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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인명사전/한 국 인 명/ㅇ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아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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阿非知

백제의 석공. 신라 선덕 여왕 때 자장 법사가 당에서 귀국하여 황룡사에 탑을 세울 뜻을 여왕께 아뢰니 여왕은 신하들과 의논하여 백제에 가서 석공을 데려오도록 하였다. 이에 아비지가 초청되어 일을 시작하였는데, 처음 절의 기둥을 세우던 날, 그는 백제가 망하는 꿈을 꾸고 일손을 멈추었다. 그러자 갑자기 뇌성이 울리고 늙은 중과 장사 한 사람이 나타나서 절의 기둥을 세우고 어디론지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이에 그는 백제의 운이 다했음을 깨닫고 탑을 완성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황룡사의 9층탑인데, 몽고의 침입 때 불타버렸다.

아좌 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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阿佐太子

백제의 화가. 위덕왕의 아들로 597년 일본에 건너가서 쇼토쿠 태자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 그림이 호류사에 보관되었으나, 1949년에 불타버렸다. 그의 화법은 일본 회화계의 원천이 되었다.

아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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阿直岐

백제의 학자. 근초고왕의 사신으로 말 2필을 끌고 일본에 가서 오진 천황에게 바치고, 말 기르는 일을 맡아보다가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또한 백제의 박사 왕 인을 추천하여 일본에 한학을 전하게 하였다.

안 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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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堅

조선 초의 화가. 자는 가도, 호는 현동자, 본관은 지곡이다. 도화원의 화원으로 있으면서 안평 대군의 사랑을 받았다. 천성이 총명하여 옛 그림들의 높은 경지를 모두 깨닫고 그 장점들을 모아 절충한 화풍을 일으켰다. 주로 산수를 즐겨 그렸으며, 안평 대군이 꿈에서 보았다는 '세종의 들놀이' 모습을 그린 <몽유도원도>는 유명한 작품이다. 그 밖에 <청산백운도> <적벽도> <동경산수도> 등이 있다.

안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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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敬信(1895∼?)

여류 독립운동가. 평남 강서에서 출생하였으며,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평양에서 군중을 선동, 만세를 부르다 체포되어 20여 일 동안 구류를 살았다. 이 해 11월 오신도·안정석과 '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활약하다가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 요인들과 가깝게 지냈다. 그 해 미국 의원단이 우리 나라에 오자, 평남 안주에서 경찰 1명을 쏘아 죽인 후 평남 도청에 폭탄을 던졌다. 1921년,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10년으로 감형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안국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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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國善(1854∼1928)

근대 신소설 작가. 1907년(융희 1)에 <연설 방법>을 썼고, 신소설로는 특이한 우화 소설 <금수회의록>을 썼다. 한국 최초로 근대적 단편집 <공진회>를 발간하였다.

안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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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玟英

조선 철종 때의 가인. 자는 성무, 호는 주옹으로 서얼 출신이다. 1876년(고종 13) 스승 박효관과 함께 조선 역대 시가집 <가곡원류>를 편찬·간행하였는데, 여기에는 그의 시조 <영매가> 외에 26수가 실려 있다. 저서로는 <마옹만필> <금옥총서> 등이 있다.

안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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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秉煜(1920∼

)

철학자. 평남 용강에서 출생하였으며 1943년 일본 와세다 대학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1958년 <사상계>의 주간을 거쳐 연세대와 서울대 강사를 지냈으며, 1969년 숭전대 교수가 되었다. 1961∼62년에는 미국의 코넬 대학과 배서 대학에 교환 교수로 초빙되어 한국의 문화사를 소개하였으며, 귀국 후 숭실대 교수로 있으면서 많은 철학서를 집필·발표하였다. 저서로 <현대사상> <철학 노트> <사색인의 향연> 등이 있다.

안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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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壽吉(1911∼1977)

작가. 호는 남석으로 흥남에서 태어나 경신학교를 거쳐 와세다 대학 영어과를 수학하였다. 젠다오 일보사 기자로 근무하면서 동인지 <북향>을 발간하였다. 월남 후 경향신문사 조사부장·해군 정훈감실 근무,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장 등을 역임하였다. <조선문단>에 단편 소설 당선을 계기로 문단에 데뷔하였다. 사실적이며 성실한 관찰과 온건한 필치가 어울려서 하나의 착실한 작품세계를 이루었다. 1954년 자유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창작집 <제3인간형> <풍차>, 장편 <화환> <북간도>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안 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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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勝

고구려 부흥 운동 때 추대된 왕. 나·당 연합군에 의해 망한 고구려는 670년 고구려의 장군인 검모잠이 부흥을 위해 반란을 일으켰는데, 왕족이었던 안 승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 때 당에서 고간을 보내어 이들을 진압하자, 안 승은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달아났다. 신라의 문무왕은 자기의 누이동생을 안 승의 아내로 삼게 하고 소판이라는 벼슬과 김씨 성까지 주었다.

안용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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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龍福

조선 숙종 때의 민간 외교가·어부. 동래부에서 출생하였으며 일본 말을 잘하였다. 당시 쓰시마 섬의 성주가 울릉도를 일본의 영토인 죽도라고 하며 고기잡이와 벌목을 마음대로 하자, 안용복은 1693년 울릉도로 건너가 일본인들을 모두 몰아냈다. 1696년 단독으로 일본의 에도에 가서 울릉도·우도의 감세관이라 자칭하고, 일본 정부에 대하여 고기잡이와 벌목의 불법성을 항의하여 울릉도가 우리 영토임을 승인한 문서를 받아냈다. 돌아오던 길에 쓰시마 섬에서 잡혀서 문서는 빼앗기고 조정에 압송되어 나라의 허락 없이 국제 문제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 후 쓰시마에서 자기들의 잘못을 사과하고 울릉도를 우리 땅으로 확인한다는 통지를 보내 왔다. 그러나 안용복의 죄는 풀리지 않았다.

안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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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祐(?∼1362)

고려의 장군. 탐진 안씨의 시조로 1352년 군부판서를 거쳐 안주 군민 만호라는 자리에 있었다. 1359년 홍건적이 쳐들어와서 의주·정주·인주 등지가 함락되자 이방실 등과 함께 적을 크게 무찌르는 공을 세웠으며 적의 장수를 생포한 공로로 공신의 호를 받았다. 1361년, 다시 홍건적이 쳐들어오자 박주·개천 등지에서 크게 이겼다. 그러나 그를 시기하던 김 용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안익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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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益泰(1905∼1965)

작곡가·지휘자. 평양에서 출생하였으며 평양 숭실학교를 거쳐 일본 국립 음악학교에서 첼로를 전공하였다. 1930년 미국으로 건너가 필라델피아 커티스 음악학교를 거쳐 신시내티 음악학교에서 첼로와 작곡을 전공하였다. 1936년 유럽에 건너가 이듬해 빈에서 슈트라우스에게 지도를 받았으며 영국 민요에 따라 부르던 애국가를 새로 작곡하였다. 1939년 부다페스트 국립 음악학교에서 배우고 지휘자로서 각국을 순례하여 교향악단을 지휘하였다. 에스파냐의 타라베라와 결혼하여 에스파냐 국적을 얻어 마드리드 마욜카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가 되었다. 그 후 영국의 로열 필하모닉, 이탈리아의 로마 교향악단을 비롯하여 유명한 200여 교향악단을 지휘하여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쳤다. 후기 낭만파에 속하는 지휘자로서 베토벤·브람스·드보르작·리하르트·슈트라우스 등의 작품을 즐겨 지휘하였다. 1965년 런던 뉴 필하모닉 교향악단의 초청 지휘자로 최후 작품인 <애(哀)! 강상의 의기 논개>를 연주하고 그 해 스페인 바르셀로나 병원에서 사망하였다. 1957년 문화 포상을 받고 1965년 문화 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작품으로 <한국 환상곡> <애국 선열 추도곡> 등이 있다.

안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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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在鴻(1891∼1965)

독립운동가·정치가. 호는 민세이며 본관은 죽산이다. 일본 와세다 대학 정경과를 졸업했으며, 3·1운동 때 만세운동을 지휘하였다. 1927년 신석우·백관수 등과 같이 '신간회'를 조직하여 일본에 항거하는 한편, 조선일보 주필과 사장 등을 지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당했고, 8·15광복 후 국민당을 조직하여 총재가 되었으며 이어 한독당 중앙위원·민주의원·민정장관을 지낸 뒤 중앙농민학교를 운영하였다. 1950년 평택에서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6·25 때 납북되었다.

안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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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鼎福(1712∼1791)

조선의 학자. 자는 백순, 호는 순암,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일찍이 과거에 응할 생각을 버리고 이 익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그의 명성이 높아지자, 영조 때 의영고 봉사·사헌부 감찰 등을 지냈다. 그 후 은퇴하여 고향 덕곡에서 20년 동안 저술에 힘썼다. 1772년 왕세손(후의 정조)의 스승으로서 남다른 대우를 받았으며, 1776년 목천 현감으로 있으면서 좋은 정치를 베풀었고, 후에 동지중추 부사에 올라 광성군에 봉해졌다. 그는 실제 생활에 직접 도움이 되는 실학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특히 역사학에 전심하여 <동사강목>을 저술하였다. 또한 천주교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여 당시 학자들이 천주교에 빠지는 것을 경고하였다. 저서로 <하학지남> <회현록> <가례집해> 등이 있다.

안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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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重根(1879∼1910)

조선의 항일 의사. 어릴 때의 이름은 응칠이며, 교명은 도마, 본관은 순흥이다.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려서는 한학을 배웠고 14세 때 신천에 와 있던 프랑스 신부 밑에서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기질이 활달하여 사냥을 다니며 총쏘기를 좋아하였고 사격에 숙달하여 작은 새들도 정확히 쏘아 맞혔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일본에 대한 적개심에 불타, 1907년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가 북간도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였다. 1909년, 이범윤·최재형 등과 함께 의용군을 조직하여 좌익장군이 되어 회령까지 진격하여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이 해 10월, 우리나라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 하얼빈에 도착하자, 그를 죽이기로 결심하였다. 26일, 하얼빈 역에서 일본 사람으로 가장하고 경계망을 뚫은 후, 10보 이내의 거리까지 접근하여 권총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쏘아 죽였다. 또한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궁내 대신 비서관 모리, 만주 철도 이사 다나카에게 중상을 입혔다. 안중근은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른 후 태연히 포박을 당하였다. 이듬해 여순 감옥에 수감되었으며 끝까지 굽히지 않고 항변하다가 사형당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안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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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中植(1861∼1919)

근대 서화가. 호는 심전이며 본관은 순흥이다. 도화서 화원을 지냈으며 산수·새·꽃 등을 잘 그렸다. 또한 글씨에도 뛰어나 초서를 비롯하여 행서·해서·등 여러 가지 글씨를 잘 썼다. 조석진과 함께 중국으로 유학가서 서화협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었으며, 후진들을 양성하는 일에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림으로 <노안도> <성재 임간도> 등이 있다.

안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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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止(1377∼1464)

조선의 문신. 자는 자행, 호는 고은, 본관은 탐진이다.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박사가 되었다. 세종 때 수찬·예문관 제학 등을 지냈으며 정인지와 함께 <용비어천가>를 지었다. 1446년 호조참판으로 정조사가 되어 명에 다녀왔으며, 그 후 집현전 부제학을 거쳐 봉조하에 이르렀다. 시에 능했으며 해서를 잘 써 세종의 명으로 태종을 위해 <금자 법화경>을 썼다.

안창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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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昌男(1893∼1930)

최초의 비행사. 서울에서 태어나 휘문고보를 중퇴하고, 1918년 일본 오사카 자동차학교를 마치고 아카바네 비행기 제작소에서 비행기 제조법을, 오구리 비행학교에서 조종술을 배웠다. 1921년 비행사 시험에 합격, 같은 해 도쿄와 오사카간 우편 비행 경기에 참가하여 당당히 우승하였다. 그는 고국에서 독립운동에 참여치 못하는 것을 비통히 여기고 있던 중 이상재의 힘으로 상하이로 탈출, 여운형의 주선으로 산서성에 들어가 처음에는 태원 비행학교 교원으로 있다가, 중국 항일 전선에 참여하여 분투하던 끝에 비행기 사고로 추락, 사망하였다.

안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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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昌浩(1878∼1938)

독립운동가. 호는 도산이며 평남 강서에서 출생하였다.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평양에서 관서 지부를 조직하기 위해 쾌재정에서 뛰어난 첫연설을 하여 청중의 갈채를 받았다. 그 후 서울로 올라와, 1898년 이상재·윤치호·이승만 등과 같이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독립협회 운동을 계속하였다. 1900년 미국으로 건너가 신문명을 배우는 한편, 공립협회를 세워 교포의 생활을 지도하였다. 1906년, 귀국하여 양기탁·신채호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여 독립을 찾으려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평양에 대성학교, 정주에 오산학교를 세웠으며 <대한매일신보>를 기관지로 사용하고 평양과 대구에 태극서관을 설립하여 출판 사업을 벌였다. 1908년 박중화·최남선·김좌진·이동녕 등과 '청년 학우회'를 조직하여 민족 계몽을 적극 추진하였다. 1911년 총독 데라우치 암살 음모 사건을 뒤집어씌우려 하자 다시 미국으로 망명을 떠났다. 1913년 로스앤젤레스에서 '흥사단'을 조직하여 활약하다가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 내무총장·노동총판을 지내며 계속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1932년 상하이에서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있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본국으로 보내어져 대전 감옥에서 3년간 복역한 후 평남 대보산에 들어가 휴양하였다. 1937년 동우회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었으며, 이듬해 서울대학 병원에서 간경화증으로 죽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저서로 <안도산 전집>이 있다.

안 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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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軸(1282∼1348)

고려의 학자. 자는 당지, 호는 근재, 본관은 순흥이다. 충숙왕 때 원의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내려졌으나 가지 않았고, 우리나라의 성균학정을 거쳐 우사의 대부에 이르렀다. 충혜왕 때 안렴사로 있을 당시 <관동와주>를 지었다. 그 후 충목왕 때 감춘추관사까지 승진하여 충렬왕·충선왕·충숙왕의 실록을 편찬하였으며, 경기체가인 <관동별곡> <죽계별곡>을 남겨 그 이름이 높았다. 저서로 <근재집> <한림별곡> 등이 있다.

안평 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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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平大君(1418∼1453)

조선의 서예가. 세종의 셋째 아들로 자는 청지, 호는 비해당이다. 1428년, 안평 대군에 봉해지고 여러 왕자들과 함께 성균관에 입학하여 학문을 닦았다. 1438년 함경도에 6진이 설치되자 북변의 경계 임무를 맡아 야인들을 토벌하였다. 수양 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빼앗기 위해 그의 측근인 김종서·황보 인을 죽였을 때 안평 대군도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고 죽었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당대의 명필로서 중국의 사신들이 올 때마다 그의 필적을 얻어갔다. 1452년 경자자를 고쳐 만든 임신자의 자모(子母)를 썼으며, 그림과 가야금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저서로 <비해당집> <팔가시선> 등이 있으며, 글씨로 <영릉 신도비> <청천 부원군 심 온 묘표> 등이 있다.

안 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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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珦(1243∼1306)

고려의 학자. 자는 사온, 호는 회헌, 본관은 순흥이다. 조선 시대 문종의 이름이 '향'이었기 때문에 안 유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1260년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을 지냈으며, 충렬왕 때 상주 판관이 되어 무당을 엄히 다스려 미신을 타파하는 등 현명한 정치를 하였다. 그 후 충렬왕을 따라 원의 연경에 가서 <주자전서>를 직접 베껴 쓰고, 또 공자와 주자의 화상을 그려 가지고 돌아와서 주자학을 연구하였다. 주자를 숭배하여 그의 초상을 벽에 걸어두고 주자의 호인 회암의 '회'를 따서 스스로 호를 회헌이라 하였다. 그가 죽은 후 충숙왕은 그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원의 화가에 명하여 그의 초상을 그리게 하였다. 이 초상화는 현재 소수 서원에 보관되어 있는데, 이제현의 초상화와 더불어 가장 오래 된 그림으로 매우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조선 중종 때 풍기 군수 주세붕이 순흥 백운동에 안향의 사묘를 세우고 서원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서원의 시초가 되었다.

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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哀王

발해의 제14대 마지막 왕(재위 901∼926). 926년 부여성에서 거란의 야율아보기에게 포위되어 섬멸당하였다. 이로써 발해는 14왕 228년 만에 멸망하고 왕자 대광현은 남은 무리를 이끌고 고려에 귀순하였다.

애장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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哀莊王(788∼809)

신라의 제4대 왕(재위 800∼809). 소성왕의 맏아들로 13세에 왕위에 올랐다. 802년 해인사를 짓고 이듬해에는 일본과 친교를 맺었다. 809년 숙부인 김언승(후의 헌덕왕)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양기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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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起鐸(1871∼1938)

독립운동가. 호는 운강이며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1904년, 영국인 베델과 함께 영문으로 된 <코리아 타임스>를 발간하고 이듬해 국한문으로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여 주필로서 항일사상을 일깨웠다. 또한 안창호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였으며 경술국치 후 김 구·이승훈·이동녕 등과 만주에 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운동에 힘쓰다가 105인 사건으로 3년간 복역하였다. 그 후 <동아일보> 고문이 되어 문화사업에도 종사하였으며, 1921년 미국 국회의원단이 우리나라를 방문하였을 때 독립진정서를 제출하여 투옥되었다. 그 후 만주로 탈출하여 의성단·정의부 등을 조직하여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에 힘썼으며, 1930년에 임시정부 주석·국무령에 추대되었으나 사퇴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양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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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吉

신라 진성 여왕 때의 반란자. 진성 여왕의 실정으로 국정이 문란하여지자, 889년 북원(지금의 원주)에서 난을 일으켜 국원(지금의 충주) 등 30여 성을 점령하여 세력을 넓혔다. 891년 궁예를 부하로 맞아 판도를 넓혀 세력을 떨쳤으나, 그 후 궁예에게 몰려 도망하였다.

양녕 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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讓寧大君(1394∼1462)

조선 태종의 맏아들로 세종의 맏형. 1404년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태종이 충녕 대군(후의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함을 알고 아우인 효녕 대군에게 동의를 얻어 일부러 미친 듯 행동하였다. 1418년 마침내 폐위되어 충녕 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 후 전국 돌아다니며 풍류를 즐기며 일생을 마쳤다. 시와 글씨에도 능하였다고 한다.

양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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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德壽

조선의 음악가. 전북 남원에서 은신하고 있던 중 1610년(광해군 2)에 악보 <양금신보>를 만들었다. 이 악보에는 가장 낮은 음조인 평조와 가장 구슬픈 음조인 우조, 또한 씩씩하면서도 가장 슬픈 음조인 우조·계면조 등의 9곡이 실려 있다. 이 악보는 우리 나라 고가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양만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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楊萬春

고구려의 장군. 644년 당 태종이 3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에 쳐들어왔을 때, 안시성주로 있으면서 60여 일 동안 치열한 공방전을 펼친 끝에 적을 물리쳤다. 당 태종도 양만춘의 화살에 맞아 한쪽 눈을 잃었다 한다. 양만춘(梁萬春)이라고도 쓰는데, 정사(正史)에는 그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다.

양사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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楊士彦(1517∼1584)

조선의 문신. 자는 응빙, 호는 봉래, 본관은 청주이다.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회양군수·철원 군수 등을 지냈으며 자연을 사랑하여 산수가 좋은 시골을 스스로 지원하였다. 금강산 만폭동의 바위에는 지금도 그의 글 8자를 새긴 것이 남아 있다. 그 후 안변 군수로 있으면서 큰 못을 파고 마초(馬草)를 저장하였는데, 이듬해 북쪽에서 변란이 일어나자 다른 고을에서는 마초와 물이 없어 관리들이 책임을 추궁당하였으나 안변 지방만은 아무 걱정이 없었다. 양사언은 천재인데다가 노력까지 하여 읽지 않은 책이 없었으며 임진왜란까지 예언하였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라는 유명한 시조가 전한다. 글씨는 해서와 초서에 능하였다. 안평 대군·김 구·한 호와 함께 조선 전기의 4대 서예가로 불린다. 저서로 <봉래 시집> <금강산 유람기> 등이 있다.

양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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陽原王(?∼559)

고구려 제24대 왕(재위 545∼559). 안원왕의 맏아들로 533년 태자로 책봉되었다. 547년 백암성을 개축하였으며 신성을 수리하였다. 이듬해 백제의 독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신라의 후원으로 실패하였다. 550년 도살성을 백제에게 빼앗겼는데, 이후 고구려는 점차 세력이 약해졌으며 이듬해에는 돌궐의 침략을 받았고 신라에게 10여 성을 빼앗겼다.

양전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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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甸伯(1869∼1923)

독립운동가. 호는 격헌이며 평북 의주에서 출생하였다. 일찍이 크리스트교 신자가 되었으며 선천 신성중학교·보성여학교 등을 설립하였다. 1907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여 목사가 되었다. 그 후 각지에 양로원·고아원을 세워 사회사업에 힘쓰다가 105인 사건으로 6년 형을 받았다.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여 다시 체포되었다. 그 후 예수교 장로회 총회장에 취임하고 일생을 신앙운동과 애국운동에 바쳤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양정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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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正模(1953- )

레슬링 선수. 부산 출생.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 경기 자유형 62kg급에서 우승해 우리나라가 광복 후 참가한 올림픽경기로는 처음으로 금메달을 땄다. 양정모는 1974년에 이어 1978년 아시아경기대회 레슬링경기에서도 우승해 2회 연속 금메달을 차지했으며, 1975년 세계선수권대회 자유형 62kg급 3위, 1978년 세계선수권대회 준우승 등 경력이 화려하다. 부산 출생. 현재 조폐공사 레슬링부 감독으로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양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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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柱東(1903∼1977)

시인·국문학자·영문학자. 호는 무애이며 황해도 개성에서 출생하였다.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후,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동국대 교수 등을 지냈다. 와세다 대학 재학중에 이장희·유 엽·백기만 등과 시동인지 <금성>을 발간하였으며, 1923년에 <영원하 비밀>을 발표하였다. <문예공론>을 발간하여 일련의 시 작품과 논문을 발표하였다. 한때 프로 문학과 민족 문학의 절충주의적 문학론을 펴기도 하였다. 신라 향가 연구에도 전념, 많은 논문을 발표하였다. 58년 연세대에서 교수생활을 했으며, 1962년 동국대 대학원장을 지냈다. 학술원 종신 회원이고, 학술원상·대한민국 문화 훈장 무궁화장 등을 수상하였다. 저서로 <고가연구> <여요전주> <조선의 맥박> <무애시문선> 등이 있으며, 한국어 대사전 편찬에 참여하였다.

양한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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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漢默(1863∼1919)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 자는 길중, 호는 지강이며 전남 해남에서 출생하였다. 1898년, 일본에 건너가서 손병희를 만나 동학에 들어갔으며, 1905년 이 준·윤효정 등과 '헌정 동지회'를 조직하여 일진회와 맞섰다. 3·1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여 체포되었으며, 그 후 서대문 감옥에서 죽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이 수여되었다. 저서로 <정자공부> <동경연의> 등이 있다.

어몽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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魚夢龍(1566∼?)

조선의 화가. 자는 견보, 호는 설곡, 본관은 함종이다. 매화를 그리는 데 특히 뛰어났으며 그 중에서도 <흑매도>는 유명하였다. 황집중의 포도, 이 정의 죽과 더불어 '3절'로 불리었다. 그림으로 <일지매> <월매도> 등이 있다.

어윤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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魚允中(1848∼1896)

조선의 문신. 자는 성집, 호는 일재, 본관은 함종이다.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참판 등을 지냈다. 1871년, 신사유람단의 한 사람으로 박정양·홍영식 등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근대 문물을 시찰했으며 청으로 건너가 톈진에서 이홍장을 만났다. 이듬해 다시 톈진에 가서 김윤식과 함께 한미 통상조약의 조문을 검토하는 등, 여러 차례 청과의 무역협정을 체결하였다. 동학혁명 때 선무사로 파견되었으며, 1894년 탁지부 대신이 되었다. 1896년 아관파천 때 고향인 보은으로 도망가던 중, 친러파에게 잡혀 죽임을 당하였다. 저서로 <종정연표>가 있다.

어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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魚允姬(1878∼1961)

여류 독립운동가·사회사업가. 본관은 함종이며 어윤중의 딸이다. 동학혁명 때 남편을 잃었으며, 1912년 미리흠여학교를 졸업하고 외딴 섬에서 전도사로 일하였다. 3·1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시가 행진에 앞장섰다가 체포되어 2년간 옥살이를 하였다. 그 후 임시정부에서 파견된 밀사들에게 여비와 은신처를 제공하여 주었고, 개성 경찰서 폭파 계획에 가담하여 구속되었다. 석방 후 개성에 유린보육원을 설립했으며, 6·25 때 월남하였다. 1953년 사회사업가로 표창받고, 1959년 인권 옹호 공로 표창, 1961년 3·1운동 선도자 표창 등을 받았다.

어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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魚在淵(?∼1871)

조선 말기의 무신. 자는 성우, 본관은 함종이다. 1866년 회령 부사 등을 지냈고,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선봉장이 되어 광성진을 수비하였다. 1871년 신미양요가 일어나자 정부에서는 어재연을 순무중군에 임명하여 광성진을 수비케 하였다. 이에 그는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우세한 무기를 가진 미국군에게 패하여 동생 재순과 더불어 용감하게 전사하였다. 후에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엄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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嚴興道

조선의 충신. 강원도 영월에서 호장으로 있을 때 단종이 세조에 의해 영월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하자, 사람들은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단종의 시신을 돌보지 않았다. 엄흥도는 관을 비롯한 장례 기구 일체를 혼자서 마련하여 정중하게 장사를 치른 후, 벼슬을 내놓고 아들을 데리고 숨어 살았다. 현종 때 송시열의 건의로 그의 자손이 등용되었고, 영조 때 그의 충성심을 기념하는 정문(旌門)이 세워졌고 공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여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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呂石基(1922- )

연극평론가·영문학자. 경북 김천 출생. 일본 도쿄(東京)대학 영문과 수료. 광복 후 서울대학 영문과 졸업. 미국 미주리대학에서 수학(1956)하였다. 70년 <연극평론>을 발행, 평론 부재의 연극풍토에 활기를 불어넣었으며, 젊은 연극인을 발굴, 육성에 힘을 기울였고, 부진한 영화 재건에도 힘썼다. 저서로 <20세기 문학론> <희곡론> <현대영문학사>를 비롯, 역서·논문 등이 다수 있으며 국민훈장모란장, 동랑연극상을 수상했다.

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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麗玉

고구려의 여류 음악가. 뱃사공 곽리자고의 아내이다. 어느 미친 사람이 강물에 빠져 죽게 되자, 그의 아내도 공후를 뜯으며 <공무도하가>를 부르고는 강물에 빠져 죽었다. 이를 본 곽리자고가 여옥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자, 여옥은 공후를 뜯으며 <공후인>을 불렀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공후인>은 당시 백성들이 읊던 민요로 작자가 여옥이 아니라고도 한다.

여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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呂運亨(1885∼1947)

독립운동가·정치가. 호는 몽양이며 경기도 양평에서 출생하였다. 우무학당을 졸업하고, 1909년 광동학교를 세워 청년들을 교육시켰다. 1914년 중국에 건너가 난징 금릉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다가 중퇴하였다. 1918년 파리에서 만국 평화 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듣고 김규식을 파견하였으며, 이듬해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임시 의정원 의원이 되었다. 이 해 겨울, 일본이 조선의 자치 문제에 대해 의견을 타진해 오자, 장덕수 등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독립의 필요성을 적극 역설하고 돌아왔다. 1920년 고려공산당에 가입, 이듬해 모스크바에서 열린 피압박 민족 대회에 참석하고 돌아와 중국의 쑨원과 협력하여 중국 혁명을 적극 추진하였다. 1929년, 영국의 식민정책을 비판했다가 영국 경찰에 잡혀 일본 경찰에 인계되어 3년간 감옥생활을 하였다. 1933년 중앙일보 사장을 지내다가 곧 사직하고, 1944년 비밀 단체인 '조선 건국연맹'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듬해 광복이 되자 '건국 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위원장이 되었고, '조선 인민공화국'을 세워 스스로 부주석이 되었으나 인정을 받지 못해 실패하였다. 12월 근로 인민당을 조직하여 당수로서 좌파 온건 세력을 규합하는 등 정치활동을 하다가, 1947년 한지근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여이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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呂爾徵(1588∼1656)

조선의 문신. 호는 동강이며 본관은 함양이다.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대제학을 거쳐 공조참판에 이르렀다. 성리학에 매우 밝았으며 시에 능하여 많은 묘비명을 찬하였다. 천문·역산·서화에도 능하였다.

연개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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淵蓋蘇文(?∼666)

고구려의 장군·정치가. 일명 개금, 천개소문이라고도 한다. 이는 당 고조의 이름이 '연'이었는데 이를 피하고자 고친 이름이다. 성품이 안하무인이어서 신하들이 그를 죽이고자 영류왕과 모의한 것을 알고, 642년 영류왕 이하 백여 명을 죽이고 보장왕을 추대한 후, 스스로 막리지가 되어 독재를 하였다. 그는 백제와 함께 신라와 당의 교통로인 당항성을 빼앗았으며, 이듬해 당의 숙달 등을 초청하여 도교를 퍼뜨렸다. 자주 신라를 침공하였는데, 신라의 요청으로 당은 양국 국교를 조정하려고 사신을 보내 왔으나 오히려 사신을 가두어 버렸다. 당 태종은 이에 격분하여 이세적 등을 거느리고 친히 쳐들어와서 안시성을 포위하였으나 실패하고 돌아갔다. 그 후에도 4차례나 당의 침입을 잘 막아내었으나 연개소문이 죽자 그의 아들들간의 세력 다툼을 틈타, 668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마침내 고구려는 멸망하였다.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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燕山君(1476∼1506)

조선의 제10대 왕(재위 1494∼1506). 성종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폐비 윤씨이다. 1483년, 세자에 책봉되어 서거정에게 학문을 배웠다. 즉위 후, 녹도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고 건주 야인들을 토벌하는 등 국방에 힘을 쏟았다. 한편, 사창·상평창·진제창을 설치하여 빈민을 구제하였으며 <국조보감> <동국명가집> 등을 간행하고, <속국조보감> <여지승람> 등을 완성하는 등, 즉위 초에는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성종의 후궁 정씨와 엄씨의 모함으로 폐위되어 사약을 받고 죽은 사실을 안 뒤부터는 향락과 횡포를 일삼았다. 정씨 소생인 안양군·봉양군을 살해하는 등, 1498년 무오사화, 1504년 갑자사화를 일으켜서 많은 선비와 충신들을 죽였으며, 왕을 비방하는 투서가 국문(언문)으로 되었다 하여 국문으로 된 서적을 불태우고 언문교육을 중지시켰다. 또한 사간원과 경연을 폐지하였으며 원각사를 기생 양성소로 만드는 등 횡포가 극에 달하였다. 1506년 성희안·박원종 등이 진성 대군(후의 중종)을 추대하고 연산군을 내쫓았다(중종반정). 연산군은 강화에 유배되었다가 병으로 죽었다.

연오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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延烏郎 신라 설화상의 인물. 원래 <수이전>에 전하는 이야기로 157년(아달라 왕 4), 아내 세오녀와 함께 동해 바닷가에 살다가 어느날 바위에 실려 일본으로 갔다. 그곳 사람들로부터 하늘에서 온 사람이라고 하여 왕으로 추대되었다. 한편, 남편을 기다리던 세오녀도 남편의 신발이 있는 바위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왕비가 되었다. 그 후 신라의 해와 달은 빛을 잃었는데, 일관의 말에 따라 일본에 사자를 보내어 연오랑을 찾았으나 연오랑은 하늘의 뜻이라 돌아갈 수 없다고 하였다. 그 대신 세오녀가 짠 천을 가지고 가서 하늘에 제사지내라고 하였다. 그가 말한 대로 행하니 해와 달이 전과 같이 빛을 찾았다. 그 비단을 어고에 두어 국보로 삼고, 그 창고를 귀비고, 제사 지내던 곳을 영일현이라고 하였다.

염무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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廉武雄(1942- )

문예비평가. 강원도 속초 출생. 서울대 문리대 독문과·동 대학원 졸업. 196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최인훈론>이 당선되어 문학평론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서울대 강사·덕성여대 국문과 전임강사를 지냈다. 67년부터 계간 <창작과 비평> 편집에 참여, 72년부터 주간이 되고 78년에 발행인이 되어 잡지 경영 책임과 편집자문위원을 맡아오고 있다. 현재 명남대 교수와 민예총 이사장으로 있다. 리얼리즘문학·농민문학·민족문학 등의 주제에 따른 뛰어난 평론들이 많으며, 70년대의 일선 문예비평가로서 서두에 서고 있다. 저서로 평론집 <한국문학의 반성>, 번역서로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백낙청과 공역), 카프카의 <성(城)> 등이 있다.

염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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廉想涉(1897∼1963)

소설가. 본명은 상섭(尙燮), 호는 횡보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보성학교를 거쳐 일본 게이오 대학 문학부를 중퇴하였다. 1920년 김 억·남궁 벽·오상순·황석우 등과 <폐허> 동인에 참가하였으며, 이듬해 <개벽>지에 단편소설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발표하여 문단에 등장하였다. 그 후 만주로 건너갔으며, 1936년 <만선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을 지내다가 광복이 되자 귀국하였다. 1946년 경향신문 편집국장, 1955년 서라벌예술대학 학장을 지냈고 예술원 종신 회원이 되었다. 1953년 서울시 문화상을, 1962년 3·1문화상 예술 부문 본상을 수상하였다. 우리나라 근대 문학운동의 중심 인물로 자연주의를 표방한 소설을 썼으나, 그의 문학사적 공로는 사실주의 문학의 확립에 이바지한 데 있다. 작품으로 단편 <암야> <신혼기> <두 파산> 등과 장편 <이심> <삼대> <채석장의 소년> 등이 있다.

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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閻長

신라의 장군. 839년 우징(신무왕)이 청해진에서 군사를 일으키자, 휘하 장수가 되어 우징을 임금으로 추대하였다. 신무왕이 왕이 되기 전에 장보고의 딸을 비로 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반대하는 신하가 있어 약속대로 하지 않자, 장보고가 반란을 일으킬 기세를 보였다. 이에 염장은 왕의 허락을 받고 청해진에 가서 거짓 항복하였다. 장보고는 평소에 그를 존경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뻐하여, 연회를 베풀고 술에 잔뜩 취하였다. 이에 염장이 칼로 장보고를 죽이고 돌아오니 왕은 매우 기뻐하여 그에게 아간 벼슬을 내렸다.

영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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靈觀(1485∼1571)

조선의 승려. 호는 부용이며 13세 때에 출가하여 신총에게서 불도를 배웠다. 1519년 금강산에 들어가 9년간 참선하였으며, 그 후 다시 지리산에 들어가 태고 법사의 법통을 이어받고 이를 휴정(서산 대사)에게 전함으로써 우리나라 불교의 정통을 이루게 하였다.

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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靈圭(?∼1592)

임진왜란 때의 승병장. 호는 기허, 성은 박, 본관은 밀양이다. 휴정의 으뜸가는 제자 중의 한 사람이며 공주 청련암에서 수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00명의 승병을 이끌고 의병장 조 헌과 함께 청주를 빼앗고 이어 금산에 이르러 왜군과 싸우다가 조 헌 등 700 의사와 함께 전사하였다. 법도 대인 등에 의하여 금산 남쪽 진락산에 영각이 세워졌고, 의선이란 편액이 하사되었다.

영류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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榮留王(?∼642)

고구려 제27대 왕(재위 618∼642). 영양왕의 이복 동생이며 즉위한 해인 618년, 수 양제가 죽고 당이 건국되자 이듬해 당에 사신을 보내어 친선을 꾀하였다. 622년, 당 고조의 청으로 살수대첩 때의 고구려 포로와 고구려에 있는 중국 포로들을 교환하였다. 625년 당에 사람을 보내어 불교와 도교의 원리를 연구하게 하였다. 631년 동북 부여성으로부터 동남해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기 시작하였으며, 638년 신라 북변의 칠중성을 공격하다가 패퇴하였다. 640년 세자 환권을 당에 보내어 조공케 하고 자제들을 파견하여 당 국학에서 공부를 시켰다. 그러나 642년 연개소문이 독재권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살해되었다.

영양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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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8)

고구려의 제26대 왕(재위 590∼618). 일명 평양왕이라고도 하며, 평원왕의 아들이다. 즉위 후 중국을 통일한 수의 침공에 대비하여 조공을 바치며 화친을 꾀하다가, 598년 요서를 먼저 공격하였다. 이에 수 문제가 3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이를 격퇴하였다. 600년 태학박사 이문진에게 명하여 <유기> 100권을 추려 <신집> 5권을 만들게 하였다. 612년 수 양제가 수륙 양면으로 침입해 왔으나 을지문덕 장군이 살수에서 전멸시켰다(살수대첩). 그 후에도 계속 수의 침입을 물리쳐서 수 멸망의 한 원인을 만들었다.

