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인명사전/한 국 인 명/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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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자비왕[편집]

慈悲王(?-479)

신라의 제20대 왕(재위 458-479). 자비 마립간이라고도 한다. 눌지왕의 맏아들이다. 459년 쳐들어온 왜구의 군선 100여 척을 월성에서 격퇴하였으며, 463년 다시 삽량성에 침입한 왜구를 벌지·덕지 등을 시켜 격파하였다. 이어 그들의 침입에 대비하여 많은 성을 쌓았다. 474년 고구려가 백제를 침범하자 백제와 동맹을 맺고 군대를 보내 주었다.

자장[편집]

慈藏

신라 중기의 승려. 성은 김씨로 진골 출신이다. 부모를 일찍 여의자, 처자를 버리고 원녕사를 지어 도를 닦았다. 이때 선덕 여왕이 대보에 임명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636년 왕명으로 제자 승실 등 10여 명과 당의 오대산에 가서 불도를 닦고는, 643년 장경 1부와 불구를 가지고 돌아왔다. 분황사 주지로 있으면서 궁중과 황룡사에서 대승론·보살계본 등을 강론하였다. 그 후 대국통이 되어 승려의 규범과 승통의 일체를 주관하였다. 또한 황룡사 9층 탑의 창건을 건의하여 645년에 완성하였으며, 통도사와 금강계단을 세웠다. 전국 각처에 10여 개의 사탑을 세웠고, 중국의 제도를 본받아 신라에서는 처음으로 관복을 입게 하였다. 이어 650년 진덕 여왕 때 당의 연호 사용을 건의하여 실시하게 하였다. 만년에는 강릉군에 수다사를 짓고, 후에 태백산에 석남원(정암사)을 세워 그곳에서 죽었다. 저서로 <아미타경의기> <출관행법> <제경계소> 등이 있다.

장경세[편집]

張經世(1547-1615)

조선의 문신. 자는 겸선, 호는 사촌, 본관은 흥덕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부모를 모시기 위해 금구 군수를 자원하여 내려갔다. 그러나 재직중 실정의 책임으로 파면당했다. 일찍이 이 황의 <도산 십이곡>을 모방하여 충군 애국 성심을 읊은 <강호 연군가> 12곡을 지었다.

장기영[편집]

張基榮(1917-1977)

언론인·체육인·정치가. 호는 백상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선린상고를 졸업한 뒤 잠시 은행에도 근무한 적이 있으나, 1952년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언론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어 1954년 코리아 타임스·한국일보를 창간하여 발행인 겸 사장에 취임하였으며, 1958년 이후에는 한국 일간 신문 발행인 협회 이사장·서울경제신문 사장·부총리 겸 경제 기획원 장관·대한 체육회 명예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1971년 민주공화당 제1지구당 위원장, 1972년 남북 조절위원회 부위원장, 1973년 제9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같은 해 남북 조절위원회 서울측 공동 위원장 대리로 서울과 평양에서 개최된 수차의 본회담에 참석하였다. 국민 훈장 무궁화장·청조근정 훈장·1등 수교 훈장 등을 받았고 1970년 중화민국으로부터 일급 문화훈장 최고 체육장을 받았다.

장덕수[편집]

張德秀(1895-1947)

독립운동가·정치가. 호는 설산이며 황해도 재령에서 출생하였다. 1916년 일본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하고 상하이로 건너가 독립 운동에 투신하였다. 1918년 신익희와 함께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국내 애국지사들과 연락을 취하러 국내에 잠입했다가 검거되었다. 이듬해 여운형과 함께 일본을 방문하여 독립의 타당성을 역설하였다. 1920년 동아일보의 초대 주간이 되어 언론을 통한 민족정신 고취에 전력하였다. 1928년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였으며, 1936년 동아일보사 부사장을 지냈다. 광복 후 송진우·김병로 등과 한국 민주당을 창당하여 민주 국가 수립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좌익 분자인 종로서 경사 박광옥과 배희범에게 암살당하였다.

장덕조[편집]

張德祚(1914- )

여류 소설가. 경북 경산에서 출생하였으며,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후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중퇴하고 1934년 <개벽>지의 여기자로 입사하여 창작 활동에 전념하였다. 평화신문·영남일보 기자를 거쳐 대구 매일신문의 문화부장과 논설위원 등을 지냈다. 여류 문인 중 제일 먼저 장편소설과 역사소설을 집필하는 등 정력적인 다작의 작가이다. 1972년 초대 통일 주체 국민회의 대의원이 되었다. 주요 작품으로 <약혼> <처> <여자의 마음> <낙화암> 등이 있다.

장 만[편집]

張晩(1566-1629)

조선의 문신. 자는 호고, 호는 낙서, 본관은 인동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균관·승문원·예조좌랑 등을 지냈으며, 1599년 봉산군수가 되었다. 1622년 병조판서로 있을 때 광해군의 정치가 문란함을 보고 대책을 건의했으나, 오히려 광해군의 분노를 사게 되자 병을 핑계로 고향에 은둔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팔도 도원수로 등용되었으며, 이듬해 이 괄의 난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이를 진압한 공으로 1등 공신이 되었다. 1627년, 병조판서로 있을 때 정묘호란이 일어났으나 적을 막지 못한 죄로 부여로 유배되었다. 죽은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문무와 재략을 갖춘 무장이었으며 많은 부하를 통솔하는 힘을 갖고 있었다. 저서로 <낙서집>이 있다.

장 면[편집]

張勉(1899-1966)

정치가. 호는 운석, 본관은 인동이며 인천에서 출생하였다. 수원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하고, 1919년 YMCA 영어학교를 나온 후 미국에 건너가서 맨해튼 카톨릭 대학 문과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 천주교 평양교구에서 교회 일을 보다가, 1931년 서울 동성상업학교 교장이 되었다. 광복 후 정계에 들어가 민주의원 의원·과도 정부 입법 의원 등을 역임하였고, 1948년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 해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 총회 한국 수석 대표로 참가하여 한국의 국제적 지위를 승인받았다. 이어 대통령 특사로 교황청을 방문하였으며 미국 맨해튼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9년 초대 주미 대사로 부임했으며, 이듬해 영국 포덤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6·25전쟁 때는 주미 대사로서 유엔의 지원을 얻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1951년 국무총리가 되었다가 이듬해 사퇴하고 야당 지도자로서 자유당 독재 정권과의 투쟁을 위해 활약하였다. 1955년 신익희 등과 민주당을 조직하여 최고 위원이 되었으며 이듬해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1960년 조병옥과 러닝 메이트로 부통령에 입후보했다가 낙선되었으나,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자 제5대 민의원을 거쳐 제2공화국 국무총리로 선출되어 정권을 잡았다. 집권 후 국민의 자유를 최대한으로 보장하려는 정책이 오히려 사회의 혼란과 무질서를 초래하여, 5·16 군사정변으로 9개월 만에 실각하였다. 그 후 정치 정화법에 묶여 정치 활동을 금지당하고, 한때 2주당 사건으로 투옥되었으나, 석방된 후 종교 생활에 전념하다가 간염으로 죽었다. 저서로 번역 작품인 <교부들의 신앙>이 있다.

장보고[편집]

張保皐(?-846)

신라 말기의 장군. 궁복·궁파라고도 한다. 일찍이 당나라 서주에 건너가 무령군 소장에 올랐으나, 중국 해적들에게 잡혀와 노비가 된 신라인들을 보고 분개하여 벼슬을 버리고 귀국하였다. 해적들의 인신매매 행위를 막기 위해 왕의 허락을 얻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해로의 요충지인 청해(완도)에 진(鎭)을 설치하였다. 청해진 대사로 임명된 후 수병들을 훈련시켜 해적을 완전히 소탕하였다. 837년 희강왕 때 왕위 계승 다툼에서 밀려난 우징(후의 신무왕)이 청해진으로 오자, 그와 함께 839년 반란을 일으켜 민애왕을 죽이고 우징을 왕으로 즉위시켰다. 신무왕이 죽은 후 문성왕에 의해 진해 장군이 되어 840년 일본에 최초로 무역사절단을 파견하고 당에도 견당매물사를 보내어 삼각 무역을 실시하였다. 845년 딸을 왕비로 들여보내려 했으나, 군신들의 반대로 좌절되어 불만을 품고 있던 중, 이듬해 왕이 보낸 장군 염장의 거짓 항복에 속아 살해되었다.

장수왕[편집]

長壽王(394-491)

고구려의 제20대 왕(재위 413-491). 광개토왕의 아들이며, 408년 태자에 책봉되었다. 413년 즉위하여 중국의 진·송·위 등과 사신을 교환하여 국교를 맺었고, 427년 도읍을 평양으로 옮겨 남하정책에 착수하였다. 435년 위가 연을 멸망시키자 고구려에 피해 온 연의 왕 풍홍을 위의 요청으로 죽였다. 475년 승려 도림을 백제에 첩자로 보내어 국고와 백성의 힘을 소모시킨 후,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수도 한성을 빼앗았으며 개로왕을 죽여 선대의 원한을 풀었다. 480년 말갈과 함께 신라의 북변을 쳐 고명성 등 7성을 점령하였다. 당시 고구려의 영토는 점점 확장되어 남쪽은 아산만에서 죽령에 이르고, 서북쪽은 요하에서 만주의 대부분을 포함한 큰 나라를 건설하여 전성기를 이루었다. 또한 종전의 부족제도를 지방제도로 고쳐 5부를 개설하는 등 민정에도 개혁을 단행하였다. 재위 79년, 나이 99세로 고구려에서 가장 장수한 왕 중의 한 사람이다.

장승업[편집]

張承業(1843-1897)

조선의 화가. 자는 경유, 호는 오원, 본관은 대원이다. 도화서의 화원으로 벼슬은 감찰에 이르렀다. 조선 초기의 안 견, 후기의 김홍도와 아울러 조선 화단의 '3대 거장'의 한 사람이다. 어려서 고아가 되어 남의 집 심부름꾼으로 있을 때, 그림 공부를 하는 주인집 자제들의 어깨너머로 배워 천재적인 소질로 순식간에 대성하였다. 술을 즐기고 평생 독신생활을 하였으며, 마음에 맞지 않으면 왕명일지라도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한다. 당시 수많은 화가 중에서도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였고, 후세 화가들에게 미친 영향도 대단히 크다. 작품으로 <귀거래도> <담채산수> <풍림 산수도> <어옹도> 등이 있다.

장영실[편집]

蔣英實

조선 세종 때의 과학자. 본관은 아산이며 부산 동래의 관노 출신이었다. 모든 일에 과학적인 재능을 나타내어 제련·축성·농기구·무기 등의 수리와 개량에 뛰어났으며, 1423년 세종의 특명으로 상의원 별좌가 되면서 노예의 신분을 벗어났다. 1432년 이 천을 도와 천문 관측대인 간의대 제작에 착수하고 각종 천문의의 제작을 감독하였다. 1433년 혼천의 제작에 착수하여 1년 만에 완성하였으며, 이듬해 동활자인 경자자의 결함을 보완한 금속활자 갑인자의 주조를 지휘 감독하였다. 또한 김 빈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물시계인 보루각의 자격루를 제작, 완성하였다. 1437년 제작 착수 5년 만에 천체 관측용 대·소간의,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귀와 천평일귀, 해시계인 정남일귀, 공중시계인 앙부일귀 등을 만들었다. 이듬해 자격루의 일종인 흠경각의 옥루를 제작 완료하고 경상도 채방 별감이 되어 구리·철의 채광과 제련을 감독하였다. 1441년 세계 최초의 우량계인 측우기와 수표를 발명하여 하천의 범람을 미리 알 수 있게 하였다. 그 공으로 상호군에 임명되었으나, 1442년 그의 감독으로 제작된 왕의 가마가 부서진 책임을 지고 의금부에 투옥되어 장형을 받은 후에 파면당하였다.

장용학[편집]

張龍鶴(1921-1999) 소설가. 함북 부령 출생. 1944년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수학. 경기 고교 교사. 61년 덕성여대 조교수, 62-67년 <경향신문> 논설위원·<동아일보> 논설위원 등을 지낸 지적 작가이다. 1950년 단편 <지동설(地動說)>이 <문예>지에 추천됨으로써 문단에 등장하였으며, 그의 작품은 상징과 우화, 그리고 순수한 관념 세계를 설정, 유동적 문체로 그린 것이 특징이다. 대표작으로 <지동설> <요한 시집>, 중편 <비인 탄생> <현대의 야(野)>, 장편에 <원형(圓形)의 전설>(1962) <태양의 아들> 등이 있다.

장인환[편집]

張仁煥(1877-1930)

항일 의사.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민비 시해 사건을 계기로 군운이 급속히 쇠퇴함을 보고 새 문명을 배워 나라의 힘을 기르고자 미국에 유학하였다. 1908년 한국 정부의 외교고문이며 일본의 한국 침략을 지지하는 친일주의자인 미국인 스티븐스가 미국에 돌아오자 그를 죽이기로 결심하였다. 스티븐스가 일본 영사와 함께 오클랜드 역에 내리자, 한국 청년 전명운이 그보다 먼저 스티븐스를 쇠뭉치로 구타하는 것을 보고 이어 권총으로 쏘아 죽였다. 사건 현장에서 체포되어 25년형을 선고 받았으나, 애국심과 예의바른 품행으로 10년 만에 특사로 풀려나왔다. 1927년 조만식 등의 환영을 받으며 귀국했다가 그 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병사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장재봉[편집]

張在奉(1896-1966)

민속 예술인. 경남 충무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려서 형으로부터 '오광대 탈춤'을 배웠다. 그 후 1945년 통영 오광대를 부활시키고 이를 보존하여, 1964년 눌원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그 해 12월 오광대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자, 제1급 무형문화재 보유자가 되었다. 이 밖에도 문둥탈·말뚝이·비비 양반 등에 특기가 있었다.

장준하[편집]

張俊河(1915-1975)

언론인·정치가. 평북 의주에서 태어나 일본 도요 대학 예과를 거쳐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상하이 임시정부 주석 비서로 활약하였으며, <사상계> 사장을 지냈다. 1962년 막사이사이 언론상을 수상했고, 1967년 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1971년 신민당 탈당으로 의원 자격을 상실하였다. 그 후 1975년 등산중 의문의 실족사를 하였다. 저서로 <돌 베개>가 있다.

장지연[편집]

張志淵(1864-1921)

언론인·애국지사. 자는 순소, 호는 위암, 본관은 옥산이다. 1894년 고종 때 진사가 되어 내부랑·통정 등을 지냈으나, 1898년 관직을 버리고 남궁 억·유 근 등과 함께 <황성신문>을 창간하였다. 그 후 이상재·이승만 등과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기도 했으며, 1902년 황성신문 사장이 되어 민중계몽과 독립정신 고취를 위해 전념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 11월 20일자에 '시일야 방성 대곡'이라는 제목의 논설을 게재하여 일본의 흉계를 폭로하고 을사 5적신을 규탄하였다. 이로 인하여 황성신문의 간행이 중지되었으며 그는 3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하였다. 1906년 윤효정·나수연 등과 함께 '대한자강회'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벌이다가 일본의 압력이 심해지자,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였다. 이듬해 귀국하여 진주에서 <경남일보>를 창간하고 주필로 있으면서 계속 언론 활동을 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이 이루어지자 분노를 참지 못하고는 황 현의 시를 경남일보에 실음으로써 간행이 정지되었다. 그 후 마산에서 병을 얻어 죽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저서로 <유교연원> <대한 최근사> <대동기년> 등이 있다.

