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민족의 독립운동/신문화운동과 3·1운동/신문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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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화운동〔槪說〕[편집]

3·1운동 이후 일제는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에로 식민정책을 전환하였다. 이에 따라 민족항쟁으로서의 문화운동이 이 시기 민족운동에 하나의 지표로 등장하였다.이러한 문화운동은 먼저 언론·출판 분야에 새로운 활력이 되어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대일보』 등 일간 신문이 발간되고 한편으로는 『개벽』 『신천지』 『조선지광』 등 잡지도 발행되었다. 이들 일간지나 잡지들은 모두 민족의 여론과 시대적 요구를 대변하는 것으로서 마치 민족의 지표나 목탁과도 같은 구실을 했던 것이다.언론운동과 함께 이 시기 문화운동의 또다른 양상은 국어학·국사학 연구를 주로 한 학술운동 및 새로운 문학운동과 연극·영화 등을 중심으로 한 음악·미술 등 예술활동의 발흥·전개이다. 이 학술 및 예술운동은 어느 것이나 강렬한 민족의식이 뒷받침되어 있었다.국어학과 국사학은 국학의 근간으로서 민족문화의 주체의식과 민족문화 전통의 자각적 긍지 및 발양에 노력했고, 문학·연극·음악·미술 등의 예술은 종래의 계몽주의적 구태를 벗고, 본격예술에의 전환을 기한 동시에 그 운동의 저류에는 강렬한 민족의식이 흐르고 있었다.문학은 최남선·이광수 등의 신문학운동에 이어 『창조』 『폐허』 『백조』 등의 잡지가 잇달아 나타났다. 토월회의 신극운동, 나운규 등의 영화운동, 홍난파 등의 음악운동은 연극·영화·음악의 새로운 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민중의 마음 속에 깊은 감동을 주었다.민족정신의 함양과 실력양성에는 교육보다 더 가깝고 중요한 것이 없었다. 언론 문화운동이 표면적 반항이라면 이 교육운동은 이면적 반항으로 점진적인 기초를 닦아가고 있었다.그러므로 3·1운동 후 급격하게 고조된 교육열은 개화운동 직후에 있었던 신교육열에 비하여 오히려 능가하였던 것이다. 당시의 관(官)·공(公) 사립학교는 수용력이 부족하여 이를 보충하기 위한 사설 학술강습회·야학회 설치운동이 일어났다.또 이러한 교육열의 고조는 고학생회의 세력을 강화시키게 되고, 이 경향은 다음 시기의 사회주의 운동에 세력을 더하였다. 당시의 교육운동은 철저한 한국인 본위의 교육을 고창했다.이러한 정신과 동향은 경세제국대학 창설이 확정되자 한국인 교육은 한국인 스스로의 손으로 해야 한다는 여론을 일으켰고, 민립대학(民立大學) 창설의 필요를 외침으로써 1922년 11월 조선민립대학기성회가 조직되었으며, 이후 이 운동은 일시 전국을 풍미하였다.

문화통치[편집]

