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음악/한국음악/한국음악가/판소리의 명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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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삼득[편집]

權三得(1772-1841)

조선(영조-헌종)의 판소리 명창. 전북 익산 출생. 완주 출생이라는 설도 있다.이른바 판소리 8명창의 한 사람. 본명은 정(人政)이며, 판소리 창본(唱本)에는 권삼보·권선달·권생원으로 나오고 광대가(廣大歌)에는 권사인(權士仁)으로 나온다. 흥보가를 잘 불렀고 그의 더늠(스스로 작곡하여 뛰어나게 잘 불렀던 대목)은 흥보가 중에서 '제비후리러 나가는데'이며, 그의 제(음악적 특징)를 설렁제(덜렁제) 혹은 '드렁조'라고 부른다.

송흥록[편집]

宋興綠

조선(정조-철종) 때의 판소리 명창. 8명창의 한 사람. 전북 운봉 출신으로, 선대의 연고지는 전북 함열·황등이라 한다. 판소리에 우조, 계면조를 체계적으로 다루었고 진양조를 도입하는 등 고도로 예술화시킨 판소리의 중시조(中始祖)라 할 수 있다. 동편제 판소리 유파를 확립하였다. 그의 가문에서는 송광록(宋光綠)·송우룡(宋雨龍)·송만갑(宋萬甲) 등 쟁쟁한 명창이 잇따라 배출되었다.

각 마당 판소리에 능하였으며, 특히 춘향가와 변강쇠가에 출중했다. 그의 더늠은 춘향가의 <옥중가> 중에서 '귀곡성(鬼哭聲)'과 단가 <천봉만학가(千峰萬壑歌)>이다. 이것은 오늘날 고고천변(皐皐天邊)으로 고쳐 불리고 있다.

염계달[편집]

廉季達

조선(정조-철종) 때의 판소리 명창. 경기도 여주(혹은 안성, 혹은 전주) 출생. 춘향가를 잘하였고, 판소리에 경드름(京調)을 창제하였다. 그의 더늠은 춘향가의 그네타는 대목·십장가(十杖歌)·돈타령, 수궁가에서의 토끼가 자라에게 욕하는 대목이 전해진다.

모흥갑[편집]

牟興甲

조선(정조-철종) 때의 판소리 명창. 경기도 진위(振威) 출생. 적벽가를 특히 잘하였고, 평양 연광정에서 소리하여 십리 밖까지 들리게 했다 한다.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평양감사 도임도에 모흥갑 판소리도가 남아 있다.

그의 더늠으로 춘향가 중에서 <이별가>의 '날 다려 가오'가 전해지며, 이것을 경드름의 일종으로 보기도 하고 동강산제라고 하는 이도 있다.

송광록[편집]

宋光綠

조선(순조-철종) 때 판소리 명창. 가왕으로 이름난 송흥록의 아우이고 근래 명창 송만갑(宋萬甲)의 조부. 형 흥록의 고수(鼓手)로 있었으나 제주도로 건너가서 4, 5년간 소리 공부를 하여 명창이 되었다. 춘향가에 능하고, 그의 더늠으로는 진양조 우조로 부르는 <긴사랑가>의 '만첩청산 늙은 범이…'가 전한다.

신만엽[편집]

申萬葉

조선(정조-철종) 때 판소리 명창. 사풍세우(斜風細雨)라는 칭호를 받았다. 전북 여산(礪山) 출생. 8명창의 한 사람. 수궁가를 잘 불렀고 그의 더늠으로 수궁가에서의

<소지노화(笑指蘆花)>가 전해지는데 그의 소리제는 가야금 병창제로 알려진 '석화제'라 한다. 특히 <토별가(兎鼈歌)>를 잘 불렀다.

김성옥[편집]

金成玉

조선(순조) 때 판소리 명창. 고종 때의 명창 김창룡(金昌龍)의 조부. 진양조를 판소리에 넣어 처음 작곡하였고, 이것을 그의 남매(男妹)간인 명창 송흥록(宋興綠)이 활용했다 한다. 30세에 요절하였다.

김제철[편집]

金齊喆

조선(정조-철종) 때 판소리 명창. 8명창의 한 사람. 충청도 출생. 그의 더늠은 심청가 중에서 <갑자 사월 초파일>이다. 그의 소리제는 가야금과의 병창제인 '석화제'라 한다.

주덕기[편집]

朱德基

조선(정조-철종) 때 명창. 전남 창평 출생. 송흥록, 모흥갑의 고수로 있다가 산중에 들어가 나무를 베어 고사를 지내고 소리를 배웠다 하여 벌목정정(伐木丁丁)이라는 별호가 생겼다. 주덕기를 8명창의 하나로 꼽기도 한다. 적벽가를 잘하였고, 그의 더늠은 적벽가 중에서 '자룡이 활 쏘는데…'이다.

방만춘[편집]

方萬春

조선(순조-철종) 때 판소리 명창. 충청도 해미(海美) 출생. 적벽가에 능했고 그의 더늠으로는 '적벽가 불지르는 데…'가 있다. 그의 창본(唱本)이 손자 방응규(方應奎)를 통하여 최근까지 전하였으나 행방불명이 되었다.

고수관[편집]

高壽寬

조선 후기 헌종(1835-1849)과 철종(1850-1863) 때 판소리 명창. 충남 해미(海美) 출생. 1827년 정부에 올린 '팔도재인등장(八道才人等狀)'에 의하면, 그 당시 판소리 명창인 송흥록(宋興祿)·염계달(廉啓達)·김계철(金啓喆) 등과 함께 팔도재인의 한 사람으로 활약했으며 신재효(申在孝)의 <광대가(廣大歌)>에서 중국 시인 백낙천(白樂天)에 비교될 정도로 판소리에 뛰어났다.

송흥록이나 모흥갑(牟興甲) 또는 염계달보다 조금 후배인 것으로 알려졌고, 염계달의 창법을 많이 전수했다고 전하는데, 그의 더늠은 춘향가의 사랑가에 전한다. 다른 명창에 비하여 많은 문식을 갖추었고 예술적 재능이 뛰어났기 때문에 소리좌석에 알맞는 노래를 골라서 잘 불렀다. 만년에 화류병(花柳病)에 걸려서 코멘

소리로 사랑가를 부르곤 했기 때문에, 그의 소리는 비성(鼻聲)으로 유명하다. 또한 동지(同知)라는 벼슬을 얻어 충남 공주에서 여생을 보냈다.

