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정치/한국의 정치/한국인의 정치의식과 정치행동/한국의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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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선거제도사[편집]

韓國-選擧制度史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의원 총선거 이래 13차례의 대통령 선거(직선 6차례), 13차례의 국회의원 선거, 2차례의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1차례의 대통령선거인단 선거 등 수십 차례의 선거를 치러왔으나 한국의 선거사·제도를 추소해 볼 때마다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긴다.

제도의 개폐도 그러하거니와 그 운영에 있어서도 무리와 모순이 많았고 항상 정권 주체의 자의적인 해석과 적용이 빈번했으며 관권개입과 과열화·금전살포·흑색선전이 난무하는 혼탁한 분위기에 선거인들의 맹목과 무정견이 맞물려 엮어졌다.

불과 45여 년의 헌정사에 9차례의 헌정개정이 있었고 그 대부분이 정권권력에 집중된 것이었는 만큼 선거가 정치권력을 창출해내는 국민적 합성행위임에 비추어 그 파란과 변혁의 정도는 짐작키 어렵지 않다. 그러나 제도와 그 운용보다도 선거에 임하는 선거권자들의 자세부터 근본적으로 변화되어야만 궁극적으로 그 본래의 의사를 분명히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대통령 선거제도[편집]

大統領選擧制度

제헌헌법에서는 정·부통령을 국회에서 선거한다고 규정하여 초대 대통령은 국회 간선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국회에서 안정세력 확보에 실패한 이승만은 재선이 어렵게 되자 헌법을 개정, 직선제로 전환하여 제2·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정·부통령 선거는 부정선거의 극치로 일컬어져 결국 '4·19'의 도화선이 되었다. 제3차 개정헌법에서는 의원내각제를 채택, 제4대 대통령은 참의원·민의원 합동회의에서 간선제로 선출되었다.

'5·16' 이후 제5차 개정헌법에서는 대통령제로 복귀해 제5·7대 대통령선거는 직선제를 취하였으나 군사정부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거세지고 여당에 대한 야당의 추적 공세가 가속화되자 1972년 10월 16일 소위 '10월유신'으로 불리는 국가긴급권을 발동, 헌법을 개정하여 자의적으로 권력구조를 개편했다.

유신헌법으로 불리는 제7차 개정헌법에서는 국민의 주권적 수임기관인 통일주체 국민회의를 설치하여 동 회의에서 대통령을 토론없이 무기명 투표로 선거했다. 이는 미증유의 선거제도로 동 회의만 장악하면 집권은 국민적 의사와 관계없는 것이었다. 제8∼11대 대통령 선거가 이 방식으로 실시되었는데 제8차 개정헌법에서는 대통령선거인단에 의한 간선제가 채택되어져 제12대 대통령 선거에 적용이 되었다.

결국 집권세력이 장기독재 수단화한 간선제에 대해 국민적 거부감이 확대되기 시작했고 제5공화국 중반 이후 직선제 개헌투쟁으로 가속화, '6월 민주화항쟁'이라는 역사적 기록을 남기며 제9차 개정헌법에서는 제7대 대통령 선거 이래 18년만에 직선제로 복귀하였다. 그 결과 13대∼14대 대통령을 국민의 손으로 직접 선출하였으며, 정치풍토 쇄신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대통령 선거의 의의[편집]

大統領選擧-意義

한국의 선거는 1948년 5월 10일에 기원을 두고 있다. 선거는 누가 정치권력을 획득하는가를 결정해 주는 과정이다. 주권을 보유하고 있는 국민들이 제도적 장치에 따라 일정한 기간동안 권력을 위임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여러 종류의 다양한 선거경험을 갖고 있는 한국의 경우에 있어서는 선거가 이와 같은 의미를 갖는 동시에 국가수립의 과정이었으며, 민주화로 가는 도정이기도 했다. 그동안 언론·집회·결사의 자유가 제약되고, 야당이 정치적 탄압의 대상이었던 과거 권위주의 시절의 선거는 집권세력에게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다분히 형식적인 행사에 불과했다(이남영 1993, 21). 그러나 선거는 민주주의의 방식을 경험해 온 국민들의 정치적 의식을 각성시키고,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오히려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어 왔다.

해방 이후 독립국가 건설에 필요한 헌법과 여타의 법률들을 제정할 임무를 부여받을 제헌의원 200명을 선출하는 사상 최초의 선거에는 48개의 정당·사회단체에서 최초의 선거가 실시되는 해(1948년)를 기념이라도 하듯, 948명의 후보가 난립하여 평균 4.7 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제헌의원선거는 오랜 봉건적 굴레의 역사와 일제의 질곡에서의 탈출을 확인하는 진정한 정치적 해방의 전기였다. 선거는 경쟁자들 가운데 한 사람을 대표로 고르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사의 늪을 헤치고 나오기 위해 정치적 광명의 열차를 타는 티켓이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기록이 경신되지 않는 95.5% 투표율은 바로 이를 반등하는 것이다.

제헌의원선거로부터 시작된 선거는 정확히 반세기 동안 국회의원선거 14회, 대통령선거 8회(나머지는 간접선거), 참의원선거 1회, 대통령간접선거(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및 선거인단) 5회, 국민투표 6회, 그리고 몇 번의 지방단체장 및 지방의원선거가 있었다. 이 선거과정들에서 유권자들은 때로는 높은 관심을 갖고 자발적으로 적극 참여했는가 하면, 어떤 선거에서는 지극히 냉담했다. 그런가 하면 정통성이 약한 정치권력이 권력유지를 위해 관권과 금권을 배경으로 유권자를 강제동원하는가 하면, 때로는 아예 부정과 불법선거를 통해 사실과 일치하기 어려운 통계적인 투표와 개표율이 나타나기도 했다.

한국정치의 대표적이고 핵심적인 특징은 '대통령선거정치'이다. 대통령선거정치는 모든 정치의 중심이 대통령선거에 모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최고권력인 대통령의 권력이 대통령선거를 통해서 나타난다는 점에서 대통령선거는 과정이지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다.

자유당과 공화당정권에서 대통령선거는 선거가 끝나고 난 뒤 항상 공정성 시비로 휘말렸고,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강화된 권위주의독재는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게임의 문제가 아니라 선거, 즉 경기를 개최하는 게임의 룰(rule of the game)

문제에서부터 여야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집권자 박정희는 장기집권구도로 3선 개헌에서 시작하여 무제한 연임과 90% 이상의 지지가 보장되는 간접선거제를 통해 영구집권의 길에 들어섰다가 10·26사건으로 막을 내렸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는 자신의 영구집권과 관련되는 대통령선거에 관한 비판은 원천적으로 봉쇄하였다. 전두환은 장기집권에 대한 국민의 분노를 단임제로 피해 갔으나 역시 선출방식은 '박정희'식이었다.

1970년에서 1980년대 중반까지의 한국정치사회를 뒤덮은 민주화투쟁의 중심적 과제는 바로 대통령선거의 민주성 확보였다.

대통령선거제도가 민주화됨으로써 그동안 동맥경화로 반신불수가 되어 있던 한국의 선거정치는 피가 돌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한국정치는 대통령선거정치라고 표현한 것이다.

모양이 어색하기는

하지만 민자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의 3당합당을 거쳐 야권의 양대 지도자 중의 1인인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민주화 투쟁의 소기목표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대통령선거에 대한 관심은 식지 않았다. 김영삼이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후계자에 관심이 쏠렸다. 대통령선거 도전자들에 의한 정당파괴와 이합집산 등은 아직도 한국정치에서 가장 뜨거운 부분이 대통령선거정치임을 실감시켜 주고 있다.

한편 한국선거의 이러한 시대별 특성을 자유당정권 선거는 관권선거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당시의 선거는 내무부장관의 진두지휘하에 경찰과 공무원이 직접 뛰는 선거였다. 따라서 강한 관권으로 인하여 금권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덜 강조되었다. 공화당정권의 직접선거는 자유당정권의 잔재인 관권과 함께 금권이 춤추는 선거였다. 유권자의 정치문화의식이 신민화단계에서 시민화단계로 발전되면서 관권선거의 공간 대신에 금권선거(金權選擧)로 채워졌다. 또한 박정희 유신정권과 5공정권의 간접선거는 경쟁 자체를 봉쇄한 요식행위로써 권력봉쇄선거였다. 6공정권이 들어서면서 관권과 권력봉쇄가 풀어지는 대신 간접적으로 금권선거가 확대되었다. 특히 제14대 대선에서 재벌회장이 정당을 급조하여 대권전에 뛰어들면서 금권이 판을 쳤다. 제6공화국의 대통령 노태우는 최소한 5,000억원의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 가운데 상당액은 집권당의 선거자금과 재임기간 중에 이른바 통치자금으로 사용되었다. 그 이전 제5공화국 대통령 전두환의 경우도 권력봉쇄 선거정치 외에 금권정치는 정권을 유지하고 연장을 기도하는 데 중요한 수단이었다. 제6공화국의 문민정부대통령 김영삼은 1992년 대통령 당시의 선거자금 과다지출에 대한 의구심 속에 임기 말에 터진 한보비리사건은 돈선거에 대한 비판을 고조시켰다. 여기에서는 대통령선거정치를 개관하고, 역대 대통령선거의 실시상황과 결의를 중심으로 토론할 것이다.

초대 대통령선거[편집]

초대 대통령선거는 1948년 7월 20일 제헌국회에서 정수 200명의 국회의원 중 196명이 참석한 가운데 간접선거제로 실시되어 이승만이 180표로, 초대 부통령선거는 2차 투표에서 이시영이 133표로 각각 당선되었다. 국회의 구성과 초대 정·부통령의 선출에 따라 7월 24일 취임식을 가진 뒤 8월 15일 대한민국의 독립이 국내외에 선포되었다. 그후 이시형 부통령이 이승만의 푸대접에 항의해 시위소찬(尸位素餐)이란 말을 던지고 제2대 부통령선거에서는 3차 결선투표 결과 김성수가 78표로 당선되었다.

제2대 대통령 및 제3대 부통령선거[편집]

제2대 대통령 및 제3대 부통령선거는 국회에서 간접선거하는 대통령선거에 자신이 없었던 이승만이 한국전쟁으로 정부가 부산으로 피난길에 있는 와중에서 정치파동을 겪으면서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켜 직접선거로 1952년 8월 5일 실시되었다. 개헌과 선거법이 공표되면서 그로부터 1주일 후인 7월 26일까지 후보 등록을 마감하도록 하고, 그후 10일만에 선거를 치르는 초고속 번개일정이었다. 선거운동 기간은 불과 10일이었다. 이것은 이승만 혼자서 단독 질주하겠다는 전략의 일환이었다. 선거결과는 이승만이 유효투표의 74.6%의 압도적 획득으로 당선되었다. 부통령선거는 이승만의 지원을 받은 함태영이 유효투표의 41.3%인 2,943,813표로 당선되었다.

제3대 대통령 및 제4대 부통령선거[편집]

제3대 대통령 및 제4대 부대통령선거는 이른바 '4사5입' 개헌에 의해 1956년 5월 15일에 실시되었다. 1948년 제정된 헌법과 1952년 개정된 헌법의 제55조는 대통령의 임기와 연임에 대하여 "대통령의 임기는 4년으로 한다. 단, 재선에 의하여 1차 중임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헌법 규정대로라면 이승만은 더 이상 출마조차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승만은 또다시 자신의 집권길을 터놓기 위해 개헌을 시도하여 '4사5입'이라는 기상천외의 논리로 제2차 개정을 성사시켰다. 선거는 정·부통령 선거사상 최초로 여당과 야당이 후보지명과 확고한 러닝 메이트 시스템 속에 정당대결로 진행되었다. 집권 자유당은 3월 6일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이승만(자유당총재)과 이기붕(자유당 중앙위원회의장)을 정·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다. 제1야당인 민주당은 3월 29일 전국대의원대회에서 신익회와 장면을 각각 정·부통령 후보로 지명하고 지금까지도 불후의 명구호인 '못살겠다. 갈아 보자'로 자유당을 공격하였다. 한편 조봉암도 진보당을 창당하여 선거전에 가세하였다. 그런데 선거운동기간 중인 5월 5일 민주당의 신익희 후보가 호남지방을 유세하는 도중 급서하는 사고가 발생하여 선거운동의 양상은 급변하였다.

