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고대사회의 발전/고대국가의 형성과 문화/고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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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槪說〕[편집]

대동강 유역의 평양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 고조선은 대륙으로부터 청동기 문화가 전래되면서 새로운 사회 발전을 거쳐 부족국가로 성장한 것 같다. 곰 토템 씨족의 족장, 즉 단군 왕검(檀君王儉)을 군장(君長)으로 받드는 이 부족국가는 한 군(郡) 정도를 지배하는 제정일치(祭政一致)의 사회였다. 고조선 부족국가는 이어 기원전 4세기경에는 대동강과 요하(遼河) 유역 일대에 흩어져 있는 여러 부족국가들과 연합해서 하나의 큰 연맹체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왕(王)을 칭하기까지 성장하여 중국의 연(燕)과 맞서 강대한 세력을 자랑하였으나, 기원전 3

전 4세기의 교체기경에 이르러 연의 요동 진출에 밀려 점점 쇠약하여 갔다. 하나의 완만한 연맹체에 불과한 세력으로서 청동기 시대에 머물고 있던 고조선은, 공고한 정치적 조직과 발달된 철제(鐵製), 무기를 소유하고 동방으로 진출해 오는 한족(漢族)에 대항할 만한 힘을 가지지 못하였기 때문에, 연의 명장 진개(秦開)의 요동 원정에 크게 위축당했다.연은 그가 약탈한 고조선의 일부 지방에 요동군(遼東郡)을 설치하였으나, 진(秦)이 중국을 통일함에 이르러 연도 이에 병합되고, 따라서 요동군도 그 소유가 되었다. 이즈음 고조선의 경계선은 다시 후퇴하여 그 영역은 더욱 축소된 것 같다. 이어서 한(漢)이 중국을 통일하고 군국제도(郡國制度)를 채용하여 옛 연의 땅에는 노관(盧?)을 봉해서 연왕(燕王)을 삼았던바, 노관은 흉노(匈奴)로 망명하여 버렸다. 이렇게 정국이 바뀌는 동안, 위만(衛滿)이 천여 명의 무리와 함께 고조선에 망명하여 북방수비의 임무를 담당하였다. 위만은 유망민(流亡民)의 세력을 기반으로 그 힘이 커지자 준왕(準王)을 축출하고 왕이 되어 위만조선(衛滿朝鮮)을 건설하였고, 이때 준왕은 남쪽 진국(辰國)으로 가서 한왕(韓王)이라 칭하였다 한다.문화적으로 보아서 당시의 다른 어느 부족사회보다도 그 발전이 현저히 앞서 있던 고조선의 사회상에 대해서는 8조 법금(八條法禁)이 행해졌음을 알 뿐 그 외에 관한 것은 알 수 없다. 이와 같은 금법(禁法)을 통해서 고조선 사회가 개인의 생명과 노동력, 사유재산 및 가부장적(家父長的)인 가족제도 등을 존중한 사실을 알 수 있다.한편 한은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그 해(전 108)에 위만조선의 판도 안에다 한(漢)의 4군(四郡)을 설치하였다. 이후 고조선의 주민은 가혹한 한의 수탈을 받았으며, 일부는 한의 압박을 피해 남으로 이주하였다. 한의 군현이 그들의 식민 정책을 수행한 중심지는 낙랑군이었다. 이른바 낙랑문화로 일컬어지는 한의 문화가 낙랑을 중심으로 이식되었고, 그것은 주변의 사회로 확대 수용되어 한국 전역으로 파급되어갔다.

정치조직[편집]

政治組織

고조선의 관명(官名)으로는 박사(博士)·대부(大夫)·상(相)·대신(大臣)·장군(將軍)·비왕(裨王) 등이 보인다. 이들 관직 모두의 구체적인 성격은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이러한 관직을 갖고 있으면서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지닌 자들이 있었다. 한나라에 대한 외교정책에서 왕과 의견이 맞지 않자 휘하의 2천 호를 이끌고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이탈해 간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歷谿卿) 같은 이가 그런 예이다. 한나라와의 전쟁 중 전선을 이탈하여 수도가 함락되는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이계상(尼谿相) 삼(參) 등 세 명의 ‘상(相)’들도 그러한 이들로 추측되는데, 상은 일정한 세력집단의 대표로서 중앙정부에 참여한 이들이 지닌 관직의 이름으로 여겨진다. 당시 위만조선에는 여러 명의 상이 있었는데, 이름으로 보아 다수가 고조선들인이었다. 상의 휘하에 있던 집단에 대해선 왕실의 통제력이 어느 정도 미쳤겠지만, 적어도 각 집단 내부의 일은 자치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역계경 등의 집단적인 이탈행위가 가능했다는 점이 바로 이를 말해준다. 왕도 기본적으로는 그러한 집단들 중에서 가장 큰 집단의 장이었고, 위만조선 왕실의 경우 중국계 유이민 집단이 그 직할 집단이었던 것이다. 국가의 주요 결정은 이들 상들이 참가한 회의체에서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자연 왕권은 강력하지 못하였고, 중국식 제도에서 비롯된 관직명이 부분적으로 보이지만 관료조직은 발달하지 않았으며, 정치조직의 기본적인 틀은 자치집단들의 연맹체와 같은 것이었다.당시 고조선사회는 이미 상당한 정도로 계급분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8조의 법금(法禁) 중 현재 전해지는 3개 조항에서, 노비의 존재와 사유재산에 대한 보호조치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시기 지배층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화려한 부장품들은 계급분화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촌락에선 공동체적 관계가 여전히 작용하고 있었다.이 시기의 사회계층은 귀족, 촌락의 일반민, 노비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귀족은 노예와 토지·재화 등 자신의 경제적 기반을 따로 가지면서 촌락공동체를 대표하는 수장(首長)의 면모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 노비는 상당수 존재하였으나, 많은 수의 노비를 사역하는 대규모 노예경영은 발달하지 않았다. 노예제경영이 발달한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보이는 화폐경제의 발달, 도시의 번창 등과 같은 사실은 확인되지 않았다.당시 사회에서 기본적인 생산활동을 담당한 이들은 촌락의 일반민이었다. 이들은 당시 농업이 지닌 낮은 생산력과, 가뭄이나 홍수 등에 따른 생산의 불안정성 및 철제 농기구의 부족 등으로 인해 소농(小農) 단위의 자립성을 유지할 수 없었으며, 촌락 단위로 상호 의존하여 생산과 소비생활을 하는 공동체적 관계를 맺고 있었다. 유력한 수장 휘하에서는 이러한 촌락들이 여러 개 귀속되어 있었다. 단 수장이 사적으로 지닌 우월한 경제적·군사적 힘이 이들 촌락을 규합하는 데 일정한 작용을 하였다는 점에서, 수장은 이미 지배계급으로서의 위치를 확보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유력한 수장들을 통합하여 성립한 것이 고조선이며, 고조선의 왕권하에서 수장들은 ‘상’으로 상당한 자치력을 지닌 세력집단을 대표하였다. 고조선의 중심을 이룬 이들 집단의 외곽에는 피복속 촌락공동체들이 존재하였다. 이러한 구조는 삼국 초기의 정치구조와 연관성을 지닌다.

