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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컴퓨터·환경·첨단·지구과학/과학의 발달/과학의 발달/물리학의 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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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의 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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物理學-變革

19세기도 거의 끝날 무렵 낡은 형태의 물리학은 거의 완성에 가까왔다.

"물리학은 고도로 발전된 거의 완성단계에 도달한 학문이며, 에너지 보존 원리의 발견으로 월계관을 쓰게 된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최후의 안정된 형태를 이룰 날도 멀지 않을 것이다."

젊은 시절의 플랑크가 물리학의 장래에 대하여 의견을 물었을 때에 스승인 욜리(1809-1884)의 대답이다. 욜리뿐 아니라 당시의 물리학자들 대부분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실제로 해왕성의 이론적 예측에 따라 실험적으로 더욱 성가를 높이는 한편, 이론적으로는 정비된 아름다운 형식을 자랑하고 있던 역학을 비롯하여, 빛나는 여러 가지 성공과 통일적인 원리로 사람들을 매혹한 열역학, 불가역성(不可逆性)까지도 해명하여낸 기체의 운동학적 이론, 더구나 전자기학의 모든 법칙을 하나로 집성한 맥스웰의 장(場)의 이론, 그것에 의한 빛의 본성의 해명, 헤르츠에 의한 전자파의 검증(檢證) 등 역학·열학·전자기학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이론과 실험 어느 면에서나 물리학은 부동의 아성을 쌓아올린 듯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단(一旦)의 완성은 동시에 붕괴의 씨를 내포하는 법이다. 물리학의 발전이 정점에 달한 듯이 보였던 바로 그 무렵 별안간 물리학에 커다란 변혁의 회오리바람이 불어닥치기 시작하였다. 몇몇 분야 상호간에 슬며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였던 모순들이 그 경계의 영역을 통하여 점차 명확해졌다. 열학과 역학의 경계인 열복사론, 역학과 전자기학 사이의 운동물체의 전기역학 등이 양자론(量子論)과 상대성이론의 실마리를 만들었다.

그러나 더욱 직접적인 동기가 된 것은 새로운 여러 가지 현상의 발견이었다. 음극선의 발견, X선의 발견, 나아가서는 계속 일어난 우라늄 방사능에서 라듐 등 방사성 원소의 발견은 그 때까지의 물리학과는 다른 새로운 대상이다. 음극선의 본체로서의 전자나, α, β, γ선이 해명되는 과정에서 물리학은 마이크로(micro=極微)의 영역―원자의 세계로 진입하였다. 이러한 영역에서 지금까지의 물리학의 법칙이 그대로 성립될지는 결코 분명한 일은 아니지만 일찍이 천체운동과 지상법칙을 하나의 역학법칙 아래 통일시킨 물리학자들로 고전물리학의 법칙들이 여기서도 성립된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한 사태발전이었다. 그런데 고전론에 의한 해명이 계속되는 과정에서 숨길 수 없는 모순이 드러나게 되어, 고전물리학에 대한 불신, 나아가서는 절망감마저 나타났다. 특히 원자는 불변이 아니라는 것의 발견(러더퍼드와 소디 1877-1956)이나, 전자의 질량이 속도에 따라 변한다는 사실의 발견(W. 카우프만 1871-1947)은 그 때까지의 물질관에서의 강한 충격이었고 널리 위기 의식을 자아냈다.

물리학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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物理學-危機

예컨대 푸앵카레(1854-1912)는 이렇게 말하였다. "뉴턴의 원칙, 마이어의 법칙, 라부아지에의 법칙, 카르노의 법칙 등 모든 낡은 물리학의 법칙들이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수학적 물리학의 위기는 도래하였다."

이러한 위기감에서 사상적 혼란이 나타났고, 물리학자들은,

신용할 수 있는 것은 사실뿐이라고 하여 이론 그 자체를 불신하며 물질은 소멸하였다고 물질을 부정하게도 되었다. 실증주의·경험주의가 유행하였고, 또한 "과학은 객관적인 자연을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식의 산물에 불과하다"라든가 "과학의 역할은 경험을 충실하게 기술하는 데 있으며, 자연의 본질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와 같은 주장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물리학의 진보는 이와 같은 사상적인 혼란에도 불구하고 한걸음 한걸음 사실을 밝혀내고 사실로써 자연을 해명하여 나갔다. 어지러운 변혁의 과정을 통하여 그릇된 해석이나 주관적인 경향은 차차 극복되어 물질의 학(學)으로서의 물리학이 확립되었다.

과학과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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科學-産業

이와 같은 물리학의 변혁을 뒷받침한 것은 산업의 진보에 따른 기술의 개발이었다.

19세기도 반이 지날 무렵부터 그 때까지만 하여도 독점적인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영국의 지위가 차차 흔들려, 산업의 진보는 전유럽에 번졌다. 그 중에서도 산업혁명이 뒤늦게 진행된 독일의 발전은 눈부셨다. 보불 전쟁(1870-1871) 후 국민적인 통일을 달성한 독일에서는 전쟁으로 획득한 알사스 로렌의 풍요한 자원과 거액의 배상금이 계기가 되어 중공업이 뻗어갔다. 제철·제강의 야금공업, 금속공업, 그리고 전기공업 등이 성장하여 그 무렵에 이미 세계를 앞지르던 화학공업과 더불어 전유럽을 압도하는 근대적인 공업 국가가 성립하였다. 미국과 더불어 독점자본주의시대의 개막의 선두를 끊은 바 있는 독일에서는 재빨리 산업과 과학의 연결의 중요성이 인식되어 정치적 배려로써 실현되었다. 베를린, 샤를로텐부르크에 지멘스(1816-1892), 헬름홀츠 등의 노력의 결과로 국립이공학 연구소가 설립되어(1887) 열복사론의 연구를 통하여 물리학 변혁의 제1페이지를 차지하게 되었다.

영국에서 1874년에 설립된 캐번디시연구소가 J. J. 톰슨을 소장으로 맞이하여(1884) 활약기에 들어선 것도 이 무렵이다. 영국에서는 1895년 이래, 과학자를 동원하여 케임브리지에 집중시키는 정책이 마련되고, 1918년부터는 러더퍼드가 소장이 되어, 캐번디시연구소는 실험물리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한편에서는 J. J. 톰슨과 러더퍼드에 의하여, 또 다른 편에서는 플랑크와 아인슈타인에 의하여 대표되는 이 영국과 독일을 중심으로 하여 물리학의 변혁기는 추진되었으며, 독일을 둘러싸고 있는 중소 여러 나라의 공헌도 컸다.

전기양자론(前期量子論)을 개혁한 보어, 전자론(電子論)을 전개한 로렌츠를 비롯하여, 코펜하겐대학(덴마크), 라이덴대학(네덜란드), 취리히공과대학(스위스), 빈대학(오스트리아) 등이 중요한 기여를 하였고, 특히 물리학의 국제적인 교류 면에서는 국가주의적인 자기만족이나 정치적 편견에 의한 과학의 왜곡이 적으니만큼 작은 나라의 역할은 컸다. 스웨덴의 노벨상(노벨의 유언과 유산으로 창설, 1901년부터 수상을 개시), 벨기에의 솔베회의(1911년 창설) 등의 역할도 물리학이 한 나라에서 국제적인 것으로 옮겨가는 이 단계에서 간과할 수 없는 일들이다.

이리하여 물리학의 진보의 주류는 각국의 학회나 아카데미로부터 대학의 연구실·실험실로 옮아갔고, 나아가서는 국가나 기업이 마련한 연구소로 옮겨가서, 한 나라의 규모에서 국제적인 규모로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과학과 산업의 결합은 매우 긴밀하게 되고 거기에 정치의 영향이 강하게 미치는 시대가 되었다.

열복사론과 작용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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熱輻射論-作用量子

물리학의 변혁의 주요한 일익을 담당한 양자론의 탄생의 터전은 열복사론이다. 마이크로(micro=극미)의 세계를 지배하는 양자론이 일견 미세한 세계와는 관계가 없는 듯이 보이는 열복사론을 통하여 생긴 것은 흥미깊은 일이다.

그러나 열복사론은 고전물리학의 두가지 분야, 열학과 전자기학이 겹쳐지는 경계영역이며, 따라서 다른 2개의 논리구조가 하나로 집약되어야 하며, 고전이론이 지니는 모순이 날카롭게 표면화될 터전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서 낡은 이론의 범주를 타파하고 새로운 이론의 싹이 숨겨져 있었던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열과 빛이라는 2개의 물리현상의 매듭은 매크로적(macro=거시)인 견해를 대표하는 열역학과 마이크로적(微視的)인 견해 및 원자론의 입장과의 접촉을 통하여, 모순 속에서 차차 풀려나간 것이다.

물체(고체)를 가열하여 어느 온도에 이르면 빨갛게 달고, 더욱 온도를 높이면 백열화한다. 즉 방사되는 빛의 색은 온도에 따라 변하며, 고온이 될수록 파장이 짧은 빛이 많아진다. 이것이 열복사현상인데 온도에 따라 열복사에 포함되는 파장이 어떻게 변하는가, 바꾸어 말하자면 스펙트럼 분포가 어떻게 변하는가, 이것이 문제의 중심으로 등장하였다. 그 배경에는 야금공업의 진보에 의한 고온측정문제나 분광학, 또 전기공업의 진보, 특히 백열전등의 필라멘트의 문제 등 당시의 산업기술의 요구가 있었다.

이론 면에서는 키르히호프가 공동복사(空洞輻射)를 논하여, 그것이 벽을 이루는 물질의 종류에 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혀 문제를 순수화한 이후, 이 보편적인 분포의 형태가 그 어떤 '절대적인 것'으로서 강한 흥미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독일의 국립 이공학연구소를 중심으로 하여 추진된 실험이 매우 정밀도를 올리기 시작할 무렵, 이 실험과 이론이 밀접하게 연결된 가운데 마침내 플랑크의 작용양자가 탄생하였다.

열복사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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熱輻射-硏究

복사의 연구는 프라운호퍼(1788-1826)가 촛불 속에서 태양 스펙트럼 속의 D선(暗線)과 같은 파장의 휘선(輝線)을 발견한 데서(1814) 비롯하였다. 이 관계를 하이델베르크대학의 키르히호프(1824-1887)와 분센(1811-1899)이 면밀히 조사(1859)해 "각 물질은 방출하는 복사와 같은 진동수의 복사를 흡수한다"라는 일반적인 형태로 정리하고, 또 "그 방출과 흡수의 비율은 물체의 종류에는 관계없이 물체의 온도와 방출(또는 흡수)되는 복사의 진동수에만 관계한다"(키르히호프의 법칙)라 하는 복사법칙에 달하여 이에 연구의 기초가 이루어졌다.

