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정치/국 제 정 치/세계각국의 정치사정/중동 제국의 정치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아랍 세계
[편집]第二次世界大戰以後-Arab 世界
제2차 세계대전은 그때까지 중동·북아프리카를 지배하여 온 영·프 등 강대국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반대로 소련의 영향력을 증가시켰다. 이같은 조건 하에서 전쟁이 끝난 직후에는 이란·이라크·시리아·레바논·이집트 등에 좌경세력에 의한 내란이 계속 일어났으나 이들은 곧 진압되었다. 프랑스의 위임 통치령이었던 시리아·레바논은 1964년 영·프군을 철수시켜 독립을 쟁취하였다. 또 한편 전후의 중동 및 북아프리카는 민족해방운동과 제3세력 형성의 길을 배경으로 삼고, 1945년 3월 아랍 제국을 연합하는 아랍제국연맹을 결성하였다. 이것은 원래 영국이 아랍 제국을 친영적(親英的)으로 결속시키고 아랍 제국에서 보수 정권을 결합하고자 제창한 것이었는데 그후 아랍연맹은 영국의 의도와는 달리 아랍 제국들의 중간 노선에 따라 반(反) 식민지주의 아랍 통일의 방향을 적극적으로 밀고 나아가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건국·팔레스티나 전쟁
[편집]Israel-建國·Palestina戰爭
영국의 위임통치령이었던 팔레스티나에서는 나치에게서 박해를 받았던 유태인 난민의 이주(移住)가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급증하여 결국 경제적·사회적으로 마찰을 일으키기에 이르러 아랍 원주민과의 대립항쟁이 격화되어 갔다. 이같은 대립항쟁을 해결할 수가 없는 위임통치국 영국은 드디어 사태수습을 국제연합에 맡겼다. 국제연합은 1947년 11월 팔레스티나 분할안을 채택하여 다음해인 1948년 5월 이스라엘의 독립을 승인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건국을 시오니스트(팔레스티나에 민족적 국가를 수립한다고 하는 유태인의 운동)에 의한 침략행위라고 간주하는 아랍 제국들은 곧 팔레스티나에 침입하여 팔레스티나 전쟁이 발발하였다. 그러나 결국 미·영 강대국들의 뒷받침을 받고 있는 이스라엘은 요르단·이집트 등 군주제(君主制) 때문에 서로 이해대립을 일으키고 지도권 쟁탈을 일삼는 약점을 지니고 있는 아랍측을 물리쳐 1949년에는 휴전이 성립되었다. 이때 이스라엘은 UN분할안이 할당한 면적을 넘는 국토를 점령하였다. 그 이후 미국은 이스라엘의 시오니스트 정권에 대하여 군사·경제원조를 강화하고 이곳을 아랍 세력을 견제하는 거점으로 활용하는 정책을 채택하기 시작하였다. 1967년의 중동전쟁이 발발하게 된 이스라엘과 아랍의 대립분쟁은 그 발단이 여기에 연유한다. 그 후 1994년 10월 평화협정에서 이스라엘은 1967년 점령한 요르단 영토를 돌려주고, 요르단 영토 내에서 이스라엘 군사를 완전히 철수하였다.
이란 석유 국유화
[편집]Iran 石油國有化
제2차대전 이후 미국은 소련을 견제하는 정책으로 중근동(中近東)에 지배권을 장악하고 이미 1947년에 발표한 트루먼 독트린에 의하여 영국을 대신하여 그리스와 터키의 방위문제를 인수하고 있었다. 그후 1951년 10월 미국은 세계전략의 일환으로 미·영·프 3국에 다시 터키를 합쳐 4개국에 의한 중동방위 사령부(MEC)의 설치를 제안하였다. 미국은 이 구상에 의하여 중동 제국을 군사적으로 장악하였고 이곳을 소련에 대항하는 기지(基地)로 활용하는 동시에 공산주의 세력의 침투를 막고 풍부한 중동의 석유자원을 영구히 보존하도록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1951년 이란의 석유국유화사건과 1952년 7월의 이집트 혁명은 이곳에 이해관계가 얽힌 강대국들에게 심각한 위협을 주었다. 중동에 불어닥친 민족주의의 대두 속에서 이란에서는 츠데당(공산당)을 선두로 한 노동자·학생 등이 1951년 3월 민족주의자 모사데크(1951∼53 수상재임) 정권을 탄생시키고, 앵글로 이레이니언 석유회사를 국유화하는 법률을 공포하였다. 이에 대하여 미·영 양국은 자헤디 장군의 쿠데타를 지원하여 1953년 모사데크 정권을 넘어뜨렸다. 앵글로 이레이니언을 대신하여 국제차관단이 결정되고 미국은 채굴권에 크게 개입하여 40%의 주식(株式)을 차지하였으며, 영국의 이란 석유독점권을 이양받았다.