박유전[편집]

朴裕全

조선(순조-고종) 때 판소리 명창. 전라북도 순창 출생. 전라남도 보성군 상산리에 거주하였다. 고운 목소리와 훌륭한 기량으로 대원군의 총애를 받아 무과에 급제하였다. 대원군이 그의 소리를 듣고 감탄하여 "네가 제일(第一) 강산(江山)이다"라고 말하였다 하여 그의 거주지 강산리(岡山里)를 따서 강산(江山)이라는 호를 내렸다.

심청가, 적벽가를 잘하였고 특히 새타령을 잘했다. 판소리에 새로운 스타일을 넣었다. 서편제 판소리 유파의 창시자로도 알려졌다. 그의 소리제는 정창업(丁昌業), 김창환(金昌煥) 계통의 서편제와 구별하기 위하여 강산제로 부르기도 한다. 그의 소리는 이날치(李捺致)·정재근(鄭在根)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무형문화재 보유자 정권진(鄭權鎭)이 강산제 <심청가>를 보유하고 있다. 그의 더늠은 춘향가 중 이별가라 한다.

이석순[편집]

李錫順

조선(헌종-고종) 때 판소리 명창. 경기도 안산 출생이며 김제철·신만엽과 동배(同背)이다. 춘향가를 잘하였고, 그의 더늠은 진양 우조로 부르는 춘향방사면벽도(春香房四面壁圖)이다.

주상환[편집]

朱祥煥

조선(헌종-고종) 때 판소리 명창. 전라남도 창평 출생. 주덕기의 아들로, 그는 아버지에게 사사하였다. 심청가를 잘했고, 그의 더늠은 심청가 중 심봉사 젖동냥하는 대목이다.

송우룡[편집]

宋雨龍

조선(헌종-고종) 때 판소리 명창. 전라

북도 구례 출생. 정조-철종 때의 명창인 송광록의 아들이며 철종-왜정 때의 명창 송만갑(宋萬甲)의 아버지이다. 동문인 박만순과 더불어 송씨 가문의 고매한 동편제 법통(法通)을 이어온 명창으로 62세까지 살았다. 그의 더늠은 <수궁가> 중에서 '토끼, 용왕을 속이는데'이다.

박만순[편집]

朴萬順

근세조선(헌종-고종) 때 판소리 명창. 전라북도 고부군 출생. 가왕(歌王)으로 이름 났던 송흥록의 수제자로 동편제 판소리의 거장이다. 성격이 호탕하고 소리의 폭이 커서 대원군의 총애를 받았다 한다. 8명창 직후 판소리계의 손꼽히는 명창이다. 68세까지 살았다 한다. 양성(陽聲)으로 우조를 주로 쓰고 점잖으면서도 국이 큰 소리를 했다. <춘향가> 중 '사랑가', '옥중가'와 <적벽가> 중 '화룡도'를 잘 불렀고, <춘향가> 중에서 춘향이 옥중에서 몽유(夢遊)하는 대목이 그의 더늠이라 한다.

김세종[편집]

金世宗

조선(헌종-고종) 때 판소리 명창. 이론가. 전라북도 순창 출생. 동편제 소리를 이어받은 명창으로, 신재효(申在孝)에게서 지도를 받아서 판소리 이론은 당시 제1인자였다. 판소리 사설 이면(내용)과 발림이 일치해야 하고 상성(上聲)과 하성(下聲)을 쓰는 것도 사설 이면에 따라야 하며 어단성장(語短聲長)이라 하여, 낱말은 짧게 붙이고 말의 끝은 길게 소리하라는 이론을 주장하였다. <춘향가>를 잘하였고, 천자(千字) 뒤풀이가 그의 더늠으로 전한다.

이날치[편집]

李捺致

조선(헌종-고종) 때 판소리 명창. 자는 경숙(敬淑). 순조-고종 때의 명창 박유전의 제자로 서편제 판소리 법통을 이어받았다. 수리성(聲)으로 성량이 풍부하여 인경소리를 흉내내면 동네가 울렸으며 표현력과 설득력이 우수하여 청중을 휘어잡고 웃기고 울게 했다 한다. 서편제 소리의 대표적인 명창으로 당시 동편제 거인 박만순(朴萬順)과 능히 겨루었다 한다. 새타령을 잘하여 산새를 불러들였다 한다. <춘향가>와 <심청가>를 특히 잘하였고 그의 더늠은 <춘향가> 중에서 '춘향자탄가(春香自嘆歌)'이다.

정춘풍[편집]

鄭春風

조선(헌종-고종) 때 판소리 명창. 충청도 어느 양반가문에 태어나 진사(進士)에 올랐으나 성격이 호탕하고 판소리를 즐겨 스스로 호를 춘풍이라 하고 혼자서 깨우쳐 명창이 되었는데 그의 소리는 동편제에 가까우나 송흥록의 제를 이어받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독특한 일가를 개척했다 한다. 그의 소리제는 제자 박기홍(朴基洪)에게 전해졌다.

학식이 높은 만큼 판소리 이론에 밝아 신재효(申在孝)와 쌍벽을 이루었다. 대원군의 총애를 받았고 만년에 전라북도 여산에서 살다가 68세로 세상을 떴다. 더늠으로 단가 <소상팔경(瀟湘八景)>이 남아 있다.

정창업[편집]

丁昌業

조선(철종-고종) 때 판소리 명창. 전라남도 강진에서 출생하여 나주, 함평에서 살았다. 서편제 명창으로 박만순, 이날치와 함께 활약하였고, 오위장 제수를 받았다. 그는 박유전, 이날치 계통과 특징이 다른 서편제로 그의 소리는 김창환에 의하여 이어졌다. 동편제 소리 가문의 종손격인 송만갑이 자기의 가문을 외면할 만큼 정창업은 특출한 명창이다. 73세에 작고하였다.

<흥보가>를 잘하였고 그의 더늠은 <심청가> 중에서 몽은사의 중이 내려오는 대목이다.

전해종[편집]

全海宗

조선(헌종-고종) 때 판소리 명창. 전라북도 부안 출생. 신재효에게서 지도를 받았고 <숙영낭자전>과

<심청가>가를 잘하였다. 더늠은 <심청가> 중에서 심청이 용궁에서 환생하는 대목이다.

한송학[편집]

韓松鶴

조선(헌종-고종) 때 판소리 명창. 경기도 수원 출생. 새타령과 흥부가에 능했고 특히 장끼타령을 잘하였다. 그의 소리제는 중고제 소리로 매우 독특하였다 한다.

