이다.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우정언·함길도 관찰사가 되어 야인들의 변경 침입을 물리쳤으며, 6진을 설치하여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1435년, 함길도 병마도절제사를 겸직하여 야인의 정세를 보고하여 그 비변책을 건의했으며, 예조판서를 거쳐 우참찬이 되었다. 1449년, <고려사>가 공정치 못하다고 하여 왕명으로 고쳐 편찬하게 되자, 지춘추관사로 총책임을 맡아 간행하였다. 12세의 단종이 즉위하자, 황보 인·정 본 등과 함께 어린 왕을 보필하였다. 여러 재상 가운데 '대호'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신하였다. 1453년, 왕위를 노리던 수양 대군에 의해 두 아들과 함께 대역 모반죄로 죽음을 당함으로써 계유정난의 제1차 희생자가 되었다. 영조 때에 벼슬이 다시 주어졌으며, 저서로 <제승방략>이 있다.

김종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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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宗直(1431-1492)

조선의 성리학자. 자는 계온, 호는 점필재, 본관은 선산이다. 밀양에서 출생하였으며,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성종 때에 경연관·이조참판·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영남학파의 거두로서 많은 제자를 길러 냈으며, 성종의 각별한 총애를 받아 제자들을 관직에 등용시킴으로써 훈구파와 심한 대립을 일으켰다. 그는 일찍이 <조의제문>을 지었는데, 그가 죽은 후인 연산군 4년에 제자 김일손이 사관으로 있으면서 이것을 사초에 적어 넣은 것이 원인이 되어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부관참시(관을 부수어 시체의 목을 벰)를 당하고 많은 문집이 소각되었으며, 그의 제자들이 모두 참화를 당하였다. 총재관으로서 <동국여지승람> 55권을 증수하였고 서화에도 뛰어났다. 저서에 <점필재집> <청구풍아> <유두유록> 등이 있다.

김종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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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鍾泌(1926- ) 군인·정치가. 충남 부여 출생. 제 6, 7, 8, 9, 10, 13, 14, 15대 국회의원, 11·12대 국무총리. 현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총재. 1947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부 2년을 수료하고 1948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1961년 5·16 군사정변의 중심인물로 초대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하여 활약하였으며, 공화당내분으로 정계를 은퇴하였다. 1971년 공화당 부총재직을 맡고 제8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같은 해 6월 국무총리에 취임함으로써 정계에 복귀하였다. 1990년 3당합당을 하여 민자당 대표최고의원으로 활동하다가 1995년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을 창당, 총재가 되었다.

김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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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佐明(1616-1671)

조선의 문신. 자는 일정, 호는 귀천, 본관은 청풍이다.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과 병조판서를 지냈다. 아버지 김 육의 건의에 따라 효종이 호남 연해와 산골까지 대동법을 실시하려 하자 자진하여 그 책임자로 나섰고, 현종 때 군율을 바로잡아서 수어사를 겸하게 되었다. 여러 관직을 겸임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한 끝에 병을 얻어 죽었다. 저서에 <영상 김 육의 비> <사계 김장생의 비> 등이 있다.

김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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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佐鎭(1889-1930)

독립운동가·장군. 호는 백야, 본관은 안동이며 홍성에서 출생하였다. 15세 때 집안의 종들을 모두 해방시키고 토지를 소작인들에게 나누어주는 등 근대화에 앞장섰으며 호명학교를 설립하였다. 을사조약 체결 후, 기호학회·청년 학우회 등의 간부를 지내고 대한 광복단에 가입하여 독립운동 자금 모집을 위해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3년 간 복역하였다. 1917년 만주로 망명하여 서 일 등과 군정부를 조직하고 이를 북로군정서로 개편하여 총사령관에 취임하였다. 1920년 북로군정서의 군대를 동원하여 청산리 전투를 총지휘하여 일본군 제19, 21사단을 상대로 격전을 벌여 독립운동사상 최대의 전과를 올렸다. 그 후 일본의 보복 작전을 피하여, 1921년 군사들을 이끌고 소련의 자유시로 건너가 군관학교를 세우고 훈련하다가 소련군과 충돌하여 다시 북만주로 건너왔다. 1929년 '한족 연합회'를 결성하여 주석이 되고 항일 투쟁과 동포의 단결에 힘쓰다가 부하였던 공산 청년회의 김일성·박상실 등에게 암살당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김주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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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朱烈(1943-1960)