준왕[편집]

準王

고조선 때의 왕(기원전 195년) 위만을 박사(博士)로 삼고 서쪽 백 리를 봉하여 북방 수비를 담당케 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194년 위만이 모반하여 왕검성을 공격하자 준왕은 남하하여 마한(馬韓)을 치고 한왕(韓王)이라 칭하였다 한다.

단군신화[편집]

檀君神話

고조선인들이 남긴 문화 중 가장 특색있는 것은 건국신화인 단군신화(檀君神話)이다. 13세기에 씌어진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천신(天神)인 환인(桓因)의 아들 환웅(桓雄)이 무리 3천을 이끌고 태백산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내려와 신시(神市)를 세우고 곰이 변하여 된 여자와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으며, 단군에 의해 건국된 고조선은 1천여 년 간 지속되었다고 한다. 즉 천신의 자손에 의해 나라가 세워지고 그 왕위가 이어져갔다는 것이다. 이는 왕권의 정통성과 국가의 존엄성을 수식하려는 당시 사람들의 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이러한 관념에 의할 때, 천신의 자손인 현왕(現王)은 반신반인(半神半人)의 존재로, 영계(靈界)와 인간계(人間界)를 매개할 수 있는 샤먼(shaman)과 같은 특이한 존재로 인식되었다. 고조선의 왕은 매년 그의 조상신인 천신께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그때 베풀어진 의식은 단군신화의 내용을 재현하는 형태였을 것이다. 이 제의에 고조선을 구성하던 모든 집단의 장들이 참여해 정치적 통합을 강화하고 결속력을 높였을 것이다. 곧 단군신화는 고조선 당대의 정치이데올로기였고, 그 제의는 정치적 집회의 기능을 지닌 것이었다.이러한 측면은 다음 시기인 삼국시기에도 이어졌다. 천신의 자손이 강림하여 나라를 세웠다는 신화는 동북아시아 지역 고대국가의 건국신화에서 흔히 보인다. 또한 자신의 조상이 곰이었다고 하는 전승과 곰 숭배 신앙은 시베리아 퉁구스(Tungus)족의 여러 종족들 사이에서도 널리 존재하였다. 이를 통해 한국 고대문화의 기저에는 시베리아 지역 주민들의 문화와 연결되는 면이 존재함을 재확인할 수 있다.단군신화는 이를 통해 고조선인의 의식세계를 살필 수 있다는 점 외에, 그것이 후대인들에 의해 각 시기마다 새롭게 재해석되면서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에 더 큰 의미가 있다. 특히 12세기 후반 장기간에 걸친 몽골와의 전쟁 이후, 단군은 한국사의 독자성과 유구성 및 한국인의 동질성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참성단[편집]

塹城檀

인천 강화군 화도면 마니산(摩利山) 산상에 있는 단군의 제천지. 사적 제136호. 상고시대 단군이 쌓았다고 전해온다. 면적은 5,593㎡이며, 상단 방형(方形) 1변의 길이는 1.98m, 하단 원형의 지름은 4.5m이다. 자연의 산석을 다듬어 반듯하고 납작하게 만들어 쌓았고, 돌과 돌 사이의 사춤에 아무 접착도 바르지 않았다. 자연석들에 의지하여 둥글게 쌓은 하원단과 네모 반듯하게 쌓은 상방단의 이중구조로 구성되었고, 상방단 동쪽면에는 21계단의 돌층계가 설치되어 있는데, 1639년(인조17)과 1700년(숙종 26)에 중수했다. 마니산에 참성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게 된 것은 강화의 생김새가 천하의 요새이기 때문이며, 예로부터 마이(摩利)·혈구(穴口) 등은 하늘과 인연이 깊다고 전해온다.또 개국신화(開國神話)의 등장인물인 우사(雨師)와 운사(雲師)도 마니산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전해지는데, 이들은 환웅의 권속이므로 단군이 참성단을 설치하여 하늘에 제사지낸 뜻을 짐작케 한다.

단군왕검[편집]

檀君王儉

어원을 보면 단군이란 고대 사회에서 제사장을 가리키는 말이었고, 왕검이란 정치의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따라서, 단군 왕검을 시조로 했던 고조선 사회는 제사와 정치가 일치하는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위만조선[편집]

衛滿朝鮮

고조선(古朝鮮)에 있어서의 마지막 조선으로 위씨조선(衛氏朝鮮)이라고도 한다. 중국에 있어서 진(秦)이 망하고 기원전 206년에 한(漢)의 고조(高祖)가 다시 천하를 통일한 뒤 주위의 여러 나라에 공신(功臣)을 봉하여 제후를 삼았다. 이때에 노관(蘆?)은 연왕(燕王)으로 옛 연(燕)나라 땅을 다스리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한이 주위의 제후들을 시기하여 제거하기 시작하자 연왕 노관은 미연에 화를 면하려고 반하여 흉노쪽으로 도망하고 연은 한군(漢軍)에게 점령당하게 되어 일시 혼란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위지(魏志)』에 의하면 이틈에 연나라의 위만(衛滿)이 연의 영내에서 망명당(亡命黨) 천여 명을 이끌고 패수(浿水)를 건너서 조선(朝鮮:所謂箕子朝鮮)에 들어와 조선왕 준(準:淇子朝鮮末王)을 달래어 고공지(故空地)의 수비를 하겠다고 하였다. 준왕은 그를 믿고 박사(博士:地方長官職)를 삼아 서변백리(西邊百理)의 땅을 봉하여 주었다. 그러나 위만은 이들 유망인들을 통솔하고 그들과 결탁하여 자기 세력을 기른 다음, 하루는 준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거짓으로 한병(漢兵)이 십도로 쳐들어오니 들어가 왕을 호위하겠다고 하여 갑자기 군사를 몰아 준왕을 쳐서 나라를 빼앗고 스스로 조선왕(朝鮮王)이라고 하였는데 이때를 『사기(史記)』에는 효혜고후시(孝惠高后時 기원전 194~ 기원전 180)라고 하였다.이때 준왕은 남쪽의 진국(辰國) 방면으로 망명하여 한왕(韓王)이 되었다고 한다. 위만은 『사기(史記)』 이하 『한서(漢書)』 등에 모두 연인(燕人)이라고 되어 있다. 이에 관하여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은 이를 국치(國恥)로 여기고 위만조선을 한의 4군(漢四郡)과 더불어 ‘지나인(支那人)의 북새질’이라고 하고 ‘위만의 도둑질’이라고까지 하였다.이병도(李丙燾)는 이에 대하여 위만이 망명하여 올 때 ( 상투를 짜고 조선 옷을 입었음(?結蠻夷服).

