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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물리학의 완성[편집]

古典物理學-完成

산업혁명을 경계로 하여 사회에는 새로운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산업혁명의 열매가 기술을 통하여 과학 속에 결정되던 시기, 그 때가 바로 과학문명의 건설기인 19세기이다. 낡은 세계관의 타도, 새로운 기술의 개발, 여기서 과학의 온갖 새로운 분야가 열리기 시작한다. 산업과 과학이 산업으로부터 과학의 방향으로 점차 긴밀화되었기 때문에 이 시대의 과학은 산업의 발달을 빼고서는 논할 수 없다.

화학이 이른바 화학공업을 통하여 힘차게 성장한 것처럼 물리학 또한 증기 기관에서 열역학이 탄생된 사실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공업기술 속에서 성장해 갔다.

차례로 나타나는 여러 가지 현상의 발견과 정리의 시기에 뒤이어 이 개념들의 확정과 체계화의 시기가 왔다. 초기의 역학전능 시대로부터 열·전기·자기·빛 등 여러 분야의 체계화를 통하여 도출되는 역학과는 상이한 사고방식과 거기서 생기는 역학적 자연관에 대한 반성과 비판, 이것이 19세기 물리학의 움직임을 형성한다. 즉 자연의 통일성과 사상(事象)의 다양성과의 관련, 전체적인 구조와 각 부분의 위치 정립문제, 그리고 그 추이(推移)이다.

19세기의 70년대까지 대체로 완성을 본 고전물리학 분야는 실은 그 속에 서로의 모순을 간직함으로써 고전물리학의 붕괴를 안고 있었다. 물리학은 이것으로 끝남과 동시에 새로 시작된 것이다.

역학적 자연관과 새로운 분야[편집]

力學的自然觀-分野

19세기 전반은 18세기 물리학이 성과의 계승으로 물리적 세계는 곧 역학의 세계였다. 이상화된 태양계, 물체의 운동을 형식화하고 추상화한 해석역학, 정전기학(靜電氣學)과 열학(熱學)에 나타난 보존칙(保存則), 그리고 정전하(靜電荷) 사이에 작용하는 쿨롱의 역제곱(逆自乘)의 힘, 이것들은 모두 역학의 다시 없는 뒷받침으로서 19세기의 자연관을 지배하였다. 역학적 자연관의 착상 기반은 물질과 그것을 담는 틀로서의 공간의 명확한 분리에 있으나, 여기서 물질이라 함은 기계론적 입자로서 공간은 허무한 절대 공간으로 규정된다. 혹은 무한하고 연속적인 공간과 유한하고 불연속적인 물질이라 함과 같이 공간과 물질, 속과 불연속이 맞선 데다가 일의적(一義的)으로 쌓아올려졌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런 의미로는 고전광학이 획득한 파동설(波動說)의 승리는 파(波)의 매체를 공간 안에 개입시킨 점에서 역학적 세계관에 하나의 동요를 일으키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매체 에테르를 역학적인 물질이라고 해석하면, 비교적 쉽게 역학의 범주 안에 들어갈 수가 있다. 한편 열학은 보다 더 혁명적이었다. 역학적 자연관의 자식인 열소(熱素)를 몰아내고, 보다 스마트한 에너지로 옮겨갔을 때, 물질의 불연속성 대신 연속적인 개념이 열(熱)현상의 물리학적 기초에 놓여지게 되었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 및 카르노의 법칙을 바탕으로 자라난 열의 열학적 이론(熱力學)은 이리하여 체계화 도중에서 물질의 입자성·불연속성에 기초를 구하여 기체의 운동학적 이론으로서 길을 튼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이론이 나란히 발전하는 가운데 불가역성(不可逆性)의 문제가 차차 초점이 되고, 고전역학의 결정론적 인과율(決定論的因果律)과는 다른 사고방식을 요구하게 된다.

전자기학은 더욱 이질적인 것이다. 전기역학으로서 뉴턴의 체계를 본받아 출발한 전자기학은 패러데이로부터 맥스웰에 이르는 과정에서 근접작용으로부터 장(場)의 이론으로 발전, 마침내 빛을 전자파로서 포함시켜, 연속적인 물리학을 건설하였다. 입자와 장의 대립은 여기서 더욱 날카로워진다.

역학의 반성과 비판[편집]

力學-反省-批判

이와 같은 물리학의 진보는 그 고도의 발전을 자랑하는 반면, 내적인 반성도 자아내게 하였다. 역학의 내부 자체로 향해진 개념 비판으로서 독일을 중심으로 진행된 키르히호프(1824-1887)를 비롯하여 마하, 헤르츠 등으로 전개되는 일련의 움직임은, 질량개념의 재음미, 절대운동, 절대시간, 절대공간의 개념에 대한 비판이 되어 역학을 더욱 심화시키는 데에 공헌하는 한편, 새로운 자연과학적 인식론마저 낳아, 사상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역학비판의 다른 형태는 에네르게티크(에너지-元論)의 탄생과 그 원자론에 대한 공격으로서 나타났다. 근대 원자론은 화학에서 나왔지만 19세기 최대의 과학이라 부르게 된 화학의 진보로 낡은 형태의 원자론은 실정에 맞지 않게 되었고, 역학적 자연관에 뒷받침된 원자론에 대한 불신이 고조되었다. 때마침 에너지 원리가 그 보편성, 통일성을 갖춰서 등장하고, 열역학이 유효성을 발휘하기 시작하자, 에너지 원리야말로 자연의 최종적 법칙이며, 자연과학은 에너지 변환의 학문이라고 하는 에네르게티크의 생각이 생겼다. 이것은 마침내 실증주의 철학과 결부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원자나 분자를 가설(假說)이라 하여 배격하고, 직접 관측할 수 있는 양(量), 특히 에너지만이 과학의 진정한 대상, 근본적 실재(實在)라고 하게 된다. 마하, 오스트발트의 지도 아래, 원자론의 옹호자 볼츠만과 격렬한 논쟁을 벌인 할레, 뤼벡 등의 에네르게테크와 원자론의 대결은 고전물리학의 종막을 장식하는 것이었다.

사상적 배경[편집]

思想的背景

이와 같은 배경에는 자연 과학의 영향이 크게 작용된 철학의 움직임이 있었다. 이른바 범속한 유물론 계통에서는 K. 포크트(1817-1895), 모레쇼트(1822-1893)의 생리학적 유물론이나 '힘과 물질'의 뷔히너(1824-1899)의 철학이 유행하였고, 이에 대한 비판으로는 헬름홀츠 등의 지지를 받고 있는 신칸트파나 버클리(1685-1953), 흄(1711-1776) 등의 사상을 흡수한 기술주의(技術主義, 자연과학은 事物의 원인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경험사실 사이의 관계를 기술하는 것이라고 하는), 또는 경험주의·실증주의가 등장하였다.

뒤 부아 레몽(1818-1896)은 자연과학의 한계를 강조하여 관념론적 불가지론(물질의 본성 등은 알 수 없다고 하는)을 전개하였다. 전화론자 헤켈(1834-1919)이 이와 같은 자연과학적 형이상학의 흐름에 반대하여 유물론적인 입장에서 조직한 일원론자 협회(一元論者協會)도, 자연과학적인 인식 방법을 철저하게 하려는 점에서 입장이 일치하고 있던 오스트발트가 주류를 이루게 되자 실증주의적인 형태로 나아간 것도 시대의 조류였다. 그 출발은 불가지론의 근원이 되는 가설의 배격과 그 대신으로서의 경험의 중시(重視)와 실증주의가 갖춘 일면의 진보성에 대한 탐닉(耽溺)이었다.