물체의 종류에 관계하지 않는다면 무언가 이상적인 물체-가령 모든 진동수의 복사를 흡수하는 물체(黑體)를 생각하고 그 복사(黑體輻射)를 연구하면 되며, 그 모형으로 제출된 공동복사(空洞輻射)가 앞으로 중심문제가 된다.

흑체복사에 관하여서는, 복사의 모든 에너지는 온도의 4제곱에 비례한다는 법칙이 슈테판(1835-1893)에 의하여 실험적으로 얻어졌으나(1879), 그 이론적인 도출은 볼츠만에 의하여 이루어졌다(1884). 이것을 이어받은 큰 진전은 독일 국립 이공학연구소의 빈의 연구로, 그는 완전히 반사하는 벽에 둘러싸인 상자 속에 밀폐된 복사를 생각하여 이를 압축한다는 사고실험(思考實驗)에 의하여 빈의 변위칙(變位則)을 유도하였다. 즉 복사를 기체와 같이 생각하여 열역학을 적용하면 압축에 의하여 온도는 상승하고, 한편 빛의 파장은 벽의 이동에 따라 도플러효과로 짧아진다. 온도와 파장은 이와 같이 그 적(積)이 일정한 형태로 변위(變位)한다는 것이 그의 변위칙이었다. 그러나 복사열에 열역학을 적용한다는 매우 대담한 방식에는 비판도 많아, 당시의 장로격인 켈빈(W. 톰슨)은 "열역학은 발광하고 있다"고 말하였을 정도였다.

실험은 파셴(1865-1947)을 비롯하여 루머(1860-1925), 프링스하임(1859-1917) 등에 의하여 추진되었고, 빈의 변위칙에 잘 맞았으며, 또 스펙트럼 분포의 실험식도 제출되었으므로, 빈은 다시 이 실험식의 이론을 정립하여 빈의 분포식(分布式)을 제출하였다. 이것은 파장의 짧은 범위에서 실험과 잘 맞고, 또 변위칙과도 모순되지 않으므로 적지않은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그 후의 실험, 특히 루벤스(1865-1922), 쿠를바움(1857-1927)의 장파장 영역의 실험은 이 식과 분명히 상이함을 나타내었으며, 그리하여 국면 타개가 요망되게 되었다.

이 무렵 영국의 레일리경(1842-1919)도 이 문제에 손을 대어, 전자장에 통계역학의 에너지 등 분배법칙을 써서 하나의 분포식(레일리-진스의 분포식)을 내놓았다(1900). 이는 고전물리학을 정통적으로 사용한 것이나, 그 결과는 얼핏보아도 옳지 않은 것을 지니고 있었다. 왜냐하면 장(場)의 개념에서 오는 당연한 결과로서, 복사의 모든 에너지를 계산하면 무한대가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기묘하기는 진동수가 작은 곳에서는, 즉 빈의 식이 실험과 빗나가는 곳에서는 레일리-진스의 식은 실험과 잘 일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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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helm Wien(1864-1928)

독일의 물리학자. 동프로이센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괴팅겐, 하이델베르크, 베를린의 대학에서 수학, 키르히호프(1824-1887)와 헬름홀츠의 영향을 받았다. 1890년, 국립 이공학연구소에 헬름홀츠의 조수로 입소, 광도단위(光度單位), 고온측정의 문제로 시작, 마침내 열복사의 연구로 들어갔다. 복사에 열역학을 적용하여 변위칙를 유도하였고, 또 볼츠만 분포를 적용하여 복사의 분포식을 만들었다. 그 뒤 아헨공과대학, 기센, 뷔르츠부르크대학의 교수를 역임, 동 대학의 총장까지 지내다가 후에 뮌헨대학으로 옮겼다. 뢴트겐선, 카나르선, 음극선 회절 등의 연구도 알려졌으며, 1911년 열복사의 연구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작용양자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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作用量子-登場

1896년경부터 열복사문제에 착수하고 있던 플랑크는 열역학의 방향에서 검토를 계속하였으며, 특히 엔트로피를 통하여 빈의 식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으나, 실험사실과의 차이가 분명하여짐에 따라 이는

"아마 극한을 위한 식일 것이다"라는 견해에 이르렀다.

그렇기 때문에 빛의 식을 기본으로 하면서 진동수의 영역의 실험사실까지도 설명할 수 있도록 보정(補正)하여 새로운 분포식을 만드는 것이 그의 목표가 된다. 1900년에 제출된 「빈의 분포식의 한 개량에 관하여」라는 것이 그 실현이며, 이에 비로소 플랑크의 복사식이 등장하였다(1900). 이 식은 실험사실과 일치하는 것이었으나, 이것만으로는 말하자면 실험결과를 연결시킨 실험식이므로 그 물리적 의미는 처음부터 분명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확률과 엔트로피에 관한 볼츠만의 고찰에 따라, 에너지의 분배를 생각함으로써 마침내 플랑크는 혁명적인 생각에 도달하였다. 그것은 에너지는 무한하게 분할할 수 있는 연속량이 아니라, 어떤 에너지의 요소(에너지量子)의 정수배(整數倍)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빈의 변위칙 중 "이 에너지양자 N는 진동수 Z에 비례해야 한다"에서 N=hz라 쓰이고 이 h는 보편적인 정수(定數)이며, 플랑크 정수(定數) 또는 작용양자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리하여 열복사식은 작용양자를 낳았고, 이 개념은 마침내 아인슈타인의 빛의 입자성에 관한 고찰 중에서 검토되어(1905), 그 진정한 혁명적인 의미가 명확하여진다. 즉 양자론에 대한 길이 열린 것이다.

플랑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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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x Karl Ernst Ludwig Plank(1858-1947)

독일의 이론물리학자. 대대로 법률가, 관리, 학자 등을 낳은 오랜 가계의 한 사람으로 킬에서 태어났다. 뮌헨대학, 베를린대학에서 공부한 후 뮌헨대학 사(私)강사를 거쳐, 킬대학에서 근무(1885), 후에 키르히호프(1824-1887)의 후임으로 베를린에 옮겨갔다(1889). 일찍부터 열역학에 관심을 가졌으며, 명저 『열역학 강의』는 널리 알려져 있다. 양자론의 실마리를 열어 놓은 작용양자의 도입도 열역학에서 발전된 열복사론의 성과이며, 이 업적에 따라 1918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사상적으로는 처음에는 에너지론의 영향을 받았으나 마침내 탈각하고, 볼츠만의 학문을 지지하여 마하의 감각론, 사유 경제설(思惟經濟說)에 반대하였다. 취미로서의 음악의 조예도 깊었고, 등산 애호가이기도 하였다.

방사선과 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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放射線-電子

19세기 말에 이르러 계속해 발견된 새로운 현상 ― 여러 가지 방사선의 발견 ― 은 물리학을 새로운 단계로 나가게 한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이것은 이른바 진공방전(저압기체에서의 방전현상)의 연구에서 비롯되었다. 전구공업의 전보에 의한 진공기술의 개발을 배경으로 스펙트럼 문제의 관련으로 방전현상을 조사하게 되었고 우선 음극선이 발견되었다(1858). 이어서 방전관 내에서 음극선을 쬔 곳에서 발생하는 X선이 발견되었고 이에 자극을 받은 베크렐(1852-1908)이 우라늄방사선을 발견하자, 이후 폴로늄, 라듐 등 새로운 방사선 원소가 모색되고 발견되었다. 동시에 거기서 나오는 방사선(α, β, γ선 등)이 문제가 되었다.

이리하여 발견된 한 무리의 방사선들은 물질에서 방출되는 에너지의 새로운 형태로서, 당시로서는 실험적으로 같은 뜻을 가지고 있었다. 빛과 함께 방사선이라는 말로서 일괄할 수 있는 이것들도 드디어 그 정체가 추구되게 되자, 고전적인 개념에 따라 어떤 것은 입자, 어떤 것은 파(波)로서 그 범주를 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체를 추구하려는 과정에서 전자선(電子線), X선, α선 등을 만들어내게 되자, 이것들과 물질과의 상호작용 문제가 마치 그 때까지의 빛과 물질과의 상호작용 문제처럼 물리학의 한 분야로서 탄생하였다. 전자선(電子線)을 기체에 비추어 그 굽는 모양이나 기체의 전리(電離)를 알아보는 단계에서 X선의 흡수와 산란(散亂)실험, α선의 산란실험 등으로 발전하여 물리학은 마이크로(極微)의 영역에 들어선다. 그리고 마침내 원자의 구조문제가 등장하게 된다.

진공방전과 음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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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空放電-陰極線

이미 18세기에 그룬멜트와 워트슨이 진공 중에서의 방전현상에 주목했고, 19세기에 와서는 패러데이가 패러데이 암계(暗計)를 발견하는 등 대체적인 연구가 있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연구는 진공기술의 개발에 의하여 좋은 진공이 얻어진 뒤부터였다. 본의 기계사 가이슬러(1814-1879)가 뛰어난 수은진공펌프를 제작하였고, 이것을 이용하여 유리관 내에 약간의 기체를 봉한 방전관(가이슬러관)을 만들어 본대학의 교수 플뤼커(1801-1868)가 이를 물리학 연구에 이용하였다.

플뤼커는 스펙트럼의 휘선(輝線)이 물질에 고유함을 발견하여 물질검출에 이용할 수 있음을 보였으나, 그 후 히토르프(1824-1914)와 협동하여 1858년에는 압력을 낮추어 패러데이 암계(暗界)가 확대되는 것과 음극에 가까운 유리벽이 녹색 형광을 발생하는 것, 형광이 발생되는 곳이 자석의 영향으로 변하는 것 등을 관찰하였다.

이 일을 이어받은 히토르프는 음극 앞에 놓은 고체의 그림자가 생기는 점으로 보아, 음극에서 방사선이 나온다고 추측하고(1869), 골트슈타인(1850-1930)은 철저한 실험을 수행함과 동시에 이 방사선을 음극선이라고 하였다. 그 정체는 전혀 불명이었으나, 영국에서는 C. F. 하리(1828-1883) 이후 입자의 흐름으로 보는 설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날개바퀴의 실험 등으로 알려진 크룩스(1832-1919)는 이 입자의 흐름을(액체·기체·고체와 함께) 물질의 제4상태라고 불렀다.