제3대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의 신익희 후보가 선거운동기간 중 급서하게 되자 자유당정권에 대하여 비판적이던 유권자는 세가지 방법으로 신익희 후보에 대한 추모와 반자유당의사를 나타냈다. 그것은 무효표를 던지는 것이었다. 투표수 9,067,063표 가운데 무효표가 무려 1,856,818표로 20.5%에 이르렀다. 이 가운데는 신익희를 추모하기 위한 투표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야당세가 상대적으로 강한 서울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서울은 투표자수 608,741명 중에 284,359명이 무효표를 던져 유효투표율은 53.8%밖에 되지 않았다. 반면에 서울의 유권자들은 부통령선거에서는 96.4%의 유효투표율에 야당의 장면 후보에게 76.9%의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던 것이다.

유권자들의 두 번째 반응은 이승만에게 유일하게 대결할 수 있었던 무소속 조봉암의 지지로 나타났다. 제2대 대통령선거전에서 11.3%의 득표율에 그쳤던 조봉암이 30%의 지지율을 확보하였다. 이것은 이승만에게는 부담스런 장애물이었고, 조봉암에게는 후에 검은 구름으로 작용하게 된다. 조봉암은 이승만에 의해 선거운동자금의 출처(梁明山事件)와 관련하여 용공으로 몰려 처형되고 말았다. 부통령경쟁에서는 대통령후보의 러닝 메이트를 잃은 민주당의 장면이 자유당의 이기붕을 46.4%의 높은 득표율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제4대 대통령 및 제5대 부통령선거[편집]

제4대 대통령선거는 제2대·제3대 대통령선거제도에 의해 1960년 3월 15일 실시되었다. 자유당은 4년 전의 부통령선거에서 이기붕 후보가 민주당의 장면 후보에게 패한 경험과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당의 약진에 초조한 나머지 서둘러 1959년 6월 29일 이승만-이기붕 진용을 재구축하고 서둘러 출진하였다. 신구파의 갈등으로 내홍(內訌)을 겪던 민주당은 우여곡절 끝에 자유당보다 5개월 늦은 11월 26일 정·부통령후보 지명대회를 통해 조병옥-장면의 진용으로 자유당에 맞서게 되었다.

그러나 또다시 조병옥이 선거를 한달 앞둔 2월 25일 하와이에서 신병치료중 급서하여 이승만은 이번에도 단독후보가 되었다. 제4대 정·부통령 선거는 과거의 어느 선거전보다 자유당정권의 부정선거활동이 더 뜨겁게 달아 올랐던 선거였다. 자유당은 정부로 하여금 공무원을 통한 선거운동망을 조직하고, 전국경찰에 지시하여 이를 감시독찰(監視督察)하도록 하는(중앙선거관리위원회 1981, 743) 등 선거에 승리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였다. 이기붕을 이승만의 후계자로 만들기 위한 전략 때문이었다. 선거결과 이승만은 단독후보로서 88.7%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제4대 부통령선거에서 46.4%의 득표율을 기록했던 민주당의 장면 후보는 4년 후의 5대 선거에서는 17.5%로 떨어져 군소후보의 모습으로 보였다. 반면에 이기붕은 79.2%의 기록적 상승세를 보였다. 결국 3·15 부정선거로 이승만 정권은 4·19를 자초하게 되어 제4대 대통령선거 및 제5대 부통령선거 자체가 무효화 되었다.

제4대 대통령 간접선거[편집]

4·19에 의해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고 1960년 6월 15일 제3차 헌법개정에 의하여 대통령제 권력구조는 내각제로 변경되어 대통령의 지위와 선거방법도 달라지게 되었다. 대통령은 양원합동회의에서 선거하고 재적국회의원 3분의 2 이상의 투표를 얻어야 하며, 1차 투표에서 당선자가 없을 때에는 2차 투표를 행하고, 2차 투표에서도 당선자가 없을 때에는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출석과 출석의원 과반수의 투표를 얻은 자를 당선자로 하도록 되었다. 이상의 규정에 따라 1960년 8월 12일 참의원과 민의원 양원합동회의에서 윤보선은 1차 투표에서 208표로 무난히 당선되었다.

한편 국무총리 선출에서는 윤보선에 의해 지명된 구파의 김도연에 대한 표결이 가 111표, 부 112표, 기권 1표로 부결되고, 대신 장면에 대한 표결은 가 117표, 부 107표, 무효 1표로 동의를 얻어 장면 내각의 출범을 보게 되었다.

제5대 대통령 직접선거[편집]

제5대 대통령선거는 대통령제 권력구조에서 대통령의 직접선거로 박정희 등 군부의 쿠데타로 민주당정권이 붕괴된 뒤 민정이양의 형식으로 1963년 10월 15일 실시되었다. 군사쿠데타에 대한 국민심판의 성격이 강한 선거였다.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에 의해 민주당정권을 붕괴시킨 박정희는 1962년 12월 17일 국민투표로 헌법을 개정하여 권력구조를 대통령제로, 선거제도를 제2공화국의 직접선거제로 되돌려 놓았던 것이다.

6개 정당에서 6명의 후보가 입후보한 가운데 민주당정권의 대통령이었던 민정당의 윤보선 후보와 4·19 후 과도정부의 내각을 이끌었던 '국민의 당'의 허정 후보는 야권통합과 단일후보를 시도했으나 성사되지 못한 채 각각 입후보하였다. 송요찬은 육군참모총장 출신으로 박정희의 군선배이지만 오히려 박정희의 민정참여와 민주공화당 창당 등에 비판적이었다. 선거 양상은 박정희가 야권후보로부터 협공을 받았으나 대신 야권후보들은 분열되는 약점을 안고 있었다. 특히 장면이 정치활동 규제상태에 있자 2공화국의 집권 민주당 신파를 계승한 민주당은 당초부터 후보를 내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윤보선에 적극 지지입장도 아니었다. 선거가 종반전으로 가면서 약세가 뚜렷하던 허정 후보가 10월 3일, 송요찬 후보가 10월 12일에 각각 사퇴하면서 윤보선 지지를 선언하였으나 부동층 유권자들을 투표장으로 향하게 만드는 극적효과는 약했던 것 같다. 선거 초기에 야권단일후보의 기대를 모았던 허정 후보의 뒤늦은 사퇴는 이미 시기를 놓쳐 신선도가 사라진 뒤의 일이었다. 유권자들에게 그의 사퇴는 이미 약세가 현저히 드러난 상황에서 주저앉은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로써 선거전은 박정희와 윤보선 후보의 대결로 압축되는 상황까지는 도달하였으나 야권은 박정희 후보를 압도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야당의 윤보선 후보는 박정희 후보를 누르지는 못했으나 한국 선거사상 가장 근소한 표차로 좁히는 데는 성공하였다. 박정희는 42.6%로 41.2%를 획득한 윤보선 후보에 아찔할 정도의 표차로 신승했다. 두 후보의 표차는 156,026표에 불과했던 것이다. 근소하나 이 선거를 통하여 박정희는 5·16 군사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하고, 이어서 유지하는 데 성공하게 되었다.

유권자들의 투표행태는 남북현상을 뚜렷이 보여주었다. 전통적인 친여지역인 강원도까지 야당의 윤보선 후보를 지지하는 등 충청 이북은 야당의 윤보선 후보, 전북 이남은 여당의 박정희 후보를 지지하여 '남여북야(南與北野)' 현상을 보였다.

제6대 대통령 직접선거[편집]

1967년 5월 3일에 실시된 제6대 대통령선거는 군인에서 민간인으로 변신하여 4년간 집권한 박정희와 그에 강력히 도전해 온 윤보선과의 재대결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한·일협정의 졸속처리와 월남파병 문제로 야권과 학생, 그리고 재야의 거센 저항에 직면해 있었다. 반면에 분열되었던 야당은 선거를 앞두고 단일화되면서 단결된 모습으로 출전하였다. 후보등록 결과 박정희와 윤보선을 제외한 5명의 후보들은 관심을 끌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박정희와 1차 방어전에 도전하는 윤보선의 설욕전은 이미 관중의 호기심이 빠진 경기였다. 오히려 박정희는 4년간 유권자에게 더욱 친숙해졌고, 윤보선은 시간의 흐름으로 인하여 역사의 한편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뚜렷한 선거쟁점이 없었기 때문에 세태에 민감한 유권자들은 83.6%만이 투표에 참가하여 지금까지의 선거에서 가장 낮은 투표율을 보여주었다.

선거결과 박정희는 5,688,666표를 윤보선은 4,526,541표를 획득하여 박정희가 1,162,125표차로 이겼다. 이 선거는 7명의 후보 가운데 이 두 후보가 유효투표의 92.3%를 차지하여 공화당과 신민당의 대결이었다. 박정희는 윤보선보다 경북에서 63,685표, 경남에서 55,688표 등 경상도에서만 119,373를 더 확보함으로써 충분했다. 경상도권인 부산에서도 174,058표를 더 추가했다. 제5대 대통령선거 당시의 '남북현상'은 제6대 선거에 들어서서는 '동서현상'으로 방향이 선회되었다. 경상도의 박정희 지지가 현저하고, 강원도와 충북이 여권으로 돌아섰다. 반면에 제5대 선거에서는 경기도를 비롯하여 여당 성향이었던 전남·북이 제6대 선거에서는 근소하지만 야당우세로 돌아섰다. 이로써 동쪽 영동의 강원, 충북과 영남의 경남·북, 부산의 여당지지로, 서울과 경기, 충남, 전남·북이 야권지지로 나뉘어 '동여서야(東與西野)'의 형세가 나타났다.

제7대 대통령 직접선거[편집]

1971년 4월 27일 실시된 제7대 대통령선거는 또다시 얼룩진 헌정사를 딛고 실시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1969년 10월 21일 이승만 정권처럼 장기집권을 위한 개헌을 변칙처리하였다. 그는 국회에서 여당 단독의 날치기 개헌을 통해 헌법 제69조 3항의 '대통령은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다'는 조항을 '대통령의 계속 재임은 3기에 한한다'로 개정하였다. 이에 따라 박정희는 제7대 대통령선거에 다시 출마하였다. 단일야당인 신민당은 김영삼의 40대 기수론 제창으로 세대교체 바람이 일면서 김영삼·김대중·이철승 등 3인이 당내 경선을 통해 김대중이 후보로 선출되어 박정희와 맞서게 되었다. 선거결과 박정희의 지역적 배경인 경상북도는 85.4%의 높은 투표율과 70% 이상의 압도적 지지를 보낸 데 비해, 김대중의 지역적 배경인 전남은 80% 이하의 투표율에 58%의 지지에 머물었다.

이 선거에서 정부여당과 인구가 많은 영남의 적극적 지지를 배경으로 한 박정희 후보는 6,342,828표로 김대중 후보의 5,395,900표보다 946,928표를 더 확보하였다. 그러나 이 표차는 윤보선과의 경쟁보다 득표수가 줄어든 것으로 공화당정권을 불안하게 만들기에 충분하였다. 그런데 박정희 후보는 경북에서만 921,935표를 앞섰고(박정희 133,051표, 김대중 411,116표), 경남에서(박정희 891,119표, 김대중 31,595표) 580,524표를 이겨 결국 영남에서의 득표만으로 김대중 후보를 압도하였다. 반면에 김대중은 자신의 지역인 호남에서 417,906표만을 이겨 지역적 배경에서 우선 열세였다.

