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인명사전/한 국 인 명/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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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 태자[편집]

麻衣太子

신라 경순왕의 아들. 신라의 국세가 날로 쇠약해져, 서쪽으로는 후백제의 견훤이 쳐들어오고 북쪽으로는 고려의 왕 건이 압력을 가해오자, 936년 경순왕은 군신회의를 열어 고려에 항복하기로 결정하였다. 태자는 이를 반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개골산(금강산)에 들어가 삼베옷을 입고 풀뿌리와 나무 열매를 먹으며 살았다고 한다. 평생 삼베옷을 입어 마의 태자로 불리게 되었다.

마해송[편집]

馬海松(1905∼1966)

아동문학가·저널리스트·수필가. 본명은 상규이며 해송은 호이다. 경기도 개성에서 출생하였으며, 1919년 <여광>의 동인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다. 1923년 <바위나리와 아기별> <어머니의 선물> 등 동화를 발표함으로써 우리 나라 창작 동화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어린이헌장과 서울특별시 시민헌장을 기초했다. 1924년 방정환·윤극영 등과 색동회를 결성하여 <어린이> 지를 간행하는 한편, 자유신문사·일본의 <문예춘추>사의 초대 편집장을 역임하는 등 저널리스트로 이름을 날렸다. 1958년 제6회 자유문학상을 수상했다. 동화집으로 <홍길동> <토끼와 원숭이> 등이 있으며, 수필집으로 <씩씩한 사람들> <요술집> 등이 있다.

만덕[편집]

萬德

신라의 무용가. 552년, 우륵에게서 춤을 배웠는데, 그의 춤을 따를 만한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가야금의 계고, 노래의 법지와 함께 임금 앞에서 공연을 갖고 극찬을 받았다고 한다.

만적[편집]

萬積(?∼1198)

고려 때 최충헌의 종. 1198년, 만적은 개성의 노예들을 모아놓고 반란을 일으킬 것을 모의하고 자유를 찾아야 한다는 연설을 하였다. 그리하여 최충헌을 비롯하여 각기 주인을 죽인 후 노비문서를 불살라 없애기로 계획하였으나, 배반자가 생겨 거사 전에 발각되었다. 주모자인 만적을 비롯한 백여 명이 붙잡혀 강물에 던져져 죽었다. 그가 일으킨 노예 해방운동은 실패했지만, 이후 노예의 지위가 향상되었고 세력이 커졌다.

망이[편집]

亡伊

고려 때 농민 반란의 지도자. 무신의 난 후 사회가 혼란할 때, 같은 공주 명학소의 천민 망소이와 함께 1176년에 굶주린 농민을 모아 난을 일으켜 공주를 함락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회유책을 써서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승격시켰으나, 다시 예산을 공략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충순현을 명학소로 환원하고 총공격을 하였다. 당시 농번기라 도망가는 농민의 수가 증가하는 등 정세가 불리해지자 망이·망소이 등이 항복함으로써 1년 반 만에 난이 평정되었다.

맹사성[편집]

孟思誠(1360∼1438)

고려 말, 조선 초의 정치가. 자는 성지, 호는 고불, 본관은 온양이다. 고려 우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조선 태종 때 대사헌이 되었다. 세종 때 우의정·좌의정을 역임하였으며 <태종실록>을 편찬하였다. 영의정 황 희와 여진 지방 개척을 위해 김종서를 시켜 4진을 설치하게 하였다. 청렴결백하여 국가에서 주는 녹미만으로 생활하고, 말년에는 음률을 좋아하여 스스로 악기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자연을 읊은 시조 외에 많은 일화를 남겼다. 시조로 <강호사시가>가 있다.

명성 황후[편집]

明成皇后(1851∼1895)