文化統治

3·1운동으로 우리 민족의 강인한 독립의지를 알게 된 일제는 ‘문화의 창달과 민력의 충실’을 시정방침으로 하는 이른바 ‘문화통치’를 내걸었다. 무단통치(武斷統治)에서 유화적인 문화통치(文化統治)로 바뀌면서 몇 가지 개량적인 조치가 취해졌다.헌병경찰제를 보통경찰제로 바꾸고, 관리나 교원의 제복과 칼차기를 폐지하였으며, 언론·출판·집회·결사를 제한적으로 허용하였다.그리고 의회를 설립하여 참정권을 부여한다는 명목 아래 지방행정기관인 도·부·면에 협의회(協議會)를 설치하여 친일인사들을 위원으로 임명하였다.그러나 일제의 문화통치는 우리 민족을 기만하면서 민족분열을 부추기기 위한 고도의 술책에 지나지 않았다. 총독을 무관에서 문관으로 바꾼다는 약속은 애당초 지켜지지 않았다.3·1운동 이후 새로 총독으로 온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이하 6명의 총독은 모두 육·해군 대장이었다. 헌병경찰을 보통경찰로 바꾸면서 전국의 경찰관서와 경찰관을 3배 이상 늘리고, 부와 군마다 한 개의 경찰서, 면마다 한 개의 주재소(駐在所, 오늘날의 파출소)를 설치하여 거미줄 같은 탄압망을 짜놓았다.언론·집회·결사의 자유 허용도 허위와 기만에 가득찬 것이었다.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1925)이라는 것을 만들어 자기들의 비위에 거슬리는 언론·집회·결사를 검거·탄압하였기 때문이다.『동아일보』(1920), 『조선일보』(1920), 『시대일보』(1924)와 같은 우리말 신문의 창간이 허용되었으나, 심한 검열을 받아 삭제·압수·벌금·정간 등의 사건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결국 언론을 허용하는 척하면서 친일언론으로 길들이기 위함이었다. 결사나 집회의 허용도 친일단체를 조직하는 데 이용되었다.대동사문회(大東斯文會)·유교진흥회·조선불교무원·상무당·조선경제회 등의 친일단체를 만들어 자산가·유학자·종교인들을 포섭하였고, 노동자·농민·학생, 그리고 사회주의 단체의 조직과 집회는 가차없이 탄압하였다.국외에도 탄압은 역시 혹독하였다. 만주에서는 독립군에 대한 보복으로 1920년 이른바 혼춘사건을 조작하여 1만여 명의 북간도교민들을 학살하였고, 일본에서는 1923년의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 때 한국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고 허위선전하여 자경단(自驚團)으로 하여금 도쿄와 인근지역에 살던 7천여 명의 교민을 참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를 ‘관동대학살’이라고 한다.일제는 한국인의 독립정신을 말살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한국인의 자존심을 부추기고 있는 역사의식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였다.특히 박은식(朴殷植)이 쓴 『한국통사(韓國痛史)』(1915)가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널리 읽히는 것에 충격을 받아 대대적인 역사왜곡작업에 나서기 시작하였다.1915년에 중추원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역사를 왜곡하는 편찬사업을 시작하다가 3·1운동 이후 이를 확대하여 1922년 총독부 산하에 조선사편찬위원회(1925년 朝鮮史編修會로 개편)를 설치하고 일본인 어용학자와 일부 한국인 역사가를 참여시켜 35권의 방대한 자료집 『조선사』를 간행하였다.이 사업은 원래 10개년으로 계획되었으나 차질이 생겨 1937년에 완성되었다.또한 한국인의 교육열을 무마하기 위해 이른바 신교육령(新敎育令, 1922)을 발표하고 일본인과 한국인을 동등하게 교육시킨다고 표방하였다.그리하여 최초의 대학기관으로서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 1924)을 설치하고 전체 학생의 약 1/3 정도를 한국인에 할당하였다. 그리고 초등교육과 실업교육을 약간 강화하였지만, 한국인 학령아동의 약 18%만이 취학하는 데 그쳤다. 그나마 민족교육은 제외되고 일본문화에 동화시키는 교육만이 시행되었다. 그리하여 일제시대 때 교육받은 인사들이 독립운동에 기여하는 측면은 적을 수밖에 없었다.

실력양성운동[편집]

