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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대유엔외교〔서설〕
[편집]韓國-對UN外交〔序說〕
전후의 새로운 세계질서를 확립하며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안전을 추구하려는 범세계적인 기구로서 유지되어 온 유엔은 그 동안에 크게 국면이 뒤바뀌는 세계정세의 변천을 불가피하게 반영하면서 몇 고비를 넘기지 않을 수 없었다.
즉 동·서 양대진영의 냉전과 각 회원국의 국가 이해가 얽힌 착잡한 국제관계는 50년대의 유엔 안에 이합집산(離合集散)과 분열의 복잡한 양상을 띠게 하였으며, 1960년대에 들어와서는 미·소 양대국의 평화공존체제가 굳어짐에 따라 동·서의 각축장과도 같이 경화(硬化)되었던 유엔이 차츰 신축성을 가지면서 국제정치의 냉엄한 현실에서 초연할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1970년대부터는 미·소 양대국의 세력균형으로 유지되어 온 국제질서가 다극화한 국제관계로 변이(變移)되어, 유엔 원가입국의 하나인 대만이 축출되고, 중국이 가입되는 등의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던 것이다.
한국의 건국과 유엔
[편집]韓國-建國-UN
한국은 국제연합(UN)의 가입국이 아니면서도 국제연합과는 남달리 두터운 관계를 맺어 왔던 것이다. 이러한 긴밀한 관계는 한국으로 하여금 대유엔외교를 매우 중요시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원래 한국이 유엔과 관련을 맺게 된 것은 1947년의 제2차 유엔총회 때부터이다. 즉 1945년 12월의 모스크바협정의 테두리 안에서 한국 독립문제가 미국과 소련 사이에 해결을 보지 못하게 되자, 미국은 세계평화 기구인 유엔에 의해서 한국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이를 유엔총회에 제기하였던 것이다.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는 소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국독립의 절차를 규정하는 미국의 결의안을 절대다수로 채택하였다. 이 결의안에 따라서 한국독립을 위한 작업이 진행되었으나, 소련측의 방해로 말미암아 남한지역에서만의 총선거에 의해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었던 것이다. 1948년 9월 21일부터 12월 21일까지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총회 제1회기화 1949년 4월 5일부터 5월 18일까지 프라싱 메도우에서 개최된 제2차 회기에서 새로 수립된 한국정부는 한반도에서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됨으로써 한국정부의 정통성이 부여되었던 것이다.
한국전쟁과 유엔
[편집]韓國戰爭-UN
한국건국 2년 만인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군이 남침하였을 때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즉시로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토의한 결과 북한의 군사행동을 평화를 파괴하는 침략적 행위로서 규정하고, 공산군의 침략행동의 즉각 중지와 38선까지의 철수를 경고하였다. 아울러 이사회는 모든 유엔회원국들에게 유엔이 취하는 행동에 대하여 모든 원조를 제공할 것을 촉구하였으며, 또한 침략자를 격퇴시키기 위하여 한국에 유엔군을 파견할 것도 결정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미국을 위시한 우방 16개국이 유엔의 기치하에 침략군을 물리치는 한국전쟁(韓國戰爭)에 참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유엔회원 국가들도 한국의 구호사업에 참가하였던 것이다.
통한문제와 유엔
[편집]統韓問題-UN
3년간의 격전 후인 1953년 7월 27일 휴전의 성립한 북한공산군의 남침은 일단 격퇴되었으나 우리민족의 염원인 국토통일은 달성되지 못했다. 즉 휴전협정 제60조에 의거하여 1954년 4월부터 6월까지의 이른바 제네바 정치회담은 아무런 성과를 보지 못한 채 한국문제는 또다시 유엔으로 이관되고 말았으며 이것을 계기로 한국문제의 토의는 유엔총회의 연례행사와도 같이 되고 말았다.