조선 고종의 왕후. 성은 민씨, 본관은 여흥으로 여주에서 출생하였다. 9살에 부모를 잃고 여주에 있는 본가에서 가난하게 자라다가 1866년 흥선 대원군의 부인 민씨의 추천으로 왕비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고종이 궁인 이씨만을 총애하고 이씨가 낳은 완화궁을 태자로 책봉하려 하자, 불만과 질투가 폭발하여 집권자인 대원군의 반대 세력을 합하고 민씨 친족들을 모아 확고한 세력 기반을 잡았다. 1873년 최익현을 동부승지로 발탁하여 대원군의 실정을 탄핵하게 하고, 고종에게 친정을 선포하게 함으로써 민씨의 외척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때부터 대원군의 쇄국 정책을 폐하고 일본과 외교 관계를 맺었다. 1882년, 임오군란 때에 윤태준의 집을 거쳐 충북 장호원으로 피신하였다. 대원군에 의해 죽은 것으로 선포되자, 윤태준을 고종에게 몰래 보내어 자신이 살아 있음을 알리고 청에 지원을 요청케 하였다. 난이 진압되자 대원군을 청에 납치해 가도록 하고 다시 민씨 정권을 수립했으나 국고를 탕진하는 등 갖은 실정을 저질렀고, 또한 민씨 일족의 부패도 극도에 달하여 기강이 무너졌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다시 청을 끌어들여 개화당 정권을 3일 만에 무너뜨렸다. 그러나 일본 세력의 침투로 김홍집 등의 친일파가 정권을 잡게 되자,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 세력의 추방을 기도하다가, 1895년 을미사변을 일으킨 일본 공사 미우라의 부하들에게 살해된 후 밖으로 운반되어 불태워졌다. 폐위되어 서민이 되었다가 복호되고 명성의 시호가 내려졌다.

명종[편집]

明宗(1131∼1202) 고려 제19대 왕(재위 1170∼1197). 인종의 셋째 아들이며 의종의 동생이다. 1170년 의종을 몰아낸 정중부 등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 동안 의종을 다시 모시려는 김보당·조위총 등의 난이 일어났고, 전국에서 농민 반란이 일어나는 등 국내가 극도로 어수선했다. 1197년, 최충헌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났다. 그는 특히 글씨와 산수화에 뛰어났다.

명종[편집]

明宗(1534∼1567) 조선 제13대 왕(재위 1546∼1567). 중종의 둘째 아들이며 인종의 동생이다. 인종의 뒤를 이어 12세로 왕위에 오르자 어머니 문정 왕후가 섭정을 하였다. 문정 왕후의 동생인 윤원형 일파가 정권을 쥐고 을사사화를 일으켜서 백여 명의 선비를 죽였다. <경국대전 주해> 등을 편찬하게 하고, <경국대전>의 원전과 그 속전을 간행하였다. 권문세가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재분배하는 등의 업적이 있다.

모윤숙[편집]

毛允淑(1909∼1990)

여류 시인. 호는 영운이며 함남 함흥에서 출생하였다.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1934년, 시집 <빛나는 지역>으로 문단에 등장하였으며, 장시 <렌의 애가>는 아직도 여성들 사이에서 많이 읽히고 있다. 펜클럽 국제본부 부회장·한국 현대 시인협회장직을 역임하였다. 예술원 공로상·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받았다. 시집으로 <옥비녀> <풍랑> 등이 있으며, 수필집으로 <내가 본 세상> <포도원> 등이 있다.

목종[편집]

穆宗(980∼1009)

고려의 제7대 왕(재위 997∼1009). 학문을 장려하는 등 치적이 많았으나 아들이 없었으므로 어머니인 천추 태후가 김치양과 간통하여 낳은 아들을 왕으로 삼으려고 후계자인 대량군(후의 현종)을 해치려 하였다. 이를 알아차린 목종이 대량군을 구하려고 강 조에게 그 호위를 명하였으나, 강 조는 오히려 목종을 폐위시키고 대량군을 왕으로 삼고 김치양 일당을 살해하였다. 왕은 쫓겨나 충주로 가는 도중에 살해되었다.

묘청[편집]

妙淸(?∼1135)

고려 인종 때의 승려. 서경 출신으로 일관인 백수한·정지상의 추천으로 왕의 고문이 되었다. 개경 출신의 세력을 꺾고 정권을 잡으려는 야심에서 풍수지리설을 들어 서경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했다. 1129년, 서경에 대화궁을 짓게 했으며 왕의 호칭을 황제라 할 것과 금 정벌을 주장했으나, 김부식 등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마침내 서경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켜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라 하였다. 김부식이 거느린 관군에게 포위당하자, 부하 장수 조 광에게 피살된 뒤 목이 잘리어 개경에 효시되었다.

무녕왕[편집]

武寧王(462∼523)

백제 제25대 왕(재위 501∼523). 동성왕의 둘째 아들이며, 즉위 후 가림성에 근거를 둔 역신 구가를 쳐서 백강에서 죽였다. 512년 양에 사신을 보내어 예물을 바쳤으며, 양으로부터 백제 제군사 영동 대장군에 책봉되었다. 523년 15세 이상의 한북주 군민을 징발하여 쌍현성을 쌓았다.