4·19 혁명 학생. 전북 남원에서 태어났다. 남원 금지중학을 졸업하고 1960년 마산 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해 마산에서 3·15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데모에 나섰다가 행방불명되었다. 약 한 달 후에 머리에 최루탄이 박힌 시체로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다. 이 참사가 경찰의 소행임이 밝혀지자, 정부에 대한 학생들의 분노가 폭발하여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김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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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周榮(1939- )

소설가. 경북 청송 출생. 서라벌예대 졸업. 1971년 <월간문학>에 <휴면기>가 당선되어 등단. 주요 작품으로 <머저리에게 축배를> <도둑 견습> <천둥 소리> <목마 위의 여자> <과외 수업> <천궁의 칼> <붉은 노을> <객주> <외촌장 기행> <겨울생> 등이 있다. 그는 평범한 삶을 민족사의 비극과 관련시켜 보여 주며, 경험된 자기 세계에 대한 동경과 애정을 갖고 집착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김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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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重業(1922-1988)

건축가. 호는 오심이고 평양에서 태어났다. 평양고등보통학교와 일본 요코하마 고등공업학교를 마치고, 도쿄 마쓰다 히라다 설계사무소에 근무하였다. 서울공대 조교수를 지냈고, 1952년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주최 제1회 국제 예술가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다. 프랑스의 파리시 '르 콜뷔제' 건축연구소에서 도시 계획을 연구하며 다수의 작품을 내었다. 1956년 귀국하여 김중업 건축연구소를 열고, 중앙공보관에서 김중업 작품전을 개최하였다. 1959년 미국으로 가 원자력 시설을 시찰했고, 건설 기술자 심사위원·국전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1962년 서울시 문화상, 1965년 프랑스 국가 공로 훈장을 받았다. 작품으로는 헬싱키 교외에 있는 <밀바의 집>, 국회의사당, 88올림픽 상징 조형물, 건국대 도서관, 서강대 본관, 경주 국립 공원 등이 있다.

김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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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芝河(1941- ) 시인. 전남 목포 출생. 본명은 영일(英一)이며 지하(芝河)는 필명. 원주중학교, 중동고등학교 졸업하고 서울대 미술대에 다니던 중 4·19의거에 가담하였다. 1969년 <시인>지(誌)에 <서울길>로 등단하고, <사상계>에 특권층의 권력형 부정과 부패상을 판소리 가락으로 통렬하게 비판한 담시 <오적>(1970)을 발표하여 반공법 위반 혐의로 체포·투옥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의 필명이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인혁당사건과 민청학련사건 혐의를 받고 1974년 내란선동죄 등의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같은 해 7월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고, <김지하 시집>(1974)이 일본에서 간행되었다. 작품으로 희곡 <나폴레옹 꼬냑>(1970) 등과 평론 <풍자냐 자살이냐>(1970), <민족의 노래 민중의 노래>(1970), 시집으로 <향토>(1970), <타는 목마름으로>(1982), 대설 <남(南)>(1982), <애린>(1986), <이 가문 날에 비구름>(1988), <볕밭을 우러르며>(1989) 등과 산문집 <남녘땅 뱃노래>(1985), 수상록 <살림>(1987) 등이 있다. 1975년 로터스상 특별상을 수상하고 노벨문학상 평화상 후보로 추천되었으며, 1981년에는 세계시인대회가 주는 '위대한 시인상'과 '크라이스키 인권상'을 수상했다.

김진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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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晋燮(1903-?)

수필가·독문학자. 경북 안동 출생. 일본 호세이대학 독문과 졸업. 1927년 해외문학 연구회 동인, 1931년 극예술 연구회 동인으로 활약했으며, 해방 뒤 서울대학·성균관대학 교수를 역임했다. 수필가로서 독특한 경지를 개척하여 수필문학에 크게 이바지했으며,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수필집에 <인생 예찬> <생활인의 철학> 등이 있다.

김 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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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質(1496-1561)

조선의 학자. 자는 문소, 호는 영모당, 본관은 안동이다. 부모를 지성으로 모시어서 사람들이 그의 효도에 감동하였다. 그가 죽은 뒤 고향에 효자 정문을 세워 그의 효성을 기념하였다. 저서로 <영모록> <육서자책설> 등이 있다.

