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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민족의 독립운동/신문화운동과 3·1운동/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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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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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일을 기하여 일어난 거족적인 민족독립운동. 일명 기미독립운동(己未獨立運動). 한일합방 이후 일본의 부당한 침략에 항거하는 의병(義兵)·열사(烈士)들이 각지에서 일어나 독립운동에 나서자 총독부는 강력한 무단정치(武斷政治)를 감행하여, 가혹한 탄압을 자행하고, 한편으로는 고유문화의 말살, 경제적 지배의 철저화로 우리 민족이 다시 일어날 기반을 없애려고 애썼다.제1차 세계대전의 대세가 연합군측의 승리로 확정되자, 1918년 1월 미국 대통령 윌슨(Thomas W. Wilson)은 강화조약의 기본 조건으로 14개 조항의 원칙을 발표하였는데 그 중에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 스스로가 결정한다는 이른바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가 들어 있었다. 이것은 세계 피압박민족에게 큰 충격을 주었거니와 우리 민족도 이에 자극을 받아 독립을 바라는 기운이 갈수록 높아졌다. 이리하여 비교적 일본의 손이 미치지 않는 외국에서부터 조직적인 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중국 상하이(上海)에서는 여운형(呂運亨)·김철(金撤)·김규식(金奎植) 등이 협의하여 김규식을 파리 강화회의에 보내어 우리나라의 독립을 호소하게 하고, 미국에서는 안창호(安昌浩)·이승만(李承晩)·정한경(鄭翰景) 등이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이동휘(李東輝) 등은 연해주(沿海州) 지방에서 활약했다. 1919년 1월 22일 고종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일본인이 독살(毒殺)했다는 소문이 퍼져서 온 국민의 일본에 대한 분노를 가일층 부채질하였다. 이보다 앞서 일본 도쿄의 우리 유학생들은 비밀리에 조선독립청년단(朝鮮獨立靑年團)을 조직하여 전위적(前衛的)인 활동을 시작하였다.1919년에 접어들면서 이들은 최팔용(崔八鏞)·김도연(金度演)·서춘(徐椿)·이종근(李琮根)·배관수(白寬洙)·윤창석(尹昌錫)·김상덕(金尙德)·최근우(崔謹愚)·김수철(金壽喆)을 대책위원으로 선출하고 송계백(宋繼白)을 국내에 파견하여 운동자금과 활자를 준비해 오고, 최원순(崔元淳)·정광호(鄭光好) 등은 이광수(李光洙)가 기초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였다. 준비를 마친 이들은 2월 8일 간다구(神田區) 조선 기독교청년회관에서 학우회 총회라는 이름으로 유학생을 모아놓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이 선언서에 서명한 사람은 위에 적은 대책위원회 9명과 이광수·송계백이었으며, 이 사건에 관계된 사람들은 모두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에 유학생들은 전원이 귀국할 것을 결의하고, 국내에 돌아와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3월 1일에 일어난 거족적인 총궐기에 합류하게 되었다.한편 국내에서는 1914년 제1차대전이 일어나던 초기부터 일부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구체적인 운동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즉 손병희는 천도교의 교세를 확장하여 독립운동에 나설 힘을 기르고, 김시학(金時學)·임규(林圭)·신익희(申翼熙) 등은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승리할 것을 예상하여 국내외의 유지(有志) 1만여 명의 연서(連書)로 독일정부에 독립을 호소하기로 결정하였다.이리하여 송진우(宋鎭禹)·김윤식(金允植)·최린(崔麟)·최남선(崔南善)이 교섭위원으로 나서서 각계 각층과 절충하였으나 독일이 패하자 이 계획은 중지되고 말았다. 그러나 민족자결주의의 제창은 독립운동에 대한 새로운 전환기를 만들어 주었고, 동경 유학생의 독립선언은 국내에 결정적인 자극을 주었다. 1919년 2월 상순 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최린 등은 손병희와 독립선언에 관한 일을 의논하고 다시 송진우·현상윤(玄相允)·최린·최남선 등이 독립선언 진행방법 등을 검토하였다. 천도교·기독교·대한제국의 유지를 조선 민족대표로 정하고 그 이름으로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 이유서를 각국에 보내기로 결정하고 서명할 인사들의 물색에 나섰다. 송진우·최남선은 대한제국의 대신들과 상의하였으나 성과를 얻지 못하여 민족대표에서 그들을 제외하기로 하였다.한편 기독교측은 이승훈(李承薰), 천도교는 최린이 각각 교섭에 나서서 많은 동지를 얻었고, 이를 안 불교측에서도 한용운(韓龍雲)·백용성(白龍城)이 가담하니, 결국 기독교측 16명, 천도교측 15명, 불교측 2명이 독립선언서에 서명키로 하고 총대표에 손병희를 추대하였다. 마침 고종황제의 인산(因山:國葬)이 3월 3일로 결정되자 많은 사람들이 서울에 모일 것을 예측하고 이 기회를 이용코자 3월 1일 정오를 기하여 손병희를 선두로 천도교·기독교·불교의 대표들은 탑동공원(塔洞公園)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인쇄물을 뿌리고 일제히 전개하기로 하였다.