김정근[편집]

金正根 조선(철종-고종) 때 판소리 명창. 충청남도 강경 출생. 순조 때 명창 김성옥(金成玉)의 아들이요 고종-일정 때 명창 김창룡(金昌龍)의 아버지이다. 무숙이타령을 잘하였고, 판소리에 '상궁접'이라는 새로운 곡조를 창시했다. 그의 문하에서 황호통(黃浩通), 이동백(李東伯), 김창룡(金昌龍) 등 여러 명창이 나왔다.

김거복[편집]

金巨福

조선(헌종-고종) 때 판소리 명창. 전라북도 부안 출생. 서편제 소리 명창으로 성량이 크고 아름다웠다 한다. 65세에 사망함. <수궁가>를 잘하였는데 특히 용왕이 탄식하는 대목을 잘했다.

김창록[편집]

金昌祿

조선(철종-고종) 때 판소리 명창. 전라북도 무장 출생. <심청가>를 남달리 잘했다. 동편제 소리로 박만순, 김세종과 같이 활약했다. <춘향가>에 '8도담배가'를 작곡했고, 또 '산유화가(山有花歌)'를 작곡했다. 그의 더늠은 <심청가> 중에서 심청이 부친과 이별하는 대목이다.

장자백[편집]

張子伯 조선(철종-고종) 때 판소리 명창. 전라북도 순창 출생. 김세종(金世宗)의 제자로 동편제 명창이다. <춘향가>와 <변강쇠타령>을 잘 불렀다. 미남자로 풍채가 좋은 데다 의연한 너름새와 탁월한 솜씨로 청중을 휘어잡았다. 그의 더늠은 <춘향가> 중에서 광한루 경치 대목이다.

김정근[편집]

金定根 철종·고종(1863-1907) 때의 판소리 명창. 진양조의 창시자인 김성옥(金成玉)의 아들이며, 명창 이동백(李東伯)의 스승으로 알려져 있다. 중고제의 명창이며 현재는 전하지 않고 있는 무숙이타령을 잘 불렀다.

정학진[편집]

丁學珍(1863-1912)

판소리의 명창. 전남 함평 출생. 명창 정창업(丁昌業)의 큰아버지로 명창 박유전(朴裕全)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적벽가·흥보가·수궁가에 특기가 있었고 그의 더늠이 조카 정광수에게 이어졌다.

이창운[편집]

李昌雲

조선(철종-고종) 때 판소리 명창. 충청남도 문의(文義) 출신이다. <적벽가>를 출중하게 잘하였고, <적벽가> 중 새타령은 박유전, 이날치 이후에 그만큼 하는 이가 드물었다.

황호통[편집]

黃浩通

조선(고종-순종) 때 판소리 명창. 충청남도 공주 출생. 김정근(金正根)에게서 배웠다. 목청이 양성(陽聲)이고 우렁차서 호통 기운이 많으므로 호통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춘향가와 심청가를 잘 불렀다. 특히 <춘향가> 중에서 어사발행(御史發行)하는 대목을 잘하였다.

성창렬[편집]

成昌烈

조선(철종-고종) 때 판소리 명창. 당시 최상준, 황호통과 어깨를 겨룬 대가로 각종 판소리에 능하였고

<춘향가>를 잘하였으며, 이도령 과거 장면이 그의 더늠이다.

백점택[편집]

白占澤

조선(철종-순종) 때 판소리 명창. 충청남도 연기(燕岐) 출생. 중고제 판소리를 잘하였다. 춘향가를 잘하였고 장기는 <춘향가> 중에서 박석틔와 어사 상봉이다.

이창윤[편집]

李昌允

조선(고종-순종) 때 판소리 명창. 전라남도 영암 출생. 이날치의 제자로 서편제 소리를 잘하여 이름을 날렸다. <심청가>를 썩 잘하였고, 특히 심청이 밥 빌러 나가는 대목을 잘하였다.

오끗준[편집]

조선(고종-순종) 때 판소리 명창. 전라남도 순천 출생. 박만순의 제자로 동편제 소리로 성창열, 이창윤과 어깨를 겨루어 이름을 날린 명창이다. <춘향가>를 잘하였고 더늠은 봉사 해몽하는 대목이다.

배희근[편집]

裵喜根

조선(고종-순종) 때 판소리 명창. 전라남도 영광 출생. 호기있고 성격이 기이하여 서편제 소리를 하되, 전통적인 법제도 하지 않고 자기가 자작한 엉뚱한 제로 하면서도 조금도 남에게 굴하지 않았다 하여 판소리계의 기인으로 알려져 왔다.

강재만[편집]

姜載萬

조선(고종-순종) 때 판소리 명창. 충청남도 금산 출생. 동편제 소리를 바르게 하였고 <춘향가>를 잘 불렀는데, 특히 <춘향가> 중에서 어사, 역졸분발하는 대목을 잘하였다.

김채만[편집]

金采萬

조선(고종-일정) 때 판소리 명창. 전라남도 능주(綾州) 출생. 서편제 소리 중에서도 가장 서편제적인 방향으로 판소리를 개척했다. 계면조를 하되 가락이 매우 정교하고 신묘한 장식음과 성음을 붙여 불렀고 아귀성으로 맛있는 소리는 전무후무했다고 한다. 김창룡이 이르기를 "계면을 하려거든 김채만같이 하라"고 할 정도였다.

고운 목소리와 맛있는 소리로 대중을 한번에 휘어잡기로는 송만갑을 능가하였다 한다.

유공렬[편집]

柳公烈

조선(고종-순종) 때 판소리 명창. 전라북도 익산 출신. 8, 9세 때부터 특별한 재주가 있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15세경에 박만순에게서 수년간 수련을 쌓았다. 30세경에는 전주대사습장(大私習場)에서 기량을 발휘하여 세상에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40세쯤에 서울에 올라와 원각사(圓覺社)와 광무대(光武臺)에서, 김창환(金昌煥)·송만갑(宋萬甲)과 함께 활약했다. 1930년경에 세상을 떠났다. <춘향가>와 <심청가>를 잘하였고 특히 <춘향가> 중에서 '이별가'를 잘하였다.

신학준[편집]

申鶴俊

조선(고종-순종) 때 판소리 명창. 동편제 판소리로 이름을 날렸으나 50여세에 세상을 떠났다. <수궁 가>를 잘하였고 특히 용왕이 세상에 갔다 온 '별주부'를 맞는 대목을 잘하였다.