김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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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集(1574-1656)

조선의 문신. 자는 사강, 호는 신독재, 본관은 광산이다. 18세 때 진사에 급제하여 재랑에 이르렀으나,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를 보고 연산으로 돌아가 은거하였다. 인조반정 후에 부여 현감을 거쳐 임피 현령으로 있다가 벼슬을 내놓았다. 효종 즉위 후, 이조판서로 부르자 3번이나 사양해도 허락하지 않자 감격하여 받아들였다. 영의정 김자점이 파면되자, 효종과 함께 북벌을 계획하였다. 이때 김자점이 청에 밀고함에 따라 청의 군사가 압록강까지 몰려와 나라가 어수선해지자 관직을 사임하였다. 학문이 깊어 우수한 제자들을 많이 배출했으며 글씨에도 능하였다. 저서로 <신독재 유고>가 있다.

김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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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昌淑(1879-1962)

유학자·독립운동가. 자는 문우, 호는 심산, 본관은 문소이다. 경북 성주에서 출생하였으며 일찍이 유학을 배워 조예가 깊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스승인 이승희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 매국 5적의 처형을 상소하였다. 1909년 매국 5적이 한일합방을 주장하자, 이에 반대하는 성토문을 각 신문사에 보냈으며, 이로 인하여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하였다. 출옥 후 개인의 재산을 털어 성명학교를 세웠으며, 3·1운동이 일어나자 해외로 망명하여 한국 유학자들이 독립을 호소한 '유림단 진정서'를 갖고 상하이로 건너가 파리 만국 평화 회의에 보내는 한편, 중국·일본 및 구미 주요 기관에도 보냈다. 그 해,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 되었으며, 이듬해 귀국하여 독립 자금을 모금하던 중 체포되었으나 풀려나와 중국으로 건너갔다. 거기서 신채호 등과 독립 기관지 <천고>를 발행하고, 이어 박은식과 함께 <사민일보>를 발간하여 교포들의 독립 정신을 고취시키는 한편, 서로군정서를 조직하여 독립 자금을 마련하였다. 광복이 되자 민주의원 의원을 지냈으며, 성균관대학교를 창립하여 학장에 취임하였다. 6·25전쟁 때 자유당 독재에 반대하여 이시영·김성수·조병옥 등과 함께 투쟁을 하였다. 82세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김창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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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昌業(1658-1722)

조선의 화가·학자. 자는 대유, 호는 노가재, 본관은 안동이다. 영의정 김수항의 아들이며 진사에 급제하여 교관을 지냈다. 시문과 그림에 뛰어났다. 화양 서원에 있는 송시열의 화상은 그가 그린 것을 화공이 그대로 베낀 것이다. 숙종 때 형인 김창협과 베이징에 다녀와서 기행문 <연행록>을 썼다. 저서로 <노가재집>이 있다.

김창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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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昌集(1648-1722)

조선의 정치가. 노론의 4대신 중의 한 사람. 자는 여성, 호는 몽와, 본관은 안동이다. 영의정 김수항의 아들이며 김창협의 형이다.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참의에 이르렀으나, 아버지 김수항이 기사환국 때 진도에 유배되어 사약을 받고 죽자, 벼슬을 내놓고 산중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1694년 정국이 바뀌자 영의정에 올랐으며 경종이 즉위하였으나 왕이 병약하고 후사가 없다는 이유로 노론의 대신들과 협의하여 왕세제(후의 영조)의 책봉을 상소하여 이를 실행하게 하였다. 1721년,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상소하여 시행하게 하였으나, 조태억 등의 반대로 취소되자 벼슬에서 물러났다. 이어 김일경 등이 반역을 꾀한다고 고발함으로써 신임사화가 일어나 거제도로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고 죽었다. 영조 때 관작이 복구되었다. 저서에 <국조 자경편> <몽화집> 등이 있다.

김창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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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昌協(1651-1708)

조선의 학자. 자는 화중, 호는 농암, 본관은 안동이다. 영의정 김수항의 아들이다. 현종 때 진사에 급제하였으며 숙종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대사성·청풍 부사에 이르렀다. 기사환국으로 아버지 김수항이 사약을 받고 죽자 벼슬을 내놓고 산중에 들어가서 살았다. 아버지의 억울한 죄명이 풀리자, 대제학·예조판서 등으로 여러 차례 불렸으나 끝내 사양하였다. 저서로 <농암집> <사단칠정변> 등이 있다.

