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근대사회의 태동/종교의 새 기운/양반정치의 파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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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정치의 파탄〔槪說〕[편집]

영조·정조와 같은 영주(英主)가 탕평책을 쓰고 있는 동안은 어느 정도 정치의 안정을 기할 수가 있었다. 영조 말년부터 정조 초년에는 정조를 보호한 공이 있는 홍국영이 도승지(都承旨)로 있으면서 정권을 농단하였으나, 오래 가지 않아 정권에서 배제되고 말았다.그러나 정조가 돌아가고 순조가 겨우 11세의 어린 몸으로 즉위하자 외척세력은 왕권을 완전히 압도하고, 이른바 세도정치라는 일종의 변태정치가 시작되었다. 즉 순조초에 정조의 유명(遺命)으로 안동 김씨인 김조순이 국구(國舅)로서 정치를 전담하다시피 하였는데, 이에 따라 그의 일족은 모두 영달하여 노론인 안동 김씨는 많은 영직(榮職)을 차지했다.이렇게 천하를 독점하던 안동 김씨의 전권 시대는 풍양 조씨라는 강적을 만나 일시 후퇴하였다. 그것은 익종(翼宗)의 비(妃)가 조만영의 딸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헌종 대에는 조씨 일문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어 조씨는 많은 현직(現職)을 역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철종이 즉위하면서 비가 김문근의 딸이었으므로 다시 세도가 안동 김씨에게로 돌아가게 되었다.이러한 형세였으므로 이씨의 왕조라고는 하지만 종실(宗室)이라 하더라도 김씨 일문의 세력에 억눌려 살아야만 했다. 하물며 김씨 아닌 다른 양반들의 세력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따라서 정치 기강이 극도로 문란해져서 유교적인 관료 정치라는 것도 하나의 허구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이제 양반들 사이의 세력 투쟁 시대로부터 척족에 의한 정권 농단 시대로 변화한 것이다.왕실의 외척에 의한 정권의 독차지는 필연코 그 척족 일문에 의하여 고관 현직이 독점되다시피 되어 정치 기강을 더욱 문란하게 한 것이다. 그로 말미암은 피해는 농민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많은 뇌물을 바치고 관직을 얻은 관리들은 그 대가를 농민에게서 염출해야 했기 때문이다.당시의 재정으로서 가장 중요했던 전정(田政)·군정(軍政)·환곡(還穀)의 3정은 이리하여 날로 문란해갔다. 전정에서는 삼수미·대동미·결작·도결 등의 폐해가 극심했고, 군정에서는 황구첨정·백골징포·족징·인징 등의 각종 협잡이 생겨 농민을 괴롭혔다. 환곡 또한 일종의 고리대기관으로 변하였을 뿐만 아니라 반작·허류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농민을 괴롭혔다.이러한 지방행정의 문란은 농민에게 과중한 부담이 되었을 뿐 아니라, 국가의 재정까지를 위협하였다. 그리하여 도처에서 민란이 발생하게 되었다. 여기에 덧붙여 각 방면에 걸친 경제적 성장은 조선 양반사회의 신분체제에 큰 변화를 불러왔다.

세도정치[편집]