이집트혁명·알제리 독립전쟁
[편집]Egypt革命·Algerie 獨立戰爭
이란의 민족주의 세력이 석유국유화 투쟁을 벌인데 힘입은 이집트는 국민과 의회(議會)가 들고 일어나 1951년 가을에 이미 1936년에 체결된 영국·이집트 불평등조약(영군의 수에즈 주둔 등)을 폐기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뒤이어 1952년 7월에는 나세르 중령을 선두로 하는 자유장교단이 쿠데타로서 파르크왕과 봉건정부를 타도하고 '7월혁명'에 성공하였다. 이집트의 7월혁명은 중동·북아프리카의 아랍 세계에 있어서 아시아의 중국혁명과 비견할 만한 큰 영향력을 미치게 되어 이 혁명의 여파는 즉시 북아프리카의 아랍 제국에로 파급되어 갔다. 북아프리카의 아랍 4개국 중에서 구(舊) 이탈리아 령(領) 리비아가 UN에 귀속되고 1951년에 왕국으로 독립은 하였지만 프랑스 지배 하의 튀니지·알제리·모로코는 독립을 위하여 프랑스 식민주의자와 무력으로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튀니지에서 1952년 12월, 모로코에서는 1954년 8월, 알제리에서는 1954년 11월 대불 무장투쟁이 개시되었다. 그러나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실패한 프랑스는 모로코·튀니지의 독립을 허용하고 알제리의 확보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리하여 알제리에서는 민족해방전선(FLN)의 지도 하에 결속한 민족주의자·노동자·빈농 등이 7년 반에 걸친 피비린내 나는 독립해방전쟁을 전개하였다.
바그다드 조약·수에즈 전쟁
[편집]Bagdad條約·Suez戰爭
이집트 혁명을 계기로 하여 급속도로 발전한 중동·북아프리카의 민족해방운동에 대처하여 소련의 진출을 막고 집단 방위체제 구축의 일환으로서 터키·이란·파키스탄·이라크와 결속하여 중동방위기구(바그다드 조약기구)를 형성하였다. 이 군사블록의 참된 지원자 미국은 처음에는 정식회원국으로 가입하지 않았다가 1956년부터 사실상의 구성 멤버가 되었다. 이것은 아랍연맹에 쐐기를 박고 NATO와 SEATO를 연결하는 반(反)소·반공 군사블록의 중간지대로 만들고자 한 것이다.
한편 아랍 제국(이집트·시리아·사우디아라비아·요르단·예멘)은 아랍 방위체제를 형성하여 미국측 불록, 즉 바그다드조약에 대처하였다. 또한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은 1956년 7월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대통령, 인도의 네루 수상 등과 회담하여 반군사 블록, 비동맹 중립주의를 내세웠다. 미국은 아스완 댐 건설원조 철회통고로써 이집트에 압력을 가했으나, 7월 26일의 혁명기념일에 나세르는 만국 수에즈운하회사 국유화선언을 단행하여 이에 대응하였다. 이때 중동 아프리카에 있어서의 지위가 더욱 약화될 것을 염려한 영국·프랑스·이스라엘은 10월말 수에즈 지역에 침입하여 소위 '수에즈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집트는 군사적으로 패배하고 말았지만 미·소 양국을 비롯한 3국침략에 대한 세계 비난이 혹심한 결과 고립에 처한 영·프·이스라엘 3국군은 휴전이 불가피하게 되어 철수하였다.
이라크의 혁명·키프로스의 독립
[편집]Iraq-革命·Kypros-獨立
미국은 1957년 1월 '아이젠하워 독트린'을 발표하였다. 이 발표의 목적은 영국·프랑스의 후퇴와 대처하여 중동에서의 미국의 지원을 확립함과 아울러 바그다드조약을 통하여 중동의 민족해방운동의 발전을 비공산 세력으로 묶어놓는 데 있었다. 이를 위하여 필요할 경우에는 미국이 직접 무력을 개입시킬 것을 선언한 것이다. 아이크 독트린은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에 의한 궁정(宮廷) 쿠데타(친소 내각의 파면), 시리아에 대한 압력(이것은 오히려 이집트와의 통합과 아랍연방의 성립 등 제3세력화를 야기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레바논의 샤문 정권에 대한 반대투쟁의 진압이나 이라크 혁명 후 미 해병대의 레바논 상륙 등과 같은 일련의 정책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가운데 이라크 혁명이 일어나 1957년 7월 카셈 중장과 아레프 대령은 바그다드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하심왕과 누리사이드 정권을 타도하였다. 카셈(1958∼63 수상 재임) 새 정권은 토지개혁법을 공포하고 1959년 2월 바그다드 조약에서 탈퇴하였다. 미·영국의 중동진출에 있어서의 거점으로 삼은 풍부한 석유왕국 이라크의 혁명은 큰 타격이었다. 1959년 8월 바그다드 조약기구는 중앙조약기구(CENTO)로 개칭되었다.