열역학과 전자기학(電磁氣學)이라고 하는 2개의 체계가 특징으로 되어 있는 19세기의 물리학은 이와 같은 사상적 배경 속에 일단의 완성과 결함을 보이면서, 일련의 새로운 사실발견을 계기로 급속히 새 물리학의 건설기로 진행한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편집]

energy 保存-法則

럼퍼드의 마찰열의 실험(1785-1798), 데이비의 열운동론(제1논문, 1799), 낡은 열소설(熱素說) 등을 지지하던 블래크의 죽음(1799) 등 세기가 교체되던 당시의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열학에서 새 국면의 전개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열소라는 것이 원소의 목록 안에 들어 있던 시대에는 열학(熱學)은 물리학보다는 오히려 화학의 한분야적 성격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열소는 19세기에 이르러서도 간단히 부정되지는 않았으며, 카르노의 탁월한 논문(1824) 속에도, 또 당세기 후반의 대영 백과사전(1856년판)에까지 수록되어 왔다.

그러나 화약·총포나 증기 기관의 발전은 열이용의 효율 향상과 열의 본성탐구를, 나아가서는 물리학의 한 분야로서의 열학의 체계화를 강력하게 촉구하였다. 그 때 효율이란 얼마만큼 효과적으로 역학적인 일을 시킬 수 있는가의 척도로서 논의되는 것이 보통이었고, 물리학으로서의 체계화라고 하면 그 모범은 전적으로 뉴턴의 역학이었다. 그런 관계로 19세기의 열학은 당연히 역학에 결부된 열학으로서 체계화되어 나간다. 고전 물리학의 한 분야로서의 열역학은 이리하여 19세기 중엽에 그 형태를 갖추었던 것이다.

이 세기의 후반에 있어서, 역학에 의한 열학의 지배는 더욱 발전되었다. 세기가 다음 교체기에 이를 무렵 이번에는 확률론(確率論)에 입각한 새로운(그러나 역시 고전적인) 열이론(古典 統計力學)이 구성되었으나, 실은 이 입각점(立脚點)은 고전물리학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지닌 것이었다. 이 설문의 정면에는 '양자론(量子論)'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열역학의 최초의 일보는 열에 관한 어떤 물리량을 역학적인 물리량의 어느 것과 결부시키는 것이어야 했다. 이것은 럼퍼드도 이미 의식하였으며, 그는 열이 물질이 아니고 운동형태의 하나임을 정확히 지적하였지만 양적으로 엄밀한 연구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열과 역학적인 일이, 또는 더 광의로 모든 에너지가 서로 전화(轉化)하여, 그들 사이에 정해진 양적 관계가 있다는 것 ― 이런 것이 에너지 보존의 법칙 내용이지만, 그 정식화는 1840년대에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서로 거의 독립적으로 이루어졌다. 주요한 기여를 한 이는 R.마이어, 줄, 헬름홀츠 등 3명이다. 원래 그들은 의사, 양조업자, 생리학자로서 정규적인 물리학자가 아니며, 이 법칙에 도달한 경위도 세 사람이 제각기 다른데, 그것은 헬름홀츠 자신이 말한 대로 "과학의 발전이 목표로 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경우에 몇 사람이 서로 전혀 아무런 관계 없이 정확하게 같은 순서로 고찰하여 나간다는 것은 가끔 있는" 그런 사례의 전형일 것이다.

에너지라는 말은 요즈음 귀에 익은 말이 되었으나 물리학의 용어로 처음 이 말을 쓴 사람은 영(1807년에 출판한 강연집), 그리고 역학적인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처음으로 표현한 것은 랑킨(1820-1872)이었다(1855). 광의의 에너지 보존법칙의 한 단계로서 1840년대에 열적 및 역학적인 에너지의 상호전화법칙(相互轉化法則)이 밝혀졌는데 그 주역들(R. 마이어, 줄, 헬름홀츠 등)은 에너지에 상당하는 것을 힘 또는 활력이라고 불렀다.

그 후의 과학의 발전 속에서 이 법칙을 부정하는 것 같은 실험적 사실이나 소견이 몇 차례 공개된 일이 있었지만, 그 모두가 일면적인 견해라고 하여 결국은 배척되고 이 법칙은 물리학(이라기보다는 자연과학) 전체에 관계되는 가장 기본적인 법칙으로서, 그 의의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열의 일당량[편집]

熱-當量

단위 크기의 열에너지(熱量)가 어느 만큼의 역학적 에너지(일)로 전화될 수 있는가? 그 값을 열의 일당량이라고 한다. 럼퍼드나 R. 마이어도 그것을 논하였으나, 스스로 여러 가지 실험을 연구하고 실행하여 당량의 값을 집요하게 구한 최초의 사람은 줄이었다. 전자(電磁)적인 방법, 기체의 팽창·압축방법, 유명한 날개바퀴로 물을 휘젓는 방법 등에서 그 정도(精度)가 좋은(1%정도) 값을 구하는 데 성공하였다.

럼퍼드[편집]

Count Rumford, 본명 Benjamin Thompson(1753-1814)

미국 태생으로 유럽에서 활약한 이공학자·군인·정치가. 보스턴 근방의 노드우번에서 태어나 상인, 교사, 군인 등의 직업에 종사하다가 정치상의 이유로 영국으로 건너가서 자연과학의 연구에 착수하였다. 1784년에는 독일로 옮겨 바이에른 선제후의 중신이 되어 뮌헨에 11년간 머물렀다. 1791년에 백작 칭호를 받았다. 후에 재차 영국으로 갔다가, 1803년에 다시 파리로 가서 라부아지에 미망인과 결혼, 4년 후 이혼하였으며, 파리에서 생애를 마쳤다.

군사·정치 면에도 공적이 많으며 화약·총포 등이 공학적 연구에서 열현상의 물리적 연구로 나아가 뮌헨 병기공장에서 대포를 깎아낼 때 많은 열이 발생하는 데 주목, 그 때까지의 열소설(열을 물질로 보는 설)을 뒤엎고 열은 운동의 한 형태임을 주장하였다(1785-1798). 이것은 그 후의 정당한 열학의 진전에 대한 중요한 기여가 되었다. 또한 런던에 왕립연구소를 창립한 것도 그의 공적의 하나이다.

마이어(로버트)[편집]

Julius Robert von Mayer(1814-1878)독일의 물리학자, 에너지의 보존법칙 제창자의 한 사람. 하일브론 태생. 의사가 되어 선의(船醫)로 자바에 건너가 그 곳에서 환자에게 방혈수술(放血手術)을 하였을 때, 열대지방 사람의 정맥의 피가 한대지방 사람의 피보다 선명한 적색을 나타낸다고 판단하였다. 이것으로 힌트를 얻어, 다음해에 귀국한 뒤로 열과 운동과의 관계를 고찰하여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제창하였다.

세상에 발표된 최초의 논문은 「무생물계의 힘에 관한 고찰」(1842)이다. 그 후에도 2, 3편의 논문으로 이 법칙을 논하였고, 우선권에 관하여 줄과도 논쟁하였으나 인정받지 못하였다. 후일 시의(市醫)가 되었으나 과로와 실의로 한동안 정신이상에 빠졌다. 그러나 업적은 마침내 클라우지우스, 헬름홀츠, 틴들(1820-1893) 등에게 인정되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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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Prescott Joule(1818-1889)

영국의 물리학자.에너지 보존법칙의 발견자의 한 사람. 맨체스터에 가까운 설포드에서 조부 때부터 양조업을 하는 집에서 태어났다. 16세 때부터 수년간, 화학자 돌턴(1766-1844)에게 배웠으나 그 밖에는 독학하였다. 20세부터 집에서 실험연구를 시작, 전기에 의한 동력의 능률문제를 통하여 전류의 발열작용에 관한 법칙(줄의 법칙)을 발견하였다(1840).

