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인명사전/한 국 인 명/ㅂ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박경리[편집]

朴景利(1926∼)

여류 소설가. 충무에서 출생하여 진주여고를 졸업하였다. 1956년, <현대문학>에 <흑흑백백>을 발표하여 문단에 등장하였다. 이듬해 <전도> <불신시대> <벽지> 등의 문제작을 발표하여 사회의식이 강한 작가로 주목을 끌었다. 1956년 현대문학 신인상, 1958년 김내성 문학상, 1972년 <토지> 1부로 월탄 문학상을 받았다. 작품으로는 <표류도> <기다리는 불안> <김약국의 딸들> <시장과 전장> 등이 있다.

박경원[편집]

朴敬元(1901∼1933)

최초의 여류 비행사. 대구에서 출생하였으며 신명여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가마다 비행학교를 졸업하였다. 1928년, 도쿄 요요기 연병장에서 열린 고도 경기 대회에서 3등을 차지하여 2등 비행사가 되었다. 1933년 만주로 가는 비행을 하려고 준비하던 중, 우리나라를 들렀다 가려고 하다가 심한 안개로 비행기와 함께 추락하여 죽었다.

박규수[편집]

朴珪壽(1807∼1876)

조선 말기의 정치가. 자는 환경, 호는 환재, 본관은 반남으로 박지원의 손자이다. 헌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철종 때 열하부사로 연경에 다녀왔다. 1862년, 진주민란이 일어나자 안핵사로 파견되어 사태 수습에 힘썼다. 평안도 관찰사로 있을 때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 호가 대동강에 들어와 행패를 부리자, 이를 공격하여 불태웠다. 1875년 운요호 사건으로 일본이 수교를 요구해 오자, 강화도조약을 맺게 하였다. 그는 당시 국제 정세에 밝아서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고 문호를 개방할 것을 주장했다. 김옥균·박영효 등이 그에게서 개화사상을 전해 받았다고 한다. 저서로 <환재집> <환재수계> 등이 있다.

박귀희[편집]

朴貴姬(1921-1993)

칠곡 출생. 가야금산조와 병창의 명인. 가야금병창으로 <중장망혜>, <녹음방초>, <사랑가>를 즐겨 불렀다. 본명은 오계화(吳桂花), 아호는 향사(香史)이다. 1957년 경상대 경제과를 수료했다. 손재광 문하에서 소리를 전문으로 공부하기 시작했고, 이화중선·박지홍·유성준에게 노래를 배웠으며, 강태홍·오태식에게 가야금병창을 배웠다. 19세 때 음반을 취입했고, 광복 후에는 김소희와 함께 여성국악동호회를 조직해 공연 활동을 했다. 1955년 김소희·박초월·한영숙과 함께 한국예술학원을 설립해 초대 원장이 되었다. 1960년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의 전신인 국악예술학교를 설립해 1973년에 이사장을 지냈다.

박동규[편집]

朴東奎(1939- )

평론가. 경북 월성 출생. 서울대학교 국문과 졸업. 동 대학원 석사·박사과정 수료. 서울대학교 교수. 1962년 <현대문학>에 <카오스의 질서화작용> <언어·성격·행동>으로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주로 분석비평적(分析批評的) 방법을 취하며 대표작으로 <현대소설기술> 및 <구조론>이 있다.

박동열[편집]

朴東說(1564∼1622)

조선의 정치가. 자는 열지, 호는 남곽, 본관은 반남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을 지내었다. 황주 목사로 있을 때, 부역에 공평하여 민폐가 없었으므로 백년 만에 처음 맞는 어진 정치가라는 칭송을 받았다. 후에 대사성으로서 광해군의 포악함을 상소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진하여 나주 목사가 되어 다스리기 어려운 곳에 학문의 풍토를 심어 놓았다. 이이첨의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옥에 갇혔으나 중풍으로 풀려난 뒤 죽을 때까지 은거하였다.

박동진[편집]

朴東鎭(1916- )

판소리 명창. 충남 공주 출생. <흥보가>를 5시간 동안 완창해 완창 판소리붐을 일으켰다. 김창진을 비롯한 여러 스승에게 판소리를 배웠다. 1962년 국립국악원 국악사로 취임했고, 판소리 다섯 마당을 모두 공연했다. 또한 <숙영낭자전>, <옹고집타령>, <변강쇠타령>을 완창했고, 창작 판소리 <이순신장군>을 발표했다. 서울신문사 문화상·국민문화은관훈장, 서울특별시 문화대상, 한국방송공사가 주최하는 국악대상을 수상했다. 1975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적벽가의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으며 현재 국립국악원 지도위원으로 있다.

박두세[편집]

朴斗世(1654∼?)

조선의 문신. 자는 사앙, 본관은 울산이다.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목사·지중추부사를 지냈다. 그의 수필집 <요로원 야화기>에서 혁신적인 비판 정신으로 당시의 사회 정책·제도를 문답 형식으로 날카롭게 풍자하였으며 <삼운통고보유>도 편찬하였다.

박두진[편집]

朴斗鎭(1916∼1998)

시인. 호는 혜산이며, 경기도 안성에서 출생다. 1939년, <문장> 지에 <향현> 등을 발표하여 문단에 등장하였다. 박목월·조지훈과 함께 '청록파'로 불린다. 처음에는 자연을 주제로 한 시를 썼으나 차차 광복의 감격과 생명감 있는 시를 썼다. 연세대·이화여대·감리교 신학대학 등에서 교수생활을 하였다. 혜산 시문학 연구소장을 역임했으며, 자유문학상과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저서로 <청록집> <박두진 시선> <시인의 고향> 등이 있다.

박목월[편집]

朴木月(1917∼1978)

시인·아동문학가. 본명은 영종이며, 경북 경주에서 출생하였다. 대구 계성고보를 졸업하였으며, <아동>·<여학생> 등 잡지사 주간을 지냈고, 서울대·홍익대·한양대 교수를 역임하였다. 1939년 <문장> 지 추천으로 문단에 등장하였다. '청록파'의 한 사람으로 처음에는 동요 동시를 써 우리나라 아동 문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청록집>에서는 압축적이고 세련된 시어 속에 자연을 통한 향토적 서정과 애수를 그렸다. 후에는 민요풍의 가락과 목가적이고 애수적인 감미로운 서정시를 써서 주목을 받았다. 아시아 자유문학상·5월 문예상·국민훈장 모란장 등을 수여받았다. 저서로 <청록집> <산도화> <난·기타> 등이 있다.

박문수[편집]

朴文秀(1691∼1756)

조선의 정치가. 자는 성보, 호는 기은, 본관은 고령이다. 경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관이 되었다. 1727년, 영남 암행어사로 등용되어 부정한 관리들을 적발하였으며, 이듬해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평정하고 영성군에 봉해졌다. 1730년 호서 어사가 되어 굶주린 백성의 구제에 힘썼으며, 진주 부사로 청에 다녀왔다. 1741년 함경도 진휼사로 나가 경상도의 곡식 1만 섬을 실어 와서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여 후에 송덕비가 세워졌다. 1749년 호조판서가 되어 양역의 폐단을 논하다가 충주 목사로 좌천되었으며, 왕세손이 죽자 약방 제조로 책임을 추궁당하고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그는 특히 군정과 세정에 밝았고 암행어사 때에 많은 일화를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박 서[편집]

朴犀

고려의 무신. 본관은 죽산이다. 1231년 서북면 병마사로 있을 때 몽고 장수 살리타이가 침입하자, 김경손·김중온 등과 함께 공격해 오는 몽고군과 한달 동안이나 격전을 벌인 끝에 이를 물리쳤다. 귀주를 버리고 개성을 먼저 함락, 고종의 항복을 받고 군세를 가다듬어 귀로에 다시 귀주를 공격하는 몽고군을 다시 대파하였다. 이때 그에게 왕명으로 최임수·민희 등이 와서 항복할 것을 권유하자, 왕명을 어기지 못해 항복하였으며, 그 후 문하평장사에까지 이르렀다.