1960년에는 터키에서 멘데레스(수상재임기간, 1950∼60) 독재정권이 타도되고 구르셀이 정권을 잡았고 키프로스는 8월에 독립하였다. 그러나 취리히·런던협정에 의하여 미·영국의 지원은 계속 증대되었다. 아라비아 반도 남단 오만에서도 반영(反英) 투쟁이 고조되어 게릴라전이 시작되었다.
아랍 사회주의연방
[편집]Arab 社會主義聯邦
아랍 민족주의의 적극적 단합을 내세워 1958년에 성립된 아랍 연방은 이집트·시리아 두 나라간에 사회발전의 격차와 나세르 대통령의 대국주의적 모순 때문에 1961년 9월 시리아는 아랍 연방에서 이탈하게 되었다. 나세르가 죽은 후 사다트 대통령은 1971년 시리아와 리비아 양국과 제휴하여 아랍 공화국연방을 구성하고자 하였으나 궁극적인 통합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말았다. 시리아측은 1976년 요르단과의 연방국을 추진하면서 오히려 아랍 연방에 미온적이며, 리비아는 1972년 이집트와 단일국가 형성에 적극적이었으나 실현되지 않고 양국 관계만 도리어 악화되었다. 범 아랍 통합의 이념은 난관 속에서도 계속 추진되고 있다.
알제리의 독립·예멘의 혁명
[편집]Algeria-獨立·Yemen-革命1954년 이래 투쟁이 계속된 알제리에서는 1960년에 들어와서 투쟁은 가일층 전진하였다. 프랑스는 NATO의 원조를 받고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벌였지만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LN)으로 굳게 단결된 독립항쟁은 계속되어 드디어 1962년 프랑스와의 에비앙 협정에 의하여 독립을 쟁취하게 되었다. 알제리의 민족 해방전쟁은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지역과 아직도 독립을 얻지 못한 동·남아프리카인들의 투쟁으로 파급되었고 아랍·아프리카 지역에 있어서 민족주의 세력을 크게 신장시켰다. 그 해 9월에는 다년간에 걸쳐서 봉건 왕제의 절대권력이 지배하고 있던 예멘은 사라르 대령의 쿠데타로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사라르 역시 온건파 이리아니의 쿠데타로 실각하고 예멘은 왕당파(王黨派)와 군부공화파 사이의 내전상태에 돌입했다. 왕당파를 지원한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원철회와 공화파 인정으로 내전은 종식되나 군부정권은 내부의 갈등으로 연속적인 쿠데타·테러가 발생했다. 남예멘은 민족해방전선(NLF)·남예멘해방 전선의 대영 독립투쟁으로 1967년 독립한 후 1970년 신헌법을 공포하여 인민민주공화국을 수립했다. 1969년 집권한 루바이 대통령 평의회의장은 친중노선을 지향하였으나 1978년 친소쿠데타로 실각하고 친소 강경파인 하사니가 일시 집권했으나 곧이어 실권자인 이스마일이 정권을 장악했다.
이라크와 레바논
[편집]Iraq-Lebanon
이라크는 1958년 카셈 중장이 쿠데타로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수립, 집권하였으나 1963년 바트당이 중심이 된 군부쿠데타로 실각하고 아레프가 집권하였다가 바트당 내의 강·온파 내분으로 친위쿠데타를 감행, 다시 정권을 장악했으나 비행기 사고로 급서했다. 그의 형인 라만이 정권을 인수했으나, 1968년 바트당 온건파가 쿠데타에 성공, 바크르 우익정권이 출범했다. 중립·비동맹노선이나 친소경향이 짙었다. 국내적으로는 쿠르드족 분리운동으로 내전상태였고 이란과는 적대관계가 지속되고 있었으며 대이스라엘 강경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레바논은 1946년 프랑스 위임통치령에서 독립했으나 1958년 이래 종교문제로 발단된 내전상태가 계속되어 오고 있다. 기독교와 회교 사이의 국가권력 배분 과정에서 시작된 내전은 이스라엘과 인접한 아랍제국의 개입을 촉발, '중동의 화약고'로 지칭되고 있다.
