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정치/한국의 정치/한국인의 정치의식과 정치행동/한국인의 정치의식〔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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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정치의식(1860∼1910년)〔서설〕[편집]

韓國人-政治意識〔序說〕

'정치의식은 정치적 상황의 산물이다'라는 말과 같이 정치의식은 원래 그 정치의식을 지배하는 사회적 상황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1860년대의 한국인에게 주어진 정치적 상황의 특색은 한마디로 한민족이 심각하게 겪어야 했던 주체성(主體性)의 위기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1860년대 이후의 한국인의 정치의식은 바로 그같이 밖으로부터 가해지는 주체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저항적 민족주체 의식이었다는 성격에서 그 주류(主流)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1860년대 한민족의 주체성의 위기를 불러일으킨 주된 요인은 바로 경제적·군사적으로 팽창해 오는 서구의 세력이었고, 이같이 서세동점(西勢東漸)의 현상을 타고 밀려오는 서구의 충격이 바로 병인양요(丙寅洋擾)와 신미양요(辛未洋擾) 등의 물리적 공격으로 나타났다.

이때 서구의 충격에는 역사적으로 다음과 같은 성격이 담겨져 있었다. 첫째로 그것은 당시까지 한민족이 한번도 체험해 본 적이 없는 이질문명권(異質文明圈)과의 새로운 접촉과 대결이라는 점이며, 둘째로 그렇게 밀려온 서구의 세력은 구체적으로 자본주의단계의 물리적 팽창이었다는 점이다. 즉 당시의 서구의 충격에는 이같이 한민족에 대하여 한 번도 접촉해 본 적이 없는 이질(異質)의 세계라는 공간적인 거리와 함께, 아직 체험해 본 바가 없는 새로운 역사단계(즉 자본주의적 근대)라는 시간적인 간격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서구의 충격을 맞아서 반응하며 성숙되는 1860년대의 한민족의 정치의식에는 이상과 같이 서구의 충격 속에 담긴 2중적 도전을 극복하면서 자기사회를 보존시켜야 한다는 민족사적 과제가 부여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서구의 도전을 저항으로서의 극복하려는 의식의 큰 한줄기가 바로 '서양을 막아야 한다'는 어양론(禦洋論)이었다. 이러한 어양론은 이미 1860년대 초 당시 조선조 주변사정의 동요(1860년 南京條約에 의한 청의 영·불에 대한 굴복, 1860년 러시아세력의 남하에 의한 조선조와 러시아와의 두만강 접경 등)로 심각한 위기의식으로 심화되기 시작하였으며, 그것은 당시 서구의 세력이 직접 한반도에 물리적으로 달려드는 병인양요 등을 계기로 그 구체적인 사상체계를 밖으로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어양·척사사상[편집]

禦洋·斥邪思想

1860년대의 어양·척사사상(禦洋斥邪思想)은 주로 성리학자들인 이항로(李恒老)·기정진(奇正鎭)·김평묵(金平默)들에 의하여 대표된다. 어양사상은 논리적으로 '옳은 것은 지키고 그른 것은 물리친다'는 전통적인 유교의 위정척사(衛正斥邪)사상의 테두리에 속하고 있었다. 따라서 어양론은 당시의 서양이 물리쳐야 할 부정적인 척사(斥邪)의 대상으로 의식됨으로써 나타나기 시작한 척사사상의 구체적인 한 형식이었다.

어양론에서 서양을 배척의 대상으로 거부하는 사상의 근저에는 한결같이 당시의 서양이 조선조라는 기층사회(基層社會)에 미칠 포괄적인 폐해(弊害)가 의식되고 있었다. 그것이 곧 '종사(宗社)의 위급', '국가존망(國家存亡)의 위기' 등으로 표현되었으며, 그러한 위기의식 뒤에는 서양으로부터 받을 경제적 침략이 특히 강하게 의식되고 있었다. 여기서 당시 어양론자들은 서양상품을 배격하기 위한 양물배격론(洋物排擊論)이나 양물금단론(洋物禁斷論)을 주장했고 다음과 같은 사항을 보인다.

첫째, 물리쳐야 할 대상은 조선조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서양이요 보존해야 할 가치는 바로 조선조의 자기질서였다는 점에서, 종전까지 주로 관념적으로 중화문화권(中華文化圈)적인 화이사상(華夷思想)에서 주장되어 오던 위정척사(衛正斥邪)의 틀이 한민족 그 자체를 의식하는 자주사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둘째, 이러한 자주사상체계는 일단 부정적인 서양이 우세한 물리적 세력으로 밀려올 때, 그것에 저항하기 위한 자신의 저항력을 주로 한민족이 걸어온 역사의식에서 찾으려 함으로써 한민족의 역사의식을 활발히 재창조하고 있었다.