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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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祖(1694∼1776)

조선의 제21대 왕(재위 1724∼1776). 숙종의 넷째 아들이며, 경종의 이복 동생이다. 1699년 연잉군에 봉해지고 1721년 경종에게 후사가 없자 노론인 김창집 등이 왕세제 책봉을 상소하여 소론인 유봉휘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책봉되었다. 1722년 박상검·문유도 등의 음모로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하였으나 1724년 경종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김일경 등 신임사화를 일으킨 소론을 몰아내고 노론 정권을 수립했으나, 파벌의 폐습을 깊이 느껴 양파를 고르게 등용하여 당쟁을 없애는 탕평책을 마련하였다. 또한 가혹한 형벌을 없애거나 고쳐 인권존중을 기하였으며, 신문고를 부활하여 백성들의 억울한 일을 직접 고하게 하였다. 금주령을 내려 낭비의 습관을 고치게 하였으며 농업을 장려하였을 뿐 아니라, 균역법을 제정하여 세금 제도를 합리화하였다. 한편, 북방을 지키는 군사들에게 조총 훈련을 실시하고, 1729년 화차를 제작하게 하였으며, 진을 설치하여 토성을 쌓는 등 국방에 힘을 쏟았다. 학문을 좋아한 영조는 인쇄술을 개량하여 <속대전> <동국문헌비고> 등 많은 서적을 발간하게 하였으며 <악학궤범>의 서문과 <어제 경세문답> 등을 친히 지었다. 오가작통법을 부활하여 조세수입을 늘리고, 1756년 기로과를 신설하여 60세 이상된 노인에게도 과거를 볼 기회를 주었으며, 유능한 학자를 발굴하여 실학의 계통을 수립하게 하였다. 1762년 아들 사도(장헌)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비극도 있었으나 역대 왕 중 재위 기간이 가장 길고(52년), 각 방면에 부흥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영창 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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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昌大君(1606∼1614)

조선 선조의 아들. 선조에게는 13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모두 후궁 소생이었다. 그러나 그만이 정궁인 인목 왕후의 소생이었다. 선조는 이미 세자로 책봉한 광해군을 싫어하여 유영경 등과 영창 대군을 세자로 책봉할 것을 몰래 의논하였다. 이것을 안 이이첨·정인홍 등이 이를 반대하던 중, 갑자기 선조가 세상을 떠나자 광해군이 즉위하였다. 광해군은 이이첨 등의 농간으로 형인 임해군을 죽이고 인목 대비를 서궁에 가두었으며, 인목 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을 반역죄로 몰아 처형하였다. 이 때 영창 대군도 서인이 되어 강화에 끌려가 투옥된 후, 강화 부사 정 항에 의해 살해되었는데, 이 때 그의 나이 8세였다.

영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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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親王(1897∼1969)

대한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이름은 은이며 순종의 이복 동생이다. 1907년 황태자에 책봉되었으며, 12월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강제로 일본으로 끌려가 일본 교육을 받았고 마사코(方子)와 결혼하였다. 1926년 순종이 죽자 이 왕가를 계승하여 이왕(李王)이라 하였다. 일본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을 졸업했으며 육군 중장을 지냈다. 아들 구는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

예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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睿宗(1079∼1122) 고려 제16대 왕(재위 1105∼1122). 숙종의 아들이며, 1100년 태자에 책봉되었다. 즉위 후 1107년, 윤 관에게 명하여 여진을 토벌케 하였고 이듬해 윤 관에게 9성을 쌓게 하였으나, 여진족들이 애원하므로 1109년에 돌려주었다. 1116년 요·금의 침입을 받았으나, 1119년 친교를 맺어 사신이 오갔다. 예종은 학문을 좋아해서 학교를 세우고 육경을 강론케 하여 유학이 크게 융성하였다. 1120년 '팔관회'를 열고 개국공신인 김 낙·신숭겸의 죽음을 슬퍼하여 <도이장가>를 지었다.

예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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睿宗(1441∼1469) 조선의 제8대 왕(재위 1468∼1469). 세조의 둘째아들이며, 1457년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1468년 세조가 위독하자 왕위를 이어받아 즉위하였으나 재위 13개월 만에 죽었다. 재위중 세조 때 시작한 <경국대전>이 완성되었으며, 직전수조법을 제정하여 둔전의 일반인 경작을 허락하고 관제를 개혁하였다.

오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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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慶錫(1831∼1879)

조선의 역관·서화가. 자는 원거, 호는 역매, 본관은 해주로 오세창의 아버지이다. 중인 출신으로 역관이 되어 청에 왕래하며 신학문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해국도지> <영환지략> 등의 서적을 구입하여 친구인 유대치에게 읽게 했으며, 김옥균·박영효 등에게 개화 사상을 일깨워 주었다. 그 후 통정대부·가선대부 등을 거쳐, 1876년 한학 당상역관으로 좌의정 박규수와 함께 문호 개방을 주장하여 강화도 조약의 체결을 지지함으로써 조약을 원만히 맺게 하였다. 역관으로 청의 연경에 왕래할 때 원·명의 서화 100여 점을 사 가지고 돌아왔으며, 금석학에 대한 관심도 커서 역대 중국의 금석문을 수집했다. 또한 전서를 잘 썼으며 그림에도 뛰어났다. 저서로 <삼한 금석록>이 있다.

오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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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圭原(1941- ) 경남 밀양 출생. 1968년 동아대 법과를 졸업했으며,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문명한 사건>(1971), <순례>(1973),<사랑의 기교>(1975),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1978), <이 땅에 씌어지는 서정시>(1981), <사랑의 감옥> 등이 있다. 현대문학상·연암문학상을 받았으며, 82년 이후 서울예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오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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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達濟(1609∼1637)

조선의 문신. 자는 계휘, 호는 추담, 본관은 해주이다. 병자호란 때 3학사의 한 사람으로,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좌랑을 지냈다. 1636년 부교리로 있을 때, 청이 군신 관계를 맺자는 모욕적인 조건을 내놓자 이에 적극 반대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 남한산성으로 피란가서도 항복을 극구 반대하였다. 이듬해 인조가 청에 항복하자, 화의를 반대한 죄로 윤 집·홍익한과 함께 청에 잡혀가 죽임을 당하였다. 후에 영의정에 추증하고 시호를 내려 광주 현절사에 제향하였다.

오상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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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相淳(1893∼1963)

시인. 호는 공초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일본 도지샤 대학 종교철학과를 졸업하였다. 1920년 <폐허>의 동인으로 우리나라 신시 초창기부터 활동하였다. <아시아의 밤> <허무혼의 독언> 등 어둡고 절망적인 시를 주로 썼다. 1925년 보성고보의 교사를 거쳐, 1930년 불교중앙학림(동국대학의 전신)에서 교편을 잡았던 인연으로 기독교에서 불교로 개종하여 일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특히 담배를 즐긴 그의 생활은 널리 알려져 있다. 1954년 예술원 종신회원이 되었고, 1959년 예술원상, 1962년 서울특별시 문화상·대통령 포상 등을 받았다. 저서로 <오상순 시선>이 있으며 <한잔술> <첫날밤> 등의 작품이 있다.

오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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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世昌(1864∼1953)

독립운동가·언론인. 호는 위창, 본관은 해주로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896년 일본 문부성의 초청을 받아 외국어학교 조선어 교사로 초청을 받아 1년간 일본에서 교편을 잡았다. 1902년 '개화당 사건'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손병희의 권유로 천도교에 입교한 다음, 귀국하여 <만세보> <대한민보> 사장을 지냈다.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여 3년간 감옥생활을 하였다. 광복 후 서울신문사 명예 사장·대한 독립 애국단체 총연합회 회장 등을 지냈다. 전서와 예서에 뛰어났고 서화의 감식에 조예가 깊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오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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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億齡(1552∼1618)

조선의 문신. 자는 대년, 호는 만취, 본관은 동복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호조·이조좌랑 등을 지냈다. 그가 사간원 전한으로 있을 때 일본 사신을 맞아 접대했었는데, 일본 사신의 말 가운데에서 우리나라 침입의 눈치를 알아차리고 왕에게 아뢰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후에 그의 말이 그대로 들어맞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비로소 왕의 인정을 받았다. 1591년, 명에 사신으로 다녀오는 길에 임진왜란으로 피란가는 왕을 개성에서 만나 의주로 모시었다. 1601년 부제학으로 청백리로 뽑혀 왕이 상을 내렸으나 끝내 받지 않았다. 글씨에도 뛰어나, 초서·예서·전서를 고루 잘 썼다.

오연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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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延寵(1055∼1116)

고려의 문신. 본관은 해주이며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으나 학문에 힘써 문장에 능하였다. 1100년 사신으로 송에 가서 이듬해 <태평어람>을 구해 가지고 돌아왔다. 1107년, 부원수로 윤 관과 함께 여진을 소탕한 뒤, 성을 쌓고 돌아와 상서좌복야·참지정사가 되었다. 그 후에도 웅주성에 침입한 여진을 격퇴하여 공을 세웠으나, 1109년 길주성을 포위한 여진을 치다가 실패하여 화의를 맺고 돌아오자, 최홍사 등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다. 후에 다시 등용되어 상주국·병부판사 등을 지냈다.

오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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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永壽(1914∼1980)

소설가. 울주에서 출생하였다. 1939년 일본 도쿄 고쿠민 예술학원을 졸업하였으며, 그 후 경남여자고등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하였다. 1949년 <남이와 엿장수>를 <신천지>에 발표하였고, <머루>가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됨으로써 문단에 등장하였다. 문인협회상·아시아 자유문학상을 받았으며, 저서로 단편집 <머루> <갯마을> <메아리> <오영수 전집> 5권이 있다.

오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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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泳鎭(1916∼1974)

영화평론가·시나리오 작가. 평양에서 출생하였으며, 1938년 경성제국대학 조선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25년 유네스코 세계 예술가 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였고, 1953년 미국 국무성 초청으로 3개월간 미국 문화계를 시찰하였다. 예술원 회원·아시아 영화제 심사위원 등을 지냈으며, 아시아 자유문학상을 비롯해 문교부 장관상을 수상하였다. 저서로 <하나의 증언>이 있으며 시나리오 <시집가는 날> <배뱅이굿> <풍운> 등이 있다.

오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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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一島(1902∼1946)

시인. 본명은 희병이며 경북 영양에서 출생하였다. 제일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릿쿄 대학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중학교 교사로 있다가 1931년 문단에 등장하여 <시문학> <문예 월간> 등에 서정시를 발표하였다. 1934년 <시원>을 창간하여 문단에 예술지상주의의 꽃을 피게 하였다. <눈이여, 어서 내려 다오> <노변의 애가> 등 주로 슬픈 서정시를 발표하였다.

오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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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貞姬(1947- )

소설가. 서울 출생.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196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완구점 여인>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불의 강> <유년의 뜰> <바람의 넋> <저녁의 게임> <동경> <직녀> <미명> 등이 있다. 이상문학상과 동인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섬세한 내면의 정경을 묘사하면서, 인간의 존재론적 불안과 내면의 고뇌를 자의식적인 측면에서 예리하게 묘사하며, 여성의 심리적 갈등을 묘사하는 데 능숙한 작가로 알려져 있다.

오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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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之湖(1905∼1982)

서양화가. 전남 화순에서 태어나 일본 도쿄 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10년간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에서 교직을 지냈다. 1949년부터 조선대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1968년부터 다년간 국전 심사위원을 역임하였다. 1973년 예술원 회원에 선임되어 그 후 원로 회원으로 활약하였다. 국민훈장 모란장·예술원상을 수상하고, 국전 운영위원에 추대되었다. 1974년 유럽 각지의 문화계를 시찰하고, 1980년 아프리카 미술계를 시찰하였다. 저서로는 <오지호 작품집> <현대 회화의 근본 문제> <미학 원론> 등이 있다.

오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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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鉉明(1924∼

)

음악가. 평북 철산에서 태어나 서울대 성악과를 졸업하였다. 1950년 시민회관에서 오페라 <카르멘>을 공연하고, 1953년 제2회 독창회를 가졌다. 서울대 음대 강사를 역임하고, 동남아 순회 문화 시찰단 독창자, 국제 음악제 등에 출연하였다. 한양대 음대 교수·국립 오페라 단장·한양대 음대 학장을 지냈고, 국립 오페라단 종신 단원 등으로 활약중이다. 문화 예술상·서울시 문화상 등을 수상하였다. 저서로 <발성법> <오페라 실패담> 등이 있다.

오화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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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華燮(1916-1979)

영문학자. 인천 출생. 일본 와세다 대학 문학부와 동 대학원을 졸업, 1946년부터 고려대학교, 부산대학교 부교수를 거쳐 53년에 연세대학교 교수가 되었으며, 문과 대학장, 교육대학원장을 역임했다. 그 밖에 영어영문학회장, 한국 셰익스피어 협회 이사 등을 지내면서 영미 문학 중에서도 특히 연극에 관한 평론, 희극 등을 많이 번역하여 우리 연극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번역 문학상을 받았으며, 창작 희곡으로 <우리 읍내> <밤으로의 긴 여로> <지평선 너머> 저서에 <현대 미국극>, 번역서에 <베니스의 상인> 등이 있다.

옥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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玉寶高

신라의 음악가. 지리산 운상원에 들어가 50년 동안 금법(琴法)을 닦고 거문고의 새로운 가락 30곡을 지었다. 그 후 금법을 속명득에게 전했다. 금오산 금송정은 그가 거문고를 타던 곳이라 한다.

온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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溫達(?∼590)

고구려의 장군. 못생기고 몹시 가난하여 초라한 옷차림으로 거리를 구걸하며 다녀 모두들 바보 온달이라 하였다. 당시 평원왕의 딸 평강 공주가 울기를 잘하므로 그때마다 왕은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고 하였다. 후에 평강 공주는 스스로 온달을 찾아가 결혼하였다. 온달은 공주에게 글을 배우고 무술을 닦아 해마다 열리는 사냥 대회에 나가 좋은 성적을 올렸다. 당시 주나라의 무제가 쳐들어오자 앞장서서 나아가 승리를 거두고 장수가 되었다. 590년 영양왕 때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 이북의 땅을 되찾으려고 싸움터에 나갔다가, 아차산성에서 적의 화살을 맞고 죽었다.

온조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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溫祚王(?∼28)

백제의 시조(재위 기원전 18∼기원전 28). 고구려 동명왕(주몽)의 셋째 아들이다. 동명왕이 북부여에서 낳은 유리 왕자를 태자로 삼자, 신변에 위협을 느껴 형 비류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왔다. 비류는 미추홀(지금의 인천)로 가고 온조는 위례성(지금의 경기도 광주)에 도읍을 정하여 국호를 '십제'라 하였다. 비류가 죽은 후 그 백성들이 위례성에 모여들자 국호를 '백제'로 고쳤다. 말갈의 침입이 잦자 기원전 5년에 도읍을 남한산으로 옮겼다. 기원전 9년 마한을 멸망시켜 마한 땅을 합쳤으며 여러 곳에 성을 쌓는 등 국토를 개발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제13대 근초고왕 이전의 사실은 신빙성이 적은 것으로 보고 있다.

왕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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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可道(?∼1034)

고려의 문신. 본성은 이씨이며 본관은 청주이다.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서경의 장서기가 되었다. 1010년, 거란족이 침입하여 나라의 재정이 어려워져 군사들에게 주었던 토지를 다시 빼앗자, 이에 김 훈·최 질 등이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왕가도는 스스로 서경 유수판관이 되어 연회를 베풀어 최 질 일파를 죽이고 정권을 쥐고 있던 무신들을 내쫓았다. 이로 인해 호부상서가 되었고 공신의 호를 받았다. 1027년 참지정사가 되어 1029년 이응보 등과 함께 개경의 나성을 쌓았다. 이에 현종은 벼슬과 영작을 주고 임금의 성인 '왕'씨를 그의 성으로 삼게 하였으며, 그 후 덕종 때 그의 딸이 왕비가 되자 내사 문하평장사까지 되었다가 병으로 사임하였다.

왕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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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建(877∼943)

고려의 태조(재위 918∼943). 개성에서 금성 태수 왕 융의 아들로 태어났다. 895년 후삼국 때 아버지를 따라 궁예의 부하로 들어갔으며, 900년 광주·충주·청주 등을 공략하여 아찬 벼슬을 받았다. 그 후 계속하여 경상도·전라도 지방에서 견훤의 군사를 격파하는 한편, 정복한 지방의 백성들을 구제하는 데도 힘써 신망을 얻었다. 918년 세력이 강대해짐에 따라 난폭해지는 궁예가 인심을 잃자, 배현경·홍 유·신숭겸 등에 의하여 궁예를 내쫓고 왕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라 하였다. 이듬해 도읍을 철원에서 개경으로 옮기고 정치제도를 정비하여 국가의 기반을 닦았다. 왕 건은 지방의 호족을 조정하고 무마하는 한편, 기인제도를 만들어서 호족들과의 유대를 강화하였다. 또한 서경을 중요하게 여겨 왕식렴을 보내어 서경을 개척하고 대도호부로 승격시켰으며, 발해의 유민을 받아들이고 여진을 공격하였다. 건국 초부터 불교를 국교로 삼아 법왕사·왕륜사 등을 비롯하여 각처에 절을 세웠다. 935년 항복해 온 신라의 경순왕을 맞아 평화적으로 신라를 병합하고, 이듬해 먼저 투항해 온 견훤과 함께 후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킴으로써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그 해 <정계> <계백요서> 등을 저술하고, 934년 후세의 왕들이 나라를 다스리는 데 본보기로 삼게 하기 위하여 <훈요십조>의 교훈을 남겼다.

왕산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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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山嶽

고구려 때 거문고의 대가. 552년(양원왕 8), 진에서 들어온 칠현금을 개조하여 100여 곡을 지어서 연주하자 검은 학이 날아와 춤을 추었다고 한다. 이 개조한 칠현금이 현학금으로 오늘날의 거문고이다.

왕 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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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隆(?∼897)

고려 태조의 아버지. 도량이 넓고 뜻이 높은 큰 인물이었다. 개성 송악산 남쪽 기슭에 살았는데, 하루는 중 도선이 문밖 나무 그늘에서 쉬다가 “이 땅에서 성인이 나오리라”하였다. 그리고 글 한 통을 쓰더니 그에게 주면서 “내년에 반드시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아이가 크거든 이것을 주라”하였다. 이듬해인 877년 과연 왕 건을 낳았다. 후에 왕 건이 왕이 되자 아버지를 추존하여 세조 위무 대왕이라 하였다.

왕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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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仁

백제의 학자. 근구수왕 때 일본에서 학자와 책을 보내 달라는 청을 하였다. 이 때 왕의 손자 진손왕과 함께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갔다. 왕 인은 일본 태자의 스승이 되었으며 일본 문화 발전에 공헌하였다. 일본의 역사책 <고사기>에는 그의 이름을 와니키시라 하였고, <일본서기>에는 와니(王仁)라고 나와 있다. 우리나라 역사서에는 전연 그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요극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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姚克一

신라의 명필. 벼슬은 시중 겸 시서학사에 이르렀으며 구양순의 글씨체를 익혀 김 생 다음가는 명필로 불리었다. <지봉유설> <필원잡기>에는 고려 때의 사람으로 되어 있다.

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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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城(1846∼1940)

조선 말기의 승려. 전북 남원에서 출생하였으며 16세에 출가하여 해인사로 들어가 선종과 교종을 함께 공부하였다. 3·1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또한 불교를 발전시키려면 농사도 지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함양에 화원과 과수원을 만들었으며, 북간도에도 농장을 만들었다. 저서로 <수심론> <어록> 등이 있다.

우거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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右渠王(?∼기원전 108)

고조선(위만 조선)의 마지막 왕. 위만의 손자이며 한의 유민을 무제한 받아들이고 남쪽의 진이 한과 교통하는 것을 방해하였다. 이때 교섭하기 위하여 온 한의 사신 섭하가 귀국 도중 위만의 장수를 죽이자 그를 습격하여 살해하였다. 기원전 109년, 한이 수륙 양면으로 침입하자 화친을 주장하는 대신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싸웠으나, 이듬해 주화파인 이계상 참에게 살해되고, 참이 한에 항복함으로써 위만 조선은 3대 80여 년 만에 멸망하였다.

우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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于勒 가야 출신의 신라 악사. 본래 대가야국 성열현 사람으로 가실왕의 총애를 받았다. 가실왕의 뜻을 받들어 12현금(가야금)을 만들고 12곡을 지었다. 551년 진흥왕 때 신라에 투항하여 제자 이문과 함께 궁중에 들어가 곡을 지어 연주하였다. 이에 감동한 진흥왕은 그를 국원(지금의 충주)에 살게 하고, 이듬해 계고·법지·만덕을 가르치게 했다. 그는 각각 그들의 소질에 따라 계고에게는 가야금을, 법지에게는 노래를,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쳤다. 그 후 진흥왕에 의하여 가야금 곡이 궁중 음악이 되었고, 하림조·눈죽조의 2조가 생겨 모두 185곡의 가야금 곡이 남게 되었다. 충주의 대문산 기슭의 금휴포와 탄금대는 우륵이 가야금을 타던 곳이라 한다.

우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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禑王(1364∼1398)

고려의 제32대 왕(재위 1375∼1388). 공민왕이 신 돈의 집에 숨어들어가 신 돈의 시녀 반야에게서 낳은 아들로, 신 돈이 죽은 후 1371년 궁중에 들어가 명덕 태후의 궁에 있었다. 1374년 공민왕이 최만생 등에 의해 살해되자, 이인임 등의 주장으로 왕위에 올랐다. 1380년 명덕 태후가 죽자 방종해지기 시작하여 나라 일을 소홀히 하였다. 그를 옹립한 이인임 일당이 횡포를 부리는 등 나라 안이 소란해졌으며, 1388년 명이 철령위 설치를 통고해 오자, 최 영과 함께 랴오둥 정벌을 꾀하였다. 그러나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에 의해 폐위되었으며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강릉으로 옮겨져 서균형에게 살해되었다. <고려사>에는 신 돈의 시녀인 반야의 소생이라는 이유로 신 돈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후세 조선의 사가들이 조선 건국의 명분을 세우고자 내세운 사실의 날조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우장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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禹長椿(1898∼1959)

농학자. 일본 도쿄에서 출생하였으며 1919년에 도쿄 제국대학 농학과를 졸업하였다. 육종학을 연구하여 세계적인 농학자가 되었으며, 1930년 더블 페추니아 꽃의 육종 합성에 성공, 다윈의 진화론을 수정하였고, 종의 합성설로 1936년 모교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0년에 귀국하여 한국 농업 연구소장·농업 지도요원 양성소 부소장·학술원 추천회원이 되었다. 그동안 육종학 연구에 전념하여 채소 종자의 육종 합성에 성공하고 씨 없는 수박과 벼의 일식 이수작을 연구하였다. 1957년 부산시 제1회 문화상 과학 부문상을 받았으며, 1959년 대한민국 문화 포장을 받았다. 죽은 뒤 사회장으로 장사지냈다. 저서로 <십자화과 식물체 속의 게놈 분석과 유채의 합성> 등이 있다.

우 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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禹倬(1263∼1342)

고려의 학자. 자는 천장, 호는 역동, 본관은 단양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영해 사록으로 있을 때 민심을 현혹하는 요신의 사당을 철폐하였다. 1308년 충선왕이 즉위하자, 감찰 규정으로 충선왕의 잘못을 간하다가 벼슬에서 물러났다. 후에 충숙왕이 그의 충성됨을 알고 다시 불렀으나 사양하고 글을 벗삼으며 지냈다. 당시 원에서 성리학에 관한 서적이 들어왔는데, 이를 해독할 사람이 없자 한 달 동안 연구하여 처음으로 이를 밝혀내고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이로써 우리나라에 성리학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는 경사와 역학은 물론 복서에도 밝았다. “춘산에 눈 녹인 바람……”, “한 손에 막대 잡고……” 등 인생의 허무를 노래한 시조 2수가 전한다.

웅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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熊女

신화에 나오는 단군의 어머니. 환인의 아들인 환웅이 태백산 신단수 기슭에 내려와 신시를 열고 세상을 다스릴 때,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기를 빌었다. 이에 환웅은 쑥 한 자루와 마늘 20개를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된다고 일러주었다. 호랑이는 며칠을 견디지 못하였으나 곰은 백일을 견뎌 마침내 여자로 변하여 웅녀가 되었다. 이 웅녀는 환웅과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고 한다.

원광 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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圓光法師(542∼640)

신라의 승려. 566년 출가하여 중이 되었으며, 578년 진의 장엄사에 가서 <열반경> <구사론> 등을 비롯한 여러 경전을 연구하고 불경을 강의하여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589년 수에 건너가 혜원에게서 불법을 배우고, 600년 귀국하여 신라에 불법을 전하였다. 그 후 기실사에 있을 때 화랑 귀산과 취항이 찾아와 가르침을 청하므로 '세속오계'를 지어주었다. 608년 진평왕의 명으로 수에 군사를 요청하는 '걸사표'를 지었으며, 613년 황룡사에서 <인왕경>을 강의하였다.

원 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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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均(?∼1597)

임진왜란 때의 무장. 자는 평중이며 본관은 원주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조산만호로 있을 때 변방의 야인을 토벌한 공으로 부령 부사가 되었으며, 1592년 경상 우수사가 되었다. 이 해 4월에 왜적의 침입에 겁이 나서 도망하려다가 부하 장수 이운룡 등의 권고로 전라 좌수사 이순신의 구원을 얻어 적을 무찌르고 왕의 표창을 받았다. 1594년 이순신이 삼도 수군 통제사가 되고 그가 휘하에 있게 되자 이를 부끄럽게 여겨 명령에 불복하였는데, 조정에서는 충청 병사로 전임시켰다. 그 후 원 균의 시기와 남인·북인의 모함으로 이순신이 옥에 갇히고, 원 균이 통제사가 되었으나 군무에 태만하다가, 1597년 왜적의 재침 때 패전하여 도망하던 중 잡혀 죽었다. 죽은 뒤 좌찬성에 추증되고 원릉군에 추봉되었다.

원두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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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斗杓(1593∼1664)

조선의 상신(영의정·좌의정·우의정의 총칭). 자는 자건, 호는 탄수, 본관은 원주이다. 광해군의 정치가 점점 문란해지자, 여러 대신들과 힘을 합하여 인조반정에 성공하였다. 그 공으로 정사공신 2등에 뽑히고 평원군으로 책봉되었다. 또 이 괄의 난에 공을 세워 전주 부윤을 지냈으며, 병자호란 때에는 왕을 남한산성으로 모시고 가 어영대장을 지냈다. 그 후 효종 때 우의정, 현종 때 좌의정에 올라 내의원·군기시의 도제조를 겸하였다.

원성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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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聖王(?∼798)

신라 제38대 왕(재위 785∼798). 내물왕의 12세손이며, 780년 김지정의 반란을 김양상(선덕왕)과 함께 평정한 공으로 상대등의 벼슬에 올랐다. 선덕왕이 후사 없이 죽자 왕으로 추대된 주원이 비가 많이 오는 바람에 알천 땅을 건너오지 못하였다. 이를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한 신하들에 의하여 왕위에 올랐다. 787년 당에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청했으며, 이듬해 독서출신과를 두어 인재를 선발하였다. 790년 벽골제를 증축하여 농사를 장려하였다.

원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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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述

신라의 화랑. 김유신의 둘째 아들로 672년 당이 말갈족과 함께 신라를 공격하자, 비장으로 출전하였다. 신라 장군 효천·의문 등이 전사하고 신라가 패주하자 그는 죽기를 각오하고 적진으로 뛰어들려고 하였으나 좌관·담릉 등이 한사코 말리므로 후퇴하였다. 이에 김유신은 원술을 처형시킬 것을 왕께 아뢰었으나 왕은 허락치 않았다. 원술은 이를 부끄럽게 여기고 시골에 숨어 살다가,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를 만나려 하였으나 어머니도 끝내 만나주지 않았다. 그는 그 길로 태백산에 들어갔는데, 675년 당의 군사가 매소성으로 쳐들어오자 지난날의 치욕을 씻기 위해 싸움터로 나가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여전히 어머니가 만나주지 않자 세상을 비관하고 숨어 살았다.

원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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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宗(1219∼1274)

고려의 제24대 왕(재위 1259∼1274). 고종의 맏아들로, 1235년 태자로 책봉되었다. 1259년 고종을 대신하여 몽고에 들어가 입조(몽고 황제를 뵙는 일)하고 돌아와 이듬해 왕위에 올랐다. 1269년 임 연에 의해 잠시 폐위되었으나, 원의 도움으로 다시 왕위에 올랐다. 1270년 개경으로 환도한 후 삼별초의 해산을 명령하자 삼별초의 난이 일어났는데, 1273년 여·몽 연합군에 의하여 평정되었다. 원의 요구로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전함 300 척을 만들게 했으며, 남편 없는 여자 140명을 요구해 오자 뽑아 보내어 백성의 원망을 샀다. 그의 재위 시대는 고려의 세력이 몽고로 넘어가려는 과정으로서 국사가 다난하였다.

원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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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天錫

고려 말의 선비. 자는 자정, 호는 운곡, 본관은 원주이다. 고려의 정치가 문란함을 보고 치악산에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부모 봉양에 힘쓰는 한편, 이 색 등과 사귀면서 어지러운 정치를 개탄하였다. 일찍이 이방원(후의 조선의 태종)에게 학문을 가르쳤기 때문에 여러 번 태종의 부름을 받았으나 응하지 않았다. 멸망한 고려를 회상하는 시조 <회고가> 1수가 전하며 야사 6권을 저술하였으나 그의 증손이 국사와 저촉되는 점이 많아 화가 두려워 모두 불살라 버렸다고 한다.

원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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圓測(613∼696)

신라의 승려. 627년 당에 건너가 불법을 배웠다. 특히 어학에 뛰어나 한문의 음과 범어의 뜻에 능통하였다. 당 태종 때 원법사에서 <비담론>과 <구사론> 등을 읽었다. 또한 당 태종에게 승려의 새로운 증명서인 도첩을 받았으며, 인도의 중 지바하라가 가져온 경전을 번역하였다. 당의 불수기사에서 죽었다. 저서로 <해심밀경소> <인왕경소> <유식론소> 등이 있다.

원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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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昊

조선 단종 때 생육신의 한 사람. 자는 자허, 호는 무항, 본관은 원주이다.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냈고, 문종 때 집현전 직제학에 이르렀다. 단종이 수양 대군에 의해 영월로 쫓겨가자 세상과 접촉을 끊고 살았다. 1457년 단종이 죽자 원주에 내려가 있는 것을 세조가 호조참의 벼슬을 내리고 불렀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숙종 때 그 절개를 찬양하여 고향에 정문이 세워졌다.

원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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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曉(617∼686)

신라의 승려. 호는 화정, 성은 설씨이며 상주에서 출생하였다. 28세 때 승려가 되어 황룡사에 들어갈 때 집을 희사하여 초개사를 세우게 했다. 34세 때 의상과 함께 불법을 닦으러 당에 가던 길에 요동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다. 잠결에 목이 말라 맛있게 물을 마셨는데, 다음날 아침에 깨어보니 해골 속의 더러운 물이었음을 알고 급히 토하다가 깨닫기를 \"마음이 나야 모든 사물과 법이 나는 것이요, 마음이 죽으면 곧 해골이나 다름이 없도다. 부처님 말씀에 3계가 오직 마음뿐이라 한 것을 어찌 잊었더냐\" 하고 그냥 되돌아왔다. 그 후 분황사에서 독자적으로 통불교를 제창하여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다. 태종 무열왕의 딸 요석 공주와의 사이에서 설총이 태어나자, 이때부터 승복을 벗고 소성 거사라 자칭하며 세속의 온갖 고통에 얽매이지 않고 삶을 즐기며 지냈다. 당으로부터 <금강삼매경>이 들어오자, 왕과 고승 앞에서 이것을 풀이하여 존경을 받았다. 그 후 절에 파묻혀 참선과 저술로 만년을 보냈다. 불교사상의 통일과 실천에 노력한 정토교의 선구자로 대승불교의 교리를 실천하였다. 저서로 <법화경종요> <열반경종요> <무량수경종요> 등이 있다.

월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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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明師

신라의 승려. 760년(경덕왕 19) 하늘에 두 개의 해가 나타나 열흘이 지나도록 없어지지 않자, 왕의 청으로 향가 <도솔가>를 지어 불러 변을 해결하였다고 한다. 또한 죽은 누이를 위해 <제망매가>를 지어 불러 그 영혼을 위로하였다고 한다. 그는 피리를 잘 불어 고요한 달밤이면 문앞 큰 길에 나와서 불렀는데, 그 소리에 달마저 가기를 멈추어 그 길을 '월명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월산 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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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山大君(1454∼1488)

조선의 왕족. 자는 자미이고 호는 풍월정이며 덕종의 맏아들로 성종의 친형이다. 어릴 때에는 할아버지인 세조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으며 문장에도 뛰어나 중국에까지 그의 시가 알려졌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북촌에다 별장을 지어놓고 그 곳에서 시를 짓고 책을 읽으며 자연 속에 묻혀 일생을 보냈다. 저서로 <풍월정집>이 있다.

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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衛滿

위만 조선의 시조(재위 기원전 194∼?). 연왕 노관의 부하로 있다가 노관이 한나라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 후 흉노 쪽으로 도망하자, 부하 쳔여 명을 이끌고 고조선에 들어와 고조선의 준왕에게 신임을 얻어 북방 수비를 담당하였다. 그 후 유민들의 세력이 강해지자 준왕을 내쫓고 왕검성에 도읍을 정하고 위만 조선을 세웠다. 그의 혈통이 본래는 한민족이라는 설도 있다.

위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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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弘(?∼888)

신라의 정치가. 진성 여왕 때에 각간(지금의 국무총리)이 되어 정치를 어지럽혔다. 진성 여왕은 위홍과 대구 화상에게 향가를 수집하여 이를 편찬케 하였다. 이것이 <삼대목>인데 전하지는 않는다. 그는 진성 여왕과의 나쁜 행실로 조정을 문란하게 하였다.

유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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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璥(1211∼1289)

고려의 공신. 자는 천년, 본관은 문화이다. 당시 최 의가 정권을 장악하여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자, 김인준과 함께 최 의를 죽이고 정권을 다시 왕에게 돌려주었다. 그 공으로 좌우위 상장군에 올랐으며 공신의 호를 받았다. 삼별초의 난이 일어났을 때 강화도에서 붙잡혔으나 탈출해 돌아왔는데, 왕은 기뻐하여 평장사 판병부사의 벼슬을 내렸다. 그는 신종·희종·강종·고종 등 4대의 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안 향 등 많은 학자들이 그에게서 글을 배웠다.

유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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兪棨(1607∼1664)

조선의 문신. 자는 무중, 호는 시남, 본관은 기계이다.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636년 병자호란 때 청과 화의를 주장하여 유배되었다. 1649년 인조가 죽자 다시 등용되어 부교리가 되었고, 장례 절차를 예론에 따라 시행토록 명종에게 건의하여 그대로 실시하였다. 그는 특히 예론에 대해서 매우 뛰어난 학자였다. 1715년 숙종 때 그가 지은 <가례원류>로 인해 노론·소론 사이에 치열한 당쟁이 벌어졌다. 저서로 <시남집> 등이 있다.

유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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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寬順(1904∼1920)

3·1운동 때의 순국 쳐녀. 충남 천안에서 출생하였으며 크리스트교 선교사의 주선으로 이화학당에 입학하였다. 총명하고 의지가 굳어 어린 나이에도 겨레의 앞날을 걱정하며 '한국의 잔 다르크'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학생들과 함께 시위에 참여하였으며, 학교가 문을 닫자 고향으로 내려가 독립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천안·청주·연기·진천 등지의 학교와 교회의 유지들을 방문하고 시위 운동을 의논하였다. 음력 3월 1일 아오내 장터에서 일제히 궐기하였으며 유관순은 열렬한 연설로 시위 행렬을 지휘하고 독립 만세를 불렀다. 이를 막기 위한 일본 경찰의 칼에 쓰러져 체포되었으며 아버지와 어머니는 총살당하였다. 유관순은 모진 고문에도 굽히지 않고 때때로 만세를 불러 동지들을 격려하다가 이듬해 10월, 갖은 형벌 끝에 순국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유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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兪吉濬(1856∼1914)

조선 말의 정치가·개화운동가. 자는 성무, 호는 구당, 본관은 기계이다.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1880년 일본에 건너가 게이오 의숙에 들어갔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워싱턴·보스턴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유럽 각국을 시찰한 후, 1884년 귀국하였으나 개화파로 몰려 감옥에 갇혔는데, 이 때 <서유견문>을 편찬하였다. <서유견문>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국한문체를 사용하였다. 1892년 전기 응용에 관한 교섭문서를 옥중에서 번역하고, 우리나라의 무한한 자원을 외국인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상소하여 중지시킨 공으로 석방되었다. 1894년 갑오경장 때 외무참의가 되고, 이듬해 내부대신이 되었으나 아관파천으로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907년 순종 황제의 특명으로 귀국하여 홍사단을 통해 국민 계몽운동에 힘썼다. 1909년 우리나라 최초의 문법서인 <대한문전>을 간행하였고, 경술국치 후 일제가 남작을 주었으나 사퇴하였다. 저서로 <보로사국 후례두익대왕 칠년전사> 등이 있다.

유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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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達永(1911- )

농학자, 사회 운동가, 수필가. 호는 성천(星泉). 경기도 이천 출생. 1936년 수원 고등농림학교(현재의 서울대학교 농과 대학)를 졸업하고 미국 미네소타 대학에서 공부했으며 1972년에 건국대학에서 명예 농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농학 관계의 연구 활동을 하는 한편, 밝은 사회를 위한 사회 운동에도 앞장섰다.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 교수, 유기농업협회 회장 등으로 일하면서 <유토피아의 원시림> <인간 발견> <흙과 사랑> <소심록> <유달영 인생론집> 등 많은 수필집을 펴냈다.

유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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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德章(1694∼1774)

조선의 화가. 자는 자고, 호는 수운, 본관은 진주이다. 동지중추 부사를 지냈으며 묵화로 대나무를 잘 그렸다. 팔순이 넘어서도 필력이 쇠하지 않았다 하며, 탄은의 화풍을 따랐다. 작품으로 <묵죽도> <설죽도>가 있다.

유득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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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得恭(1749∼?)

조선의 실학자. 자는 혜풍, 호는 냉재, 본관은 문화이다. 일찍이 진사에 합격하여 정조 때에 규장각 검서가 되었다. 이덕무·박제가·서이수와 함께 '4검서'라 불리며, 북학파인 박지원의 제자로 박제가·이덕무와 더불어 실사구시의 방법으로 근대 문물을 수입하여 산업 진흥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덕무·박제가·이서구와 함께 '한학 4가'라고도 불린다. 저서로 <냉재집>이 있다.