경북과 경남은 제5대 선거부터 박정희에게 지지를 보내고 6대·7대 선거로 이어지면서 그 강도를 더해 나갔다. 경북의 경우 제5대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 대 윤보선 후보의 지지율 차이는 19.53%이었으나 제6대에는 37.61%, 제7대에는 50.29%의 차이로 증가했다. 경남의 경우도 제5대 31.83%의 차이로 시작하여 제6대 45.57%,제7대 55.12%로 오히려 경북보다 높게 나타났다. 다만 부산의 경우 제5대 선거에서는 0.73%의 박빙의 차이에서 제6대에는 32.05% 차이로 벌어졌으나 제7대 선거에서는 오히려 박정희에 대한 지지가 줄어 11.79% 차이로 좁아졌다.

제5대 선거에서 박정희의 손을 들었던 전남·북은 이미 제6대 선거에서부터 야권으로 방향을 선회하였다. 전북은 제5대 선거에서 윤보선 후보에 비해 박정희 후보에게 7.91%를 더 주었으나 제6대 선거에서는 오히려 윤보선 후보에게 6.43%를 더 넘겼고, 제7대 선거에서는 지역연고자인 김대중에게 24.88%를 더 얹어 주어 전체적으로 여당후보에서 야당후보로의 변화폭은 32.79%였다. 김대중의 고향인 전남의 경우는 제5대 선거에서는 역시 박정희에게 전북보다 더 호의적이어서 윤보선 후보보다 21.29%를 더 지지했다. 그러나 제6대 선거에서는 오히려 윤보선 후보에게 2.04%의 지지를 더 보내 박정희 후보의 입장에서 보면 23.23%가 떨어져 나간 셈이었다. 그리고 김대중이 경쟁에나선 제7대 선거에서는 김대중에 대한 지지율이 박정희보다 26.41% 앞서 전체적으로 여권에서 야권으로의 선회폭이 가장 큰 47.07%를 나타냈다.

그러면 이 시기에 지역감정이 작용했는가? 작용했으면 어느 지역에서 어느 정도의 지역감정이 작용했나를 보기로 한다. 지역감정은 노태우·김영삼·김대중·김종필 등 소위 3김이 1987년 대선에서 경쟁하면서 유권자들이 각기 자기지역의 출신후보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보낸 현상을 말한다. 이 선거에서 경북·대구는 노태우 후보에게, 부산·경남은 김영삼 후보에게, 호남은 김대중 후보에게, 충청·대전은 김종필 후보에게 각각 압도적인 몰표를 제공했던 것이다. 그러나 특정후보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보낸다는 사실만으로 지역감정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전국적인 경쟁을 벌이는 대통령선거에서 자기지역의 출신이 후보로 출마했을 경우 다른 지역출신보다 지지할 가능성은 더 높을 것이다. 또한 경상도유권자의 입장에서 볼 때 지지후보가 현직대통령이고 경상도의 발전에 긍정적이라는 인식을 가졌다면 박정희 후보에 대한 몰표를 감정적이거나 연고주의에 의한 투표로 한정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감정'의 요건이 충족되려면 정책 및 소속정당과 관계없이 지역배경이 지지요인으로 작용하되, 상대후보에 대해 적대적 감정이 지역배경과 상승작용하여 지지형태로 나타날 때 지역감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제5대-제7대 선거의 상황을 이러한 조건을 중심으로 보기로 한다.

제5대·제6대 박정희와 윤보선의 대결에서는 박정희의 지역적 배경인 경상도에서 박정희의 지지폭이 크게 나타난 것을 제외하고는 뚜렷한 지역주의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제7대 선거의 박정희·김대중 대결에서는 영·호남의 대결구도가 분명해지고 있다.

제7대 선거에서는 경남·북이 각각 박정희 후보를 79.79%, 72.72%로 각각 압도적인 몰표를 제공함으로써 김대중 후보의 지지율과 50% 이상의 차이로 다른 지역의 지지율과 현저한 차이를 나타냈다. 문제는 경상도 유권자들이 김대중 후보에게 지역연고로 인한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마찬가지로 제7대 대선에서 전남·북의 유권자들은 경남·북의 박정희 지지율에는 훨씬 미치지 못하였으나 김대중에 대한 지지율은 50%를 상회했다. 경상도유권자들과 전라도유권자들은 각각 자기지역의 출신후보에게 현저한 지지를 보냈는데, 결과는 경상도유권자가 박정희에게 보낸 지지율에 비해 전라도유권자가 김대중 후보에게 보낸 지지율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물론 전체적인 득표율에서 김대중이 박정희에게 뒤졌다는 점에서 같은 비율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경상도의 지지율 차이는 경상도 이외의 최대 지지율 차이를 나타낸 강원도의 20.25%의 2배 이상이라는 점에서 전라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지지율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선거에서 전라도유권자의 33% 내외는 박정희 후보를 지지하였다. 또한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처럼 타지역후보가 유세도 하지 못하는 대립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 특히 이 당시의 경상도와 전라도유권자들의 투표형태는 후에 지역감정으로 발전할 수 있는 잠재적 요인의 성격일 수는 있어도 지역감정 그 자체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이후의 1987년 제13대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선거에서 호남이 보였던 김대중 후보와 김대중 후보가 이끄는 평민당에 대한 90% 이상의 지지율에 대한 반응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제8대-제11대 대통령 간접선거[편집]

제8대부터 제11대까지의 대통령선거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간접선거제도였다. 박정희는 2차의 연임 이후 또다시 연임조항에 대한 개헌을 통해 장기집권의 길을 닦아 3기 집권을 했다. 이번에는 이른바 '10월 유신'을 통해 지역별로 선출되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 대통령을 선출하는 간접선거제도의 방향으로 헌법을 개정해 영구집권을 시도한 것이다. 박정희는 이 제도로 대통령에 2번 더 당선되었으나 두 번째의 임기는 1년 남짓 재임하다 10·26으로 비운을 맞게 되었다. 그의 사후 제10대와 제11대는 10·26사건을 배경으로 하여 전두환 등 군부가 다시 정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선거였다.

대통령을 선출하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은 구·시·읍·면·동 등 행정구역단위를 선거구로 하여 전국을 1,630개 구로나누되, 농촌에서 소선거구제를 채택하고, 도시지역에서는 중선거구제를 채택하여 인구 2만명을 기준으로 1인에서 5인까지 다양화하여 전국의 대의원정수를 2,359명으로 하였다.

정당이 배제된 가운데 공영제로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선거라는 요식절차를 거쳐 선출된 대의원 2,359명은 1972년 12월 23일에 1명의 결석도 없이 전원 장충체육관에 모였고, 박정희는 2,357표(무효 2표)로 당선되는 요식행위로 제8대 대통령, 그에게는 4번째의 대통령이 되어 영구집권의 가도에 들어섰다.

박정희 정권은 1978년의 제9대 대통령선거를 위해 1978년 5월 18일에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선거를 실시하였는데, 2,583명 대의원이 1978년 7월 6일 6년 전의 필름을 다시 보는 듯 제9대 대통령선거가 실시되었다.

박정희는 1978년 12월 27일 제9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7년의 권좌에서 5번째의 대통령 취임이었다. 그의 앞에는 또 다시 6년의 임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6년 임기의 제9대 대통령에 취임한 지 10개월 만인 1979년 10월 26일 그의 심복이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술상 앞에서 시해되었다. 이로써 어느 영화 속의 한 주인공 '강시'같이 느껴지던 유신체제의 대들보는 내려앉았으나 그를 떠받히던 골격은 계속 남아 있었다. 우선 헌법 제48조에 따라 당시 국무총리이던 최규하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취임하였다.

박정희에게 도전하던 야권과 박정희를 추종하던 공화당이 다된 밥에 뜸만 들이면 되는 것으로 여유있고 느긋하게 생각하는 동안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주도면밀하게 숫가락을 잡아 나갔다. 신군부는 1단계로 현행 헌법을 존속시키면서 1979년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선거에서 제8대·제9대와 똑같은 방법으로 제10대 대통령선거를 실시하였다. 역시 모든 과정은 지난번과 같았다. 다만 주인공만 최규하로 바뀌었다. 또 하나 다른 것이 있다면 무효표가 84표나 나와 박정희를 선출할때와의 분위기 차이를 알려 주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군부정권 아래서 서기에서 출발하여 총리에 이르기까지 정치보다는 관료로 일관했던 최규하 대통령은 권부의 주인이 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전두환은 1980년 8월 27일 최규하 대통령에게 평화적인 정권교체의 전통을 남긴다는 위선적인 정치적 수사로 국민들의 귀를 메우고 물러 가게 한 뒤 박정희와 똑같은 방법으로 제11대 대통령에 선출되는 형식을 밟았다. 박정희가 만들어 놓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2,525명을 소집하여 2,524표(무효 1표)로 대통령 자리에 앉게 된 최규하는 대통령에 오른 뒤 8개월 21일 만에 밀려났다.

제12대 대통령 직접선거[편집]

12·12군사반란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은 헌법규정에 의해 최규하를 앞세워 집권기반을 다진 뒤 집권실현을 위해 무력으로 여론을 봉쇄해 놓고 더 이상 지탱하기 어려운 유신헌법 대신 새로운 헌법을 마련해 국민투표로 확정했다. 헌법의 핵심은 박정희의 유신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최대 저항요소였던 1인 영구집권 대신 7년 단임제로 변화인식을 주었으나 확고한 계승을 담보하기 위한 제도로 변형된 통일주체국민회의 선출방식인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해 선출제를 도입하였다.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과 비교할 때 다른 점은 정당소속원의 출마를 허용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입후보 자체를 관권이 개입하여 여당은 전체 선거인단의 53.1%가 입후보하고 친여무소속 31.8%가 입후보한 데 비해, 제1야당은 전체 선거인단의 12.5%에 불과한 1,165명만이 입후보하는 등 선거인단선거 자체가 요식행위였다. 전두환 후보는 예상대로 선기인단 90% 이상의 압도적 득표로 제12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제13대 대통령 직접선거[편집]

제13대 대통령선거는 한국정치사에서 가장 따스한 '정치적 봄'에 실시된 선거였다. 군부의 권위주의정권이 민중항쟁에 의해 굴복하고 여야가 합의한 경쟁규칙에 의한 최초의 게임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집권계승 시나리오에 의해 군사반란의 동지 노태우를 차기후계자로 지명했으나 또 다시 선거인단에 의해 간접선거로 권력 릴레이를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지 못하였다. 그들에게 남은 선택은 각본과 연출, 연기의 적절한 분담을 통해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 남는 것이었다. 공연된 작품은 '6·29선언'이었다. 공연은 노태우가 맡았다. 아이디어는 물론 국민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6·29선언은 일단 성공적인 공연이었다. 그러자 전두환과 노태우는 시나리오를 둘러싸고 서로 자신의 작품이라고 공다툼을 하기에 이르렀다.

6·29선언에서 비롯된 민주화의 첫 작업은 권위주의적인 헌법을 바꾸는 것이었다. 그 가운데 민주화투쟁의 최대과제였던 대통령 선출 규칙이 핵심이었다. 국민투표를 거쳐 1987년 10월 29일 확정·공포된 헌법에는 '대통령은 국민의 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에 의하여 선출한다'(제67조)는 선거의 기본원칙이 분명히 각인되었다.

제13대 대통령선거는 새로운 헌법과 선거법에 의해 1987년 12월 16일 실시되었다. 후보는 집권 민정당의 노태우와 야당의이른바 '3김'으로 김영삼(통일민주당), 김대중(평화민주당), 김종필(신민주공화당) 외에 4명의 군소후보 등 8명이었다. 그러나 관심은 이른바 '1노 3김'에 모아졌다. 특히 김영삼과 김대중은 민주화투쟁과정에서 동반자였다는 점에서 유권자들은 후보단일화를 기대했다. 특히 김영삼과 김대중은 공동으로 신한민주당을 붕괴시키고 통일민주당을 창당하였다. 그리고 김영삼이 중심에 위치하면서 김대중은 밖에서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여 출마함으로써 야권은 분열된 채 선거를 맞았다.