장택상[편집]

張澤相(1893∼1969)

정치가. 호는 창랑이며 경북 칠곡에서 태어났다. 영국 애든버러 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하여 청구회 회장을 지냈다. 광복 후 수도 경찰청장·제1관구 경찰청장에 취임하여, 좌익 세력 제거와 치안 유지에 힘썼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되자 외무부 장관에 취임하였고,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 민의원 부의장이 되었다. 제5·6차 유엔 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고, 1952년 국무총리로 기용되었다. 1958년 제4대 민의원에 당선되어 반공 투쟁 위원장으로 활약하였다. 5·16 군사정변 이후에는 재야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병으로 사망, 국민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장헌 세자[편집]

사도 세자

장희빈[편집]

張禧嬪(?∼1701)

숙종의 빈. 숙종이 오래도록 아들이 없자 궁녀이던 그를 가까이하여 1688년 왕자 균(후의 경종)을 낳았다. 이듬해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장소의에서 희빈으로 봉해졌다. 1694년 기사환국이 일어나자 인현 왕후를 폐위시키고 대신 정비(正妃)가 되었으나, 같은 해 갑술옥사 후 강등되었다가 무당과 함께 취선당 서쪽에 신당을 차려 놓고 인현 왕후를 저주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져 사약을 받고 죽었다. 숙종 이후 빈이 비로 승격되는 일이 없도록 법을 만들었다.

전광용[편집]

全光鏞(1919∼1988)

소설가·국문학자. 호는 백사이며 함남 북청에서 출생하였다. 193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별나라 공주와 토끼>가 당선된 후 문학 수업을 시작하였다. 1947년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국문과에 입학한 후 <시탑> <주막>의 동인으로 문학활동을 하였다. 195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흑산도>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장하였다. 그는 사실적 필치의 바탕 위에서 한국적 상황을 추구하는 작가로 1966년 서울대학교 교수를 거쳐, 1972년 문리대 문학부장이 되었다. 사상계 논문상·동인 문학상 등을 받았으며, 1973년 서울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단편집 <흑산도> <꺼삐딴리> <나신>과 장편 <창과 벽> <태백산맥> 등이 있다.

전 기[편집]

田琦(1825∼1854)

조선의 화가. 자는 기옥, 호는 고람이며 본관은 개성이다. 산수화를 잘 그렸고 시도 잘 썼다. 그림은 송·원의 남종파의 화풍을 계승하였다. 그림으로 <자문 월색도>와 <매화 서옥도> <매화도> 등이 있다.

전두환[편집]

全斗煥(1931∼

)

군인·정치가·제11·12대 대통령. 경남 합천에서 출생하였으며, 1955년 육군 사관학교를 제11기로 졸업하였다. 그 후 미국 특수전학교와 보병학교에 유학하고 돌아와, 1961년 국가 재건 최고회의 의장실 민원 비서관을 지냈다. 1970년 백마부대 연대장으로 월남전에 참가했으며, 이듬해 공수특전단 단장·1978년 제1사단장 등을 거쳐 이듬해 국군 보안사령관을 역임하였다. 1979년 10·26사태를 합동 수사 본부장으로서 수습하고 이듬해 국가 보위 비상 대책 위원회 상임 위원장이 되어 제5공화국의 기틀을 잡았다. 1980년 8월 육군 대장으로 예편하였으며, 같은 달 27일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후 1981년 2월 25일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1988년 2월까지 재임하였다. 퇴임 후 광주민주화운동과 5공비리문제로 책임 추궁을 당하다가 백담사에서 은둔생활을 하였으며, 12·12 군사반란, 5·18 광주민주화운동, 비자금 사건과 관련 1996년 구속 수감되었가 1997년 12월 사면 복권되었다.

전명운[편집]

田明雲(1884∼?)

항일 애국지사. 평안도에서 출생하였으며 블라디보스토크에 건너갔다가, 1905년 하와이로 이민하였다. 이듬해 미국에 건너가 알래스카 어장의 노무자 등으로 일하다가 애국 단체인 '공립협회' 회원이 되었다. 1908년 한국 정부 외교 고문인 친일파 스티븐스를 살해할 것을 결심하였다. 마침 스티븐스가 워싱턴에 가기 위해 샌프란시스코 주재 일본 영사와 오클랜드 역에 내리는 기회를 이용하여 쇠뭉치로 얼굴을 강타하고 격투를 벌였다. 이때 스티븐스를 살해하기 위해 온 장인환의 유탄에 맞아 부상당하였다. 현장에서 체포되어 구속되었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그 후에도 계속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전봉건[편집]

全鳳鍵(1928-1988)

시인. 평남 안주 출생. 평양 숭인상고 졸업. 1950년에 <원(願)> <사월(四月)> <축도(祝禱)> 등으로 <문예>의 추천을 받고 문단에 데뷔하였다. 이후 시 <어느 토요일> <0157584> <또 하나의 차폐물과 탄피> <강물이 흐르는 너의 곁에서> <강하> <은하를 주제로 한 바라아시옹> 등을 발표했다. 이후 시집 <춘향연가(春香戀歌)> <속의 바다> <돌> 등을 간행, 현대시로서 한국적이며 고전적인 작품을 현대화하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한편 극작에도 관심을 기울여, 시극 <꽃소라> <모래와 산소> 등을 발표했다. 제3회 한국시인협회상을 수상했다.

전봉준[편집]

全琫準(1854∼1895)

동학혁명의 지도자. 별명은 녹두 장군이며 전북 태인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 전창혁이 민란의 주모자로 처형된 후부터 사회개혁에 대한 뜻을 두게 되었다. 30세 때 동학에 들어가 고부 접주가 되어 각지를 돌아다니며 동지를 규합하였으며, 은거 중인 대원군과도 접촉하여 국정 개혁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1892년 조병갑이 고부 군수로 부임하여 갖은 탐학을 자행하자, 1894년 농민과 동학교도를 이끌고 관아를 습격하여 양곡을 풀어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부패한 관리를 잡아 가두었다. 이 보고를 받은 조정에서는 조병갑 등을 처벌하고 대신 이용태를 안핵사로 보내어 선정을 베풀 것을 약속하자 농민들은 해산하였다. 그러나, 이용태 역시 농민들의 재산을 빼앗는 등 횡포가 심해, 전봉준은 그 해 다시 동학교도를 중심으로 하여 고부의 백산을 본거지로 삼고 부대를 편성하였다. 그러고는 동도 대장이 되어 척왜·척양·부패한 지배계급의 타파 등 4대 강령을 내세우고 부안·정읍·고창·무장·전주 등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요청으로 청의 군사가 오고, 동시에 톈진 조약을 핑계로 일본군도 입국하여 나라가 위태롭게 되자, 탐관의 응징·시정의 개혁·노비의 해방 등 12개 조목의 실천을 약속받고 해산하였다. 그러나 시정 개혁이 실현되지 않아 다시 궐기를 계획하던 중 청·일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일본군이 우리나라를 침략하려 하였다. 이에 전봉준은 재궐기하여 12만 명의 군사를 지휘하면서 북쪽 교구장인 손병희의 10만 군사와 힘을 합쳐 일본에 대항하여 싸웠다. 동학군은 한때 중부·남부의 모든 지역과 함경도·평안남도까지 세력을 뻗쳤으나, 금구 전투에서 조직적이며, 무기까지 갖춘 일본군에게 패하였다. 이에 전봉준은 순창으로 도망쳐 재기를 꾀하다가 현상금을 탐낸 한신현 등 지방민의 급습으로 피로리에서 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1895년 사형당하였다.

전숙희[편집]

田淑禧(1919- ) 수필가. 함남 협곡 출생. 이화여전 문과 졸업. 1938년 단편소설 <시골로 가는 노파>를 <여성(女聲)>에 발표하여 창작활동을 시작했으며, 1954년 수필집 <탕자의 변>을 출간하면서 본격적인 수필활동에 전념했다. 수필의 특징은 다정다한(多情多恨)한 여성심리를 조촐한 필치로 표현하는 데 있다. 주요 수필집으로 <이국(異國)의 정서(情緖)> <탕자의 변> <나직한 말소리로> <영혼의 뜨락에 내리는 비> <가진 것은 없어도> 등이 있다. 현재 동서문학 대표이며 예술원 학원이다.

전영택[편집]

田榮澤(1894-1968)

소설가. 호는 늘봄이며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평양 대성중학을 거쳐 일본 아오야마 학원 문학부와 신학부를 졸업하고, 미국 캘리포니아 주 태평양 신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918년 김동인·주요한과 함께 우리 나라 최초의 문학 동인지 <창조>를 창간하였으며, 1935년 기독교 잡지 <새 사람>을 발행하였다. 그는 근대 문학 초기의 작가로 리얼하면서도 심리적으로도 따뜻한 인정을 보여주었다. 광복 후 조선 민주당·문교부 편수국장 등을 지냈으며 중앙신학교·감리교 신학교 교수·국립 맹아학교 교장·기독신문 주간·<신생명>지 주필·기독교 문학인 클럽 회장을 지냈다. 1961년 한국 문인협회 초대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1963년 대한민국 문화 포상 대통령상을 받았다. 작품으로 단편 <화수분> <소>와 장편 <청춘곡> 등이 있으며, 저서로 <하늘을 바라보는 여인> <어머니가 그리워> <의의 태양> 등이 있으며, 그 밖에도 논설집·수필집 등이 있다.

전용선[편집]

全用先(1888-1965)

국악사. 호는 추산이며 전북 고부에서 출생하였다. 서숙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20세 때부터 단소를 익히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정악(正樂)에 통달하였으며, 후에 '단소 산조 주법'을 창안하였다. 1963년 국립 국악원이 제정한 국악상을 받았다.

전택부[편집]

全澤鳧(1915- )

종교인. 함경남도 문천 출생. 1941년 일본 신학교를 중퇴하였다. 52년 월간 잡지 <새벗>,

54년 <사상계>의 주간으로 일했으며 57년부터 20여 년간 서울 기독교 청년회에서 총무 등 여러 중요 직책을 맡았다. 이 밖에 한글 전용, 국어순화 운동, 교남 소망의 집, 정립회관 운영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장애인을 위한 사회운동, 방송심의위원, 지역감정해소 국민운동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많은 활동을 하였다. 저서에 <월남 이상재> <한국 기독교 청년회 운동사> <한글 성서와 겨레 문화>, 수필집으로 <강아지의 항변> <무슨 재미로 사나> <세상은 달라진다> <이 땅에 묻히리라> <달을 쏘는 아이> 등이 있다. 현재 교남재단이사장으로 있다.

전형필[편집]

全鎣弼(1906-1962)

문화재 수집가·교육가. 호는 간송,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휘문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 1929년 와세다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 오세창의 지도로 문화재 수집과 육영사업에 뜻을 두었다. 한림서원을 경영하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재가 일본으로 유출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았다. 1940년 보성고등학교를 인수하여 운영하였으며 광복 후 보성중학교 교장이 되었다. 1954년 문화재 보호위원이 되었으며, 그의 국보 15점을 포함한 수집품은 개인 박물관인 성북동에 있는 보화각에 보존하였다. 1956년 교육 공로자 표창을 받았다.

전혜린[편집]

田惠麟(1934-1965)

여류 수필가·번역 문학가. 평남 순천에서 태어나 경기여중고를 거쳐 서울법대 재학중 독일에 유학하여 뮌헨 대학 독문과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 서울법대·이화여대·성균관대 강사를 역임하였다. 1956년부터 F.사강 원작 소설인 <어떤 미소>를 비롯하여 E.시나벨의 <한 소녀가 걸어온 길>,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 E.케스트러의 <파비안>, L.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W.막시모후의 <그래도 인간은 산다>, H.노바크의 <태양병> 등을 계속 번역하여 소개하였다. 그 밖에 사후에 출판된 작품도 있으며, 반짝이는 재능과 인생을 자살로 마감하였다.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모든 괴로움은 또다시>가 있다.

정경화[편집]

鄭京和(1948- )

바이올린 연주자. 서울 출생. 섬세하면서도 개성이 강한 연주로 전세계 음악 애호가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1967년 미국 줄리어드 음악원 졸업. 1966년 차이코프스키 국제콩쿠르에서 2등으로 입상, 1968년 리벤트리트콩쿠르에서 우승했다. 그 후 세계의 유명한 관현악단과 협연했으며, 1992년에는 정명훈과 함께 최초로 국제연합 마약퇴치기구 친선대사로 임명되기도 했다. 정명화·정명훈과 함께 음악가족으로서 유명하다.

정 구[편집]

鄭逑(1543-1620)

조선의 문신. 자는 도가, 호는 한강, 본관은 청주이다. 조 식·이 황에게 성리학을 배웠으며, 1580년 선조 때 창녕 현감으로 부임하여, 좋은 정치를 베풀어 그곳 백성들이 그의 사당을 세웠다. 그 후 충주 목사 등을 거쳐 광해군 때 대사헌이 되었으나, 임해군의 옥사가 일어나자 이에 관련된 사람들을 모두 용서하라는 상소를 올린 후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는 그곳에서 백매원을 세워 제자들을 가르쳤다. 경학을 비롯하여 산수·병진·의약·풍수에 이르기까지 정통했으며, 특히 예학에 뛰어나 예학에 관한 저술이 많았다.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으며 당대의 명문장가로서 글씨도 잘 썼다. 죽은 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한강집>이 있으며, 편찬 서적으로서 <성현풍범> <태극문변> <고금충모> 등이 있다.

정극인[편집]

丁克仁(1401-1481)

조선의 학자. 자는 가택, 호는 불우헌, 본관은 영광이다. 세종 때 생원시에 급제하였으며, 문종 때 학행으로 추천을 받았다. 1453년 단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에 이르렀으나, 계유정난으로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사퇴하고 고향인 태인으로 내려가 후진 양성에 힘썼다. 1472년 성종 때 후진 양성에 노력한 공으로 3품 고관이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가사 작품인 <상춘곡>을 지었으며, 죽은 후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불우헌집>이 있다.

정난종[편집]

鄭蘭宗(1433-1489)

조선의 문신·서예가. 자는 국형, 호는 허백당, 본관은 동래이다.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검 열·이조좌랑·예조참판 등을 지냈고, 봉교로 있을 때 정자청과 함께 서얼 출신의 과거응시를 반대하였다. 1467년 황해도 관찰사로 있을 때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반란군을 평정하여 그 공으로 이듬해 호조참판이 되었다. 1469년 <세조실록>을 편찬했으며 <예종실록>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1483년 성종 때 주문 부사로 명에 다녀온 후, 우참찬을 거쳐 이조·공조·호조판서 등을 지냈다. 그는 훈구파의 중진으로 성리학에 밝았으며, 글씨에도 뛰어났는데, 특히 초서와 예서에 능하였다. 글씨로 <흥천사 종명> <윤자운 신도비> 등이 전한다.