이에 대하여 비데만(1826-1899), 골트슈타인, 헤르츠 등 독일의 물리학자들은 에테르의 진동으로 보는 파동설을 취하여 영국학파와 대립하였다. 헤르츠는 전지를 사용한 고전압에 의하여 음극선이(펄스적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나오는 것을 보였고, 또 전하(電荷)의 검출 및 전계에 의한 굴곡이 어느 것이나 부정적(否定的)으로 끝났기 때문에 입자설을 배제파동설의 약점이었던 투과성 문제(파동인 빛은 유리 등 투명체를 통과한다)에 대하여서도 몇 개의 금속박(金屬箔)을 투과하는 것을 보이고(1891), 파동설을 강조하였다. 얼마 후에 제자인 레나르트(1862-1947)가 이 실험을 추진, 방전관 밖으로 음극선을 끌어 내어 파동설은 승리한 듯이 보였다.

그러나 한편 영국의 슈스터(1851-1934)는 입자설을 뒷받침하는 연구를 착착 진행시켜 1890년에 이르러서 음극선 입자의 비전하(比電荷=電荷와 質量의 比)의 상한과 하한을 견적하고, J. J. 톰슨은 음극선 입자의 속도를 측정하여(1894) 광속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작은 것을 나타내었으며, 프랑스의 페랭(1870-1942)은 음극선이 실제로 음전기(陰電氣)를 지니고 있음을 실증(1895), 비헤르트(1861-1928), 카우프만(1871-1947)도 비전하(比電荷)의 값을 추정하여 사태는 점점 음극선 입자설로 굳어져 갔다.

방사능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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放射能-硏究

프랑스에서는 푸앵카레(1854-1912)가 아카데미에서 X선 발견을 보고하였으나, 그 무렵 그는 강한 형광과 X선의 발생과의 사이에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시사하였다. 이 설에 자극되어 형광물질에 관해 연구한 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인 베크렐(1852-1908. 1903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이 우란을 포함한 인광물질이 투과성이 강한 방사선을 내고 있음을 확인하고 우란선이라고 이름붙였다. 그는 이것이 X선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였지만 동시에 이 방사선이 우란원소 자체의 존재에 결부되어 있음을 추론하고 당시의 물질관에 최초의 쇼크를 주었다.

우란원소와 같이 방사선을 내는 원소가 이 밖에는 없을까 하는 문제가 여기서 당연히 등장하게 되었다. 피에르 퀴리와 아내 마리는 이 문제에 착수하였다. 피에르가 제작한 예민한 전기계를 써서 전리작용을 관찰하여 "방사선을 내는 성질(퀴리가 이를 방사능이라고 명명하였다)이 화학적인 성질이 아니라 물질의 원자에서 오는 성질"이라고 결론지은 후 여러 가지 물질을 검토하고, 먼저 토륨의 방사능을 발견하였다(1898, 이는 독일에서도 G. 슈미트가 수주일 전에 독립적으로 발견하고 있었다). 계속하여 그들은 우란이나 토륨보다도 강한 방사능의 존재에 주의하여, 이것이 새 원소일 것이라고 예측하고, 새로운 화학적인 방법으로 우란광 피치블렌드를 분석하여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1898, 7월, 12월). 원자량의 측정과 스펙트럼 분석 ― 여기에는 공동연구가 드마르세(1852-1904)도 가담하여 ― 에 의하여 새원소라고 단정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방사능의 연구는 급속히 활발해졌으며, 드비에르느(1874-1949)는 악티늄을, 퀴리 부부, 드비에르느, 러더퍼드 등은 에머네이션을 발견하는 한편, 이들이나 기제르(1852-1927), 엘스터(1854-1920), 가이테르(1855-1923) 등에 의하여 방사선의 여러 가지 성질이 관찰되었고, 러더퍼드는 투과성에 의하여 방사선을 구분하여 α선, β선이라고 이름붙였으며(1899), 또 P. 비라르는 자장에 의하여 굴곡되지 않는 방사선인 γ선을 발견하였다(1900).

퀴리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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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rie 夫婦, Pierre Curie(1859-1906), Marie Sklodowska(1867-1934)

프랑스·폴란드의 물리학자·화학자. 피에르 퀴리는 파리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소르본에서 수학하였고, 파리의 물리화학 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압전기(壓電氣)와 결정의 이론연구에서 자성체(磁性體)의 연구로 학계에 알려졌고(퀴리 와이스의 법칙), 1895년, 마리 스클로돕스카와 결혼하였다. 마리는 폴란드의 바르샤바에서 태어나 고생하면서 과학에 뜻을 가지고 당시 소르본에 재학중이었다. 이들 부부는 당시 발견된 방사선의 연구에 재빨리 착수하여, 토륨의 방사선에 이어 새로운 방사선원소 폴로늄(마리의 조국을 따라 명명하였다), 라듐을 발견, 1903년 베크렐과 함께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피에르는 소르본의 교수가 되었으나 1906년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고, 마리가 그 후임이 되어 마침내 금속라듐의 분리에 성공하여 또다시 노벨화학상을 받았다(1911). 퀴리연구소 소장 역임.

베크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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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oine Henri Becquerel(1852-1908)

프랑스의 물리학자. 파리 출생. 에콜폴리테크니크에서 수학. 베크렐은 1896년에 우라늄 광석에서 나오는 방사선이 엑스선처럼 사진 건판을 감광시킨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 방사선은 태양과 같은 외부 에너지와는 관련이 없으며, 순수한 우라늄에서 나오는 방사선보다 더욱 강력하다고 생각했다. 이 가정에 따라 퀴리 부부는 순수한 우라늄보다 방사능이 더 큰 광물인 피치블렌드를 조사해 화학원소인 리듐을 분리해내는 데 성공했다. 자연방사능을 발견한 공로로 1903년에 퀴리 부부와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알렉상드르 에드몽 베크렐의 아들이다.

X선과 기체의 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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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線-氣體-電離

1895년 뷔르츠부르크대학의 뢴트겐은 헤르츠, 레나르트(1862-1947) 등의 실험을 추시(追試)하다가 X선을 발견하였다. 그는 조직적인 일련의 실험으로 그 형광작용, 감광작용, 강한 투과성이나 직진성 등을 관찰, 자장(磁場)에 의해 굴곡되는 것에서 음극선과는 다르다는 것을 결론지었고, 음극선이 방전관에 부딪힌 데서 발생하는 새로운 방사선이라 하였다. X선의 발견은 큰 방향을 일으켜 많은 물리학자들을 자극하였으나 다음해 J. J. 톰슨은 X선이 지닌 기체의 전리작용을 발견하고, 이후 기체 중의 전기전도에 대한 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뢴트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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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helm Conrad R

ntgen(1845-1923)

독일의 실험물리학자. 프로이센의 레네프에서 태어났으나 어릴 때 네덜란드의 아페르도룬으로 이주하였다. 사소한 일로 김나지움에서 퇴학당하고 취리히 공과대학에서 수학하고 클라우지우스의 영향을 받았다. 그 후 클라우지우스의 후임 쿤트의 조수가 되어 취리히, 뷔르츠부르크, 스트라스부르 등지로 옮겨다니다가 마침내 호엔하임 농대, 기센대학을 거쳐, 1888년 뷔르츠부르크대학에서 콜라우시의 후임으로 물리학 연구소장의 지위에 올랐다. 여기서 X선을 발견하였고 곧 뮌헨대학으로 옮겼는데(1900년 이후), X선의 발견은 당시 학계뿐만 아니라 세상에도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 업적으로 최초의 노벨물리학상(1901)을 받았다(그 밖에도 뢴트겐 전류의 연구 등도 알려져 있다).

전자의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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電子-發見

여러 가지 새로운 현상 가운데서 먼저 정체가 밝혀진 것은 전자였다. 전자의 확인에는 제에만 효과나 방사성 원소에서 나오는 선이 관련되어 있으나 음극선의 실험적인 연구의 진보가 이룩한 역할이 현저하다. 기체전리(氣體電離)의 연구에서 출발한 J. J. 톰슨은 X선의 전리작용의 발견에 의하여 편의를 얻어 러더퍼드와 협력하여 정량적인 연구로 나아갔으며, 특히 전장(電場)에 의한 이온의 운동을 측정하였다. 이를 토대로 음극선의 전장에 의한 굴곡의 측정으로 진출, 이 문제로 이전에 헤르츠가 실패한 것은 진공도가 부족하였기 때문인 것을 알고 음극선 입자설에 대한 확신을 굳혀 자장과 전장의 양쪽을 써서 음극선 입자의 비전하(比電荷)를 측정하고, 그것이 사용된 기체의 종류와는 관계없는 보편적인 것임을 밝혀냈다.

한편, 음극선 입자가 지닌 전하에 관한 페랭(1870-1942)의 실험을 개량하여 음극선이 실제로 음전하를 나르는 것을 확증하고, 또 열량측정에서 직접 입자의 평균속도도 구하였다. 그리하여 전하의 크기가 수소이온이 가진 전하와 같다면, 음극선 입자의 질량은 많아야 수소원자의 1/1000 정도이다. 이것은 수소원자보다 매우 작고, 또한 모든 물질에 공통된 구극입자(究極粒子)의 존재를 상정시킨다.

마침 이 무렵, 제만효과의 연구도 있었다. 1896년에 제만(1865-1943)은 전자석 사이에 놓은 나트륨염(焰)의 스펙트럼의 D선이 확산되는 것을 발견하였으나, 이 효과는 로렌츠가 그 전자론을 사용하여 훌륭하게 설명했고, 또 스펙트럼선의 확산에서 전자의 비중하(比重荷=톰슨의 측정치는 그것과 꼭 일치하고 있었다)를, 빛의 치우침(偏)에서 전자의 전하가 (-)임을 각각 결론짓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제만효과에 따라 라머(1857-1942)는 원자가 궤도운동을 하는 전자로 되어 있다고 확인할 수 있음을 지적하고(1897), 또 로렌츠는 물질의 굴절률로도 비전하를 정하였다.

이리하여 J. J. 톰슨의 음극선 입자는 물질을 구성하는 전자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어서 캐번디시연구소에서는 이 입자의 전하 그 자체를 정하는 일이 추진되었으며, 윌슨(1869-1959)의 안개의 방법을 사용한 타운젠트(1868-1957)가 그것을 추진하였다. J. J. 톰슨에 의하여 그 크기는 수소이온과 같음이 밝혀졌다.

1899년 J. J. 톰슨은 원자를 구성하는 전자에 관하여 통일적인 보고를 하여, 최초의 소립자(素粒子)로서의 전자가 물리학 가운데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다음해에는 β선이 전자라는 것도 확실히 밝혀졌다.