實力養成運動

3·1운동 후 일제가 소위 문화통치를 내걸고 고등적인 기만술책으로 우리민족을 회유·동화하고 나서자 국내의 우익세력들은 한말의 실력양성 우선운동을 계승하여 일제와 타협하면서 실력을 양성하자는 부류와, 일제에 대한 타협을 거부하면서 적극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는 두 부류로 나뉘어졌다.실력양성론자들은 민족개조론(民族改造論)과 자치론(自治論)을 들고 나와 우리 민족의 좋지 않은 민족성을 개조하여 민족산업을 키우고 근대 서구적인 시민으로 다시 태어나야 할 것을 역설하고, 나아가 지방행정에 적극 참여할 것을 주장하고 나섰다. 대표적인 지식인은 일본유학생인 최남선(崔南善)과 김성수(金性洙)·이광수(李光洙) 등이었다.최남선은 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하는 한편,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1925, 1927)을 써서 한국과 일본을 동질적인 종교문화권으로 설정하여 뒷날 일본의 신사정책(神社政策)을 찬동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는 또 「역사를 통하여 본 조선인」(1928)이라는 글에서 우리의 국민성은 사대주의·타율성·조직력 부족·형식병·낙천성 등의 나쁜 점이 있다고 지적하고, 우리 국민은 불구미성자(不具未成者)임을 자각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이광수도 1922년에 쓴 「민족개조론」에서 우리 민족성의 결점은 허위·비사회성·이기심·나태·무신(無信)이 있음을 지적하고, 무실역행(務實力行)으로 산업발전과 교육진흥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1924년 「민족적 경륜」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자치론을 지지하고 나섰다.민족개조론은 서구적 가치관을 주입하는 효과는 있었지만, 민족과 역사에 대한 허무주의를 조장하여 독립운동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실력 양성론자들은 실력 양성의 구체적 방법으로 언론을 통한 국민계몽과 문맹퇴치운동, 민립대학(民立大學) 설립운동, 그리고 물산장려운동 등을 추진하였다.특히 고등교육기관으로서 대학을 설립해야 한다는 취지 아래 한규설(韓圭卨)·이상재(李相在) 등 91명은 1923년 ‘민립대학 설립 기성회’(1903. 3. 30)를 조직하고, 대학 설립을 위한 모금운동에 나섰다.그러나 이 운동은 일제의 방해와 모금의 부족 등으로 실패하고, 이에 당황한 일제는 관립대학인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을 설립하여(1924) 극소수의 한국인을 입학시킴으로써 한국인의 고등교육열을 무마하였다.물산장려운동은 한말의 국채보상운동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서, 1920년에 조만식(曺晩植) 등이 평양에서 조직한 평양물산장려회를 시초로 하여 1923년 서울에서 조직된 조선물산장려회가 중심이 되어 자급자족·국산품애용·소비절약·금주·금연 등의 운동을 전개하였다.“조선인이 만든 것을 입고, 먹고, 쓰자”는 구호 아래 민족자본의 육성을 위해 전개된 이 운동은 전국 각지로 퍼지면서 큰 반응을 일으켰으나, 민족산업이 워낙 미약한 상황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김성수 등이 경성방직(京城紡織)을 설립한 것도 실력양성운동의 일환이었다.한편,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은 대부분 국외로 망명하였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세력이 크지 못하였다. 그러나 일부 국학자와 종교인들은 민족문화를 강력하게 옹호하면서 항일독립정신을 고취시키고 있었다.주시경의 제자인 장지영(張志暎)·김윤경(金允經) 등은 한말의 국문연구소의 후신으로서 조선어연구회(1921)를 조직하여 우리말을 연구하고 보급하는 데 힘을 쏟았으며, 이 운동은 나중에 조선어학회(1931)로 연결되어 국내에서 가장 강력한 항일문화운동으로 발전하였다.역사학자로서 강렬한 항일운동을 전개한 이는 단재 신채호와 백암 박은식이었다.신채호는 중국에 망명생활을 하면서 『조선사』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사연구초』 등을 집필하여 『조선일보』 『동아일보』에 연재함으로써 우리나라 고대사연구를 개척하고, 민족정기를 선양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의 영향을 받아 1930년대에는 정인보(鄭寅普)·안재홍(安在鴻) 등이 이른바 ‘조선학’운동을 전개하여 한국학의 뿌리를 내렸다.1915년에 『한국통사(韓國痛史)』를 써서 일본인을 놀라게 했던 박은식은 1920년에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써서 그때까지의 피나는 독립운동의 역사를 정리하였다. 앞의 책에서는 국혼(國魂)을 강조한 반면에, 나중의 책에서는 전세계 민중의 힘에 의해서 일본이 패망할 것을 예견하였다.종교 분야에서는 한말에 『불교유신론』을 썼던 한용운이 조선불교유신회(1921)를 만들어 일제의 사찰령(1911)에 반대하여 투쟁하였으며, 일제가 조선불교중앙교무원(1925)을 설치하여 불교계를 장악하자 이에 맞서 卍당을 결성(1930)하여 투쟁하였다.또 그는 「님의 침묵」(1926)이라는 시를 써서 조국에 대한 사랑과 독립에 대한 열망을 노래하였다. 1910년대에 가장 강경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던 대종교는 일제의 탄압으로 1915년 교주 나철(羅喆)이 구월산의 삼성사에서 자결하였으며, 그 뒤를 이어 김교헌(金敎獻)·윤세복(尹世復)이 차례로 교주가 되면서 점차 순수한 종교운동으로 방향을 바꾸어 갔다. 그러나 일제는 대종교를 위험한 종교로 계속 탄압하여 결국 1930년대에 문을 닫고 말았다.

