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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인명사전/한 국 인 명/ㅊ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차미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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車美理士(1880-1955)

여류 교육자. 본관은 연안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남편이 죽자 크리스트 교인이 되었다. 1905년 미국으로 건너가 안창호와 함께 <독립신문>을 발간하였으며, 그 후 캔자스 주의 더스콘 대학 신학과를 졸업하였다. 1917년에 귀국하여 배화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20년 '조선 여자 교육협회'를 설립하였으며, 이어 전국 여자 순회 강연단을 만들어 전국적으로 계몽 강연회를 가졌다. 이 강연회에서 모은 돈으로 근화(덕성)여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재단 이사장을 지냈으며, 덕성여자대학을 세웠다. 후에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차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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車凡錫(1924- ) 극작가·연출가. 전남 목포 출생.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후 10여 년간 교편 생활을 하다가, 195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밀주>로 가작 당선되고, 1956년 <귀향>으로 당선되었다. 그 해에 '제작극회'의 동인으로 극작활동을 시작하였다. 현재 예술원 회원이며, 주요 작품으로는 <껌질이 깨지는 아픔 없이는>(1961) <태양을 항하여> <불모지>(1958) <산불>(1962) <갈매기>(1963) <청기와집>(1964) <열대어>(1966) <장미의 성>(1968) <대리인>(1969) 등이 있다.

차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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車天輅(1556-1615)

조선의 문신. 자는 복원, 호는 오산, 본관은 연안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문사로 뽑혔다. 1589년 통신사 황윤길을 따라 일본에 다녀왔으며, 벼슬이 봉상시첨정에까지 이르렀다. 그 후 문장이 수려하여 명나라로 발송되는 대부분의 외교문서를 그가 작성하였는데, 재주가 뛰어나 '동방문사'라는 이름으로 명나라에서 불리었다. 특히 한시를 잘 지었으며, 당시 한 호의 글씨와 최 입의 문장과 더불어 '송도 3절'로 불릴 정도로 유명하였다. 1792년 정조 때 왕명으로 그의 저서를 간행하여 반포하게 하였다. 저서로 〈오산집〉 〈오산설림〉 등이 있다.

창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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昌王(1380-1389)

고려의 제33대 왕(재위 1388-1389). 우왕의 아들이다. 1388년 우왕이 왕(王)씨의 혈통이 아니고 신 돈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폐위되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이 때 왕씨 종실에서 왕을 뽑자는 주장이 많았으나, 이 색·조민수 등의 강력한 주장으로 추대되었다. 후에 이성계에 의해 폐위되어 강화에서 살해되었다.

채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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蔡東鮮(1901-1953)

작곡가·바이올린 연주가.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베를린에 유학, 슈테른센 콘세르바토리움에서 리하르트 하르체에게서 바이올린을, 빌헬름 클라테에게서 작곡을 배웠다. 귀국하여 4회의 바이올린 독주회를 가졌고, 1932년 작곡 발표회를, 1937년 가곡집을 발간하였다. 현악 4중주단을 조직하여 실내악 발전을 위해 활약하였고, 1938년 동아일보사 주최 제1회 전 조선 창작곡 발표 대음악제에서 <환상곡 D단조>를 자신의 바이올린 연주로 발표하였다. 광복 직후 고려음악협회를 조직, 협회장에 선임되었다. 가곡 <망향>, <모란이 피기까지는> 외에 현악4중주곡, 바이올린 소나타, 현악 모음곡 등 주옥같은 작품을 많이 남겼다.

채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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蔡萬植(1904-1950)

소설가. 호는 백릉이며 전북 옥구에서 출생하였다. 중앙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와세다 대학교 영문과를 중퇴하였다. 1925년 <조선문단>에 단편 <새길로>가 추천되면서 문단에 등장하였다. 동아일보의 사회부 기자·개벽사의 편집기자 등으로 근무하면서 동반자적인 작품을 썼다. 1934년경부터 <레디메이드 인생> <인텔리와 빈대떡> <탁류> 등 풍자성이 농후한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의 작품은 인간생활을 예리하게 비판하는 풍자성이 강한 사회소설이 대부분이다. 광복 후에는 작품 활동이 뜸하다가 폐결핵으로 사망하였다. 작품에 장편 <천하태평> <아름다운 새벽> <배비장전> <허생전> 등이 있으며, 단편 <옥랑사> <잘난 사람들> 등이 있다.

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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蔡壽(1449-1515)

조선의 문신. 자는 기지, 호는 나재, 본관은 인천이다. 1469년 예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부수찬에 올라 춘추관에서 일했으며, <세조실록> <예종실록>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는 음악에도 뛰어나 1475년 성종 때 이조정랑으로서 장악원의 일까지 맡아보았다. 한편 당시 아첨 잘하기로 이름난 임사홍을 몰아내 백성들을 기쁘게 해 주었다. 그 후 충청도 관찰사·예조참판·평안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1504년 연산군 때 갑자사화에 관련되어 유배되었다. 저서로 <나재집>이 있다.

채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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蔡濟恭(1720-1799)

조선의 문신. 자는 백규, 호는 번암, 본관은 평강이다. 영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승무원 부정자를 거쳐 교리 등을 지냈다. 그 후 이조참판·호조참판을 거쳐, 1771년 동지정사로 청에 다녀왔다. 정조 초에 형조판서가 되어 정조를 살해하려는 음모를 여러 차례 적발해 처벌하였으며, 후에 홍국영과 뜻이 맞지 않아 벼슬에서 물러났다. 1780년 규장각 제학이 되어 서명응 등과 함께 <국조보감>을 편찬하였다. 이어 예조판서·지중추 부사 등을 거쳐 좌의정에까지 올랐다. 1790년 천주교도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자, 이것을 만류하여 파직되었다가 1792년 복직되었다. 그 후 여러 차례 파직·유배 등의 처벌을 받았으나, 정조의 신임으로 곧 등용되었으며 판중추 부사로 재직중 죽었다. 1801년 순조 때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을 하면서 관직을 박탈하였으나, 1823년 복관되었다. 저서로 <번암집> 59권이 있다.

채홍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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蔡洪哲(1262-1340)

고려의 문신. 자는 무민, 호는 중암, 본관은 평강이다. 충렬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장흥 부사 등을 지내다가 사직하고 불교와 음악을 연구하였다. 충선왕이 왕위에 오르자, 밀직부사를 거쳐 정승에까지 이르렀다. 1314년 충숙왕 때 토지와 세금의 제도를 다시 정비할 때, 민전을 횡령하여 거부가 되었다. 그 후 자기집 북쪽에 전단원을 두어 승려들을 살게 하는 한편, 병든 사람들에게 약을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또한 중화당을 지어 과거에 재상을 지낸 국로(國老) 8명을 맞아들여 <자하동신곡>을 지었는데, 이것이 <고려악부>에 전한다.

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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處英(1880-1955)

조선 선조 때의 승려. 호는 뇌묵이며 서산 대사 휴정의 제자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전라도에서 승병을 일으켜 공을 많이 세웠다. 1594년 권 율의 명령으로 남원의 교룡산성을 다시 고쳐 쌓았다. 1794년 정조 때 표충사와 수충사에 서산 대사와 사명당과 함께 그의 진영(얼굴을 그린 화상)을 안치하게 하였다.