톰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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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r Joseph John Thomson(1856-1940)

영국의 물리학자. 맨체스터에서 태어나 맨체스터 및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수학하고, 트리니티컬리지의 연구생을 거쳐 28세로 캐번디시 교수직에 취임, 그 연구소의 소장이 되었다. 진공방전의 연구에서 전자의 존재를 확립하고 원자모형을 제출하였으며, 양극선을 사용한 질량분석기를 만들어 네온의 동위원소를 발견하는 등 많은 뛰어난 업적을 남기는 한편 캐번디시연구소를 주재하여 많은 연구가를 육성함으로써 원자물리학 형성의 실마리를 만들었다. 후에 왕립연구소의 교수가 되었고, 또 트리니티컬리지의 학장으로 있었으며, 그 밖에 왕립학회의 회장을 비롯 수많은 공직에 있었다. 1906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상대성 이론의 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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相對性理論-建設

물리학의 새로운 이론체계로 먼저 등장하는 것은 상대성 이론이다.

이의 발단은 빛의 전파 문제인데, 이는 매질 에테르로 집약되어 난점을 극복하는 한걸음 한걸음이 그 물질성을 하나하나 벗겨나가다 마침내 에테르의 완전한 부정과 함께 상대성 이론이 형성되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운동물체의 전기역학이라고 하는, 역학과 전자기학(電磁氣學)의 경계·영역의 연구를 통하여 두 개의 이론의 구조상 차이가 분명해지고, 그 기초개념의 반성을 통하여 통일적인 새로운 이론이 건설되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특수상대성이론은 이후 물리학의 기초가 되었고, 그 바탕 위에 여러 가지 분야가 전개되었으나 한편 중력의 이론으로서 만들어진 일반 상대성이론은 통일장의 이론, 우주론으로 전개되어 갔다.

빛과 에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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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her

상대성이론 건설의 역사는 빛의 전파문제에서 출발하였다. 빛의 파동설이 수립된 이래, 파동을 지닌 매질로서 에테르라는 것이 생각되며, 그것이 광학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여 왔었다. 그리고, 빛의 속도는 발광체의 운동과는 관계가 없는 듯하다는 사실(예컨대 2중성의 관측결과)도 그에 대한 뒷받침으로 생각되어 왔다.

빛은 먼 항성으로부터도 오고, 대기도 통과하며, 또 투명한 물질도 통과하는 것을 생각하면, 빛의 매질인 에테르는 전우주에도, 지구에도, 물질 속에도, 진공 중에도 다 고루 퍼져 있는 듯하다. 뿐만 아니라 진공 중의 빛의 속도는 지구상에서는 언제나 일정한 듯이 보이므로 에테르는 지구에 고정되어 있고 지구와 함께 움직이고 있는 듯이 생각되는 바가 있다. 그러나 우주 전체로 생각하면 지구 같은 것은 한 덩이의 행성에 지나지 않으므로 전우주의 에테르가 지구와 함께 움직이고 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따라서 지구 주위의 에테르가 지구와 함게 움직인다는 생각도 나오지만 1727년에 브라트리가 발견한 광행차(光行差)의 현상을 생각하며, 이는 빛의 진행이 지구의 운동에 의하여서는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라 하여 비로소 잘 설명된다. 만일 지구의 주위의 에테르가 지구와 함께 움직인다면 상당히 좋은 사정이 일어나, 에테르의 흩어짐의 효과가 해소된다고 하여야 하겠다.

그리하여 19세기 초에 빛의 파동설을 수립한 프레넬은 정지(靜止)에테르의 입장을 취하였다. 이것은 말하자면 우주에 정지하고 있는 에테르의 바다 속을 지구 또는 지구상의 물체들도 모두가 통과한다는 생각이며, 그 때 아무런 저항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어느 정도 이상한 감을 느낄 수 있다. 운동하고 있는 투명체를 생각하였을 때에는 더욱 문제가 된다. 투명체에는 굴절률이 있어서, 투명체(물이나 유리) 내의 빛의 속도는 진공 속과 다르므로(늦다), 당연히 그 때의 에테르의 밀도는 보통 공기 속과는 달리 짙어졌다고 생각된다. 만일 에테르가 완전히 정지하고 있다면, 에테르의 농담(濃淡)의 장소는 지구나 물체와는 틀림없이 아무 관계가 없을 것이며, 바꾸어 말하자면 투명체는 운동할 때에 에테르의 짙은 부분을 방치해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즉 지금까지 투명체가 있던 곳은 진공 속에서도 굴절률이 1과 다르고, 또 투명체는 운동을 한 결과 굴절률은 또 없어지고 말 것이다. 이는 분명히 경험과 상반되고 있다.

그리하여 프레넬은 에테르의 일부분이 투명한 물체에 이끌리어 움직인다고 생각하고, 그 비율을 '수반계수(隨伴係數)'라 하였다. 그리고 1851년의 피조(1819-96)의 실험은 프레넬의 수반계수의 식이 정확함을 밝혔다. 이것은 또 에테르가 모두 물체와 함께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이 옳지 않음을(이 경우에는 수반계수는 1이 된다) 밝힌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지에테르의 가정(假定)은 매우 기묘하므로 거기에 반대하는 설도 많이 나왔으나(예컨대 1845년, 스토크스(1819-1903)는 지구를 둘러싼 에테르는 겉돌지 않고 지구와 함게 움직이고 있다는 이론을 세웠다), 모두가 부자연스러운 점을 지녔으며, 주류는 정지에테르의 개념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운동물체의 전기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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運動物體-電氣力學

에테르 문제는 전술한 바와 같이 운동물체의 현상이 열쇠가 되어 있다. 그리하여 맥스웰의 전자기학(電磁氣學)이 성립되어, 빛의 본성이 전자파로서 확립된 뒤에는 운동하는 물체 중의 빛의 현상을 전자기학의 기초 위에 고찰하려고 하는, 즉 맥스웰의 이론을 물질 내에 확장하려고 하는 '운동물체의 전기역학'이 전개되었다.

빛의 매질인 에테르는 빛이 탄성파가 아닌 것을 알았으므로 그 물질로서의 성질을 다소 인정할 수 없게 되기는 하였으나 당시로서는 전자파를 에테르 내의 전기진동으로 해석하는 것은 오히려 에테르설의 승리로 환영받는 면이 있었다. 당시 겨우 완성에 이른 전자기학은 개념이 확정되기에는 아직 미숙하기 때문에 원격작용(遠隔作用=공간을 격해서 존재하는 물체간에 작용하는 힘은 도중의 매질에 영향을 주지 않고 직접 순간적으로 전달된다고 하는 생각)을 부정한 장(場)의 이론으로서의 전자기학의 참뜻은 이해되지 않고, 물리학자들은 오래도록 많이 사용된 역학의 낱말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장이 결국 에테르로 되고, 그것이 역학의 생각으로 취급되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먼저 나타난 헤르츠의 전기역학(1890)에서는 장(場)이 물질에 부수되어 생각되게 되고, 장의 독립성이라는 점으로는 절대정지 에테르보다도 도리어 한걸음 후퇴한 꼴을 취하였다. 헤르츠의 이론은 실험에 맞지 않았으며(1903-1904), 계속하여 등장한 로렌츠의 이론(1892)에 자리를 넘기게 된다.

로렌츠는 절대정지 에테르의 입장을 취하지만 에테르의 기능은 전자장(電磁場)을 짊어지는 데 그치고, 이미 역학적 성질을 생각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에테르의 물질성은 전혀 부정되고 장(場)은 물질과는 독립된 존재가 된다. 로렌츠는 이 같은 에테르(電磁場) 속에서의 전자의 행동을 논하고, 물질의 운동에 의하여 에테르가 끌린다고 하지 않더라도(절대정지 에테르) 프레넬의 수반계수(隨伴係數)에 상당하는 것이 나타나는 것을 보였다. 이 식은 프레넬의 식과 조금 달라서 파장에 관계하는 항을 포함하나, 제만(1865-1943)이 행한 실험(1914)은 로렌츠의 식이 보다 정확함을 보였다. 또 운동하는 물체의 속도가 충분히 작을 경우에는 로렌츠의 식은 정지물체에 대한 맥스웰의 식과 일치하므로 지구와 에테르와의 상대운동은 지상의 광학현상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결과도 얻었다. 헬름홀츠에 의하여 지적된(1894) 장력(張力)문제라는 난점도 있었으나, 로렌츠의 이론은 그런대로 성공한 듯이 보였다.

로렌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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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drik Antoon Lorentz(1853-1928)

네덜란드의 이론물리학자. 네덜란드의 아른헴에서 태어나 라이덴 대학에서 배우고, 후에 그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물질의 전자론을 전개하였고, 제만효과의 이론, 자유전자(自由電子)에 의한 금속의 전기전도나 열전도 등의 이론을 만들고, 또 진공중의 전자(電子)이론에서 물질 중의 전자장(電磁場)의 기초방정식(맥스웰의 식)을 부여하고, 운동물체의 전기역학에 큰 공헌을 하였으며 상대성이론의 선구자가 되었다. 1902년 제만(1865-1943)과 함께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상대성 이론에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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相對性理論-

1881년 이래 마이켈슨(1852-1931)은 지구의 에테르에 대한 상대운동을 검출하는 실험에 착수하고 있었으나 1887년부터 몰리(1838-1923)와 협력하여 충분한 정밀도로 실험을 하였다. 그 결과는 뜻밖에도 부정적이고, 절대금지 에테르의 가정에 입각한 로렌츠 이론에 치명적인 것이었다(결과적으로 말하면, 이 실험은 에테르가 가진 최후의 기능인 절대정지를 짊어진다는 기능마저 박탈하였다). 로렌츠와 피츠제럴드(1851-1901)는 이 실험결과를 설명하기 위하여 운동물체는 운동의 방향으로 수축한다(로렌츠 수축)라는 가정을 현상론적으로 도입하였으나(1892), 다시 1902년 수축과 국소시(局所時)의 개념을 근저로 하여 로렌츠가 새로운 이론을 제출하였다. 이는 절대정지 에테르를 아직 보유하고는 있지만 국소시와 유효좌표(여기에 이른바 로렌츠 변환이 나타난다)에 의하여 형식적으로는 후의 상대성이론과 같은 내용을 가지며 앞의 전자론(電子論)의 성과를 계승함과 동시에 실험결과를 널리 설명하는 것으로서, 이에 최종적인 이론으로서의 전자론이 완성된 듯이 보였다.

