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인명사전/한 국 인 명/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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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함[편집]

斯多含

신라의 화랑. 내물왕의 7대손으로 급찬 구리지의 아들이다. 풍모가 뛰어나고 의지와 기개가 높았다. 그는 화랑이 되어 1,000명의 낭도를 거느렸다. 진흥왕 때 신라가 가야국을 칠 때, 15세의 나이로 공을 세워 그 공으로 전답과 가야 사람 300명을 노예로 받았다. 그러나 그는 밭은 병사들에게 나누어주고 가야 사람은 모두 석방시켜 주었다. 어렸을 때 친구인 무관랑이 병으로 죽자, 7일 동안 통곡하다가 따라 죽었다.

사도 세자[편집]

思悼世子(1735∼1762)

조선 영조의 둘째 아들. 이름은 선이고, 호는 의재이며 부인은 혜경궁 홍씨이다. 출생한 지 1년 만에 왕세자에 책봉되었고, 10세 때에 결혼하여 별궁에 거처하였다. 그는 자라면서 학문을 게을리하였고 난행과 광태를 일삼아 왕의 노여움을 샀다. 1761년에 평안도 관찰사 정희량 등의 계교에 빠져 평양에 몰래 놀러갔다 온 것 때문에 왕의 노여움이 한층 더해진 데다가, 당파 싸움으로 모함까지 곁들여져 이듬해 폐위되었다. 이어 자결할 것을 명령받았으나 듣지 않자, 서인의 자격으로 뒤주 속에 갇혀 8일 만에 굶어죽었다. 죽은 후, 이를 후회한 왕에 의하여 곧 위호가 복귀되고 사도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장헌 세자로 추존, 1799년 장조로 추존되었다.

사명당[편집]

유정

서거정[편집]

徐居正(1420∼1488)

조선의 문신·학자. 자는 강중, 호는 사가정, 본관은 달성이다.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재감 직장을 지냈으며, 세조 때 공조·예조·이조참의가 되었으며 1460년 사은사로 명에 다녀왔다. 그는 그곳 학자들로부터 '해동의 기재'라는 찬사를 받았으며, 조선 최초로 양관 대제학이 되었다. 그는 여섯 왕을 섬겨 45년간 조정에 봉사하였으며, 여러 번 전형을 담당하여 많은 인재를 뽑았다. 시화의 백미인 <동인시화>와 <동문선> 등을 남겨 신라 이래 조선 초에 이르는 시문을 선집하여 한문학을 대성하였다. 세조 때 <경국대전>과 <동국통감>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왕명으로 <향약집성방>을 국역하였다. 그는 성리학을 비롯하여 천문·지리·의약 등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였다. 저서로 <골계전> <사가정집> <필원잡기> 등이 있다.

서경덕[편집]

徐敬德(1489∼1546)

조선의 학자. 자는 가구, 호는 화담이며, 본관은 당성이다. 그는 집안이 가난하여 독학으로 공부하였으며, 13세 때 <서경>을 읽고 복잡한 태음력의 수학적 계산을 스스로 터득하였다. 18세 때 <대학>을 읽고 격물치지의 원리를 깨달았다. 산림에 묻혀 후진의 교육에 힘을 기울이던 중, 조광조에 의해 현량과에 응시하도록 추천받았으나, 계속 학문 연구에만 전심하였다. 그는 병약한 몸을 치료하기 위해 속리산·지리산 등을 기행하면서 기행시 수편을 남겼다. 그리고 이기론의 본질을 연구하여 기와 이의 상관관계에서 천지만물이 형태화하며 음양으로 분화한다는 이기일원론을 체계화하였다. 또한 인간의 죽음도 우주의 기에 환원된다는 사생일여를 주장하였으며, 도학을 비롯하여 수학·역학 연구로 일생을 보냈다. 황진이의 유혹을 물리친 일화가 유명하며, 박연폭포·황진이와 함께 송도 3절로 불린다. 선조 8년에 우의정에 추증되고, 1585년 신도비가 세워졌다. 저서로 <화담집>이 있다.

서명응[편집]

徐命膺(1716∼1787)

조선의 학자. 자는 군수, 호는 보만재, 본관은 달성이다. 영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서장관으로 청에 다녀왔다. 그 후에 대사헌을 거쳐 황해도 관찰사·수군절도사·한성부 판윤 등을 지냈다. 역학에 통달했으며 실학 연구에 전력한 북학파의 시조로 일컬어지며 학자로서 명망이 높았다. 영조의 명으로 악보를 수집하여 간행했으며 글씨에도 능했다. 저서로 <보만재집> <계몽도설> 등이 있다.

서산대사[편집]

휴정

서 성[편집]

(1558∼1631)

조선의 문신. 자는 현기, 호는 약봉, 본관은 달성이다. 이 이·송익필의 문인으로서 선조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좌랑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피란시켰으며 그 후, 암행어사·경기도 관찰사·판중추 부사 등을 지냈다. 광해군 때 계축옥사에 연관되어 11년간 유배되었다가 인조반정으로 다시 등용되었다. 이 괄의 난과 정묘호란 때에 왕을 피란시켰다. 그는 이인기·이 귀 등과 남지 기로회를 조직하여 역학을 토론했으며, 서화에도 능하였다. 저서로 <약봉집>이 있다.

서유구[편집]

(1764∼1845)

조선의 실학자. 자는 준평, 호는 풍석, 본관은 달성이다. 서명응의 손자이며, 정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교·검열을 지냈다. 현종 때 대사헌·좌참찬·대제학 등을 지냈다. 그는 실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1834년 호남 순찰사로 나갔을 때 백성들의 궁핍함을 보고, 일본에 가는 통신사 편에 부탁하여 고구마 종자를 구입하였다. 그는 이를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어 재배를 장려하였다. 또한 <종저보>를 저술하여 그 재배법을 널리 알렸다. 또한 농업에 관한 상소문을 써서 영농법의 개혁을 역설하였으며, 박세당의 <산림경제>를 토대로 <임원경제지>를 저술하였다. 이 책은 농업을 주로 한 방대한 백과 사서로, 농기구의 그림과 전국의 시장 날짜까지 적혀 있다. 저서로 <인제지> <한양 세시기> 등이 있다.

서윤복[편집]

徐潤福(1923- )

마라톤 선수. 서울 출생. 1957년 고려대 상과를 졸업했다. 1946년 제1회 전국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하고, 1947년 제51회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참가해 2시간 25분 39초의 세계 신기록으로 우승하였다. 1960-1977년까지 서울 운동장장 겸 육상연맹 이사를 지냈다. 1976년부터 대한체육회 강화위원으로, 현재 대한육상경기연맹 고문으로 우리나라 체육 발전에 힘쓰고 있다.

서재필[편집]

徐載弼(1866∼1951)

의학자·독립운동가. 전남 보성에서 출생하였으며 일본 도쿄 육군유년학교를 졸업하였다. 1884년 김옥균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이로 인하여, 가족들이 모두 죽음을 당하였으므로 미국에 귀화하였다. 워싱턴 대학에서 의학을 배우고 세균학을 연구하였다. 민씨 정권이 몰락하고 갑오경장이 있자, 귀국하여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고 <독립신문>을 발간하였다. 이상재·이승만·윤치호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독립문을 세우는 등 자유 민권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외신이라는 수구파의 책동으로 강제 출국되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 후, 펜실베이니아에서 병원을 개원했으며 3·1운동이 일어나자 한국 문제를 세계 여론에 호소하였다. 광복 후 과도 정부의 정무관으로 취임하기 위하여 조국으로 돌아왔으나 국내 정세에 어두워 이승만과의 불화로 일하지 못하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의사로서 일생을 마쳤다. 저서로 <자서전>이 있다.

서정인[편집]

徐廷仁(1936- )

소설가. 본명 정택. 전남 순천 출생. 서울대 영문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영문학 수학. 1962년 <사상계> 신인상에 <후송(後送)>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하였다. 이후 <물결이 놀던 날> <의상을 입으라> <미로> <강> <원무(圓舞)> <우리 동네> <산> 등을 발표했다. 그의 작품들은 실체를 상징 또는 환상으로 포착하면서 자의식의 분열을 추적, 진실을 찾지 못한 채 방황하는 지식인의 고민을 분석했다. 87년 전북대 영문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소설집 <강> <토요일과 금요일 사이> 등이 있고, 창작집 <가위> <서정인 문학선> 등이 있다. 한국문학작가상, 월탄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서정주[편집]

徐廷柱(1915∼2000)

시인. 호는 미당이며 전북 고창에서 출생하였다. 서울 중앙고보를 중퇴한 후, 1931년 대종사에 입산하였다. 그 후, 중앙불교전문학교를 졸업하였으며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장하였다. 1941년 첫 시집 <화사집>을 출간하였으며, 1946년 <귀촉도>를 출간하여 놀라운 반응을 일으켰다. <화사집> 시대에는 원인 모를 깊은 죄의식이 바탕을 이루어 스스로 종의 아들·천치·죄인으로 규정하고 그 운명적인 업고를 문둥이나 뱀을 통하여 울부짖었다. 1961년 <신라초>를 출간하여 불교사상을 한층 심화하면서 한국적 전통을 새롭게 해석하였다. 자유문학상과 5·16 문예상을 수상했으며, 예술원 회원·문협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시집으로 <동천> 등이 있으며, <서정주 시선> <시문학 개론> 등이 있다.

서 희[편집]

徐熙(942∼998)

고려의 외교가이며 문신 출신 장군. 자는 염윤이며 본관은 이천이다. 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10여년 간 외교가 중단되었던 송에 가서 국교를 열고, 송 태조로부터 검교 병부상서의 벼슬을 받고 귀국하였다. 993년 거란이 침입해 오자, 중군사로서 출병하였다. 이 때 전세가 불리해지자, 조정에서는 소손녕의 요구대로 서경 이북의 땅을 내주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서 희는 국토의 할양에 극력 반대하여 소손녕의 군영으로 가서 담판을 시도했다. 서 희는, 고려는 고구려의 옛 땅이 터전이므로 국명도 고려임을 설득시켜 거란군을 철수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태보·내사령을 지냈고, 병으로 개국사에서 사망하였다. 덕종 때 태사에 가증되었다.

