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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혁명 시대의 과학[편집]

産業革命時代-科學

1760년부터 1830년에 이르는 영국산업혁명 시대에는 동시에 미국의 독립전쟁과 프랑스혁명이 있었다.

영국의 산업혁명은 무엇보다도 사회의 조직을 일변시켰다. 공장제도가 확립되고 자본가가 나타남과 동시에, 많은 공장 노동자가 나타났다. 자본가는 공장제도를 만드는 데 있어 생산방식을 개량하기도 하고 변혁하기도 하는 데에 관심을 두었다. 많은 기술적인 발명이 생산에 채택되게 되었다. 그러나 발명가들은 학자가 아니라 한낱 직업인에 지나지 않았다. 하그리브스도 하이즈도, 크럼프턴도 와트까지도 과학이론을 응용하여 발명한 것이 아니라 생산 증대라고 하는 시대의 요구에 밀려 그들의 솜씨와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방적기나 증기기관의 발명에 도달한 것이다. 과학이나 이론은 이와 같은 생산 기술의 발명이나 생산 방법의 개량을 바탕으로 하여 비로소 새로운 전개를 보인 것이다.

예를 들면 열과학의 진보이다. 글래스고대학의 블래크는 위스키의 증류솥의 개량에서 '잠열(潛熱)'이라는 현상을 발견하여, 그 때까지 혼동되고 있던 열과 온도라고 하는 두개의 개념을 분명히 구별하여 열학(熱學)발전의 기초를 다졌다. 이 잠열에 대한 착안은 증기기관의 개량에 큰 역할을 하였고 마침내 와트의 증기기관의 탄생을 보았다. 그리고 한층 새로운 열과학이 시작되었다. 카르노는 증기기관의 개량을 목표로 하는 가운데 열이 어떻게 동력(일)으로 변하는가를 고찰하여, 후에 열역학의 제2법칙이라고 부르게 된 법칙 발견의 선구자가 되었다(1820). 열의 과학은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열역학이라는 분야로 더욱 확대되었다. 또 탄산가스(블래크), 산소가스(셸레, 프리스틀리), 수소가스(캐번디시) 등 기체의 발견이 이 시기에 나타났다. 이 기체의 화학적 연구는 근대 화학을 낳은 모체였다.

한편 돌턴은 근대적 원자론을 만들었으나 이는 항해에 필요한 기상의 관측에서 비롯하여 기체의 혼합·확산, 기체가 물에 녹는 데 대한 연구를 거치고 있다.

산업혁명기의 영국 과학자의 사상은 과학과 산업을 연결시켜 인류의 복지에 이바지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각 도시에 독자적인 지방학회를 만들고, 와트나 프리스틀리 등은 버밍엄에서 월회(月會)의 회원이었다(1760경). 돌턴은 맨체스터의 문예과학협회(1781)에서 활약하였고 람포드는 런던에 왕립 연구소를 만들었으며(1799년) 거기서 데이비와 패러데이가 나왔다.

월회의 회원으로 다윈의 조부 에라스무스 다윈이 있었다. 그의 저서 『즈노미아』(1794)에는 이미 진화의 사상이 엿보였다. 그것은 사물을 잘 관찰하며, 사물이 끊임없이 발전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당시의 새로운 과학자들의 진보된 사상이기도 하였다. 후에 손자인 다윈이 진화론을 대성하였는데, 이 때 참고로 한 것이 허튼의 생각을 이어받은 라이엘의 『지질학 원리』였다.

프랑스에서는 라부아지에가 영국에서 전개된 기체화학을 바탕으로 화학 이론을 근대적인 것으로 완성시켰다. 그는 플로기스톤설의 부정, 질량 불변의 법칙, 원소 개념, 원소 분석, 원소의 근대적 명명법 등 차례로 새로운 이론을 전개하였다. 프랑스혁명(1789)은 그의 목숨을 앗아갔지만, 혁명은 과학의 진보를 방해하지 않았고, 혁명정부는 1798년 에콜 폴리 테크니크(고등학교)를 세웠다.

라부아지에와 대등한 대화학자 베르톨레는 프랑스혁명을 지키기 위하여 화학 분석의 재능을 발휘하여, 화약이나 강철의 제조에 전념하는 한편, 피륙의 표백에 흥미를 가지고 염소 표백작용에 착안하였다. 이는 후에 영국의 표백분 발명을 유도하고, 그의 염소연구는 산의 수소설을 확립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이탈리아의 볼타는 개구리 다리의 경련실험에서 전류를 발견하였고, 전류를 연속적으로 이끌어내는 장치(전지)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 발명이 전신기로서 실용화된 것은 철도가 보급되기 시작한 1835년의 일이었다.

산업혁명은 노동자의 생활·노동조건을 불건전한 대로 둔 채 진행되었다. 당시의 평균 수명은 1800년경에 40세였다. 하수도나 상수도는 모두 비위생적인 대로였다. 영국 산업혁명이 최고에 달하였던 1831년에 런던, 에든버러, 그리고 파리, 베를린 등 전유럽에 콜레라가 크게 유행하였는데 전염병의 예방에 과학적 의학이 응용되자면 아직 40년 이상을 더 기다려야 했다. 코흐나 파스퇴르의 과학적 의학이 나타는 것은 1870-1880년에 이르러서였다. 1760년부터 1770년에 이르는 산업혁명은 여러 가지 새로운 과학을 낳았다. 그러나 그것은 직접 생산방법의 개량에 소용되는 과학만을 우선 채용하였을 뿐, 그 밖의 과학 응용은 19세기 중엽 이후까지 미루어졌다.

열학의 출현[편집]

熱學-出現

인류에게 있어서 열은 항상 가까이 느끼는 감각이었으나 힘이나 빛에 비하여 수량적 취급이 어렵기 때문에 열 현상의 연구가 시작된 시기는 비교적 늦었다.