전도성[편집]

全道成(1864- ? )

조선(고종-일정) 때 판소리 명창. 전라북도 임실 출생. 정읍에서 거주. 9세 때부터 부친 전명준(全明俊) 밑에서 공부하다가 28세 때 송우룡(宋雨龍)에게 배웠다. 동편제 창법으로 매우 고아한 성음으로 부르며 판소리 역사와 이론에 밝았다. 목소리는 양성이고 기교가 매우 정교하였다. 지방에 묻혀 있어서 별로 알려지지 않은 명창이다. 동편제에서 이탈한 송만갑과 동편제를 고수한 전도성과는 이론이 달랐다.

<심청가> 중에서 '범피중유'를 잘 불렀다.

한경석[편집]

韓景錫

조선(고종-일정) 때 판소리 명창. 담양(潭陽) 출신. 서편제 소리 명창으로 60여세까지 살았다. 풍채가 당당하고 성음이 명랑하고 <춘향가>를 잘하였다. 특히 '옥중가'를 잘 불렀다.

송만갑[편집]

宋萬甲(1865-1939)

조선(고종-일정) 때 판소리 명창. 5명창의 한 사람. 전라남도 구례군(求禮郡) 봉북리(鳳北里)에서 동편제 판소리 명문(名門)에 태어났다. 송우룡의 아들이요 가왕(歌王) 송흥록의 종손(從孫)이다. 7세부터 아버지로부터 판소리 공부를 하였다. 13세 때는 전주대사습놀이에서 재롱으로 불러본 것이 청중을 감동시켜서 명창으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성격이 활발하고 발랄한 소리를 좋아하여 자기 가문의 고매한 판소리에서 이탈하였다.

정창업(鄭昌業) 소리에 감복하여 동편제의 판소리에 서편제의 발랄하고 구성진 요소를 가미하여 독특한 자기 스타일을 개척하였다. 따라서 많은 대중에게 갈채를 받은 반면 자기 가문에서 환영을 받지 못하고 박기홍(朴基洪)·전도성(全道成)과 같은 전통적인 동편제 명창들에게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어전에서 판소리를 불러 감찰(監察) 벼슬을 받았다. 김창환, 이동백과 더불어 원각사에서 연주한 이래 연흥사, 협률사에서 활약했고 조선성악연구회를 조직하여 공연과 후진양성에 힘썼다.

<오바탕>과 <변강쇠타령>까지 모두 능하였으나 <박타령>이 특출했다. 장판개(張判介), 김정문(金正文), 박봉래(朴鳳來), 박녹주(朴綠珠) 등 쟁쟁한 명창들이 그의 문하에서 났으나 대개 일찍 타계하였다. 일정 때 취입된 음반이 더러 남아 있는데, <고고천변>, <진국명산>, <박타령> 등이 걸작이다.

김찬업[편집]

金贊業

근세조선(철종-고종) 때 판소리 명창. 전라북도 흥덕 출생. 동편제 판소리 명창이며 이론가인 김세종(金世宗)에게 사사하였다. 박만순·김세종 이후 동편제 소리의 거장으로 5마당 판소리에 모두 능하였다. 그의 더늠은 <수궁가> 중에서 유명한 토끼의 화상을 그리는 대목이다.

김창환[편집]

金昌煥(1848-1933)

조선(고종-일정) 때 판소리 명창. 5명창의 한 사람. 전라남도 나주 출생. 정창업에게 사사하여 서편제로 고제 판소리 법통을 이어 왔다. 풍신이 잘났고 너름새가 능하였으며 고종 때 어전에서 소리하여 의관(議官)직을 제수(除授)받았다. 1907년 원각사(圓覺社) 주석(主席)이 되었고, 그 뒤 협률사(協律社)를 조직하여 공연에 힘썼다. 흥보가를 잘하였고, 더늠으로 제비노정기가 박녹주에게 전해졌다. 일정 때 취입한 <제비노정기> 음반이 남아 있다.

박기홍[편집]

朴基洪

조선(고종-순종) 때 판소리 명창. 전라남도 나주에서 나서 경상도 함양(咸陽)·청송(靑松) 등에서 살았다. 박만순(朴萬順)에게서 공부하다가 정춘풍(鄭春風)의 문하에서 다년간 수련하였다. 동편제 소리의 정통을 이어 오다가 그의 제자가 끊어지면서 순수한 동편제 소리는 끊어지고 말았다. 특히 동편제 가문의 증손격인 송만갑(宋萬甲)이 자기 가문의 소리제를 바꾼 것에 대하여 항상 비판하였다.

그 소리는 동편제 특성인 고매한 품격으로 엮어 나가다가 특출한 대목에 이르러 새로운 기교를 부리고 딴 청을 쓰는 수법을 썼다. 학식이 높고 국악 전반에 걸쳐서 조예가 있었으므로 판소리의 실제와 이론에 있어서 당시 그를 당할 사람이 없었다. <춘향가>·<적벽가>가 출중하였고 특히 '삼고초려', '자판교 대전', '적벽대전'을 잘하였는데, 적벽대전 불지르는 대목에서는 장내(場內)가 온통 불바다가 된 느낌이었다 한다. 그의 더늠은 <적벽가> 중 조조군사가 고향 생각하는 대목이다.

정재근[편집]

鄭在根

조선 고종 때 판소리 명창. 전라남도 나주에서 나서 보성에서 살았다. 철종-고종 때 박유전(朴裕全)의 제자로, 어전에서 소리하고 홍패를 받았다. 이날치(李捺致)와 더불어 박유전 소리제를 전한 공로가 크다. <심청가>를 잘하였다 한다.

진채선[편집]

陳彩仙(1842- ? )

근세조선(고종-일정) 때 판소리 여류 명창.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戊長) 출생. 판소리에서 최초의 여류 명창이 되었다. 신재효에게 판소리 지도를 받았고 정악에도 능하였다.

경복궁 경회루 낙성연(落成宴)에서 출중한 기예를 발휘하여 청중을 놀라게 했고, 대원군의 아낌을 받았다. <춘향가>·<심청가>를 잘하였다. 특히 잘하는 대목은 <춘향가> 중에서 기생 점고하는 대목이다.

허금파[편집]

許錦波

근세조선 고종 때 판소리 여류 명창. 전라북도 고창 출생. 김세종(金世宗) 문하에서 사사하고 신재효의 지도를 받아서 명창이 되었다. <춘향가>를 잘했고 옥중 장면을 특히 잘했다.

김석창[편집]

金碩昌

조선(고종-순종)의 판소리 명창. 충청도 출신으로 이동백의 선배이다. 아니리와 부침새를 잘하였고

<춘향가>를 잘하였다. <춘향가> 중에서 신연맞이를 유별나게 잘하였는데 여기에 8도 마부가 나오는 대목이 특이하였다.