『시대일보』[편집]

時代日報

1924년 3월 31일 최남선이 주간하던 『동명(東明)』을 개제(改題) 발간한 일간 신문 중의 하나로 발행부수가 2만을 넘었다. 국한문 혼용 4면으로, 다른 신문과 달리 1면을 정치면이 아닌 사회면으로 꾸미고, 1면 머리에는 ‘오늘일 래일일’이라는 시평난을 두어 특색을 살렸다. 이와 같은 신선한 편집으로 독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켜 1920년대 조선일보, 동아일보와 더불어 3대 민간지가 되었으나 1926년 재정난으로 중외일보(中外日報)에 흡수되었다.

『동아일보』[편집]

東亞日報

1920년 4월 김성수·박영효 등 애국지사 77인의 발기로 창간된 일간지. 1920년 4월 1일 이상협 명의로 허가된 동아일보는 조선민중의 표현기관, 민주주의 지지, 문화주의 제창 등 3개 사시(社是)를 내걸고, 자주독립 정신의 앙양과 민족계몽에 이바지하는 한편 일제 규탄의 선봉에 섰다.이리하여 1940년 8월 10일자로 강제 폐간되는 등 전후 20여 년 간에 5차의 정간 처분과 2천 회 이상의 발매금지, 신문 압수 489회, 판매금지 63회, 삭제 2,423회의 탄압을 받았다. 광복 후 송진우 사장이 중간(重刊)하여 반공·반탁·민주주의 수호운동을 하였다.

『조선일보』[편집]

朝鮮日報

1920년 3월에 창간된 일간지. 이 신문은 당시 대정실업 친목회를 배경으로 재계(財界)의 거두(巨頭) 조진태가 사장이 되어 실업신문을 표방하고 나선 일간지로서 수차례 정간 및 발행정지처분을 받은 바 있으며, 1932년 판권자 소동이 일어나자 방응모가 사장에 취임, 경영을 확고히 했다. 『조광』을 비롯하여 『소년』 『신여성』 등의 월간잡지를 통한 문화운동을 전개하다가, 1940년 8월 일제의 문화말살 정책으로 『동아일보』와 함께 강제 폐간되었다.광복이 되자 11월 23일 복간되었으며, 6·25전쟁 때 방응모는 납북되었다.

『개벽』[편집]

開闢

1920년 5월 천도교를 배경으로 발행된 잡지. 3·1운동 이후 일제의 소위 문화정치에 의해 잡지 발행이 가능해졌다.당시의 잡지 중에서 이 『개벽』지는 가장 많은 탄압을 받았으나 1926년 8월 통권 72호로 발행 정지를 당할 때까지 꾸준히 신문화운동의 중추적인 역할을 다했다. 당시 문예면은 계급주의적 경향 문학의 대표인 박영희·김기진 등이 담당했다.