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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處容

신라 헌강왕 때의 사람. 879년 왕이 행차하여 개운포에 이르렀을 때, 이상한 생김새와 괴이한 의복을 입은 처용이라는 자가 왕 앞에 나타나 노래하고 춤추면서 왕을 따라 서울까지 왔다. 처용은 급간이라는 벼슬을 받고 달밤이면 나가 춤추고 노래하다가, 마침내는 그 행방을 감추어 버렸다. 악부에 그의 춤을 '처용무' 또는 '상염무'라고 전한다. 1505년 연산군 때 모든 문서에 '처(處)'자 사용을 엄금하여 처용을 '풍두(豊頭)'라고 하였다.

척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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拓俊京(?-1114)

고려 인종 때의 무신. 곡산 척씨의 시조이다. 어려서 집이 가난하여 학문을 배우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다가 계림공(후의 숙종)의 종이 되었다. 1104년 숙종 때 평장사 임 간을 따라 동여진 정벌에 나가 공을 세워 천우위 녹사참군사가 되었다. 1107년 예종 때 중군 병마록사로 윤 관을 따라 동여진을 정벌할 때 길주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워 공부원외랑이 되었다. 인종 초 이부상서를 거쳐 문하시랑 평장사에 이르렀다. 1126년 이자겸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대궐로 쳐들어갔으나, 왕의 권유로 뜻을 바꾸어 이자겸을 잡아 유배시키고 그 공으로 문하시중에 올랐다. 후에 정지상의 탄핵으로 유배되었다가 곡주에서 병으로 죽었다.

천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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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鏡子(1924- )

여류 화가·수필가. 전남 고흥에서 태어나, 일본 도쿄 여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파리 아카데미 고에즈에서 수학하였다. 홍익대 전임강사·조교수·부교수·교수 등을 지냈고 수차례의 개인전을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가졌다. 국전 심사위원·초대작가·국전 운영위원·미전 운영위원 등을 지냈고 예술원 회원으로 있다. 1955년 국전 대통령상, 1964년 문예상 외에 3·1 문화상·예술원상·은관 문화훈장·시문화상 등을 수상하였다. 작품으로 <생태> <꽃무늬> <정> <꽃과 병사> 등이 있고, 저서로 <한, 여인 소묘>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 <천경자 아프리카 기행화문집> 등이 있다.

천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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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寬宇(1925-1991)

언론인·사학가. 충북 제천에서 출생하였으며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사학과를 졸업하였다. 1951년 대한통신 기자를 거쳐 <한국일보> 논설위원·<조선일보> 편집국장·<동아일보> 편집국장 등을 지냈다. 1971년 <동아일보> 이사로 취임하여 언론계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저서로 <썰물 밀물> <언관사관> <한국사의 재발견> 등이 있다.

천상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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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祥炳(1930-1993)

시인·평론가. 경남 창원 출생. 서울대학교 상과대 수학(1955). 중학 5학년 때 <죽순(竹筍)>에 시 <공상(空想)> 외 1편으로 추천을 받았고, 대학 재학시 송영택(宋永擇) 등과 함께 동인지 <신작품(新作品)>을 발간하였다. 1952년 <문예>에 시 <강물> <현대문학>에 평론 등이 추천되어 문단에 정식 데뷔했다. 이후 시 <덕수궁의 오후> <새> <장마> <간봄> <귀천(歸天)> 등과, 평론 <사실의 한계> <비평의 방법> <젊은 동양 시인의 운명> 등을 발표하였다. 1967년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고문을 받았고 70년 그의 실종 이후, 친구들이 유고시집으로 <새>를 낸 후에 서울시립정신병원에서 찾아내었다. 시집으로 <새> <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 등과 시선집 <주막에서>가 있다.

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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哲宗(1831-1863)

조선의 제25대 왕(재위 1849-1863). 휘는 변, 호는 대용재, 전계 대원군의 셋째 아들로 1844년 형 회평군이 옥에 갇혀 죽자, 가족과 함께 강화로 유배되었다. 1849년 덕완군에 피봉되어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순원 왕후의 명으로 19세에 왕위에 올랐다. 1851년 김문근의 딸을 왕비로 맞음으로써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이듬해부터 왕이 직접 정치를 하였으나, 정치에 어두워 세도정치는 극도로 문란해졌다. 따라서 삼정은 어지러워지고 도처에 탐관오리들이 백성들을 착취하여 국가는 도탄에 빠졌다. 이에 민중의 분노가 폭발하여 1862년 진주에서 민란이 일어나 삼남 일대를 휩쓸었으며, 잇따라 함흥·제주에서도 대규모 민란이 일어났다. 이와 같은 상태에서 최제우의 동학은 시대의 뜻에 맞는 사상으로 날로 커져갔다. 1863년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인다고 최제우를 처형하였으나 동학의 세력은 날로 확대되었다. 철종은 재위 14년 만에 병으로 후사 없이 죽었는데, 세도의 농간으로 국정을 잡아보지 못하였다.

첨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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沾解王

신라의 제12대 왕(재위 247-261). 조분왕의 동생이다. 248년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어 서로 화친하였다. 249년 사량벌국을 쳐서 신라에 통합시켰으나 왜구의 침입을 받았다. 255년 백제의 침공을 받았으며 달벌성을 축조하였다.

초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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肖古王(?-214)

백제의 제5대 왕(재위 166-214). 소고왕 또는 속고왕이라고도 하며 개루왕의 맏아들이다. 167년 신라의 서쪽을 침략하였고, 이어 188년부터 여러 차례 신라의 모산성·요거성 등을 침공하였다. 210년 적현성·사도성을 쌓았으며, 214년 1,000여 명의 군사로 말갈의 석문성을 습격하였다. 그러나 곧 말갈의 침입을 받아 술천까지 내습당하였다.

최경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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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慶昌(1539-1583)

조선의 문신·시인. 자는 가운, 호는 고죽, 본관은 해주이다. 일찍이 학문에 뛰어나 이 이·송익필 등과 함께 8대 문장가로 손꼽혔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종성 부사를 거쳐 1583년 방어사의 종사관에 임명되어 서울로 올라오던 도중 죽었다. 시를 잘 지었으며 피리도 잘 불었다. 어려서 영암 바닷가에 살 때 해적의 무리에게 포위되자 퉁소를 구슬프게 불었는데, 그 연주법이 너무 뛰어나 해적들은 신이 부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모두 흩어져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저서로 <고죽유고>가 있다.

최경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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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慶會(1532-1593)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자는 선우, 호는 삼계, 본관은 해주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고경명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을 모아 금산·무주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이듬해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그 해, 제2차 진주성 싸움에 참가하여 계속 격전을 벌이다가 더 이상 버틸 수 없음을 알자 남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 죽은 후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최광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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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光玉(1879-1911)

조선 말기의 문법학자. 1904년 평양 숭실학교 중학부를 졸업하였으며, 주시경과 함께 정부에서 세운 국문 연구소에서 국어 정리에 노력하였다. <대한문전>을 발간했는데, 이 책은 그의 저작이라고 하나 사실은 유길준의 초고라는 유력한 신설이 있다.

최광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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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匡裕

신라의 학자. 학문이 깊었으며 시도 잘 지었다. 당에 유학하여 학문에 대한 명성이 높았는데, 당에서는 최치원·박인범 등과 함께 '신라 10현'이라 불리었다. 고려 때 발간된 <십초시> 하권에 그의 시가 실려 있는데, 고려 때 간행되었다가 조선 문종 때 밀양 부사 이백상이 다시 발간한 것이라고 한다.