석주명[편집]

石宙明(1910∼1950)

박물학자. 평양에서 출생하였으며 일본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하였다. 개성 송도중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나비 표본 등을 수집하여 미국 박물관의 곤충과 교환하는 등 연구를 계속하였다. 1940년, 우리나라 나비 종류를 분류하여 정리한 <접류 목록>을 저술하였다. 특히 <배추흰나비의 변이 곡선>은 생물 분류학과 측정학에 커다란 업적으로 남았다. 1950년 6·25전쟁중에 횡사하였다.

선덕 여왕[편집]

善德女王(?∼647)

신라 제27대 여왕(재위 632∼647). 이름은 덕만, 호는 성조황고이며 선덕은 시호이다. 진평왕의 맏딸로 진평왕이 후사 없이 죽자 백성들이 그를 즉위시켰다 하는데, 이로써 삼국시대 최초의 여왕이 되었다. 634년 연호를 인평으로 고쳤으며, 이듬해 당으로부터 주국 낙랑군공 신라왕에 책봉되었다. 638년 고구려가 칠중성에 침입하자 이를 격퇴하였으며, 642년 백제 의자왕에게 40여 성을 빼앗겼고 이듬해 당에 원병을 청했다. 647년 비담·염종 등이 여왕의 무능을 구실로 모반하였으나 곧 진압시킨 후 죽었다. 그러나 여왕은 그동안 선정을 베풀어 민생을 향상시켰으며 구휼 사업에 힘썼고 당 문화를 수입하였다. 특히 불법을 들여오고 황룡사 구층탑·첨성대를 건립하는 등 업적을 남겼다.

선우 휘[편집]

鮮于輝(1922∼1986)

작가.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경성사범학교를 거쳐 일본 도쿄 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하고, 1949년 이후 정훈장교로서 육군에 복무하였다. 조선일보 논설위원을 지냈고, 1955년 <문학예술>지에 <불꽃>을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하였다. 현대인의 착잡한 사고와 행동 과정을 추구한 작품을 많이 썼다. 1956년 동인문학상을 수상하였다. 단편집 <불꽃> <5분간> 등이 있다.

선조[편집]

宣祖(1552∼1608)

조선의 제14대 왕(재위 1567∼1608). 덕흥군 초의 아들로 하성군에 봉해졌다가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즉위하였다. 이 황·이 이 등 많은 인재를 등용하여 유학을 장려하였으나, 계속되는 당쟁으로 동서로 당이 나뉘고 동인이 다시 남북으로 갈리는 등 당쟁의 회오리 속에서 국력이 쇠약해졌다. 이러한 때 정치 기강이 문란한 틈을 타서 북으로는 2회에 걸쳐 야인들의 침입이 있었으며, 남으로는 일본의 세력이 강해지자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당파를 달리하는 두 사람이 서로 상반되는 보고를 함으로써 대책을 세우지 못하였다. 마침내 1592년 일본이 대군을 몰고 침입하자, 선조는 의주까지 피란하였고 7년간 왜군에게 국토가 유린되어 많은 문화재를 잃었다. 전후에도 당쟁이 그치지 않아 당쟁 속에서 재위 41년간을 보냈다.

선종[편집]

宣宗(1049∼1094)

고려 제13대 왕(재위 1083∼1094). 문종의 둘째 아들이며 순종의 동생이다. 순종 때 중서령을 거쳐 국원공에 봉해졌으며, 순종이 죽자 대를 이어 즉위하였다. 1084년 처음으로 승과를 설치하고 법흥사에 교장도감을 두어 도서를 출판하는 등 불교 발전에 힘썼다. 그는 경사에 밝고 제술에 능하였다.

선화 공주[편집]

善花公主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미모가 뛰어나 백제의 서동(후에 무왕)이 사모하여, 두 사람이 남 몰래 밤에 만나곤 한다는 <서동요>를 지어 금성(지금의 경주)에 퍼뜨렸다. 공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유배되어 가던 중 서동에게 구출되어 결혼하고 백제에 가서 왕비가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무왕이 아니고 모대(동성왕)라고도 한다.

설 순[편집]

楔循(?∼1435)

조선의 학자. 자는 보덕, 본관은 경주이다. 고려 때 귀화한 위구르 인의 손자이며, 태종 때 생원으로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세종 때 교리·좌사경·인동 현감 등을 지냈다. 그는 왕명으로 <효행록>을 증수하였다. 또한 1431년에 집현전 부제학으로서 <삼강행실도>를 편수하였으며 윤 회 등과 함께 <통감훈의>를 저술하였다. 박학하고 역사에 뛰어났으며, 문장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설 신[편집]

薛愼(?∼1251)

고려의 문신. 본관은 순창이며 문과에 급제하여 대각에 재직하였다. 고종 때 어사로서 원에 다녀왔으며, 그 후 추밀원 부사에 올랐다. 그의 어머니 조씨는 세 아들이 모두 문과에 급제한 공으로 국대 부인에 봉해졌다.

설총[편집]

薛聰

신라의 석학. 자는 총지, 호는 빙월당이며 원효 대사와 요석 공주의 아들이다. 강 수·최치원 등과 더불어 신라 3문장 중의 한 사람이며 벼슬은 한림에 이르렀다. 어려서부터 유달리 총명하여 경사에 밝았다. 경덕왕 때 박사로서 강 수와 함께 구경을 강론하여 유학 발전에 기여하였다. 568년 북한산성 비봉에 세운 진흥왕 순수비문에 이두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이두를 창작했다기보다는 집대성 내지 정리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한편 <화왕계>를 지어 신문왕을 충고했다는 일화가 <삼국사기>에 전한다.

성경린[편집]

成慶麟(1911- )

국악인. 서울 출생. 이왕직(李王職) 아악부원양성소 졸업. 이왕직 아악부 아악수·아악수장, 국립국악원장, 문교부 국악진흥위원, 교육과정 심의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예술원 회원으로 있다. 방송문화상, 서울시문화상을 수상했다. 저서에 <조선음악독본> <조선의 아악> <조선의 민요> 등이 있다.

성덕왕[편집]

聖德王(?∼737)

신라 제33대 왕(재위 702∼737). 신문왕의 둘째 아들이며 효소왕의 동생이다. 여러 차례 당에 사신을 보내어 당 문화 수입에 힘썼다. 718년 처음으로 누각을 만들었으며, 732년 발해를 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대동강 이남의 땅을 신라의 영토로 하였다.

성삼문[편집]

成三問(1418∼1456)

조선의 학자이며 충신으로 사육신의 한 사람. 자는 근보, 호는 매죽헌, 본관은 창녕이다. 홍주에서 출생하였는데, 태어나려고 할 때에 공중에서 "낳았느냐?"고 3번 묻는 소리가 났으므로 '삼문'이라 이름을 지었다. 세종 때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항상 임금의 측근에서 좋은 건의를 많이 하였다. 또한 집현전 학사로서 글씨를 잘 썼고 문장이 뛰어나서 세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신숙주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1455년 세조가 단종을 내쫓고 왕위에 오르자 성삼문은 예방승지로서 국새를 안고 통곡하였다. 그는 유응부 등과 같이 명 사신이 왔다가 돌아가는 송별 연회석상에서 세조를 죽이기로 하였다. 그러나 연회 당일, 세조는 갑자기 자리가 좁으니 운검을 그만두라고 지시하였다. 이 운검은 임금이 정좌한 앞에 큰 칼을 들고 서는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당시 도총관으로 있던 성삼문의 아버지인 성 승과 유응부가 이를 맡기로 되어 있었다. 유응부는 그대로 하려고 하였으나 후일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런데 같이 모의했던 김 질이 세조에게 이같은 사실을 알림으로써 박팽년·이 개·하위지·유응부·유성원·성 승과 함께 체포되어 왕의 심문을 받았다. 이 때도 성삼문은 세조를 보고 "하늘에 태양이 하나밖에 없듯이, 나라에도 두 임금이 있을 수 없소" 하며 단종에 대한 충절을 굽히지 않았다. 이리하여 그는 거열(두 대의 마차에 두 다리를 각각 묶어 몸을 찢는 형벌)의 극형을 받고 죽었으며 아버지와 세 동생, 네 아들이 모두 살해되었다. 영조 때 이조판서로 추증되었으며, 저서로 <성근보집>이 있다.

성석린[편집]

成石璘(1338∼1423)

고려의 문신. 자는 자수, 호는 독곡, 본관은 창녕이다.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전리총랑·성균관 사성·지신사를 지냈다. 1375년 우왕이 즉위한 후, 왜구가 침입하자 조전원수가 되어 양백연의 부하로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그 후 양광도 관찰사를 지낼 때, 큰 흉년이 들자 의창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여 전국에 의창을 두게 하였다. 조선 건국 후에도 벼슬길에 나아가 영의정까지 이르렀다. 시문에 능하고 진초(眞草)를 잘 써 당대 명필로 이름을 떨쳤다. 글씨로 <조선 태조 건원릉 신도비>가 있다.

성왕[편집]

聖王(?∼554) 백제 제26대 왕(재위 523∼554). 무녕왕의 아들이며 성명왕이라고도 한다. 양의 고조로부터 백제왕에 책봉되었으며 양에 예물을 바쳤다. 538년 고구려와 충돌이 심해지자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하고 남부여라고 하였다. 554년 신라와 같이 한강 유역의 빼앗겼던 땅을 되찾았으나, 이를 다시 신라 진흥왕에게 빼앗겼고 왕자 여창과 함께 친히 신라를 치다가 관산성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성왕[편집]

成王(?∼795) 발해 제5대 왕(재위 794∼795). 문왕의 손자이며 대굉림의 아들이다. 문왕에 이어 대원의가 즉위했으나, 포악하여 백성들에게 살해되자 왕위에 올랐다. 연호를 중흥으로 고치고 전의 도읍지였던 상경 용천부로 다시 도읍을 옮겼다.