조선어학회[편집]

朝鮮語學會

1921년 3월 한글 연구를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 처음의 명칭은 ‘조선어연구회’로서 당시 회원은 장지영·김윤경·최현배·권덕규 등 15

16명이었다. 이들은 동호인들을 규합한 후 학회활동으로 연구발표회를 가지는 한편, 1927년에는 기관지 『한글』을 발간했다. 1931년에는 학회의 이름을 ‘조선어학회’로 고쳤고, 1933년에는 한글맞춤법통일안·외래어표기법을 제정하고 우리말사전을 편찬했다. 1942년부터 회원들이 여러 차례 독립운동죄로 검거되니 이것이 유명한 조선어학회사건이다. 8·15 광복과 더불어 부활되어 한글학회로 개칭, 오늘에 이르렀다.

조선어학회사건[편집]

朝鮮語學會事件

일본어 사용과 국어 말살을 꾀하던 일제가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의 회원을 죄로 몰아 검거 투옥한 사건. 일본은 1939년 4월부터 학교의 국어 과목을 전폐하고 각 신문·잡지를 점차 폐간하였다.1941년 12월 하와이의 진주만(眞珠灣)을 습격하여 제2차 세계대전에 뛰어든 일본은 내부의 반항을 염려하여, 1942년 10월에 조선어학회에도 총검거의 손을 대었다.처음에는 정태진을 <함흥 학생 사건>의 증인으로 불러가더니, 10월 1일에 이윤재(李允宰)·최현배(崔鉉培)·이희승(李熙昇)·정인승(鄭寅承)·김윤경(金允經)·권승욱(權承昱)·장지영(張志暎)·한징(韓澄)·이중화·이석린(李錫麟)·이고루, 21일에는 이강래·김선기(金善琪)·이병기(李秉岐)·이야자·정백수·김법린(金法麟)·이우식, 23일에는 윤병호·서승효·김양수·장현식·이인(李仁)·이은상(李殷相)·정인섭(鄭寅燮)·안재홍(安在鴻) 등을 검거하였다.이듬해 3월 초에는 김도연(金度演)·서민호(徐民濠)를 검거, 그달 말부터 4월 1일까지 신윤국·김종철이 불구속으로 심문을 받았고, 또 권덕규(權德奎)·안호상(安浩相)은 병중이어서 잡히지 않았다.홍원(洪原)으로 끌려간 여러 인사들은 1년 동안 경찰서 유치장에 있으면서 온갖 야만적 악형을 받았고, 치안 유지법 위반죄(독립운동 죄)로 기소되어 함흥(咸興) 검사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이 밖에도 혐의자·증인으로 심문을 당한 사람이 50여 명에 달하였다. 피고들에게 불리한 증언을 아니한다고 곽상훈(郭尙勳)·김두백을 유치장에 구금한 일도 있었으나, 이들 증인 중에는 어학회 사업을 운조, 협력한 저명한 문화인들도 많았다. 함흥 검사국에서는 범위 축소 지시에 따름인지 모르나, 어학회 관계자를 다시 조사하여 대부분은 석방하고, 이윤재·한징·최현배·이희승·정태진·이고루·김양수·김도현·이중화·김법린·이인·정현식 13명만 공판을 하였다.1943년 1월 이윤재가, 이듬해 2월에 한징이 각각 심한 고문과 추위와 굶주림에 못 이겨 옥사(獄死)하였다. 그 나머지 11명은 함흥 지방재판소에 각각 징역 2년에서 6년까지 판결을 받게 되었다. 그 중 정태진만은 복역(2년)함이 더 빠르겠다고 하여 복역을 마쳤고, 장현식은 무죄로 석방되었다. 그리고 체형을 받은 이는 공소하였으나 8·15광복을 이틀 앞두고 공소가 기각되었다. 이 사건으로 어학회가 해산되고, 사전 원고는 증거물로 홍원과 함흥으로 옮겨다니다가 여러 부분의 원고가 없어지게 되었다.

