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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 역학의 시대[편집]

Newton 力學-時代

르네상스기에 창조된 자연과학은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폭발적인 발전을 보였다. 이 시대에 앞선 100년간의 종교적·정치적인 혼란 속에 과거의 권위는 사라지고, 새로 대두한 상층 부르주아지의 강한 영향하에 안정된 정치를 배경으로 하여 새로운 문명이 번영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이 시기의 과학 성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매뉴팩처(manufacture)와 상업의 증가, 새로운 항해, 기계의 발명 장려, 이러한 상황에서 크롬웰(O. Cromwell, 영국의 군인·정치가, 1599-1658)의 혁명을 경험한 영국을 중심으로 물리학이 진보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역학의 건설이라는 뉴턴의 위대한 금자탑에 지탱되는 왕립학회(王立學會, Royal Society)가 18세기에 이르러 점차 하강선을 더듬는 대신에 파리의 과학아카데미를 비롯한 대륙에서의 연구가 뉴턴 체계의 소화와 반성 시대의 주류가 된 것도 우연은 아니겠다. 역학적 자연관에 의하여 자라난 '이성(理性)의 시대'의 사상은 파리를 중심으로 개화하여 계몽사상에 연결되어 프랑스 혁명을 준비한다. 또 이성의 시대의 사상은 과학상으로는 18세기 후반에 나타나는 자연에 대한 새로운 안목, 자연의 생성 발전이라는 생각과 자연의 다양성에 대한 주목이라는 형태로 되어 새로운 물리학의 분야를 낳는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그것들은 아직 싹에 불과하며, 최초의 이론 체계로서 완전함을 자랑하는 뉴턴역학의 무게는 이 시대를 통해 역학적 자연관에 바탕을 두는 물질상을 널리 전파하여 물리학이나 자연과학뿐 아니라 사상 면에도 큰 영향을 남겼다.

한편, 학회 중심의 활동이 시작되는 이 시기는 과학이 일종의 제도로서 사회 속에 시민권을 가지게 된 시기이기도 하며, 베를린·상트페테르부르크 등 연구의 중심이 국제적으로 확대됨과 동시에 사회 속으로의 침투가 이루어져 "지금이야말로 과학은 사람들의 공유물이 되고, …진정 민중적인 것으로 되는 날이 가까워지고 있다(콩도르세)"고 하는 몽상조차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역학적 자연관의 형성[편집]

力學的自然觀-形成

운동의 이론은 데카르트에 의하여 전 자연학의 기초로 간주되어, 그 추상화·수학화가 단행되어 학(學)으로서의 체계화가 기도되었다. 그러나 그 나아가는 방법은 기본이 되는 원리를 일거에 파악하여 거기서 논증에 의하여 차례로 명제를 이끌려고 하였다. 그 나아가는 방법의 기초에는 자연학의 보편적 원리로서 신의 완전성과 불변성이 놓여졌다.

뉴턴의 입장은 이와 반대였다. 원리는 최초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도달의 목표이며, 출발점이 되는 것은 경험 사실이었다. 따라서 우선 "실험과 관찰을 하고 거기서 일반적 결론을 찾는다"고 하는 분석 방법이 있고, 그 후에 '발견되고, 원리로서 확립된 원인에서 여러 현상을 설명한다'는 합성 방법이 계속된다. 이리하여 경험 사실로부터의 출발과 분석에 따르는 합성이 역학의 방법이 된다.

그 큰 첫걸음은 정량적 수단으로서의 유율법(流率法=微積分法)의 확립에 있었다. 어떤 양(量)에서 '그 양의 변화'로 바뀌는 방법, 또 반대로 양의 변화에서 양 그 자체로 바뀌는 방법이 주어져, 운동을 운동의 변화로서 취할 수 있게 되었다. 힘이 운동의 유지가 아니라 운동의 변화에 결부되어 낡고 정적인 우주관에 반하여 동적(다이내믹)인 우주관이 생긴다. 그리하여 만유 인력의 도입으로 행성 운동을 설명하고 천상계의 법칙과 지상의 법칙(관성의 법칙)을 같은 지위에 놓아 보인다. 이리하여 신의 명령에 따라 운행되고 있던 천체가 간단한 자연 법칙에 의하여 움직여지고 있는 기계 장치로 대치되어 신의 손에 의한 지배는 천체의 운행에선 배제되어 창조와 조직에만 남겨지게 된다. 말하자면 신은 '천상(天上)의 입헌 군주(立憲君主)'가 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관 타도의 마지막 손질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의 파괴·대립의 뒤를 이어 종교와 과학의 하나의 타협점이 발견되었다.

역학은 이리하여 과학의 최초의 이론 체계로서의 형태를 갖추고 모든 자연학의 기초적 지위에 올라 이성시대를 여는 근원이 되었다.

