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민족의 독립운동/신문화운동과 3·1운동/일제 식민정책의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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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식민정책의 전환〔槪說〕[편집]

1920년대로 들어서면서 일제는 식민정책의 전환을 강요당하였다. 그것은 일본 내부에서 새로운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그 첫째가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른 식량 문제의 긴급성이었다. 실제로 일본은 개항 이후부터 한국을 일본에 대한 식량 공급지로 삼아왔으나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서 일본의 식량 문제 해결은 당면한 긴급 과제가 되었다. 이리하여 일제는 산미증식계획으로 이 과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일제의 이와 같은 양곡 정책은 순전히 일본에 미곡을 공급하기 위한 조처로서 그 계획의 수행에는 한국 농민의 희생이 따랐다. 즉 이 계획에 의하여 한국민의 미곡 소비량은 해마다 감소되었으며, 그리하여 한국인은 부족한 양곡을 만주로부터 들여오는 잡곡으로 보충시켜야 했다. 이 정책은 한국의 농업형태에도 큰 제약과 영향을 미쳐 한국의 농업경제는 미곡생산 일변도의 극히 파행적인 양상을 띠었으며, 한편 봉건적이고 관습적인 소작관계와 경영 형태를 그대로 보존함으로써 농민의 영락이 더욱 심해졌다.전지(田地)의 보다 많은 부분이 일인에 의하여 점거되었고, 농민들은 소작료 징수 과정에서나 또는 각종 부담의 가중에 의해서 화전민이 되거나

만주나 일본으로 이류(移流)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리하여 소작농들은 지주에 의한 소작농의 자의적인 이동에 항거하고 또는 소작료의 경감을 요구하면서 소작쟁의를 벌였다. 일제가 한국을 병탄한 초기에는 한국을 순전히 일본에 대한 식량공급지로만 삼으려고 하여 공업에 대해서는 크게 배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의 전쟁 경기가 지나가자 일본의 자본가들은 유리한 투자시장으로서 한국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1920년에 총독부는 회사령을 철회하고 회사의 설립을 허가주의에서 계출주의(屆出主義)로 바꾸었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의 민족자존을 육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한국의 유리한 노동조건과 풍부하고 값싼 수력전기에 주목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일본 자본은 1931년의 만주사변 이후 다투어서 한국에 공장을 건설하였고, 이에 따라 한국의 산업에서 공업의 비중이 급격히 커져갔다. 그러나 그것은 군수공업의 일방적인 발전이었고, 일본이 대륙침략을 위해 한국을 병참기지로 만든 것이었다.

경제수탈의 강화[편집]

經濟收奪-强化

일본은 1910년대 이후 자본주의경제가 급속하게 발전하면서 농민들이 도시에 몰려 식량조달에 큰 차질이 빚어졌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이른바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이 세워졌다. 이 계획은 토지개량(수리개선, 지목변경·개간)과 농사개량(시비증가·경종법개선)에 의해 식량생산을 대폭 늘림으로써 일본으로 더 많은 쌀을 가져가고 우리나라 농민생활도 안정시킨다는 목표하에 추진되었다. 그러나 제1차(1920

1925)·제2차(1926

1934)계획이 계속 추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36년 현재 쌀생산량은 1920년보다 약 30%가 증가한 데 불과하였지만, 일본으로의 수출량은 약 8배로 증가하였다. 1932