이동백[편집]

李東伯(1866-1947)

조선(고종-일정) 때 판소리 명창. 5명창의 한 사람. 충청남도 비인(庇人) 출생. 처음 김정근(金正根) 문하에서 판소리를 공부하다가 김세종(金世宗) 문하로 옮겼다. 경남 창원에서 살다가 1900년 상경하여 고종 때 어전에서 판소리를 불러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었다. 김창환, 송만갑 등과 원각사에서 공연하다가 1934년 연흥사·협률사·광무대 등에서 활약했고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를 조직하여 공연과 후진양성에 힘썼다. 풍채가 좋고 성음이 아름다우며 세세상성에서부터 중하성까지 넒은 음역을 능히 구사하여 폭이 넓고 깊이 있는 소리로 청중을 휘어잡았다.

새타령은 당시 독보적이었다. 1939년 부민관(府民館)에서 은퇴 공연을 했다. <춘향가>, <적벽가>를 잘하였다. 일정 때 취입한 음반이 더러 남아 있는데 <새타령>, <범피중류>, <박타령>,

<적성가> 등이 걸작이다.

김봉문[편집]

金奉文(1866-1929)

조선(고종-일정) 때 판소리 명창. 충청남도 서산 출생. 박기홍(朴基洪)에게 사사하여 동편제 소리로 이름을 날린 명창이다. <흥보가>를 잘하였고 특히 흥보 박타는 대목을 잘하였다.

김창룡[편집]

金昌龍(1871-1935)

조선(고종-일정) 때 판소리 명창. 충청남도 서천(舒川) 출생. 경기 충청 소리제인 중고제 판소리 명문에서 태어났다. 진양조를 처음 판소리에 넣어 작곡했다는 김성옥(金成玉)의 손자이고 고종 때 명창 김정근(金正根)의 아들이다.

7세부터 13세까지 아버지에게 판소리를 배웠고, 그 뒤에 이날치(李捺致)에게서 1년간 사사했다. 30세경에 서울에 올라와 연흥사(延興社) 창립에 노력하였고 송만갑, 이동백, 정정열 등과 조선성악연구회를 창립하여 공연과 후진양성에 힘썼다. 자기 가문에 내려오는 독특한 창법으로 고제(古制) 판소리를 잘하여 평안도에서는 환영을 받았으나 당시 일반 대중들은 신제(新制)를 환영하는 경향이 있어 경원시되었고 그의 소리는 제자가 없어 끊어지고 말았다.

<적벽가>를 잘하였고 일정 때 취입한 레코드가 더러 남아 있다. <심청가> 중에서 '꽃타령(花草歌)', <적벽가> 중에서 '삼고초려(三顧草廬)', '단가(短歌)', '장부가(丈夫歌)' 등이 걸작이다.

이선유[편집]

李善裕(1872- ? )

조선(고종-일정) 때 판소리 명창. 경상남도 진주 혹은 전라남도 구례 출생이라고 한다. 15세에 송우룡(宋雨龍)에게 사사하고 30여세에 김세종에게 사사하였다. 동편제로 고제의 우아한 판소리를 하였다. <수궁가>를 잘하였고, 저서로 고제 판소리 5마당 사설을 엮은 <5가전집>이 남아 있다. 일제 때 취입된 음반으로 <토끼타령>이 있다.

유성준[편집]

劉成俊(1874-1949)

조선(고종-일정) 때 판소리 명창. 전라북도 남원 출생. 송우룡의 제자로 정춘풍, 김세종에게서 소리를 닦았으므로 동편제 소리 이론에 밝다. 만년에 진주에서 후배를 양성했으며 근래 명창 임방울(林芳蔚)과 김연수(金演洙)가 그에게 <수궁가>를 사사했다. <수궁가>를 잘하였고 특히 자라가 토끼 만나는 대목을 잘 불렀다. 고종 때 참봉직을 받았다.

장자백[편집]

張子伯 조선 후기 철종-고종(1849-1907) 년간의 판소리 명창. 전남 담양(潭陽) 출생. 명창 김세종(金世宗)의 수제자로 동편제를 계승했다. 인물이 선풍도골(仙風道骨)의 풍채를 자랑하고 음성이 빼어나서 명성이 높았다. 변강쇠타령과 춘향가에 특출하였고, 특히 이도령이 광한루(廣寒樓)에서 관경하며 노래하는 대목이 일품이었다 한다. 그의 창제가 오늘에 이어져 오고 있다.

정정렬[편집]

丁貞烈(1875-1938)

조선(고종-일정) 때 판소리 명창. 전라북도 익산 출생. 7세(철종-고종) 때에 명창 정창업의 문하에 들어가서 판소리를 공부하였고, 14세 때에 명창 이날치(李捺致)에게 2년간 배웠다. 그 뒤 절을 찾아다니면서 깊은 산 속에서 판소리를 혼자 닦았다.

목성이 탁하고 음량이 부족하며 상성(上聲)이 막히어 성공할 희망이 없었으나 수십년간 생명을 걸고 수련한 결과 명창으로 성공하였다. 50세 전후하여 서울에 올라와 송만갑, 이동백 등과 조선성악회에서 공연과 후진양성에 힘썼는데, 송만갑이 세상을 뜬 뒤 많은 제자들이 그에게 모여들었다.

서편제 소리의 맛있는 성음과 능한 부침새로 <춘향가>를 많이 개작하였다. 그의 <춘향가>는 '정정렬 낳고 춘향가 났다'고 할 정도로 대중들에게는 인기였으나 고제 판소리를 이해하는 이들은 소리를 버려 놓았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는 <춘향가>를 특출나게 잘했고 그 중 '신연맞이'를 잘했다. 일정 때 취입한 음반이 많이 남아 있으며 '신연맞이', '어사출도', '광한루경치' 등이 걸작이다. 그의 제자로 김연수, 김여란 등이 있다.

장판개[편집]

張判介

근세조선(고종-일정) 때 판소리 명창. 전라북도 순창(淳昌) 출생. 송만갑의 제자로 스승에 못지 않은 기량을 가졌으나 지방에 묻혀 살았기 때문에 별로 알려지지 못했다. 큰 음량과 뛰어난 기량으로 당시 청중을 휘어잡았는데 선배 명창들도 동석하기를 꺼릴 정도였다. 그가 좀더 오래 살아서 중앙에서 활약했더라면 당시 판소리 판도가 달라졌으리라 한다. 오가에 능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특히 <적벽가>를 잘하였다. 일정 때 음반이 두어 장 취입되었다 한다.