한민족에 대한 주체적 인식과 자기 역사의식에 대한 자율적 재창조라는 바로 이 점에서 1860년대의 어양론(禦洋論)은 그것이 가지는 전통·보수적 성격에 불구하고 후일 19세기 말의 의병(義兵)과 같은 자주민족운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사상적 추진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어양사상은 밀려오는 서양을 대신하여 일본의 경제·군사력이 한반도에 대해 불평등을 강요하는 1870년대(書契問題, 丙者修好條約)에 그것을 다시 물리치기 위한 절화·척사(絶和斥邪)사상으로 발전하였다. 1876년 수호조약을 반대하여 올린 면암 최익현(崔益鉉)의 척화소(斥和疏)로 대표되는 당시 척사사상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의 위협에 굴복하는 조약은 우리의 자주를 상실하는 불평등조약(不平等條約)이며, 둘째, 우리의 제한된 필수품과 일본의 무한한 사치품이 교역될 경우 우리는 불과 몇 년 못가서 지탱할 수 없게 되며, 셋째, 오늘의 일본은 이미 서양화되어 있기 때문에 저들이 들어올 때 그것과 함께 오게 될 서양의 이질세력이 우리의 문화적·사회적 자기질서를 파괴할 것이니, 우리는 그것을 결사 반대해야 한다는 저항민족의식으로 집약되고 있다.

여기서 척사사상은 통상과 교역에서 올 경제적인 불평등만이 아니고 불평등조약에서 올 정치적인 자주의 문제까지도 심각히 의식하고 있었으며, 거기에서 주장된 소위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은 바로 아시아에서 서구의 자본주의의 팽창에 대항하려는 당시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지적한 저항적 척사론의 또하나의 논리적 심화이기도 하였다.

채서·개화사상[편집]

採西·開化思想

병자수호조약에 의하여 일본과의 개항(開港)이 제도화되고 또 계속하여 서구 열강들과의 통상이 조약으로 이루어지던 1870년대 말 1880년대 초에 이르러서는 한민족의 정치의식 가운데에서 서양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사상의 한 조류가 움트고 있었다. 이러한 사상은 곧 서양을 배척의 대상으로서가 아니고 오히려 그것을 받아들여 자기를 개혁하고 자강(自强)시키려는 채서사상(採西思想)으로 나타났다.

채서사상은 한민족이 자기를 개혁시키려는 조선조 개화사상(開化思想)의 한 줄기로서, 그 사상의 틀은 '도(道)나 원리는 자기 것(固有價値)을 지키되 기(器)나 기술은 서양 것을 받아들인다'는 일종의 '동도서기(東道西器)'와 같은 온건개화론에 따르고 있었다. 즉 자기의 도를 지킨다는 가치정향(價値定向), (주로 천주교 등 서양사상 배격)에서는 위정척사와 같은 방향을 잡고 있었으나, 서양의 기술을 승인하고 그것에 의한 조선조의 사회변화를 추진하려 하였다는 동기정향(動機定向)에서는 일종의 유신론(維新論) 내지 개화사상이었음에 틀림없었다.

이러한 당시의 채서사상에는 농업기술·제조기술 등 서양의 기술을 배워들여야 한다는 기술수용론(郭基洛 등)에서부터 의회제도·금융제도 같은 적극적 제도수용론(高穎聞 등)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다양한 내용들이 담겨져 있었으며, 그것들 모두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설치와 같은 제도개혁이나 영선사(領選使)·군기학조(軍器學造)와 같은 기술습득 정책과 같은 1880년대 개항체제 속에서 조정의 일련의 개혁정책 등과 함께 진행되고 있었다.

