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정치/한국의 정치/한국인의 정치의식과 정치행동/한국인의 정치의식〔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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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정치의식(1948∼1960년)[편집]

韓國人-政治意識〔序說〕

한국인의 정치의식을 말하는 데 있어서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로 한국인의 인종적·풍토적·역사적 특징에서 말미암은 의식상의 특징을 들 수 있다. 예로부터 한국인은 평화를 사랑한다거나 동방에서 예의를 잘 지키는 사람들이라는 말이 풍겨주는 바와 같이 한국인은 감정이나 행위면에서 적극성보다는 소극성이 지배적임을 알 수 있다. 한민족이 예로부터 종사해온 생업인 농업은 이러한 경향을 더욱 촉진시켜 왔다고 볼 수 있다. 농업은 자연과의 싸움보다는 자연에의 순응에서 그 특징적 성격이 발견된다. 더욱이 가부장적(家父長的) 가족제도와 이를 뒷받침해온 장자 세습제도 등도 한국인의 성격을 온순하고 순종적인 것으로 만들어 놓은 주요한 요인이었으며, 이러한 요소들은 혈연과 문벌·업적보다는 귀속성(歸屬性), 합리성보다는 전통 위주, 개방성보다는 폐쇄성이 생활윤리의 중심이 되게 했다.

이같은 한국인의 의식구조는 바로 정치적인 태도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전통적인 정치적 의식이란 정치적 권위에 복종하는 이른바 귄위주의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권위주의적 의식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정치로 인하여 더욱 강화되어 해방 이후 도입한 민주정치 운영의 장애요인으로 등장했다.

둘째로는 사회적 변수가 의식상 미친 결과로 나타난 특징을 들 수 있다. 한국인은 1945년 해방시까지 잡다하나 대등한 세력 간의 견제와 균형 속에서 운영되는 민주정치에 대부분 접할 기회가 없었다. 문헌상으로만 민주정치를 아는 소수의 지식인에게 있어서도 그것은 생활화되어 있지 못했다. 이러한 풍토 속에서 한국은 해방과 더불어 일시에 민주정치에 접하게 되었던 것이다. 식민통치가 물러가고 스스로 정치하는 민주국가를 수립하게 되었으나, 독립국가 건설의 환희에 젖었을 뿐 그들의 의식구조는 여전히 누군가가 지배해 주기를 바라는 복종형 바로 그것이었으며, 이것은 해방 후 한국의 통치자로 군림한 이박사의 국부(國父)라는 칭호에서도 그대로 엿볼 수가 있는 것이다.

한국인의 정치의식의 변화[편집]

韓國人-政治意識-變化

1948년 이후에는 한국인의 의식상의 변화에 영향을 주는 매우 중대한 변화가 발견되고 있다.

첫째로는 교육기회의 확장이다. 과거 한국에는 지배계층인 양반들을 위한 성균관(成均館)이 있었고, 일제식민치하에서는 초등교육기관과 중·고등교육기관이 존재했으나 통치상의 편의를 위하여 한국인에 대한 교육기회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해방과 독립 이후 정부의 의무교육제도의 확장, 중·고등교육기관의 설치로 인하여 피교육자의 수는 급격히 상승했다. 학생수를 보더라도 1946년에는 국민학교가 1,366,024명, 중·고등학교가 83,514명, 전문학교와 대학교가 7,819명이었는데, 1960년에는 국민학교가 3,621,267명, 중·고등학교가 816,672명, 대학이 92,930명으로 급증하고 있다. 문맹률(文盲率)도 거의 90%에 육박하던 것이 한글전용정책에 공민교육 등의 실시로 1960년대에는 한글을 쓰고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의 수는 17.8%로 감소되었고, 이것은 국민들에게 신문이나 잡지에 접할 기회를 증대시켜 주어 이들의 보급망의 상대적인 확대를 가져왔다.

교육기회의 증대는 소극적이고 복종적인 한국인의 의식을 적극적이며 참여적인 것으로 바꾸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초등교육이나 무학자(無學者)보다 정치적 관심이 높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사항에 관한 비판의식도 매우 높아지게 된다. 1960년대 전후의 부정선거 규탄도 주로 대학생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이것을 반증(反證)해 주고 있다.