유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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瑠璃王(?∼18)

고구려의 제2대 왕(재위 기원전 19∼기원후 18). 시조 동명왕의 맏아들로 부여에서 아버지를 찾아 고구려로 와서 태자에 책봉되고 동명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기원전 17년 <황조가>를 지었고, 기원전 9년 선비족을 쳐서 항복을 받았다. 3년 도읍을 국내성으로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았으며, 13년 부여의 침입을 받았으나 크게 무찔렀다. 이듬해 왕자 무휼(후의 대무신왕)을 태자로 책봉하였으며 한의 고구려 현을 빼앗았다.

유방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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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方善(1388∼1443)

조선의 학자. 자는 자계, 호는 태재, 본관은 서산이다. 권 근·변계량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태종 때 사미시에 급제하였으나, 1409년 서산으로 유배되었다. 이 때 서당을 짓고 학문에 열중하자, 아이들이 몰려들어 그에게서 글을 배웠다. 세종은 그의 학식이 높고 인품이 훌륭함을 알고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어 학문에 대해 의논하게 하였다. 이에 주부라는 벼슬을 내렸으나 얼마 후 병으로 죽었다. 그의 제자로 서거정·이보흠 등 이름있는 학자가 많으며 그림도 잘 그렸다. 저서로 <태재집>이 있다.

유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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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成龍(1542∼1607)

조선의 문신·학자. 자는 이견, 호는 서애, 시호는 문충, 본관은 풍산이다. 일찍이 이 황에게서 배우고,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로서 춘추관 기사관을 겸했다. 선조 때 서장관으로 명에 다녀와 직제학·승지·부제학을 거쳐 상주 목사를 지내면서 어머니의 병을 간호하였다. 그 후 예조판서·이조판서 등을 지낸 후, 1590년 우의정에 승진되어 광국공신으로 풍원 부원군에 봉해졌다. 좌의정에 재직 중 일본이 그들의 군사를 명으로 들여보내겠다는 국서를 보내왔는데, 이 사실을 명에 알려 훗날 명의 조선에 대한 의심을 풀게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권 율·이순신 등의 명장을 등용했으며, 영의정에 올라 왕을 모시고 피란가던 중 평양에 이르렀을 때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다. 그는 평양에서 소동을 일으킨 난민들을 진정시키고 왕의 행렬이 의주로 향할 것을 주장하여 후에 명의 구원의 길을 열게 하였다. 관서 도체찰사가 되어 안주에 있으면서 군량을 준비하다가 이여송에게 평양 지도를 주어 전투상의 편의를 제공하고 간첩 수십 명을 잡아 죽였다. 그 후 삼남 도체찰사가 되어 이여송의 후퇴를 강력히 막아 전진케 했으며, 훈련도감제를 두어 군사를 훈련케 하고 다시 영의정에 올랐다. 1598년 북인의 탄핵을 받고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2년 후 복관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604년 호성공신에 책록되었으며 문장과 글씨로 이름을 떨쳤다. 특히 영남 유생들의 숭배를 받았으며 예악교화·치병이재에 이르기까지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저서로 <서애집> <징비록> <관화록> 등이 있다.

유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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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誠源(?∼1456)

조선의 문신·사육신의 한 사람. 자는 태초, 호는 낭간, 본관은 문화이다.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로 있으면서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1453년 김종서 등을 죽이고 권력을 잡은 수양 대군의 탄압에 못이겨 정난공신의 공로를 기록하는 교서를 썼다. 그 후 성삼문·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1456년 탄로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자결하였다. 영조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가곡원류>에 시조 1수가 전한다.

유 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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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淑(1827∼1873)

조선 말기의 화가. 자는 선영, 호는 혜산, 본관은 한양이다. 도화서의 화원을 지냈으며 산수화를 비롯해 꽃·새 등을 정묘하고 아름답게 잘 그렸다. 완당 김정희는 유 숙의 <하산욕우도>를 평하여 “화경에는 주객의 구별이 뚜렷해야 하는데 이 작품에서는 주와 객이 분명치 않아 제1급의 그림이 못 된다”고 하였다. 작품으로 <계산추새도> <신선도> <오수삼매> 등이 있다.

유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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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順汀(1459∼1512)

조선의 문신. 자는 지옹, 본관은 진주이다.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연산군 때 성희안 등과 모의하여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왕위에 오르게 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1등 정국 공신이 되었으며, 한때 임사홍의 미움을 받기도 했으나 해를 입지는 않았다. 중종 때 영의정에까지 올랐으며 활을 아주 잘 쏘았다. 문무를 경한 공신으로 명망이 높았다. 사후 중종의 사당에 배향하였다.

유숭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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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崇祖(1452∼1512)

조선의 학자. 자는 종효, 호는 진일재, 본관은 전주이다.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동지중추 부사가 되었다. 도학정치를 실현하고자 한 최초의 학자로서 성균관에 18년간 있는 동안 성리학에 큰 공을 세웠다. 조광조 등과 같은 훌륭한 학자를 길러냈고 경서를 우리 말로 옮긴 최초의 책인 <칠서언해>를 내놓았다. '칠서언해'란 중국의 경서인 <주역> <서경> <시경> <대학> <중용> <논어> <맹자>를 한글로 번역한 책이다.

유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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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伸(?∼1105)

고려의 문신·서도가. 1087년 선종 때 요에 사은사로 다녀왔으며, 1093년 다시 사신으로 송에 가서 <책부원귀>를 얻어 가지고 돌아왔다. 그 후 벼슬이 좌복야 정당문학에 이르렀고 글씨에 뛰어났다. <이상국집>에 의하면 그의 글씨는 신의 경지에 이르렀고 신라의 김 생, 고려의 탄 연·최 우에 다음가는 명필이라 하였다. 순천 조계산에 있는 송광사의 <불일보조국탑비>는 그가 쓴 것이다.

유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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兪莘煥(1801∼1859)

조선 말기의 학자. 자는 경형, 호는 봉서, 본관은 기계이다. 헌종 때 전의현감이 되어 선비들에게 소학을 가르치는 한편, 탐관오리를 처벌하였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존경하였다. 그러나 모함을 받아 홍천으로 유배되었다가 돌아온 후부터는 후진 양성을 위해서만 힘썼다. 그는 조선 말기 성리학의 대가로서 유명하다. 저서로 <패동수언> <동유연원> 등이 있다.

유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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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如大(1878∼1937)

독립운동가·목사. 호는 낙포이며 평북 의주에서 출생하였다. 1900년 의주에 양실학교를 세웠으며 선교활동을 하다가 목사가 되었다.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의주의 시위 운동을 지도하였다. 저서로는 <면무식> <위인기담> 등이 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유운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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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雲龍(1539∼1601)

조선의 문신. 자는 응견, 호는 겸암, 본관은 풍산이다. 선조 때 전함사별좌를 지냈으며 백성들을 어질게 다스렸으므로 존경을 받았다. 그 후 1592년 사복시첨정으로 벼슬이 올랐으며, 이듬해 풍기 군수로 있을 때 도둑떼를 소탕하여 공을 세웠다.

유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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釉由(?∼246)

고구려의 충신. 246년 위의 관구검이 쳐들어와서 환도성이 함락되고 동천왕이 위급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 때 유유는 혼자 용감히 적진으로 나아가 위의 장수를 만나 항복하는 척하다가 틈을 보아 적장을 찔러 죽이고 자기도 같이 죽음로써 왕을 위급한 상황에서 구했다. 장수를 잃은 위군은 혼란을 일으켜 대패하고 낙랑으로부터 쫓겨가 버렸다. 국토가 회복되자 구사자라는 벼슬에 추증되었으며 아들 또한 대사자의 벼슬을 받았다.

유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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兪應孚(?∼1456)

조선의 무신·사육신의 한 사람. 자는 신지, 호는 벽량, 본관은 기계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평안도 절제사를 거쳐, 1455년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동지중추 원사·평안도 절제사 등을 지냈다. 활을 잘 쏘고 학식이 깊어 세종·문종의 사랑을 받았다. 같은 해 성삼문·박팽년 등과 단종 복위를 모의하고 명의 사신을 초대하는 연회장에서 세조를 살해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김 질의 배신으로 탄로되고 붙잡혀 심한 고문을 당하였으나, 끝까지 불복하다가 죽었다. 기골이 장대하고 효성이 지극했으며 청렴결백하였다. 숙종 때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유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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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麟錫(1842∼1915)

조선의 학자·의병장. 자는 여성, 호는 의암, 본관은 고흥이다. 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할 때, 문하(門下)의 유생들을 이끌고 이를 반대하였다. 1894년 김홍집의 친일 내각이 조직되자 의병을 일으켜 충주·제천 등지에서 싸워 김규식·권 소 등 부패한 관리들을 죽였다. 그러나 관군에게 패하여 만주로 망명하였으며, 1909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3도 의군 도총재가 되어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만주 봉천 성에서 병사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저서로 <소의신편> <화동속강목> 등이 있다.

유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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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一韓(1895-1971)

실업가·사회사업가. 평남 평양 출생. 9세 때에 미국에 건너가 고학으로 공부하여 1919년에 미시간 대학을 졸업, 1922년에 동 대학원을 수학하였다. 그 뒤 미국에서 식품 회사를 경영하여 크게 성공하고, 귀국하여 1926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제약 회사인 '유한양행'을 세웠다. 한편 한국 고등기술학교를 세웠으며, 여러 가지 공익사업과 육영 사업에도 힘썼다. 또한 뉴욕 한미상공회의소 회장·대한상공회의소 회장 등을 지냈으며, 국민훈장 모란장 및 무궁화장을 받았다. 저서에 <한국과 태평양 전쟁> 등이 있다.

유자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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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子光(?∼1512)

조선의 간신. 자는 우준, 본관은 영광이다. 용맹이 뛰어나 세조 때 무과에 올랐으며 예종 초에 남 이·강 순 등을 역모자로 몰아 죽였다. 그 후부터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은 반드시 모함해서 몰아냈다. 성종 때 도총관에 임명되자 서자 출신이라 하여 논란이 많았다. 그 후 사신으로 명에 여러 번 다녀왔으며, 일찍이 경남 함양 군수로 있을 때 자작시를 써 현판에 새겨 걸게 하였는데, 그 후 김종직이 함양 군수로 부임하자 떼어버렸다. 이에 원한을 품고 있었는데, 1498년 연산군 때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이 스승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은 것을 트집잡아 김종직의 저서와 현판을 모두 거두어 불사르게 하고 그를 대역죄로 몰아 그의 제자들까지 희생시킨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그 후 대신들의 탄핵으로 한때 벼슬에서 물러났으나, 성희안과의 인연으로 1506년 중종반정에 참가하여 1등 공신이 되었다. 이듬해 대신들의 탄핵으로 훈작을 빼앗기고 유배되었다가 장님이 된 후 죽었다.

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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惟政(1544∼1610)

조선의 고승·의병장. 속성은 임, 자는 이환, 호는 사명당, 본관은 풍천이다. 경남 밀양에서 출생하였으며 13세 때 경북 직지사에 들어가 신문 화상에게 선을 받아 승려가 되었다. 명종 때 선과 시험에 합격한 뒤, 묘향산에서 휴정(서산 대사)의 불법을 이어받았다. 금강산·팔공산·태백산 등의 명승지를 유람하며 도를 닦던 중, 옥천산 상동암에서 소나기에 의해 떨어진 꽃을 보고 인생의 무상함을 느껴 제자들을 해산시킨 다음 오랫동안 홀로 참선하였다. 1589년 정여립의 역모 사건에 관련되어 투옥되었으나 무죄로 풀려나와 금강산에서 3년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200여 명의 승병을 모집하여 휴정의 밑으로 들어갔다가, 이듬해 그의 뒤를 이어 승군 도총섭이 되어 명의 군사와 협력하여 평양을 탈환하였다. 또한 도원수 권 율과 같이 의령에 내려가 왜군을 격파하여 당상이 되었다. 1594년 명의 장군 유 정(劉綎)과 의논한 후, 왜장 가토를 울산 진중으로 세 번 방문하여 왜군의 정세를 알아보고 돌아왔다. 이어 영남 지방에 내려가 팔공·금오·용기 등지에 산성을 쌓고 군량미와 무기를 갖추어 방비 태세를 굳건히 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명의 장군 마귀를 따라 울산의 도산에 쳐들어갔으며, 이듬해 순천의 예교에서 공을 세워 동지중추 부사가 되었다. 1604년 국서를 받들고 일본에 가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강화를 맺고 포로로 잡혀 갔던 3,500명을 데리고 돌아와 임금이 내리는 말인 어마를 하사받았다. 이때는 휴정이 입적한 해로 스승의 영탑에 예를 올리고 치악산에 들어갔으며 선조가 죽은 후에는 해인사로 들어가 불도를 닦았다. 저서로 <사명집> <분충서난록>이 있다.

유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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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周鉉(1921∼1982)

소설가. 호는 묵사이며 경기도 여주에서 출생하였다. 일본 와세다 대학 전문부 문과를 중퇴하였으며, 1948년 문예지 <백민>에 <번요의 거리>가 발표됨으로써 문단에 등장하였다. 그 후 <백민> 편집 동인을 거쳐 신태양사 편집국장 등을 지내며 창작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의 작품은 주지와 사실의 조화를 잘 그려냈다. 1958년 아시아 자유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작품으로 <태양의 유산> <바람 옥문을 열라> <조선 총독부> 등이 있다.

유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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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辰仝(1497∼1561)

조선의 문신·서화가. 자는 숙춘, 호는 죽당, 본관은 진주이다. 경남 진주에서 출생하였으며,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전라·경기·평안 등의 관찰사와 도총관을 지냈다. 글씨와 그림에 뛰어났으며, 특히 대나무를 잘 그렸다. 현재 남대문의 현판인 '숭례문' 3자를 썼다는 설이 있다.

유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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兪鎭午(1906∼1987)

소설가·법학자·정치가. 호는 현민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경성제국대학 예과와 문학부 법과를 졸업한 후 모교의 교수로 있으면서 문예지 <조선지광>에 <김강사와 T교수>를 발표하였다. 광복 후에는 주로 법학자로 활동하였으며, 1948년 헌법 기초위원으로 대한민국 헌법의 근간을 마련하였다. 이듬해 고려대학교 법정대 학장을 거쳐, 1952년 고려대학교 총장이 되었다.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 대학에서 연구원으로 있다가 귀국하여, 1961년 5·16 군사정변 뒤 재건 국민운동 본부장이 되었다. 1967년 신민당 총재로 취임하면서 정치계에 들어서 정치인으로도 크게 활약하였다. 학술원 종신회원을 지냈으며, 저서로 <헌법해의> <헌법강의> <구름 위의 명상> <유진오 단편집> 등이 있다.

유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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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敞(?∼1421)

조선의 개국 공신. 자는 맹의, 호는 선암, 본관은 강릉이다. 이 색의 제자이며,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박사·문하 주서 등을 지냈다. 특히 이성계와 친하여 그에게 학문을 가르쳐 주었다. 1392년 조선 건국에 공을 세워 2등 공신으로 대사성·중추원 부사 등을 거쳐 예문관 대제학이 되었다. 1408년 태조 이성계가 죽자 3년 동안 묘를 지켰다. 저서로 <선암집>이 있다.

유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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兪拓基(1691∼1767)

조선의 상신. 자는 전보, 호는 지수재, 본관은 기계이다. 1721년 사신으로 청에 다녀온 후 신임사화가 일어나자 경남 동래로 유배되었다. 1725년 노론이 권력을 잡자 풀려나와 대사간을 거쳐 호조판서·우의정이 되었다. 이때 신임사화로 죽은 김창집과 이이명의 복관을 건의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 후 1758년 영의정이 되었으나 곧 그만두었다. 그는 당대의 명필이었으며 저서로 <지수재집>이 있다.

유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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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致眞(1905∼1974)

극작가. 경남 충무에서 출생하였으며 청마 유치환의 형이다. 일본 릿쿄 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뒤 귀국하여 '극예술연구회' 동인으로 극작과 연출에 전념하였다. 1941년 극단 '현대극장'을 세우고 1946년 '극예술 협회'를 조직했으며 이듬해 한국 무대 예술원 초대원장을 지냈다. 1949년 중앙 국립 극장을 세웠으며 우리나라 무대 예술의 원로로 활동해 왔다. 서울시 문화상을 받았으며 동국대 교수를 거쳐 한국연극연구소(드라마센터) 소장이 되었다. 희곡집으로 <소> <원술랑> <나도 인간이 되련다> 등이 있다.

유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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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致環(1908∼1969)

시인. 호는 청마이며 경남 충무에서 출생하였다. 연희전문학교 문과에서 공부하였으며 일제 시대 만주에서 방랑하다가 돌아왔다. 1931년 <문예월간>지에 <정적>을 발표하며 문단에 등장하였다. 그의 대표작 <깃발> 등 초기의 작품에서는 허무적인 경향이 짙었으나 차차 인간의 생명·의지를 노래한 작품을 써서 세칭 생명파라고 불리운다. 그는 생의 추구와 개척의 태도가 허무를 초극하는 강렬한 의지를 실현하려 하였다. 이런 정신적 자세는 인생을 본질적이고 근원적으로 탐구하는 형이상학적 내용의 시로 나타났다. 따라서 개념에 충실한 나머지 시어의 조탁에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아 때로는 생경한 언어가 사용되는 수가 있으나 이것은 도리어 독자의 눈을 인생의 내부로 끌어들여 깊은 감동을 주는 효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서울시 문화상·자유문학상·예술원 공로상 등을 수상했으며 경주고등학교·경남여고·부산 남성여고 교장 등을 지내다가 교통사고로 죽었다. 시집으로 <청마시초> <생명의 서> <울릉도> 등이 있으며, 수필집으로 <예루살렘의 닭> <나는 고독하지 않다> 등이 있다.

유현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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兪賢穆(1925- ) 영화감독. 황해도 사리원 출생. 동국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47년에 이규환 감독의 조감독으로 출발해 1956년에 <교차로>로 감독에 데뷔했다. 대표작인 <오발탄>(1961)은 이범선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로, 뛰어난 영화기법을 곁들여 비참한 사회를 날카롭게 비판하여 우리나라 영화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손꼽힌다. 또한 <잉여인간>(1964)도 <오발탄>과 같은 성격의 영화이며, 박경리 원작의 <김약국의 딸들>(1963), 황순원 원작의 <카인의 후예>(1968)도 소설을 영화로 만든 주요 작품이다. 1980년대에는 이문열 원작의 <사람의 아들>(1980)로 다시 주목을 받았다. 신상옥, 김기영, 강대진, 이만희 등과 함께 1960년대 우리나라 영화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손꼽힌다. 현재 동국대 명예교수와 예술원 회원으로 있다.

유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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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馨遠(1622∼1673)

조선의 실학파 학자. 자는 덕부, 호는 반계, 본관은 문화이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5세 때부터 이원진·김세렴을 스승으로 모시고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정동직과 더불어 '이기사칠' '인심도심' 등의 설을 논술하는 등 옛 사람이 발견하지 못한 것을 많이 발견하였으며, 주자의 <가례>에 의하여 모든 의례를 행하였다. 진사에 급제한 후 1653년 효종 때 전라도 지방으로 옮겨와 살면서 저작에 힘쓰고 이상적인 세상을 건설하려는 이념에 몰두하였다. 그는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방법은 우선 토지 개혁을 실시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농민에게 최저 기본량의 경작 농지를 확보하게 하여 농민이 잘 살게 되면 자연히 나라가 부강해진다고 하였다. 그 외에도 세금·과거제도·교육·관료·군사 등 전반적인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의 이러한 학문 사상은 이 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당시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이 익·정약용에 이르러 발전되었다. 그가 10년 동안 저작한 <반계수록> 26권에는 그의 사상과 이상 국가 건설의 구상이 실려 있으며, 1770년 영조의 특명으로 간행되었다. 죽은 뒤 호조참의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 <기행일록> <속강목의보> <동사강목조례> <주자찬요> 등이 있다.

유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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兪好仁(1445∼1494)

조선의 문신·시인. 자는 극기, 호는 임계, 본관은 고령이다. 김종직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1486년 <동국여지승람> 편찬에 참가했으며, 1490년 <유호인 시고>를 편찬하여 성종에게 옷감을 상으로 받았다. 그 후 합천 군수를 지내다가 병으로 죽었다. 그는 문장·시·글씨에도 뛰어나 당대의 '3절'로 불리었다.

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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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花

고구려 동명왕의 어머니. 여동생들과 함께 압록강가에서 놀다가 북부여 왕 해모수의 꾐에 빠져서 그를 가까이 하자, 아버지 하백에 의해 태백산 우발수로 쫓겨나서 동부여의 왕 금와의 아내가 되었다. 그 후 해모수와의 관계를 알게 된 금와가 방에 가뒀는데, 이때 알을 하나 낳았다. 왕이 그 알을 개와 돼지에게 주어도 먹지 않고 길에 버려도 소와 말이 피하고 들에 버려도 새와 짐승이 덮어주었다. 다시 유화에게 돌려주어 따뜻한 곳에 두니 한 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는데 이 아이가 고구려의 시조 주몽(동명왕)이라고 한다.

유효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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兪孝通

조선의 의학자·문신. 자는 행원, 본관은 기계이다.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세종 때 중시에도 급제하여 집현전 직제학을 지냈다. 1431년 노중례와 함께 약용 식물을 정리한 의학 서적인 <향약채집월령> <향약집성방>을 편찬하였다.

유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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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僖(1773∼1837)

조선의 문신·한글학자. 자는 계신, 호는 서파·남악이다. 11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에게서 학문을 배우며 자랐다. 실학파의 언어학자인 정동유 문하에서 실학을 연구하여, 천문·지리·농사·새·곤충·식목 등에 조예가 깊었다. 특히 한글을 독창적인 방법으로 분석·검토하여 훈민정음의 자모를 분류·해설하였다. 1824년 순조 때 훈민정음의 원리와 중국음과의 관계를 이야기한 <언문지>를 저술하였다. 그 외에도 <문통> <물명유고> 등이 있다.

유희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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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希春(1513∼1577)

조선의 문신. 자는 인중, 호는 미암, 본관은 선산이다. 김안국의 제자이며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수찬·정언 등을 지냈다. 명종 때 윤원형에 의해 제주에 유배되었다가, 1567년 풀려나와 부제학·대사간 등을 지냈다. 선조 때 이조참판으로 있다가 물러나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가 지은 <미암일기>는 1568년에서 1577년까지의 정치 모습과 자기의 경력을 쓴 책으로 역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죽은 후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속위변> <역대요록> 등이 있다.

육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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陸英修(1921∼1974)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인. 충북 옥천에서 태어나 배화여고를 졸업하고, 해방 후 옥천여중에서 교편을 잡았다. 양지회의 명예회장으로 고아와 노인 등 불우한 사람들을 도와 사회 육영 사업에 공헌한 바가 크며, 남산 어린이회관을 비롯하여, 부산 어린이회관을 설립하여 어린이 복지 사업에도 힘썼다. 1974년 8월 15일 제29주년 광복절 경축 식장(국립 극장)에 참석하였다가 조총련 소속 문세광에게 저격당하여 유명을 달리하였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렀고 국립 묘지에 안장되었다.

육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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陸完順(1933- )

현대무용가. 전북 전주 출생. 이화여대 체육과(무용 전공), 동 대학원(현대무용 전공)을 졸업. 1963년 미국 일리노이 주립대학 대학원에서 현대무용을 전공했으며, 마사 그레이엄 무용학교에서 현대무용을 사사했다. 1962년 제1회 육완순 귀국무용발표회(국립극장)에서 <흑인영가(黑人靈歌)> <공포> <마음의 파도> 등을 소개했는데 미국의 현대무용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소개했다는 점에서 무용계의 주목을 끌었다. 그 후 1972년까지 미국과 서울에서 7회의 무용발표회를 개최했고, 또한 무용관계 논문을 집필하여 교육무용의 이론화에 공적을 남겼다. 이화여대 부속고등학교 교사, 경희대학교 무용과 과장, 이화여대 무용과 과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 육완순 무용원장으로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부활> <황무지> <단군신화> 등이 있다.

윤곤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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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崑崗(1911-1949)

시인. 충남 서산 출생. 일본 센슈 대학 졸업(1933). 1934년 <시학(詩學)> 동인의 한 사람으로 문단에 등장했다. 초기에는 카프(KAPF)파의 한 사람으로 시를 썼으나 곧 암흑과 불안, 절망을 노래하는 퇴폐적 시풍을 띠게 되었고 풍자적인 시를 썼다. 그러나 해방후에는 전통적 정서에 대한 애착과 탐구로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다. 동인지 <시학>을 주간, 그 밖의 시집으로 <빙하> <동물시집> <살어리> 등이 있고, 시론집으로 <시와 진실>이 있다.

윤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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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瓘(?∼1111)

고려의 장군. 자는 동현, 본관은 파평이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104년 숙종 때 동북면 행영 병마 도통에 임명되어 여진을 정벌하다가 실패하였다. 1107년 여진 정벌 원수가 되어 부원수 오연총과 함께 17만 대군을 이끌고 동북계에 있는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았다. 점령한 지역은 함흥평야를 중심으로 한 함경도의 동남부 일대로서 그 지역의 함주·영주·웅주·복주·길주·통태·진양·숭녕·공험진 등이다. 그러나 여진이 계속 북변을 침범하여 재정벌에 나섰으나 별소득 없이 패퇴하고 9성을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이 때문에 윤 관은 벼슬과 공신의 호를 삭탈당했다. 1110년에 복관되었으나 그 후 우울한 나날을 보내다가 죽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해서 싸움터에서도 항상 오경(五經)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한다.

윤국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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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國馨(1543∼1611)

조선의 문신. 자는 수부, 호는 달천, 본관은 파평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좌승지 등의 벼슬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직접 군사를 지휘하여 왜군과 싸웠으나 병으로 실패하여 벼슬을 잃었다. 1594년 다시 등용되어 병조참판·대사헌 등을 지냈으나 병으로 물러났다. 그 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공조판서를 지냈다. 그는 마음이 어질고 넓었으며 언제나 충성과 믿음으로 왕을 모시었다.

윤극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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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克榮(1903∼1986)

작곡가.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경기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 음악학교에서 작곡을 공부하였다. '색동회' 동인으로 활동하며 많은 동요와 가곡을 발표하였다. 그는 사실상 우리나라 동요와 동시의 선구자라 할 수 있으며, 망국의 원통함을 안으로 삭여 <반달> <설날> <고드름> <할미꽃> 등 어린이에게 희망을 주는 300여 곡의 동요를 작곡하였다.

윤 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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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汲(1679∼1770)

조선의 문신. 자는 경유, 호는 근암, 본관은 해평이다. 영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대사간·호조참판을 지내다가 사신으로 청에 다녀와서 이조판서에 올랐다. 글씨를 잘 써서 '윤상서체'라 불리었으며, 당시의 비문에 그의 글씨가 많았다. 저서로 <근암집>이 있다.

윤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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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德熙(1685∼?)

조선의 화가. 자는 경백, 호는 낙서, 본관은 해남이다. 화가인 윤두서의 아들이며 도사라는 벼슬을 지냈다. 그는 특히 말과 신선을 잘 그렸다. 아버지와 함께 쌍절이라 불리어지나, 필법이 유약하다는 평도 있다. 작품으로 <하경산수도> <기마부인도> 등이 있다.

윤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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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東奎(1695∼1773)

조선의 학자. 자는 유장, 호는 소남, 본관은 파평이다. 그는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으며 대신 안정복·이가환 등과 함께 천문을 비롯해서 역법·지리·강역·의방 등 실용적인 학문을 공부하여 실학파로 그 이름을 떨쳤다. 또한 패수(지금의 대동강)를 비롯하여 4강에 대한 연구를 한 끝에 <사수변>이라는 책을 지었다.

윤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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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東柱(1917∼1945)

시인. 어릴 때의 이름은 해환이며 북간도 용정에서 출생하였다. 평양 숭실중학을 거쳐 1941년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일본 릿쿄 대학과 도지샤 대학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일제 말 암흑기 저항문학의 대표적 시인으로서 민족의 슬픔을 노래로 나타내었다. 1943년 친구인 송몽규와 함께 귀국하다가 독립운동에 관련된 혐의로 붙잡혀서 2년형을 선고받고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죽었다. 광복 후 친구들이 그의 유고를 모아 첫 시집을 발간했으며, 1955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였다. 불과 30편 미만의 시를 남겼지만, 서정과 동경의 시로 이름 높은 <별 헤는 밤>과 젊은이의 기개를 잘 나타낸 <새길> 등을 비롯하여 전편을 통해 민족의 애수와 이상·정열을 상징적 필치로 다루고 있어 문학사적 견지에서도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연세대학교에 그의 시비가 있다. 그의 대표적인 시로 <자화상> <별 헤는 밤> <무서운 시간> 등이 있다.

윤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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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斗緖(1688∼1715)

조선의 화가. 자는 효언, 호는 공재·종애, 본관은 해남이다. 윤선도의 증손이며 숙종 때 진사에 급제하였다. 글씨와 그림에 능하였는데, 특히 인물·동식물 등의 그림에 뛰어났다. 현재·겸재와 함께 조선의 '3재'라 불린다. 작품으로 <노승도> <산수도> <자화상> 등이 있다.

윤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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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斗壽(1533∼1601)

조선의 문신. 자는 자앙, 호는 오음, 본관은 해평이다.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정랑을 지냈다. 1579년 연안 부사로 나아가 백성들을 잘 다스렸으며, 임진왜란 때 왕을 모시고 가다가 개성에 이르러 어영대장이 되었고 평양에 가서 좌의정이 되었다. 왜군이 평양 가까이까지 오자 왕과 여러 신하들이 함흥으로 옮기자 했으나 그는 의주가 함흥보다 방어하기에 낫다고 하여 끝내 그의 뜻을 관철시켰다. 후에 함흥이 적의 손에 들어가자 윤두수의 선견지명에 모두들 탄복하였다. 그 후 영의정이 되었으나 사임하였고, 1604년 왕을 안전하게 모시고 피란한 공으로 상을 받았다. 저서로 <성인록> <연안지> <평양지> 등이 있다.

윤문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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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文擧(1606∼1672)

조선의 학자. 자는 여망, 호는 석호, 본관은 파평이다.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부수찬 등을 지냈다. 1636년 병자 호란 때 아버지 윤 황을 따라 왕을 남한산성으로 모셨다. 그 후 아버지가 죽자 벼슬을 내놓고 오직 주자학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그는 글씨에 뛰어났으며 죽은 뒤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석호집>이 있다.

윤백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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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白南(1888∼1954)

소설가. 본명은 교중이며 연극·영화의 선구자이다. 충남 공주에서 출생하였으며 일본 도쿄 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하였다. 1913년 <매일신보> 편집장을 거쳐 <동아일보>에 입사하면서부터 소설을 쓰는 한편, 신극 운동·영화 사업에 참가하였다. 그는 '연극 동호회' '극예술 연구회' 등을 조직하였으며, 1953년 서라벌예술대학 학장과 이듬해 초대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작품으로 <대도전> <봉화> <흑두건> <야화> 등이 있다.

윤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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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潽善(1897∼1990)

정치가·제4대 대통령. 호는 해위이고 충남 아산에서 출생하였다. 1930년 영국 에든버러 대학을 졸업하고 1922년 상하이로 가서 임시정부 의정원으로 활약하였으며, 광복 후 미군정청 농상국 고문, 민중일보사 사장을 거쳐 1948년 서울 특별시장이 되었다. 그 후 상공부 장관·대한 적십자사 총재·3∼6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60년 4·19혁명으로 제2공화국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가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자 대통령직을 물러났다. 1965년 민중당을 조직, 고문으로 있다가 이듬해 신한당 총재가 되었다. 1967년 신민당 고문을 거쳐, 1970년 국민당을 만들고 총재가 되었다. 저서로 <구국의 가시밭길>이 있다.

윤봉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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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鳳九(1681∼1767)

조선의 학자. 자는 서응, 호는 병계, 본관은 파평이다. 숙종 때 진사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지냈으며, 영조 때 주자를 송시열 사당에 함께 모시자고 했다가 벼슬에서 쫓겨났다. 그 후 다시 등용되어 판서에까지 올랐으며 한원진과 함께 호론(湖論)을 내세웠다. 한원진·이이근·현상벽·한홍조·성만진·이간·채지홍 등과 함께 권상하의 문하에서 배워 이들을 '강문 8학사'라고 불렀다. 저서로 <병계집> <화양존주록> 등이 있다.

윤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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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奉吉(1908∼1932)

항일의사. 충남 예산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려서 한학을 배웠다. 1926년 상하이에 건너가 모직 공장·세탁소 등에서 일하다가, 1931년 김 구의 '한인 애국단'에 들어갔다. 1932년 4월 29일, 일본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 기념식 겸 일본 전승 축하회가 홍구 공원에서 열렸다. 이 날 윤봉길 의사는 폭탄을 몸에 품고서, 삼엄한 경비를 뚫고 식장에 들어가 폭탄을 던졌다. 당시 중국에 있던 최고위급 일본인들이 한 자리에 모인 식장에서의 이 거사로 일본 거류민단장 가와바타는 폭발 현장에서 즉사하였고, 최고사령관 시라카와 대장은 파편을 맞고 5월 26일에 죽었다. 그 밖에 여러 명의 일본인들이 중경상을 입었다. 거사 직후 윤봉길 의사는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른 후 체포되어 오사카로 이송되었고, 그 해 12월 19일, 24세를 일기로 사형당하였다. 유족으로 부인 배씨와 두 아들이 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윤봉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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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鳳朝(1680∼1761)

조선의 문신. 자는 명숙, 호는 포암, 본관은 파평이다.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서·정언 등을 거쳐 1713년 암행어사가 되었다. 그 후 대사간이 되었으나 경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소론이 정권을 잡자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 후 영조가 즉위하자 다시 등용되었으며 <경종실록>의 편찬을 도왔다. 1727년 삭주로 귀양갔다가 풀려나와 대제학까지 이르렀다. 저서로 <포암집>이 있다.

윤석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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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石重(1911∼

)

아동문학가.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1942년에 일본 조치 대학 신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25년 잡지 <어린이>에 동요 <오뚜기>가 당선된 뒤 많은 동요를 발표하였다. 1933년, 방정환의 뒤를 이어 <어린이> 주간으로 우리나라 아동문학의 선구자로 활약하였다. 그 후 <소년중앙> <소년> <소학생>의 주간을 지냈으며 조선일보 편집 고문을 지냈다. 1956년 새싹회 회장에 선출되고, 1961년 3·1 문화상 예술 부문 본상과 1966년 문화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1970년 어린이 회관 고문이 되어 아동들을 위한 많은 공헌을 하고 있다. 저서로 <윤석중 동요집> <초생달> <굴렁쇠> <어린이를 위한 윤석중 시집> 등이 있다.

윤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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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宣擧(1610∼1669)

조선의 학자. 자는 길보, 호는 미촌·노서, 본관은 파평이다. 김 집의 제자이며 인조 때 생원시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강화도로 피란하여 성문을 지키다가 점령당하였다. 이때 그의 아내는 자살하였고 그는 평민의 옷을 입고 성을 탈출하여 살았다. 그 후 비겁하게 살아남은 것을 후회하여 금산으로 내려가 평생을 학문 연구에 바쳐 성리학의 대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죽은 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 <노서유고> <노서일기> 등이 있다.

윤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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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善道(1587∼1671)

조선의 문신·시인. 자는 약이, 호는 고산, 본관은 해남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글을 좋아하여 경사 백가에 무지 불통이었고, 의약·음양 지리에도 정통하였으며 시조에 특히 뛰어났다. 광해군 때 진사시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다. 1616년 성균관 유생으로 있을 때 권신 이이첨·박승종·유희분 등이 마음대로 권세를 휘두르자, 이를 비난하는 글을 써서 왕께 올렸다가 이듬해 함북 경원으로 8년간 유배되었다. 그 후 인조반정으로 귀양에서 풀려나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사양하고 고향인 전남 해남에서 지냈다. 1628년 봉림 대군(후의 효종)과 인평 대군의 사부가 되어 인조의 깊은 신임을 받았다. 그 후 시강원문학이라는 벼슬을 지냈으나, 모함을 받고 벼슬에서 물러난 뒤 고향으로 내려갔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왕이 강화도로 피란하게 되자, 왕을 보호하기 위하여 배를 타고 강화도로 향하던 중, 청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제주도로 향하였다. 보길도를 지나다가 그 섬의 아름다움에 감탄한 나머지, 그곳에 머물러 '부용동'이라 이름짓고 낙서재라는 정자를 세워 시를 벗삼아 지냈다. 그 후 남한산성에 있는 왕을 문안하지 않았다는 죄로 영덕에 유배되었다. 효종이 즉위하여 승지·예조참의 등의 벼슬을 내렸으나 서인들에게 몰려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 1659년 효종이 죽자 자의 대비 복상 문제로 논쟁하다가 서인들에게 몰려 함경남도 삼수로 유배되었다. 7년 후인 1667년 현종 때 비로소 용서되었다. 죽은 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그는 치열한 당쟁 때문에 일생을 거의 유배지에서 보냈다. 저서로 <고산유고>가 있으며, 그 중 <산중신곡> <속산중신곡> <어부사시사> <오우가> 등은 뛰어난 작품으로 손꼽힌다.

윤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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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暹(1561∼1592)

조선의 문신. 자는 여진, 호는 과재, 본관은 남원이다. 선조 때 사신으로 명에 가서, 그곳에서 태조의 조상이 잘못 기록되어 있는 것을 바로잡고 돌아왔다. 그 공으로 용성 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임진왜란 때 상주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성이 함락될 때 죽었다.