진단학회[편집]

震檀學會

1934년 5월 11일에 조직된 역사 연구회. 이병도(李丙燾) 등이 주동이 되어 일본 학자에 의하여 연구되던 우리나라 역사·언어·문학 등을 우리나라 학자의 힘으로 연구, 한글로 발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설치되었다. 같은 해 11월 28일에 기관지(機關誌)로 『진단학보(震檀學報)』를 창간, 계간(季刊)으로 14집까지 계속하다가 일본인의 압력으로 중단되었다. 해방 이후 다시 계속되어 15·16집이 나오고 6·25전쟁 이후 17집이 나온 뒤로 23집이 간행되었다.1959년 이래 『한국사(韓國史)』를 간행하였다. 이 회의 발기인(發起人) 및 초대위원은 다음과 같다. 발기인:고유섭(高裕燮)·김두헌(金斗憲)·김상기(金庠基)·김윤경(金允經)·김태준(金台俊)·김효정(金孝井)·이병기(李秉岐)·이병도(李丙燾)·이상백(李相佰)·이선근(李瑄根)·이윤재(李允宰)·이은상(李殷相)·이재욱(李在郁)·이희승(李熙昇)·문일평·박문규(朴文圭)·백낙준(白樂濬)·손진태(孫晋泰)·송석하(宋錫夏)·신석호(申奭鎬)·우호익(禹浩翊)·조윤제(趙潤濟)·최현배(崔鉉培)·홍순혁(洪淳赫), 위원(委員):김태준·이병도·이윤재·이희승·손진태·조윤제.

이광수[편집]

李光洙 (1892

1950)

소설가. 호는 춘원(春園), 평북 정주 출신. 도산 안창호의 민족 운동에 감화를 받고 와세다 대학 재학중, 1919년 2월 백관수·최팔용 등과 재일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였다. 2·8독립선언을 모의할 때 연락차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가담했다. 이보다 앞서 1917년 장편소설 「무정(無情)」을 매일신문에 발표, 최남선과 함께 신문학 개척기의 선구자가 되었다. 상하이에서 귀국한 뒤에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 재직했으며, 그 때 신문에 「흙」을 발표, 당시의 민중들에게 민족주의와 인도주의를 기조로 한 계몽주의 사조를 불어넣었다.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기도 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말기부터 황도문화(皇道文化)의 선양, 학병 지원을 위한 권고 강연, 대화혼(大和魂) 고취 등을 통해 친일적으로 변신했다. 6·25전쟁 때 납북됐다.

최남선[편집]

崔南善 (1890

1957)

국학자. 호는 육당(六堂), 본관은 동주(東州). 광무 10년(1906)에 도일하여 와세다 대학 고등사범부 지리역사과에 입학하였다가 이듬해 귀국하여 신문관을 설립, 출판과 인쇄사업을 벌였다. 융희 2년(1908) 잡지 『소년』을 창간하고, 새로운 형식의 자유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는 한편, 이광수 등과 더불어 근대문학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 1910년 조선광문회를 창설하여 고전을 간행했으며, 1914년 『청춘』을 창간했다.3·1운동 때는 독립선언문을 기초하였으며, 1927년에는 논문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을 발표하는 한편 총독부의 조선사 편수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이후 만주에서 교편 생활과 언론인 생활을 하다가 귀국하였다. 1943년 재일 조선유학생의 학병 지원 권고 강연차 이광수 등과 동경에 건너갔다. 광복 후 우이동에 은거하면서 역사논문 집필에 전심하다가 친일 민족 반역자로 기소되었으나 병보석되었다. 그 후 국학 관계의 저술을 하다가 뇌일혈로 죽었다.

나운규[편집]

羅雲奎 (1902

1937)

영화인. 호는 춘사(春史), 회령 출신. 회령의 신흥학교 고등과를 졸업한 후 시베리아 각지를 방랑하다 홍범도의 독립군에 들어가기도 했다. 1924년 「운영전(雲英傳)」에서 은막에 데뷔하고 「심청전」에서 주역을 맡아 열연했다. 1926년 자기의 원작인 「아리랑」을 감독·주연해 선풍적 인기를 모았으며, 이후 「벙어리 삼룡이」 「임자 없는 나룻배」 등을 제작하고 주연을 맡았다. 1936년 「아리랑 제3편」의 제작 때 토키를 사용하였다. 그가 관계한 영화는 총26편이며, 원작·감/독·주연을 겸한 것만도 15편이 넘어 한국영화제의 선구자적 위치를 차지했다.

