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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컴퓨터·환경·첨단·지구과학/과학의 발달/과학의 발달/산업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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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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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業革命

산업혁명이란 기술사상으로는 인류가 오랫동안 사용하던 연장을 버리고 기계를 널리 사용하게 되는 것을 뜻한다. 이 연장에서 기계로의 이행으로 말미암아, 산업사적으로는 매뉴팩처(工場制手工業)에서 기계제 대공업으로의 발전이 촉구되고, 경제사적으로는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확립되었다. 이 변혁은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에 걸쳐서 영국에 일어났고 이어 유럽 대륙의 여러 나라와 미국에도 퍼졌다.

산업혁명이라는 말이 보급되기는 1884년 영국의 경제학자 아놀드 토인비(A. Toynbee, 1852-1883)의 유고집(遺稿集) 『18세기 영국 산업혁명 강의』(1884)가 출판된 뒤부터이다. 그 이전에 엥겔스(F. Engerls, 1820-1895)가 『영국 노동자 계급의 상태』(1845)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데, 이것이 산업혁명이라는 말이 사용된 최초의 예이다. "영국에서 노동자 계급의 역사는 전세기의 후반, 증기기관 및 방적기계의 발명과 함께 시작된다. 이 발명들은 산업혁명, 즉 모든 부르주아 사회를 변혁하고, 그리고 그 세계사적 의의가 오늘날에 이르러 비로소 인식되어 가고 있는 혁명에 동기와 원인을 가져다 주었다."

토인비는 산업혁명이라는 말에 18세기 영국이라는 설명을 붙여서 사용하였고, 엥겔스는 영국이 그 고전지(古典地)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산업혁명을 널리 농업적 사회에서 공업적 사회로의 변화, 기술의 급속한 진보로 인한 사회의 변혁 등으로 광의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고전적인 영국 산업혁명을 제1차 산업혁명,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엽에 이르는 각국의 중공업의 발전을 제2차 산업혁명이라고 하는 설 등은 바로 그 까닭이다. 여기서는 엥겔스, 토인비 이래의 통설에 따르기로 한다.

영국 산업혁명은 1760년에 시작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그것은 조지 3세(재위 1760-1820)의 치세였다는 편의적인 구실뿐만이 아니고, 1760년 전후에 기술적 및 경제적으로 매우 중대한 변혁이 시작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자본주의적인 생산 양식의 확립은, 매뉴팩처에서는 노동력에서 출발하였지만, 대공업에서는 노동 수단에서 출발한다. 대공업의 노동 수단인 기계는 원동기·전력기(傳力機)·작업기의 세 가지로 구성되고 있는데, 이 중에서 작업기가 기본이 된다. 작업기가 연장에서 기계로, 매뉴팩처에서 대공업으로 발전하는 출발점이 되었고, 따라서 산업혁명의 기점이 된 것이다.

작업기의 도입은 인간생활에 필요한 의류를 생산하는 방직 부문에서 비롯하였다. 방직 작업은 매우 복잡한 노동과 많은 노동력을 요하는 과정이다. 이 방직 작업의 기계화는 16세기경부터 시도되었으며, 그 때까지의 발명을 통합하여 실현한 것은 18세기의 60년대였다. 작업기의 발달은, 원동기의 발달을 요구하였다. 원동기는 처음에 매뉴팩처에서 이어받은 수차(水車)를 사용하였으나 대공업용의 만능적 원동기를 요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증기기관이 발명되고, 대공업 스스로의 원동기가 성립되었다. 산업혁명의 말기에는 육상과 해상의 수송이라는 일종의 작업기에 증기 원동기가 사용되었다.

이리하여 원동기가, 동일 종류 또는 타 종류의 몇 개의 기계를 움직이는 기계의 협업, 즉 기계 체계가 발생한다. 기계 체계의 발달에 따라서 기계를 제작하기 위한 작업기, 즉 공작기계가 출현하였다. 그리고 기계 재료로서의 철의 사용 증대는 야금 기술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이 때까지의 철야금은 숯과 수력을 이용하고 있었으나 코크스와 증기기관에 의한 야금으로 옮아 갔다. 더구나 방적업의 발전은 피륙의 마무리에 소요되는 염색·표백 부문의 변혁을 촉진시켰다. 산업혁명의 말기에 무기산(無機酸)·알칼리·표백제·매염제(媒染劑)를 다각적으로 생산하는 화학콤비나트(combinat)가 출현하였다.

이상은 산업혁명에 있어서 공업 발전의 기술적 측면이나 산업혁명의 배경에 농업 개혁 및 교통업의 발전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만일 농업 개혁에 의하여 농업의 합리화가 진척되지 않고 농업 인구가 감소되지 않았더라면 산업혁명은 불가능했으리라고 한다.

18세기 중엽까지의 개방경지 제도로는 토지 생산의 향상은 곤란하다 하여 새로운 인클로저법에 의한 개방 경지제도 폐지, 근채 작물을 포함한 윤작 실시, 품종 개량을 수반하는 가축 사육, 정부의 지주에 대한 토지 개량 자금 대여 등이 있었다. 이 농업 개혁의 주창자가 아더 영(1741-1820)이다.

이리하여 16세기의 인클로저 운동 이래 공업 부문에 있어서 독립 소생산자와 더불어 영국 국민의 중견층을 이루고 있던 독립 자영 농민(요먼리)은 18세기 중엽 후의 농업개혁 중에 차차 말소되었다.

그 시기는 마침 산업혁명 및 이에 계속되는 자본주의의 최성기에 해당한다. 그리하여 생산에 대한 자본의 자유 투하를 가능케 한 것이 일면 기계제 대공업이며, 다른 면에서는 자본가적 차지농업(借地農業)이었다. 따라서 공업과 농업에 있어서 2개의 혁명은 한꺼번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영국의 역사가 트레벨리언(G. M. Trevellyan, 1876-1962)은 "교통을 개량하지 않고서는 산업혁명도 농업혁명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고 기술하고 있다.

산업혁명 전의 도로의 형편없는 상황은 영의 여행기에도 잘 나타나 있다. 18세기 중엽의 산업혁명의 개시와 더불어 원료·제품 수송량의 증대, 농업개혁에 의한 농산물 시장의 확대에 따라 우선 도로교통의 개량이 촉진되었다. 유료도로가 영국 전토에 건설되고, 도로공사의 기술이 개량되어, 개량된 도로 위를 4륜마차와 역마차가 빈번히 왕래하였다.

수로교통은 도로교통보다 빨리 발달하였으며, 특히 연안항행은 18세기 중엽까지 도로의 발달을 막았을 정도였다. 운하 건설은 프랑스보다 1세기 반이나 늦어져 있었으나 1760년대부터 급속히 발달하여 1890년대의 이른바 운하시대를 이루었다. 그 기점이 된 것이 1761년에 개통된 워슬리 운하이다. 건설을 추진한 귀족은 브리지워터이며, 그는 노새를 대신한 값싼 운하 수송망 건설의 선구자로서 '영국내륙 항로의 아버지'라 불린다. 그와 협력하여 근대의 도로공업을 개척한 기술자는 브린들리이다.

요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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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omanry

영국의 봉건사회가 해체되어 가던 16세기경에 등장하여, 19세기의 전반에 제2차 인클로저 운동 중에 소멸된 독립 자영 농민과 그 계층이다. 요먼이라고도 한다. 어원은 본디 명예 봉사, 특히 군사적 봉사를 한 봉건적인 신하를 의미하였다.

16세기경부터 화폐가치의 전락에 따라 봉건지대(封建地代)로부터 사실상 해방되고, 농민적 토지 소유권을 사실상 획득한 광범한 계층을 요먼리(독립 자영 농민)라고 부르게 되었다. 대체로 중 정도의 면적의 토지를 자기 및 가족의 손으로 경영하고 있었다. 제2차 인클로저 운동에 따라 가축의 방목권을 잃어 차차 감소되었으나, 대농업 자본가가 되기도 하고 토지를 매각한 자본을 바탕으로 하여 공업으로 전환한 자도 있었다.

인클로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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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closure

미개간지·공동지·개방경지 등을 울타리나 그 밖의 다른 경계표지로 둘러싸서 사유지임을 명시하는 것을 영국에서는 인클로저라고 한다. 물가상승에 대한 지주의 대책이며, 보통 제1차와 제2차의 2회로 구분한다. 16세기부터 17세기 반까지의 제1차는 '양치기'를 목적으로 하였고, 17세기 중반 이후, 특히 18세기 중반 이후의 제2차는 "양이 들어가지 못하게 둘러싸는" 농업경영의 집약화를 목적으로 하였다. 후자 쪽에서는 의회에 청원하여 각 지방에 방책의 법률을 통과시키는 방법이 보급되었으나, 1845년 이후 이 절차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워슬리 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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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sley 運河

1759년 영국의 브리지워터공(A.Bridgewater, 1736-1803)이 자기가 소유하고 있던 워슬리의 탄광으로부터 맨체스터까지 7마일간을 건설한 운하. 1761년에 개통되었는데, 그 결과 맨체스터의 석탄 가격은 반감되었다고 한다. 그 성공에 힙입은 공은 맨체스터·리버풀 간의 운하(1767년 완성), 트렌토강과 머지강을 잇는 그랜드 트렁크 운하(1777년 완성)를 건설하여, 영국에서 운하붐을 불러일으켰다. 대운하의 건설은 산업혁명의 전조이며, 운수혁명의 큰 흐름을 일으킨 물길이 되었다. 워슬리 운하는 브리지워터공 운하라고도 한다.

브린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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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Brindley(1716-1772)

영국의 기술자, 운하 개척자. 가난한 집에서 자라 학교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하였다. 배수용 증기 펌프의 개량, 보일러용 급수 장치의 발명 등에 참여하였고, 1759년부터 브리지워터 공작(1736-1803)을 위한 워슬리 운하, 맨체스터·리버풀 간의 운하, 그랜드 트렁크(대간선이라는 뜻) 운하를 건설하였다. 운하의 최종 공사 중 초인적인 노고로 사망하였다.

방직기의 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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紡織機-發明

산업혁명 전의 영국 섬유공업에서는 수세기 동안, 양모공업이 왕좌를 차지하고 있었다.

"양이 인간을 먹어 치운다"고 하였다. 방책이 시작되면서부터 국내에 양모공업이 일어나, 오래도록 수출산업의 으뜸을 차지하고 있었다. 양모공업에 이어 마(麻)공업 및 견(絹)공업이 있었고, 목면(木綿) 공업은 16세기 이래 최하위의 빈약한 존재였다. 그 목면공업이 1780년대부터 급속히 발전하여 산업혁명의 주역을 맡게 되었다.