정 담[편집]

鄭湛(?-1592)

임진왜란 때의 의병. 자는 징경이며 평해 정씨의 시조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1592년 김제 군수가 되었다. 이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이복남·황 박 등과 함께 웅치를 방어하였다. 이 때 금산을 거쳐 전주를 점령하려는 왜군을 웅치에서 끝가지 방어하다가 다른 의병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왜군이 그의 충절에 경의를 표하여 '조(弔) 조선국 충간의담'이라는 묘비를 세워 주었다. 그 후 숙종 때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정도전[편집]

鄭道傳(?-1398)

고려 말 조선 초의 정치가·학자. 자는 종지, 호는 삼봉, 본관은 봉화이다. 이 색의 문인으로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 박사에 이르렀다. 1375년 예문 응교·지제교 등을 역임하고, 권신인 이인임·경복흥 등의 친원 배명 정책을 반대하다 회진현에 유백되었다. 1383년 우왕 때 이성계의 참모가 되었으며, 이듬해 성절사 정몽주의 서장관으로 명에 다녀왔다. 1388년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신진 사대부 세력이 집권하게 되자, 이성계의 우익이 되어 토지개혁을 실시하고 권문세족을 조정에서 몰아내는 데 힘썼다. 또한 우왕과 창왕을 몰아내고 공양왕을 추대하였다. 1391년 정당문학으로 있을 때 정몽주의 탄핵으로 봉화에 유배되었다. 정몽주가 살해된 후 풀려나와 조 준·남 은 등과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 건국 후 개국 1등 공신이 되었다. 1394년 한양 천도를 주장하여 실현하였으며, <고려사> 37권을 편찬하였다. 1397년 동북면 도선무 순찰사가 되어 성을 수축하고 역참을 신설했으며 성균 제조가 되었다. 그는 건국 사업에 크게 이바지하여 새 나라의 문물 제도와 국책의 대부분을 결정하였다. 즉 한양 천도 당시 궁궐과 종묘의 위치 및 궁문의 칭호, 도성의 8대문 및 성안 48방의 이름 등을 제정하고, <조선경국전> <경제문감> 등을 지어 치국의 대요와 관제 등 모든 제도와 문물을 제정하였다. 몽금척·수보록·문덕곡 등 수많은 악장을 지어 태조의 공덕을 찬양하였는데 이 악장은 500년 간 중국에서 연주되었다. 또한 병제를 대폭 개혁하여 진법·진도를 지어 장병을 훈련시켰다. 태조의 서자인 이방석을 추대하고 정실의 왕자들을 죽이려 한다는 의심을 받고 이방원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그는 여말 배불론자의 주동자로서 철두철미 불교의 말살을 기도하고 유교로써 문교를 통일하고자 하였다. 저서로 <삼봉집> <경제육전> 등이 있다.

정두원[편집]

鄭斗源(1581-?)

조선 인조 때의 문신. 자는 정숙, 호는 호정, 본관은 광주이다. 광해군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623년 인조 때 성천 부사가 되었고 이듬해 정묘호란 때에는 전향사가 되어 임진강의 군량미 수송을 맡았다. 1630년 진주사로 명에 갔으며, 이듬해 귀국할 때 홍이포·천리경·자명종 등의 서양 기계와 이탈리아 신부 로드리게스로부터 <천문서> <직방외기> <천문도> 등을 얻어 가지고 왔다. 그 후 강원도 관찰사·지중추 부사 등을 지냈다.

정명훈[편집]

鄭明勳(1953- )

지휘자이자 피아노 연주자. 서울 출생. 작품해석이 섬세하고 탁월하며, 피아노와 지휘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음악가이다. 미국 메니스 음대·줄리어드 음악대 졸업. 1974년 차이코프스키 국제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 2위를 차지했다. 1975년 줄리어드 음대 상임지휘자를 역임하였으며, 1978년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관현악단의 부지휘자를 지냈다. 1984년 서독 자르브뤼켄 방송교향악단 수석 지휘자로 활동하였으며, 1989년 프랑스 국립 바스티유 오페라단 음악감독 겸 상임지휘자로 세계적인 명성을 떨쳤다. 누나 명화, 경화와 함께 뛰어난 앙상블의 정(鄭)트리오로도 유명하다. 현재 아시아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이다.

정몽주[편집]

鄭夢周(1337-1392)

고려의 학자·충신. 자는 달가, 호는 포은, 시호는 문충, 본관은 연일이다. 공민왕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수찬 등을 지냈다. 그 무렵 왜구의 침입이 잦았고, 안으로는 원을 섬기려는 파와 명을 섬기려는 두 파로 갈라져 싸움을 일삼는 등 나라 안팎이 매우 어수선하였다. 당시 신망이 높았던 이성계와 힘을 합하여 토지제도를 고쳤으며 '의창'이라는 제도를 마련하여 곡식을 보관했다가 위급할 때 백성들에게 풀어주었다. 1372년 성균관 사성으로 있을 때 명에 사신으로 가서 친선을 맺고 돌아왔다.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왕위에 오르자, 이인임 등 원을 섬기려던 파들이 정권을 잡아 경남 언양으로 유배되었다. 1377년 풀려나와 사신으로 일본 규슈로 가서 그곳에 잡혀 있던 우리 나라 사람 수백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 후 1387년 명이 갑자기 철령 이북의 땅을 자기네 것이라고 주장하자, 우왕은 이듬해 최 영·이성계로 하여금 요동 반도의 공격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이성계는 압록강에 있는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위화도 회군) 개성으로 돌아가 우왕과 최 영 등을 귀양 보냈다. 정몽주는 백성들이 굶주리고 도적의 무리가 날뛰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을 일으키는 일에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왕위에 앉혔다. 그러나 고려를 멸망시키려는 이성계의 흉계를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이때에 이성계의 아들인 이방원이 정몽주를 찾아와 이성계의 편이 되어 달라는 시조를 짓고 그의 뜻을 묻자, 정몽주는 <단심가>를 지어 자신의 꿋꿋한 충성심을 표현하였다. 1392년 명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낙마하여 황주에 누워 있게 되자, 그 기회를 이용하여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이방원이 이성계를 그날 밤으로 개성에 돌아오게 함으로써 실패하였다. 이어 이성계의 태도를 살필 목적으로 부상당한 이성계의 문병을 가장하여 그의 집으로 향하던 도중,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부하 조영규 등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그가 죽은 자리에는 뒷날 그의 고결한 절개를 상징하듯 대나무의 싹이 돋아 자랐으며, 그의 피가 떨어진 선죽교의 돌다리에는 붉은 피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그는 충신일 뿐 아니라 뛰어난 학자였는데, 이 색·길 재와 함께 '고려의 3은'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 후 태종 때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익양 부원군에 추봉되었다. 저서로 <포은집>이 있다.

정문부[편집]

鄭文孚(1565-1624)

조선의 문신. 자는 자허, 호는 농포, 본관은 해주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북평사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회령에서 의병을 일으켜 적을 섬멸하였으며, 그 공으로 영흥 부사·길주 목사가 되었다. 1624년 인조 때 초회왕에 대해 지은 시가 이 괄의 난에 관련되었다는 누명을 쓰고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후에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농포집>이 있다.

정 발[편집]

鄭撥(1533-1592)

조선의 장군. 자는 자고, 호는 백운, 본관은 경주이다.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1592년 부산진 첨절제사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성을 지키려다 장렬하게 죽었다. 늘 검은 옷을 입었으므로 '흑의장군'이라고 하였다. 죽은 후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정배걸[편집]

鄭倍傑

고려 문종 때의 학자. 초계 정씨의 시조이다. 1017년 현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부상서·중추원 부사에 이르렀다. 글방을 열어 제자들을 가르쳐 '홍문공도'라고 불리었는데, 이것은 당시 사학 12도 중의 하나였다.

정비석[편집]

鄭飛石(1911-1991)

소설가. 본명은 서죽으로 평북 의주에서 출생하였으며 일본 니혼 대학 문과를 중퇴하였다. 193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성황당>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장하였다. 초기에는 자연 친화적이면서도 청신한 정감을 바탕으로 한 소설로 주목을 끌었는데, 후기에는 대중 소설로 방향을 바꾸어 정력적으로 작품을 양산하였다. 매일신문·중앙일보 등의 문화부장을 지냈고 1961년 펜클럽 한국 본부 부위원장, 1965년 방송 윤리위원, 1971년 라이온스 클럽 회장 등을 지냈다. 대표작으로 단편 <제신제> <사랑하는 사람들> <꽃 모습> 등과 장편 <장미의 계절> <애정무한> <자유부인> <손자병법> 등이 있다.

정상기[편집]

鄭尙驥(1678-1752)

조선의 학자. 자는 여일, 호는 농포자, 본관은 하동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고 몸이 약하여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 연구로 일생을 보냈다. 그는 중년 이후 저작에 힘썼는데, 정치·경제·국방·병술·의약·기계·농경 등 전반에 걸쳐 많은 연구를 하였다. 특히 지도 제작에 있어 백리척(百里尺)의 축척법을 쓴 것은 우리나라 지도 제작에 대한 과학적인 큰 공헌이었다. 이 익의 4대 제자의 한 사람이며, 실학파 지리학자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저서로 <인자비감> <농포문답> <향거요람> 등이 있다.

정 서[편집]

鄭敍

고려 인종 때의 문인. 호는 과정, 본관은 동래이다. 조상의 덕으로 내시 낭중을 지냈다. 인종의 왕비인 공예 대후의 여동생이 바로 그의 아내로서 인종의 사랑을 받았다. 1151년 의종 때 정 함·김존중 등의 모함으로 동래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연군의 정을 읊은 <정과정곡>을 지어 유명하다. 1170년 명종 때 죄가 풀리어 다시 등용되었다.

정 선[편집]

(1676-1759)

조선의 화가. 자는 원백, 호는 겸재,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김창집의 천거로 도화서의 화원이 되고 벼슬이 현감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중국의 남화풍에서 출발하였으나, 30세를 전후하여 한국 산수화의 독자적인 특징을 살린 산수 사생의 진경화로 바뀌었다. 여행을 즐겨 금강산 등 명승지를 찾아다니며 그림을 그렸다. 심사정·조영석과 함께 '3재'라고 불리었다. 강한 농담의 대조 위에 청색을 주조로 하여 암벽의 면과 질감을 나타낸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으나, 후계자가 없어 그의 화풍은 일대에 그쳤다. 문재가 없던 탓으로 다만 서명과 한두 개의 낙관만이 화폭 구석에 있을 뿐, 화제가 없는 것이 이채롭다. 저서로 <도설경해>가 있으며, 작품으로 <여산 초당도> <금강산 만폭동도> <내금강도> <인왕제색도> <장안연우도> 등이 있다.

정수동[편집]

鄭壽銅(1808-1858)

조선의 시인. 자는 경안·하원, 호는 수동, 본관은 동래이다. 본명은 정지윤이며 태어날 때 손바닥에 '수(壽)'자가 새겨져 있어서 스스로 수동이라 이름 붙였다. 자유 분방한 성격으로 유행·풍습에 얽매이지 않는 생활을 하였다. 그의 시풍은 권력이나 금력에 대한 저항 속에 날카로운 풍자와 야유로 일관하였고, 그에 얽힌 많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또한 번거로운 문장이나 허황한 형식을 배격하고, 간결한 가운데 격조 높은 시를 썼다. 특히 술을 즐겼고 김흥근·김정희·조두순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 저서로 <하원시초>가 있으며 시 작품으로 <관동상매> <전춘시> 등이 있다.

정수영[편집]

鄭壽榮(1743-1831)

조선의 화가. 자는 군방, 호는 지우재, 본관은 하동이다. 특히 산수화를 잘 그렸으며, <조선 고적도보>에 그의 작품 <춘강소주도> <금강산 분설담도> 등이 들어 있다.

정약용[편집]

丁若鏞(1762-1836)

조선의 실학자. 자는 미용, 호는 다산, 교명은 요한, 본관은 나주이다. 16세 때, 당시의 이름난 학자인 이가환·이승훈을 찾아가서 여러 가지 새로운 학문을 배웠다. 특히 이 익의 책을 읽으면서 정치와 경제를 주로 한 실학에 전념하였다. 또한 친구인 이 벽에게 서학과 천주교의 교리를 배웠다. 1789년 정조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이듬해 정조에게 <중용>을 강의하여 왕의 총애를 받았다.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가 되어 연천 현감 서용보를 파직시켰으며, 이듬해 동부승지·병조참의가 되었으나 청의 신부인 주문모 사건에 관련되어 금정도 찰방으로 쫓겨났다. 그 해 다시 왕의 부름을 받고 규장각에 있으면서 <규장전운> <옥편> 등을 편찬하였다. 1801년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하자, 신유박해가 일어나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강진으로 유배지를 옮겼다. 이 곳에서 그는 다산 기슭에 있는 윤 박의 산정에서 18년 간 경서학에 전념하여 학문의 체계를 세우고 <경세유표>를 비롯하여 <목민심서> 등 10여 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1818년 이태순의 상소로 풀려난 뒤 고향으로 돌아와서 농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연구를 계속하였다. 그는 저술 활동을 통해서 국가의 제도를 바르게 고치고 백성들을 잘 다스려 형벌에 신중히 할 것 등을 주장하였다. 또한 선비나 지방관리들이 찾아오면 <목민심서>를 주며 백성들을 잘 다스려 달라고 부탁하였다고 한다. 그의 학문 체계는 사상적으로 유형원과 이 익의 주류를 계승하여 유학의 정신 체계에 기반을 두고 있으나, 다분히 양명학적인 데로 기울어져 있었고, 이 이의 주자학적인 실천윤리와 홍대용·박지원·박제가 등 북학파의 사상을 흡수하여 집대성하였다. 그리고 이기론에 있어서는 이 황과 이 이의 학설을 합성하고 있다. 죽은 후 규장각 제학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흠흠신서> <마과회통> <모시강의> <상서고훈> <매씨서평> <상서지원록> 등이 있다.

정약전[편집]

丁若銓(1758-1816)

조선의 학자·천주교 전도가. 자는 천전, 호는 일성루, 본관은 나주이다. 정약용의 둘째 형으로 정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부정자·병조좌랑 등을 지냈다. 1798년 왕명으로 <영남 인물고>를 편찬하였다. 남인 계통의 학자로 서학에 뜻을 두어 천주교에 입교한 후, 벼슬을 버리고 천주교 전도에만 힘썼다. 1801년 신유박해 때 흑산도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저서로 <송정사의> <자산어보> <논어잡> 등이 있다.

정약종[편집]

丁若鍾(1760-1801)

조선의 학자·천주교 순교자. 정약용의 셋째 형으로 이 익의 제자이며 서학을 연구하여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권일신·이덕조 등과 신앙 실천운동에 가담하여 인습 타파와 계급 타파의 사회운동을 촉진하며 천주교 전도에 힘썼다. 이승훈 등과 모의하여 청의 신부 주문모를 맞아들여 전도에 노력하던 중, 1801년 신유박해 때 딸 정혜는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으며, 그도 이승훈·최필공·최창현 등과 함께 서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정여립[편집]

鄭汝立(?-1589)

조선 선조 때의 모반자. 자는 인백, 본관은 동래이다. 성격이 사납고 잔인했으나 통솔력이 있고 두뇌가 명석하여 경사와 제자백가에 통달하였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 이·성 혼의 문하에서 총애를 받았다. 1583년 예조좌랑이 되었으며, 본래 서인이었으나 집권중인 동인에 아부하여 죽은 이 이를 배반하고 박 순·성 혼 등을 비판하여, 왕의 노여움을 사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갔다. 그 후 많은 선비들과 접촉하여 점차 성망이 높아지자, 진안 죽도에다 서실을 지어 놓고 대동계를 조직하여 신분에 제한 없이 선비·불평객들을 모아 무술 훈련을 시켰다. 전주 부윤 남언경의 요청으로 변경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친 후 대동계를 전국으로 확대하는 한편, 이씨가 망하고 정씨 세상이 온다는 소문을 퍼뜨리며 민심을 선동하였다. 1589년 소문이 퍼져 비밀이 누설되자 군사를 일으켜 서울을 점령하려 하였으나 미리 탄로되어 관련자들이 차례로 잡혀갔다. 그는 진안 죽도로 도망갔다가 관군의 포위 속에서 자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동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어 기축옥사가 일어났으며, 이후로 전라도를 반역향으로 하여 호남인들의 등용이 제한되었다.

정여창[편집]

鄭汝昌(1450-1504)

조선의 문신. 자는 백욱, 호는 일두, 본관은 하동이다. 김굉필과 함께 김종직의 제자가 되어 지리산에 들어가 3년간 오경과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1490년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을 거쳐 안음 현감을 지냈다. 1498년 연산군 때 일어난 무오사화로 종성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그 후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부관참시(관을 쪼개고 목을 벰)되었다. 그 후 중종 때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용학주소> <주객문답설> 등의 저서가 있었으나 무오사화 때 소각되고, 지금은 정 구가 엮은 <문헌공 실기> 속에 그 유집이 전할 뿐이다.

정인보[편집]

鄭寅普(1892-?)