무열왕[편집]

→ 태종 무열왕

무왕[편집]

武王(?∼641) 백제 제30대 왕(재위 600∼641). 어렸을 때의 이름은 서동이다. 신라의 서쪽 국경을 공략하고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당에 사신을 보내었다. 관륵을 일본에 보내어 천문·지리 등에 관한 서적과 불교를 전하게 했고, 634년 왕흥사를 창건했다. 만년에는 사치와 유흥을 일삼아 백제 멸망의 원인을 만들었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 공주를 사모하여 <서동요>를 지어 퍼뜨렸으며 마침내 왕비로 맞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무왕[편집]

武王(?∼737) 발해의 제2대 왕(재위 719∼737). 대조영의 아들이며 연호를 안인으로 고치고 일본과 국교를 맺어 사신을 내왕하게 하였다. 한편, 무력을 양성하여 당의 산둥성을 공략하였다.

무학[편집]

無學(1327∼1405)

고려 말, 조선초의 승려. 성은 박, 이름은 자초, 호는 무학이다. 18세에 소지선사 밑에서 승려가 되었으며, 혜명 국사로부터 불법을 배운 뒤 묘향산의 금강굴에서 수도하였다. 공민왕 때 원의 연경에 유학하여 인도의 지공 선사와 당시 원에 가 있던 혜근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392년 조선 개국 후 왕사가 되고 다시 회암사에 있다가, 그 다음해에 수도를 옮기려는 태조 이성계를 따라 계룡산 및 한양을 돌아다니며 땅의 모양을 보고 마침내 한양으로 정하는 데 찬성하였다. 1397년 태조가 그의 장수를 기원하는 탑을 회암사 북쪽에 세워주었다. 만년에는 금강산 금장암에 들어가서 여생을 마쳤다.

묵호자[편집]

墨胡子

고구려의 승려. 아도라고도 한다. 미추왕(혹은 눌지왕) 때에 고구려로부터 신라에 들어와 모례의 굴방에 숨어 있었다. 그 때 양나라 사신이 왕께 향을 바쳤으나, 모두들 그 용도를 몰라 사방에 수소문하자 묵호자가 이를 보고 그 용도와 이름을 알려주었다. 때마침 왕녀가 병을 앓고 있어서 왕은 묵호자를 불러 향을 피워 재를 올리게 하여 병을 고쳤다. 왕은 매우 기뻐하여 흥륜사를 지어 주고 불법을 펼치게 하였다. 그 후 영흥사를 창건하여 살다가 미추왕이 죽자 백성들이 그를 해치려 하므로 모례의 집에 들어가 굴을 파고 문을 봉한 채 영영 나오지 않았다. <삼국사기>에는 눌지왕 때 묵호자라는 이름으로, <삼국유사>에는 미추왕 때 아도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문극겸[편집]

文克謙(1122∼1189)

고려의 문신. 자는 덕병, 본관은 남평이다. 의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내시 백선연의 잘못을 상소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좌천되었다. 그 후 의종은 문극겸의 상소가 정당한 것임을 알고 벼슬을 올려주었다. 무신들이 정권을 잡아 명종을 왕위에 앉히고 문신들을 마구 처벌하였는데, 이때 많은 문신들을 구해 주었다. 그는 재상이 된 후, 상장군을 겸임하여 최세보와 함께 <의종실록>을 편찬하였다.

문덕수[편집]

文德守(1927- ) 시인. 호 청태(靑苔). 경남 함안 출생. 1955년 홍익대학교를 졸업하고, 1956년 <현대문학>에 시 <침묵(沈默)> <화석(化石)> <바람 속에서> 등이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1964년 현대문학 신인상을 수상했다. 1960년대에 발표한 연작시 <선(線)에 관한 소묘> <종이 한 장> <새벽마다> 등을 고비로 순수 심리주의적 경향을 계속 추구하여 현실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반영한 내면세계의 미학을 개척하였다는 평을 듣고 있다. 동인지 <시단(詩壇)> <한국시(韓國詩)> 등을 주재했다. 시집으로 <황홀(恍惚)> <선·공간(線·空間)> 등이 있고, 그 밖에 평론집 등이 있다.

