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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정치/한국의 정치/한국인의 정치의식과 정치행동/한국인의 정치의식〔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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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정치의식 (1911∼1948)〔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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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人-政治意識〔序說〕 1911년부터 1948년까지의 기간은 성격을 달리하는 2개 시기로 대별된다. 즉 1911년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의 일제시대(혹은 민족독립운동 시기, 반제해방투쟁 시기), 8·15 해방 이후 정부수립까지의 미군정기(혹은 좌·우익 투쟁시기, 정부수립 준비시기)의 두 시기라 하겠다. 정치의식이란 한편으로는 객관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정치과정에 수반되는 내면적 구성요소이고 따라서 권력주체에 의한 조작대상이다.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권력주체 그 자체의 내심(內心)의 세계 및 행동을 정리·지지하는 힘이며, 그리하여 그것은 정치양식(政治樣式)의 창출 혹은 재생산의 추진력이기도 한 것이다. 일제치하의 한국인의 정치의식과 해방 및 정부수립 준비시기의 한국인의 정치의식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기 마련이므로 이를 ① 일제시대의 한국인의 정치의식과 ② 해방과 정부수립 준비시기의 한국인의 정치의식으로 나누어 고찰하고자 한다.

일제시대의 한국인의 정치의식(1911∼194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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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帝時代-韓國人-政治意識 정치의식이란 정치적·사회적인 여건 및 그 변동에 따라 영향 및 제약을 받고 변천하기 때문에 일제시대의 한국인의 정치의식도, ① 배일민족주의(排日民族主義) 내지 민족적 독립주의(1911∼1920년), ② 사회주의 내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제휴 및 합작(1921∼1930년), ③ 민족주의 및 사회주의(공산주의)의 침체와 쇠퇴(1931∼1945년)의 3개항목으로 나누어 살펴보려 한다. ⑴ 배일민족주의 내지 민족적 독립주의(1911∼1920년) ― 1910년의 한·일합방으로 조선왕조(朝鮮王朝)가 종말을 고하자 한국민족은 일제의 통치 아래에 놓이게 되었고, 이로부터 한국민족의 배일민족주의·항일구국운동이 줄기차게 계속되었다. 1905년의 을사조약 이전에도 항일운동은 있었고, 그것은 개화당(開化黨)에 의한 개화주의운동 계열과 유림(儒林)으로 대표되는 위정척사운동의 두 갈래로 이루어져 왔다. 그런데 이 개화주의운동은 일본을 배경으로 하여 갑신정변·갑오개혁을 일으켰으며, 부정적 측면에서 보면 이것이 일제침략에 이용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청·일 전쟁(淸日戰爭)을 계기로 개화주의는 배일개화주의 및 항일운동으로 전환·발전하였다. 또 위정척사론은 일본·양이(洋夷)의 배척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일본의 침략에 대한 위기의식·생존의식을 바탕으로 한 주체적 민족의식이었다. 이 척사운동은 의병의 지도적 사상이 되었으며, 척사사상은 동학운동(東學運動)의 사상적 배경이기도 하다. 1910년의 한일합방(사실은 1905년 이후) 이후 3·1 운동에 이르는 시기는 항일 계몽사조의 일대 팽배기였다. 