둘째로는 그것이 수평적인 이동의 면이 짙기는 하나 사회적 유동성의 증가를 지적할 수 있다. 해방과 더불어 빚어진 남북분단은 최근세 사상 최대의 민족적 이동을 불가피하게 했고, 이어 발생한 6·25의 민족적 이동을 불가피하게 했고, 이어 발생한 6·25의 민족적 비극은 사회체제 전반의 격동을 강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하나의 식물처럼 토지에 뿌리를 박고 살던 한민족이 어떤 이유에서든지 대이동을 체험했던 것은 그들의 정적(靜的)이며 소극적이며 폐쇄적인 의식구조에 변동의 씨앗을 뿌렸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었다.

셋째로는 도시지역의 확대를 지적할 수 있다. 1946년 이때 군(郡)의 인구비는 17.2% 대 82.8%였는데, 1960년에는 28% 대 72%로 도시인구가 급증하였다. 도시의 사회학적 기능이 문화의 파급적 기능에 있다고 하면 도시지역의 확대 역시 의식상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여러 사회경제적인 변수들을 민주국가의 건설이라는 정치적 환경의 변화로 국민들의 정치적 의식의 변화를 민주의식지향적인 것으로 변모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 초기에는 선거가 무엇인지 입후보자가 무엇인지 모르던 일반대중들이 투표장에 가서 투표해야 된다는 말을 듣고 투표라는 행사를 하는 것이 상례였으나, 이를 반복해 감에 따라 선거에는 입후보자가 있고 입후보자는 정당의 후원을 받는다는 등의 사실을 인지하게 되어, 어렴풋하게나마 투표가 요구하는 민주의식을 체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부녀자들이 초기에는 가장(家長)의 말에 따라 투표하는 것이 상례였으나, 1950년대 후반에 가면 남편은 남편의 생각대로 투표하고 나는 나의 생각대로 투표한다는 생각이 교육을 받은 젊은층에게는 당연한 얘기가 되었다. 사회적 변수들이 주는 영향이 민주적 제도라는 환경 속에서 민주적인 의식을 싹트게 했다고 볼 수 있다.

1948년부터 1960년까지 정치의식에 영향을 준 이상의 변수 중에서도 특징적인 것은 도시의 영향이었다. 대부분의 농촌지역민의 정치의식이 소극적이고 방관적이며 복종적인데 반하여 도시지역은 반항적이며 적극적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이 기간 동안의 한국인의 정치의식은 첫째로는 매우 가변적이며 복합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즉 복종적인 동시에 반항적이며 폐쇄적인 동시에 개방적인 요인이 병존해 있었다.

둘째로는 첫째의 특징과 관련이 있는 것이지만 정치적인 영역을 가정적인 영역의 자연스런 확대로 생각하는 면이 짙어서 정치의 제도적 인식이 결여되어 있었다.

셋째로는 교육정도, 거주지역, 특히 도시와 농촌지역에 따른 정치의식의 현격한 차이를 지적할 수 있다. 즉 교육정도가 높고 도시지역에 거주하는 사람일수록 민주적 지향이 강한데 비하여, 교육정도가 낮고 농촌에 거주하는 사람일수록 복종적인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金 圭 澤>

반공의식[편집]

反共意識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감정으로 해방 후 한국인이 경험한 객관적 여건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일제치하 민족독립운동 과정에서부터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간에 갈등과 알력이 존재하였으나 일제로부터의 해방이라는 한국민족의 지상과제를 놓고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의식이 전반적으로 존재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해방 후 건국문제를 둘러싼 좌·우익의 대립과 사회주의 세력의 격렬한 활동은 국민으로부터 반감을 샀다고 볼 수 있고, 공산주의의 불법화로부터 시작되었던 공산주의자의 반국가적 파괴활동은 국민에게 적대감을 심어주고 공산주의를 위험사상시 하도록 했다. 이후 6·25의 쓰라린 경험을 통하여 한국인의 반공의식은 더욱 심화되었다.