문명 왕후[편집]

文明王后

신라 태종 무열왕의 왕후. 이름은 문희, 본관은 김해이다. 김유신의 누이이며 인물과 지혜가 뛰어났다. 언니인 보희의 꿈을 사서 김춘추와 결혼하게 되었다고 한다. 문무왕·인문·노차·지경·개원 등을 낳았다.

문무왕[편집]

文武王(?∼681)

신라 제30대 왕(재위 661∼681). 태종 무열왕의 맏아들이며, 660년 당의 소정방이 백제를 공격하려고 군사를 이끌고 오자 김유신과 더불어 백제를 멸망시켰다. 661년 고구려를 정벌할 때 무열왕이 죽자 즉위하였다. 668년 다시 나·당 연합군을 동원하여 동생 인문을 시켜 고구려를 공격했다. 이로써 삼국 통일이 이루어졌지만, 계속 간섭하는 당 세력을 김유신 등을 시켜 완전히 몰아냈다. 부인들에게 당식의 옷을 입게 하였고 당악을 배우게 하는 등, 당 문화 수입에 노력하였다. 죽은 후, 유언대로 화장하여 감은사 동쪽 바다 대왕암 가운데에의 물 속에 장사지냈다. 1967년 조사단에 의해 경북 월성군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에 유해가 안장되어 있음이 발견되었다.

문성왕[편집]

文聖王(?∼857)

신라 제46대 왕(재위 839∼857). 신무왕의 아들이며 재위 기간 중에 자주 반란이 일어났다. 가장 큰 반란은 장보고에 의한 것으로, 그는 산둥 반도에서 신라·일본·당의 3국을 상대로 무역에 종사하다가 고국에 돌아와 청해진 대사가 되었다. 장보고는 그의 딸을 왕비로 삼으려다 뜻대로 되지 않자 청해진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왕은 염장을 보내어 그를 죽이고 난을 평정하였다.

문왕[편집]

文王(?∼793)

발해의 제3대 왕(재위 737∼793). 무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으며, 연호를 대흥이라 하였다. 용천부로 천도하고 당 제도를 본받아 관직 제도를 제정하였다. 또한 사적을 수입하고 주자감을 세워 학문 교육을 장려하여 나라의 중흥에 힘썼다.

문익점[편집]

文益漸(1329∼1398)

고려의 학자·문신. 자는 일신, 호는 삼우당, 본관은 남평이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서장관으로 원에 갔다. 최 유 일파가 충숙왕의 아우인 덕흥군을 받들고 고려에 쳐들어오자, 이에 가담했다가 귀국 후 파면되었다. 귀국할 때 목화씨를 얻어 와 장인 정천익과 함께 재배하여 성공함으로써 우리의 의복 생활에 큰 공헌을 하였다. 우왕 때 전의주부로 등용되었으며, 창왕 때 좌사의대부를 지냈다. 공양왕 때 이성계 일파에 의해 추진된 전제 개혁에 반대하여 조 준 등의 탄핵을 받고 파면되었다. 세종 때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문익환[편집]

文益煥(1918-1994)

시인·목사. 호 늦봄. 만주 간도 출생. 1955년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 대학원 수료. 1972년 <월간문학>에 <추억의 커피잔> <미켈란젤로의 고독> 등을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히브리서 11장 1절> <십계명> 등이 있다. 그는 <구약성서>의 히브리 정신을 바탕으로 한국적인 정신과 감성을 융화시켜 얻어지는 새로운 가락과 언어를 발굴, 투명하고 섬세한 시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시집으로 <새삼스런 하루>가 있다.

문자왕[편집]

文咨王(?∼519)

고구려 제21대 왕(재위 491∼519). 호는 문자명왕·명치호왕으로 장수왕의 손자이다. 아버지가 일찍 죽었으므로 장수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여러 번 사신을 위에 보냈으며 제·양 두 나라로부터 왕에 책봉되었다. 494년 부여국을 쳐 항복을 받고 신라와 백제를 자주 침공하여 국위를 떨쳤다.

문정 왕후[편집]

文定王后(1501∼1565)

조선 중종의 왕후. 성은 윤, 본관은 파평이다. 명종이 즉위하자 8년간 수렴청정을 하면서 윤원로를 해남에 유배하고 윤 임 등을 죽여서 을사사화를 일으켜 동생 윤원형 등 친척 일파가 정권을 잡게 하였다. 불교를 독실히 믿어 승려 보우를 신임하고 불교를 다시 일으켰다.