근세 초기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 신대륙을 발견하는 시대가 되자, 항해술과 거기에 따라 기상학이 발달하고, 기온의 측정이 중요해졌다. 이리하여 온도계가 발명되고, 완전한 온도계를 만들기 위한 시도가 거듭되는 동안 물체의 열적 성질에 관한 지식이 축적되어 왔다.

그리하여 18세기 중엽, 산업혁명의 최성기에 이르러 에너지원으로서의 열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중요하게 되었다는 것과, 또 근대 과학의 기초가 되는 자연 인식의 방법이 한층 명확해진 것이 원인이 되어, 그 때까지의 단편적 지식이 집성되어 열학 체계가 시작되었다.

온도계[편집]

溫度計

자연에 대한 활발한 흥미가 넘치기 시작한 16-17세기에는, 관찰의 도움이 되는 기구가 여러가지 고안되었다. 그 중에서도 피렌체의 아카데미아 데르 티멘트(實驗學會)의 업적은 유명하다. 온도계도 이 그룹들에 의하여 실용화되었다.

그 이전 시대에도 갈릴레이나 드레벨(1573-1633)이 겨우 온도의 고저를 알 수 있는 간단한 온도계를 만들기는 하였지만 대기의 압력이 알려진 이 시대에 이르러서 비로소 기압변동의 영향을 제거하기 위하여 끝을 봉한 실용적인 알코올 온도계가 만들어졌다. 그 후 기상 관측에는 알코올 온도계가 많이 쓰여 공기의 성질이 점차 해명되었다. 영국에서 처음으로 알코올 온도계를 사용한 보일은 온도가 일정한 경우의 공기의 압력과 부피의 관계를 발견하였으나 아몽통(G. Amontons, 프랑스의 실험 물리학자, 1663-1705)은 여기서 힌트를 얻어, 밀폐된 공기의 압력 변화로 온도를 알 수 있는 공기온도계를 만들었다. 이 때 공기의 압력과 온도의 관계에 관하여 그가 행한 연구는, 후에 기체의 상태 방정식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공기의 역학은 진보하였다. 한편, 발달하기 시작한 광산업에서는 그것을 이용한 증기기관이 고안되었으며 열 문제는 점점 긴요한 것이 되었다. 18세기가 되자 기술 발달의 영향을 받아, 직공·기계 제작자(機械製作者) 출신의 과학자들이 많은 업적을 올렸다. 수은 온도계의 완성도 기계 제작자인 파렌하이트(1687-1736)에 의한 것이다.

수은을 온도계에 쓰려고 하기는 이전부터의 일이었으나 그가 수은의 청정법(淸淨法)을 발견할 때까지는 실용이 되지 못하였다. 또 그는 아몽통의 연구에 자극되어 물체의 여러 가지 열적 성질을 조사하여, 그 결론으로 그 때까지 여러 가지로 제안되고 있던 눈금의 정점(定點)을 통일하기 위하여 지금의 화씨 눈금(°F)을 설정하였다(1724).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섭씨 눈금(°C)은 그 후 20년쯤 지나 셀시우스(A. Celsius, 스웨덴의 천문학자, 1701-1744)가 정한 것이다(1742).

온도와 열량[편집]

溫度-熱量

비열(比熱)이나 잠열(潛熱)의 개념이 잘 알려져 있는 오늘날에도, 온도계에 나타나는 눈금이 물체의 열량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18세기 중엽까지는 열량과 온도는 같은 것이라고 직관적으로 생각되고 있었다.

온도계가 완성되기까지의 연구에서도 비열이나 잠열의 존재를 나타내는 과학자료는 마련돼 있었으나 그것들을 정량적 열학(定量的熱學)의 바탕이 되는 개념으로 확립시킨 이는 블래크였다.

블래크는 화학 반응의 연구에 처음으로 정량적 방법을 도입하여 성공한 뒤, 같은 정량적인 실험 태도로써 화학 반응의 원동력이 되는 열문제 해결에 착수하였다.

그는 온도계(溫度計)의 정밀도와 신빙성을 확인하기 위하여 수은의 열적(熱的) 성질을 검토하고, 이전 과학자료와 대조하여 물과 수은에서는 같은 온도에 이르는 데 필요한 열량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생각을 확대하면 같은 질량의 여러 물체의 온도를 1℃ 높이는 데는 각기 그 물체가 지니는 고유한 열의 양이 필요하다는 것이 된다(1760). 독일의 윌케(1732-1796)는 이것을 비열(比熱)이라고 했다. 또 블래크는 얼음이 녹을 때, 얼음을 아무리 가열하여도 얼음의 온도는 오르지 않고 녹아서 물이 되고 마는 사실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이로부터 30년 가량 전에 파렌하이트는 과냉각(過冷却)의 실험을 하여, 융점 이하로 냉각시킨 물에 진동을 가하면 물은 일순간에 응고하고, 동시에 열이 발생하는 것을 보고하였는데, 이는 얼음의 융해와 정반대의 현상이다. 그리하여 블래크는 얼음과 물이 서로 변화할 때에는 많은 열의 출입이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이 열의 변화는 온도계에는 나타나지 아니하므로, 그는 이것을 잠재하는 열, 즉 잠열이라고 하였다(1761).

또 그는, 잠열은 당연히 물이 증기로 변하는 경우에도 있으리라고 생각하여, 1764년에 이를 증명하였다. 대학을 출입하는 기계 기술자인 와크는 블래크로부터 증기의 잠열 현상을 배워, 증기기관을 탄생시킬 수가 있었다. 블래크 이후 시대의 요구에 따라 열학은 급속히 진보하였고 열역학으로 발전하였다.

블래크[편집]

Joseph Black(1728-1799)

영국의 의학자, 화학자, 물리학자. 프랑스 보르도의 포도주 상인의 집에서 태어나 글래스고대학 의학교수, 에든버러대학 화학교수를 역임. 정량화학(定量化學)의 창시자, 탄산가스를 발견하였다.