박세채[편집]

朴世采(1631∼1695)

조선의 정치가·유학자. 자는 화숙, 호는 현석, 본관은 반남이다. 18세 때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이 이·성 혼의 문묘 종사에 대하여 반대하는 자들을 공격하다가 효종의 꾸지람을 듣고서는 과거 공부를 포기하였다. 김상헌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연구하고 송시열과도 학문 교류를 하였다. 그는 소론으로 당쟁에 끼여들었으나 황 극 탕평설을 주장하면서 당쟁의 근절에 노력하였다. 그는 당대의 유종(儒宗)으로서 특히 예학에 밝았다. 많은 저술 외에 70여 권의 문집,논어·맹자의 찬요, 유현들의 사우 연원을 수록한 책 등 후진들에게 귀중한 문헌을 남겼다. 저서로 <범학전편> <남계집> <삼례의> 등이 있다.

박수근[편집]

朴壽根(1914∼1965)

화가.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나 독학으로 미술 공부를 하였다. 1932년 제11회 조선 미술 전람회에 입선함으로써 화단에 등장하였다. 해방 후 월남하여 1952년 제2회 국전에서 특선, 미술협회전람회에서 입상하였다. 1958년 이후 미국 월드 하우스 화랑·조선일보사 초대전·마닐라 국제전 등에 출품하는 등 국내외 미술전에 여러 차례 참가하였다. 1959년에 제8회 국전 추천 작가가 되었고, 제11회 국전에서는 심사위원이 되었다. 그의 작풍은 회백색을 주로 하여 단조로우면서도 한국적 주제를 소박한 서민적 감각으로 충실하게 다루었다.

박수량[편집]

朴守良(1491∼1554)

조선의 정치가. 자는 군수, 본관은 태인으로 장성에서 출생하였다.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장령을 지냈다. 1546년, 동지춘추관사가 되어 <중종실록> <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좌참찬 벼슬이 내려졌으나 노모의 봉양을 위해 이를 사양하였다. 그 후 벼슬이 지중추부사에까지 올랐다. 주세붕과 깊이 교류하여 학자로서 존경을 받았으며, 청렴결백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박 순[편집]

朴淳(?∼1402)

조선의 무장. 본관은 음성이다. 1388년 요동 정벌 때 이성계 휘하에서 종군, 위화도 회군에 앞서 이성계의 명으로 회군의 승인을 얻기 위하여 우왕에게 갔으며,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상장군이 되었다. 이성계가 여러 왕자를 죽이고 등극한 태종을 미워하여 함주(함흥)에 머물고 있자, 수차 사자를 파견하여 귀환을 요청했으나 모조리 사자를 죽이므로 태조와 친분이 두터운 그가 사자 되기를 자원하였다. 1402년 그는 함주에 내려가서 귀환하겠다는 태조의 확약을 받고 귀로길에 올랐다. 한편 그를 쫓아가 죽이자는 측근들의 간청에 못 이긴 태조는 그가 강을 건넜을 무렵, 신하들의 청을 허락하면서 강을 건너갔으면 쫓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박 순은 도중에 급병으로 지체하다가 간신히 배를 탔으나, 결국 뒤를 쫓아온 사람들에게 붙잡혀 살해되고 말았다. 여기에서 함흥차사라는 말이 유래되었다. 태종은 그에게 관직과 토지를 내렸으며, 그의 고향에 충신·열녀의 두 정문을 세우게 하였다.

박순천[편집]

朴順天(1898-1983)

여류정치가. 본관 밀양. 본명 명련(命連). 부산 출생. 1917년 동래의 일신여학교를 졸업하였다. 19년 마산의 의신여학교 교사로 있을 때 3·1운동에 참가하여 지도적 활동을 하다가 수배되어 일본으로 피신, 그곳 요시오카(吉岡) 여자의학전문에 편입하였으나 1년 후 수배인물임이 탄로나 체포되었다. 출감 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26년 니혼여대(日本女大) 사회사업과를 졸업한 후 28세에 결혼하였다. 경북 고령의 시댁에서 농사를 돕다가 39년 상경하여 이우(李禑)공의 소유 건물인 벽돌집을 매수하여 경성가정여숙(京城家政女塾)을 설립하고 교육사업에 열중하다가 8·15광복을 맞이하였다. 45년 중앙여중 부교장이 되었고, 47년부터 독립촉성애국부인회 회장을 겸하다가 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감찰위원에 임명되었으며, 50년까지 <부인신문> 사장, 대한부인회 회장, 대한여자청년단 단장 등을 역임하고 50년부터는 2·4·5·6·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한국 여성정치인의 제1인자가 되었다. 69년 통일원 고문, 72년 근명학원(槿明學園) 이사장, 중앙여고 이사 등에 취임하였고, 76년에는 육영수여사추모사업회 이사장이 되었으며, 80년부터 83년까지 국정자문위원을 역임했다.

박승종[편집]

朴承宗(1562∼1623)

조선의 문신. 자는 효백, 호는 퇴우당, 본관은 밀양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봉교·병조정랑 등을 지냈으며, 1600년 동지사로 명에 다녀왔다. 그 후 부제학 형조판서 좌의정·영의정이 되었으며, 1619년 이이첨의 무리들이 경운궁의 인목 대비를 죽이려 할 때 죽음을 무릅쓰고 이들을 저지시켰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손녀가 광해군의 세자빈이 되어 그 일족이 오랫동안 권세를 누린 사실을 자책하여 아들과 함께 목매어 죽었다.

박승환[편집]

朴昇煥(1869∼1907)

조선 말기의 순국지사. 구한국군 참령으로 시위 연대 제1대대장으로 재직중에, 1907년 고종이 일본에 의해 강제로 왕위를 양위당하자 궁중에 돌입하여 복위 운동을 펴려다가 고종에게 해가 미칠까 두려워 중지하였다. 이 해 8월 군대 해산을 위해 대대장 이상의 장교를 일본군 사령부에 집합시키자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고 서소문 병영에 머물러 있다가 군대 해산령이 내리자 권총으로 자살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박에스터[편집]

(1879∼1910)

최초의 여류 의사·박사. 본성은 김이며 한자명은 애시덕(愛施德), 본관은 광산이다.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이화학당에 다니다가 미국 선교회의 장학금으로 남편 박씨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볼티모어 여자 의과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남편이 죽자 귀국하여 황해도와 평안도 일대에서 무료 진찰을 하면서 맹아학교와 간호학교를 세웠다. 고종은 그의 업적을 찬양하여 은메달을 수여하였다.

박 연[편집]

朴堧(1378∼1458) 조선의 음악가. 자는 탄부, 호는 난계, 본관은 밀양이다.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교리·지평·문학을 지냈다. 세종이 즉위한 후 악학별좌에 임명되어 음악에 관한 일을 맡아 보았다. 당시 불완전한 악기의 조율의 정리와 악보 찬집의 필요성을 상소하여 허락을 받았다. 1427년 편경 12매를 제작, 자작한 12율관에 의거한 정확한 음률로 연주하게 하였다. 박 연은 아악을 궁정의 조회에도 향악 대신 쓰자고 왕에게 건의하여 1430년 아악의 악기와 악보를 편찬하였다. 또한 종묘 제향 음악의 잘못된 점을 들어 종묘 아악에 쓸 악기를 만듦으로써 종묘악을 개정하였는데, 그가 개정한 제향악은 오늘날에도 쓰이고 있다. 1445년 성절사로 명에 다녀와서 예문관 대제학에 올랐으며, 1453년 계유정난 때는 아들이 처형되었으나, 그는 3대에 걸쳐 왕을 섬긴 원로로 죽음을 면하고 파면되어 고향에 내려갔다. 그는 피리의 명연주가였으며, 신라의 우륵, 고구려의 왕산악과 더불어 3대 악성으로 불린다. 저서로 <난계유고> <가훈> 등이 있다.

