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음악/한국음악/한국의 서양음악가/성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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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심덕[편집]

尹心悳(1897-1926)

소프라노 주자. 평양 출생. 평양여자고보(平壤女子高普)를 거쳐 경성여자고보(京城女子高普)사범과를 졸업. 잠시 철원에서 교편을 잡다가 관비(官費)로 일본 도쿄의 우에노(上野) 음악학교를 나온 뒤 귀국하여 경성여자사범 부속학교의 음악교사로 있는 한편 성악가로도 활약했다.

이 무렵 돌연 악단에서 극단으로 전향, 신극 단체인 토월회에 가입하여 배우로서 2회의 공연을 가진 바 있고, 1926년 오사카(大阪)로 가서 11곡의 레코드를 취입하였다. 관부(關釜) 연락선으로 귀국 중 극작가였던 애인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에 투신, 정사하고 말았다. <사의 찬미>를 애창.

신막[편집]

愼幕( ? -1950)

전남 영암 출생. 본명은 신용원(愼溶沅)이다. 목포상고를 졸업한 직후 도쿄로 유학하였다. 그 곳에서 독일 성악선생인 우아베 니히로부터 성악을 배웠다. 귀국 직후 얼마 지나지 않아 대동아악단에서 활동함으로써 주목받는 신진으로 부각되었다.

이 악단에는 바이올린 계정식, 소프라노 김자경, 테너 송진혁, 피아노 신장자, 소프라노 박현숙, 알토 김혜란 등 당시 쟁쟁한 신진 실력가들이 '순수음악'을 표방하며 음악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들은 당시 순수음악이야말로 일제에 저항하는 최후의 음악정신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신막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지하서클 '성연회'를 조직하여 그 중심역할을 하였다. 성연회는 '한국민족음악해방'을 표방하고 광복공간의 민족음악진을 주도하였다. 또한 광복 직후에는 조선음악가동맹 서기장으로 활동하였다. 성악가이면서도 현실인식과 실천을 행한 이론가로 유명하다.

현제명[편집]

玄濟明(1902-1960)

테너 주자이자 작곡가. 대구 출생. 1923년에 평양 숭실전문학교에서 선교사에게 피아노·바이올린을 배우고 잠시 전주 신흥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25년 도미하였다. 시카고 건음악학교에서 프라트로에게 사사했다. 1928년에 동교를 졸업, 이듬해 귀국하여 연희전문 교수로 1942년까지 재직. 그 해 9월 공회당에서 첫 독창회를 개최하여 자작 가곡 <석양>, <집으로 돌아오라>를 비롯한 오페라 아리아 등을 불렀다. 또한 후생악단(厚生樂團)을 조직하여 동 악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1934년에는 경성음악학교를, 8·15광복 후에는 고려교향악단을 각각 창립하였다. 1947년 서울대 예술대학 음악부장을 거쳐, 서울대 음악대학장에 취임하여 작고할 때까지 재임하였고, 이어 한국음악가협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1955년에는 마닐라의 동남아 음악회의 한국 대표로 참석했으며, 초대 예술원상 음악부문에서 수상한 바 있다. 특히 연희전문 재직시에 유능한 음악인을 많이 배출했다.

작품으로는 1932년에 출간한 <현제명 작곡집>이 있고 이보다 한 해 앞서 가곡집 제1집 <고향생각 외 10여곡>을 발간했다. 대표작은 오페라 <춘향전>(1949년 국립극장 상연), <왕자호동>이 있다.

권태호[편집]

權泰浩(1903-1972)

경상북도 안동 출생. 도쿄고등음악학교 졸업. 제1회 경북 문화상 수상. 작품으로 국민가요

<무찌르자 오랑캐> 외 다수가 있음.

이인선[편집]

李寅善(1906-1960)

테너주자. 의사. 평양 출생. 광성고보(光成高普)를 거쳐 연희전문 문과 2학년 때 세브란스 의전(醫專)으로 전학하여 1931년 봄 졸업하자 황해도 해주에서 3년간 개업하였다.

이 동안 버거, 부스 두 미국 여성에게 성악을 배우다가 1931년 이탈리아로 건너가 1934년부터 밀라노에서 성악을 연마하고 4년 만에 귀국하여 국제 오페라사를 조직, 베르디의 <춘희>를 공연하여 우리나라 오페라사의 첫페이지를 장식했다.

1950년 5월 <카르멘>을 주연하기도 했으며 같은 해 미국으로 건너가 외과의로 있으면서 메트로폴리탄 가극단의 오디션에 동양인으로는 처음으로 합격, 그 후 우리의 민요를 번역하여 소개하는 일에도 힘을 썼다. 1960년 3월 19일 밤 켄터키주 루이빌에서 병사한 그는 오페라 운동의 개척자로 공헌이 크다.