홍난파[편집]

洪蘭坡 (1897

1941)

음악가. 본명은 영후(永厚), 수원 출신. 1912년 Y.M.C.A. 중학부를 졸업하고 1915년 조선정악전습소(朝鮮正樂傳習所)를 졸업했다. 1918년 동경우에노(上野) 음악학교에서 2년 간 수학, 귀국 후 「봉선화」를 작곡하고 연악회(硏樂會)를 창설하였다.1926년 다시 도일하여 동경고등음악학교에 입학하였으며, 귀국후 중앙보육학교교수, 조선음악가협회 상무이사 등을 지냈다. 1931년 미국 셔우드 음악대학에서 연구생활을 하다가 귀국, 그 후 한국 음악계를 위해 많은 연구활동과 업적을 남겼다.

토월회[편집]

土月會

1921년에 창립된 극예술 단체. 이 단체의 멤버는 박승희(朴勝喜)·이서구(李書九) 등이다. 대중의 취향에 영합하는 신파극에서 탈피하여 유럽 근대 연극의 계보를 따른 신극을 이 땅에 수립하려는 의도로 형성되었으며, 당시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 청년들로 구성되었다. 주로 번역극을 상연하여 87회의 공연 기록을 남겼으며, 신극 발전에 공헌한 바가 컸다.

조선프로예술동맹[편집]

朝鮮 Pro 藝術同盟

1925년 7월에 결성된 예술 단체. 처음에 박영희(朴英熙)·김복진(金福鎭)이 강령(綱領)과 규약(規約)을 만들었고, 이 두 사람이 주로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여기에 가담한 사람들은 김기진(金基鎭)·조명희(趙明熙)·최학송(崔鶴松)·안석주(安碩炷)·이상화(李相和)·박팔양(朴八陽)·이익상(李益相)·이기영(李箕永)·이양(李亮)·최승일(崔承一)·김영팔(金永八), 그리고 잡지 『염군(焰群)』을 내던 송영(宋影)·이적효(李赤曉) 등인데, 주로 신경향파(新傾向派) 작가 중심으로 구성되었다.이들 배후에서 예술동맹을 후원하던 사람은 이성태(李星泰)를 비롯한 당시의 사회주의자들이었다.이 동맹은 1927년 이른바 목적의식적(目的意識的) 정치노선(政治路線)으로 방향전환을 결의한 뒤로부터 카프(KAPF 혹은 KPAF)로 약칭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카프란 Korea Artist Prole

