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고대사회의 발전/고대국가의 형성과 문화/기원전 3 ~ 전 1세기경의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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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 ~ 전1세기경의 한국〔槪說〕[편집]

정치 형태나 사회 구조의 발달·변화는 어느 지역에서나 공통적으로 경제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신석기 시대까지 우리 나라의 경제 생활은 씨족공동체적인 채집 경제 활동과 원시적인 생산 활동이 행해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러한 단계에서는 힘에 의존한 지배나 통솔은 요청되지 않았고, 다만 지역적인 수확물이 교환될 때에 그 교섭을 위한 대표자적인 존재가 필요했을 뿐이다. 이러한 단계에서 북방으로부터 일차적 금속 문화가 들어왔다.이 일차적으로 전래된 금속 문화는 청동기 문화였다. 청동기 문화는 경제면에서는 그리 큰 영향을 주지 못했으나 정치면에는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무기의 재료가 석재(石材)에서 청동재(靑銅材)로 바뀌었고, 이 청동제(靑銅製) 무기는 곧 힘의 상징으로 등장하여 이를 소유한 자에 의해 여러 씨족 집단이 연결되는 새로운 움직임을 보여 주었다. 여기서 부족 국가가 성립하게 되었고, 나아가 몇 개의 부족 국가가 다시 연결되어 점차 부족 연맹체적인 구성을 보게 되었다. 고조선(古朝鮮)이 바로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등장한 부족 연맹체적인 정치 사회였다고 볼 수 있다.고조선은 기원전 3세기 후반에 왕을 칭한 것으로 중국에 알려졌는데, 이 왕은 화베이(華北) 지방에 세력을 펴고 있던 연(燕)과 경쟁하면서 만주와 한국 북방에 걸친 광대한 지역을 통솔하였던 고조선 부족 연맹체의 연맹장인 것이다. 조선의 영역에 대해서는 연장(燕將) 진개(秦開)가 조선을 공격하여 2천여 리를 취했다는 『위략(魏略)』의 기사로도 짐작할 수 있다.『한서(漢書) 조선전(朝鮮傳)』을 보면 위씨조선(衛氏朝鮮)이 멸망할 당시의 상황을 서술하면서 ‘조선상(朝鮮相)’, ‘이계상(尼谿相)’ 등의 명칭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이 곧 연맹체 내의 대표적인 부족장들인 것이다.고조선의 중심 지역은 이때의 유산인 지석묘(支石墓)의 분묘나 청동기의 출토(出土)로 보아 대동강 유역인 것으로 추측되며, 왕을 칭했다고 소개되었던 고조선의 부족이 여기에 위치하였던 것이다.일차적 부족연맹체 시대인 고조선의 생활상은 간략하나마 그 기록과 유물·유적으로 추측할 수 있다. 『한서(漢書)』에 조선의 법률은 (1)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2) 상해자는 곡물로 보상하며, (3) 도적한 자는 가족을 노예로 삼는다고 하였는데, 이 중 재산에 대한 엄격한 규정으로 보아, 아직 석기가 생산 도구인 당시의 사회였지만 재산은 노동력에 비례하여 상당히 축적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70톤에 달하는 거대한 바위를 옮겨 지석묘를 영조(營造)했던 것은 부족장들의 경제력과 노동력 동원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가족 구조는 이때의 주거지(址)인, 무문토기(無文土器)가 출토되는 수혈식(竪穴式)주거지의 규모나 형태로 짐작건대 2,3개의 핵가족(核家族)이 한 집에서 생활하는 중가족제(中家族制)에 이르렀던 것 같다.즉 조부·자(子)의 2,3대가 한 집에서 생활하는 형태가 일반적이었던 것이다. 일차 청동기 문화에 국한된 금속 문화로 형성되었던 정치권은 부족장들이 연합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지배권이라기보다는 통솔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기원전 2세기경부터는 이차적(二次的)으로 들어온 중국 계통의 청동기 문화와 철기 문화에 의해 사회 전반에 걸쳐 큰 변혁이 일어났다. 이 새로운 금속 문화의 파급은 한(漢)이 건국되어 고조선이 정복되고 4군(四郡)이 설치되면서 본격화하였다.철기 문화의 전래는 철제(鐵製) 농구(農具)의 제작을 가져와 생산면에 혁명을 일으키게 되었다. 여기서 과거와 같이 통솔자라고 하기에 족했던 부족장들이 연합하여서 이룩하던 연맹 정권의 성립은 오히려 어려워졌고, 경제력이 뒷받침하는 힘의 우열로 새로운 형태의 연맹체가 성립되었다. 이 연맹체는 보다 강력한 지배자의 성격을 띤 부족장들로 구성되었고, 이것은 점차 연맹장을 중심으로 집권화(集權化)하여 갔다. 이러한 새로운 연맹체는 철기의 일반화를 기다려 한의 지배 지역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지역에서 기원전 1세기경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북만주 방면의 부여(扶餘)와 압록강 유역의 고구려(高句麗)인 것이다.부여에서는 왕 밑에 마가(馬加)·우가(牛加)·저가(猪加)·구가(狗加)의 4가(四加)가 있었는데, 이들은 전국을 5등분하여 왕과 함께 각각 하나씩을 통치하였다. 즉 각 가(加)는 수천 가(家)를 거느리고 있던 대부족장으로서 왕(王) 부족과 함께 연맹체를 형성하였던 것이다.고구려도 이와 비슷한 형편이었다. 즉 계루부(桂婁部)·소노부(消奴部)·절노부(絶奴部)·순노부(順奴部)·관노부(灌奴部)의 5부족이 연맹하여 이 중 강대 부족이었던 소노부에서 왕이 선출되다가 뒤에 계루부가 왕위를 차지하면서 점차 집권 국가로 발전하였다. 이 두 연맹체는 초기에는 연맹장의 권한이 약하여 연맹장인 왕은 실정(失政)에 대한 책임을 지고 왕위를 물러나거나 혹은 사형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점차 집권화하면서 고구려는 기원 1세기 중엽의 6대 태조왕(太祖王)대에 이르러 1부족에 의한 지배권이 확립되고 왕권은 강화되었다.부여·고구려와 같은 발전 과정이 철기 문화의 파급으로 한강 이남 남한 전역에도 답습되었다. 즉 삼한(三韓)이라 하여 극히 형식적이던 연맹체 내에서 다시 백제(百濟)·신라(新羅)·가야(加耶)의 3개 연맹체가 나타났다. 백제는 기원 1세기경부터 5개 부족으로 구성되어 3세기 중엽에 가서 집권화가 이루어졌고, 신라는 6개 부족으로 구성되어 4세기말까지 연맹체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가야 연맹체도 6가야라 하여 6개 부족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가야는 집권화하지 못한 채 신라에 통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