김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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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千鎰(1537-1593)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자는 사중, 호는 건재, 본관은 언양이다. 임진왜란 때에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수원 행산고성을 거쳐 강화성으로 들어갔다. 이듬해 명의 이여송 군대가 개성으로 오고 있을 때, 이들에게 지형과 적의 형편 등을 알리어 작전을 도왔다. 왜군이 남으로 후퇴하기 시작하자, 이를 추격하여 진주성에 주둔하였다. 그 후 왜군이 대군을 이끌고 성벽을 넘어 들이닥쳤으나, 아군은 화살이 떨어지고 창검이 부러져 대나무 창으로 맞서 싸우다가 마침내 성이 함락되었다. 이에 그의 아들 상건과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자살하였다. 저서로 <송천집> <건재유집> 등이 있다.

김천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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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天澤

조선 영조 때의 가인. 자는 백함, 호는 남파이며 숙종 때 포도청의 포교를 지냈다. 시조를 잘 지어 57수를 남겼다. 김수장과 더불어 평민 출신의 가객으로 시조의 정리·발달에 이바지하였다. 그가 편찬한 시가집 <청구영언>은 국문학상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귀중한 책이다.

김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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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春洙(1922- )

시인. 경남 충무 출생. 니혼대학 예술과를 중퇴한 뒤, 경북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다. 1946년 시 <애가>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광복 후 종래의 서정적인 바탕 위에 주지적인 시풍을 이루는 데 힘썼다. 한국 시인협회상, 자유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시집으로 <구름과 장미>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등이 있다.

김춘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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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春澤(1670-1717)

조선의 문인. 자는 백우, 호는 북헌, 본관은 광산이다. 숙종 때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제거되자, 집안이 큰 화를 입었다. 1694년 갑술옥사로 남인이 실각하자 풀려났으나 서인이 다시 노론·소론으로 나누어지자 노론에 속하였다. 그는 소론의 탄핵으로 부안에 유배되었으며, 유배중 세자(후의 경종)를 살해하려 한다는 모함을 받고 제주도로 귀양갔다. 글씨도 잘 썼을 뿐만 아니라 시에 대한 재주가 뛰어나서 명성이 높았으며, 할아버지 김만중이 지은 소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저서로 <북헌집>과 글씨 <호판 김진귀 표>가 있다.

김취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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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就礪(?-1234)

고려의 장군. 본관은 언양이며 동궁위를 거쳐 장군이 되었다. 고종 때 거란의 왕자가 몽고군에게 쫓겨 쳐들어온 것을 무찌르고 상장군이 되었다. 1218년, 전군 병마사가 되어 충청도 제천까지 침입한 거란군을 격퇴하였으며, 이듬해 강동성을 근거로 하여 저항하는 거란군을 몽고·동진의 군사와 함께 연합하여 무찔렀다. 또, 그 해 한 순·다지 등이 의주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평정하여 판병부사 시중이 되었다. 용맹스러울 뿐 아니라 성품이 곧고 깨끗하여 부하를 골고루 아끼었으며, 싸움에서는 뛰어난 지략으로 큰 공을 세웠다.

김치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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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致陽(?-1009)

고려 때의 권신. 본관은 동주이며 목종의 어머니 헌애 왕후 황보씨의 외가 친척이다. 성격이 간교하여 승려로 가장하고 헌애 왕후가 사는 천추궁을 드나들며 추문을 만들었다. 목종이 즉위하자, 천추 태후(헌애 왕후)가 불러들여 우복야 겸 삼사사의 벼슬을 주었다. 그는 태후와의 사이에 낳은 아들을 왕으로 세우려고 대량군 순(후의 현종)을 죽이려다가 실패했고, 다시 유일한 혈통인 목종을 해하려 하다 실패했다. 강 조의 정변으로 현종이 즉위하자 김치양은 그의 아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김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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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泰吉(1920- )