또 각 지방에서도 미리부터 조직을 짜고 독립선언서와 아울러 운동의 방법·날짜 등을 전달해 두었다. 독립선언서와 일본 정부에 대한 통고문(通告文), 미국 대통령·파리 강화회의 대표들에 보내는 의견서는 최남선이 기초하고 비용과 인쇄는 천도교측이 담당하여 김홍규(金弘奎)·한위건(韓偉健)·김법린(金法麟)·백성욱(白姓郁)·오택언(吳澤彦) 등이 책임을 맡되 종로 이북은 불교계통의 학생 10명, 종로 이남은 기독교계통의 학생 10명, 남대문 밖은 천도교계통의 학생 10명이 각각 담당하였다.한편 일본 정부와 의회(議會)에 대한 통고문의 제출은 천도교, 미국 대통령과 강화회의에 보내는 의견서는 기독교에서 담당하도록 계획을 세웠다. 2월 28일 손병희 이하 33명의 민족대표는 재동(齋洞) 손병희의 집에 모여 마지막으로 세밀한 논의를 했다. 탑동공원에는 많은 군중이 모일 것이므로 혼잡을 피하기 위하여 독립선언 장소를 인사동(仁寺洞) 명월관 지점(明月館 支店)으로 변경하고 선언식 후에 취할 태도를 결정했다. 이날 김원벽을 비롯한 학생들은 승동교회(勝洞敎會)에 모여서 이갑성(李甲成)으로부터 받은 독립선언서 1천 5백매를 강기덕이 학생에게 나누어 주었다. 학생들은 3월 1일 정오에 탑동공원에 모여 만세를 부르고 독립운동에 앞장 설 것을 결의하였다.이와 같이 모든 일이 비밀리에 진행되었는데 일본측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다. 3월 1일 드디어 학생들이 모여들었는데 정오를 알리는 오포(午砲)가 울리자 정재용(政在鎔)이 8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부르니, 학생들은 모자를 공중에 던지고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일제히 만세를 외쳤다. 이들이 선언을 끝내고 공원을 나설 때는 수만의 군중이 호응하여 함께 시위행진을 감행하니 대열이 대한문(大韓門) 앞에 이를 무렵에는 온 서울 시내는 흥분된 군중과 만세소리로 물끓듯 하였다. 행렬은 대한문 앞에 이르러 고종황제의 빈전(殯殿)을 향하여 삼례(三禮)를 하고, 대열을 나누어 1대는 정도의 미국 영사관으로 향하고, 다른 1대는 남대문을 지나 왜성대(倭城臺)의 총독부로 향하였다.이 시위행진은 전혀 폭력의 요소가 없고 평화적이었으나 총독부로 향하는 대열에는 일본 군인과 기마 경찰이 덤벼들어 많은 사람을 짓밟았다. 한편 민족대표 33명은 명월관 지점에 모여 하오 2시 한용운이 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부른 후 간단한 축배를 들고 전화로 경찰에 통고하여 자진해서 체포되었다.탑동공원에서 시작된 시위운동은 하오 6시에 일단 끝났으나 하오 8시에는 마포에서 1천여 명이 다시 일어났고, 밤 11시 경에는 예수교 부속전문학교 부근에서 5백여 명이 만세를 불렀다. 이 운동은 전국으로 퍼져서 같은 날 개성·평양·진암포·선천·안주·의주·원산·함흥·대구를 비롯하여 황주·수안·곡산 등 지에서 일어났고, 다음 날부터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독립만세와 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서울에서는 3일의 국장(國葬) 당일만을 제외하고는 매일 가두시위가 벌어졌으며, 학생은 휴교, 상인은 철시(撤市), 공원(工員)은 파업, 관리는 퇴직하였고, 3월 28일 대한제국의 정치가 김윤식(金允植)·이용직(李容稙)이 총독부에 독립 승인 최촉장(催促狀)을 제출하였으며, 유림(儒林)에서는 곽종석(郭鍾錫)·장석영(長錫英)·김창숙(金昌淑) 등이 독립을 외치고 나섰다.4월 23일에는 서울에서 「조선민국 임시정부 조직 포고문」이 발표되고, 5월 20일에는 김가진(金嘉鎭)이 중심이 되어 의친왕(義親王)을 포함하여

조선민족 대동단(大同團)을 조직하였다. 이에 대해 총독부는 군대와 경찰을 동원하여 철저한 무력탄압을 감행하여 전국 도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부상·투옥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수원 제암리 학살인데, 일본 군인들은 우리 기독교인들을 교회에 몰아 넣은 후 입구를 막고 어린이 부녀자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 사격을 가하고 난 후 불을 질러 태워버리니 이 작은 동네에서 1천여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이 밖에도 화수리(花樹里)·정주(定州)·맹산(孟山)·강서(江西)·대구·밀양·합천 등지의 집단학살과 유명한 유관순(柳寬順)의 참살(慘殺) 등은 우리 민족의 고달픈 운명을 영원히 전할 참혹한 일들이었다. 자진하여 붙들려간 민족대표를 위시한 지도자 47명은 내란죄로 기소되었는데 한용운은 옥중에서도 「독립의 서(書)」라는 논문을 지어 비밀리에 외부로 발표하여 큰 충격을 주었다. 이 거족적인 운동은 3월과 4월에 걸쳐 최고조에 달했으며, 만주·하와이·가라후도 (樺太) 등지에서도 호응하였다.결국 이 거족적인 운동은 일본의 무력 앞에 많은 사상자 또는 투옥된 채 독립이라는 하나의 목표는 달성하지 못하였으나 온 민족이 글자 그대로 한덩어리로 뭉쳐서 일본과 항쟁하여 대내 외적으로 우리 민족정신을 새로 인식케 하였고 이 후 두고두고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를 3·1운동에서 찾게 되었으며, 훗날 대한민국의 헌법은 그 전문에서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하였음을 명백히 하고 있다.일본 또한 이 운동을 계기로 우리 민족을 야만족 취급하던 종래의 무단정치(武斷政治)를 완화하여 이른바 문화정치(文化政治)를 표방하게 되었다.

