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음악/한국음악/한국의 서양음악가/관악기·오르간·기타 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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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식[편집]

金仁湜(1885-1962)

코넷 주자. 음악교육가. 1885년 평양에서 출생. 11세 때 교회에 나가 오르간과 찬미에 흥미를 느껴 평양 숭덕학교(崇德學校)에 입학하여 창가를 배우고 그후 숭실중학교에 들어가 음악공부에 몰두했다.

숭실전문학교 3년을 마치고 1907년 서울로 올라와 황성기독청년회(YMCA)에서 설립한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 중학부를 비롯, 여러 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쳤고, 1910년 최초로 서울에 세워진 음악 전문교육기관인 조양구락부(調陽俱樂部)에서 후진을 양성하기도 했다. 한편 YMCA 청년학원에 합창단을 조직, 본격적인 합창운동을 전개했다.

그 밖에 헨델의 <메시아>와 같은 찬송가를 번역하기도 하고 국악에도 관심을 기울여 <영산회상>, <여민락(與民樂)> 등 전래의 고전음악의 채보와 <전진가>·<국기가> 등의 작품도 남겼다. 특기할 사실은 광무 9년(1905)에 평양 서문밖 소학교에서 연합운동회가 열렸을 때 <학도가(學徒歌)>를 작사·작곡하여 부르게 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최초의 작곡이다.

김형준[편집]

金亨俊(1884-?)

코넷 주자. 음악교육가. 평양숭실학교 졸업. 한국 악단의 선구자의 한 사람으로 홍난파와 함께 음악교육과 연주로써 음악운동에 이바지하였다. 1921년 9월 23일 종로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동서 음악대연주회에서 코넷 독주를 한 바 있는데 그 때 그의 딸인 김원복(金元福:피아니스트)이 2중창에 출연하여 이채를 띠었다. 그 밖에 <봉선화>,

<저 구름의 탓>, <나물캐는 처녀> 등의 작사를 한 바 있고, 후에 경신중학, 경기공고 등에서 교편을 잡은 적도 있다.

정사인[편집]

鄭士仁(1881-1958)

플루트 연주가. 서울 출생. 구한국 군악대원이었으며 송도고등보통학교(松都高等普通學校)에서 악대를 지휘. 대표작으로는 행진곡 <추풍(秋風)>, <돌진(突 進)> 등이 있으며 그 밖에 민요 <닐리리야>와 자신이 작사·작곡한 가곡 <타향>이 있다.

김재호[편집]

金載鎬(?-1950)

플루트 주자. 구한국 군악대원. 조선호텔 관현악부원 및 4중주단원으로 활약. 그 후 방송관현악단원이 되어 실내악 운동에 참여했다.

남궁요열[편집]

南宮堯悅(1912- ? )

오보에 주자. 경기도 용인 출생. 니혼대학 예술과 음악부 졸업. 고려교향악단 운영위원 및 동악단 오보에 주자. 서울교향악단, 전국 관악연맹이사, 해군군악학교장, 해군본부군악대장 등을 역임. 박태현과 함께 관악운동에 공헌이 크다.

최성진[편집]

崔星鎭(1914- ? )

오르가니스트. 경기도 인천 출생. 숭실전문학교 졸업. 밀너 힐만, 말스베리에게 사사.

인천음협회장, 인천고교 음악교사, 국제방송국 음악과장직을 지냈다. 그외 한국교회음협 중앙위원과 기독교방송국 음악과장, 방송부장을 역임.

한인환[편집]

韓鱗桓(1914- ? )

팀파니 주자. 함경남도 출생. 연희전문 졸업. 김형준(金亨俊)에게 사사. 서울교향악단을 거쳐 음협 및 한국교회음악협회에서 활약함. 피아니스트 한동일(韓東一)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김흥교[편집]

金興敎(1918- ? )

더블베이스 주자. 대구 출생. 일본 도쿄음악학교 예과 졸업. 나가시오(長汐壽治), 하시모토(橋本國彦)에게 사사. 경성중앙방송국 관현악단원, 고려교향악단 창립위원, 서울예대 전임강사, 공군군악대 교관직 등을 역임했다. 대표작은 <콘트라베이스 신교본>, <국악보의 신기보론> 등이다. 효성여대를 거쳐 서울대 음대 교수 역임. 1972년 봄에 작곡 발표회를 가진 바 있다.

백남준[편집]

白南準(1932- )

전위예술가. 서울 출생. 비디오 신데사이저(전자제어기)를 개발하여 텔레비전 수상기를 작품에 이용하는 새로운 미술 세계를 열었다. 1950년에 일본 도쿄대학에 들어가 음악과 음악사, 미술사를 전공했으며, 1956년 독일 뮌헨으로 건너가 음악을 공부했다. 백남준은 독일에서 전위예술가들이 참여하는 플럭서스(Fluxus:흐름)의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전통 음악에 대해 반발하는 행위음악으로 실험예술에 깊이 빠져들었다.

최근에는 비디오를 폭넓은 표현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음을 발견하고, 전자음악가에서 시각예술가로 길을 바꾸었다. 1965년 뉴욕에서 열린 전자예술 전시회에서 전선과 전기기구로 가득한 화랑 안에서 <로봇 k-456>을 제작하여 많은 사람의 인기를 끌었다. 1984년에는 인공위성으로 중계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작품에서 현대 기계문명에 대한 찬사와 위기감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 만든 작품들에서는 전자제품이 대중화하고 컴퓨터가 보급됨에 따라 수준 높은 과학기술을 이용하여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세계를 동시에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술작품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