1770년까지 영국의 면제품은 아직도 거의 인도로부터 수입되고 있었다. 날염(捺染)된 꽃모양의 면포를 차차 애용하게 되어 국산 모직물업을 압박하기에 이르렀다. 의회는 1700년, 1719년 거듭하여 인도 면포의 수입을 금지하였다. 이미 목면공업의 싹이 트고 있던 랭커셔는 그 발전에 가장 적합한 곳이었다. 리버풀항과 가깝기 때문에, 원료는 매우 저렴한 수송비로 동서 인도로부터 도착하였다. 이 지방에 마침내 1760년대부터 면방직기의 발명이 공업화(工業化)되기 시작했다.

기계북의 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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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유공업을 변혁시킨 첫째 발명은 케이의 기계북이었다. 천을 짜는 작업을 기계화하는 요점은, 틀에 건 날실 사이로 씨실을 나르는 북을 움직이는 방식이다. 랭커셔에서 태어난 케이는 모직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북을 움직이는 장치를 연구하였다. 이 때까지의 북은 두 손을 써서 이 손에서 저 손으로 던져 보내는 동작을 거듭하였다. 기계북은 이와는 달리 오른손으로 줄을 당길 때마다 북은 북집에서 북집으로 건너간다. 따라서 왼손은 자유로워졌으므로 바디집으로 씨실을 다지는 일을 할 수 있어 두 손의 분업이 가능해진다. 이 기계북으로 천을 짜는 속도가 배가 되었고, 한 사람이 폭이 넓은 피륙도 짤수 있게 되었다.

이리하여 직포의 능률이 오르자, 방사는 부족하게 되고 가격은 올랐다. 방적(紡績) 공정은 모두 (1) 섬유의 늘임, (2) 꼼, (3) 감기의 세 가지 작업으로 되어 있다. 이 세 작업을 한 가지씩 하지 않고 동시에 하면 항상 같은 조작을 연속할 수 있다. 이미 17세기에는 플라이어(flyer)가 달린 족답(足踏)물레가 보급되었지만 (1)의 늘이기 작업은 수동 작업으로 남아 있었다. 목수이며 발명가인 존 와이아트(J. Wayat, 1700-1766)는 몇 개의 롤러 사이에 섬유나 조사를 통하여 잡아늘이는 방법(롤러 드래프트라고 한다)을 발명하고, 루이스 폴의 이름으로 1738년에 특허를 얻었다.

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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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Kay(1704-1764)

영국의 직조공, 기계북의 발명자. 랭커셔의 베리에서 태어나, 1730년경부터 북의 제작에 종사하고 있던 중 기계북을 발명하고 1733년 5월 26일 특허를 받았다. 그러나 이 발명으로 실업을 두려워한 직조공들의 습격을 받아, 그는 프랑스로 도피하였다가 그 곳에서 쓸쓸히 죽었다. 1908년에야 그의 발명의 혁명적 의의가 인정되어 고향인 베리에 그의 기념비가 세워졌다.

제니 방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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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nny 紡績機

기계북과 와이아트(1700-1766)의 발명은 1760년대까지는 거의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다. 케이는 동업자들에게 미움을 사서 프랑스로 도피하였고, 와이아트와 폴의 공장은 파산하였다. 이러한 발명은 시기적으로 너무 일렀다. 섬유공업에 혁명을 가져온 방적기는 1768년에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하그리브스의 제니 방적기와 아크라이트의 수력 방적기이다. 면포의 수요는 증대하고 면섬유의 방사가 모든 올실 중에서 가장 기계화하기 쉬웠다.

제니기(機)를 롤러 대신에 누름판(押板)이 달린 활동차(滑動車, carriage)의 장치를 갖추고 늘이기와 꼬기의 손작업에서 해방시켰다. 사람의 노동은 오른손으로 방추(紡錘)를 회전시키는 방차(紡車)를, 그리고 왼손으로 활동차를 앞뒤로 움직이는 동력의 역할만으로 충분하였다. 방추는 처음에는 8개, 후에는 16개, 그의 생전에 80개에 이르게 되었다. 제니는 소형의 것이라도 이 때까지의 6-8인분의 일을 하는 기계로서 급속히 보급되었다.

하그리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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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Hargreaves( ?-1778)

영국의 제니 방적기의 발명자. 전기(傳記)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으며, 1740-1760년 사이에 랭커셔의 블랙번 부근에 살면서, 직조공과 목수일을 겸하고 있었다. 1762년에 어느 날 염면포업자(捺染綿布業者)에게 고용되어 소면기(梳綿機)의 제작에 종사하던 중 방적기의 발명에 착수하였다.

제니기의 발명은 옆으로 누운 방차(紡車)가 얼마동안 돌아가자 두 손가락으로 잡고 있던 실이 자연히 꼬아지는 것을 보고 그것을 착상하였다고 한다. 1767년에 몇 대의 방적기를 제작하였다가 그 곳 노동자들의 습격을 받아 기계가 파괴당하였다. 그리하여 1770년에 특허를 얻어, 다른 곳에서 널리 기계를 팔려고 하였으나 특허를 얻기 전에 판매하였기 때문에 특허의 권리는 무효가 되었다. 하그리브스의 사망 후 10년째 되던 해에는 영국에서 2만대 이상의 제니기가 사용되었다. 얼마 안 가서 지방에서는 양모 공업이 거의 없어졌고, 무명실이 제니기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수력 방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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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力紡績機

제니기는 노동자가 자기 집에서 자기가 돌리는 가내 공업의 기계로 보급되었다. 그러나 이미 인간이 단순한 동력으로만 일하게 되었고, 이 동력도 수차(水車)로 바뀌어, 자본가들이 세운 공장으로 집중되었다. 이 무렵 아크라이트의 수력 방적기가 나왔다. 그의 최초의 특허는 1769년, 제2의 특허는 1775년이었다.

수력 방적기는 처음부터 기계적 동력을 예정한 구조를 갖추어, 비로소 늘이기·꼬기·감기의 세 공정을 동시에 기계화한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이 이발사의 제자로부터 나이트가 된 발명 기업가의 정체는, 마르크스가 평한 대로 '남의 발명에 대한 최대의 도적'이었던 것이다. 그의 발명은 와이아트(1700-1766)의 롤러 드래프트를 비롯해 여러 가지 남의 발명을 교묘히 결합한 것뿐이었다. 법정은 그의 방적기가 하이즈의 발명이며, 협력자였던 시계공 케이의 조립품이었다는 것, 잇단 그의 급면기(給綿機)·소면기(梳綿機)·조방기(粗紡機)의 발명도 모두 하이즈와 그 밖의 도용임을 폭로하였다. 그의 특허는 1785년에 무효로 선고되었다. 그러나 특허권은 박탈되었지만 그의 공장은 이미 수에 있어서나 규모에 있어서도 영국 최대의 것이 되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진정한 발명가들은 겨우 터닦기의 수고만 거듭하여온 데 반하여, 이 대공장 자본가만은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였다. 아크라이트야말로 산업 혁명이 낳은 새로운 인간의 타입을 나타내고 있다.

아크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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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r. Richard Arkwright(1732-1792)

영국 무명 공업의 창시자. 가난한 부모의 7형제 중 막내로 태어나 이발사·가발공으로 일했다. 머리카락의 염색으로 얻은 소자본을 바탕으로 하여 무명 방적기의 발명을 시작하였다. 1769년에 처음으로 그 특허를 얻어, 두 친구와 함께 니드 스트래트 앤드 아크라이트 상회를 창립하여, 1771년부터 수력을 동력으로 한 큰 방적공장을 각지에 세웠다. 1775년에 제2의 특허를 얻었는데, 그의 발명은 폴과 와이아트의 기계의 확대 구조를 보통 족답식 방차의 꼬기와 감기의 구조와 결합한 데 불과하였다. 그리하여 특허의 소송을 받아, 1785년에 패소하였다. 그러나 그의 기계는 처음부터 수차 동력을 예정하고 있었으므로, 수력 방적(워터 프레임)라고 불리었으며, 무명 공업에 혁신적 역할을 할 수가 있었다. 따라서 특허소송에서 패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50파운드나 되는 유산을 남겼고, 1786년에는 나이트의 작위를 받았다.

하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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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mas Highs(생몰연도 미상)

수력 방적기의 진정한 발명자라고 알려진 영국의 직업인. 랭커셔의 방직업자가 소송한 1785년의 재판에서, 아크라이트가 자기가 발명자라고 주장하였던 방적기를, 1767년에 이미 고향인 리에에서 제조하였다고 말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하이즈는 하그리브스 이전에 제니기까지도 발명하였다고 한다. 제니라는 이름은 사실은 하이즈의 딸의 이름이었을 것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뮬 방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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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le 紡績機

수력 발전기에 이어 크롬프튼의 뮬 방적기가 나왔다. 제니기에 수력 방적기의 2개의 원리를 결합시킨 혼성 기계이다. 실을 늘이는 롤러를 수력방적기에서 전후로 움직이는 활동차는 제니기에서 따온 것이었다. 수력 방적기로 만들어지는 실은 질기나 너무 굵고, 제니기로 만들어진 실은 가늘기는 하나 끊어지기 쉬웠다. 이에 대하여 뮬기는 질김과 동시에 극도로 가는 실을 만들 수 있는 결정적인 발명이었다.

뮬기는 처음에 제니기와 같이 소형의 나무 제품으로서 농가에서 사용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1783년경 차차 기어와 금속제 롤러를 갖춘 대형기의 제작이 시작되었다. 뮬기(機)는 1811년에 공업지구에서만도 400만추(錘)에 달하였고, 제니기를 구축하였다. 처음에는 1대에 48추뿐이던 것이 1800년에는 그 자신이 500추의 것 2대를 제작하였고, 20년 후에는 900추를 가진 것이 나왔다.

뮬기는 또한 방적 공정만이 아니고 직포 공정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미 수력 방적기는 동인도에서 수입되고 있던 캘리코의 제조를 가능케 하였다. 또 뮬기는 극히 가는 무명실을 생산하였기 때문에 지금까지 인도 노동자의 숙련에만 의존되던 섬세한 무명모슬린의 제조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랭커셔와 글래스고 등에서도 무명 모슬린의 생산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베틀의 개량이 필요하게 되었다.