1910년대 국외의 민족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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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年代國外-民族運動

일제의 파쇼통치로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어렵게 되자 많은 애국지사들이 만주와 연해주지방으로 망명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곳은 일제의 침략이 상대적으로 미약하였고, 특히 만주의 간도지방(間島, 두만강, 압록강 연안)은 대한제국시대에 우리 교민들이 많이 이주하여 독립운동기지로서 적당한 곳이었다. 간도와 연해주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 대종교를 신봉하던 열렬한 국수주의 인사들이었다.그들은 간도를 독립기지로 하여 장차 고구려와 발해의 옛 땅인 만주를 되찾아 대조선(大朝鮮)을 세운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많은 교육기관·군사기관·산업시설을 설치하였으며, 무력에 의한 독립쟁취를 목표로 했으니, 이른바 한말의 의병전쟁을 계승하고 있는 셈이었다.대종교인이 세운 독립운동기지로서 유명한 것은 이회영(李會榮)·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이상룡(李相龍) 등이 서간도(유하원)의 삼원보에 세운 경학사(耕學社)라는 자치기관이며, 이를 모체로 하여 독립군양성을 위한 신흥강습소(1919년 신흥무관학교로 개칭)가 설치되었다.이 밖에 윤세복(尹世復, 대종교 3세 교주)이 환인지방에 세운 동창학교(東昌學校, 1911)에는 신채호·박은식 등 저명한 역사가들이 참여하여 여러 가지 위인전기를 편찬하여 교재로 사용하였으며, 김교헌(金敎獻, 대종교 2세 교주)이 지은 『신단실기(神壇實紀)』(1914)·『신단민사(神壇民史)』(1914) 등의 역사책도 재만교포들 사이에서 널리 읽혔다. 이곳에서는 역사교육과 군사교육이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졌다.재만 독립운동가들은 1918년 12월 39명의 대표가 모여 ‘대한독립선언서’(일명 무오독립선언)를 발표하여 무력항쟁의 강렬한 의지를 보여 주기도 하였다.시베리아의 연해주지방에는 이미 1905년에 한국인 자치기관인 한민회(韓民會)가 설치되었고, 『해조신문』의 발행 등 언론활동과 한민학교(韓民學校, 1909)를 중심으로 한 교육활동도 활발하였다. 1910년 이후에는 이상설·이동휘 등이 블라디보스토크(해삼위)에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 1914)라는 최초의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독립군을 조직하여 무장투쟁을 계획하고 있었다. 또 이상설은 만주 용정(龍井)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세워 민족교육의 요람으로 키웠다.또한 1917년에는 시베리아 한인의 핵심단체인 전러한족회 중앙총회가 결성되고, 1919년에는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로 발전하였다. 이 밖에도 연해주에는 권업회(勸業會, 이상설)·대한청년교육회·공공회·대한민공제회·철혈단(鐵血團) 등 많은 단체들이 설립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1917년 러시아혁명의 영향을 받아 1918년 이동휘 등은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결성하기도 하였다(1921년 고려공산당으로 개명).한편, 중국 국민당 정부와의 긴밀한 협력관계가 편리한 상하이도 해외독립운동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1912년 대종교의 신규식(申圭植)이 조직한 동제사(同濟社)는 대표적 단체였다. 신규식은 신해혁명(1911)에도 참여하여 국민당 인사들과 친교가 깊었는데, 국민당 인사들과 연합하여 동제사를 신아동제사로 개편하였으며, 1915년에는 박은식과 더불어 대동보국단(大同輔國團)을 조직하고 『진단(震檀)』이라는 잡지를 발간하기도 하였다. 그의 외교적 활약은 뒷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에 큰 도움을 주었다. 상하이의 민족지도자들은 1919년 1월 신한청년단을 조직하고, 제1차 세계대전을 마무리하는 파리강화회의(1919. 2)에 김규식(金奎植)을 대표로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미국에서의 민족운동은 한국교민이 많이 거주하는 하와이에서부터 시작되었으나, 1903년에 신민회, 1907년에 한인합성협회를 조직하는 등 많은 단체들이 생겨났다.한편 미국 본토에서도 역시 한국교민이 있는 샌프란시스코가 중심이 되어 공립협회(共立協會, 1905) 등이 조직되었는데, 교민 장인환·전명운이 스티븐스를 암살한 사건(1908)을 계기로 재미한국인의 단결이 공고해져 1909년에 하와이교민과 본토교민이 연합하여 국민회(뒤에 大韓人國民會로 개명)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그 중심인물은 박용만(朴容萬)이었으나, 1915년 이후로는 독립협회 회원이었다가 1904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대학교육을 받고 있던 이승만(李承晩)이었다. 그는 그 뒤 프린스턴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1910),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44세의 나이로 대통령에 추대되었다.한편, 신민회의 회원이던 안창호가 로스앤젤레스에서 조직한 흥사단(興士團, 1913)의 활동도 활발하였다. 재미교포들은 대부분 기독교인으로서 군인양성과 외교활동에 역점을 두는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본에서는 젊은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부터 점차 독립운동의 기운이 일어났다. 최팔용(崔八鏞)이 중심이 된 조선청년독립단은 해외의 독립운동과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민족자결주의 그리고 러시아혁명에 고무되어 1919년 2월 8일 동경의 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이 ‘2·8독립선언’은 국내의 3·1운동을 야기하는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서로군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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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路軍政署

남만주(南滿州)에 있던 독립혁명단체. 1919년 한족회(漢族會)와 함께 조직된 군 정부가 상하이 임시정부의 지배 아래 있을 때부터 불리워진 이름. 독판(督辦) 이상룡, 부독판 여준, 정무청장 이탁, 국정청장 양규열, 참모장 김동삼, 교관 지청천·신팔균 등 군사훈련과 동지 양성에 노력하다가 1922년 대한통군부에 통합하였다.