이성 시대[편집]

理性時代

18세기에 이르면 이와 같은 역학의 완성의 뒤를 이어 그 소화와 반성의 시대가 시작된다. 여하튼 모페르튀(P. Maupertuis, 프랑스의

수학자·천문학자, 1698-1758)에 비롯한 프랑스의 뉴턴주의의 발전은 현실적인 요구와도 관계되면서 그 수학적 측면을 점차 굳혀 갔다. '이론역학'·'해석역학'의 방향으로의 진보로 명석한 수학적 방법이 정비되고, 경험에 의한 실증과 수학적 논증이라는 역학의 방법은 이미 신을 전혀 필요없는 것으로 하였고, 이성의 결정적인 승리로 확신하게 된다. 이리하여 인간성의 힘을 전면적으로 신뢰하는 이성의 시대가 열렸다.

뉴턴주의의 도입에 힘을 다한 볼테르(Voltaire, 프랑스의 문학가, 1694-1778) 등의 계몽주의도 이와 같은 이성의 힘이 사회 진보의 원동력으로 간주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성시대의 당연한 산물이었다. 그뿐 아니라 이와 같은 경향은 새로운 질서를 찬양하는 생각에서, 곧 미리 예정된 질서를 고정시키는 데 대한 회의(懷疑)로 변해갔다. 계몽주의가 구체제의 비판이라는 형태로 발전하는 것도 자연관의 보조와 관련되어 있었다.

자연계의 발전과 다양성[편집]

自然界-發展-多樣性

뉴턴 역학의 소화가 진전됨에 따라 하나의 새로운 측면으로서 경험 사실에 대한 한층의 존중과 수학적 형식을 만능으로 하는 사고방식에 대한 비판이 나타났다. 디드로(D. Diderot, 철학자, 문학자, 1713-1784)에서 보듯이 미리 예정한 대로 움직이는 기계 같은 자연이 아니라, 더욱 살아 있는 자연, 성장하고 발전하는 자연을 파악하는 것을 주장하는 생각이다.

이는 자연을 발전시키는 원인마저도 자연 자체 속에서 찾아 내려고 하는 점에서 '역학적 자연관'의 철저이기도 하며, 명령자인 신에 대한 최종적인 추방을 뜻하고 있었다. 뷔퐁(C. L. L. Buffon, 프랑스의 박물학자·철학자, 1707-1788)의 행성과 지구의 역사에 대한 고찰, 칸트(I. Kant, 독일의 철학자, 1724-1804), 라플라스의 성운설은 이 흐름에 따라 '자연의 진화'를 파악하려는 생각이었다.

한편 경험 사실의 존중은 자연의 여러 가지 현상을 고찰(考察)하는 방향, 즉 자연의 다양성(多樣性)을 주시하는 경향도 생겼다. 산업·기술의 진보에 따라 열, 전기, 자기 등의 연구가 점차 왕성해져서 물리학의 새로운 분야가 개척되기에 이르렀다.

18세기를 통하여 이러한 연구가 개시되었고, 거기에도 역학적 자연관과 공통된 물질상이 있었다. 열의 본성, 전기의 본성, 또는 전기 사이에 작용되는 힘, 역학과 같은 모델이 만들어지고, 이들은 본격적인 발전의 시기인 19세기로 이어지게 되었다.

뉴턴 역학의 확립[편집]

Newton 力學-確立

뉴턴이 만유인력의 착상을 얻은 것은 1665-66년경의 일이었다. 그는 행성 운동에 관한 케플러의 법칙에서 태양과 제 행성과의 사이에 작용하는 힘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달을 그 궤도에 유지시키는 데 필요한 인력은 지구의 중력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물론 이 발견은 매우 독창적인 것으로, 역학상의 여러 기본적인 개념을 명확하게 파악하여야만 비로소 가능하였던 것이다. 그렇다 하여도 어느 정도 그 도움이 되었던 것은 브리아르두스(Briardus, 1605-1604)나 보렐리였다. 브리아르두스는 케플러가 "태양이 행성을 움직이는 힘은 거리에 반비례한다"라고 생각한 것을 비판하여, 힘은 표면에 퍼지므로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여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또 보렐리는 천체의 운동을 중심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하는 힘과 중심으로 끌어당기는 힘과의 균형에서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 한동안 광학의 연구에 전념하고 있던 뉴턴은 빛의 에테르 가설(假說)에 관한 여러 고찰을 통해 다시 역학 연구로 돌아갔다. 1673년에 출판된 호이겐스의 『추시계』, 특히 그 원심력의 연구와, 1679년-1680년에 이르는 훅과의 서신교환에서도 자극된 것으로 생각된다.

1684년까지 렌(C. Wren, 영국의 건축가, 1632-1723), 핼리(E. Halley, 영국의 천문학자, 1656-1742)도 각각 행성(行星)에 작용하는 힘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여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고 있었지만, 그 작용을 받는 행성은 타원 궤도를 그린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였다.