최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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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圭夏(1919- )

정치가·제10대 대통령. 강원도 원주에서 출생하였으며, 1941년 일본 도쿄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1943년 만주 대동학원을 졸업한 후, 1945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1947년 중앙 식량 행정청 행정실장을 거쳐 이듬해 농림부 양정과장을 지냈다. 1959년 주일 대표부 공사·1967년 외무부 장관·1975년 국무총리 등을 거쳐 1979년 대통령이 됨으로써 공직 생활 30여 년 만에 최고직에 올랐다. 이듬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국정 자문회의 의장·민족사 바로찾기 국민회의장을 역임하였다. 무궁화 대훈장·건국 훈장 등을 비롯하여 여러 나라로부터 최고 훈장 등을 많이 받았다.

최남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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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南善(1890-1957)

문학가·사학자. 호는 육당, 본관은 동주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는 한학을 배웠으며, 1904년 국비 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 대학에 입학하였으나 동맹 휴학으로 중퇴하였다. 이어 이광수 등 유학생들과 사귀면서 러시아 문학 작품을 탐독하였다. 이때 유학생 회보인 <대한 흥학회보>를 편집하면서 새로운 형식의 시(신체시)와 시조를 발표하였다. 귀국하여 우리 민족의 시대적 각성을 위한 신문화 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인쇄 시설을 구입하여 1908년 신문관을 창설하였다. 여기서 <대한역사> <대한지지> <외국지지>등 중요한 책을 출판하였으며, 새 시대의 주인공들을 위하여 1908년 최초의 종합 잡지인 <소년>을 발행하였다. 그는 이 잡지에 <해에게서 소년에게>라는 최초의 신체시를 발표하였으며, 이듬해 안창호와 함께 '청년 학우회'를 설립하여 학우회의 노래를 짓는 등 청소년 지도 운동에 앞장섰다. 1911년에 <소년>이 폐간되었으며, 이듬해 이광수의 도움으로 <붉은 저고리> <아이들 보이> 등을 발간하였으나 총독부의 명령으로 모두 폐간되었다. 1914년 다시 종합 계몽 잡지 <청춘>을 발간하여 새로운 지식의 보급과 민중 계몽을 위해 공헌했으나 1918년 폐간되었다. 그는 신문관에서 많은 책과 잡지를 발행하는 한편, 우리 민족 문화를 보호하기 위해 '조선광문회'를 설립하였다. 그는 여기에서 우리 나라의 귀중한 옛 책들을 다시 간행하였으며, 민족문화를 널리 퍼뜨리기 위한 국가적인 사업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당시 <동국통감> <열하일기> 등을 비롯한 많은 고전이 간행되었다. 1919년 3·1운동 때 독립선언문을 기초하고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하였다. 그 후 다시 <동명> 지와 <시대일보>를 발간하여 일본의 침략 정치를 규탄하고 우리 민족 정신을 불러일으키기에 힘썼다. 1925년 <동아일보>에 사설을 쓰는 한편, <불함문화론>을 발표하였는데, 이 글에서 그는 동방 문화의 근원지를 우리나라 단군 신화의 무대인 백두산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일본이 총독부 내에 '조선사 편수위원회'를 둘 때 편수 위원직을 맡았으며, 중추원 참의를 거쳐 일본 관동군이 만주에 세운 건국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로 인해 광복 후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 비난을 받기도 하였으며, <한국역사대사전>을 편찬하던 도중 병으로 죽었다. 최남선이 우리 신문화 운동에 남긴 업적은 매우 크게 평가되고 있으며, 1973년 고려대학교 아시아 문제 연구소에서 <육당전집>이 발간되었다. 저서로 <조선유람기> <고사통> <조선 독립운동사> 등이 있으며, 시조집 <백팔번뇌>가 있다.

최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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最訥(1717-1790)

조선의 승려. 자는 이식, 호는 묵암, 본관은 밀양이다. 성은 박씨이며 최눌은 이름이다. 14세 때 낙안 징광사의 돈정에게서 불도를 배우고는 승려가 되었다. 18세 때 만리 대사에게 3족계를 받았으며 그 후 풍암·호암·새봉 등에게 불법을 배우고 진명 대사의 법을 이어받았다. <제경문답 반착회요> 등을 비롯한 많은 저술을 하여 당시의 불교계에서 큰 활약을 하였다. 1770년 해남 표충사 원장이 되었고, 송광사에 비가 있다. 저서로 <내외잡저> 10권과 <심성론> 3권, <문집> 3권 등이 있다.

최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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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萬理

조선 세종 때의 문신. 자는 자명, 호는 강호산인, 본관은 해주이다. 고려의 학자 최 충의 후손이다.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를 거쳐 집현 부제학·강원 감사 등을 지냈다. 1443년 훈민정음이 창제·반포되자, 이듬해 여섯 가지의 이유를 들고 반대 상소문을 올렸다. 또한 관리가 사모를 쓰는 것이 옛 제도에 어긋난다 하여 중국 제도에 따라 시행하게 되었다. 후에 청백리에 뽑혔다.

최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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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鳴吉(1586-1647)

조선의 문신. 자는 자겸, 호는 지천, 본관은 전주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을 거쳐 예문관 전적을 지냈다. 그 후 광해군의 정치가 날로 어지러워지자 김 유·이 귀 등과 함께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였다. 그 공으로 1등 공신이 되고 완성군에 봉하여졌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왕을 모시고 강화로 피란하였으며, 그 후 대제학·병조판서·한성판윤 등을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주화론을 주장하여 이듬해 청 태종에게 항복하였다. 이때 우의정이 되어 흩어진 정사를 잘 정리하여 나라가 안정되게 하였으며 좌의정·영의정 등에 이르렀다가 죽었다. 성리학과 문장에도 뛰어났으며 글씨에 있어서는 동기창체로 유명하였다. 저서로 <지천집> 19권, <경서기의> <병자봉사> 등이 있다.

최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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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茂宣(?-1395)

고려 말 조선 초의 화약 발명가. 본관은 영주이다. 일찍부터 병법을 좋아하여 화약제조법에 몰두하던 중 원나라 사람 이원으로부터 그 제조법을 배웠으며, 여러 차례 조정에 건의하여 1377년 우왕 때 처음으로 화통도감을 설치하게 하였다. 그는 이곳의 주임이 되어 화약을 만드는 동시에 석포·신포·화전·화포·화통·철령전 등 각종 화기를 제조하였다. 또한 이런 화기 등을 실을 수 있는 전함의 감독·건조에도 힘썼다. 1380년 왜구가 대거 침입하자, 나 세 등과 함께 전함을 이끌고 진포에서 왜구 선박 500여 척을 격파하는 큰 공을 세웠다. 그 후 벼슬이 지문하부사에 이르렀으며, 조선 태조는 그가 세운 공을 참작하여 영성 부원군을 추증하였다. 저서로 <화약수련법> <화포법> 등이 있다.