윤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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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順之(1591∼1666)

조선의 문신. 자는 낙천, 호는 행명, 본관은 해평이다. 광해군 때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등을 지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아버지 윤 훤이 평안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적을 막아내지 못한 죄로 사약을 받고 죽자, 그는 아우들을 데리고 숨어서 살았다. 그 후 1636년 병자호란 때 왕을 모시고 남한산성으로 가 있었으며, 1643년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왔다. 1657년 <선조 수정 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그 후 공조판서에까지 올랐다. 시와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저서로 <행명집>이 있다.

윤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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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心悳(1897∼1926)

가수. 본관은 파평, 평양에서 태어나 경성여고보 사범과를 졸업하고 교사 생활을 하였다. 총독부 관비생으로 일본 도쿄 음악학교에 유학을 가서 성악을 전공하였다. 귀국 후, 경성사범 부속학교 음악 교사로 근무하며 음악회에 출연, 성악가로서 명성을 떨쳤다. 은퇴 후 토월회 배우로 활약하다가 탈퇴하고 유행가 가수로 전향하여 방송에 출연하고, 레코드를 취입하였다. 특히 <사의 찬미>는 대단한 반응을 일으켰다. 1926년 일본 니토 레코드 회사에 레코드 취입차 오사카로 갔다가 관부 연락선을 타고 귀국하던 중, 애인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에 투신하여 정사하였다.

윤양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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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陽來(1673∼1751)

조선의 문신. 자는 계형, 호는 회와, 본관은 파평이다.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글씨 쓰는 것이 매우 빨라 '비주서'란 별명을 얻었다. 그 후 주청부사로 청에 다녀왔는데, 정권을 잡고 있던 소론으로부터 '청에 갔을 때 경종의 질병을 함부로 발설했다'는 탄핵을 받고 벼슬에서 쫓겨났다. 노론이 정권을 잡자 풀려났는데, 공조참판을 거쳐 대사간으로 있을 때 탕평책을 건의하여 왕의 신임을 받았다. 그는 특히 글씨와 시에도 뛰어났는데, 글씨로 <영상 윤인경 비>가 전해진다.

윤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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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9)

고려의 문신. 호는 금강 거사이며 본관은 파평이다. 윤 관의 아들이며 인종 때 국자사업에 전임되어 경연에 나아가 왕에게 학문을 강의하여 왕의 칭찬과 상을 받았다. 예종 때 아버지인 윤 관이 의천의 비문을 지었는데, 김부식이 이것을 함부로 고쳐서 아버지를 모욕했다는 이유로 개인 감정을 품고 있었다. 1133년 김부식이 <주역>을 강의할 때 조리있게 따져 김부식을 공박하였다. 1135년 '묘청의 난'이 일어났을 때 김부식의 부하가 되어 공을 세웠으나 묘청의 일파인 정지상과도 친했다는 이유로 양주 방어사로 좌천되었다. 그는 문장에도 뛰어났을 뿐 아니라 특히 <주역>에 밝았다. 저서로 <역해>가 있다.

윤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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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8∼?)

조선의 화가. 자는 군열, 호는 청고, 본관은 해남이다. 진사 벼슬을 지냈으며 할아버지 윤두서와 아버지 윤덕희의 뒤를 이어 그림을 잘 그렸다. 작품으로 <춘하도> <연강우색도> 등이 있다.

윤원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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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元衡(?∼1565)

조선의 문신. 자는 언평, 본관은 파평이다. 중종의 왕후인 문정 왕후의 동생으로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문정 왕후가 경원 대군(후의 명종)을 낳자 당시의 권세가인 김안로를 제거하였다. 또한 인종의 외삼촌 윤 임이 경원 대군을 해하고자 한다고 모함하여 서로 다투었는데, 이때 윤 임 일파를 대윤이라 하고 윤원형 일파를 소윤이라고 했다.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윤원형은 크게 세력을 얻어, 1545년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 임 일파와 많은 선비들을 죽였다. 이어 형인 윤원로와 권력을 다투다가 이듬해 형을 유배시키고 완전히 권력을 잡았다. <중종실록> <인종실록>의 편찬을 도왔으며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영의정에까지 올라 세도를 부리다가, 1565년 문정 왕후가 죽자 벼슬을 잃고 강음에 유배되어 죽었다. 첩 난정과 함께 자살하였다고도 한다.

윤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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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毅立(1568∼1643)

조선의 문신. 자는 지중, 호는 월담, 본관은 파평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형조참판·예조판서 등을 지냈다. 그림과 글씨에 띄어났는데, 특히 산수화를 잘 그렸다. 저서로 <야언통재>가 있으며 그림으로 <하령산수도> 등이 있다.

윤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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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伊桑(1917∼1995)

작곡가. 경남 충무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음악가로서의 소질을 보였으나 가난하여 정상적인 공부를 하지 못하였다. 통영의 협성학원 2학년을 중퇴하고 포목상의 점원으로 들어갔으나, 음악에 대한 집념을 버릴 수 없어 틈틈이 작곡을 익혀 18세 때 동요곡집 <목동의 노래>를 출간하였다. 홍난파에게 격찬을 받고 일본 동양 음악학교에서 고학으로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하고 귀국하였다. 직장 생활을 하던 중 신사 참배를 거부하여 5개월간 옥살이를 하여 폐병을 얻게 되었다. 통영여고·부산사범의 음악 교사로 재직하면서 음악인으로 인정받기 시작했고, 덕성여대 음악대 강사로 있으면서 <현악 4중주>곡과 <피아노 3중주>곡을 작곡하였다. 1955년 성루시 문화상(음악 부문)을 수상했는데, 그것을 동기로 프랑스로 유학갔다가 다시 서독으로 갔다. 1959년 독일 다름슈타트 국제 현대 음악제에 <7악기를 위한 연주곡>으로 입선, 작곡가로서의 그의 위치가 굳어져 갈 때 동백림 사건에 관련되어 소환당하였다. 옥중에서 오페라 <나비의 꿈>을 계속 작곡하던 그는 특사로 석방되어 다시 서독에서 오페라 <심청>을 작곡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 1992년 세계 최고의 작곡가 30인에 선정되었고 베를린 음대 교수를 역임, 독일 튀빙겐 대학에서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독 킬 시 문화상·서독 뮌헨 글라트 바흐 시 문화상·독일 연방 공화국 대공로 훈장 95 예술인 공로상 등을 수상했고 저서로 <상처 입은 용>이 있다. 작품으로는 오페라 <유동의 꿈>을 비롯 100여 곡의 연주곡이 있고 30여 종의 CD 및 레코드를 남겼다.

윤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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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日善(1896∼1987)

의학자. 충남 아산에서 출생하였으며 1923년 일본 교토 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1929년 동 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세브란스 의과대학 교수·서울대학교 의과대 학장·대한 의학협회장·학술원 초대 회장 등을 지냈다. 1956년 서울대학교 총장에 취임했으며, 그 후 유네스코 한국 과학기술 정보 센터 위원장·원자력 원장·과학기술 후원회 이사장 등을 지냈다. 학술원상·문화 훈장·서울시 문화상 등을 받았다.

윤 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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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任(1487∼1545)

조선의 무신. 자는 임지, 본관은 파평이다. 중종의 비인 장경 왕후의 오빠로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찬성에 이르렀다. 윤 임은 인종의 외삼촌이었고 윤원형은 명종의 외삼촌이었는데, 둘이 세력이 비등하여 서로 싸웠다. 당시 사람들이 윤 임을 대윤, 윤원형을 소윤이라 불렀다. 일찍이 인종이 왕세자로 있을 때 중종의 계비인 문정 왕후가 명종을 낳자 중종은 이를 매우 사랑하였다. 윤 임은 김안로와 함께 인종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문정 왕후와 틈이 생겼다. 그 후 윤원형 일파는 윤 임이 명종을 해치려 한다고 모함했으며, 윤 임은 또 윤원형이 인종을 해치려 한다고 하여 대윤과 소윤간에 큰 싸움이 벌어졌다.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죽자, 명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했으므로 문정 왕후가 대신 정사를 돌보았다. 이에 크게 세력을 얻은 윤원형은 1545년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 임을 처형하고 그의 아들 3명도 살해하였다. 그 후 선조 때에 복관되었다.

윤지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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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持忠(1759∼1791)

조선 말기의 천주교 순교자. 교명은 바오로이며 정약용의 외사촌이다. 정조 때 진사가 되었고 정약용의 가르침을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1789년 베이징에 가서 견진성사를 받고 돌아왔다. 그의 어머니가 죽자 위패를 만들지 않고 제사를 지냈는데, 이 사실이 관청에 알려져 불효·불충·악덕이라는 죄명으로 사형을 당하였다. 이 사건을 신해사옥이라고 한다.

윤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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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集(1606∼1637)

조선의 문신. 자는 성백, 호는 임계, 본관은 남원이다. 병자호란 때 3학사의 한 사람으로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정랑 등을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교리로 있으면서 청과의 굴욕적인 화의를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인조가 청에 항복하자 청의 선양에 잡혀가 심한 고문을 받고, 오달제·홍익한과 함께 사형당하였다. 죽은 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윤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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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致昊(1864∼1946)

조선 말기의 정치가. 호는 좌옹이며 본관은 파평이다. 1881년 최연소자(17세)로 신사유람단에 끼어 일본을 다녀와서 개화 사상에 눈을 떴다.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하다가, 1883년 한·미 조약을 체결하러 오는 미국 공사의 통역관으로 귀국하였다. 1896년 민영환을 따라 러시아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고 돌아와서 서재필·이승만·이상재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하였다. 1898년 독립협회 회장이 되었으며 <독립신문> 사장을 겸하였다. 그 해, 종로 네거리에서 '만민공동회'를 열어 <시정 개혁안 6개조>를 고종에게 상소했으나, 황국협회의 모함을 받자 피신하였으며 독립협회는 해산당하였다. 1906년 장지연·윤효정 등과 함께 '대한자강회'를 조직하여 교육 사업과 국가를 부강하게 하는 데 노력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후 데라우치 총독 암살 사건에 가담한 혐의로 6년형을 선고 받았다. 일제 말기에 일본 귀족원 의원을 지냈는데, 광복 후 친일파로 규탄받자 자택에서 자살하였다.

윤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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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卓然(1538∼1594)

조선의 문신. 자는 상중, 호는 중호, 본관은 칠원이다. 이 황의 제자로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관이 되었다. 그 후 동래 부사·상주 목사를 지냈으며,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이 때 영남 지방에 큰 흉년이 들자 왕이 그의 재능을 믿고 영남 감사로 기용하였다. 임진왜란 때 광해군을 모시고 북으로 피란갔는데, 이 때 함경 지방에는 이미 적이 다가왔으므로 의병을 모아 적을 격퇴시킬 계획을 세우던 중 객사하였다.

윤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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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弼商(1427∼1504)

조선의 상신. 자는 양좌, 본관은 파평이다.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도승지 등을 지내면서 세조를 가까이 모셔 왕의 총애를 받았다. 1467년 '이시애의 난'이 평정되자, 반란의 기밀을 미리 알아낸 공으로 파평군에 봉해졌다. 1479년 성종 때 명이 건주위를 칠 때, 좌의정으로 도원수가 되어 5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명을 도와 싸웠다. 그 후 영의정에 올랐으며, 연산군 때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를 폐할 때 관련되었다 하여 사약을 받고 죽었다.

윤 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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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煌(1572∼1639)

조선의 문신. 자는 덕요, 호는 팔송, 본관은 파평이다. 성 혼의 제자이며,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이조참의 등을 지냈다. 1637년 김상헌·정 온 등이 병자호란 때 화의를 반대했다는 죄로 청에 붙잡혀 갈 때, 윤 황은 대신 잡혀 가겠다고 했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죽은 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윤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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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淮(1380∼1436)

조선의 학자. 자는 청경, 호는 청향당, 본관은 무송이다.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 겸 춘추관 기사관을 지냈다. 세종 때 집현전에 있으면서 불교를 배척하고 맹사성 등과 함께 <팔도지리지>를 편찬하였다. 1434년 <자치통감훈의>를 편찬하였으며, 남수문과 더불어 당대의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다. 윤 회와 남수문은 같이 술을 잘 마셔 과음할 때가 많았다. 이들의 재질을 아낀 세종이 술을 석 잔 이상 못 마시게 한 후로는 연회 때마다 둘이서 큰 그릇으로 석 잔씩 마셨다고 한다. 사람들은 문성·주성의 정기가 합하여 윤 회 같은 현인을 낳았다고 하였다. 그 후 병조판서를 거쳐 예문관 대제학에 이르렀다.

윤효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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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孝重(1917∼1967)

조각가. 경기도 장단에서 출생하였으며 일본 도쿄 미술학교 조각과를 졸업하였다. 1952년 이탈리아에서 열린 유네스코 국제 예술가 회의에 우리 나라 대표로 참가했다. 그 후 미술 전람회 심사위원·홍익대 미술학부장·대한 미술협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작품으로 <충무공 동상> <야생> 등이 있다.

윤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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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7∼1680)

조선의 문신. 자는 희중, 호는 백호, 본관은 남원이다. 남인의 주요 인물로 서인과 대립하였으며 <중용> <대학> <효경> 등에 독자적인 해석을 붙인 학자이다. 1659년 효종이 죽자 자의 대비 복상 문제가 일어나 서인들이 기년설을 주장한 데 대해, 윤 휴 등 남인은 3년설을 주장하여 서인의 송시열과 논쟁을 벌였다. 1674년 서인이 물러나고 남인이 정권을 잡자, 성균사업·우찬성을 지냈다. 그러나 1680년 남인이 물러나게 되자, 윤 휴는 갑산으로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는 오가작통법과 지폐법 등을 실시하게 했으며 세금제도를 개혁했으나 실패하여 중지되었다. 또한 상평제·호포법을 실시하도록 하였으며 체부를 신설하여 여진족 정벌에 대비하도록 했으나 결과가 나빠서 폐지되었다. 그는 학문에 있어서도 당시의 주자학 해석 방법을 배격하고 나름대로 독특한 해석을 함으로써 당시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 후 숙종 때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독서기> <백호집> <중용설> 등이 있다.

윤흥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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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興吉(1942- )

소설가. 전북 정읍 출생. 전주사범학교 수학하고, 1973년 원광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68년 <한국일보> 신춘 문예에 <회색 면류관의 계절>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황혼의 집> <장마> <묵시의 바다> <무지개는 언제 뜨는가> <완장> <꿈꾸는 자의 나상> 등이 있으며, 한국문학작가상·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그는 인간의 근원적인 갈등과 민족적 의식의 저변에 위치한, 삶의 풍속도를 예리하게 파헤치는 솜씨를 지닌 작가다.

을지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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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支文德

고구려의 장군. 612년 영양왕 때 수 양제가 우문술·우중문을 좌·우익위 대장군으로 삼고 3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하여 압록수에 이르렀다. 이 때에 을지문덕은 거짓으로 항복하고 적의 헛점을 염탐하고 돌아오던 중, 수의 군사들이 이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추격하여 왔다. 을지문덕은 여러 차례 싸움에서 거짓으로 패하여 평양성 가까이에까지 유인하였다. 이때 을지문덕은 적장 우중문에게 \"그대의 신묘한 재주는 천문에 구하고 묘산은 지리에 통하였으며 전승의 공은 이미 높았으니 만족함을 알았으면 그치기를 원한다\"라는 희롱의 시를 보냈다. 다시 우문술에게도 거짓 항복을 청하여, \"철군하면 왕을 모시고 황제를 찾아뵙겠다\" 하니 꾐에 빠진 것을 깨달은 적군은 황급히 후퇴하였다. 을지문덕은 적군이 살수를 건널 때, 맹공격을 가하여 살아돌아간 자가 불과 2천여 명에 불과하였다. 이 싸움을 '살수대첩'이라고 한다.

을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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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巴素(?∼203)

고구려의 재상. 압록곡 사람으로 유리왕 때의 을 소의 손자이다. 191년 고국천왕이 각부에 유능한 사람을 천거하라고 하자, 4부에서 모두 안 유를 천거하였는데 안 유는 다시 왕에게 을파소를 천거하였다. 왕은 을파소에게 중외대부의 벼슬과 우태의 작위를 주었으나, 을파소는 나라를 다스리기에 부족한 벼슬이라 하여 사양하였다. 그러자 왕이 재상에 임명하였는데, 많은 반대가 있었다. 그는 지성으로써 나라를 다스렸는데, 상벌을 신중히 하여 천하가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농부에서 일약 재상이 되어 13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는데, 그가 죽자 나라의 모든 백성들이 슬퍼하였다.

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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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湘(625∼702)

신라의 고승·화엄종의 시조. 친척 형인 원효와 가깝게 지내다가 644년 선덕 여왕 때 황복사로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650년 원효와 함께 불법을 연구하기 위하여 요동 지방까지 갔다가 고구려의 순찰대에 붙잡혀 실패했다. 그러나 661년 바닷길로 당에 가서 당의 고승인 지엄을 스승으로 7년 동안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먼저 들어온 제자들보다도 학문이 앞섰다. 지엄은 화엄 교리에 대하여 72가지 그림을 그려 설명했으나, 의상은 그보다 더 간단한 그림으로 전체의 뜻을 나타냄으로써 지엄을 감탄하게 하였다. 671년 당이 백제와 동맹을 맺고 신라를 공격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하여, 문무왕에게 나라의 방비를 튼튼히 할 것을 건의하였다. 676년 의상은 자기가 배운 교리를 펴기 위하여 부석사를 창건하고 화엄종의 시조가 되었다. 692년 효소왕 때 당의 고승 현수가 자신의 저서 <화엄경 탐현기>와 그 책을 비판해 달라는 편지를 보내왔는데, 그 친필 서신이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의상은 이 책을 제자들에게 주어 화엄의 깊은 뜻을 배우게 하였다. 그의 제자들 가운데서 오진·지통·표훈·상원·능인 등 10여 명의 훌륭한 승려가 나왔다. 고려 숙종은 해동 화엄 시조 원교 국사라는 시호를 내렸다. 저서로 <화엄일승법계도> <십문간법관> <백화도장발원문> 등이 있다.

의유당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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意幽堂金氏

조선 순조 때의 여류 문인. 본관은 연안이며 판관 이희찬의 아내이다. 1829년 남편이 함흥 판관으로 부임하게 되자 남편을 따라서 그 부근의 이름난 고적지를 찾아다니면서 지은 기행·전기·번역 등을 모아 <의유당 관북 유람일기>를 지었다. 이 작품의 내용은 낙민루·북산루 등에 대한 것으로서 한글로 썼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동명일기>는 국문학 사상 중요한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의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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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慈王(?∼660)

백제의 제31대 마지막 왕(재위 641∼660). 무왕의 맏아들로 632년 태자에 책봉되었고, 용맹스러우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642년 신라를 공격하여 40여 성을 빼앗고, 이어 윤 충으로 하여금 대야성을 치게 하는 등 신라를 자주 쳐들어갔다. 그러나 649년 신라의 7성을 쳐들어갔으나 김유신에게 크게 패하고 말았다. 만년에는 사치스럽고 방탕하여 성 충 등 충신들의 간언도 듣지 않았다. 660년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계백 장군으로 하여금 맞아 싸우게 했으나, 황산벌 싸움에서 패하여 사비성이 함락되었다. 백제의 멸망을 지켜본 3천 궁녀들은 낙화암 절벽에서 뛰어내려 죽었으며, 왕은 태자 등 1만 2,000여 명과 함께 당에 끌려가 그곳에서 병으로 죽었다. 이로써 백제는 31대 678년 만에 멸망하였다.

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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毅宗(1127∼1173)

고려의 제18대 왕(재위 1146∼1170). 인종의 맏아들로, 1134년 태자로 책봉되었다. 성격이 거칠고 방탕하였으나 시문을 좋아하여 문신들과 함께 호화스러운 연회를 일삼고 무신들을 멸시하였다. 1170년 정중부의 난으로 왕위를 빼앗기고 동생인 명종이 왕위에 올랐다. 1173년 김보당이 의종을 다시 왕위에 올리려고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경주에 유배되었다가 이의민에게 살해되었다.

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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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天(1055∼1101)

고려의 승려. 이름은 후, 의천은 자이며 문종의 넷째 아들이다. 11세가 되던 1065년 승려가 되어 영통사에서 당시의 왕사인 난원의 가르침을 받았다. 13세 때 승려를 다스리는 직책인 승통에 임명되었다. 1084년 송의 정원 법사의 초청을 받고, 왕에게 갈 것을 청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으므로 이듬해 몰래 제자인 수개만을 데리고 송으로 떠났다. 왕은 크게 놀라 관리와 제자 낙진·혜선·도린 등을 수행하게 하였다. 그는 송나라 철종제의 환대를 받으면서 계성사에 머물며 유성 법사에게 화엄종·천태종의 진리를 배웠다. 그 후에는 상국사·흥국사 등을 찾아가 여러 승려들을 만나 불법을 닦았다. 1086년 항주로 가서 정원 법사에게서 <화엄소초>의 의문점에 대해 지도받았으며, 자변 대사로부터는 천태종의 강론을 들었다. 그는 이 곳에서 '해동 석가'라고 불리었으며 그가 거처하던 혜인선사라는 절은 고려 사람인 그를 기념해서 '고려사'라고 바꾸기까지 하였다. 1086년 형인 선종의 간곡한 청으로 귀국하여 문종 때 개경에 새로 세운 흥왕사의 주지가 되었다. 그는 이 곳에 교장도감을 두어 송에서 가져온 많은 경전과 요·일본에서 사들인 서적 등 4,700여 권을 다시 고쳐 간행하였다. 또한 옛 책을 모아서 <속장경>을 완성하였다. 1094년 홍원사 주지가 되었으며, 이듬해 숙종이 왕위에 오르자 화폐를 만들도록 건의하여 경제 발달에도 이바지하였다. 1097년 국청사가 새로 세워지자, 주지가 되어 처음으로 천태종을 강의하였다. 그는 고려 불교가 신라의 5교 9산을 이어받아 교종과 선종으로 갈라져 서로 대립하고 있던 당시에, 교종과 선종을 통합·통일하여 천태종을 새로 만들어서 고려 불교의 융합을 실현함으로써 큰 업적을 남겼다. 영통사에 김부식이 지은 비석이 남아 있으며, 선봉사에는 '해동 천태 시조 대각 국사'라고 씌어진 비석이 전해진다. 저서로 <원종문류> <해동유본 견행록> <천태사교의주> 등이 있다.

의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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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親王(1877∼1955)

고종의 셋째 아들로 순종의 이복 동생. 이름은 강, 서출로서 1891년 의화군에 봉해졌다. 1894년 특명 대사의 자격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1900년 의친왕에 봉해졌으며, 1920년 항일 단체인 대동단의 전 협·김가진 등과 의논하여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상하이 임시정부에 보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본이 매국 간신들을 이용하여 우리나라를 합방하고 내 부왕과 모후를 살해한 것이며, 결코 부왕께서 합방을 허락하신 것이 아니다. 나는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차라리 독립된 한국의 한 서민이 될지언정, 일본의 황족 되기를 원하지 않는 바이니 임시정부가 설립된 곳으로 가서 광복을 위해 보조하려 한다. 이 결심은 오직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함과 조국의 독립 및 세계의 평화를 위함에서이다” 이 해 의친왕은 밤중을 이용하여 궁궐을 빠져나와 정남용과 상의한 끝에 상복 차림을 하고 만주 안동 현까지 갔으나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송환되었다. 그 후 여러 차례 일본으로 건너갈 것을 강요받았으나 거절하고 일본을 배척하는 정신을 끝까지 지켰다.

의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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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砧

조선 성종 때의 승려. 당의 유명한 시인 두보의 시에 능하여, 성종 때 조 위와 함께 두보의 시를 한글로 번역하여 <두시언해>를 편찬하였다.

이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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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家煥(1742∼1801)

조선 말기의 학자·천주교 순교자. 자는 정조, 호는 금대, 본관은 여흥이다. 정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남인파에 속하는 학자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새로운 학문연구를 위해 노력하였다. 이때 숙부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천주교 서적을 가지고 오자, 이에 흥미를 느끼고 연구하였으나 입교를 하지는 않았다. 신해박해 때, 광주 부윤으로 있으면서 천주교에 박해를 가하는 편에 섰다. 그 후 형조판서 등 높은 벼슬을 지냈으며, 1795년 청의 주문모 신부가 몰래 입국한 사건으로 반대당의 모함을 받고 좌천되었다. 그는 다시 천주교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여 마침내 신자가 되었고, 1801년 신유박해 때 이승훈과 함께 붙잡혀 순교하였다. 문장에도 능했으며 필법이 뛰어났다. 저서로 <기전고>가 있다.

이 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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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甲

독립 운동가. 호는 추정이며,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1906년 정운복과 함께 오성학교를 세워 후진 교육에 힘썼으며, 안창호와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그 후 시베리아로 건너가 이 강과 함께 <정교보>를 발행하는 등 독립운동에 힘쓰다가 병사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이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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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甲成(1889∼1981)

독립운동가. 1915년 세브란스 의전 약학과를 마쳤으며, 3·1 운동 때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1924년 세브란스 의약 지배인을 거쳐, 1926년 중앙 기독교 청년회 이사, 1931년에는 경성공업 지배인이 되었다. 광복 이듬해 독립 촉성회 회장을 지낸 뒤, 국민회 최고위원·국산 부흥회 회장 등을 지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을 받았으며, 이듬해 건국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강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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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康年(1861∼1908)

조선 말기의 의병장. 자는 낙인, 호는 운강, 본관은 전주이다. 경상도 문경에서 출생하였으며, 고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으로 있다가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사직하였으며, 1894년 동학운동 때 문경의 동학군을 지휘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맺어지고, 1907년 일본에 의해 고종이 퇴위할 것을 강요받자, 영춘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원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민긍호와 합세하여 충주를 공격하였다. 이 해 12월 전국의 의병들이 서울을 공격할 때 백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이에 가담하였다. 그는 가평·인제·강릉·양양 등지에서 승리했고 서울로 향하여 가던 중, 가평의 광악산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적의 복병에게 사로잡혀 일본 정부의 재판을 받고 순국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저서로 <운강문집>이 있다.

이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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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塏(1417∼1456)

조선 사육신 중의 한 사람. 자는 청보, 호는 백옥헌, 본관은 한산이다. 이 색의 증손이며,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직제학을 지냈다. 시문이 청절하여 이름이 높았다. 1456년(세조 2) 성삼문·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모진 고문 끝에 죽었다. 본래 세조와도 친분이 있어 사건의 진상을 진술하기를 강요받았으나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혹심한 형벌을 받는 동안 안색조차 변하지 않아 보는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하였다. 1758년(영조 34)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이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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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健命(1663∼1722)

조선의 문신. 자는 중강, 호는 한포재, 본관은 전주이다.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698년 서장관으로 청에 다녀온 후 부제학·우의정·좌의정을 지냈다. 1721년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으로 세제(영조)의 책봉을 주장했으며 책봉 주청자로 청에 다녀왔다. 그때 신임사화가 일어나 노론이 쫓겨나자,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는 성미가 온순한 반면 강직하여 왕을 섬기되 아부하지 않았다. 글씨가 뛰어났는데 특히 송설체로 이름을 떨쳤다. 저서로 <한포재집>이 있다.

이건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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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建昌(1852∼1898)

조선의 문장가. 자는 봉조이며 호는 영재이다. 어려서부터 사서 오경에 정통하였으며 15세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1874년 서장관으로 청에 가서 그 곳의 문장가인 황 각 등과 교제하며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이듬해 충청우도의 암행어사·해주 감찰사 등을 지냈다. 그가 지은 <당의통략>에는 당쟁이 일어난 원인과 그 과정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당쟁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강화에서 자결한 할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철저하게 서양인들을 미워하였다. 그로 인하여 크게 영달하지 못하였다. 저서로 <명미당집>이 있다.

이경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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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慶胤(1545∼?)

조선의 화가. 자는 수길, 호는 낙파, 본관은 전주이다. 산수화를 비롯하여 인물·소·말 등의 그림에 뛰어났으며, 색감과 정취가 뚜렷하였다. 작품으로 <수족도> <고사탁족도> <관폭도> <산수도> 등이 있다.

이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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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繼祐(1573∼1645)

조선의 화가. 호는 휴휴당이며 그림을 잘 그렸는데, 특히 포도에 능하였다. 대표작으로 <월야 포도도>가 있다.

이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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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高(?∼1171)

고려의 무신. 의종이 문신만 우대하고 무신은 천대하는 데 분개하여, 1170년 의종이 보현원에 행차했을 때 이의방·정중부 등과 함께 많은 문신을 죽였다. 이어 의종을 몰아내고 명종을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이듬해 무신들 사이에 분열이 생기자, 정중부 등을 제거하려다가 도리어 이의방에게 피살되었다. 그의 어머니도 피살되었으나, 아버지는 본래 이 고와 의절하고 있었으므로 죽음은 면하고 유배되었다.

이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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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穀(1298∼1351)

고려 말기의 학자. 자는 중부, 호는 가정, 본관은 한산이다. 1344년 충목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 연복사 종에 새기는 글을 지었으며 검열관·정당문학 등을 지냈다. 이제현 등과 함께 <편년강목>을 증수했고 충렬왕·충선왕·충숙왕에 대한 실록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저서로 <가정집> 등이 있다.

이 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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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适(1587∼1624)

조선의 무신. 자는 백규, 본관은 고성이다. 무과에 급제한 뒤 선조 때 형조좌랑·태안 군수를 지냈다. 1623년 함북 병마절도사가 되어 부임하기 직전에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성공케 하였다. 그 공으로 2등 공신이 되었으며, 후금(청)과 변방에서 분쟁이 잦아지자 영변으로 가서 성을 쌓고 군사를 훈련시키는 등 국경의 경비에 힘썼다. 1624년 이 괄의 아들 이 전이 당시의 일부 지식층과 교유하며 공신들의 횡포로 인한 시정의 문란을 개탄한 사실이 과장되어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모함을 받았다. 이에 조정에서 사실 여부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그의 아들을 잡으러 오자, 무능하고 의심 많은 공신들에 대한 평소의 적개심이 폭발하여 공신들의 제거를 이유로 난을 일으켰다. 막강한 군대와 탁월한 작전으로 관군을 차례로 격파하자, 인조는 공주로 피란했다. 이어 흥안군 제를 왕으로 추대했으나, 다음날 장 만이 거느린 관군과의 길마재 싸움에서 정부군에게 대패하였다. 이 괄은 이천으로 도망했다가 부하 장수 기익헌·이수백에게 목이 잘리어 죽고, 난은 평정되었다. 그의 반란은 후에 정묘호란의 한 원인이 되었다.

이광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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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匡呂

조선 영조 때의 학자. 자는 성재, 호는 월암, 본관은 전주이다. 통신사 조 엄이 쓰시마 섬에서 가지고 온 고구마를 당시 동래 부사로 있던 강필리에게 자극을 주어, 고구마 재배에 성공하게 하였다. 저서로 <이참봉집>이 있다.

이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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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光洙(1892∼?)

소설가. 호는 장백산인·춘원이며, 평북 정주에서 출생하였다. 도산 안창호의 민족주의 운동에 감화를 받아 일본 와세다 대학을 중퇴하고, 1919년 2월 백관수·최팔용·송계백 등과 '재일 조선 청년 독립단'을 조직하였다. 2·8 독립운동 사건을 모의할 때 연락차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가담하였다. 그곳에서 <독립신문>의 주필 겸 임정 사료 편찬위원회 주임으로 있다가, 1921년 귀국하였다. 이보다 앞서 1917년 <매일신보>에 장편소설 <무정>을 발표하여 최남선과 함께 신문학 개척기의 선구자가 되었다. 상하이로부터 귀국한 후에는 동아일보 편집국장·조선일보 부사장 등을 지내면서 신문에 장편소설 <흙> 등을 발표하였다. 그의 수많은 작품은 민족주의와 인도주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민족 갱생의 이상을 담고 있어 당시 청년층에 큰 감명을 주었다. 1937년 흥사단 사건으로 투옥되어 이듬해 병으로 보석되었으며, 이 무렵에 <사랑> <세조대왕> 등을 집필하였다. 1938년부터 친일 행위를 하기 시작했다. 일제의 국민 총동원 계획에 참여하여 김용제·최재서·김기진 등과 문인 보국회를 조직하고 소위 황도문화 선양에 노력하였으며, 1945년 2월에는 소위 내선 동포의 정신적 단결을 촉구하여 국민의무 완수를 목적으로 한다는 야마토 동맹의 조직에 가담하여 이사가 되었다. 광복 후 반민족 행위자 재판에 회부되었으며, 그 무렵 <나의 고백>이라는 자서전을 내었다. 그 후 봉선사 등에서 집필 활동을 계속하다가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작품으로 <개척자> <방황> <혁명가의 아내> <이순신> <원효 대사> <무명> <소년의 비애> <어린 벗에게> 등이 있다.

이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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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光弼

고려 명종 때의 화가. 본관은 전주이며 화가 이 영의 아들이다. 그는 문신들이 지은 <소상팔경>을 읽고 느낀 대로 그림을 그렸다. 또한 산수화에 능한 명종과 함께 때때로 그림을 그렸다. 작품으로 <소상팔경도>가 있다.

이교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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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敎翼(1807∼?)

조선 말기의 화가. 자는 사문, 호는 송석, 본관은 연안이다. 산수도와 꽃·나비 등의 그림을 잘 그려 이름을 떨쳤다. 일찍이 기묘한 나비를 뜰에서 보고 이를 잡아 색채를 연구하려고 의관도 벗은 채 성북동까지 따라갔다는 일화도 있다. 작품으로 <노승소요도> <호접도> 등이 있다.

이 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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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貴(1557∼1633)

조선의 문신. 자는 옥여, 호는 묵재, 본관은 연안이다. 이 이·성 혼의 제자이며, 임진왜란 때에 삼도 소모관·삼도 선유관으로 소·말·식량·군졸 등을 징발하여 도체찰사 유성룡에게 수송했다. 1603년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좌랑·안산 군수·배천 군수 등을 지냈다. 그 후 평산 부사가 되었으나, 광해군의 문란한 정치를 개탄하여 김 유 등과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그 공으로 1등 공신이 되었으며, 연평 부원군에 봉해졌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왕을 모시고 강화도로 피란하였으며, 이때 청과의 화의를 주장하다가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 저서로 <묵재일기> <이충정공 장소> 등이 있다.

이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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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圭景(1788∼?)

조선의 실학자. 자는 백규, 호는 오주, 본관은 전주이다.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할아버지 이덕무가 이룩해 놓은 실학을 이어받아 조선 후기의 실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대학자로서 이름을 떨쳤다. 우리나라와 중국의 많은 서적을 읽고 천문·지리·역사·문학·종교·서화·풍속 등 모든 학문을 깊이 연구하였다. 저서로 <오주연문장전산고> 60권이 있다.

이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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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奎報(1168∼1241)

고려의 문장가. 자는 춘경, 호는 백운거사, 본관은 황려(여흥)이다. 어려서부터 시와 문장에 뛰어났다. 명조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이듬해 아버지가 죽자 천마산으로 들어가 호를 백운거사라 하고 글을 쓰며 지냈다. 그는 거기서 <천마산시> 등을 썼는데, 특히 영웅 서사시 <동명왕편>은 민족의 영웅 동명왕의 생애와 발자취를 노래한 서사시로서 우리 문학사에 남긴 큰 업적으로 평가된다. 그는 벼슬에 임명될 때마다 그 감상을 읊은 즉흥시를 쓰기로 유명하였으며, 시·술·거문고를 좋아하여 '3혹호(三酷好) 선생'이라 불리었다. 한때는 권신의 압객(狎客)이란 말도 들었으나, 성격이 강직하여 조정에서는 인중룡(人中龍)이란 평이 있었다. 저서로 <동국이상국집> <백운소설> <국선생전> 등이 있다.

이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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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圭煥(1904-?)

경북 대구 출생. 일본 신코(新興)키네마에 들어가 연출 수업을 받았다. 1932년 <임자없는 나룻배>, 1935년 <바다여 말하라> <그 후의 이도령> <무지개>, 1937년 <나그네>, 1939년 <새 출발>, 1940년 <창공(蒼空)>, 1946년 <똘똘이의 모험>, 1947년 <민족의 절규> <갈매기>, 1948년 <그들의 행복> <민족의 새벽> <돌아온 어머니>, 1955년 <춘향전>, 1956년 <심청전>, 58년 <애련(愛戀)의 꽃송이> <천하태평(天下泰平)>, 1962년 <정(情)> 등을 발표. 제5회 서울시 문화상 수상. 예술원 회원. 이규환 감독의 대표작인 <임자없는 나룻배>는 한국적 정서 속에 승화된 리얼리즘의 극치였고, <춘향전>은 35밀리 영화의 최초작으로 흥행에도 크게 성공했다.

이극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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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克墩(1435∼1503)

조선의 문신. 자는 사고이며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차례 사신으로 명에 다녀왔다. 그 후 이조판서·병조판서·5도의 관찰사를 거쳐 좌찬성에 이르렀다. 그는 훈구파의 학자로 신진 사류인 사림파와 반목이 심하였다. 1498년 실록청 당상관으로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에 기사를 정리하다가, 사림파의 지도자인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사관으로 있을 때에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은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 <조의제문>이 세조를 비난한 것이라고 연산군을 부추겨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이때 소위 영남학파의 문인들이 모두 제거되었고, 당시 이극돈을 가리켜 무오사화의 원흉이라 했다. 죽은 뒤 익평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나 후에 벼슬과 함께 빼앗겼다.

이긍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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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肯翊(1736∼1806)

조선의 학자. 자는 장경, 호는 연려실, 본관은 전주이다. 어려서 아버지 이광사에게 가르침을 받아 학문과 글씨에 뛰어났다. 그는 실학을 제창하고 고증학파로서도 크게 이름을 떨쳤다. 소론이었던 그는 노론의 집권으로 여러 번 유배 생활을 하였으며 온 집안이 크게 화를 입었다. 많은 책을 저술했으나 겹치는 유배 생활로 대부분 없어지고, 현재 <연려실기술>만이 전한다.