( 요동 방면에는 한인(漢人) 계통뿐만이 아니라 동호(東胡)·조선인 계통의 사람이 지리적으로 보아 많이 살았을 것이며, 혼란한 틈을 타서 조선계 사람들이 본연의 자태로 돌아가 집단적으로(대부분이 조선인) 모국(母國)에 들어왔을 것임. ( 준왕의 신임을 받았다는 점을 들어 순수한 외족(外族)이 아니었을 것이며, 건국하여 국호를 종전대로 조선이라고 하였음. ( 위만조선 말기의 관직명이 조선적(朝鮮的)이었으며 응소(應?)가 위만조선을 융적시(戎狄視:漢書朝鮮傳)하였다는 것 등을 들고 위만은 패수 이북의 요동지방에 토착하였던 조선인계의 연인으로 보고 있다. 이것을 그대로 믿어 위만이 처음에 망명하여 올 때에 상투를 짜고 조선옷을 입고 왔다는 것은 그가 연인이기 때문에 조선땅에 들어와서 정권을 잡기 위하여 조선인의 행세를 하였을 것이라고 봄이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위만이 건국하였을 무렵 한나라도 건국 초기로 국가적인 체제가 집고하지 못하였으며 전부터 계속하여 침입하던 흉노에 대비하기가 급급하여 조선에 대한 정책은 대단히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정치적 변동은 인접한 요동군에 대하여 불안을 준 듯하여 요동 태수는 위만으로 하여금 ( 한의 외신(外臣)이 될 것. ( 요동 새외(塞外)의 만이(蠻夷)가 한의 변경을 침범치 못하게 할 것. ( 만이의 제 군장(君長)이 한의 천자를 입현하려고 할 때 막지 말 것 등을 맹약하고 한제(漢帝)의 재가를 얻었던 것이다.이로 말미암아 위만은 한으로부터 병력과 물자의 원조를 얻어 세력을 신장하고 이웃의 작은 마을과 진번(眞番)·임둔(臨屯) 등을 아울러서 복속케 하여 지역이 수천 리에 달하였다고 한다. 이는 곧 그 광대함을 형용한 것으로 팽창력이 강성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며, 사실상은 평양을 중심으로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에 세력을 뻗쳤던 것이다.진무(陳武:漢文帝初의 將軍) 등이 남월과 조선이 병력을 장비하여 중국을 엿보고 있으니 이들을 치자고 주청(奏請)한 사실로 보아 위만은 주위의 제 씨족사회를 통합하여 강력한 국가를 형성하고 기회가 오면 요동방면으로 진출하여 패권을 잡아보려는 계획을 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와 같은 진무 등의 주장은 실현을 보지 못하였지만 당시의 위만의 태도가 심상치 않았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위만의 강성은 그 자체의 실력도 있었지만 이때 북아시아에 강대한 제국을 형성하였던 흉노(匈奴) 제국과 긴밀한 연락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위만이 죽고 그 손자 우거왕(右渠王) 때에 이르러서는 더욱 한의 망명인을 포섭하고 세력을 양성하여 한에 대항하여 입현(入見)하지 않을 뿐더러 진번에 남접한 진국(辰國)이 한에 입조하려는 것을 막고 통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드디어 문제가 되었다.이 무렵의 한제국은 미증유의 발전을 보게 되어 대외적으로는 종래에 압도되었던 흉노제국에 넘칠 만큼 우세하게 되어 북방으로는 이 흉노를 공벌하고 남쪽으로는 멀리 민월(閔越)·남월(南越)을 크게 정벌한 때였으므로 이와 같은 위력은 동방에도 파급되어 은연중 힘을 기르며 여러 씨족을 지배하고 한에 대한 복속을 가로막을 뿐만 아니라 흉노와 내통하는 기미를 보이는 위만조선을 방치할 수는 없었다. 이런 때에 조선에 예속되었던 압록강 방면의 예맥(濊貊)의 군장(君長) 남녀(南閭) 등이 반하여 주민 28만명을 거느리고 한에 항복하니 한은 그곳에 창해군(滄海郡)을 설치(기원전 128)하였다. 이것은 날로 강성해가는 위만조선을 거세하려는 것이었다.한은 여기에 예맥으로 통하는 교통로를 개척하기 시작하였으나 경비가 막대하여 3년 만에(기원전 126) 파하였다. 한은 예맥·조선·진번 등의 땅에서 목재(木材)·철(鐵)·어염(魚鹽) 등의 물자를 수탈 또는 무역하는 경제적 이익을 욕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침략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므로 한은 처음에 거만한 위만조선에 효유사(曉諭使)로 섭하(涉何)를 보냈으나(기원전 109) 뜻을 이루지 못하고 조선의 호송사(護送使)를 패수에서 죽이고 돌아갔다. 한무제는 이것을 가상히 여겨 섭하를 요동군 동부도위(東部都尉)로 임명하였다.이에 분격한 위만조선은 병력을 동원하여 보복적으로 섭하를 습격하여 죽였다. 이 사태로 말미암아 한의 대대적인 침략을 당하게 되었으니 한무제는 이해 가을에 죄인들로 편성된 군대를 이용해 수·륙 양면으로 공격해 왔다. 수군은 5만을 양복(楊僕)이 거느리고 산동(山童)을 떠나 발해(渤海)를 건너 열수(列水:大洞江)를 거슬러 올라와 왕검성을 직공(直攻)하였으며, 육군은 주로 요동군을 동원하여 순체(荀?)로 하여금 왕검성으로 진격하여 왔으나 조선군의 반격으로 패산 도주하였다.무제는 이 형세를 보고 위산(衛山)을 군사로 호위하고 위압으로 우거에게 재차 태도 변경을 권유하였다. 이에 우거는 화의를 청하겠다고 하고 태자를 군마로 호위케 하여 회사(回謝)로 한에 보내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위산과 더불어 출발케 하였으나 패수에 이르러서 위산은 태자에게 군대를 해산하라고 하여 의심을 품은 태자는 되돌아왔다. 이 사실을 보고하자 무제는 노하여 위산을 목베어 죽였다.화의가 실패로 돌아간 것을 안 순체는 용기 백배하여 패수상군(浿水上軍)을 격파하고 진격하여 왕검성의 서북면을 포위하고, 양복의 수군은 이에 호응하여 그 남쪽에 대진하여 왕검성을 완전히 포위하였다. 그러나 왕검성의 공방전(攻防戰)은 수개월이 지나도 진전이 없었으며, 개전 벽두에 타격을 입은 수군은 전위를 잃고 단독으로 조선과 강화코자 하였으며 사기 왕성한 육군에 협력하지 않았다.한무제는 이렇게 부진한 전세를 속히 타개하려고 제남태수(濟南太守) 공손수(公孫遂)를 보냈다. 공손수는 강화파 양복을 가두고 수륙 양군을 통합하였다. 그 후 공손수는 참형(이유불명)을 당하게 되었으므로 순체가 양군을 지휘하여 일제히 공격을 가하게 되었다. 이때에 성안에서는 화전양론(和戰兩論)이 대립되어 동요를 가져오게 되었다. 왕은 끝끝내 항전을 주장하고 왕의 보강인 조선상 노인(朝鮮相 路人)·상 한음(相 漢陰)·이계상 삼(尼谿相 參)·장군 왕겹(將軍 王?) 등은 주화(主和)를 주장하다가 마침내 항복하고, 이계상 삼이 보낸 자객에게 조선왕 우거는 살해당하고 말았다. 성은 이내 공략되고 위만조선은 3대 80여 년으로 멸망하였다(기원전 108년).우거가 죽은 뒤 대신 성기(成己)는 계속 반항하였으나 드디어 죽음을 당하고 평정되었다. 한무제의 공략은 그 근본 원인이 흉노에 대한 정책에 있었으며 위만의 불손한 저항을 계기로 단행되었던 것인데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은 그 세력권내에 낙랑·진번·임둔:이상 기원전 108년·현도:기원전 107의 4군을 설치했다.위만이 건국한 조선국은 토착사회(土着社會)와는 이질적으로 이미 고도한 정치세력을 구성하고 문물제도가 중국화하였으리라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발달하여 온 토착사회 즉 토호(土豪)들의 존재도 무시할 수는 없었던 것으로 위만이 국호를 조선이라 하고 왕의 밑에 고유한 관직명을 사용한 것 등은 혼란을 피하고 반도의 제족(諸族)을 호령하기 위하여 토착세력과 합력하기 위한 듯하다. 우거왕 때의 직제의 조선상·이계상·역계경(歷谿卿) 등은 중앙과 지방관의 직인 듯하며 여기에 경상(卿相)은 중국제도를 모방한 전대의 유제(遺制)였을 것이나 『한서』에 관기를 알지 못하고 상(相)을 칭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는 것은 원시부족장제(原始部族長制)에서 유래된 잔재일 것이다.사회제도 등에 관한 기록이 없어 분명한 모습을 알 길이 없으나 토착사회의 기념물로서 평안도·황해도 지방의 거대한 지석묘(支石墓), 사회의 유습을 이어받고 중국으로부터의 우세한 철기문명을 결합한 최초의 철기 문명사회를 형성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으니, 약 1년 간의 한나라와의 항쟁에서 여러 번 한군의 예봉을 좌절시킨 사실은 당시의 조선인 사회의 정치조직·경제 및 군사조직의 진보 발달과 민족의식의 왕성(토착민의 애국심)은 물론이요, 우세한 한의 철제무기(鐵製武器)에 대항할 만한 철기문명의 혜택을 이미 갖고 있었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기자조선[편집]