1910년대 국내의 민족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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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年代國內-民族運動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국내의 독립운동은 큰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안악사건과 105인사건으로 서북지방의 독립운동이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그러한 제약 속에서도 비밀결사의 형태로 지하에 숨어든 독립운동단체들이 전국 각지에서 확산되어 갔다. 1910년대의 독립운동은 대체로 무력항쟁을 기본으로 하여 독립군을 직접 양성하거나 지원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그러나 독립 후의 국가에 대해서는 대한제국의 회복을 주장하는 측과 주권재민의 공화국을 건설하려는 측의 노선 차이가 있었다. 대한제국의 회복을 추구하는 대표적 단체인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 1913)를 들 수 있다. 한말에 최익현과 더불어 의병전쟁에 참가한 바 있던 임병찬이 주도한 이 단체는 전라남도를 중심으로 무력항쟁을 벌였으나 1914년에 임병찬이 체포되어 거문도에 유배되었다가 자결함으로써 끝났다(1916). 이 밖에 1907

1915년에 황해도·평안도 지방을 중심으로 한 채응언(蔡應彦)의 의병활동도 있었다. 공화국 건설을 목표로 한 비밀단체로는 박상진(朴尙鎭)·김좌진(金佐鎭) 등이 1913년에 조직한 대한광복단(1915년 大韓光復會로 개편)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대구에서 결성된 이 단체는 각도에 지부를 두고 해외의 애국지사들과 연계하여 군대양성과 친일파 숙청을 도모하다가 1918년에 발각되어 잠시 활동이 위축되었으나, 3·1운동 이후에 활발한 투쟁을 계속하였다. 경상도지방에서는 대종교에 귀의한 윤상태(尹相泰)·서상일(徐相日)·이시영 등 유학생들이 1915년 조선국권회복단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적극 참여하여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평안도지방에서 일어난 공화주의 단체로는 조선국민회(朝鮮國民會, 1914)를 들 수 있다. 평양의 숭실학교 학생과 기독교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이 단체는 하와이의 대조선국민단 및 간도의 독립운동단체와 연락하면서 군자금모금과 무기구입을 위해 활동하였으며, 3·1운동 당시 평안도지방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밖에 서울에서 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조선물산장려계(1914), 함경남도 단천에서 조직된 자립단(1915), 평양 숭실여학교 교사들이 조직한 송죽회(松竹會, 1913), 그리고 민단조합(1915), 자진회(自進會, 1918) 등 수많은 비밀결사가 활동하였는데, 이들은 주로 교육문화활동, 그리고 실력양성에 치중하였다.1910년대의 민족운동을 주도한 것은 도시의 중산층과 교사·학교·유생 등 지식인층이 중심이었으며, 기독교·불교·대종교·천도교 등 종교단체와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또한 사립학교와 서당도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교육문화운동이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이 1910년대의 축적된 역량이 1919년의 3·1운동으로 폭발하게 된 것이다.

대한애국부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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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愛國婦人會

독립운동을 위한 여성단체. 1919년 6월 한영신(韓永信)이 동지를 규합하여 애국부인회를 조직하였고, 박승일·이성실·손진실·최진석 등도 같은 단체를 조직하여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의 원조로 독립운동을 하던 중 11월 2일 여러 부인회가 통합하여 대한애국부인회로 개칭했다. 평양에 본부를 두고 각지에 지부를 두어 독립운동을 전개, 1920년 2차에 걸쳐 군자금 2400원을 임시정부에 보내다 발각되어 모두 체포되고 해체되었다.

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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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一 (1881

1921)

독립운동가. 호는 백포(白圃). 본관은 이천(利川). 함북 경원(慶源) 출생. 1911년 만주 간도(間島)에 건너가 명동 중학교를 설립했고, 두만강을 건너온 의병들을 규합하여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여 단장에 취임했다. 1918년 여준(呂準)·유동렬·김좌진 등과 함께 독립선언문을 채택, 발표하여 3·1운동 직후 계화(桂和)·채오(蔡五)·양오(梁五) 등과 정의단 (正義단團)을 조직했으며, 이 해 8월 김좌진과 함께 북만주에 산재한 대종교도(大倧敎徒)를 중심으로 하여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 총재가 되어 총사령관에 김좌진, 참모장에 이장녕(李章寧), 사단장에 김규식(金奎植), 연성 대장(硏成隊長)에 이범석(李範奭)을 각각 임명하고 본영을 길림성(吉林城) 왕칭현(汪淸縣)에 두었다.1920년 9월 청산리(靑山里)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후 미산현으로 이동하여 각 군단 수령 회의를 열고, 헤이룽 강을 건너 그곳 자유시를 독립운동 본거지로 삼자는 데 합의, 행동 통일을 위한 단체로서의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한 후 역시 총재로 추대되었다. 그 뒤 기회를 기다리며 휴식하던 중 1921년 8월 26일 흑하사변(黑河事變)으로 청년 병사들이 많이 죽으니 이에 책임을 지고 자결하였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

