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인명사전/한 국 인 명/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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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편집]

檀君(기원전 2400년경)

한민족의 시조. 단군 왕검이라고도 불린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천제 환인의 아들 환웅이 태백산에 내려와 세상을 다스릴 때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곰과 호랑이에게 쑥과 마늘을 주며, 그것을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말고 근신하게 하였다. 곰만이 이를 지키어 여자로 변하여 웅녀가 되었는데, 환웅이 웅녀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 단군이라고 한다. 단군은 기원전 2333년,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단군 조선을 건국하여 약 2천년 간 나라를 다스렸다. 그 후 주의 무왕이 기자를 조선 왕에 봉하자,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다시 아사달로 돌아와 은거한 후 산신이 되었다 한다. 이것은 고조선 시대의 부족 설화이나 고려 때부터는 민족 공동의 시조로 등장하며, 조선 때에는 대중화하여 숭배되었다. 외세에 시달리던 민중 사이에서 종교적 대상으로 등장하여 단군을 교조로 모시는 대종교를 비롯한 여러 교파가 생기고 <단경> <단전> 등의 경전이 나왔다. 대종교에서 시작한 개국일(음력 10월 3일)은 광복 후 양력으로 고쳐 개천절이 되었다.

단종[편집]

端宗(1441∼1457)

조선 제6대 왕(재위 1452∼1455). 문종의 아들이며 10세에 세자로 책봉되어 12세에 왕위에 올랐다. 문종은 세자가 나이 어린 것을 걱정하여 황보 인·김종서 등에게 보필을 명하였으나, 숙부 수양 대군은 정인지·한명회·권 남 등과 결탁하여 황보 인·김종서 등을 암살하고 왕위를 강탈하였다. 성삼문·박팽년 등 세칭 사육신이 주동이 되어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가 김 질의 배반으로 발각되어 참형을 당하고, 단종은 노산군이 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었다. 다시 금성 대군 유가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노산군은 서인이 되고 죽임을 당하였다. 그 후 숙종 때에 대군으로 추봉했다가 이어 복위되었고 묘호를 단종이라 하였다.

담징[편집]

曇徵(579∼631)

고구려의 승려·화가. 오경과 채화에 능하였다. 영양왕 때에 승려 법정과 함께 일본에 가서 오경·채화·공예 및 종이·먹·칠·맷돌 등을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 그가 그렸다고 하는 일본 호류사의 <금당벽화>는 중국의 윈강 석불, 경주의 석굴암과 함께 동양 3대 미술품의 하나였으나, 1948년 불타버렸다.

대구 화상[편집]

大矩和尙

신라의 승려. 진성 여왕 때 왕명을 받고 각간 위홍과 함께 향가집 <삼대목>을 엮었으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대무신왕[편집]

大武神王(?∼44)

고구려의 제3대 왕(재위 18∼44). 일명 대해 주류왕이라고 하며, 유리왕의 셋째 아들이다. 22년 동부여를 공격하여 대소왕을 죽인 뒤 동부여를 병합하였다. 26년 개마국을 병합하는 한편, 을두지와 같은 현신을 등용하여 군국 정사를 맡김으로써 한의 요동 태수의 공격을 지략으로 물리칠 수 있었다. 32년 호동 왕자를 시켜 낙랑을 공략하고, 37년 마침내 정벌하는 등 국토 확장에 전력을 다하였다.

대조영[편집]

大祚榮(?∼719)

발해의 시조(재위 699∼719). 고려의 유민으로, 당의 대장군 이해고의 군사를 천문령에서 격파하고 읍루의 동모산에 홀한성을 쌓고 말갈과 고구려의 남은 무리를 모아 나라를 세워 국호를 '진'이라 하였다. 진은 10여만 호와 수만의 정병을 가진 해동의 성국이었다. 713년, 국호를 '발해'라 고치고 신라와 국교를 열었으며, 당과 화친하여 사신의 내왕이 빈번하였다.

덕종[편집]

德宗(1016∼1034)

고려 제9대 왕(재위 1031∼1034). 현종의 맏아들이며 현종을 계승하여 즉위한 뒤에 거란에 억류된 고려인의 송환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1033년, 평장사 유 소에게 명하여 압록강 입구로부터 영원 등 14성을 거쳐 동해안의 도련포까지 천리를 석축으로 하여 천리장성을 쌓았다. 동여진인과 거란인들 중 투항자가 많았으며, 현종 때에 시작한 국사 편찬 사업도 완성하였다.

도선[편집]

道詵(1827∼898)

신라의 승려. 성은 김씨이며, 전남 영암에 출생하였다. 15세에 승려가 되어 불법을 공부하였다. 일찍이 고려 태조 왕 건의 탄생과 고려의 건국을 예언하였다. 풍수지리설과 음양도참설을 골자로 하여 지은 <도선비기>는 고려의 정치 사회면에 큰 영향을 끼쳤다. 효공왕으로부터 요공 국사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숙종 시당기때 왕사에 추증되었다. 그는 굴 속이나 움막 속에서 수도 생활을 하다가 백계산 옥룡사에서 일생을 마쳤다. 죽을 때 제자들에게 “인연으로 와서 인연이 다하여 떠나는 것이니 슬퍼하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 한다. 인종 때 선각 국사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저서로 <송악명당기> <도선> 등이 있다.