박 연[편집]

朴淵(1595∼?) 조선의 전술교관. 인조 때 귀화한 네덜란드 사람으로 본명은 벨테브레이다. 1628년 일본으로 가는 도중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표류되어 물을 구하려고 상륙했다가 붙잡혀 서울로 와서 우리나라 여자와 결혼하였다. 훈련도감에 예속되어 호란 때에 대포를 만들고 전술을 가르쳤다. 1653년 네덜란드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표류하여 왔을 때, 통역을 맡고 우리나라의 풍속·지리 등을 설명해 주었다.

박영준[편집]

朴榮濬(1911-76)

소설가. 호는 관우. 평남 강서 출생. 연희전문 문과 졸업. 1934년 단편 <1년>이 <신동아>에, <모범경작생>이 <조선일보>에 당선됨으로써 문단에 등장한 후 <어머니> <목화씨 뿌릴 때> 등 주로 농촌 소설을 발표하였다. 해방 뒤에는 <경향신문> 등에 근무하며 주로 소시민 생활의 윤리적인 면을 강조한 소설을 발표하였다. 작품으로는 장편에 <아름다운 길> 등이 있고, 단편집으로 <목화씨 뿌릴 때>(1947) 등이 있는데, 1953년 단편집 <그늘진 꽃밭>으로 자유문학상을 받았다.

박영효[편집]

朴泳孝(1861∼1939)

조선의 정치가. 자는 자순, 호는 현현거사이며 철종의 사위이다. 13세 때 철종의 딸 영혜 옹주와 결혼하여 금릉위가 되었다. 유대치를 중심으로 김옥균·홍영식·서광범 등 개화당 요인들과 함께 정치적 혁신을 부르짖고 일본의 세력을 이용하여 청의 간섭과 러시아의 침투를 억제하고자 하였다. 1882년 수신사로 일본에 갈 때, 처음으로 태극기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1884년 김옥균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청의 개입으로 3일 만에 개화당 내각이 무너지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94년 갑오경장 때 귀국하여 제2차 김홍집 내각의 내무대신이 되었다. 1907년에는 이완용 내각의 궁내 대신이 되었으며, 대신 암살 음모 사건으로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경술국치 이후 일본 정부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았으며, 일본 귀족원 의원이 되었다.

박영희[편집]

朴英熙(1901∼?)

시인·평론가. 호는 회월·송은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배재고보를 거쳐, 일본 도쿄 세이코쿠 영어학교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1921년 황석우와 함께 시 동인지인 <장미촌>을 발간하면서 시를 발표했고, 1922년 <백조>의 동인으로 <미소의 허영시> <꿈의 나라로> 등 상징적인 서정시를 발표하였으나, 1925년 <개벽>지에 단편 <사냥개>를 발표하면서부터 신경향파에 속하게 되었다. 이 해 김기진·최학송 등과 조선 카프(KAPF:프로 예술동맹)를 조직, 그 중앙위원이 되었다. 그 후 대표적인 극좌 평론가로 목적 의식론을 제창, 다수의 평론을 발표하여 카프 계열의 대변자도 활약하다가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옥고를 치르고, 이론보다 예술을 찾고자 1933년 카프를 탈퇴하고 순수 예술로 전향하였다. 1950년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작품으로는 시 <유령의 나라> <어둠 너머로>, 소설 <전투> <지옥 순례> 등이 있다.

박완서[편집]

朴婉緖(1931- ) 소설가. 경기도 개풍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국문과 졸업. 1970년에 <여성동아>에 장편 <나목>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장했다. 이후 <어떤 나들이>(1971),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틀니>(1972), <부처님 근처>(1973), <지렁이 울음소리>(1973),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1974), <휘청거리는 오후>(1977), <그 가을 사흘 동안>(1980),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1983), <엄마의 말뚝> 등 섬세하고 유머있는 문체와 사실성을 바탕으로 한 문제작을 잇달아 발표했다. 제25회 동인문학상, 제38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수많은 독자를 둔 대중 인기 작가이면서 문학성도 높은 작품을 써서 우리 시대의 탁월한 이야기꾼으로 평가받는다.

박용만[편집]

朴容萬(1881∼1928)

독립운동가·언론인. 호는 우성이며, 강원도 철원에서 출생하였다. 1904년 미국으로 가서 헤이스팅스 대학에서 정치와 사관학교 과목을 공부하였다. 1914년 하와이에서 대조선 국민 군단을 창설하고 이듬해 <미국 혁명사>를 한글로 번역, 출판하였다. 1917년 뉴욕에서 열린 약소국 동맹회에 참석하였으며, <태평양 시사>를 창간하여 주필이 되었다. 1925년, 하와이에서 열린 태평양 연안 국제신문 기자대회에 대표로 참석하였으며, 이듬해 군사운동의 근거지 확충을 목적으로 베이징에 대본공사를 설립하는 한편, 1927년 초등 국어 교과서를 편찬하여 교포의 국어 교육에 이바지하였다. 1928년 베이징에서 암살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박용철[편집]

朴龍喆(1904-1938)

호는 용아(龍兒). 시인. 전남 광주 출생. 동경 아오야마 학원과 연희전문에서 수업. 순수시 동인지 <시문학>(1930)과 문예지 <문예월간>(1931)을 출자 간행, 정지용, 신석정, 김영랑, 이하윤 등과 함께 경향파에 대립하여 순수시 운동을 전개했고 극예술운동회 동인으로 활약했다. 그의 시는 릴케와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을 받아 회의·모색·상징 등의 그 주조를 이루었으며, 작품에 시·번역시·평론을 모은 <박용철 전집>이 있다.

박 위[편집]

고려의 장군. 본관은 밀양으로 우왕 때 김해 부사가 되었으며, 이성계를 따라 위화도에서 회군한 후, 최 영을 몰아내고 경상도 도순문사가 되었다. 그는 전함 백 척을 이끌고 쓰시마 섬을 쳐서 크게 이기고 돌아왔다. 그 후 판자혜 부사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추대하였다. 조선이 개국되자 양광도 절도사가 되어 왜구를 무찔러 큰 공을 세웠다.

박은식[편집]

朴殷植(1859∼1926)

독립운동가. 자는 성칠, 호는 백암이며, 황주에서 출생하였다. 1898년 장지연·남궁억·신채호 등과 <황성신문> 창간에 참여하여 주필이 되었다. 3·1운동 후 시베리아로 망명하여 '애국노인단'을 조직하여 항일운동에 투신하는 한편, 고구려의 유적지를 답사하고 고대사와 고구려 위인전의 저술에 힘썼다. 그 후 상하이로 건너가 <독립신문> <한족회보> 등을 발간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했다. 1925년 임시정부 국무총리가 되었으며, 이듬해 대통령이 되었다가 이 해 헌법 개정으로 대통령직에서 퇴임하고 병사하였다. 그의 저서 <한국통사>와 <한국 독립운동지혈사>는 우리나라 최근세사와 의병 활동 등에 관한 귀중한 사료로 되어 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저서로 <조선 고대사고> <동명왕실기> <발해 태조실기> 등이 있다.

박이서[편집]

朴彛敍(1561∼1621)

조선의 문신. 자는 서오, 호는 비천, 본관은 밀양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병조좌랑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순찰사 종사관이 되어 황해도 지방의 군사를 맡았으며, 이이첨을 탄핵하다가 파면되어 여강에 은거하였다. 그 후 영광 군수로 있을 때, 전라도 관찰사 이창준의 탐학 행위에 실망한 나머지 벼슬을 내놓았다. 다시 복직되어 진위사로 명에 다녀오던 중 풍랑을 만나 행방불명되었다.