노태우 후보는 경북·대구를 근거지로 하여 여당의 이점을 살려 친여적 지역인 강원·충북에 기대를 걸었다. 김영삼은 연고지인 부산·경남을 중심으로 하여 지지를 모아 갔다. 특히 김대중은 호남, 김종필은 충청을 중심으로 표를 모아 갔다. 특히 김대중 후보에 대한 호남의 지지는 열광적이었다. 그만큼 다른 후보에 대한 배타적 감정도 진했다. 노태우 후보는 호남유세에서 달걀과 돌세례를 받고 유세를 중단하는 불상사가 일어나는 등 선거는 사상 유례없이 지역대결로 치달았다.

노태우는 36.6%의 최다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우선 노태우는 연고지역 득표율에서 평균 68.5%의 결속력을 확보했다. 이 가운데 특히 1차적 연고지인 대구에서는 70.7%였다. 김영삼은 연고지역인 부산에서 56%, 경남에서는 51.3%로 겨우 과반수를 넘기는 약한 결속력을 보였다. 김대중은 1차 연고지인 전남과 광주에서 90% 이상의 몰표를 뽑아냈다. 2차 연고지인 전북에서도 83.5%로 압도적이다. 반면에 김종필은 1차 연고지인 충남에서도 최다득표의 위치는 지켰으나 겨우 45%에 머물렀고, 2차 연고지인 충북에서는 오히려 노태우가 46.9%로 충남에서 김종필이 득표한 45%를 상회하고, 또한 김영삼도 28.2%를 득표한 반면, 연고당사자인 김종필은 13.5%에 그쳤다. 물론 이러한 득표율은 김종필은 충남을 제외한 전국 13개 시·도에서 유일하게 두 자리수 득표율이라는 점에서 지역주의의 미풍이 지나갔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려우나 3위에 머물러 그 위력은 의미없는 수치에 그쳤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호남의 결속력이 가장 강하게 나타났으며, 그 다음이 경북·대구이다. 김영삼의 연고지인 부산의 경우는 제2의 수도라는 특성으로 인하여 다른 지역출신이 복합되어 있다는 점으로 보이지만, 경남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결속력이 약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김종필이 고향인 충남에서 45%에 그친 것은 전통적인 여권 및 야권표와 당선 가능성 등의 복합적인 요인 때문으로 보인다.

제14대 대통령 직접선거[편집]

제14대 대통령선거는 1992년 12월 18일 실시되었다. 이 선거는 몇 가지 점에서 다른 선거와 구별되는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매 선거 때마다 달라지는 선거규칙에 의해 실시되었으나 이번의 경우는 연속선상의 선거였다. 다른 하나는 야권의 표를 쟁패하던 김영삼·김대중이 여야의 위치에서 경쟁하였다. 특히 1960년대 이후 여권의 축을 이루던 군출신후보가 사라지고 순수민간인 후보끼리의 대결이었다. 특히 제14대 대선은 여당과 제2·제3야당이 통합한 새로운 여당과 제1야당과의 대결이었다. 제13대 총선 결과 국회는 제13대 총선주자였던 '1노 3김'의 4당체제 속에 여당의 다수당 위치가 무너지고 '여소야대' 상황에서 여당과 제2야당의 김영삼(통일민주당)과 제3야당의 김종필(신민주공화당)이 집권 민정당과 통합하여 민주자유당을 탄생시킨 것이다.

제14대 선거에서 김영삼은 노태우가 이끌던 민자당의 대표직에서 노태우로부터 후보의 위치를 이끌어내 당내 경선형식으로 여당의 후보가 되었다. 김대중은 제1야당의 후보로 야권의 가장 강력한 도전자의 입장에 서게 되었다. 여기에 현대그룹의 총수인 정주영이 갑자기 뛰어들었고, 홀로 서기를 시도해 온 박찬종이 경쟁에 가세했다. 정주영은 엄청난 현대그룹의 재력을 배경으로 여당과 야당의 낙천자들을 대상으로 이삭줍기를 통해 국민당을 급조하여 1992년 3월 24일의 제14대 총선에서 31석을 획득, 제3당으로 부상했다. 총선은 정주영에게는 대권열차 주행을 위한 레일이었다.

제14대 선거도 역시 지역대결의 구도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웠다. 제13대 대통령선거가 1노 3김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이 4분(分)된 구도였다면, 제14대 대선은 크게 영남과 호남의 대결구도였다. 김영삼 후보는 과거에는 영남의 한 쪽인 부산·경남에서 대구·경북으로 연고범위가 넓어졌다. 김대중은 연고지역은 그대로이지만 제13대 대선에서 김영삼을 지지했던 야당세력을 넘겨 받는 입장이 되었다. 한편 재벌후보 정주영은 이 틈바구니에서 자신의 연고지인 강원도를 집중공략하여 새로운 지역주의를 개척하면서 무주공산의 충청도를 파고들었다. 이러한 점에서 역시 지역별 유권자 규모는 각 후보에게 중요한 선거자원이다.

김영삼 후보는 총득표율에서 42.0%의 최다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김영삼은 연고지역 득표율에서 67.5%의 결속력을 확보했다. 이 가운데 제13대 대선 당시의 연고지역이었던 부산·경남의 결속력은 72.8%로 높게 나타났지만, 2차적 연고지인 대구·경북은 62.2%의 상대적으로 낮은 결속력을 보였다. 김대중은 제13대 대선과 별 차이 없이 호남의 1차 연고지인 광주와 전남에서 94.0%의 절대적 지지 속에 강한 결속력을 나타냈고, 2차 연고지인 전북에서도 89.1%로 압도적 우세를 나타냈다.

이상의 투표참가율과 결속력의 강도를 볼 때, 호남이 지역연고 유권자수는 적었지만 투표율도 높고 결속력도 훨씬 강한 것으로 나타났다. 다음으로 부산과 경남이 높게 나타났고, 대구·경북은 후보자의 연고지역이라는 의미에서 볼 때 투표참가율도 평균 이하이고, 결속력에서도 비교적 약한 편이었다. 그러나 김대중은 호남의 강한 결속력을 배경으로 했지만, 서울 외의 다른 지역에서는 우세를 확보하지 못했고, 김영삼은 연고지역의 결속력이 압도적이지는 않았지만, 호남 이외의 모든 지역에서 고른 득표율을 보였고, 서울에서도 1% 내외의 차이로 선전해 제13대 노태우의 승리보다 훨씬 더 높은 득표율로 승리했다. 반면에 김대중도 제13대 득표율보다도 6.8% 증가했는데, 이것은 김영삼을 지지했던 야당고정표의 가세라고 볼 수 있겠다.

제14대 대통령선거는 한국정치사의 한 획을 긋는 선거였다. 김영삼의 당선으로 이른바 3김 가운데 1김은 대통령으로 공식적인 현역정치를 마감한다. 다른 두 김은 선거후 다른 길을 들어섰다. 김대중은 정계은퇴 발표로 다시 국민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그것은 시한부였다. 1995년 6월 27일 실시된 지방선거의 야당 승리를 발판으로 정계에 재진입하여 1995년 9월 5일 새정치국민회의의 창당을 통해 제1야당총재로 정계에 복귀했다. 그의 목표는 제15대 대통령선거의 4수에 있는 것이었다. 김종필은 김영삼 정부의 충실한 2인자 역할을 수행하다 출당(黜黨)되었다. 그는 자력으로 자유민주연합을 결성하여 충청도를 발판으로 다시 3김전에 진입하였다. 한편 김영삼은 김종필의 출당 이후 민주자유당을 자신의 체제로 재편한 뒤 신한국당으로 개명하였다. 그러나 1997년 신한국당 대통령후보 선출은 그의 영향력 밖에서 이루어져 자신이 경선직전 당대표로 선임했던 이회창이 선출되었다.

제15대 대통령 직접선거[편집]

1997년 12월 18일 한국 정치사에 한 획이 그어졌다. 광복 후 50년 만에 처음으로 정상적 절차를 밟은 정권교체가 이뤄진 것이다.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11월 26일부터 20여일간 7명의 후보가 각기 총력을 다해 뛴 결과다.

총 유권자 3,229만 416명 중 80.7%인 2,604만 2,633명이 참가한 대통령선거에서 국민회의 김대중후보는 40.3%인 1,032만 6,275표를 얻었다. 한나라당 이회창후보는 이보다 39만 557표 뒤진 993만 5,718표(득표율 38.7%)를, 국민신당 이인제후보는 492만 5591표(득표율 19.2%)를 얻었다.

한나라당 이회창후보 두 아들의 병역기피 시비, IMF태풍으로 표현되는 경제위기, 구 여당인 신한국당에서 이인제씨가 이탈하고 이회창후보가 조순 민주당총재와 손잡고 한나라당을 만들기까지 드러난 여권의 난맥상, DJT(김대중 김종필 박태준)로 표현되는 야당의 연대 등이 선거 판세를 가른 주요 요인들로 꼽힌다. 그런 것들의 결과물이 바로 정권교체로 나타난 셈이다.

국회의원 선거제도[편집]

國會議員選擧制度    미군정령 제175호에 의해 실시된 제헌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소선거구 다수대표제를 채택하였고 제헌헌법과 1950년 4월 공포된 국회의원선거법에 근거하여 실시된 제2대 총선에서는 행정구역 단위 및 인구수에 기초한 법정선거구 다수대표제를 취하였는데, 무투표당선제도가 인정되었다. 제1차 헌법개정으로 국회구성은 민의원·참의원 양원제를 채택하였는데, 제3·4대 총선에서는 민의원선거만이 실시되었고 참의원선거는 제5대 총선에서 처음 실시되었다. 제5대 총선에서 민의원은 소선거구 다수대표제, 참의원은 대선거구 소수대표제를 채택하였는데 제4차 개정헌법까지는 헌법에 국회의원 정수에 관한 규정이 없었다.제5차 개정헌법에서는 국회의원 정수를 150인 이상 200인 이하의 범위 안에서 법률로 정한다고 규정하여 정수제한을 명문화하고 국회의원 후보가 되려 하는 자는 소속정당의 추천을 받아야 한다고 규정하여 정당추천제를 도입, 무소속출마가 배제되었으며, 국회의원은 임기중 당적을 이탈하거나 변경한 때 또는 소속정당이 해산된 때에는 그 자격이 상실된다고 규정하여 한국 헌정사상 초유의 정당국가적 성격을 짙게 나타냈다. 제6대 총선에서는 지역구·전국구 선거구제를 채택, 소선거구 다수대표제와 비례대표제를 병행했는데, 헌법에는 비례대표제에 관한 명문규정이 없었다. 제7·8대 총선까지 이러한 틀을 유지했는데, 8대 총선에서 선거공영제가 도입되었다.  제7차 개정헌법(유신헌법)에서는 정당국가적 조항을 폐지하여 무소속출마가 허용되었으나 국회의원을 직선제와 간선제로 2원화하여 직선제의원은 1선거구 2인 선출방식을 취하였다. 간선제의원은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로 대통령이 통일주체 국민회의에 일괄추천하여 후보자 전체에 대한 찬반투표로 선거하였는데, 직선제 의원의 임기는 6년인 데 비해 간선제 의원의 임기는 3년으로 이는 대통령의 국회 지배기도였다. 이 제도는 제9·10대 총선에 적용되었는데, 간선제 의원들이 유신정우회를 조직하여 원내 제1세력을 차지하였다. 제8차 개정헌법에서는 국회의원 정수를 200인 이상으로 정하고 선거구를 지역구와 전국구로 나누어 비례대표제를 명문화했다. 지역구 의원은 1선거구에서 2인을 선출하고 전국구 의원정수는 지역구에서 선출되는 의원정수 2분의 1로 하였다. 제11·12대 국회의원 선거가 이 방식으로 실시되었는데, 지역구 선거구는 92개였다.제9차 개정헌법에서는 제8차 개정헌법상의 골격을 유지하여서 전국구 의원정수를 지역구 의원정수의 3분의 1로 축소하였다.
 