최병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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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炳憲(1858-1927)

조선의 기독교 신자. 아펜젤레·존슨 목사로부터 한문으로 된 신약 성경을 얻어 100일 동안 특별 기도를 올리며, 열심히 읽었다. 1892년 존슨 박사에게 세례를 받고 전도 활동을 열심히 하였다. 또한 아펜젤러 목사의 신약 성경의 한국말 번역에 적극 협력하였고 배재학당에서 한문을 가르쳤다. 서울 종로에 책점을 설립하는 한편 우리나라 최초의 도서관을 창립하였다. 1894년에는 <조선 기독교인 회보> <신학월보>의 주필을 맡아 보다가 1902년에 목사가 되어 정동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서 12년 동안 재직하고 신학교 교수로 있다가 사망하였다.

최 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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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北 조선 영조 때의 화가. 자는 성기, 호는 성재·기암, 본관은 무주이다. 산수·인물·괴석·고목 등을 두루 잘 그렸는데, 특히 산수를 잘 그려 '최산수'라고 불리었다. 필법이 대담하고 솔직하여 남화의 거장 심사정과 견줄 만한 인물이다. 성격이 괴팍하여 이상한 행동을 잘 하였으며, 폭주가이고 여행을 즐겼다. 칠칠거사로 알려진 많은 일화를 남긴 위인으로, 시에도 뛰어났다. 작품으로 <송음관록도> <표훈사도> <마법산수도> <수경각수도> <풍설야귀도> 등이 있다.

최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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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士威

고려 현종 때의 문인. 1010년 강 조 등과 함께 30만 군사를 지휘하여 퉁저우로 나가 거란군을 무찔렀다. 그 후 서경유수·이부상서 등을 지내면서 12주 절도사를 없애고 5도호 75도에 백성들을 돌보는 안무사를 두게 하였다. 1022년 복잡한 관직의 명칭을 고치자고 왕에게 건의하여 이를 실시하게 하였다. 죽은 후 태사에 추증되었다.

최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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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常壽(1918- )

민속학자. 호는 성천이며 부산에서 출생하였다. 일본 오사카 외국어학교를 졸업하고, 1947년 한국 민속학회 회장이 되었으며 이때 <민속학보>를 발간하였다. 그 후 외국어대학 조교수·이화여자대학교 강사·미국 아시아 민속학회 이사·경희대학교 교수 등을 지냈다. 우리나라 민속학의 학문적 체계 확립과 세계 민속 학회와의 국제적 교류를 위해 활약하고 있다. 저서로 <한국 민속학 연구 총서> <한국 민간전설집> <한국과 아라비아와의 관계> 등이 있다. 월남 문화 훈장·지원 훈장 등을 수여받았다.

최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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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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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聖模(1874-1936)

독립운동가.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협성신학교를 졸업한 후 북감리교 목사로서 교회 일을 맡아보았다. 3·1 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여 2년 동안 복역하였다. 후에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최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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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世珍(1473-1542)

조선의 학자·문신. 자는 공서이며 괴산 최씨의 시조이다.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중국어에 능통하여 외교문서를 도맡아 처리하였다. 1524년 군자감정으로 있으면서 <친영의주>와 <책빈의주> 등을 한글로 풀이하였다. 또한 1527년 <훈몽자회>를 완성하였는데, 이것은 한글의 자음·모음의 이름을 정하고, 순서와 받침 등을 정리한 최초의 저술로 국어학 발달에 큰 업적을 이룩하였다. 1530년 첨지중추 부사로서 <황극경세서집>을 지어 왕에게 바쳤다. 1539년 승문원 제조로 <대유대주의>와 <황극경세서설>을 지어 바쳤다. 당대에서 가장 뛰어난 중국어 학자로 사신들을 맞을 때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중인(中人) 출신이었기 때문에 생전에는 큰 환영을 받지 못하였다. 저서로 <경성지> <여호경> <사성통해> <소학편몽> <운회옥편> 등이 있다.

최승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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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承老(927-989)

고려 초기의 명신. 12세에 논어를 읽는 것을 보고 태조가 원봉성 학사에 올렸다. 988년 성종 때 수문하시중이 되고 청하후에 봉해졌다. 벼슬에 있는 동안 왕에게 청하는 것이 모두 이루어졌으며, 역대왕의 선악 득실을 28조(시무 28조)로 분석하여 왕께 바친 것으로 유명하다. 죽은 후 태사에 추증되었다.

최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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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時亨(1827-1898)

동학의 제2대 교주. 호는 해월, 본관은 경주이며 경주에서 출생하였다. 일찍이 고아가 되어 고생을 하였으며, 1861년 동학교도가 되었고 이듬해 최제우의 후임으로 제2대 교주가 되었다. 1864년 정부의 탄압으로 최제우가 처형되자, 안동·울진 등지로 돌아다니며 포교에 힘썼다. 그 후 인제에 가서 <동경대전>을 간행하고, 단양에서 <용담유사>를 발간하는 등 경전의 완성에 노력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으로 정국이 소란하여 동학에 대한 탄압이 완화되자, 조직 강화에 힘써 육임제(동학 교직의 등급)를 확립하고 전국에 육임소를 설치하여 종교로서의 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1892년 손천민·손병희 등의 주장에 따라 충청도 관찰사에게 교조의 신원과 포교의 자유·탐관오리의 숙청 등을 요구하는 글을 보냈으나 묵살당하였다. 1894년 고부 접주 전봉준이 동학혁명을 일으키자, 교주로서 이에 호응하여 10만 명의 병력을 인솔하였다. 그러나 관군과 일본군에게 공주에서 패하여 청주로 피신했다가, 1898년 원주에서 송경인에게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당하였다. 1907년 고종의 특지로 신원되었다.

최신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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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臣海(1919-1991)

의사·수필가. 경남 울산에서 태어나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정신과 교실에서 연구하다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 대학교 부속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에서 연구를 계속 하였다. 1956년 국립 청량리 뇌병원 원장이 되었고, 1961년 일본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연세대 외래 교수, 신경 정신과 학회장 등을 지냈다. 그는 틈틈이 생활 수상을 모아 글을 발표하였다. 화랑무공 훈장을 수여받았다. 저서로 <국보 찾아 10만리>, 수필집 <훔친 사과가 맛있다> <공부 못하는 천재> <고독을 이겨야 하는 현대인> 등이 있다.

최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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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瑩(1316-1388)

고려의 명장. 본관은 창원이다. 처음에는 무인으로서 양광도 도순문사의 휘하에 있으면서 여러 차례 왜구를 토벌하여 공을 세웠다. 1352년 공민왕 때 조일신이 난을 일으키자 안 우·최 원 등과 함께 이를 진압하여 호군으로서 출세하였다. 1354년 중국 산둥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원에서 원병을 요청하자, 대호군으로서 2,000여 명을 거느리고 나가 적을 전멸시켜 용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후에 2차에 걸친 홍건적의 침입을 격퇴시키는 데 공을 세워 전리판서가 되었다. 1358년 오예포에 침입한 왜구를 크게 무찔렀으며, 1376년 홍산에서도 왜구를 격퇴하여 철원 부원군에 봉해졌다. 이후부터 왜구는 최 영을 몹시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왜구의 토벌에 공을 세웠다. 한때 신 돈의 모함으로 지방으로 쫓겨간 일도 있으나, 신 돈이 처형되자 찬성사에 올랐다. 1388년 명에서 철령 이북의 땅을 탐내자, 당시 73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한 뼘의 땅도 내줄 수 없다고 하여 요동 정벌을 주장하였다. 이 때 최 영은 8도 도통사가 되어 군을 총지휘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우군 도통사인 우왕과 함께 평양까지 출진하였으나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함으로써 정벌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최 영은 회군하는 이성계의 군사를 막아 싸웠으나, 마침내 붙잡혀 고봉에 유배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최용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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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容信(1909-1935)

여류 농촌운동가. 본관은 경주이며 원산에서 출생하였다. 서울여자 신학교에 재학중이던 1931년에 YWCA 농촌 사업부 파견으로 경기도 화성군 샘골에 가서 농촌 교육을 시작하였다. 1934년 일본 고베 신학교에 유학했으나 신병으로 귀국하여, 샘골에서 요양하면서 농촌 계몽 운동을 하다가 죽었다. 1964년 한국 여성단체 협의회에서는 그를 기념하기 위해 '용신 봉사상'을 제정하였다.