수필가·철학자. 호 우송(友松). 충북 중원 출생. 서울대 철학과 및 미국 존스홉킨스대 대학원 졸업. 1955년 <사상계>에 수필 <화단(花壇)>을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데뷔했다. 이어 <나비> <삼남삼녀> 등을 발표했고, 첫번째 수필집 <웃는 갈대>를 간행, 이후 학술논문과 수필들을 다수 발표했다. 수필집으로 <빛이 그리운 생각들> <검은 마음 흰 마음> <멋없는 세상 멋있는 사람> 등이 있고, 저서에 <우리의 현실과 서구사상> <이조소설에 나타난 한국인의 가치관> 등이 있다.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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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台鉉(1261-1330)

고려의 학자. 자는 불기, 본관은 광산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학문에 힘쓰다, 충렬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우승지를 지냈다. 밀직부사로 원에 갔을 때, 원 황제가 간쑤성에 가 있으면서 \"진공사는 모두 베이징에 머물라"고 하자 "황제가 있는 간쑤성에 가는 것이 우리 왕의 명령이니 어길 수 없다" 하며 간쑤성에 가서 황제를 만났다. 이에 원 황제가 그의 충성심에 탄복하여 낭중이라는 벼슬을 내렸다. 귀국 후 벼슬이 중찬에 이르렀다. 저서로 <동국문감>이 있다.

김통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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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通精(?-1273)

고려의 장군. 1271년, 삼별초의 난 때 배중손과 함께 원과 연합한 고려군에게 진도에서 패하자, 나머지 군사를 이끌고 제주도로 가서 연안을 지배하였다. 조정에서는 수십 차례 사람을 보내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가는 사람마다 대개는 살해되었으므로, 결국 원에 군사를 요청해서 고려의 김방경과 함께 제주도를 정복하였는데, 이때 그는 자살하였다.

김헌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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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憲昌(?-822)

신라의 반신. 원성왕의 후손으로 애장왕 때 시중에 올랐다가 무진주·청주 도독을 지냈다. 헌덕왕 때 웅천주 도독이 되었으나 아버지 김주원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데 원한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한때 무진주·완산주·금관경 등을 장악하여 장안국이라 칭하고 왕이 되었다. 그 후 신라 관군에게 패하자 웅천주에서 자살하였다. 그 후 825년 그의 아들 김범문이 다시 난을 일으키다 잡혀 죽임을 당하였다.

김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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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現 신라 호원사를 지은 설화적인 인물. 원성왕 때, 복을 빌기 위하여 홍륜사에 간 그는 탑 주위를 돌다가 뒤따르는 처녀와 정을 나누고 그녀가 사는 곳으로 갔는데, 그녀가 갑자기 호랑이로 변했다. 이 처녀 호랑이는 죄를 많이 지어서 하늘로부터 벌을 받아 죽게 된 몸이라, 이왕이면 김 현에게 공을 세우고 죽기를 청하며 그에게 한 가지 꾀를 일러 주었다. 어느 날, 성 안에 사나운 호랑이가 나타나서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자, 왕은 호랑이를 잡아오는 자에게 상금과 벼슬을 내린다고 하였다. 김 현은 호랑이를 잡아오겠다고 자원하여 호랑이를 추격하였다. 그러자 호랑이는 다시 처녀로 변하여 자기가 죽은 뒤 절을 세워 줄 것을 청하고는 죽음을 당하였다. 그리하여 김 현은 상금과 벼슬을 받았으며 호랑이의 청에 따라 절을 지어 그 넋을 위로하였는데, 호랑이가 원해서 지은 절이라 하여 '호원사'라 이름지었다.

김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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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炫(1942-1990) 문학평론가이자 불문학자. 본명은 김광남. 전남 진도 출생. 경복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불문학과와 동대학원에서 불문학을 전공. 1990년에 간암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서울대 불문과 교수를 역임했다. 1970년대의 대표적인 문학지였던 <문학과 지성>에 동인으로 참여하여 문학평론의 전문화를 이룬 대표적인 평론가이다. 대학 재학중인 1962년 <자유문학>에 평론 <나르시스트 시론>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불문학자로서 바슐라르, 사르트르, 프로이트, 푸코 등 프랑스 문학이론의 거장들을 국내에 소개했으며, <프랑스 비평사>(1982), <제네바학파 연구>(1986) 등을 통해 프랑스 문학이론을 정리하기도 했다. 국문학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연구해 김윤식과 함께 <한국문학사>(1973)를 공동집필하고, <한국문학의 위상>(1977)이라는 입문서를 발간하기도 했다.