그로부터 열과 일과의 관계를 깊이 연구하였고, 열의 일당량을 측정하는 실험을 면밀하게 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실행하여(1843-1849), 에너지 보존법칙의 확립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그 업적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1847년 학회에서 W. 톰슨이 줄의 발표에 대하여 흥미를 보인 데서부터였다. 두 사람은 그 후 오래도록 협력하여 연구를 진전시켰다. 공동 성과 중에는 줄·톰슨효과의 발견(논문은 1852년)이 유명하다.

헬름홀츠[편집]

Hermann Ludwig Ferdinand von Helmholtz(1821-1894)

독일의 생리학자·물리학자. 베를린 교외의 포츠담에서 태어나, 의학을 전공하여 군의가 되었으나, 물리학에 흥미를 느껴, 1845년 베를린에서 물리학회를 조직하고, 1847년 이 학회에서 「힘의 보존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는 에너지의 보존법칙을 말한 획기적인 것이었으나, 학회잡지 『포겐돌프 연보』는 그 게재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그는 이것을 단독 책자로 출판하였다. 그러나 같은 법칙이 R. 마이어에 의하여 이미 발표되어 있음을 클라우지우스 등의 주의로 알고 R. 마이어의 우선권(優先權)을 인정하였다.

그 후 케니히스베르크, 본, 하이델베르크의 각 대학에서 생리학을, 1871년부터 베를린대학에서 물리학을 강의하였으며, 1887년부터는 신설된 국립 이공학연구소 소장을 겸하였다.

업적은 생리학·수학·철학에도 미쳤고, 물리학에서도 열학·역학·광학·음향학·기상학·전기역학·유체역학 등에 걸치고 있다. 『힘의 보존에 관하여』 외에 이론물리학 강의, 생리광학, 음향감각, 인식론, 강연집 등의 저서가 있다.

힘의 보존에 관하여[편집]

(1847)

헬름홀츠의 저서.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넓은 견지에서 논구(論究)한 것. 베를린에서 출판되었다. 오스트발트 과학고전총서에 수록되었다(1889).

열역학의 형성[편집]

熱力學-形成

18세기의 증기기관의 고안과 잇단 그의 개량 ― 파팡(1647-1712), 세이버리, 뉴커먼, 와트 등에 의한 ― 은 참으로 눈부셨다. 그것은 방적기계와 함께 산업혁명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였다. 인류는 증기기관을 만들어 냄으로써 비로소 열을 유효하게 통제(統制)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유효성(效率)을 높이는 문제는 그대로 열역학의 원리에 연결되는 것이었다. 즉 일정한 열이 어느 정도의 역학적 일에 대응하느냐 하는 문제가 열역학의 제1 법칙(열역학에서의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가져왔고, 열기관의 효율의 한계라는 문제가 열역학 제2법칙을 가져왔던 것이다.

카르노는 아버지의 수력 기계론이나 푸리에(1768-1830)의 열전도론을 바탕으로 하여 열기관을 물리적으로 연구하였다. 그리고 준정적 변화(準靜的變化), 가역과정(可逆過程), 카르노의 사이클(반복과정) 등의 개념을 써서 가역기관이 최대의 효율을 지닌다는 것, 그 효율이 고저 양 열원의 온도만으로 정해진다는 것을 논하였다. 거기에는 고전열역학의 기초가 되는 개념이 모두 갖추어져 있는 느낌이 있지만 그 체계화를 완수하기에는 그의 생애는 너무나 짧았다.

계속하여 열기관의 효율을 논하여 보다 구체적인 실체문제에 결부시킬 수 있는 쉬운 이론으로 발전시킨 것은 클라페롱(1799-1864)이었다.

그런데 뉴턴역학의 3법칙에 필적하는 열역학의 기본법칙 제1과 제2

중 제1은 에너지의 보존법칙을 열현상에 대하여 말한 데 불과하다. 이 제1 법칙은 일단 확인되고 보니 무엇인가 당연한 것처럼 생각된 일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제2법칙은 열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 방향의 문제, 현상의 가역(可逆)·비가역의 문제 등에 관한 것으로서 그 확립에는 정규물리학의 소양을 가진 클라우지우스, W. 톰슨의 기여가 필요하였다.

제2법칙에 관련하여 W. 톰슨은 절대온도의 생각을 제창하였다. 한편 클라우지우스는 엔트로피의 생각을 도입하여 제2법칙의 내용을 확장하였다. 오늘날 그것은 "자연계의 과정은, 그것에 관여하는 모든 물체의 엔트로피의 합이 증대하는 방향으로 진행한다"라고도 표현된다는 제2법칙이 현상(現象)의 방향을 규정하는 일, 그것은 모든 자연현상의 종말로서의 '열적(熱的) 죽음'의 논의를 세상에 퍼뜨리기도 하고, 또 역학 현상과는 다른 성격을 지닌 열현상의 본질에 대한 깊은 고찰에 볼츠만 등을 끌어들이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엔트로피의 확률론적인 의미가 밝혀지지만, 나중에는 그 정보이론적인 의미도 거론되어 정보 시대인 오늘날 엔트로피는 에너지와 함께 중요한 개념으로 되어가고 있다.

어쨌든 열역학은 두 개의 기본법칙을 출발점으로 하여 논리정연하게 체계화되고, 또 열공학·화학(가령 기브스) 등의 영역에 대해 정력적으로 응용되어 유효성을 발휘하였다.

영구기관의 꿈[편집]

永久機關-

정지함이 없는 영구운동, 홀로 일을 계속하는 영구기관, 그것은 인류의 오랜 꿈이었다. 이 꿈을 노래한 음악작품도 적지 않다(파가니니, 베버, 요한 슈트라우스 등). 에너지의 보급없이 계속 일을 하는 제1종의 영구기관의 실현 불가능성은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의하여 증명되었다. 또한 열원에서 열을 받을 뿐, 다른 낮은 열원으로 열을 주지 않고 일을 반복하는 제2종의 영구기관의 실현 불가능성은 열역학 제2법칙에 의하여 증명되었다. 또한 영구기관을 제1종·제2종으로 분류 명명한 것은 오스트발트이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말하면, 영구기관의 꿈은 열역학의 어머니이기도 하였다. 카르노의 논문은 영구기관의 논의 없이는 성립되지 않았다. R. 마이어는 영구기관을 꿈꾼 사람 중의 한사람이었다. 헬름홀츠는 영구기관 불가능을 엄밀히 증명하려고 열학연구에 뜻을 두었던 것이다.

카르노[편집]

Nicolas L

onard Sadi Carnot(1796-1832)

프랑스의 물리학자. 열역학 건설의 선구자. L. N. M. 카르노(프랑스 혁명에 활약한 장군·정치가·수학자)의 아들로 파리에서 태어나, 에콜 폴리테크니크를 졸업하고 군무에 복무한 짧은 기간에도 열학을 연구하였고, 1824년에 「불의 동력에 관한 고찰」을 발표하였으나, 그 밖에 수기 한편을 남긴 채 콜레라로 짧은 생애를 마쳤다. 그의 업적은 열의 작용에서 역학적 일을 끄집어 내기 위한 고찰에 기초를 제공하여, 열역학 건설의 길을 연 데 있다. 즉 그 당시, 갑자기 발전한 증기기관에 관하여 그 효율을 높인다는 실제적인 문제를 추상화하여 카르노의 가역사이클을 생각해 내어, 그것이 효율이 가장 큰 열기관임을 보였다. 여기에는 열역학 제2 법칙의 싹틈이 보인다. 또 전기의 한 논문에는 열을 물질로 보는 낡은 생각(열소설)이 남아 있지만 유고(遺稿, 1878년 동생 이포리트가 발표)에서는 구설(舊說)에서 벗어나 열과 역학적 일과의 상호전화(相互轉化)의 등량성(等量性, 열역학 제1법칙)에도 논급하고 있다.