크럼프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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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uel Crompton(1753-1827)

영국의 방적기 '뮬'의 발명자. 랭커셔의 소(小)자작농 집에서 태어나 21세 때부터 방적기의 제작을 하였다. 제니기의 개량을 뜻하여 1779년에는 날실·씨실 어디에나 적합한 모슬린차(車)라고 하는 방적기를 만들었다. 그것은 이 때까지 인도의 특산이었던 모슬린의 독점을 불가능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이 기계는 후에 널리 뮬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뮬이라 함은 수탕나귀와 암말의 잡종인 '노새'이며, 그의 기계가 아크라이트의 수력 방적기와 하그리브스의 제니 방적기와의 혼혈아인 데서 유래하였다. 그는 특허를 받지 않고 기계의 비밀을 사용료를 받고 공개하였으나 수입은 매우 적었다. 그리하여 재차 1791년에 작은 방적 공장을 개설하였으나 사업은 실패하고 말았다. 의회로부터 수여된 일시금이나 친구가 기부한 연금도 부채의 지불에 소비되어, 빈곤 속에 사망하였다.

역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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力織機

이미 완성된 기계가 방적에는 사용되고 있는데도 한편에서는 수직(手織)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직조공, 특히 무명 모슬린의 직조공의 임금은 급등하여 방적업자는 방사를 국내에서 짜지 않고 수출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방적기의 발달이 방적과 직조 사이의 균형을 부수었던 것이다. 이 균형을 유지하고 직조가 방적에 따르기 위하여서는 사람의 손에 의하지 않고 다른 동력에 의한 역직기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 실현은 카트라이트의 역직기로부터이다.

역직기의 보급은 19세기를 맞이하였을 때 시작되었다. 방적 공장이 이미 수백만 추를 헤아리는 데 대하여, 영국 전국에서, 또 수백대의 역직기의 위력은 참으로 혁명적이었다. 15세의 소년이 감독하는 역직기 2대는, 숙련된 직조공이 기계북을 써서 1필을 짜는 동안에 3필반을 짜 내었다.

방적기·역직기의 발달은 섬유 공업에서 방직 이외의 부문에도 변혁을 가져왔다. 날염은 이 때까지만 하여도 부조(浮彫)된 평판에 의하였다. 1783년에 실린더 날염기가 발명되고부터는 1대의 날염기는 실로 날염공 100인분을 해치웠다. 몇 개의 대날염 캘리코 공장이 랭커셔에 건설되었다. 그와 동시에 표백, 염색 공정이 화학 발전의 혜택을 입게 되었다. 이리하여 섬유 공업 전체가 복잡한 유기체의 기관과 같이 상호의 연대와 균형을 유지하면서 발전하였다. 여기서 대공업의 특징을 볼 수 있다.

카트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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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muind Cartwright(1743-1823)

영국의 역직기 발명가. 노팅엄셔의 맨험에서 태어나 옥스퍼드대학에서 배웠다. 성직에 취임하여 40세까지 기계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1784년 우연한 기회에 면직물업에 기계를 응용하는 데 흥미를 느끼고, 1785년에 최초의 역직기의 특허를 받았다. 그 후 1787, 1792년에도 그 개량에 특허를 받아 근대 역직기의 기초를 열었다. 그의 역직기는 수직의 기본 작업의 대부분을 기계화하였으며, 몇 개의 중대한 결점이 있었지만, 동력을 써서 직물을 짤 수 있다는 가능성을 처음으로 보였다. 그가 발명한 직기는 돈커스터의 그의 공장과 그 특허 사용이 허락된 맨체스터의 사람들에 의하여 조업되었다. 이 기계들은 그들의 공장이 역직기의 발명을 증오하는 노동자들에 의하여 불살라질 때까지 사용되고 있었다. 그의 업적은 처음에는 아무런 보답도 받지 못하였으나, 그 후에 1809년에 이르러 의회에서 1만 파운드의 상금을 받게 되었다.

철과 석탄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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鐵-石炭-時代

하나의 산업 부문에서 생산방법에 혁신이 발생하면 다른 산업 부문에서도 같은 혁신이 일어난다. 방직업에서의 작업 기계가 등장한 것이 발단이 된 영국의 산업 혁명은 드디어 다른 모든 생산 부문에도 기계 도입을 재촉하였고, 대공장적 규모에 의한 기계 공업의 발달을 가져왔다. 대공업의 원동기라고 할 증기 기관의 기술 진보가 이 경향을 촉진시켰다.

이와 같은 기계적 생산으로의 이행은 거기에 대응하는 새로운 에너지 기반의 창조를 요구하였고, 새로운 기계의 제작을 위한 새로운 재료와 그 생산 방법을 요구하였다. 새로운 기계라 함은 지난날의 목제 기계에 대체되는 금속제 기계, 즉 철제 기계인 것이다. 새로운 에너지 기반이란 지난날의 땔감·목탄에 대체하는 석탄 자원이다. 종래의 목탄 연료에 의한 제철 기술로는 급속히 증대해 가고 있던 금속제 기계를 위한 재료로서의 철을 대량으로 생산해 낼 힘이 없었으므로 기계 공업의 발달과 더불어 제철 기술의 변혁이 요구되었고, 그 결과로 석탄 → 코크스에 의한 새로운 제철법이 생겼다. 이리하여 방적기 및 증기 원동기의 발명에 이어, 제철업의 기술 혁신이 산업혁명사상의 제3의 단계를 이루었고, 기계 공업의 성숙을 유도하였으며, 나아가 철도·조선·교량 등 운수의 모든 부문의 발달을 촉진하기에 이르렀다.

새로운 제철법의 체계는 (1) 코크스 고로(高爐)에 의한 선철의 생산, (2) 석탄을 연료로 하는 선철 제련용 반사로 퍼들로(爐)에 의한 연철(鉛鐵)의 생산, (3) 증기 구동력(驅動力)을 지닌 압연기에 의한 연철의 가공 등 세 개의 작업 공정으로 되었다. 게다가 이들 세개의 공정은 동일 공장에서 할 수가 있어 대제철소의 형성 기초가 되었다. 퍼들로에 의한 연철의 생산은 산업 혁명의 말기에는 다시 전로(轉爐)라든가 평로(平爐)라 불리는 정련로의 발명으로 강철로 대체되지만, 여하튼 오늘날의 이른바 선강 일관(銑鋼一貫) 제철소의 원형의 탄생이다. 석탄 에너지의 활용이 이와 같은 새로운 제철 기술 체계를 낳았던 것이다. 이런 뜻에서 산업 혁명은 실로 '철과 석탄'의 시대를 가져왔고, 철과 석탄에 의하여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코크스 제철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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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kes 製鐵法

고대·중세의 제철기술로는 철광석을 충분히 녹일(환원하는) 만한 높은 온도를 낼 수가 없었고, 철광석에서 나오는 광재(鑛滓)가 철과 분리되지 않은 채였다. 그러므로 노(爐)에서 나온 반용융상(半溶融狀)의 철을 몇 번이고 단련을 거듭하여 광재를 짜낸 다음 여러 가지 모양으로 가공하여야만 하였다. 이런 종류의 철을 연철(鉛鐵)이라 했다. 그런데 14세기 초경에 이르자 용광로(高爐라고도 함)가 발명되어, 이로써 철을 용융상태로, 또한 매우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연료는 목탄이었다. 고로의 발상지는 독일의 라인강 유역의 지겔란트 지방이다. 한때 인간이나 동물의 힘에 의지하던 송풍용 동력에 수차(수력)가 응용되게 되었고, 종전의 생산성 낮은 제철로 (수로(竪爐))로부터 고로(高爐)로 혁신되었다. 고로로 만들어진 철을 선철이라고 한다. 고로법은 그 후 차차 서쪽으로 진출하여 벨기에, 프랑스의 서남부로 퍼졌고, 15세기 말에는 영국의 남서섹스 해안으로 건너갔다. 또한 16-17세기를 통하여 여러 지방에서 견실하게 성장하였으며, 특히 영국 서부의 세번강 하류에 있는 딘 숲속의 제철은 그 강 상류에 있는 버밍엄, 더들리, 셰필드 등 중부 잉글랜드 지대의 철제품의 제조와 결부되어 제철업의 새로운 규모와 형태를 나타냈다. 베크의 말에 의하면 1719년의 영국 제철업 및 철공업은 전 영국 공업의 3분의 1을 점하였고, 이 부문에 20만 명의 노동자를 헤아리게 되었다.

영국의 발달한 금속 공업, 기계 공업은 18세기에 이르러서는 더욱 발달한 제철 기술을 필요로 하였다. 그런데 영국에는 제철업의 원료인 철광석은 풍부히 매장되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삼림은 고갈하여 목탄이 결핍하였고, 영국 제철업은 국내의 산업 수요를 메울 수가 없어 수요의 대부분을 스웨덴, 러시아, 미국으로부터 수입하는 외국철에 의존하는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 당시의 영국이 대(大)철공장주 윌리엄 우드는 1720년 한 기록에다 다음과 같이 썼다.

"철은 양모의 뒤를 이어 영국의 가장 중요한 공업적 기초이다. 영국은 매년 약 3만t의 철을 소비하지만 그 중 숯이 결핍된 까닭에, 우리는 약 2만t의 경화(硬貨)를 이웃나라에서 사들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뿐 아니라, 1t당 10파운드 스털링, 따라서 매년 20만 파운드 스털링을 지불하고서, 그렇지만 우리나라에는 광석이 남아돌 만큼 있으므로, 모든 수요를 채우는 데는 다만 숯을 만드는 장작만 있으면 되었던 것이다."

18세기 초기에는 영국의 제철업은 삼림의 급격한 벌채로 말미암아 마침내 전멸에 이르는 위기에까지 빠져들고 있었다. 이 때까지의 유일한 야금용 연료인 목탄에서 석탄으로의 전환이 절대로 필요하였다. 16세기 이래, 뉴캐슬의 석탄을 대륙으로도 대량 수출하였으며, 석탄의 풍부한 매장량을 가진 이 나라야말로 이 과제를 해결하는 데 적당하였다. 또 이 문제의 해결 없이는 제철 기술은 발전 도상의 기계 공업 등의 수요에 응답하여 스스로 발전해 갈 길이 없었다.