문종[편집]

文宗(1019∼1083) 고려의 제11대 왕(재위 1046∼1083). 현종의 셋째 아들로 즉위하자 최 충에게 명하여 법률 개정에 착수하였다. 양반의 공음전 시법·삼원신수법 등을 제정하고, 전세의 율을 정하였으며 녹봉제를 제정하여 내치의 중요 기초를 공고히 하였다. 또한, 불교를 독실히 믿어 흥왕사를 비롯한 모든 사찰을 건립하고 왕자 후를 출가시켜서 대각 국사(의천)가 되게 하였다. 한편, 유학을 장려하여 최충의 9재를 비롯한 사학 12공도가 일어나게 하는 등 학문이 융성하게 하였다. 동여진이 자주 북방을 침입하였으나 회유책으로 이들을 무마시켰으며, 특히 송과 국교를 맺어 친선 관계를 유지하였다. 양주 삼천사의 대지 국사비 비문은 왕의 친필이다.

문종[편집]

文宗(1414∼1452) 조선의 제5대 왕(재위 1450∼1452). 세종의 아들로, 1421년 세자로 책봉되어 20여 년간 세종을 도왔다. 즉위 후에 언로(言路)를 열어 민심을 파악하는 등 문무를 겸비하여 백성들의 신망이 컸다. 그러나 몸이 약해서 적극적으로 정치는 하지 못하고 재위 3년 만에 병으로 죽었다. <동국병감>을 찬술하고 <진법구편>을 친히 만들었다.

물계자[편집]

勿稽子(196∼229)

신라의 장군. 내해왕 때 포상 8국(해안의 여러나라)이 가락국으로 쳐들어왔을 때 그들을 격파시켜 큰 공을 세우고, 이어 또 그들이 신라를 침범하여 갈화성을 공격했을 때도 큰 공을 세웠으나, 평민이어서 공을 인정받지 못하였다.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국가의 위기에 생명을 버려 싸워야 함에도 돌아왔음은 신하의 도리가 못 된다고 하며 머리를 푼 뒤 거문고를 들고 사체산에 들어가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미천왕[편집]

美川王(?∼331)

고구려 제15대 왕(재위 300∼331). 고추가 돌고의 아들로 봉상왕이 돌고를 죽이자 민가에 숨어 있었다. 봉상왕이 폐위된 후 왕이 되었으며, 303년 현도군을 쳐서 8천 명을 사로잡아 왔다. 또한 서안평과 대방군을 쳐서 합치고, 낙랑군을 멸망케 하였으며 요동의 모용씨와도 자주 싸웠다. 낙랑군·대방군을 합방하는 등 고구려의 영토 확장에 큰 공을 세웠다.

미추왕[편집]

味鄒王(?∼284)

신라의 제13대 왕(재위 262∼283). 김알지의 후손이며 김씨 왕의 시조로 첨해왕이 후사 없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백제가 봉산성·괴산성을 침입하자 이를 물리쳤으며 백성들에게 농사를 적극 장려하였다.

민겸호[편집]

閔謙鎬(1838∼1882)

조선의 정치가. 자는 윤익, 본관은 여흥이다.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민씨 세도의 일원으로 권력을 잡고 여러 요직을 지냈다. 1880년 정치 제도 전반에 걸쳐 대개혁이 실시되자, 신식 무기에 의한 교련과 군제 개편을 단행한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하고 선혜청 당상이 되었다. 별기군 창설로 차별대우를 받던 구식 군인이 임오군란을 일으키자, 강압적으로 진압하려다가 오히려 살해되었다.

민긍호[편집]

閔肯鎬

조선 말기의 의병대장. 원주 진위대에 정교로 근무중, 고종이 물러나고 군대가 해산됨에 분개하여 의병을 일으켜 관동 일대에서 다수의 왜병을 사살하였다. 이인영이 양주에서 의병을 일으켰을 때 가담하여 관동군 창의 대장이 되어 1백여 회의 전공을 세웠다. 치악산에서 왜병의 불의의 습격을 받고 전사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민무질[편집]

閔無疾(?∼1410)

조선의 무신. 민 제의 아들이며 민무구의 형이다. 제1차 왕자의 난에 공을 세워 좌명공신 1등으로 여성군에 피봉되고, 1403년 예문관 총제로서 왕명에 따라 <시전>을 자본으로 하여 구리로 활자 수십만 자를 주조하였다. 일찍이 정도전의 음모 사실을 방원에게 밀고한 바 있었다. 이 화 등의 탄핵을 받아 장단에 유배된 뒤 사약을 받아 죽었다. 다. 치악산에서 왜병의 불의의 습격을 받고 전사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민비[편집]

→ 명성 황후

민애왕[편집]

閔哀王(?∼839)

신라의 제44대 왕(재위 838∼839). 성은 김, 휘는 명으로 원성왕의 증손이다. 상대등으로 있을 때 희강왕을 자살하도록 하여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불과 2년 만에 김우징(후의 신무왕)에게 살해되었다.