tahiat Federation (혹은 Korea Proletariat Artist Federation

朝鮮無産階級藝術家同盟)이다.이 프로레타리아 예술가동맹은 조직만 결성해 놓았을 뿐으로 드러나게 하는 일이 없다가 1926년 1월 『문예운동(文藝運動)』이란 준기관지(準機關誌)를 발간했다.그러나 3호까지밖에 발간되지 못했다. 이 해 여름 일본 도쿄(東京)에서 『제삼전선(第三戰線)』을 창간한 동인들 조중곤(趙重滾)·김두용(金斗容)·한식(韓植)·홍효민(洪曉民) 등과 이북만(李北滿)이 도쿄지부(支部)를 만들고 카프의 기관지도 사전검열(事前檢閱)이 없는 도쿄에서 발행하겠다고 하여 1927년 9월에 카프는 3개조의 정치적 강령을 내걸고 방향전환을 선언하는 총회를 개최하였다.또 개성(開城)·원산(元山)·평양(平壤) 등 전국에 10여 개소의 지부를 설치하여 맹원(盟員)은 200여 명이나 되었는데, 이때 한설야(韓雪野)·임화(林和)·안막(安漠)·김동환(金東煥)·김남천(金南天) 등이 맹원이 되었다. 그 뒤 도쿄에서는 『제삼전선』과 『개척(開拓)』이 합동되는 동시에 도쿄지부에 간판을 걸었으며 카프의 기관지 『예술운동』 창간호가 나왔다.그리하여 프로문학 운동이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는데, 종래의 문학동인(文學同人)과 달라서 그들은 정치성이 농후하였다. 신경향파 문학과 프로문학이 같은 계통이면서 서로 구별되는 것은 전자가 막연한 반항(反抗)인 데 반하여, 후자는 명확하고 조직적인 정치투쟁을 의식한 이른바 목적의식(目的意識)의 문학이란 점이다.1927년 박영희가 문예운동 방향 전환을 논하는 자리에서 목적의식적 문학투쟁을 앞세운 것은 그 때문이다 카프는 일반 문인과는 물론, 그 조직체 안에서 서로 이론투쟁을 전개하였으니, 박영희와 김기진의 논전이 그 중 유명하였다.1926년 말에서 시작한 논쟁은 1929년 최고조에 올랐고, 1930년 초까지 계속되었다. 그런데 이 시기의 중요한 논제(論題)는 첫째로 문학형식 문제, 둘째 민족주의(民族主義)의 문제, 셋째 예술의 대중화(大衆化)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민족주의 의식을 적극적으로 고조한 사람은 염상섭(廉想涉)·양주동(梁炷東)·정노풍(鄭盧風) 등이었고, 이에 대항한 계급의식 이론으로 무장한 평가(平家)로는 김기진·박영희 두 사람이었다.1925년부터 1930년까지는 프로문학이 왕성하던 시기로서 한때 유진오(兪鎭午)·이효석(李孝石)을 비롯하여 유치진(柳致眞)·이무영(李無影)·최정희(崔貞熙)·박화성(朴花城)·조용만(趙容萬)·엄흥섭(嚴興燮)·채만식(菜萬植)·안함광(安含光)·한인택(韓仁澤)·김해강(金海剛)·장혁주(張赫宙) 등 이른바 동반자작가(同伴者作家)가 배출된 것도 그런 시대성에서 이해된다.한편 1930년 10월에는 프로 연극동맹(演劇同盟)이 결성되어 본격적인 조직망을 펴서 활동했으니 이것이 이 땅의 좌익극단(左翼劇團)으로서 신건설(新建設) 외에 여러 개 극단(劇團)을 둔 원인이 되었다.그들의 연극운동은 정치활동과 예술활동의 상호관계에 있어서 너무나도 정치의 우위성(優位性)을 강조한 나머지 예술로서 독자성을 잃고, 공식적 당적(黨的) 과오를 범하고 말았다. 한설야의 희곡 「절뚝발이」 송영의 「호신술(護身術)」 「일체면회(面會)를 거절하라」 「신임이사장(新任理事長)」과 같은 작품이 프로 예술작품의 대표적인 것들이다.그런데 1931년부터 프로문학은 차츰 문단에서 그 세력을 잃게 되었다. 이해 9월에 일제가 대륙침략의 첫걸음으로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켰는데, 그 무렵 일제가 노동쟁의(勞動爭議)·민족운동 등에 정치적 탄압을 가하던 때여서, 동년 5월에 카프의 검거사건이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김남천을 빼놓고 결국 불기소 석방되었으나 여기서 카프 진영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들 사이에 의견이 대립되어 박영희 일파가 탈퇴하고, 뒤이어 1934년 5월 그들의 연극단체인 신건설(新建設) 단원이 체포됨으로써 시작된 제2차 카프 검거가 있어, 맹원은 전원 전북경찰부에 붙들려갔다.1935년 여름에 김기진·김남천·임화 등이 서로 합의하여 경기도경찰부에 해산계(解散屆)를 제출, 자진 해산하고 말았다. 프로 문학파는 이론 투쟁에 있어서는 여러 면으로 논의될 만한 발자취를 남겼으나 작품에서는 별로 뚜렷하게 내세울 만한 것이 없다. 그 중 조명희의 「낙동강(洛東江)」, 임화의 「우리 오빠와 화로(火爐)」, 이기영의 「서화(鼠火)」 「고향(故鄕)」 등이 그들의 대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