박인량[편집]

朴寅亮(?∼1096)

고려의 학자. 자는 대천, 호는 소화, 본관은 죽산이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청환직을 지냈다. 1075년 요가 압록강 동쪽을 국경선으로 삼으려 하자, 진정표를 지어 올림으로써 요 황제가 그 문장의 훌륭함에 감탄하여 그들의 주장을 철회하였다. 1080년에 유 홍·김 근 등과 송에 사신으로 갔을 때에도 시문으로 크게 격찬을 받아, 김 근의 글을 합친 <소화집>을 중국인이 발간하였다. 문장이 아름다워 중국에 보내는 많은 외교 문서를 담당했으며 <고금록> 10권을 편찬하였다. 신라시대의 설화를 모은 <수이전>의 저자로도 알려져 있다.

박인로[편집]

朴仁老(1561∼1642)

조선의 문인. 자는 덕옹, 호는 노계, 본관은 안동이다. 영천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시에 뛰어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정세아의 밑에서 별시위가 되어 왜군을 무찔렀다. 1598년 왜군이 퇴각할 때 병사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태평사>를 지었다. 이듬해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선전관 등을 지냈으나, 후에 사직하고 고향에 가서 독서와 시작에 전념하였다. 그는 도학과 조국애·자연애를 사상적 바탕으로 천재적인 창작력을 발휘하여, 전쟁중에서도 시정과 우국애가 넘치는 작품을 썼다. 무인다운 기백과 신선미로서 화려한 시풍을 이룩한 그는, 송강 정 철을 계승하여 가사문학을 발전시키는 데 큰 공로가 있었으며, 시조 10여 수가 전한다. 저서로 <노계집>이 있다.

박인환[편집]

朴寅煥(1923∼1956)

시인. 강원도 인제에서 출생하였으며, 평양 의학전문학교를 중퇴하였다. 8·15광복 후 서울에서 서점을 경영하였고, 1947년부터 경향신문 기자로 있으면서 미국을 시찰하였다. <후반기>의 동인이 되어 모더니즘 운동에 참가하였다. 비평성과 서정성의 조화를 꾀했으나, 33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그는 <목마와 숙녀>라는 시로 더욱 유명하다. 시집으로 김수영 등과 함께 발간한 <새로운 도시와 시민의 합창> <박인환 시선> 등이 있다.

박재삼[편집]

朴在森(1933∼1997)

시인. 충북 충주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를 중퇴하였다. 현대문학 편집위원·대한일보 기자 등으로 있다가 1955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문단에 데뷔하였다. 처음에는 시조를 쓰다가 시로 전환하였다. 섬세한 언어 연마를 통한 민족 정서의 재현이 작품의 주조를 이루었다. 1956년 현대 문학상 신인상을 수상하였다. 시집 <춘향이 마음> <햇빛 속에서> 등이 있다.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있다 사망하였다.

박정양[편집]

朴定陽(1841∼1904)

조선 말의 정치가. 자는 치중, 호는 죽천, 본관은 반남이다.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참판 등을 지냈으며,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선진문물을 시찰하고 돌아왔다. 1894년 김홍집 내각 때 학부대신이 되었으며 1898년 독립협회가 주최하는 만민공동회에 참석하여 시정의 개혁을 약속했으나 수구파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그는 진보적인 개화사상의 소유자로서 이상재 등 개화파에 속하는 인사들을 많이 돌보아 주었다. 저서로 <죽천고> <해상일기초> 등이 있다.>

박정희[편집]

朴正熙(1917∼1979)

정치가·제5∼9대 대통령. 경북 선산에서 출생하였으며,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잠시 교편을 잡았다. 그 후 만주로 건너가 만주 군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44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1946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대위로 임관되었다. 1953년 육군 준장으로 진급하고 미국 포병학교 고등 군사반 과정을 수료하였다. 1961년 5·16 군사정변을 주도하여 4·19혁명 후의 어지러운 정국을 바로잡았다. 이어 군사혁명위원회 부의장, 계엄 부사령관, 국가 재건 최고회의 의장 등을 역임하였다. 1962년 대통령 권한 대행으로 이듬해 군에서 퇴역하고 공화당에 입당하여 총재가 되었다. 그 해 제5대 대통령, 1967년 제6대 대통령에 당선되고 국가 안보회의 의장이 되었다. 제6대 대통령에 취임하자,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기획 실천하여 조국 근대화에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고속도로를 만들어 전국을 1일 생활권으로 만들었으며,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룩하였다. 1971년, 제7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이듬해 10월 유신을 단행하여 통일 주체 국민회의 의장이 되었다. 또한 자조·근면·협동의 새마을 정신을 고취함으로써 국민 정신을 불러 일으켰다. 제8대 대통령을 거쳐 제9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살해되었다. 저서로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 등이 있다.

박제가[편집]

朴齊家(1750∼1815)

조선의 실학자. 자는 차수, 호는 초정, 본관은 밀양이다. 19세 때 박지원의 문하에서 실학을 연구하였다. 이덕무·유득공·이서구 등의 실학자와 교류하며 함께 지은 시집 <건연집>이 청에 소개되어 조선의 시문 4대가 중의 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1778년 사은사 채제공의 수행원으로 청에 가서 그곳 학자들에게서 새학문을 배워 귀국한 뒤, <북학의>를 저술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실생활에 있어서의 기구와 시설의 개선점을 다루고 정치·사회 전반에 대한 모순점을 지적하여 개혁 방안을 서술하였다. 이듬해 왕명으로 규장각 검서관이 되어 많은 책을 편찬해 냈으며, 동지사를 수행하여 청에 다녀왔다. 1794년 춘당대 무과에 장원으로 뽑혀 이듬해 영평 현감으로 나갔다. 1801년 사은사를 따라 청에 다녀왔을 때, 사돈인 윤가기 사건에 관련되어 함북 종성으로 귀양갔다가 4년 만에 풀려 나왔다. 저서로 <명농초고> <정유시고> 등이 있다.

박제상[편집]

朴堤上

신라 눌지왕 때의 충신.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후손으로 삽량주의 간으로 있을 때 지혜와 용맹으로 이름을 떨쳤다. 실성왕 때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일본에, 미사흔의 형 복호는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었는데, 417년 눌지왕이 즉위한 후, 고구려에 들어가 복호를 데려왔다.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왕에게 신임을 얻은 후, 미사흔과 함께 낚시를 하는 척하다가 미사흔만 배에 태워 신라로 탈출시키고 그는 혼자 남아 체포되었다. 일본 왕이 신하가 되어 주기를 종용하였으나 끝내 거절하고 불로 지지는 형을 받고 죽었다. 그의 충성심에 감동한 눌지왕은 그의 딸을 미사흔과 결혼시켰다. 한편 그의 아내는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다가 돌부처가 되었는데, 이 바위는 '망부석'이라고 불린다.

박제순[편집]

朴齊純(1858∼1916)

조선 말기의 매국노. 호는 평재이며 본관은 반남이다.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참의·참판 등을 지냈다. 1899년, 전권대신으로서 한·청 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1901년 필리핀 및 벨기에와 통상조약을 체결하고 청 주재 전권공사로 갔다가, 1904년 귀국하였다. 이듬해 을사조약에 조인하여 5적의 한 사람이 되었다. 1909년 이완용 내각의 내부대신이 되어 한일합방 조약에 서명하고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의 칭호를 받았다.

박종홍[편집]

朴鍾鴻(1903∼1976)

철학자.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경성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를 거쳐 학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여러 예술 단체의 중심 인물로 크게 활약하였다. 그의 철학적 신념은 “모든 행동은 철학과 지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지성은 반드시 행동으로 실천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저서로는 <인식 윤리학> <철학적 모색> <부정에 관한 연구> 등이 있다.