箕子朝鮮

고조선과 연관된 전승으로는 후대인들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기자전설(箕子傳說)을 빼놓을 수 없다. 기자는 중국 상나라의 귀족으로 현인(賢人)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가 기원전 12세기 말 상나라가 주나라에 망하자 동쪽으로 가 조선의 왕이 되었다는, 또는 주왕(周王)에 의해 조선 땅의 제후로 봉해졌다는 것이 전설의 내용이다. 기원전 12세기 말 당시의 상황과 황하 중류 유역과 조선 간의 거리, 기자의 묘가 북중국의 허난성 지역에 있다는 다른 전승의 존재, 한국 청동기 문화와 북중국의 상·주 청동기 문화가 계통상 성격을 달리한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실제로 기자가 조선에 왔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기자가 조선에 갔다는 전설이 중국측 기록에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기원전 2세기 말이다. 아마도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침공한 그 무렵, 조선에 대한 고대 중국의 연고권을 강조하려는 의도와 관심이 투영되어 기자전설이 구체화된 것으로 여겨진다. 기자전설은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하고 설치한 낙랑군(樂浪郡)에 이주한 중국계 호족들에 의해 그들의 조상설화로 받아들여지기도 하였다. 아무튼 이 전설은 그 뒤 중세기에 한국인들에 의해 사실로 믿어졌고, 기자조선은 역사적으로 존재한 것처럼 인식되었다. 선진 중국문물을 일찍부터 수용하였다는, 이 이른 시기부터 한국이 중국에 못지않게 문명국이었다는 것을 내세우려는 상징으로 기자는 존숭되었다. 이 같은 사실은 전근대시기에 중국문화가 한국문화에 끼친 영광과 그에 대한 한국인의 대응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팔조의 법금[편집]

八條-法禁

고조선 사회의 법률. 고조선에는 일찍부터 사회의 안녕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일종의 불문율인 8조(八條)의 법이 있어 각종 범죄를 처벌하였다.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그 중 3조목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 3조목은 다음과 같다. ①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사형에 처한다. ② 남에게 상해(傷害)를 입힌 자는 곡물로써 배상한다. ③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데려다 노비로 삼는다. 단, 자속(自贖)하려는 자는 1인당 50만 전을 내야 한다.위의 3조목 중 절도죄에 대한 규정의 한 조(條)는 후대에 가서 중국법의 영향을 받은 것 같으며, 원래는 부여나 고구려와 같이 12배를 갚는 것이었으리라 생각된다. 고조선인들은 절도죄에 대해 상당히 관심이 컸던 것 같아서, 비록 속전(贖錢)을 내고 자유민이 되더라도 이를 부끄러이 여겼으며, 결혼의 상대자를 구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또 부인들은 정신(貞信)해서 음란하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이 사실로 미루어 보아 간음(姦淫)을 금하는 1조목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법조목의 존재는 고조선 사회가 원시적인 씨족 사회를 벗어나서 발달된 생산력을 기초로 한 사유재산 제도와 가부장적인 가족 제도가 성립된 사회로 발전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삼한과 진국[편집]