2·8 독립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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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八獨立宣言

1919년 2월 8일 동경의 유학생들이 일으킨 독립운동. 세계대전의 종결과 민족자결주의의 팽배한 풍조는 애국의 열정에 불타는 청년학도를 일깨웠으니 이와 같이 무르익은 국내외 정세에 앞장서서 과감히 불을 붙인 것은 일본 주재 도쿄 유학생들이었다. 그들은 마침내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동경에 있는 조선기독청년회관에 회합하여 ‘조선청년독립단’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 날 6백여 명의 학생들은 윤창석(尹昌錫)이 사회를 보는 가운데 백관수(白寬洙)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이어서 김도연(金度演)이 결의문 낭독을 끝낸 다음 윤창석의 기도로 대회를 끝마치게 되었다. 흥분한 학생들과 경찰 사이에 일대 충돌이 벌어진 가운데 독립만세가 제창되었다. 이 사건으로 30여 명의 부상자를 내고, 60명이 경찰서로 압송되었다가 일부는 다음날 아침에 석방되고 29명이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당일 회장에서 체포된 60여 명 중 김상덕(金尙德)·김도연·최팔용(崔八鏞)·백관수·송계백(宋繼白) 등 9인은 독립선언 서명자로서 방청 금지하에 재판에 회부되어 1년에서 3개월간의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파리장서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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巴里長書事件

1919년 김창숙(金昌淑) 등이 주동이 되어 파리평화회의에 독립탄원서(獨立歎願書)를 보내다가 발각된 사건. 우리나라 유림대표 곽종석·김복한 등 137명이 김창숙의 연락으로 독립탄원서를 작성, 김창숙이 이 탄원서를 가지고 상하이에 가서 파리평화회의에 우송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발각되어 곽종석 이하 대다수가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일부는 망명하였다. 곽종석·하용제·김복한 등은 감옥에서 순국하였고, 그 밖의 사람들도 형에 못 이겨 죽고 또

처형되었다.

간도국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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間島國民會

1919년 간도에서 조직된 교포(僑胞)의 자치기관(自治機關). 3·1운동 이후 국내에서 많은 사람이 간도에 이주하자, 연길(延吉)·화룡(和龍)·왕청(王淸) 등 3현(縣)의 대표는 자치기관의 필요성을 느끼고 구춘선(具春先)을 회장, 강구만(姜九萬)을 부회장, 고동환(高東煥)을 비서 겸 재무로 임명하고 간도국민회를 조직하였다. 국민회는 3현을 5구회(五區會)로 나누고, 그 밑에 52지회(支會)를 두어 기구를 정비하는 한편, 임시정부에 복종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그 후 훈춘(暉春)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의 회원 3천명을 포섭, 지회를 80개소로 확대시키는 한편 임원을 개선하고 회장에 이명순(李明淳), 부회장에 박관일(朴觀一), 서기에 여남섭(呂南燮),·오종범(吳宗範), 회계에 오현경(吳玄慶) 등을 선출하였다.

8월 말에는 홍범도(洪範圖)가 지휘하는 200여 명의 군대를 국민회 직할인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으로 편입, 다시 최진동(崔振東)·이태범(李泰範) 등의 도독부군(都督府軍) 300여 명을 포섭하여 대군단(大軍團)을 조직하고 사령관에 최진동, 부관 안무(安武), 연대장 홍범도, 제1중대장 이천오(李千五), 제2중대장 강상모(姜尙模), 제3중대장 강시범(姜時範), 제4중대장 조권식(趙權植) 등을 임명하여 부대를 정비하였다. 국민회는 계속하여 군비확장에 힘써 1920년까지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군대를 육성하여 일본군에 큰 타격을 주었다.

독립선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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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立宣言書

1919년 3월 1일의 독립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이 한국의 독립을 선언한 글. 육당(六堂) 최남선이 작성. 일제에 합방된 조국을 독립시키고자 손병희를 비롯한 33명의 민족대표는 세계 만방에 독립을 선언하고 삼천리 곳곳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기로 계획을 세웠다.이리하여 33명의 대표는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명월관에서 회동, 한용운이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낭독했으며, 이에 앞서 2월 26일 ‘보성사’에서 2만여 장의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28일 천5백여 장을 학생들에게 분배하고 나머지를 그 밖의 각처와 각 지방에 분배했다.

이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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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薰 (1864

1930)

독립운동가·교육자. 일명 인환(寅煥), 호는 남강(南岡). 평북 정주 출생.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10세 때 정주(定州)에서 임일권(林逸權)의 집에 심부름꾼이 되고, 16세 때 놋그릇 가게의 점원이 되어 상업에 눈을 떴다.