톰슨(윌리엄 켈빈경)[편집]

Lord Kelvin William Thomson(1824-1908)

영국의 물리학자. 아일랜드의 벨파스트 태생. 아버지(글래스고대학 교수)로부터 계통적 초등 교육을 받은 후 글래스고, 케임브리지 양 대학을 졸업. 이어 파리의 르뇨(1810-1878) 밑에서 열학의 실험 연구에 종사. 1846년에 글래스고 대학 교수가 되었고, 그 후 50여년간 재직하였다.

업적은 전기학·역학·지구물리에도 미치나, 열학에서도 카르노, 줄의 선구적인 일의 진가를 일찍이 인정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절대온도 눈금의 도입(1848), 열역학 제2법칙의 정식화(1851), 줄·톰슨효과의 발견(1852) 등 뜻깊은 업적이 많다.

클라우지우스[편집]

Rudolf Julius Emanuel Clausius(1822-1888)독일의 이론물리학자. 북독일의 폰메른에서 태어나, 고학으로 베를린대학을 졸업, 할레대학에서 학위를 받았고, 베를린 병학교, 취리히공과대학, 뷔르츠부르크대학, 본대학의 물리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그는 1850년의 논문 「열의 동력에 관하여」에서 열역학 제2법칙을 정식화하였으나, 이는 1824년에 카르노가 낡은 열소설의 입장에서 논한 원리를 올바른 입장에서 엄격하게 체계화한 것이며, W. 톰슨의 그와 같은 발표보다도 1년 빨랐다. 또 1865년에는 엔트로피의 개념을 도입하여 열역학의 체계화에 큰 기여를 하였다.

한편 기체운동론에서도 평균 자유행로의 개념을 도입(1858)하여 통계역학의 진로를 열었다. 그 밖에 클라우지우스·크라페이론의 식(式), 클라지우스의 부등식(不等式), 클라우지우스의 비리아르 등 업적은 이론물리의 여러가지 영역에 이른다. 그 학풍으로 말미암아 그를 이론 물리학자라고 하는 형태의 원조(元祖)로 보는 이도 있다.

기체운동론과 통계역학[편집]

氣體運動論-統計力學

고전열역학은 거시적인 계통에서의 열현상에 대한 이론을 정연하게 수립하였으나 미시적(원자론적) 본성에 관하여서는 논급이 없었다. 그러나 미시적인 열이론이 전혀 안나타난 것은 아니다. 멀리 1738년 D. 베르누이(1700-1782)나 1821년 J. 헬라파스(1796-1867)는 기체압력이 기체분자의 벽에 미치는 충격의 집적(集積)임을 논하였다.

열역학 제1법칙에 기여한 줄은 젊은 시절에 원자론자 돌턴(1766-1844)을 스승으로 모셨던 만큼 미시적 열이론에도 관심을 보였고, 헬라파스의 이론을 바탕으로 수소분자의 평균 속도를 구하기도 하였다.

열역학 제2 법칙의 공로자 클라우지우스는 미시적 열이론에서도 위대한 공로자였다. 그는 온도를 분자운동의 평균에너지라고 바르게 보았고, 또 분자운동을 논할 때에 분자상호간의 충돌의 빈번함을 규정하는 평균자유행로의 개념을 도입하였다.

이어 획기적인 착상을 제출하여 기체운동론을 탈피시킨 것은, 전자기학(電磁氣學)의 제1인자인 맥스웰이다. 그 때까지의 클라우지우스 등이 분자운동의 속도는 분자마다 다르지는 않다고 논의한 데 대하여 맥스웰은 속도의 분포를 생각하고, 그것을 수학적으로 다루는 데는 확률론을 적용한다는 뜻깊은 아이디어를 말하였다(1860). 즉 맥스웰의 속도 분포규칙으로서, 확률론을 구사하는 열이론(통계역학)의 단서는 여기서 열렸다. 맥스웰은 또 분자간의 힘에 관하여서도 독자적인 견해를 말하였으며, 그것으로 거시적 현상(輸送現象 등)을 설명하였다(1866).

같은 1866년에 볼츠만은 학위논문 「열이론 제2법칙의 역학적 의미에 관하여」를 썼는데 이 테마는 볼츠만의 생애를 통한 과제가 되었다. 이것은 물론 맥스웰의 업적을 계승한 것이었지만, 맥스웰도 볼츠만의 초기의 연구를 일찍이 받아들여 발전시켰다(1878). 그러나 다음해에 맥스웰은 사망하였다.

앞에서 말한 볼츠만의 논문의 테마는 H정리 및 거기에 따른 엔트로피의 역학적 해석(1872)으로 발전하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체르멜로(1871-1953), 로슈미트(1821-1865)가 비판을 하기 시작하였다. 거기에는 역학현상의 가역성과 열현상의 비가역성과의 결부에 관한 심각한 문제가 깃들여 있었지만, 볼츠만은 확률론의 입장에서 이 비판에 훌륭한 반론을 펴서 열현상을 지배하는 통계적 법칙성을 명백히 하였다.

볼츠만의 착상이 보다 일반적인 형태의 통계역학, 즉 해밀튼역학의 형식을 바탕으로 한 통계역학으로 훌륭하게 체계화된 것은 기브스의 저서(1902)에서였다. 그러나 이 저서보다 먼저 1900년에는 플랑크가 열복사론 속에 볼츠만적 착상을 받아들였고, 게다가 작용양자(作用量子)의 가설이 불가결함을 논구하여, 양자 통계역학(量子統計力學)의 제1보를 내디뎠다.

볼츠만[편집]

Ludwig Boltzmann(1844-1906)

오스트리아의 이론물리학자. 통계역학의 건설자의 한 사람. 빈에서 태어나 그 곳의 대학에서 물리학을 배웠다. 그라츠, 빈, 뮌헨, 라이프치히의 각 대학의 교수를 역임한 뒤, 다시 빈대학의 교수가 되어 물리학 및 자연과학 방법론을 담당하였다. 실험 물리학에도 다소 손을 대었으나, 주된 업적은 이론물리학(역학·전자기·광학, 그리고 특히 열학)과 자연철학 방면에서 볼 수 있다. 가장 힘을 기울인 것은 고전역학과 원자론의 입장에 입각한 열이론의 전개로서, 통계역학의 논법의 기본을 이루는 에르고드 가설, 기체운동론의 상태함수(狀態函數)를 정하기 위한 볼츠만 방정식, H정리, 열역학 제2법칙 및 엔트로피 개념의 통계역학적 의미 정립 등의 업적은 통계역학 발전의 초석이 되었다.

또 이 이론을 점성(粘性)·확산(擴散) 등의 구체적 문제에 적용시키는 데도 정력적인 기여를 하였지만, 그의 이론은 뉴턴역학의 형식에 입각하였다고 할 수 있다. 같은 문제를 해밀튼역학의 형식으로 보기 좋게 체계화한 사람은 기브스였다. 오스트발트 등의 반원자론자들과 논쟁을 벌였던 일도 유명하며, 양자론(量子論)을 끌어오기 위한 방법론상의 선구자로도 간주되는데, 피서지에서 갑자기 자살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기체론 강의』(2권, 초판 1895와 1897)가 있고 그 밖에 『과학론집』(초판 1905)도 있는데 모두 개성적인 작품이다.