공창식[편집]

孔昌植

일정 때 판소리 명창. 전라남도 창평(昌平) 출생. 고향에서 김채만에게 판소리를 배운 뒤 송만갑에게 사사하여 명창이 되었다. 오명창 이후 장판개, 박중근, 김정문 등과 어깨를 겨루었다. 송만갑에게 배웠으나 성음은 김채만에게 가까운 서편제 소리를 하였고 그 맛있는 목 구성은 그의 제자 임방울에게 전해졌다.

김정문[편집]

金正文

일정 때 판소리 명창. 전라북도 남원 출생. 송만갑에게 사사하였다. 송만갑의 소리에 당시에 유행하던 신제 판소리의 맛있는 성음을 써서 청중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받았으나 장판개에게 비판을 받았다. 창극에도 능하여 재치있는 연출로 갈채를 받았다. 박녹주에 전수되어 그의 <흥보가>가 전해지고 있다. 일정 때 취입된 음반으로 단가 <천하태평(天下太平)>이 남아 있다.

박중근[편집]

朴重根

조선(고종-일정) 때 판소리 명창. 전라남도 옥과(玉果) 출생. 송만갑에게 사사했다. 5명창 이후 장판개, 김정문, 공창식 등과 지방에서 활약한 명창이다. 일정 때 취입한 음반이 남아 있다.

정응민[편집]

鄭應珉(1896-1964)

조선(고종-대한민국) 때 판소리 명창. 전라남도 보성(寶城) 출생. 보성은 철종-고종 때 명창 박유전(朴裕全)이 살던 곳으로 박유전의 소리를 이은 명문에 태어났다. 고종 때 명창 정재근(鄭在根)의 조카이고 강산제 보유자 정권진(鄭權鎭)의 아버지이다. 어려서부터 큰아버지인 정재근에게서 판소리를 사사하였고, 그 뒤 김찬업(金贊業)과 이동백(李東伯)에게 사사하였다. 소년 명창으로 고종 때 어전에서 소리를 했을 만큼 촉망되었으나 한일합방 이후 고향에 은거하면서 제자를 길렀다. 특히 <심청가>를 잘하였다. 그의 <춘향가>, <심청가>,

<적벽가>, <수궁가>가 정권진에게 전해졌다.

이화중선[편집]

李花中仙(1898-1943)

일정 때 판소리 명창. 부산 출생. 17세 때 전라남도 남원에 시집와 살다가 협률사(協律社) 공연을 보고 감복하여 판소리를 공부하였다. 서울에 올라와 송만갑, 이동백에게 사사하여 명창이 되었다. 고운 목소리와 타고난 재주로 아무리 어려운 대목도 불러내어 청중을 흐뭇하게 하였다.

그러나 서슬이 약한 점이 단점이었다. 여하튼 일정 때 이화중선을 모르는 이가 없을 만큼 인기가 대단하였다. 일본에 공연차 갔다가 객사했다. 일정 때 취입한 많은 음반이 남아 있고 <심청가> 중에서 '추월만정'이 걸작이다.

김초향[편집]

金楚香(1900- ? )

판소리 여류명창. 대구(大邱) 출생. 광무대(光武臺) 극장에 들어가 가무(歌舞)를 배웠고, 김창환(金昌煥)·송만갑(宋萬甲)의 가르침을 받아 대성하였으며 이화중선(李花中仙)과 더불어 당대 여류 명창의 쌍벽을 이루었다. 흥보가를 잘 불렀다.

임방울[편집]

林芳蔚(1905-1961)

일정-대한민국 때 판소리 명창. 전라남도 광산(光山) 출생. 어려서 고향에서 이재현(李在賢)에게 판소리 <춘향가>, <흥보가>를 공부하였고 공창식(孔昌植) 문하에서 다시 닦았다. 유성준(劉聖俊)에게 <수궁가>, <적벽가>를 사사했다. 1928년에 상경하여 김창환(金昌煥)의 소개로 무대에 나갔다가 크게 인기를 얻었다. 아름다운 목소리와 맛있는 목구성으로 청중을 휘어잡은 명창이다. 일정 때 취입된 음반이 많이 남았고 이 가운데 <춘향가> 중에서 '쑥대머리'가 유명하다. 빅터레코드판 <춘향가 전집>과 오케이판 <흥부가 전집>이 남아 있다. 그가 작곡한 <호남가(湖南歌)>와 <사별가(思別歌)>가 있다. 1960년 국악상을 받았다.

김여란[편집]

金如蘭(1907-1983)

판소리 여류 명창. 전북 고창(高敞) 출생. 부모의 뜻에 의하여 1917년부터 1921년까지 김비취(金翡翠)에게 시조·양금·가야금·가곡·법무 등을 배웠다. 김봉이(金鳳伊)에게서 심청가를 배우고, 1922년부터 정정열(丁貞烈)에게 춘향가· 적벽가·심청가를 배웠다. 1929년 대구에서 첫 발표회를 가졌고,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기능 보유자로 지정되어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다. 제자로는 박초선(朴招宣)·최승희(崔勝姬) 등이 있다.

오명창[편집]

五名唱

일제시대에 판소리를 잘 부르는 사람으로 꼽힌 다섯명창. 5명창을 꼽는 기준은 일정하지 않으나 김창환(金昌煥)·송만갑(宋萬甲)·이동백(李東伯)의 세 사람 이외에 이보다 빠른 박기홍(朴基洪)과 김채만(金采萬)을 꼽기도 하고 세 사람의 후대 사람인 김창룡(金昌龍)과 정정열(丁貞烈)을 꼽기도 한다. 이 가운데서 박기홍과 김채만은 녹음이 전하지 않고 나머지 사람들은 음반 녹음이 남아 있어서 그 기량을 가늠할 수 있다. 특히 송만갑과 이동백은 성악적인 기량이 현재까지 그들을 능가하는 명창이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5명창들은 원각사를 중심으로 판소리를 창극이라는 새로운 장르로 발전시킨 시대적 위치에서 활동한 사람들이다. 일제 말엽에는 조선성악연구회를 조직해서 판소리의 전수와 보급에 힘썼다.

박녹주[편집]

朴綠珠(1905-1979)

판소리 명창. 경북 선산 출생. 동편제 계열의 판소리 명창으로 <춘향가>와 <흥보가>를 특히 잘 불렀다. 1916년부터 박기홍에게 소리를 배우기 시작했고, 강수용에게 가야금을 배웠다. 1923년에 판소리 명창 송만갑 문하에서 <춘향가>와 <적벽가>를 배웠고, 1925년부터는 정정렬에게 <춘향가>를 배웠다. 또한 김창환에게 <흥보가> 중 '제비노정기'를, 김정문에게 <심청가>를, 유성준에게 <수궁가>를 배우며 명창의 기틀을 닦았다.