사학자·시조 시인. 자는 경업, 호는 위당·담원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910년 중국에서 동양학을 전공하면서 신규식·박은식·신채호 등과 함께 동제사를 조직하여 독립운동과 동포들의 계몽에 힘썼다. 1918년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를 비롯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고 국학·동양학 등을 강의하였다. 또한 시대일보·동아일보 등의 논설위원으로 총독부의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광복 후 국학대학장·초대 감찰 위원장 등을 지내다가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국문학·한문학·국사학 등에 대해 광범위한 연구를 하였고, 시조와 한시에도 뛰어났다. 저서로 <조선사 연구> <월남 이상재 선생전> <조선 문학 원류고> <담원 시조집> 등이 있다.

정인섭[편집]

鄭寅燮(1905-1983)

문학 평론가·영문학자. 경남 울주에서 출생하였으며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방정환 등과 '색동회' 발기인이 되어 동인지 <어린이>에 동시·동화를 발표하였다. 1926년 유학생인 김진섭 등과 '해외문학 연구회'를 조직하였다. 1931년부터 시를 발표하기 시작하여 <산들바람> <국화> 등 수십 편을 발표하였다. 1946년까지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있었다. 그 후 중앙대학교 교수·런던 대학교 교수·일본 덴리 대학교 교수 등을 지냈으며, 1953년 런던 대학원을 수료하였다. 1966년 국제 연극협회 한국 본부 위원장, 1969년 외국어대학교 언어 연구 소장, 이듬해 국제 펜클럽 아시아 문학 번역국 회장 등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1963년 펜클럽 번역 문학상을 받았다. 저서로 <한국 문단 논고> <세계문학 산고> <산넘고 물건너> <버릴 수 없는 꽃다발> 등이 있다.

정인승[편집]

鄭寅承(1897-1986)

국어학자. 호는 건재이며 전북 장수에서 출생하였다. 1925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1935년 조선어학회 이사가 되었으며,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함흥 감옥에 투옥되기도 하였다. 그 후 광복이 되어 석방되자 <큰사전> 편찬을 주재하였다. 1952년 전북대학교·중앙대학교 교수를 거쳐, 1966년 학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학술원상·건국 공로상·국민 훈장 모란장 등을 받았다. 국어 교과서와 <중등말본> <고등말본> <한글문답> 등을 펴내어 국어 교육에 큰 공을 세웠다.

정인지[편집]

鄭麟趾(1396-1478)

조선의 문신·학자. 자는 백휴, 호는 학역재, 본관은 하동이다.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감찰·예조좌랑 등을 지낸 후, 세종 때 병조좌랑에 전임되었다. 그 후 세종의 총애를 받아 집현전 학사로 등용되었고, 1425년 집현전 직제학에 올랐다. 1427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으며, 이듬해 정 초와 함께 대통력을 개정하고 <칠정산내편>을 지어 역법을 개정하였다. 1440년 사은사로 명에 다녀왔으며, 1442년 예문관 대제학으로 <사륜요집>을 편찬하였다. 1448년 이조판서가 되어 삼남 지방에 토지 등급을 정했으며, 1453년 계유정난을 일으킨 수양 대군을 도와 우의정이 되었고 정난 공신 1등으로 하동 부원군에 봉해졌다. 1455년 세조 때에 영의정에 오르고 좌익 공신 2등이 되었으며, 1458년 불교책 간행에 반대하여 부여로 유배되었다. 그 후 풀려나와 다시 부원군이 되었다. 1468년 예종 때 남 이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 공신이 되었다. 조선 초기의 대표적 학자로 천문·역법·아악에 관한 많은 책을 편찬하였으며, 김종서 등과 <고려사>를 편찬했다. 세종을 도와 성삼문·신숙주 등과 <훈민정음> 창제에 공이 컸으며 권 제·안 지 등과 <용비어천가>를 지었다. 저서로는 <학역재집> <역대병요> <역대역법> 등이 있다.

정인홍[편집]

鄭仁弘(1535-1623)

조선의 문신. 자는 덕원, 호는 내암, 본관은 서산이다. 대북파의 영수로 선조 때에 황간 현감이 되어 좋은 정치를 베풀었다. 1581년 서인 정 철·윤두수를 탄핵하다 벼슬을 빼앗기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합천에서 김 면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성주에 쳐들어온 왜군을 물리쳤다. 이듬해에는 성주·합천·함안 등지를 방어했으며, 1602년 대사헌에 승진하여 공조참판을 지냈다. 남인인 유성룡이 임진왜란 때 화의를 주장한 것을 탄핵하여 벼슬에서 물러나게 하였으며, 홍여순·남이공 등 북인파와 함께 정권을 잡았다. 북인이 소북·대북으로 갈라지자 이산해·이이첨과 함께 대북을 이끌었으며, 1601년 인목 대비에게서 적통인 영창 대군이 출생하자, 적통을 주장하여 영창 대군을 옹립하려는 소북에 대해 그는 광해군의 즉위를 주장하였다. 1607년 소북파 이효원의 탄핵으로 영변에 유배되었다가,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사헌에 등용되어 대북 정권을 수립하였다. 1612년 우의정이 되었으며 이듬해 이이첨과 함께 계축옥사를 일으켜 김제남과 영창 대군을 죽게 하였다. 1618년에는 인목 대비를 폐하여 서궁에 유폐시키고 영의정에 올랐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참형당하였으며 가산은 모두 몰수당하였고, 이후 대북파는 정계에서 몰락하였다. 저서로 <내암집>이 있다.

정조[편집]

正祖(1752-1800)

조선의 제22대 왕(재위 1777-1800). 영조의 손자이며 사도(장헌) 세자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혜경궁 홍씨이고 비는 청원 부원군 김시묵의 딸로 효의 왕후이다. 1759년 세손으로 책봉되었으며, 1762년 사도 세자가 죽자 영조의 뒤를 이었다. 1777년 그를 옹호하여 왔던 시파를 벽파가 탄핵하자, 벽파를 추방하였다. 이에 벽파가 음모를 꾸미는 등 왕의 신변까지 위협하자 홍국영으로 하여금 이를 뿌리 뽑게 하였다. 그러나 홍국영이 왕의 총애를 빙자하여 횡포를 자행하고 왕통을 바꾸려 획책하자, 1780년 그를 쫓아냄으로써 홍씨 세도정권을 무너뜨렸다. 그 후 영조의 뜻을 이어 탕평책으로 일관했으며 숙종 이후 실각했던 남인을 등용하고 서인(庶人)도 기용하였다. 1791년 신해사옥을 일으켜 천주교를 탄압하였으나 교세는 날로 확장되었다. 그는 규장각을 설치하여 역대 서적을 보관하고, 활자에 관심이 깊어 임진자 등 많은 활자를 새로 만들어 인쇄술의 발달을 꾀하였다. 서적 편찬에도 힘을 기울여 자신의 문집인 <홍재전서>도 완성하였으며, <증보 동국 문헌 비고> <국조보감> <대전통편> 등을 간행하였다. 특히 남인 학자들을 우대하여 주자학의 공리 공론적인 학풍을 배격하고 실사구시와 이용 후생을 목표로 하는 실학을 발전시켰으며 조선 후기의 문화적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제도 개혁에도 힘써 악형을 금지시키고 백성의 부담을 덜기 위하여 궁차 징세법을 폐지하는 한편, 빈민을 구제하는 법도 제정하였다.

정종[편집]

定宗(923-949) 고려 제3대 왕(재위 946-949). 태조 왕 건의 둘째 아들. 이복 형 혜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으며, 946년 왕 규의 난을 평정하였다. 불교를 지나치게 믿어 여러 사원에 불명경보와 광학보를 설치하도록 양곡 7만 섬을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947년 서경에 왕성을 쌓고 도참설을 좇아 그곳으로 천도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죽었다.

정종[편집]

定宗(1357-1419) 조선 제2대 왕(재위 1399-1400). 태조 이성계의 둘째 아들. 초명은 방과이며 성품이 인자하고 용략이 뛰어나 고려 때 장상까지 지냈다. 조선이 건국되자 영안군에 봉해졌으며,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이듬해 태조의 은퇴로 왕위에 올라 도읍을 개성으로 옮겼다.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동생 방원(후의 태종)을 세자로 삼고 사병을 몰수하여 삼군부에 편입시켰다. 이 해 하 윤의 건의로 관제를 개혁하고 서울 5부에 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는 본래 왕위에 야심이 없었으나 방원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으므로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었다.

정중부[편집]

鄭中夫(1106-1179)

고려의 무신. 본관은 해주이며 천민 출신이었으나 기골이 장대하여 인종 때 견룡대정으로 발탁되었다. 이때 나이 어린 김부식의 아들 내시 김돈중에게 촛불로 수염을 태우는 모욕을 받고 그를 때려 눕혀 김부식의 분노를 샀으나 왕의 만류로 화를 면하였다. 그 후 여러 벼슬을 거쳐 의종 때 상장군에 이르렀다. 당시 의종은 정사를 돌보지 않고 연회를 자주 베풀며 무신을 천대하였다. 불평이 쌓인 정중부는 몇 명의 동지와 모의하여 왕이 보현원으로 행차하러 가던 도중 반란을 일으켜 문신들을 모두 죽이고 왕을 폐위시켰다. 이어 의종의 동생인 명종을 즉위시키고 정권을 잡았는데, 이를 '무신의 난' 또는 '정중부의 난'이라고 한다. 이로부터 무신 정치를 실시하여 스스로 참지정사가 되었다. 1173년 김보당이 의종 복위를 꾀하여 난을 일으키자 이를 토벌하고 의종을 살해하였다. 또한 이듬해 조위총의 난도 진압하였다. 후에 문하시중이 되었다가 1175년 벼슬에서 물러났으며, 1179년 무신인 경대승에게 아들과 사위와 함께 죽음을 당하였다.

정지상[편집]

鄭知常(?-1135)

고려 중기의 문신·시인. 호는 남호이며 본관은 서경이다. 예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사간 등을 지냈으며 인종 때 기거주에 올랐다. 1127년 역신 이자겸을 축출한 척준경이 그 공을 믿고 횡포해지자, 왕에게 상소하여 유배시켰다. 묘청·백수한의 음양 비술을 깊이 믿어 서경 천도와 금 정벌, 그리고 황제 호칭을 쓸 것을 주장하였다. 1130년 지제고로서 왕명으로 <산재기>를 지었다. 묘청의 난이 일어나자, 이에 관련된 혐의로 김 안·백수한과 함께 김부식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시에 뛰어나 고려 '12 시인'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또한 글씨와 그림에도 능하였으며 노장 철학을 숭상하였다.

정지용[편집]

鄭芝溶(1903-?)

시인. 충북 옥천에서 태어나 휘문고보를 거쳐 일본 도지샤 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휘문고보 교사로 재직하며 1930년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 <문장>지의 시 추천을 맡아 보았다. 그는 1930년대의 경향파 시의 무잡 속에서 시어의 탁마와 청신한 김각시를 써서 후배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광복 이후 이화여대 문과 과장·<경향신문> 주간·숙명여대 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6·25전쟁 때 행방 불명되었다. 그의 고향 옥천에 시비가 세워졌고, 생가가 보존되어 해마다 '지용제' 행사를 열고 있다. 시집 <정지용 시집> <백록담>이 있다.

정창손[편집]

鄭昌孫(1402-1487)

조선의 문신. 자는 효중이며 본관은 동래이다.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를 거쳐 집현전 응교로 있을 때 최만리·신석조와 함께 한글 제정을 반대하다 파직되었다. 1445년 복직되었으며, 이듬해 문과 중시에 급제하여 집현전 직제학이 되었다. 1449년 부제학으로 춘추관 편수관·수사관을 겸직하여 <고려사> <세종실록> <치평요람>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후 대사헌·이조판서 등을 거쳐, 1456년 사위 김 질에게서 들은 성삼문 등의 단종 복위 모의를 세조에게 고한 공으로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문장과 서예에도 뛰어났다. 1504년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관을 쪼개고 목을 벰)되었으나, 중종 때 청백리에 뽑혔다.

정천익[편집]

鄭天益

고려 공민왕 때의 목화 재배자. 1363년 사위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지고 온 목화씨를 심어 3년간 연구 끝에 재배에 성공하였다. 고려에 목화를 처음으로 널리 보급하였으며, 씨를 뽑는 씨아와 실을 뽑는 물레도 고안해 내어 면포를 짜내게 하였다.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무명옷이 널리 입혀지게 되었다.

정 철[편집]

鄭澈(1536-1593)

조선의 문신·시인. 자는 계함, 호는 송강, 본관은 연일이다.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났을 때 계림군(정 철의 둘째 누이의 남편)이 관련되어 그의 일족으로서 아버지가 유배당하자 유배지에 따라다녔다. 그 뒤 기대승·김인후 등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1562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1556년 함경도 암행어사가 되었으며, 1578년 선조 때 승지에 올랐다. 이때 진도 군수 이 수의 뇌물 사건으로 동인의 공격을 받아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580년 강원도 관찰사로 등용되었으며, 이때 시인으로서 많은 작품을 썼다. 그가 지은 최초의 가사 <관동별곡>은 금강산을 비롯하여 관동 팔경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읊은 노래이며, <훈민가> 16수는 백성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지은 것이다. 1583년 예조참판이 되고 이듬해 대사헌이 되었으나, 동인들의 공격을 받고 벼슬에서 물러나 4년간 시조와 가사를 지으며 지냈다. 이때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등 수많은 가사와 시조를 지었다. 1589년 다시 우의정에 등용되어 정여립의 난을 진압하였으며, 1591년 이산해와 함께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기로 했다가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혼자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였다. 이 때 신성군을 책봉하려던 왕의 노여움을 사서 평안도 강계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의 부름을 받고 의주로 피란하는 왕을 모셨다. 왜군이 평양 이남을 점령하고 있을 때 경기도·충청도·전라도의 체찰사를 지냈으며, 1593년 사은사로 명에 다녀왔다. 그 후 동인들의 모함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강화도의 송정촌에 머무르며 여생을 보냈다. 당대 가사문학의 대가로서 시조의 윤선도와 더불어 한국 시가사상 쌍벽으로 일컬어진다. 사망 후 관작을 추탈당했다가 광해군 1년에 용서되고 인조 1년에 관작이 복구되었다. 저서로 <송강집> <송강가사> 등이 있으며 70여 수의 시조가 있다.

정 초[편집]

鄭招(?-1434)

조선 세종 때의 문신. 자는 열지, 본관은 하동이다.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이 되었으며, 1407년 문과 중시에 급제하여 정언이 되었다. 그 후 세종 때 공조와 예조참의를 거쳐 예조참판을 지낸 뒤, 1423년 함길도 도관찰사로 나갔다. 1430년 공조판서로 있을 때 왕명으로 <농사직설>을 편찬하였으며, 정인지와 함께 역법을 개정하였다. 1433년 이 천과 함께 혼천의를 제작했으며 <삼강행실도발>을 편찬하였다. 경사에 밝았으며 역산·복서(거북의 등껍질로 치는 점)에도 통달하였다. 저서로 <회례문무악장> 등이 있다.

정충신[편집]

鄭忠信(1575-1636)

조선의 무신. 자는 가행, 호는 만운, 본관은 나주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17세의 나이로 권 율 밑에서 활약하였다. 당시 권 율의 보고서를 갖고 의주로 피란중이던 선조에게 갔다가 이항복의 주선으로 학문과 무예를 닦았다. 그 해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621년 만포 첨사로 국경을 수비하였다. 1624년 이 괄의 난 때 난을 진압한 공으로 1등 진무 공신이 되었으며 병마절도사에 올랐다. 1627년 정묘호란 때 부원수로 활약하였으며 포도대장이 되었다. 그는 무술에 뛰어났으며 천문·지리·의학·복서에도 밝았다. 저서로 <만운집> <백사북천록> 등이 있다.