기브스[편집]

Josiah Willard Gibbs(1839-1903)

미국의 물리학자·화학자. 고전어학자를 아버지로 동해안의 뉴헤븐에서 출생. 예일 대학 졸업 후 유럽에 유학(1866-1869), 1871년부터 평생 예일 대학의 수리물리학 교수로서 사회와 학회와는 그다지 교섭없이 연구에만 전념하였다. 수학관계의 업적 외에 열역학적인 화학이론 특히 다성분계(多成分系) 평형이론 및 그것을 구체화시킨 『상률(相律)』도 저명하지만, 과학사상 큰 의의를 갖는 것은 사망하기 전해의 저서 『통계역학의 기초원리』이다.

이것은 위상공간(位相空間)의 이론, 해밀튼의 형식의 역학 및 확률론에 따라 역학계의 통계적 집단의 평균적 성질을 논하고, 거기서 거시적계(巨視的系)의 열역학적 성질의 설명을 도출(導出)할 것을 시도한 것으로, 통계적 평형에 있는 계(系), 이 중에서도 이른바 카노니칼 분포를 이루는 계(기브스의 앙상블)에 관한 고전적인 통계역학은 여기서 아름답게 체계화되었고, 그 후의 양자통계역학·물성론(物性論) 발전의 본질적인 기반이 되었다.

고전광학의 완성[편집]

古典光學-完成

17세기의 뉴턴의 업적 이래, 광학에서 입자설의 입장은 확고한 것이었다. 그러나 뉴턴은 자신이 상세히 연구한 뉴턴링(環)의 문제 등 빛의 주기적 성질을 보이는 사실이 있고, 또한 빛이 아무리 거센 광원에서 나와도 속도는 변하지 않는다는 중요한 성질이 입자설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것같이 생각되었다. 이와 같은 점에 주목하여 뉴턴의 업적의 검토에 따라 간섭이나 회절현상을 파동론에 의하여 해명한 것이 토마스 영이다. 그는 빛을 종파(縱波)라고 생각하였고, 회절의 취급방법이 완전하지 못한 데다 뉴턴파(派)의 사람들의 비판도 강경했기 때문에 많은 지지는 거두지 못하였다.

1808년 프랑스의 물리학자 마리우스(1775-1812)가 우연한 기회에 반사에 의해 편광(偏光)이 발생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호이겐스 이래 알려져 있던 빛의 복굴절 현상은 치우침을 가진 빛의 존재라는 개념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마리우스는 이 성질을 입자설의 입장에서 설명하려 했으나 종파밖에 생각하지 않았던 당시의 파동설에 대하여서는 충분히 우위를 유지할 수가 있었다. 브루스터(1781-1868)나 라플라스에 의한 실험과 이론 양면의 연구는 그 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편집]

Thomas Young(1773-1829)

영국의 의사이며 물리학자. 백과전서적인 지식의 소유자로서 사교계의 명사였다. 의사로서의 감각생리학적 연구에서 소리와 빛의 연구로 전향하여 1801년 뉴턴의 설과 모순되지 않음을 강조하면서 빛의 파동설을 제창하였다. 이 착상은 1807년에 나온 『자연철학 강의』 속에 잘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입자론자의 공격을 받고 이집트학(學)에 몰두하고 있었다. 프레넬이나 아라고(1786-1853)의 연구가 발표된 후 그들과의 사이에 파동설에 관한 흥미있는 서신을 교환하였다.

프레넬의 파동설[편집]

Fresnel-波動說

빛에 관한 입자설이 우세한 중에 파리의 과학 아카데미의 다수파는 회절이론(回折理論)만이라도 될 수 있다면 입자설의 승리는 확정된다고 생각하여 현상논문을 모집하였다. 1818년에 아라고(1786-1853)와 앙페르의 권유로 프레넬은 파동론의 입장에 선 회절(回折)의 연구를 제출하고, 반대로 파동론의 승리를 결정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프레넬은 호이겐스의 원리를 받아들여 영의 착상을 확장하고 수학적으로 문제를 다루었다. 그 결과 광범하게 실험과의 일치를 보았다.

또 아라고와의 공동실험 등에 의하여 프레넬은 빛이 횡파(橫波)임을 명백히 하였다. 그리고 결정광학에서의 복(複) 굴절 현상을 교묘하게 설명하고 매질 중에 빛의 횡파가 전달될 수 있는 여러 조건을 일반적으로 보이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당시의 광학상의 난문제는 거의 해결의 단서를 얻게 되었다. 특히 결정광학(結晶光學)의 이론은 해밀튼이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원추굴절을 예언하였고, 로이드가 실험으로 확인함으로써 더욱 옳음이 인정되었다.

프레넬[편집]

Augustin Jean Fresnel (1788-1827)

프랑스의 물리학자. 에콜 폴리테크니크(고등공예학교)를 나와 공병대에 입대, 군무의 여가에 광학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 그간 아라고와 알게 되어 평생 공동으로 연구하였다. 파동광학의 이론적 연구 외에 등대용(燈臺用)의 프레넬 렌즈의 발명 등으로 유명하다.

에테르설[편집]

ether說

빛의 파동설이 확실함은 프레넬의 연구 외에도 뉴턴링(環)에 대한 에어리(1801-1892)의 연구나, 아라고가 제기하고 1850년에 푸코(1819-1868)가 실행한 공기중과 수중에서의 광속의 측정과 비교 등이 결정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빛과 같이 고속도로 전달되는 횡파의 매질이 역학적으로 어떠한 성질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것이 실제적인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프레넬이 보인 일반적인 영역뿐만이 아니라, 보다 실재적인 역학모델이 요구된 셈이다.

나뷔에(1785-1836)나 코시는 뉴턴적인 입자론의 묘상(描像)에 의해 에테르의 모델을 만들려고 했고, 조지 그린(1793-1841)은 연속체의 역학으로 출발하여 에테르의 구조를 밝히려고 하였다. 이 방향에서 가장 실제에 근사한 것은 마칼라프(1809-1847)의 모델이었으나 이것은 보통 의미로 말하는 역학모델이 지녀야 할 직관적인 의미를 지니지 않았다. 맥스웰 이론에 의하여 빛은 전자파일 뿐, 탄성체(彈性體)의 역학적 운동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게 되었을 때 이와 같은 의문은 해소되었다.

역학의 반성[편집]

力學-反省

고전역학의 뉴턴 형식은 지구의 형상 문제 등 18세기의 여러 연구를 통하여 결정적인 것으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에 걸쳐 전개된 해석역학(解析力學)도 뉴턴역학의 연장으로 간주하여, 당연히 이 범주 내에 있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었다.

그러나 해밀튼이나 야코비(1804-1851)의 무렵이 되자 해석 역학이 지니는 새로운 형식이 단지 형식이 바뀌었다는 것만이 아니라 더욱 다른 그 이상의 뜻을 지니고 있음을 점차 이해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역학의 반성을 통하여 운동의 일반적 형식을 주는 이론의 지표가 되었으며, 이것은 마침내 파동역학(波動力學)이나 일반상대론(一般相對論)으로 통하는 길이기도 하다.