김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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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顯承(1913-1975)

시인. 전남 광주에서 태어나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했다. 1934년경부터 시작을 계속하다가 해방 직전부터 침묵을 지켰고, 6·25전쟁 직후부터 다시 시작 활동을 전개하였다. 숭일중학교 교감, 조선대·숭전대 교수, 한국 문인협회 부이사장을 역임하였다. 감각적 언어망을 통한 참신한 서정으로 생의 예지를 추구한 시를 썼다. 제1회 전남문화상을 수상했다. 작품집 <김현승 시초>, 시로는 <견고한 고독> <옹호자의 노래> <절대 고독> 등이 있다.

김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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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亨錫(1920- )

수필가·철학자. 평남 대동 출생. 1943년 일본 조치대학 철학과 졸업. 수많은 철학적 수필을 발표하여 독자에게 큰 감명을 주었으며, 1959년 간행한 수필집 <고독이라는 병>은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였다. 그의 수필은 현대인의 삶의 지표를 제시하기 위해 기독교적 실존주의를 배경으로 현대의 인간 조건을 추구하여, 부드럽고 시적인 문장으로 엮어 독자에게 감명을 주고 있다. 수필집으로 <영원과 사랑의 대화> <오늘을 사는 지혜> <현대인과 그 과제> 등이 있다.

김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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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弘道(1745-?)

조선의 화가. 자는 사능, 호는 단원, 본관은 김해이다. 강세황의 천거로 도화서 화원이 되었다. 영조 때, 왕세손의 얼굴을 그려서 그의 놀라운 솜씨를 보였다. 그의 그림은 한국적인 풍취가 드러나고 서민적인 체취와 독창적인 신선한 조형미가 담겨 있다. 1781년 정조의 초상화가로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으며, 왕의 명령으로 금강산 풍경을 그렸다. 1789년 왕의 명령으로 김응환과 함께 일본으로 가던 도중, 부산에서 김응환이 죽자 혼자서 쓰시마섬에 가서 섬 지도를 그려서 바쳤다. 1795년 오륜행실도의 삽화와 판화를 그렸으며, 그 밖에도 여러 선비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그의 정교하고 호탕한 작품으로서 현재 남아 있는 그림들은 그가 20세 무렵에 그린 것들이다. 그의 성격은 부드러운 가운데 소탈하여 사람들은 그를 신선 같은 인물이라 불렀다. 그의 <투견도>는 서양화의 음영 기법을 사용하여 더욱 찬탄을 받고 있다. 작품으로 <선동취적도> <청앵도> <소림명월도> <신선도 병풍> <무동> 등이 있다.

김홍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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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弘集(1842-1896)

조선 말기의 정치가. 자는 경능, 호는 도원, 본관은 경주이다.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참의로서 수신사가 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1882년 한미·한영·한독 통상 조약 체결과 제물포 조약 체결에서 외교 수완을 발휘하여 경기도 관찰사로 승진되었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좌의정으로 전권대신이 되어 한성조약을 체결한 뒤 사임하고 한직에 머물러 있었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 일본의 침투가 표면화되자, 그 힘을 빌려 김홍집 내각을 조직하였다. 그는 총리대신이 되어 '홍범 14조'를 발표하는 등 새로운 국가 체계를 세우고 갑오경장의 과업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재정난과 박영효·서광범 등 극단적 친일파와의 대립으로 내각은 와해되고, 새로운 박정양 내각이 탄생했다. 박정양 내각이 새로 세력을 뻗기 시작한 구미 열강에 친근하려는 정책으로 기울어지자, 일본은 1895년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 황후를 죽인 후 김홍집 내각을 개편하였다. 일본의 압력으로 단발령 시행 등 과격한 개혁을 실시하였으나 전국에서 봉기한 의병에게 규탄을 받았고, 1896년 러시아의 세력이 증대하여 아관파천으로 친러파 내각이 조직됨으로써 김홍집 내각은 무너지고 많은 대신들이 피살되었으며, 그도 광화문에서 살해되었다. 저서로 <이정학재집>이 있다.