성종[편집]

成宗(960∼997) 고려 제6대 왕(재위 982∼997). 태조의 일곱째 아들인 욱의 둘째 아들로, 981년 경종이 위독하자 즉위하였고 이듬해에는 5품 이상의 대신들에게 정치의 옳고 그름을 글로 써서 올리게 하였다. 이때 최승로는 역대 왕들의 선악을 평한 '시무 28조'를 올렸다. 성종은 최승로 등 유학자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정치를 단행함으로써 고려 초기의 여러 문물 제도를 정비하였다. 982년 행정 개혁을 단행하여 백관의 칭호를 개정하고, 이듬해 중앙에 3성, 6조, 7시를 제정하고 지방에는 12목을 설치하였다. 995년 6관을 상서 6부로 하는 등의 관제를 개편하고 지방 행정 구역을 10도로 고쳤다. 또한, 불교의 폐단을 고려하여 불교적인 행사를 금하고 유교주의를 채택하여 학문과 농업을 장려하였다. 995년 송과의 사대관계를 바꾸어 거란의 연호를 사용하는 등 거란과 외교 관계를 맺고 북쪽 경비에 특히 힘썼다.

성종[편집]

成宗(1457∼1494) 조선 제9대 왕(재위 1469∼1494). 세조의 손자이며 덕종의 아들이다. 세조의 왕후인 정희 대비의 명으로 13세에 즉위했고, 그 후 7년 동안 정희 대비가 섭정하였다. 현명한 왕으로 학문을 좋아하고 글씨와 그림에도 능했으며, 홍문관·존경각·독서당 등을 설립하고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동문선> 등을 편찬하게 하였다. 또한 <경국대전>을 반포하고 <대전속록>을 편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의 어머니인 윤씨를 비로 맞았다가 폐위시켜, 연산군 때 갑자사화가 일어나는 원인을 만들었다. 성종은 배불정책을 썼으며 여러 문물 제도를 정비하여 조선 초창기를 융성하게 하였다.

성철[편집]

性徹(1912-1993)

현대 우리나라의 선불교 전통을 대표하는 수행승. 속명은 이영주. 경상남도 산청 출생. 대한불교 조계종의 종정(최고 우두머리)을 지냈으나 세속에 거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교리에 대한 그의 입장은 저서인 <선문정로>(1981)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나라 선불교의 수행 전통으로 여겨온 지눌의 돈오점수에 반대하여 돈오돈수론을 주창했다. 그 후 현재까지 우리나라 불교 철학계의 돈·점 논쟁은 활발하게 이루어져 왔다. 성철에 따르면, 앎과 행동이 일치된 단계의 앎만이 진정한 앎이며, 지눌의 돈오점수는 이론적 앎일 뿐 참 앎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눌과 성철은 가르침의 대상이 달랐기 때문에 옳고 그름을 따지기가 어렵다. 지눌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여 인생의 가르침을 폈으며, 성철은 수행승을 대상으로 했다.

성충[편집]

成忠(?∼656)

백제의 충신. 656년 좌평으로 있을 때 의자왕이 방탕하여 국운이 위태로워지자, 정사를 돌보지 않음을 간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옥에 갇히었다. 그는 옥중에서 단식하면서 왕에게 글을 올려 만약 외적이 침입하면 백제의 험난한 지형을 이용하면 된다고 하였다. 660년 나·당 연합군이 침입하여 사비성이 위태롭게 되자 의자왕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음을 후회하였다. 마침내 사비성이 함락되자, 왕은 항복하고 백제는 멸망하였다. 계백·흥수와 함께 백제의 3충신으로 일컬어진다.

성 현[편집]

成俔(1439∼1504)

조선의 학자. 자는 경숙, 호는 용재, 본관은 창녕이다.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교 등을 거쳐 사록에 올랐다.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 경연관이 되어 베이징에 갈 때 도중에서 지은 기행시를 엮어 <관광록>이라 하였다. 성종 때 지평을 거쳐 성균 직강이 되고 이듬해 한명회를 따라 베이징에 다녀왔다. 1488년 평안도 관찰사로 있을 때 명의 사신과 서로 시를 주고받음으로써 그들을 탄복케 하였다. 1493년 유자광 등과 <악학궤범>을 편찬하여 음악을 집대성하였으며, 유자광 등과 함께 왕명으로 고려 가사인 <쌍화점> <이상곡> <북전> 등을 다시 고쳐 썼다. 그의 저서 <용재총화>는 조선 초의 정치·사회·문화면을 살피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죽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되었다. 저서로 <허백당집> <풍아록> 등이 있다.

성 혼[편집]

成渾(1535∼1598)

조선의 학자. 자는 호원, 호는 우계, 본관은 창녕이다. 17세 때 감시 초시에 합격했으나 병으로 복시를 못 치러 과거를 포기하였다. 백인걸의 제자가 되어 성리학을 연구하였으며, 이 이와 '사단칠정 이기설'을 토론하고 새로운 학설을 주창하였다. 이 이가 선조에게 권하여 종묘 서령의 벼슬을 내렸으나, 병으로 등청하지 못하자 왕이 약을 보내 주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해 세자를 모시었고, 환도 후 영의정 유성룡과 함께 일본과 화평을 맺을 것을 주장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고향인 파주로 내려갔다. 이 황의 학설을 이어받은 성리학의 대가로 이 이와 함께 <사칠속편>을 완성하였고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죽은 후, 반대파들에 의해 관작을 빼앗겼으나, 인조 때 복귀되고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우계집> <주문지결> 등이 있다.

성희안[편집]

成希顔(1461∼1513)

조선의 공신. 자는 우옹, 호는 인재, 본관은 창녕이다.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연산군 때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연산군의 횡포를 풍자하여 시를 써서 바쳤는데, 이로 인하여 당시 천시되던 무신으로 직위가 떨어졌다. 그 후, 연산군이 점점 포악해지자 박원종·유순정 등과 모의하여 1506년 중종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폐하였다. 그 후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사람됨이 너그럽고 과단성이 있었으며 조정에 들어간 30여 년간 많은 치적이 있다.

세오녀[편집]

細烏女

신라 아달라 왕 때의 여인. 일본에 가 왕이 된 남편 연오랑을 기다리고 있던 중, 우연하게 남편의 신이 놓여 있는 바위가 떠내려오자, 그것을 타고 일본에 건너가 남편을 만나 왕비가 되었다는 설화의 주인공이다.

세조[편집]

世祖(1417∼1468)

조선의 제7대 왕(재위 1455∼1468). 세종의 둘째 아들이며 문종의 동생이다. 무예에 능하고 병서에 밝았다. 세종 때 수양 대군에 봉해졌으며, 단종이 즉위하자 고명 사은사로 명에 다녀왔다. 단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왕위를 빼앗기 위하여 황보 인·김종서 등을 죽이고 동생인 안평 대군을 강화도에 유배시킨 다음, 사약을 내려 죽게 하였다. 1455년 마침내 단종을 핍박하여 선위 교서를 내리게 하고 즉위하였다. 성삼문 등의 집현전 학자들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자 모두 사형에 처하고 집현전을 폐지하였다. 1457년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하여 영월로 유배하고 사약을 내려 죽게 하였다. 이듬해 상평창 제도를 실시하였으며, 궁궐에 뽕나무를 심어 궁녀들에게 누에를 치게 하였고 <잠서>를 한글본으로 발간케 하였다. 각 도에 둔전제를 실시하게 하고 <경국대전>을 간행하였으며 간경도감을 두어 불경을 우리 말로 번역하게 하였다. 불교를 숭상하여 서울에 원각사를 세우고 <원각경>을 편찬케 하였다. 또한 국경 지대에 성을 쌓게 하여 변방의 경비를 튼튼히 하였으며,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고 강 순으로 하여금 건주위의 야인들을 토벌하게 하였다. 세조는 재위 기간 동안 서적 간행과 병기의 제조·토지 제도 및 관제 개혁 등 수많은 업적을 쌓았으며 왕권 확립에 크게 공헌하였다. 만년에는 왕위 찬탈로 인한 인간적 고뇌에 싸여 불교에 귀의하였으며, 문둥병을 앓다가 죽었다고 한다. 저서로 <석보상절> <역대병요> 등이 있다.

세종[편집]

世宗(1397∼1450)

조선의 제4대 왕(재위 1418∼1450). 태종의 셋째 아들이며, 1413년 충녕 대군에 봉해졌다. 1418년, 형인 양녕 대군이 세자의 자리에서 쫓겨나자, 세자로 책봉되어 2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1420년에 집현전을 설치하여 젊고 학식이 풍부한 문신들로 하여금 학문을 연구하게 하는 한편, 각 도의 관찰사들에게 명하여 숨은 인재를 추천하도록 하였다. 또한 각종 책을 발간해 내는 데 필요한 활자와 인쇄술을 개량함으로써 경자자·갑인자·병진자 등의 구리 활자를 주조하였다. 이로써 친히 지은 <월인천강지곡>을 비롯하여 <고려사>, 예법과 도덕에 관한 <삼강행실도> <효행록> <오례의>, 군사에 관한 <역대병요>, 농사에 관한 <농사직설>, 중국의 의학 지식을 모은 <의방유취>, 지리책인 <팔도지리지> 등이 편찬 발간되었다. 특히, 세종은 나라 말이 없어 백성들이 큰 불편을 겪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겨 정인지·성삼문·신숙주 등 집현전 학자들로 하여금 익히기 쉽고 쓰기 쉬운 우리 글을 연구토록 하였다. 이것이 1443년에 완성되어 3년 후인 1446년에 반포된 '훈민정음'이다. 이렇듯 한글이 새로 만들어지자, 세종은 한글로써 <용비어천가> <석보상절> 등을 편찬하게 했는데, 조선 초기의 언어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박 연으로 하여금 아악기를 고쳐 그 때까지의 모든 악기·악보 등을 정리하게 하였으며, 장영실 등에게 명하여 혼천의·해시계·물시계 등의 천문 기계를 발명하게 하였다. 그리고 측우기를 만들어 세계 최초로 비의 양을 측정하게 하였다. 한편, 국방과 외교에도 힘을 기울여, 1443년 최윤덕을 북쪽에 보내 야인을 정벌하게 하고 김종서를 시켜 두만강 방면에 6진을 설치하게 하였다. 또한 압록강 방면에 4군을 설치했고 무기 제조·병서 간행 등에도 힘썼다. 일본에 대해서는 무역선의 입항을 허락하는 등 회유책을 썼으며, 1419년 비인현에 왜구가 침입하자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를 정벌하게 했으나 그들을 위해 삼포(제포·부산포·염포)를 개항하였다. 세종은 재위 기간 동안 국내 정치와 문화 등에 이바지하여 우리나라 역대 임금 가운데서 가장 찬란한 업적을 남겨 해동의 요순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또 조선 왕조의 기틀을 더욱공고히 한 임금으로 손꼽힌다. 그는 글씨와 그림에도 뛰어났다.