물론 형식면의 발전만으로는 이론의 내용적인 발전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석역학에서 다루는 대상이나 법칙성은 뉴턴 형식과 같은 고전역학의 범주를 한 걸음도 벗어나지 않았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형식의 변경에 따라 범주 밖으로 확장될 가능성이 생겨, 고전역학(古典力學)과는 질적으로 다른 단계의 운동도 고찰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해석역학의 건설[편집]

解析力學-建設

해석역학은 뉴턴역학의 완성 속에서 오일러와 라그랑주에 의해 발전되어 왔으나, 그 출발점이 되는 기초원리인 최소작용의 원리는 본디 페르마(1601-1665)에 의하여 부여된 광학상의 원리였다. 이것을 역학분야로 도입한 모페르튀는 뉴턴의 이신론적(理神論的) 철학으로 치우쳐, 이른바 신의 섭리로서 이 원리를 채용하였다. 그러나 라그랑주의 단계에 이르러 철학적 측면은 후퇴하고 뉴턴역학의 해석적 취급과 풀이(解)를 구하는 수학적 방법의 개발이라고 하는 측면이 전면에 나타났다. 그리하여 이론의 형식은 엄밀해짐과 동시에 그 이론이 뉴턴형의 운동방정식과 동일한 라그랑주의 방정식을 가져오는 등 최소작용의 원리를 무엇인가 형식적이고 무의미한 규칙으로 생각케 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뉴턴의 운동 기술(記術)이 시공(時空)에 관하여 국소적인 것에서 출발한 데 대해, 운동을 가능한 한 몇 개의 존재에서 하나를 선출한다는 대역적(大域的)인 관점에서 기술하려고 한 것이며, 또한 어떤 힘에 의하여 운동하는 대상에 관한 정보를 다만 한 개의 양(스칼라함수)에서 도출하려고 한다(뉴턴적 형식에서는 하나의 스칼라함수가 아니라 힘이나 운동량과 같이 몇 개의 벡터량을 사용한다). 이와 같은 구상도 도리어 라이프니츠적인 것이라 하겠다. 실제에 있어서, 뉴턴의 운동방정식에서 그가(중간적분으로 하여) 유도한 역학적 에너지는, 그 가운데 라이프니츠의 '활력'에 상당하는(계수만 다른) 운동에너지를 포함하며, 작용원리는 이를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진다. 이 의미를 명확히 한 것이 해밀튼과 야코비의 연구였다.

해밀튼과 야코비의 이론[편집]

Hamilton-Jocobi-理論

해밀튼은 광학계의 이론에서 출발하여, 페르마의 원리를 확장하여 에너지가 일정하지 않은 듯한 가상적인 과정도 고려에 넣도록 하고, 이 생각을 특성함수(特性函數)로 특징지었다. 계속하여 이 방법을 역학에 적용하여 역학의 해밀튼형식을 만들었으나, 여기서는 광학과 역학과의 해석적(解析的)인 관계가 명료하게 드러나서, 좌표(座標)의 설정방법과는 관계가 없는 운동의 기술형식(記術形式)이 만들어진다.

특성함수는 페르마나 모페르튀 이래의 광입자(光粒子)의 속도의 경로에 따른 적분(積分)이지만, 복잡한 광학계에서도 그 형(形)을 구하여 그 값을 최소로 한다는 조건이 경로를 결정짓는 식을 유도하여 낸다. 1834년 이래의 논문에서, 이상의 생각을 역학에 확장하고, 운동에너지의 2배(라이프니츠의 活力)의 경로적분을 특성함수로 하여, 입자의 경로를 결정지을 수 있음을 보인 다음, 라그랑주의 함수의 적분으로 해밀튼의 주함수(主函數)를 정의함으로써 한걸음 전진시켰다. 이 주함수의 변분(變分)을 취함으로써, 입자의 운동을 정하는 식을 유도하고, 거기서 다시 뉴턴, 라그랑주의 운동방정식과 동등한 해밀튼의 정준(正準) 운동방정식을 유도하였다.

야코비는 해밀튼의 이론을 음미하여 이를 역학의 중심으로 하고, 이 비판에 입각하여 다시 발전시켰다. 특히 운동의 기술이 좌표의 선택방법에 관계하지 않는 점에 주의하여 좌표의 변환관계를 조사하고, '정준변환'의 이론을 건설하였다. 또 그 기하학적인 의미를 검토하여 최소작용의 원리가 실은 굽은 공간(비유클리드 공간) 내에서의 최단거리를 주고 있음을 주의하였다(비유클리드 공간에서는 2점간의 최단거리를 주는 것은 곡선이 되고 측지선이라 불린다. 또한 유클리드 공간에서의 최단거리는 직선이다). 바꾸어 말한다면, 힘의 장(場)이 존재하기 위하여 공간이 굽고, 이 굽은 공간 내의 최단거리를 통하여 역학계의 운동이 실현된다. 이 생각은 마침내 중력장(重力場)에 대하여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론으로 굳어졌다.

야코비의 변환이론은 그 후에 S. 리(1842-1899)에 의하여 '접촉변환의 이론'으로 발전하였고, 역학은 최후의 통일형으로 이루어졌다.

야코비는 해밀튼의 주함수에 관한 방정식을 간략하게 하고, 오늘날 해밀튼·야코비의 방정식이라고 하는 것을 유도하였다. 그리고, 정준운동 방정식을 불변하게 만드는 변수의 변환(正準變換)의 개념을 도입하여, 주함수가 그와 같은 변환의 모함수(母函數)임을 밝혀냈다. 최소작용의 원리는 기하학적인 사고방식에 따라 재구성되고, 그것이 비유클리드 공간에 있어서 측지선을 결정짓는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졌다(야코비의 원리). 주함수라는 것은 이 측지선을 법선(法線)으로 한 곡면의 모임이며, 최소작용의 원리에서 운동의 경로 결정의 차례는 곡면군의 법선인 무수한 궤도 중에서 측지선을 선출하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운동에 대한 관점이 물체운동을 각 순간마다 물체의 위치의 미소한 시간적 변화와 연결해 간다는 뉴턴의 설과 대조적이라는 것을 곧 이해할 수 있겠다.

해밀튼[편집]

William Rowan Hamilton(1805-1865)

아일랜드의 수학자·이론 물리학자. 어린 시절부터 천재적 재능을 나타내어 10세때 호머를 외웠고, 아라비아어와 산스크리트를 배워 마침내 13개 국어를 마스터하고, 예술적 재능도 보였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은 광학이나 역학분야의 연구는 1824-1835년에 주로 실행하였다. 그러나 그가 보다 관심을 가졌던 것은 1833년경에 비롯된 4원수(四元數)의 연구이다. 복소수체(複素數體)의 확장이라고 하는 매우 추상적인 연구로 알려졌던 4원수가 후에 역학이나 수학의 다방면에 걸치는 문제(특히 회전과 관련된)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알았다. 1827년 이래 사망할 때까지 더블린 근교의 단싱크 천문대에 재직하면서 천체역학상의 문제도 많이 해결하였다. 그의 업적의 대부분은 후세에 이르러 다시금 그 천재적 착상이 인정되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역학의 비판[편집]

力學-批判

열이론이나 전자기학(電磁氣學)의 발전은 역학만능의 관념에 입각한 18세기적 자연관을 동요시키고 있었으며, 해석역학의 발전은 역학 그 자체에 대한 해석의 가능성을 확장시켰다. 그 결과 뉴턴 이래의 역학의 정통적인 주장과는 다른 물리적 해석이 역학적 자연관 전체에 대한 비판 및 실증주의적 철학의 주장과 결부하여 등장하였다. 1876년, 키르히호프(1824-1887)는 뉴턴에 의한 힘이나 질량의 개념이 애매하다 하여 뉴턴방정식을 시간과 공간좌표만으로 표시되는 것으로 해석할 것을 제안하였다.