최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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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瑀(?-1249)

고려 중기의 권신. 본관은 우봉이며 후에 최 이로 개명하였다. 최충헌의 아들로 1219년 아버지가 죽자, 뒤를 이어 집권하였다. 처음에는 인심을 얻기에 힘썼으나, 1225년에는 자기 집에다 정방을 설치하여 관료의 인사권을 장악하였다. 1227년 서방을 두어 문객 중 이름 있는 유생들을 포섭하여 정치에 이용하는 한편, 3번제로 도방을 두어 자신의 신변보호를 담당하게 하였다. 몽고의 침입이 있을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1232년 왕에게 강화 천도를 청하여 단행하게 하였다. 1234년 강화 천도의 공으로 진양후에 봉해졌으며, 강화 연변에 성을 쌓아 몽고군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1243년 국자감을 수축하고 양현고에 쌀 3천섬을 내놓는 등 장학에 힘쓰는 한편, 강화에서의 대장경판을 만드는 데 개인의 재산을 희사하여 완성하게 하였다. 후에 횡포가 심하여져서 백성들의 원망을 샀다. 글씨에도 능하여 해서·행서·초서 등을 잘 썼다.

최윤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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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閏德(1376-1445)

조선의 무신. 자는 백수, 호는 임곡, 본관은 통천이다. 태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상호군·동북면 조전병마사 등을 지냈다. 1419년 세종 때 의정부 참찬으로서 삼군 도통사가 되어 체찰사 이종무와 함께 쓰시마를 정벌하였다. 그 공으로 공조판서가 되었으며 정조사로 명에 다녀왔다. 1443년 만주의 야인 이만주가 국경을 침입하자, 평안도 도절제사로서 이를 대파하여 우의정에 특진되었다. 1435년 좌의정이 되었으며, 이듬해 영중추원사로 전임되었다.

최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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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允植(1899-1959)

수학자. 호는 동림이며 평북 선천에서 출생하였다. 경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18년 동교 사범과를 졸업하였다. 1922년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 제1부를 졸업하였고, 1926년 도쿄 대학 수학과를 졸업하였다. 이해 귀국하여 휘문고등보통학교·경성공업학교 등의 교사로 있었다. 1940년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교수에 이어 대한 수물학회 회장에 선출되었으며, 1954년 대한 수학회가 창립되자 회장이 되었다. 이 해 학술원 추천 회원이 되었다. 1955년 미국 시카고 대학에서 연구하였으며, 이듬해 귀국하여 서울대학교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우리나라 수학자로서는 최초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수학계의 수준 향상을 위하여 많은 공헌을 하였다. 문교부로부터 교육자 근속상을 수여받았다.

최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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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允儀(1102-1162)

고려의 문신·학자. 본관은 해주이며 최 충의 5대손이다. 어려서부터 글에 뛰어나 유명하였다. 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태학박사를 거쳐 문하시랑 평장사에 이르렀다. 사리에 밝아 당대 선비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의 저서인 <상정고금예문>은 고종 때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본으로 출판되었다.

최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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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恩喜(1904-1980)

여류 언론인. 황해도 연백에서 태어나 니혼 여자대학 3년 재학중 <조선일보> 기자가 되었다. 일본 와세다 대학 법과 통신 강의 2년을 수료하고, 근우회를 창설하여 선전부장을 지냈다. 서울 보건인회 창설 회장·여권 옹호회 창립 선전부장·재건 국민운동 중앙위원·조국 수호 협의회 여성 대표 집행위원·3·1 국민회의 대표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 <씨 뿌리는 여인> <여류명인기> <청춘 회상기> 등이 있다.

최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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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誼(?-1258)

고려 중기의 권신. 본관은 우봉이며 아버지 최 항이 죽자 교정별감이 되어 정방 정치를 이어받았다. 처음에는 인심을 얻으려고 집과 쌀을 왕에게 바쳤으며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그 후 우부 승선이 되자, 횡포해지기 시작하여 재물을 약탈하는가 하면 노비에게 낭장의 벼슬을 주었다. 현명한 선비를 잘 대우하지 않고 경박한 유 능 등과 사귀어서 그들의 보고에 따라 살육을 함부로 행하여 원성이 높았다. 마침내 1258년 유 경·김인준 등에 의해 죽음을 당함으로써 4대 60여 년에 걸친 최씨 무신 정권은 끝을 맺었다.

최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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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益鉉(1833-1906)

조선의 문신. 자는 찬겸, 호는 면암, 본관은 경주이다. 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장령을 거쳐 호조판서가 되었다. 이 때 서원을 폐지하려는 대원군의 정책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1875년 유배에서 풀려났으며 이듬해 정부가 일본과의 통상을 논의하자, 5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하였다. 이로 인해 다시 흑산도로 유배되었다가, 1879년 풀려나왔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단발령이 내리자 이를 강력히 반대하다가 감옥에 갇혔다. 그 후 중추원 의관·경기도 관찰사 등의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듬해 제자 80여 명을 이끌고 전라북도 순창에 내려가 의병을 모집한 후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다. 항전중 임병찬 등과 함께 체포되어 쓰시마 섬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이 곳에서 "내 늙은 몸으로 어찌 원수의 밥을 먹겠느냐" 하며 단식하다가 죽었다. 시체가 부산에 돌아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나와 통곡하며 맞았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최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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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仁圭(1916-1961)

정치가. 경기도에서 태어나 연희전문학교 상과를 졸업한 뒤에 미국 뉴욕 대학 상과를 졸업하였다. 1950년 동남아시아 무역 사절단의 정부 대표로 파견되고, 대한 교역사 이사장, 운크라(UNKRA) 미국 주재 한국 대표 등을 역임하였다. 1956년에 외자청장이 되었고, 1958년 제4대 민의원에 당선, 이 해 9월 교통부 장관이 되었다. 1959년 내무부 장관이 되고 다음 해 정부통령 선거 때 자유당 후보자를 당선시키기 위해 부정 선거를 총지휘하였다. 이로 인해 4·19혁명이 일어나자 부정 선거의 원흉으로 투옥되고 5·16 군사정변 후 사형당했다.