영국의 제철인은 이 과제를 훌륭히 해결하였다. 목탄 대신에 석탄을 연료로 하여 철을 제조하는 기술과의 씨름은 벌써 16세기부터 비롯되었고, 그 중에서도 더드 더들리(D. Dudley, 1599-1684)는 그 고전의 발자취를 『석탄에 의한 제출』(1665)이란 책에 저술하고 있는데, 이들 선인의 뒤를 이어받아 1713년(시바트의 설로는 1709년) 우선 에이브러햄 더비 1세가 코크스를 연료로 하여 고로로 선철을 제조하는 데 성공하였고, 또 그의 아들 더비 2세에 의해 계승 발전되어 1735년 본격적인 코크스 고로 제철의 확립을 보게 되었다.

더비 1세·더비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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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raham

DarbyⅠ(1677-1717)Abraham DarbyⅡ(1711-1763)

코크스 고로(高爐)의 창시자. 부친인 더비Ⅰ세는 워세스터셔의 더들리 근방의 농장에서 태어나 엿기름을 건조하는 가마솥 제조업자의 직공이 되었다가, 뒤에 브리스틀로 정주해 수차 건조공장을 세웠고, 이어서 네덜란드인 주조 기술자 몇 명을 고용하여 주조 공장(鑄造工場)을 설립하였다. 여기서 그는 모래형(砂型)의 주조법을 발명하여 1708년에 특허를 받은 뒤, 이를 이용하기 위하여 공장의 대확장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공동 출자자들이 자금 출자를 거절하였기 때문에 브리스틀을 떠나서 콜브루크데일로 옮겨, 자력으로 사업을 확장할 것을 다짐하고 제철 공장을 세 내어 고로를 건설하고 주조장을 설치하였다. 그 제조품은 곧 명성을 얻었으나 공장의 확장과 동시에 숯이 부족하여 근방에 있는 석탄의 이용에 착안, 1713년에 우선 배합 사용(配合使用)이라는 형태로 석탄을 고로에 사용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석탄을 코크스로 만들어, 처음에는 코크스를 질이 좋은 숯과 배합 사용하고, 뒤에는 가루 코크스와 이탄(泥炭)만을 사용하였던 모양이다.

원래 이 성공에는 여러 설이 있어, 1709년이라는 철강사가(鐵鋼史家)도 있지만, 19세기의 영국의 저명한 철야금학자 퍼시(J. Persy, 1817-1888)는 이 코크스 고로의 개발 자체를 더비 2세에 돌리고 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정력적으로 사업을 발전시킨 그는, 석탄의 코크스화에 주력하여 1735년 철광석을 코크스만으로 고로에서 제련하는 데 성공하여, 영국 제철 기술 발전의 첫 토대를 쌓았다.

퍼들법(교반식 제철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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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ddle法(攪拌式製鐵法)

에이브러햄 더비 부자의 고투로 코크스 고로(高爐) 기술이 확립되는 한편, 송풍용 동력으로서 수차를 대신하여 증기기관이 등장하자, 고로의 규모는 더욱 대형화되어, 많은 선철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선철은 주물에 쓸 수는 있었으나 용도는 한정되어 있었다. 탄소분이 많고 잘 부러져, 연철처럼 단조 또는 압연이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선철을 연철처럼(탄소분의 적은) 단련할 수 있는 철로 바꾸기 위해(정련한다) 여러 가지 노력이 시도되었다. 18세기에 회오리바람같이 일어난 기계 보급이 더욱 많은 철(可鍛鐵)을 요구하였던 까닭이다. 이 과제는 코트에 의한 퍼들법의 발명으로 해결되었다.

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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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y Cort(1740-1800)

영국의 제철 기술자. 랭커스터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런던에서 스웨덴 철 및 러시아 철을 수입하여 해군에 납품하는 선박 대리점 주인이었던 코트는, 그 직업상 해외의 철에 대한 영국 철의 열등성을 관찰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1775년 이 직업을 버리고 포츠머드항의 폰틀레이에 제철공장을 건설하고, 여기서 그는 선철을 연철로 만들 것을 결심하였다. 국내에서 질이 좋고 가공성이 풍부한 철이 만들어져 대량으로 공급할 수만 있다면 막대한 이윤이 약속되었던 것이다. 1784년, 그는 퍼들로(爐)라고 불리는 일종의 반사로(反射爐)를 발명, 석탄을 연료로 하여 선철을 가단철(연철)로 전환하는 데 성공하였다. 퍼들법은 높아가는 요구에 응하여 새로운 기계 제작용 연철을 풍부하게 생산하여 19세기 초기의 공업을 윤택케 하였다. 그가 1783년에 홈(溝) 롤러를 갖춘 압연기를 발명하여 퍼들 압연법이라는 새로운 일관적인 기술 체계를 창시한 것도 특기할 만하다. 바야흐로 "조그만 노(爐)와 수차와 해머에 의한 목가적인 산업은 커다란 반사로와 증기 기관과 압연기에 의한 대량 생산의 산업"으로 크게 변모하는 단계로 발전했던 것이다.

연철에서 강철로의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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鍊鐵-鋼鐵-轉換

그러나 새로운 발명은 또다시 새로운 기술 혁신을 요구한다. 퍼들법은 획기적인 발명이기는 하였으나, 때마침 산업 혁명이 전성기에 이르러 철재에 대한 수요가 한층 증대하자, 용해된 선철을 인력으로 교반(퍼들)하는 원시적 공정을 기본으로 하는 생산법은 마침내 버림받아야 할 원시적인 제철법으로 전락하는 운명이 되었다. 퍼들법의 결함을 극복하기 위한 첫걸음은 1855년 헨리 베서머(A. Bessemer, 1813-1898)의 취정제강법(吹精製鋼法=轉燥法)의 최초의 특허로 시작된다. 이에 연철에서 강철로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데, 그것은 레오뮬(A. Reomule, 1683-1757)에 의한 '연철을 강철로 바꾸는 방법'의 창시(1722년), 헌츠먼(B. Huntsman, 1704-1776)에 의한 도가니 주강의 발명(1740)이라는 선구적 업적과, 또 영국의 석탄 제철의 경험과 유럽대륙의 철의 과학의 결합으로 비로소 성취된다.

증기기관의 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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蒸氣機關-發明

증기를 이용하여 움직이는 장난감은 옛날부터 있었으나 동력으로서의 실용적인 증기 기관이 발명된 것은 18세기가 되고서이다. 게다가 이 방면의 발명가들이 거의 영국에 집중되어 있음은 매우 흥미롭다.

17세기 전반에 이미 선진국에 오른 영국에서는 상업상·군사상의 필요로 금·은·동·철 등의 금속, 그리고 석탄이 대량으로 필요하게 되었다. 각종 광산의 갱도는 깊어지기만 하여 수십 m로부터 때로는 100m에 달하였다. 그에 따라 지하수를 퍼내기가 점점 곤란하게 되었고 그 해결이 긴박(緊迫)해졌다. 당시 물푸기용 펌프는 충분히 발달되어 있었으나, 동력에는 말 등이 사용되었으며, 관리·운영이 매우 번거롭고 비용이 들었었다.

말과 대체될 수 있는 동력으로 예상된 것은 화약, 증기, 그리고 대기의 압력, 이렇게 세 가지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화약은 순간적인 폭발이기 때문에 어떻게 이용하느냐가 문제였다. 또 증기는 장난감 정도는 움직일 수 있으나 큰 힘을 내기는 어렵다고 생각되었다. 대기압은 독일의 게리케(H. Guericke, 1602-1686)가 공개 실험을 한 것과 같이 뛰어난 힘을 가지고 있지만, 진공을 손쉽게 만드는 방법이 없으면 이용할 수 없었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생각하는 가장 유망한 방향을 향하는 노력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어느 하나도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 중 이 세 개의 방향을 관련시켜 동력을 생각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예를 들면 영국의 우스터 후작이 고안한 기관(1663)은 수증기와 대기 압력을 이용하려고 한 것이었다. 또 프랑스인으로 영국에 건너온 드니 파팡(D. Papan, 1647-1712경 기체연구로 유명한 보일의 제자)은 화약과 대기압, 뒤에 수증기와 대기압을 동력에 이용하는 기관을 고안하였다. 어느 것도 실용에는 쓰이지 못하였으나 수증기를 냉각하여 진공을 만들고 대기압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아이디어였다. 화약의 이용은 벽에 부딪혔으나 수증기와 대기압은 잘 해결되었다. 그 배경에는 기체나 열에 관한 과학 연구의 진보가 있었다.

영국의 세발리는 위에서 말한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겨 일단 성공을 거두었으며, 같은 영국의 뉴커먼도 실용화에 성공하였다. 18세기 초의 일이다.

뉴커먼의 기관의 출현으로 광산의 배수 문제는 일단 해결되었다. 그러나 뉴커먼 기관은 대량의 석탄을 소비하기 때문에 탄갱용(炭坑用)이든가 탄갱 근방의 광산용에 적합하였다. 탄갱으로부터 먼 거리에 있는 금속 광산에서는 말의 힘으로 펌프를 움직였을 때와 별로 차이없는 수효의 말로 석탄을 운반하여야 했던 까닭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기계에는 1주야 연속 운전이 가능한 이점이 있다.

마침내 산업 혁명이 진행되고 공장용의 동력이 필요하게 되었으나 뉴커먼 기관은 이상과 같은 사정으로 적합하지 못하였다.

공장용의 동력으로서는 뉴커먼 기관의 3분의 1 이하의 연료로 움직이는 와트의 증기 기관의 출현을 기다려야만 하였다.

또 윌킨슨(M. Wilkinson, 1728-1808)이 호닝 머신(실린더의 내부를 정확하게 깎을 수 있다)을 발명(1774)하고 그것으로 만든 실린더를 사용함으로써 와트의 증기 기관이 실용화되었다고 하겠다. 그 후로 공장의 동력으로 와트의 기관은 급속하게 퍼져 나갔다.

뉴커먼의 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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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comen-機關

영국의 토머스 뉴커먼이 발명한 증기 기관의 1종. 수증기를 이용한 열기관이기는 하지만 증기의 압력으로 동력을 얻는 것이 아니고, 증기는 간접적으로 이용되고 대기의 압력으로 동력을 얻기 때문에 대기압 기관(大氣壓機關)이라고도 한다.

이 기관이 최초로 사용되기는 1712년이다. 그 후 급속히 보급되어 와트의 증기 기관이 나온 뒤에도 한동안 사용되고 있었다. 1769년 잉글랜드 북부에서 100대가 가동하였다고 하며, 또 탄광에서는 1830년경까지 사용되고 있던 것도 있었다고 한다.