30세 전후에 자립하여 크게 상점을 벌리더니 32세 때 오산면용동(五山面龍洞)으로 이사하고 교육에 뜻을 두고 서당을 차렸다. 1906년(광무 10) 평양에 나갔다가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의 강연을 듣고 크게 감화되어, 마을에 돌아가자 사재를 털어 먼저 서당 자리에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세우고 신학문과 애국사상을 가르치기에 힘을 다했다. 그 뒤 도산이 조직한 독립운동 단체인 신민회(新民會)에 들어, 관하 산업 기구로서 마산 자기회사(馬山磁器會社)를 설립하여 활약하였다. 1911년 5월 신민회 사건으로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이해 9월 일제가 소위 데라우치 총독 암살모의 사건을 조작, 신민회 간부를 중심으로 한민족 지도자급 105인을 체포할 때 서울로 송치되어 4년 2개월 동안 옥고를 겪었다. 출옥 후 평양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되었고, 55세되던 해 3·1운동이 일어나자 민족 대표의 한 사람이 되어 활약, 다시 투옥되어 3년형을 살았다. 출옥 후 한때 동아일보사 사장을 지내고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의 고취를 위하여 계속 분투하다가 1930년 5월 9일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重章)을 받았다.

한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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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龍雲 (1879

1944)

독립운동가·승려·시인. 이름은 봉완(奉玩), 용운은 법호, 호는 만해(萬海), 홍성 출신.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동학혁명에 가담, 그 후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인제 백담사(百潭寺) 등지에서 승려가 되어 수도했다. 한일합방이 되자 중국에 가서 독립군 군관학교를 방문하고 만주·시베리아 등지로 방황했으며, 귀국 후 불교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는 대승불교의 입장에서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했다. 1916년 서울 계동에서 월간지 『유심(唯心)』을 발간하였으며,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여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27년 신간회에 가입하였으며, 1931년 조선불교청년동맹을 통해 청년운동을 강화하고 불교의 대중화와 항일 독립사상의 고취에 힘썼다. 그 후에도 계속 불교 유신과 작품 활동을 계속하다 성북동에서 중풍으로 죽었다. 저서로는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 『불교대전(佛敎大典)』 『님의 침묵(沈默)』 등이 있다.

민족대표 33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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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族代表三十三人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손병희·길선주(吉善宙)·이필주(李弼柱)·백용성(白龍城)·김완규(金完圭)·김병조(金秉祚)·김창준(金昌俊)·권동진(權東鎭)·권병덕(權秉悳)·나용환(羅龍煥)·나인협(羅仁協)·양전백(梁甸伯)·양한묵(梁漢默)·유여대(劉如大)·이갑성(李甲成)·이명룡(李明龍)·이승훈(李承薰)·이종훈(李鍾勳)·이종일(李鍾一)·임예환(林禮煥)·박준승(朴準承)·박희도(朴熙道)·박동완(朴東完)·신홍식(申洪植)·신석구(申錫九)·오세창(吳世昌)·오화영(吳華英)·정춘수(鄭春洙)·최성모(崔聖模)·최린(崔麟)·한용운·홍병기(洪秉箕)·홍기조(洪基兆) 등이다.

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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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麟 (1878

?)

3·1운동 때의 민족 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 호는 고우(古友)·여암(汝庵). 함남 함흥 출생. 19세 때에 한남 관찰부 집사(執事)가 되었다. 25세 때에 활빈당(活貧黨)과 일심회(一心會)에 가입하였다가 일심회가 발각되자 일본에 건너갔었고 귀국하여 외부주사가 되었으며, 황실특파 유학생으로 도쿄 부립 제일 중학교에 입학하여 일본 유학생회를 조직, 메이지(明治) 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돌아왔다. 33세 때는 보성 고등학교장에 취임, 안창호(安昌浩)의 발의로 조직된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배일 구국 운동에 투신하였다. 1918년 자기 집에서 미국으로 떠나는 신복순(申福順) 여사를 비롯하여 최남선(崔南善)·현상윤(玄相允) 등이 모여 민족 자결 원칙에 의한 한국의 독립을 선언할 것을 의논했다. 1919년 1월에 다시 최남선·현상윤 등과 중앙 학교에 모여 독립 선언문서에 서명할 지도자 선출을 밀의하고 독립 선언문의 초안을 작성, 최남선으로 하여금 완성케 했다. 이 해 3월 1일 손병희(孫秉熙)를 위시한 민족 대표 33인과 함께 대한독립을 선언,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3년 간 옥고를 겪었다. 1934년 변절하여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參議)에 취임했고, 1937년에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사장에 취임, 1939년 임전보국단(臨戰報國團) 단장에 취임하는 등 8·15 해방 전까지 친일 활동을 하였으며, 1950년 6·25 전쟁 중 납북되었다.

임시정부의 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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臨時政府-樹立