三韓-辰國

한편 위만조선이 존속하고 있을 때에 그 남쪽인 한반도 중·남부지역에는 진국(辰國)이 있었다. 진국에 대해선 아직도 분명하지 않은 점이 많다. 진국은 고대국가로 보기 어렵고, 한족(韓族)의 여러 부족과 소국들의 제의와 중국과의 교역 등을 통해 상호 결속한 완만한 형태의 연맹체로 여겨진다.위만조선이 망한 뒤 많은 수의 고조선인들이 남으로 내려왔고, 이보다 앞서 위만이 고조선의 왕위를 찬탈했을 때에도 상당수의 고조선인들이 남쪽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기원전 108년 한나라의 군현이 설치된 이후에도 진번군이 폐지되는 등의 변동에 따라 적지 않은 유이민들이 발생하였다. 한 단계 앞선 금속기 문화를 지닌 고조선계 주민들이 이주해 옴에 따라, 한반도 중·남부지역의 한족사회에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대전-익산, 대구-경주, 김해-마산 등지에서 집중적으로 발굴되는 새로운 금속기문화의 유적과 유물은 그같은 사실을 말해준다. 그 결과 이들 지역을 중심으로 마한(馬韓)·변한(弁韓)·진한(辰韓)의 삼한(三韓)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삼한 역시 그 각각이 집권력을 지닌 국가를 이룬 것은 아니었다. 그 내에 비슷한 문화를 영위하던 여러 소국과 부족을 포함하는 종족 단위로서의 성격을 띠었다. 이 삼한사회에서 백제(百濟)와 신라(新羅) 등이 고대국가로 등장하게 된다.

한사군[편집]

漢四郡

전한(前漢)의 무제(武帝)가 기원전 108년 위씨조선(衛氏朝鮮)을 멸망시키고 그 영토에 설치한 낙랑(樂浪)·진번(眞番)·임둔(臨屯)·현도(玄?)의 4군현을 말한다.

설치[편집]

기원전 194

기원전 180년에 해당하는 기간에 한반도의 지배자가 된 위만(衛滿)은 외정(外征)뿐만 아니라 내치(內治)의 정비에도 힘을 써 왕위 세습권이 확립되었을 뿐 아니라 토착민의 회유에도 상당히 성공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위만의 아들 이름은 확실치 않으나 그의 손자는 우거(右渠)였다고 그 이름이 전한다. 우거 때는 중국 한 무제(기원전 140

87) 때에 해당하는 시기였다. 이때 중국은 사방을 침략하여 영토를 확장하고 있었다. 무제에게는 흉노(匈奴)가 가장 두려우 존재였던 것 으로 생각되며 흉노를 치기 위하여 장건(張騫)을 대월지국(大月氏國)에 파견하여 동맹 관계를 맺으려고 한 것도 이때였다. 무제의 대동방(對東方) 조선정책에는 흉노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방편도 있었을 것이다. 『한서(漢書)』에는 “동이(東夷)의 예군(濊君) 남녀(南閭) 등의 28반인이 투항하였으므로 이 곳에 창해군(蒼海郡)을 설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후한서(後漢書)』에는 수련이 지나자 창해군을 혁파(革罷)하였다고 하여 남녀가 우거의 지배하에 있다가 한에 투항하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한무제는 그곳에 창해군을 설치하고 팽오(彭吳)를 시켜 이곳에 이르는 통로 개척을 명하였으나 공비(工費)와 노동력이 막대하게 투입되는 사실 때문에 창해군이 설치된 지 3년만인 기원전 126년에 혁파하고 말았다. 또 우거는 부조(父祖) 때와는 달리 친한정책을 취하지 않았다. 이것은 위씨조선이 진국(辰國) 등의 여러 나라가 한과 직접 교통하는 것을 금함으로써 중간 무역의 이익을 차지하려는 의도에서 그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한의 동방침략의 한 구실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흉노가 위씨조선과 동맹을 맺게 되면 한으로서는 큰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한 무제는 외교적 방법에 의하여 우거의 거한 정책(巨漢政策)을 무마하려 하였다. 무제는 기원전 109년에 사신으로 섭하(燮河)를 파견하여 설득시키려 하였으나 우거는 제의를 거절하고 종전의 태도를 굽히지 않았다. 한은 섭하를 요동군(遼東郡) 동부도위(東部都尉)로 임명하였는데 조선은 이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일으켜 그를 살해하였다. 이 사건이 한 무제가 조선에 침략군을 일으킬 구실을 준 것이며, 한 무제의 근본 정책은 즉위하여 사방을 침략하고 영토을 확장하는 데 있었던 것이다.『사기(史記)』조선전에 의하면 천자(天子:무제)는 죄인(罪人)들을 모집하여 조선을 칠 준비를 하였다고 기록되었고, 기원전 109년 가을에 이르러 육해로를 통하여 침략을 개시하였다. 양복(楊僕)이 발해(渤海)를 거쳐 왕검성(王儉城)으로 쳐들어가는 수로군을 맡았고, 순체(筍?)는 요동으로 출발하여 패수(浿水)에 이르는 육로군을 지휘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공격으로 온 육·육·수로 양군이 모두 무너지자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조선 정복이 불리한 국면으로 전개되자 한 무제는 다시 우거에게 평화적 방법을 제의하게 되었다. 위산(衛山)을 파견하여 화의를 교섭케 하였다. 우거도 태도를 바꾸어 화의에 동조하면서 화의 교섭에 응하고 태자를 파견하여 회사(回謝)토록 하였다. 그러나 1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회사길에 나선 태자가 패수(浿水)를 건널 때 교섭사 위산과 좌장군(左將軍) 순체는 태자의 호위군사의 무장을 해제하라고 요구하였고, 신변을 걱정한 태자는 도강을 중지하고 왕검성으로 돌아오니 화의는 결렬되었다. 이리하여 순체와 양복은 왕검성에 이르러 서북과 남쪽에 진을 치고 포위하였다. 하지만 순체와 양복은 주전론, 화의론으로 각기 그 의견이 엇갈려 전쟁은 끝날 것 같지 않았다.한 무제는 위산의 평화 교섭 실패와 순체·양복 간의 불화로 인한 작전의 부진 등을 감안하여 현상 타개를 위한 방법으로 제남태수(濟南太守) 공손수(公孫遂)를 현지에 파견하여 이 문제를 해결토록 하였다. 공손수가 전지(戰地)에 이르자 순체는 전날 양복의 소행을 들어 양복과 조선이 함께 아군을 멸할지도 모른다고 그의 의중을 밝히자 공손수는 순체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 양복을 잡아 가두고 수로군을 순체의 휘하에 병합시켜 작전의 일원화을 꾀하게 되었다. 그러나 공손수로부터 이러한 전말을 보고받은 무제는 공손수를 참형에 처하였다. 순체가 총공격을 감행하는 중에 왕검성 내의 조선 조정에서는 화·전 양파로 대립이 심각하여 주화파(主和派)는 집단적으로 이탈하거나 한군에게 투항하는 현상까지 일어나게 되었던 것 같다. 양복과 몰래 화의를 추진하던 일파로 보이는 한음(韓陰)·왕협(王陜)·노인(路人)은 모두 도망하여 한군에 투항하다가 노인은 중도에서 죽고 말았다. 이러한 지배층의 내분 때문에 전력은 약화되었고 기원전 108년 주화파로써 성내에 잔류하고 있던 이계상 참(泥谿相參)은 사람을 시켜 우거를 죽이고 한군에 내항(來降)하게 되었다. 우거왕 피살 후에도 왕검성의 저항은 완강하였다. 우거의 대신이었던 성기(成己)가 반격전을 펴 순체는 앞서 투항한 왕자 장(長)과 노인의 아들 최(最)로 하여금 성내의 백성들에게 고유(告諭)하여 성기를 죽였다. 이렇게 하여 위씨조선의 3대 80여 년 계속된 왕조는 막을 내리고 한은 4군을 설치하게 되었다.