또 마하는 1883년의 저서 『역사적·비판적으로 본 역학의 발전』이나 그 밖의 논문에서 뉴턴의 질량개념, 뉴턴의 운동법칙 등이 그 존립의 전제로 예상하고 있는 절대공간의 개념 등을 계통적으로 비판하고, 뉴턴형의 운동법칙은 '사고경제(思考經濟)'의 원리에 따른 하나의 정식화(定式化)에 불과하다고 논하였다. 이와 같은 구상에서, 힘의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 역학의 건설을 기도한 것은 헤르츠였다. 1894년에 나온 『역학의 원리들』은 그의 미완성으로 그친 연구를 사후(死後)에 간행한 것인데, 거기서는 관성법칙(慣性法則)은 최소곡률(最少曲率)의 법칙이라고 하는 기학학적 형식으로 표시되고, 외력(外力=퍼텐셜의 형으로 표시되고 있다)은 '숨겨진 질량'에 의한 운동학적인 효과의 외양상의 표현이라고 한다.

본디 뉴턴의 역학체계의 배후에 있는 물질의 이미지는 선험적인 시공(時空)의 범주 내에 존재하는 입자가 공허한 공간을 건너서 직접 힘을 서로 미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야코비에서의 주함수의 해석, 원리의 기하학적 의미 정립, 헤르츠에서의 숨겨진 실체의 공간점유 등은 힘이 전달되어가는 공간에 대하여 데카르트적인 의미에 있어서 에테르와는 별개인, 말하자면 수학적(기하학적) 실체라고 하는 모델(類型)을 부여한 것이 된다.

마하[편집]

Ernst Mach(1838-1916)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오스트리아의 모라비아에서 태어나 빈에서 배웠고, 그라츠, 프라하대학을 거쳐 빈대학 교수로 있었다. 과학사 및 과학론을 강의하였다. 역학의 발달과 그 역사적·비판적 고찰(1883)을 서술하여 역학비판을 전개하였고, 또 실증주의의 입장에 선 독자적인 인식론을 개척하였다. 초음속 제트기둥에 관한 연구도 있었으며 '마하 수'는 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전자기학의 성립[편집]

電磁氣學-成立

갈바니 전류에 관한 여러 가지 연구와 쿨롱의 법칙 발견은 19세기 초엽의 전자기학의 수준을 나타내는 것이다.

특히 후자는 전자하의 힘의 법칙이 거리의 제곱(自乘)에 반비례한다는 의미에서 뉴턴의 인력법칙과 유사하기 때문에 전기현상을 뉴턴역학과 같이 점전하간(點電荷間)의 직달력(直達力)을 바탕으로 하여 설명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다. 자기 문제와 전기 문제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와 같은 사고방식으로 처리하기에는 곤란한 문제를 가져왔지만 프랑스와 독일의 연구가들은 한결같이 그 방향을 취하려고 하였다(대륙파의 전기역학).

이에 대하여, 영국에서는 전통적인 뉴턴적 과학에 관한 교양이 없는 천재적 실험가 패러데이가, 전자기에 관한 연구 속에서 전하, 전류, 자석 등 사이의 상호작용은 그들간에 존재하는 공간을 채우고 있는 매질이 전기적 긴장상태를 취함으로써 전달된다는 착상을 전개하였다.

이 착상에 대한 수학적으로 엄밀한 취급은 켈빈경(W. 톰슨)에서 맥스웰로 계승되었다. 그들의 연구는 매질이 역학적 모델(역학적 성질을 가진 것)로서 파악되고 있었다는 의미로 말한다면 역학적 자연관의 범주 내에 있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맥스웰의 방정식에는 매질에 대한 좁은 의미의 역학적 해석을 허용할 수 없는 요소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진공 중의 변위전류 등).

그 요소들은 전자파의 실재성이 헤르츠에 의하여 실험으로 확인됨으로써 명확하여졌고, 전자장은 역학적 모델을 통하여서가 아니라, 그 자신이 공간에 퍼진 물질적 존재로서 인식되게 된다. 그리하여 19세기 초엽의 전자연구에서 확립되어 온 여러 법칙은 맥스웰이론의 범주 내에서 포착되게 되었다. 다만 전자장의 원천인 동시에 전자장과 상호작용을 하는 전기를 띤 입자(電子)의 운동이 본질적으로 개재하는 문제는 로렌츠의 연구 이후까지 기다려야 되었다.

가령 전기저항에 관하여 말하면, 옴의 법칙(1827년, 옴(1787-1854))에 의하여 발견되었고, 시간이 지나서 세상에서 받아들인)이 전류에 대한 유용한 법칙으로 쓰여왔으나, 이를 맥스웰의 이론과 결부시켜 논하는 과제는 로렌츠전자론을 계기로 금속 내 전자에 의한 수송현상(輸送現象)을 생각한 데서 착수되었다(1900년, 드루데(1863-1906) 및 로렌츠).

베크렐[편집]

Antoine Cesar Becquerel(1788-1878)

프랑스의 물리학자. 루아레 출생, 파리의 에콜폴리테크니크에서 수학. 전지를 발명했으며, 전자기 천칭과 몸 안의 온도를 재는 기구인 열전침을 발명했다. 또한 근육이 수축할 때 생기는 에너지가 열로 바뀐다는 사실도 알아냈으며, 전기학·자기학·생리학에 관한 책도 많이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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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 Simon Ohm(1787-1854)

독일의 물리학자. 에를랑겐에서 출생하였으며 베를린 사관학교·뮌헨대학 교수를 지냈다. 금속선을 흐르는 전류에 대한 실험으로, 전류의 세기는 전압에 비례하고 전기 저항에 반비례하며, 전기 저항은 도선의 길이에 비례하고 그 단면적에 반비례한다는 '옴의 법칙'을 발견하였다. 전지 저항의 단위 옴(Ω)은 그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전류의 자기작용(전기역학적 연구)[편집]

電流-磁氣作用(電氣力學的硏究)

1820년, 덴마크의 물리학자 외르스테드(1777-1851)는 전류가 흐르고 있는 도선에 접근시킨 자침(磁針)이 흔들리는 것을 발견하였다. 같은 해에 비오(1774-1862)와 사바르(1791-1841)는 그 실험을 정밀하게 하여, 전류의 미소한 요소와 자극(磁極)과의 사이의 힘이 거리의 제곱(自乘)에 반비례하는 것을 발견하였다(비오-사바르의 법칙).

또한 같은해 앙페르는 역시 외르스테드의 실험을 시험하고, 또한 2개의 전류가 흐르고 있는 도선간에 힘이 작용함을 발견하였다. 이 때 같은 방향의 전류끼리는 인력(引力)이라 하고 다른 방향의 전류끼리는 척력(斥力)이라 하였다.

그리고 전류의 미소요소간(微少要素間)의 힘의 크기는, 도선간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것을 알았다. 이와 같이 쿨롱의 법칙처럼 역제곱형의 힘의 법칙이 차례로 출현함으로써 전류의 자기작용도 뉴턴적 방법의 범주 내에서 다룰 수 있다는 생각을 넓혔다. 이 단계에서 그 방면의 연구를 가장 진척시킨 사람은 앙페르이다.

앙페르[편집]

Andr

Marie Ampere(1775-1836)

프랑스의 물리학자. 12세에 미적분학에 통하였고, 16, 7세 때 베르누이, 오일러, 라그랑주의 저작을 마스터하였다고 한다.

1793년, 아버지가 혁명정부에 의하여 처형당하였기 때문에 심한 정신적 타격을 받아, 한동안 일절의 학업에서 떠났으나, 루소의 식물학 서간과 그 밖의 고전을 읽고 회복한 뒤, 확률론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여 인정받았고, 1805년 이래 에콜 폴리테크니크(고등 공예학교)에 들어가 연구에 몰두할 수가 있었다. 전술한 전기역학상의 업적과 원형전류에 의하여 자석이 만들어진다는 중요한 견해를 말하였다. 코일(솔레노이드코일=solenoid coil)로 전자석을 만든다는 오늘날까지도 널리 쓰이고 있는 방법의 출발점을 만듦과 동시, 지자기의 성인(成因)도 이 생각을 바탕으로 하여 논구하였다. 그에게는 자연철학에 관한 저서도 있고, 그 속에는 현대의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에도 일맥상통하는 착상이 엿보인다.