그는 산업혁명 시대의 과학 제1인자로서 늘 과학과 산업의 관련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때마침 그가 있는 글래스고에서는 위스키의 증류업이 번성하였으며 증류시 잠열현상 때문에 연료의 경제가 중대한 문제가 되고 있었다. 또 당시의 화학 실험에서는 증류와 강열(强熱)이 주요 수단이었기 때문에, 그는 화학이란 열이 물질에 미치는 효과를 연구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열소설과 그 비판[편집]

熱素說-批判

17세기에는 광학의 분야에서 입자설(粒子說)과 파동설(波動說)의 날카로운 대립이 일어났다. 열에 대하여서도 데카르트적 2원론의 영향으로 물질설과 운동설의 2개의 주장이 있었다.

금속을 두드리기만 하여도 열이 발생하는 것에 근거를 둔 보일과 그 제자인 블래크는 열은 입자의 배열이나 운동에 의한다고 생각하였으나, 한편 같은 시대의 호이겐스는 열은 격심하게 운동을 하고 있는 입자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열학은 아직 발달하지 못하여서 열의 실체에 관한 고찰을 더욱 깊이 파고들어갈 만한 지식이 없었으므로 그 대립도 심한 것은 아니었다.

18세기에 이르자 블래크는 비열이나 잠열 현상에서 열은 물체 내에 보존되는 물질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생각은 라부아지에에 의하여 정착되었다.

그는 원소표 속에서 열소(熱素)와 빛을 원소로 꼽았고, 열소는 무게가 없으며, 서로 반발하는 미세한 입자라고 말하였다. 그 후 열소설은 널리 지배적이 되었으나, 마찰이나 타격에 의하여 발생하는 열은 아직 해석할 수 없는 문제로서 남게 되었다.

1798년 럼퍼드는 조병창에서 대포 포신의 구멍을 파는 작업을 감독하고 있으면서 포신이 단시간 내에 매우 높은 열을 내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열의 원천을 방지하려고 한 그는, 단열적(斷熱的)인 장치 중에서 끝이 뾰족하지 않은 구멍뚫는 작대기로 포신을 마찰하는 실험을 하여, 이 때 열이 무진장으로 발생하는 것을 보였다. 열소설로는, 물체가 지닌 열량은 한정되어 있었으므로, 이 많은 열은 마찰운동이 열로 변하는 것으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이 실험 결과는 큰 반응을 일으켜 럼퍼드는 이에 관련되는 여러 가지 실험으로 열소설과 싸웠으나 그의 설을 인정한 것은 데이비나 영 등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로부터 40년 후 줄(J. P. Joule, 영국의 물리학자, 1818-1889)이 일에 대한 열의 양을 발견, 운동과 열의 등가성(等價性)이 확실히 제시될 때까지 열소설은 뿌리깊게 믿어지고 있었다.

연소의 이론[편집]

燃燒-理論

보일은 자기가 진공펌프를 써서 공기의 성질을 조사하던 중, 배기한 용기 속에 촛불을 넣자 곧 꺼지고, 동물을 넣어 보았더니 죽어버리는 것을 보고 공기는 어떠한 방법으로 연소나 호흡을 돕고 있는지 생각하였다. 보일의 제자 훅은 화약 속에는 진공 속에서나 또 수중에서나 무엇인지 타는 성질이 있어, 공기 중에도 아주 조금 포함되어 있는 그 물질(현재의 산소)이 연소를 돕고 있다고 말하였으나 실험으로 증명은 하지 못하였다.

같은 시대의 영국 의사 메이오(J. Mayow, 1640/43-1679)는 교묘한 실험법을 고안하여, 수중에 거꾸로 세운 플라스코 속에서 장뇌(樟腦)를 태우거나 쥐를 넣어 호흡시키거나 하면 공기의 부피가 감소한다는 것을 보였다. 그는 이 사실을 공기 속의 미립자가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바로 해석하고, 연소나 호흡은 물질과 미립자의 결합이라고 말하여, 산소의 발견에 접근하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이론을 확대시켰기 때문에 모순이 생겼으며, 그의 요절로 그의 이론은 그대로 묻히고 말았다.

당시, 금속의 회화(灰火=酸化)는 연소와 결부하여 생각되고 있지 않았으나, 보일은 밀봉된 유리그릇 속에서 금속을 가열하면 중량이 증가하는 것은, 유리를 통한 불의 입자가 금속에 붙는 까닭이라고 생각하였다.

플로기스톤설[편집]

Phlogiston說

영국에서 기계론적 자연관이 전성되고 있을 무렵, 독일에서는 아직 연금술에 대한 뿌리가 남아 있어, 의사이며 화학자인 베허(J. R. Becher, 1635-1682/85)가 3원소설을 제창하고 있었다. 그는 물과 3가지의 흙을 원소로 간주하고, 연소되는 것은 3원소 중 기름흙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의사 슈탈(F. J. Stahl, 1660-1734)은 베허의 이론을 발전시켜 플로기스톤설을 제창하였다. 그에 따르면, 모든 가연물 속에는 플로기스톤이라고 하는 물질이 포함되어 있어서, 연소할 때에는 플로기스톤은 열과 빛과 함께 공중으로 방출되고 뒤에 재를 남긴다. 숯은 플로기스톤의 덩어리이므로 나중에는 재가 거의 남지 않는다. 금속도 가열하면 플로기스톤을 잃어 금속화가 되는데, 이를 숯과 함께 가열하면 잃었던 플로기스톤을 흡수하여 본디 금속으로 다시 돌아간다고 한다.

이 설명은 물체가 연소할 때 불꽃이 되어 무언가가 도망가는 것 같은 현상과 꼭 같았고, 또 지금까지 별개로 생각되고 있던 연소와 회화(灰火=酸化)가 같은 현상이라는 것을 보여, 물질 변화의 기본적인 원리를 간단히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때문에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플로기스톤설은 점점 퍼져 나갔다.