변천[편집]

위씨조선(衛氏朝鮮)이 멸망한 후 기원전 108년에 위씨조선 지역에 낙랑(樂浪)·진번(眞番)·임둔(臨屯)의 3군을, 그리고 기원전 107년에 예맥(濊貊) 지방까지 걸쳐서 현도군(玄도郡)을 각각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사군이 설치될 때에 이들 군현의 위치와 그 소속 현명(縣名)에 대하여 자세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아직 미해결의 문제로 남아 있다. 그리고 한은 4군 설치 후 불과 20여 년만인 기원전 82년에 진번·임둔 양군을 폐지하여 진번군을 낙랑군에 임둔군을 현도군에 각각 병합시켜 버렸다. 그 뒤 10년도 채 못 되어 기원전 75년(漢 昭帝 元鳳 6年)에 현도군이 예맥(濊貊)의 고지(故地)로부터 지금의 혼하(渾河) 상류의 흥경(興京) 노성(老城) 지방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이는 예맥 고지를 중심으로 한 고구려의 침공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앞서 물려받았던 임둔 고지의 관할을 낙랑군에 이관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三國志 東夷傳東沃沮案에 의거). 따라서 낙랑군은 진번·임둔의 고지(故地)의 관할을 위하여 진번고지에 남부도위(南部都尉)를, 임둔 고지에 동부도위(東部都尉)를 각각 설치하게 되었다. 한편 2차 변동시에 홍경 노성 방면으로 쫓겨간 현도군은 고구려의 압력에 의해 다시 무순(撫順) 지방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심산 계곡의 비옥하지 못한 토지에서 일어난 고구려는 전투행위가 하나의 생활수단이었으며 한족(寒族)에 대한 투쟁은 고구려의 국력 신장에도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고구려가 현도군을 무순지방으로 쫓은 것도 고구려 초기 대외발전의 영주(英主) 태조왕대에 해당되는 것이다. 후한(後漢)의 말기 2세기 후반에 들어서자 중국은 황건적(黃巾賊)의 난을 비롯하여 군웅할거(群雄割據)의 시대로 변하였다. 이때 요동군(遼東郡)에 웅거하여 독립된 세력을 떨치고 있었던 사람이 공손탁(公孫度)이었다. 그런데 낙랑군은 1세기 초부터 북쪽의 고구려의 압박을 받고 있었을 뿐 아니라 남쪽의 한(韓)의 맹렬한 침공도 받고 있었다. 『삼국지』 동이전(東夷傳) 한조(韓條)에 기록한 바로는 “후한 환제(桓帝)·영제(靈帝)의 말기에는 한예(韓濊)가 강성하여 군현(郡縣)이 능히 제박(制馭)하지 못했으며, 백성이 다수 한국(韓國)에 유입하더라”는 정도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앞에서 말한 공손도(公孫度)는 요동태수(遼東太守)로 자립하여 요동군을 양립하여 각각 태수(太守)를 두었고, 영주자사(營州刺史)를 설치하여 자신은 요동후(遼東侯) 평주목(平州牧)이 되었을 뿐 아니라 낙랑군과 현도군도 그의 지배하에 놓게 되었다. 그의 아들 공손강(公孫康) 때에는 낙랑과 한(韓)·예(濊)에 대한 견제책으로 낙랑이 남쪽에 새로이 군현을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204년 경에 만든 대방군(帶方郡)이다. 아울러 공손모(公孫摸)·장창(張敞) 등으로 한지방(韓地方)으로 이동하는 유민(流民)을 막았다고 한다. 그 후 후한이 위(魏)나라로 바뀌자, 공손강(公孫康)의 아들 연(淵)은 연왕(淵王)을 지칭하게 되었다. 위(魏) 명제(明帝)는 사마의(司馬懿)를 파견하여 공손연(公孫淵)을 토벌하는 한편 대방태수 유혼(劉昕)과 낙랑태수 선우사(鮮于嗣)를 비밀히 파견하여 2군을 평정하여 위의 영토로 편입시켰으며 위가 진(晋)으로 바뀌자(265년) 군현도 자연히 이양되었다. 이렇게 본국의 정정(政情)이 불안함에 따라 군현에 대한 적극적 지원이 미약해진데다가 고구려의 압박과 한(韓)의 새로운 실력자로 등장한 백제의 공격은 한층 강하게 나타나게 되었다.본토 중국에서는 또 다시 5호(五胡)의 침입이 시작되어 진(晋)의 수도 낙양(洛陽)이 흉노족인 전조(前趙)에 함락되자(313년) 낙랑군과 대방군은 더 버틸 힘을 상실하여, 313년 고구려 미천왕(美川王)에 의해 낙랑군은 멸망하였고, 이어 대방군의 태수 장통(張統)은 몇 년 동안 미천왕과 싸우다가 천호(戶)를 이끌고 선비족(鮮卑族)인 모용씨(摹容氏)에게 투항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420여 년 간 유지되어 오던 한군현은 조선인의 끈질긴 투쟁의 결과 종식되었다.