소성왕[편집]

昭聖王(?∼800)

신라 제39대 왕(재위 799∼800). 원성왕의 태자인 인겸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태자로 죽었으므로 궁중에서 자라서 789년에 당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그 후 대아찬이 되고 시중 등을 거쳐 이듬해 병부령이 되었다. 795년 태자로 책봉되어 왕위에 올랐다. 당의 덕종으로부터 개부의동삼사 검교대위 신라왕에 책봉되었다. 재위 2년 만에 죽어 이후로 신라 왕위 쟁탈전의 원인이 되었다.

소수림왕[편집]

小獸林王(?∼383)

고구려 제17대 왕(재위 371∼384). 고국원왕의 아들이며, 일명 '소해 주류왕'이라고도 한다. 372년 진의 왕 부견이 사신편에 승려 순도와 불상·경문을 보내자, 사신을 보내어 사례하였다. 이 해 태학을 세웠으며, 이듬해 율령을 반포하였다. 375년 초문사를 지어 순도를 이곳에 머물게 하고 또 이불란사를 세워서 진의 승려 아도를 주지로 삼았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불교의 시초가 되었다. 그 해 백제를 쳐서 수곡성을 점령했으며, 거란의 침략이 있었으나 이를 물리쳤다. 왕세자가 없었으므로 동생 이련(후의 고국양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소지왕[편집]

炤知王(?∼500)

신라 제21대 왕(재위 479∼500). 자비왕의 맏아들로 일명 '조지·비처'라고 한다. 480년에 말갈이 북방을 침입하였고 이듬해에는 고구려가 쳐들어왔다. 484년 다시 고구려가 침입하자, 백제와 연합하여 이를 물리쳤으며, 백제와는 화평을 유지했고, 이벌찬 비지의 딸을 백제 왕에게 보내었다. 487년 처음으로 각 지방에 우편역을 설치하였으며, 490년 시장을 개설하기도 하였다.

소현 세자[편집]

昭顯世子(1612∼1645)

인조의 맏아들. 1625년 세자로 책봉되었다. 정묘·병자호란을 당하여 그는 봉림 대군(효종)과 함께 청의 선양으로 볼모로 잡혀가서 만주어도 배우고 청의 군사를 따라 베이징에 들어갔다. 그곳에 와 있던 천주교 선교사 아담 샬에게서 천주교와 서양의 과학 문명에 대한 여러 가지 지식을 배웠다. 귀국할 때 천주교에 관한 서적과 지구의·천주상 등을 가지고 왔다. 그러나 귀국 후 2개월 만에 병으로 죽었으며, 그가 가지고 온 천주교 서적들도 불살라져 천주교 전래의 기회도 놓치게 되었다.

소혜 왕후[편집]

昭惠王后(1437∼1504)

조선 덕종(세조의 큰 아들)의 비. 성은 한씨, 본관은 청주이다. 한 확의 딸로 1455년 수빈에 책봉되었다. 아들 성종이 세자로서 죽은 아버지 덕종을 왕으로 추존하자, 인수 왕비에 봉해졌고 다시 소혜로 봉해졌다. 불경에 조예가 깊어 범어·한어·국어 3자체로 쓴 불경과 부녀자를 위해 편찬한 <여훈>을 남겨 후세에 귀중한 연구 자료가 되고 있다. 손자되는 연산군이 생모 윤씨가 모함으로 폐위 사사된 사실을 알게 되어 참혹한 보복을 할 때 병상에 있던 소혜 왕후가 이를 꾸짖자, 연산군은 머리로 대비를 받아 얼마 후 사망하였다.

손기정[편집]

孫基楨(1912∼

)

체육인. 평북 신의주 출생.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메이지 대학 법과를 졸업하였다. 1936년 베를린에서 열린 제11회 세계 올림픽에 참가하여 마라톤에서 2시간 29분 19초의 기록을 수립하고 우승하였다. 당시 우리나라는 일제하에 있어 일장기를 달고 출전하였다. 동아일보사에서 손기정의 가슴에 그려진 일장기를 지우고 태극기로 바꾸었는데,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는 폐간되었다. 대한체육회 부회장·육상경기연맹 회장·방콕 아시아 대회 대표 단장으로 참가하는 등 우리나라의 체육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받은 투구가 그동안 서독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가 1986년 손기정에게 다시 돌아왔다.

손병희[편집]

孫秉熙(1861∼1922)

독립운동가·종교인. 호는 의암이며 청주에서 출생하였다. 일찍이 동학에 입당하였고,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충청도와 경상도에서 관군과 싸웠다. 그 후 일본을 거쳐 상하이로 망명하여 이상헌이란 가명으로 경찰의 눈을 피했다. 1897년 최시형의 뒤를 이어 동학의 3세 교주가 되었으며, 1904년 '진보회'를 조직하였다. 1906년 천도교라 개칭하고 교세 확장에 힘쓰다가 보성전문학교와 보성중학교를 인수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는 한편, 보성사 인쇄소를 부설하고 <천도교 월보>를 발간하였다. 1919년 기독교·불교의 대표들과 3·1운동을 일으켜 민족대표 33인의 필두로 조선 독립을 선언하다가 체포되어 복역하였다. 이듬해 병보석으로 나와 요양중 죽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저서로 <삼전론> <천도 태원경> 등이 있다.

손소희[편집]

孫素熙(1917-1987)

소설가. 함북 경성 출생. 일본 니혼대학 수학, 외국어대학 영문과 졸업(1961). 1946년 <백민>에 <맥(貊)에의 결별>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그의 초기작품은 일본과 만주 등을 무대로 한 일제하의 민족의식과, 남녀의 애정과 그 고민상을 극적으로 다루었으며, 이후의 작품에서는 여성심리를 지적으로 추구하여 성격적인 패턴을 제시하고 세태를 반영하는 작품과, 남성의 존재를 시니컬하게 풍자하면서 그 내면상을 파고드는 인간의 행동과 성격·심리 등을 다각적으로 보여준다. 60년 중앙대 예대 교수와 83년 소설가협회 대표의장을 지냈다. 서울시문화상과 5월문예상 등을 수상했으며, 주요 작품으로 단편 <이라기> <회심> <현해탄> <닳아진 나사> <창포 필 무렵> <그날의 햇빛은> 등이 있으며, 장편으로는 <태양의 계곡> <에덴의 유역> <원색의 계절> 등이 있다. 작품집으로는 <다리를 건널 때> <갈가마귀 그 소리> <창포 필 무렵> <그날의 햇빛은> 등이 있다.

손재형[편집]

孫在馨(1902∼1981)

서예가. 호는 소전이며 전남 진도에서 출생하였다. 양정의숙을 거쳐 외국어학원 독어과를 졸업하였다. 중국의 금석학자 나진옥에게서 서화와 금석학을 공부하였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서예가로 특히 한글에도 전서·예서·행서 등의 글씨체를 창안해 내어 한글 글씨를 예술적인 경지에까지 끌어올리는 데 힘썼다. 서울시 문화위원·예술원 회원 등을 지내고 서울시 문화상·예술원상을 받았다. 글씨로 한글에 <창경원> <화랑대> 등이 있으며, 한문에 <이 충무공 벽파진 전첩비> <영빈관> 등이 있다.

손창섭[편집]

孫昌涉(1922-1973)

소설가. 평양 출생. 일본 니혼 대학에서 수업. 1925년 <문예>지에 <공휴일(公休日)>이 추천됨으로써 문단에 등장했는데, 그의 작품 세계는 착실한 사실적 필치로 비정상적 인물을 그림으로써 현대의 불안·절망 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1950년대의 대표적인 작가로 1955년 현대문학 신인상을, 1958년 단편 <잉여 인간>으로 제4회 동인문학상을 받았다. 작품집에 <비오는 날>(1959), <낙서족>(1959), 장편에 <부부(夫婦)>(1962) 등이 있다.

솔거[편집]

率居 신라 초 진흥왕 때의 화가. 어려서부터 그림에 열중했으나, 스승이 없어 천신께 가르침을 받았는데, 꿈 속에 단군이 나타나 신필을 주었다는 전설이 있다. 황룡사 벽에 그린 <노송도>에는 새들이 날아들었다고 하며, 이외에도 <관음보살상> <유마거사상> <단군 화상>이 있었다 하나 전하여지지 않는다.

송계연월옹[편집]

松桂烟月翁

조선의 가인. <고금가곡>의 편찬자로 본명은 알 수 없다. <고금가곡>의 권말에 갑신춘 송계연월옹이란 편찬기와 아울러 이 책에 수록된 숙종 때 가인인 김유기의 작품이 실린 것으로 미루어 보아, 1704년(숙종 30) 이후의 인물로 추측된다. <고금가곡>에 시조 14수가 수록되어 있다.

송규렴[편집]

宋奎濂(1630∼1709)

조선의 문신. 자는 도원, 호는 제월당, 본관은 은진이다. 송준길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으며, 효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이조좌랑 등을 지냈다. 현종 때 사간으로 송시열·송준길 등의 죄를 풀어 줄 것을 간하다가 벼슬에서 쫓겨났다. 1680년 서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자 대사헌을 지냈다. 그는 학문에 뛰어났으며, 송시열·송준길과 함께 3송이라 불리었다. 저서로 <제월당집>이 있다.