정 탁[편집]

鄭琢(1526-1605)

조선의 문신. 자는 자정, 호는 약포, 본관은 청주이다. 이 황의 제자로 명종 때 사마시를 거쳐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헌납 등을 지냈다. 1568년 선조 때 교리로 춘추관 기주관을 겸하여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후 대사헌이 되었으나 정인홍 등과 의견이 맞지 않아 이조참판으로 옮겼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의주로 모시었으며 명나라 송응창을 영접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몸소 전쟁터에 나가 사기를 돋우려 했으나, 왕이 그가 연로함을 이유로 만류하였다. 그 후 판중추 부사를 거쳐 3등 호종 공신으로 서원 부원군에 봉해졌다. 경서는 물론 천문·지리·병법에 이르기까지 정통했으며, 임진왜란 때 이순신·곽재우·김덕령 등 명장을 발탁하였다. 저서로 <악포집> <용만견문록> 등이 있다.

정평구[편집]

鄭平九

조선 선조 때의 발명가. 전라도 김제에서 출생하였다. 지금의 기구와 비슷한 '비거(飛車)'를 발명하여, 임진왜란 때 진주 싸움에서 이를 사용하여 외부와 연락을 하는 한편, 성 안에 갇혀 있던 성주를 30리 밖으로 탈출하게 하였다고 한다.

정하상[편집]

丁夏祥(1795-1839)

조선의 천주교 순교자. 본관은 나주이며 정약종의 둘째 아들이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아버지와 형이 순교하여 어머니와 누나 밑에서 자랐다. 1813년 서울로 올라와 여신도 조증이의 집에 머물면서 교회의 재건에 노력하였다. 1816년 동지사를 따라 베이징에 간 이후 9차례나 베이징에 드나들면서 신부 파견을 강력히 요청하였다. 1825년 로마 교황에게 신부 파견의 필요성을 호소하여 이듬해 조선 교회를 베이징 교구에서 분리하여 파리 외방 전교회 산하에 새로이 조선 대리 감목구를 설치하게 하였으며, 브뤼기에르 주교를 초대 감목 대리로 임명케 하는 데 성공하였다. 1833년 중국인 신부 유방제를 맞아들였으며, 1836년 프랑스 모방 신부를 맞아들여 천주교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1838년 앵베르 주교 밑에서 이신규 등과 신학교육을 받고 성직자의 대상에 올랐으나 1839년 헌종 때 기해박해로 가족과 함께 붙잡혀 사형되었다. 그가 죽기 전에 쓴 <상재상서>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호교론으로, 1881년 홍콩 교구에서 발간되어, 중국에서 널리 전도에 활용되었다. 1925년 복자의 자리에 올랐다.

정학유[편집]

丁學游

조선 헌종 때의 문인. 호는 운포이며 정약용의 둘째 아들로 <농가월령가>의 작자로 유명하다.

정한모[편집]

鄭漢模(1923-1991)

시인·국문학자. 충남 부여 출생. 호는 일모. 서울대학교 교수, 문예진흥원장, 문공부 장관 등을 역임했다. 1945년 동인지 <백맥>에 <귀향시편>을 발표하면서 활동하기 시작하였으며, <시탑>과 <주막> 동인으로도 활동하였다. 시집으로 <카오스의 사족>(1958), <여백을 위한 서정>(1959), <아가의 방>(1970), <원점에 서서>(1989) 등이 있으며, <현대시론> <한국 현대시 문학사> <한국 현대시의 정수> 등 많은 학술서가 있다.

정한숙[편집]

丁漢淑(1922-1997)

소설가. 호는 일오. 평북 영변 출생. 고려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였다. 1947년 정한모·전광용 등과 <주막>의 동인을 조직하였으며 이듬해 단편 <흉가>가 <예술조선>에 당선되어 문단에 등장하였다. 1953년 중편 <배신>이 조선일보 현상 문예에 당선되었으며, 1955년 단편 <전황당 인보기>, 희곡 <혼항>이 한국일보 신춘 문예에 당선되면서부터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하였다. 고려대 교수로 있으면서 후진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1958년 내성문학상을 받았으며, 그 밖에도 흙의 문학상·문화예술상·예술원상·3·1 문화상 등을 수상하였다. 저서에 단편 <시몬의 회상> <고추잠자리>, 장편 <암흑의 계절> <끊어진 다리> 등이 있다.

정현종[편집]

鄭玄宗(1939- ) 서울 출생. 연세대 철학과 졸업. 1974년 <중앙일보> 기자, 77년 서울예전 교수를 거쳐 현재 연세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1965년 <현대문학>에 <독무(獨舞)> <화음> 등이 추천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사물의 꿈>(1972), <고통의 축제>(1974), <나는 별 아저씨>(1978),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1984), <거지와 광인>(1985),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1989) 등이 있다. 한국문학 작가상 수상과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정 호[편집]

鄭澔(1648-1736)

조선의 문신. 자는 중순, 호는 장암, 본관은 연일이다. 정 철의 현손이며 송시열의 제자이다.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정언 등을 지내다가, 1689년 기사환국으로 파직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로 서인이 기용될 때 풀려나와 지평·교리 등을 지냈다. 1721년 경종 때 실록청 총재로서 <숙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나, 신임사화로 파직되어 강진에 유배되었다. 1725년 영조 때 노론의 재집권으로 풀려나와 영의정에 이르렀다. 문장과 글씨·시에 모두 능하였다. 저서로 <장암집>이 있으며, 편서로 <문의통고>가 있다.

제관[편집]

諦觀

고려 초의 승려. 960년 광종 때 송나라 오월왕이 천태종의 3대부가 해외로 흩어져 없음을 알고 경전을 구해 오라고 고려에 사신을 보내자, 이에 제관이 경전을 가지고 송에 갔다. 그는 그곳에서 천태종의 대가인 나계사의 의적을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어 10년간 공부하다 죽었다. 이 때문에 중국에는 천태종이 부활했으나, 고려에는 그 전맥이 끊어지게 된 것을 뒤에 의천이 중국에 건너갔을 때 그의 저서를 가지고 돌아와 계승하였다. 그가 지은 <천태사교의>는 천태종의 입문서로서 승려 강원의 필수과목으로 되어 있으며, 중국·일본의 불교 학계에서도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제국대장 공주[편집]

齊國大長公主(1259-1297)고려 충렬왕의 왕후. 원나라 세조의 딸로 1274년 원에 체류중이던 세자 심(후의 충렬왕)과 결혼하였다. 그 해 즉위한 충렬왕을 따라 고려에 들어와 이듬해 원성 공주에 책봉되고 무종 때 제국대장 공주에 추봉되고, 충선왕을 낳았다. 고려 왕실과 원 왕실과의 혼인 관계를 이루는 시초가 되었다.

조 견[편집]

(1351-1425)

고려의 충신. 호는 송산, 본관은 평양이다. 어려서 승려가 되어 여러 절의 주지를 지냈다. 그 후 환속하여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안렴사를 지냈다. 형 조 준이 이성계를 도와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과천의 청계산에 숨었다. 태조 이성계가 벼슬을 내리고 여러 번 불렀으나 나오지 않고 양주의 송산에 숨어 여생을 마쳤다. 죽을 때 자손들에게 묘비에 고려 때의 벼슬만 적고, 조선 때의 훈명은 적지 말라 하였다.

조 경[편집]

趙璥(1727-1787)

조선의 문신. 자는 경서, 호는 하서, 본관은 풍양이다. 영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을 거쳐 대사성이 되었다. 정조 때 공조참판·대사헌 등을 지낸 후 함경도 관찰사로 민폐를 없애고 군무를 충실케 하는 등 좋은 정치를 베풀어 명성을 떨쳤다. 효성이 지극하여 고향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저서로 <하서집>이 있다.

조관[편집]

(1700-1762)

조선의 승려. 자는 무회, 호는 용담이며, 본성은 김씨이고 본관은 남원이다. 1718년 숙종 때 감로사에서 승려가 되었으며, 새봉·영해·낙암·화정 등으로부터 선과 교의 진리를 배워 통달하였다. 이어 지리산 견성암에 들어가 <기신론>을 읽고 크게 깨달은 뒤, 1732년 지리산에 가은암을 짓고 심원사·도림사 등에서 20여 년간 경서를 강연하였다. 1749년 시봉의 법을 이어받았으며, 부안의 실상사에서 죽었다. 사리가 5개 나왔는데, 감로사·파근사·실상사의 탑에 각각 보관되어 있다.

조광조[편집]

趙光祖(1482-1519)

조선의 문신·성리학자. 자는 효직, 호는 정암, 시호는 문정, 본관은 한양이다. 김종직의 학문을 이어받아 사림파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1515년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승지 등을 지내고 부제학이 되어 소격서의 폐지를 단행하였으며, 유교를 바탕으로 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역설하였다. 고을의 상부 상조를 위해 여씨 향약을 만들어 실시하게 했으며 미신 타파에도 힘썼다. 1519년 대사헌이 되어 현량과를 실시하여 사림파를 대거 요직에 등용시키는 반면, 훈구파를 외직으로 몰아내었다. 특히 중종반정 때 정국공신이 너무 많다 하여 4분의 3에 해당하는 76명을 삭제하는 등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하여 훈구파의 원망을 받았다. 심 정·홍경주 등 훈구파의 갖은 모함으로, 김 정·김 구 등과 함께 파직당하여 유배되었다. 조광조는 능주로 유배되어 사약을 받고 죽었으며,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어 공자묘에 함께 모셔졌다. 이 이는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을 가리켜 '동방 4현'이라 하여 숭배하였다. 저서로 <정암집>이 있다.

조광진[편집]

曺匡振(1772-1840)

조선의 서예가. 자는 정보, 호는 구눌·눌인, 본관은 용담이다. 평양에서 태어나 이광사의 글씨를 배웠다. 일찍부터 김정희와 사귀어 글씨의 평론을 비롯한 서신 교환 등을 하였다. 처음에는 안진경의 체를 본받았으나 후에 행서와 초서에 있어서 청의 유 용을 따랐으며, 예서에 있어서는 장도악을 따랐다. 죽은 후 중국 사신이 동국의 명필이라 하며 찾다가 한탄하며 탑본을 얻어 가지고 돌아갔다는 일화가 있다.

조두순[편집]

趙斗淳(1796-1870)

조선의 문신. 자는 원칠, 호는 심암, 본관은 양주이다. 순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규장각 대교를 거쳐 대사성에 이르렀다. 1835년 동지부사로 청에 다녀왔으며, 그 후 이조참판·황해도 관찰사·한성부 판윤 등을 지냈다. 1849년 예문관 대제학이 되어 <헌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그 후 좌의정에까지 올랐다. 1862년 삼정의 문란으로 백성들에 대한 가혹한 착취가 계속되어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이정청을 설치하여 총재관이 되어 삼정의 개혁에 전력하였다. 1863년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 이명복(후의 고종)의 추대를 적극 주장하여 조 대비와 흥선 대원군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다. 1864년 <철종실록>의 편찬 총재관이 되었으며 이듬해 영의정이 되어 <대전회통>을 편찬하였다. 삼군부를 부활시키고 경복궁 영건도감 도제조를 지냈다. 흥선 대원군의 명을 받아 천주교 탄압에 앞장섰다. 저서로 <심암집>이 있다.

조만식[편집]

曺晩植(1882-?)

민족 운동가·정치가. 호는 고당, 본관은 창녕이며 평남 강서에서 출생하였다. 1905년 평양 숭실중학에 입학하여 재학중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1908년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소쿠 영어학교에서 3년간 공부하였으며, 이때 인도의 독립운동가 간디의 무저항주의와 민족주의에 크게 감동을 받아 자기 사상과 민족운동의 거울로 삼았다. 1913년 메이지 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후 귀국하여 오산학교 교사가 되었다. 1919년 오산학교 교장이 되었으나 사직하고 독립운동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을 지휘하다 잡혀 평양 감옥에서 1년간 복역하였다. 그 후 1923년 김성수·송진우와 함께 '연정회'를 조직하였으며, 이듬해 이들과 '민립대학 기성회'를 조직하려 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하였다. 그 후 숭인중학교 교장이 되었으나 일제의 압력으로 사직하였다. 1927년 '신간회' 결성에 참여하였으나 역시 일본의 방해로 좌절되었으며, 1932년 조선일보사 사장이 되어 민족 언론 창달에 공헌하였다. 그 후 많은 후진들과 기독교인들의 무저항 민족주의 운동을 지도하였다. 광복 후 평남 건국 준비 위원회와 평남 인민 정치 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어 질서 유지와 국민의 지도에 앞장섰다. 한편, 소련 군청정에서 북조선 인민 정치 위원회를 설치하고 그에게 위원장 취임을 권고했으나 거절하였다. 그 해 '조선 민주당'을 창당하여 당수가 되었고, 반공 노선을 확립하였으며 반탁 운동의 선봉에 나섰다. 이에 조선 민주당은 소련 군정청 당국과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접수되고 그는 소련군에 의해 고려 호텔에 연금되었다. 그들의 협박과 회유에도 끝까지 굽히지 않았으며 신탁통치에 반대하였다. 월남을 종용하는 제자들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동포들을 남겨 두고 홀로 자유를 누릴 수 없다고 거부하였다. 6·25전쟁 때 공산당에게 학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조말생[편집]

趙末生(1370-1447)

조선의 문신. 자는 근초, 호는 화산, 본관은 양주이다. 태종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정언·감찰·헌납 등을 지냈다. 1403년 서장관으로 명에 다녀왔으며, 그 후 장령·예문관 직제학·승정원 동부대언 등이 되었다. 태종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으며 세종 때 예문관 대제학을 거쳐 판중추원사에 이르렀다. 글씨에도 뛰어났다.

조 목[편집]

趙穆(1524-1606)

조선의 학자. 자는 사경, 호는 월천, 본관은 횡성이다. 이 황의 문인으로 명종 때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이 되어 유교를 공부하였다. 1571년 선조 때 공릉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으며, 1576년 봉화 현감을 거쳐 1594년 군자감 주부로서 일본과의 강화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1601년 사재감정을 거쳐 공조 참판에 이르렀다. 생활이 무척 빈곤하였으나 오직 학문에만 전심하여 대학자로서 존경을 받았다.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저서로 <월천집>과 성현의 훈화를 기록한 <곤지잡록>이 있다.

조문명[편집]

趙文命(1680-1732)

조선의 문신. 자는 숙장, 호는 학암, 본관은 풍양이다. 김창협의 문인으로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수찬·부교리 등을 거쳐 이조참의에 이르렀다. 1727년 <경종실록> 편찬에 참가하였으며, 이듬해 대사성·이조참판 등이 되었다. 1728년 이인좌의 난을 수습한 공으로 풍릉 부원군에 봉해졌다. 1730년 우의정이 되었고, 이듬해 사은사로 청에 다녀와 좌의정에 올랐다. 관직에 있는 동안 탕평책을 실시하는 데 앞장섰고, 불편 부당한 인사 관리를 했다. 글씨를 잘 썼다. 저서로 <학암집>이 있으며 글씨로 청주에 <삼충사 사적비>가 있다.

조민수[편집]

曺敏修(?-1390)

고려 말기의 무신. 본관은 창녕이며, 1361년 공민왕 때 순주 부사로 여러 장군들과 함께 홍건적의 침입을 물리치고 2등 공신이 되었다. 1368년 명나라가 원의 서울인 연경을 포위하자 좌상시로서 명의 위협에 대비하였으며, 그 후 여러 벼슬을 거쳐 1385년 판문하 부사로서 사은사가 되어 명에 다녀왔다. 1388년 우왕 때 요동 정벌군의 좌군 도통사로 이성계와 함께 출정하였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세우는 데 공헌하였다. 이듬해 이성계 일파의 전제 개혁을 반대하여 창녕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왔다. 다시 우왕의 혈통을 에워싼 논쟁으로 이성계 일파에 대항하다가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1390년 창녕으로 유배되어 죽었다.