영향[편집]

낙랑·대방군 외의 주위 여러 토착사회(土着社會)의 문화는 대체로 금석병용 또는 그것을 겨우 탈출한 정도에 불과하였을 만큼 저급하였다. 그들의 사회체체에 있어서도 부족제 중심이었을 것이고 한인들은 이들의 심리를 잘 이용하여 종래 주위 이민족에 대한 전통 정책에 의하여 만이군장(蠻夷君長)과 거수(渠帥)들에게 봉작(封爵)과 의복·인수(印綬) 등을 수여하고 군현과의 조공(朝貢)·조알(朝謁) 관계를 맺는 동시에 그들의 토산물을 수탈하였다. 일종의 공적 무역과 교류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주변사회와의 교류관계를 살펴보면, 김해 패총(貝塚)에서 출토된 유물에서는 다수의 패각(貝殼)·골기각(骨器角)·토기파편과 약간의 석기도 출토되었지만 철부두(鐵斧頭)·철편(鐵片)·화천(貨泉) 등이 같이 출토되었다.이들 유물은 본패총이 금속병용기에 속한 것임을 말하며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주의할 것은 화천과 철기류라 하겠다. 화천이 이 패총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이 지방이 원래 가야의 본거지요 한·위 시대에 일본에 파송되는 낙랑·대방의 사신이 여기에 중계하였던 터이므로 화폐가 이곳까지 유포된 것을 알 수 있다.다시 동으로 경북 영천군 금호면 어은동(永州郡琴湖面漁隱洞) 유적지에서 발견된 금속기에서는 소형고경(小形古鏡)과 기타 청동식구(靑銅飾具)가 발견되었다. 영천은 본시 골벌소국(骨伐小國)인데 이곳 발견의 소형고경(小形古鏡)에는 수개의 칠흑색(漆黑色) 백동경(白銅鏡)과 청동방제경(靑銅?製鏡)이 있는데, 백동경은 한대의 일광경(日光鏡)으로 이런 종류의 것은 낙랑유적에서는 물론 남만주지방과 서부 일본에서도 발견된 일이 있다.또 경주 외동면(外東面) 입실리(入室里)와 내동면 구정리(九政里)에서는 다뉴세문경(多?細文鏡) 1개, 구정리에서는 철도(鐵刀)·철부(鐵斧)·철겸(鐵鎌) 등이 출토되었다. 이 유물들은 중국 한대의 것과는 계통을 달리하는 소위 북방계통 양식의 것으로 이상 유물은 대개 전한 말경의 것으로 본다.제주도에서는 1936년 동지 축항공사시 해안에 가까운 용암 밑에서 오수전(五銖錢)·화천(貨泉)·대천오십(大泉五十)·포화(布貨) 등이 출토되었다. 이들 유물은 왕망시대(王莽時代)에 주조한 것인데 이곳에서 출토된 것은 흥미있는 일이라고 보고 있다. 제주도는 고대의 탐라국(耽羅國)으로 『삼국지』 위지(衛誌)에는 주호(州胡)라 하여 그곳 토착인이 배를 타고 중한(中韓)에 왕래하며 무역을 행하였다고 씌여 있다.중한은 낙랑·대방에 접근한 진한·마한을 지적한 것이니 위의 유물들은 이러한 지방과의 교역에서 중계 유전된 것으로 추축한다. 이와 같이 낙랑 등 한군현의 주변 토착사회는 동군현과 또 거기를 통해서 중국 역조(歷朝)에 대한 교역 교류관계에서 전파된 한문화 특히 철기문명의 자극을 받아 그것을 모방하는 한편, 차차로 자기 반성, 자기 각성을 일으키게 되었다.지역에 따라 지속의 차이는 있었지만 이러한 반성·각성으로 인하여 차츰 금속병용기(金屬倂用期)를 탈피하고 동시에 사회체제에 있어서도 고대국가(古代國家)가 전후(前後)하여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낙랑문화[편집]