뉴커먼 기관의 원리를 위 그림으로 설명하면 ①은 보일러로서 이 속의 물이 가열되어 증기가 만들어진다. ②의 밸브가 열리면 증기가 그 곳을 지난다. ③은 실린더이며, 증기는 이 속으로 들어간다. ④도 밸브인데 이것이 열리면 ⑤의 찬물이 실린더 속에 뿜어진다. 그러면 실린더 속의 증기가 냉각되어 물로 변하고 갑자기 부피가 줄어, 실린더의 내부는 진공과 같이 된다. 그러면 ⑥의 피스톤이 빨려들 듯이 아래로 내려온다. 이것은 바깥쪽의 대기가 피스턴을 내리 누르기 때문이다. 이 때 매우 큰 힘이 생기게 되며 ⑦의 작동막대가 움직여 ⑧의 사슬이 위로 끌려 올라간다. 이 사슬 밑에는 우물 펌프가 달려 있어 물을 퍼 올리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 뒤 다시 같은 일을 거듭한다. 피스톤이 한번 왕래하는 데 약 5초가 걸렸다.

뉴커먼 기관은 대단히 큰 것이 많고, 최초에 설치된 것이라 하여도 실린더의 내경이 50센티미터, 길이 3미터 이상이나 되었다. 그 능력은 5-6마력 정도였던 것 같다. 그 중에는 실린더의 직경이 2미터나 되는 거대한 것도 있었던 모양이다.

대기압은 1기압으로 정해져 있으므로 큰 힘을 내려고 하면 기관도 커진다. 게다가 피스톤과 실린더 사이에 틈이 생기면 그 곳으로 공기가 들어와 큰 힘을 낼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이 기관의 최대의 결점은 연료를 많이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실린더는 5초마다 냉수로 냉각되므로, 들어가기 시작한(미리 들어간) 증기는 식어서 소용없게 된다. 이러한 결점을 제거한 것이 와트의 증기 기관이다.

세이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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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mas Savery(1650-1715)

영국의 발명가. 잉글랜드의 더번주 실스튼 태생. 그는 영국 육군 공병대의 장교로 많은 발명을 하였으며, 세계 최초로 실용화된 증기 기관의 발명자로서 유명하다. 증기 기관이라고 하여도 후에 출현하는 뉴커먼 기관이나 와트의 증기 기관과 달리, 실린더나 피스톤은 없고 수동 코크와 밸브가 움직일 뿐인 간단한 것이다. 증기에 의한 양수 장치라고 하는 편이 좋겠다.

그의 화력 기관은 1698년에 특허를 얻어, 1702년 런던에 공장을 세우고, 『광부의 친구』라고 하는 책자로 선전하였으나, 광산의 배수에는 적합하지 않았고 주로 가정용의 물을 퍼올리는 데 쓰였다. 그러나 그의 발명은 뉴커먼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1705년 그는 런던 왕립학회원으로 뽑혔다.

뉴커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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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mas Newcomen(1663-1729)

영국의 발명가. 영국 디번주 대트머드 태생. 그는 대장간의 직공이었으며 남달리 재능이 있었던 듯하다. 17세기 말의 영국에서는 광산의 배수 문제가 크게 다루어져, 결국 세이버리의 화력 기관이 발명되었다. 그는 세이버리의 기관의 부품 제작을 하기도 하고, 설치와 수리로 광산을 드나들었다.

그 무렵부터 뉴커먼은 증기를 이용한 동력에 관심을 굳혀, 그 연구에 주력하였다. 10년 가까이 노고를 치른 뒤, 그는 겨우 뉴커먼 기관이라고 하는 증기기관을 완성하였다(1712).

그는 원래 한 사람의 직공으로서 학문도 없고, 과학도 몰랐다. 그러나 그의 완성된 기관은 매우 뛰어나서, 광산의 배수용으로 많이 보급되었다. 그만큼 훌륭한 발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뉴커먼은 특허를 받지 않았다. 그 이유의 하나는 세이버리의 화력 기관의 특허 범위가 넓어, 뉴커먼의 발명도 세이버리의 특허 속에 포함된다고 생각한 까닭일 것이다.

와트의 증기 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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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tt-蒸氣機關

공장의 동력으로서 최초로 실용화된 열기관이며, 그 때까지의 세이버리나 뉴커먼의 기관보다 강력하고, 게다가 경제적인 점에서는 훨씬 뛰어나 있었다.

뉴커먼 기관과 비교하여 그 특징을 들어 보자. 첫째, 연료가 3분의 1로 충분하다는 경제성을 들 수 있다. 뉴커먼 기관으로는 피스톤 1왕복마다 실린더를 냉각시켜야 했다. 냉각된 실린더 속에 증기를 보내면 상당한 양의 수증기가 즉시 물방울로 변하고 말아, 실린더에 수증기를 채우는 데는 많은 수증기를 필요로 하였다. 와트 자신의 실험에 따르면 보내진 증기의 4분의 3은 찬물로 실린더를 식히기 전에 이미 물로 변했다. 그래서 와트는 실린더의 열을 그대로 유지한 채, 그 속의 증기만을 냉각시키는 방법은 없을까하고 생각한 끝에 분리 응축기(分離凝縮機=凝結器, 復水器, 콘덴서 등이라고도 한다)를 발명하였다.

초기의 와트 증기 기관은 아래 그림과 같이 뉴커먼 기관과 흡사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눈에 띄게 다른 점은 응축기가 붙어 있는 점분이다. 실린더 안의 증기를 펌프로 밖으로 뽑아 내어 냉각시킨다. 이것만으로도 연료는 단번에 3분의 1로 줄 뿐이었다(그림 참조).

그림을 주의하여 살펴보면, 또 한 가지 뉴커먼 기관과 다른 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피스톤의 아래 부분이 진공으로 되었을 때, 피스톤의 위쪽으로부터 증기가 내리누르게 되어 있는 점이다. 피스톤을 위로부터 내리 누르는 것은 1기압의 대기가 아니라, 1.5-2기압의 압력이 큰 증기인 것이다.

뉴커먼의 기관은 대량의 연료를 사용하게 되므로, 탄갱이나 그 근방이 아니면 이용되지 못한 데 반해 와트의 기관은 도시에서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증기의 압력을 높임으로써, 동형으로 보다 큰 출력을 낼 수도 있게 되었다. 특허는 1769년, 실용화는 1776년이다.

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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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Watt(1736-1819)

영국의 발명가, 사업가. 스코틀랜드의 서해안 그리노크에서 태어났다. 그는 증기 기관의 발명자로서 특히 유명하다. 또 그의 이름을 딴 일의 단위 W(와트)로도 현대인에게 인상깊은 인물로 이름을 남기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선박 목수에서 출발하여 마침내 크게 해운 관계의 장사도 하게 되었다. 제임스 와트는 아버지의 조선 공장이나 선구점(船具店)에서 여러가지 기계를 다루었고, 또 공작을 즐기면서 자라났다.

한때, 글래스고대학 앞으로 뱃짐이 도착했다. 그것은 천무기기와 그 밖의 기계 부품이었다. 그가 그것을 조립하여 조정했는데, 일 솜씨가 인정되어 글래스고대학 내의 대학 전속 기계 제조점을 열게 되었다. 그의 나이 21세 때의 일이었다(1757년).

와트는 이 상점으로 말미암아 대학교수들과 친숙해졌다. 1763년 앤더슨 교수로부터 뉴커먼 기관의 모형 수리를 의뢰받았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와트는 증기 기관의 연구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와트는 그 모형이 잘 움직이지 않는 이유를 과학적으로 알아내어, 뉴커먼 기관의 최대의 결점을 제거하는 방법을 발견하였다. 그것이 분리 응축기의 발명(1765)이다. 와트는 또한 증기 압력으로 직접 피스톤을 미는 것을 생각해냈다. 그리고 연구를 거듭하여 1769년 그는 첫번째 특허를 받았다.

그 후에도 증기 기관의 개량을 거듭하여 공장의 동력으로서 완성시켰다. 또 그 때까지 와트의 연구비를 지원해 온 사업가 볼튼(1726-1809)과 함께 회사를 경영하여 사업가로도 성공하였다.

통신 운수 기술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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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信運輸技術-發展

통신과 운수는 매우 관계가 깊고 그 발전도 서로 영향을 주었다고 하겠다.통신과 운수의 수단이 비약적으로 발전을 이룬 것은 18세기 후반에 시작된 산업 혁명의 결과였다.

원래 통신이나 운수나 그 역사는 오래며 고대로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주로 정치적·군사적 필요에서 여러 모로 연구가 실행되었다. 통신 수단으로서는 봉화나 깃발 등을 이용하여 먼 곳과 통신을 하였고, 또 말을 달려 편지를 멀리 전하기도 하였다.

1800년 볼타가 전지를 발명하여 전류를 만들어 내게 되자 그것을 전신에 이용할 가능성이 생겼고 외르스테드의 '전류의 자기 작용'의 발견(1820)에 의하여 전기 통신 실현의 가능성은 결정적이 되었다.

한편 와트의 증기 기관(1769)이 출현하자, 그것을 동력으로 하여 운수에 이용하려는 시도가 시작되어, 1807년에는 풀턴이 기선을 실용화시켰다. 또한 에반스나 트레비식의 고압 증기 기관(1800-1802)은 기차를 실용화시켜 레일의 개량과 더불어 스티븐슨에 의하여 기차가 완성되었다(1814).

이와 같이 기차·기선이 실용화되자 운수의 양과 속도는 현저하게 증대하였다. 이에 따라 도시의 경제는 큰 영향을 받아 결국 먼 곳과의 급속한 연락이 필요하게 되었다. 신속한 뉴스의 교환은 상업상 절대 필요하게 되었다.

볼타 전지의 발명 후 제멜링이, 그리고 외르스테드의 발견 후에는 많은 사람들이 전신기의 발명에 착수하였으나, 1830년대에 독일, 영국, 러시아, 미국에서 거의 같은 무렵에 실용할 수 있는 전신기가 발명되었다. 그 시기는 유럽이나 미국에서 철도가 한창 늘어나고 있을 때였다. 그로부터 오늘날까지 운수와 통신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기차와 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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汽車-鐵道

증기 기관은 첫째, 물을 퍼올리는 데 실용되었으나, 그 동력을 차에 달아 움직이려고 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프랑스의 군인 퀴뇨(1725-1804)는 대포를 끄는 데 증기기관을 이용할 수 없을까 하고 생각하여, 처음에 짐수레 같은 데다 증기 기관을 붙여 보았다. 그러나 실용에는 합당하지 못하였다. 증기 기관의 힘이 약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1769년의 일로서, 와트가 증기기관의 특허를 받은 해이다.