원명은 대한민국(大韓民國) 임시정부. 3·1운동 후 조국의 광복(光復)을 위하여 임시로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조직, 선포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미국 대통령 윌슨(Wilson)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에 힘을 얻어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를 부르고, 한편 일본 통치에 조직적으로 항거하는 기관의 필요성을 느낀 지사(志士)들은 각처에서 상하이로 집결하였다. 1919년 4월 11일 이들은 상하이에 임시정부 조직에 합의하여 프랑스 조계(租界) 보창로(寶昌路)에 기관을 두고 임시의정원(臨時議定院)을 구성, 각도(各道) 대의원(代議員) 30명이 회합하여 임시헌장(臨時憲章) 10개조(個條)를 채택, 발표하고 4월 17일에 임시정부 조직, 관제(官制)를 선포하였다. 당시의 각료(閣僚)로는 임시의정원의장(臨時議定院議長) 이동녕(李東寧), 국무총리 이승만(李承晩), 내무총장 안창호(安昌浩), 외무총장 김규식(金奎植), 법무총장 이시영(李始榮), 재무총장 최재형(崔在亨), 군무총장 이동휘(李東輝), 교통총장 문창범(文昌範) 등이었으나 동년 9월 11일 임시헌법(臨時憲法) 전문과 8장(八章:1장 강령, 2장 인민의 권리의무, 3장 임시대통령, 4장 임시의정원, 5장 국무원, 6장 법원, 7장 재정, 8장 부칙) 56조(條)를 개정 공포(公布), 내각(內閣)을 개편하고 대통령에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후에 李東寧), 내무총장 이동녕(후에 金九), 재무총장 이시영, 군무총장 노백린(盧伯麟:후에 柳東說), 법무총장 신규식(申奎植:후에 申翼熙), 교통총장 문창범(文昌範:후에 李?), 참모총장 유동열(柳東說:후에 盧伯麟), 노동국총판(勞動局總判) 안창호(安昌浩:후에 金東三), 비서장 김입(金立:후에 申翼熙) 등이 취임하였다. 그 후 임시정부는 재정적인 곤란과 사상적인 분렬로 많은 타격을 받았으나 전력을 기울여 임무수행에 노력하였다.그 중 중요한 활동은 ① 교통로(交通路):국내의 무장적(武葬的)·사상적(思想的) 투쟁을 위하여 교통부대에 지부(支部)를 설치, 전국 각군에 1개소의 교통국(交通局)을 두고 1개면(面)에 1개의 교통소(交通所)를 신설, 교통부 차장이 책임을 지고 국내와의 연락활동에 힘썼다. ② 연통제(聯通制):임시정부 국무원령(國務院令) 제1호로 공포된 제도로 국내 각도에 독판(督辦), 각군에 군감(君監), 각면에 사감(司監)을 두고 지방세포조직에 힘써 1921년에는 전국 각 방면에 완전한 조직을 갖게 되었다. ③ 재정:재정적인 토대를 세우기 위하여 구급의연금(救急義捐金)·인두세징수(人頭稅徵收:1인당

50전)·국내공채(國內公債)·외국공채(外國公債) 등 4가지 방법을 책정, 이를 시행하였으나 대부분이 재미교포(在美僑胞)가 보내는 헌금(獻金)으로 유지되었으며 안창호의 제안으로 실시된 공채발행은 아일랜드에서 발행한 500만 달러의 공채만이 성공하였으나 큰 활약은 없고 중국에 있는 각군관학교에 파견을 장려하고 만주에 있는 독립군을 후원했다. ⑤ 사료편찬부(史料編纂部) 설치:외국에 파견되는 특사(特使)에게 한국독립의 이론적 근거를 설명하고 일본의 침략사실과 한국역사의 우수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1921년 7월에 설치, 9월 말에 전4권을 완성하였다. ⑥ 언론기관:이광수(李光洙)가 사장 겸 주필이 되어 기간지 『독립신문(獨立新聞)』을 발간하고 그 밖에 『신대한보(新大韓報)』 『신한청년보(新韓靑年報)』를 간행, 독립선전과 계몽에 힘썼다. ⑦ 외교활동:1919년 4월 18일 김규식을 전권대사(全權大使)로 임명하여 파리강화회의(講和會議)에 파견, 한국 독립을 청원하고 일본의 침략행위를 공격하게 했으며 각지 외교관을 파견하여 한국독립의 열의(熱意)를 만국에 호소했다. 1919년 7월에는 조소앙(趙素昻)을 스위스에서 열리는 만국사회당대회(萬國社會黨大會)에 보내어 한국임시정부의 승인을 정식으로 얻게 했다. 주미(駐美) 외교위원장 서재필(徐載弼)도 미국에서 활약, 미국의회에 4번이나 한국독립안을 상정(上程)하게 하였으나 실패하고 1921년 1월에 미국 대통령과 직접 만나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이 밖에도 1920년 10월에는 손문(孫文)이 광동(廣東)에 세운 호법정부(護法政府)에 신규식(申奎植)을 파견, 양국 정부는 서로 승인할 것, 한국유학생을 중국군관학교(軍官學校)에 수용하고 조차지대(租借地帶)를 허락, 한국독립군을 양성할 것, 5백만환을 차관(借款)할 것 등의 5개조의 외교에 성공하였다. ⑧ 대일·독(對日·獨) 선전포고:1941년 임시정부는 일본과 독일에 선전을 포고하고 군대를 연합군에 편입시켜 항전(抗戰)하게 하였는데 특히 미얀마·사이판·필리핀 등지에서 용명(勇名)을 날렸다. ⑨ 시정방침(施政方針):1920년 국무원령(國務院令)으로 시정 방법을 결정, 시위운동(示威運動), 납세거절(納稅拒絶), 일본법령 거절, 임시작탄사용(臨時炸彈使用), 국내외의 감사대조직(敢死隊組織), 각 종교단체에의 침투공작(浸透工作)을 지시하는 등 활약을 하였다.그 후 1926년 9월 의정원(議政院)에서 임시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령(國務令)제를 택하여 12월 김구를 국무위원회 주석(主席), 김규식을 부주석으로 임명, 1932년 1월 김구는 이봉창(李奉昌)으로 하여금 일본 천황을 저격하게 하고 4월에는 윤봉길(尹奉吉)로 하여금 일본육군대장 시라카와(白川我則)를 폭살(爆殺)하게 하였다. 이 사건이 있은 뒤 1932년 5월 임시정부는 일본의 탄압을 피해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로, 1937년에는 강소성(江蘇省) 진강(鎭江)으로 옮겼다가 동년 11월 중국정부를 따라 중경(重慶)으로 옮겨 장개석(葬介石)과 협력하여 일본에 항쟁(抗爭)하였으며, 1940년 건국강령(建國綱領) 3장을 발표, 광복군(光復軍)을 대폭 증가하였다.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자 11월 29일 주요간부(主要幹部)가 입국했으나 계승되지 못하였다.