한편, 슈탈은 생기론자(生氣論者)였으므로 호흡에 관하여서는 연소와는 전혀 별개의 현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또 연소할 때의 공기의 역할은 완전히 무시되고, 공기는 다만 플로기스톤의 용기(容器)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가스의 발견[편집]

gas-發見

슈탈과 같은 시대의 영국의 목사 헤일스(S. Hales, 1677-1761)는 발달한 물리학의 연구 방법을 식물 생리의 분야에 채택하였다. 그 때 기체대사(氣體代謝)의 연구 때문에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는 수상치환(水上置換)에 의한 가스 채집방법을 개발하였다. 이는 후에 기체화학 발달의 토대가 된다. 18세기에 이르러서도 기체는 그 종류의 여하를 막론하고 공기라고 생각되고 있었다.

처음으로 공기 이외의 가스를 발견하여 기체화학 시대의 테이프를 끊은 이는 블래크이다.

그는 의학의 학위논문 때문에 위나 방광 내의 결석(結石)의 용제(溶劑)로서 당시 유행하고 있던 알칼리의 연구에 착수하였다.

산업혁명기의 스코틀랜드에서는 급격히 직물산업이 발전하였기 때문에, 햇볕에 의존하던 표백업이 이를 따르지 못했고, 산, 알칼리는 화학 표백의 재료로서 화학자의 흥미의 중심이 되고 있었다. 블래크는 알칼리를 약으로 쓰는 데는 실패하였으나, 중량을 달아가면서 알칼리의 연구를 진행하고 있던 중, 생석회의 원료인 석회석을 구우면 중량이 줄어들고, 그 줄어든 분량이 기체의 형태로 사라져 나간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기체는 공기와 전혀 다른 성질을 보였기 때문에, 새로운 종류의 가스임을 알았다. 이 가스가 석회석 속에 고정되고 있었다 하여, 블래크는 이 가스를 고정공기(固定空氣)라고 하였다. 현재의 호칭은 탄산가스(이산화탄소, CO2)이다.

또한 탄산가스를 발견할 때 블래크는 화학 변화의 연구에 천칭(天秤)을 써서 물질 변화의 모양을 중량 변화로 조사하였다. 이것이 화학의 정량화의 시초이며, 블래크의 탄산가스 발견방법은 그 후 가스 발견방법의 모델이 되었다.

10년 후 케임브리지에서 교육을 받은 부유한 귀족 캐번디시(H. Cavendish, 영국의 물리학자·화학자, 1731-1801)는 수소를 추출하여 그 밀도를 측정하였다(1766). 이어서 광물학이 발달한 스웨덴에서는 광물학자에게 지도를 받은 젊은 약제사 셸레(K. W. Scheele, 스웨덴의 화학자, 1742-1786)가 6종류의 방법으로 산소가스를 만들어 보였다. 그러나 산소의 발견자로서는 후세에 미친 영향이 컸던 점에서 프리스틀리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식물이 호흡으로 더러워진 공기를 흡수하고, 플로기스톤이 없는 신선한 공기를 배출하는 것을 안 프리스틀리는 보다 순수하고 신선한 공기를 찾고 있었는데, 마침내 그 해결을 붉은 수은(산화수은)에서 발견하였다. 수은을 약 300℃로 가열하면 붉은 수은회가 되는데, 그것을 더욱 고온으로 가열하면 초(燭)를 맹렬히 연소시키고, 또한 호흡을 좋게 하는 순수한 공기가 생기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것이 산소이며, 이 발견을 써서 라부아지에는 반플로기스톤설을 수립하였다.

프리스틀리[편집]

Joseph Pristley(1733-1804)

영국의 화학자, 목사. 모직물의 중심지 리즈의 라사(羅紗) 직공(織工)의 집에서 태어났다. 탄산가스가 물에 녹는 데서 힌트를 얻어 수상치환 대신에 수은 위에 기체를 모아 수용성의 새로운 기체를 몇 가지 추출하였다.

그는 프랑스 혁명 때 동조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폭도들이 집을 불살라 버렸으며, 만년에는 미국으로 이주하여 그 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질량 불변의 법칙[편집]

質量不變-法則

블래크에 의하여 화학변화 때의 중량변화가 물질이 드나드는 눈금으로 되기에 이르렀으나, 화학변화의 전 과정을 통하여, 그 전후에 있어서 모든 원소의 질과 양이 불변하다는 것을 사상으로서 확립시킨 것은 라부아지에이다. 그가 이 법칙을 화학사상 최초의 화학 방정식과 함께 발표한 것은 오랜 후이지만, 그가 이룬 화학혁명에서는 그 최초로부터 이 법칙이 지도 원리로서 적용되었다.

새로운 기체가 계속 발견된 이 시대에 있어서도 아직 아리스토텔레스류의 4원소설은 널리 신봉되었고, 연소의 이론으로서는 플로기스톤설이 세상을 휩쓸고 있었다. 18세기 화학의 큰 문제였던 연소의 이론에 주의를 하게 된 라부아지에는 인(燐)·유황(硫黃)·금속 등 여러 가지의 연소·회화실험(산화)을 반복하였으나, 그 때 생성물의 중량이 본디의 것보다 반드시 증가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질량 불변의 사상에서 그는 연소·회화(산화)는 공기 중의 무엇인가가 시료(試料)와 결합하는 현상이라고 확신하고, 슈탈 이래의 플로기스톤설을 깨뜨리고 화학혁명을 이루고자 결심하였다.

1774년 파리를 방문한 프리스틀리로부터 붉은 수은을 가열하면, 연소력이 강한 기체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배운 라부아지에는 이를 사용하여 처음으로 플로기스톤에 반대하는 이론을 수립하였다.

