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음악/한국음악/한국음악가/이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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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사성[편집]

孟思誠(1360-1438)

고려 우왕-조선 세종 때의 명상(名相), 음악 이론가. 자는 자명(自明), 호는 고불(古佛), 본관은 신창(新昌). 온양 출신. 권근(權近)의 문인. 1386년(우왕 12년) 문과에 급제하고 1392년 수원 판관을 역임. 1406년 이조참의(李曺參議)·한성부윤(漢城府尹), 1416년 예조판서, 1419년이조판서, 1427년 우의정, 1431년 좌의정에 올랐다. 1432년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를 겸하여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를 찬집(撰集)하고 1435년 치사(致仕)했다. 황희(黃喜)와 함께 조선 초기 문화를 이룩하는 데 공을 세웠고 청백리로 이름이 났고, 특히 음악 이론에 밝아 박연(朴堧)과 함께 세종대왕의 음악정리를 도왔다. 악기를 스스로 제작하고, 향악(鄕樂)에는 누구보다도 널리 정통하고 있어서, 세종대왕이 "아악은 박연에게, 향악은 맹사성에게 물으라"고 할 정도였다.

박연[편집]

朴堧(1378-1458)

근세조선 세종 때의 음악 이론가. 자는 탄부(坦夫), 호는 난계(蘭溪). 본관은 밀양, 영동 태생. 1405년(태종 5년) 문과에 급제하고, 집현전(集賢殿) 교리(校理)를 거쳐 지평(持平) 및 문학(文學)을 역임하였다. 세종이 즉위한 후 악학별좌(樂學別坐)에 임명되어, 음악에 관한 이론과 사무를 맡아 보았다. 당시 불완전했던 악기의 조율의 정리, 악보 찬집의 필요성을 상소하여, 1427년(세종 9년)에는 편경 12매를 제작하고, 이것을 자기가 측정하여 만든 12율관(十二律管)에 의거한 정확한 조율로 하여 연주케 했다.

한편 궁중 조회 때 사용하던 향악을 폐지하고 아악을 대신 연주하게 하였다. 1431년에는 회례(會禮)에도 아악을 연주하게 하고, 종래에 조회 및 회례에서 기녀(妓女)가 춤추던 것을 무동(舞童)으로 대치하고, 문무(文舞) 및 무무(武舞)의 작변지절(作變之節)과 속부(俗部) 남악지기(男樂之伎)를 추게 하여 궁중 악무(樂舞)를 개혁했다. 1433년 유언비어 유포 혐의로 파직되었다가 사면되어, 아악에 종사하게 되었다. 공조참의(工曺參議)·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를 거쳐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를 지냈다.

1445년 성절사(聖節使)로서 명나라까지 갔다 와서 인수부윤(仁壽府尹)·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를 역임하였고,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이르렀다. 1453년(단종 1년)의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아들 계우(季愚)는 처형되었으나, 그는 3대조(三代朝)에 걸친 공로로 죽음을 면하고 파직, 고향으로 내려가 초야에 묻히었다. 그는 이론에 밝은 악률가(樂律家)로, 세종 같은 위대한 임금을 도와서 아악의 정비에 있어서 공을 많이 세웠으므로 왕산악, 우륵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악성(樂聖)으로 꼽히고 있다. 저(笛)의 명연주가이고, 금(琴)·슬(瑟) 등 아악기에 능하였다. 그의 저서로 <난계유고(蘭溪遺稿)>, <가훈(家訓)> 등이 전한다.

성현[편집]

成俔(1436-1509)

조선(세조-성종)의 정치가, 학자, 음악 이론가. 자는 경숙(磬淑), 호는 용재·허백당(虛白堂)·부휴자(浮休子), 본관은 창녕. 1462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오른 이후 대사헌, 대사간을 거쳐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음악 이론에 정통한 그는 장악원제조(掌樂院提調)를 겸하여 음악 행정에 공이 많았고, 특히 1493년(성종 24년)에 신말평(申末平), 유자광(柳子光) 등과 한국음악을 집대성한 우리나라 최대 음악서인 악학궤범(樂學軌範)을 편찬하였다.

<허백당집(虛白堂集)>·<용재총화> 등이 있어 근세조선 초기의 정치·사회·제도·문화와 더불어 음악에 관한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안상[편집]

조선(선조)의 음악 이론가.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명종 때의 명신(名臣)인 안현(安玹)의 아우이다. 1561년(명종 16년)에 장악원 첨정(僉正)이 되었고, 음악 이론에 밝아 악사(樂師) 홍선종(洪善終), 악공(樂工) 이무금(李無金)과 더불어 만대엽(慢大葉)·정석가(鄭石歌)·사모곡(思母曲) 등 옛음악을 엮어 내었다. 1572년(선조 5년)에 개판(開版)한 것 중 유일본(唯一本)으로 남아 있는데 <금합자보(琴合字譜)> 혹은 <안상금보>라 하며 보물 263호로 지정되었다.