그 무렵의 증기 기관은 증기의 압력이 약하므로 마력을 크게 하면 대형으로 무겁게 되어, 수레 위에는 도저히 올려 놓을 수가 없었다.

기차에 이용할 수 있는 소형이고 강력한 증기 기관은 미국의 에반즈나 영국의 트레비식이 만든 고압 증기 기관이 아니면 안 되었다. 트레비식은 1804년에 실용적인 증기 기관차를 만들었으나, 그 무게로 레일이 파손되어 실용적인 철도가 될 수 없었다.

그 후 기관차를 가볍게 하는 노력을 하는 사람이 나왔으나, 이번에는 바퀴가 헛돌아, 그것을 막기 위해 톱니바퀴가 레일에 물리기도 하여 여러 가지 방법이 시도되었다(1813년 경까지).

그러나 기관차를 무겁게 하면 헛도는 것은 막을 수 있다는 것이 다시 증명되어(1812), 레일을 튼튼히 하는 데도 방향을 돌렸다.

1814년경부터 몇 개의 탄갱에서 실용적인 증기 기관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스티븐슨의 기차도 그 중의 하나이다. 스티븐슨은 그 후에도 차례로 기관차를 개량해 나갔다. 1829년 영국에서 거행된 기관차 속도 경기대회에서도 스티븐슨의 '로켓호'가 우승하였다. 이로부터 철도는 급속히 발전하였다.

트레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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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chard Trevithick(1771-1833)

영국의 기술자. 최초의 실용적인 증기 기관차를 만든 사람이나, 보다 큰 뜻을 지닌 그의 업적은 고압 증기 기관의 발명이다.

잉글랜드의 콘월 태생. 어린 시절부터 광산에서 일하면서 기술을 몸에 익힌 발명의 천재이다. 1820년, 고압 증기 기관과 증기차의 특허를 얻었으며, 1804년에는 실용적인 기관차를 만들었으나 레일이 부러져 세상의 주목을 끌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소형이고 강력한 그의 고압 기관은 여러 방면에 동력으로 이용되게 되었다. 증기의 압력으로 피스톤을 움직이는 증기 기관은 사실은 트레비식 이후이다. 그런데 그의 만년은 불운하였고, 빈곤 중에서 생애를 마쳤다.

스티븐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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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 Stephenson(1871-1848)

영국의 기술자. 우수한 증기 기관차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증기 기관차의 필요성을 결정적으로 인식케 하였다.

영국, 뉴캐슬 근방의 탄광 지대에서 태어나 탄광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탄광의 뉴커먼 기관의 화부였다. 학교에도 못 가고 노동을 하면서 공부하여 21세로 탄광의 기계 기사가 되었다. 그로부터 탄광에 관한 여러 가지 기술적인 문제에 착수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유명한 것은 그가 34세(1815) 때 발명한 갱내 안전등(安全燈)이다(같은 무렵 영국의 과학자 데이비도 갱내 안전 등을 발명한 바 있다).

그는 석탄 운반용 증기차의 발명에도 관심을 가졌고, 한걸음 나아가 여객용 철도도 생각하였다. 1825년에는 세계 최초의 여객용 철도를 만들었고, 1829년에는 로켓호를 만들었다.

기선의 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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汽船-出現

18세기의 후반에는 목조이긴 하였으나 조선 기술은 퍽 진보하여 갔고, 길이 수십 미터의 대형 범선이 움직이고 있었다. 증기 기관이 발명되자 그것을 동력으로 이용하려는 생각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뿐 아니라 기차와 달라서 대형 증기 기관을 장치하는 일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기선의 실현에서 다른 곤란이 있었다. 그것은 선박의 추진 수단을 무엇으로 하느냐의 결정이었다. 옛날부터 배는 돛(帆)이라든가 노(櫓)로 움직여 왔으나 증기 기관으로 노를 젓는 것은 기계적으로 어려웠다. 또 추진 수단으로서 물갈퀴차, 프로펠러, 나사(스크루) 등은 이미 있었고 또 물을 후미에서 뿜어내는 제트 방식도 생각되었으나, 어느 것이 증기선에 적합한지는 분명치 않았다.

미국의 존 피치는 1785년, 트랙터의 캐터필러 꼴의 부판(浮板)이 있는 증기선을 만들었다. 그는 또 노를 움직이는 증기선도 만들었다. 그러나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하였다.

결국 물갈퀴차, 스크루, 제트의 세 가지 방식의 증기선이 실험적으로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것들도 속도가 느리고, 선박 안에는 증기 기관과 연료로 꽉 찼었다. 그뿐 아니라 특히 유럽에서는 강가의 농민이나 뱃사공들의 반대도 강렬하였기 때문에 실용화하는 데 매우 곤란하였다.

풀턴은 1807년 물갈퀴차가 붙은 클러몬트호(길이 43m, 150t)를 만들어 사람들을 모아 놓고 화려한 공개 실험을 하였고, 그 인기로 기선을 실용화시킬 수가 있었다. 그러나 당시는 아직도 증기선에도 돛을 달고 있었으며, 증기의 힘만으로 대양을 건너는 배가 생긴 것은 그 후 30년 이상이나 뒤의 일이다.

스티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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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Stevens(1749-1838)

미국의 발명가. 증기선의 발명으로 풀턴과 겨루었다. 뉴욕 태생으로, 컬럼비아대학의 전신 킹스 컬리지 출신(1768). 법률을 전공하여 법률가가 되었다. 미국의 독립 전쟁 때는 혁명군 장교로 활약하였고 후에 뉴저지주의 재정을 담당하였다.

그는 허드슨강을 가로질러 대량의 화물을 운반할 필요를 늘 생각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증기 기관을 배의 동력으로 사용하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스크루가 있는 증기선을 만들어(1802) 허드슨강을 몇 번이고 왕복시켰다. 증기선으로서 움직이는 것은 증명되었으나 그 속도나 힘에 있어서 그는 만족하지 못하였다. 그는 그 무렵에 발전 중에 있던 고압 기관에 눈을 돌려, 1807년에야 비로소 고압 기관을 설치한 스크루선 '피닉스'호를 진수시켰다. 그러나 그것은 풀턴의 클러몬트호의 공개 실험이 있은 지 며칠 후였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을 끌지 못하였다.

게다가 풀턴이 허드슨강을 이용하여 독점권을 얻었기 때문에 증기선 발명가로서의 스티븐스의 이름은 그늘에 가려지고 말았다.

스티븐스는 또 철도 수송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방면의 사업은 두 아들에 의하여 수행되었다.

풀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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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Fulton(1765-1815)

미국의 기술자, 사업가. 펜실베이니아 태생. 소년 시절부터 그림과 공작이 좋았기 때문에 공부는 즐기지 않았다. 상급 학교에는 가지 않고 필라델피아의 보석상에서 점원이 되었다. 그러나 마침내 화가를 지망하였고 22세 때 그림 공부를 위하여 영국으로 건너갔다. 동향인이며 저명한 화가 벤저민 웨스트(1738-1820)의 밑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 거기에 접촉이 있던 제임스 와트 등과 알게 되어 영향을 받고, 증기기관 등을 비롯하여 기술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794년 운하 항행에 관한 영국의 특허를 받았고 1796년 이에 관한 논문을 출판하였으나 그다지 좋은 반응은 얻지 못하였다. 다음해 프랑스로 건너가 리빙스턴의 원조를 얻어 1804년 센강에서 증기선의 실험을 하였다.

이것으로 자신을 얻은 그는 미국으로 돌아와 클러몬트호를 완성(1807), 증기선의 공개 실험에 성공하였다. 이어 운수 사업에도 성공하였다.

전신기의 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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電信機-發明

1800년에 볼타 전지가 발명되자, 전류에 의한 통신의 가능성을 연구하게 되었다. 1806년 나폴레옹 1세에 정복된 독일의 정치가는 통신이 군사적으로 중요함을 알고, 유명한 해부학자 제메링에게 전신기의 발명을 의뢰하였다. 제메링은 전류에 의한 물의 정기 분해시 거품(水泡)이 생기는 것을 응용하여 전신기를 만들었다(1809). 아마 이것이 최초의 전신기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알파벳의 수효만큼 전선의 수가 필요하고 통신 방법도 번거로웠다.

외르스테드의 '전류의 자기 작용'의 발견(1820)이 있자 전신기의 연구는 급속도로 진전하여, 1830년대 초에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전신기가 발명되었다. 이 전신기들에는 두 가지의 형이 있었다. 하나는 전류로써 자침(磁針)의 방향을 바꾸는 것, 또 한 가지는 모스의 전류를 단속(斷續)시키는 것이다. 모스 이외는 모두 앞의 형식이다.

앞의 형식의 것 중에도 세분하면 여러 가지가 있으나 실용된 것은 영국의 휘트스톤의 것뿐이고, 다른 것은 통신 방법에 있어서 복잡한 문제가 있었다. 또 휘트스톤의 전신기는 실용적이었으나 몇 가닥의 전선이 필요하였다.

이에 대해 모스 전신기는 회로가 하나이므로 가장 단순할 뿐 아니라 후에 무선 전신에도 쓰이게 되었다.

휘트스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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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les Wheatstone(1802-1875)

영국의 발명가, 물리학자, 전기 공학자, 잉글랜드의 글로스터 태생. 아버지는 악기상인데, 그는 악기를 만들기도 하고, 연구하기도 하는 중에 음향학을 연구하게 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광학, 전자기학의 연구로 나아갔다. 32세 때 킹스 컬리지의 실험 물리학 교수가 되었으며 그 해에 그는 스테레오스코프의 연구도 하였다.