송기숙[편집]

宋基淑(1935- )

작가. 전남 장성 출생. 전남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64년 <현대문학>에 <창작 과정을 통해 본 손창섭>이 추천받았다. 1965년 <이상서설>로 추천 완료. 1966년 단편 <대리 복무>에 이어 장편 <자랏골의 비가> 등을 발표했다. 1978년 긴급 조치 제9호 위반. 1980년 광주 사태로 다시 구속, 이듬해 석방되었다. <녹두 장군> <개는 왜 짖는가?> <휴전선 소식> 등을 발표했고, 현재 전남대 교수로 있다. 현대문학상과 제9회 만해문학상을 받았다. 그는 현실의 부정에 과감히 대처하는 80년대 행동하는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송만갑[편집]

宋萬甲(1866∼1939)

조선 말의 명창. 전남 구례에서 출생했으며, 7세에 소리 공부를 시작하여 후에 원각사의 간부가 되었다. 소리로만 부르던 <춘향가> <심청가>를 창극화하여 공연하였다. 궁내부 별순검을 지냈으며, 이동백·정정렬 등과 함께 '조선 성악연구회'를 설립하여 제자 양성에 힘썼다.

송병수[편집]

宋炳洙(1932- )

소설가. 경기도 개풍 출생. 1957년 단편 <쑈리 김>이 <문학 예술>지에 추천됨으로써 문단에 등장하여 1964년 단편 <잔해(殘骸)>로 동인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주요 단편에 <22번형> <환원기(還元期)> <잔해> 등이 있다.

송병준[편집]

宋秉畯(1858∼1925)

조선 말의 정치가. 본관은 은진이며 함남 장진에서 출생하였다. 서울에 올라와 민영환의 식객으로 있다가 무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을 지냈다. 1884년, 갑신정변 후 밀령을 받고 김옥균을 암살하러 일본에 갔다가 도리어 그의 정신에 공명하여 동지가 되어 귀국하였다. 1886년 김옥균 일파로 몰려 구속되었으나, 민영환의 도움으로 풀려나왔다. 그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나 체포령이 내리자 일본으로 망명하였으며, 러·일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의 통역으로 귀국하였다. 윤시병·이용구 등과 함께 '일진회'를 조직하여 일본의 앞잡이로 활동하였으며, 1907년 이완용 내각의 농상공부 대신·내부대신을 지내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경술국치 성사의 공으로 백작의 작위를 받았다.

송상현[편집]

宋象賢(1551∼1592)

조선의 문신. 자는 덕구, 호는 천곡, 본관은 여산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공조 정랑과 군자감의 정 등을 지냈다. 1584년에는 사신으로 명에 다녀왔으며, 1591년 동래 부사가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 부산이 함락되고, 이어 동래에 쳐들어온 왜병과 싸웠을 때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했다.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관복을 갑옷 위에 입고 북쪽의 임금께 절을 올린 후 성문의 누각에 앉아 태연히 잡혀 죽었다. 적장이 그의 충절에 탄복하여 송상현을 살해한 자기 부하를 잡아 죽이고, 그를 동문 밖에 장사 지내 주었다 한다. 그 후 조정에서 그 아들에게 벼슬을 내리고 예관을 보내 제사를 지내 주었다.

송 순[편집]

宋純(1493∼1583)

조선의 문신. 자는 수초, 호는 면앙정, 본관은 신평이다.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명종 때 주문사로 명에 다녀왔다. 이 황 등 신진 유학자와 대립했으며, 선조 때 대사헌·한성부 판윤 등을 지냈으며 나이가 많아 기로소에 들어갔다. 전남 담양에 석림정사와 면앙정을 짓고 독서와 시조를 지으며 여생을 지냈다.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선구자이며 저서로 <면앙집> <기촌집> 등이 있다.

송시열[편집]

宋時烈(1607∼1689)

조선의 학자·정치가. 자는 영보, 호는 우암, 본관은 은진이다. 김장생의 제자로 인조 때 사마시에 장원 급제하여 경릉 참봉이 되었다. 이어서 봉림 대군(후의 효종)의 스승이 되었으며, 1649년 효종이 왕위에 오르자 송시열은 왕을 보좌하면서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왕에게, 백성들에게 이익이 되는 세금 제도인 대동법을 실시하도록 했으며, 농업을 장려하도록 간하였다. 그는 서인의 지도자로서 남인과 맞섰으며, 한때 당파 싸움으로 인하여 거제도로 귀양가기도 하였다. 당시 서인파 안에서도 분열이 일어나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나누어졌다. 1689년 숙종이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을 왕세자로 책봉하자, 이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려 숙종의 미움을 사 제주도로 귀양가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 후 5년 만에 조정에서 관작을 복구하고 시호를 내렸다. 그는 평생을 주자학 연구에 바쳤으며 '이기일원론' 사상을 발전시켰다. 그는 성격이 과격하여 많은 정적을 가졌으나, 뛰어난 학식으로 많은 학자를 길러냈다. 그는 당파 싸움으로 혼란했던 당시에도 학문에 뜻을 두어 성리학을 크게 발전시켰다. 후에 '송자'라는 성인의 칭호를 받음으로써 유명하게 되었다. 저서로 <주자대전차의> <이정서분류> <문집> 등이 있다.

송익필[편집]

宋翼弼(1534∼1599)

조선의 학자. 자는 운장, 호는 구봉, 본관은 여산이다. 이 이·성 혼 등과 사귀어 성리학을 논하여 통하였고 예학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문장에 능해 8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시와 글씨에도 탁월하였다. 김장생·정 엽 등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으며, 특히 김장생은 스승의 예학을 계승하여 조선 예학의 대가가 되었다.

송인명[편집]

宋寅明(1689∼1746)

조선의 문신. 자는 성빈, 호는 장밀헌, 본관은 여산이다.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을 거쳐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다. 영조 때 동부승지가 되어 탕평책의 선두로서 당쟁을 막고 질서를 바로잡는 데 공을 세웠다. 그 후 왕명으로 박사수와 함께 <감란록>을 편찬하였다. 죽은 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송준길[편집]

宋浚吉(1606∼1672)

조선의 문신. 자는 명보, 호는 동춘당, 본관은 은진이다. 김장생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효종이 즉위하자 사헌부 집의로 기용되어 당시 정치를 어지럽히던 김자점을 몰아냈다. 1659년 병조판서가 되어 송시열과 함께 노론의 지도자가 되었다. 효종이 죽자, 자의 대비의 복상 문제로 송시열과 함께 윤 휴·윤선도의 공격을 받고 스스로 물러나 회덕에서 은거하였다. 문장과 글씨에 능했으며 영조 때 문묘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동춘당집> <어록해> 등이 있고, 글씨로 <이시발 신도비> 등이 있다.

송진우[편집]

宋鎭禹(1889∼1945)

독립운동가·정치가. 호는 고하이며 전남 담양에서 출생하였다. 일본 메이지 대학을 졸업하고 김성수와 함께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한편, 중앙중학교 교장으로 육영사업에 힘썼다. 3·1운동 때 독립운동을 지도하다가 1년간 복역하였다. 1921년 동아일보사 사장에 취임하였으나 일제의 압력으로 사직하고, 만주 크리스트교 청년회 주최 태평양 회의에 대표로 참석하여 다시 투옥되었다. 출옥 후에도 계속 독립운동을 지도하였으며, 광복이 되자 한국 민주당을 조직하여 수석 총무로 있으면서 정부 수립을 위해 활동하다가, 이 해 자택에서 한현우에게 암살당하였다.

송치규[편집]

宋穉圭(1759∼1838)

조선의 학자. 자는 기옥, 호는 강재, 본관은 은진이다. 김정묵 문하에서 배울 때 너무 온순하여 스승이 호를 강재라 지어주었다. 순조 때 이조참판까지 내렸으나 모두 사퇴하고, 현종 때 정헌 대부에 올랐다. 천성이 온순하고 의리에 투철하여 그가 죽자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문인 100여 명이 모두 상복을 입고 상여를 따랐다. 이 이·김장생의 학문을 계승하여 '이기일원론'을 주장하였으며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송한필[편집]

宋翰弼

조선의 학자. 자는 계응, 호는 운곡, 본관은 여산이다. 송익필의 동생으로 당시의 대학자 이 이가 말하기를 "성리학을 가지고 논할 사람은 한필과 익필밖에 없다"고 하였다.

수로 부인[편집]

水路夫人

신라 성덕왕 때 순정공의 부인. 남편이 강릉 태수로 부임하는 도중, 벼랑에 핀 철쭉꽃을 갖고 싶어하자, 소를 몰고 가던 노인이 이를 꺾어 주면서 <헌화가>를 지어 바쳤다 한다. 그런데 수로 부인이 임해정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용이 나타나 수로 부인을 바다 속으로 끌고 갔다. 그 때 한 노인이 순정공에게 "근처의 백성을 모아 노래를 부르게 하고 막대기로 언덕을 치면 부인이 나올 것이다"고 하여 그 말대로 하였더니 수로 부인이 나왔다고 한다. 수로 부인은 절세미인이어서 산과 바다를 지날 때, 여러 번 신들에게 붙들려 갔다고 한다.

숙종[편집]

肅宗(1054∼1105) 고려 제15대 왕(재위 1095∼1105). 문종의 셋째 아들이며 순종의 동생이다. 문종 때 계림공에 봉해지고 조카인 헌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왕위를 빼앗고 즉위하였다. 1096년 주전관을 두고 주화인 은병을 만들어 사용케 하였으며, 1102년에 해동통보를 만들어 통용케 하였다. 또한 평양에 기자의 무덤을 만들고 사당을 세웠다. 1104년 여진족의 추장 우야소가 침입하자, 임 간을 보내어 방어하게 하였으나 패하였다. 다시 윤 관을 보내어 화약을 체결하였는데, 이로써 정주 장성 밖에 있는 여진 부락은 여진족의 지배가 되었다. 그 후 윤 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군비를 강화하려 하였으나 병을 얻어 죽었다.