박종화[편집]

朴鍾和(1901∼1981)

소설가. 호는 월탄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휘문의숙을 졸업하고, 1922년 <백조> 동인으로 문단에 등장하여 이후 시와 역사 소설을 많이 발표하였다. 1935년 <금삼의 피>를 매일신보에 연재하였으며, <아랑의 정조> <다정 불심> 등을 썼다. 서울신문사 사장, 성균관대학교 교수, 예술원 회장 등을 지냈으며, 1965년 '월탄 문학상'을 제정하였다. 그는 민족과 전통 의식을 신앙처럼 지녔으며, 사실에 입각한 역사소설에 큰 공적을 남겼다. 제1회 예술원 문학공로상과 문화 훈장을 받았다. 저서로 <목 매는 여인> <여명> <임진왜란> 등이 있다.

박지원[편집]

朴趾源(1737∼1805)

조선의 실학자·소설가. 자는 중미. 호는 연암, 본관은 반남이다. 실학자 홍대용에게서 지구의 자전설을 비롯한 서양의 신학문을 배웠다. 정조 때, 홍국영에 의해 벽파로 몰려 연암협으로 이사하여 독서에 전념하다가, 진하사 박명원을 따라 청에 가서 중국인의 이용 후생하는 실생활을 보고 실학에 뜻을 두었다. 당시 홍대용·박제가와 함께 북학파의 영수로 청의 문물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다. 그의 <열하일기>는 당시 보수파에게 많은 비난을 받았으나, 정치·경제·병사·천문·지리·문학 등 각 방면에 걸쳐 청의 신문물을 서술하여 실학사상을 소개하였다. 그는 양반의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양반들이 실속 없이 허울 좋은 이름만 내세우는 것을 미워한 나머지 10편의 한문 소설을 지어 독특한 해학으로써 이들을 풍자하였다. 그의 사상이 가장 많이 나타나 있는 <허생전>은 살기 좋은 나라를 건설하려는 꿈을 그린 소설이다. 후에 그는 <과농소초>라는 농업 연구책을 지어 정조에게 바치고 벼슬에서 물러났다. 저서로 <연암집> <양반전> <호질> <한민명전의> 등이 있다.

박충원[편집]

朴忠元(1507∼1581)

조선의 정치가. 자는 중초, 호는 낙촌, 본관은 밀양이다.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영월 군수 등을 지냈다. 1545년 춘추관 편수관을 겸하여 <중종실록> <인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53년 성절사로 명에 다녀왔으며, 이 황의 뒤를 이어 대제학을 지내고 이듬해 지중추 부사가 되었다. 밀원군에 봉해졌다.

박태보[편집]

朴泰輔(1654∼1685)

조선의 문신. 자는 사원, 호는 정재산인, 본관은 나주이다.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을 지냈다. 예조좌랑으로 있을 때 남인의 모함을 받아 선천에 귀양갔다가 복직되었다. 성품이 결백하여 아부를 하지 않았으므로 시기하는 자가 많았으나, 왕의 총애를 받았다. 이조좌랑으로 암행어사가 되어 호남 지방을 시찰할 때 폐단을 시정하여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1689년 기사환국 때에 서인으로 인현 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 심한 고문을 받고 진도로 귀양가는 도중 죽었다. 숙종은 후회를 하고 이조판서에 추증하였다.

박태준[편집]

朴泰俊(1900-1986)

작곡가. 경북 대구에서 태어나 미국 터스컬럼 웨스트민스터 음대 및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귀국 후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를 거쳐 연세대 종교 음악과를 창설하였으며, 많은 작곡을 하여 우리나라 음악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예술원 음악공로상과 국민훈장 무궁화장 등을 받았다. 64년 연세대 음대 학장을 지냈으며, 작품으로 <오빠생각> <집 생각> <사우(思友)> 등 150여 곡이 있고, 동요곡집으로 <중중때때 중>, 가곡집으로 <박태준 가곡집> 등이 있다.

박팔양[편집]

朴八陽(1905-?)

시인. 경기도 수원에서 출생. 서울 배재고보를 거쳐 경성법학 전문학교를 졸업했다. 법전 졸업 후에 여러 신문사에서 기자로 활약하고, 1973년 만주 신경으로 가서 <만주일보> 기자 생활을 하던 중 시집 <여수시초>를 발간한다. 그는 일찍이 카프의 창립멤버로 문단에 등단했는데 등단작품은 <신(神)의 주(酒)>로 알려진다. 광복 후 다시 좌익계 신문을 만들면서 1945년 9월 30일 결성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에 참여,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다가 월북했다. 1956년 <박팔양시선집>을 발행했고, 1962년에는 집체작 <인민은 노래한다>를 발표하는 등 북한 문단의 한 지도자로서 활약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박팽년[편집]

朴彭年(1417∼1456)

조선의 학자로 사육신의 한 사람. 자는 인수, 호는 취금헌, 본관은 순천이다.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성삼문 등과 함께 집현전 학사가 되어 편찬 사업에 참가하였다. 황보 인·김종서 등과 함께 문종과 단종을 보필하였다. 수양 대군이 황보 인·김종서·안평 대군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후, 그를 형조참판에 임명하였으나, 성삼문 등과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가 김 질의 밀고로 잡혀 처형되었다. 후에, 숙종은 그의 관작을 복구시키고 절개를 표창하였다. 저서로 <취금헌 천자문>이 있다.

박 포[편집]

朴苞(?∼1400)

조선의 역장. 조선 태조의 넷째 아들 방간은 정종의 적사가 없으니 자기가 왕위를 계승하리라 생각하고 있었으나, 다섯째 아들 방원(태종)의 세력이 커져 가는 것을 불안하게 여기고 있었다. 이때 그는 지중추 원사로 있었는데, 일찍이 정도전의 난에 방원을 도와 공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논공이 박함을 불평하다가 죽수(충북 영동)로 귀양갔었다. 이에 불만을 품어 방간을 충동하여 거병하였으나, 방원의 군사에게 패하여 방간은 토산으로 귀양갔으며, 박 포는 선동한 죄가 무섭다 하여 참수되었다.

박혁거세[편집]

朴赫居世(기원전 69∼기원후 4)

신라의 시조(재위 기원전 57∼기원후 4). 왕호는 거서간이고 국호는 서라벌이며, 왕비는 알영이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 6부의 하나인 사량부의 소벌공이 어느 날 숲속에서 말의 울음소리를 듣고 다가갔더니 그 자리에 커다란 알이 하나 있었는데, 그알 속에서 사내아이가 나왔다고 한다. 그 아이가 10여 세가 되자, 기골이 준수하고 크게 될 인물이므로 6부 사람들이 임금으로 추대하였다. 17세 때, 왕비를 맞아들이고 6부를 돌면서 백성들에게 농사와 누에 치기를 권장하였다. 기원전 28년 낙랑이 침범하였으나, 백성들이 밤에 문을 잠그지 않으며 곡식더미가 들에 즐비한 것을 보고 도덕의 나라라 하여 스스로 물러갔다 한다. 도읍을 금성이라 정하고 궁성을 쌓아 국가의 기초를 세웠다. 사람들은 박과 같이 큰 알에서 나왔다고 하여 박씨라는 성을 붙였고, 또 '세상을 밝게 다스린다'는 뜻에서 '혁거세'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박화목[편집]

朴和穆(1924∼)

시인·아동문학가. 황해도 황주에서 출생하였으며, 만주로 건너가 봉천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941년 <아이생활>에 동시 <피라미드>와 <겨울밤>이 추천되면서부터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다. 기독교 방송국 편성국장·아동 문학회 부회장·크리스찬 문학회 부회장 등을 지냈다. 시집으로 <시인과 산양> <주의 곁에서> 등이 있으며, 동화집으로 <꽃 잎파리가 된 나비> <부엉이와 할아버지> 등이 있다.