역대 국회의원 선거 현황



구 분



투 표 일



유권자수



투표자수



유효투표



무효투표



기권자수



투표율(%)



정원수



당선자수(정당별)



제 헌




48. 5. 10




7,840,871




7,497,649




7,216,642




270,707




353,222




95.5




200




한민(29), 한독(1), 조민(1), 촉성(55), 대동청년(12), 민족청년(6), 대한농총(2), 대한노총(1), 무(93)



2 대




50. 5. 30




8,434,737




7,752,076




6,987,341




764,735




682,661




91.9




210




대한민국(24), 민주국민(24), 사회(2), 국민(14), 대한청년(10), 노총(3), 인민구(3), 여자국민(1), 부인회(1), 불교국민(1), 민자련(1), 무(126)



3 대




54. 5. 20




8,446,509




7,698,380




7,492,308




206,082




748,119




91.1




203




자유(114), 민국(15), 국민(3), 국민회(8), 무(68)



4 대



58. 5. 2



10,164,428



8,923,905



8,576,757



347,148



916,750



87.7



233



자유(126), 민주(79), 통일(1), 무(27)



5 대




60. 7. 29




11,593,432




9,778,921




9,337,705




409,983




1,845,744




84.4




233




민주(175), 자유(2), 사대(4), 한사(1), 통일

(1), 무(50)



참 의 원



60. 7. 29



11,593,432



9,747,688



9,337,705



409,982



1,845,744



84.1



58



민주(32), 자유(4), 한사(1), 무(20), 기타(1)



6 대




63. 11. 26




13,344,149




9,622,183




9,268,830




323,353




3,721,966




72.1




地(131)

全(44)



공화(88, 22), 민정(27, 14), 민주(8,5), 자민(6, 2), 국민(2)



7 대




67 .7. 8




14,717,309




11,202,317




10,856,008




346,309




3,515,037




76.1




地(131)

全(44)



공화(103,27), 신민(27,17), 대중(1))




8 대




70. 5. 25




15,612,258




11,381,168




-




-




4,231,090




72.9




地(153)

全(51)



공화(86,27), 신민(65,24), 국민(1), 민중(1)




9대地 (直)

(1기)



(2기)




73. 2. 27

73. 3. 7


 


76. 2. 19




15,690,130

2,359






2,303




11,196,484

2,354


 


2,289




10,991,436

贊(2,251)

反(82)

贊(2,274)

反(8)



205,048

21






7




4,151,555

5


 


-




72.9

99.9


 


99.4




146

73


 


73




공화(73), 신민(52), 통일(2), 무(19)





10대地(直)

維(3기)



78. 12. 12

78. 12.21



19,489,490

2,581



15,029,387

2,573



-

2,562



-

11



4,360,103

0



77.1

99.7



154



공화(69), 신민(61), 통일(3), 무(22)



11 대




81. 3. 25




20,909,120




15,403,151




-




-




5,505,969




78.4




地(184)

全(92)



민정90(61), 민한57(24), 국민18(7), 민권2, 신정2, 민사2, 안민1, 민농1, 무11



12 대




85. 2. 12




23,987,830




20,286,672




19,974,643




312,029




3,701,158




84.6




地(184)

全(92)



민정86(61), 민한26(9), 국민14(5), 신민50(17), 신사1, 신민주1, 무4



13 대




88. 4. 26




26,198,205




19,850,815




19,642,040




208,775




6,347,390




75.8




地(224)

全(75)



민정87(38), 평민54(16), 민주46(13), 공화27(8), 한겨레1, 무9



14 대




92. 3. 24




29,003,828




20,843,482




-




-




-




71.9




地(237)

全(62)



민자당116(33), 민주당75(22), 국민당24(7), 신정당1, 무소속21



15 대




96. 4. 11




31,488,294




20,122,799




-




-




-




63.9




地(253)

全(46)

地(223)



국민당24(7), 신정당1, 무소속21

신한국당121(18), 국민회의66(13), 민주당9(6), 자민련41(9), 무소속16



16 대



00. 4. 13



34,991,529



24,784,963



-



-



-



70.8



全(46)

地(223)



한나라당112(21), 새천년민주당96(19), 자유민주연합12(5), 민주국민당1(1), 한국신당1, 무1



※ 당선자의 ( )은 전국구임


 

국회의원 선거의 의의[편집]

國會議員選擧-意義    우리나라의 국회의원선거는 1948년 5월 10일 제헌의원을 선출한 이후 1996년 4월 11일 제15대 국회의원을 선거하기까지 총선거만 모두 15회를 치러 짧지 않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15회의 국회의원선거를 치르면서 서구식 민주주의를 최초로 도입한 제헌의원 선거에서부터 여러 가지 형태의 선거제도를 적용해 왔다 제1대에서 제8대까지는 소선거구제가 채택되었고, 제6대·제7대·제8대에는 무소속 입후보가 금지된 상태에서 소선거구제에 비례대표제가 가미되었다. 제9대·제10대는  중선거구제와 유정회제도가, 제11대·제12대는 중선거구제에 비례대표제가 가미된 형태였다. 제13대 이후부터는 소선거구방식에 비례대표제를 채택했다. 비례대표의석의 배분방식은 매 선거마다 다른 방식이 채택되어 왔다.
  한국의 역대선거는 대부분의 경우 집권당에 유리한 선거제도였음에도 역대 국회의원선거는 민주주의 발전의 디딤돌이 되었다. 국민의 정치적 의식의 각성과 정치참여로 대중민주주의의 길을 열었고, 민의를 기초로 한 정치를 실현하게 되었다. 선거제도의 시행으로 국민은 역사상 처음으로 주권을 되찾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제헌국회의원선거 이후 지금까지 실시된 국회의원선거는 한국 정치구조의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주어 왔다. 특히 역대 국회의원선거의 결과는 민주주의의 발전 정도를 가늠하는 척도가 되기도 하기 때문에 정치사적 의미도 크다고 할 수 있다. 역대 국회의원 선거제도의 변천과정은 표와 같다.
 


 역대 국회의원선거 제도의 변천과정


 구 분  선거구제도  선거구수    후보등록     임기    선거권       비


 제1대  소선거구      200   선거인추천제     2년    만21세     (1구1인제)

 제2대  소선거구      210   선거인추천제     4년    만21세

 제3대  소선거구      203   공천제·추천제    4년    만21세     (민의원)

 제4대  소선거구      233   공천제·추천제    4년    만21세     (민의원)

 제5대  소선거구      233   공천제·신고제    4년    만20세     (민의원)

(참의원) 중·대선거구   10                                     (1구

2~8인제)


 제6대  소선거구      131   정당공천제       4년    만20세    (무소속출마금지)

        비례대표제(전국구)


 제7대  소선거구      131   정당공천제      4년     만20세    (무소속출마금지)

        비례대표제(전국구)  

 제8대  소선거구      153   정당공천제      4년     만20세    (무소속출마금지)

        비례대표제(전국구)    

 제9대  중선거구       73   정당공천제    지역구6년 만20세    (1구 2인제)

                           대통령지명제 유정회3년            (무소속출마허용)

 제10대 중선거구       77   정당공천제 지역구6년    만20세    (1구 2인제)

                           대통령지명제

유정회3년   만20세


 제11대 중선거구       92   정당공천제 지역구6년    만20세    (1구 2인제)

        비례대표제(전국구)                                   (의원정수 1/2)

 제12대 중선거구       92   정당공천제      4년    만20세     (1구 2인제)

        비례대표제(전국구)                                   (의원정수 1/2)

 제13대 소선거구      224   정당공천제      4년    만20세    (1구 1인제)

        비례대표제(전국구)                                  (의석비율로 배분)

 제14대 소선거구      237   정당공천제      4년    만20세    (1구 1인제)

        비례대표제(전국구)                                  (의석비율로 배분)

 제15대 소선거구           정당공천제       4년    만20세    (1구 1인제)

        비례대표제(전국구)                                  (득표율로

배분)

제헌국회의원선거[편집]

한국 최초의 정치실험인 제헌국회의원선거는 미군정에 의하여 관리·집행된 가운데 1948년 5월 10일 실시하여 국회의원 정수 200명을 선출하였다. 투표자는 선거인 총수의 95.5%로 역대 선거사상 최고의 투표율이다.

입후보자는 모두 948명으로 이승만이 이끄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235명, 동아일보 중심의 언론계출신과 자본가계급, 그리고 일본 및 미국 등에서 해외유학을 하고 돌아온 지식인계층 등이 조직한 보수우익정당인 한국민주당(정해구 1995, 234-238)이 91명, 대동청년당이 87명, 조선민족청년단이 20명, 대한노동총연맹이 12명,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이 12명의 후보를 각각 냈다. 그리고 기타 43개 사회단체 및 정당이 86명을 후보자로 내세웠으며, 무소속은 무려 417명(전체 입후보자의 44%)이 출사표를 던졌다. 무소속이 이렇게 많은 이유는 한민당의 상당수가 한민당의 비인기로 인해 무소속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정당 및 사회단체가 무려 48개나 되었지만, 7명 이하로 후보를 낸 정당이 42개나 되었고, 단 1명의 후보를 낸 정당 및 사회단체도 25개나 되었다. 해방후 정당과 사회단체의 난립현상과 함께 정치적 혼란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남북협상을 추진했던 남북협상파와 좌익계열은 이 선거에 불참하였다.

제헌국회의원 투표 결과 정당·단체별 당선자는 무소속이 의원정수 200명에 42.5%에 해당하는 85명이 당선되어 정당제에 대한 낮은 이해 속에 개인의 인기(popurarity)가 선거를 좌우하였고, 정당 및 단체별로는 이승만을 추종하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총의석의 27.5%인 55석을 차지하여 가장 많은 당선자를 내어 제1세력으로 부각되었다. 선거전에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던 한국민주당은 당 중진을 포함한 후보자들이 대거 탈락하여 총의석의 14.5%에 불과한 29명으로 그 뒤를 이었다. 그러나 한민당의 상당수는 당의 인기가 없자 무소속으로 출마하였기 때문에 실제 의석수는 이보다 많은 60-80석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제2대 국회의원 선거[편집]

제2대 국회의원선거는 제헌국회에서 마련한 새로운 국회의원선거법에 의하여 1950년 5월 30일에 실시되었다. 경쟁률은 의원정수 210명에 대하여 무려 2,209명이 출마하여 평균 10.5 대 1로 역대선거 중 가장 높았다. 이러한 과열경쟁의 결과는 제헌국회의원선거에 불참하였던 남북협상파와 중간계열의 참여 그리고 독립정부를 수립한지 2년간에 조성된 정치적 과열현상이기도 하다. 정파별로는 39개 정당·사회단체가 참가했는데, 이 가운데 여당격인 대한국민당 소속이 165명으로 가장 많았고, 야당인 민주국민당 소속이 154명이었다. 이에 반해 10명 이내의 후보를 낸 정당·사회단체가 30개에 달했고, 이 중에는 1명의 후보자를 낸 정당·사회단체가 18개로서 정당 및 사회단체의 극심한 난립현상을 보여주었다. 무소속은 전체 입후보자의 68.5%인 1,513명으로 제헌국헌의원선거의 417명보다 무려 1,096명이나 증가하였다. 선거결과 정당·단체별 당선자는 무소속이 모두 126명으로 총정원의 60%를 차지하여 제헌국회의원선거에 이어서 절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었고, 정당으로는 대한국민당과 민주국민당이 각각 24명을 당선시켰다. 따라서 제1정당으로서 뚜렷하게 부각되는 정당이 없는 '도토리 키재기식' 선거결과가 나와 선거 이후 정치세력들의 이합집산을 예고하였다.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제헌의원의 재선율은 불과 15.5%로 31명에 불과하여 역대 선거 중 재선율이 가장 낮았다. 제헌의원은 임기가 2년밖에 되지 않아서 의원으로서 업적을 남기기에는 너무 짧은 기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승만 지지자들의 당선이 크게 줄어들고, 무소속이 전체의석의 60%인 126석을 차지하여 이승만 정부를 위협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이승만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불리한 간선제에서 직선제개헌운동을 전개하게 만들었으며, 결국 부산정치파동을 거쳐 발췌개헌을 하기에 이르도록 하였다.