이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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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沂(1848∼1909)

조선 말기의 애국자. 자는 백증, 호는 해학, 본관은 고성이다. 전북 만경에서 출생하였으며 유형원·정약용 등의 실학을 이어 받았다. 1905년 러·일 전쟁이 끝나고 미국 포츠머스에서 일본과 러시아가 강화 조약을 맺을 때, 우리나라의 입장을 호소하기 위해 미국에 가려 했으나 일본 공사의 방해로 떠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뜻을 굽히지 않고 일본 도쿄로 건너가 일본 천왕과 정치인들에게 한국 침략을 규탄하는 내용의 글을 써서 항의하였다. 이 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귀국하여 한성사범학교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장지연 등과 '대한자강회'를 조직하여 민중 계몽을 통한 항일운동에 전력하였다. 1907년 나인영 등과 함께 '자신회'를 조직하여 을사 5적신을 암살하려 했으나, 권중현에게 부상을 입혔을 뿐 실패하였다. 진도로 귀양가서 7년 동안 지낸 후, 풀려나와 <호남학보>를 발행하면서 민중 계몽 운동에 힘썼다. 저서로 <해학유서>가 있다.

이기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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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起鵬(1896∼1960)

정치가. 호는 만송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보성학교를 거쳐 연희전문학교를 중퇴하였다.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 호텔에서 일하면서, 데이버 대학 문과를 졸업하였고 뉴욕에서 허 정 등과 <삼일신문>을 발간하였다. 1934년 귀국하여 광복이 되자, 미군정 재판장의 통역관을 거쳐 이승만의 비서로 있다가 1949년 서울 특별시장·국방부 장관 등을 지냈다. 1951년 이범석과 자유당을 창당하였으나, 2년 후 이범석 세력을 몰아내고 실권을 잡았다. 1954년 민의원 의장이 되었으며, 1960년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4·19혁명이 일어나 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 경무대로 피신하였다. 이곳에서 장남 강석의 권총으로 가족이 모두 집단 자살하였다.

이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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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基卨(1556∼1622)

조선의 문신. 자는 공조, 호는 연봉, 본관은 연안이다. 선조 때 부모에 대한 효성이 널리 알려져 참봉에 발탁되었다. 1592년 한성부 판관이 되었고, 이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조정랑으로 군량미 조달에 힘썼다. 난이 끝나자 병을 핑계로 벼슬을 내놓고 고향에서 지내다가 영의정 이산해의 추천으로 상원 군수를 거쳐 연안 부사를 지냈다. 그 후 광해군이 즉위하자 부호군·예빈시정 등을 지냈다. 1613년 영창 대군이 서인으로 쫓겨나고 폐모론이 일어나자 벼슬을 내놓고 고향에 내려가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는 특히 천문·지리·율학·병술 등 여러 방면에 정통하였다. 죽은 후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 <연봉집>이 있다.

이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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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箕永(1896-1984?)

충남 아산 출생. 호는 민촌. 동경 세이소쿠(正則)학교 중퇴.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귀국했다. 카프 맹원. 1924년 <개벽> 현상문예에 <오빠의 비밀 편지>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다. 그 후 <서화> <인간수업> <고향> <신개지> <땅> <두만강> <봄> 등을 발표했으며, 희곡 작품으로 <그들의 남매> <월희> 등이 있다. 해방 후 월북하여 조선예총위원장 등 각종 기관의 책임자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는 집단성과 프로 문학의 전형을 보여주는 작품을 쓴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이능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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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能和(1868∼1945)

대한제국, 일제 초기의 학자. 자는 자현, 호는 간정, 본관은 전주이다. 충북 괴산에서 태어나 1889년 정동 영어학당을 거쳐, 1894년 한어학교를 졸업하였다. 이어 1900년 한성 외국어학교의 학감을 지냈으며, 영어·프랑스어·중국어·일본어에 뛰어났다. 1921년 총독부 조선사 편수위원회의 편수관으로 있으면서 많은 저서를 남겨 국학 연구에 큰 도움을 주었다. 저서로 <조선 불교통사> <조선 기독교 및 외교사> <한국 도교사> <조선 무속고> <조선여속고> 등이 있다.

이단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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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端夏(1625∼1689)

조선의 문신. 자는 계주, 호는 외재, 본관은 덕수이다. 현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북평사·부교리 등을 지냈다. 1669년 군대 조직인 훈련별대 창설을 왕에게 청하여 이를 실시하게 하였고 소나무 잎으로 기민을 구제할 것을 청하여, 서울 밖에 있는 빈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 후 응교·사간·동부승지 등을 지냈으며 숙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는 서인으로서 활약이 컸다. 1684년 예조판서가 되어 <사창절목>을 지어 숙종에게 바쳤으며, <현종실록>을 고쳐 편찬하는 데 참여하였다. 그는 글을 잘 지어 이름을 떨쳤으며 글씨 또한 잘 썼다. 저서로 <외재집>이 있다.

이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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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達

조선 중기의 한문 시인. 자는 익지, 호는 손곡, 본관은 원주이다. 이 첨의 후손이며 한리 학관을 지냈으나 물러났다. 최경창·백광훈과 같이 당시(唐詩)에 이름이 있어 3당(三唐)이란 칭호가 있으며, 문선·태백·성당 십이가 등을 전부 욀 정도로 남이 따를 수 없는 한시의 대가였다.

이덕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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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德懋(1741∼1793)

조선의 문장가·실학자. 자는 무관, 호는 형암, 본관은 전주이다. 글씨·그림·시 등에 재주가 뛰어났으나, 서자인 까닭으로 큰 벼슬을 하지 못하였다. 1778년 사신을 따라 베이징에 가서 그곳 학자들과 사귀며 지식을 넓혔다. 돌아와서는 북학을 제창하여 박제가·유득공·이서구 등과 함께 사가(四家)로 불리면서 활약하였다. 저서로 <청장관전서> <청비록> <뇌뢰낙락서> 등이 있다.

이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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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德一(1561∼1622)

조선의 무신. 자는 경이, 호는 칠실, 본관은 함평이다. 어려서부터 문명을 떨쳤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무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피란민을 모아 의병을 조직하여 통제사 이순신의 막하로 들어갔다. 이순신이 전사한 후 절충장군이 되었으나, 광해군 때 국정이 문란해짐을 보고 한탄하는 시조 28수를 지어 애타는 심정을 노래하였다. 저서로 <칠실유고>가 있다.

이덕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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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德馨(1561∼1613)

조선의 명신. 자는 명보, 호는 한음, 본관은 광주이다. 영의정 이극균의 5대 손으로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고 문학에 통달하여 20세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같은 해에 급제한 이항복과 함께 당시 대제학으로 있던 이 이에게 뽑혀 승문원에서 공부하였다. 직제학·승지·이조참의·홍문관 교리 등을 거쳐, 1592년 예조참판 겸 대제학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에 가서 안찰 학걸을 설복시켜 장군 조승훈이 5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듬해 의주에 이르게 했다. 자신은 대사헌으로서 대군을 맞아들여 평양을 탈취하고 이어 서울을 수복하였다. 그 공으로 형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명의 어사 양 호를 설복시켜 서울을 위기에서 구하기도 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38세로 좌의정이 되었으며, 우의정 이항복의 주장대로 명의 유 정과 함께, 이순신과 연합하여 왜장 고니시의 군대를 대파하였다. 1602년 영의정에 올랐으며, 1606년 한때 한직으로 밀려났다가 광해군이 즉위하자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1613년 영창 대군의 처형과 인목 대비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벼슬을 빼앗기고 시골로 내려가 병사하였다. 광해군은 몹시 슬퍼하여 복관(復官)을 명하였다. 어릴 때 절친한 사이였던 이항복과의 많은 일화가 전한다. 저서로 <한음문고>가 있다.

이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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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道宰(1848∼1909)

조선 말기의 문신. 자는 성일, 본관은 연안이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났을 때 전라도 관찰사가 되어 전봉준을 붙잡았으며, 이듬해 전주부 관찰사가 되었다. 이어 학부대신·군부대신이 되었으나 단발령을 반대하여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 후 1898년 지석영의 부탁으로 한성의학교 설립을 인가하는 한편, 우리 나라 최초의 서양의학 교육기관을 세우게 하였다.

이동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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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東寧(1869∼1940)

독립운동가. 호는 석오이며 충남 목천에서 출생하였다. 1904년 상동청년회에서 청년운동을 하였고 이듬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상설 등과 북간도로 건너가 서순의숙을 설립하였다. 1907년 귀국하여 상동청년회를 중심으로 안창호·김 구 등과 함께 비밀 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1910년 다시 남만주로 건너가 이시영·이강영과 함께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내무총장이 되었다. 1924년 국무총리, 1927년 국무위원 주석을 겸하였다. 이듬해 한국 독립당을 결성하여 이사장이 되었으며, 1935년 한국 국민당 간부로 활약하다가 중국 쓰촨 성에서 병사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이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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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東伯(1867∼1950)

명창. 본명은 종기로 충남 비인에서 태어났으며 김정근·김세종에게서 창을 배웠다. 1900년 고종 황제 앞에서 판소리를 불러 통정대부가 되었다. 김창환·송만갑 등과 원각서 공연하다가, 1934년 광무대·조선 성악 연구회 등에서 중진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춘향가> <적벽가>에 뛰어났으며, 특히 <새타령>에는 독보적인 존재였다.

이동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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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東輝(?∼1928)

독립운동가. 호는 성재이며 함경도 단천에서 출생하였다. 일찍부터 안창호와 함께 신민회·서북학우회 등을 통하여 개화 운동에 활약하여 명성이 높았다. 1911년,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에 관련되어 1년간 감옥생활을 하였다. 그 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했으며, 시베리아로 가서 문창범 등과 대한국민의회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1919년 상하이로 가서 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고, 군무총장을 거쳐 이듬해 국무총리까지 지냈다. 그 후 공산당에 들어갔다가 시베리아에서 병사하였다.

이만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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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晩孫

조선 고종 때의 유학자. 이 황의 후손으로, 영남 유생들을 이끌고 위정척사론을 내세우면서 민씨 세도의 개화 정책을 정면으로 비난하였다. 김홍집이 일본에서 <조선책략>을 가지고 돌아와 왕에게 바치자, 1882년 강진규 등과 함께 <만인소>를 올려 당시의 정책을 비난하다가 유배되었다. 임오군란 후, 대원군이 정권을 잡자 석방되었다.

이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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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晩熙(1931∼1975)

영화감독. 서울에서 태어나 영화 <주마등>으로 감독에 데뷔하였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으로 제3회 대종상과 제1회 청룡상을 받았으며 흥행에도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제3회 한국 영화 예술상에서 감독상을 받은 <만추>는 우리나라 영화의 예술성을 한층 높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작품으로는 <흑맥> <물레방아> <군번 없는 용사> <기적> <0시> 등이 있다.

이맹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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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孟專

조선 단종 때 생육신의 한 사람. 자는 백순, 호는 경은, 본관은 벽진이다.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거창 현감 등을 지냈다. 단종 때 수양 대군이 왕위를 탐내어 권력을 휘두르자 눈이 잘 보이지 않고, 귀도 잘 들리지 않는다는 핑계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 후 선산으로 내려가 김종직 등과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죽은 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이명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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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明龍(1872∼1956)

독립 운동가. 호는 춘헌, 본관은 전주이며 평북 정주에서 출생하였다. 1897년 크리스트교 신자가 된 후, 신앙운동과 민족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12년 105인 사건에 관련되어 3년간 복역하였다. 1919년 3·1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여 2년간 복역하였다. 그 후에도 계속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광복 후 북한에서 조만식과 조선 민주당을 창립하여 최고고문이 되었으나 공산당의 탄압으로 월남하였다. 그 후 여러 사회단체의 지도자로 활약하다가 병사하여 사회장으로 장례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이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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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明郁

조선 숙종 때의 화가. 본관은 전주이며, 숙종 때 도화서의 화원으로 있었다. 그림을 정묘하게 잘 그려, 중국 명의 화가 맹영광 이후 가장 훌륭한 화가로 알려졌다. 작품으로 <수묵인물도> <어촌문답도> 등이 있다.

이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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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明漢(1595∼1645)

조선의 문신. 자는 천장, 호는 백주, 본관은 연안이다. 광해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정자·전적·공조좌랑 등을 지냈다. 인조가 즉위하자 명문의 자제라 하여 경연 시독관이 되었고, 이 괄의 난 때는 왕을 모시고 공주로 피란하였다. 1645년 명과 몰래 서신 교환을 했다 하여 청에 잡혀 갔다가 돌아온 후, 예조판서를 지냈다. 그는 인품이 온유하고 성리학에 밝았으며 시와 글씨에 재능이 있었다. 병자호란 때, 화의를 반대했다가 선양까지 잡혀갔던 울분을 노래한 시조 6수가 전한다. 저서로 <백주집>이 있다.

이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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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穆(1471∼1498)

조선의 문신. 자는 중옹, 호는 한재, 본관은 전주이다. 연산군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으며, 일찍이 김종직에게 글을 배웠다. 태학에 있을 때, 성종이 병이 있어 대비가 무녀를 시켜 벽송정에서 기도를 베풀자, 이 목이 태학생들을 데리고 가서 무녀에게 곤장을 쳐서 쫓아냈다. 후에 성종이 이 사실을 알고 노하여 당시의 유생들을 기록하게 하였다. 유생들은 모두 도망하였으나, 이 목 홀로 도망하지 않아서 성종의 칭찬과 술을 받았다. 그는 늘 바른말 잘 하기로 유명하였는데, 이로 인해 공주에 유배된 적도 있다. 무오사화 때, 윤필상의 모함을 받아 김일손·권오복 등과 함께 사형을 받았는데, 형장에 나갈 때 조금도 안색이 변하지 않고, 스스로 절명(絶命)의 노래를 지어 죽으니 그때 그의 나이 28세였다. 그는 일찍이 공주에 귀양갔던 인연으로 공주의 인사들이 충현 서원을 세우고 제사하였다.

이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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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夢鶴(?∼1596)

조선 선조 때의 반란자. 서자 출신으로 아버지에게 쫓겨나 충청·전라도 지방을 돌아다녔다. 임진왜란 때 한 현의 부하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반란 계획을 꾸민 다음, 의병을 모은다는 명목으로 장정들을 모집하였다. 1596년 충청도 홍산에서 난을 일으켜 한때는 홍산·청양·대흥 등을 차례로 함락시켜 홍주(지금의 홍성)까지 돌입했으나, 반란군 중에서 관군에 붙은 자가 많아져서 전세가 불리해졌다. 그러자 그의 부하 김경창·임억명 등이 이몽학의 목을 베어 항복하였다.

이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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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無影(1908∼1960)

소설가. 본명은 용구이며 충북 음성에서 출생하였다. 18세 때 일본으로 가 작가 가토에게서 4년간 문학 수업을 받았다. 귀국하여 <의지 없는 영혼> <폐허> 등을 발표하였고, 1932년 동아일보에 <지축을 돌리는 사람들>을 연재하면서부터 작가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그의 초기작품은 무정부주의적인 반역의 정열이 주조를 이루었다. 이듬해 이효석·정지용 등과 '구인회'의 동인이 되었다. 그 후 시골로 내려가 직접 농사에 종사하며 농촌 냄새가 풍기는 소박한 필치로 농부들의 세계를 유머러스하고도 사실적으로 묘사한 <농민> <흙의 노예> 등을 발표하였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농촌소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일제 시대 때 농민문학 개척의 공으로 조선예술상을 받았고, 1956년 <농부전초>로 서울시 문화상을 받았다. 6·25전쟁 때는 종군 작가로 활약하였고, 자유문인협회 부위원장·문총 최고위원을 역임하였다. 1960년 심장마비로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그 밖의 작품으로 <세기의 딸> <명일의 포도> <취향> <산가> 등이 있다.

이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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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文求(1942-2003)

충남 보령 출생.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1963년 <다갈라 불망비(不忘碑)>가 <현대문학>에 추천, 등단. 주요 작품으로 <장한몽> <우리 동네> <몽금포 타령> <관촌 수필> <만추> <산 너머 남촌> <감동 만필> 등을 발표하였다. 그는 도시화와 산업화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을 다루고 있으며, 그의 소설의 특징은 고향 잃은 사람들이 갈 곳 없다는 것을 밝히면서, 우리 사회 현실 속에서 개인이 느끼게 되는 갈등과 불안의 실마리를 제시해 준다. 현재 소설가협회 편집위원과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를 지내고 있다.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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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文烈(1948- ) 소설가. 서울에서 출생. 고향인 경북 영양을 비롯하여 안동·서울·밀양 등지를 전전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검정고시를 거쳐 1968년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했다가 1970년에 중퇴했다.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 <한하곡(寒下曲)>이 당선되고, 중편 <사람의 아들>로 오늘의 작가상을 받으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작품집으로 <사람의 아들>(1979), <그 해 겨울>(1980), <그대 다시 고향에 가지 못하리>(1981), <금시조>(1982), <황제를 위하여>(1982), <영웅시대>(1985),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1989) 등이 있다. 1994-97년까지 세종대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는 작품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이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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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文眞

고구려 영양왕 때의 태학박사. 600년 왕명을 받고 국사를 편찬하기 시작했다. 국초에 처음으로 문자를 사용할 당시 편찬한 <유기> 100권을 간추려서, <신집> 6권으로 만들었다고 하나 전해지지 않는다.

이미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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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彌勒(1899∼1950)

재독 교포 작가. 본명은 이의경으로 황해도에서 태어나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재학중 3·1운동이 일어나자 반일 전단을 뿌리는 등 학생운동 주동자로 활약하다가 상하이로 망명, 1921년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 의학과로 유학하였다. 하이델베르크 대학과 뮌헨 대학에서 동물학과 철학을 전공하고 뮌헨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획득하였다. 1931년 <다메>지에 <하늘의 천사>를 처음으로 발표, 그 후 민족적인 경향이 짙은 문학 작품을 독일어로 독일 신문·잡지에 수시로 발표하였다. 그의 문학은 주로 한국을 배경으로 동양 문화의 전통적인 풍습을 주제로 하고 있으며, 1946년에는 대표작인 <압록강은 흐른다>가 독일에서 발간되어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이 소설은 영문 및 국문으로 번역되었으며, 그 일부는 독일의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서 독일 학생들에게도 애독되었다. 1947년부터 뮌헨 대학교 동양학부 강사로 있다가 1950년 위암으로 죽었다. <압록강은 흐른다>의 속편 <그래도 압록강은 흐른다>가 경북 왜관 분도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독일에서 독일어로 작품 활동을 한 유일한 한국 작가이다.

이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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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芳碩(1382∼1398)

조선 태조의 여덟째 왕자. 1392년 정도전 등의 추대로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이복 형인 다섯째 왕자 이방원(후의 태종) 등이 이에 불만을 품었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유배되던 도중 살해되었다.

이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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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昉運(1761-?)

조선 말기의 화가. 자는 명고, 호는 기야, 본관은 함평이다. 산수·인물을 잘 그렸고, 특히 거문고를 잘 탔다. 그림은 중국 남화풍의 온화하고 섬세한 산수화를 많이 그렸다. 작품으로 <방우도> <파초고사도> 등이 있다.

이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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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範奭(1900∼1972)

독립운동가·정치가. 호는 철기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915년 중국으로 건너갔으며, 1919년 윈난 육군강무학교 기병과를 나왔다. 이 해 만주 청산리 전투 사령관이 되어 이듬해 청산리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 1922∼25년에 소련 합동 민족군 연해주 지구 지휘관으로 소련 혁명에 참가하였다. 1941년 지청천과 광복군을 만들어 참모장이 되고, 1945년 광복군 중장이 되었다. 광복을 맞이하여 일본군의 무장 평화 접수차 귀국하였다. 그 후 조선 민족 청년단을 만들었고 초대 국무총리·국방부 장관·중화민국 대사·내무부 장관·참의원 등을 지냈다. 회고록 <우등불>이 있다.

이범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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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範宣(1920∼1981)

작가. 평남 안주에서 태어나, 교직 생활을 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였다. <현대문학> 지를 통하여 데뷔한 그는 사회성의 저변에 대한 예리한 관찰로 휴머니즘을 추구한 작품을 썼다. 1958년 현대문학상 신인상·1959년 동인문학상(후보작)·5·16 문예상 장려상을 수상하였다. 창작집으로 <학마을 사람들> <오발탄> <피해자> 등이 있다.

이범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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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範允(1863∼1922)

독립운동가. 조선 말기 북간도의 관리사로 있다가 일본의 침략으로 국운이 기울어져감을 보고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북간도 개척 동포들로 하여금 자주정신과 자치활동의 능력을 기르도록 적극 지도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남만주 연길현에서 의군부를 조직하여 5개 대대의 병력과 교포 관할구역의 행정 체계를 확립하였다. 그 후 김좌진 등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와 동맹을 맺고 일본군과 싸워 위세를 떨쳤다. 1920년 청산리 싸움에서 패한 일본이 대대적인 반격을 감행하자, 시베리아로 이동하였으며 그곳에서 죽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을 받았다.

이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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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範晋(1853∼?)

조선 말기의 정치가. 자는 성삼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민비(명성 황후)의 사랑을 받았다. 1895년 명성황후가 친러 정책을 쓸 때 대신 서리가 되었으나, 그 해 8월 을미사변이 일어나 친일파가 정권을 잡음으로써 파면되었다. 그 해 10월에 다시 정권을 잡으려다 실패하고 러시아로 망명하였다. 1896년 귀국하여 러시아와 힘을 모아 친일파를 몰아내고 새로운 내각을 세워 법무 대신이 되었다. 러·일 전쟁 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러시아 방면에서 방랑하다가 죽었다. 이위종은 이범진의 아들이다.

이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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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秉岐(1891∼1968)

시조 작가·국문학자. 호는 가람이며 전북 익산에서 출생하였다. 한성사범학교를 나와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많은 시조를 발표하였다. 1926년 시조 부흥을 위해서 동아일보에 <시조란 무엇인가>를 발표한 후부터 현대적 감각을 띤 새로운 시조를 짓기 시작하였다. 1939년 <가람 시조집>을 발간하였으며, 또한 문헌 학자로서 숨어 있던 많은 고전을 학계에 소개하였다. 광복 후에는 우리 나라 고전 문학을 현대어로 고치는 일에 힘썼으며, 서울대학교 교수·전북대학교 문리대 학장·중앙대학교 교수 등을 지냈다. 대표작으로 <초> <별> <냉이꽃> 등이 있으며, 저서 <가람 시조집> <국문학 개설> <국문학 전서> 등이 있다.

이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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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丙燾(1896∼1989)

사학자. 호는 백수이며, 경기도 용인에서 출생하였다. 일본 와세다 대학 사학과를 졸업하였으며, 1919년 중앙학교 교사를 거쳐 1933년 중앙불교전문학교·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를 지냈다. 그 후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었으며 문교부 장관을 거쳐 학술원 회장이 되었다. 1967년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서 명예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진단학회 이사장·동구학원 이사장을 지내며 국사학의 권위자로 국사 편찬위원이 되었다. 저서로 <한국사 대관> <한국사 중세편> <나의 인생관> <고려시대 연구> 등이 있다.

이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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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秉喆(1910-1987)

기업인. 호 호암(湖巖). 경남 의령 출생. 중동중학을 졸업한 후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전문부 정경과에 입학하였다가 1934년 중퇴하였고, 82년 미국 보스턴 대학에서 명예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51년 부산에서 삼성물산을 세워 무역업을 하면서 53-54년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설립, 제조업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사업 영역을 크게 확대해갔으며, 61년부터 87년까지 한국경제인협회(전국경제인연합회의 전신) 회장을 역임했다. 64년 동양 라디오 및 텔레비전 방송과 65년 <중앙일보>를 창설하여 언론사 경영에 참여하였다. 69년 삼성전자를 설립하여 삼성그룹 육성의 도약대를 만들었다. 74년 삼성석유화학·삼성중공업을 설립하여 중화학공업에 진출하였고, 이후 용인자연농원·삼성정밀 등을 설립하였다. 77년 삼성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이 되었으며, 82년 삼성반도체통신을 설립하였다. 금탑산업훈장을 비롯하여 세계최고경영인상을 받았다. 저서에 <우리가 잘사는 길> <호암자전(湖巖自傳)> 등이 있다.

이봉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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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鳳蕓

조선 말기의 국어학자. 1897년 <국문 정리>를 출판하여 무조건 한문만을 숭배하고 한글을 천시해 오던 당시의 풍조와 전통을 깨뜨리고, 한글을 다시 찾아 널리 사용하도록 노력하였다.

이봉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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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奉昌(1900∼1932)

독립운동가. 서울에서 출생하였고 1925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방랑생활을 하였다. 1931년 상하이로 가서 김 구의 애국단에 가입하였으며, 일본 천황을 암살하기 위해 수류탄 2개를 갖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1932년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천황 히로히토를 노려 사쿠라다 문앞에서 수류탄을 던졌으나 실패하였다. 일본 법원은 방청인도 없이 제멋대로 판결문을 작성하여 사형을 언도하고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형을 집행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이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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異斯夫

신라의 장군. 성은 김씨이며 내물왕의 4대손이다. 505년 지증왕 때 실직주 군주가 되었으며, 512년 나주 군주가 되어 우산국을 정복하였다. 550년 진흥왕 때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을 공략할 때, 양군이 피로한 틈을 타서 공격하여 도살성·금현성을 빼앗아 이를 증축하고 내침을 막았다. 또 신라의 국사 수찬은 그의 제의에 의한 것이었다. <삼국유사>에는 그의 이름이 박이종으로 되어 있다.

이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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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山海(1538∼1609)

조선의 문신. 자는 여수, 호는 아계, 본관은 한산이다.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정자·응교 등을 지냈다. 1567년 선조가 왕위에 오르자 이조좌랑을 지냈으며, 1578년 대사간으로 서인의 윤두수·윤근수·윤 견 등 3윤을 몰아냈다. 그 후 대사헌·형조판서·이조판서 등을 거쳐 우의정이 되었다. 이 때 동인이 남북으로 갈리자 북인의 지도자로 정권을 잡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모시고 개성에 이르러, 왜적이 쳐들어오는데도 당파 싸움을 했다는 죄로 강원도로 유배되었다가, 1595년 풀려나왔다. 그 후 선조가 죽자 원상(院相)으로서 정사를 맡아 처리하였다. 그는 서화와 문장에 뛰어나 당시 문장 8가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저서로 <아계유고>가 있으며, 글씨로 <조정암 광조 묘비> 등이 있다.

이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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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三晩

조선 말기의 서도가. 자는 윤원, 호는 창암, 본관은 전주이다. 부유한 집안이었으나 글씨 공부만 하여 집안이 어려워졌다. 벼루를 3개나 구멍을 내었으며 병중에도 천 자나 되는 글을 썼다. 글씨를 배우러 오는 이가 있으면, 한 점·한 획을 가르치는 데 한 달이 걸렸다고 한다. 그의 글씨는 하동에 있는 <칠불암의 편액> <전주판의 칠서> 등이 있다.

이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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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箱(1910∼1937)

시인·소설가. 본명은 김해경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경성공업고등학교 건축과를 졸업했으며, 3년간 총독부 건축기사로 일하였다. 그는 <자화상>이란 그림을 그려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되기도 하였다. 1934년 중앙일보에 <오감도>를 발표하여 난해시라는 비난을 받았다. 1936년 <조광>지에 문제작 <날개>를 발표했는데, 당시는 세계적으로 자의식 문학이 유행하여 일약 문단의 주목을 끌었다. <종생기> <동해> <실락원> 등 그의 소설은 모두가 심리주의적 경향이 농후하여 생활의 표현이라기보다 극도로 피로한 지식인의 신경과, 그 신경이 가져오는 자의식의 분열을 악착스럽게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폐결핵을 앓고 있었으며 무질서하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 헤매다가 갱생의 뜻을 품고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1937년 도쿄에서 28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1956년 유고집 <이 상 전집>이 나왔으며 최근에 그의 전 작품을 모은 <이 상 전집> 3권이 발간되었다.

이상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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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相龍

독립운동가. 호는 석주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한일합방 후에 만주로 건너가 조국 광복운동에 종사하였다. 그곳에서 부민단을 조직하여 단장이 되었으며, 1919년 3·1운동 때는 '한족회'를 조직하여 교육사업에 주력하였다. 그는 서로군정서를 조직하여 독판이 되었고, 1926년 임시정부 국무령이 되어 활약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이상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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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象範(1897∼1972)

화가. 호는 청전이고, 충남 공주에서 태어났다. 1918년 서화 미술회에서 미술 공부를 했고, 1925년∼34년 선전에 연 10회 특선을 수상하였다. 동아일보 미술부 책임 기자로 근무했고, 1938년 일장기 말살 사건으로 피검되었으며, 1938∼43년 선전 심사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47년 종합 미술전 심사위원을 거쳐, 1949년 첫 미술전에 추천 출품을 하고, 홍익대 교수·이화여대 강사를 역임하였다. 국전 심사위원·예술원 회원·미술 협회 고문 등을 지냈고, 1963년 문화 훈장 본상 및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작품으로는 <창덕궁 대조전 벽화> <원각사 벽화> 등이 있다.

이상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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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相卨(1871∼1917)

독립운동가. 자는 순오, 호는 부재, 본관은 경주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났으며, 1894년 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의정부참찬이 되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통분을 금치 못하고 가두에서 대중에게 연설한 후 두문불출하였다. 1907년 네덜란드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리자, 을사조약이 결코 황제의 뜻이 아님을 호소하려다가 일본의 방해로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고 미국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1910년 한일합방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세계 여러 나라에 보내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이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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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商在(1850∼1927)

애국자·종교가·정치가·사회운동가. 자는 계호, 호는 월남, 본관은 한산이다. 박정양과 10년간 같이 생활하며 항상 나라 일을 걱정하였다. 1881년 박정양 등이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에 갔을 때, 그의 개인 비서로 따라갔는데, 거기서 홍영식을 알게 되었다. 그 후 우정국장이 된 홍영식이 그를 우정국 주사로 임명하였으나,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자 3년간 고향에서 지냈다. 그러던 중 초대 미국 공사에 임명된 박정양을 따라 서기관으로 미국에 갔으나, 청의 압력으로 이듬해 귀국하였다. 1895년 서재필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만들어 부회장이 되었다. 1898년에는 '만민공동회'의 사회를 맡아 정부에 보내는 결의 사항을 의결하였다. 그는 독립운동을 지도하다가 두 차례나 감옥생활을 하였다. 그 후 황성 기독교 청년회(YMCA)에서 강연을 하고 성경을 가르치면서 날카로운 풍자로 일본인들을 공박하였다. 기독교 청년회 회장·조선일보 사장을 거쳐 신간회 회장을 지냈다. 그는 만년에도 늘 청년들을 벗삼아 그들을 지도하고 이끌어주기에 힘썼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이상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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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上佐

조선의 화가. 자는 공우, 호는 학포, 본관은 전주이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는데, 특히 산수와 인물에 따를 사람이 없었다. 중종의 특명으로 도화서에 벼슬 자리를 받았으며 중종이 죽자 그 초상화를 그렸다. 1546년 명종 때 공신들의 초상을 그려 원종(原從) 공신이 되었다. 그의 작품 <송하보월도>가 덕수궁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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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相和(1900∼1941)

시인. 호는 상화(尙火)이며 경북 대구에서 출생하였다. 중동중학을 거쳐 도쿄 외국어학교 불어과를 졸업하고 대구 교남학교에서 여러 해 교편을 잡았다. 1922년 홍사용·박종화·나도향 등과 함께 문예지 <백조>를 발간하여 그 창간호에 <나의 침실로>를 발표하였다. 이어서 <말세의 희탄> <가을의 풍경> 등 퇴폐적인 풍조를 나타내는 시를 쓰다가, 1926년 <개벽>지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하여 신경향파에 속하는 시인으로 알려졌다. 문단 생활 10년 동안 <서러운 해조> <이별> <역천> 등 19편의 시와 역시(譯詩) 몇 편을 남겼다. 1935년부터 2년간 중국을 방랑했고, 1941년 대구에서 사망하였다. 1948년 동향 출신 시인 김소운의 발기로 대구 달성공원에 상화 시비(詩碑)가 세워졌다. 작품으로 <그 날이 그립다> <폭풍을 기다리는 마음> <반딧불> <청년> 등이 있다.

이 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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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穡(1328∼1396)

고려 말의 성리학자. 정몽주·길 재와 함께 고려 '3은'의 한 사람이다. 호는 목은, 본관은 한산이다. 어려서부터 총기가 뛰어나 14세에 성균시에 합격하였다. 21세 때 원에 가서 성리학을 연구하였으며, 1351년 귀국하여 공민왕에게 학문의 경향과 당면한 여러 정책의 개혁에 관한 건의문을 올렸다. 1353년 서장관으로 다시 원에 가서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지제고가 되었다. 귀국하여 내서사인·밀직제학 동지 춘추관사가 되어 정몽주 등과 명륜당에서 학문을 강론하였다. 이때 정주(程朱)의 성리학이 처음 일어났다. 1377년 우왕의 사부가 되었으며 공양왕 때 판문하 부사가 되었으나 오사충의 상소로 장단·함안 등으로 유배된 적도 있다. 정몽주가 피살되자 다시 금천·여흥 등지로 유배되었다. 조선 건국 후 태조가 그의 재능을 아끼어 한산백으로 봉하여 예를 다하여 출사(出仕)를 종용했으나, 망국의 사대부는 오로지 해골을 고산에 파묻을 뿐이라 하였다. 다음해 피서차 여강으로 가던 중 갑자기 사망했으므로 그 사인에 대해서는 후세에 의혹을 남기고 있다. 학문이 깊고 시문에 뛰어났으며, 제자 권 근·김종직·변계량 등을 배출하여 조선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게 하였다. 저서로 <목은 시고> <목은 문고> 등이 있다.

이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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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書九(1754∼1825)

조선의 문신·학자. 자는 낙서, 호는 척재, 본관은 전주이다. 덕흥 대원군의 후손으로 영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관·지평·경상우도 암행어사 등을 지냈다. 1795년 정조 때 천주교도를 옹호한다는 죄로 영해부에 유배되었다가 대사성이 되었다. 이듬해 교정당상이 되어 왕명으로 <장릉지>를 편찬했으며, 1800년 순조 때 호조판서로 지실록사가 되어 <정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후 형조판서·대사헌·대호군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으며, 판중추 부사로 재직중 죽었다. 명문장가로서 특히 시명이 높아 박제가·이덕무·유득공과 함께 한시의 4대가로 알려졌으며 5언 고시에 능했다. 저서로 <서산집> <장재집> <여지고> 등이 있다.

이성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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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成桂(1335∼1408)

조선 왕조의 창건자(재위 1392∼1398). 자는 군진, 호는 송헌, 본관은 전주이다. 함남 영흥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지혜롭고 용맹스러웠다. 1356년 유인우가 원의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였을 때, 이성계는 아버지 이자춘과 함께 유인우를 도와 원의 군사를 물리쳐 큰 공을 세웠다. 1361년 홍건적이 고려에 쳐들어왔을 때 그는 뛰어난 무술과 지휘력을 발휘하여 싸움이 있을 때마다 이기는 등 공이 컸다. 이듬해에는 동북면 병마사가 되어 원의 장군 나하추를 무찔러 승리했으며, 그 후에도 두만강 부근으로 침공해 온 여진족을 무찔러 승리하였다. 또한 황산·해주 등지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였다. 1388년 우왕 때 명은 철령 이북의 땅을 요동 관할하에 두고 다스리겠다고 주장했다. 이에 최 영은 단 한 치의 땅도 내줄 수 없다고 강력히 주장함으로써 요동 정벌에 나서게 되었다. 이성계는 4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하였으나 왕과 최 영이 끝내 정벌을 주장하여, 이성계도 하는 수 없이 통도사로서 군사를 이끌고 요동을 향해 진군하였다. 북으로 진격한 좌우 양군은 잠시 위화도서 머물렀으나, 압록강의 물이 계속 불어 진군할 수가 없었다. 이성계는 여러 장군들과 의논한 끝에 위화도 회군을 감행하고 최 영을 유배보내 죽게 한 다음, 창왕을 왕위에 앉혔다. 이어 창왕을 몰아내고 공양왕을 왕위에 오르게 한 후 자신은 수문하시중이 되었다. 1391년 조 준과 함께 토지 개혁을 단행하여 귀족 계급의 경제력을 빼앗아 반대 세력을 없애 나갔고, 아들 이방원이 고려의 충신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죽임으로써 고려의 모든 권력이 완전히 그의 손에 들어갔다. 마침내 1392년 배극렴 등의 추대로 공양왕을 원주로 몰아내고 새로운 왕조의 태조로서 왕위에 올랐다. 그는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으며, 무학 대사와 함께 여러 곳을 둘러본 다음, 개성에서 한양(지금의 서울)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는 명에 사신을 보내어 왕조가 바뀐 것에 대한 해명을 하는 등 사대주의 정책을 썼다. 또한 유교를 숭상하였고 농업을 중히 여기는 농본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왕위를 계승하려는 여덟 왕자들의 피비린내나는 두 차례의 싸움으로 방석·방번이 죽자, 왕위를 방과(정조)에게 물려주고 함흥으로 내려갔다. 후에 아들들이 상경해 줄 것을 권했으나 돌아오지 않다가, 무학 대사의 권유로 덕수궁에 거처하면서 오직 염불만 외며 조용히 여생을 보냈다.

이세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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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世春

조선 영조 때의 가인. 삼국시대 이후 전해 내려온 가곡류의 창사를 시조 형식으로 고쳐 부른 최초의 인물이었다. ‘시조’라는 명칭도 이 때부터 생긴 것으로 추정하는데, 신광수가 지은 <관서악부>를 보면 “일반적으로 시조는 장단을 배제한 노래로서 장안(평양)의 이세춘으로부터 전래되었다”고 하였다.