우선 밀폐된 용기 속에서 12일간 수은을 가열하면 용기 안의 공기의 부피의 약 5분의 1이 수은에 흡수되어 수은 표면에 붉은수은이 생긴다. 남은 공기는 연소나 호흡을 돕는(지탱하는) 힘을 잃은 것이었다. 표면의 붉은 수은만을 꺼내서 중량을 단 다음 가열하면 기체가 발생하고 수은의 중량은 줄어든다. 이 기체 속에서는 물체가 격렬하게 연소하며, 이 기체를 연소력을 잃은 본디의 공기로 돌리면 보통 공기가 되었다. 이 점에서 그는 공기는 정반대의 성질을 지닌 2가지 부분으로 나뉜다는 것, 그리고 연소나 호흡을 할 때에는 그 중 한 성분이 물질에 결합하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는 이러한 성분을 산소라 이름지었다.

이리하여 연소·회화현상을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플로기스톤으로 설명할 필요는 없어졌다. 라부아지에는 이 때 공기가 단일한 것이 아니라는 데서 4원소설 중의 기(氣)의 원소성을 부정하게 되었으며, 후에 물·흙에 대하여도 원소가 아니라는 것을 보였다. 그는 화학분석이 현재까지 도달한 궁극점의 물질을 원소로 생각하고, 물질을 화합물과 단체(單體)로 나누었다. 그리하여 근대적 원소표를 만들고 원소의 조성에 바탕을 둔 화합물의 명명법을 고안하였다. 이 체계는 1세기 이상 지난 오늘날에도 수정을 약간 가한 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라부아지에[편집]

Antoine Lavoisier(1743-1794)

프랑스의 화학자. 파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법률가. 풍부한 환경에서 자라나 25세로 과학사원 회원이 되었고 화약제조 감독관을 비롯, 각종 국가경제의 운영에 참가했다. 그는 반플로기스톤설의 논쟁을 혼자서 시작하였으나 곧 새 이론체계가 『화학원리』(1789)로 출판되자 찬성하는 사람이 증가하였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이 발생하자 징세청부인(徵稅請負人)이었던 것이 화근이 되어 단두대에서 50세의 생애를 마쳤다.

근대적 원자론[편집]

近代的原子論

뉴턴은 17세기 말에 빛의 입자설을 제창하였고, 물질에 대하여서도 만유인력으로 서로 끌어당기는 최소 구성입자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로부터 17-18세기의 화학의 밑바닥에는 플로기스톤(설)까지 포함하여 입자론적 사고방식이 흐르고 있었으나, 이 경우의 입자는 질이 다르지 않은 보편적인 물질이었다.

1799년, 프랑스 화학자 프루스트(M. Proust, 1754-1826)는 당시 급속히 발달한 정량 화학 분석기술의 도움을 받아, 화합물과 혼합물을 구별하고, 화합물에 관하여 "균일 물질의 성분원소의 중량비는 항상 일정하다(定比例의 法則)"는 것을 선언하였다. 이에 대하여 같은 프랑스의 화학자 베르톨레는 화합물과 혼합물과의 사이에는 구별은 없고, 자연계에서는 성분물질들이 서로 자유로운 비율로 화합할 뿐이라고 반론하였다. 이 문제는 8년간의 대논쟁 후에 프루스트의 승리로 끝났다.

이 무렵 영국에서는 돌턴이 대기 속의 수증기에 대하여 같은 문제를 검토하고 있었다. 베르톨레는 비중이 다른 2가지의 기체가 균일하게 서로 섞이는 이유를 2가지 기체 사이의 화학적 친화력으로 설명하였으나 돌턴은 입자간에 작용하는 물리적인 힘으로 이 문제를 설명하려고 하였다.

돌턴은 공기중에서나 또 진공중에서나 같은 조건이라면 같은 양의 수증기가 증발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물이 증발하는 것은 공기와 물이 화학적으로 결합하기 때문이라고 하는 베를톨레의 생각으로는 이 현상은 설명되지 못하였다. 돌턴의 생각에 따르면, 기체입자의 주위에는 열소(熱素)가 둘러싸고 있어, 열소의 반발력으로 기체의 입자는 균일하게 분포하고 있다. 그리고 종류가 다른 기체가 혼합하였을 경우에도 종류가 다른 기체입자 사이에는 아무런 힘도 작용하지 않고 균일하게 혼합된다고 생각하였다. 이 과정을 법칙화한 것이 분압(分壓)의 법칙이다.

그리고 돌턴은 기체가 물에 녹을 경우에는 이 법칙은 해당되지 않으며, 각 기체가 고유한 용해도(溶解度)를 갖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입자는 원소의 종류만이 존재하며, 종류에 따라 입자의 무게나 크기가 달라진다는 근대적인 원자의 개념을 제출하였다.

돌턴은 수소를 단위로 하여 각 원자의 중량을 산출하고, 이에 비로소 원자량표를 만들었다(1803). 따라서 화합물을 구성하는 원자의 중량 사이에는 정수비(整數比)가 존재한다는 것이 예상되었고, 이는 실험으로써 성립이 확증되었다(倍數比例의 法則).

데이비, 베르톨레 등은 원자론을 지나치게 가설적이라는 이유로 배격하였으나, 스웨덴의 베르셀리우스는 뛰어난 실험기술로 원자량을 정밀하게 측정하여 정비례의 법칙과 배수비례의 법칙의 실험적 확립에 성공함으로써 이 가설의 옳음을 증명하였다.

1808년 돌턴은 『화학의 새체계』를 출판하여 원자론의 전모를 명백히 하였다. 그 다음해 게이 뤼삭은 공기중의 산소와 수소를 화합시켜 물을 만드는 실험을 하였다. 그 때 반응에 사용되는 2가지 기체의 용적 사이에는 항상 정수비가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기체 반응의 법칙을 발표하였다.

1811년, 아보가드로는 원자론적 입장에서 이 법칙을 설명하기 위하여, 같은 조건 아래서는 모든 물체는 같은 용적 안에 동수의 분자를 포함한다는 분자가설을 세웠다.

이 분자가설의 출현으로 근대적 원자론은 비로소 완성되었고, 원자량의 체계 확립은 물론 근대화학 발전을 이끄는 기초가 되었다.