최인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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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仁旭(1920-1972)

소설가. 경상남도 합천 출생. 해인 불교 전문학원(지금의 동국대학교)을 나와 일본의 니혼 대학 종교과를 중퇴하였다. 1938년 <매일신보>에 단편 소설 <시들은 마을>, 이듬해에 <산신령>을 통해 문단에 나왔다. 광복 후에 문총 중앙위원, 한국 문학가 협회 중앙위원, 서라벌예대와 중앙대학교 강사를 역임했다. 왕성한 창작 의욕을 발휘하여 <개나리> <동방기(洞房記)> <동자상> 등을 발표하는 한편, 역사 소설에 전념하여 <초적(草笛)> <임꺽정> <만리 장성> <사명당> <임진왜란> 등을 신문에 연재했다. 창작집에 <저류(低流)> <행복의 위치> <화려한 욕망> 등과 소년소설집 <일곱별 소년> 등이 있다.

최인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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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仁勳(1936- ) 소설가. 함북 회령 출생. 서울대 법대 중퇴. 1959년 <라울전>이 <자유문학>지에 추천됨으로써 문단에 등장, 장편 <광장>으로 문제 작가라는 평판을 받은 이후 <구운몽(九雲夢)> 장편 <회색인(灰色人)> <크리스마스 캐럴> <열하일기> <서유기(西遊記)> 등 문제작을 발표했다 단편 <웃음소리>로 12회 동인문학상을 받았고, 92년 노벨문학상 한국 후보에 올랐으며, 장편 <광장>을 발간했다.

최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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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笠(1539-1612)

조선의 문신·학자. 자는 입지, 호는 간역, 본관은 통천이다. 이 이의 제자로 명종 때에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1577년 선조 때 질정관으로 명에 다녀왔으며, 그 후 강릉 부사·형조참판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외교문서 작성의 제1인자였으며 명나라 학자들로부터 명문장가라는 격찬을 받았다. 시에도 뛰어났으며 그의 문장은 차천로의 시, 한 호의 글씨와 더불어 '송도삼절'이라 일컬어진다.

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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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滋(1188-1260)

고려의 문신. 자는 수덕, 호는 동산수, 본관은 해주이다. 최 충의 후손이며 강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상주 사록을 지냈다. 그 후 이규보의 추천으로 왕명을 글로 작성하는 문한을 맡아 보았다. 당시 집정자인 최 우에게 인정받아 상주 목사가 되어 어진 정치를 하였다. 시문에 뛰어나 당대에 크게 이름을 떨쳤다. 저서로 <가집> 10권, <보한집> 3권 등이 있다.

최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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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載瑞(1908-1964)

영문학자·문학평론가. 호는 석경우이며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하였다. 1931년 경성제국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후, 런던 대학에 유학하여 영문학을 공부하였다. 1934년부터 시작된 그의 문학평론은 우리 문학에 대한 과학적 비평의 방법을 제시해 주었다. 1939년 <인문평론>지를 경영하면서 평론 등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이어 <국민문학>지를 창간하였으며 광복 후 연세대학교·한양대학교의 교수 등을 지냈다. 특히 셰익스피어 연구에 있어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평론 <현대시의 생리와 성격> 등과 저서로 <문학원론> <셰익스피어 예술론> <문학과 지성> 등이 있다.

최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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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貞熙(1912-1990)

여류 소설가. 함남 단천에서 출생하였으며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31년 중앙보육학교를 졸업하였다. 이어 <삼천리>지 기자로 있으면서 <램프> <정당한 스파이>를 발표하였고 <형상>지에 <성좌> 등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장하였다. 그의 작품은 구성미보다도 작자 자신이 등장 인물의 한 사람이 되어서 자신의 심리를 추구해 나가는 진실한 고백적 성격을 띤 것이 특징이다. 그 후 조선일보 출판부원·주부생활 주간·여류 문인협회 고문 등을 지냈다. 1958년 서울시 문화상·1964년 여류 문학상·1971년 예술원상 등을 받았다. 작품으로 단편집 <천맥> <풍류 잡히는 마을>, 장편집 <녹색의 문>, 수필집 <사랑의 이력> <젊은 날의 증언> 등이 있다.

최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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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濟愚(1824-1864)

조선 말기 동학의 창시자. 호는 수운이며 본관은 경주이다. 본래 몰락한 양반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한때 울산에 내려가 무명 행상을 직업으로 전국 각처를 돌아다녔다. 1855년 철종 때 양산군 천성산 내원암에서 수도 생활을 시작하여, 1860년 천주 강림의 도를 깨닫고 동학을 창시하게 된 것이다. 이 무렵 중국에서는 태평천국의 난과 영·프 연합군의 베이징 침입 사건이 있었다. 이 여파로 우리나라에 대한 열강의 세력 침투가 시작되어 민족적인 위기의식이 조성되어 있었다. 특히 서학(천주교)의 전래는 사상과 풍속이 다른 우리나라에 많은 물의를 일으켰다. 이에 최제우는 서학에 대항하는 유교·불교·선교 등의 교리를 종합한 민족 고유의 신앙인 동학을 창시하였다. 동학은 후에 천도교로 발전하였다. 동학의 근본사상은 '인내천'이다. 즉, 이것은 인본주의를 강조하면서, 성실과 신의로써 새롭고 밝은 세상을 만들자는 외침이었으며 어지러웠던 우리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사상이었다. 또 모든 사람은 평등함을 주장하였는데, 갈수록 신도가 늘어나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 마침내 1863년 정부에서는 최제우를 체포하여 이듬해 대구에서 혹세무민의 죄(사람을 속여 세상을 어지럽히는 죄)로 처형하였다. 1907년 순종 때 그의 죄가 풀렸다. 저서로 <동경대전> <용담유사> 등이 있다.

최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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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震立(1568-1636)

조선의 무신. 자는 사건, 호는 잠와, 본관은 경주이다. 1594년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597년 정유재란 때 결사대를 이끌고 서생포에서 왜군을 격멸하였다. 이어 권 율과 함께 도산에서 대승하여 선무공신이 되었다. 그 후 삼군수군통제사를 거쳐 1634년 전라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공주 영장으로서 용인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죽은 후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최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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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瓚植(1881-1951)

신소설 작가. 호는 해동초인이며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하였다. 한성중학에서 신학문을 공부하고 문학에 뜻을 두어, 1907년 상하이에서 발간된 소설집 <설부총서>를 번역하여 우리나라 현대 소설의 토대가 된 신소설 분야를 개척하였다. 1912년에 발표한 <추월색>을 비롯한 많은 작품을 발표하여 신문학 개척에 공헌하였다. 작품으로 <안(雁)의 성> <금강문> <춘몽> 등이 있다.

최춘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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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椿命(?-1250)

고려 고종 때의 충신. 본관은 해주이며 최 충의 후손이다. 1231년 고종 때 자주 부사로서 관민을 이끌고 몽고군에 포위된 성을 지키며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화의를 맺은 뒤였으므로 조정에서는 송국섬을 보내어 항복을 하라고 타일렀으나 듣지 않았다. 그를 처형하라는 몽고 관리의 압력으로 서경에 투옥되자 최 우도 그의 처형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몽고에 대해서는 거역했지만 고려에는 충신이니 살려주라는 살리타의 주선으로 석방되었다. 후에 1등 공신에 오르고 추밀원 부사에 발탁되었다.

최 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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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沖(984-1068)

고려의 문신·학자. 자는 호연, 호는 성재, 본관은 해주이다. 목종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1013년 국사 수찬관이 되어 태조에서 목종까지의 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또한 1037년 참지정사·수국사로서 <현종실록>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1047년 문종 때 문하시중이 되어 법률관들에게 율령을 가르침으로써 고려 형법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055년 중서령을 지내다가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 후 사숙을 열어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으며,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서 해동공자로 추앙되었다. 또한 그의 제자들을 가리켜 당시 문헌공도라고 하였다. 저서로 <최 문헌공 유고>가 있다.