이 시기는 아직 유교적이고 봉건적인 근왕사상(勤王思想)이 사회의 잠재적 지도이념이었으나, 토지조사사업(土地調査事業) 등으로 봉건적 사회질서가 무너지자 사회의 지배세력 및 사상계의 주도세력은 양반유생에서 서구적 교양을 지닌 신흥세력층, 신교육을 받은 지식계층의 손으로 넘어갔다. 1910년대 항일운동의 주류는 배일민족주의 및 민족적 독립주의였다고 하겠다. 1919년의 3·1 운동과 그 사상적 문헌인 독립선언문(2·8 독립선언도 포함해서)에 나타난 민족자결주의와 계몽적 자유주의에서 이 시기의 사상적 집약을 볼 수 있는 것이다. ⑵ 사회주의 내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제휴 및 합작(1921 ∼1930년) ― 3·1 독립운동이 실패하고 파리나 워싱턴회의에서 국제정의(國際正義)가 실현되지 못하자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는 이 땅의 학생을 비롯한 지식인층에서 그 매력과 호소력을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민족자결·민족주의(民族主義)·자유주의 대신에 사회주의·공산주의·계급투쟁·무산자(無産者)·반제(反帝) 등의 술어가 등장하였고, 항일독립운동의 주도권도 민족주의 세력으로부터 사회주의세력 쪽으로 넘어갔다고 하겠다. 민족자결주의와 구미(歐美) 제국에 대한 약소민족의 희망과 기대가 컸던 데 반비례하여 실망감과 불신감이 컸고, 반대로 1917년 소련에서의 10월혁명의 영향과 사회주의의 호소력 및 매력은 컸다. 소련의 볼셰비키혁명의 충격과 여파는 자본주의 국가에는 사회주의 운동을 촉발시켰고, 약소민족이나 피압박민족에게는 반제국주의운동·민족해방투쟁에 활력을 불어넣은 감이 있었다. 그리고 소련은 코민테른을 통해 세계 각국에 사회주의혁명을 수출하거나 민족해방운동을 직접·간접으로 지원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1921년에는 이미 일본 유학생에 의해 사회주의사상 단체인 흑도회(黑濤會)가 조직되었고, 국내에서도 사회주의 운동단체(즉 無産者同盟·北風會)와 사회주의사상 연구단체(화요회) 등이 1922년부터 생겨났다. 또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향상을 목적으로 하는 여성단체(조선여성동우회·여성해방동맹 등)도 조직되었으며, 마침내 조선공산당이 결성되기에 이르렀다(1924년). 이러한 사회·노동운동과 사상 경향에 따라 많은 소작쟁의(小作爭議)와 노동쟁의가 일어났고 학생들의 이데올로기적인 동맹휴학이 빈발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움직임은 갑신정변 → 독립협회(獨立協會) → 3·1운동에 이르는 서구 자유주의 영향하의 민족주의운동의 퇴조를 의미하는 것이고, 신간회(新幹會) 운동을 계기로 민족주의사상과 공산주의사상 운동의 결정적 분열·결별을 가져오게 되었다. 1927년에 결성됐다가 1931년에 해산된 신간회는 사회주의운동과 민족주의운동의 통일전선이었고, 종전의 낡은 민족주의 세력의 반일투쟁 논리는 경제적 측면에서 비판되었으며, 또 '무단정치(武斷政治)에서 문화정치'로의 일제의 정책전환에 따른 민족주의 세력의 자치운동 방향에의 타락 등이 재검토된 데에 사상사적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 시기까지의 민족주의는 물론 사회주의조차도 인텔리층에서 주로 문제되었고 일반민중 속으로 파고들어 그들을 지도·조직하거나 생활 속에 뿌리박기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⑶ 민족주의 및 사회주의의 침체와 쇠퇴(1931∼1945년) ―1931년은 만주사변(滿洲事變)이 발발한 해이며 만주사변은 한국의 전략적 지위를 높이기에 이르렀다. 이로부터 일제에 의한 문화정치는 끝나고 노골적이고도 야만적인 탄압이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동아·조선일보 등의 민족 대변지는 폐간되고 사상운동이나 쟁의(爭議)는 억압되었으며, 합법적·표면적인 항일독립운동은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또한 일제는 불령선인(不逞鮮人)과 적화(赤化) 반대를 위한 사상선도 및 사상동원 태세를 강화해 갔다. 신간회가 해산됐고 독립운동 지도자들에 대한 박해와 회유가 동시에 수행되었다. 많은 전향자와 훼절자가 생겨났으며 대일 협력자와 적극적인 친일군상(親日群像)이 속출했다. 창씨개명(創氏改名), 조선어 금지, 국어상용(國語常用), 내선일체(內鮮一體),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가 추진되어 가는 동안 대부분의 한국인은 일제에 의한 식민지정책에 순응했다 하겠다. 해외에 있어서의 민족독립운동 및 항일무장투쟁 등과 국내에 있어서의 일제 말기의 건국동맹(建國同盟)의 지하조직과 재감자(在監者) 등을 제외하고는 민족주의운동도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도 극도로 침체·쇠퇴하였으며 빈사(瀕死)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맥마흔 폴은 '조선민족의 애국심의 저수지는 일제탄압하에서도 마르지 않았다'고 말했으나, 사실은 그 애국심의 저수지의 물은 즐어들어 바닥이 점차 드러날 지경에 있었다.