박화성[편집]

朴花城(1904∼1988)

여류 소설가. 전남 목포에서 출생하였으며, 숙명여고보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여자대학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1925년 <조선문단>에 <추석 전야>가 발표되면서 문단에 등장하였다. 그 후 <사랑> <타오르는 별> 등 많은 장편을 썼다. 초기 작품은 경향 문학적 색채가 짙고, 후기 작품은 도시의 애정론을 다룬 장편이 많다. 1970년 예술원상을 수상하였다. 저서로 <고향 없는 사람들> <눈보라의 운하> 등이 있다.

박효관[편집]

朴孝寬

조선 말기의 가객. 자는 경화, 호는 운애이다. 1876년 제자인 안민영과 함께 <가곡원류>를 편찬하였다. 이것은 옛것의 답습에 불과하였으나, 당시까지의 가요곡을 총정리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흥선 대원군의 총애를 받았으며, 당시의 풍류객들이 모인 승평계의 중심 인물이었다. 시조 13수가 <가곡원류>에 전한다.

박희도[편집]

朴熙道(1889∼1951)

독립운동가.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하였으며, 감리교회 전도사로 있으면서 조선 크리스트 중앙 청년회 간사를 지냈다.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 선언에 참가하여 운동을 지도하다가 체포되어 2년형을 받았다. 그 후 월간지 <신앙생활>의 주필로서 일본에 대한 항쟁을 하다가 <신앙생활>이 폐간되고 투옥되었다. 1929년, 경성보육학교를 세워 어린이 교육에 힘썼다. 후에 변절, 잡지 <동광>의 주간으로 있으면서 친일행위를 하여 1948년 반민특위에 의하여 친일파로 체포되었다.

반굴[편집]

盤屈(?∼660)

신라의 화랑. 성은 김씨이며, 660년 무열왕 때 백제를 멸망시킨 황산벌 싸움에서 아버지 흠순의 뜻을 받들어 충효로써 싸움에 임할 것을 맹세하고 홀로 적진에 쳐들어가 용감히 싸운 끝에 죽었다. 관창과 함께 신라군의 사기를 높여 황산벌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

방정환[편집]

方定煥(1899∼1931)

아동문학가·사회 사업가. 호는 소파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918년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신청년> <녹성> <신여자> 등의 잡지 편집을 맡아보았고, 3·1 운동 때에는 <독립신문>을 등사하여 돌리던 중 체포되었다가 풀려나왔다. 1921년 어린이에 대해 존대말 쓰기 운동을 벌였으며, 이듬해 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발행하고 잡지 <어린이>를 창간하였다. 이어서 일본 유학생인 손진태·윤극영 등과 '색동회'를 조직하고 5월 1일을 첫 어린이날로 제정하였다. 1924년 전국 소년 지도자 대회를 개최하여 어린이 단체의 단합을 꾀했으며, 동화 대회를 개최하였다. 1928년 세계 아동 미술 전람회를 개최하였으며, 새로운 월간 잡지 <혜성>을 발간했으나 지병이던 신장염과 피로가 겹쳐 죽었다. 1957년 그를 기념하기 위해 '소파상'이 제정되었다. 저서로 <소파전집>이 있다.

배극렴[편집]

裵克廉(1325∼1392)

조선의 개국 공신. 자는 양가, 호는 주금당·필암, 본관은 경산이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상주 목사·합포진 첨사 등을 지냈다. 우왕 때 경상도 도순문사로 진주에 쳐들어온 왜구를 대파하고, 이후 이성계의 밑에서 여러 차례 왜구를 토벌하였다. 1388년 조전 원수로 위화도에서 이성계 등과 회군을 결행하였으며 최 영 등의 구세력을 제거하였다. 1392년 우시중으로 조 준 등과 모의하여, 공양왕을 폐하고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 공신 1등이 되었다.

배상명[편집]

裴祥明(1906∼1986)

여류 교육자. 평남 강서에서 태어나 일본 도쿄 고등기예학교 사범과를 졸업하고, 미국 시카고 대학교 교육학부에서 수학, 미시간 대학교 영어 속성과를 수료하였다. 1937년 상명여중고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하였고, 1945년 상명학원 창설 이사가 되었다. 1964년 서울시 교육회 부회장에 선출되었고, 문화 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1965년 상명여대 사대 학장에 취임하였다.

배중손[편집]

裵仲孫(?∼1271)

고려의 무장으로 삼별초의 반란 지휘자. 1270년 원종이 개경으로 환도한 후, 몽고에 대항하는 세력을 없애기 위해 삼별초의 해산을 명령하자, 야별초 지유 노영희와 공모하여 승화후 온을 왕으로 내세우고 강화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탈자가 속출하여 경계가 어렵게 되자, 진도로 근거지를 옮겨 궁궐을 세운 후 남해 연안과 각 도서·나주·전주까지 출병하여 관군을 격파하고 해상왕국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상장군 김방경과 몽고의 흔도가 거느린 여·몽 연합군의 총공세로 진도가 함락당하고, 그는 전사하였다. 이후 남은 군사들은 제주도로 건너가서 최후의 항쟁을 벌이다가, 1273년 마침내 평정되었다.

배현경[편집]

裵玄慶(?∼936)

고려의 개국 공신. 경주 배씨의 시조이며, 남달리 담력이 있었고 일개 병졸로 시작하여 대광에 이르렀다. 신숭겸·복지겸 등과 같이 모의하여 궁예를 내쫓고 왕 건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고려가 개국되자 1등 공신이 되었으며, 후에 태조가 사방을 정복할 때 큰 힘이 되었다.

배흥립[편집]

裵興立(1546∼1608)

조선의 장군. 본관은 성산으로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선을 만들어 큰 공을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칠천도 싸움에서 단 한 척의 배로 적의 진격을 방해하기도 하였다. 이어 한산도대첩과 행주대첩 때에도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고향에 그를 기리는 정문이 세워졌다.

백건우[편집]

白建宇(1946- )

세계적인 피아노 연주자. 모리스 라벨의 작품 해석에 뛰어나다. 1968년 줄리어드 음악학교(피아노 전공)를 졸업했다. 1965년 미국 카네기홀에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제3번>을 연주하여 데뷔했으며, 메트로폴리탄 콩쿠르에서 특별상을, 이탈리아 볼자노 국제콩쿠르에서 1등상을 수상했다. 그 후 세계의 유명한 교향악단과 협연했으며, 유럽 순회 공연을 가졌다. 영화배우 윤정희와 결혼했으며, 80년 이후 프랑스 파리에 살면서 유럽을 중심으로 활발한 연주 활동을 벌이고 있다.

백결 선생[편집]

百結先生

신라 때 거문고의 명수. 자비왕 때 경주 낭산 기슭에서 살았다. 몹시 가난하여 옷을 백 군데나 기워 입었기 때문에 백결 선생이라 불리었다. 거문고를 타면서 세상의 근심을 잊곤 하였다. 섣달 그믐날 아내가 이웃집 떡방아 소리를 부러워하자, 떡방아 대신에 아내에게 들려준 떡방아 소리인 <대악>으로 특히 유명하다.

백관수[편집]

白寬洙(1889∼?)