제3대 국회의원 선거[편집]

1954년 5월 20일 실시된 3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우리나라 선거사상 처음으로 이승만이 조직한 여당인 자유당이 의원후보자 공천제를 채택하였고, 원내 제1야당인 민주국민당도 후보를 공천하여 공천제 선거를 바탕으로 정당정치의 기틀을 마련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경쟁률은 의원정수 203인에 대하여 입후보자가 1,207명으로 평균 5.9 대 1이었다. 제헌국회의원선거와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보였던 정당·사회단체의 난립이 현저하게 줄어들어 자유당·민주국민당 등 14개 정당이 선거에 참가하였다. 이 중에서 10명 이상의 후보를 낸 정당·단체가 4개였고, 1명의 후보를 낸 정당·단체는 6개로 유명무실한 군소정당 및 사회단체가 대폭 정비되었다. 정당·단체별 후보상황을 보면 아직도 무소속이 797명이 출마하여 전체 입후보자의 66%를 차지하여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정당으로는 자유당이 선거사상 처음으로 후보를 공천하여 공천부호자 181명, 비공천자 61명으로 모두 242명의 후보를 전선거구에 후보를 공천하였다.

정당·단체별 당선자는 자유당이 의원 정수의 56.2%에 해당하는 114명으로 원내 다수당을 차지하게 되었다. 자유당이 과반수가 넘는 의석을 점유함으로써 선거 이후의 정치구도가 자유당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반면에 무소속이 무려 67명이 당선되어 아직도 인물과 개인중심의 선거경향이 남아 있었으며, 야당인 민주국민당은 15명의 당선자를 내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그 밖에 당선자를 낸 정당·단체는 자유당을 포함해서 모두 5개였다.

제4대 국회의원 선거[편집]

제4대 국회의원선거는 1958년 5월 2일에 실시되었다. 민의원 의원정수 233명에 대하여 입후보자는 841명으로 평균 3.2 대 1의 경쟁률을 보였으며, 전국적인 조직을 가진 자유당과 민주당을 비롯하여 14개 정당·사회단체가 후보를 출마시켰다. 이 중에서 10인 이내의 후보자를 낸 정당·사회단체가 10개였으며, 후보를 단 1명을 낸 정당·사회단체의 난립은 다소 감소되는 경향을 보여 정당정치의 기틀이 점차 잡히기 시작하였고, 유명무실한 군소정당은 정비되는 현상을 나타냈다. 정당·단체별 입후보 현황을 보면 여당인 자유당이 236명으로 전체의 28.1%를 차지했다. 자유당은 전선거구의 90%에 해당하는 219개 선거구에서 후보자를 추천하였고, 여타지역에서도 17명이 입후보하여 전선거구에서 후보자를 냈다. 야당인 민주당은 후보자수에 있어서도 열세이긴 하지만 전선거구의 84%에 해당하는 197개구에서 공천후보자를 추천하여 무공천후보자 2명을 합쳐 모두 199명으로 전체의 23.7%를 차지하였다. 한편 무소속은 357명으로 전체의 42.4%를 차지하여 가장 많은 후보가 입후보하였다. 총투표율은 90.6%로 상당히 높았으나 강원도 93%, 제주도 94.9%인 반면에, 서울은 80.1%로 '고촌저도(高村低都)', 즉 투표율이 농촌에서는 높고, 도시지역에서는 낮은 현상을 나타냈다.

선거결과 정당·단체별 당선자는 자유당이 126명(공천자 121명, 비공천자 5명)으로 전체의원 정수의 54.1%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였으며, 민주당이 79명, 무소속이 26명의 당선자를 냈다. 민주당은 제3대 국회에 비해서 33명이 늘었고, 자유당은 이와 반대로 5명이 줄었다. 그 밖에 통일당이 1석을 차지한 것을 제외하고는 여타 11개 정당이 단 1명의 당선자도 없어 유권자들의 투표성향이 구심적으로 작용하여 양당제적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정당과 후보의 극심한 난립이 정리되어 제3대 국회의원선거까지 1,000명 이상의 후보가 난립하였던 것이 841명으로 줄었고, 다수의 정당·사회단체가 출현하여 혼란스러웠던 것이 전국적인 조직을 가진 자유당 및 민주당으로 정비되었다. 따라서 전체적인 선거전의 대결양상은 정당에 의한 여·야의 각축장이 되었다. 특히 제4대 선거에서 여촌야도현상의 선거결과가 나타나, 여당인 자유당은 지방에서 대부분의 승리를 거뒀으며, 야당인 민주당이 도시에서 승리하며 민심의 소재를 읽을 수 있는 선거였다.

제5대 국회의원 선거[편집]

제5대 국회의원 선거는 4·19혁명후 1960년 6월 15일에 내각책임제에 입각한 헌법개정과 이 헌법에 의하여 같은 해 6월 25일에 개정 공포된 국회의원선거법에 따라 민의원이 해산되고 과도정부의 관리로 7월 29일에 실시되었다. 제5대 국회의원선거는 대통령제 대신 내각제로 권력구조가 변경되어 제2공화국을 담당할 정부를 선택하는 선거였던 만큼 국내외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집권당으로 확정적인 민주당은 233개 선거구 가운데 민의원에 227명(6개구 무공천)과 참의원에 정원 58명을 모두 공천하려 했으나 신·구판간의 경쟁이 치열하게 되어 신파공천 선거구에 구파가 대항후보를 내고, 구파공천 선거구에 신파가 대항후보를 공천한 곳이 110여개 선거구나 되었다. 몰락의 길에 들어선 자유당은 공식적인 공천을 하지 않았고, 대부분 무소속으로 출마하였다. 자유당으로 출마한 사람은 민의원이 54명, 참의원이 11명이었다. 정당별 입후보상황은 전국적인 조직을 가진 민주당을 비롯하여 14개 정당·사회단체가 후보를 출마시켰다. 무소속은 입후보자 총수의 64.4%에 해당하는 1,010명으로 4·19 직후의 정치과열현상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민주당은 모두 305명이 입후보하여 전체의 19.55%를 차지했다. 이 선거에서 전체경쟁률은 의원정수 233명에 1,563명이 입후보하여 평균 6.7 대 1의 경쟁률을 나타냈다.

선거인 등재율은 전체인구의 53.9%로 선거사상 가장 높았다. 이는 선거권자의 연령이 21세에서 20세로 낮아졌다는 점과 자연인구의 증가가 그 배경으로 보인다. 총투표율은 선거인 총수의 84.3%로 지금까지의 선거에 비해 비교적 낮은 편이었다. 이는 제1공화국 때 치러진 선거에서처럼 관권에 의해서 유권자를 투표소로 강제로 동원하거나 투표부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민의원 의원선거 결과 정당·단체별 당선자는 민주당이 의원정수의 75.1%에 해당하는 175명이 당선되어 과반수를 훨씬 넘었다. 무소속도 49명이 당선되었는데, 민주당의 신·구파 공천연합에서 낙천된 후보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민주당이 사실상 의석을 석권한 선거였으며, 자유당은 단 2석을 차지하여 군소정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혁신계 정당들도 한국사회당에서 1석을 차지한 것을 제외하면 사실상 전멸한 것이어서 우리나라 국민들의 이념적 성향을 엿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참의원선거는 1952년 7월 7일에 공포된 개정헌법의 규정에 따라 국회는 민의원과 참의원의 양원으로 구성토록 되어 있었으나 참의원 구성에 필요한 입법조치의 미비로 말미암아 제3대와 제4대 국회는 민의원만으로 구성되어 오다가 제5대 국회의원선거로 민·참 양원의원을 동시에 선출하게 되었다. 제헌 이래 최초로 시행된 참의원 의원선거에서 선거구는 서울시와 도단위로 의원정수를 2명에서 8명으로 하여 정원을 58명으로 하는 중·대선거구제로 하였다.

참의원 의원선거의 기표방법은 해당선거구 의원정수의 반수 이하의 후보자를 선택할 수 있는 제한연구투표제를 채택하였다. 제한연기투표제는 정당별 당선의 편중을 막기 위하여 채택한 제도이다. 그리고 참의원 의원은 3년마다 1/2을 개선하도록 규정하였다. 입후보자수는 201명으로 평균경쟁률은 3.5 대 1이었다. 참의원 의원선거 투표율은 선거인 총수의 84.1%였다. 투표방법은 먼저 민의원 의원선거에서 투표하고, 그리고 다음에 참의원 의원선거에 투표하는 방법으로 실시되었다. 참의원 의원선거 결과 정당·단체별 당선자는 민주당이 의원정수 58명에 31명이 당선되어 절대다수 의석을 차지하였다. 무소속은 20명 당선되었으며, 자유당은 단 4석을 얻는 데 그쳐 민의원 의원선거 결과와 마찬가지로 군소정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당선자를 낸 정당·단체는 민주당을 포함하여 6개에 달했다. 제5대 총선은 우리나라 국회사상 처음으로 양원제를 구성하는 선거였다. 그러나 제5대 국회는 5·16군사쿠데타에 의해 9개월여만에 문을 내린 단명국회였다. 특히 참의원선거는 정치의식과 교육수준이 높은 서울을 제외하고 여타 9개도에서는 기호 1번의 순위자가 모두 당선되는 결과가 나타났다.

제6대 국회의원 선거[편집]

제6대 국회의원선거는 1963년 11월 26일 실시되었다. 5·16군사쿠데타에 의한 군부의 정치개입으로 민주당정권이 붕괴된 뒤 쿠데타 주도세력에 의해 만들어진 정치일정과 제도에 의해 치러진 선거였다. 군부세력에 의하여 새롭게 개정된 헌법에서는 권력구조형태를 내각책임제에서 대통령중심제로, 국회도 양원제에서 단원제로, 그리고 국회의원은 지역구와 전국구제도를 도입하였다. 군부정권은 정당정치를 표방하면서 총선후보자격을 정당소속으로 한정하였다. 이로 인해 선거에 참여하려는 정객들은 각기 정당 창당에 돌입하였다. 이에 따라 이 2개의 정당 외에도 제6대 선거에는 모두 12개의 정당이 참여하여 많은 정당이 난립되는 현상 속에 12개 정당에서 847명이 입후보하여 평균 5.7 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전국구의석은 지역구선거에서 3석 이상의 의석을 차지하지 못하였거나 그 유효표총수의 5/100 이상을 얻지 못한 정당을 제외한 정당에 대하여 배분하도록 하였다. 그 배분방식은 제1당(최다수득표당)의 득표비율이 50/100 이상일 때는 각 정당의 득표비율에 따르지만, 제1당의 의석수는 전국구 의원정수는 2/3를 초과하지 못하며, 제1당이 50/100 미만일 때는 제1당에 전국구의석의 1/2을, 제2당 이하의 잔여의석을 득표비율로 배분하였다.

입후보상황은 지역구 131명과 전국구 44명 총 175명의 의원정수에 대하여 지역구 847명, 전국구 154명으로 모두 1,001명이 각각 입후보하여 지역구에 평균 6.5 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투표율은 72.1%로 제14대 총선의 71.9%를 제외하고는 가장 낮았으며, 5대보다는 무려 12.2%나 낮았다.