김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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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煥基(1913-1973)

화가. 전남 무안 출신으로 호는 수화이다. 1936년 니혼 대학 미술학부를 마치고 도쿄에서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해방 후 신사실파를 창설하고, 1952년 홍익대 미술학부 교수로 취임했다. 1956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에서 개인전을 열고, 1957년 파리·니스·브뤼셀 등에서 계속 개인전을 가졌다. 1959년 귀국하여 홍익대 교수·초대 예술원 회원을 역임하였다.

김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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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活蘭(1889-1970)

여성 교육가. 본명은 기득, 호는 우월, 세례명은 헬렌이다. 경기도 인천에서 출생하였으며,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미국에 유학하여 웨슬리언 대학을 거쳐 보스턴 대학원에서 문학 석사를 받았다. 귀국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와 학감을 지냈다. 1931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컬럼비아 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돌아와,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장이 되어 일제의 탄압에도 굽히지 않고 학교를 끝까지 지켰다. 유엔 총회 한국 대표와 유네스코 한국 대표로 눈부신 활동을 하였다. 또한 공보처장, 코리아 타임스 사장, 아시아 반공 연맹 이사, 대한 적십자사 부총재 등을 역임했다. 1963년 대한민국 문화 포장과 막사이사이 공익 부문상을 받았으며, 동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의 다락방상을 받았다. 1961년 총장직을 정년 퇴직하고 명예총장 겸 재단 이사장이 되어 평생 독신으로 우리나라의 여성 교육에 이바지하였다. 죽은 후 대한민국 1등 수교 훈장이 수여되었으며, 저서로 <그 빛 속의 작은 생명>이 있다.

김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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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黃元(1045-1117)

고려의 문신·시인. 자는 천민, 본관은 광양이다.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고 고시(古詩)에 이름을 날려 해동의 제일인자라 일컬어졌다. 한림원에 있을 때 요의 사신을 시(詩)로써 맞아 존경을 받았으며, 예종 때 요에 가는 길에 북부지방 백성들이 굶주려 있는 것을 알고는 나라의 식량을 풀어 그들을 구했다. 귀국 후에 예부시랑·한림학사 등을 지냈다.

김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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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孝元(1532-1590)

조선의 문신. 자는 인백, 호는 성암, 본관은 선산이다. 문과에 급제한 후 영남에 내려가 이 황, 조 식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선조가 즉위한 후, 이조정랑에 천거되었으나 이조참의 심의겸이, 전에 그가 윤원형의 집에서 지낸 사실을 들추어 권력가에 아첨하는 자라고 하여 반대하였다. 그러나 김효원은 이조정랑이 되었으며 이듬해 그의 후임으로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천거되자, 이번에는 그가 반대함으로써 두 사람은 정식으로 충돌하여 조선의 당파 싸움의 근원이 되었다. 김효원의 집이 건천동이므로 효원 일파는 동인이라 불렸으며, 심의겸의 집은 정동이라 그 일파를 서인이라 하였다. 당파 싸움이 커질 것을 염려한 부제학 이 이의 조정으로 김효원은 지방으로 밀려나 10년 동안 한직에 머물러 있다가, 선조의 특명으로 영흥 부사로 승진하여 재직중 병으로 죽었다. 저서로 <성암집>이 있다.

김 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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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4-1305)

고려의 문신. 자는 용회, 본관은 의성이다. 원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원에 갔을 때, 임 연이 왕을 폐하고 안경공 창을 세우자, 원 황제는 세자 담(후에 충렬왕)을 동안공으로 책봉하고 군사를 보내어 임 연 일당을 토벌하고자 하였다. 이에 김 훤은 원의 황제에게 세자가 공으로 책봉되면 국내 민심이 임 연에게 기울어진다고 주장하여 중지케 하였다. 그가 금주 방어사로 있을 때 방 보가 난을 일으켜 진도에 있는 삼별초와 합세하려는 것을 경주 판관 엄수안 등과 함께 이를 토벌하였으며, 삼별초의 남은 무리가 경상도에 쳐들어온 것을 막은 공으로 예부 낭중·도호부사에 올랐다. 1275년 충렬왕이 즉위하자 전라도 부부사가 되어 부임하던 도중, 청호역에서 전라도 관찰사인 노경륜이 서울로 보내는 뇌물을 빼앗아서 나라에 바친 일로 양주 부사로 좌천되었다. 그 후 충선왕이 세자로 원에 있을 때 그를 받들다가 귀국하여 찬성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