돌턴[편집]

John Dalton(1766-1844)

영국의 물리학자, 화학자. 칸벌랜드의 쓸쓸한 농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면직물 직공. 초등 교육을 마친 뒤, 산업혁명의 중심지 맨체스터에서 사숙(私塾)을 경영하면서 과학연구에 몰두하였다. 21세부터 77세로 별세할 때까지 하루도 기상관측을 게을리 한 일이 없다. 대기의 조성에 관한 그의 흥미는 기상학에서 나왔다.

또 그의 원자론은 뉴턴의 저서에서 얻은 입자설과, 라부아지에의 저서에서 얻은 원소관(單體)이 결합한 것이다. 원자를 표시하는 데 독특한 부호를 사용하였다.

51세 때, 제1회의 은사(恩賜)메달을 왕립학회로부터 받았다.

게이 뤼삭[편집]

Jeseph Louis Gay Lussac(1778-1850)

프랑스의 물리학자이며 화학자. 아버지는 사법관. 상 레오나르에서 태어났다. 에콜 폴리테크니크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베르톨레 밑에서 기체연구를 시작하였다. 1801년, 정밀한 측정을 하여 기체의 팽창법칙을 확립하였다.

그의 업적은 유기화학 연구, 황산제조 때의 게이 뤼삭탑의 고안, 적정법의 기초확립 등 다방면에 걸친 것이었다. 소르본대학 교수, 자르단 데 플란트 교수 등의 자리에 올랐으며, 몇 차례 대의원으로 선출되었고 후에 귀족이 되었다.

아보가드로[편집]

Amedeo Avogadro(1776-1856)

이탈리아의 물리학자·화학자. 처음에는 법률 일을 하였으나 곧 물리학과 수학공부에 열중하였고, 토리노대학에서 이탈리아 최초의 수리물리학(數理物理學) 강좌의 교수가 되었다. 그의 분자가설은 발표 당시에는 인정받지 못하였고, 50년 후에 칸니차로(S. Canni-zzaro, 이탈리아의 화학자, 1826-1910)에 의하여 그 의의가 재발견되었다.

화학친화력[편집]

化學親和力

어떠한 원료에서 어떠한 제품이 생산되는가? 이것은 화학변화의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일면이다. 그러나 또 다른 한면도 옛날부터 추구되고 있었다. 그것은 그 원료로부터 어떠한 순서로 제품이 되는지 화학변화의 과정을 탐구하는 일이다.

가령 초석(硝石)에 황산을 가하면 질산(窒酸)이 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러한 원료간에 어떠한 힘이 작용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이러한 힘을 친화력이라고 한다.

17세기 독일의 화학공업가 글라우버(J.R.-1670)는 질산이 되는 화학변화의 과정을, 초석에 포함된 한 성분(칼리)이 다른 성분(질산)보다도 황산 쪽을 '보다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글라우버는 친화력을 호불호를 가리는 인간감정으로 설명한 것이다.

본디 친화력(affinity)이라는 것은 친근성(親近性)이라는 인간감정을 나타낸 것이며, 이 말을 화학에 처음으로 채택한 것은, 13세기 독일의 알베르투스 마그누스(Albertus Magnus, 스콜라 철학자, 자연과학자, 1193-1280)라고 한다.

그러나 친화력이 인간감정을 바탕으로 생각하는 동안은 친화력의 과학적 연구는 출발되지 않는다. 이 점을 처음으로 비판한 사람은 17세기 영국의 보일이었다. 이리하여 친화력의 과학적 연구의 길이 열려, 친화력의 크기를 양적으로 비교하는 일이 시작되었다. 뉴턴의 인력설로부터 많은 실험에 의하여 친화력이 강한 차례로 여러 가지 성분을 나타내어 처음으로 친화력표를 만든 이는 프랑스의 조프로아(Geoffroy Saint-Hilaire, 1772-1844)이었다.

스웨덴의 베리만(T.O.Bergman, 1735-1784)은 뉴턴의 인력설을 공공연하게 채용하여 한층 완전한 친화력표를 만들었다(1775). 그는 조프로아의 불비를 더욱 보충하면서 3만회에 이르는 실험결과 습식(濕式)의 경우와 건식(乾式)의 경우의 2종류의 표를 작성하였다.

그러나 조프로아의 표나 베리만의 표나 모두가 정해진 조건하에서는 성분물질에는 고유의 친화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점은 같았다.

그런데 프랑스의 베르톨레는 화학변화는 한 방향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반대방향에도 일어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로써 그 때까지의 친화력표는 옳지 않음을 분명히 하였다. 화학변화는 일반적으로 정역양변화(正逆兩變化=可逆反應)를 일으켜 일정한 조건 아래서 평형을 유지하고 있다는(化學平衡) 생각에 의하여 비로소 친화력 연구의 근대화가 비롯된 것이다.

베르톨레[편집]

Claude Louis Berthollet(1748-1822)

프랑스의 화학자. 파리에서 태어나 이탈리아의 토리노대학에서 의학을 배웠다. 1780년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고, 1784년 염료공장 검찰관, 고블랑직물 공장주가 되었다. 그는 염색술의 권위자인 동시에 염소의 표백 효과의 발견자이기도 하다.

한편 그는 라부아지에의 산 산소설(酸酸素說=모든 酸은 산소를 지닌다는 설)에 반대하였고, 또 염소에는 산성이 없음을 보였다(1785). 그렇지만 그는 라부아지에의 반플로기스톤설을 재빨리 인정하고(1785), 1789년에는 함께 그 새 학술을 저술했다(1887). 혁명 당시에는 초석강철·화약(염소산 칼리 사용) 등의 제조에 화학적 재능을 바쳐 혁명정부를 지지하였고, 또 에콜 폴리테크니크(고등학교) 설립(1795)에 참여, 1811년까지 화학교수로 있었다.