해방과 정부수립 준비시기의 한국인의 정치의식(1945∼194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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⑴ 자유민주주의와 민족주의 ― 1890년대에 지식분자(知識分子) 사이에 싹튼 자유주의·민족주의·자유민주주의는 그 후 일제식민지 지배하에서 항일독립운동·민족해방투쟁의 사상적 지남(指南) 역할을 해오다가 일제 말기엔 거의 고사(枯死) 상태에 빠졌으며, 8·15를 계기로 다시 소생되었다고 하겠다. 이렇게 하여 소생되고 이식(移植)된 자유민주주의는 명백하고 자신있는 개념을 정립하지 못하고 스스로 보수적이라는 죄의식(罪意識)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진보적 민주주의, 진정한 민주주의를 자칭한 좌익측의 선전공세 앞에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자유민주주의는 한국 특유의 조건하에서 우여골절을 겪은 끝에 정부수립으로 대한민국정부라는 조직체 속에 일차적인 이식을 끝냈다. 38선으로 인한 국토의 분단과 또 신탁통치 등으로 정치가들도 민주주의보다는 민족주의를 더 절실한 것으로 느꼈으며, 우익세력은 스스로를 민족진영이라 불렀고, 우익을 반민주, 파쇼로 낙인찍고 곧잘 민주주의의 슬로건을 내세운 좌익이 그 연합체의 명칭으로 소위 민주주의민족전선을 채택한 것 등이 이와 같은 사실의 반증이라 하겠다. ⑵ 사회주의(공산주의) ― 일반적으로 식민지 해방투쟁에 있어서는 민족주의자보다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의 투쟁이 더 철저하고 끈덕진 일면이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으니, 일제 말기에 이르러서 국내 민족주의자들의 독립운동은 사실상 종언을 고한 감이 있었으나, 공산주의자의 경우에는 가혹한 탄압하에서도 그들 핵심분자는 지하(地下)에서나마 존속했고, 더욱이 이론 체계를 정비한 다음에 실천에 옮기는 잇점 등으로 말미암아 갑작스런 해방을 맞았지만 자유민주주의 세력만큼 무질서하지는 않았다. 비록 장안파(長安派)와 재건파(再建派)의 두 갈래에 의해서나마 공산당은 합법정당의 간판을 내걸었으며, 인민공화국이 선포되기도 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은 그러면서도 자극적인 공산주의란 말을 되도록 피하면서 대중을 선동·계몽하려 하였고, 친일파·민족반역자의 숙청과 미군 철수 등을 주장하여 대중의 동조와 지지획득에 분망했다. 이 당시 공산당은 합법적 투쟁과 비합법적 투쟁의 노골화·과격화로 인해 마침내 불법화되었고, 철저한 탄압으로 조직은 거의 완전하게 파괴당했다. 그리고 그 당시만 해도 공산주의와 민주사회주의 간의 구별이 확연하지 않았기에 민족주의 좌파 내지 민주사회주의 세력까지도 많은 구속과 제약을 받았던 것이 사실이다. 8·15 이후 정부수립까지의 기간은 자유민주주의와 민족주의, 그리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미분화·미정립의 상태에 있었다고 하겠다. ⑶ 독립과 통일에의 의지와 열망 ― 이 당시의 한국민족주의 정치의식의 저변에 일관해서 흐르고 있었던 것은 통일에의 의지요 열망이었다. 그것은 분단 후 남·북간의 대화가 이루어지다 중단된 1978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변함이 없다. 비록 일제의 패망으로 이 나라가 해방은 되었으나 통일국가를 이룩하지 못한 채 북한은 공산주의 세력하에 놓이게 되었고, 남한은 미군정하에 들어갔다가 통일정부가 아닌 가능한 지역에서의 선거를 통한 단정(單政)을 세우려는 정책과 노선이 추구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에 반대하여 민족분열을 막고 통일정부를 세워야겠다는 주장과 운동이 일어났는데 그것이 곧 남북협상(南北協商)으로 불리는 것이다. 이 주장과 운동은 현실정치의 제약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실패하고 말았으나, 이는 자주적·평화적 통일을 염원하는 절대다수의 한국민족의 의지와 열망을 대변한 애국·애족적 행동임에 틀림없다. 일제통치하에서는 한국의 해방과 독립이 전민족의 희망이요 이상이었던 것처럼 해방이 되었으나 분단의 비극 속에 사는 한국 민족의 열망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이었다고 하겠다. <李 相 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