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고대사회의 발전/고대국가의 형성과 문화/철기 문화의 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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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기 문화의 전래〔槪說〕[편집]

기원전 3

전 4세기경에 한족과 흉노족의 활발한 움직임에 따라서 한국에는 두 계통의 새로운 금속문화, 즉 스키타이 계통의 청동기문화와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출현한 철기문화가 전해졌다.이 새로운 문화는 연(燕)나라의 화폐인 ‘명도전(明刀錢)’의 유적 분포로 미루어 보아 만주에서 혼합, 압록강 중류를 거쳐 청천강과 대동강 유역으로 전래된 것 같다. 대동강 유역에 정착하여 일단 발전한 철기·청동기문화는 사방으로 번져 나갔으며, 재래의 무문토기 문화와 혼합, 일본에 전파되어 야요이 문화(彌生文化)를 이루었다.금속문화의 전래는 고조선 사회의 생활 모습을 크게 변화시켰다. 가옥으로는 움집에다가 난방(煖房)을 위하여 온돌 장치를 한 것이 나타나고 또 목조가옥도 등장하였다. 분묘의 축조도 달라져서 넓은 토광(土壙)에 시체를 묻는 토광묘(土壙墓)와 두 개 또는 세 개의 항아리를 맞붙여서 관으로 사용하는 옹관묘(甕棺墓)의 양식이 행해졌다. 또 토기로는 견고한 중국식 회도(灰陶)가 나타났다.농업도 크게 발달하였다. 이는 철추뿐 아니라 철리(鐵犁)·철겸(鐵鎌) 등의 농구가 발견되는 것으로 알 수가 있다. 이리하여 경제적인 생활이 청동기시대보다 훨씬 발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로 말미암아 증가된 부(富)는 사회 전체에 고루 퍼졌다기보다도 지배층에 의하여 더 많이 점유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농구(農具) 이외에 철검(鐵劍)·철모(鐵?) 및 세형(細形)의 동검(銅劍)·동모(銅?)·동과(銅戈) 등의 무기와 철비·동탁 등의 마구, 차형(車衡) 등의 차구(車具)가 발견되는데, 이러한 금속제품이 일부 지배층인 족장(族長)들만의 소유물이었을 것임은 분명하다. 또 뒷면에 특수한 기하학적 세선(細線)무늬가 있고, 두 개의 꼭지가 달려 있는 다뉴세문경(多?細文鏡)과 동물 모양의 대구(帶狗) 등이 있다. 이러한 철기들은 지배층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었다.유물과 각지에서 발견되는 용범(鎔范)이 뒷받침하는 바와 같이 이러한 새로운 금속문화는 고조선인들에게 수용되어 독특한 형식으로 변형·발전, 토착문화의 발달을 가져왔다.

토광묘[편집]

土壙墓

길이 3m, 넓이 1m 정도의 토광에 시체를 묻은 묘. 이 토광묘는 단장(單葬)하거나 부부(夫婦)를 합장하였으며, 동검·동모 및 철기 등이 함께 발견되었다. 평남 강서군 대성리, 황해도 운성리 등지에 분포되어 있다.

옹관묘[편집]

甕棺墓

금석병용시대의 분묘, 흙이나 돌 대신 큰 항아리 속에 시체를 넣어 만든 무덤이다. 부장품으로 화살촉, 도끼 등이 발견된다. 토기 하나를 사용한 것을 단식옹관, 두 개를 붙여서 사용한 것을 합구(合口)옹관이라 한다. 매장법으로는 옹관을 수직으로 세워놓은 수직관과 수평으로 관을 눕혀 놓은 수평장이 있다.낙랑유적(樂浪遺蹟)에서는 어린아이의 옹관이 발견되었으며, 남쪽에서는 경남의 동래(東萊)·양산(梁山)·김해(金海)의 선사시대 유적에서 발견되었고, 삼국시대로 보이는 옹관 유물이 전남 나주군 반남면에서 발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