그는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 참가하였을 때(1798) 천연 소다가 검출(檢出)되는 호수를 발견, 그 원인을 추구하는 중에 어떠한 화학반응도 정반응과 동시에 역반응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可逆反應의 생각)과, 그 원인은 반응물질의 양(다시 말하면 濃度)에 의한다는 것, 그리고 일정한 조건 아래서는 가역반응이 평형된 상태에 있다는 것(化學平衡의 생각)을 보였다. 이는 친화력 연구를 근대적인 것으로 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1807년 파리 교외에 알크이유 학회를 만들었으며, 이 곳에서 게이 뤼삭, 테나르(1777-1857), 비오(1774-1862), 말뤼스(1775-1812) 등 다음 세대의 과학자가 나왔다. 주요 저서로는 『화학 친화력의 법칙에 관한 연구』(1801), 『화학 정력학론(精力學論)』(1803) 등이 있다.

전류의 발견[편집]

電流-發見

18세기까지 탐구해 오던 정전기와는 다른 전기, 즉 전류를 발견한 것은 이탈리아의 파비아대학 물리학 교수 볼타였다.

그는 런던 왕립학회(협회)로 보낸 편지에서 전류를 만들어내는 장치(볼타 電堆)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30, 40, 60 또는 그 이상의 은판(銀板)을 한 장씩 주석판 또는 아연판 위에 겹친다. 그리고 물 또는 소금물, 나무 잿물 등 양도액(良導液)에 적신 두꺼운 종이 또는 가죽을 2개의 금속 사이에 끼운다. 3개의 도체를 모두 이와 같은 순서로 배열한다는 것, 이것이 나의 새 장치의 조립방식의 전부이다."

그리고 볼타는 이 장치가 효과는 약하지만 라이덴 병(甁)과 흡사하며, 팔에 쇼크를 주는 것으로 보아 미리 외부로부터 전기를 주는 일 없이 연속적으로 전기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볼타장치의 원리는 다른 금속 사이에 도체의 액을 적신 것을 끼운다는 것이다. 이 원리의 착상을 볼타는 갈바니로부터 얻었다.

볼로냐대학의 갈바니는 개구리 다리의 경련을 관찰하고 그 원인을 '동물전기'라 생각하였다. 갈바니의 논문을 받은 볼타는 처음에는 이 동물전기설을 받아들였으나 마침내 그 원인이 동물전기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그는 2개의 금속 접촉이 바로 개구리 다리의 근육의 경련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1792).

그리고 여러 가지 다른 종류의 금속(또는 목탄도 포함하여)이 어떤 이치로 전기를 발생시키는가를 아연, 주석, 납, 철, 구리, 백금, 금, 은, 석묵(石墨), 숯 등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금속계열(電氣化學系列)의 표를 1794년에 발표하였다. 이 계열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일수록 전기 발생이 크다.

이어 볼타는 근육과 신경을 젖은 천(布), 두꺼운 종이 등으로 바꾸어 갔다. 이 생각이 결국은 전류의 발견과 전퇴(電堆) 발견에 연결된다.

갈바니[편집]

Luigi Galvani(1737-1798)

이탈리아의 의사·해부학자. 볼로냐에서 태어나 볼로냐대학에서 의학을 배우고 후에 해부학 교수가 되었다.

1780년, 해부한 한 마리의 개구리를 기전기가 놓인 테이블 위에 놓고 우연히 메스의 끝으로 가볍게 개구리 다리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 때 모든 근육이 갑자기 경련을 일으킨 것처럼 수축되고 동시에 기전기에서 전기 불꽃이 튀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이 원인으로서 2가지를 생각할 수 있었다. 한 가지는 동물의 몸 자체에 따른 현상이고, 다른 한 가지는 금속을 접촉시켰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다. 갈바니는 전자를 따랐다. 동물에는 뇌수에서 나와 신경을 통하여 근육으로 흘러 들어가는 '동물전기'라는 것이 있어 그것이 금속에 의하여 회로가 만들어졌을 때 작용한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을 그는 근육을 바깥쪽으로, 신경을 안쪽으로 한 라이덴 병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였다. 1791년 갈바니는 이상의 모든 결과를 「근육운동에 대한 전기작용에 관하여」라고 제목을 붙여 볼로냐 과학아카데미의 잡지에 발표하였다.

그 후 갈바니의 설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 볼타와의 사이에 논쟁이 있었으나, 그는 언제나 자기 주장을 옹호하였다. 만년에는 부인의 사망과 실직으로 볼타의 전퇴(電堆) 발명을 못 본 채 1798년에 사망하였다.

볼타[편집]

Alessandro Volta(1745-1827)

이탈리아의 전기화학자. 북이탈리아의 코모에서 태어나 그 곳 공립학교에서 배운 뒤 이어 코모의 왕립학원을 졸업하였다. 1774년 23세로 코모의 왕립학교 물리학 교수가 되었다. 최초의 논문은 1769년 21세 때에 발표한 「전기화(電氣火)의 인력에 대하여」였다. 이 논문과 다음 논문으로 그는 프랭클린의 생각을 빌어 모든 물질은 양음 전기(陽陰電氣)의 평형상태(平衡狀態)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1775년에는 오늘날 쓰이고 있는 전기쟁반(電氣盆)을 발명하였다.

또 1776년에는 전기불꽃으로 메탄가스를 폭발시키는 장치를 발명하고 전기 피스톨이라고 이름지었다. 이 원리는 후일, '볼타의 유디오미터(1790)'가 되었다.

1779년, 파비아대학 물리학교수가 되었으며, 이후 40년간 이 곳에 봉직하였다. 그 동안 1782년에는 예민한 금박험전기(金箔驗電器)가 붙은 축전기(蓄電器)를 고안하였다. 1792년에는 갈바니의 동물전기(動物電氣)의 생각을 비판하였고, 많은 실험 결과 금속이 어떠한 형태로 결합되었을 때 전기를 발생하는가를 조사하여 1794년에 전기화학 계열의 표를 발표하였다.