1936년의 평균 쌀생산량은 1,700만석인데, 일본으로 가져간 것은 그 절반이 넘은 876만석이었다. 이에 비해 일본인은 1년에 1인당 1석 2두를 소비하였다. 한국인들은 부족한 식량을 만주에서 들여오는 잡곡(조·수수·콩) 등으로 메워 나갔다.우리나라 농민들은 식량사정만 나빠진 것이 아니라, 과도한 수리조합비로 자작농이 소작농으로 몰락하는 사례가 많았고, 농업구조와 유통구조까지 쌀 중심으로 개편되어 경제구조의 파행성이 심화되었다. 결국 일제의 산미증식계획은 1920년대 이후 소작쟁의가 격화되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한편, 일본은 일본자본의 침투를 촉진시키기 위해 회사령을 철폐(1920)하여 회사설립을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완화하였다. 이로써 일본인 자본가의 투자가 크게 늘어났는데, 1930년 현재 회사자본의 62.4%를 일본인이 차지하고, 한·일합자가 30.8%, 그리고 한국인은 6.4%에 불과하였다. 투자대상은 주로 상업·공업·운수업에 치중하였는데, 공업과 관련된 것으로는 조선수력전기회사에 의한 부전강수력개발(赴戰江水力開發, 1926)과 함경도 흥남(興南)에 건설된 질소비료회사가 규모가 큰 것이었다.한국인이 건설한 회사로는 호남지주 출신의 김성수(金性洙)가 세운 경성방직(京城紡織)의 규모가 큰 편이었고, 대구와 평양의 메리야스공장, 부산의 고무신공장 등이 민족기업으로서 성장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인 회사들은 중개상업·고리대·토지투기 등 비생산적인 부분에 투자하여 대자본으로 성장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에 회사가 크게 늘어남으로써 노동자층이 확산되고 농민·노동자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그 밖에 일본은 목화재배를 장려하여 헐값에 가져가고, 누에고치 생산을 강제하여 통제가격으로 헐값에 가져갔으며, 광업생산의 80% 이상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연초전매제도(1921)와 교통·체신의 관영사업을 통해 총독부 수입을 늘리고, 총독부 재정의 80%에 해당하는 액수를 각종 세금을 통해 충당하였다. 총독부는 크게 늘어난 수입을 일본인 지주와 자본가, 그리고 각종 탄압기관을 운영하는 데 지출하였다.

산미증식계획[편집]

産米增殖計劃

일본이 한국을 식량공급기지로 하여 미곡을 증산시키기 위해 세운 계획.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일본은 공업생산량이 급격히 발전하면서 한국에 대한 미곡 의존도가 갑자기 증가하였다. 일본은 한국에서 생산되는 쌀을 일본에 보내는 데 그치지 않고, 일본에서 수요로 하는 쌀을 한국에서 생산하기 위해 미곡증산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1920년부터 15개년 계획으로 자본을 투입하여 연간 9백여만 섬의 미곡을 증산하여 5백만 섬을 일본으로 수출할 계획이었다.

이 계획은 1926년에 다시 변경되었고, 그나마 기대한 바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이리하여 미곡 생산량이 증산되지 않았던 데 반하여, 일본에로의 수출량은 예정량을 초과하게 되었으며, 1933년에 이르러서는 그 수출량이 총생산량의 ½을 초과할 정도에 이르렀다. 이 계획의 실시로 한국은 완전히 일본의 식량공급지가 되었고, 농업형태가 단작형(單作型)으로 되었을 뿐 아니라, 소작농의 증가가 여실해지는 등 농촌경제는 몰락하여갔다.

상품시장의 역할[편집]

商品市場-役割

1920년 일본과 한국 사이에 관세제도가 철폐됨으로써 한국은 일본의 상품시장으로 전화하였다. 그 결과 1931년에 대일본 수출액은 그해 총수출액의 95%였고, 일본으로부터의 수입액은 총수입액의 80%를 차지하는 형편이었다. 뿐만 아니라 1939년에 일본의 총수출액의 34%가 대한수출액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일본으로부터 한국으로 수입되는 것은 전제품(全製品)이 대부분을 차지하였고, 그나마 일용품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일본에 수출하는 것은 대부분 쌀을 중심으로 한 식료품 및 원료와 원료제품이었다.1930년대에 들면서는 수입품의 내용에서 전제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낮아지고, 반면에 원료와 원료제품의 수입이 증가하였다. 그리고 수출에 있어서도 쌀의 비중이 적어졌으니, 이는 일본의 자본 투하가 증가되었음을 의미한다.