독립운동가·정치가. 호는 근촌이며 본관은 수원이다. 고창에서 출생하였으며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후 일본에 건너가 메이지 대학 법학과를 졸업하였으며 2·8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여 1년간 복역하였다. 1927년 하와이에서 열린 만국 기독교 청년회 주최 제2차 태평양 회의에 조선 대표로 참석하였다. 1937년 동아일보사 사장이 되었고 광복 후에는 법제 사법 위원장·헌법 제정의원을 지냈다.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백낙신[편집]

白樂莘 조선의 탐관. 철종 때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진주에 부임한 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백성의 재산을 약탈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이윤명 등이 무리를 모아 민란을 일으켜 관리를 죽이고 관청을 파괴하였다(진주민란). 백낙신은 파면되어 고금도로 유배되었고 재산은 몰수되었다. 고종 초에 다시 등용되어 병인양요 때에 영종진과 행주를 방어하였다.

백낙준[편집]

白樂濬(1895∼1985)

교육자·역사학자. 호는 용재이며 평북 정주에서 출생하였다. 미국 파크 대학교 역사과와 프린스턴 신학교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27년 미국 예일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같은 해 연희전문학교 교수를 거쳐 연희대학 총장, 연세대학교 총장을 지냈다. 1950년에 문교부 장관, 서울시 교육회 회장 등을 지냈으며, 그 후에 연세대학교 명예 총장이 되었으나, 1985년 지병으로 죽었다. 저서로 <한국의 현실과 이상> <시냇가에 심은 나무> 등이 있다.

백낙청[편집]

白樂晴(1938- )

문예비평가·영문학자. 평북 정주 출생. 서울에서 경기고교를 졸업하고 미국에 건너가 브라운 대학에서 영문학·독문학을 전공, 1972년 하버드 대학교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63년에 귀국하여 서울대 문리대에서 강의를 맡고 65년부터 신문·잡지 등에 문학평론을 발표하기 시작, 66년 1월에 한국 최초의 문예 계간지 <창작(創作)과 비평(批評)>을 창간하여 문단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그의 <시민문학론>, 그리고 리얼리즘을 토대로한 수편의 <민족문학론> 등은 70년대 한국 비평문학에서 두드러지는 공헌이다. 현재 서울대 영문학과 교수, <창작과 비평> 편집인으로 있다. 저서로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역서로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社會史)> 등이 있다.

백남준[편집]

白南準(1932- )

전위예술가. 서울 출생. 비디오 신시사이저(전자제어기)를 개발하여 텔레비전 수상기를 작품에 이용하는 새로운 미술 세계를 열었다. 1950년 일본 도쿄대학에 들어가 음악과 음악사·미술사를 전공했다. 1956년에 도쿄대학을 졸업한 뒤 독일 뮌헨으로 건너가 음악을 공부했다. 독일에서 전위예술가들이 참여하는 플럭서스(Fluxus:흐름)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면서 전통 음악에 대해 반발하는 행위음악으로 실험예술에 깊이 빠져들었다. 다다이즘 정신을 이어받고, 우연과 침묵을 강조하는 전위음악가 존 케이지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예술의 표현 가능성을 발견하였다.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오늘날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데, 해프닝(happening)과 같이 작품을 제작하는 행위의 일부를 관객 앞에서 직접 보여줌으로써 관객이 작품의 제작에 참여하기도 하며 예술가와 관객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예술을 만들어내고자 한다. 이러한 행위예술은 예술 작품을 제작하는 전통 방법을 거부하면서 미술, 음악, 연극 등의 요소를 한데 뒤섞어서 하나의 작품을 만든다. 뉴욕시장 자유상과 서독 윌리그로상을 수상했다.

백용성[편집]

白龍城(1865∼1940)

독립운동가·불교인. 본관은 수원, 법명은 진종, 속명은 상규이며 법호는 용성이다. 16세 때 해인사에 들어가 도를 닦았다.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1년 반 동안 복역하였으며, 그 후 불교 종단의 정화와 대중화를 위해 저술에 힘쓰면서 대각사를 창건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백이정[편집]

고려의 성리학자. 호는 이재, 본관은 남포이다. 1298년, 충선왕을 따라 베이징에 가서 10년간 머무르며 주자학을 연구하고 돌아왔다. 이제현 등을 가르쳐 우리나라 성리학 보급에 큰 공을 세웠다. 충선왕 때 도감사가 되었으며, 후에 상당군에 봉해졌다.

백일규[편집]

白一圭(1879∼?)

독립운동가. 호는 약산이며 평남 강서에서 출생하였다. 1905년 하와이로 이민갔으며, 이듬해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하다가 '대동 보국회'의 창립 발기인이 되었다. 또한 친일적인 미국인 스티븐스를 살해한 장인환·전명운 의사의 후원회 회장이 되어 공정한 재판을 위해 힘썼다. 1919년, 대한인 국민회 중앙 총회장에 선출되어 독립운동 자금 30만 달러를 모아 임시정부로 보냈다. 1946년 국민회에서 발행하는 <국민보>의 주필이 되어, 한국인의 권익 보호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저서로 영문판 <한국 경제사>가 있다.

백정기[편집]

白貞基(1896∼1936)

독립 운동가. 전북 정읍에서 출생하였으며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에서 항일 운동을 벌였다. 그 후 동지들을 규합하여 일본의 군사 시설 파괴를 꾀하다가 탄로되어 구금되기도 하였다. 그는 계속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여 베이징으로 망명하였으며, 일제의 군사 시설을 파괴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1933년 이강훈·이원훈 등과 함께 상하이 훙코우에서 중국 주재 일본 대사 아리요시를 암살하려다가 발각되어 복역중 사망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백 철[편집]

白鐵(1908∼1985)

평론가. 본명은 세철이며 평북 의주에서 출생하였다. 도쿄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였으며 <개벽>지의 기자를 거쳐 매일신보 문화부장, 중앙대학교 문리과 대학장, 펜클럽 한국 본부 위원장 등을 지냈다. 많은 평론을 발표하여 경향문학 시대 이후, 한국 문학의 순화와 외국 문학 소개에 노력하였다. 특히, 우리 나라 현대 문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으며, 1961년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저서로 <신문학 사조사> <문학의 개조> <두 개의 얼굴> 등이 있다.

백홍준[편집]

白鴻俊(1848∼1894)

크리스트교 순교자. 호는 북산이며 평북 의주에서 출생하였다. 일찍이 개화사상에 눈떠, 1874년 만주로 가서 스코틀랜드 자유 일치 교회의 선교사 매킨타이어와 로스 목사에게 서구 과학을 배웠다. 이응찬·이성하·김진기 등과 함께 최초로 세례를 받고 크리스트교 신자가 되었으며, 친구들과 함께 <신약성경>의 한글 번역 사업에 착수하여 <예수교 성교전서>라는 이름으로 간행하였다. 그 후 서상륜·최명호 등과 함께 언더우드 목사에 의해 최초로 크리스트 교 전도사가 되어 교회를 건립하였다. 1892년 만주에서 나쁜 책을 간행했다는 죄로 붙잡혀 옥사함으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크리스트교 순교자가 되었다.

법지[편집]

法知

신라의 음악가. 진흥왕 때에 왕명을 받고 우륵으로부터 계고·만덕과 함께 노래를 배웠다. 가야금을 배운 계고와 춤을 배운 만덕과 함께 왕 앞에서 연주회를 갖기도 하였다. 그는 노래로 유명하다.

법흥왕[편집]

法興王(?∼540)

신라의 제23대 왕(재위 514∼540). 지증왕의 아들로 지증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517년 병부를 설치하고, 520년 처음으로 율령을 반포하여 백관의 공복을 정하는 등 국가 체제의 확립에 힘을 기울였다. 527년 불교를 공인하여 삼국 통일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531년 상대등의 관직을 채택하였으며, 이듬해 가야국을 정복하여 비옥한 낙동강 유역을 확보하였다. 536년 처음으로 연호를 정하여 건원이라 하였다.