도윤[편집]

道允(798∼868)

신라의 승려. 성은 박이며 호는 쌍봉이다. 18세 때 승려가 되어 <화엄경>을 연구하였다. 헌덕왕 때 당에 가서 보원 대사의 가르침을 받고 귀국하여 금강산에 들어갔다. 제자 절중은 그 선풍을 받들어 사자산파를 창건하여 신라 선문 9산 중의 하나가 되었다. 경문왕의 총애를 받았다.

도의[편집]

道義

신라의 승려. 성은 왕이며, 호는 원적으로 북한군에서 출생하였다. 선덕왕 때 당에 건너가 지장의 불법을 이어받고 도의로 개명하였다. 헌덕왕 때 귀국하여 설법을 했으나 당시 사람들이 경교만을 숭상하고 무위법을 믿지 않자, 시기가 오지 않았음을 깨닫고 설악산 진전사에서 40년 동안 수도하였다. 제자 염거에게 남선(南禪)을 전하고 죽었다. 가지산 선파의 개조로 일컫는다.

도침[편집]

道琛(?∼661)

백제의 승려. 660년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게 망하자, 일본에 볼모로 갔던 왕자 부여 풍을 왕으로 추대하여 주류성을 근거로 반기를 들고 스스로 영거 장군이라 칭하였다. 유민을 규합하여 기세를 떨쳤으나, 내분이 일어나 복신에 의하여 살해당하였다.

동명왕[편집]

東明王(기원전 58∼19)

고구려의 시조(재위 기원전 37∼19). 성은 고이며 이름은 주몽이다. 아버지는 동부여왕 금와이고 어머니는 하백의 딸 유화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동부여왕 해부루가 죽고 금와가 즉위하여 유화를 아내로 삼았으나, 천제의 아들 해모수와 가까이했다는 이유로 유화를 궁실에 가두었다. 유화는 햇빛을 받고 임신하여 알 하나를 낳았는데, 그 알에서 사내아이가 나와 주몽이라 불렀다. 총명하고 활을 잘 쏘아, 금와의 아들 7형제가 그를 시기하여 죽이려 하자, 피하여 졸본에 도읍하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다. 기원전 34년, 성곽 궁실을 짓고 행인국을 멸망시켰으며 기원전 27년, 북옥저를 합쳐 고구려의 토대를 이룩하였다.

동천왕[편집]

東川王(?∼248)

고구려 제11대 왕(재위 227∼248). 성은 고, 이름은 우위거이며 산상왕의 아들이다. 위와 친선을 도모하여 위와 적대관계에 있던 오의 사신을 죽였으며, 위를 도와 공손 연을 토벌하는 등 친선관계를 맺었다. 후에 위의 서안평을 공격하자, 위의 관구 검의 침입을 받고 환도성이 함락되어 남옥저로 피신하였다. 밀우와 유유의 지략으로 적을 격퇴하고 동황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동풍신[편집]

董豊信(?∼1919)

3·1운동 때의 순국 소녀. 1919년 3월 함경도 길주의 화대 장터에서 독립 만세를 부른 소녀이다. 장터에 모인 군중이 만세를 부르자, 일본 경찰들은 마구 총을 쏘아 장터 일대는 피바다가 되었다. 그 때 일본 경찰이 겨누고 있던 총구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나선 그녀가 죽은 아버지를 들쳐업고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자, 일본 경찰은 '미친 소녀'라 하여 총을 쏘지 않고 사로잡았다. 함흥 재판소로 잡혀간 동풍신은 "만세를 부르다 총살된 아버지를 대신하여 만세를 불렀다."고 말할 뿐 갖은 고문에도 애국심을 굽히지 않다가 감옥에서 죽었다.

두경승[편집]

杜景升(?∼1197)

고려의 장군. 만경 두씨의 시조이며 배운 것은 없으나 뛰어난 용기로 공학군으로 뽑혔다. 1170년 정중부의 난 때 크게 활약하였고, 1173년 김보당의 난을 평정하였다. 그 공으로 장군이 되었고 서북면 병마부사가 되었다. 이듬해 조위총이 난을 일으키자 평정하여 삼한후벽상공신이 된 뒤, 이의민과 함께 문하시중으로 승진하였다. 1197년, 최충헌에 의해 자연도로 유배되자 울분으로 죽었다.

득오곡[편집]

得烏谷

신라 효소왕 때, 향가 <모죽지랑가>를 지은 사람이다. 화랑의 한 사람으로 득곡, 혹은 급간이라고도 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그가 당전모량익선아간에 잡혀 부산성에 갇혔을 때, 죽지랑이 구해준 것을 감사하여 <모죽지랑가>를 읊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