勢道政治

조선시대 왕의 신임과 직접적인 위임(委任)을 받아 정권을 잡고 나라를 다스리던 일. 세도정치는 그 형태에 있어서 정조 이전과 이후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정조 때 홍국영(洪國榮)이 세도정치를 하기 전의 세도(世道)는 단순한 정치권력보다는 어떤 지도이념과 공정한 언론을 주체로 하여 세도인심(世道人心)을 바로잡으려는 사상적·도의적인 일면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런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훌륭한 인격과 뛰어난 학식이나 덕망을 가져야만 되었고, 따라서 왕도 높은 관직을 주어 우대하였다. 예를 들면 중종 때의 조광조(趙光祖)는 교학(敎學)의 최고직인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를 거쳐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며, 효종·헌종 때의 송시열(宋時烈)은 예조참판에서 신임을 받기 시작하여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뒤에 우의정·좌의정 등의 요직(要職)에 있으면서 세도의 신임과 위임을 받았다. 그러나 정조 때에 이르러서는 치세(治世)의 도리를 주장하여 정신적으로 왕을 보좌하기보다는 실지로 정치권력의 행사를 위임받아 권세를 부리는 정치형태로 변질되면서 일반적으로 종전의세도 대신 세도(世道)라고 흔히 일컫게 되었다.즉 정조 때의 홍국영은 정조가 세손(世孫)으로 있을 때 정후겸(鄭厚謙)·홍인한(洪麟漢) 등의 위협에서 그를 보호하여 무사히 왕위에 오를 수 있게 한 공으로 도승지(道僧旨) 겸 금위대장(禁衛大將)에 임명되어 왕의 신변보호를 맡는 한편 모든 정사도 그를 거쳐 상주(上奏)하고 결재하는 권한을 위임받았다. 그래서 요즘 흔히 쓰이는 뜻으로서의 세도정치는 홍국영에서 시작된다. 홍국영 이후 세도정치의 특색은 대개 척신(戚臣)으로서 왕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면 관직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지명되었으며, 치세의 도리보다는 상하의 민정과 신임의 동향을 조사 보고하고 인사행정에까지 직접 참여하여 권력의 남용을 초래함으로써 외척(外戚)의 발호를 보게 된 데 있다.홍국영의 세도는 그의 부정과 부패 때문에 1780년(정조 4)에 추방당하고 말았지만 정조가 죽고 순조가 불과 12세에 즉위하게 되자, 전왕의 유탁(遺託)을 받아 김조순(金祖淳)이 정권을 잡게 되고, 이듬해에 그의 딸로서 왕비를 삼으면서부터 외척 안동 김씨에 의한 세도정치의 기틀이 잡히게 되어서 중앙의 요직은 그의 일족(一族)에 의해 모조리 독점되었다. 그 뒤 익종(翼宗)의 비(妃)로서 조만영(趙萬永)의 딸이 들어서면서 헌종 때에는 잠깐 풍양 조씨(豊壤趙氏)에 의해 세도가 성립되기도 하였으나, 철종이 즉위하고는 그 비(妃)가 김문근(金汶根)의 딸이었으므로 다시 안동 김씨가 세도를 잡게 되었다. 비록 왕족이라 하더라도 김씨의 세도에 억눌려 살아야 되었으니, 가령 왕족인 이하전(李夏銓)이 과거(科擧) 시험장에서 김씨의 자제(子弟)와 싸워 패하고는 뒤에 죽음을 당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온갖 협잡이 성행하여 정치의 기강(紀綱)은 문란해지고 민생(民生)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정권을 잡고 안동 김씨의 세력을 꺽어, 한때 독재적인 세도정치를 이룩하여 외척에 의한 세도정치의 폐단이 없어지는 듯 하였으나 얼마 뒤에 민비(閔妃)에게 축출되고부터는 다시 한말까지 민씨 일족에 의한 외척의 세도정치가 그대로 계속되어, 1895년(고종 32) 민비가 살해된 뒤에도 국가의 요직을 차지한 민씨가 1천 명을 넘었다고 한다.

안동 김씨[편집]

安東金氏

조선 후기 순조·헌종·철종의 3대에 걸친 왕의 외척으로서 조정의 요직을 독차지하고 세도정치를 행한 안동 김씨의 일가. 정조 때 홍국영이 세도정치를 행한 이래 역대 제왕은 나이가 어려 세도정치가 더욱 본격화되었다. 순조가 11살에 즉위하자 김조순(金祖純)이 자기 딸을 왕비로 삼아 외척으로 정권을 장악하게 되어 많은 안동 김씨 일파가 요직에 앉았는데, 순조 27년(1827) 세자가 정치를 대리하니 풍양 조씨(豊壤趙氏) 일파가 정권을 장악하여 헌종 대를 통해 조씨 일문에게 정권을 빼앗긴 셈이었다. 철종이 즉위하여 김문근(金汶根)의 딸이 왕비가 되자 김씨는 또다시 정권을 잡게 되어 김좌근(金左根)·김재근(金在根)·김병익(金炳翼)·김수근(金洙根)·김병국(金炳國) 등이 국정을 좌우하는 중심 인물이 됨으로써 김씨의 세력은 가히 절정에 달했는데, 대원군의 등장으로 김씨 세력은 몰락을 면치 못했다.