숙종[편집]

肅宗(1661∼1720) 조선 제19대 왕(재위 1674∼1720). 현종의 아들로 1667년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674년 왕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 중 대외적인 전쟁이 없어 비교적 태평 성대하였으나, 당쟁이 가장 심했던 시기로 서인과 남인, 노론과 소론의 당파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다. 희빈 장씨를 왕비에 책봉하였으며, 왕비 민씨를 폐위시키는 사건이 일어나, 이와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화를 입었다. 그러나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왕은 선조 말 이래 계속된 사업인 대동법을 평안도·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 실시하여 효과를 거두었다. 또한, 왜란·호란 이후 계속된 토지 개혁을 추진하여 종결지었으며, 주전을 본격적으로 시행하여 중앙관청과 지방관아 등에 통용토록 하였다. 특히 쓸모없는 땅으로 버려 둔 압록강변에 무창·자성의 2진을 신설하여 영토 회복운동을 시작하고, 1712년 백두산 정상에 정계비를 세워 국경선을 확정지었다. 또한 종래 4영이던 군제에 금위영을 만들어 5영이 되게 하였으며, <선원록> <대명집례> 등의 간행과 <대전속록>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이 편찬되었다. 특히, 쟁쟁한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어 조선 후기 성리학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1718년부터 병으로 왕세자(후의 경종)에게 대신 정사를 돌보게 하였으며, 1720년 위독해지자 사관의 입회 없이 이이명에게 연잉군(후의 영조)을 경종의 후계자로 삼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겨 신임사화의 화근을 만들었다.

순정효 황후[편집]

純貞孝皇后(1894∼1966)조선 순종의 왕후. 본관은 해평이며 해풍 부원군 윤택영의 딸이다. 1906년 13세의 나이로 동궁 계비로 책봉되었으며, 1907년 순종이 즉위하자 황후가 되었다. 경술국치 때 친일파들이 조약에 도장을 찍을 것을 순종에게 강요하자, 왕의 도장인 옥새를 감추고 내놓지 않았으나 작은아버지 윤덕영에게 빼앗겼다. 1926년 순종이 죽자 왕자가 없었으므로 왕의 이복동생인 영친왕을 황태자로 책봉하였다. 늙어서는 불교를 믿었으며, 낙선재에서 심장마비로 죽었다.

순조[편집]

純祖(1790∼1834)

조선의 제23대 왕(재위 1800∼1834). 정조의 둘째 아들이며 11세에 왕위에 올랐다. 1801년 최초로 천주교를 탄압하여 신유박해를 일으켰다. 안동 김씨 김조순이 세도하던 시기로 시파·벽파의 당파가 서로 모략하여 조정이 문란하였으며, 지방은 탐관오리의 득세로 민생이 도탄에 빠졌다. 재위 기간 중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으며, 천재지변이 자주 일어나 나라가 불안하였다.

순종[편집]

純宗(1874∼1926)

조선의 마지막 왕(재위 1907∼1910). 고종의 둘째 아들로 1875년 세자에 책봉되었다. 1897년 황태자로 다시 책봉된 후에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묻는 일본의 압력으로 고종이 물러나자 즉위하였다. 융희로 연호를 고치고 영친왕 은을 황태자로 책봉하였다. 그 해에 일본과 한일 신협약을 체결하였으며, 이에 일본은 통감부를 두어 내정 감독권을 가졌고 군대를 해산시켰다. 그러자,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났는데 모두 일본에 의해 진압당하였다. 1908년 동양 척식 회사의 설립을 허락하고, 이듬해 사법권을 일본에 빼앗김으로써 점차 일본에 그 실권을 넘기게 되었다. 1910년 마침내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조선 왕조는 27대 518년 만에 망하고, 이후 36년간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일본은 순종을 창덕궁에 있게 하고 이왕(李王)이라 불렀다.

승화후 온[편집]

承化侯溫(?∼1271)

고려 원종 때의 왕족. 원종이 강화에서 개경으로 환도할 때 삼별초를 지휘하던 배중손 등이 끝까지 반대하자, 조정에서 삼별초 명부를 압수하고 해체를 명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장군 배중손 등은 1270년 강화에서 반란(삼별초의 난)을 일으키고 승화후 온을 강압적으로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계속 이탈자가 늘어나자 진도로 옮겼는데, 이듬해 여·몽 연합군에게 대패하고 아들 환과 함께 원의 홍다구에게 잡혀 죽었다.

신검[편집]

神劍(?∼936)

후백제의 제2대 왕(재위 935∼936). 견훤의 큰아들로 견훤이 10여 명의 아들 중 넷째 아들 금강에게 왕위를 전하려 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양검·용검 등의 도움을 받아 935년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고 금강을 죽인 다음 왕위에 올라 대왕이라고 했다. 그 해 왕 건이 탈출한 견훤과 함께 공격해 오자 패하였으나 용서되어 왕 건으로부터 벼슬을 받았다.

신경림[편집]

申庚林(1935- )

시인. 충북 중원 출생. 동국대 영문과 졸업. 1956년 <문학예술> 잡지에 <갈대>를 비롯한 시들이 추천되어 문단에 나왔다. 한때 고향에 내려가 지내다가 다시 서올로 와 잡지사·출판사 등에 취직해 지내며 시작을 중단했고, 71년 가을호 <창작과 비평>에 <농무> <전야> <서울로 가는 길> 등을 발표하여 주목을 끌면서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재출발 이후의 그의 시들은 '시골의 흙냄새에 묻어서 풍기는 생활의 땀냄새와 한(恨)과 의지 등'이 짙게 풍겨 이른바 민중시인이란 지칭을 얻게 했다. 한편 농민문학·민중문학 등을 주제로 평론들도 발표하였다. 현재 <창작과 비평> 편집 자문위원으로 있다. 저서로 시집 <농무(農舞)> <새재> <남한강>, 평론집 <민중과 문학> 등이 있다.

신경준[편집]

申景濬(1712∼1781)

조선의 실학자. 자는 순민, 호는 여암, 본관은 고령이다. 해박한 지식과 높은 학덕으로 천(天)·관(官)·직(職)·방(方)·성(聲)·율(律)·의(醫)·복(卜) 등의 학문과 해외의 기서뿐 아니라 우리나라 언어·지리에도 도통하였다. 그는 치밀한 연구 업적을 <훈민정음 운해> <도로고> 등의 저서를 통해 정리하였다. 40세가 넘은 후인 1754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서산 군수·사간 등을 지냈다. 1770년 <문헌비고>를 편찬할 때, <여지고>를 담당하여 그 공으로 승정원 동부승지에 뽑힌 후 <팔도지도> <동국여지도>를 완성하였다. 그 후 강계 부사·순천 부사·제주 부사 등을 지내다가, 1779년 고향인 순창으로 내려갔다. 저서로 <소사문답> <의표도> 등이 있다.

신규식[편집]

申圭植(1880∼1922)

독립운동가. 자는 공집, 호는 예관이며 청주에서 출생하였다. 외국어학교에 들어가 중국어를 배우고 구한국군의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부위가 되었다. 그 후 대한 자강회·대한협회 등 독립단체에 들어가 활약하였고, 1909년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1911년 중국에 건너가 쑨원의 신해혁명에도 가담하였으며, 중국 국민당 간부들과 사귀어 한·중 연합단체를 만들어 본격적 독립 운동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1919년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법무총장이 되고, 이듬해에는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의 자격으로 중국 광둥 정부에 특파되어 쑨원과 교섭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받았다. 1922년 임시 정부 내에 내분이 생기고 중국 광둥 정부에도 정변이 생겨 쑨원이 피신하는 사태가 생기자, 민족의 앞날을 근심한 나머지 25일간 단식 끝에 죽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저서로 <한국혼> <아일루> 등이 있다.

신덕 왕후[편집]

神德王后(?∼1396)

조선 태조의 계비. 본관은 곡산이고 상산 부원군 강유성의 딸로 태조가 즉위하자 현비에 책봉되었다. 방번·방석 두 왕자와 경순 공주를 낳았고, 현종 10년 순원현경의 휘호를 추상받았다.

신 돈[편집]

辛旽(?∼1371)

고려 말의 승려. 속성은 신, 이름은 편조, 자는 요공, 호는 청한거사이다. 옥천사 사비의 아들로 승려가 되어 전국 각지를 방랑하다가 김원명의 추천으로 공민왕의 신임을 얻어 정치·종교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는 전민 변정도감을 두고 과감한 개혁 정치를 실시하였는데, 이는 고려 내부의 혼란한 사회적 폐단을 타개하여 질서를 바로잡으려는 것이었다. 신 돈은 부호들이 빼앗은 토지를 원래의 소유자에게 돌려주고 노비로서 자유민이 되려는 자들을 해방시켜 민심을 얻었다. 그러나 그의 급진적 개혁은 상층 계급의 반감을 샀으며, 점차 오만해지고 음란 방탕한 행동을 하므로 신망을 잃었다. 1367년 영록대부 집현전 대학사에 올라 귀족 세력을 무너뜨리고자 천도를 건의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왕의 신임을 잃자, 반역을 꾸미다가 발각되어 수원에 유폐된 후, 1371년 처형되었다.

신돌석[편집]

申乭錫(?∼1906)

조선 말기의 의병장. 경북 영덕에서 출생하였으며 을사조약으로 나라가 위급해지자, 1906년 울진군 평해면에서 의병을 일으켜 많은 일본인을 죽이는 등 당시 영남지방에서 그 세력이 매우 컸다. 이 때 일본 경찰이 신돌석의 체포에 현상금을 걸었는데, 그의 고종 사촌인 김자성이 그를 집에 초대하여 독한 술을 먹여 도끼로 살해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신동엽[편집]

申東曄(1932∼1969)

시인. 충남 부여에서 출생하였으며 단국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건국대학교 대학원 국문과를 수료하였다. 1959년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조선일보> 신춘 문예에 당선됨으로써 문단에 등장하였다. 1967년 펜클럽 작가 기금을 받은 것을 계기로, 그동안 구상해 오던 장편 서사시 <금강>을 집필했다. 이 서사시는 강렬한 민중의 의지와 민족을 주체로 한 역사관을 가지고 동학혁명을 시화한 우리나라 시문학 사상 획기적인 작품이다. 시론과 시극 운동에도 참여하여 시론으로는 <시인 정신론> 등이 있고, 시극 <그 입술에 파인 그늘>은 시극 동인회에 의해 상연되었다. 작품으로는 <삼월> <껍데기는 가라> <4월은 갈아엎는 달> 등이 있다.