최충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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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忠獻(1149-1219)

고려의 권신. 본관은 우봉이다. 1174년 조위총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별초도령에 등용되었다. 1196년 동생 충수와 함께 권신 이의민 일당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는 당시 부패된 정치의 개혁을 요구하는 '봉사 10조'를 명종에게 올려 각성을 촉구하였다. 그는 정치적 기반을 굳게 한 후에 좌승선과 지어사대사를 겸하였다. 1197년 충성좌리공신의 호를 받았으며, 동생 충수가 자기의 딸을 태자비로 삼으려 하자, 의견 충돌을 일으켜 동생을 살해하였고 독재정권을 강화하였다. 1198년 신종 때 만적의 난을 진압하였으며, 이듬해 지이부사가 되어 군사권과 문무관의 인사권을 장악하였다. 1202년 도방을 설치하여 문무관 중에서 용감한 자를 선발하여 신변을 보호하게 하였다. 이듬해 반란을 일으킨 승병들을 유배시키는 등 횡포를 일삼았다. 1205년 희종 때 문하시중에 올랐으며, 1209년 학자 이규보를 발탁하여 문화를 일으키는 데 힘썼다. 또한 교정도감을 설치하여 국정 전반을 감찰함으로써 사실상 중앙 기관의 수뇌가 되었다. 1211년 왕준명 등의 음모로 죽을 뻔하였으며, 희종을 폐위시키고 명종의 아들인 강종을 즉위시켰다. 강종이 3년 만에 죽자 태자를 왕위에 앉혔는데, 이가 바로 고종이다. 그는 이와 같이 네 임금을 왕위에 앉히고 두 임금을 폐위시키는 등 나라의 정치를 마음대로 행함으로써 최씨 집권의 기반을 확고히 하였다. 그러나 풍속의 순화, 문화의 재흥 등 여러 가지 업적을 이룩하기도 하였다. 그가 죽은 후 아들 최 우가 정권을 이어받았다.

최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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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致遠(857-?)

신라의 학자. 자는 고운·해운이며 경주 최씨의 시조이다. 12세 때 당에 유학하였으며, 17세 때 과거에 급제하여 선주표수현위를 거쳐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이 되었다. 879년 산둥 지방에서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고변의 종사관을 따라가 <토황소격문>을 써서 이름이 알려졌다. 그는 이 글로 당나라 사람들의 칭송을 한몸에 받았으며 884년 귀국하였다. 893년 진성 여왕 때 견당사에 임명되었으나 도둑이 들끓어 가지 못하고, 이듬해 '시무 10조'를 건의하여 정치의 어지러움과 백성들의 어려운 생활을 구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후 어지러운 세상을 비관하여 전국을 유랑하며 풍월을 읊다가 가야산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고려 현종 때 내사령에 추증되었다. 고려의 왕 건이 그의 학풍을 듣고 글로써 문답하였다고 하며, 그의 제자들이 고려에서 많은 벼슬을 하였다. 부산의 '해운대'라는 이름은 최치원의 자인 '해운'에서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저서로 <계원필경> 20권이 있으며, 그는 글씨에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는데, 그가 쓴 <난랑비 서문>은 신라 시대의 화랑도를 설명해 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숭복사·쌍계사·성주사·봉암사 등 4군데의 비석 글씨를 합하여 <4산 비명>이라고 하는데, 모두 걸작품이다.

최치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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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致爀(1809-1878)

조선의 천주교 신자. 교명은 요안이며 공주에서 출생하였다. 1846년 천주교에 입교하였으며, 1866년 병인박해 때 9명의 프랑스 신부가 순교하자 청나라에 있는 프랑스 제독에게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서 떠나는 리델 신부를 수행하여 청에 갔다. 8년간 중국에서 머물며 <한불자전> 및 <한어문전>의 편찬에 종사하였다. 1874년 비밀리에 귀국하여 외국인 신부를 맞아들이려는 운동을 벌이던 중, 만주에 있던 리델 신부와 연락하여 1876년 블랑 신부 등 두 신부를 입국하게 하였다. 이듬해에도 조선 교구 제6대 교구장에 임명된 리델 주교와 로베르·두세 신부를 맞아들여 포교에 힘썼다. 1878년 베이징 외방 전교회와 연락하기 위해 만주로 파견된 밀사가 체포되자, 그도 함께 체포되어 옥사하였다. 1880년 그가 쓴 글씨를 자모(子母)로 한, 한국 최초의 <한어문전>이 코스트 신부에 의해 출판되었다.

최학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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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鶴松(1901-1933)

소설가. 호는 서해, 함북 성진에서 태어나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독학을 하였다. 한때는 북간도 지방에서 방랑한 적도 있으나, 귀국하여 방인근이 경영하던 조선문단사에 들어가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1924년 <조선문단>에 <고국>을, 이듬해에는 <탈출기>를 발표하여 문단의 총아가 되었다. 그 후 <기아> <살륙> <홍염> <큰물 진 뒤> 등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극빈자의 고투와 자연 발생적인 반항을 주제로 한 많은 작품을 썼다. 당시는 신경향파 문학이 유행한 때여서, 그의 빈궁 문학은 시류를 타고 카프 계의 문인들에게 갈채를 받았다. 1925년 '프로 예맹'에 가입했고, <중외일보> 기자 <매일신보> 학예부장을 역임하였다. 만년에는 타락과 무궤도한 사생활로 문단에서도 백안시되어 불우하였다. 소설집 <혈흔>이 있다.

최 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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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恒(1409-1474) 조선의 문신·학자. 자는 정부, 호는 태허정·동량, 본관은 삭녕이다.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부수찬이 되었다. 1443년 정인지 등과 '훈민정음'을 한글로 풀이하였으며 <용비어천가>에 주를 달아 풀이하였다. 1453년 승지로 있을 때, 수양 대군이 김종서 등을 제거하는 데 참여한 공으로 정난공신 1등에 봉해졌다. 이듬해 이조참판이 되어 <공신연곡> 4장을 지어 왕께 바쳤다. 그 후 공조판서·이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1461년 왕명으로 <경국대전> 편찬에 착수하여 조선 초기의 법률과 제도를 집대성하였다. 1467년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이듬해 영성 부원군에 봉해졌다. 1471년 성종 때 <세조실록> <예종실록>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평소 겸손하고 과묵했으며 문장에 능하여 명에 보내는 글을 거의 그가 작성했다고 한다. 저서로 <태허정집>이 있다.

최 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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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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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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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瀣(1287-1340)

고려의 문신·학자. 자는 언명부, 호는 졸옹, 본관은 경주이다. 최치원의 후손이며 충숙왕 때 원나라 과거에 급제하여 요양로 개주판관을 지냈다. 병을 핑계로 귀국하여 검교·성균관 대사성 등을 지냈다. 만년에는 농사를 지으며 저술에 힘썼다. 그는 특히 고려의 저명한 문인들의 글을 모아 <동인지문> 25권을 편찬하였으며, 당대의 문호로서 이제현과 함께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쳤다. 저서로 <졸고천백> <농은집> <귀감> 등이 있다.

