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고대사회의 발전/고대국가의 형성과 문화/청동기 문화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청동기 문화〔槪說〕[편집]

한반도에 청동기시대가 존재한다는 것이 학술적으로 인정받게 된 것은 근자의 일이다. 그러므로 청동기시대에 관하여 그 간의 경위를 살펴볼 때 한국의 청동기시대 연구도 나름대로의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찍이 일본 학자들이 한국의 고고학을 연구하였을 때 한국에는 물론 청동기시대가 없었다고 보았으며, 뿐만 아니라 금속문화라는 것 자체도 한국에서는 독자적인 발전이 없이 중국으로부터의 영향이라고 일관하여 생각하였던 것이다. 1945년 이후 한국인에 의한 고고학 연구가 활발하여짐에 따라 한국에도 독자적인 청동기 문화가 존재한다는 것이 차츰 알려지게 되었고, 또한 각처에서 청동기 유물이 나타남으로써 물적 증거가 되기 시작하였다. 한때 한국의 청동기 유물은 북한(北韓) 지역에만 있다는 설도 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한반도 전역에서 청동기 유물이 출토(出土)되고 있어 모두 시정되었다. 현재 청동기 유물의 분포를 보면, 함경도에서부터 전라남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출토되고 있다.청동기가 출토되고 있는 묘제의 예를 몇 가지 들어보면, 토광묘(土壙墓)·지석묘(Dolmen)·석관묘(石棺墓) 등인데 이를 각각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토광묘의 경우 은파군 갈현리 하석동, 황주군 천주리 한밭골, 황주군 흑교리(黑橋里), 재령군 부덕리 수역동, 은율군 운성리, 황주군 선봉리, 경주 구정리(九政里) 등에서 세형동검 등이 철편(鐵片)들과 함께 출토되었다. 함경도에서도 흥남군 호상동, 홍원군 운포리, 영흥군 소라리, 성주군 대성리, 경성군 동관리, 신창군 세동리에서 청동유물이 나온 바 있다. 석관묘로는 강계군 어뢰면, 영덕군 사천리, 사리원 상매리, 서광군 천곡리에서 청동 유물이 출토되었다. 지석묘의 경우를 본다면, 양주군 사노리, 봉산군 어수구, 김해 무계리에서 청동유물을 얻고 있다. 이 외에도 대전시 괴정동과 전라남도 화순에서 청동제 유물이 나와 귀중한 학술적 가치를 던져 주고 있다.원래 청동기시대는 석기시대를 거치거나, 또 지역에 따라서는 석기와 공존하는 금석병용기(金石倂用器) 시대를 거친 뒤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인데, 한국의 청동기 유물은 석기와 함께 나오기도 하고, 독자적으로 순수하게 청동유물만 나오기도 하는가 하면, 일부에서는 철기와 함께 출토(出土)되기도 한다. 바로 이런 점이 청동기의 역사로 볼 때 가장 보편적인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지난날의 연구는 오히려 정도(正道)에서 벗어나 철기가 나오는 김해패총(金海貝塚)을 금석병용기라고 정의해 버리는 과오를 범했던 것이다.현재 청동기시대의 상한(上限) 문제는 학계에서 정론(定論)이 없는데 기원전 7세기, 기원전 10세기 등 대체로 두 설로 나누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청동기 유물이 중국적인 영향권이 아님을 볼 때, 다시 검토해야 할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한국의 석관묘는 그 분포가 남(南)시베리아·만주·한국 등지까지 넓게 퍼져 있는데, 시베리아의 석관묘는 기원전 8세기로 정해지고 있어 이 연대가 한국의 청동기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고 볼 수가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의 석관묘에서도 청동기 유물이 나오기 때문에 향후 한국의 청동기 문화가 반드시 기원전 8세기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그 연대가 더 올라갈 수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한국의 청동기로는 세형동검(細形銅劍)·다뉴세문경(多?細文鏡)·청동촉(靑銅鏃)·동모(銅?) 등이 있다. 특히 세형동검은 만주, 한국, 일본의 구주(九州), 소련의 연해주에까지 걸친 광대한 지역에서 출토되고 있다. 지난날 한국에서 나오는 마제석검(磨製石劍)은 동검의 모방품이라고 보았지만, 지금은 그러한 해석이 타당성을 잃고 있다.청동기와 함께 출토되는 토기는 주로 무문토기(無文土器)이다. 이 무문토기는 유문토기(有文土器)와는 달리 일반적으로 구릉(丘陵) 지대에서 출토되고 있지만, 때때로 청동기와도 함께 오고 있다. 또 대전 괴정동의 예에서 보는 것처럼 흑도(黑陶)가 청동기와 함께 출토되기도 한다. 특히 무문토기는 유문토기(또는 즐문토기)와 달리 밑이 편편한 것이 특징인데, 반월형석도(半月形石刀)가 나오는 경우 그것은 예외 없이 무문토기 유적이며, 유문토기와는 관계가 없다. 반월형석도는 중국 룽산문화(龍山文化)의특징인데, 우리의 경우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농경이 있었다는 증거로 삼을 수 있지만, 그것이 전파된 경로는 아직도 정확하지 않다.한국의 지석묘도 지난날에는 남방식(南方式)·북방식(北方式)으로 확연히 구별하였지만, 북에서도 남방식의 지석묘가 나타나고 있어 정확한 개념이라고는 할 수가 없다. 이 지석묘도 전파 경로가 불명(不明)인데, 중국의 동북지방에 많이 분포되고 있지만, 동북아시아에 있어서는 만주·한국과 일본의 구주 지방에 집중적으로 퍼져 있다. 그러므로 한국의 지석묘가 대륙으로부터의 전파인지, 해로(海路)로 들어온 것인지는 아직도 단언할 수가 없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지석묘의 연대는 상한(上限)이 기원전 8세기 이전에 시작되어 기원전 3

2세기까지 존속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청동기시대의 경제활동은 어로(漁撈)나 수렵, 그리고 채집과 같은 초보적 단계를 벗어나 최소한 식량을 자급자족하는 단계에 들어가 있었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반월도의 존재는 농경의 가능성을 증명하는 것이고, 거대한 지석묘를 조영(造營)할 수 있는 힘도 실은 양곡의 충족 위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뿐만 아니라 청동기라는 이기(利器)를 만든다는 것 자체가 벌써 신분제의 초기적 성립을 보여주기 때문에 자유자재의 양식 생산이 가능한 사회에서 청동기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이들 청동기를 만들 수 있는 사회적 바탕이 곧 고대국가를 세울 수 있는 힘과 조직의 근원이 된 것이다.

<金 貞 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