조병갑[편집]

趙秉甲

조선 말기의 탐관. 본관은 양주이며, 1893년 고종 때 고부군수로 부임하여 만석보라는 저수지를 증축하여 물세를 징수 착복하고, 무고한 사람에게 죄를 씌워 재산을 착취하였다. 또한 태인 군수였던 자기 아버지의 비각을 세운다고 금품을 강제 징수하는 등 갖은 학정을 자행하였다. 이에 군민들의 항의를 받았으나 듣지 않아, 이듬해 동학혁명을 일으키는 직접적인 원인을 만들었다. 전봉준이 봉기할 때 습격을 받았으나 도망하였다가, 후에 파면당하여 섬으로 유배되었다.

조병세[편집]

趙秉世(1827-1905)

조선 말기의 문신·순국열사. 자는 치현, 호는 산재, 본관은 양주이다. 철종 때 문과에 급제한 뒤, 1889년 우의정을 거쳐 1893년 좌의정이 되었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관제가 개혁되자 사직하고 가평에 은거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상경하여 을사 5적신의 처형을 왕에게 간청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이루지 못하였다. 심상훈·민영환 등과 함께 여러 날 궁궐에 머물며 을사조약의 무효를 상소하다, 왜군에게 강제로 끌려가 해산되었다. 그러자 각국 공사 및 동포에게 보내는 글과 유서를 남기고 음독 자결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조병식[편집]

趙秉式(1832-?)

조선 말기의 문신. 자는 공훈, 본관은 양주이다. 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을 거쳐 홍문관에 등용되었다. 1862년 전라우도 암행어사가 되었으며, 1885년 진주 부사로 청에 가서 흥선 대원군의 석방을 요청하였다. 귀국 후 예조·형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외교 활동에 헌신하였다. 1888년 조선 대표로 러시아 대표 웨베르와 한·러 육로 통상 장정을 체결한 뒤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다. 이듬해 흉년이 들자 방곡령을 선포하여 양곡의 대일 수출을 금지하였다. 이에 일본의 반발을 사서 11만 원의 배상금을 물게 됨으로써 그 책임으로 3개월의 감봉 처분을 받았다. 1891년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동학교도들이 교조인 최제우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호소하자, 오히려 이들을 탄압하여 사태를 긴박하게 만들어 동학혁명이 일어나게 하였다. 뒤에 독립협회를 무고한 사실이 밝혀져 체포령이 내리자 외국인의 집에 피신하였다.

조병옥[편집]

趙炳玉(1894-1960)

독립 운동가·정치가. 호는 유석, 본관은 한양이며 천안에서 출생하였다. 평양 숭실학교를 거쳐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 와이오밍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어 컬럼비아 대학에 입학하여 경제학을 전공하였으며, 한인회와 흥사단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25년 컬럼비아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모교의 강사를 지냈으나 좌익교수를 배척하고 사직하였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되어 3년간 복역하였다. 1932년 조선일보사 전무 겸 영업국장을 지냈으며 1937년 수양 동지회 사건으로 다시 2년간 복역하였다. 광복 후 송진우·장덕수 등과 한국 민주당을 창당하였으며, 정부 수립 후 대통령 특사·유엔 한국 대표 등을 지냈다. 6·25전쟁 때 내무부 장관으로서 대구 방위 전선에서 진두 지휘하였다. 그 후 이승만 대통령과 의견 충돌로 사직했으며, 이후 반독재 투쟁에 앞장섰다. 1954년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되었으며 이듬해 민주당 최고위원, 1956년 대표 최고의원이 되어 야당을 이끌어 나갔다. 1960년 민주당의 공천을 받아 대통령에 입후보하였으나 신병으로 미국에 건너가 치료하던 중 사망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저서로 <민주주의와 나> <나의 회고록> 등이 있다.

조병화[편집]

趙炳華(1921-2003)

시인. 호는 편운이며 경기도 안성에서 출생하였다. 경성사범학교를 거쳐 일본 도쿄 고등사범학교 물리화학과를 졸업하였다. 광복 후 경성사범학교·제물포고등학교·서울고등학교의 교사를 지냈다. 1949년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으로 문단에 등장하였다. 그는 도회인의 애상을 평이한 수법으로 노래하여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1955년 중앙대학교·이화여자대학교 강사 등을 거쳐 경희대학교 문리대 학장·경희대 교육대학원장·세계 시인 대회장·세계 시인 대회 국제 이사·예술원 회장·문인협회 이사장·계관시인 등으로 활약하였다. 1959년 아시아 자유문학상을 비롯하여 국민훈장 동백장·모란장·서울시 문화상·3·1 문화상·예술원상·대한민국 문학상·금관 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시집으로 <하루만의 위안> <인간고도> <밤의 이야기> <시간의 숙소를 더듬어서> <공존의 이유> <남남> 등이 있다.

조봉암[편집]

曺奉岩(1898-1959)

독립운동가·정치가. 호는 죽산, 본관은 창녕이며 경기도 강화에서 출생하였다. 일본 쥬오 대학을 중퇴한 후 소련 모스크바 동방 노동자 공산대학에서 수업하였다. 3·1운동 때 참가하여 1년간 복역한 후, 1924년 조선 청년 총동맹 중앙간부·조선 공산당 중앙간부 등을 지내다가, 1930년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7년형을 받았다. 광복 후 석방되었으며, 1946년 공산당을 탈당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초대 농림부장관 등을 거쳐 1950년 제2대 민의원이 되었다. 1952년과 1956년 대통령에 출마했으나 낙선되었다. 이 해 진보당을 창당하고 위원장이 되어 정당활동을 하다가, 1958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당하였다.

조석진[편집]

趙錫晋(1853-1920)

조선 말기의 화가. 호는 소림, 본관은 함안이며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조부 조정규로부터 그림을 배워 명성을 떨쳤으며 산수·인물·화조·기명·절지·어해에 이르기까지 모두 능하였다. 고종의 초상화를 그린 공으로 영춘 군수가 되고, 품계가 정3품에 올랐다. 만년에는 후진 육성에 힘썼고, 서화 미술원·서화 협회의 창립 발기인이 되었다. 작품으로 <해림유거도> <매조도> <군리도> 등이 있다.

조성환[편집]

曺成煥(1875-1948)

독립운동가. 호는 청사. 본관은 창녕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26세 때 무관학교 학생으로 부패한 군관들을 내쫓으려다 발각되어 복역중, 3년 만에 특사로 풀려나와 참위가 되었으나 곧 사퇴하였다. 1907년 김 구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하는 한편, 헤이그 특사 파견을 도와 경술국치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다가, 1919년 북로군정서를 조직하여 군사부장이 되었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을 지냈으며 광복 후 귀국하여 대한 독립 촉성 국민회 위원장 등을 지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저서로 <대종교인과 독립운동>이 있다.

조세희[편집]

趙世熙(1942- )

소설가. 경기도 가평 출생.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및 경희대 국문과 졸업. 196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돛대 없는 장선(葬船)>이 당선되어 등단. 1975년 <칼날>을 발표한 후, <뫼비우스의 띠> <우주여행>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등을 발표했다. 그는 70년대 소외된 노동자 빈민의 삶을, 난쟁이와 연결하여 폭로한 작가이다. 동인문학상 수상.

조소앙[편집]

趙素昻(1887-?)

독립운동가·정치가. 본명은 용은이며 경기도에서 출생하였다. 일본 메이지 대학 법과를 졸업하였으며 조선법학 전수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3·1운동 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하였다. 그 해 제네바에서 열린 만국 사회당 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임시정부의 승인을 받았다. 1922년 임시정부의 내분을 수습하기 위해 안창호·김 구 등과 '시사 책진회'를 조직하였다. 1928년 김 구·이시영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으며, 1937년 독립운동 단체의 연합체인 한국 광복 전선을 결성할 때 한국 독립당 대표로 참가하여 운영 간부에 선출되었다. 광복 후 귀국하여 이승만·김 구 등과 국민의회를 설치하여 상무위원회 의장을 지냈고, 1946년 한국 독립당 부위원장이 되었다. 1948년 김 구·김규식과 함께 남북 협상에 찬동하여 평양에 갔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반대하고 정부 수립에 불참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서울 성북구에서 입후보하여 전국 최고 득점으로 당선되었으나 6·25전쟁 때 납북되어 사망하였다.

조 속[편집]

趙涑(1595-1668)

조선의 서화가. 자는 희온, 호는 창강, 본관은 풍양이다. 1623년 인조반정 때 가담하여 공을 세웠으므로 벼슬이 내려졌으나 사양하였다. 그 후 효종 때 시종으로 뽑혔으나 역시 사양하였다. 그림은 특히 새·짐승·매화·대나무 등을 잘 그렸다. 저서로 <창강일기> 그림으로 <묵매도> <매작도> <금궤> <지상 쌍금도> 등이 있으며, 글씨로 <좌찬성 이계맹 비> <조회양 사령비> 등이 있다.

조 식[편집]

曺植(1501-1572)

조선의 학자. 자는 건중, 호는 남명, 본관은 창녕이다. 어려서부터 학문 연구에 열중하여 당시 유학계의 대학자로 추앙되었다. 지리산에서 지내면서 성리학을 연구하여 독특한 학문의 체계를 이룩하였다. 1552년 명종 때 이몽량의 천거로 전생서 주부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명종의 부름을 받고 찾아가 치국의 도리를 건의하고 돌아왔다. 만년에는 두류산에 들어가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여러 차례 조정에서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그의 제자로 김효원·김우옹 등 저명한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선조 때 대사간, 광해군 때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저서로 <남명집> <남명학기> <파한잡기> 등이 있으며, 작품으로 <남명가> <권선지로가> 등이 있다.

조 신[편집]

曺伸

조선 성종 때의 문인. 자는 숙분, 호는 적암, 본관은 창녕이다. 시와 어학에 능하여 사역원경에 특선되었다. 명의 연경에 7회나 왕래하였으며, 신숙주를 따라갔던 것을 비롯하여 일본에도 3회 왕래하였다. 성종 때 김안국과 더불어 <이륜행실도>를 지었는데 국민 교화의 좋은 자료가 되었다. 만년에는 금산에서 은거하였다. 저서로 <시고> 5권과 <수문쇄록> 등이 있다.

조 엄[편집]

(1719-1777)

조선의 문신. 자는 명서, 호는 영호, 본관은 풍양이다. 영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경상감사가 되었다. 1760년 창원의 마산창·진주의 가산창·밀양의 삼랑창 등 곡식 창고를 늘려 백성들이 곡식을 수송하는 폐해를 덜고, 공물의 수납을 공정하게 하여 국고의 충실을 기했다. 후에 예조참의에 이르러 통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고구마 종자를 구하여, 제주도에 처음으로 재배하게 하여 번식시켰다. 그 후 대사간·이조서 등을 지내다가, 1777년 홍국영 등의 무고로 김해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사람됨이 강직하고 자기가 하는 일이 정당한 것이면 끝까지 고집하므로 그를 '조고집'이라 불렀다. 저서로 <해차록> <해행총재> 등이 있다.

조연현[편집]

趙演鉉(1920-1981)

문학평론가. 경남 함안에서 출생하였으며,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혜화전문학교 2년을 수료하였다. 처음 에는 시 동인지 <시림> <아>의 동인으로 시를 썼으나, 광복 후 평론을 쓰기 시작하였다. 1946년 김동리·서정주 등과 '청년 문학가 협회'를 결성하였다. 1948년 <문예>지 주간을 거쳐 서울대학교·동국대학교 강사를 지냈다. 1955년 이후 <현대문학>을 주관하는 한편, 동국대학교 교수를 거쳐 1966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그 후 문학 평론가 협회장·펜클럽 한국 본부 부위원장·문인협회 이사장 등을 지냈다. 3·1 문학상과 예술원상·문화 예술상·국민 훈장 동백장 등을 받았다. 저서로 <한국 현대문학사> <문학과 생활> <조연현 문학전집> <내가 살아온 한국 문단> 등이 있다.

조영무[편집]

趙英茂(?-1414)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한양이다. 1392년 공양왕 때 이방원의 명으로 조영규 등과 함께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죽였다. 그 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3등 개국 공신으로 한산군에 봉해졌다. 1398년 이방원의 심복 부하로서 제1차, 제2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와 난을 수습하는 데 공을 세워 1등 좌명 공신이 되었다. 그 후 1408년 부원군에 봉해졌으며, 1413년 우의정을 지내다가 병으로 물러났다.

조영우[편집]

趙榮祐(1686-1761)

조선의 화가. 자는 종보, 호는 관아재, 본관은 함안이다. 숙종 때 진사에 합격하여 첨지중추 부사 돈령부 도정에 이르렀다. 산수·인물을 잘 그려 예조(禮曹)로부터 숙종의 초상을 그리라는 명을 받았으나, 왕명이 아니면 부름에 나가지 않는 것이 고도(古道)라 하여 거절하였다 한다. 겸재·현재와 함께 '3재'로 알려졌으며 문장·서화에 모두 뛰어나 3절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작품으로 <암상포금도> <죽하기지도> 등이 있으며, 글씨로 <참봉사 윤수열 표>가 있다.

조영하[편집]

趙寧夏(1845-1884)

조선의 문신. 자는 기삼, 호는 혜인, 본관은 풍양으로 조 대비의 조카이다. 사대당의 중요 인물이며, 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조 대비의 총애를 받아 1865년 대사성으로 특진하였다. 1873년 호조판서로 있을 때, 민승호 등 민씨 일족과 결탁하여 흥선 대원군의 실정을 탄핵하여 대원군 세력의 추방에 앞장섰다. 이 해 고종의 친정(親政)이 선포되면서 대원군이 실각하자 포도대장·훈련대장 등을 지냈다. 1882년 전권대관으로 일본의 하나 부사를 접견하였으며, 전권대신이 되어 한미·한영·한독 수호 조규를 각각 체결하였다. 이 해 임오군란으로 흥선 대원군이 집권하자, 청에 가서 병사를 요청함으로써 임오군란의 주동자를 색출하였으며, 또한 대원군을 청으로 납치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민씨 세력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되었다. 이 해 다시 진주사로 청에 가서 외교 담당 고문으로 독일인 묄렌도르프를 초빙, 입국하게 하였다. 1883년 예조판서에 재임되었으나, 이듬해 갑신정변 때 살해되었다.

조 욱[편집]

趙昱(1498-1557)

조선의 학자. 자는 경양, 호는 우암, 본관은 평양이다.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에 오르지 않고 용문산으로 들어가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그의 높은 학식과 인격이 세상에 알려지자 '용문 선생'이라 불리었다. 명종 때 현사로 뽑혀 선무항 내 섬주부직을 받았고, 장수 현감을 지냈다. 당시의 저명한 학자인 이 황·서경덕과도 가깝게 지냈다. 시·그림에도 뛰어났으며 죽은 후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용문집>이 있다.

조 위[편집]

曺偉(1454-1503)

조선의 학자. 자는 태허, 호는 매계, 본관은 창녕이다.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성종의 명으로 김종직의 문집을 편찬할 때 <조의제문>을 실어 무오사화의 화근이 되었다. 하정사로 명에 다녀오다 잡혀 의주와 순천에 유배되어, 그 곳에서 병으로 죽었다. 학문이 넓고 깊었고, 문장이 뛰어나 많은 제자들이 있었다. 저서로 <매계집>이 있으며, 글씨로 <조계문 묘비>가 있다.

조위총[편집]

趙位寵(?-1176)

고려 중기의 반란자. 병부상서로 서경 유수를 겸직하고 있던 중, 1170년 정중부 등이 난을 일으켜 횡포를 일삼자, 1174년 명종 때 철령 이북의 40여 성의 호응을 얻어 난을 일으켰다. 이에 중앙에서 평장사 윤임첨이 진격해 오자 이를 격파하고 개경에까지 이르렀으나, 이의방의 역습을 받고 후퇴하였다. 그 후 관군의 공격으로 곤경에 빠졌으며, 금에 원병을 요청했으나 실패하였다. 1176년 서경이 함락된 뒤에 죽음을 당하였다.