선거결과 정당별 당선자는 민주공화당이 의원정수 175명의 62.8%에 해당하는 110명(지역구 88명, 전국구 22명)으로 절대다수의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민주공화당은 과반수를 훨씬 넘는 의석을 확보하여 정국주도권을 잡는 데 성공하였다. 민정당은 41명(지역구 27명, 전국구 14명)을 당선시켜 제1야당으로 부상하였지만, 민주당이나 자유민주당은 군소정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제7대 국회의원 선거[편집]

제7대 국회의원선거는 1967년 6월 8일 실시되었다. 의원정수는 제6대 선거와 동일한 지역구 131명과 전국구 44명으로 총 175명이었다. 선거전은 지역구에 702명이입후보하여 평균경쟁률은 5.4 대 1을 나타냈다. 이 선거에는 민주공화당과 신민당 이외에 대중당·민중당·자민당 등 모두 11개 정당이 참여하였다. 투표율은 76.1%로 제6대보다 4% 가량 증가하였다. 선거결과 정당별 당선자는 민주공화당이 의원정수의 73.7%에 해당하는 129명(지역구 102명, 전국구 27명)으로 제6대보다 19명이 늘어나 절대다수의석을 자치하게 되었다. 신민당은 45명(지역구 28명, 전국구 17명)을 등원시켰고, 대중당이 1명에 나머지 8개 정당은 단 1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하였다. 정당별 득표율에서는 민주공화당이 50.6%의 득표율로 전체의석의 77.9%에 해당하는 102명을 당선시켰다. 반면에 신민당이 32.7%를 획득하여 당선비율 21.4%에 해당하는 28명을 당선시켰다.

공화당은 여전히 농촌지역에서 압승을 거둔 반면에, 신민당은 대도시에서 크게 승리하여 여촌야도현상의 심화를 드러냈다. 특히 선거과정에서 저질러진 많은 부정선거행위로 말미암아 야당으로부터 전면부정선거라는 문제가 제기되었고, 공화당도 화성지역구 당선자 권오석을 신민당의 김형일로 착오시정하고, 7개구의 지구당위원장을 당에서 제명하여 공화당 스스로 부정선거임을 자인한 꼴이 되어 불법과 타락선거의 양상을 나타냈다.

제8대 국회의원 선거[편집]

제8대 국회의원선거는 박정희가 3선개헌을 통하여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장기집권에 대한 국민의 염려 속에 1971년 5월 25일 실시되었다. 신민당은 유진산 당수가 지역구를 포기하고 전국구 후보로 등록하자 당내에 혼란이 일어났다. 이른바 진산파동(5·6파동)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유진산 대표위원이 자신의 출신지역구인 서울 영등포 갑구를 포기하고 전국구 1번으로 등록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당내 소장층과 영등포 갑구 당원 등이 강력하게 반발하여 당수직 사퇴를 요구하는 사태로 벌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유진산 당수는 당직을 사퇴하였다.

제8대 국회의원선거에서는 제7대 선거보다 지역구 의원정수가 22명, 전국구 7명이 증가하여 지역구 153명과 전국구 51명 등인데, 지역구 입후보자는 577명으로 평균경쟁률 3.8 대 1을 나타냈다. 투표율은 73.2%로 제7대보다 2.9% 가량 감소하였다. 선거결과 정당별 당선자는 민주공화당이 의원정수의 55.4%에 해당하는 113명(지역구 86명, 전국구 27명)으로 과반수를 넘는 의식을 차지하게 되었다. 신민당은 89명(지역구 65명,전국구 24명)을 당선시켰고, 국민당과 민중당이 지역구에 각가 1명씩 당선시키고, 나머지 2개정당은 단 1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하였다. 제8대 총선은 국회를 통해 집권세력을 견제해야겠다는 유권자들의 의지가 투표의 결과로 드러났고, 특히 대도시를 중심으로 야당에 대한 지지가 구심점으로 작용함으로써 양당체제로 정치가 단순화되는 선거였다.

제9대 국회의원 선거[편집]

제9대 국회의원선거는 1973년 2월 27일 실시되었다. 유신헌법에 따라 국회의원 1/3을 대통령이 임명하고, 1선거구에서 2인씩 선출하는 중선거구제로 하여 전국을 73개 선거구로 나누고, 국회의원 정수는 선거구 선출 146명, 통일주체국민회의 선출 73명(의원정수의 1/3)으로 모두 219명으로 하였다. 입후보자는 지역구에 339명으로 평균경쟁률 2.3 대 1의 비교적 저조한 경쟁률을 나타냈다. 저조한 경쟁률의 원인은 유신독재로 인해 정치적 자유가 위축되고 출마 자체도 자유롭지 못한 상황 때문이었다. 투표율은 72.9%로 제8대보다 0.3% 낮았으며, 이는 역대 선거에 비하면 비교적 낮은 편이었다.

선거결과 민주공화당은 집권당의 위력과 동반 당선제의 제도적 배경으로 모든 지역구에서 1명씩 당선되어 지역구 의원정수의 50%에 해당하는 73명을 확보했다. 신민당이 52명으로 35.6%를 민주통일당이 2명으로 1.4%를, 그리고 무소속이 19명으로 13.0%였다. 정당별 지역구득표율에 있어서는 민주공화당의 득표총수가 유효투표총수의 38.7%로 73명의 당선자를 내었고, 이는 의원정수의 33.3%를 차지하는 것이지만, 대통령의 지명에 의하여 선출되는 유정회를 합치면 여당의 당선율은 66.7%에 이른다. 이어서 신민당이 32.5%로 의원정수의 23.7%에 해당하는 52석을 획득하였다. 민주통일당이 10.2%로 2명을 당선시켜 가장 저조하였다. 박정희와 민주공화당은 여촌야도라는 전통적인 선거경향에서 승리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도시선거구를 45개에서 17개로 줄이고, 농촌선거구를 도시선거구와 통합시키는 게리멘더링 선거구를 확정하기도 하였다.

제10대 국회의원 선거[편집]

제10대 국회의원선거는 1978년 12월 12일 실시되었다. 선거구가 73개 선거구에서 4개구를 증설하여 77개 선거구로 하였으며, 의원정수는 선거구에서 선출하는 146명에서 154명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하는 73명을 77명으로 하여 총 219명에서 231명으로 증원되었다. 입후보 상황을 보면 의원정수 154명에 473명이 입후보하여 평균 3.1 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투표율은 77.1%로 제9대보다 4.2% 높았다. 선거결과 정당별 당선자는 민주공화당이 의원정수의 44.2%에 해당하는 68명이 당선되었고, 신민당이 61명, 민주통일당이 3명, 무소속이 22명의 당선자를 각각 내었다. 그러나 정당별 득표수는 헌정사상 최초로 야당인 신민당이 여당인 공화당보다 1.1%를 더 획득하는 결과를 낳았다. 즉 정당별 지역구 득표율에서는 신민당이 유효투표총수의 32.8%로 가장 많은 득표율을 획득한 반면, 민주공화당의 득표총수가 유효투표총수의 31.7%를 획득하였다.

긴급조치 제9호에 의하여 유신체제에 대한 논쟁은 일체 할 수 없게 됨에 따라 특별한 쟁점이 없었던 제10대 총선거결과, 민주공화당은 유효투표의 31.7%를 득표하였으면서도 전체의원의 44.2%를 차지하였고, 반면 신민당은 유효투표의 32.8%로 가장 많은

득표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의원 총수의 39.6%를 차지하여 심각한 게리맨더링 현상과 더불어 야당이 여당의 득표율을 앞선 것은 건국 이후 국회의원선거에서 처음 있는 결과로 국민의 정치의식의 성장과 함께 유신체제의 불안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정당별 득표수에 있어서 여당인 민주공화당이 4,695,995표로 득표율 31.7%를 얻었고, 제1야당인 신민당은 4,861,204표로 32.8%를 얻어 165,209표에 해당하는 1.1%를 더 획득하여 득표수에 있어서는 야당이 실질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야당의 이러한 승리는 박정희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제11대 국회의원 선거[편집]

제11대 국회의원선거는 1981년 3월 25일 실시되었다. 10·26 대통령 시해사건으로 유신체제가 종말을 고하고 잠시동안의 이른바 '서울의 봄'이 찾아오는 듯했으나 유신독재의 냉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일단의 군부세력의 정치개입으로 또다시 군정에 돌입하게 된 한국정치는 군부의 주도로 제11대 선거를 실시하게 된 것이다. 국회를 대신하는 이른바 임명직의 국가보위입법회의가 1981년 1월 29일 마련한 국회의원선거법은 지역구에서 다수득표제로 2인씩 선출하고, 지역구 의석정수의 1/2은 전국구로 선출하며, 전국구 의석의 배분은 지역구선거에서 5석 이상을 얻지 못한 정당은 제외하고 지역구선거의 제1야당에게 전국구의원 정수의 1/2은 전국구로 선출하며, 전국구의석의 배분은 지역구선거의 제1당에게 전구국의원 정수의 2/3를 배분하도록 했다. 군부세력은 1구 2인제의 동반당선제와 함께 권력을 이용하여 3개의 관제야당을 만들어 야권표를 분산시키는 기만술을 썼다.

제10대 선거보다 지역구의원 정수가 30명이 증가하여 지역구 184명과 지역구의석 획득비율에 따라 배분되는 전국구 92명을 합쳐 모두 276명을 선출하는 선거에 12개 정당과 무소속이 난립하여 평균 3.4 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선거결과 정당별 당선자는 민주정의당이 지역구에서 제주도를 제외한 전역에서 90명이 당선되어 48.9%를 차지하였고, 전국구에서는 66.3% 61명이 당선되어 전체의석의 54.7%인 151석을 획득하였다. 이어서 민주한국당이 지역구에서 31.0%에 해당하는 57명, 전국구에서 26.1%에 해당하는 24명으로 모두 81명을 당선시켰다. 이 밖에

한국국민당이 지역구에서 18명, 전국구에서 7명으로 모두 25명을 당선시켰다. 특히 군부세력은 의회구성의 구색을 맞추기 위해 혁신정책을 만들도록 하고, 혁신정당대표가 출마하는 지역에 야당의 공천을 만들도록 하고, 혁신정당대표가 출마하는 지역에 야당의 공천을 억제시켜 인위적으로 원내의석을 확보하도록 하였다.

