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인명사전/한 국 인 명/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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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문[편집]

坦文(900-975)

고려의 승려. 자는 대오, 속성은 고이며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하였다. 원효 대사가 살았던 향성산의 옛 절터에 암자를 짓고 수도한 후, 장의사의 신엄에게서 <화엄경>을 배웠다. 914년 15세의 나이로 구족계(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를 받았다. 고려 태조로부터 별화상이란 칭호를 받았으며, 926년 왕후가 임신을 하자 아들을 낳도록 기도드린 끝에 왕자(후의 광종)를 낳게 되어 더욱 총애를 받았다. 그 후 구룡산사에서 <화엄경>을 강론하여 별대덕이 되었고, 942년 염주·배주 지방에 메뚜기로 인한 피해가 극심하자 <대반야경>을 읽어 이를 물리쳤다. 975년 광종 때 국사에 임명되었다.

탄연[편집]

坦然(1070-1159)

고려의 승려·서예가. 호는 묵암이며 속성은 손이다. 1085년 선종 때 명경과에 급제하였으며, 숙종이 그의 명성을 듣고 세자(후의 예종)를 가르치게 하였다. 1088년 안적사에서 승려가 되었으며 광명사 혜소 국사의 제자가 되었다. 그 후 각지를 돌아다니며 불교를 연구하였고, 1105년 승과에 급제하였다. 1121년 예종 때 선사가 되었고, 1146년 왕사가 되었다. 서예에도 뛰어나 왕희지의 필체를 따랐으며 김 생 다음가는 명필로 알려졌다. 죽은 후 국사에 추증되었다. 글씨로 <문주원비> <북룡사비> <승가굴 증수비> 등이 있다.

탈해왕[편집]

脫解王(?-80)

신라의 제4대 왕(재위 57-80). 본래 칭호는 탈해 이사금이다. 다바나국(탐라국)의 왕과 여인국의 왕녀 사이에서 태어난 알이 궤짝에 넣어져 바다에 떠다니던 중, 한 노파에게 발견되어 궤짝 속에서 나온 것이 탈해왕이 되었다는 설화가 있다. 8년 남해왕의 사위가 되었고, 10년 대보에 올라 군국정사를 맡아보았다. 남해왕의 유언에 따라 57년 유리왕이 죽은 후 왕위를 물려받았다. 즉위 후 일본과 화친을 맺고 여러 차례 백제를 공격하였다. 65년 시림에서 김알지를 얻어 시림을 계림으로 바꾸었으며 국호를 계림이라 하였다. 77년 황산진에서 가야와 싸워 크게 이겼다.

태조왕[편집]

太祖王(47-165)

고구려의 제6대 왕(재위 53-146). 일명 국조왕이며 유리왕의 손자이다. 모본왕의 뒤를 이어 7세에 즉위하여 태후가 섭정하였다. 56년 동옥저를 정벌하였고, 72년 달고를 파견하여 조나를 정벌하였다. 121년 요수현을 공격하여 요동 태수를 죽이는 등 영토를 개척하여 부족 국가적 형태에서 중앙 집권적인 형태로 국가 체제를 변혁시켰다. 말년에는 동생 수성(후의 차대왕)에게 양위하고 별궁으로 은퇴하여 태조왕이라 하였다. 119세로 죽어 고구려 역대 왕 중 가장 오래 산 왕이 되었다.

태종[편집]

太宗(1367-1422)

조선의 제3대 왕(재위 1400-1418). 이름은 방원이며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이다. 조선의 건국에 공헌이 컸으며, 1392년 정안군에 봉해졌다. 이복 동생 방석이 세자에 책봉되자 이에 불만을 품고,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형 방과를 세자로 책봉, 즉위하게 하였다. 1400년 정종 때 방간에 의한 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세자에 책봉되었다. 이 해 정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즉위 후 사병을 폐지하고 숭유억불 정책을 강행하였다. 또한 호패법을 실시하였고 신문고를 설치하였으며, 국방에도 힘을 써 야인을 격파시키는 등 국정을 안정시켰다. 한편, 학문을 장려하여 주자소를 설치하고 동활자인 계미자를 제작하였다. 또한 하 윤 등에게 <동국사략> <고려사> 등을 편찬하게 하였다. 대외관계에서는 명나라로부터 고명 금인을 받아서 '조선국왕'이라 칭하게 되었으며, 안으로는 왕권의 확립에 힘써서 국가의 기반을 튼튼히 다지는 데 있어서 크게 이바지하였다. 1418년 세자(후의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 주었다.

태종 무열왕[편집]

太宗武烈王(604-661)

신라의 제29대 왕(재위 654-661). 무열왕이라고도 하며 성은 김, 이름은 춘추이다. 진지왕의 손자이며 어머니는 진평왕의 딸 천명 부인이다. 642년 선덕 여왕 때 백제의 침입으로 대야성이 함락되자, 고구려와 연합하여 백제에 보복하려고 고구려에 갔으나 오히려 갇혔다가 돌아왔다. 그는 외교 수완이 비상하여 여러 차례 당에 내왕하면서 외교적 성공을 거두었는데, 군사 원조를 약속받아 삼국 통일의 기초적 작업을 진행시켰다. 654년 진덕 여왕이 후사 없이 죽자, 군신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라 신라 최초의 진골 출신 왕이 되었다. 즉위 후 이방부령 양수에게 명하여 율령을 상정하게 하고 60여 조의 이방부격을 제정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당나라에 대해서는 계속 친교 정책을 실시하여 깊은 신뢰를 얻고 개부의 동삼사 신라왕에 책봉되었다. 660년 나·당 연합군을 결성하여 김유신 등에게 5만의 군사를 주어 백제를 멸망시켰다. 이듬해 백제의 부흥군을 격파하였으며 고구려 정벌을 위해 군사를 일으키다가 죽었다. 그의 즉위로 신라 왕권의 전제화가 확립되었으며, 당나라의 율령제도를 모방한 관료 체계가 정비되었다. 또한 9서당이라는 9개 군단을 설치하여 군사조직이 강화되는 등 국가 체제가 확립되었다.

태평[편집]

泰評

고려의 문신. 황해도 연안에서 출생하였으며 사서에 능하여 이사(吏事)를 잘 보았다. 신라 말에 호족 유긍순의 기실(記室)이 되었다. 유긍순이 궁예에게 격파되자, 궁예에게 항복하였다. 후에 왕 건을 섬겨 고려 개국에 공을 세우고 순군 낭중이 되었다.

태흘[편집]

泰屹(1710-1793)

조선의 승려. 호는 천봉, 본관은 서흥, 속성은 김이다. 16세에 유덕사에서 승려가 되었고 도원으로부터 구족계(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를 받았다. 1729년, 우점에게 학문을 배운 후 이름난 승려들을 찾아다니며 공부하였다. 그 후 만년에 배천 호국사로 들어가 좌선하다가 해숙의 법을 이어받았다. 죽은 후 정골 2편과 사리 64개가 나왔는데, 호국사·월정사·망월사 등에 각기 나누어 보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