한국문제는 매년 언커크가 유엔통회에 제출하는 보고서와 더불어 유엔에서 자동적으로 토의하여 왔던 것이다. 해마다 유엔총회에서 토의되는 한국문제는 절차상의 문제인 대표초청 문제와 실질사항인 통한문제가 있다. 여기에 공산측이 제안하는 소위 언커크 해체문제 및 외군 철수문제가 있다. 유엔총회가 개최되면 한국문제는 우선 운영위원회에서 단일의제로 하자는 서방측 주장과 안건별로 분리하여 토의하자는 공산측 안이 맞서 치열한 논쟁이 벌어진다. 결국은 표결에 의하여 단일의제로서 채택케 되는 것이 상례이다. 이와 같이 한국 문제가 의제로서 채택되면 유엔총회의 제1위원회 즉 정치 위원회에서 토의를 하게 되며, 이 결과는 전체총회에 회부되고 여기에서 간단한 토의를 거친 후 표결한다.
한국의 대 유엔외교는 유엔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던 1950년대까지는 별문제가 없었다. 따라서 1959년까지는 유엔에 의하여 한반도에 있어서의 유일 합법정부로서 승인된 대한민국정부의 대표만이 당연히 유엔총회에 초청되었다.
대유엔 외교의 전환기
[편집]對UN外交-轉換期
유엔총회 회원국의 변동, 즉 새로운 회원국이 유엔에 가입함에 따라, 이 대표초청 문제를 둘러싸고 유엔총회에서 상당한 논의가 되었다. 즉 1960년 아프리카 신생독립국들이 대거 유엔에 가입함에 따라서 과거 한국과 유엔과의 관계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회원국들에 대한 북한의 집요한 외교공세와 공산국가들의 적극적인 책략에 의하여 이 대표 초청문제에 혼란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대한민국대표는 무조건 초청되어야 하나, 한편 북한대표도 유엔의 권위와 권능을 인정한다면 투표권이 없이 유엔총회에 초청될 수 있다는 미국의 조건부 초청안인 이른바 '스티븐슨안(案)'과 공산측 제안인 남북한대표 무조건 초청안이 절차문제로서 유엔에서 논란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한국의 대유엔외교는 득표획득에 집중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국의 외교적 노력의 결과로 남북대표의 동시초청안이 부결되고, 그 대신 한국대표 단독초청안을 통과케 하는 한편 통한결의안을 채택케 하였다.
그러나 1968년 9월 24일부터 12월 21일까지 개최된 제23차 유엔총회에서는 종전까지의 한국문제의 자동상정방식을 언커크보고에 따른 재량상정방식(裁量上程方式)으로 바꾸자는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이것은 한국의 대 유엔외교의 일대 전환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재량상정방식은 다시 1971년의 제26차 유엔총회에서 한국문제 불상정방식(不上程方式)으로 바뀌었다.
1970년대를 전후해서 한국문제가 재량상정으로 전환되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자동상정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왔다. 그러므로 되도록 한국문제를 유엔의 테두리 안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을 바람직하게 생각해 온 종전의 한국의 정책에서 보면 한국문제의 불상정 가결은 큰 변화임에는 틀림없다. 그것은 바로 다극화현상으로 인한 최근의 우리 주변정세가 자아낸 결과요, 냉엄한 국제관계의 현실의 반영이라고 할 수밖에는 없는 것 같다.
<李 基 遠>
유엔총회에서의 한국문제 토의
[편집]UN 總會-韓國問題討議
매년 유엔총회에서 토의되는 한국문제는 내용상·수속절차상 문제인 대표초청 문제와 실질사항인 통한문제(統韓問題)가 있고, 공산측이 제안하는 소위 언커크해체안과 외군철수안 등으로 대별할 수 있다. 총회가 개최되면 한국문제는 운영위원회에서 단일의제(單一議題)로 하자는 서방측 주장과 안건별로 분리토의하자는 공산측 주장이 충돌을 하게 되는데, 표결에 의해 단일의제로 채택되는 것이 상례로서, 의제로 채택이 되면 유엔총회의 제1위원회(정치위원회)의 토의를 거쳐 총회에 회부, 토의·표결 등의 절차를 밟게 된다.