풍양 조씨[편집]

豊壤趙氏

조선 후기 헌종 대를 통해 왕의 외척으로서 정권을 잡아 세도정치를 행한 풍양 조씨의 일문(一門). 순조 27년(1827)에 왕세자(翼宗)가 부왕의 신병요양으로 인하여 정치를 대리하게 되자 조만영(趙萬永)의 딸을 비(妃)로 삼아 조씨 일파는 김씨 일파와 세력다툼을 벌여 한동안 세도를 잡았으나 그들간의 불화 반목으로 세도가 무너지게 되었고, 철종 즉위와 함께 안동 김씨에게 세력을 빼앗기고 말았다.

김조순[편집]

金祖純 (1765

1831)

조선 순조 때의 문신으로 자는 사원(士源), 호는 풍고(楓皐), 본관은 안동, 영의정 창집(昌集)의 4대손. 정조 9년(1785) 문과(文科)에 급제, 벼슬이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다. 순조의 국구(國舅)가 되어서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封)해졌으며,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기초를 마련했다.

김문근[편집]

金汶根 (1801

1863)

조선 왕조 철종의 장인. 자는 노부(魯夫), 시호는 충순(忠純), 본관은 안동, 이조판서 수근(洙根)의 아우. 음보(蔭補)로 가감역(假監役)이 된 뒤 현감(縣監)을 역임했다. 이어 그의 딸이 왕비로 책봉되자 국구(國舅)로서 임금을 보필하여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이 되고 영돈영부사(領敦寧府事)에 이르렀다. 이 때 안동 김씨 세력은 조야에 크게 떨쳤다.

조만영[편집]

趙萬永 (1776

1846)

조선의 정치가. 자는 윤경(胤卿), 호는 석애(石崖), 시호는 충경(忠景). 본관은 풍양(豊壤). 진관(鎭寬)의 아들. 1713년(순조 13) 능원량(陵園郞)의 문과(文科)에 급제, 검열(檢閱)이 된 뒤, 지평(持平)·겸문학(兼文學) 등을 역임하고, 1816년 전라도 암행어사로 나갔다. 1819년 부사직(副司直)으로 있을 때 딸이 세자빈(世子嬪:純祖의 長男인 追尊王 翼宗妃)이 되자, 풍은 부원군(豊恩府院君)에 봉해지고 이후 그 일파인 풍양 조씨가 정계에 등장, 그 중추적 인물로서 안동

김씨(安東金氏)와 세도를 다투게 되었다. 이듬해 이조 참의가 되고 1821년 금위대장(禁衛大將), 이어 이조·호조·예조·형조의 판서와 한성부 판윤, 판의금 부사(判義禁府事) 등 요직을 역임, 1845년 궤장(机杖)을 하사받고 영돈령 부사(領敦寧府事)가 되었다. 특히 글씨를 잘 썼다. 영의정에 추증(追增)되었다.

삼정의 문란[편집]