그러나 바로 이 단계에서 아인슈타인의 날카로운 통찰이 나타나 문제를 일변시켰던 것이다. 그는 일련의 부정적인 실험결과 속에서 일반적인 원리를 찾으려고 하였다. 이들 배후에 있는 최대의 문제점은 역학의 이론적인 조립과 전자기학의 조립이 엇갈려 있는 점이니, 즉 역학으로 성립되는 상대성원리가 전자기학의 광속도의 불변과 서로 용납하지 않는 점에 있다. 이것을 모순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도리어 이 두개의 원리를 출발점으로 하여, 이 원리가 양립하도록 역학의 개념에 재검토를 가한다는 것이 아인슈타인의 입장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있던 역학을 반성할 필요가 있으며, 그 중에서도 시간·공간개념을 크게 고쳐야 하였으나 측정(測定)을 기초로 하여 한번 이 입장을 관찰하자 로렌츠가 가정(假定)하고, 또 힘들여 이끈 결과가 실은 매우 자연스럽게 차례로 인출(引出)되었다. 애매한 물질 에테르는 이미 아무런 소용도 없게 되었다.

이리하여 상대성 이론이 탄생되었다(1905). 얼마 후 민코프스키(1864-1909)의 4차원 세계의 정식화를 거쳐 이제 20세기 물리학의 변혁의 제1부가 완성된 것이다.

마이켈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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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bert Abraham Michelson(1852-1931)

미국의 물리학자. 독일에서 출생하여 미국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880년 유럽에 유학하였다. 클리블랜드대학 물리학 교수를 거쳐, 시카고대학 교수를 지냈다. 1881년 빛이 간섭하는 현상을 이용하여 광파의 길이를 재는 마이켈슨 간섭계를 발명하고, 그것으로 지구상의 공전 궤도에 따르는 방향과 빛의 속도가 거의 같음을 실제로 측정하였다. 또한 빛의 속도를 정확히 측정하여 초속 186,153마일이라 정하였다. 그 후 상대성 이론의 논거를 제공하여, 1907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아인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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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bert Einstein(1879-1955)

미국의 이론 물리학자. 남독일의 울름에서 태어난 유태인. 취리히공업대학에서 수학하고, 베른의 특허국에 근무하였는데, 비연구적인 분위기 속에서 1905년 특수상대성 이론을 비롯하여 브라운운동의 이론, 광량자설(光量子說)에 의한 광전효과 등 뛰어난 성과를 차례로 발표하여 학계의 주목을 끌었다. 그 후 프라하대학, 취리히공대 등을 거쳐 베를린대학 교수가 되고, 카이저 빌헬름연구소장으로도 있었으며, 1914-1916년에 일반상대성 이론을 완성, 1921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얼마 후 나치즘의 발흥과 반세미티즘의 물결 속에서 1933년에 도미, 프린스턴대학 고등연구소의 교수로서 미국에 정주하였다. 전시중에 반나치스의 입장에서 행한 원폭문제에 대한 발언을 반성하여, 전후에는 평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한 것도 알려져 있다.

원자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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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子-構造

원자에 대한 생각은 오래지만, 현실적인 의미를 가지고 물리학 가운데 나타나기는 19세기 말엽의 일이다. 기체운동론의 진보에 따라 열현상이 원자분자의 개념으로 교묘하게 설명되고, 한편에서는 로렌츠의 전자론(電子論)이 전개되어 원자의 알맹이에까지 들어가려는 이론적인 고찰이 진행되었어도 아직 원자는 경험적·현실적인 것은 아니었다. 음극선 발견 이후 급속히 열린 실험 면의 발전이 마침 이 무렵부터 시작되었고 전자의 발견, 제만효과의 해명, 방사능의 기구(機構) 등을 통하여 원자가 현실과제로 등장하였다.

한편 전자선(電子線)·α선·X선의 등장은 그것들과 물질과의 상호작용을 살핀다는 형태로 새로운 실험수단을 제공한다. 이는 원자의 내부구조를 밝혀내는 수단이 되며, α선 산란(散亂)에서는 원자핵이 발견되고 원자의 유핵모형(有核模型)이 확립되었다. 이 해석들은 모두 고전이론에 따라 추진되어 왔으나, 마이크로(극미)세계의 모양이 이와 같이 확정됨에 따라 고전이론의 모순이 점차 분명해진다. 새로운 법칙의 확립이 필요하게 되고, 게다가 그 형태는 잡히지 않는다. 이 단계에서 보어의 원자구조론이 등장하지만 과도기적인 역할을 하는 이 이론은 당연히 절충적인 것이었다. 마침내 그 수명은 끝나고 양자론(量子論)의 길이 트였다.

방사성 변환과 α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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放射性變換-α線

방사능(放射能)의 원인에 관하여 처음에는 많은 학설이 있었으나, 방사성 물질의 곁에 놓은 물질이 방사능을 지니게 된다(誘導放射能)는 현상의 발견(1899, 퀴리부부, 러더퍼드)에서 물질의 방사성 변환이라는 개념이 점차 굳어졌다.

토륨의 에머네이션(토륨에서 나오는 기체의 방사성물질)의 연구에서 유도방사능(誘導放射能)의 해명에 착수한 러더퍼드는 소디(1877-1956)와 공동으로 화학적인 추적을 계속, 물질변화를 확인하고, 우선 토륨으로 비롯되는 일련의 붕괴계열(崩壞系列)을 확립하였다(1902). 또 방사능감쇠의 규칙을 조사함으로써 다음의 새로운 생성물이 생길 때 α선·β선 등이 방출된다고 결론지었으며, 마침내 방사능을 내면서 물질이 변화한다는 '방사성 변환설'을 제출했다(1903). 이 설은 방사능계열의 새로운 물질을 추정하고 확인하는 과정과 방사선, 특히 α선의 본질을 밝히는 과정을 통하여 굳어져 갔다.

α선이 뛰는 거리가 각각 그 원소에 고유하다는 것이 브래그에 의해 확인된 후 러더퍼드는 전장(電場)과 자장(磁場)에서 선을 굽혀 비전하(比電荷)를 측정하여(1906), 그것이 속도에 관계없이 수소원자의 비전하의 1/2이 되는 것을 발견하고 램지(1852-1916)와 소디, 듀어(1842-1923)와 퀴리 등이 라듐이나 라듐 에머네이션에서 헬륨을 모은 일(1903-4)과 아울러 생각하여, α선의 본질을 헬륨이라고 추정(推定)하였다. α선의 전하를 측정하는 일도 필요하였지만 봐룩스의 스핀대리스코프(1903)로 수를 헤아리는 것을 불만으로 여긴 러더퍼드는 가이거와 더불어 계수관(係數管)을 개발하고 전하마저 확정하였다. 그리하여 1908년에는 최종적으로 α선의 본성이 결정되었다.

이 α선을 사용한 산란실험(散亂實驗)은 1906년경부터 개시되었으며, 가이거와 마스덴이 협력하여 알루미늄박(箔), 금박에 의하여 선의 매우 큰 각도의 굴곡이 발생되는 것을 확인하였다(1909). 이는 원자의 중심에 굳은 심(芯)이 있다고 하면 설명이 가능해지므로, 원자의 유핵구조의 생각에 대한 출발점이 되었다.

러더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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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nest Nelson Rutherford(1871-1937)

영국의 실험물리학자. 뉴질랜드의 넬슨에서 태어나 뉴질랜드대학과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배우고, 메길대학·맨체스터 대학 교수를 거쳐 캐번디시연구소 소장, 방사능의 연구, 원자모형, 원자핵의 인공변환 등으로 알려졌으며, 1907년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가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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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 Geiger(1882-1945)

독일의 물리학자. 라인란트팔츠의 노이슈타트 출생. 에를랑겐·뮌헨대학에서 수학 후 영국으로 건너가 맨체스터대학에서 러더퍼드의 지도를 받으며 방사선 연구에 종사하였다. 그는 계수관을 고안하여 라듐에서 나오는 α입자의 수를 측정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계수기는 뮐러와 공동으로 제작한 '가이거-뮐러 계수기'인데 이것은 현재에도 많이 쓰인다.

원자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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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子模型

전자를 발견한 J. J. 톰슨은 그것이 원자 속에 어떻게 포함되어 있는가에 대하여서도 언급(浮遊磁石의 모형)하였으며(1897), 방사성 변환설이 나왔을 무렵, 원소의 진화설(進化說)을 배경으로 무핵원자모형을 내놓았다(1904). 이것은 하나같이 (+)로 대전(帶電)된 구(球) 속에 몇 개의 전자가 등간격으로 배열되어 원주상을 일정한 각속도(角速度)로 운동하고 있는 모형으로서, 화학적 성질을 원자의 배열로 설명하려고 하는 점에서는 획기적이고 사변적인 켈빈경(W. 톰슨)의 같은 종류의 모형(1897-1902)보다 몇 배 우수하였다. 이에 대항하는 행성계(行星系) 모형은 페랭(1901)과 나가오카 한타로(1904)에 의하여 제출되었으나 전자는 방사능 현상을, 후자는 제만 효과의 설명을 노린 것으로서, 반드시 현재의 원자모형을 생각해낸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겠다.

J. J. 톰슨의 모형은 원자 내에 많은 전자를 지니고 있으나, 그 수를 실험적으로 정하기 위하여 그는 β선과의 상호작용을 생각하여 β선의 산란을 다루었다. 전자가 몇 번씩이나 반복하여 산란된다(복합산란)고 간주하여 계산을 한 결과(1910)는 크라우더의 실험과 일치한 듯이 보였으나 얼마 후 나타난 러더퍼드의 α선 산란의 결과와는 모순되었다. 이리하여 원자모형은 유핵모형으로 옮아갔다.

보어의 원자구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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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hr―原子構造論

1913년, 보어는 러더퍼드의 결론에 기초를 두고, 작용양자(作用量子)를 원자모형에 도입하여 획기적인 모형을 제출하였다. 그는 보통의 물질적·화학적 성질은 주위에 있는 전자군에 귀속하고, 방사능은 중심에 있는 원자핵(보어가 명명)의 성질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핵 주위를 회전하고 있는 전자궤도의 반지름을 정하는 어려운 문제가 있었으나, 수소 스펙트럼에 대해 이상하리만큼 규칙성을 나타내고 있는 발머(J. J. Balmer, 스웨덴 물리학자, 1825-1898)의 공식(1885)에 주의하여, 에너지와 회전진동수와의 사이에 작용양자를 중개로 한 어떤 관계를 둠으로써 문제를 해결하였다.

이것은 복사문제에서 나타난 에너지의 불연속성을 원자문제에 교묘하게 도입한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고전이론과는 상용(相容)되지 않는 정상상태(定常狀態)의 가정이 필요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 정상적인 궤도 사이를 전자가 이동할 때 그 에너지차(差)에 따른 빛이 방출된다고 하였고, 그 빛의 파장은 플랑크의 작용양자에 의하여 결정된다(진동수조건). 이리하여 스펙트럼 법칙도 훌륭하게 설명되며, 가장 설득력 있는 논의로서 학계에 받아들여졌다(1913). 정상상태의 가정은 마침내 플랑크(1882-1964)와 헤르츠(1887-1950, H.R.헤르츠의 조카)의 실험에 의해 확인(1914-19)되어 양자론(量子論)의 시작이 되었다.