이승학[편집]

李升學(1908- ? )

함경북도 출생. 일본 도요음악학교 졸업. 한성(漢城)고교 교사를 거쳐 경성음악전문학교 교수, 문교부 음악 고문, 서라벌예대 재단이사 및 학장, 동 대학의 민족예술연구소 소장을 역임. 베초르트 우마르에게 사사.

전형철[편집]

全螢喆(1910-1944)

바리톤 주자. 서울에서 출생. 일본 데이코쿠고등음악학교 졸업.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에 출연. 동경에서 3회의 독창회 개최. 경성중앙방송국 음악 계장 역임.

이상춘[편집]

李想春(1910-1944)

테너 주자. 충청남도 부여 출생. 일본 중앙음악학교 졸업. 1942년 전 일본 음악콩쿠르 성악부에 입선. <춘향전>에 출연. 이 외에도 <왕자호동>, <팔리아치> 등에 주역으로 출연했다. 시모야가와(下介), 히라마(平門文壽), 노타르 자코모, 네토게 레베에게 사사. 서울대 음대 학장 역임.

정훈모[편집]

鄭勳謨(1911-1978)

소프라노 주자. 황해도 안악(安岳) 출생. 바이올리니스트인 김형량(金亨亮)과 정동 모리스홀에서 부부음악회를 가짐으로써 데뷔했다. 일본 데이코쿠음악학교를 졸업하고, 1935년 5월 <동아일보>사 주최로 독창회를 개최, 하이든의 <천지창조>를 비롯하여 슈베르트의 <방랑자>, 슈만의

<여자의 사랑과 생애> 등을 불러 절찬을 받았다. 서울대 음대 교수로 있었고 이관옥과 함께 유능한 성악가를 많이 배출하였다.

이유선[편집]

李宥善(1911- ? )

테너 주자. 평안남도 평양 출생. 아메리칸음악대학 성악과 졸업. 현제명, 와이스(J. Weiss), 더들리 버크(Dudly Buck), 쉬니저스(Schneejuss), 간즈(R. Ganz)에게 사사. 국제오페라단을 창설하여 오페라 <춘희> 합창을 지휘했으며, 1949년 시카고음악대학원 이론 및 지휘 과정을 수료한 후 서울을 비롯, 대도시에서 귀국 독창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오페라 해설집>, <음악가 일화집>, <한국양악 80년사>가 있고 가곡 <고향> 등 10여곡이 있다. 또한 오페라대사 번역 8편을 비롯하여 라디오, TV 등을 통한 음악해설이 4천여회에 달하였다. 1971년 5월에 독창회를 가진 바 있다. 한국음악협회 초대 이사장, 한국교회음악협회 부회장 겸 중앙대학교 교수역임. 난파 기념사업회 이사였다.

이용준[편집]

李容俊(1911-1965)

평안남도 안주(安州) 출생. 평양숭실전문, 일본 도요음악학교를 거쳐 미국 웨스트민스터콰이어스쿨(Wesjminster Choir School) 졸업. 캘리포니아대학 교수 역임. 파리 몽파르나스에서 사망.

채선엽[편집]

蔡善葉(1913- ? )

소프라노 주자. 서울 출생. 이화여전을 거쳐 뉴욕 줄리아드음악학교를 졸업. 이화여대 음악과장을 역임.

서수준[편집]

徐守俊(1913- ? )

성악가이자 합창지휘자. 일본 도요음악학교 졸업. 경희대 음대 교수, 서울대 음대 강사 역임. 고려합창협회 지휘.

이인범[편집]

李仁範(1914-1974)

테너 주자. 평안북도 용천 출생. 연희전문 및 일본 고등음악학교 졸업.

1939년 마이니치신문 주최 전 일본 음악콩쿠르 성악부 1등 수상. 1958년엔 고려교향악단 및 서울교향악단 독창자로 활약하는 한편 한국오페라연구회를 창설했다. 오페라 <춘향전>을 비롯하여 <토스카>,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니>, <카르멘>, <오셀로>, <돈 조반니> 등에서 주역을 맡았다. 키노시타(木下保)에게 사사했으며, 연세대 음대 학장으로 후진 양성에 힘썼다. 김천애와 함께 가장 명성이 높은 성악가였다.

하대응[편집]

河大應(1914- ? )

성악가이자. 작곡가. 일본 도요음악학교 졸업. 전 일본 음악콩쿠르 2위 입상. 동성상업학교를 거쳐 효성여대 음악과 교수 역임. 작품으로 <하대응 가곡집>이 있다. 제임스 블랜드 작곡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를 애창하여 보급시켰다.

한규동[편집]

韓圭東(1914- ? )

테너 주자. 서울 출생. 1943년 일본 고등음악학교를 졸업. 1944년에 부민관에서 제1회 독창회를 개최. 1949년엔 오페라 <파우스트>에 출연했고, 한국음악가협회 이사장 서리 역임. 편저(編著)로 <한국 가곡집>이 있다. 숙명여대 음대 교수 역임.