신무왕[편집]

神武王(?∼839)

신라의 제45대 왕(재위 839). 성명은 김우징이고 원성왕의 증손이며 상대등 균정의 아들이다. 836년 흥덕왕이 죽고 김제륭(후의 희강왕)이 김 명(민애왕)·이 홍 등의 힘을 빌려 왕위에 오르려 하자, 아버지 균정을 추대하여 싸웠으나 패배하고 청해진 대사 장보고에게로 도망쳤다. 839년(민애왕 2) 장보고를 움직여 민애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그 후 장보고를 감의군사에 명하였으며 이 해 반대파의 저주를 받고 죽었다.

신문왕[편집]

神文王(?∼692)

신라 제31대 왕(재위 681∼692). 문무왕의 큰아들로, 665년 태자에 책봉되었다. 682년 국학을 설립하여 학문을 장려했으며 고구려 유민들을 금마군에 분산, 거주하게 하였다. 685년 완산주·거열주를 설치하여 9주를 정비했고 봉성사·망덕사를 창건했다. 이듬해, 당으로부터 예기·문장에 관한 서적 50여 권을 들여왔고, 689년 관리에게 주던 녹읍제를 폐지하고 조(租)로써 대치하였다. 이 밖에도 일본·당과 사신의 내왕을 빈번히 하였으며 설총·강 수 같은 대학자가 배출되는 등 신라의 전성 시대를 이루었다.

신사임당[편집]

申師任堂(1504∼1551)

조선의 여류 문인·서화가. 호는 사임당, 본관은 평산이다. 이 이의 어머니로 천성이 온아하고 지조가 높아 현모양처의 덕을 갖추었다. 어려서 경전을 익히고 문장·바느질·자수에 이르기까지 그 재능이 뛰어났다. 7세 때 안 견의 화법을 배워 산수도·포도화를 그렸으며 점차 여성적인 섬세함과 정묘함을 더하여 그를 따르는 자가 없었고 필법에도 능하였다. 자녀 교육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후세에 현모양처의 본보기가 되었다. 그가 그린 병풍과 족자가 전한다. 그림으로 <자리도> <산수도> <초충도> <오이와 개구리> 등이 있다.

신석구[편집]

申錫九(1875∼1950)

독립운동가. 호는 은재이며 청주에서 출생하였다. 크리스트교에 입교하여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사가 되었다.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고 2년간 복역하였다. 광복 후 진남포에서 반공 비밀결사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는데, 이 때문에 6·25전쟁 때 공산주의자에 의해 총살당했다.

신석정[편집]

辛夕汀(1907∼1974)

시인. 본명은 석정(錫正)이며 전북 부안에서 출생하였다. 중앙불교전문강원에서 공부하였으며, 전북대·영생대 등에서 교직 생활을 하면서 시작에 전념하였다. 전형적인 자연 시인이라 불리는 그의 작품은 심화된 자연숭배의 사상이 짙고 특히 산을 즐기고 산에 사사하며, 산을 철학한 속에서 자연을 노래한 소박하고 간결한 형식이 많았는데, 후기에 와서는 인생과 현실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1969년 한국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저서로 <슬픈 목가> <빙하> <산의 서곡> 등이 있다.

신석초[편집]

申石艸(1909-1976)

시인. 본명은 음식. 충남 서천 출생. 일본 호세이 대학 철학과 수학(1931). 1935년 신병으로 귀국, 한학(漢學)의 스승인 정인보(鄭寅普)의 소개로 시인 이육사(李陸史)와 사귀게 되었다. 그때 육사가 가져간 <비취단장(翡翠斷章)> <바라춤 서사(序詞)> <뱀> <검무랑> <파초(芭蕉)> 등 시 작품들이 육사를 통해 1935년부터 1940년까지 동인지 <자오선(子午線)> <시학(詩學)> <문장(文章)> 등에 발표됨으로써 시단에 알려졌다. 주요 작품으로는 장시 <바라춤> <낙와(落瓦)의 부(賦)> <불춤> <어떤 가을 날에> <만사(輓詞)> 등이 있다. 시집으로 <석초시집> <바라춤> <폭풍의 노래> 등이 있다. 1965년 시인 협회장을 역임했으며, 1969년 예술원상을 수상했다.

신숙주[편집]

申叔舟(1417∼1475)

조선의 학자·문신. 자는 범옹, 호는 보한재, 본관은 고령으로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1443년 서장관으로 일본에 가서 그의 뛰어난 시 재능을 보여 이름을 떨쳤으며 쓰시마 섬에 들러 계해약조를 체결하였다. 그 후 사신들이 일본에 갈 때마다 신숙주의 안부를 묻곤 하였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가장 공이 컸으며 수양 대군(후의 세조)과 함께 사은사로 명에 같이 간 일이 있었는데, 1453년 계유정난에 참여하여 세조의 왕위 찬탈을 도왔다. 성삼문 등 사육신의 단종 복위 사건이 탄로되어 처형되자, 단종과 금성군의 처형도 주장하여 1457년 마침내 모두 죽게 하였다. 1460년 강원도·함길도 도체찰사가 되어 야인들을 소탕하고 돌아왔으며 예종이 어려서 즉위하자, 원상으로 승정원에 들어가 정사를 돌보았다. 그는 6대 왕을 모신 공이 크나, 계유정난에 참여하여 후세의 비난을 받았다. 예종이 재위 1년으로 죽고 성종이 즉위하자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경국대전> <세조실록> <예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여진과 일본의 지도를 만들었으며 왕명으로 <오례의> <동국통감> 등도 편찬하였다. 저서로 <해동제국기> <보한재집> 등이 있다.

신숭겸[편집]

申崇謙(?∼927)

고려의 개국 공신. 본관은 평산이며 평산 신씨의 시조이다. 배현경·홍 유·복지겸 등과 모의하여 궁예를 몰아내고 왕 건을 추대하였다. 927년 신라를 도와 공산에서 견훤과 싸우다가, 태조가 위급하게 되자 김 낙 등과 함께 태조를 구하고 전사하였다. 1120년 예종은 두 장군을 추도하여 <도이장가>를 지었다.

신 위[편집]

申緯(1769∼1847)

조선의 시인·서화가·학자. 자는 한수, 호는 자하, 본관은 평산이다. 어려서부터 신동이라 불리었고 14세 때 정조가 그를 불러 크게 칭찬하였다. 1799년 알성 문과에 급제하여 도승지·이조참판을 지냈다. 당시 시·서·화의 3절로 일컬어졌으며, 조선 이래 시작이 가장 많았었고 백년 이후의 시인들도 모두 그를 작시법의 스승으로 추대하였다. 그가 쓴 <동인론 시절구 35수>는 신라의 최치원으로부터 그 당시까지의 시인들의 작품을 평가해 놓은 대표적인 평론집이라 할 수 있다. 저서로 <경수당전고> <분여록> 등이 있다.

신윤복[편집]

申潤福(1758∼?)

조선의 화가. 자는 입부, 호는 혜원, 본관은 고령이다. 당시 서민 사회의 풍속을 매우 세밀하게 잘 그려 김홍도와 함께 조선의 대표적인 화가로 꼽힌다. 화원으로서 벼슬은 첨정을 지냈을 뿐이다. 같은 풍속도를 그린 김홍도의 그림이 익살스럽고 신선한 반면, 신윤복의 풍속화는 기생이나 무당의 그림을 즐겨 그렸으며, 또한 시골 주막의 서민적인 풍속을 날카로운 화필로 잘 그려냈다. 이것은 양반 사회에 대한 예술가로서 저항을 표현하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주유도> <단오 수변 희희도> <주막도> 등이 있다.

신익성[편집]

申翊聖(1588∼1644)

조선의 문신. 선조의 딸인 정숙 옹주의 남편으로 자는 군석, 호는 낙전당, 본관은 평산이다. 12세에 정숙 옹주와 결혼하여 동양위에 봉해졌으며, 광해군 때 폐모론을 적극 반대하였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왕을 모시고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주화파 대신들이 세자를 적에게 인질로 보내 화의를 맺자고 주장하자 칼로 위협까지 해가며 반대하였다. 후에 김상헌·최명길 등과 함께 선양으로 잡혀갔으나, 후에 소현 세자의 덕으로 무사하였다. 효성이 지극하고 글과 글씨에 능했다. 저서로 <낙전당집>이 있다.

신익희[편집]

申翼熙(1894∼1956)

독립운동가·정치가. 호는 해공, 본관은 평산이며 광주에서 출생하였다. 한성외국어학교에서 영어를 배우고, 1911년 일본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하였다. 재학중 학생 운동을 벌이고 기관지 <학지광>을 발간하였다.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다가, 1919년, 3·1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상하이로 망명했고 임시정부 외무부장·내무부장 등을 지냈다. 8·15광복 후 귀국하여 대한 독립 촉성 국민회 부위원장·자유신문사 사장·제헌국회 2대 의장 등을 지냈다. 1955년 민주당 공천으로 대통령에 입후보하여 국민의 열렬한 지지 속에 호남 지방 유세 중 열차 안에서 죽었다. 국민장으로 지냈으며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신 임[편집]

(1642∼1725)

조선의 문신. 자는 화신, 호는 한죽, 본관은 평산이다.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공조판서에까지 올랐다. 1722년 김일경 등이 신임사화를 일으켜 노론파의 중요 인물들을 죽이거나 유배시키는 데 항의하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영조가 즉위하자, 유배지에서 풀려나오는 도중에 죽었다. 시와 글씨에 능했다. 죽은 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유집 몇 권이 전한다.