한국문제의 유엔상정
[편집]韓國問題-UN上程
한국문제가 유엔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46년과 1947년에 한국통일을 위한 미·소공동위원회가 소련의 책동으로 실패로 돌아가고, 이어 모스코바회담 개최제의마저 소련의 거부로 실패로 돌아가자, 미국이 소련과의 타협이 종결된 것으로 판단 1947년 9월 17일 한국문제를 유엔총회에 상정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유엔총회는 미국의 제안에 의해 동년 11월 14일 제2차총회에서 남·북한의 총선거의 실시 및 유엔 한국위원단의 설치를 결의하고, 1948년 1월 8일 서울에 동위원단을 설치하였으나 소련에 의해 입북(入北)이 거절되었다. 이 때문에 남한에서만 선거가 실시되어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었으며, 제3차 유엔총회의 정치위원회는 1948년 12월 6일 한국대표의 단독초청안을 가결하였고, 12월 15일 총회는 결의안 제195호 3으로 한국을 한반도 내에서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했다.
한국의 유엔가입 신청은 1949년 1951년에 제출되었으나 소련의 거부권 행사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북한의 남침시에는 1950년 6월 27일 긴급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하여 소련대표가 불참한 가운데 유엔군의 한국파견을 결정하였다. 또한 동년 9월부터 1951년 2월에 걸쳐 개최된 제5차 총회는 전한국에 통일독립된 민주정부의 수립을 위해 언커크(유엔한국통일 부흥위원단)를 설치하기로 결의하였으며, 한국전쟁 중 언커크는 총회의 지시에 따라 구호와 부흥을 실행함에 있어 유엔을 대표할 책임이 부여되었다. 언커크는 7개국으로 구성되며, 이들은 한국에 상주하면서 매년 유엔총회가 개막되기 전에 회합을 갖고, 한국내의 안전보장을 비롯하여 정치·경제·문화·사회 등 제분야에 걸친 자세한 내용의 보고서를 작성하여 유엔총회에 제출한다. 유엔총회는 이 언커크보고서를 접수한 후 자동적으로 한국문제를 토의하게 된다.
이에 따라 한국문제는 언커크보고서와 함께 매년 자동상정되어 왔으나, 마치 연례행사와 같이 토의는 하나 항상 동어반복을 되풀이할 뿐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더구나 유엔에서 한국문제는 점차 인기없는 냉전(冷戰)의 부산물로 여겨졌다. 그런 가운데 중국의 유엔가입과 병행, 무조건 남·북한 동시초청 문제는 정부의 대(對) 유엔외교에 시련을 주어 왔다. 이리하여 정부는 1968년 한국문제 토의를 연례 자동상정방식에서 재량상정(裁量上程) 방법으로 바꾼 후부터 한국문제의 불상정을 원했다.
남북한 동시초청안·외군철수안·언커크해체안과 재량상정방식
[편집]南北韓同時招請案·外軍撤收案·UNCURK解體案-裁量上程方式
한국문제가 유엔과 관련을 맺게 된 이후에 대표초청 문제에 있어서는 1959년까지 한국대표만이 한국문제 토의에 투표자격 없이 무조건 초청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에 이르러 아프리카의 신생국들이 대거 유엔에 가입되어 유엔내의 사정이 달라짐으로써 1961년 4월 미국에 의해 한국대표는 무조건 초청되어야 하나 북한대표도 유엔의 권위와 권능을 인정하면 투표권 없이 유엔총회에 초청될 수 있다는 조건부 남·북한 동시초청안(스티븐슨안)이 15차 유엔총회에 제출되었다. 1965년의 20차 총회 때는 남북한 동시초청안이 제기되었으나 역시 한국 단독초청안이 통과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기부터 비동맹국가들의 영향으로 급격히 변하기 시작한 유엔총회의 분위기는 한국문제를 유엔에서 토의하는 자체가 이롭지 못한 방향이라는 것이 확실해지게 되었다. 이래서 매년 자동적으로 한국 문제를 토의하던 상정방정식을 버리고 언커크의 보고에 따른 재량상정방정식을 취하도록 1968년에 전환시켰다. 그러나 1972년의 알제리 결의안을 서두로 하여 공산권의 제안이 격심해지자 1973년에는 북한 대표가 처음으로 유엔 회장에 업저버 자격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후 주한 외국군의 철수를 강력히 주장하고 나왔으며, 그 결과 1974년에는 유엔정치위원회에서 남북한을 동시에 초청하여 열띤 토론을 벌이게 되었고, 1975년 회기에서는 유엔은 한국측이 주장한 유엔군의 계속 주둔안과 북한측 의견인 유엔군 철수안이 동시에 통과되는 모순을 빚게까지 되었다.