김학상[편집]

金學相(1915-1962)

함경남도 원산 출생. 일본 도요음악학교 졸업. 그 후 동경중앙방송국원으로 있다가 귀국했다. 서울 후생악단원을 거쳐 서울대에서 음악을 담당했다. 1950년에 공연된 오페라 <춘향전>에서 방자역으로 출연했다. 이어 1954년에 공연된 가극 <왕자호동>에도 출연했다.

이점희[편집]

李點熙(1915-1991)

경북 달성 출생. 계성학교에서 박희준 선생에게 배웠으며 일본의 도쿄음악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939년 동경 히비아 공화당에서 오페라 <춘희> 공연을 시작으로 많은 공연을 하였으며, 일본에서 활동하다가 1946년 귀국하였다. 귀국 후 대구에서 활동하면서 서울대 출강, 효성여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많은 후진을 양성하였다.

이처럼 이점희는 연주가와 교육가로서의 두가지 음악활동을 하였다. 특히 이점희가 활동하였던 당시 호남지역은 서양음악의 불모지나 다름 없었기 때문에 그의 활동은 더욱 돋보이며, 대구에서의 활동도 두드러져 대구지역 성악사에 한 획을 그었다. 예컨대 대구음악학원의 설립 및 운영에 의해 탄생된 전문음악인을 볼 때, 더욱 그의 업적이 두드러진다. 또한 1952년 효성여대가 개교하면서 시작된 음악과는 이점희에 의해 대학에서 성악이 교육되었으며, 대구지역 대학음악교육의 시발점을 장식했다. 정년퇴임한 영남대학교에서 공식적인 음악활동을 마감함으로써 이점희는 성악가인 동시에 음악교육가로서 살아왔다.

이창식[편집]

李昌植(1916-1983 )

평양남도 강서 출생. 일본 동양음악학교(동경대학교 음대 전신) 졸업. 후지와라(藤原)오페라 단원, 이화여대 음대 교수 역임. 아베(阿部英雄), 네토케 레뵈에게 사사.

김창락[편집]

金昌洛(1916- ? )

전라북도 전주 출생. 일본 무사시노음악학교 졸업. 숙명여대 음악 과장, 광주여고 교장 역임. 미국무성 초청으로 도미, 독창회 개최. 5인음악회에 출연. 오다구로(太出異養二), 부하 페나치에게 사사. 프랑스 가곡의 개척자.

임만섭[편집]

林萬燮(1918- ? )

테너 주자. 황해도 은율(殷栗) 출생. 일본 음악학교 졸업. 오페라 <콩쥐팥쥐>, <사랑의 신곡>, <왕자호동>, <카르멘> 등에 주역으로 출연. 히라마(平問文壽), 이노우에(井上) 게이코에게 사사. 국립오페라단, 고려오페라단원을 역임하고 2회의 독창회를 개최한 바 있다.

김창섭[편집]

金昌燮(1918-1977)

함경북도 경성(鏡城) 출생. 일본 예술대학, 일본 고등음악학교 졸업. 서라벌예대·숙명여대·수도여사대 교수 역임. 3회의 독창회 개최. 하라(原信子), 만프레드 글루리트, 유아사에게 사사. 저서로는 <음악미학>, 번역집 <토스카니니의 생애와 예술>, <세계음악대전집 성악편전곡> 등이 있다.

남궁요설[편집]

南宮堯卨(1919- ? )

베이스 주자. 평안남도 평양 출생. 도쿄음악학원 졸업. 상하이교향악단, 고려교향악단 매니저를 역임. 1930년 일본 마이니치신문 주최, 전 일본 음악콩쿠르 2위 입상. 보기 드문 베이스로서 독일 가곡이 전문임.

이관옥[편집]

李觀玉(1920-1976)

소프라노 주자. 평안남도 순천(順天) 출생. 일본 무사시노(武藏野)음악학교

본과 성악부 졸업(1938). 같은 해 제1회 독창회를 개최하고, 1940년에 제2회 독창회 개최. 1961년에 매노티 작곡 오페라 <전화> 전곡을 번역 출간한 것을 비롯하여 1962년엔 <가요명곡전집(소프라노)>을 편저하였다. 서울대 음대 교수 역임. 정훈모와 함께 유능한 성악가를 많이 배출했다.

김자경[편집]

金慈璟(1921- ? )

소프라노 주자. 서울 출생. 이화여전 음악과를 졸업하고 미국 줄리아드음악학교에서 수학. 미주 60개 도시 순회공연(1950-1958). 뉴욕 카네기홀에서 독창회 개최. 이화여대 음대 성악과장, 김자경 오페라단을 창설, 단장 역임. 오페라 발전에 공헌이 크다.