이상과 같이 사상적으로 익어가던 온건개화론과 병행하여 갑신정변·갑오개혁과 같은 적극적 정치개혁을 실천하고자 했던 적극 개화사상이 성숙되어 가고 있었다. 갑신정변을 시도하였던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나 갑오개혁을 수행하였던 김홍집(金弘集)·유길준(兪吉濬) 등에 의하여 대표되던 적극 개화사상 등은 침략에 관련된 외세의 간섭·영향 및 당시 척양척왜(斥洋斥倭) 저항 민족의식에 차 있던 민중의 호응을 얻을 수 없어 그 본래의 역사적 사명을 다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갑오개혁 이후 일본의 내정간섭 등 개화에 따른 주체성의 위기가 심각해지자, 채서(採西)나 개혁에서만 주로 진보를 찾아오던 개화사상에 점차 자주(自主)라는 민족적 가치가 의식되기 시작하였으며(申箕善 등 자주개화론 및 獨立協會 등의 자주개화운동), 여기서 주로 밖으로부터 오는 민족적 모순에 저항하여 성숙하여 오던 척사사상의 자주의식과 안으로부터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하여 자기개혁을 주장해 오던 개화사상의 진보의식이 서로 만나게 되는 근대민족의식의 성장계기가 마련되고 있었다.

자주·의병운동사상[편집]

自主·義兵運動思想

갑오개혁의 실패, 일본의 내정간섭 등으로 개항체제(開港體制)의 모순이 점차 한민족의 자존에 대한 위기로 심화되어 가던 19세기 말기의 한민족의 정치의식은 민족의 자존이란 저항민족운동 사상으로 더욱 적극화 되어 갔다. 여기서 1860년대 이래 어양론(禦洋論) 등을 비롯하여 민족사상에서 성장하여 오던 척사(斥邪) 저항적 민족의식은 의병(義兵)과 같은 적극적인 저항민족운동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의병운동사상은 첫째, 1860년대 이후의 한민족의 민족의식에서 더욱 자주의 기반을 굳혔다는(여기에는 개화사상 쪽에서의 자주의식 강화도 포함) 근대 한국사상의 주체성의 의의와 둘째, 그러한 자주의식이 대중동원을 통하여 적극적 근대 민족운동을 일으킬 수 있었다는 한국사상의 역사 추진력의 의의를 함께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의병운동은 전·후 양기로 구분되는 바, 을미사변(乙未事變) 등을 계기로 1895년대에 일어나는 전기의 의병(柳麟錫·盧應奎·金福漢 등)에서는 주로 외세의 배척이나 외세와 관련된 관인(官人)들에 대한 공격 등과 같은 국내적 정치정통성을 회복하기 위한 민중운동이었던 데 반하여, 조선조의 대외적 자주권이 상실되는 제2차 한일협약(즉 乙巳條約)을 계기로 하여 일어나는 1906년대 후기의 의병운동은 이미 대외적으로 항거하는 민족대표 집단으로서 한민족의 국제적 민족주체성(즉 自主權)을 회복하기 위하여 일어난 근대적 민족운동이었다(崔益鉉·閔宗植·申乭石 등).

즉 1895년대 전기의 의병은 외세(국외적 모순)와 관인(국내적 모순)이 함께 저항하였다는 점에서 그 직전의 동학운동(東學運動)과 비슷한 성격을 가지나, 의병은 주로 외세에 저항하는 근왕적(勤王的) 보수임무를 담당하였던데 반하여, 동학운동은 주로 국내의 봉건모순을 극복하려는 반왕조적(反王朝的) 개혁임무를 담당하고 있었다는 차이를 갖는다.

이와 같은 한말의 정치의식을 대중동원이라는 민중운동의 형식에서 바라보면 동학운동은 민주적 성격의 종교동원(religions mobilization)이며, 독립협회운동은 민주적 성격의 지성동원(intellectual mobilization)이며, 전기 의병운동은 민족적 성격의 종교동원으로 정리될 수 있다. 여기에 대하여 일단 한민족의 국가 상태가 사라진 상황하에서의 민족운동인 후기의 의병운동은 그것 자체가 하나의 한민족의 역사실천 주체로서 근대적, 민족적 동원(national mobilization)의 1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한 의병운동의 사상 속에는 첫째, 이제까지 척사사상에서 배격되어 오던 왜·양(倭洋) 등이 공존의 대상으로 승인됨으로써 근대적 국제질서 속에서의 한민족의 잔존을 실현시키려는 근대민족주의적 성격과 둘째, 이제까지 문화적인 화이(華夷)사상 속에 묻혀 그 존재가 모호하던 한민족 그 자체를 하나의 독립된 자기주체로서 확인함으로써 성숙하던 민족의식·역사의식 등이 긍정적으로 재창조되고 있었다.

이러한 20세기 초 의병운동사상의 근대성·자주성 등을 통하여 1860년대 이후 그 저항적 문맥(文脈)에서 반세기 이상 성장돼 온 한민족의 민족의식은 1919년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창조적이었던 근대민족운동(3·1운동)으로 힘차게 전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崔 昌 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