한국문제 불상정방식
[편집]韓國問題不上程方式
한국 정부가 1968년 총회부터 재량상정방식(裁量上程方式)을 채택한 이후에도 1970년 제25차 유엔총회까지 한국단독 초청안이 가결되고, 공산측이 제의한 남북한·무조건 동시 초청안 언커크 해체안·주한미군철수안 등은 부결되는 연례적인 절차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매년 통한결의안(統韓決議案)에 대한 지지표가 줄어들고 대신 공산측표가 늘어나는 경향이 나타나고, 중국의 유엔가입이 확실해짐에 따라 남북한 동시초청 문제에서 불리하게 될 위험성이 있다는 점, 분단국 동시가입론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게 되었다는 점, 그리고 북한과의 접촉에 손실이 된다는 점 등을 감안하여, 한국정부는 1971년 제26차 유엔총회에서 재량상정방식을 한걸음 더 발전시켜 불상정방침을 채택하기로 방침을 세웠다. 한국의 이러한 방침은 총회의 운영위원회에서 영국대표에 의해 동의되어 표결에 붙여졌다.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남북접촉에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서 1년간 한국문제의 토의를 보류하자는 동 연기안의 표결 결과는 운영위원회에서 찬성 13, 반대 9, 기권 2, 불참 1로 가결되었다. 이에 따라 주한유엔군 철수안(35번째), 언커크해체안(36번째), 언커크보고서(37번째), 알제리안(96번째)은 가의제(假議題)로 남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71년 중국이 유엔에 가입하고 비동맹세력이 확대되자 이듬해에는 주한미군의 유엔기 사용금지를 골자로 하는 알제리안이 제출되었다. 이에 서방측은 7·4 공동성명과 적십자를 통한 대화의 분위기 조성을 명분삼아 한국문제 불상정 방침을 결의했다. 1973년에 다시 제출된 공산측 상정안에 대해서도 서방측은 막후교섭을 통하여 남북한의 자주해결을 내세워 언커크 해체안만 합의하고 유엔군 해체문제는 연기시켰다. 이렇게 한국측은 원칙적으로 유엔에서의 한반도문제 토의 자체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기본 입장을 굳히고 불상정 방식을 채택하게 되었으나 공산 측에서 먼저 제기해 오는 사태에는 대비해야만 되었다. 1974년의 총회는 바로 공산측의 제안에 대한 방어를 위하여 한국 문제를 유엔에 상정시켜 북한측 의견을 48대 48동수로 부결시킨 한편 유엔군의 계속 주둔 필요성을 강조한 한국안을 61대 43으로 통과시켰다. 이어 1975년의 제30차 총회에서는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을 비롯한 주한외군의 주둔과 철수문제를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져 표결 결과 서방측 안이 찬성 59, 반대 51, 기권 29로 통과된 한편 공산측안도 찬성 54, 반대 43, 기권 42라는 수로 역시 통과되었다. 그러나 한국의 남북한 UN 동시가입 신청은 소련이 거부권을 행사하여 안보리의 부결로 거부되다가 1991년 9월 17일 제46차 총회에서 마침내 남북한이 동시가입하였다. 그리고 남한은 1996년 12월 12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9번째 회원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