이수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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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3∼1628)

조선의 명신. 자는 윤경, 호는 지봉, 본관은 전주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이조좌랑 등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경남 방어사 조경지의 종사관으로 출전하여 용인에서 패하였다. 그 후 주청사로 연경에 왕래하였으며, 당시 명에 와 있던 이탈리아 신부 마테오 리치의 저서 <천주실의> 2권과 <교우론> 1권 및 중국 책 <속이담> 6권을 얻어 가지고 돌아와 우리나라 최초로 서양 학문을 도입하였다. 그는 <지봉유설>을 지어 서양과 천주교 지식을 소개하였다. 1613년 광해군이 인목 대비를 폐하고 서궁에 유폐시키자, 관직을 떠나 두문불출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재등용되어 도승지·대사간을 지내고 이 해 이 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를 공주로 모셨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인조를 강화도로 모셨으며 이조판서를 지냈다. 죽은 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채신잡록> <병촉잡기> <찬록군서> 등이 있다.

이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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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壽長(1661∼1733)

조선의 서예가. 자는 인수, 호는 정곡, 본관은 천안이다. 숙종이 지은 시를 붓글씨로 써서 왕의 칭찬을 받았으며, 1709년 청의 사신 연갱요로부터 동방에서 으뜸가는 글씨라는 칭찬받았다. 이어 1711년 통신사 조태억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일본의 서예가들이 그의 글씨를 보고는 극찬을 하였다. 특히 그는 해서와 초서에 뛰어났으며 <묵지간금>을 발간하였는데, 이는 서예를 공부하는 후배들에게 귀중한 지침서가 되고 있다.

이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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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樹廷(1842∼1886)

조선 말기의 크리스트교 신자. 개화당의 일원으로 벼슬이 도승지에 이르렀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민비를 도와 무사히 충주까지 피란하게 한 공으로 일본 시찰의 특명을 받았다. 도쿄로 건너가 야스카와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1883년 일본에 와 있던 미국인 루이스 목사와 함께 마태·마가·누가·요한의 4복음을 번역하여 <신약전서 마가복음 언해>를 간행하였다. 이 책은 백홍준 등이 간행한 <누가복음>과 함께 한글판으로 된 최초의 성경책이 되었다. 1885년 윤치호 등 유학생들에게 크리스트교를 전도하여, 7명이 모여서 처음으로 예배를 본 것이 동기가 되어 후에 유학생 교회가 생기게 되었다. 1886년 귀국하였으나 수구파의 음모로 살해되었다. 저서로 <진리문답> <조선 천주교회사>가 있다.

이숙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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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叔蕃(1373∼1440)

조선의 문신. 본관은 안성이며, 태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충청도 관찰사로서 정도전 등을 죽이고 태종으로부터 정사공신의 호를 받았다. 1400년 박 포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좌명공신의 호를 받고 안성군에 봉해졌으나, 공을 믿고 거만하고 사치하게 굴어 1417년 벼슬을 잃고 경남 함양으로 유배되었다. 세종 때 <용비어천가>를 만들기 위해 풀려나왔다가 책이 완성되자, 다시 함양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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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舜臣(1545∼1598)

임진왜란 때의 명장. 자는 여해, 시호는 충무, 본관은 덕수이며, 서울 건천동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용맹하였으며 자라면서 무예에 뜻을 두어 말타기와 활쏘기를 연마하였다.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북방의 경비를 맡다가 모함을 받고 파직되었다. 1591년 유성룡의 추천으로 진도 군수를 지내다가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승진되었다.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측하고 군사훈련을 시켰으며, 특히 세계 최초의 철갑선을 고안하였는데 이것이 거북선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원 균의 요청을 받고 출전하여 옥포·사천·한산도·안골포·부산포 등 가는 곳마다에서 승리하였다. 이듬해 3도 수군통제사가 되어 3도의 수군을 총지휘하게 되었다. 명의 원병과 합세하여 적군의 후방을 교란시켰고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일본 수군의 앞길을 막는 등, 적의 작전에 차질을 주었다. 전쟁이 일단 중지되자 군사훈련과 군비 확충에 힘쓰다가, 1597년 원 균의 모함과 일본의 이간책으로 심한 고문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판중추 부사로 있던 정 탁의 변호로 풀려나와 권 율 휘하에서 백의 종군하게 되었다. 이순신을 대신하여 통제사가 된 원 균은 안일과 방탕한 생활로 군비를 축냈으며,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대패하여 전사하니 수군은 전멸 상태에 빠졌다. 사태의 긴박함을 느낀 조정에서는 다시 이순신을 통제사로 임명하여 적을 막게 하였다. 이때 그는 모친상을 당하였으나 이를 돌볼 겨를도 없이 싸움터에 도착하였다. 남은 배는 겨우 12척뿐이고 군사들의 사기는 완전히 떨어져 있었다. 조정에서는 수군을 폐하라고 명령을 내렸으나, 그는 자신이 죽지 않는 한, 적이 감히 우리의 수군을 얕잡아보지 못할 것이라는 비장한 결의를 표하였다. 이에 그는 적은 배로 명량에서 왜군을 대파하고 다시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철수하는 왜군을 노량 앞바다에서 맞아 섬멸하였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이순신은 적의 유탄을 맞고 54세로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그는 지극한 충성, 숭고한 인격, 위대한 통솔력 등을 볼 때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이며, 임진왜란 중 나라의 운명을 홀로 지탱한 민족적 영웅이며 은인이었다. 그의 죽음을 안 선조는 특사를 보내어 조문하고, 시호를 내리고 선무일등공신의 호를 주어 덕풍군에 봉했으며, 우의정 및 좌의정을 추증하였다. 고향에는 충신문을 세우고, 정조 때에 영의정을 추증하고 임금이 친히 지은 비문을 하사하였다. 저서로 <이충무공 전서>가 있으며 이 속에 있는 <난중일기>는 유명하다. 사당은 충무의 충렬사, 아산의 현충사 등이 있다.

이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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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純之(?∼1465)

조선의 수학자·천문학자. 자는 성보이며 본관은 양성이다.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왕명으로 산법(算法)을 공부한 후, 장영실 등과 함께 물시계를 만들었다. 세조 때에는 벼슬이 판중추 원사에 이르렀으며 성미가 꼼꼼하여 산학·천문·음양·풍수에 뛰어났다. 김 담 등과 함께 <칠정산내외편>을 저술하였다.

이숭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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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崇寧(1908∼

)

국어학자. 호는 심악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경성제국대학을 마치고 경성대학 법문학부 조교수가 되었다. 그 후, 교수자격 심사위원·학술원 회원·진단학회 상임이사 등을 지냈으며, 1956년 서울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5년 국어학회 이사장·1971년 서울대 대학원·1976년 국어학회장·1985년 무궁화 선양회 총재를 역임하였다. 1961년 3·1 문학상을 받았으며 우리나라 음운론 연구의 제일인자로 많은 공을 세웠다. 저서로 <국어 음운론 연구> <국어학 논교> <중세 국어문법> <음교 음론 연구> 등이 있다.

이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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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崇仁(1349∼1392)

고려의 학자. 자는 자안, 호는 도은, 본관은 성주이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숙옹부승이 되었다. 고려 문사(文士)를 뽑아 명에 보낼 때 1등으로 뽑혔으나 나이가 어려 가지 못했다. 정도전 등과 함께 원의 사신을 돌려보낼 것을 청하다가 유배된 적이 있으며, 그 후 정몽주와 함께 실록을 편찬하였다. 1386년 우왕 때와 1389년 창왕 때 두 차례 사신으로 명에 다녀왔다. 1392년 이방원에 의해 정몽주가 살해될 때 일당으로 몰려 유배되었다가, 조선이 건국되자 정도전의 부하 황거정에게 살해되었다. 그는 당시의 복잡한 외교문서를 도맡아 썼는데, 그의 문장에 명의 태조도 탄복했다고 하며, 길 재 대신 '3은'으로 꼽히기도 한다. 저서로 <도은집>이 있다.

이숭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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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崇孝

조선 선조 때의 화가. 자는 백달, 본관은 전주이다. 그의 아버지 이배련, 조부 소불(小佛), 아들 이 정 등 4대에 걸쳐 그림에 뛰어난 집안이었다. 그의 작품 <저본묵화> <귀어도>가 덕수궁 국립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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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1875∼1965)

독립운동가·1∼3대 대통령. 호는 우남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황해도 평산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려서는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1894년 배재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이듬해 모교의 영어 교사가 되었다. 1897년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발간하자, 이 신문에 논설을 집필하면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는 등 독립사상 고취와 민중 계몽에 힘썼다. 무능한 정부를 비판하고 민주적 자문기관인 중추원의 설치를 주장하면서, 정부측 폭력단인 황국협회와 싸우다가 체포되어 7년간 감옥생활을 하였다. 1904년 출옥하여 민영환의 주선으로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미국에 건너가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05년 워싱턴 대학에 입학하였으며, 1908년 프린스턴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귀국하여 이상재 등과 함께 '기독교 청년회(YMCA)'를 중심으로 후진들을 지도하다가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후 30여 년간 미국과 하와이·상하이 등지를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을 하였다. 1917년 하와이에서 <한국 태평양> 지를 발간했고, 세계 약소민족 대표자 회의에 한국 대표로 박용만을 파견하였다. 3·1운동 때 국내 인사들과 연락하여 거사에 동조했으며, 그 해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설립되자 대통령에 취임하였으나 곧 물러났다.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임시정부 구미 위원부를 설치했으며, 1933년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 회의에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광복이 되자 귀국하여 독립 중앙 협의회를 조직하고 반공·반탁을 주장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의장이 되고 이 해 정부 수립과 함께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 후 강력한 반공·배일주의자로 국내의 공산주의 운동을 분쇄하고 일본에 대해서는 강경 외교를 고수하였다. 6·25전쟁 때에는 UN의 도움을 얻어 공산군을 격퇴하였다. 1960년 대통령에 4선되면서 장기 집권을 꾀하다가 4·19혁명으로 하야하였다. 이 해 하와이로 망명했으며 그곳에서 1965년에 병사하였다. 저서로 <독립정신>, 영문판 <일본 폭로기> 등이 있다.

이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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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薰(1756∼1801) 조선 말기의 천주교 순교자. 교명은 베드로이며 본관은 평창으로 정조 때 진사 시험에 급제하였다. 당시 남인 학자들 사이에는 베이징으로부터 들어온 천주교가 처음에는 단순한 학문으로만 연구되다가, 차츰 그 뛰어난 진리를 깨달음에 이르러 하나의 실천 철학으로 받아들여져 종교적 신앙으로 귀의해 가는 뚜렷한 움직임이 있었다. 1783년 황인점의 서장관으로 베이징에 가는 아버지 이동욱을 따라가게 되었다. 떠나기 전에 천주학을 연구하던 이 벽이 찾아와, 교리와 그 실천 방법을 자세히 살피고 올 것과 천주교에 관한 서적을 구해 올 것을 부탁하였다. 그는 베이징에 도착하여 베이징 교구를 찾아가 교리를 배운 후, 그라몽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고 조선교회의 주춧돌이 되라는 뜻에서 베드로(반석)라는 교명을 받았다. 1784년 성서와 성상·묵주 등을 가지고 귀국하여 서울 명례동(명동) 김범우의 집에 처음으로 조선 교회를 세웠다. 이 벽·이가환 및 정약용·정약종·정약전 3형제와 함께 주일 미사와 설법을 행하면서 성서를 한글로 번역하여 교인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는 1789년 관직에 나가 평택 현감을 지내기도 했으나, 1791년 천주교의 전국적 전파를 막으려는 조정의 탄압으로 신해박해가 일어나 관직을 빼앗겼다. 1795년 주문모 신부 입국 사건으로 예산에 유배되었으며, 1801년 신유박해 때 서대문 형장에서 사형되었다. 1868년 그의 뒤를 이어 아들과 손자가 순교하고, 1871년 증손까지 순교하여 4대에 걸친 순교자 집안이 되었다.

이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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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昇薰(1864∼1930) 독립운동가·교육자. 호는 남강이며 본관은 여주이다. 평북 정주의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유기상 점원으로 일하다가 10년 후에는 큰 돈을 모아 손꼽히는 실업가가 되었다. 러·일 전쟁으로 재산을 잃었으며, 평양에서 안창호 강연에 감동되어 오산학교를 세우고 '신민회'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힘썼다. 1911년 신민회 사건으로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이 해 다시 '105인 사건'에 관련되어 4년간 감옥생활을 하였다. 3·1운동 때 민족대표로 활약하다가 붙잡혀 3년형을 선고받았다. 1922년 가출옥한 뒤 '자면회'를 창립했고, 1924년 동아일보 사장을 맡아 물산장려 운동을 벌였으며 오산학교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1930년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졸업생들의 발기로 오산학교에 동상이 세워졌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이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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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昇薰(1942- ) 강원도 춘천 출생. 1966년 한양대 졸업, 82년 연세대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2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 시집으로 <사물 A> <환상의 다리> <당신들의 초상> <사물들> <당신의 밤> 등이 있고, 평론집으로 <이상 시 연구> <반인간> <시론> 등이 있다. 초기 시들은 언어 그 자체를 대상화하는 작업에 집중하여, 개념화를 거부하는 시세계를 주로 보여주었다. 현재 한양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이승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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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休(1224∼1300)

고려 말기의 학자. 자는 휴휴, 호는 동안거사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두타산 구동에 가서 어머니를 모시고 밭을 갈며 학문을 연구하였다. 그 후 이심돈의 권유로 서장관에 취임하고 원에 가서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충렬왕 때에 밀직부사·감찰대부 등을 지내다가 벼슬에서 물러나 구동에서 만년을 지냈다. 그는 일생을 정치와 문학으로 일관했으며, 종교적 교양도 풍부하였다. 저서로 <제왕운기> <동안거사집> <내전록> 등이 있다.

이시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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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時白(1592∼1660)

조선의 문신. 자는 돈시, 호는 조암, 본관은 연안이다. 이 귀의 아들이며 인조반정 때의 공으로 연양 부원군에 봉해졌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병조판서로서 남한산성을 지켰으며, 소현 세자가 죽자 인조는 효종을 세자로 세우려 했는데 그는 세손(世孫)을 그대로 세울 것을 주장하였다. 1652년 효종 때 연경에 다녀와서 영의정까지 지냈다. 어려서 성 혼·김장생·이항복 등에게 배웠으며 풍채가 당당하고 힘이 세었다. 또한 지혜가 있었으며 항상 겸손하고 청백하였다. 김 육의 건의로 호남 지방에도 대동법을 실시하게 하였다.

이시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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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施愛(?∼1467)

조선 세조 때의 반란자. 본관은 길주이며 함길도 첨절제사 이인화의 아들이다. 대대로 함경도 지방에 살던 지방 호족 출신으로 조선 초기 북방민 회유 정책에 의해 중용되어 문종 때에 호군이 되었다. 세조 때에는 경흥진 병마절제사를 거쳐 판회령 부사 등을 지냈다. 세조가 왕권을 확립한 후, 차츰 북방민의 중용을 억제하고 지방관을 중앙에서 직접 파견하자, 자신의 지위 확보에 불안을 느껴 반란을 꾀하기 시작했다. 1467년 당시 함경도 군사권을 쥐고 있던 절도사 강효문을 살해한 뒤 반란을 일으켰다. 조정에 대해서는 강효문이 반란을 꾀하므로 처형했다고 보고하여 자신의 반란을 합리화시키고, 절도사를 자칭하여 민심을 얻어 세력을 확보하였다. 그는 단천·북청·홍원을 공략하고 함흥을 점거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조석문·허 종·남 이·강 순·어유소 등을 대장으로 하여 3만의 관군을 출동시켜 항복을 종용했으나, 반란이 아니라는 것과 함경도민의 중용을 거듭 주장하였다. 마침내 관군의 공격을 받고 대패했으며, 여진 부락으로 도망하다가 조정에서 밀파된 허유례의 계교로 부하인 이 주·이운로에게 체포되어 참형당하고, 이어 각도에 효수되었다. 그 후로 함경도 등 북쪽 사람들을 경계하여 벼슬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이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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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始榮(1868∼1953)

정치가·독립 운동가. 자는 성옹, 호는 성재, 본관은 경주이다.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동부승지·평안 관찰사·법무 민사국장 등을 지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만주로 가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청년 장교 육성에 전력을 다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 베이징에서 이동녕·조완구 등과 함께 본국과의 연락을 계속했으며, 상하이로 가서 임시정부를 조직하여 법무총장·재무총장·의정원장 등을 지냈다. 광복과 함께 귀국하여 대한 독립 촉성 국민회 위원장이 되었으며, 1948년 정부 수립과 동시에 초대 부통령에 취임하였다. 1951년 퇴임하여 1953년에 피난지 부산에서 노병으로 사망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이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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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植(1584∼1647)

조선의 문신. 자는 여고, 호는 택당, 본관은 덕수이다. 광해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1618년 폐모론이 일어나자 벼슬을 내놓고 고향에 있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다시 등용되어 이조좌랑이 되었다. 그 후 부제학·대제학·이조참판 등을 지냈다. 1642년 김상헌 등과 함께 청과의 화의를 반대하였다 하여 선양에 잡혀 갔다가 돌아올 때, 다시 의주에서 붙잡혔으나 탈출하여 돌아왔다. 그는 또한 장 유와 더불어 당대 일류의 문장가였으며, <선조실록> 수정 작업을 전담하였다. 죽은 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 <택당집> <초학자훈증집>이 있다.

이안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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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安訥(1571∼1637)

조선의 문신. 자는 자민, 호는 동악, 본관은 덕수이다. 선조 때 문과에 2등으로 급제하여 예조정랑·이조정랑 등을 지냈다. 1601년 명에 사신으로 다녀온 후 외국의 사신을 맞는 종사관이 되었다. 당시 광해군의 옳지 못한 정치에 분개하여 벼슬에서 물러났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다시 등용되어 예조참판·형조참판이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모시었다. 죽은 후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청백리에 뽑혔다. 그는 당시(唐詩)에 뛰어났으며, 효성이 지극하기로 유명하였다. 저서로 <동악집>이 있다.

이 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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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7∼1364) 고려 말기의 서화가·문신. 자는 고운, 호는 행촌, 본관은 고성이다. 충선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찬성사·우정승 등을 지냈다. 1359년 홍건적이 쳐들어오자, 왕을 피란시킨 공으로 1등 공신이 되었다. 그는 글씨에도 뛰어나 '동국의 조자앙'이라 했다. <대갑편>을 옮겨 써서 왕에게 바쳤으며, 그림으로는 특히 묵죽을 잘 그렸다. 글씨로 춘천 청평산의 <문수원 장경비>가 있다.

이 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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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巖(1499∼?) 조선 중기의 화가. 자는 정중이며 세종의 넷째 아들인 임영 대군의 증손이다. 꽃·새·벌레·동물 등을 잘 그렸으며, 1545년 중종의 초상을 그릴 때 참여하였다. 작품으로 <묘구도> <화조구자> 등이 있다.

이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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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愛羅(1898∼1921)

항일 운동가·여류 교육자. 본관은 전주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이화학당 중등과를 졸업한 후, 이화학당 교사를 지내고 이규갑과 결혼한 후 공주 영명학교 교사로 있었다. 3·1운동 때 만세 시위에 참가하여 구류되었다. 그 후 수원·공주 등지의 교회를 돌아다니며 '항일 부인회'를 조직하였다. 이것이 일본 헌병에게 발각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다. 석방된 후 1921년 천안 양대여학교 교사로 있었는데, 일본 경찰이 붙잡으러 올 것을 알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몸을 피했다. 그 동안 여러 차례의 고문으로 병이 들어 그곳에서 죽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이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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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敭河(1904∼1963)

영문학자·수필가. 평남 강서에서 출생하였으며, 1930년 일본 도쿄 제국대학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1934년부터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논문과 수필을 발표하였다. 서울대 문리대 교수로 있다가 1950년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 대학 대학원에서 2년간 영문학을 연구하였다. 1953년 미국 학술원의 초청으로 예일 대학 언어학부에서 마틴 교수와 함께 <한영사전>을 편찬했다. 서울대학교 교수와 문리과 대학장을 지냈으며, 1954년 학술원 회원이 되었다. 저서로 <이양하 수필집> 등이 있다.

이어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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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御寧(1934∼

)

문학 평론가·소설가·언론인. 충남 아산에서 출생하였으며, 1956년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을 거쳐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이듬해 <시비평 방법서설>이 <문학예술> 지에 추천됨으로써 문단에 등장하였다. 그는 서구적인 문학이론과 비평방법론으로 의욕적인 활동을 하였으며, 평론가로서 크게 활약하기도 하였다. 연작 에세이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는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으며, 스타인버그에 의하여 영문으로 출간되었다. 경기고교 교사·단국대 전임강사·서울대 문리대 강사·이화여대 문리대 교수를 지냈고, <서울신문> <한국일보> <경향신문> <중앙일보> 등의 논설위원으로 컬럼과 사설을 썼다. 또한 월간 <문학사상> 주간으로도 활동하였다. 1987년 이화여대 기호학 연구소장·1990년 문화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저서로 <지성의 오솔길> <이어령 전작집> 12권과 <한국과 한국인> 6권 등 다수가 있다.

이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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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彦迪(1491∼1553)

조선의 문신. 자는 복고, 호는 회재, 본관은 여주이다.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천광랑·장령·밀양 부사 등을 거쳐 사간에 이르렀다. 1530년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심언광 등의 모략으로 벼슬에서 쫓겨났다. 1537년 김안로 일파가 쫓겨난 뒤 직제학·전주 부윤이 되어 어진 정치를 베풀었다. 그 후 이조·예조·형조판서를 지냈으며, 1545년 인종이 죽자, 원상(院相)으로서 국사를 맡아 처리하였다. 1547년 명종 때 양재역의 벽서사건에 관련되어 강계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으며, 선조 때 영의정에 추증되고 경주 옥산 서원에 배향되었다. 그는 조선 전기의 가장 유명한 성리학자의 한 사람으로 특히 주리(主理)에 대한 학설은 이 황의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후에 이 황은 그를 김굉필·정여창·조광조와 함께 '동방 4현'이라 불렀다. 저서로 <회재집> <대학장구 보유> <구인록> 등이 있다.

이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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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5∼1718)

조선의 문신. 자는 치보, 호는 수곡, 본관은 덕수이다. 송시열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으며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부제학이 되었다. 그러나 1689년 기사환국으로 송시열과 함께 벼슬에서 쫓겨났다. 1694년 갑술옥사로 남인들이 벼슬에서 쫓겨나자 형조참판이 되었으며, 인현 왕후가 복위될 때에 중궁 복위 고명문 제술관으로 일하였다. 그 후 판중추 부사가 되어 옳은 정치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이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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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寧 고려의 화가. 본관은 전주이며 이준이에게 그림을 배웠다. 특히 인종과 의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그림에 관한 일은 모두 이 영이 주재하기도 하였다. 인종 때 이자덕을 따라 송에 가서 송 휘종의 명으로 <예성강도>를 그려 바치고 찬탄과 후한 상을 받았다.

이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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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榮(?∼1563) 조선의 무신. 자는 현보, 호는 괘편, 본관은 영천이다. 중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무관직을 거쳤으며, 1545년 명종이 즉위하자 단천 군수를 지냈다. 이듬해 정평 부사에 부임하여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여 명관으로 이름이 높았다. 1552년 회령부사로 있으면서 훌륭한 정치를 베풀고 청백리에 뽑혔다. 이듬해 함경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군비 확충과 군사훈련에 공을 세워 동지중추 부사가 되었다. 그 후 제주 목사·경상도 병마절도사·부호군 등을 지냈다.

이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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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翎(1615∼1637) 조선의 문신. 자는 화중, 호는 우송재, 본관은 우봉이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참봉으로 있으면서 아버지와 함께 강화도로 가서 의병이 되어 왜적과 싸웠다. 그러나 성이 함락되자 자살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는 가족과 함께 피란하던 도중, 다시 왜적을 만나자 아버지와 함께 적에 대항하여 싸웠다. 여기서 아버지가 전사하자 어머니는 적의 포로가 될까 두려워 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때 이 영은 화상을 입은 어머니를 구해 내어 업고 도망치다가 적의 화살에 얼굴을 맞고 죽었다. 죽은 뒤 정문이 세워졌으며 지평에 추증되었다.

이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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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永道(1916∼1976)

여류 시조 작가·수필가. 경북 청도에서 태어나 오랫동안 교직 생활을 하였고, 1950년 대구의 <죽순> 동인으로 창작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한국 전래의 고전적 정서를 바탕으로 인간의 내면적 정한을 시조로 읊었다. 시조집 <청저집>, 수필집 <춘근집> 등이 있다.

이영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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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英胤(1561∼1611)

조선의 화가. 자는 가길, 본관은 전주이다.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여 이름을 떨쳤는데, 특히 산수·우마·영모를 잘 그렸다. 작품으로 <영모도> <산수도> <화조도 병풍> 등이 있다.

이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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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芮(1419∼1480)

조선의 문신. 자는 가성, 호는 눌재, 본관은 양성이다.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박사가 되었으며, <의방유취> 365권을 편찬하는 데 참여하였다. 이어 1474년 개성 유수가 되어 백성을 위해 어진 정치를 베풀어서 왕이 내리는 비단을 상으로 받았다. 그 후 형조판서·공조판서를 지냈다. 그 당시 부녀자의 재혼문제에 대해 논란이 벌어졌을 때, 이 예는 한 남편을 섬기는 것이 원칙이지만 부양자가 없거나 부모나 존장이 사정을 딱하게 여겨 다시 결혼시킬 경우에는 이를 허락해 주어야 하되 세 번 개가한 자의 자손은 중요한 벼슬에 오르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짐으로써 조선 시대의 재혼에 대한 기본 방침이 되었다.

이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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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浣(1602∼1674) 조선의 문신. 자는 징지, 호는 매죽헌, 본관은 경주이다. 1636년 병자호란 때 김자점 휘하의 별장으로 정방산성에서 공을 세웠다. 인조에 이어 즉위한 효종은 선양에 인질로 잡혀갔던 굴욕에 분개하여 북벌을 계획하였으며, 이 완을 훈련대장으로 임명하였다. 이어 송시열·송준길 등 명인을 등용하고 신무기의 제조·성터의 개수를 서두르는 등 군비 확장에 전력하였다. 그리하여 북벌 시기를 기다렸으나, 얼마 후 효종이 죽자 뜻을 실현하지 못하였다. 그 후 현종 때 병조 판서로 기용되었으나 굳이 사양하여 수어사로 임명되었고 후에 우의정에 이르렀다. 그는 강직한 성격에 독서를 즐겼고 병법에 밝아서 적을 다루는 데 기략이 뛰어났었다.

이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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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示完(1604∼1649) 조선의 문신. 자는 자완, 본관은 연안이다. 인조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자가 되었으며, 흉년으로 기근이 심하자 '구휼 10조'를 상소하여 이를 시행하게 하였다. 이어 병조좌랑을 거쳐 옥구 현감으로 있을 때 각종 잡세를 폐지하도록 건의하여 백성의 부담을 덜어 주었다. 1645년 대기근으로 진휼청을 두게 되자, 각도에 운미선을 보내어 비축미를 풀어 백성을 구제하였다. 1648년 지평으로 있을 때, 김자점이 뇌물을 받아 기강을 문란시킴을 상소하고는 벼슬에서 물러났다.

이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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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完用(1858∼1926)

조선 말기의 매국노. 자는 경덕, 호는 일당, 본관은 우봉이다.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교 수찬을 지냈다. 1887년 미국 주재 대리공사로 미국에 갔다가, 1890년 귀국하여 학부대신 등을 거쳐 중추원 의관이 되었다. 1896년 아관파천 때 친러파로서 외부·탁부·농공상부 대신 서리 등의 직책을 맡았으며, 1901년 친일파로 변절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의 체결을 지지하고 서명함으로써 을사 5적신의 괴수가 되었다. 1907년 의정부를 내각으로 바꾸고 이토 히로부미의 추천을 받아 내각 총리대신에 궁내부 대신 서리를 겸임했다. 헤이그 특사 사건이 일어나자, 고종에게 그 책임을 물어 왕위를 내놓을 것을 강요하였으며, 순종을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이로 인해 전국 각처에서 항일 의거가 일어나고 성난 군중들은 그의 집으로 몰려들어 불을 질렀다. 1909년 명동성당에서 이재명의 칼에 찔려 복부와 어깨에 중상을 입기도 하였다. 1910년 정부 전권위원의 자격으로 한일합방 조약을 체결하여 매국의 원흉이 되었다. 그 공으로 일본 정부로부터 백작 칭호를 받고 조선 총독부 중추원의 고문이 되었으며, 3·1운동 때에도 동포를 공갈 협박하는 경고문을 3회나 발표, 후작 작위를 받는 등 죽을 때까지 매국 매족하며 자신의 영달을 위해 일본에 충성을 다하다 죽었다.

이용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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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容九(1868∼1912)

조선 말기의 친일파. 자는 대유, 호는 해산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도와 농사로 겨우 살아가다가, 1890년 동학에 들어가 손병희와 최시형의 제자가 되었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 최시형 등이 붙잡혀 처형될 때 옥에 갇혔으나, 그 후 남은 세력을 모아 '진보회'를 조직하였다. 1904년 친일파인 송병준의 권유로 진보회를 친일 단체인 '일진회'에 합병했다. 이듬해 손병희가 동학의 전통을 이어 천도교를 시작하자, 이용구는 따로 시천교를 창설하여 교주가 되었다. 윤시병의 뒤를 이어 일진회 회장이 되었고 한일합방을 부르짖는 동시에, 고종 황제를 비롯하여 이완용과 조선 통감에게 한일합방 건의서를 전달하는 등 매국행위를 자행하였다. 죽은 뒤에 일본 천황으로부터 1등 서보장을 받았다.

이용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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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容翊(1854∼1907)

조선 말기의 대신. 함남 북청에서 출생하였으며 민영익의 천거로 감역으로 발탁되었다. 1882년 임오군란 때 장호원에 피신한 명성황후와 고종과의 연락을 재빨리 하여 주었기 때문에 고종의 신임을 얻어 단천 부사가 되었다. 1902년 탁지부 대신으로 이 준·민영환·이상재와 개혁당을 조직했으며, 친러파의 지도자로서 일본의 침투를 막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후 용암포의 조차권을 러시아에 넘겨주도록 적극 주장하였으며, 내장원경이 되어 화폐를 남발하고 광산 채굴권·인삼·전매 등의 사업을 잘못 감독하여 독립협회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1905년 보성학원(고려대학교)을 세워 소학·중학·전문학교 과정을 두어 교육사업에 힘썼다. 이 해 체결된 을사조약을 반대하다가 일본 헌병대에 연금당하였다. 그 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병사하였다. 일설에는 러시아 페테르스부르크에서 김현토에 의해 암살당했다고 한다.

이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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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瑀(1542∼1609)

조선의 서화가. 자는 계헌, 호는 옥산, 본관은 덕수이다. 율곡 이 이의 동생이며 명종 때 진사에 급제하여 군자감정까지 지냈다. 그는 어머니인 신사임당의 예술적 재능을 이어받아 시·글씨·그림·거문고에 능하여 '4절'이라 불리었다. 글씨로 양주에 <윤은성사정비>가 있다.

이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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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元壽(1911∼1986)

아동문학가. 경남 마산에서 출생하였으며 마산 상업학교를 졸업하였다. 재학중 방정환이 발행하던 어린이 잡지 <어린이>에 <고향의 봄>을 발표하여 문단에 등장하였다. <기쁨사> 동인이 되면서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하여 장편 동화와 아동 소설을 주로 썼다. 광복 후에는 <소년세계> <어린이세계> 주간을 거쳐 경희대학교 초급대학 강사, 아동문학가 협회 회장이 되었다. 대표작품으로 <숲속 나라> <구름과 소녀> <민들레의 노래> <파란 구슬> <을지문덕> 등이 있다.

이원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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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元翼(1547∼1634)

조선의 문신. 자는 공려, 호는 오리, 본관은 전주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있었으나, 원래 인품이 곧아 사람 사귀기를 싫어하여 공적인 일이 아니면 나오지 않았으므로 그를 아는 이가 없었으나, 유성룡만은 그의 슬기로움을 알고 존경하였다. 1573년 권덕여를 따라 명에 다녀온 후 황해 도사가 되어 크게 인망을 얻었다. 이 이가 황해 감사로 있을 때, 그의 밑에서 일을 잘 처리하여 정언·승지가 되었다. 그러나 왕자 사부 하 낙이 승정원이 왕의 총명을 흐리게 한다고 상소함으로써 그 책임을 지고 파면되었다. 그 후 대사헌이 되었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조판서로 평안도 도순찰사를 겸임하여 왕이 피란하는 길에 앞장섰으며 흩어진 군사를 모아 적과 싸웠다. 이듬해 평양 탈환 작전에 공을 세워 영의정이 되었으나, 일본과 화의를 주장한 죄로 물러난 유성룡을 변호하다가 벼슬에서 물러났다. 1600년 다시 이항복의 뒤를 이어 좌의정이 되었다. 1608년 대동법을 건의하여 전국적으로 실행하도록 하였으며 불합리한 세금제도를 고치게 하고 군사제도를 개혁하였다. 1615년 폐모론을 반대하다 홍천에 유배되었으며, 1619년 풀려나왔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영의정에 등용되었으며, 이듬해 이 괄의 난 때에 공주로 피란하는 왕을 모셨다. 그는 청백리에 뽑혔으며 남인에 속해 있었으나, 성품이 원만하여 반대파로부터도 호감을 받았다. '오리 정승'이란 이름으로 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으며, 저서로 <오리집> 등이 있다.

이원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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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源喆(1896∼1962)

천문학자. 1919년 연희전문학교 수학물리과를 졸업하고, 이듬해 미국에 건너가 미시간 주립대학에서 수학과 천문학을 전공하여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27년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 교수·중앙 기독교 청년회 이사를 지냈다. 광복 후에는 국립 중앙 관상대장·한국 천문학 회장·학술원 회원 등을 지냈다. 우리나라 천문학계의 육성에 힘썼으며 새로운 별을 발견하여 '원철 스타'라고 이름지었다.

이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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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緯國(1597∼?)

조선의 문신. 자는 태언, 호는 운포, 본관은 전주이다. 광해군 때 원주 목사로 있다가 정국이 혼란해지자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지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다시 등용되어 용인 현령·곡산 군수로서 선정을 베풀었다. 1634년 병자호란이 일어날 것을 예견하고 그 방비책을 상소하였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1658년 효종 때 14만 석의 정부 양곡을 차용하고도 갚지 않는 서울 사대부들을 탄핵했다가 파직당했다. 후에 다시 등용되어 상원 군수·이천 부사 등을 지냈다. 여러 지방 관직을 거치며 좋은 정치를 베풀어 청렴강직한 관리로서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이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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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瑋鍾

조선 말기의 외교관. 러시아 주재 한국 공사 이범진의 아들이다. 1907년 고종의 밀령을 받고 이준·이상설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동행하였다. 그러나 일본 대표의 방해로 회의 참석을 거부당하였으나, 기자협회의 도움으로 한국의 억울한 입장과 일본의 야만적인 침략 행위를 규탄하는 연설을 하였다. 이때 일본은 이들 3의사에 대한 궐석 재판을 열고 사형을 선고하여 체포령을 내렸다. 이위종은 이미 순국한 이 준을 헤이그에 묻고, 이상설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항일투쟁을 하였다. 그 후 다시 페테르스부르크에 가서 계속 항일 투쟁을 하다가 그곳에서 병사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이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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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陸史(1905∼1944)

시인. 본명은 활, 호는 육사이며 경북 안동에서 출생하였다. 일찍이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들어가 중국의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중국 베이징 대학 사회학과를 졸업한 뒤 귀국하였으며, 조선은행 대구 지점 폭파 사건에 관련되어 3년간 감옥 생활을 하였다. 그때의 죄수번호 64를 따서 호를 '육사'라고 하였다. 잡지업자·신문기자·사회운동가 등 여러 가지 경력을 거쳐 소설을 쓰기도 했고, 30살이 훨씬 지나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1937년 신석초·윤곤강·김광균 등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을 펴내고, <청포도> <교목> 등 목가풍의 시를 발표하였다. 그는 상징주의적 수법으로 서정성이 풍부하고 소박한 시를 발표하였다. 그의 대표작인 <광야> <절정>에서는 피압박 민족의 민족적 비운을 소재로 한 강렬한 저항의식을 담은 서정시를 지었다. 1942년 중국으로 망명했으나, 독립운동에 관련된 혐의로 붙잡혀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광복 후 친구들에 의해 그의 유작 20편을 실은 <육사 시집>이 발간되었다.

이윤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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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允宰(1888∼1943)

국어학자. 호는 한뫼이며, 경남 김해에서 출생하였다. 대구 계성학교를 졸업하였으며, 평북 영변의 숭덕학교에 재직중 3·1운동에 참여하여 3년간 감옥생활을 하였다. 1924년 중국 베이징 대학 사학과를 졸업한 뒤 귀국하여, 오산·경신·연희전문·감리교 신학교 등에서 교편 생활을 하였다. 1927년 '조선어학회' 회원들과 사전을 엮고, 1934년 국어학자·사학자들과 함께 '진단학회'를 설립하였으며 기독교신문의 주필이 되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최현배·이희승 등과 함께 체포되어 이듬해 함흥 형무소에서 악형과 추위에 시달리다 병사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저서로 <표준 조선어 사전> <도강록> 등이 있다.