제11대 선거는 유신체제의 부정적 선거제도를 비켜 가면서도 신구부세력이 정권안정을 위해 제도적 이점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도록 고안된 선거제도에 의한 선거였다. 우선 여당에게 안정의석을 확보해 주는 데 효과성이 입증된 여야 동반당선의 1구 2인제를 유지하고, 유정회 대신 전국구제도를 부활시켰다. 제11대 선거는 명망있는 많은 야당정치인들이 정치활동이 규제된 상태에서 치러진 불평등하고 부당한 선거였다. 이런 제도와 과정 속에서 제1야당으로 부상한 민주한국당은 주요 야당인사들이 정치활동이 금지된 상태에서 동반 당선하여 탄생했기 때문에 관제야당이라는 비난을 받아 정책과 대안을 제시하고 국정을 비판하는 야당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제12대 국회의원 선거[편집]

제12대 국회의원선거는 1985년 2월 12일 실시되었는데, 9개 정당이 후보를 내어 여전히 정당의 난립현산을 보였고, 무소속은 제11대에 106명이 출마하여 가장 많은 입후보 비율이었으나, 이 선거에서는 26명만이 출마하였다. 투표율은 84.6%로 제11대보다 무려 6.2%나 증가하였는데, 이 투표율은 제4대에 90.6%를 기록한 이래 가장 높은 투표율이었다. 선거결과 정당별 당선자는 민주정의당이 지역구에서 87명, 전국구의원 61명 등 모두 148명이 당선되어 의원정수의 53.6%를 차지하였다. 신한민주당은 지역구에서 50명, 전국구 17명 등 모두 67명을 차지하였으며, 민주한국당이 지역구에서 26명, 전국구에서 9명 등 35명을, 그리고 한국국민당이 지역구에서 15명, 전국구에서 5명으로 모두 20명을 확보하여 4당체제로 출발하게 되었다. 한편 당선자를 단 1명도 내지 못한 정당이 3개였고, 무소속은 경북 등의 지역에서 4명이 당선되었다. 제12대 국회의원선거는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성 중견정치인들을 정치쇄신법이라는 소급법에 의해 정치참여를 봉쇄했다가 해제하여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던 선명한 야당정치인의 정치활동 재개로 야당의 거센 바람이 어느 선거보다도 강하게 불었다. 그동안 군부통치 아래서 신음하던 국민들이 이 선거를 통해 군부정권을 심판한 것이다. 관제야당이던 민한당은 야당인사들이 신한민주당으로 대거 등장하자 제3당으로 전락하여 관제야당의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제13대 국회의원 선거[편집]

제13대 국회의원선거는 1988년 4월 26일 실시되었다. 1987년 6월 소위 '6·29선언'으로 한국정치가 군부의 권위주의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여·야 합의로 대통령선거법이 마련되었으나 야당은 직선의 대통령선거에서 분열로 인해 패하고서도 통합에 이르지 못한 채 분열된 그 상태에서 참여한 가운데 치러진 선거였다. 의원정수는 지역구의 92개 선거구에서 184석을 선출하던 것을 40석이 늘어난 224석, 전국구에서 75석으로 제12대보다 23석이 늘어난 총 299명이었는데, 14개 정파에서 935명과 무소속 111명 등 지역구에 1,046명의 후보가 입후보하여 평균경쟁률은 4.7 대 1이었다. 정당별 당선자는 민주정의당이 지역구 224명 중에서 38.8%에 해당하는 87명의 당선자를 냈고, 이에 따라 전국구의원 38명을 배정받아 제12대보다 23명이 적은 125명이 당선되어 의원정수의 41.8%를 차지하여 제1당이 되었다. 이어서 황색바람을 일으킨 평화민주당이 지역구에서 54석, 전국구에서 15석 등 모두 70석으로 총의석수의 23.4%로 제1야당이 되었다. 통일민주당은 지역구에서 46석, 전국구에서 13석을 차지하여 총 59석을 차지하였다.

13대 선거는 헌정사상 처음으로 '여소야대' 현상을 초래하여 집권여당이 과반수 확보에 실패하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각 정당의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지역적 구도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민주정의당은 대구·경북 그리고 경기도와 강원도에서 강세를 보였으며, 호남에 기반을 둔 평화민주당은 전라남·북도에서 압승을 거두었고, 서울에서도 상당수의 당선자를 냈다. 영남에 기반을 둔 통일민주당은 부산과 경상남도에서 압승을 거두었으며, 민주공화당은 충청권을 기반으로 하는 지역분할구도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제14대 국회의원 선거[편집]

제14대 국회의원선거는 1992년 3월 24일 실시되었다. 민주정의당은 13대 국회의원선거에서의 참패로 여소야대의 정치적 상황에서 국정운영의 주도권을 야당에게 빼앗기자 통일민주당과 민주공화당과의 3당을 통합하여 민주자유당이라는 당명으로 정국을 재조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인위적 거대여당의 창당은 한편으로는 평민당으로 하여금 야권통합에 의한 위상변화를 도모하도록 만들었다. 거대야댱의 출현으로 평민당은 통일민주당에서 잔류한 민주당과 야권통합을 견지해냈고, 재벌기업을 바탕으로 정주영이 창당한 통일국민당이나 기성 정당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과 불만을 배경으로 탄생한 신정치개혁당은 14대 총선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잘 설명해 준다.

의원정수는 지역구에서 237명, 전국구에서 62명, 모두 299명으로 13대에 비해 변함이 없었다. 이 선거에서는 모두 6개 정당과 무소속에서 지역구의 1,052명, 전국구에서 154명의 후보가 입후보하여 4.4 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선거결과 민주자유당은 지역구에서 38.5%의 득표율로 116석(48.9%)과 전국구의석 33석을 합쳐도 과반수에서 1석이 모자라는 149석에 불과하였다. 반면에 야권통합의 민주당은 29.2%의 득표율로 지역에서 75석을, 그리고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의 재벌정당인 통일국민당이 24석(17.4%)을 획득했다.

제14대 국회의원선거는 집권 민주자유당이 제1당을 차지했지만 과반수의석을 넘기지 못해 여소야대 국회를 구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야권통합으로 선거에 임한 민주당은 제1야당으로 부상하였고, 재벌기업을 바탕으로 탄생한 통일국민당도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하여 한국정치의 새로운 환경을 불러일으켰다. 제14대 선거는 역대 국회의원선거 중 투표율이 71.8%로 가장 낮았다.

제15대 국회의원 선거[편집]

제15대 국회의원선거는 1996년 4월 11일 실시되었다. 15대 총선은 문민정부를 출범시키고 변화와 개혁을 추진한 김영삼 정부가 한 해 전에 지방선거에서 참패한 이후 실시되는 선거라서 그 결과에 초미의 관심이 모아진 선거였다. 정계는 김영삼의 집권당과 지난 해의 지방선거를 기점으로 다시 정계에 복귀한 김영삼의 영원한 경쟁자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 그리고 김영삼으로부터 출당된 후 충청도를 배경으로 지방선거에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 김대중이 빠져 나간 이른바 통합민주당의 대결장이었다. 특히 통합선거법이라는 새로운 정치실험의 리트머스시험지에 의한 선거라는 점에서 향후 금권과 편법의 한국선거의 미래를 설정하는 선거였다. 선거법은 돈 안드는 선거를 표방하면서 금권선거의 엄격한 제재와 함깨 전국구를 과거의 의석비에서 각 당의 득표비율로 하는 등 개선된 상황이었다.

지역구에서 253명, 전국구 46명 등 299명을 선출하는 선거에서 신한국당 253명, 국민회의 241명, 자민련, 217명, 민주당 224명, 그리고 무속 454명 등 1,389명이 입후보하여 평균 5.5 대 1의 경쟁률을 기록하였다. 65.6%의 가장 낮은 투표율 속에 신한국당은 지역구 121명, 전국구 18석으로 139석을 확보하였으나 과반수에는 11석이 부족하였다. 14대에 이어 또다시 여소야대의 결과를 낳은 것이다. 새정치국민회의도 당초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79석에 그쳤고 자민련 41석, 민주당은 겨우 9석에 머물렀다. 반면에 무소속은 16석이 등원하였다. 신한국당은 제1당을 지키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과반수의석을 확보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야당에 비해 선전함으로써 김영삼 정부는 정치적으로 승자의 입장에 서게 되었다. 특히 새정치국민회의는 전통적으로 강세였던 서울에서마저 여당에 패하는 수모를 겪었다.

15대 총선거는 권위주의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문민정부의 선거라는 특징에서 '여당=비민주', '야당=민주'라는 기존의 의식이 타파된 상황에서 인물과 정책에 나름대로 관심을 갖는 선거였다. 그럼에도 지역주의가 이를 가로막아 선거결과는 지역대결의 양상을 나타냈다. 즉 영남은 신한국당과 신한국당에서 이탈하면서 지역연고가 없는 무소속, 호남은 김대중 중심의 국민회의, 충청은 김종필 중심의 자민련 등의 정당과 연계되는 현상을 나타냈다.

이상으로 역대 국회의원선거에 대하여 일고하였다. 우리의 헌정사에서 대통령선거는 자주 중단되었지만, 국회의원선거는 중단없이 실시되었다. 국회의원선거는 유권자들의 잠재된 정치적 의사의 유일한 표출기회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물론 많은 왜곡이 있었다. 그럼에도 국회의원 선거는 우리나라 민주정치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어 오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 동안의 총선은 몇 가지의 특징을 보여준다.

첫째, 대부분의 총선에서 집권당인 여당이 압도적으로 승리하는 결과를 보였다. 제12대 총선까지 집권당이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결과는 야당의 분열, 즉 '1여다야' 구조와 선거방법이 각 당의 득표율을 의석에 정확히 반영하지 못하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다. 특히 전국구의석의 배분은 여당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제도였다.

둘째, 제5대 총선을 제외하고는 도시에서는 야당이, 농촌에서는 여당이 늘 압승을 거두어 여촌야도의 투표현상을 보였으나 13대 총선부터는 지역대결의 양상으로 변화되었다.이것은 제13대 대통령선거가 지역구조 속에 1노 3김 대결로 치러짐으로써 비롯된 것이다. 지역대결의 구도에서는 여당이 절대다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결과는 지역주의가 본격화된 13대 총선거 이후 계속되었으며, 앞으로도 현행 선거제도와 지역주의가 계속된다면 비슷한 결과가 이어질 것이다.

셋째, 초기에는 무소속 중심에서 선거의 경험이 많아질수록 정당을 선호하는 경향으로 바뀌어 왔다. 특히 여당과 제1야당의 대정당중심으로 투표가 구심화되고 있는 현상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물론 지역주의가 발로한 13대 총선 이후부터는 지역연고 정당중심으로 투표가 이루어졌다. 따라서 후보의 선택은 정당의 정강정책이나 개별적인 인물중심의 선거이기보다는 지역적 연고관계가 있는 정당지도자에 따른 선거였다.

넷째, 투표율은 도시일수록 낮고, 농촌일수록 높게 나타났다. 아울러 최근에 이를수록 투표율이 낮아지는 현상을 보였으며, 특히 정치적 쟁점이 있는 선거(예를 들면, 12대 선거)는 투표율이 높은 반면, 그렇지 않은 선거는 상대적으로 낮은 투표율을 보였다.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의 제정[편집]

公職選擧-選擧不正防止法-制定

1994년 3월 16일 지금까지 별개의 선거법체계로 유지되어 온 대통령 선거법·국회의원 선거법·지방의회의원 선거법·지방자치단체장 선거법을 단일법률로 통합한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이 제정되었다. 문민정부는 이 통합선거법을 모든 선거에 통일적으로 적용하도록 함으로써 선거관리에 일관성을 유지하고, 선거에 참여하는 정당과 후보자는 물론 국민이 선거법규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을 뿐 아니라 선거공영제를 확대하고 선거부정과 부패의 소지를 근원적으로 제거함으로서 선거문화를 개혁하려고 하였다. 이를 위하여 정당과 후보자에게는 선거법 준수와 공정경쟁의무를, 공무원에게는 정치적 중립성 유지 의무를, 검찰·경찰공무원 등에게는 신속·공정한 선거사범단속 의무를, 언론인에게는 공정한 보도와 논평 의무를, 공명선거추진 사회단체에게는 중립성과 공정성유지 의무를 지우고 있다.

의원정수[편집]

議員定數

국회의 의원정수는 지역구 국회의원(253)과 전국구 국회의원(46)을 합하여 299인으로 한다. 하나의 국회의원 지역선거구에서 선출할 국회의원의 정수는 1인으로 한다. 전국구 국회의원 선거에서 5석 이상의 의석을 얻었거나 유효투표 총수의 100분의 5이상을 득표한 각 정당에 대하여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에서 얻은 득표비율에 따라 전국구 국회의원 의석을 배분한다. 다만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에 유효투표 총수의 100분의 3이상 100분의 5미만을 득표한 각 정당에 대하여는 1석씩을 배분한다. 시·도의회의 의원정수는 그 관할구역 안의 자치구·시·군마다 3인으로 하되, 인구 30만을 넘는 자치구·시·군에서는 30만을 넘는 매 20만까지 1인씩을 더하고 인구가 7만 미만이 되는 자치구·시·군은 2인으로 한다. 그리고 자치구·시·군의회의 의원정수는 그 관할구역 안의 읍·면·동마다 1인으로 하되 인구 2만을 넘는 읍·면·동에서는 2만을 넘는 매 2만까지 1인씩을 더한다. 비례대표시 도의원 정수는 지역구 시·도의원 정수의 100분의 10으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