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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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els Bohr(1885-1962)

덴마크의 물리학자. 코펜하겐에서 태어나 그 곳 대학에서 배운 뒤 케임브리지·맨체스터 등을 방문, J. J. 톰슨이나 러더퍼드와 접하였고, 1917년 이후에는 코펜하겐대학 교수가 되었다. 그 곳의 이론물리학 연구소는 세계의 수재들이 모여들어 양자론 발전의 중심이 되었다. 새로운 창조를 짊어진 코펜하겐 정신은 그 후 물리학의 전개를 리드하였다. 원자구조론으로부터 전기양자론(前期量子論)의 건설로 획기적인 업적을 올려, 1922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원자핵의 연구도 있다.

헤르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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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stav Ludwig Hertz(1887-1975)

독일의 원자물리학자. 함부르크에서 출생하여, 할렌대학 교수·지멘스공업상회 연구소장을 지냈다. 1932년 방사성 동위원소의 분리법을 개발하였으며, 미국의 원자력위원회에서 그의 방법을 이용하여 우라늄 분리 공장을 건설하였다. 1945-1954년에 걸쳐 구소련에서 연구한 공로로 스탈린상을 받았다. 또 보어의 원자론을 증명하여, 1925년에는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양자역학의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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量子力學-形成

원자구조에 대한 최초의 공격이 된 보어의 이론이 제출된 지 오래되지 않아 세계의 정세는 어두운 시대에 들어갔다. 제1차대전이 일어나 많은 과학자들이 동원되었고, 몇몇 뛰어난 사람들이 전사(모즐리 1887-1915, 시바르츠실드 1873-1916 등) 또는 전상을 입어 과학의 일반적인 발전은 방해되었다.

그러나 전쟁의 종료와 평화의 회복과 더불어 물리학의 발전은 눈부시게 시작되었다. 이른바 양자역학의 형성기이다. 1918년도의 노벨상은 패전국 독일의 물리학자인 플랑크에게 수여되었으며(아인슈타인 1921년, 보어 1922년), 독일을 중심으로 하여 폭풍같은 양자론의 진전이 시작되었다. 그 주요 중심지는 이론물리학 연구소가 개설된(1921) 코펜하겐(보어)을 비롯하여 뮌헨(조메르펠트, 1868-1951), 괴팅겐(보른, 플랑크), 라이덴(에렌페스트)이며, 그 밖에 취리히의 슈뢰딩거, 베를린의 아인슈타인이 가담하였다. 이 형성기는 또 젊은 세대의 활약이 특징적이었다.

양자역학 형성의 길은 두 갈래로 되어 있다. 한쪽은 보어의 원자구조론에서 출발하여 대응원리(對應原理)에서 행렬역학(行列力學)으로 통한 길이다. 또 한쪽은 아인슈타인의 광량자(光量子)로 비롯하며, 드 브로이의 물질파(物質波)를 거쳐서 도달하는 파동역학의 길이었다. 이 둘은 그 형성과 정이나 수립된 이론이 전혀 달랐지만 얼마 안 가서 실은 같은 내용이라는 것이 판명되고, 통일체로서의 양자학으로 간추려진다.

그리하여 이 양자역학의 형성이 일단락질 무렵, 물리학은 재차 새로운 단계에 이른다. 때는 바야흐로 나치즘 발흥의 어두운 그늘에 싸이려고 할 무렵이었다.

원자구조론의 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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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子構造論-進步

보어의 원자구조론은 전쟁중에 조메르펠트(1868-1951)에 의하여 발전되었다. 보어의 양자조건을 일반화하여 이론적 형태를 정돈하고 동시에 원자 속의 전자의 궤도를 각운동량(角運動量)으로 분류하여 '방향양자화(方向量子化)'의 개념(1916)을 도입한 것이 그의 업적이며, 이것으로 보어의 원궤도(角運動) 이외에 타원궤도가 추가되어 자기능률 문제가 해명되었고, 또 제만효과의 해석이 가능하여졌다. 방향양자화의 실험적 증명도 마침내 O. 시테른(1888-1969)과 W. 게를라하에 의하여 이루어졌다(1921). 이리하여 그후 원자구조론은 보어, 조메르펠트의 이론으로서 분광학(分光學)·화학의 영역의 문제들을 차례로 해명하여 빛나는 성공을 과시하였다. 그러나 이 이론의 한계는 곧 나타났다. 낮은 양자수의 범위에서의 실험의 불일치나, 다전자원자(多電子原子) 문제를 쉽게 다룰 수 없다는 것 등으로서 사람들의 관심은 양자조건(고전역학에서 가능한 상태중에서 정상상태를 선택하기 위한 조건. 보어는 각(角) 운동량이 플랑크정수 h의 정배수라고 하는 조건을 양자조건이라 하였다) 성립의 일반적 근거로 향한다.

한편 이리하여 추진된 원자구조의 연구는 스펙트럼의 검토에서 두 가지 중요한 결과를 유도하였다. 하나는 파울리에 의한 배타율(排他律=하나의 양자상태에는 하나의 전자밖에 들어가지 못한다)의 발견이며, 또 하나는 이에 관련하여 도입된 울렌베크(1900- ? )와 하우스미트(1902- ? )에 의한 새로운 양자수

'전자스핀'의 개념이다(1925). 이것들은 낡은 물리학에는 대응하는 것이 없고, 전자라는 마이크로(극미) 세계의 입자에는 지금까지의 물리상(物理像)이 적용되지 않음을 분명히 나타내는 첫걸음이 되었다.

파와 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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波-粒子

보어의 원자구조론은 광자설을 출발시의 하나의 기둥으로 하고 있었으나 이 광자설이 '파와 입자의 이중성'이라는 불가해한 문제의 실마리이다. 빛을 금속에 비췄을 때 전자가 나온다는 광전효과의 현상을 헤르츠가 발견한(1887) 뒤 레나르트(1862-1947)가 정량적 연구를 진행하여(1902) 튀어나오는 전자의 속도가 빛의 파장에 의하여 정해지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이것은 빛을 입자같이 생각하면 설명할 수 있다.

플랑크의 복사론을 고찰하여 빛의 입자성을 검토(1905)하고 있던 아인슈타인은 광량자설을 제출하여 광전효과에 관하여 훌륭한 설명을 붙였다(1906). 빛의 전자파로서의 성질은 확립되어 있었으므로 광량자설이 가정하는 빛의 입자성은 빛에 파와 입자의 2중성을 요구하는 것이 된다. 더욱이 복사의 흔들림 현상(흔들림이라 함은, 거시적으로 보면 일정하게 보이는 경우에도, 개개의 하나하나의 값은 평균값 가까이에서 변동하고 있는 현상을 말한다. 브라운운동 등은 그 한 예이다)의 연구를 통하여 빛의 입자성을 계속 추구한 아인슈타인의 입장은 마침내 A. H. 콤프튼(1892-1962)에 의한 콤프튼 효과(X선을 전자에 비추어 산란시켰을 때, 그 파장이 늘어나는 현상, 빛을 입자로써 설명할 수가 있다)의 발견(1918-1822)에 의하여 극히 확고해져서, 융화시키기 어려운 파와 입자 문제는 낡은 물리학의 빈틈을 더욱더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모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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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y Gwyn Jeffreys Moseley(1887-1915)

영국의 물리학자. 도싯주 웨이머스 출생. 이튼대학과 옥스퍼드대학을 졸업하고, 맨체스터대학 특별연구원이 되었다. E. 러더퍼드 밑에서 방사능을 연구하다가 X선 연구로 방향을 바꾸었다. 1913년에는 각 원소의 고유 X선을 측정하여 '모즐리의 법칙'을 발견하여 원소의 분석에 획기적인 방법을 제공함으로써 X선 분광학의 개척자가 되었다. 제1차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대응원리에서 행렬역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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對應原理-行列力學-

원자구조론의 막다른 길을 타개하는 길은 우선 에레페스트(1880-1933)의 단열가설(斷熱假說)의 제창(1913)에 의하여 열렸다(단열가설이란 단열변화 때에 변하지 않는 양에 주목을 하면, 어느 系가 새로운 상태로 단열변화에 의하여 이행했을 때 거기서의 量子條件을 발견할 수가 있다는 주장, 아인슈타인이 명명하였다. 1914). 이것에 의하여 양자조건의 검토가 가능하여졌고, 조메르펠트의 양자조건도 근거가 부여된다.

보어는 이 단열가설을 발판으로 하여 아인슈타인의 빛의 방출흡수 이론을 고려, 대응원리를 제창하였다(1917-1923). 이것은 양자론과 고전론과의 이행·대응관계를 논하고, 양자론은 어느 한계에서 고전론에 점진적으로 일치할 것임을 지적하여, 새로운 이론을 건설하는 데 있어서의 지도원리로 하려는 것이다. 이 정신을 현실적인 프로그램에 올려놓은 것은 크라머스(H. A. Kramers, 네덜란드의 물리학자, 1894-1952)로서, 빛의 분산이론을 채택, 보어의 이론으로는 밝힐 길이 없는 정상상태간을 전자가 천이(遷移)하는 확률문제를 원자에서 나오는 빛의 강도의 고전적인 계산과 대응시켜 검토하였다(1924). 이 방향은 보른(1882-1970)에 의하여서도 추진되어, 고전론에서 양자론으로의 이행절차가 다시 체계화 되었다(보른은 이것을 '양자역학'이라고 명명하였다). 그 중에는 천이(遷移)를 특징짓는 양이 진폭의 자승에 비례한다는 데 대한 주의(注意)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이 점을 추구한 이가 하이젠베르크(W. K. Heisenberg, 독일의 물리학자, 1901-1976)이다. 그는 체계화를 더욱 추진시키는 과정에서 전자(電子)의 궤도라는 개념을 버리고 천이진동의 집합을 문제로 하여 그 계산규칙을 만들어 내려고 하였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역학의 새로운 운동학적인 해석이며, 관측할 수 있는 양(量) 사이의 관계이다.

보른은 하이젠베르크의 이 정식화에 포함되는 계산규칙이 실은 행렬(行列=매트릭스, martrix)의 연산규칙(演算規則)에 불과하다는 것을 주의하여 요르단(P.Jordan, 독일의 물리학자, 1902- ? )과 더불어 행렬로 나타낸 양자조건을 사용하여 에너지보존칙(保存則)이나 진동수 조건을 유도하였다(1925). 이리하여 하이젠베르크, 보른, 요르단의 협동연구가 개시되었고 행렬역학(行列力學)의 완성을 보았다(1925). 그리고 수소원자의 문제는 파울리에 의하여 다루어졌다. 또 같은 무렵 영국에서는 디랙(P. A. M. Dirac. 영국의 물리학자, 1902- ? )이 하이젠베르크의 이론을 다소 다른 형태로 전개하여(非可換量을 문제로 하여) 교환관계를 도입했다.