조윤제[편집]

趙潤濟(1904-1976)

국문학자. 호는 도남이며 경북 예천에서 출생하였다. 경성제국대학 조선어 문학과를 졸업하였으며, 1952년 서울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4년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장·1960년 한국 교수 협의회 의장·1965년 영남대학교 교수 등을 지냈다. 그 후 학술원 회원을 거쳐 학술원 인문 과학부장이 되었다. 그는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고대 소설과 시가에 대한 사적 연구에 주력하였다. 그리고 1930년대에 한국 고전 문학의 체계를 세운 한국 최초의 국문학 연구가이기도 하다. 이병도·이희승·이선근 등과 진단학회 결성에 참여하여 진단학보를 발간하였고, 광복 후에도 한국 시가와 국문학사에 대한 연구 저술이 많으며, 초기의 실증주의에서 탈피하여 민족 사관을 주창, 일제 하에서 애국적 입장에 서서 국문학에 관한 학구적 연구를 견지해 왔다. 특히 <한국 문학사>는 가장 방대하고 권위 있는 저술로 평가되고 있다. 후에 학술원 공로상을 받았다. 저서로 <조선 시가사강> <한국 시가의 연구> <국문학 개설> 등이 있으며, 수필집으로 <도남잡식> <교양문선> 등이 있다.

조의설[편집]

趙義卨(1906-1978)

사학자. 평남 용강에서 출생하였으며 일본 도호쿠 제국대학 서양사학과를 졸업하였다. 1953년 미국 미네소타 대학과 하버드 대학에서 서양사를 연구하였으며, 그리스에서 그리스 사학을 연구하였다. 1954년 학술원 종신 회원이 되고, 1957년 한국 서양사 학회장이 되었다. 1962년 연세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64년 연세대학교 부총장을 지냈다. 저서로 <서양사 개론> <희랍신화> <희랍 사회 연구> <세계기행> 등이 있다.

조 익[편집]

趙翼(1579-1655)

조선의 문신. 자는 비경, 호는 포저, 본관은 풍양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정자·검열 등을 지냈으며, 1611년 광해군 때 수찬으로 있으면서 정인홍 등이 이언적·이 황의 문묘를 반대하자 이를 탄핵했다가 좌천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이조좌랑·직제학·형조참의 등을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도망한 죄로 처벌당한 후, 1643년 원손(왕세자의 맏아들)의 보양관이 되었다. 그 후 대사헌·우의정 등을 거쳐 좌의정에까지 이르렀다. 성리학의 대가로서 음률·병법·문장 등에도 뛰어났다. 저서로 <포저집>이 있다.

조인영[편집]

趙寅永(1782-1850)

조선의 문신. 자는 의경, 호는 운석, 본관은 풍양이다. 순조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대사헌을 거쳐 이조판서에까지 올랐다. 당시 나이 어린 헌종을 대신하여 순원 왕후가 정사를 맡아보게 되자, 안동 김씨가 세력을 잡기 시작하였다. 그는 이에 맞서 풍양 조씨의 중심 인물이 되어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1839년 기해박해를 일으켜 크리스트교를 탄압하였으며, 1847년 <국조보감>을 지을 때 공이 컸다. 임금을 섬기고 백성을 사랑하는 정신이 투철하였으며 문장도 뛰어났다. 저서로 <운석유고>가 있다.

조정규[편집]

趙廷奎(1791-?)

조선 순조 때의 화가. 자는 성서, 호는 임전, 본관은 함안이다. 첨사를 지냈으며, 산수·인물·꽃·새 특히 어해로써 이름이 높았다. 작품으로 <화조도> <추경산수도> <어개도> 등이 있다.

조정래[편집]

趙廷來(1943- )

소설가. 전남 승주 출생. 동국대 국문학과 졸업. 1970년 단편 <누명(陋名)> <선생님 기행>이 <현대문학>에 추천되어 등단하였다. 73년 <월간문학> 편집장, 1985-89년 <한국문학> 주간을 지냈으며, 주요 작품으로 <유형(流刑)의 땅> <불놀이> <20년을 비가 내리는 땅> <어떤 전설> <태백산맥> 등을 발표했다. 그는 분단 문제와 그에 따르는 민족의 비극적 실상을 밀도 있게 파헤치는 데 주력한 작가라는 평을 받고 있다. 현대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을 받았다.

조 준[편집]

趙逡(?-1405)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자는 명중, 호는 우재, 본관은 평양이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1376년 우왕 때 통례문 부사를 거쳐 전법판서가 되었다. 이성계의 신임을 받아 위화도 회군 후 지밀직 사사 겸 대사헌이 되었다. 1392년 공양왕 때 정도전 등과 함께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조선 건국의 공신이 되었다. 그는 특히 경제에 밝아 고려 말에는 전제 개혁안을 발표하여 문란한 토지 행정의 개편을 주장하였으며, 조선의 토지제도는 그에 의하여 정비되었다. 1397년 하 윤 등과 <경제육전>을 편찬하였다. 1400년 판문하 부사로 태종을 옹립하여 영의정 부사에 오른 후 부원군에 봉하여졌다.

조중환[편집]

趙重桓(1863-1944)

근대의 신소설 작가. 호는 일재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906년경부터 10여 년간 신소설이 유행하던 시절에 주로 일본의 것을 번안하여 신소설을 썼다. 번안 작품이 대부분이었으나 문장이 유창하여 많은 독자들의 인기를 끌었다. 1912년 우리 나라 최초의 희곡 <병자삼인>을 매일신보에 연재하였다. 대표작으로 <장한몽> <쌍옥루> <불여귀> 등이 있다.

조중회[편집]

趙重晦(1711-1782)

조선의 문신. 자는 익장, 본관은 함안이다. 영조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757년 대사간이 되었다. 사도 세자(장헌 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 죽게 되었을 때, 왕에게 그를 살려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무장으로 유배되었다. 곧 풀려나와 예조판서를 지냈다. 그는 성품이 곧고 결백하여 주위의 유혹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조지훈[편집]

趙芝薰(1920-1968)

시인. 본명은 동탁이며 경북 양양에서 출생하였다. 독학으로 중학 과정을 마친 뒤 혜화전문학교에 입학하여 불교를 배웠다. 1939년 <문장>지에 <고풍의상>과 <승무>를 추천받아 문단에 등장하였다. 광복 후 경기여자고등학교 교사와 서울여자대학교·고려대학교 교수 등을 지냈다. 1961년 벨기에에서 열린 국제 시인 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다. 이듬해 고려대학교 부설 민족문화 연구소장에 취임하면서부터 민족문화 개발에 주력하였다. 그는 청록파의 한 사람으로 주옥 같은 명시를 많이 남겼다. 그의 시는 주로 자연·무속·선 등을 소재로 한 민족적인 색채가 짙은 것이며, 불교 세계에 대한 관심은 종교의식을 일깨워 주어 작품에 반영되었다. 박목월·박두진 등 다른 청록파 시인들이 후에 시 세계의 근본적 변혁을 가져온 데 반하여, 그는 초기의 자연 친화의 시 세계를 비교적 많이 유지하였다. 1956년 자유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시집으로 <청록집> <조지훈 시선> 등이 있으며, 수필집 <창에 기대어>, 논문집 <한국 민족운동사> 등이 있다.

조 충[편집]

趙沖(1171-1220)

고려의 문신. 자는 감약이며 본관은 횡천이다.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내시가 되었으며, 1211년 희종 때 대사성·한림학사 등을 지냈다. 1216년 고종 때 추밀원부사를 거쳐 상장군이 되었다. 이 때 거란족이 황해도에 침입하자 부원수로 나가 싸웠으나 패하였고, 다시 서북면 병마사로 출전하여 인주 부근에서 거란족을 무찔렀다. 1219년 몽고군과 연합하여 거란군의 근거지인 강동성을 공격하여 항복받았다. 죽은 후 문하시중에 추증되었다.

조태억[편집]

趙泰億(1675-1728)

조선의 문신. 자는 대년, 호는 겸재, 본관은 양주이다.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북평사·부교리 등을 지냈다. 1709년 대사성이 되었으며 이때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왔다. 김일경 등과 함께 1721년 신임사화를 일으켜 노론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우의정으로 승진하였으나, 노론의 민진원 등의 탄핵으로 벼슬을 잃었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다시 좌의정이 되었으나 이듬해 병으로 벼슬에서 물러났으며, 영돈령 부사로 있다가 사망하였다. 1776년 영조 때 관작을 추탈당하였다. 저서로 <겸재집>이 있다.

조태채[편집]

趙泰采(1660-1722)

조선의 문신. 자는 유량, 호는 이우당, 본관은 양주이다.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옥구 현감·평안 감사 등을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다. 1713년 지중추 부사로 있을 때 청에 다녀왔다.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으로 경종 즉위 후 연잉군(후의 영조)을 세자로 책봉하는 데 소론파와 대립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진도로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고 죽었다. 저서로 <이우당집>이 있다.

조풍연[편집]

(1914- ) 수필가·언론인. 서울 출생. 연희전문 문과 졸업(1938). 1934년 신백수(申百秀) 등과 <삼사문학(三四文學)> 동인으로 문학활동을 시작, 1938년 <젊은 예술가 군상(群像)>이 <매일신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수필집으로 <명상하는 서민> <청사수필> <여성의 적> <여성의 길> 등을 간행, 현대의 혼돈된 문화를 피하여 동양의 고전적인 면을 추구하였다. 1940년 문예지 <문장>을 편집했으며 을유문화사 주간·<한국일보> 문화부장·<소년한국일보> 주간 등을 역임했다. 추리소설 <심연(深淵)의 안테나>, 소년소설 <붉은 마인> <소년검객 마억(馬億)> 등 다수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조 헌[편집]

趙憲(1544-1592)

조선의 문신·의병장. 자는 여식, 호는 중봉, 본관은 백천이다.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정주 교수를 거쳐 호조·예조좌랑 및 감찰 등을 지냈다. 1582년 보은 현감으로 있을 때, 상소를 올려 노산군(단종)의 후사를 세울 것과 사육신의 정문을 세울 것을 청했으나 시기하는 자의 무고로 파면당하였다. 1586년 공주 제독이 되어 선비들의 규율을 엄하게 하고 앞장서서 실천하니 찾아드는 선비가 많았다. 이때 또 상소를 올려 이 이를 변호하는 한편, 정여립의 행패를 비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벼슬을 내놓고 옥천으로 갔다. 1589년 또 상소를 올려서 시정의 득실을 논하여 길주로 유배되었다. 그 해 정여립의 모반 사건이 일어나자 선견지명이 있다 하여 석방되었다. 1591년 일본 사신이 왔을 때 왜적에 대비할 방법을 상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시골로 내려가 탄식하였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보은의 통로를 차단하는 등 공이 컸으나 순찰사 윤석각의 시기를 받고 홍성으로 옮겨갔다. 그곳에서 의병을 일으켜, 청주에 진을 치고 있는 왜군을 승장 영규와 합세하여 물리쳐 청주성을 탈환하였다. 당시 금산에 있는 왜적이 충청도 일대를 석권하리라는 소식을 듣고 영규와 함께 7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금산 10리 밖에 이르렀다. 원래는 권 율과 합세하여 협공할 계획이었는데 왜적이 이를 알고 미리 역습해 오자, 700명의 의병과 함께 끝까지 싸우다가 모두 전사하였다. 1754년 영조 때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고경명·김천일·곽재우와 함께 '임진 4충신'의 한 사람이다. 저서로 <중봉집> <조천록> 등이 있다.

조흔파[편집]

趙欣坡(1918-1980)

소설가. 본명은 봉순으로 평양에서 태어났다. 일본 센슈 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경성 방송국 촉탁이 되었다가, 아나운서로 활약하였다. 경기여고 교사·숙명여대 강사를 역임하였고, 1950년 국방부 군무원으로 정훈국 부산 분실 선무 반장 겸 종군 작가로 활동하였다. 이어 교육자로 활동하였고 <현대여성> 주간을 맡았다. 국도신문사·세계일보사·한국경제신문사 등에서 논설 위원으로 활약하고, 공보실 공보 국장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명랑 소설 작가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 작품으로 다큐멘터리 <대한 백년> <만주국>, 장편 <임꺽정전> <주유천하>, 단편 <봄은 도처에> 등이 있다.

주기철[편집]

朱基徹(1897-1944)

목사. 경남 창원에서 태어났다. 웅천에서 남학회를 조직하여 애국 사상을 고취하고 3·1운동 때 고향에서 만세 운동을 지휘한 뒤, 예수교 장로회에 재직하며 신앙 운동과 애국 운동을 일으켰다. 중일 전쟁 때 평양 산정현 교회의 목사로 있으면서 신사 참배를 끝까지 거부하며 항일 운동을 하다가 1938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0년 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 옥사하였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주명신[편집]

周命新

조선 말기의 의학자. 호는 기하이며 경북 상주에서 출생하였다. 학문이 깊고 재능이 많았으며 허 준의 제자로 병을 잘 치료하였다. 저서로 <의문보감>이 있는데, 이 책은 임상 치료학과 의학의 입문서이다.

주세붕[편집]

周世鵬(1495-1554)

조선의 학자·문신. 자는 경유, 호는 신재, 본관은 상주이다.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부수찬 등을 지내다가 김안로의 배척을 받아 좌천되었다. 그 후 곤양 군수를 거쳐 풍기 군수로 있을 때, 1542년 백운동에 고려 말의 학자 안 향의 사당을 세웠다. 이듬해 백운동 서원(소수 서원)을 창설하였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다. 1551년 황해 감사로 있을 때 해주에 수양 서원(문헌 서원)을 창설하였다.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죽은 후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무릉잡고> <죽계지> <동국 명신 언행록> 등이 있으며 단가 8수가 전한다.

주시경[편집]

周時經(1876-1914)

한글학자. 호는 한힌샘이며 황해도 봉산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는 이회종에게 한문을 배웠으며 1894년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 1896년 독립협회 조직에 참여한 후, 이 해 협성회를 만들었다. 1898년 배재학당 만국지지과를 졸업하였고 이어 배재보통과에 입학하였다. <독립신문> 교정원으로 있으면서 '조선문동식회'를 결성하여 한글 기사체의 통일과 연구에 힘썼다. 1905년에는 국어 연구와 사전 편찬 사업에 관한 건의서를 정부에 제출하였고, 1907년 어윤적·이능화 등과 학부의 국문 연구소 위원이 되었다. 전 생애를 한글의 문법과 맞춤법의 과학적 연구에 바쳤으며, 많은 제자를 육성하였다. 또한 '조선어 연구회(한글학회의 전신)'를 창설하게 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1908년 <국어 문전 음학>을 저술하였으며, 1910년 <국어문법>을 지었다. 이어 최남선이 '광문회'를 창설하자, 여기서 간행되는 국어 관계 서적의 교정과 <말모이(국어사전)> 편찬을 담당하였다. 1914년 <말의 소리>를 저술하였으며 이 해 독립운동 동지들이 수감되자, 해외 망명을 준비하던 중 병으로 죽었다. 저서로 <주시경 유고> 등이 있다.