뉴턴이 이미 이것을 증명하고 있었음을 안 핼리는 그에게 그 발표를 권하여, 1687년 『프린키피아』가 출판되었다.

뉴턴 역학은 이 『프린키피아』에 집약되었다 하여도 좋으며, 자연계의 물리적 인과성을 완전히 표현한 최초의 이론 체계로서 세계관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데카르트로 대표되고 있는 것 같은 역학적·인과적인 세계관은 점차 보급되어 오기는 하였지만, 그러나 아직 이론적으로 체계화하고 있지는 못하였다.

뉴턴[편집]

Isaac Newton(1642-1727)

영국의 물리학자, 천문학자, 수학자. 영국 동부의 링컨셔에 있는 작은 마을 울스소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이름도 아이잭, 어머니는 한나. 뉴턴의 집은 크지는 않지만 이 지방의 지주였다. 그랜섬의 그래머 스쿨을 거쳐 1661년 케임브리지대학의 트리니티컬리지에 입학, 1663년 발로(영국의 성직자, 고전학자, 수학자, 물리학자, 1630-1677)가 교수로 와서, 그의 지도하에 케플러의 굴절 광학, 데카르트의 해석 기하학, 월리스(영국의 수학자, 물리학자, 신학자, 1616-1703)의 무한 수학(1655) 등을 배웠다. 1665년에 버첼러 오브 아트의 학위를 얻었으나, 같은 해의 여름 페스트가 유행하여 대학은 일시 해산하였고 그도 고향으로 돌아갔다.

뉴턴의 위대한 모든 발견의 싹은 모두 이 시대, 1665년-1666년경에 얻어진 것이며, 저 사과의 일화도 이 무렵의 일이라고 한다. 1667년 마이너 펠로우(하급직원)에, 다음 1668년에는 메이저 펠로우(상급직원)에 뽑혔고, 또 이 해 마스터 오브 아트의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1669년에는 스승 발로의 후임으로 루카스 교수직에 취임하였다.

처음에는 광학 방면에 힘을 쏟아 빛의 분산, 박막(薄膜)의 색깔 등에 관하여 연구하였다. 그 성과는 『광학강의』(1729), 『빛과 색과의 새이론』(1672-1675), 『광학』(1704)에 정리되어 있다. 또 1668년에는 반사 망원경을 제작하고, 이것으로 1672년 로열 소사이어티(왕립학회)의 회원에 선출되었다. 이어 역학 연구로 돌아가, 이른바 뉴턴 역학을 확립하여 만유인력의 가설에 따라 행성의 운동을 논하고, 1687년 『프린키피아』를 저술하였다.

또 역학의 건설에 필요한 유율법(流率法), 즉 미적분학도 만들었다. 이는 1736년 『유율법과 무한 급수』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화학실험에 매우 흥미를 가지고 있던 그는 물질에 관하여 원자론적인 생각을 말하고 있다.

1688년 명예혁명 때 대학 대표의 국회의원에 선출되었다. 1694년 조폐국의 감사, 1699년에는 그 장관에 임명되어 화폐개주(貨幣改鑄)라는 어려운 사업을 수행하였다. 1703년, 로열 소사이어티의 회장이 되었고 1705년에는 나이트의 작위를 받았다.

당시 그는 신학자로도 알려졌으며, 성서가 사실을 정확하게 전하고 있음을 보이기 위하여, 고대에 관한 새로운 해석도 시도하고 천문학적인 고찰도 가하며 연대를 작성하였다. 또 성서의 신학적 연구를 통하여 3위1체를 부정하기에 이르렀다고 보고 있다. 런던 교외에 있던 켄신턴에서 사망하였고, 웨스트민터 성당에 장례되었다.

프린키피아[편집]

Principia

뉴턴의 『프린키피아』 즉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는 1687년에 핼리의 노력에 따라 출판되었다. 이른바 뉴턴 역학은 본질적으로 이 책에 잘 정리·수록되어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3권으로 되어 있는데, 첫째는 질량, 운동량 등의 정의, 둘째에 운동의 공리(公理), 즉 운동의 3법칙이 씌어져 있다. 또 절대시간·절대공간에 대하여서도 말하였다.

제1권의 첫째 장에는 유율법, 즉 미적분학이 간단히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이 책은 모두 고전적으로 기하학에 의하여 기술되고 있다. 제1권의 주제는 구심력, 즉 한 점을 향하여 긋고, 또 물리치는 힘이다. 물체의 운동에서 구심력을 구하는 것, 반대로 구심력의 작용하에서 물체의 운동으로 이끄는 것 등을 논하고 있다.

제2권은 유체(流體)에 관하여 씌어져 있으며, 마지막 장에서는 데카르트의 와동설(渦動說)이 부정되어 있다.