최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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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海山(1380-1443)

조선의 무신. 본관은 영천이고 최무선의 아들이다. 태조 때 아버지의 유명에 따라 화약 수련법과 화포법을 공부하여 학문과 기술을 터득하였다. 1400년 태종 때 군기시에 등용되어 주부에 올랐다. 1436년 세종 때 동지중추 원사가 되었으며 화차·완구·발화·신포 등의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 냈다.

최현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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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鉉培(1894-1970)

국어학자. 호는 외솔이며 경남 울산에서 출생하였다. 경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주시경의 조선어 강습원에 들어가 한글을 연구하였다. 1919년 일본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이어 교토 제국대학교 문학부를 졸업하였다.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 교수가 되었으며 조선어학회 간부로 활약하던 중,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 관련되어 구속되었다. 광복 후 출옥하여 문교부 편수국장을 지내면서 교과서 편찬을 지도하였다. 그 후 한글학회 이사장·연세대학교 교수·연세대학교 부총장 등을 지냈다. 한글 연구에 일생을 바쳤으며 말본의 체계를 확립하였고 한글 전용 운동에 힘썼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저서로 <우리 말본> <한글의 바른 길> <나라 사랑의 길> 등이 있다.

추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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楸南

고구려의 점쟁이. 보장왕 때 국경 지방의 강물이 거꾸로 흘러서 왕이 점을 치게 하자, 왕비가 음양의 도를 역행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화가 난 왕비는 그를 시험하기 위해 상자 속에 쥐 한 마리를 넣고 그 속에 무엇이 있느냐고 물었다. 추남이 쥐가 여덟마리가 있다고 하자 왕비가 맞추지 못하였다고 하여 그를 죽였다. 그 후 쥐의 배를 갈라보니 일곱 마리의 새끼가 들어 있었다. 그는 사형되기 전에 자기가 죽으면 후에 장군으로 태어나 반드시 고구려를 멸망시키겠다고 했는데, 그 화신이 바로 신라의 명장 김유신이라고 한다.

충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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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湛(869-940)

신라 말 고려 초의 승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승려가 되었다. 889년 진성 여왕 때 무주 영신사에서 구족계(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를 받았다. 그 후 당에 건너가 정원을 만나고, 효공왕 때 귀국하여 왕사가 되었다. 고려 태조 때에도 왕사가 되었으며, 그가 죽자 태조가 친히 비문을 지어 당 태종의 글씨로 새긴 탑비를 원주 영봉산 흥법사에 세워주었다.

충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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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談師

신라 경덕왕 때의 승려. 경덕왕의 부름을 받고 왕을 맞아 음력 3월 3일과 9월 9일에 미륵세존에게 드리던 차를 끓여 왕에게 권하고 향가 <안민가>를 지었다. 또 하나의 작품 <찬기파랑가>와 함께 <삼국유사>에 실려 전해진다.

충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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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烈王(1236-1308)

고려의 제25대 왕(재위 1274-1308). 원종의 맏아들이며 1260년 태자로 책봉되었다. 1272년 원나라에 갔으며, 1274년에는 원의 제국대장 공주와 결혼하여 살다가 원종이 죽은 뒤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왕권을 강화하였으나 고려는 점점 원의 종속국이 되었다. 1275년 원 세조의 강요로 일본을 치기 위해 배와 장정 등을 준비하였다. 이 정벌 때 원은 고려에 정동행성이라는 관청을 두었는데, 이것은 군사 준비를 감독하는 기관이었다.

충목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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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穆王(1337-1348)

고려의 제29대 왕(재위 1344-1348). 충혜왕의 아들이며 어릴 때 원에 볼모로 잡혀가 있었다. 1344년 충혜왕이 죽자, 귀국하여 8세의 나이로 즉위하였으므로 어머니인 덕령 공주가 대신 정사를 맡아보았다. 권세가들에게 빼앗겼던 땅을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었으며, 기근이 들었을 때 진제도감을 설치하여 빈민을 구제하였다. 또한, 충렬왕·충선왕·충숙왕 등의 실록을 편찬하였다.

충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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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宣王(1275-1325)

고려의 제26대 왕(재위 1298-1313). 충렬왕의 맏아들이며 왕비는 원의 계국대장 공주이다. 1277년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이듬해 원에 가서 몽고식 이름을 받았다. 1290년 계국대장 공주와 결혼하였다. 1297년 충렬왕 측근에서 횡포가 심하던 무비 등을 죽이고 기강을 확립하였다. 충렬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후, 정방을 폐지하고 관제를 혁신하여 자주적인 정치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왕비와의 사이가 나빠 다시 아버지인 충렬왕에게 왕위를 주고 원에 가서 머물렀다. 1308년 충렬왕이 죽자, 귀국하여 다시 왕위에 올랐으며, 조세의 공평·인재 등용의 개방·농잠의 장려·동성간의 결혼 금지 등 혁신적인 정치를 시행하였다. 그러나 원의 생활에 오랫동안 젖어 있던 관계로 곧 정치에 싫증을 느끼고 제안 대군에게 정치를 대행시켰다. 이어 원에 갔다가 1313년 귀국하여 충숙왕을 즉위시켰다. 이듬해 원에 가서 만권당을 세우고 서적을 수집하며, 이제현과 조맹부를 비롯한 원의 유학자들을 교유하게 하는 등 문화 교류에 힘썼다.

충숙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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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肅王(1294-1339)

고려의 제27대 왕(재위 1313-1330, 1332-1339). 충선왕의 둘째 아들이며 1313년에 즉위하였다. 그러나 정치를 소홀히 하고 사냥·유희만을 일삼아 정치가 문란해졌다. 이 틈을 타 심양왕 고가 왕위 찬탈을 꾀하여 충숙왕의 행실을 원에 고하자, 충숙왕은 원에 불려가 5년간 체류하였다. 그 후 1325년에 귀국, 충숙왕은 심양왕 고에게 양위하려 했으나, 한종유 등 충신들의 반대로 취소하고 1330년 태자 정(후의 충혜왕)에게 양위하였다. 그리고 원에 가서 부마 상주국 일수왕의 호를 받았다. 그러나 원나라의 명으로 1332년 다시 복위되었다.

충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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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定王(1337-1352)

고려의 제30대 왕(재위 1348-1351). 충혜왕의 서자로 충목왕이 후사 없이 죽자 1348년 원으로부터 책봉을 받아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1349년 왜구의 침입과 정치의 문란으로 나라가 혼란하였다. 1351년 윤 택 등의 주장으로 충혜왕의 동생 공민왕이 즉위하였고, 그는 강화도로 유배되어 이듬해 독살당하였다.

치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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致益(1862-1942)

승려. 호는 해담이며 속성은 서이다. 19세에 통도사에서 승려가 되었으며 용문사의 해주에게서 경전을 배웠다. 그 후 고운사의 음관의 법을 이어받았다. 1929년 선교 양종 칠교정의 한 사람으로 추대되었으며, 통도사에서 죽었다.

침류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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枕流王(?-385)

백제의 제15대 왕(재위 384-385). 근구수왕의 맏아들로 384년 즉위하였다. 그는 진나라에 사신을 보냈으며, 동진의 승려 마라난타를 국가적인 문화 사절로 영접하여 백제에 불교가 전래되게 하였다. 이듬해 한산에 절을 창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