하이젠베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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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rner Heisenberg(1901-1976)

독일의 이론 물리학자. 뮌헨에서 출생하여 뮌헨·괴팅겐·코펜하겐대학을 졸업하고, 라이프치히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주로 원자 역학을 연구하고, 1925년 마트릭스 역학에 관한 논문을 썼다. 이 역학은 파동 역학과 함께 이론 양자 물리학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이것이 후에 양자역학을 생기게 하였다. 이 밖에도 그는 불확정성원리 등의 중요한 연구를 많이 하였으며, 1932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저서로 『양자론의 물리학적 원칙』 『원자핵 물리학』 등이 있다. 양자역학이라는 물리학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공로로 1932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디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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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Adrien Maurice Dirac(1902-1984)

영국의 수리물리학자. 양자역학에 대하여 연구하였으며 1930년 『양자역학의 원리』라는 책을 출판하여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대한 완전한 수학식을 제시하였다.

브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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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uis Bictor Brogie(1892-1987)

프랑스의 물리학자. 마리스 드 브로이의 동생 양자론에 대한 연구를 하였으며 1929년 물질파에 대한 선구자적 업적으로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반 데르 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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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annes Diederik van der Waals(1837-1923)

네덜란드의 물리학자. 암스테르담대학 교수로 재직중에 기체에 대한 '발스 상태의 방정식'을 실험적으로 발견하였다. 1893년 모관현상의 열학이론을 세웠다. 1910년 상태 방정식의 연구에서 분자 사이의 인력을 밝혀낸 '발스 힘'을 발표하여 그 해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애스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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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is William Aston(1877-1945)

영국의 물리학자. 버밍엄 출생. 케임브리지대학 졸업. 1919년 그가 발견한 질량분석기는 원자량을 정확히 재서 무거운 원소와 가벼운 원소를 구분할 수 있는 장치였다. 애스턴은 질량분석기를 써서 거의 모든 원소가 원자 번호는 같지만 원자량이 다른 여러 동위원소의 혼합물임을 밝혔다. 이러한 업적으로 1922년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물질파와 파동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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物質波-波動力學

파와 입자의 2중성의 문제가 또 하나를 흐름인 '행렬역학과 병립하는 파동역학 건설의 길'이 되었다. X선을 파와 입자의 결합물이라고 생각한 X선의 연구가 모리스 드 브로이(Maurice Duc de Broglie, 1875-1960)의 동생 루이 드 브로이는 전자도 또한 파와 입자의 2중성을 지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여, 물질(電子)파의 사고방식을 제창한(1923) 것이 큰 계기가 되었다. 그가 제출한 입자와 부수파의 관계식은 물질과 빛에 공통되는 통일상으로서 아인슈타인 등의 지지를 획득하였으나, 이 물질파의 실재가 보른, J. 프랑크(1882-1964), 에르자서(1904- ? ) 등의 토의를 거쳐, 데이비슨(1881-1958), 거머(1896- ? )에 의하여 실증되었을 때(니켈단 결정에 의한 전자파의 회절실험, 1927), 그 입장은 확고한 것으로 되었다.

드 브로이의 이론에 흥미를 가진 슈뢰딩거는 역학과 광학의 유사점에 주의하였고, 또 근거리를 문제로 할 때 기하광학이 파동과학으로 이행하는 점에 착안하였다. 양자의 효과는 역시 미소한 영역에서 나타나므로, 고전적인 역학은 여기서 파동역학으로 이행할 것이 틀림없다. 이리하여 해석역학(解析力學)의 표현형식을 출발점으로 전개된 파동역학에 의하여 조화진동자(調和振動子)·섭동론(攝動論)·스타르크효과 등이 취급되었고, 계산결과는 하이젠베르크의 것과 일치하였다. 일방적인 형태로 부여된 그의 기초방정식이 슈뢰딩거방정식이다(1926).

양자역학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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量子力學-成立

행렬역학(行列力學)과 파동역학(波動力學)은 다른 관점에서 출발하였고, 전혀 다른 형태를 갖추고 형성되었으나, 그 이룩한 결과는 기묘하게도 일치하고 있었다. 이것을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 슈뢰딩거는 파동역학에서 행렬역학을 유도할 것을 시도하여 양자의 동등성(同等性)을 증명하는 데 성공하였다. 마침내(행렬역학에서 사용된 정준변환의 방법이 파동역학에 도입되고부터) 디랙과 요르단(1902- ? )은 변환이론(變換理論)을 수립하였으며, 이것으로 두 개의 이론은 하나로 통합되어 양자역학의 성립을 보게 되었다(1926).

양자역학의 형식은 성립되었어도, 그 물리적 해석에는 아직도 많은 문제가 남아 있었다. 예컨대 파동의 개념에 대하여서도 파동역학의 창시자 슈뢰딩거는 이것을 실재(實在)하는 것으로 보았지만 아인슈타인의 반론을 받고, 보른의 확률해석이 이에 대체되었으나, 마침내 이것도 불충분하여 많은 모순으로 유도되는 것이 판명되었다. 이리하여 결국 낡은 물리학의 사고방식으로는 양자론의 개념은 어떻게도 설명할 수 없음이 차차 확실해져서 드디어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관계가 등장하였다. 파와 입자의 두개의 상(像)을 결부시킴으로써 발생하는 이 관계는, 마이크로의 세계에서는 일상경험에서 만들어진 관념은 이미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1927).

보어는 이 생각을 다시 자연인식 일반에 펼쳐 양자역학의 일관된 해석을 수립하려고 하여, 상보성원리(相補性原理)를 제창하였다(1927). 현상의 시공적(時空的)인 기술과 인과적 관계와는 서로 보충(補充)하는 동시, 서로 배제한다는 것이 골자이다. 아인슈타인이 이와 같은 새로운 양자론의 해석에 찬성하지 않고 일관하여 의문을 계속 제출한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일이지만, 일견 기묘한 양자역학의 주장은 당시의 사상계에도 큰 영향을 주어, 물질의 부정이나 주관주의·실증주의의 경향이 세력이 증가하는 기초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낡은 물질관의 붕괴는 결코 물질 자체의 부정이 아니고, 도리어 물질의 깊이, 자연의 입체적인 구조를 말하는 것으로 보는 사고방식이 차례로 퍼져, 새로운 물질관으로 결정(結晶) 물리학은 물질 의학으로서의 성격을 되찾은 것이다.

드 브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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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uis Victor Prince de Broglie (1892-1987)프랑스의 물리학자. 귀족 출신이며 디에프에서 태어나 파리대학 교수가 되었다. 전자파설(物質波說) 제창으로 알려졌으며, 파와 입자의 2중성 문제의 통일적인 해결의 실마리를 주어 파동역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양자론의 인과적 해석에 관련하여 오래 전에 그가 말한 향도파(嚮導波, 파일럿 웨이브(pilotwave))의 이론은 최근 다시 검토되고 있다. 1929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라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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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x Theodor Felix von Laue(1879-1960)

독일의 물리학자. 스트라스부르·괴팅겐·베를린 등 여러 대학을 졸업하고, 뮌헨·취리히·프랑크푸르트 등 여러 대학의 교수를 역임하였다. 1912년 결정체에 의한 X선의 굴절을 이론적으로 다루어, X선의 이용 및 결정체 연구에 새로운 장을 개척하여, 1914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밀리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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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Andrews Millikan(1868-1953)

미국의 물리학자. 일리노이주 출신으로 컬럼비아대학을 졸업하고, 독일로 건너가 베를린·괴팅겐대학에서 공부하였다. 귀국 후 시카고대학 교수를 거쳐, 1921-1946년 캘리포니아공대의 노만 브리지 물리학 연구소장을 역임하였다. 1909년 기름 방울에 의하여 전자 전하(물체가 띠고 있는 전기)의 크기를 정밀하게 측정하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스펙트럼선을 연구하고, 단파장의 '밀리컨선'을 발견하였다. 그 밖에 광선 효과와 우주선을 연구하는 등 세계 과학사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1923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시그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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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rl Manne Georg Siegbahn(1886-1978)

스웨덴의 물리학자. 스웨덴의 외레브로 출생. 새로운 유형의 엑스선 분광 사진기를 개발하고 엑스선관도 개량해서 더 정확한 측정을 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원자의 엑스선스펙트럼을 조사해 원자의 내부 구조도 알아냈다. 엑스선 연구와 엑스선분광법이라는 분석 방법 연구로 1924년에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그의 아들 카이도 고해상도의 전자현미경 개발에 끼친 공로로 1981년에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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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r Chandrasekhara Venkata Raman(1888-1970)인도의 물리학자. 인도 트리치노폴리 출생. 빛이 액체나 기체를 통과할 때에는 산란되고, 산란된 빛의 일부는 진동수도 바뀐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러한 현상을 라만효과라고 하는데, 라만효과를 이용하면 산란되는 분자의 구조를 연구할 수 있다. 이러한 공로로 1930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슈뢰딩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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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win Schr

dinger(1887-1961)

오스트리아의 이론물리학자. 빈에서 태어나 그 곳 대학에서 수학한 뒤 각지의 대학(취리히·베를린·옥스퍼드·그라츠·더블린 등)의 교수를 역임하였고, 1956년 빈대학 교수, 특히 파동역학을 건설하여 양자역학의 성립에 공헌하였다. 새로운 장(場)의 이론 건설에 관한 일과 생물학에 관한 연구도 있다. 1993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보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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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x Born(1882-1970)

독일의 물리학자. 브레슬라우 출생. 1924년에 드 브로이가 물질파라는 파동이 원자를 구성하는 아주 작은 입자의 운동을 조절한다고 가정했다. 또 슈뢰딩거는 수학적 과정과 물리적 개념을 체계화한 양자역학 파동방정식을 발표했다. 보른은 슈뢰딩거의 연구를 기초로 물질파는 단순히 어떤 주어진 장소에서 입자가 존재할 확률일 뿐이라고 결론지었다. 양자역학에 중요한 기여를 했으며 결정학과 광학에도 많은 기여를 하여 1954년에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퍼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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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ward Mills Purcell(1912-1997)

미국의 물리학자. 일리노이주에서 출생하여 퍼듀대학을 졸업하고, 독일 칼스르의 공과대학에 1년 동안 유학하였다. 미국으로 돌아와 하버드대학에서 공부하여 학위를 받았다. 제2차세계대전 중에는 방열 연구소에서 도파관 회로·마이크로파 전자기술 등을 연구하였고, 전쟁이 끝나자 하버드대학 교수가 되었다. 액체나 고체 시료로 고주파의 핵자기 공명 흡수법에 의하여 원자핵의 자기능률을 측정하는 방법을 고안하였다. 1952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바소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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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kolai Gennadievich Basov(1922-2001)

러시아의 물리학자.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생. 1953년 러시아의 물리학자 프로호로프와 함께 전파를 증폭시킬 때 분자의 에너지를 이용하는 원리를 알아냈다. 이 두 사람은 또한 1955년에 이 증폭기의 작동 방법을 고쳐서 메이저라는 새로운 증폭기를 발명했다. 이 업적으로 두 사림은 1964년 미국의 물리학자 타운스와 함께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쇼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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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iam Shockley(1910-1989)

미국의 물리학자. 영국 태생으로 1932년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1936년 매사추세츠 공과대학에서 학위를 받았다. 그 해에 벨전화연구소에 들어가 개체물리학·야금학·전자공학 등을 연구하였다. 제2차세계대전 후 벨전화연구소에서 기획한 반도체 연구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게르마늄 P-n 접합의 전자론적 연구 등 전자 연구에 이바지한 공로로, 1956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쇼클리반도체연구소를 설립하여 소장이 되었다. 「트랜지스터의 연구」 등의 논문이 있다.