양덕수[편집]

梁德壽

조선(선조-광해군)의 음악 이론가. 임진란으로 남원에 내려가 살다가 임실현감 김두남(金斗南)과 사귀게 되었다. 그의 권고를 듣고 1610년(광해군 2년) 거문고의 도를 끊기지 않게 하기 위하여 <만대엽(慢大葉)>·<중대엽(中大葉)>· <감군은(感君恩)> 등 옛 음악을 엮어 <양금신보(梁琴新譜)> 악보를 만들었다.

이득윤[편집]

李得胤(1553-1630)

조선(선조-광해군)의 정치가·학자·음악 이론가. 자는 극흠(克欽), 호는 서계(西溪), 본관은 경주.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이다. 1588년(선조 21년) 진사가 된 뒤, 참봉, 형조좌랑, 괴산(槐山) 군수를 지냈다. 서기(徐起)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역학(易學)에 뛰어났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1620년(광해군 12년) <현금동문유기(玄琴東文類記)>를 엮어서 세상에 내놓아 가야금의 법도(法道)를 바로 전하게 하였다. 음악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여러 금보 및 그 저자와 거문고 대가에 대하여 다룬 것을 보면, 그가 음악에 조예가 깊고 상당히 박학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저서로 <서계집(西溪集)>이 남아 있다.

신성[편집]

申晟

조선(숙종)의 음악 이론가. 소년 때부터 음악을 즐겨 하였고, 악관(樂官)을 지냈다. 1680년경에 <만대엽>·<중대엽>·<영산회상> 등 옛음악의 거문고 악보를 엮은 <현금신증가령(玄琴新證假令)> 악보집을 내었다.

서명응[편집]

徐命膺(1716-1787)

조선(영조-정조)의 정치가, 학자. 자는 군수(君受), 호는 보만재(保晩齋). 본관은 달성. 1754년 문과에 급제하고 동부승지, 이조참의, 우승지, 홍문관 제학, 이조·호조·병조판사 등을 역임했다. 역학에 정통한 실학(實學)의 대가이다. 1759년(영조 35년)에 세종·세조 때 쓰였던 당악·향악 등 옛음악을 엮어 <대악전보(大樂前譜)>·<대악후보>를 엮었다. <대악전보>는 분실되고, <대악후보>만이 전한다.

서유구[편집]

(1764-1845)

조선(정조-헌종)의 학자, 정치가. 자는 준평(準平), 호는 풍석(楓石), 본관은 달성. 대제학 서명응(徐命膺)의 손자. 1790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고 의주부윤(義州府尹), 대사성, 부제학, 형조판서, 예조판서, 병조판서, 우참찬,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실학에 조예가 깊고 백가서(百家書)에 통달하여 이름을 떨치었고 <종저보(種藷譜)>·<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한양세시기(漢陽歲時記)>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음악에도 학식이 많아서, 그 당시 악보를 엮어서 <유예지>라는 책을 저술했다. <유예지>는 근세조선 중기음악과 후기음악을 비교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이규경[편집]

李圭景(1788- ? )

조선(순조-헌종)의 학자. 자는 백규(百揆), 호는 오주(五洲), 소운거사(嘯雲居士). 본관은 전주. 실학자 이덕무의 손자. 일생 동안 초야에 묻혀 할아버지의 실학을 계승하여 근세조선 후기의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로 이름을 떨치었다.

<오주연문 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가 유명하며, 특히 <구라철사금보(歐邏鐵絲琴譜)>라는 양금보(洋琴譜)를 엮어 한국음악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남기었다. 저서에 <오주연문장전산고>·<오주서종(五洲書種)>·<청장관고(靑莊館稿)> 등이 있다.

신재효[편집]

申在孝(1812-1884)

근세조선(철종-고종)의 판소리 이론가, 작가. 자는 백원(百源), 호는 동리(桐里). 본관은 평산. 고창 출신.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1850년까지 치산(治産)에 솜씨를 보여 많은 가산(家産)을 모았고, 그 재력으로 판소리 명창들을 후원하는 한편, 판소리 이론을 연구했다. 1876년 기민(饑民)을 구제한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고, 이어 절충장군(折衝將軍)을 거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품(陞品)되고, 호조참판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겸직했다. 많은 명창들을 후원하고 판소리 이론을 가르쳐서 김세종(金世宗), 전해종(全海宗), 진채선(陣彩仙), 허금파(許錦波) 등 많은 명창을 길러냈다. 만년에는 춘향가·심청가·흥보가·적벽가·수궁가·변강쇠가 등 판소리 6마당을 개작했고 광대가(廣大歌)·도리화가(桃李花歌) 등 단가(短歌)를 지었다.