변계량[편집]

卞季良(1369∼1430)

고려 말, 조선 초의 정치가. 자는 거경, 호는 춘정, 본관은 밀양이다. 이 색·정몽주 밑에서 가르침을 받고, 우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전교·진덕박사 등을 지냈다. 조선 초에는 사헌부 시사·성균관 학정·예문관 응교·직제학 등을 지냈다. 20여년 간 대제학을 지내면서 대부분의 외교문서를 도맡아 지어 명문장가로 유명했으며, <태조실록> 편찬과 <고려사> 개수에 참여하였다. 시에도 뛰어나 문묘·기자묘의 비문을 지었으며 <청구영언>에 시조 2수가 전한다.

변상벽[편집]

卞相壁

조선의 화가. 자는 완보, 호는 화재, 본관은 밀양이다. 숙종 때 화원을 거쳐 현감에 이르렀다. 닭과 고양이를 잘 그려 '변 고양이'라는 별명이 붙었으며, 초상화도 잘 그려 '국수'라는 칭호를 받았다. 작품으로 <추자도> <묘작도> 등이 있다.

변영로[편집]

卞榮魯(1898∼1961)

시인. 호는 수주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중앙학교를 졸업하고 이화여전 등에서 교편 생활을 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 주립 산 호세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신문학 초창기에 등장한 신시의 선구자로서, 압축된 시구 속에 서정과 상징을 담은 기교를 보였다. 민족 의식을 시로 표현하고 수필에도 재능이 있었다. 광복 후 성균관대학교 교수·해군사관학교 교수 등을 지냈으며, 대한공론사 이사장으로 영자 일간지를 발간하였다. 1951년 제2회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고, 1955년 제1대 한국 펜클럽 회장에 선출되었다. 대표작으로 <논개> <사벽송> 등이 있고, 수필집 <명정 40년> 등이 있다.

보덕[편집]

普德

고구려의 승려. 평남 용강에서 출생하였으며 평양에 영탑사를 지었다. 보장왕이 당에서 도교를 받아들여 불교를 배척하는 것을 보고 백제로 가서 전주 고대산에 경복사를 짓고 열반종을 강의하였다. 그의 제자 11명이 각각 절을 세우고 열반종을 퍼뜨림으로써 신라 열반종의 시조가 되었다.

보우[편집]

보우의 법어를 모은 책.

普愚(1301∼1382) 고려의 승려. 호는 태고, 속성은 홍이며, 홍주에서 출생하였다. 13세 때에 중이 되어 가지산에서 도를 닦았다. 충목왕 때, 원에 가서 청공의 법을 이어 우리 나라 임제종의 시조가 되었다. 공민왕의 왕사가 되었다가 신 돈에 의해 속리산에 갇히기도 하였으나, 신 돈이 죽은 뒤 국사가 되었다. 그는 시에도 능하여 <태고암가>를 지었다. 북한산에 탑비가 있다.

보우[편집]

普雨(1515∼1565) 조선의 승려. 호는 허응당이며 1530년 금강산 마하연암에 들어가 수도하다가, 1548년 문정 왕후의 신임을 얻어 봉은사 주지가 되었다. 그 후 선종과 교종을 부활시키고 승과와 도첩제를 다시 실시하게 하는 등 불교의 부흥에 노력하였다. 후에 도대선사에 올랐으나 문정 왕후가 죽자, 유림들의 기세에 밀려 승직을 삭탈당하고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제주목사에 의해 참형되었다. 저서로 <허응당집> <불사문답> 등이 있다.

보장왕[편집]

寶藏王(?∼682)

고구려의 제28대 왕(재위 642∼668). 영류왕의 동생이며, 642년 연개소문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당의 도사 숙달 등 8인을 데려와 도교를 폈다. 645년 당 태종이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였으나, 연개소문에 의해 격퇴되었다. 668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평양이 함락되자, 대신들을 이끌고 항복하여 고구려 최후의 왕이 되었다. 667년 요동주 도독으로 조선왕에 봉해졌으며, 말갈족과 함께 고구려 부흥을 꾀하다가 피살되었다.

복신[편집]

福信(?∼663)

백제의 장군. 660년 좌평으로 있을 때, 사비성이 나·당 연합군에 의해 함락되자 흑치상지 등과 임존성에서 대항하여 싸웠다. 의자왕이 당에 항복하자, 도침과 주류성을 근거지로 하여 일본에 가 있는 왕자 풍을 왕으로 세워 백제 부흥을 꾀하였다. 그러나 도침과 뜻이 맞지 않아 그를 죽여버린 데다가 장차 왕자 풍까지 없애려는 기미가 보이자 풍이 먼저 그를 죽였다.

복지겸[편집]

卜智謙

고려의 개국 공신. 태봉의 마군 장군으로 있다가 궁예가 횡포해져서 민심을 잃자, 918년 배현경 등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왕 건을 추대하였다. 이때 환선길이 반대하자 이를 왕 건에게 알려 죽이게 하였으며, 임춘길의 역모를 평정하는 데도 공을 세웠다. 성종 때 태사에 추증되었다.

봉상왕[편집]

烽上王(?∼300)

고구려 제14대 왕(재위 292∼300). 일명 '치갈왕'이라고도 하며 서천왕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교만하고 시기심이 많아, 즉위하자 안국군 달고가 백성의 존경을 받고 있음을 시기하여 살해하였으며 동생 돌고도 약을 먹여 죽였다. 창조리를 국상으로 등용하여 연의 모용 외의 침입을 막기도 하였으나, 사치와 방탕이 심한 데다가 흉년으로 기근까지 겹쳤는데 화려한 궁전을 짓고 창조리의 충고를 듣지 않다가 창조리에 의해 폐위되었다. 그 후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자살하였다.

봉원부인 정씨[편집]

蓬原夫人鄭氏(1541∼1620)조선 중기의 여류 시인. 본관은 동래이며 광해군의 장모이다. 어릴 때부터 시재가 뛰어나서 많은 작품을 썼다. 정 현의 <공사 견문록>에 그의 시 4수가 전해지고 있다.

부대부인 민씨[편집]

府大夫人閔氏(?∼1898)조선 고종의 어머니. 본관은 여흥이며, 흥선 대원군의 부인으로 1861년 고종을 낳았다. 일찍이 천주교를 믿어 신자가 되었다. 둘째 아들 명복이 왕위에 오르자, 특별 감사 미사를 올렸다. 1896년 운현궁에서 뮈텔 주교로부터 영세를 받았다. 또한 고종의 유모인 박 마르다와 함께 베르뇌 주교를 통하여 프랑스에 도움을 청하고, 러시아의 세력을 막으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비류[편집]

沸流

고구려 동명왕의 둘째 아들. 북부여에서 남하한 이복형 유리가 태자가 되자, 동생 온조와 함께 부하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온조와 도읍 문제로 의견이 맞지 않아 온조는 위례성(경기도 광주)에, 비류는 미추홀(인천)에 각각 도읍을 정했다. 미추홀이 살기가 적당하지 않으므로 백성들이 흩어지자 부끄럽게 생각하고 자살하였다.

비류왕[편집]

比流王

백제의 제11대 왕(재위 304∼344). 구수왕의 둘째 아들이고 사반왕의 동생이다. 분서왕이 죽자, 그 아들들이 모두 어려 비류왕이 추대되어 즉위하였다. 오랫동안 민간에서 살았으므로 민간의 사정을 잘 알아 선정을 베풀었다. 그 후, 좌평 우복이 북한산성을 거점으로 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토벌하였다.

비유왕[편집]

毘有王(?∼455)

백제의 제20대 왕(재위 427∼454). 구이신왕의 맏아들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가난한 백성들에게 식량을 나누어주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송·신라·일본과도 국교를 맺었다.

빙호당 이씨[편집]

氷壺堂李氏

조선 선조 때의 여류 시인. 왕족 숙천령의 부인으로 시를 짓는 재주가 뛰어났다. 널리 알려진 작품으로 <영빙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