이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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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殷官(1917∼

)

국악인. 강원도 이천에서 태어나 철원보통학교를 마치고 국악계에 투신하였다. 1941년부터 광복 때까지 무대 생활을 하였고, 1946년 국악원 민요국 극단을 조직하여 운영하였다. 1968년 국악협회 감사를 지냈고, 이은관 민속 예술학원을 설립하여 후진 육성에 전력하였다. 1984년 중요 무형문화재 29호(서도 소리) 기능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이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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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殷相(1903∼1982)

시조작가·사학자·명예 문학박사. 호는 노산이며 경남 마산에서 출생하였다.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한 뒤, 일본 와세다 대학 사학부에서 공부하였다. 경희대에서 문학박사, 연세대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화여전·서울대·영남대 교수를 거쳐 민족문화 협회장·시조작가 협회장·한국 산악회장 등을 지냈다. 광복 전에는 국민문학파의 일원으로 활약하였고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투옥되기도 하였다. <조선문단>지 초기부터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였다. 그의 시조는 조국과 국토 산하에 대한 예찬, 전통적 동양 정서, 불교적 무상관 등이 얽혀 바탕을 이루고 있다. 특히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은 거의 신앙적 집념으로 나타난다. 평이한 언어가 자연스럽게 유출하는 즉흥성은 넓은 독자층을 형성하여 시조 부흥을 이룩한 공로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광복 후에는 언론·학술·사학 방면의 저술을 많이 남겼다. 또 국토를 편답하면서 쓴 기행문도 많고, 충무공 연구가로도 이름이 높다. 저서로는 <노산 시조집> <민족의 맥박> <조국 강산> <이 충무공 일대기> 등이 있으며 기행문 <피어린 육백 리>가 있다.

이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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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義旼(?∼1197)

고려의 무신. 본관은 경주이며, 천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키가 크고 힘이 세어 경군(京軍)에 편입되었다. 수박(권투)을 잘 하여 의종의 총애를 받아 별장이 되었다. 1170년 정중부의 난에 가담하여 공을 세우고 장군이 되었다. 1173년 김보당의 의종 복위 반란을 진압하여 대장군이 되고, 그 후 조위총의 난을 평정하여 상장군이 되었다. 경대승이 정중부를 죽인 뒤에는 그를 두려워하여 병을 핑계로 고향인 경주에 있다가 경대승이 죽은 뒤에 다시 조정에 나가 판병부사가 되었다. 김사미 등과 힘을 합하여 반역을 도모하려 하였으며 인사권을 장악하여 벼슬을 팔고 백성의 재산을 빼앗아 큰 저택을 짓는 등 질서를 어지럽히다가 최충헌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의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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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義方(?∼1174)

고려의 무신. 본관은 전주이며 1170년 정중부·이 고 등과 난을 일으켜 의종을 폐위시키고 명종을 오르게 한 공으로 벽상공신이 되었다. 1173년 김보당의 난을 평정하였고, 이듬해 딸이 태자 빈이 되자 부귀와 권세를 누리며 정치를 어지럽혔다. 이 해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러 서경에 갔다가 패하고 돌아오는 길에 정중부의 아들 정 균이 보낸 자객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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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珥(1536∼1584)

조선의 학자·문신. 아명은 견룡, 자는 숙헌, 호는 율곡, 본관은 덕수이다. 강릉의 외가에서 출생하였는데, 그 집이 바로 오죽헌이다. 그는 어머니인 신사임당의 교훈을 받으며 학문을 닦아 13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 초시에 장원 급제하였다. 16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3년상을 치른 후, 금강산으로 들어가 마하연에서 불교의 이치를 연구하였다. 그러던 중 깨달은 바가 있어 산에서 내려와 유학 연구에 힘썼다. 그 후 강릉을 떠나 서울로 올라와서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으며, 이 황을 찾아가 학문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는데, 당시 대학자로 이름이 높았던 이 황은 이 이의 총명함과 사람됨에 대해 크게 칭찬을 해주었다. 그는 그 후 다시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는데, 그 때 그가 답안으로 쓴 <천도책>은 그의 철학에 대한 근본사상이 들어 있는 글이었다. 이 <천도책>은 중국에까지 알려져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여 9번이나 장원급제하였으므로 '9도 장원공'이라 불리었다. 이 때부터 벼슬길에 올라 정치에 참여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대사간의 직책을 9번이나 맡아 임금이 올바른 정치를 하도록 도왔다. 그는 당시의 정치 문제 등 여러 가지를 다루어, 왕으로서 취할 태도를 밝힌 <동호문답> <만언봉사> <성학집요> 등을 지었다. 그는 특히 10년 안에 큰 전쟁이 있을 것이니 10만 군대를 키우자고 주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과연 9년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34세 때 병이 나자, 벼슬을 내놓고 황해도 해주 석담에 집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한편, 학문과 수양에 힘썼다. 이 때 그 곳의 경치를 읊은 시조 <고산 9곡가>를 지었으며, 청주 목사로 임명되었을 때 백성들이 자치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향약'이라는 자치조직에 대한 규칙을 마련하였다. 그 뒤 황해도 관찰사가 되어 이 운동을 크게 일으켰다. 선조 때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져 당파 싸움이 심해지자, 그는 나라 일을 걱정하며 화해시키는 데 노력하였다. 48세에 병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이듬해 죽었다. 이 이는 죽기 이틀 전까지도 나라 일을 걱정하며, 북방을 지키기 위해 떠나는 서 익에게 6가지 중요한 일을 가르쳐 주기도 하였다. 그가 죽었을 때, 그의 집에는 값나가는 물건이 아무것도 없었으며 장례를 치를 돈마저 없어 친구들이 모아 겨우 치렀다고 한다. 그는 제자들에 의하여 '동방의 성인'이라는 칭호를 받고 기호학파를 형성하여, 후세의 학계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1682년(숙종 8)에는 문묘에 모셨고 황해도 배천에 문회 서원이 건립되어 그를 제향하였다. 저서로 <격몽요결> <율곡전서> <대동법> 등이 있다.

이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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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8∼1722)

조선의 문신. 자는 양숙, 호는 소재, 본관은 전주이다.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강원감사를 지내다가 1689년 영해로 유배되기도 하였으나, 1694년 대사헌을 거쳐 좌의정·우의정에까지 올랐다. 1720년 숙종의 승하를 알리기 위해 청에 갔는데, 그곳에서 독일·포르투갈의 신부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천주교를 비롯한 천문학·역산 등에 관한 책을 가지고 이듬해 귀국하여 이를 널리 소개하였다. 그는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으로서 영조의 대리청정을 실현시켰으나, 소론의 무고로 남해로 유배되었다가 압송 도중 처형되었다. 저서로 <소재집>이 있다.

이이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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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爾瞻(1560∼1623)

조선의 문신. 자는 득여, 호는 관송, 본관은 광주이다. 이극돈의 후손으로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 등을 지냈다. 1608년 선조의 후계자 문제로 대북파와 소북파가 서로 다툴 때에 대북파의 지도자로서 광해군을 받들었다. 정인홍과 모의하여 영창 대군을 추대하려는 유영경 등 소북파를 공격하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 유배되었으나 선조가 승하하여 광해군이 즉위하자 풀려났다. 그는 소북파 일파를 몰아내고 영창 대군을 강화에 가두었으며, 선조의 장인 김제남을 죽이는 등 연거푸 옥사를 일으켰다. 1617년 폐모론을 내세워 인목 대비를 서궁에 가두는 등 나쁜 정치를 일삼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그의 세 아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이 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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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瀷(1681∼1763)

조선의 실학자. 자는 자신, 호는 성호, 본관은 여주이다. 숙종 때 문과에 합격하였으나 형이 당쟁으로 희생된 후, 벼슬의 뜻을 버리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그는 유형원의 학풍을 계승하여 실학의 대가가 되었으며, 특히 천문·지리·의약·율산·경사 등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영조는 그의 명성을 듣고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저술에 힘쓰는 한편, 서학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였다. 그는 당쟁의 폐단이 제한된 관직에 많은 관리들이 배출되어, 서로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려는 데서 비롯된다고 분석하였다. 이것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양반 계급의 생업 종사와 과거제도의 잡다를 피하고 관리 승진에 있어서도 신중을 기할 것을 주장하였다. 한편, 그는 토지 경작을 기본적인 경제 정책으로 삼고 한전법(限田法)의 시행을 제창하였다. 그 후 이 익의 사상은 제자 안정복·이가환·이중환·윤동규·신후담·권철신 등에 의하여 연구 계승되고 정약용이 집대성하였다. 죽은 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성호사설> <성호문집> <해동악부> 등이 있다.

이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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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仁老(1152∼1220)

고려의 학자. 자는 미수, 호는 쌍명재, 본관은 인주이다. 1170년 의종 때 '정중부의 난'이 일어나자,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절에 들어가 지냈다. 그 후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직사관에 있으면서 당대의 학자들인 오세재·임 춘·이 담 등과 함께 결의 친구가 되어 시와 술을 즐기었다. 신종 때 예부원외랑을 지내었고, 고종 초에는 비서감 우간의 대부를 지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문장과 글씨에 능하였으나, 성미가 급하였으므로 크게 쓰이지 못하였다. 저서로 <은대집> <쌍명재집> <파한집> 등이 있다.

이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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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寅文(1745∼1821)

조선의 화가. 자는 문욱, 호는 유춘, 본관은 해주이다. 도화서의 화원이었으며, 첨사 벼슬을 지냈다. 그의 그림은 근대 조선화의 구성상의 산만함을 없애고 정연하고 아담한 구도로서 실력을 높이 평가받았다. 작품으로 <누각아집도> <강상무진도> <산수도> <강촌우색도> <추림도> 등이 있다.

이인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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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仁復(1308∼1374)

고려의 문신. 자는 극례, 호는 초은, 본관은 성주이다. 이조년의 손자이며 백이정에게 학문을 배워 문장에 능하였고, 특히 주자학에 밝았다.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록·춘추공봉 등을 지냈다. 충혜왕 때 기거사인으로 원나라의 제과에 급제하여 대령로 금주판관의 벼슬을 받았다. 1344년 충목왕이 즉위하자, 우대언을 거쳐 삼사 좌사에 올라 원나라의 정동행성 도사가 되었다. 1352년 공민왕 때 감찰대부가 되었고 성산군에 봉해졌다. 1364년 찬성사에 나가 단성좌리 공신이 되었으며, 이 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공민왕이 복위된 것을 알리고 돌아왔다. 공민왕에게 신 돈을 멀리할 것을 간하다가 파면되었으며, 후에 다시 판삼 사사·검교 시중을 지내다가 등창으로 죽었다. 충렬·충선·충숙왕의 실록과 <고금록> <금경록>을 편수하였다. 저서로 <초은집>이 있다.

이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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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麟祥(1710∼1760)

조선의 화가. 자는 원령, 호는 능호관, 본관은 전주이다. 영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북부 참봉에 임명되었으며, 벼슬이 음죽 현감에 이르렀다. 시서화를 다 잘하여 '3절'이라 불리었으며 인장도 잘 새겼다. 저서로 <능호집>, 작품으로 <수석도> <노송도> <옥류동도>, 글씨로 <대사성 김식표> 등이 있다.

이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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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麟榮(1867∼1907) 조선 말기의 의병장.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나 일찍이 학문에 전념하여 이름을 떨쳤다. 문경으로 이사하여 유인석·이강년 등과 협력하여 1885년 의병을 일으키고, 여러 차례 일본군과 싸우다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본격적으로 의병활동을 하였다. 1907년 양주에서 각지의 의병을 연합하여 총대장으로서 수만의 병력을 24진으로 편성하여 서울로 진격하려 하였으나, 동대문 밖에서 패하여 퇴각하였다. 이 때 아버지의 별세 소식이 전해져 고향에 돌아갔다가 황간에서 붙잡혀 서울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이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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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仁榮(1911∼?) 사학자. 호는 학산이며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1937년 경성제국대학 조선사학과를 졸업하였다. 그 후 '진단학회'에 들어가 많은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진단학회가 운영난에 빠지자 사재를 털어 <진단학보> 제9집을 발간하였다. 1949년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교수가 되었다가, 이듬해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일본에 우리의 문화재가 흘러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많은 골동품과 활자본을 수집했으며, 서지학·활자 연구·한국 만주 관계사의 권위자였다. 저서로 <한국 만주 관계의 연구> <국사요론>이 있다.

이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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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仁任(?∼1388)

고려 우왕 때의 간신. 호는 황무이며 본관은 성주이다. 이조년의 손자로 문벌로 벼슬에 나아갔다. 1359년 공민왕 때 홍건적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1등 공신이 되었다. 1369년 서북면 도통사가 되어 원나라의 동녕부를 토벌하였다. 1374년 공민왕이 죽자, 우왕을 받들어 정권을 잡았다. 그는 일족을 벼슬에 앉혔으며 매관 매작과 충신을 모함하여 몰아내는 등 횡포가 심하였다. 결국 1388년 최 영 등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이인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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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麟佐(?∼1728)

조선 영조 때의 반란자. 본관은 광주이며 이준경의 후손이다. 1721년 신임사화 때 한동안 득세하였으나, 영조가 즉위하여 소론파를 몰아내자, 정희량과 함께 밀풍군 탄을 왕으로 추대하고 1728년 반란을 일으켰다. 청주를 함락하고 안성에까지 이르렀으나, 관군에게 크게 패하여 서울에서 처형되었다.

이인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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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人稙(1862∼1916)

신소설 작가. 호는 국초이며 경기도 이천에서 출생하였다. 갑오경장 후 조중응을 따라 일본에 건너가 미야코 신문에 연재되던 소설을 탐독하고 신소설에 대한 소양과 지식을 얻었다. 1906년 <만세보>의 주필이 되었으며, 이 신문에 신소설 <혈의 누>를 발표하였다. 1907년경 <만세보>가 운영난에 빠지자, 이완용의 힘을 빌려 <대한신문>을 창간하였다. 한때는 원각사를 중심으로 신극운동을 전개하고 <설중매>와 같은 신소설을 신극으로 각색하기도 했다. 그는 경술국치 때, 이완용을 돕는 등 친일적인 행위를 많이 했으나, 작가적 재능은 뛰어나 근대 소설의 성격을 잘 파악하였고, 구상력과 성격의 묘사에 능했으며, 사실적 산문 문장을 처음으로 쓴 점에서 근대 소설의 토대를 닦은 그의 문학사적 공적은 크게 평가되고 있다. 대표작으로 <치악산> <귀의 성> <은세계> 등이 있다.

이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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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仁鎬(1932∼1966)

군인. 경북 청도에서 출생하였으며 해군사관학교를 제11기생으로 졸업하였다. 1965년 해병대 대위로서 월남으로 건너가 청룡부대에서 정보장교로 근무하였다. 이듬해 투이호아 지방에서 있었던 '해풍작전' 때 동굴 수색 작전중 수류탄 1개가 날아들자, 이를 몸으로 덮쳐 부하들을 구하고는 장렬한 전사를 하였다. 군인으로서 최고 훈장인 태극 무공 훈장이 수여되고 소령으로 특진되었다.

이자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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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資謙(?∼1126)

고려의 척신. 본관은 인주이며 이자연의 손자이다. 둘째 딸이 예종의 왕비가 되자 소성군 개국백이 되었다. 예종이 죽자, 외손자인 태자를 인종으로 즉위하게 하고 셋째, 넷째 딸을 인종에게 바쳤다. 그는 십팔자(十八子:李)가 왕이 되리라는 참위설을 믿고 왕위를 탐내었다. 그러던 중, 1126년 왕의 뜻을 받은 최 탁·오 탁 등이 그를 몰아내려 하자, 이들을 모두 살해하였다. 이 사건으로 궁궐이 타버려 왕은 연경궁으로 옮겼는데, 이 난을 '이자겸의 난'이라고 한다. 그는 더욱 권세를 부려 왕을 독살하려고 하였으나, 그의 일파인 척준경이 왕의 부탁으로 일으킨 거사로 붙잡혀 영광으로 유배되어 죽었고 이자겸 소생의 왕비도 폐위시켰다.

이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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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子淵(?∼1086)

고려 문종의 외척. 본관은 인주이며 현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부상서·참지정사 등을 지내다가, 1050년 문종 때 내사시랑 평장사에 올랐다. 딸 셋이 각각 인예 왕후·인경 현비·인절 현비 등으로 모두 문종의 아내가 되자, 세력을 잡고 높은 벼슬을 지냈다.

이장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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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長孫

조선 선조 때의 발명가. 화포공(火砲工)으로 1592년 임진왜란 때 비격 진천뢰라는 박격포와 비슷한 무기를 만들었다. 경주 탈환전에서 경주 판관인 박의장이 이를 사용하여 큰 효과를 거두었고, 해군 함포에도 사용하여 많은 적선을 쳐부수었다.

이장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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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長鎬(1945- ) 영화감독이자 제작자. 서울 출생. 홍익대학교 건축미술학과를 중퇴하고 신상옥 감독이 만든 신필름에서 일하다가 1974년 <별들의 고향>으로 데뷔했다. 사회의 어두운 면을 영화의 주제로 삼고 비판하는 사회성을 강조하면서 영화의 흥행에서도 뒤지지 않는 상업주의 감독의 모습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작품으로는 <바람 불어 좋은 날>(1980), <어둠의 자식들>(1981), <바보 선언>(1983),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1987) <무릎과 무릎 사이>(1984), <어우동>(1985) 등이 있다. 그는 1980년대 우리나라 영화가 안고 있는 현실과 영화의 간격을 좁히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이장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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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章熙(1902∼1928)

시인. 호는 고월이며 경북 대구에서 출생하였다. 교토 중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25년 <조선문단>지를 통하여 문단에 등장하였다. 당시 우리나라 시의 풍조가 퇴폐적이고 감상적인 것이 주조를 이루고 있었는데 그는 맑고 날카로운 작품을 많이 발표하여 시의 천재라고 불리었다. 1928년 정신적인 쇠약과 고독·회의 끝에 음독 자살하였다. 1951년 백기만에 의해 유고집인 <상화와 고월>이 출판되었으며, 대표작으로 <봄은 고양이로다> <청천의 유방> 등이 있다.

이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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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縡(1678∼1746)

조선의 학자. 자는 희경, 호는 도암, 본관은 중봉이다.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단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후 부제학 등을 거쳐 함경도 관찰사가 되었다. 1720년 경종이 즉위하자, 예조참판으로 등용되어 도승지·대사헌·공조판서 등을 지냈다. 1721년 신임사화 때 작은 아버지 이만성이 피살되자, 벼슬에서 물러나 설악산에 숨어 살면서 성리학 연구에만 열중하였다. 그는 당시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그림 또한 잘 그렸다. 만년에는 용인에서 지냈는데, 그를 찾아와 학문을 배우는 선비가 많았다. 저서로 <도암집> <어류초절> <근사심원> 등이 있다.

이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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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在寬(1783∼1837)

조선 후기의 화가. 자는 원강, 호는 소당, 본관은 용인이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그림을 그려 팔아 어머니와 생계를 이어나갔다. 그는 구름·나무·새 등을 잘 그렸고 초상화에도 뛰어났다. 벼슬은 등산진 첨절제사에 이르렀으며, 작품으로 <송하인물도> <약산초상> <선인도> 등이 있다.

이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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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在明(1890∼1910)

독립운동가. 평북 선천에서 출생하였으며 18세 때 선교사를 따라 미국 유학을 하고 돌아왔다. 귀국 후에는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 가 있다가 한일합방이 이루어지리라는 소문을 듣고 국내로 들어왔다. 1909년 명동 천주교 성당에서 벨기에 황제 레오폴드 2세의 추도식이 거행되었는데, 이를 마치고 나오는 이완용을 칼로 찔러 중상을 입혔다. 그 후 그는 경찰에 체포되어 이듬해 사형당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이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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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勣(1162∼1225) 고려의 무신. 본관은 지평이며 대장군 이준선의 아들이다. 1216년 고종 때 우군 병마판관이 되어 서북면으로 쳐들어온 거란군을 물리쳤다. 이듬해 다시 거란군이 쳐들어오자, 병마부사로서 광탄에서 적을 크게 물리쳐 상서 좌복야에 올랐다. 그 후 추밀원 부사·어사대부 등을 지냈다. 평소에는 온순하지만 전장에 나가면 남이 따르지 못할 정도의 용기로 적과 맞섰다고 한다.

이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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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霆(1541∼?) 조선 중기의 화가. 자는 중섭, 호는 탄은이며 세종의 5세손이다. 석양정에 임명되었다가 석양군으로 피봉되었다. 그는 묵화를 잘 그렸는데, 대나무에 특히 뛰어났으며 시와 글씨에도 능하였다. 임진왜란 때 한쪽 팔이 부러졌는데, 팔이 나은 후부터 화필이 더욱 능숙해졌다. 작품으로 <우죽도> <풍죽도> 등이 있다.

이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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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禎(1578∼1607) 조선 중기의 서화가. 자는 공간, 호는 나옹, 본관은 전주이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뛰어났으며 아버지 이숭효의 재주를 이어받아, 10세 때 이미 그의 이름이 알려졌다. 13세 때 장안사의 벽화를 그려 천재 화가라고 불리었으나, 지나치게 술을 즐겨 30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작품으로는 <목죽도> <한강조주도> 등이 있으며, 글씨로 <법주사 벽암 대사비>가 있다.

이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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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廷龜(1564∼1635)

조선의 문신. 자는 성징, 호는 월사, 본관은 연안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에 들어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모시고 피란하였다가, 그 곳에서 명나라 송응창의 요청으로 경서(經書)를 강의하여 학자로서 존경을 받았다. 그 후에도 자주 중국 사신들을 접대하며 말벗이 되었다. 그가 명에 갔을 때, 그곳 문인들의 요청으로 100여 장의 기행문을 모아 <조선 기행록>이란 책을 만들었다. 1624년 이 괄의 난 때 인조를 공주로 모시었으며, 1627년 정묘호란 때 왕을 강화로 모시었고, 화의하자는 의견에 반대하였다. 조선 중기 4대 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저서로 <월사집> <서연강의> <대학강의> 등이 있다.

이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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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廷立(1556∼1595)

조선의 문신. 자는 자정, 호는 계은, 본관은 광주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제학 등을 지냈다. 이 이의 추천으로 이덕형·이항복과 함께 경연에서 <통감강목>을 강의하여 '3학사'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그 후 병조참판·한성부 좌윤·대사성 등을 지냈다. 죽은 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계은집>이 있다.

이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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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濟馬(1837∼1900)

조선의 한의학자. 자는 무평, 호는 동무, 본관은 전주이다. 함남 함흥에서 출생하였으며, 1892년 진해 현감이 되었다. 경사 백가·의학에 정통하였으며, <주역>을 깊이 연구하여 그때까지의 의학이 비과학적임을 알아낸 후, 나름대로 새로운 학설을 내세웠다. 그리하여, 태극설인 태양·소양·태음·소음 4상을 사람의 몸에 적용하여 사람의 체질을 4가지로 나누었으며, 그에 따라 치료 방법을 달리하는 '사상 의학설'을 내놓았다. 저서로 <동의 수세보원> <격치고> 등이 있다.

이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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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齊賢(1287∼1367)

고려의 성리학자. 자는 중사, 호는 익재, 본관은 경주이다. 충렬왕 때 성균시에 장원급제하고 예문 춘추관에 들어갔다. 1314년 충숙왕 때 백이정의 문하에서 정주학을 공부하였다. 그 해 원에 가 있던 충선왕이 만권당을 세우고 그를 부르자, 베이징에 가서 원의 학자들과 함께 고전을 연구하였다. 충선왕이 모함을 받아 원의 조정에 의해 유배되자 잘못됨을 밝혀 풀려나오게 하였으며, 그 후에도 충숙왕이 모함을 받아 두 차례나 원에 잡혀갔을 때에도 원의 조정에 글을 올렸다. 만년에는 벼슬에서 물러났으나 왕명을 받고 실록을 편찬하였다. 그가 쓴 <익재난고>란 책에 17수의 고려가요를 한시로 번역하여 실은 것이 있는데, 이는 오늘날 고려가요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저서로 <익재집> <역옹패설> <효행록> 등이 있다.

이조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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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兆年(1269∼1343)

고려의 문신. 자는 원로, 호는 매운당, 본관은 성주이다. 충렬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306년 비서랑으로 왕을 모시고 원에 갔을 때 왕유소·송방영 등의 모함으로 충렬왕과 왕자(충선왕)의 사이가 나빠졌다. 이때 그는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았으나 화를 입고 유배되었다. 그 후 유배에서 풀려나 13년간 고향에 있다가, 1340년 충혜왕 때 예문관 대제학이 되어 성산군에 봉해졌다. 그는 시에 뛰어났으며 시조 한 수가 전해지고 있다. 공민왕 때 성산후에 추증되었고, 충혜왕의 사당에 배향되었다.

이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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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存吾(1341∼1371)

고려의 문신. 자는 순경, 호는 석탄, 본관은 경주이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한으로 있을 때, 정몽주·정도전 등과 학문에 관해서 토론하였다. 1366년 벼슬이 정언에 이르렀다. 후에 신 돈을 쫓아내라는 간언을 하다가 공민왕의 미움을 받아 공주에서 은둔생활을 하던 중 울분으로 병을 얻어 죽었다. 죽은 후, 뒤늦게 왕은 그의 충성심을 알고 성균관 대사성에 추증하였다. 저서로 <석탄집>이 있다.

이종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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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從茂(1360∼1425)

조선의 무신. 본관은 장수이며 어려서부터 말타기·활쏘기에 능하였다. 1381년 우왕 때 14세의 나이로 아버지를 따라 강원도로 쳐들어온 왜군을 물리친 공으로 정용호군이 되었다. 1397년 옹진에서 만호의 벼슬에 재직중 왜군이 다시 쳐들어와 성을 포위하자, 이에 끝까지 싸워 적을 물리친 공으로 첨절제사가 되었다. 1419년 삼군 도체찰사가 되어 군함 227척을 거느리고 쓰시마 섬을 정복하였다. 1423년 사은사로 명에 다녀왔다.

이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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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宗城(1692∼1759)

조선의 문신. 자는 자고, 호는 오천, 본관은 경주이다. 이항복의 5세손이며 좌의정 이태좌의 아들이다. 숙종 때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727년 영조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이듬해에 경상도 암행어사가 되어 백성들을 잘 보살폈다. 그 후 이조판서·형조판서·대사헌·좌의정·영의정 등을 지냈다. 그는 성리학에도 밝았으며 글씨에도 뛰어났는데, 재직중 사도 세자(장헌 세자)를 한마음으로 잘 보살펴 그가 살아 있는 동안은 적당들이 간계를 부리지 못했다고 한다. 저서로 <오천집>이 있다.

이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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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鍾一(1858∼1925)

독립 운동가.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 호는 옥파, 본관은 성주이며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는 4서 3경을 공부하였으며, 1898년 <제국신문> 사장이 되어 10여 년간 민족의 자주 정신을 일깨우기에 노력하였다. 그 후 국문연구회 회장이 되었으며, 천도교에 들어가 천도교 월보 과장·보성 인쇄소 사장 등을 지냈다. 3·1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였다. 이 사건으로 3년 간 감옥살이를 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이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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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鍾勳(1856∼1935)

독립 운동가. 3·1운동 때 33인 중의 한 사람. 호는 정암이며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는 한문을 공부하고 25세 때 천도교에 들어갔다. 1894년 동학혁명 때 많은 활약을 하여 천도교 장로가 되었다. 3·1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가 붙잡혀, 2년간 감옥살이를 하였다. 그 후에도 독립운동에 헌신하였으며, 1922년 천도교를 중심으로 고려 혁명 위원회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에 큰 공을 세웠다. 만주로 건너가 활약하다가 병으로 죽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이 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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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埈(1560∼1635) 조선의 문신·의병장. 자는 숙평, 호는 창석, 본관은 홍양이다. 유성룡에게 학문을 배우고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 정자가 되었다. 이듬해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적과 싸운 공으로 형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경상도 도사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중국 역대 왕들의 업적과 신하들의 올바른 충성을 엮은 <중흥귀감>을 만들어 왕에게 바쳤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다시 의병을 모집하였으며 수만 섬의 군량을 모은 공으로 부제학이 되었다. 저서로 <창석문집>이 있다.

이 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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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儁(1859∼1907) 조선 말기의 순국열사. 호는 일성, 본관은 전주이며 함남 북청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성격이 곧고 늘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으며, 어지러운 나라를 걱정하였다.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 대학 법과를 졸업한 뒤 귀국하여 한성재판소 검사가 되었다. 1896년 서재필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했으며, 초대 평의장이 되어 <독립신문>을 발행하는 등 일본에 항거하는 독립투쟁을 계속해 나갔다. 이어 친일 단체인 '일진회'에 맞서 '공진회'를 조직하여 친일파를 규탄하다가 유배되기도 하였다. 1907년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이상설·이위종 등과 함께 일본의 침략 행위를 호소하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로 갔다. 그는 만국평화회의 개최일인 6월 5일 의장을 찾아가 고종의 친서와 신임장을 전했으나, 일본측 대표 고무라의 방해로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고 퇴장당하게 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순국하였다. 그동안 헤이그에 묻혀 있던 유해는 1963년 서울 수유리 묘지로 이장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이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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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埈慶(1499∼1572)

조선의 문신. 자는 원길, 호는 동고, 본관은 광주이다. 1504년 연산군 때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형 윤경과 함께 괴산으로 유배되었으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왔다.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부수찬이 되었으나, 기묘사화 때 갇힌 죄없는 사람들을 석방할 것을 주장하다가 김안로의 미움을 받고 쫓겨났다. 1555년 호남에 왜구들이 쳐들어오자, 전라도 도순찰사가 되어 이를 격퇴시킨 공으로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그 후 나이가 많아 벼슬에서 물러났으나, 선조에게 정몽주의 후손을 벼슬에 등용시킬 것을 건의하였으며, 홍수와 흉년이 들었을 때에는 세금을 덜게 할 것을 부탁하여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이중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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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仲燮(1916∼1956)

화가. 호는 대향이며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도쿄 분카 학원에 재학중, 1937년 일본 자유 미협전에 출품하여 태양상을 받았다. 1939년 '자유 미술 협회'의 회우가 되었고, 1945년 귀국하여 일본 여자 이남덕과 결혼하고 원산 사범학교 교사를 지냈다. 6·25전쟁 때 월남하여 부산·제주·통영 등지를 전전하며 담배갑 은종이에 그림을 많이 그렸다. 그 후 생활고로 시달리던 부인이 두 아들과 함께 일본으로 가자, 부두 노동을 하면서 지내다가 환도와 함께 상경하였다. 1955년 미도파 화랑에서 단 한 번의 개인전을 가졌다. 이듬해 간장염으로 적십자 병원에서 죽었다. 그의 작풍은 야수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향토적이고 개성적인 것으로서 우리 나라에 서구 근대화의 화풍을 도입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작품으로 뉴욕 현대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소>와 홍익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는 <흰소> 등이 있다.

이중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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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重煥(1690∼?)

조선 영조 때의 실학자. 자는 휘조, 호는 청담, 본관은 여주이다.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좌랑을 지냈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목호령의 일당과 함께 이듬해 절도로 유배되었다가, 1727년 풀려나왔다. 그 후 30년 간을 전국을 돌아다니며 지리·사회·경제 등을 연구하였다. 성호 이 익의 학풍을 계승하여 인문 지리학의 선구자로 활약하였다. 저서로 <택리지> 등이 있다.

이지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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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之蘭(1331∼1402)

조선의 개국공신. 본성은 퉁이며 이름은 쿠란투란티무르이다. 여진족의 천호(千戶)인 아라부카의 아들로, 공민왕 때 부하들을 이끌고 귀화하였다. 북청에 있다가 이성계의 휘하로 들어가 이씨 성을 받았다. 1392년 공양왕 때 지문하부사 판도평의사사사(使司事)가 되었다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개국공신이 되었다. 이듬해 경상도 절제사가 되어 왜적을 막는 데 힘썼으며, 1398년 명을 도와 건주위 정벌에 공을 세워 청해군에 피봉되었다. 그 후 이성계가 은퇴하자 이성계를 시종하는 일을 맡았다. 그는 지난날 싸움터에서 많은 사람들을 죽인 것을 속죄하기 위해 절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태조의 사당에 함께 모셔졌다.

이지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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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芝蕃(?∼1575)

조선 명종 때의 학자. 자는 형백, 호는 성암, 본관은 한산이다. 이지함의 형이며 부모에게 남달리 효성이 지극하였다. 그는 학문이 뛰어났으며 천문과 지리에도 밝았다. 명종 때 장례원사평이 되었으나, 당시 정권을 잡고 있었던 윤원형이 횡포를 부리자, 벼슬에서 물러나 단양의 귀담에다 집을 짓고 정신을 수양하면서 지냈다. 그는 소를 타고 강가의 경치를 즐기는가 하면, 귀담 언덕의 양 끝에다 칡덩굴로 줄을 매어놓고 날아가는 학 모양을 매달아 그 위에 올라타고 왕래하니, 사람들이 그를 신선이라 하였다. 그 후 선조 때 청풍 군수를 지냈으며, 아들 이산해는 영의정에 이르렀다.

이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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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址鎔(1870∼?)

조선 말기의 매국노. 자는 경천, 호는 향운, 본관은 전주이다.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황해도·경상도 관찰사를 지내고 이듬해 1887년 일본에 다녀왔다. 1905년 을사조약에 서명하여 백성들의 규탄을 받고 집이 불타 버렸다. 1910년 경술국치 때 일본 정부에게 백작의 칭호를 받았으며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을사 5적'의 한 사람이다.

이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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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7∼1578)

조선의 학자. 자는 형중, 호는 토정, 본관은 한산이다. 목은 이 색의 후손이며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형 이지번에게 배운 후 서경덕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선조 때 뛰어난 행실로 벼슬에 올라 포천 현감을 거쳐 아산 현감을 지냈다. 재물에 욕심이 없어 평생 가난한 생활을 하였고, 의약·복서·천문·지리·음양 등에 통달하였으며 괴상한 행동과 예언 등의 일화가 많다. 이 이와 친하여 성리학을 배우라는 권고를 받았으나 욕심이 많아 배울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고 한다. <토정비결>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숙종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이 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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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稷(1362∼1431)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자는 우정, 호는 형재, 본관은 성주이다. 이인민의 아들이고, 이조년의 증손으로, 우왕 때 16세의 어린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경순부 주부·예문관 제학 등을 지냈다. 1392년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는 데 공을 세워 성산 부원군에 봉해졌다. 1403년 태종 때 왕명을 받고 주자소를 설치하여 동활자인 계미자를 만들었다. 그 후 이조판서를 거쳐 좌의정에까지 올랐다.

이진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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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眞燮(1922∼1983)

방송극 작가·저술가.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문리대 사회학과를 수료하고, 합동통신·서울 중앙방송국·서울신문·세계통신 등에서 활약하였다. 1955년 경향신문사 조사부장·문화부장 등을 역임하였고, 1957년 안양 촬영소 전속 작가로 활약하였다. 1962년 다시 경향신문사 부국장 겸 기획위원이 되었다. 1965년 대한 공론사 편집위원을 역임하였고, 1973년 이후 KBS 심의위원으로 근무하였다. 1958년 연속 방송극 <장미빛 인생>을 써서 극작가로 등장하였고, 이어 <삭풍의 노래>, 뮤지컬 <사랑의 도표> <8월의 노래> <10월의 노래> 등을 발표하여 주목받았다.

이징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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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澄玉(?∼1453)

조선 초기의 무신. 본관은 양산이고 6진(六鎭) 설치 때 공이 컸으며, 김종서의 뒤를 이어 함길도 도절제사가 되었다. 1453년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잡은 수양 대군이 김종서의 심복이라 하여 파직시키자, 이에 분개하여 난을 일으켰다. 그는 야인들의 후원을 얻어 스스로를 대금 황제라 칭하고 군사를 이끌고 남으로 내려갔으나, 함경도 종성에서 종성 판관 정 종 등의 습격을 받고 아들 셋과 함께 살해되었다. 그가 일으킨 '이징옥의 난'은 조선 초기 최초의 반란으로 후에 '이시애의 난'에 영향을 미쳤다.

이차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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異次頓(506∼527)

신라의 불교 순교자. 성은 박, 일명 거차돈으로 습보 갈문왕의 아들이다. 아도가 신라에 처음으로 불교를 전파하려 할 때, 모든 신하들이 이를 반대하였으나 오직 이차돈만이 불교의 공인을 적극 주장하여, 당시 불교에 관심이 있는 법흥왕으로부터 절 짓는 일을 허락받았다. 그런데 절을 짓기 시작한 그 해부터 가뭄과 장마가 겹쳤으며, 질병이 돌기 시작하여 많은 백성들이 죽었다. 그러자 불교를 반대하던 신하들이 이차돈 때문이라고 왕을 충동하여 처형하게 하였다. 그는 죽을 때 \"불법에 신이 있다면 내가 죽은 뒤 반드시 이변이 있을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는데, 그의 목을 베니 피가 흰 젖빛으로 변하여 솟구쳤다. 이에 모두 놀라고 감동하여 528년 드디어 불교를 공인하기에 이르렀다. 전설에는 그가 죽을 때 머리가 날아가 떨어진 곳이 경주 북쪽에 있는 금강산이며, 그곳에 817년 헌덕왕 때 승려 혜륭이 무덤을 만들고 비를 세웠다고 한다.

이 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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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5∼1451)

조선의 과학자·무신. 호는 불곡이며 본관은 예안이다. 태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충청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공조참판이 되었다. 1420년 세종의 명으로 '경자자'라는 새로운 활자를 만들었으며, 1434년 '갑인자'를 만들어 인쇄 발달에 이바지하였다. 그 후 평안도 도절제사로서 여진족을 정벌하고 4군 설치를 건의하여 실현케 하였다. 호조판서로서 오랜 연구 끝에 천문학 기구인 대간의·소간의·혼의·앙부 일귀·자격루 등을 만들었고, 그 밖에 화포를 만드는 등 과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 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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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詹(1345∼1405)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장가. 자는 중숙, 호는 쌍매당, 본관은 홍주이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 검열을 지냈다. 1375년 권력을 남용하는 이인임 등을 탄핵하여 10년간 유배되었다. 그 후 1391년 공양왕 때 다시 벼슬에 올랐으나, 김진양 사건에 관련되어 다시 홍성으로 유배되었다. 조선 건국 후 1398년 태조 때 이조판서가 되었으며, 1402년 하 윤과 함께 <삼국사략>을 편찬하였으며, 뛰어난 문장력으로 <저생전>이라는 소설을 짓기도 하였다.