그는 연구도 하였지만 많은 발명도 하였다. 가령 전신기(1833년경), 전기시계(1840), 휘트스톤브리지(1843) 등이 있고, 그 밖에 발전기의 발명도 하였다. 그가 실용적인 전신기를 만들게 된 동기는 다음과 같다. 독일에 의학도로서 유학중인 쿡(1806-1879)이 하이델베르크에서 전기실험을 보고 흥미를 갖게 되어 스스로 전신기를 만들었다. 곧 영국으로 돌아와 전기학자 패러데이에게 그 이야기를 하자, 패러데이는 휘트스톤을 소개했다. 휘트스톤과 쿡은 협력해 실용적인 전신기를 완성하고 1837년 특허를 받았다. 이 전신기는 영국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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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uel Finley Breese Morse(1791-1872)

미국의 화가, 통신 기술자. 모스 전신기 발명과 모스부호 고안으로 유명하다. 현재 '모르스'로 이름이 통하고 있으나 '모스'라고 발음하는 것이 옳다. 매사추세츠주 태생이고 화가로 이름을 남겼다. 41세경 유럽으로부터 돌아오는 배에서 전기 통신의 힌트를 얻어 뉴욕에 도착하자 전신기를 만들었다(1836). 모스부호는 처음에 점의 수효를 숫자로 바꾸고 그것을 또 대칭표(對稱表)에서 문자로 바꾸는 것이었으나 알프레드 베일의 힌트에서 점과 선에 의한 편리한 모스부호로 바꾸었다.

대서양 해저 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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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西洋海底電信

1858년 8월 5일 막심한 고생 끝에 완성된 해저 케이블로 아일랜드와 북미의 뉴펀들랜드 간에 부설되었다.

모스 전신기가 실용화되자 즉시 범위가 확대되어 갔다. 그러나 큰 강이나 바다를 건너 전선을 부설하는 것은 하나의 과제였다. 마침 모스가 전신기를 연구하고 있을 때에 고무의 연구가 발달하여 1834년 구타 펠루카라는 고무가 만들어졌다. 이 고무를 전선에 씌우면 물 속에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즉각 이용되어 뉴욕항을 비롯하여 뭍과 섬, 섬과 섬이 연결되었고, 1850년에는 도버 해협에 부설되었으며, 곧 지중해에도 부설되기에 이르렀다.

미국의 필드(1819-1892) 등은 1856년에 대서양 전신회사를 설립하고 다음해 케이블을 배로 부설하기 시작하였다. 조심스럽게 하였지만 500km 가량 진척되었을 때 케이블이 끊어지고 말았다. 2번째도 이와 마찬가지로 실패를 거듭하였다. 1858년의 여름에 겨우 완성되었고 통신은 성공하였다. 최초의 손님은 1858년 8월 17일 빅토리아 여왕이 부캐넌 대통령에게 보낸 축하 메시지였다. 그러나 전신의 성능은 점점 약화되었다가 10월 20일 통신이 끊기고 말았다.

회사는 과학자와 기술자의 그룹에게 조사를 의뢰하여 7년간이나 조사 연구가 계속되었다. 그 가운데 영국의 물리학자 W. 톰슨(후에 작위를 받아 로드 켈빈이라고 했으며, 절대온도 눈금을 만든 사람)이 있어, 여러 가지 난문제를 해결하고 새 케이블을 부설할 때 직접 지도하여 1866년 완전한 대서양 케이블을 완성시켰다.

산과 알칼리 공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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酸-Alkali 工業

산과 알칼리는 중세부터 공업용에 널리 사용되었다. 산업 혁명 이전의 용도로서는 금속 정련, 비누·유리·도자기의 제조, 그리고 피륙 표백이었다. 이 시대의 공업은 소규모였으므로, 산이나 알칼리의 공급은 실험실적 방법으로 하고 있었다. 18세기에 이르러 영국에서는 광산업과 금속 공업이 급속히 발전하였으며, 첫째, 황산의 수요가 증대하였다. 그 때까지 황산은 주로 종 모양으로 된 유리제의 단지로 황을 태워 그 연기를 물에 흡수시켜 만들었으나, 1737년 영국의 의사 겸 화학자인 워드가 이 방법을 확대시켜, 용량이 큰 단지를 많이 써서 대량으로 황산을 만들어 팔았다. 이 때문에 황산 가격은 20분의 1로 내렸으나, 늘어나는 수요를 미처 따르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황산 제조는 수공업적 규모에서 공업적 규모로 바뀌는 전기가 되었다. 그것은 연실법(鉛室法)의 출현이었다. 버밍엄의 화학자 로벅은 반응에 쓸 그릇으로서 깨지기 쉽고 값이 비싼 유리 대신에 값이 싸고 어떠한 크기로도 만들 수 있는 납(鉛)으로 만든 용기(容器)를 사용할 것을 착안하였다. 1749년 로벅에 의하여 에든버러 근방의 프레스톤 판즈에서 연실법에 의한 황산 공장이 가동되기 시작하였다.

마침 이 무렵 영국 산업혁명의 추진력이 되었던 직물공업의 생산량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하였으며, 피륙이 염색되어 시장에 나가기까지는 표백이라는 공정을 거쳐야 하였는데, 당시의 표백은 전통적인 천일 표백(天日漂白)이어서 목회(木灰)인 알칼리액과 산패우유(酸貝牛乳)의 산성액에 번갈아 담갔다가 햇볕에 바래는 방식이었다. 넓은 표백장이 필요한 데다, 1개월에서 수개월이 걸리는 이 공정은 직물 공장의 애로가 되었다. 게다가 산패우유는 수요에 따를 수가 없어 값의 상승이 심하였다. 이 무렵(1754) 에든버러 대학의 홈은 산패우유 대신 묽은 황산을 쓰는 방법을 소개하였다. 황산은 값이 싼 데다 품질이 항상 일정하였다. 이 방법은 곧 보급되었고, 표백에 산을 쓰는 공정은 며칠에서 반나절로 단축되었다. 그에 따라 황산의 수요도 급증되었고, 또 후에 소다 공업, 표백분 공업의 원료로서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됨에 따라 연실법 황산은 근대 공업으로 발전하였고, 몇몇 개의 중요한 기술상의 진보가 더하여졌다.

황산에 이어 부족하였던 것은 알칼리였다. 이 시대까지 알칼리의 공급원은 목재나 해초였고 이것들을 태워 만든 잿물(탄산소다나 탄산칼리를 품고 있다)이 그대로 알칼리로 쓰이고 있었다. 알칼리에는 비누 제조, 직물 표백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용도가 있었으나, 원료인 목재는 연료로도 없어선 안 될 물건이었기 때문에 목재의 구득은 점점 곤란해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태의 해결을 위하여 생긴 것이 바로 소다(탄산소다)제조의 르블랑법이었다. 르블랑법 소다 공업은 동시에 발명된 표백분 공업·황산 공업과 직결되었고 나아가서는 부산물의 처리나 각 부문간의 관계에서 새로운 공업이 발생하여 영국의 무기화학 공업은 거대한 구조를 자랑하는 세계적 콤비나트로 성장하였다.

표백분과 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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漂白粉-soda

홈에 의하여 화학 표백의 가능성이 보여졌을 무렵 화학자의 관심은 산과 알칼리에 집중되고 있었다. 블래크(1728-1799)는 알칼리의 연구에서 탄산가스를 발견하고 기체 화학에서 라부아지에의 근대적 화학 체계로 가는 길의 개척자가 되었다. 블래크와 동시대인인 셸레(1742-1786)는 기체를 연구하다가 염소(鹽素)를 발견하였다. 프랑스의 화학자이며 왕립 염색공업 겸찰관이었던 베르톨레(1748-1822)는 염소 속에 풀이나 꽃을 넣으면 탈색된다고 한 셸레의 관찰에 힌트를 얻어 염소의 표백력을 발견하였다. 그는 1789년에 학회에 이를 발표하고 염소수와 알칼리로 피륙을 번갈아 처리하는 표백법을 적극적으로 지도하였으며, 이 때문에 천일 표백은 전혀 쓰이지 않게 되었다. 염소수는 파리를 방문한 와트가 영국으로 가져왔으나 여기서 발생되는 유해한 염소 가스는 큰 문제였다. 사정은 프랑스에서도 같았다. 그러나 파리 부근의 자베르의 공장주들은 염소수에 잿물을 섞어 이 결점을 제거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는 자베르수라고 불리었다. 자베르수가 영국에 건너오자 목재 부족으로 잿물이 고가인 데 착안한 표백업자인 테넌트는 잿물 대신에 값싼 석회수를 섞어 표백액을 만들었다. 이는 성공되었으나 액체인 표백액은 수송이 불편하였기 때문에, 그는 소석회에 염소를 흡수시킨 분말 표백분을 고안하였다. 표백분의 특허를 얻은 것은 1799년이다.

르블랑법이 발견되기 이전에 알칼리의 부족이 특히 심각하였던 것은 마르세유의 비누업을 가진 프랑스였다. 반세기 전에 프랑스의 뒤아멜(1700-1782)은 실험실 내에서 소금에서 소다를 얻는 방법을 발견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립 과학원은 많은 상금을 걸고 무진장으로 소금에서 소다를 공업적으로 얻는 방법을 모집하였다. 문제점은 소금과 황산에서 얻은 황산소다를 탄산소다로 바꾸는 방법이었다. 르블랑은 황산소다에 석회와 코크스를 섞어 세게 가열하여 그 생성물(生成物)로부터 소다를 물로 추출(抽出)하는 방법으로 입상하였다. 그러나 그 후 프랑스에서는 혁명의 물결이 끓어올라 르블랑법이 만족스럽게 기업화되기 전에 영국의 매스프러트가 염세 폐지(鹽稅廢止)를 기회로 1823년 르블랑법의 공업화를 개시하였다. 이 소다공업은 직물공업의 발전과 더불어 성장하였고 영국의 무기화학 콤비나트는 표백분에서 출발한 테넌트와 소다에서 출발한 매스프러트에 따라 둘로 나뉘었다. 그러나 1세기 후 르블랑법 소다공업은 솔베이의 암모니아 소다법에 그 왕좌를 물려주게 되었다.

르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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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colas Leblanc(1742-1806)

프랑스의 의사, 화학자. 오를레앙공의 군의(軍醫)로 있었는데 화학에 소양이 있었으므로 소다의 현상에 응모하려고 연구를 계속하여 1787년에 르블랑법을 완성시켰다. 오를레앙공의 자금 원조를 받아 1790년에 파리의 근교 상 드니에 소다공장을 세웠으나 조업이 만족하게 진행되기 전에 혁명이 격심하여져 오를레앙공이 처형되고 말았다. 소다공장은 귀족의 재산이라 하여 몰수되고 르블랑법과 특허까지도 국가의 이익으로 공표되고 말았다. 파산한 르블랑은 1806년에 구빈원(救貧院)에서 자살하고 말았다.