樂浪文化

한군현(韓郡縣)이 설치되어 실제로 식민정책을 수행한 것은 낙랑군과 현도군 정도이고 그 중심지는 역시 낙랑군이었다. 한 때는 동의 임둔고지와 남의 진번고지를 병합한 적도 있었고 대방군 역시 1세기밖에 존속하지 못하였고, 현도군도 두 차례나 이동하였기 때문에 한군현의 문화는 대국적으로 보아서 낙랑 중심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이들의 문화와 생활상은 그들이 남긴 유적과 유물에 의하여 잘 알려져 있다고 하며, 평양 서남 대안의 토성리(土城里) 유적과 대방군 치소(治所)로 추정되는 황해도 봉산(鳳山)의 당토성(唐土城) 유적에서 많이 발견되었다.이들 유적 부근에는 낙랑군 당시의 한인(韓人)의 것으로 생각되는 수백·수천의 고분군이 있는데 그 양식은 목곽분(木槨墳)과 전축분(塼築墳)으로 되어 있으며, 그 부장품으로 보아서는 태수급(太守級)의 고급 관리의 무덤이라기 보다는 한인 하급 관리나 그 이하의 것으로 보여진다고 한다.우선 평양 부근의 토성리에서는 가옥지(家屋址)·포도(鋪道)·구지(舊址) 등이 발견되고 기타 초석(礎石)·봉니(封泥)·경편(鏡片)·와당(瓦當)·반냥전(半兩錢)·오수전(五銖錢)·대천오십(大泉五十)·화천(貨泉) 등의 전화(錢貨)·전범(錢?)·동촉(銅鏃)·금영락(金瓔珞)·소옥(小玉) 등이 출토되었다.와당에는 낙량예관(樂浪禮官)·낙랑부귀(樂浪富貴) 등을 새긴 것이 있고, 봉니(封泥)로는 낙랑태수장(樂浪太守章)·낙랑대윤장(樂浪大尹章)·조선우위(朝鮮右尉)·증지승인(增地丞印) 등의 문자가 새겨진 것이 발견되고, 이 토성을 중심으로 주위 동서 약 20리, 남북 약 10리에 걸쳐 1,300여 기(基)의 고분이 산재해 있다고 한다. 당토성을 중심으로 판 곳은 물론 평남 용강군(龍岡郡) 해운면(海雲面)에서는 낙랑군 속현 중에 점제현의 위치를 전하여 주는 점제현신사비를 비롯하여 어을동고성(於乙洞古城)과 몇 기(基)의 고분이 있다. 고분의 외형은 방대형(方臺形)인데 내부 구조는 목곽분과 전축분 두 가지가 있다. 목곽분은 광실(壙室)을 목재로 축조한 방형으로 되어 있고 전곽분은 광실을 전[벽돌]으로 축조한 서역의 궁륭형(穹?形) 천정과 아치식의 입구를 가진 것이다. 부장품에 있어서는 하급관리의 분묘에도 화려한 유물이 많이 나와 한대(漢代) 후장(厚葬)의 풍습은 그들의 호화로운 생활을 엿볼 수 있다.낙랑고분의 부장품으로는 동기(銅器)·옥기(玉器)·토기·도기(陶器)·목기(木器)·철기·칠기·장신구·문방구·철물·인(印)·기타 명기(明器) 등이 출토되었다. 동기로는 노(爐)·정(鼎)·종(鐘)·제렴(堤?)·호(壺)·세(洗)·인(印) 등이 있고 향로는 대동강가의 제9호분에서 나온 박산로(博山爐)가 유명한데 중국 산동성 박산의 모양으로 만든 까닭에 박산로라 한다. 낙랑 유물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동경(銅鏡)인데, 용호(龍虎)·금수(禽獸) 계열의 거울과 내행화문경(內行花文鏡) 등이 태반을 차지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왕망(王莽) 시대의 명기가 있는 동경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칠기로는 한대 최고도의 기술을 발휘한 촉(蜀)·광한(廣漢) 두 군의 관공(官工)의 손으로 만든 것이 많은데, 안(案)·반(槃)·매(杯)·우(盂)·협상(?箱) 등이 있고, 그 중에는 목제·저제(紵製)·죽제(竹製)의 것이 있다. 제9호분에서 나온 금동구칠반(金銅?漆盤), 석암리(石巖里)의 왕우묘(王旴墓)에서 나온 채화칠우, 남정리(南井里) 채협총(彩?塚)에서 나온 채화칠협(彩畵漆?), 그외 여러 고분에서 나온 금동이칠배(金銅耳漆杯)와 같은 것 등이 대표적이다. 채협총 출토의 채협칠기는 죽조(竹條)로는 구부려 엮은 구형(矩形)의 협상(?箱)으로 그 네 귀퉁이와 뚜껑물림에는 아름다운 채칠로서 충·효·의·열(忠孝義烈)에 관한 인물화를 그렸는데 당대의 화풍을 보여주는 좋은 미술품이다. 칠배류로는 대개 타원 장변에 귀[耳]를 붙였기 때문에 이것을 이배(耳杯)라고 한다. 그 중에 내면주칠(內面朱漆)·외면흑칠 등에 교묘한 운문(雲文)을 주칠로 나타내고 두 변의 귀[耳]를 모두 금동으로 금동이칠배(金銅耳漆杯)와 전면 흑칠 일색의 칠이배(漆耳杯)가 있다. 칠이배에도 연호명(年號銘)이 나타나는 것이 있는데, 그 중에는 기원전 85년(前漢 昭帝 始元年 2년), 54년(光武帝 建武 30년)의 명(銘)이 있는 이배(耳杯)도 발견되었다. 장신구로는 금지환(金指?)·은지환(銀脂?)·금천(金釧)·은천(銀釧), 패옥(佩玉)으로 벽옥(碧玉)·금박(金珀)·유리(琉璃)·수정(水晶) 등이 있고 순금제의 눈부신 대구(帶鉤)까지 출토되었는데 대동강변 제9호분에서 발굴된 것이다.다음 점제현의 신사비(神祠碑)는 높이 약 1.33m, 너비 약 1.10m되는 화강암으로 만든 것인데, 이 비문에 의해서 점제현의 위치를 알게 되었다.다음 대방군의 유적으로 황해도 사리원역 동남에 있는 당토성(唐土城)은 그 도성내에서 와(瓦)·전(塼)과 전화(錢貨)로서 오수전(五銖錢)·화천(貨泉) 등이 나오는데 이들 유물의 양식은 대동강 토성리의 유지에서 출토되는 것과 같다.사리원역 동남 2·3리에 있는 고분은 대방 태수 장무이(張撫夷)의 무덤으로 알려졌다. 전면(塼面)에 문자가 기입되어 있어 확증되었다.이 밖에 안악군(安岳郡)에서도 태강(太康) 9년 원강(元康) 5년의 명전(銘塼)이 나오고 신천(信川)에서도 태강(太康) 4년·7년을 비롯하여 건무(建武) 16년, 가평(嘉平) 2년 등의 명전이 무수히 발견되었다.1928년 신천군(信川郡) 북부면 서호리 부근에서 출토된 신천 명전에 ‘태강(太康) 4년 3월 소명왕장조(昭明王長造)’란 글자가 있어 이 지방이 낙랑군 동부도위의 치소이며 뒤에는 대방군의 속현인 소명현(昭明縣)의 소재지였음을 알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 권12』신천군 역원조(驛院條)에 ‘土城院, 在郡北十里’라는 토성원도 이 토성의 명칭임을 알 수 있다.

낙랑고분[편집]

樂浪古墳

평양 근교와 황해도에 산재되어 있는 낙랑 시대의 무덤, 평양 근방 토성리(土城里)를 중심으로 동서 약 20리, 남북 약 10리에 걸쳐 1,400여 기(基)에 달하는 고분이 있으며, 일제 때 일본 학자들의 손에 의해 어느 정도 발굴되었으나 아직도 대부분이 미발굴 상태이다.그 내부 구조에 따라 목곽분(木槨墳)과 전곽분(塼槨墳)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목곽분은 광실(壙室)을 목재로 축조한 것으로 곽호(槨戶) 이외에 내측별관(內側別槨)이 있는 것도 있고, 전곽분은 벽돌로 내부를 쌓은 것으로 천장과 아치(arch)식의 입구를 가졌고, 모두 벽돌로 쌓아 묘실은 2, 3씩 있고 측실(側室)까지 있는 것도 있다. 하지만 이들 고분의 외형(外形)은 대개 주한(周漢) 시대에 보편적으로 행하던 방대형(方臺形)이다.부장품(副葬品)으로는 동기·옥기·토기·도기·목기·철기·칠기 등 각종이며, 특히 제9호분(墳)에서 나온 박산로(博山爐)라는 향로와 내행화문거치경(內行花文鉅齒鏡)·다루세문경(多累細文鏡) 등의 거울이 유명하며, 칠기류에는 금동구칠반(金銅?漆盤)·채화칠우(彩畵漆盂)·채화칠협(彩畵漆?) 등이 훌륭하다. 그 외 순금제(純金製) 대구(帶鉤) 등 화려한 장식품들이 많이 출토되어 낙랑시대의 화려한 문화 생활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