주요섭[편집]

朱耀燮(1902-1972)

소설가·교육자. 호는 여심이며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1918년 도쿄 아오야마 학원 중학부에 재학중, 이듬해 3·1 운동이 일어나자 귀국하여 김동인과 함께 <독립신문>을 발간하다가 붙잡혀 감옥 생활을 하였다. 1920년 상하이로 건너가 호강 대학에 입학하였다. 이듬해 단편 <추운 밤>을 <개벽>에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장하여 경향적인 작품을 쓰며 본격적인 활동을 하였다. 1927년, 상하이 호강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스탠포드 대학원을 수료하고 귀국하였다. 1931년 <신동아> 주간으로 있으면서 순수 문학으로 전향하였다. 1934년부터 10년간 중국의 보인대학 교수를 지냈다. 광복 후 <코리아 타임스> 주필을 지냈으며 경희대학교 영문과 교수·대한 공론사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대표작으로 장편 <길> <구름을 잡으려고>, 단편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아네모네의 마담> <추물> 등이 있다.

주요한[편집]

朱耀翰(1900-1979)

시인·언론인·정치가. 호는 송아이며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상하이 호강대학을 졸업하였으며, 1919년 <창조>의 동인으로 창간호에 발표한 <불놀이>는 우리 나라 최초의 주지시로 평가되고 있다. 1927년 <동아일보> 기자를 거쳐 <동아일보> 편집국장·<조선일보> 편집국장 등을 지냈다. 1958년 4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60년 부흥부(건설부) 장관·대한 해운공사 사장·전국 경제인 연합회 부회장 등을 지냈다. 저서로 <부흥론>이 있으며 시집 <아름다운 새벽>, 평론집 <자유의 구름다리> <안도산 전집> 등이 있다.

주의식[편집]

朱義植

조선 중기의 가인·시조 작가. 자는 도원, 호는 남곡, 본관은 나주이다.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칠원 현감을 지냈으며, 노래와 시조를 잘 짓기로 유명하였다. 그의 노래는 내용이 도덕적이고 건실하였으며, 시조 14수가 <청구영언> <해동가요> <가곡원류> 등에 실려 전한다.

죽죽[편집]

竹竹(?-642)

신라 선덕 여왕 때의 무신. 대야주에서 출생하였으며 사지 벼슬에 있으면서 대야성의 도독 김품석의 부하로 활약하였다. 642년 백제의 장군 윤 충에게 대야성이 포위되자, 끝까지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후에 급찬에 추증되었다.

죽지[편집]

竹旨

신라 중기의 장군. 죽지랑이라고도 한다. 화랑 출신으로 장군이 되어 649년 진덕 여왕 때 김유신과 함께 도살성에서 백제군을 격파하였다. 그 공으로 파진찬을 거쳐 중시가 되어 기밀 사무를 관장하였다. 661년 태종 무열왕 때 백제의 잔병 소탕전에 참전하였으며 이 해 문무왕이 즉위하자 귀당 총관이 되었다. 668년 나·당 연합군의 고구려 정벌 때 경정 총관으로 참전하였고, 671년 석성에서 당 군사와 싸워 적을 5천여 명이나 죽이는 등 큰 공을 세웠다. 화랑 득오곡이 그를 흠모하여 지은 향가 <모죽지랑가>가 전해진다.

준왕[편집]

準王

고조선의 마지막 왕. 부왕의 아들이며 기자의 자손이다. 한나라 초기 기원전 195년 하북 지방에서 망명하였다고 하는 위만을 신임하여 박사를 삼았는데, 이듬해 위만이 모반하여 왕검성을 빼앗겼다. 준왕은 바다가 있는 남쪽으로 내려가 마한 지방을 빼앗고 한왕이 되었다고 한다. 준왕이 남쪽으로 내려간 곳이 전라도 익산, 또는 경기도 광주 경안이라고 한다.

준정[편집]

俊貞(?-576)

신라의 원화(源花). 576년 미녀 2명을 뽑아 원화로 삼을 때 남모(南毛)와 함께 선발되어 각각 300여 명의 무리를 거느렸다. 남모와 아름다움을 다투다가 서로 질투하게 되어 남모를 자기 집으로 유인하여 독주를 먹여 취하게 한 다음 강물에 던져 죽였다. 후에 이것이 발각되어 사형당하였다. 이로써 원화 제도는 폐지되고 화랑이 생겼다.

중종[편집]

中宗(1488-1544)

조선 제11대 왕(재위 1506-1544). 성종의 둘째 아들이며 연산군의 동생이다. 1494년 성종 때 진성 대군으로 봉해지고, 1506년 박원종 등에 의해 연산군이 폐위된 후 왕으로 추대되었다. 즉위 초, 부패된 정치를 개혁하기 위하여 1515년부터 조광조를 등용하여 그가 주장하는 지치주의를 표방한 이상정치를 실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신진세력의 과격한 개혁정치는 훈구파의 반발을 초래하였다. 1519년에는 남 곤·심 정 등의 모함에 빠져 기묘사화를 일으켜, 신진세력을 숙청함으로써 개혁정치의 의도는 사라지고 훈구파의 세력만 커져 갔다. 국방 상태도 혼란하여 1510년 3포 왜란이 일어나 경상도 해안 일대가 큰 피해를 입었으며, 1522년 동래 염장의 왜변·1524년 야인의 침입·이듬해 전라도 일대를 석권한 왜구의 행패 등 나라 안팎이 어수선하였다. 1537년 윤원로 형제가 등장하여 김안로를 추방하였으나, 이들 역시 횡포가 극심하여 1545년 명종 때 을사사화를 일으키게 하였다. 중종은 왕위에 오른 후 미신 타파를 위해 <소학> <이륜행실> 등을 간행하였으며, <경국대전> <대전속록>의 발행으로 법률제도의 확립에 노력하였다. 그 밖에 역사·지리·문학·언어·사회의 각 방면에 걸쳐 많은 문헌이 편찬 간행되었다. 특히 주자도감을 설치하여 대량의 활자를 만들고 역대 실록의 등사를 마쳤으며, 그것을 사고(史庫)에 비치한 것은 재위 기간 중 중요한 업적으로 꼽힌다.

지눌[편집]

知訥(1158-1210)

고려의 승려. 호는 목우자, 속성은 정씨이며 시호는 불일보조국사라고도 한다. 조계종의 창시자로 8세에 승려가 되어 도(道)를 구하였다. 1182년 명종 때 승과에 급제하였으나 승려로서의 출세를 포기하고 많은 선배들을 찾아다니며 가르침을 받았다. 창평의 청원사에서 <육조 단경>을 읽다가 스스로 깨달은 바가 있어서 도를 구하기 위하여, 1185년 하가산의 보문사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대장경>을 열독하는 등 불도에 전력하며 독자적인 사상을 확립하였다. 이어 지리산 상무주암에 은거하며 외부와의 인연을 끊고 참선하여 선의 참뜻을 깨달았다. 1200년 송광산 길상사에서 11년 동안 제자들에게 설법을 전하니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희종이 즉위하여 송악산을 조계산, 길상사를 수선사라 개명하여 하사하고 가사(법복)를 보내왔다. 그는 중생을 떠나 부처가 따로 없음을 강조하여 선종과 교종을 통합하였다. 승도를 소집하여 법복을 입고 당에 올라가 설법하다가 주장을 잡은 채 사망하니 탑을 세우고 감로라 하였다. 죽은 후 국사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진심직설> <수심결> <정혜결사문> <상당록> <염불요문> 등이 있다.

지석영[편집]

池錫永(1885-1935)

조선 말기의 학자. 자는 공윤, 호는 송촌, 본관은 충주이다. 1876년 수신사 자격으로 일본을 다녀온 박영선에게서 <종두귀감>을 얻어보고 느낀 바 있어, 1879년 부산에 있는 일본 제생의원에 가서 종두법을 배웠다. 그 해 겨울 충북 충주 덕산면에서 우리 나라 최초로 40여 명에게 종두를 실시하였다. 이듬해 수신사 김홍집을 따라 일본에 건너가 종두를 위한 우두의 제조법을 배우고 돌아와 종두법을 보급하기에 힘썼다. 1883년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참의와 동래 부사 등을 지냈으며, 1885년 <우두신설>을 저술하였다. 그는 천연두가 유행할 때마다 우두 종법을 실시하여 우리나라 의학 발전에 많은 공을 세웠다. 1899년 경성의학교를 세워 10년간 교장으로 재직했으며, 1905년 <신정국문 6개조>를 고종에게 상소하여 공포하게 하고, 학부 안에 국문 연구소를 설치하였다. 1909년 한자를 국어로 풀이한 <자전석요>를 간행하여 한자 해석의 새로운 방법을 개발하였다. 그는 우리나라 종두법 시행의 선구자이며 국문의 연구에 공헌한 바가 크다.

지엄[편집]

知嚴(1464-1534)

조선의 승려. 호는 야로, 본관은 부안이며 속성은 송씨이다. 1491년 성종 때 여진족의 침입에 맞서 싸워 크게 이겼다. 그 후 계룡산으로 들어가 조계 대사 밑에서 불도를 닦았다. 연희·정심에게서 교리를 배운 후, 지리산으로 들어가 더욱더 불도를 닦고 연구하였다. 제자들에게 대승경론을 강의하였으며, 1534년 지리산 수국암에서 <법화경>을 강의하다가 죽었다. 저서로 <벽송집> <가송잡서> 등이 있다.

지증왕[편집]

智證王(437-514)

신라의 제22대 왕(재위 500-514). 내물왕의 증손이며 법흥왕의 아버지로 지증 마립간이라고도 한다. 502년 순장법을 금하고 농사를 장려하였으며, 소를 길러 땅을 갈게 하였다. 이듬해 국호를 신라로 정하고 왕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504년 상복법을 제정하였으며, 505년 주·군·현을 정하고 각 주에 군주를 두었다. 509년 서울에 동시(東市)를 두었고, 512년 우산국(울릉도)을 정복하였다. 시호는 지증인데, 우리나라 최초의 시호이다.

지청천[편집]

池靑天(1888-1959)

독립운동가. 호는 백산, 본명은 지대형이며 일명 이청천이라고도 한다.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정부 파견 유학생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1919년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교성 대장이 되어 독립군 간부를 길러냈다. 청산리 싸움 후 일본군의 보복 작전을 피해 헤이룽장으로 이동하였다. 혹하사변이 일어나자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1940년 임시정부 광복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중국군과 협력하면서 항일 투쟁을 계속하였다. 광복 후 귀국하여 '대동청년단'을 창설, 청년 운동에 힘썼으며, 무임소 장관·민주 국민당 상임 최고위원·제헌 의원·제2대 국회의원 등을 지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지통[편집]

智通

신라 성덕왕 때의 승려. 7세에 출가하여 영취산의 낭지 법사에게 나아가 제자가 되었다가, 의상 밑에서 불경의 깊은 뜻을 깨달았다. 원효 대사가 반고사에 있을 때 찾아가서 가르침을 받고 <초장관문>과 <안신사심론>을 지었다고 한다. 의상 대사의 10제자 중의 한 사람이며, 세상에서 10대덕 중 한 사람이라 칭한다. 저서로 <추동기>가 있다.

진덕 여왕[편집]

眞德女王(?-654)

신라의 제28대 여왕(재위 647-654). 이름은 승만, 갈문왕의 딸이며 연호를 태화로 고쳤다. 648년 김춘추를 당에 보내어 백제를 토벌하기 위한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후부터 당을 모방하여 관리들의 의복도 당의 것을 따랐으며, 여왕이 친히 <태평송>을 지어 당에 보냈다. 650년 당의 연호인 영휘를 사용하여 당의 환심을 샀으며, 652년 김인문을 당에 보내어 친교를 맺었다. 안으로는 김유신과 같은 명장을 기용하여 삼국 통일의 기초를 닦았다.

진성 여왕[편집]

眞聖女王(?-897)

신라의 제51대 여왕(887-897). 이름은 만, 경문왕의 딸이며 정강왕의 여동생이다. 정강왕이 후사 없이 죽자, 유언에 따라 왕위에 올랐다. 888년 각간 위홍과 대구 화상에게 명하여 향가집 <삼대목>을 편찬하게 하였으나 전하지 않는다. 품행이 단정하지 못하여 왕실의 풍기를 문란하게 하였으며, 정치의 혼란뿐 아니라 세금 징수와 군사 제도도 매우 문란해졌다. 이 틈을 타서 북원의 도적 양 길의 부하 궁예가 자주 국경을 침범하였고, 견훤이 모반하여 후백제를 세움으로써 다시 삼국이 맞서게 되었다. 재위 11년 만에 왕위를 감당치 못하고 효공왕에게 물려주고 죽었다.

진재해[편집]

秦再奚(1691-1769)

조선의 화가. 자는 정백, 호는 벽은, 본관은 풍기이다. 도화서의 화원으로서 벼슬이 첨사에 이르렀다. 인물·산수화를 주로 그렸으며 숙종의 전신화를 비롯하여 <월하취적도> 등이 남아 있다.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 때 의병을 일으켜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으나 상훈을 사양하였다.

진지왕[편집]

眞智王(?-579)

신라의 제25대 왕(재위 576-579). 진흥왕의 둘째 아들이다. 백제의 침공의 자주 받았으나 내리 서성을 쌓고 잘 막아내었다. 중국 진(陳)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하였으며 상대등 거칠부에게 국사를 맡겼다.

진평왕[편집]

眞平王(?-632)

신라의 제26대 왕(재위 576-632). 진흥왕의 손자이다. 수나라와 친교를 맺어 원광·담육 등을 유학시켰으며, 609년 수의 원조를 받아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수가 망하고 당이 건국되었을 때도 화친 정책을 써서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연호를 건복이라 고치고 여러 문물 제도를 개혁하였으며 남산성을 쌓는 등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진표[편집]

眞表

신라 중기의 승려. 12세에 금산사로 들어가 숭제 법사 밑에서 불도를 닦았다. 선계산 불사의암에서 고행한 후, 740년 효성왕 때 지장보살의 현신을 맞아 보살계를 받았다. 그 후 영산사에서 도를 닦고 마침내 소원이던 미륵보살의 현신을 맞았다. 752년 경덕왕 때 <점찰경> 2권과 간자(점치는 대쪽) 189개를 받았다. 그 후 경덕왕의 부름으로 궁중에 보살계를 베풀고 불교를 융성하게 하였다. 영심·보종·신방·체진·진해·진선·석충 등 많은 제자를 길러냈으며, 법상종의 창시자이다.

진흥왕[편집]

眞興王(534-576)

신라의 제24대 왕(재위 540-576). 법흥왕의 동생이며 갈문왕 입종의 아들로 7세에 즉위하여 한때 왕태후가 섭정을 하였다. 544년 흥륜사를 창건하고, 이듬해 이사부로 하여금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다. 551년 연호를 개국으로 고쳤고 팔관회를 두었으며, 우륵을 후대하여 음악을 보급하였다. 553년 황룡사를 창건하였으며, 백제의 한강 유역을 침략하여 여러 성을 빼앗았는데, 이에 백제 성왕이 분하게 여겨 쳐들어온 것을 크게 격파하였다. 562년 사다함의 공으로 대가야를 평정하고 주위의 침입에 대비하여 군대를 강화하였다. 또한 새로 개척한 땅에 순수비를 세웠는데, 현재까지 4개의 순수비(창녕·북한산·황초령·마운령)가 전해지고 있다. 576년 화랑제도를 만들어 삼국 통일의 원동력을 이루게 하였다. 황룡사의 장륙상을 주성하는 등 불교의 번창에도 힘이 컸고, 개국을 위시하여 대창·홍제의 연호를 사용하여 자주적인 기상을 나타냈다. 신라 중흥기의 왕이다.

징엄[편집]

澄儼(1090-1141)

고려의 승려. 호는 복세이며 순종의 넷째 아들이다. 8세 때 흥왕사의 의천에게 가서 승려가 되었으며 불일사에서 구족계(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를 받았다. 1105년 승통이 되었으며, 홍원사·개태사 등의 주지를 지냈다. 1122년 인종이 즉위하자 5교도 승통이 되었으나, 이자겸의 횡포를 보고 귀신사에 은퇴하였다. 1141년 왕명으로 흥왕사에 머물다가 죽었다. 죽은 후 원명 국사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