로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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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Roebuck(1718-1794)

영국의 화학공업가. 아버지는 금속공업가. 에든버러대학에서 의학을 배우고 블래크의 가르침을 받았다. 당시로는 최고의 과학교육을 받은 그는 그 지식을 바탕으로 철저하게 새로운 기술을 추구하였다. 처음 그는 버밍엄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있었으나 연실법 황산제조에 성공하자 의사를 그만두고 기업에 전념하였다. 황산공업이 이익이 있자 그는 캐론에 대제철공장을 건설하였다. 이 공장에서는 새로 개발된 코크스 제철을 하였으며, 원료를 얻는 탄갱의 송풍 장치에는 뉴커먼의 증기 기관을 사용하고 새로운 기술로 정비하였다. 이 제철 공장의 기술로 코크스는 비로소 양질의 철을 생산할 수 있었다. 그러나 탄갱과 소다의 제조 실험용으로 파낸 암염갱(岩鹽坑)에 자금을 투자한 로벅은 파산 상태가 되어 사업을 포기하고 말았다. 이 때 그는 후원하고 있던 와트의 증기기관의 권리를 볼튼에게 양도하고 말았다.

테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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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lses Tennant(1768-1838)

영국의 화학공업가. 표백공 출신으로, 블래크의 제자이다. 표백분을 발명하였고, 1799년 글래스고 근처인 세인트 로록스에 최초의 표백분 공장을 세웠다. 공장의 연간 생산량은 30년간에 20배가 되었고 가격은 반으로 내렸다. 1803년 원료인 염소를 얻기 위하여 연실법에 의한 황산공장을 아울러 설립. 이 때의 부산물인 황산소다의 이용을 위하여 1818년 르블랑법 소다의 제조도 개시하였다.

솔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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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nest Solvay(1838-1922)

벨기에의 화학공업가. 브뤼셀 근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제염업자이다. 가스 공장에 근무하였고, 그 연구실에서 가스액 중의 암모니아를 활용하는 연구를 하던 중 소금과 암모니아와 탄산가스를 녹인 액체를 가열하면 중조(중탄산소다)가 되는 것을 알았다. 중조는 가열하면 소다가 된다. 이 암모니아 소다법은 실험실 내에서는 옛날부터 알려져 있었으나, 공업화는 어려운 것으로 알고 있었다. 솔베이는 독특한 탄산 반응탑을 만들고 공업적 암모니아 소다법을 완성하였다. 이 방법으로는, 반응이 밀폐된 장치 속에서 연속적 자동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노동력이나 연료가 모두 적게 소비되었다. 이리하여 암모니아 소다법은 제1차 대전 후에는 완전히 르블랑법으로 대체되어 소다공업의 주역이 되었다.

산업혁명의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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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業革命-影響

산업혁명은 영국 사회의 전반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 특징은 다만 영국뿐만이 아니라 산업혁명을 경험한 어느 나라에서도 각기 그 사회 제도에 따라 볼 수 있는 바이다.

그 최대의 특징은 산업에 기계사용이 보급된 점이다. 방직업을 비롯하여 철광업, 운수업, 제도업(製陶業) 등에 작업기와 동력기가 널리 보급되었다. 그러나 각 산업에 동시에 균일하게 보급된 것은 아니다. 방직업에서 보더라도 양모, 삼(麻), 명주(絹)에 각각 다른 완만한 변화를 나타내었으며 의류 생산의 마지막 공정인 재봉 기계의 발명과 그 보급은 훨씬 후의 일이다. 석탄업에서는 수송 기계나 배수기계는 발달하였으나 채탄 기계의 출현은 훨씬 뒤떨어져 있었다. 건축업에도 산업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기계가 보급되지 않은 많은 산업 부문에서는 노동자의 숙련을 필요로 하고, 새로 일어난 기계 제작업이나 제철업에서는 고도의 숙련공에 대한 수요가 발생하였다. 기계의 보급은 상품을 표준화한다. 생산자의 개성을 제품에 나타내기는 어려워졌고 예술을 대중의 손에서 박탈했다. 그 반면 생활 필수품의 가격을 저하시켜, 적어도 양적으로는 대중의 물질적 생활을 풍부히 하였다. 1831년 '실용지식 보급회'가 출판한 『기계의 모든 결과』 속에 다음과 같이 보고되고 있다. "2세기 이전에는 양말을 신고 있는 자는 1,000명에 하나도 안 되었고 1세기 이전에는 500명에 한 사람도 없었다. 지금은 양말을 신지 않는 자가 1,000명에 한 사람도 없다."

대공장과 인구의 집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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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工場-人口-集中

산업혁명은 섬유 공업을 기계제(制) 대공업화(化)시켰다. 즉 거액의 자본을 가진 고용주가 아동까지 포함하는 많은 남녀 노동자를 고용하여, 공동 작업장에서 기술적 분업으로 생산하게 되었다. 대공장의 출현은 산업의 지역화, 공업 지대의 성립을 촉구하였다. 면업은 랭커셔로, 양모공업은 웨스트라이딩으로 집중하여 각각 그 지역에 특수한 산업이 형성되었다. 이와 같은 지역화는 인구의 도시 집중을 가져왔다. 그뿐 아니라 철도가 개통되고부터 인구의 이동은 장거리에 미치게 되었다.

도시로의 인구 집중은 공업 도시에 많은 폐해를 가져왔다. 그리하여 인구의 끝없는 증가는 결코 바람직스러운 일이 못되며, 그 증가에 대하여서는 생활 자료의 한계가 있다는 학설이 생겼다. 이 이론이 영국의 경제학자 맬서스의 『인구론』(1798년)이다. 그 요점은, 인구는 쉴 사이 없이 생활 자료의 한계를 압박하고 있으며, 그 결과 인구는 과도로 증가하여 행복 즉 생활 수준은 저하하고, 이 빈곤이 인구를 감소시킨다. 그리하여 행복은 또 옛날로 돌아가고 인구는 다시 증가한다고 하는 '인구와 행복과의 진동'의 이론이었다. 맬더스의 학설은 빈곤의 필연성을 풀이하였기 때문에 지주 또는 자본가의 이론이라고 한다.

자본가의 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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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本家-出現

산업 혁명을 추진한 주역은 공업 자본가이며, 그 사회적 세력은 19세기 전반에 이르러 지주 계급을 앞지르게 되었다. 앞에서 말한 대로 발명가로서는 믿음직스럽지 못한 아크라이트가 공업 자본가로 성공한 사실은, 새롭게 등장한 공업 자본가라고 하는 계급이 어떠한 성격의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와트의 협력자 볼튼(1728-1809)은 본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본의 조달에 고생을 하지 않았지만, 아크라이트의 성공은 무엇보다도 우선 자본가를 발견한 데에 있다.

자본에 다음가는 문제는 고용하는 임금 노동자의 획득이다. 자본과 노동을 결합시켜 생산한 상품으로 시장만 개척한다면 공장주로서의 자격은 충분하다. 아크라이트는 점심도 먹지 않고 쉬지 않고 사업에 헌신하여, 항상 모든 사업을 감독하기 위하여 국내를 최대 스피드의 마차로 여행하였다. 공장주에게는 과학적 교양 같은 것은 필요가 없었으며, 또 없는 것이 보통이었다. 많은 과학자를 친구로 만들었는데, 높은 교양을 지닌 볼튼이나 자칭 과학자들로서 운하·도로 건설에 선견지명을 보인 웨디우드(1730-1795), 최고의 과학 교육을 받고 공업화학, 야금학에도 선구적인 업적을 보인 로벅 등은 전혀 예외에 지나지 않았다.

일반적인 공업 자본가들은 이익을 증대시키기 위하여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예컨대 아크라이트의 공장에서는, 1789년의 노동자수 1,150명 중 약 3분의 2가 소년이었다. 성인 노동자의 3분의 1에서 6분의 1의 임금으로 일하는 온순한 소년은 기계 작업에 특히 환영받았다. 심야 작업도 소년들에게 강행시켰다. 소년들의 사소한 과오나 태업에는 엄한 편벌(鞭罰)이 내려졌다.

노동자 계급의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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勞動者階級-形成

기계는 그 자체로 볼 때 노동 시간을 단축시키고 노동을 쉽게 하며 단순화한다. 그러나 자본가가 기계를 사용하면 반대로 기계는 노동시간의 연장, 노동 강화의 수단이 되어, 숙련 노동자나 남자·성인 노동자를 해고하고, 비숙련 노동자나 부인·아동 등을 생산에 등장시킨다. 산업 혁명과 함께 기계에 대한 반감에서 수많은 기계 파괴 운동이 일어났다. 케이, 하그리브스, 아크라이트, 카트라이트들이 발명한 기계도 모두 파괴되고, 공장은 습격받아 불태워졌다.

이 기계 파괴 운동이 최고조에 이른 것이 1811-1816년의 라다이츠 운동이다. 이 운동은 러드(Ned Ludd)라고 하는 가공(架空)의 대장 지휘하에 행동하였는데, 행동이 조직적, 계획적, 계속적인 것이 특징이었다. 그것은 기계제 대공업의 발생에 의하여 실업을 당한 수공업 노동자의 초기의 반자본주의 운동이었던 것이다. 이 운동은 1812년에 사형으로 탄압되었으나 그 효력은 없었고 1816년 의회 개혁 운동 중에 해소되었다. 시인 바이런이 의회에서 이 운동을 옹호하는 연설을 한 것은 유명하다.

기계가 노동자를 빈궁 속에 몰아넣는 것이 아니라, 그 자본가적 소유, 생산 수단의 소유가 자본가 계급이 노동자를 궁핍 속에 몰아 넣는 것을 노동자가 알게 되기까지는 시간과 경험을 필요로 하였다. 기계 파괴 운동은 지양되었지만 노동조합이 합법성을 획득할 때까지는 어느 나라에서나 오랜 기간 고투를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영국에서는 1824년에 단결법이 의회를 통과하고 노동자는 자기들의 계급적 이익을 수호하기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19세기 초에 생 시몽, 프리에, 오언은 자본주의가 빚어내는 비참에 대한 항의, 미래 사회에 대한 천재적 예견을 포함한 이른바 공상적 사회주의의 학설을 세워 이를 실행하였다. 그것은 아직 계급 투쟁이 아니고, 지배 계급의 선의에 의하여 이상사회(유토피아)를 실현코자 하는 것이었다. 공상적 사회주의의 전통은 마침내 마르크스 주의에 계승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