제3권에서는 행성이나 위성의 운동과 제1권의 계산이 비교되어, 역제곱의 법칙을 도입했다. 또 달에 작용하는 지구의 인력이 중력에 지나지 않는 점도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천체간의 관계가 모든 물체에 확장되어 만유인력의 법칙이 수립된다. 또 조수의 간만, 혜성의 궤도 등도 설명되고 있다.

만유인력의 법칙[편집]

萬有引力-法則

"모든 물체간에는 그들 자체의 질량을 서로 곱한 것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이 작용하고 있다." 이것이 만유인력의 법칙이며, 뉴턴에 의해 수립되어 『프린키피아』에 논술되어 있다.

이 법칙을 천체간에 적용하면 케플러의 법칙을 설명할 수가 있고, 지구와 지상의 물체와의 사이에 적용하면 지구의 질량·반경이 일정한 데서 중력의 가속도는 일정해져서 갈릴레이의 낙하운동의 법칙을 이끌어 낼 수가 있다.

뉴턴은 만유인력의 물리적인 원인을 추구하는 것이, 만족할 만한 결론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억측을 피해 도리어 수학적인 표현에 그쳤다. "나는 가설(억측)을 만들지 않는다"라는 말은 그의 이 같은 태도를 잘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편집]

Robert Hooke(1635-1703)

영국의 물리학자. 도버 해협에 면하는 와이트 섬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배우고, 보일의 조수가 되어 기체의 실험을 도왔다. 1662년 로열 소사이어티(왕립학회)의 실험 관리자가 되어 평생 그 자리에 있었으며, 사실상 왕립학회를 대표하는 존재였다. 1664년에는 그레섬 컬리지의 기하학 교수에 임명되었다.

1665년 『마이크로글래피어』를 저술하고, 현미경에 의한 각종 동식물의 관찰을 실었고, 한편 박막(薄膜)의 색에 관하여 빛의 파동설을 제창하였으며, 연소와 호흡, 화석에 관하여 논하였고, 식물세포의 발견도 기술하였다.

또 천문학·항해술의 필요에서 시계를 개량하였고, 1678년에는 탄성체(彈性體)에 관한 이른바 '훅의 법칙'을 발표하였다. 1679-1680년경에는 천체간에 작용하는 힘의 '역제곱의 법칙'에 도달하였다.

1666년 런던의 대화재 후, 시의 측량 감독관에 임명되어 런던시의 부흥계획에 임하였고, 한편 베드람 병원 등의 건축에도 힘썼으며, 런던에서 사망하였다.

광학의 발달[편집]

光學-發達

빛의 굴절과 이에 관계되는 빛의 입자설(粒子說), 파동설(波動說)의 논쟁이 17-18세기 광학의 중심 문제였던 것 같다.

1611년 케플러는 『굴절 광학』을 저술하였고, 망원경이나 천체로부터 오는 빛의 대기에 의한 굴절에 관련하여 많은 물질에 관하여 입사각(入射角)과 굴절각을 측정하였다.

처음 굴절의 법칙에 도달한 것은 스넬(W. Snell, 네덜란드의 수학자, 물리학자, 1591-1626)이며, 현재 사용되고 있는 모양의 표현은 데카르트의 『굴절 광학』 (1637)에 나타나 있다. 데카르트는 또한 빛은 에테르에 의하여 전파되는 작용이라고 하여 그 속도는 무한대라고 생각하였다.

페르마(R.Fermat, 프랑스의 수학자, 1601-1665)는 '빛은 최소의 시간에 도달할 수 있는 경로를 간다'라고 한 이른바 '페르마의 원리'에 따라 굴절의 법칙을 이끌어냈다. 그 때 빛의 속도는 엷은 매체(媒體) 속이 밀도가 높은 매체 속에서보다 크다고 가정하였다.

1665년에는 그리말디(F. M. Grimaldi,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1618-1663)가 빛의 굴절을 발견하였다. 그도 빛의 파동설을 예상하였던 듯하다. 같은 1665년 훅은 『마이크로글래피어』를 저술하고, 엷은막의 색을 논하며, 빛의 파동설을 제창(提唱)하였다.

뉴턴은 1668년에 처음으로 반사 망원경을 제작하였다. 또 1669년부터 1671년 걸쳐 케임브리지대학에서 강의를 하였고, 1672년과 1675년에는 '빛과 색과의 새이론'을 로열 소사이어티(왕립학회)에 발표하였다.

그의 빛에 관한 연구는 1704년에 출판된 『광학(光學)』에 간추려져 있다. 제1편은 빛의 분산 연구이다. 프리즘을 사용하여 태양광선을 여러 색광(色光)으로 분석하고, 색은 빛의 고유한 성질로서 굴절에 의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 굴절률은 각색광에 고유한 것이라는 것 등을 증명하였으며, 또 균질광(均質光)으로부터 복합광(複合光)을 합성하는 것도 시도하였다.

제2편은 엷은막의 색연구로, 특히 이른바 뉴턴링에 관하여 상세히 말하고 있다. 그는 빛의 입자설에 기울이고 있었던 것 같은데, 뉴턴링을 설명하는 데 발작이라고 하는 주기성(周期性)을 가진 것도 생각하고 있었다.