뫼스바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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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dolf Ludwig Mossbauer(1929- )독일의 물리학자. 뮌헨 출생. 뮌헨공과대학 수학. 뫼스바우어는 파장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감마선을 발생시키는 방법인 뫼스바우어효과를 발견했는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검증하는 데 이용되었다. 감마선의 공명흡수를 연구한 공로로 1961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졸리오 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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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rene Joliot-Curie(1897-1956)

프랑스의 원자물리학자. 퀴리 부인의 라듐연구소에 들어가 방사성 현상을 연구하고, 1928년 퀴리 부인의 큰딸 이레느 퀴리와 결혼하였다. 부인과 함께 인공 방사능을 발견하여 1935년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1946년 프랑스원자력위원회 위원장을 지내며 원자력의 평화적인 이용에 힘썼다.

채드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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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r James Chadwick(1891-1974)

영국의 원자 물리학자. 맨체스터대학을 졸업한 후 원자핵 연구를 시작하였다. 1932년 중성자를 발견하여 원자물리학과 소립자론의 기초가 되었다. 1935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으며, 제2차세계대전 중에는 원자 병기 연구에 참가하였다.

앤더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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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l David Anderson(1905-1991)

미국의 물리학자. 뉴욕 출생.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서 수학. 윌슨의 안개상자를 이용해 우주선을 연구하다가 양전자와 뮤온을 발견했으며, 양전자를 발견한 공로로 1936년에 오스트리아의 헤스와 함께 물리학상을 받았다. 1932년에 발견된 양전자는 처음 알려진 반입자로 (-)전하를 띤 전자와 질량은 같지만, 전하는 반대이다. 1937년에 발견된 뮤온은 (+)전하나 (-)전하를 띠며, 전자나 양전자와 매우 비슷하다. 그러나 뮤온의 질량은 전자의 약 207배에 이른다.

로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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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nest Orlando Lawrence(1901-1958)

미국의 물리학자. 사우스다코타주의 캔턴 출생. 제2차세계대전 전에 거대한 사이크로트론을 만들기 시작했고, 전쟁 중에는 우라늄의 동위원소를 분리하려고 사이클로트론을 개조했다. 1946년에 싱크로사이클로트론을 만들었는데, 이 장치는 입자를 4억 전자볼트(eV)의 에너지로 가속시킬 수 있다. 또 1948년에 싱크로사이클로트론을 이용해 처음으로 중간자를 만들었다. 1954년에는 다른 과학자들과 함께 70억 eV의 높은 에너지를 발생하는 입자가속기인 베바트론을 만들었다. 1939년에 노벨물리학상, 1957년에 미국의 원자력위원회가 주는 페르미상을 받았다.

페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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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rico Fermi(1901-1954)

이탈리아 태생의 미국 물리학자. 로마에서 출생하여, 피사의 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괴팅겐대학에 유학하여 연구에 열중하였다. 피렌체대학 강사를 거쳐, 1927년 로마대학 물리학 교수를 지냈다. 1933년 우라늄·라듐 같은 방사성 원소가 전자를 내놓으면서 다른 원소로 바뀌어 가는 「(베타) 붕괴의 이론」을 발표하였다. 또 우라늄에 중성자를 충돌시켜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원소 초우라늄을 발견하여, 1938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그 후 이것을 바탕으로 독일의 한슈 트라스만은 우라늄의 원자에 중성자를 충돌시키면 핵 분열을 일으키면서 열과 빛을 내고 몇 개의 중성자가 튀어나옴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것을 실험하여 보고 연쇄 반응의 가능성을 증명하였다. 제2차세계대전 중에는 노벨상을 받기 위해 스웨덴으로 갔다가 그대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서 원자폭탄 제조 연구에 지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1942년 세계 최초의 원자로를 만들었다.

애플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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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r Edward Victor Appleton(1892-1965)

영국의 물리학자. 케임브리지대학을 졸업한 후 런던대학·케임브리지대학의 교수를 지내고 에든버러대학의 학장을 지냈다. 1926년 케넬리 헤비사이드 층보다 높은 곳에 전리층이 있음을 확인하고 이를 '애플턴층'이라 하였다. 이 연구로 레이더 발달에 이바지하였으며, 1927년 왕립과학협회 회원이 되었다. 전파·전리층을 연구한 공로로 1947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월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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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nest Thomas Sinton Walton(1903-1995)

영국의 물리학자. 워터퍼드주의 턴가버 출생. 1932년에 코크로프트와 함께 입자를 인공적으로 가속시켜 원자핵을 변환시키는 현상을 발견했으며, 50만 볼트(V)를 내는 통제할 수 있는 입자가속기를 처음으로 만들었다. 월턴과 코크로프트의 실험은 질량과 에너지가 같다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확인해 주었다. 1951년에 코크로프트와 함께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오펜하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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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ius Robert Oppenheimer(1904-1967)미국의 물리학자. 뉴욕 출생. 하버드대학교 졸업. 1943-1945년에 뉴멕시코주의 로스앨러모스에 있는 연구소의 소장을 지냈으며, 이 연구소에서 첫번째 원자폭탄의 설계와 제조가 이루어졌다. 1947-1952년에 미국원자력위원회(AEC) 자문회의 의장을 지냈고, 처음으로 미국이 핵에너지의 국제적 통제에 관한 제안서를 작성할 때 도움을 주었다.

타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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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les Hard Townes(1915- )

미국의 물리학자. 사우스캐롤라이나 그린빌 출생. 1951년에 메이저를 개발하는 데 기초가 되는 기본 원리를 밝혀냈다. 메이저는 분자나 원자가 들뜬 상태에서 바닥 상태로 떨어질 때 나오는 에너지를 이용해서 전파를 증폭하는 도구이다. 1958년에 숄로와 함께 광파를 증폭시키는 도구인 레이저를 제안했다. 1964년 개량된 메이저를 만든 구소련의 물리학자 프로호로프, 바소프와 함께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파인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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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chard Phillips Feynman(1918-1988)

미국의 물리학자. 뉴욕 출생.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수학. 양자전기역학은 원자구성입자와 전자기복사의 상호작용에 대해 연구하는 분야이다. 양자전기역학 이론으로 전하를 띤 입자들이 복사장 안에서 서로 미치는 효과들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의 물리학자인 슈윙거, 일본의 물리학자 도모나가 신이치로와 함께 1965년에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세 사람은 각자 1940년대 후반 양자전기역학 이론을 연구하여 한층 발전시켰다.

베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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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 Albrecht Bethe(1906- )

독일 태생의 미국 물리학자. 슈트라스부르크 출생. 1940년대와 1950년대에 걸쳐 원자폭탄과 수소폭탄 개발에 참여했으나, 원자폭탄이 투하된 일에 강한 책임감을 느껴 이후에는 핵무기군비축소를 주장했다. 태양과 별에서 에너지가 어떻게 생겨나는지에 대해 연구한 공로로, 1967년에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와인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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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ven Weinberg(1933- )

미국의 물리학자. 뉴욕 출생. 전자기와 약한 상호작용에 대해 설명하고, 기본입자가 충돌했을 때 생기는 결과를 예측하는 이론을 만든 공로로, 1979년에 글래쇼, 살람과 함께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이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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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輝昭(1935-1977)

우리나라 태생의 미국 물리학자. 서울 출생. 1954년에 미국으로 가서 왕성한 연구활동을 펼쳤다. 1972년에 발표한 논문 「게이지이론의 재규격화」에서 자연에 존재하는 네 가지 기본 힘 가운데 전자기력과 약한 상호작용을 통합하는 게이지이론의 재규격화를 해결했다. 이에 따라 1967년에 게이지이론을 제안한 글래쇼·와인버그·살람은 1979년에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또한 이휘소의 논문이 발표되면서 두 가지 기본 힘 외에 강한 상호작용까지 통일하는 '표준모형'이 완성되어 자연을 더욱 깊이 이해하는 데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이휘소는 또한 매력쿼크로 이루어진 새로운 기본입자를 이론적으로 예측했으며 1974년에 매력쿼크의 결합상태인 매력입자가 발견되었다.

스베드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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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odor Svedberg(1884-1971)

스웨덴의 물리화학자. 바르보에서 출생하여, 웁살라대학 교수 및 물리화학 연구소장을 지냈다. 콜로이드 미립자에 대한 브라운 운동의 실험적 근거를 밝혀 콜로이드 화학의 기초적 연구에 공헌하였다. 또 그가 발명한 원심 분리기에 의한 고분자화합물의 분자량 측정 연구 또한 유명하다. 1926년 노벨화학상을 받았으며, 저서로 『콜로이드 화학』이 있다.

유가와 히데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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湯川秀樹(1907-1981)

일본의 물리학자. 도쿄에서 출생하였으며 교토대학을 졸업하였다. 오사카대학·교토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원자핵 및 장의 양자론을 연구하였다. 1934년 원자핵 속에서 작용하는 핵력을 생각하여 '중간자'가 있음을 예언하였다. 후에 앤더슨에 의해 중간자가 밝혀지자, 1949년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1948년 미국의 초청으로 컬럼비아대학과 프린스턴고등연구소에서 연구 생활을 하였다. 1953년 귀국하여 교토대학에서 후진을 양성하고 소립자에 관한 연구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