중공업의 발전[편집]

重工業-發展

1920년 회사령을 철폐함으로 말미암아 일본 자본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의 전쟁 경기를 지내고 난 뒤 한국에서 유리한 자본 투하 시장을 발견했다. 이리하여 1926년에는 조선전기수력회사가 설립되었고, 다음해에는 조선질소비료회사가 흥남에 건설되었다. 1931년의 만주사변 이후 일본의 대재벌은 다투어서 한국에 공장을 건설하였고, 이에 따라 한국의 산업에서 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급속도로 커갔다. 그 결과 광공업은 한국 산업의 수위를 차지하게 되었고, 각지에서 공업지대가 건설되었다. 공업의 성격에 있어서는 처음 절대적인 우세를 보이던 식료품공업 대신 화학공업이 발전하게 되고 여기에 금속공업과 기계기구공업을 합한 중공업의 비중이 전체 공업의 47%에 달했다. 이는 공업의 정상적인 발전이 아니라 군수공업의 일방적인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민족자본의 상태[편집]

民族資本-狀態

한국에 있어서 공업의 발전이 민족자본의 성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1938년에 있어서 공장에 대한 자본 투하는 한국인이 12.3%를 차지한 데 비하여 일본인은 실로 87.7%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회사당 자본을 비교해 본다면 한국인의 공장은 보잘것 없는 데 비하여, 일본인의 공장은 대규모적인 것이었다. 광업의 경우에서도 공장은 대규모적인 것이었다. 이리하여 일본자본을 배척하고 민족자본을 육성하기 위한 운동이 전개되었으니, 물산장려회의 활동 같은 것이 그것이었다. 사실 민족자본가들 중에서도 일본 자본에 예속된 것도 있었으나 한편 언론·교육 등의 민족적 활동을 뒷받침해 주는 일도 많았다. ‘경성방직’을 경영하던 김성수는 대표적인 민족자본가였다.

백산상회[편집]

白山商會

1919년 안희제가 세운 민족기업. 안희제는 구국운동도 경제문제 해결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1914년 이유석·추한식 등과 백산상회를 설립하였는데, 독립운동의 연락과 자금공급에 목적을 두었다. 백산상회는 1919년 5월 주식회사로 개편되었는데 주주는 최준·최태욱·윤현태·강복순 등으로 모두 영남의 대지주들이었다. 주식회사로 개편한 뒤 대구·서울·원산·안동(安東:만주 소재)·봉천 등지에 지점과 연락사무소를 설치하여 그 활동지역을 확대하였으나 일본경찰의 계속적인 수색·감금·고문·장부검열 등의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1927년 해산하였다.

조선물산장려운동[편집]

朝鮮物産奬勵運動

3·1운동 이후에 일어난 민족운동의 한 갈래. 이 운동의 추진체는 조선물산장려회였으며, 그 취지는 ① 민족적 산업 기초 확립 ② 민족 기업의 육성 ③ 국산품 애용 등이었다. 그러므로 이 운동은 순수한 민족 경제 건설 운동이었는데, 당시의 일본 제국주의 경제적 지배와 민족 자본의 취약한 조건 밑에서는 민족이 살아갈 산업의 기초를 확립한다는 것이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으므로 다른 민족운동과 유기적인 관련을 맺지 않고서는 성공할 수 없다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었다.1920년 회사령(會社令)의 철폐로 조선인도 자유롭게 기업을 설립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러한 조선인의 기업열은 특히 평양지방이 다른 지방보다 우세하였다. 이러한 기업열을 배경으로 조선물산장려운동은 1922년 12월 1일 서울의 조선청년연합회가 주동이 된 물산장려운동이 시작되면서부터이다. 이들은 조산물산의 장려를 위한 표어의 모집, 북선(北蘚)일대의 지방 순회강연 등으로 이 운동을 크게 고조하였다. 1923년에 들어와서는 전국적 규모의 조선물산장려회의 창립 준비가 시작되었으며, 1월 20일에는 당시 경기도 참여관(參與官)이었던 유성준(兪星濬)을 이사장으로 하는 20명의 이사를 선출하고 조선물산장려회를 창립하였다.조선물산장려회의 조직은 그다지 광범하지 못하여, 서울에 회의 본부가 있고 평양 및 동래의 지방조직이 결성된 것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지방조직이 없었던 듯하다. 따라서 이 운동에 있어서는 각 지방의 청년회 및 상인단체가 중요한 구실을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물산장려회의 운동수단은 강연회 및 시위선전이었다. 일찍이 1922년 12월에 조선청년회에서 ‘내 살림 내 것으로, 조선 사람 조선 것으로’ 등 일련의 표어를 앞세우고 북선지방 순회강연단을 조직하였으며, 5·6천명의 청중을 동원하는 등 강연회는 가는 곳마다 성황을 이루었다. 1923년 초에 조선물산장려회가 결성됨을 계기로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번져 나갔다. 그러다가 구정대시위운동(舊正大示威運動)이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실패하자, 좌절되기 시작하였다. 원래 구정을 계기로 대대적인 물산장려운동의 시위를 벌일 계획이었는데, 조선총독부 당국은 이 운동이 전국으로 번져 나가자 당황하여 급기야 2월 14일에는 종로경찰서에 조선물산장려회의 간부를 호출하여 이 계획을 취소하도록 명령하였던 것이다. 이 후에도 이 운동은 약 1년 간 계속되었으나 그 후는 거의 휴면상태였으며, 1929년 박세권(朴世權)의 특지로 소생하는 듯 하다가 1934년에 들어와서는 또 다시 재정난으로 운동이 침체되었으며, 1940년 8월에 총독부의 명령으로 강제 해산되었다.조선물산장려회는 강연·선전활동 외에 여러 가지 다른 활동도 전개하였다. 그 기관지로 『산업계(産業界)』 5권, 『자활(自活)』 12권, 『조선물산장려회보(朝鮮物産奬勵會報)』 『장산(奬産)』 『실생활(實生活)』을 발간하였으며, 또한 부대사업으로서 소비조합(消費組合)·생산기관(生産機關)·조선물산장려산진열관(朝鮮物産陳列館)의 설립을 계획하였으나 실패하였고, 1928년 6월에는 경성상공업자대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김성수[편집]