三政-紊亂

조선시대 국가 재정의 3대 요소인 전정(田政)·군정(軍政)·환곡(還穀:정부 보유 미곡의 대여제도)의 문란을 말한다. 우선 전정의 문란은 임진왜란의 참화로 말미암아 더욱 심해졌다. 전란으로 많은 땅이 황폐해진 데다가 궁방전(宮房田)·둔전(屯田) 등 면세지(免稅地)와 양반·토호(土豪)들이 조작한 은결(隱結:대장에 오르지 않은 땅)의 증가는 국고(國庫) 수입을 격감시켜 결과적으로는 무력한 농민들의 부담만 과중하게 만들었다. 농민은 땅 1결(結)에 전세(田稅) 4말(斗)에다가 삼수미(三手未) 2말 2되, 대동미(大同米) 12말, 결작(結作) 2말을 내야 되었는데, 그 위에 또 여러 가지 명목의 부가세(附加稅)와 수수료(手數料)를 바쳐야 했다. 뿐만 아니라 관리들은 황폐해서 못 쓰는 땅에도 세금을 부과하고 심지어는 백지징세(白地徵稅)라 하여 공지(空地)에 세금을 부과하는 일도 있었다.다음으로 군정은 장정이 직접 병역을 치르는 대신 군포(軍布)를 내던 것을 말하는데, 영조가 이를 반감(半減)하여 장정 1명에 포(布) 1필로 정하고 어염세(魚鹽稅)·선박세(船舶稅)·은결의 결전(結錢) 등으로 부족액을 보충하기로 하였다.그러나 원래 양반·아전·관노(官奴)는 병역이 면제된 데다가 정치 기강이 문란해지자 일부 농민들도 세력가에게 매달려 군역을 기피하는 반면에 무력한 농민을 대상으로 황구첨정(黃口簽丁:어린애를 어른과 같이 취급하여 세금을 부과하는 일)·백골징포(白骨徵布:죽은 사람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일) 등의 협잡이 성행하여 전보다도 더 심한 고통을 받았다. 끝으로 환곡은 본래 가난한 농민에게 정부의 미곡(米穀)을 꾸어 주었다가 추수기에 이식(利息)을 붙여 회수하는 것으로, 빈민의 구제가 목적이었던 것이 후기에는 고리대(高利貸)로 변하여 그 폐단이 삼정 가운데서 가장 심하였다.지방관들은 그들대로 사리사욕에만 눈이 어두워 아전들의 부정부패를 막을 도리가 없었다. 또 봉급을 받지 못한 아전들은 그들대로 자연히 농민들을 착취하고, 나아가서는 공금(公金)이나 관곡(官穀) 등을 횡령하는 등, 온갖 협잡을 하였다. 중앙에서는 암행어사(暗行御史)를 수시로 보내서 지방관들의 부정행위를 조사·보고하도록 하였으나 고질화된 악습을 제거할 수는 없었다. 철종(哲宗) 때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 민란(民亂)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삼수미[편집]

三手米

조선시대의 특별 지세(地稅). 임진왜란 때 정부는 훈련도감을 설치, 포수(砲手)·사수(射手)·살수(殺手)의 세 가지 병종으로 된 특수부대를 편성하였다. 이 3수군(三手軍)의 경비에 충당하기 위하여 처음에는 둔전(屯田)을 두었으나 부족하여 선조 35년(1602) 경상·전라·충청·강원·황해·경기의 6도에 1결(結)에 1말(斗)의 특별세를 부과하였다가 세액을 또 1말 2되로 증액하였는데, 이를 삼수미 또는 삼수량(三手糧)이라고 하며, 갑오개혁 때까지 이 제도는 계속되었다.

도결[편집]

都結

조선 후기에 들어서 지방의 이서(吏胥)가 공금이나 군포를 사용(私用)하고서 이를 미봉하기 위하여 결세(結稅)를 정액 이상으로 남징(濫徵)·과징(過徵)하던 것을 말한다.

백지징세[편집]

白地徵稅

조선 중기 이후 관리의 농민착취 현상이 빚어낸 위법징세의 일종. 실제로는 전혀 토지가 없는데 가전적(假田籍)을 만들어 징세하거나 세(稅)를 부과할 수 없는 황폐한 진전(陳田)에 대해서 납세하는 경우를 두고 말한 것이다.