1669년 바르트리누스(F. Bartrinus, 덴마크의 물리학자, 1625-1698)는 방해석(方解石)에 의한 복(複)굴절을 발견하였다. 또한 1672년 뢰머(O. Reomer, 덴마크의 천문학자, 1644-1710)는 목성의 위성식(衛星蝕)을 이용하여 빛의 속도를 측정하였다.

호이겐스는 데카르트, 페르마, 훅 등의 의견에 암시를 받고, 또 복굴절의 발견이나 빛의 속도측정을 토대로, 빛의 파동설을 확립하였다. 그는 '호이겐스의 원리'에 따라 빛의 반사, 굴절, 복굴절에 이론적인 설명을 하였다. 그 때 빛의 속도는 엷은 매체 쪽이 짙은 매체 속에서보다도 더 크다고 가정하였다. 그리고 그는 복굴절 때 발생하는 편광(偏光)현상도 발견하였다.

그러나 그는 편광을 설명하지 못하였고, 또 색의 설명도 하지 않고 있다. 호이겐스의 『광학론』은 1678년에 완성되어 1690년에 출판되었다.

모페르투이는 입자설(粒子說)을 지지하고, 페르마나 호이겐스와는 반대로 빛의 속도는 짙은 매체쪽이 엷은 매체 속보다 크다고 가정하고, 굴절의 법칙을 내기 위하여 1744년 '최소 작용의 원리'를 세웠다. 이는 역학에도 적용되었고 또 변분법(變分法)의 발전에도 기여하였다. 오일러는 파동설을 지지하였고, 빛의 색과 진동수와의 관계에 접근하였다.

빛의 입자설과 파동설[편집]

-粒子說-波動說

에너지의 이동 방법에는 2개의 종류가 있다. 그것은 물질 자신이 에너지를 운반하는 경우 ― 가령 돌을 던졌을 때, 물질은 작은 진동을 하고 있을 뿐인데 에너지는 전파되는 경우의 물의 파동이나 소리 등이다.

그렇다면 빛은 전자와 같은 입자의 흐름인가, 또는 후자와 같은 파동인가?

우선 입자설로 빛의 여러 현상을 설명해 본다. 이 경우에는 물질과 빛의 입자와의 사이에 있는 인력 또는 척력(斥力)―이것은 역학적인 개념이다―을 바탕으로 한다. 첫째, 빛의 직진은 운동의 제1법칙(정지해 있거나 똑같은 직선운동을 하고 있는 물체는 힘이 작용하지 않는 한 그 상태를 유지한다)으로 분명하다. 둘째, 빛의 반사는 마치 탄성구(彈性球)를 벽에 던졌을 때 튀는 것과 같다. 셋째, 빛의 굴절은 다음과 같이 생각하면 된다.

빛의 입자가 공기 중에서 광학적으로 짙은 물질의 표면에 근접하면, 그 물질은 표면에 수직으로 인력을 빛의 입자에 미치고, 또한 그 힘은 물질의 매우 가까운 곳에만 작용한다면 운동의 제2법칙(운동의 변화(가속도)는 작용하는 힘의 크기에 비례하고, 그 방향에 일어난다)에 의하여 힘의 작용을 받은 빛의 입자는 경계면에 세운 법선(法線)으로 가까이 굽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속도는 공기중보다도 커질 것이며, 또 이것이 굴절의 법칙을 이루는 것도 증명할 수 있다.

다음, 파동설로 설명한다면, 빛은 에테르의 작은 진동이 파도로서 전달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 빛의 파(波)가 전달되면 그 때까지 정지하고 있던 부분의 에테르가 진동을 개시하여, 이번에는 그 점들이 근원이 되어 많은 파가 구면상(球面狀)으로 일어나고, 이들 2차적인 구면파를 감싸는 면이 새로운 파면(波面)을 만든다. 이것이 '호이겐스의 원리'이다. 이 원리를 사용하면 반사·굴절은 그림과 같이 쉽게 설명을 할 수 있다. 다만 굴절에 관하여서는 빛의 속도는 광학적으로 짙은 물질 속일수록 작다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복굴절은 어떤 종류의 결정 중에서는 빛의 속도가 방향에 따라 달라진다고 설명할 수 있다. 파동설은 호이겐스에 의하여 확립되었다.

색에 관해서는, 입자설로는 여러 가지 색광에는 각각 그에 대응하는 광입자(光粒子)를 가정하여야 한다. 파동설로는 색은 파장의 차이에 따라 설명되고, 감각에서의 질적인 다양성을 양적인 것으로 환원할 수가 있다.