김영제[편집]

(1883-1954)

근세조선(고종-일정)의 국악 이론가. 연주가. 호는 괴정(槐庭), 본관은 경주. 충청북도 괴산군 출생. 조선 말기 유명한 국악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순조 때 악사로 가야금과 정재춤의 명인으로 익종(翼宗)을 도와 공을 세운 김창하(金昌河)가 증조 할아버지이고, 초대 악사장을 지낸 가야금의 대가 김종남(金宗南)이 양(養)할아버지이고, 철종 때 가야금 명인 김종표(金宗杓)가 할아버지이다. 어려서 한문을 공부하고 1897년에 장례원 전악에 임명되고, 1908년 궁내부 국악사로 임명되었고, 1911년에는 이왕직 아악사로 임명되었다. 1928년에는 4대 아악사장을 역임했다. 국악 자료의 수집, 악서 편찬, 악보 정리, 악기 정리 등의 공이 크다.

함화진[편집]

咸和鎭(1884-1949)

근세조선(고종) 및 대한민국 시대의 국악 이론가, 연주가. 본관은 양근(楊根), 초명(初名)은 화진(華鎭), 자는 순중(舜重)이고 호는 오당(梧堂)이다. 서울 출생. 조선 말기의 손꼽히는 아악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헌종 때의 악사요 단소와 젓대의 뛰어난 명인인 함제홍(咸濟弘)이 할아버지이고, 젓대의 명인인 함재영이 큰아버지, 거문고 삼절(三絶)의 칭호를 받은 함재운(咸在韻)이 아버지이다.

어려서 5년간 한문을 배우고, 1897년 소학교와 고등소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웠다. 사립 보성 일어학교를 거쳐 사립 중동학교 부기과를 졸업하였다. 1901년 장악원에 들어가, 이병문(李炳文)에게 거문고, 명완벽(明完璧)에게 가야금을 사사했다. 1911년 장악에 임명되고, 1913년 이왕직 아악수장에 임명되었다. 아악사장 직에 있는 동안에 국악의 교육, 보급, 악기 제작 등의 업적이 많았다. 특히 1937년에는 중국에서 공후와 운라(雲羅)를 구해 왔고, 수백년간 만든 일이 없던 편경(編磬)을 새로 만든 공이 크다. 1931년에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국악 이론과 실기를 지도했고, 만년까지 국악운동과 저술에 종사했다.

주요 저서에는 <조선아악개요(朝鮮雅樂槪要, 1915)>, <조선악기편(朝鮮樂器編, 1933)>, <이조악제원류(李朝樂制源流, 1933)>, <증보가곡원류(增補歌曲源流, 1938)>, <조선음악통론(1948)>이 있고, 유고로 <국악 50년 회고담>이 있다.

안기옥[편집]

安基玉(1894-1974)

전남 나주 태생. 가야금 산조의 창시자 김창조의 제자로서 특히 김일성과의 음악적 논쟁으로 유명하다. 이 분야 명인으로 살다가 1974년 양강도 혜산에서 향년 81세로 삶을 마감한 민족음악가이다. 일제에 항거한 음악인으로 1946년에 월북하여 평양음악대학 민족음악학부 학부장도 지냈고, 수많은 창작활동과 저술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판소리 발성법이 어두운 탁성이자 쐑소리이기 때문에 역사발전에 따라 그 발성법도 현대화하여야 한다는 김일성의 주장에 맞서 판소리야말로 민중의 힘차고 올바른 삶의 철학이 구조화한 서사적 문학이자 광대를 통한 민중문학의 표현형태이므로 남도 판소리에서 탁성을 제거하면 그 노래 장르 역시 성립되지 않는다며 비판했다.

또한 그는 김창조로부터 전수받은 진양조(5장)-중모리(5장)-중중모리(3장)-자진모리(5장) 등 장별제(장단 하나에 몇 개의 장으로 구성한) 산조에다 엇모리와 휘모리를 각각 몇 개의 장절로 창작 삽입하여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법성포 뱃노래>와 민족관현악곡 <조국산천>, 민족기악 중주곡 <새봄> 등을 창작 발표하였으며, <조선장단에 대하여>라는 논문과 정남희와 공저로 <가야금 교칙본> 등의 저서를 남겼다.

김영동[편집]

金英東(1951- )

국악 작곡가.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와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에서 대금을 전공했다. 1979년 <개구리 소리>와 <애서당>을 담은 동요국악곡집을 내놓으며 예사롭지 않은 눈길을 끌었다. 전통음악뿐만 아니라 연극, TV 드라마와 다큐멘터리 음악도 작곡했는데, 이러한 작품으로는 <조각배>, <삼포로 가는 길>이 있다. 또한 국악관현악 작품집인 <매굿>과 대금 연주곡집 <상영산>은 뛰어난 작품으로 인정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