1933년에 조선성악연구회 회원을 지냈고, 1935년에 종로에 개인 연구실을 열어 창극 발전에 공헌했다. 1948년에 김소희, 박귀희와 함께 여성국악동호인회를 조직하고, 시공관에서 <옥중화>를 비롯해 여러 작품을 공연했다. 1960년부터 서울국악예술학교에서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1965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조상현, 박초선 등이 박녹주의 소리를 이어받았다.

정광수[편집]

丁珖秀(1909- ? )

전남 나주 출생. 김창환, 유성준에게 소리를 배웠으며 무형문화재 판소리 <수궁가>의 기능보유자이다. 옛법을 존중하는 귀족적인 소리광대로서 다른 소리꾼들과 달리 자신이 소리꾼이라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고 국악계를 떠나 조용히 살았다.

강장원[편집]

姜章沅(1909-1962)

전남 함평(咸平) 출생. 어려서 한문 공부를 하다가 16세 때 김창환(金昌煥)의 문하생으로 소리 공부를 시작했으며, 1930년에 서울로 올라와 명창 이동백(李東伯)에게 사사했고, 1933년 판소리 명창대회에 참가하여 <적벽가(赤壁歌)>의 <삼고초려(三顧草廬)>를 불러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하여 조선성악연구회의 회원으로 일제시대 창극 발전에 공헌했다.

1939년 3월 29일-30일 부민관(府民館)에서 개최된 이동백 은퇴공연 때 찬조 출연한 이후 만주 여행에 동참하여 활약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1948년 국극사(國劇社)에 입단한 후 창작된 창극 선화공주의 공연 때 도창(導唱)을 받아서 창극활동을 했으며, 한때 대한국악원에서 창극 분야의 책임을 맡았고, 1949년 구왕궁아악부(舊王宮雅樂部) 촉탁으로 창악을 담당했다. 판소리 지도 및 후배양성에 힘쓰다가 1962년에 별세했다.

그의 목소리는 아주 특출하지는 못했지만, 저력 있는 수리성으로 가곡의 정대한 창법을 구사하여 특이했으며, 1950년대 임방울(林芳蔚)·김연수(金演洙)와 함께 이름을 떨쳤다. 판소리 다섯마당에 능했는데, 특히 흥보가와 적벽가를 잘 불렀으며, 그의 <삼고초려>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가 부른 단가(短歌) 중에 죽장망혜(竹杖芒鞋)·중타령·적성가(赤聲歌)·운담풍경(雲淡風輕)은 5선보로 채보되어 전한다.

김연수[편집]

金演洙(1907-1974)

전남 고흥(高興) 출생. 고향에서 축음기로 소리공부를 시작했다가 1935년 유성준(劉成俊)에게 수궁가를 사사하여 동편제(東便制)의 전통을 전수했고, 그 후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에 가입하여 송만갑(宋萬甲)에게 흥보가와 심청가를, 정정열(丁貞烈)에게 춘향가와 적벽가를 배웠다. 1939년 창극좌(唱劇座)의 대표와 1942년 조선창극단의 대표를 역임했고, 광복 후 김연수 창극단과 우리국악단을 만들어 창작 창극활동에 힘을 쏟았다.

그의 제자로 오정숙(吳貞淑)·박옥진(朴玉珍)·김옥련(金玉蓮)·한농선(韓弄仙)·원옥화(元玉花)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창본춘향가> 및 <창본심청가>·<흥보가>·<수궁가>·<적벽가>가 있다.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인 판소리 춘향가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고, 국악공로상·국악상 등을 받았으며 많은 음반을 남겼다.

박초월[편집]

朴初月(1913-1983)

전남 순천 출생. 1930년 전국명창대회에서 1등을 했고, 1934년부터 명창 김정문, 송만갑에게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후 여성국극동지사를 창립했고, 여성국악동호회 회장과 초대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1964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고, 1973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수궁가>의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박동진[편집]

朴東鎭(1916-2003)

충남 공주 출생. 김창진을 비롯해 여러 스승에게 판소리를 배웠다. 1962년 국립국악원 국악사로 취임했고, 판소리 다섯 마당을 모두 공연했다. 또한 <숙영낭자전>, <옹고집타령>, <변강쇠타령>을 완창했고, 창작 판소리

<이순신장군>을 발표했다.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적벽가>의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김소희[편집]

金素姬(1917-1995)

전북 고창 출생. 명창 송만갑 문하에서 소리를 공부했다. 김소희의 창법은 가성을 쓰지 않고 상·중·하청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점이 특징이다. 한성준에게 살풀이를 배웠고, 1934년에는 정정렬 문하에서 판소리 공부를 계속했으며, 김종기에게 가야금과 거문고를 배워 소리, 춤, 기악을 두루 익혔다, 1936년에는 최초로 정정렬, 임방울과 함께 나누어 부른 춘향가를 녹음했고, 판소리 다섯 마당도 모두 녹음했다.

1939년부터 화랑창극단에 참여했고, 조선성악연구회에 가입했으며, 박귀희와 함께 여성국악동호회를 조직했다. 1962년에 유럽, 1964년에 미국을 순회 공연하는 등 우리 전통 예술을 보급하는 데 이바지했으며, 1964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의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정권진[편집]

鄭權鎭(1927-1986)

판소리 명창. 전남 보성 출생. 남도 특유의 판소리 가락을 지켜온 명창이다. 일찍부터 아버지에게 판소리를 배웠고, 19세 때에는 득음을 위해 강진에 있는 고성사에서 7년 동안 혼자 공부를 하기도 했다. 30세 때부터 부산, 대구, 대전 등지의 국악원에서 활동했으며, 34세 때 서울로 올라와 국립창극단에서 활동했다. 1970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심청가>의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강도근[편집]

(1918-1996)

전북 남원 출생. 17세 때부터 김정문, 박봉래, 송만갑에게 소리를 배웠다. 통상성(通上聲)의 더늠·수리성·흥보가가 장기인 그는 1918년 판소리 인간문화재로 지정받았다. 동일창극단·조선창극단 단원으로 현재 남원국악원에서 제자를 가르치고 있다.