황구첨정[편집]

黃口簽丁

조선 후기 군정(軍政)의 폐단 가운데 하나. 철종 때에 이르러 삼정의 문란이 극도에 달하자 이는 곧 사회경제적인 심각한 위기를 조성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전지(田地)에 대한 과다한 부세(賦稅)조차 감당하기 어려웠던 농민으로서는 또다시 군포의 부담까지 져야 했으므로 그들은 유망(流亡) 또는 도망으로 자구책(自求策)을 찾게 되었으며, 세포(稅布)의 징수에 대한 책임을 진 지방장관은 책임을 다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그리하여 그들은 부족액을 보충하기 위하여 유아에 대해서까지 세포 징수의 대상자로 간주하였다. 이를 황구첨정이라 하며, 이와 같이 진행된 군정의 이면에는 극도의 부패상이 도사리고 있었다.

반작[편집]

反作

조선 후기의 환곡 출납 관계에 대한 허위 보고서. 환곡은 원래 빈민구제를 목적으로 실시된 대여곡(貸與穀) 제도였으나 철종 때 세정(稅政)이 극도로 문란하게 되어 환곡은 고리대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겨울철 회수기와 봄의 반배기(頒配期)에 각 지방의 수령은 이서(吏胥)들과 결탁, 대여곡을 회수 또는 반배한 것처럼 허위문서를 작성하고 그 양곡에 대하여 쌀 매섬당(每石當) 전(錢) 1냥(兩)씩을 징수하여 착복한 것이다.

허류[편집]

虛留

조선 말 환곡의 폐단 가운데 하나. 전임(前任) 관리나 지방의 아전이 결탁하여 창고에 있는 양곡을 횡령·착복하고 장부상으로는 실제로 있는 것처럼 거짓으로 기재하여 후임 관리에게 인계하는 것을 말한다. 국법에는 이러한 경우 엄격한 처벌을 받도록 규정되어 있으나 허위문서의 작성자와 인수자가 서로 공모하여 은폐시켜서 환곡의 폐단은 국가재정의 궁핍화를 가속화시켰다.

백골징포[편집]

白骨徵布

조선 후기 수취체제 문란이 가열됨에 따라 야기된 군정상의 폐단. 철종 때에 이르러 국가의 재정적 기반이었던 삼정이 정치기강의 문란과 서로 인(因)과 과(果)가 되어 극도로 문란해져서 농민들은 이중 삼중의 과중한 부담에 허덕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농민들은 유망민(流亡民) 또는 도망민으로 변하였고, 한 지방의 군적(軍籍)은 하나의 허부(虛簿)와 다름이 없어서 관청의 호적 기록상 정남(丁男)의 수는 실제보다 훨씬 많아졌다. 호구(戶口)의 증가와 정남수의 확보로 국가재정을 담당해야 했던 지방의 수령들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한 방법의 하나로 심지어는 사망자에 대해서까지 세포(稅布) 징수를 하는 악랄한 수법을 부렸는데 이것을 백골징포라 한다.

족징[편집]

族徵

조선 후기 군정의 폐단으로 인한 독소조항의 하나. 삼정(三政)의 문란(紊亂)으로 인하여 호적이 사실상의 허부(虛簿)나 마찬가지가 되고 과세 대상의 출입이 무상하였음에도 지방 수령들은 이러한 토지대장과 호적에 준하여 과세의 강제징수에 온갖 수단을 다 부렸다. 또한 국법에 사족(士族)·이서(吏胥)·공노(公奴)에게는 군역(軍役)을 면하기 때문에 농민의 부담은 더욱 커지게 되고 이것을 면하기 위해 권세가는 관아에 청탁하는 자가 많아지게 되었다. 이것을 보충하기 위해 도망자·사망자·행방불명자의 체납분을 친족에 강제 징수하기도 했다. 이로써 농촌은 더욱 황폐해졌다.

인징[편집]

隣徵

조선 후기에 군포를 징수할 때 부정한 수단의 하나. 군포 부담자가 관리와 결탁하여 면제를 받으면 결국 약한 농민에게로 부담이 전가되었으며, 이러한 부담을 짊어진 농민은 이중의 질곡 속에서 결국 토지나 주거를 버리고 달아나게 되었다. 이러한 도망자와 사망자 및 유망자의 체납분을 이웃 사람에게 대납토록 하여, 지방의 수령이나 관리들은 그들의 의무를 벗고 또 수탈하는 수단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