장과 전자유도[편집]

場-電磁誘導

외르스테드(1777-1851)의 연구의 반대, 즉 자석운동에서 전류를 발생케 하려는 착상은 앙페르도 가지고 있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또 아라고(1786-1853)가 발견한 금속제 회전원반상에서 자석을 회전시키면 원반도 회전한다는 현상도 전기역학으로는 설명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문제는 1831년에 보고된 패러데이의 연구에 따라 해명되었다. 그는 여러 가지 다른 방법에 의하여, 자석운동이나 전자석에 의한 자기의 생성과 소멸에 의하여 그 근방에 놓인 도선 속에 전기가 발생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즉 '전자유도'의 발견이다.

이 현상을 전기역학을 바탕으로 하여 설명하기는 곤란하였지만, 1847년 프랑츠 노이만(1798-1895)은 렌츠의 법칙(전자유도는 그 유도현상을 일으키는 원인을 저지하는 방향으로 작용한다는 법칙)을 써서 전자유도를 설명하는 이론을 만들었다. 같은 무렵, 베버(1804-1891)는 쿨롱이나 앙페르의 업적과 전자유도를 통일적으로 기술하는 전기역학의 기본방정식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직달력(또는 遠隔作用)에만 의거하는 전자기 이론은 복잡하고 결함도 많아(헬름홀츠의 비판을 받은) 장(場)의 이론의 등장에 의하여 대체된다.

그러나 전자기의 정밀측정을 실용적 수준으로 높인 베버의 공적은 중요하다. 그에 대해 패러데이는 전기분해에 관한 연구에서, 전해질용액의 작용에 대하여 자세히 알 수가 있고, 전자기 현상이 절연체까지 포함하는 물질의 내부적 상태의 변화를 통하여 전달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 착상은 다시 정전감응을 각종 절연체를 통하여 실시하는 실험을 정밀히 추구함으로서 더욱 깊게 하였다.

즉 오늘날 말하는 전매질의 종류에 의하여 감응의 모양이 달라지고, 더구나 전기가 전매질에 삼투하는 데 시간이 필요함을 알았다. 매질을 구성하는 물질의 '전기적 긴장상태'가 전기적 또는 자기적(磁氣的)인 작용의 본성이고, 그것은 역선(力線 또는 力管)이라고 하는 모델로 나타난다. 이것이 패러데이의 장의 이론이다.

패러데이[편집]

Michael Faraday(1791-1867)

영국의 물리학자·화학자. 가난한 가정 출신으로 13세에 제본소에서 일을 하였다. 자연과학에 흥미를 가져 데이비(1778-1829)의 강연을 듣고 내용필기를 제출한 것이 계기가 되어 그의 조수로서 1813년에 왕립연구소에 입소, 주로 화학 실험에 종사하였다. 생석회의 분석, 염소의 액화(1823), 벤젠의 발견(1825) 등 뛰어난 업적을 올렸고, 1825년에는 연구소의 주임이 되었다.

1830년경부터 전자유도의 발견으로 비롯된 중요한 전자기학의 실험으로 장의 이론의 선구자가 되었다. 1840년 이후로는 전적으로 자성의 연구에 매진하여 패러데이 효과(1845)와 반자성물질 등을 발견(1845)하였다.

1857년에 왕립협회 회장에 추대되었으나 사퇴. 비국교회(非國敎會)의 한 종파에 속하며, 가난한 환경에서 출발하여 19세기 영국의 대표적 과학자가 된 그는 많은 친구가 있었고, 뛰어난 인격으로 존경받았다.

전자파[편집]

電磁波

패러데이의 착상을 수학적 이론형식으로 정리하여 장 이론의 입장으로 전자기학의 일관된 체계를 수립하려는 시도는 켈빈경(W. 톰슨)이 실행하였다. 패러데이와 서신을 교환하면서 그는 패러데이의 연구에서의 전기력이나 자기력의 제 관계가 탄성체의 응력(應力=탄성체에 외력이 가해졌을 때에 물체 내의 각 부분이 나타내는 변위)을 나타내는 식에 의하여 표현할 수 있음을 보였고, 1847년의 패러데이 앞으로 보낸 한 서신에서, 그 착상을 더욱 발전시키면 빛의 파동론이나 패러데이 효과와의 관련도 분명해지리라고 말하였다.

한편 그는 1853년에 라이덴병의 방전의 과도적 현상(過度的現象)으로 진동전류가 발생할 것이라는 것을 교묘한 수학적 추론으로 밝혔다. 켈빈경은 그 무렵부터 공학적 문제의 연구로 전환했는데, 그로부터 패러데이의 연구를 잘 배우도록 충고받고 전자기학 연구의 길로 나갔던 맥스웰이 이 방향을 완성시켰다.

맥스웰은 1885년의 「패러데이의 역선에 관해」라는 논문에서 유체의 사고방식을 이용하여 역선(力線)을 유선(流線)으로 나타내면 전자기학이 잘 정식화된다는 것을 보였다. 이 생각을 전자유도까지 포함하여 확장해 가면, 직관성은 점차 상실되나, 1861년 이후에는 그는 변위전류의 개념을 끌어들여, 전자장의 기초방정식을 정비하고, 오늘날 알려져 있는 형식(맥스웰 방정식)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장의 물리적 의미는 아직 역학적으로 생각되고 있었다. 이 맥스웰의 고찰에서 얻은 중요한 결과는 매질 내에서 일어난 주기적인 진동이 파동이 되어 전파된다는 것, 그리고 그 진행속도는 피조(1819-1896)가 알아냈던 빛의 속도와 같다는 것이다. 빛의 본성은 전자기의 파(波), 전자파일 것이라고 본 맥스웰이나 헬름홀츠의 예견은 전자파론의 발단이 되었고, 그 후 전자기학은 빛의 전자론, 에테르모형의 문제 등을 중심으로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한편 그 실험적 검증도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시도되었으나, 하인리히 헤르츠는 1886년-1887년에 변위전류의 실재를 밝혔고, 또 1888년 맥스웰 방정식에서 예견되는 전자적 횡파의 존재를 불꽃방전을 써서 확인하였던 것이다.

맥스웰[편집]

James Clerk Maxwell(1831-1879)

영국의 물리학자.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에든버러,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배우고, 런던대학 교수 등을 거쳐 1871년 케임브리지 최초의 실험물리강의, 캐번디시연구소 소장이 되었다. 10대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으며, 전자기학에서의 업적 외에 기체운동론의 분야에서도 중요한 일을 하였고, 당시 최대의 물리학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 밖에 색채론 연구나 오늘날 말하는 자동제어론의 선구를 이루는 연구 등이 중요하다.

헤르츠[편집]

Heinrich Rudolf Hertz(1857-1894)

독일의 물리학자. 처음에는 기술자를 지망하였으나, 뮌헨고등공업 재학 중에 자연과학 지망으로 바꾸어, 1878년 베를린대학으로 옮겼으며 헬름홀츠의 평생 지도를 받게 되었다. 킬, 칼스루에, 본의 여러 대학을 역임, 칼스루에시대에 맥스웰이론의 실험적 증명을 하였고, 이 시대에 역학의 재정식화(再定式化)나 운동물체의 전기역학에 관한 연구를 하였으나, 장래가 촉망되는 가운데 아깝게도 37세로 사망하였다. 스승인 헬름홀츠는 "고대사람들 같으면, 그는 재능으로 인하여 신의 질투를 받았다고 말하였을 것"이라고 탄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