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정치/한국의 정치/한국인의 정치의식과 정치행동/한국의 의회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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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의회정치〔서설〕[편집]

韓國-議會政治〔序說〕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의회정치제도의 도입은 다른 신생국(新生國)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러했지만 한국의 정치사에 있어서도 뚜렷한 한 구획점이 된다. 그것은 한국이 오랜 전통적인 왕도정치(王道政治) 질서와 36년간에 걸친 일제의 식민지 통치체제로부터 벗어나서 새로운 정치 질서로 전환함을 의미하였기 때문이다. 즉 치자(治者)와 피치자(被治者)의 관계를 오직 일방적으로 통치하게끔 운명지워진 왕과, 오직 그것에 복종하게끔 운명지워진 신민(臣民) 사이의 주종관계(主從關係)로 보는 정치체제로부터, 모든 개인은 원칙상으로 자유롭고 평등하며 결코 침해될 수 없는 존엄성과 기본적인 권리를 가지는 동시에 국가의 정치생활은 원칙적으로 피치자인 국민의 정치참여에 의해서 운영됨으로써 치자와 피치자의 동질성이 보장된다는 것을 기본원리로 하는 정치체제의 나라로 전환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한국의 의회정치는 사실상 우리의 전통적인 정치질서와의 단절 속에서 생성하였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역사적인 배경조건이 없는 상태에서 우리의 의회정치제도가 전개되었다는 것은 우선 주목하여야 할 사실이라 할 것이다.

한국 의회정치와 반공노선[편집]

韓國議會政治-反共路線

한국의 의회정치는 해방 후에 우리가 정치적으로 또는 경제·사회적으로 큰 혼란 속에 있었으며, 더욱이 미·소 양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공산 양진영 사이의 냉전(冷戰)이 격화됨으로써 우리의 국토분단이 고정화되어 가고 있을 때에 도입되었다는 사실은 우리의 의회정치체제의 성격을 결정지은 중요한 요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이 종말되고 패망한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기 위해서 미·소 양국의 군대가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양분(兩分)하여 점령하였을 때, 우리는 카이로와 포츠담의 두 선언에서 약속받은 해방과 독립에 대한 부푼 기대만 갖고 있었을 뿐 정치적으로는 매우 혼란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여러 색채의 주의·노선을 부르짖는 수많은 세력이 난립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혼란은 북한 지역에 진주한 소련군의 군사력을 배경으로 하여 공산주의 세력이 한반도에서 크게 진출함에 따라서 더욱 더 심각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은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영·소의 3대국 외상회의(外相會議)에서 한국에 대한 5개년간의 신탁통치(信託統治) 실시의 결정을 보게 되자, 이에 대한 찬·반문제를 둘러싸고 공산주의 노선을 표방하는 좌익세력과 사실상 의회정치의 실시를 주장하는 민족진영 사이의 격렬한 대립과 투쟁으로 진전하였다. 그리고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에 따라서 한국의 독립문제를 구체적으로 협의하기 위해서 열린 미·소 공동위원회(美蘇共同委員會)는 오히려 그러한 좌·우간의 대립·투쟁을 더욱 더 격화시킬 뿐이었다.

그 격렬한 대립과 투쟁 속에 민족 진영을 영도한 지도자가 이승만(李承晩)이었으며, 2차에 걸친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 상태에서 아무 성과없이 막을 내리자 그는 한국에서의 남·북 분단, 좌·우세력 사이의 대립·투쟁은 격화일로에 있었던 미·소 양진영 사이의 냉전의 한 표징(表徵)으로 보았다. 따라서 미·소가 타협에 도달하지 않는 한 한국인의 힘만으로는 우리의 통일된 민주정부의 수립은 당분간 그 실현이 어려운 것으로 믿었다.

그후 이승만은 미국의 지원을

얻어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하여 마침내 유엔감시하에 한국전역에 총선거를 실시하여 민주적인 통일정부를 수립하도록 하는 결의를 유엔총회가 가결하도록 하는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북한지역을 점령한 소련당국은 총선거의 감시를 위한 유엔한국위원단의 입북(入北)을 거절하여 북한지역에서의 자유선거의 실시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에 한국문제는 다시 유엔소총회에 상정되어 자유선거의 실시가 가능한