박봉술[편집]

(1922-1989)

전남 구례 출생. 11세 때부터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하여 송만갑, 박봉래, 이선유, 유성준에게 소리를 배웠다. 무형문화재 판소리 <적벽가>의 기능보유자인 그는 동일창극단 단원으로 활동하며 탁성(濁聲)을 고쳐 판소리 5마당 중의 대목을 음악으로 취입하기도 했다. 흥보가·수궁가·적벽가가 장기이다.

한승호[편집]

(1924- )

광주 출생. 장판개·송만갑·이동백·김채만·박종원에게 소리를 배웠다. 명창 한성태의 아들이기도 한 그는 동편제와 서편제를 절충하여 부른 것으로 유명하다. 김채만의 창제를 계승하였으며, 심청가·춘향가·적벽가가 장기이다. 무형문화재 판소리 <적벽가>의 기능보유자이다.

오정숙[편집]

吳貞淑(1935- )

전북 완주 출생. 어릴 때부터 타고난 재질을 발휘하여 극단에 참여하였으며 1972년 판소리 춘향가 완창 이후 매년 흥보가·심청구·수궁가·적벽가 순으로 완창 발표회를 가졌다. 1975년 중요무형문화재 전수자발표회에서 1등을 수상하였고 1975년 제1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에 출전하여 판소리 부문에 장원상을 받았다.

그녀는 1977년 국립 창극단에 입단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1983년에는 광주에서 개최된 제1회 남도문화예술제 판소리 부문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였고 1984년에는 KBS국악대상을 받았다.

1991년 5월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현재 전북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에 동초각을 지어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소리·발림·도습·연기의 표현동작이 혼연일체된 완숙한 기량은 단연 여류창악계의 패권자로서 인정받고 있다.

조상현[편집]

趙相賢(1939- )

전남 보성 출생. 어려서부터 음악적 재질이 뛰어났고 성음은 수리양성이며 성량 또한 풍부하였다.

13세 때 정응민 명창에게 소리를 공부한 이래 여러 스승의 지도하에 춘향가·심청가·흥보가 세 마당을 이수하였다.

1957년 이승만 대통령 84회 생신기념 전국명창대회에 참가하여 최우수상을 수상하였으며, 1970년 국립창극단에 입단, 창극무대는 물론 라디오방송, TV출연으로 점차 알려지게 되었다.

1974년 남원에서 개최한 전국남녀명창대회에서 1등상을 받았고, 1976년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판소리 명창부에 출전, 장원으로 영예의 대통령상을 수상함으로써 명창의 반열에 들게 되었다.

1982년 판소리보존연구회 이사장을 역임하면서 TV출연, 라디오방송, 무대출연을 하는 한편 각 음악대학 국악과 강사로 눈부신 활동을 하고 있다.

199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고 현재는 광주시립국극단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성우향[편집]

成又香(1935- )

전남 화순 출생. 1952년 명창 정응민 문하에서 춘향가·심청가·흥보가·수궁가 네 마당을 이수하였고 그 후 7년 동안 각고탁마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1956년 전국명창대회에 출전하여 영예의 1등상을 수상하면서 명성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1974년 KBS주최 전국명창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으며, 1976년 국립국악원 소속으로 있으면서 많은 후진을 가르쳤다. 현재는 성우향판소리전수소를 마련하며 후배를 양성하면서 중앙대학교와 추계예술대학 그리고 서울예전 강사를 겸임하고 있다.

성창순[편집]

成昌順(1934- )

광주 출생. 명창 성원목이 아버지로서 어려서부터 부친이 문도들에게 가르치는 소리를 귀담아 듣고 그대로 방창하는 천재적 소질을 지녔다.

부친은 딸의 소리 자질을 인정하고 판소리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는데 그녀가 보통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춘향가·심청가·흥보가 세 마당의 이수를 끝냈다.

1954년 김연수 명창에게 심청가를, 여류명창 김소희에게 춘향가를, 명창 정응민에게 수궁가, 여류명창 박녹주에게 흥보가, 정권진 명창에게 적벽가를 배워 일가를 이루었다.

1968년 한국국악협회 주최로 열린 전국명창경연대회에서 1등상을 시작으로 1978년 제4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에 출전하여 판소리 명창부 장원으로 대통령상을 수상한 영광을 안았으며, 1982년 KBS제정 국악대상을 받는 등 실력을 과시했다.

199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기능보유자로 지정된 성창순은 현재 전남대학교, 단국대학교 강사를 겸임하면서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조통달[편집]

趙通達(1945- )

전북 익산 출생. 어려서부터 여류명창 박초월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며 정성껏 지도하여 왔던 수제자이다. 그는 국악예술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스승에게 춘향가·심청가·흥보가·수궁가를 차례로 이수하였고, 당시 국창으로 추앙을 받은 임방울에게 수궁가와 적벽가를 학습하였으며, 정권진 명창에게 강산제 심청가를 재수받은 후 10년을 하루같이 각고탁마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1967년 신인명창대회에서 1등상을 차지했고, 1982년 제8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판소리 명창부에서 영광의 대통령상을 받게 되면서 명성이 알려졌다. 국립창극단에 입단하여 창극의 주인공 역을 도맡았다. 1991년 전라남도 도립국악단의 단장 겸 상임지휘자로 부임하여 현재 광주에서 활동중이다.

김일구[편집]

金一球(1940- )

전남 화순 출생. 어려서 광주 호남국악원에 들어가 공대일 명창에게 사사하여 판소리의 기초를 닦았으며, 1962년 장월중선에게 아쟁산조를 학습하고 1968년 원옥화에게 사사하여 가야금 산조를 이수하였다.

1980년 박봉술 명창에게 적벽가와 수궁가를 전수받아 판소리 다섯마당을 완전히 이수하였고 판소리·아쟁·가야금 다 같이 일가를 이루었다.

1983년 전주대사습 전국대회 판소리 명창부에서 대통령상을 받았으며, 1985년에는 신라문화제 기악부문에서 특상,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현재 국립국악원에서 활동하고 있다.

김영자[편집]

金英子(1951- )

대구 출생. 10세 때부터 정권진 명창 문하에서 소리공부를 시작하였는데 천재적인 음악재질과 맑고 아름다운 성음으로 1962년 경주 신라문화 판소리 소년부에서 1등을 차지, 음악성을 발휘했다. 1975년 국립창극단 단원으로 발탁된 후 창극무대를 통하여 소리와 연기의 기예를 닦으면서 김소희에게 사사하여 춘향가와 흥보가를 재수 연마하였고 1985년 전주대사습 전국대회 판소리 명창부 장원으로 대통령상을 수상하여 여류명창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