1801년, 나폴레옹의 초청으로 파리를 방문, 프랑스 학사원의 대집회에서 전퇴(電堆)의 실험을 해 보였으며, 나폴레옹은 그에게 금메달을 주었다. 만년에는 각종의 많은 영예를 받았고, 1810년에는 백작이 되었다. 전압의 단위 볼트(V)는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전기화학의 시초[편집]

電氣化學-始初

볼타의 전퇴 발명의 소식을 접한 런던의 과학자들, 니콜슨(1753-1815)이나 칼라일(1768-1840)은 즉시 전퇴를 조립하여 전류의 응용에 착수, 1800년에는 전류로써 물을 분해하는 실험을 처음으로 실시하였다. 그리고 음극(陰極)에서 발생하는 가스가 수소가스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리하여 볼타의 전퇴를 바탕으로 한 화학작용의 연구는 영국을 비롯하여 독일, 프랑스, 스웨덴에도 동시에 퍼졌다. 리터(1776-1810)가 볼타의 전퇴를 바탕으로 물의 전기분해를 하여 산소와 수소로 나누었고, 동시에 이것들을 반대로 물로 합성시켰다. 스웨덴에서는 베르셀리우스와 히싱거(1766-1852)가 염류(鹽類)를 전기 분해하여, 알칼리는 음극에, 산은 양극에 생기는 것을 발견, 산과 알칼리는 서로 반대의 전하(電荷)를 지닌다는 것을 실증하였다. 베르셀리우스는 이것이 동기가 되어 후에 전기적인 화학 친화력론을 완성하였다.

니콜슨과 칼라일이 시작한 전기분해의 유행(갤버니즘=galvanism) 속에서 가장 빛나는 성공을 거둔 이는 영국의 데이비였다. 그는 알칼리 금속원소, 알칼리 토류 금속원소의 발견자이다. 그는 알칼리염의 용융분해를 처음으로 생각해 내었다. 그는 칼리염(포타시)과 소다염(소다) 등, 알칼리염류(alkali 鹽類)의 분해(分解)를 시도(試圖)하여 칼륨과 나트륨의 단리(單離=원소를 화합물에서 단독으로 분리하는 것)에 성공하였다.

칼륨과 나트륨의 격렬한 성질은 화학자들에게 큰 놀라움을 주었고, 데이비의 명성은 온 유럽에 퍼졌다. 1년 후(1808), 그는 다시 바륨, 마그네슘, 칼슘, 스트론튬을, 바라이터(重土), 마그네시아, 석회, 스트론티아 등의 용융 전기분해로 단리(單離)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라부아지에의 교과서에 따르면 그 이상 분해할 수 없는 '원소'로 생각되고 있었다.

데이비[편집]

Humphry Davy(1778-1829)

영국의 화학자. 콘월의 펜잔스 부근에서 태어났다. 16세에 아버지를 잃은 그는 생계를 위하여 약제사의 조수가 된 것이 그에게 화학의 흥미를 갖게 하였다. 1798년 프리스틀리의 기체연구소에 들어갔다. 다음해 그는 얼음을 마찰시켜 열을 발생함으로써, 라부아지에 등이 '열은 물질'이라고 하는 설에 대하여, 열은 운동이라는 것을 증명한 유명한 실험을 발표하였다. 또 같은 해, 프리스틀리가 발견한 아산화질소(亞酸化窒素)는 흡입이 가능하여 마취의 역할을 하는 것을 발견하였고, 또한 안면근(顔面筋)을 경련시켜 웃는 표정을 만든다는 사실을 밝혀내었다(1800). 이 가스의 성질의 발견은 기체연구소를 매우 유명하게 만들었다.

데이비는 칼라일(1768-1840), 니콜슨(1753-1815)의 물의 전기분해가 발표(1800년 6월)되자 즉시 이를 실험하였다. 이는 마침내 데이비의 전기분해 실험과 알칼리금속의 발견으로 연결되었다. 데이비는 전기화학에 전념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술에 대한 관심도 컸으며, 특히 농업에 대한 관심은 1813년에 『농예화학 연구(農藝化學硏究)』의 출판에까지 이르렀다.

1812년, 왕립 연구소장(초빙 입소한 지 2년되던 해)직에서 물러나, 다음해 조수 패러데이를 데리고 유럽여행을 하였고, 귀국 후 탄광부용의 안전 등을 발명하였다(1816). 1820년에는 왕립학회 회장이 되었다.

이 사이에 데이비의 화합물을 전기분해할 수 있다는 생각은, 반대로 화합물이 전기의 힘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 화학친화력의 정체 탐구로 유도되어, 1807년에 발표된 「전기의 약간의 화학작용에 관하여」라는 논문에서 화학친화력(化學親和力)의 정체(正體)는 전기력과 같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화학친화력을 전기에 의하여 계통적으로 설명하는 일은 베르셀리우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1826년 이래 건강이 나빠져 데이비는 51세 때에 제네바에서 사망하였다.

베르셀리우스[편집]

Jons Jacob Berzelius(1779-1848)

스웨덴의 화학자. 링케핑 근방의 웰즌다에서 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807년, 스톡홀름대학의 의학 및 약학교수가 되었고, 그 후 화학교수가 되었다.

초기의 논문에는 전기분해에 관한 것이 많다. 베르셀리우스는 돌턴의 원자설을 근거로 하여 각종 화합물을 분석하고, 많은 원소의 원자량을 결정하였다. 또 화합물 구성에 관하여 유명한 2원설(電氣化學的二元說)을 제창하였다. 규소(硅素), 탄탈(탄탈룸), 지르코늄 등을 산화물로부터 분리시킨 외에 세륨, 셀렌, 토륨을 발견하였고, 백금, 플루오르, 텔루르 등의 새 화합물도 연구하였다. 그 밖에 촉매(觸媒)의 개념의 확립과 라틴명(名)을 머릿글자로 하는 오늘날의 화학기호를 만드는 등 그의 공적은 매우 크다. 만년에는 많은 영예를 받다가 1848년의 여름에 스톡홀름에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