뉴턴은 이른바 뉴턴링의 현상은 광선이 어떤 원인으로 서로 반사, 또는 굴절하는 성향(性向)이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생각하고 이를 발작(피츠)이라고 불렀다. 그는 가설에 관해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파동설로는 빛의 직진(直進)을 설명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빛의 입자설로 기운 듯하다.

그러나 그는 발작이라고 하는 주기성을 가진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빛에 입자적인 측면과 파동적인 측면이 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19세기 초에 회절(回折)·간섭(干涉)·편광(偏光) 등의 현상이 문제가 되었고, 파동설이 승리를 했지만, 에테르의 역학적 성질이라고 하는 큰 문제가 뒤에 남게 된 것이다.

호이겐스[편집]

Christian Huygens(1629-1695)

네덜란드의 물리학자·천문학자 헤이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콘스탄틴은 외교관이고 뛰어난 문화인으로서, 데카르트와도 친교가 있었다. 라이덴대학과 브레다의 컬리지에서 배운 뒤 유럽 여러 나라를 돌았고, 또 프랑스의 성직자이며 당시 학문의 정보 교환의 중심인물이었던 메르센(M. Mersenne, 1588-1647)과 서신을 통하여 학계의 소식을 얻었다.

1656년, 망원경을 개량하여 토성의 고리(環)를 발견하였다. 또 추시계를 처음으로 제작한 것도 그였다(1655-1660). 1666년, 아카데미 르와이아르 데 시안스가 창립됨과 동시에 그 회원으로 초청되었으며, 2번의 짧은 귀향을 빼고는 1681년까지 파리에 머물러 아카데미의 중심 인물로서 활약하였다.

1669년 충돌에 관한 문제를 논하여 월리스, 렌 등과 독립적으로 '운동량(運動量)보존의 법칙'에 도달하였다. 1673년에는 『추시계』를 저술하여, 추시계를 제작, 사이클로이드에 따른 진동, 물리 그네추의 진동의 중심, 원심력 등에 대하여 논하였다.

물리 그네추의 이론을 전개할 때에 에너지 보존(保存)의 원리에 상당하는 생각을 사용하였다. 이른바 '호이겐스의 원리'로, 빛의 여러 가지 현상을 설명하고 빛의 파동설을 확립하였다. 『광학론』은 1678년 완성되었고, 1690년에 출판되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데카르트의 영향을 받았는데 실험이나 관측도 매우 중요시하였다. 하프의 교외에서 사망하였다.

뉴턴 역학의 체계화[편집]

Newton 力學-體系化

뉴턴 이후의 역학은 해석학·천문학·지구 형상론과 더불어 영국보다도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유럽 대륙에서 발전되었다.

데카르트의 철학, 특히 그 에테르의 와동설(渦動說)이 지배적이었던 프랑스에서 뉴턴의 역학, 특히 만유 인력의 법칙이 인정받게 된 것은 최초 지구형상론을 통하였다. 즉 뉴턴의 역학에 따르면 지구는 적도쪽이 부풀어 다소 편평하게 되어 있지만, 데카르트의 설에 따를 것 같으면 반대로 지구는 극이 있는 쪽이 다소 가늘고 길게 되어 있다. 이 문제는 모페르튀나 클레로(A. C. Clairaut, 프랑스의 수학자, 1713-1765)가 이론적으로 발전시킴과 동시에 극지(極地) 라플란드에 가서 측량을 하여 뉴턴 학설이 정확함을 증명하였다.

18세기는 뉴턴 역학의 체계화의 시대이다.

먼저 호이겐스는 물리 그네추의 이론을 전개할 때 에너지 보존의 원리에 상당하는 생각을 썼으나 이는 다니엘 베르누이(D. Bernoulli, 스위스의 물리학자·수학자, 1700-1782)에 의하여 보다 일반화되었다. 또 그는 이를 유체에 응용, 1738년 『유체역학』을 저술하였다. 유체의 운동에 관한 '베르누이의 정리'는 잘 알려져 있다. '가상작용의 원리'는 요하네스 베르누이(J. Ber-noulli, 스위스 수학자, 1667-1748)에 의해 정식화되었다. 오일러는 강체(剛體)의 역학을 발전시켜 오일러의 각(角)과 오일러의 방정식에 이름을 남겼고, 달랑베르(J. R. D'Alembert, 프랑스의 수학자·물리학자·철학자, 1717-1783)는 『역학론』(1743)을 저술하고 질점계(質點系) 문제를 다루어, 이른바 달랑베르의 원리를 저술하였다.

역학의 해석학에 의한 체계화를 확립한 사람은 라그랑주이다. 그는 1788년에 『해석역학』을 저술하였으며 이른바 '라그랑주의 방정식'을 유도하였다.

변분법(變分法)은 요하네스나 야코프 베르누이(스위스의 수학자, 1654-1705) 그리고 오일러에서 라그랑주에 이르러 완성되었으며, 역학의 해석학적인 취급에 큰 역할을 하였다. 모페르튀는 최소작용의 원리를 제창하였는데, 이것도 변분법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또 라그랑주는 천문학에서도 오일러가 먼저 손을 댄 상수변화(常數變化)의 방법을 완성하여 천체역학에 유력한 무기를 제공하였으며, 3체문제의 특수한 풀이를 얻어 라플라스로의 길을 텄다.