이청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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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淸潭(1902∼1971)

승려. 경남 진주에서 출생하였으며 진주 공립 농업학교를 졸업하였다. 1927년 일본으로 건너가 송운사의 아키모토에게서 불도를 닦아 득도하였다. 이듬해 귀국하여 개운사 불교전문강원의 대교과를 졸업하였다. 1956년 대한 불교 조계종회 의장·1957년 해인사 주지·1962년 도선사 주지·1968년 조계종 총무원장 등을 지내면서 우리나라 불교정화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971년 입적하였고 종단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이청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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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淸俊(1939- )

소설가. 전남 장흥 출생. 1966년 서울대학교 독문과 졸업. 1965년 <사상계> 신인작품 모집에 단편소설 <퇴원(退院)>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이후 단편 <임부(姙婦)> <줄> <무서운 토요일> <굴레> <이어도> 등을 발표, 신인으로서의 작가적 지반을 확고히 하였다. 그의 작품 경향은 <줄> 같은 작품의 계열에서 보이듯이 줄광대의 표현보다는 그 이면, 즉 수련과정의 비정함이나 단호함이 파헤쳐지고 있다. 1986-87년 한양대 국문과 강의를 했고, 주요 작품으로 <별을 보여드립니다> <소문의 벽> <조율사(調律師)> <이어도> <잔인한 도시> 등을 꼽을 수 있으며, 창작집으로 <별을 보여드립니다> <예언자> <남도사람> <살아 있는 늪> <소문의 벽> <시간의 문> 등과 <흐르지 않는 강> <당신들의 천국> 등의 중·장편집을 간행했다. 동인문학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창작문학상, 이상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이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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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兌榮(1914∼1998)

여류 변호사. 평북 운산에서 태어나 1949년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후 동 대학원을 수료하였다. 그 후 미국 남감리교 대학 법과대학원을 수료하고 1952년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1954년 변호사를 개업하였다. 1959년 국제 여변호사 협회 부회장·이화여대 법정 대학장·가정 법률 상담소장 등을 지내고 가정 법원 조정위원으로 있었다. 1971년 신민당에 입당하여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다. 같은 해 '법을 통한 세계 평화 센터'로부터 법을 통한 세계 평화상을 받았다. 저서로는 <한국 이혼 제도 연구> <법률 상담 실기> 등이 있다.

이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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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弼柱(1869∼1932)

독립 운동가·3·1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려서는 한문을 공부하였다. 20세 때 구한국군에 들어가 8년 동안 장교로 근무하였다. 그 후 기독교 청년회에 들어가, 초대 체육 교사로 있으면서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다. 미신 타파와 자립정신을 불어넣고 신생활 운동에 앞장섰으며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여 2년간 감옥살이를 하였다. 그 후 유치원을 비롯하여 국민학교·야간 부녀학교 등을 운영하였으며, 신사 참배에 항거하다가 병으로 죽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이하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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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河潤(1906∼1974)

시인·영문학자. 호는 연포로 강원도 이천에서 출생하였으며, 일본 호세이 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경성여자미술학교 교사가 되었다. 1930년 박용철과 <시문학> <문예월간>을 주재하면서 해외문학 소개와 함께 서정시를 발표하였다. <중외일보> <동아일보> 기자를 거쳐 동국대학교·덕성여자대학교·서울대학교 교수 등을 지냈으며 국제 펜클럽 대회에 수차 참석하였다. 시집으로 <물레방아>와 번역 시집 <실향의 화원> <프랑스 시선> <영국·아일랜드 시선> 등이 있다.

이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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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 대원군

이한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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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漢福(1897∼1940)

서화가. 호는 수재·무호이며, 본관은 전의이다. 일찍이 조소림·안심전의 문하에서 서화를 배웠으며, 그림은 일본 도쿄 미술학교 동양화과를 졸업하였다. 그는 그림뿐 아니라 글씨도 잘 썼는데, 서도는 오창석의 전서를 본받았으며, 특히 화조(花鳥)를 잘 그렸고 서화 감식에도 능하였다. 작품으로 <산수도> <비파란도> <절지도> 등이 있다.

이한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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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漢應(1874∼1905)

조선 말기의 외교관·순국 열사. 경기도 용인에서 출생하였으며, 18세에 관립 영어학교를 마치고 26세에 영어학교 교관이 되었다. 1901년 영국·벨기에 공사관의 3등 참사관으로 임명되어 영국 런던으로 갔다. 이듬해 영·일 동맹이 체결되자 우리 공사에 대한 영국의 태도가 불친절해졌고,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일본에게 빼앗겨 부득이 공사관을 철수하게 되자, 귀국하기를 단념하고 그곳에서 음독 자결하였다. 이 사실이 본국에 알려지자, 뒤이어 민영환·조병세 등도 순국하는 등 동포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이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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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漢喆(1808∼?)

조선 말기의 화가. 자는 자상, 호는 희원, 본관은 안산이다. 운재 이의양의 아들로 도화서의 화원이었고 벼슬은 군수를 지냈다. 산수화를 비롯하여 꽃·새·초상화에 뛰어난 재주를 발휘하였다. 일본의 세키노는 그의 산수·인물의 필치를 격찬한 바 있다. 작품으로 <추경독서도> <정포은 초상> <소년행마도> <방화수유도> 등이 있다.

이 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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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恒(1499∼1576)

조선의 학자. 자는 항지, 호는 일재, 본관은 성주이다. 일찍이 무과에 뜻을 두어 활쏘기·말타기를 잘 하였으나 30세에 이르러 학문을 시작하였다. 그는 태인에서 어머니와 농사를 지으며 성리학 연구에 힘써 '이기일원론'을 발전시켜 대학자가 되었다. 1566년 명종 때 나라에서 학문이 뛰어난 선비를 뽑을 때 수석으로 뽑혀 임천 군수가 되었다. 그 후 장악원정을 지내다가 병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태인에서 죽었다. 죽은 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이항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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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恒寧(1915∼

)

법학자·수필가. 충남 아산에서 출생하였으며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였다. 1946년 양산중학교 교장을 거쳐 1954년 고려대학교 교수·고려대학교 법과 대학장이 되었다. 이때 단편소설 <그믐 밤>과 장편소설 <교육가족>을 발표하였다. 1966년 변호사업을 개업하였으며 학술원 회원·펜클럽 중앙위원·경향신문 논설위원 등을 거쳐, 1972년 홍익대학교 총장이 되었다. 1987년 학술원 원로회원이 되었다. 1973년 국민 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저서로 <법철학 개론> <민법학 개론>이 있으며 소설 <청산곡>과 수필집 <객설론> 등이 있다.

이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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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恒老(1792∼1868)

조선의 학자. 자는 이술, 호는 화서, 본관은 벽진이다. 3세 때 <천자문>을 떼고, 6세 때 <십팔사략>을 배웠다고 한다. 1840년 헌종 때 경사(經史)에 밝은 선비로 천거되어 휘경원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고향 벽계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1864년 고종 때 조두순의 추천으로 장원서 별제·전라도 도사를 거쳐 공조참판에 이르렀다. 그는 특히 성리학에 밝았으며, 저서로 <화동역사 합편강목> 60권과 <벽계아언> 12권, <주자대전 잡의집보> 등이 있다.

이항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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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恒福(1556∼1618)

조선의 문신. 자는 자상, 호는 백사·필운·동강, 본관은 경주이다. 고려의 명상 이제현의 후손이며 참찬 이몽량의 아들이다. 어려서는 악동으로 골목 대장 노릇을 하였으나, 어머니의 책망을 듣고 학문에 힘썼다. 16세에 어머니가 죽은 뒤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이 더욱 깊어져 당대에 명성을 떨쳤다. 소년시절에 한음 이덕형과 재치 있는 장난을 잘하여 '오성과 한음'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참의로 있을 당시, 전곡의 출납에 밝았으므로 판서 윤두수에게 칭찬을 받았다. 정여립의 모반 사건을 다스린 공으로 평난 공신의 호를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도승지가 되어 왕을 모시고 의주까지 무사히 피란을 갔는데, 그 공으로 피란 도중 개성에서 오성군에 봉해졌다. 그 후 5번이나 병조판서가 되어 활약했으며, 왕의 신임이 두터워져 1602년 오성 부원군에 봉해졌으나, 정인홍 등이 성 혼을 탄핵하자, 그를 변호하다가 화를 입고 벼슬에서 물러났다. 당시는 당파 싸움이 심하였는데 광해군이 인목 대비를 폐하려 하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되었다. 이때 지은 시조를 광해군이 읽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는 당파 싸움에 초연하였으므로 늘 혼자 외롭고 의롭게 살았으며, 유배된 지 5개월 만에 죽었다. 죽은 후 벼슬이 다시 내려졌으며 많은 백성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그의 제자가 쓴 <북천일록>에는 그의 유배지 생활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저서로 <백사집> <주소계의> <사례훈몽> 등이 있다.

이해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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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海浪(1916∼1989)

연극 연출가. 서울에서 태어나, 1940년 니혼대 예술과를 나와 연극계에 투신하여 한국 연극의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 1949년 중앙 국립 극단장에 취임하고, 1954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1959년 동국대 연극과 부교수로 출강하고, 1963년 예술원상을 수상하였다. 1967년 예총 회장, 1971년 동국대 연극과 교수, 같은 해 8대 국회의원(전국 민주공화당)에 당선되었다. 연출 작품은 <밤으로의 긴 여로> <햄릿> <오셀로> 등이 있다.

이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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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海朝(1869∼1927)

신소설 작가. 호는 동농·열재이며 필명은 우산거사이다.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하였으며 신소설 창시자로서 <자유종>을 비롯해서 30편에 가까운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등에 이름을 밝히지 않고 많은 신소설을 발표하였으며, 베르느의 <철세계> 등을 번역하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고대 소설을 신소설의 형식으로 고쳐 <춘향전>을 <옥중화>로, <심청전>을 <강상련>으로, <별주부전>을 <토의 간> 등으로 고쳐 썼다. 대표작으로 <월하가인> <탄금대> <봉선화> 등이 있다.

이헌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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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軒求(1905∼1983)

문학 평론가. 호는 소천, 함북 명천에서 출생하였으며 일본 와세다 대학 불문과를 졸업하였다. '해외문학 연구회' '극예술 연구회' 등 동인으로 활약하였다. 1932년 <조선일보>를 통해 문단에 등장하였으며 주로 <해외문학>을 통하여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 후 만주일보 부사장·공보처 차장·이화여자대학교 문리대 학장 등을 지냈으며, 언론계와 교육계에서 많은 활약을 하였다. 평론으로 <조선 문학은 어디로> 등이 있으며, 저서로 <문화와 자유> <모색의 도정> 등이 있다.

이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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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賢輔(1467∼1555)

조선의 문신. 자는 비중, 호는 농암, 본관은 영천이다.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을 거쳐 정언으로 있을 때, 어지러운 정치를 논하다가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 안동으로 유배되었다. 중종반정으로 다시 등용되어 호조참판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특히 문장에 뛰어나 자연을 노래한 시조가 많이 있는데, 10장으로 전하던 <어부가>를 그가 5장으로 고쳐 지은 것이 <청구영언>에 실려 있다. <효빈가> <농악가> 등이 그의 저서인 <농암문집>에 수록되어 있다.

이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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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鎬雨(1912∼1970)

시조 시인. 호는 이호우(爾豪雨)이며, 경북 청도에서 출생하였다. 1940년 <문장>지에 시조 <달밤>이 추천되어 문단에 등장하였다. 이후 주로 대구에서 기거하면서 신문사에 몸을 담고 지방 문화 창달과 후진 양성에 힘썼다. 1955년 <이호우 시집>을 간행하고 제1회 경북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그 후 누이동생 이영도와 함께 발간한 오누이 시조집 <비가 오고 바람이 붑니다> 중의 1권인 <휴화산>을 발간하였다. 그는 한국의 옛 시조의 제한된 시조 형식을 고수하면서 현대적인 느낌이나 생활의 정서를 담아 새로운 시조를 탄생시켜, 시조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대표작으로 <개화> <별> <바위 앞에서> 등이 있다.

이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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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浩哲(1932- )

소설가. 함남 원산 출생. 원산고 졸업. 1950년 월남한 이후 1955년 단편 <탈향>이 <문학예술>지에 추천됨으로써 문단에 등장했고, 대표적인 단편에 <나상> <핏자욱> <탈각(脫殼)> <파열구> <판문점> <닳아지는 살들> <타인의 땅> <부시장(副市長)> <부임지로 안가다> <고여 있는 바닥> 등이 있다. 꾸준한 작품 세계의 발전을 보여주어 1961년 <판문점>으로 현대문학상 신인상을, 1962년 <닳아지는 살들>로 동인문학상을 받았다. 장편에 <60년대의 배당(配當)> <서울은 만원이다> 등이 있고, 단편집에 <이단자>가 있다. 현재 소설가협회 공동대표와 방송위원으로 있다.

이 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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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廓(1590∼1665)

조선의 무신. 자는 여랑, 본관은 전주이다. 3세 때 임진왜란으로 아버지를 여의었고, 장성하여 키가 8척이나 되었으며 힘이 장사였다. 광해군 때 이항복의 권유로 무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그 후 선전관을 거쳐 수성 도찰방이 되었다. 1623년 이 귀 등과 함께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성공시킴으로써 평산 부사가 되었다. 이 해 부총관으로 금에 갔다가, 조선을 속국으로 취급한 금의 국서를 받아온 죄로 선천에 유배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들어가 항전하였으며, 화의가 성립된 후 총관·충청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삼도 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죽은 후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이 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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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滉(1501∼1570)

조선의 대학자·문신. 자는 경호, 호는 퇴계, 시호는 문순, 본관은 진보이다. 경북 안동군 도산면에서 출생하였는데 생후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숙부에게 양육되었다.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정자·박사·호조좌랑·홍문관 수찬 등을 지냈다. 그 후 승진하여 성균관 사성이 되었으나 고향에 돌아와 학문을 닦았다. 그러나 다시 조정에서 불러 홍문관 교리를 지내다가, 인종 때 전한이 되었다.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한때 파직되었다가 복직하였으나, 고향에 내려가 양진암을 짓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일찍이 그가 서울에 있을 때, <주자전서>를 읽고 여기에 몰두하여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으므로 '동방의 주자'라는 칭호를 받았다. 1547년 응교를 거쳐 이듬해 풍기 군수로 있던 중 병을 얻어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 곳에 한서암을 짓고 독서와 사색의 생활을 즐겼다. 1558년 주자가 지은 <역학계몽>을 깊이 연구한 끝에 <계몽전의>를 지었으며 주자와 그 후계자들의 학문을 연구하여, 1560년 <송계원명 이학통록>이라는 책을 내놓았다. 그는 주자학의 대가였을 뿐 아니라, 시도 잘 지어 <도산 십이곡>과 같은 유명한 작품을 남겼다. 한서암에서 공부하고 있던 중, 1560년 다시 대사성·부제학 등의 벼슬에 올랐으며 왕위에 오른 어린 선조에게 왕으로서 지켜야 할 올바른 도리를 6조항으로 적은 '무진 육조소'를 올렸다. 또한, 유학의 근본 원리와 실천 방법을 모아 중요한 내용만을 적은 '성학십도'를 지어 왕에게 올리고는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내려갔다. 이 책은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최대의 힘을 기울여 지은 책이며, 고향에서 그는 베옷을 입고 지냈고 나들이할 때는 칡으로 만든 짚신과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 그는 또한 도산서원을 지어 제자들에게 글을 가르쳤으며, 자기 학설의 잘못된 점은 서슴지 않고 고쳤다. 그의 제자들 중에서 유성룡·기대승과 같은 뛰어난 유학자들이 나왔으며, 그가 지은 <주자서절요>를 비롯하여 많은 책들이 일본에서 번역·간행되어, 그곳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주자학을 만든 중국에서조차 이 황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문학·고증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그의 사상·학풍이 후세에 계승되어 영남학파를 형성, 유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저서로 <수정천명도설> <성학십도> <자성록> <논 사단칠정서> <도산 십이곡> <퇴계집> <사서석의> 등이 있다.

이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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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자는 송곡, 본관은 태안이다. 고려 우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조선 태조 때 병조정랑이 되었다. 변중량과 함께 정권과 병권의 겸임이 옳지 못하다고 주장하여 순천으로 유배되었다. 태종 때 승려 청준이 그린 <역대제왕혼일강리도>에 교정을 더하여 우리 나라 지도에다 일본을 첨부하여 새 지도 <팔도도>를 만들었다. 벼슬이 사간에 이르렀으며 시문에 뛰어났다.

이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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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孝石(1907∼1942)

소설가. 강원도 평창에서 출생하였으며 경성제국대학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예과 시절부터 교우 동인지인 <문우> <청량> 등에 습작 시 <동(冬)의 시장> <유월의 조(朝)> 등을 발표하였다. 1925년 <매일신보> 신춘문예에 시 <봄>이 당선되었으며, 1928년 <조선지광> 7월 호에 단편 소설 <도시와 유령>을 발표하여 문단에 등장하였다. 그 후 <북국통신> <노령근해> 등 경향적인 단편을 발표하여 유진오와 함께 동반 작가라는 평을 받았다. 1931년 조선 총독부 검열계에 근무하다가 친지들의 비난을 받아 한 달 만에 사퇴하고, 함북 경성에 내려가 농업학교 영어 교사가 되었다. 1933년 <조선문학> 창간호에 단편 <돈>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종래의 경향성을 버리고 <메밀꽃 필 무렵> <산> <여수> 등 자연에의 귀의와 서정성이 풍부한 작품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때가 효석 문학의 황금시대라 할 수 있다. 체호프·맨스필드·싱그·로렌스·켓셀 등 외국 작가로부터 영향을 받아, 진정한 서구적 현대성을 문학으로써 구상화하여 단편소설의 예술성과 기법면에 신경지를 개척하였다. 평양 대동공전의 교수로 있다가 1942년 36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광복 후 <효석전집> 3권이 출간되었다. 대표작으로 <화분> <거리의 목가> <황제> <성화> 등이 있다.

이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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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厚源(1598∼1660)

조선의 문신. 자는 사심, 호는 우재, 본관은 전주이다.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을 지냈다. 병자호란 때 화의를 반대하였고, 장악원에 보관되어 있던 <악학궤범>을 인쇄하여 여러 사고에 나누어 간직하게 하였다. 효종이 즉위하자, 북벌계획에 참가하여 전함 200여 척을 준비하였고, 그 후 우의정이 되어 송준길·송시열 등의 인재를 등용시켰다.

이흥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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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興烈(1909∼1980)

작곡가. 함남 원산에서 출생하였으며 일본 도요 음악학교를 졸업하였다. 초창기 현대 음악의 개척자로서 경성보육학교와 고려대학교 등에서 음악 교수로 있었다. 1963년 숙명여대 음대 교수 및 학장으로 예술원 회원이 되고 1969년 방송가요심사위원장을 거쳐 1970년 방송윤리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그가 작곡한 <바위 고개>는 널리 불리어지고 있으며, 저서로 <이흥렬 가곡집> <음악의 종합 연구>가 있고 가곡집으로 <너를 위하여> 등이 있다.

이희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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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熙昇(1897∼1989)

국어학자. 호는 일석이며 경기도 개풍에서 출생하였다. 1930년 경성제국대학 문학부 조선어 문학과를 졸업하였으며 '한글학회' 창립 이후 계속 이사직에 있으면서 일본 도쿄 제국대학 대학원에서 언어학을 연구하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되어 4년간 감옥살이를 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1952년 서울대 대학원 부원장으로 학술원 종신 회원이 되었고, 1957년 서울대학교 문리대학장, 1963년 동아일보사 사장·성균관 대학원장·학술원 부원장 등을 지냈다. 평생을 학문 연구에 이바지한 국어 국문학계의 원로이다. 저서로 <국어 대사전> <역대 조선 문학 정화> <한글 맞춤법 통일안 강의> 등이 있으며, 수필집 <벙어리 냉가슴>과 시집 <박꽃> 등이 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과 학술원 공로상을 받았다.

인목 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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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穆大妃(1584∼1632)

조선 선조의 계비. 성은 김씨이며 본관은 연안이다. 연흥 부원군 김제남의 딸로 선조의 유일한 적통(嫡統)인 영창 대군의 어머니이다. 1602년(선조 35)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존호 소성·정의·명렬 등을 각각 받았다.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북파인 정인홍 등에 의해 영창 대군과 김제남은 피살되고 인목 대비는 서궁에 유폐되었다. 1623년 이 귀 등에 의하여 인조반정이 이루어지자 대왕대비가 되어 인경궁 흠명정에 기거하다가 죽었다. 글씨에도 뛰어나 금강산 유점사에 인목 대비의 어필인 <보문경> 일부가 전한다.

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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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祖(1595∼1649)

조선 제16대 왕(재위 1623∼1649). 선조의 손자이며 선조 때 능양군에 봉해졌다. 1623년 김 유·이 귀 등 서인들이 광해군을 몰아내자 왕으로 추대되어 왕위에 올랐다. 이듬해 이 괄의 난이 일어나자, 공주로 피란갔다가 돌아왔다. 1627년 정묘호란을 당하여 강화도에 피란하였다가 형제국의 의를 맺고 화의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항거하다가 척화파·주화파와의 치열한 싸움 끝에 인조 자신이 삼전도(송파)에 나와 치욕적인 항복을 하고 군신의 의를 맺었다. 이어 소현 세자·봉림 대군의 두 왕자를 선양에 인질로 보내었으며, 청의 요구대로 삼전도에 <대청 황제 공덕비>까지 세웠다. 두 차례의 호란으로 인하여 나라가 어지러웠으나, 송시열·김 육 등의 뛰어난 학자들이 나와 조선 후기 성리학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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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宗(1109∼1146) 고려 제17대 왕(재위 1123∼1146). 예종의 맏아들이며, 1115년 태자로 책봉되었다. 예종이 죽은 뒤 나이가 어렸으나 이자겸의 옹립으로 왕위에 올랐다. 1126년 이자겸이 궐내에 침입하여 궁실에 불을 지르자, 척준경·최사전 등으로 하여금 이자겸을 잡아 유배시켰다. 또한 묘청의 서경 천도와 금 정벌론에 찬성하여 한때 실행하려 하였으나, 김부식 등의 반대로 중지하였다. 1135년 묘청이 반란을 일으키자, 김부식을 서경 정토대장으로 보내어 이듬해 평정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예능에 재질이 있어 음률과 서화에 능하였으며 김부식으로 하여금 <삼국사기>를 편찬케 하였다. 또한 국가 재정을 절약하여 환관을 줄이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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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宗(1515∼1545) 조선 제12대 왕(재위 1544∼1545). 중종의 맏아들로 장경 왕후의 소생이다. 1520년 세자로 책봉되고 1544년 즉위하여 이듬해 기묘사화로 없어진 현량과를 다시 설치하였다. 당시는 대윤(윤 임 일파)이 점차 득세하고자 하여 종파 싸움이 치열하였다.

인평 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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麟坪大君(1622∼1658)

조선 인조의 셋째 아들. 자는 용함, 호는 송계, 본관은 전주이다. 1636년 병자호란 뒤 청의 간섭이 심해지자, 외교관의 자격으로 청에 가서 많은 공을 세웠다. 그는 그림과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시조도 잘 지어 <청구영언>과 <해동가요>에 3수가 전한다. 저서로 <송계집> <연행록> <산행록> 등이 있다.

인현 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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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顯王后(1667∼1701)

조선 숙종의 계비. 여양 부원군 민유중의 딸로 1681년 왕비가 되었다. 1689년 장희빈의 소생인 왕자 균(후의 경종)의 책봉 문제로 기사환국이 일어나자 폐위 당하여 서인이 되었다. 이를 인현 왕후 폐위 사건이라고 한다. 1694년 갑술옥사가 일어나 장희빈이 몰락하자 복위되었다. 예의가 바르고 정숙했으며, 인현 왕후를 주인공으로 궁녀가 쓴 소설 <인현 왕후전>이 전한다.

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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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然(1206∼1289)

고려의 고승. 속성은 김씨이며 이름은 견명이다. 자는 회연·일연, 호는 무극·목암이며 시호는 보각, 탑호는 정조로 경북 경산에서 출생하였다. 9세에 해양 무량사에서 승려가 되어 여러 곳을 다니면서 불전을 연구하였다. 고종 때 승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계속 수도에 정진하였다. 1237년 삼중 대사가 되었으며 이어 45세 때 대선사에 올랐다. 그 무렵 몽고의 침입으로 대구 팔공산 부인사에 보관되어 있던 대장경이 불타 없어지자, 현종은 새로 만들게 하였으며 낙성회의 일을 일연에게 맡겼다. 일연은 운해사에서 대장경 낙성회를 열고 나라를 구하기 위한 기도회를 열었는데, 이 때 그의 교리 설명과 열성적인 기도에 많은 사람들이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 후 78세에 국사에 올랐으나, 물러나 고향으로 내려가 늙은 어머니를 모셨다. 그의 어머니가 죽은 후, 나라에서는 일연에게 경북 군위에다 인각사라는 절을 세워 주었다. 그는 이 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지내다가 84세로 죽었다. 그는 고승이며 대학자, 대문학가로서 1백여 권이나 되는 많은 책을 지었다. 그 중 <삼국유사>만 전해지고 있다. 이 책은 우리 민족의 고대 설화 문학을 한데 모아 만들었으며 신화·전설·민담 등이 모두 실려 있다. 저서로 <계승잡저> <중편조동오위> <대장수지록> 등이 있다.

임경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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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慶業(1594∼1646)

조선의 장군. 자는 영백, 호는 고송, 본관은 평택이다. 충주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용맹하여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았다. 광해군 때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624년 이 괄의 난이 일어나자 안현 싸움에서 공을 세워 1등 공신이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의주 부윤이 되어 청의 군사를 국경에서 막으려고 원병을 청했으나, 김자점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남한산성이 포위되기에 이르렀다. 1642년 청의 군사가 금주를 포위하자, 임경업은 명과 내통하여 청에 대항하고자 하였으나, 이 사실이 탄로되어 명으로 도피하였다. 그러나 청이 명의 난징을 점령하자 붙잡혔는데, 청에서는 부귀를 약속하면서 그를 달래었으나 끝까지 굴하지 않으므로 가상히 여겨 옥에 가두었다. 때마침 그가 심기원의 모반 사건에 관련되었다 하여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인조는 그의 무죄를 알고 석방하려 했으나 김자점의 모함으로 피살되고 말았다. 그는 명나라를 받드는 사상이 강한 장군이었으며, 그의 무용담을 소재로 한 소설 <임경업전>이 있다.

임꺽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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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巨正(?∼1562)

조선 중기의 의적. 임거정이라고도 하며, 양주의 백정으로 꾀가 많고 담대하였다. 당쟁으로 조정의 기강이 문란하고 사회의 질서가 어지러워지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을 모아 우두머리가 되었다. 1559년 명종 때부터 수년간 황해도·경기도 일대의 관청을 습격하고 창고를 털어 가난한 백성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장연·풍천 등지에서 정부군의 토벌을 받았으나, 백성들의 도움으로 무사하였다. 그 후 1562년, 황해도 토포사 남치근의 대규모 토벌 작전으로 월산에서 싸우다가 잡혀 사망하였다. 그에 대한 많은 이야기와 역사소설이 있으며 <명종실록>에는 임거질정이라 씌어 있다.

임권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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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權澤(1934- )

전남 장성 출생. 전남 광주 숭일고등학교 졸업. 1962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데뷔. 그 밖의 작품으로 <전쟁과 노인> <증언> <왕십리> <서편제> 등이 있다. 1974년 아시아영화제 감독상(<증인>), 1976년도 한국 연극영화예술상 감독상(<왕십리>) 등을 수상했으며 86년 제22회 시카고국제영화제에서 <길소뜸>으로 게츠 세계 평화메달상 수상. 제44회 베니스국제영화제와 제16회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 강수연이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 <아제아제 바라아제>로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임방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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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芳蔚(1904∼1961)

명창. 전남 광산 출생. 14세 때 <춘향가>를 배웠다. 그 후 유성준으로부터 <수궁가> <적벽가> 등을 배웠으며 천부적으로 타고난 아름다운 목소리와 노력으로 일가를 이루었다. 그는 방송에 출연하는 한편, 컬럼비아·빅타 레코드 회사의 전속으로 있으면서 <춘향전> <심청전> 등의 전집을 제작하였다. 그는 편곡을 비롯하여 작곡에도 재주가 있었으며, <호남가> <사별가>에 특히 뛰어났다. 1960년 국악상을 받았다.

임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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任士洪(?∼1506)

조선 연산군 때의 세도가. 본관은 풍천이고 좌찬성 임원준의 아들이다. 그의 아들 임광재는 예종의 딸 현숙 공주의 남편으로 풍천위가 되고, 숭재는 성종의 딸 휘숙 옹주에게 장가들어 풍원위가 되었다. 따라서 임사홍은 1498년 무오사화 이후 권세를 독점하고 있던 유자광과 어깨를 겨루었으며, 사재 감정·도승지 등을 지내고, 또 한문과 중국 말에 능하여 관압사·선위사 등으로 명에 다녀오고 승문원에게 중국어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벼슬에 올라 있는 동안 자주 대간의 탄핵을 받았으며 유자광 등과 같이 극형을 당하게 되었으나 왕의 특사로 귀양 정도로 그친 일이 수차례 있었다.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과 모의하여 옛 중신들의 제거를 꾀하여 연산군의 생모 윤비가 죽은 내막을 밀고하여 1504년 갑자사화를 일으키게 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 때 피살되었고, 반정 후 아버지 임원준도 처형되었다.

임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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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尙沃(1779∼1855)

조선의 무역 상인. 자는 경약, 호는 가포, 본관은 전주이다. 정조 때부터 상업에 종사하여, 1810년 순조 때에는 국경 지방에서 인삼의 무역권을 독점하였다. 이 때부터 천재적인 사업 수완을 발휘하여, 1821년 변무사의 수행원으로 청에 갔을 때, 베이징 상인들의 불매 동맹을 교묘한 방법으로 깨뜨리고 원가의 수십 배로 매각하는 등 막대한 재화를 벌었다. 그동안 기민 구제 등의 자선사업으로 천거를 받아 1832년 곽산 군수가 되고, 1834년 의주 수재민을 구제한 공으로 이듬해 구성 부사에 발탁되었으나 비변사의 반대로 물러났다. 이후 빈민 구제와 시와 술로 여생을 보냈다. 시로서도 이름이 높았으며, 저서로 <가포집> <숙중일기> 등이 있다.

임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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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聖九

신극 초창기의 연극인. 이인직의 뒤를 이어 1911년 극단 '혁신단'을 조직하였으며, 김도산·김소랑·박창한 등의 배우를 이끌고 최초의 지방 공연을 가졌다. 남자를 여역(女役)에 대신하였으며 <법지법> <육혈포 강도> 등의 신파극을 상연하는 등, 1921년 혁신단이 해산될 때까지 연극 운동에 전력하였다.

임성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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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聖男(1929-2002)

무용가. 서울 출생. 전주 사범학교 졸업. 니혼 음악학교를 거쳐 오랫동안 일본에서 무용생활을 하다 1951년 '도쿄청년발레단'을 창립, <백조의 호수>에 왕자역으로 주연했다. 1956년도에 귀국, '임성남발레단'을 창단하여 12회에 걸친 개인 발표회를 개최했고, 5·16 군사정변 이후 국립무용단 단장직을 맡은 후 국립무용단 정기 공연 제6회를 공연한 바 있다. <살자기 옵서예>에서 안무의 연출을 지도하여 절찬을 받았다. 1968년 미국무성 초청으로 도미, 2년동안 모던발레를 연구했고, 그 후 서울 예술고등학교 무용과 과장, 무용협회 부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주요작품으로는 <예불(禮佛)> <오줌싸개의 향연> 등이 있다.

임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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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衍(?∼1271)

고려 중기의 권신. 본관은 진주이며 몽고의 군사를 쳐서 이름을 떨쳤다. 낭장으로 김 준과 함께 최 의를 죽이고 정치를 왕실에 복귀시켜, 그 공으로 위사공신의 호를 받고 추밀원 부사가 되었다. 그 후 김 준을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 그는 안경공 창을 왕으로 내세웠다가 수개월 만에 몽고의 간섭으로 폐위시켰으며, 이에 몽고에서는 그의 죄를 물으려 불렀으나 가지 않고 아들만 보냈다. 다시 몽고에서 입조를 재촉하자 울분으로 병이 나 죽었다. 죽은 후 참지 정사에 추증되었다.

임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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任永信(1899∼1977)

교육가·정치가. 충남 금산에서 태어나 미국 사우스 캘리포니아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을 수료하였다. 1945년 국민당 여자 당수가 되고, 1948년 초대 상공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1949년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1950년 2대 민의원으로 UN 한국 대표가 되었다. 1961년 대한 여자 청년단장을 지냈다. 1957년 미국 미네소타 대학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1965년 중앙대 총장에 취임하였다. 동년 미국 롱 아일랜드 대학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대한 교육 연합회 회장을 10년간 역임하였다.

임예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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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禮煥(1865∼1949)

독립 운동가로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 호는 연암이며 평남 중화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한학을 배웠으며, 동학에 들어가 1894년 동학혁명에 참가하였다.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가 2년간 감옥살이를 하였다. 그 후에도 계속 민족운동에 노력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임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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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玉仁(1915- ) 소설가. 함북 길주 출생. 일본 나라여자고등사범학교 졸업. 1940년 <문장>에 <봉선화> <고영(孤影)> <후처기(後妻記)>로 추천을 받아 문단에 데뷔한 뒤 이어 <전처기(前妻記)> <산(産)> 등을 발표했고, 해방 후 가정여학교를 창설, 농촌여성 계몽운동에 투신했다. 월남 후 <부인신보> <부인경향> 편집장을 지내면서 단편 <수원(愁怨)> <풍선기(風船記)> <나그네> <낙과(落果)> 등을 발표했다. 그 후 <그리운 지대(地帶)> <월남전후> <일상의 모험> <힘의 서정> 등의 장편을 발표했으며, 창작집 <후처기>를 간행했다. 1957년 <월남전후>로 자유문학상을, 이후 예술원상, 여류문인상 등을 수상했다.

임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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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完

고려 인종 때의 명신. 본래 송나라 사람으로 예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부원외랑에 이르렀다. 이때에 인종이 서적소를 설치하자 김부식 등과 함께 고문이 되었다. 1135년 국자사업 지제고로 있을 때, 왕에게 묘청이 상하를 현혹시키고 서경에 태화궁을 세우려고 백성들을 괴롭히니 처형해야 한다고 극간하였다.

임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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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仁洙(1919∼1967)

아동문학가·시인. 경기도 김포에서 출생하였으며, 한국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944년 <봄바람>을 발표하여 문단에 등장하였으며, 동시와 동화를 계속 발표하였다. 그는 기독교적 선의의 바탕에서 허무의 극복을 시도하였다. 작품으로 동화 <눈이 큰 아이>와 시집 <주의 곁에서> 등이 있다.

임정 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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臨政太子

백제의 마지막 태자. 660년 백제가 망하자, 일본으로 건너가 오우치의 좌경 대부가 되었다. 지금의 규슈 후쿠오카 현에 도읍을 정하여 오우치노도조라 칭하고, 그 후예가 47대를 이어 내려갔다고 한다. 백제 제명왕의 셋째 아들로 '육신여래'를 기원하던 중 '법명여래'의 화신이라는 쇼토쿠 태자를 만나 다타라라는 성을 받고 살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임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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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悌(1549∼1587)

조선의 문신. 자는 자순, 호는 백호, 본관은 나주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정랑을 지냈으나, 선비들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다투는 것을 개탄하고 명산을 찾아다니면서 여생을 보냈다. 문장과 시에 뛰어난 천재였다. 우리나라가 중국의 속국과 같은 형태로 있는 것을 못마땅히 여겨 죽은 뒤 곡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한다. 저서로 <백호집> <사화가> 등이 있다.

임 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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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椿

고려 인종 때의 문신. 자는 기지, 서하 사람으로 예천 임씨의 시조이다. 여러 번 과거에 실패했고, 1170년 정중부의 난 때에 간신히 목숨을 건졌으며, 이규보·오세재 등과 함께 '강좌 7현'의 한 사람으로 시와 술로 세월을 보냈다. 한문과 당시(唐詩)에 뛰어났으며, 그의 시문은 <삼한시귀감>에 기록되어 있다. 저서로 설화집 <서하 선생전> <공유전> 등이 있다.

임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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臨海君(1574∼1609)

선조의 맏아들(서자). 이름은 진, 성품이 사나워서 세자에 책봉되지 못하고 아우인 광해군(서자)이 세자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함경도로 피란갔다가 가토에게 포로가 되었다 석방되었다. 1609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북파 이이첨·정인홍 등의 모함을 받아 영창 대군·김제남 등과 함께 역모죄로 몰려 살해되었다.

임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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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和(1908-1953)

시인·비평가·문학사가. 서울 출생. 보성고보를 중퇴하고 다다풍의 습작시기를 거쳐 1920년대부터 프로문학에 참가하여 문단 활동을 전개했다. 1931년 일본에서 귀국하여 카프의 서기장에 취임, 프로문학운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다. 1935년 카프 해산 이후에는 순문학 쪽으로 기울어져 시집 <현해탄>(1938), 비평집 <문학의 윤리>(1940), <조선문학사>를 집필했다. 또한 이 무렵부터 출판사 <학예사>를 경영하면서 영화에도 관계하고, 친일단체인 조선문인보국회에 가담하기도 했다. 광복 후 조선문학건설본부(朝鮮文學建設本部)를 만들어 서기장을 지내고 조선문학가동맹에 참가, 남로당 노선의 문학운동을 전개했다. 1947년 4월경 월북하여 북한에서 문화선정성부장, 조·소문화협회부위원장을 역임하고 6·25 때 종군하다가 1953년 8월 '미제의 스파이'라는 혐의로 사형당했다. 시집으로 <현해탄> 이외에 공동시화집 <카프 시인집> <찬가> <회상시집(回想詩集)>이 있으며, 그 밖에 평론 <조선신문학사론서설> <개설조선신문학사> <신문학상의 방법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