남영우[편집]

(1915- ? )

서울삼육대학 신학과 및 오사카 외국어대학 졸업. 시카고음악원에서 종교음악 연구. 오사카(大阪) 및 시카고에서 독창회 개최. NHK 제25회 음악콩쿠르 입상. 나카야마(中山悌一), 네트게레베, 게루할트 피슈에게 사사.

오사카예술대학 음악학부 조교수 역임. 일본 악계에서 활약.

이규도[편집]

李揆道(1940-

) 소프라노 주자. 평북 의주 출생. 1963년 이화여대 성악과 졸업 후 미국 줄리아드음악학교 졸업. 1977년 독창회, 84년 독창회, 90년 국립오페라단 라보엠 멘델스존 가곡의 밤에서 마담 버티플라이역을 맡았다. 국제심사위원으로 위촉되었으며, 1995년 KBS교향악단 캠퍼스연주회 한국음악상을 수상하였다. 현재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엄정행[편집]

嚴正行(1943- )

경남 양산 출생. 경희대 음대 및 동 대학원 졸업. MBC FM 고전음악프로그램(안녕하십니까 엄정행입니다 진행). 저서에 <목련꽃 진 자리 휘파람새는 잠도 안자고>가 있다. 현재 경희대 음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윤치호[편집]

서울대 음대, 단국대 대학원 졸업. 국립오페라 단원으로 활약중이다. 오페라 <토스카> 등 70여편에 주연으로 등장하였다. 현재 경희대 음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백남옥[편집]

白南玉(1946- )

메조소프라노 주자. 서울 출생. 서울대 음대 졸업 후 독일 베를린국립음대오페라에서 공부하였다. 1969년 오페라 <순교자>, 1970년 푸치니 오페라 <나비부 인>, 1971년 모차르트 오페라 <마적>, 1972년 비제 오페라 <카르멘>, 1975년 베를린국립음대 오케스트라 말러가곡 솔리스트를 맡아 공연하였다. 또한 1987년 오펜바흐 가곡 <호프만의 이야 기>, 1989년 모차르트 오페라 <코지판투테(여자는 다 그런 것)>, 1991년 미국 애틀란타·휴스턴·시애틀·워싱턴 등지 순회독창회, KBS교향악단·시향 10여회 협연, 지방연주 20여회, 독일문화원 주최 '독일가곡의 밤'에 해마다 참가하고 있다.

김영미[편집]

金英美(1954- )

소프라노 주자. 대구 출생. 이탈리아 산타체칠리아음악학교 및 동 대학원 졸업. 1982년 미국 오페라무대에서 활동중으로 뉴욕·휴스턴·그랜드·코넥티컷 등 미주 15개 도시에서 공연했으며, 필라델피아오페라 <사랑의 묘약>에서 파바로티와 공연하였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성악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난파 음악상을 수상했다.

최현수[편집]

(1958- )

바리톤 주자. 서울 출생. 연세대 음대 졸업 후 스칼라 오페라극장 오페라학교, 베르디국립음악원, 오지모아카데미, 가를로베르곤치아카데미 등에서 공부하였다.

1986년 베르니 국제 콩쿠르에서 최고 바리톤상을 수상했다.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 1등상 등 다수의 수상경력이 있다. 현재 한국종합예술학교 교수로 재직중이다.

홍혜경[편집]

(1958- )

소프라노 주자. 줄리아드음악학교 졸업 후 1982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 오디션에서 우승하였다. 1984년 모차르트의 <라 클라멘자 디 디토>의 세르발리아 역을 맡아 유명해졌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의 프리마돈나로서 시카고·워싱턴·샌디애이고·캐나다·토론토 오페라극장 등에서 주역으로 출연하는가 하면 뉴욕 필하모닉을 비롯한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와 협연하였으며, 근래에는 캐나다 캘거리 동계올림픽 때 초빙되어 세계를 놀라게 했다.

조수미[편집]

(1962- )

소프라노 주자. 서울대 음대 졸업 후 1986년 이탈리아 산타체칠리아음악원 졸업. 1986년 알베르토 카페라 국제콩쿠르에서 우승했고, 1988년 밀라노 스칼라에서 용멜리의 <페톤데>을 맡아 데뷔하였다. 주요 레퍼토리는 베르디·모차르트·R.슈트라우스의 오페라이다. 1986년 산타체칠리아음악원 때부터 이미 두각을 나타내어 가장 권위가 있다는 알베르토 카페라 콩쿠르에서 우승한 뒤 주목을 끌어 주로 이탈리아 오페라를 레퍼토리로 하여 세계 무대에 서게 되었다. 최근에 독일 작품인 <그림자 없는 여인>이나 <카르미나 부리나>에서 뛰어난 가창력을 나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