신 입[편집]

申砬(1546∼1592)

조선의 장군. 자는 입지, 본관은 평산이다. 22세 때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도총·진주 판관 등을 지냈다. 1583년 은성 부사로서 두만강을 건너가 야인의 소굴을 소탕하고 돌아왔다. 그 후 함경북도 병사·평안 병사·한성부 판윤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순변사에 임명되어 충주의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왜장 고니시가 지휘하는 적과 접전을 벌였다. 양쪽으로 협공당하여 패하자 부하 장수 김여물과 함께 강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그는 특히 선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싸움터로 갈 때 선조가 검을 하사하면서 격려해 주기도 하였다.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신재효[편집]

申在孝(1812∼1884)

조선 말의 가인. 자는 백원, 호는 동리, 본관은 평산이다. 전북 고창에서 출생하였으며 40여 세까지는 집안 일에 종사하다가 이후 판소리 연구에 전력하였다. 고종 때 오위장을 지냈으며, 당시까지만 해도 판소리는 기생이나 광대들이 아무 계통 없이 불러왔는데, 그는 이를 통일하여 <춘향가> <심청가> <박타령> <가루지기 타령> <토끼타령> <적벽가> 등 6가지로 체계를 세우고 독특한 창의로 판소리 사설 문학을 이루었다. 또한, <춘향전> <박타령> <토끼타령> <심청전> 등을 개작하여 창극화하였다. 그의 전 작품에는 서민적인 해학성과 사실성이 넘치고 있다. 문하에서 김세종·정춘풍·채 선·허 금 등 많은 명창을 길러냈다. 시문집이 전해진다.

신채호[편집]

申采浩(1880∼1936)

조선 말의 사학자·언론인. 호는 단재, 본관은 평산이다. 13세 때 칠서를 읽은 천재이며 20여 세에 성균관 박사를 지냈다.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등에 논설을 실어 독립정신을 북돋우기에 전념하였다. 경술국치 후 중국에 망명하여 상하이와 베이징 등지로 다니며 독립운동에 관계하였다. 또한 국사 연구와 저술에도 힘쓰다가, 무정부주의자 비밀결사 사건으로 일본 관헌에게 체포되어 10년 징역을 받고 여순 감옥에서 복역중 8년 만에 옥사하였다. 그는 순수한 민족주의적 역사관으로 당시 식민주의적인 모든 학설을 배격하였으며, 우리나라 언론의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저서로 <조선 상고사> <을지문덕전> <이순신전> <조선사 연구초> 등이 있다.

신충[편집]

信忠

신라의 승려·정치가. 효성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자기 집 잣나무 아래서 서로 바둑을 두면서 장차 즉위하면 등용시키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효성왕이 잊고 찾지 않으므로 원망하는 노래 <원수가>를 지어 그 나무에 붙였더니 나무가 곧 말라죽었다. 그 후 왕이 뉘우치고 신충을 불러 등용하자, 나무가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 경덕왕 때(757년)에는 상대등이 되었다가, 763년 사임하고 승려가 되어 단속사를 창건하고 효성왕의 명복을 빌었다.

신홍식[편집]

申洪植(1872∼1937)

독립운동가. 충북 청원에서 출생하였으며 서울 협성신학교를 졸업하였다. 공주 감리교회와 평양 남산현교회의 목사로서 신앙 생활과 민족 단결을 호소하였다. 3·1운동 때, 기독교 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2년간 복역하였다. 그 후에도 종교운동과 독립운동을 계속해 여러 번 감옥에 갇히었으나 끝까지 민족사상 고취에 노력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신 흠[편집]

申欽(1566∼1628)

조선의 학자·문신. 자는 경숙, 호는 상촌, 본관은 평산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학유·감찰·병조좌랑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에 양재도 찰방으로 삼도 순변사 신 입을 따라 조령 전투에 참가했으나, 신 입이 패하자 강화에 들어갔다가 체찰사 정 철의 종사관이 되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사헌으로서 세자 책봉 주청사가 되어 명에 다녀왔다. 선조로부터 영창 대군을 보필하라고 부탁 받은 7대신 중의 한 사람으로, 1613년 계축옥사 때에 유배되었다. 인조반정 후 다시 등용되어 우의정을 지냈으며, 정묘호란 때 세자를 모시고 전주에 피란갔다가 돌아와서 영의정이 되었다. 장 유·이 식과 함께 조선 중기 한문학의 태두로 일컬어진다. 저서로 <상촌집> <산중독언>> <야언구정록> 등이 있다.

실성왕[편집]

實聖王(?∼417)

신라 제18대 왕(재위 402∼417). 고구려에 인질로 잡혀갔다가 401년 돌아왔으며, 이듬해 내물왕이 죽자 어린 왕자를 대신하여 왕위에 올랐다. 즉위하기 전 고구려에 볼모로 갔다가 401년에 귀국한 실성왕은 즉위하자 일본과 수호하고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일본에, 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 405년 명활산성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쳐 쓰시마 섬을 침략할 것을 계획하였다가 반대하는 자가 많아 취소하였다. 417년 내물왕의 아들인 눌지를 죽이려고 계획하다가 오히려 그에게 살해되었다.

심사정[편집]

沈師正(1707∼1769)

조선의 화가. 자는 이숙, 호는 현재, 본관은 청송이다. 김홍도와 더불어 조선 중기 화단을 대표하는 인물로 어려서는 정 선에게 배웠다. 그는 대륙풍의 웅건한 화풍을 이루어 중국에까지 그의 그림이 알려졌다. 특히 화초·벌레·털짐승·산수에 뛰어나 명작을 많이 남겼다. 그림으로 <강상야박도> <귀렵도> <하경산수도> 등이 있다.

심수경[편집]

沈守慶(1516∼1599)

조선의 문신. 자는 희안, 호는 청천당, 본관은 풍산이다.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직제학 등을 지냈다. 1590년 우의정이 되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지휘하였다. 시와 글씨에 뛰어났으며 저서로 <청천당 시집> <청천 유한록> 등이 있다.

심연원[편집]

沈連源(1491∼1558)

조선의 문신. 자는 맹용, 호는 보암, 본관은 청송이다.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대교·봉교 등을 거쳐 명종 때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그의 문장은 아름다우면서도 날카로웠으며, 중국과의 국경선을 자세히 알고 있었다. 제주 목사로 있을 때 산과 강의 높낮이·굴곡 등을 자세하게 지도로 잘 그려 두었다가, 1555년 해적들이 쳐들어오자 이를 이용하여 잘 막아내었다.

심 온[편집]

沈溫(?∼1418)

조선 세종의 장인. 자는 중옥, 본관은 청송으로 세종의 비 소헌 왕후의 아버지이다. 11세 때 고려의 감시를 거쳐 문과에 급제했고, 조선에 들어와 영의정에 이르렀다. 태종 때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다가 태종 비난 사건에 연루되어 압록강에서 체포되고, 수원으로 압송되어 자결하였다. 그 사건은 처음 심 온의 동생인 심 정이 도총제로서 병조판서 박 습과 같이 상왕(태종)을 비난한 것이 심 온의 선동이라고 인정된 것이며, 박 습은 먼저 처형되었다. 좌의정 박 은이 심 온을 비난한 바 있어 심 온의 유언대로 대대로 후손에 이르기까지 박씨와 결혼하지 않았다. 뒤에 세종의 명으로 복관되었다.

심의겸[편집]

沈義謙(1535∼1587)

조선의 문신. 자는 방숙, 호는 손암, 본관은 청송이다. 인순 왕후(명종의 비)의 동생이며 이 황의 제자로, 명종 때 급제하여 병조좌랑·부수찬·교리·이조참의 등을 지냈다. 그는 척신 출신이지만 구세력을 대표하는 인물로 사림들간에 명망이 높았다. 1572년 김종직 계통의 신진 세력으로서 김효원이 이조정랑에 천거되자, 그가 일찍이 권신이던 윤원형의 집에서 묵은 사실을 들어 권력가에 아부했다 하여 반대하였다. 1574년 결국 김효원은 이조정랑이 되었고, 이듬해 심의겸의 동생인 심충겸이 후임 이조정랑에 추천되자, 이번에는 김효원이 반대함으로써 두 사람은 대립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구세력은 그를 중심으로 서인이라 했으며, 신진 세력은 김효원을 중심으로 동인이라 하였다. 그 후 당쟁이 커질 것을 염려한 이 이의 조정으로 개성부 유수가 되었다가 사직하였다. 1584년 이 이가 죽은 후 동인이 득세하고, 서인이 몰락하자 파직당하였다. 그의 날카롭고 비타협적인 성격은 당쟁의 실마리를 만들어 조선 왕조의 치명적인 적폐의 요인이 되게 하였다.

심지원[편집]

沈之源(1593∼1662)

조선의 문신. 자는 원지, 호는 만사, 본관은 청송이다. 광해군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에 오르지 않고 은거하였다.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검열을 지냈으며, 1636년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으로 왕을 모셨다. 1657년 동지사 겸 사은사로 청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영의정이 되었다.

심충겸[편집]

沈忠謙(1545∼1594)

조선의 문신. 자는 공직, 호는 사양당, 본관은 청송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판서까지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비변사 제조로서 선조를 평양으로 모시었다. 이듬해 호조·병조참판으로 군량미를 조달하는 데 크게 활약하였다. 죽은 후에 청림군에 추봉되었으며, 서도에도 뛰어났다.

심 훈[편집]

沈薰(1904∼1937)

소설가·영화인. 본명은 대섭, 호는 훈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제일고보에 재학중 3·1운동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하였다. 그 후 상하이로 건너가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귀국하였다. 1923년부터 동아일보·조선일보·중앙일보의 기자로 있으면서 시와 소설을 쓰고, 1925년에는 동아일보에 영화소설 <탈춤>을 연재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영화계에 데뷔, 1926년 <먼동이 틀 때>를 원작·각색·감독하였다. 그 후 <동방의 애인> <영원의 미소> 등 장편소설을 발표했으며, 1934년 <상록수>가 동아일보에 당선되어 작가적 지위를 얻었다. 그는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현상 소설에 당선하자 그 상금으로 당진에 상록 학원을 설립하였다. 그의 작품은 주로 대중적이고 계몽적인 것으로, 특히 <상록수>는 그 당시 브나로드라는 민족주의 운동의 의사를 반영한 것이었다. 저서로 <황공의 최후> <그 날이 오면> <한국 현대문학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