남한지역에서만이라도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결의가 통과되어 남한만의 단독 자유민주주의 정부 수립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이것은 결국 반공투사였던 이승만의 반공노선(反共路線)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는 한반도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서는 우선 남한지역에서만이라도 공산세력의 진출을 제지할 수 있는 강력한 반공민주정부를 수립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한 견해에 미국정부가 동조함으로써 유엔을 움직일 수 있었으며, 유엔으로부터 한반도에서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을 받은 대한민국이 수립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대한민국의 수립과정에서 볼 때 우리의 의회정치제도는 처음부터 강력한 반공노선의 테두리 안에서 성장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것은 우리의 의회정치제도가 사회민주주의 노선까지도 포함하여 모든 좌경(左傾)된 정치노선을 배격하는 비교적 폭이 좁은 포용성을 가진 체제일 수밖에 없는 중요한 원인이라 할 것이다. 심지어 이승만의 단정노선(單政路線)에 반기를 들고 남북협상을 추진하였고 같은 민족주의 세력이었던 김구(金九)의 임정계(臨政系) 세력, 그리고 좌·우 합작(左右合作)을 추진하였던 중간파 인사들까지도 탈락된 상태에서 우리의 의회정치가 발족하였던 것이다.

과도정부 입법의원과 국회제도[편집]

過渡政府立法議院-國會制度 한국에서 의회정치가 그 제도상의 기틀을 마련한 것은 역시 1948년의 대한민국정부의 수립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그 이전인 1946년 12월 미군정당국은 이미 한국인으로 구성된 입법기관으로서 과도입법의원(過渡立法議院)을 창설하여 운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미국이 군정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잠정적 필요에 따라서 과도적인 자문기관으로 만들었던 것이며, 명분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한국민이 민주주의적 절차에 따라서 스스로를 다스리기 위한 국민대표기관의 성격을 띤 기관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입법의원은 그 구성에 있어서도 90명의 의원 가운데 반수는 군정장관이 임명하였으며, 나머지 반수의 민선의원(民選議員)도 보통선거제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각 지방의 유지를 유권자로 하여(그 자격기준도 극히 모호한 것이었다) 의원을 선출하는 절차에 의한 것이었다. 미군정 당국이 이처럼 근대적 선거제도와는 거리가 먼 절차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그 당시 남한의 특수사정에 기인하는 것이다.

어쨌든 입법의원의 시대가 한국의회정치사의 일부가 될 수 없는 것만은 사실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다만 이 입법의원이 우리에게 근대적인 입법기관 운영의 경험을 쌓게하고, 특히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의원(制憲國會議員)의 선거를 위해서 미군정 당국이 기초한 선거법을 심의·통과시킴으로써 미군정에서 대한민국정부의 수립에 이르는 과도단계에서 공헌한 바를 간과해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입법부와 집행부와의 관계[편집]

立法府-執行府-關係

이승만 노선의 승리가 대한민국정부의 수립이란 결론을 만들었다는 것은 우리의 의회정치에 있어서 입법부와 집행부 사이의 관계를 좌우하는 중요한 여건이 되었을 뿐 아니라, 정부의 권력구조를 결정짓는데 있어서도 중요한 조건이 되었던 것이다.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1948년 5월 10일 유엔감시하에 보통선거제에 의한 총선거가 실시되어 198명의 국민대표로 구성된 제헌국회(制憲國會)가 소집되었으며, 이 제헌국회에서 제정한 헌법의 절차에 따라서 집행부를 담당할 대통령이 선출되고 행정체계가 확립되었으며, 사법부도 그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하여 근대적인 의회정치가 시동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실질적으로 역할을 한 것은 국회라기 보다도 오히려 이승만 한 사람의 의사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 가장 뚜렷한 실증은 헌법조항을 심의·결정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국회의원 대다수의 의향이 의원내각제(議院內閣制)를 채택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한 사람의 반대에 부닥치자 하룻밤 사이에 대통령중심제(大統領中心制)의 정부구조로 바뀌었던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수립으로까지 끌고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이승만의 영도와 권위는 대한민국정부를 운영하는 데 있어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의 독선적인 권력행사로 둔갑하고 말았다. 이러한 조건을 배경으로하여 건국 초부터 한국의 입법부와 집행부 사이의 부조화와 불균형의 관계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집행부의 독주(獨走), 나아가서는 이승만 1인의 독주로까지 진전하였던 것이다.