천체역학을 완성한 것은 라플라스라고 하겠다. 그는 섭동론(攝動論)을 사용해서 3체문제를 전개하였고, 그 결과는 『천체역학』 5권(1799-1825)에 집성되었다. 섭동론이라고 하는 것은, 가령 토성의 운동을 태양의 인력뿐만 아니라, 목성에 의한 작은 영향마저 고려하여 계산하는 방식이다.

영국에서는 1676년에 그리니치 천문대가 완성되었고 관측 천문학이 발달되었다.

오일러[편집]

Leonhard Euler(1707-1783)

스위스의 수학자. 바젤에서 태어나 베르누이 일족(一族)에게 배웠고, 상트페테르부르크(1727-1741, 1766-1783)와 베를린(1741-1766)의 아카데미에서 활약하였다. 해석학을 발전시켜 그 역학에 대한 응용에도 성과를 울렸다. 특히 변분법이나 강체의 역학에 관한 업적은 잘 알려져 있다. 또 빛의 파동설을 발전시켰다. 그는 실명하였으나 굴하지 않고 45권의 책과 700편이나 되는 논문을 저술하였다.

라그랑주[편집]

Joseph Louis Lagrange(1736-1813)

프랑스의 수학자·물리학자. 이탈리아의 토리노에서 태어났다. 1766년 베를린의 아카데미, 1787년 이후로는 파리에서 활약하였으며 아카데미의 회원, 에콜 노르말,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교수가 되었다. 『해석 역학(解析力學)』(1788)을 저술하여 이른바 '라그랑주의 방정식'을 가르쳤고, 역학의 해석학에 체계를 확립하였다.

변분법을 완성한 것도 그이며, 이는 역학을 해석학적으로 다루는 데 매우 유력하였다. 천문역학에 관하여서는 상수변화의 방법을 완성하였고 3체문제의 특수한 풀이를 구하였다. 미터법 제정에서는 지도적 역할을 하였다.

라플라스[편집]

Pierre Laplace(1749-1827)

프랑스의 천문학자·수학자. 노르망디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아카데미 데시안스의 회원. 에콜 노르말,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교수, 정치에 관여한 일도 있다. 섭동론(攝動論)을 써서 3체 문제를 전개하였고 천체역학을 완성하였다. 그 성과는 『천체 역학』 5권(1795-1825)에 간추려져 있다.

또 칸트와 똑같이 태양계는 성운(星蕓)에서 진화하였다 하여 이른바 칸트·라플라스의 성운설을 제창하였다. 해석학에 의하여 포텐샬론, 확률론을 발전시켰다. 미터법의 제정에도 참여했다.

정전기의 연구[편집]

靜電氣-硏究

호박(琥珀)을 마찰하면 미세한 먼지 등을 끌어당기는 것은 옛날부터 알려져 있었고, 자석에 관하여서는 16세기 말에 길버트의 연구가 있어 테카르트의 설과 함께 17세기에 지배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전기의 현상에 관하여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된 것은 18세기에 이르러서의 일이다.

전기 연구에 하나의 전기를 마련한 것은 라이덴병(甁)의 발명과 보급이었다. 이 장치로 말미암아 전기의 실험이 손쉽게 되었고, 정전현상(靜電現象)·방전(放電) 등이 알려졌으며, 2종류의 전기의 구별, 전기량의 보존, 감응 현상의 발견 등으로 발전하여, 마침내 사람들의 관심은 전기의 본성으로 향해졌다. 한편 전하(電荷) 속에 작용하는 힘에 관하여서는 쿨롱의 법칙이 확립됨으로써 만유인력과 같은 역제곱 법칙(逆自乘法則)이 성립됨을 알게 되어 뉴턴학을 뒷받침하였다.

그러나 그동안의 연구는 정전기밖에 없었다. 그는 전류의 발견과, 또는 그것을 저장하는 장치로서의 전지(電池)의 발견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기전기와 축전기[편집]

起電機-蓄電器

게리케(O. von Guericke, 독일의 물리학자, 1602-1686)는 그의 저서 『새로운 실험』(1672년)에서 전기적인 실험에도 언급하였고 특히 마찰 기전기의 제작에 관하여 기술하였다.