연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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聯通制

일제 시대에 상하이(上海)에 있던 임시정부가 국내와의 연락통으로 조직한 비밀 단체.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 안창호의 제안으로 각 도에 총판(總辦), 각 군에 군감(郡監), 면에 면감(面監)을 두어 연락망을 짰고, 해외에서는 민간 단체를 통하여 임시정부의 명령을 전달하였다.

유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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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寬順 (1904

1920)

3·1독립운동 때의 순국 열사. 충청남도 천안 출신. 중권(重權)의 딸. 예수교 공주교회(公州敎會) 부인선교사의 주선으로 이화학당에 입학했다. 본래 총명하고 의지가 굳어 어린 나이에도 겨레의 앞날을 걱정하여 ‘한국의 잔다르크’가 될 수 있기를 하느님께 기도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16세의 소녀로 시위 대열에 끼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다시 이 운동의 전국적인 전파에 일익을 담당코자 고향에 내려갔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천안·연기(燕琦)·청주(淸州)·진천(鎭川) 등지의 학교와 교회의 유지들을 방문하고 태극기를 나눠주며 시위운동을 모의, 음력 3월 1일 아누내 장날을 기해 일제히 궐기케 하였다. 수천의 군중이 가두로 몰려나온 이날 유관순은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나눠주며 행렬을 정돈하고 만세를 선창하면서 시위를 지휘, 장터 복판에 이르자 곡물점 쌀섬을 디디고 올라서서 독립을 외치는 열렬한 연설로 군중을 격려·고무했다. 이때 달려온 일본 헌병이 칼을 빼어 들고 제지해도 듣지 않고 연설을 계속하다가 드디어 헌병의 칼에 피를 흘리고 쓰러졌다. 이 사건으로 아버지 유중권, 어머니 이씨가 총살당하고, 유관순은 부상을 입은 채 체포되어 모진 고문에도 굽히지 않고 재판을 거절, 공주감옥에서 7년형을 언도받고, 경성법원으로 옮겨 서대문감옥에 투옥되었다. 옥중에서도 유관순은 살기를 원치않는다 하며 때때로 만세를 불러 동지들을 격려하다가 1920년 10월, 17세의 나이에 일본 옥리(獄吏)의 악형을 받고 순국했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헌장 단장(單章)을 받았다.

문화정치의 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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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化政治-標榜

3·1운동은 일본의 정책에도 형식적이나마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그리하여 새 총독 사이토 마코트(齋蘇實)의 부임과 함께 일본은 이에 무단정치를 버리고 소위 문화정치를 실시하였다. 우선 지금까지의 육해군대장이 임명되던 총독에는 문관도 임명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며, 헌병경찰제도 대신 보통경찰제도를 채용한다는 것이었다. 또 교육을 보급시켜 일본인과 같은 수준으로 올린다는 것이며, 언론의 통제를 완화하여 한국인이 경영하는 한글 신문의 간행을 허락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의 전환은 허위와 기만에 가득찬 것으로 한국민족에 대한 일종의 회유책으로 취해진 것이었다. 따라서 일제의 식민정책의 근본에는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한글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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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會

1921년 12월 3일 한글 연구를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 처음의 명칭은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로서, 국어학 연구에 뜻을 두고 나아가서는 나라를 근심하던 학자들의 왜정하(倭政下)임에도 불구하고 한글을 연구하기 위하여 당시의 휘문의숙(徽文義塾:지금의 휘문학교)에서 조직, 회원으로는 장지영(張志暎)·김윤경(金允經)·최현배(崔鉉培)·이윤재(李允宰)·권덕규(權德奎)·신명균(申明均)·최두선(崔斗善)·이병기(李秉岐) 등 15, 16명이었다. 이들은 동호인들을 규합한 후 학회활동으로 연구발표회와 강연회를 갖는 한편, 한글의 우수성을 선전하였다. 1927년 2월 10일에는 학회 기관지(機關誌)로 『한글』을 발간, 다음 해 9월에 9호까지 내고 휴간, 1931년에는 학회의 이름을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로 고치고 꾸준한 활동을 하였으며, 1932년 5월 1일 『한글』을 속간(續刊), 1933년에는 <한글맞춤법통일안>을 작성하고 표준어를 사정(査定)하였으며, <외래어표기법(外來語表記法)>을 제정, 우리말 사전을 편찬하는 등 있는 힘을 다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을 일으키자, 1942년10월 1일부터 그들의 소위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에 의거하여 회원들을 독립운동죄(獨立運動罪)로 몰아 5·6차에 걸쳐

검거하니, 이것이 유명한 조선어학회사건(朝鮮語學會事件)이다. 이로 인하여 30여 명이 검거되었고, 학회도 자연 해체되었다가 8·15해방과 더불어 부활되었고 1949년 ‘한글학회’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이 학회는 국어의 부흥과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으며, 또 1947년부터 시작하여 온갖 고난 끝에 1957년에 간행한 『근사전』 6책은 참으로 거족적(擧族的)인 대사업으로 길이 빛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