이란의 백색혁명
[편집]Iran-白色革命
1958년 미국의 지원으로 민족주의자 모사데크를 축출하고 복귀한 팔레비 국왕은 친미노선을 견지했다. 1968년부터 토지개혁·여성참정권 부여 등 '백색혁명'으로 불리는 근대화 작업에 착수했으나 왕권안정을 위한 국방비 증액과 인플레이션, 생필품 부족 등에 대한 국민의 불만, 전통적인 회교·민족주의 세력의 저항이 격화되고 있다.
미국의 대아랍 정책
[편집]美國-對 Arab 政策
1960년대 이후 팔레스티나 민족주의 운동의 고조와 함께 아랍 신생국의 단결이 강화되어 가자 미국은 그 지역에 대한 사회주의 및 소련의 진출과 확대를 막고자 본격적인 대아랍 정책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1964년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가 조직되자 미국은 이스라엘에 대한 원조를 증가하는 한편 사회주의적 민족주의 세력의 침식을 막기 위하여 군주국과 토후국의 보호정책을 실시했다. 미국의 이와 같은 대아랍 정책의 기본 자세는 친소 세력의 억제와 석유자원의 확보라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는데 1960년대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아랍 민족주의 세력이 너무나 급팽창하게 되자 일방적인 이스라엘 지원정책에서 일면 지원 일면 협상정책으로 방향을 바꿨다. 그 결과 키신저의 아랍 및 중동문제를 단계적으로 해결한다는 외교방식이 적용되어 소강 상태를 유지해 왔으나 1977년 카터 행정부의 출범으로 전환점을 맞았다. '중동의 항구적 평화달성'을 기본 입장으로 제시한 카터는 제네바 중동평화회의를 재개, 팔레스타인의 권리인정을 소련과 공동으로 선언하였으며 1979년 캠프 데이비스에서 조인된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에서는 이를 배제함으로써 아랍 강온파의 거센 반발에 직면하게 되었다.
시리아의 정변
[편집]Syria-政變
바트당에 의하여 1966년 일어난 쿠데타는 시리아를 봉건적인 체제에서 완전 탈피시켜 토지개혁·중요 산업의 국유화·노동자의 권익옹호 등의 급진정책을 펴게 했다. 또 대외적으로 미국·영국계 석유회사의 송유관 통과료를 인상함과 동시에 체납까지도 독촉하여 송유관 통과국들의 석유투쟁에 앞장섰다.
아랍권의 친소 강경파인 시리아는 1970년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하페즈 아사드가 무혈쿠데타로 정권을 장악, 시리아 바트당의 일당독재가 계속되고 있다. 1971년에는 리비아·이집트 양국과 아랍공화국 연방을 구성하였으나 3국간의 내분으로 와해되고 1977년 이집트가 이스라엘과 평화협상을 추진하자 단교, 리비아·이라크와 함께 대 이스라엘 강경노선을 견지하고 있다. 제3·4차 중동전에 참전하였다가 패전하였으며 1975년부터 레바논 내전에 깊숙히 개입, 초기에는 기독교 우파를 지원하였으나 이후 반전하여 회교좌파와 PLO 반란세력을 지원하고 있다.
중동전쟁
[편집]中東戰爭
2차대전 때 강대국의 정치적 흑막으로 야기된 이스라엘 독립문제가 아랍민족의 영유권과 마찰을 일으켜 일어난 전후 4차에 걸친 전쟁. 제1차전은 1948년 이스라엘 독립선언으로 발발했고, 2차는 1956년 수에즈운하 전쟁, 3차는 1967년 6일 전쟁으로 미국 지원하의 이스라엘이 영토를 강점·확대시켰고, 4차전은 1973년에 일어났는데 아랍측의 실지(失地) 회복이 약간 있었다. 유엔 안보이사회는 이스라엘측에게 강점한 영토의 반환과 평화공존을 강요하고 있으나 계속 거부당하고 있으며, 이와 맞서 아랍제국은 대이스라엘 격퇴를 위한 강경투쟁 노선에서부터 협상파까지 갖가지 주장이 엇갈리고 있어 현대 세계 분쟁의 초첨이 되고 있다.