金性洙 (1891

1955)

정치가·교육자·언론인. 호는 인촌(仁村), 전북 고창(高敞) 출신. 어려서 신학문에 눈을 떠, 융희 2년(1908) 송진우와 함께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했다. 1914년 졸업 후 귀국하여 중앙학교를 인수하였으며, 1919년 경성방직회사를 창립했다. 1920년 『동아일보』를 창간하였으며, 1932년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했다.일제시대를 통하여 그는 인재양성·산업진흥·민족언론육성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 수립까지의 그의 신념은 한민당과 한독당의 합당을 통해 민족진영이 대동단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47년에는 신탁통치 반대투쟁에 앞장섰으며, 1949년에는 민주국민당의 최고위원으로 1950년 제2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반대하여 이듬해 5월에 사임했으며, 그 후 민국당 고문으로 있으면서 재야 민주세력의 대동단결을 외치다가 1952년 향년 62세로 불귀의 객이 되었다.

소작쟁의[편집]

小作爭議

토지조사사업과 산미증식계획의 실시로 한국의 농업인구에는 변화가 도래하였고, 그 결과 소작농이 부쩍 늘었다. 이 소작농마저 소작료 및 각종 부담으로 권한이 박탈될 위협에 부딪히자 이에 대한 항거가 소작쟁의로 나타났다.

소작쟁의는 날이 갈수록 증가하였고 그 소작쟁의의 원인은 소작권 이동에 대한 반대가 태반이었으며 다음으로는 소작료 감하(減下)였다. 그러나 이러한 소작쟁의는 단순한 경제투쟁이 아니었고, 일본에 대한 반항운동의 색채를 점점 띠게 됐다.

노동자의 생활[편집]

勞動者-生活

공업의 발전에 따라 임금노동자의 수도 급격히 증가하였다. 공장노동자와 광산노동자의 경우 1912년에는 약 1만 명밖에 안되던 노동자가 만주사변이 일어난 당시에는 14만을 돌파했고, 중·일 전쟁이 일어나던 해에는 27만이 되었으며, 미·일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1943년에는 73만을 넘게 되었다. 이들 노동자에게 강요된 노동조건은 극히 열악하여 공장·광산 노동자의 경우 12시간 이상의 장시간 노동이 강요된 사람이 30

50%를 차지하고, 임금 또한 일본인 공장노동자의 반액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 노동쟁의는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 1912년에는 6건에 참가인원 1,573명이던 것이 1921년에는 36건에 3,403명, 1926년에는 81건에 5,984명, 1931년에는 205건에 21,180명으로 격증했으니 이 또한 일제의 식민정책에 대한 민족운동으로 차츰 승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