민영익[편집]

閔泳翊(1860∼1914)

조선 말기의 정치가. 자는 우홍, 호는 운미, 본관은 여흥이다.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임오군란 때 민씨 척족의 거물로 지목되어 난군에게 집을 파괴당했다. 난이 수습된 후 사죄사절로 일본에 다녀왔으며,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 우리나라 최초로 서양 문화를 시찰했다. 갑신정변 때 자객의 습격을 받아 죽을 뻔하였으며, 일본에 망명중인 김옥균·서광범 등을 암살하기 위하여 자객을 밀파한 일도 있었다. 고종 폐위 음모에 관련되어 홍콩으로 망명, 상하이에서 죽었다. 행서를 잘 썼으며 묵란도에도 능하였다.

민영환[편집]

閔泳煥(1861∼1905)

조선 말기의 정치가·순국지사. 자는 문약, 호는 계정, 본관은 여흥이다. 민겸호의 아들로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성이 되었으나, 아버지가 임오군란 때 피살되자 일시 퇴임하였다. 그 후 유럽 각국을 순방하면서 서양 문화에 감명을 받고 전반적인 개혁을 건의했으나 군제 개혁만 채택되었다. 독립협회를 적극 후원하여 한때는 민씨 일파의 미움을 사 파면되기도 하였으나 다시 기용되어 탁지부 대신·헌병사령관 등을 역임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병세와 함께 백관을 인솔하고 이를 반대했으나, 이미 대세가 기울었음을 알고 유서 3통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민영환이 자결한 후 피묻은 옷과 칼을 마루방에 간직해 두었는데, 이듬해 열어보았더니 푸른 대나무가 솟아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의 충성심이 꺾으려 하여도 꺾이지 않는 대나무로 변하여 살아난 것이라 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저서로 <민 충정공 유고>가 있다.

민영휘[편집]

閔泳徽(1852∼1936)

조선 말기의 정치가. 자는 군팔, 호는 하정, 본관은 여흥이다.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민씨 척족의 세력을 타고 요직을 거쳤다. 1884년 갑신정변을 진압하고 사대당 내각에 들어갔으며,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청의 위안스카이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 후 갑오경장으로 민씨 척족과 함께 실각, 임자도에 귀양가게 되었는데, 그는 탈출하여 중국으로 도망갔다. 이듬해 대사령으로 귀국, 중추원의장·표훈원 총재·헌병대 사령관 등을 역임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본 정부에 의해 자작이 되었고 천일은행·휘문학교를 설립했다. 저서로 <향례삼선>이 있다.

민종식[편집]

閔宗植(1861∼?)

조선 말기의 의병장. 자는 윤조, 본관은 여흥이다. 고종 때 별시 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충남 정산에 은거하였는데, 높은 덕망으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분개하여 이듬해 홍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본군에게 패하고 공주에 숨어 있다가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 이후 풀려났다.

민필호[편집]

閔弼鎬(1898∼1963)

독립운동가. 호는 석린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휘문의숙을 졸업하고, 1911년 상하이로 건너가 박달학원·체신학교 등을 졸업하였다. 신규식이 조직한 '동제사'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대종교에 입교하여 민족운동을 일으켰다. 1919년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을 거쳐 한국 독립당 선전부장이 되어 <독립신문>을 발간하였다. 그 후 자유중국에 건너갔다가 1956년 귀국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저서로 <한중 외교 사화>가 있다.

문주왕[편집]

문주왕

文周王(?∼477)

백제의 제22대 왕(재위 475∼477). 개로왕의 맏아들이며,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한성을 침입하여 개로왕이 전사하자 즉위하여 웅진으로 천도하였다. 결단력은 없었으나 성품이 온유하고 백성을 사랑하여 신망이 높았다. 대두산성을 수축하고 탐라와 친선을 도모하였으며 국정에 힘썼다. 해구를 병관좌평에 임명했으나 그에게 피살되었다. <일본서기>에는 문주왕이 개로왕의 친동생이라고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