팔레스티나
[편집]Palestina
요르단강 서안의 면적 2만 6,000㎢의 지역으로 기원전 10세기경에 건국하였던 유대왕국이 기원전 8∼6세기경에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에게 멸망한 후 아랍계 팔레스타인인들이 이 지역에 정착하였다. 2천년 동안 국가를 잃고 방황하던 유대인들은 시오니즘 운동을 전개, 이 지역에 유대국가 부흥을 추진하였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이 지역을 지배한 영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양측에 국가건설을 약속, 중동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유대인의 이주가 증가함으로써 정착 중인 팔레스타인인과 아랍인 사이에 무장대립이 격화되자 영국은 위임통치권을 포기, 국제연합이 이 지역을 분할하여 유대국가와 팔레스타인국가를 세우고 예루살렘을 국제 도시화하는 중재안을 제안했으나 실패했고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하자 아랍측의 선공으로 팔레스티나 전쟁이 발생, 이스라엘이 승리함으로써 팔레스타인인은 축출되었다. 420만 팔레스타인인의 생존권과 조국해방, 기독교·유대교·이슬람교 등 3대 종교의 성지인 예루살렘, 역사적인 종교적 갈등 문제로 요약되는 팔레스티나 문제는 중동전쟁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1964년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가 결성됨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편집]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
1964년 결성된 PLO는 1974년 아랍정상 회담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의 유일한 합법적 대표기구로 승인받았고, 동년 국제연합에서도 참관인 자격을 부여받았으며, 서방 일부 국가에서도 자결권과 외교특권을 인정받고 있다. 무장투쟁에 의한 이스라엘 축출과 팔레스타인 국가건설을 헌장에 규정하였던 PLO는 1970년대 말부터 다시 강경화하고 있다.
PLO와 중동평화
[편집]PLO-中東平和
팔레스타인 문제는 중동정치에서 전체 아랍문제이면서 지역 문제라는 모호성을 가지고 있다. 걸프 전쟁중에 현재 UN의 제재를 받고 있는 이라크를 지지하였던 팔레스타인은 중동 정치에서 나타나고 있는 민족 정체성마저 빛을 잃었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정치적인 정통성 문제뿐만 아니라 인도주의적인 가족 재회 또는 가족 재결합이라는 이산 가족에 대한 문화적 이슈로 국제문제가 되어 왔었다. 이는 난민문제이며 UN은 피난민구제기구(UNRWG)를 1949년에 만들어 팔레스타엘의 아랍점령지내 정착촌 문제 및 팔레스타인 주민문제는 새로운 정치적 쟁점으로 제기될 개연성이 높기 때문이다. 결국 팔레스타인 민족이란 의미는 정치성을 가진 상징적 의미로 해석하기보다는 규모가 큰 소수 민족문제의 발현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중동 평화의 중심 변수인 팔레스타인 주권문제는 UN결의안 242호와 338호에 의하여 실질적인 문제로 부각되었다. 팔레스타인 민족 문제와 관련된 중동전쟁은 1948, 1956, 1967, 1973년 등 4차 이스라엘과의 전쟁과 1970-1971 요르단 내전, 1975-1976 레바논 내전, 1982 레바논 전쟁, 1991년 걸프 전쟁 등으로 점철되어 왔다.
특히 6일 전쟁 이후 아랍의 패배로 인한 좌절감은 아랍민족주의 열기를 가라앉게 하였으며 제3세계의 정치 교섭체인 비동맹세력의 영향력을 감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분위기는 PLO로 하여금 아랍·유대인 갈등을 격화시키는 촉매 역할로 테러리즘을 이용하게 하였다. 6일 전쟁 이후 국제사회에서 충격을 준 중동 테러리즘은 PLO에 의하여 발생하였다. 미국과 이스라엘 등 서방세계는 PLO를 정치기구보다는 테러집단으로 규정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축소시켰다.
1982년 레바논 전쟁 결과로 PLO는 베이루트에서 추방되었으며 PLO의 성격이 군사적 성격에서 정치적 성격을 갖게 되는 환경을 만들었다. PLO는 이스라엘과 준군사적으로 투쟁할 방향을 잃은 것이며 군사 세력이 여러 파벌집단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베리루트에서 8개 아랍국가로 분산 철수하면서 군사적 영향력을 지닌 집단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1991년 걸프 전쟁에서 PLO가 이라크를 지지하면서 아랍세계에서조차 PLO는 고립된 환경을 지니게 되었다. PLO는 미국과 이스라엘이 PLO기구를 팔레스타인 민족의 정치적 대표권을 가진 기구로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레바논 전쟁 후에도 민족의 생존권을 위하여 국제사회에서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협상권을 요르단에게 위임하는 원칙을 결정하였다. 이것이 1985년 요르단-PLO협정의 주요 내용이다. 이 원칙에 의하여 요르단 대표내에 팔레스타인인이 참여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었다. 그러나 1993년 워싱턴 중동평화협정으로 이스라엘과 PLO의 정체성은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