이에 자극되어 보일도 일련의 실험을 하였으며 18세기에 이르러 영국의 그레이(S. Gray, 1670경-1736), G. 호일러, 데조그리에(J. T. Dezogrie, 1683-1744), 파리의 뒤페(C.Dufay, 1698-1739) 등이 실험을 진전시켜, 물질에는 전기적인 성질을 멀리까지 전하는 것(導體)과 전하지 않는 것(不導體, 絶緣體)이 있음을 알아내었다. 한편 그레이와 뒤페는 유리의 용기에 넣은 물에 전기를 넣을 수 있음을 보였고, 이것이 축전작용 발견의 계기가 되었다. 첫째, 폰 클라이스트(E. G. von Kleist, ?-1748)가 유리병에 하전(荷電)된 철침(鐵針)을 넣어 축전에 성공(1745)하였고, 다음해 네덜란드의 무셴브루크(P. von Musschenbroek, 1692-1761)는 이와는 달리 역시 병에 넣은 물에서 코르크 마개를 통해 끌어낸 철사에 유리막대로 하전시켜 전기가 축적된 것을 알아내었다.

이 발견은 레오뮈르를 통하여 파리의 과학아카데미로 전하여졌고, 놀레(M.Nollet, 프랑스의 물리학자, 1700-1770)가 이 장치를 라이덴병(무셴브루크는 라이덴대학의 교수)이라고 이름을 붙여, 즉각 온 유럽에 보급되었다. 그 후 와트슨(R. Watt-son, 1715-1787) 등이나 베비스(F.Bevis, 1695-1771)의 개량을 거쳐 액체가 없는 축전 장치가 되었고 라이덴병은 전기 현상 연구의 무기가 되었다.

전기의 실체와 유체설[편집]

電氣-實體-流體說

라이덴병의 발견 후 전기 현상의 실험적인 연구는 급속히 진전되었다. 우선 전기량의 보존이 실험적으로 확인되었고, 1753년에는 캔턴 (J. Canton, 1718-1772)이 정전유도를 발견하여 윌케 (W. Wilke, 1732-1796)·에피어스 (E. Epiers, 1724-1802) 등이 이것을 정밀하게 관찰하였다.

이 때부터 전기의 본성이 문제로 등장, 첫째 전기량의 보존성과 결부하여 '전기적 물질'이란 사고 방식이 등장했다.

와트슨은 전기의 전도를 '전기적 에테르'의 이동이라고 설명하려 하였고, 연(鳶)의 실험으로 번갯불(雷)이 전기 현상임을 밝힌 미국의 프랭클린(B. Franklin, 1706-1790)은 '전기의 불'의 물질을 원소의 일종이라 하여 일유체설(一流體說)을 수립하였다. 이 사고 방식을 철저히 발전시킨 사람은 에피너스이며, 모든 부도체는 전기유체의 통과를 방해하는 것이라 하여 공기 축전기를 만들어, 공기에 이 사고방식이 합당함을 보였다. 이것으로 전기적인 작용은 원격적으로 작용한다고 추론하여, 전기의 입자의 상호간의 반발과, 전기 유체와 보통물질과의 사이의 인력을 가정하여 유도(誘導) 현상도 해석하였다.

이리하여 한편에서는 뒤페나 시머(R. Symmer, 영국의 물리학자, ?-1763)가 제창한 2유체설과 논쟁이 일어났지만, 하전(荷電)간에 작용하는 힘의 법칙(쿨롱의 법칙)이 실험적으로 확립된 것은 마침 이 무렵이었다.

쿨롱의 법칙[편집]

Coulomb-法則

하전간의 힘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점에 최초로 주의한 것은 다니엘 베르누이이고, 자극(磁極)에 대하여서는 미첼(J. Mitchell, 1724-1793) (1750)이라고 한다.

프리스틀리가 처음으로 전기에 관하여 실험하고, 이어 캐번디시(H. Cavendish, 영국의 물리학자, 화학자, 1731-1801)가 이 문제 해결에 몰두하였으나 마침내 쿨롱이 저울을 사용한 정밀 측정을 진전시켜(1784-1785), 이른바 '쿨롱의 법칙'을 확립하였다. 1유체설과 2유체설의 논쟁은 이 법칙을 둘러싸고 맹렬히 벌어졌으나 결국 아무런 결론을 얻지 못한 채 차차 잠잠해지고, 연구의 주류는 전기의 본성 문제를 떠나서 뉴튼 역학적인 전자기학(電磁氣學)의 건설 방향으로 옮아 갔다.

쿨롱[편집]

Charles Augustin de Coulomb(1736-1806)

프랑스의 토목 공학자·전기학자. 남프랑스의 앙굴렘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배운 뒤 기술장교가 되어 마르티닉 섬에서 근무하다 병에 걸려 귀국, 공병단에서 군무에 종사하면서 과학 연구를 진행하였다.

1871년 과학 아카데미 회원. 프랑스 혁명의 발발(1789)과 함께 사직, 귀향하였으나, 공화력 3년에 파리로 돌아와서 파리대학 총장이 되었다.

그는 과학 연구자로서, 또 성실한 인격자로서 당시 널리 사회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전하(電荷) 및 자하(磁荷)에 관한 쿨롱 법칙의 확립은 초기의 트위스팅 저울로 연구, 결실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