또한 끊임없는 공산주의의 위협과 남·북한의 냉전적 대결이라는 객관적 상황에서 국민의 정치의식은 일체의 공산주의적 형태를 배격하도록 했고, 특히 한국정치에 있어 반공산주의적 교육과 정책은 국민의 반공의식을 철저하게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 결과 자유민주주의를 제외한 어떠한 정치이데올로기도 한국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고, 흔히 후진국에서 부르짖고 있는 각종 사회주의는 한국민에게는 위험사상시 되고, 나아가서는 각 정당의 정책적 차이를 불분명한 것으로 하였다고 볼 수 있겠다.

이러한 한국 국민들의 철저한 반공의식과 정부의 강력한 반공정책은 자유세계의 반공보루로서 그 역할을 수행했고, 국내정치에 있어 사상적 혼란을 방지하는 데 효과적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으나, 한국의 정치발전에 있어서 부정적인 측면도 드러냈다고 볼 수 있겠다. 그것은 첫째, 그동안의 정치과정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정치적 반대자를 억압하는 수단으로 작용하기 쉬웠고, 둘째, 국민들의 자주민권운동이 공산주의 활동과 동일시될 위험과 공산주의의 침투 가능성 때문에 자주민권운동이 위축되는 일이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셋째, 건전한 이념정당의 부재현상을 드러내는 한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자유민주주의[편집]

韓國-自由民主主義

서구의 정치이념으로서 한국의 건국이념이 되었다. 해방 후 공산주의와의 투쟁에서 승리한 민족진영은 서구식 민주주의를 도입하여 건국이념으로 삼고 정치체제를 이에 맞추어 수립하였으며 그 집약적인 표현이 헌법에 나타나고 있다. 지금까지 수차례의 각종 선거 및 투표가 시행되어 국민의 정치의식을 나타내기는 했지만, 자유민주주의가 국민들의 정치의식에 올바로 용해되어 완전한 한국 국민의 정치의식을 형성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원래 자본주의의 정상적인 발전과정을 통하여 오늘날의 민주주의 전통을 갖게 된 서구와는 달리, 대공산주의 투쟁과정에서 긴급히 도입된 자유민주주의는 한국이 갖는 특수한 역사적·사회적 여건으로 인하여 쉽게 토착화되지 못하고 여러 부면에 걸쳐 그 적합성이 문제시 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는 한국의 정치이념으로서는 유일하게 그 존립이 허용되고 있지만 국민들의 민주주의 정치의식이 성장하지 못한 채 전통적 의식이 잔존하고 있어 이념과 현실과의 괴리현상을 낳음으로써 각종의 부정적 측면을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인의 정치적 무관심[편집]

韓國人-政治的無關心

정치권력에 대해 지지도 반항도 않고 정치현상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을 정치적 무관심이라 한다. 일반적으로 선진국에서의 정치적 무관심은 현대의 정치과정의 거대화와 복잡화, 비인격적 기구 속에서의 각종 분업에 따르는 심신의 피로와 정신의 수동화, 매스컴의 마취적 기능과 각종 소비문화의 비정치화적 역할과 번영된 사회생활 등에서 관심이 정치로부터 사생활로 옮겨지고 사생활에 집착하게 되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의 정치적 무관심은 이와는 달리 전통적인 요소가 크다고 볼 수 있겠다. 한국인은 오랜 역사를 통해 절대군주에 대한 묵인·복종과 관료기구의 하향적 지배체제로 정치에 관심을 가질 수 없었던 데다가 철저한 신분계급사회로 일반국민이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다. 일제치하에서도 역시 한국인은 정치에 참여하기에 앞서 억압과 착취만을 받아 왔다. 이러한 한국인의 전통적인 의식상태에 해방 이후의 정치적 혼란과 1950년의 한국전쟁 등은 한국인의 정치에 대한 무력감을 더하는 상황을 만들었고, 4·19 혁명이나 5·16 등 거듭되는 변혁으로 객관적 조건이 정치·경제의 혼란을 가져와서 국민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에 동요를 일으켰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경제적 불균형과 불안정은 정치에 무력감을 갖게 하고 나아가서는 무관심으로 발전했다고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