한국 의회정치의 시련[편집]

韓國議會政治-試鍊

이승만박사의 권위주의적인 독선과 독주, 그리고 그것을 허용하고 감수하는 한국인의 전근대적인 준봉적(遵奉的) 행태가 우리의 의회정치를 부조리와 탈선과 혼란으로 몰고 갔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한국의 의회정치가 겪지 않으면 안되었던 외적인 어려운 조건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시초 한국의 의회정치체제는 공산주의 세력과의 대립·투쟁 속에서 탄생한 것이지만, 본래 이질적인 것과의 대립·투쟁보다도 그것을 포용하는데 있어서 무서운 힘을 발휘하는 이 타협과 양보, 그리고 차이를 토론에 의해서 해결코자 하는 체제는 그 출범 초부터 실로 모진 시련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5·10 선거가 실시되기 한달 전인 4월 3일부터 불붙기 시작한 제주도 4·3사건은 마침내 그해 10월 여수·순천사건으로까지 비화(飛火)하여, 아직 그 토대가 다져지기도 전에 대한민국의 존립까지 위태롭게 하였다.

또한 대한민국의 수립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북한에는 김일성(金日成)의 공산정권이 세워졌으며, 이러한 남북의 분열은 38도 국경선에서의 긴장을 더욱 악화시켰던 것이다. 38도선을 연하여 국군과 공산군 사이에는 소전투가 빈발하였다. 이 남북한간의 위기는 마침내 1950년 6월 25일의 한국동란을 일으키고 말았다. 그리하여 한국의 의회정치체제는 발족한지 만 2년도 못되어서 엄청난 인명·재산의 피해를 강요하는 전쟁을 치러야 했고, 수차의 환도(還都)를 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러한 다사다난한 속에서 전시체제로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1952년 항도(港都) 부산에서의 정치파동(政治派動)에서 난무(亂舞)한 이승만의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독선적인 여러 불법조치에 대해 국민은 우리의 의회정치를 파괴하는 용허하지 못할 부당한 처사라고 느끼면서도, 공산주의자의 침략과 맞서 싸우는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는 그의 강력한 영도력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후 1953년 휴전협정이 조인된 후에 있어서도 한반도에서 전쟁위기는 결코 사라지지는 않았으며, 따라서 비정상적인 전시체제의 의회정치는 그대로 존속하였으며, 또한 이승만과 그의 자유당(自由黨)체제는 그들의 정치권력의 확대와 존속을 위해서 여러 가지 획책을 하였음은 물론이다. 즉 공산주의세력의 압력과 그것에 대항하기 위한 긴장체제는 10년 동안에 걸쳐서 우리의 의회정치체제를 파괴상태로 몰고간 이승만과 그의 자유당정권의 불법적 독선과 횡포를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환경조건이었다.

한국민의 정치참여와 의회정치[편집]

韓國民-政治參與-議會政治

이승만 집권 아래에서 한국의회정치가 파탄상태에 빠진 결과는 바로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으로 나타났다. 즉 1960년 4·19 혁명으로 인한 이승만의 하야와 자유당정권의 와해, 그리고 그것에 뒤이은 7·29 선거와 민주당정권의 출현은 비록 의회정치의 회생(回生)을 의미하는 것이기는 하였으나 일단은 우리의 의회정치가 파탄에 빠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한국의회정치의 파탄은 이미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공산주의세력의 위협이라는 외적 조건에 기인하는 바가 크지만, 그러나 한국민 자신의 내적 조건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의회정치의 전통 즉 역사적 배경이 없었던 까닭에 한국의 정치문화에는 국민의 올바른 정치참여를 저해하는 여러 요인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것은 한국의 의회정치를 파탄으로 몰고 간 중요한 조건이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한국의 정치문화는 구조적인 결함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서구식 민주주의에 대한 한국인의 무경험과 학습의 결여이다. 즉 전제군주시대에서 일제침략기를 거쳐 거의 맹목적으로 받아들인 서구식 민주주의였고 작금까지의 정권주체는 권력에의 집착에만 머물러 개념조차 뿌리내리지 못한 한국의 헌정·민주주의 제도 자체를 비정상적이고 기형적인 모습으로 만들어 놓았다. 더욱이 서구식 민주주의의 성립이 오랜 기간의 혼돈과 갈등·수정의 산물임에도 이 땅의 위정자들은 민중이나 반대세력들의 비판·주장·요구를 혼란·비능률·반체제로 몰아 세웠으며 심지어 비판·감시 기능이나 세력의 존재마저 거부했다. 특히 '5·16', '12·12'를 주도한 정치군부가 내세운 명분이 그 실례이거니와 실상 그들은 민주주의나 의회정치를 전혀 모르는 문외한들인 것이다. 물론 그들은 민중의 노예근성을 노리고 있었다. 한국의 의회운영의 파행성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며 그 주체는 민중 스스로가 선택한 선량이었다는 점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