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지리/한국지리의 개요/한국의 자원과 산업/한국의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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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산업[편집]

제1차 산업구조[편집]

第一次産業構造

한 국가의 경제적 특성을 나타내는 방법의 하나로 그 나라의 산업별 인구구조를 사용할 때가 있다.1962년에 1차산업이 40.3%였던 것이 1986년에는 12.3%로 줄어들었다. 이와는 반대로 13.3%였던 2차산업은 31.3%로 늘어났다. 46.6%였던 3차산업은 1974년에 53%, 1980년에 55.4%로 늘어났으며, 1983년에는 2.1%가 줄어든 53.5%를 나타냈으나, 1986년에는 56.4%로 늘어났다.이와 같이, 1차산업이 줄어들고 2·3차산업이 늘어난 것은 그만큼 우리나라 산업이 공업화 및 근대화되어 간다는 좋은 증거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농림·수산업 부문이 갑작스럽게 줄어들고 보면, 농촌과 도시의 소득차이가 더욱 심해지기 때문에, 이것이 장차 2차산업을 키워 나가는 데 있어 지장을 주기 쉽다.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우리나라가 3차산업 비율이 50%를 넘는다는 것은 너무 높은 수치이다. 이것은 2차산업이 다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생산인구가 필요 이상으로 비생산적인 일에 종사하고 있는 데서 비롯되었으나, 점차 감소 추세로 되어 가고 있다.

농업[편집]

農業

국토의 대부분이 산지로 되어 있고 농경지개간이 잘 되어 있지 못해 농경지는 전 국토의 22%에 불과하다. 이와 같이 협소한 농경지에 전 가구의 19.5%가 농가이므로 농가 1호당 평균 경지 면적이 1.1㏊에 불과하고 따라서 한국의 농업은 그 경영이 세계적으로 영세하다. 1호당 1㏊ 미만의 농가가 전 농가의 62%를 차지하고 있음은 그 영세성이 더욱 심각함을 보여 주고 있다. 더구나 이러한 경지조차 호당 평균 6개 정도의 필지로 분산되어 있어 경영의 영세성에서 오는 불리한 점을 가중시키고 있다. 또한 경영의 영세성은 도시의 고용기회가 적은 것과 어우러져, 한국의 농업을 가족 노동에 의존하는 자급농업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노동집약적인 주곡(主穀) 농업의 성격을 강화시켰다. 이것은 농지 소유의 상한선(3정보) 설정으로 기업적 대경영의 출현이 억제되고 있는 것과 관련하여, 한국 농업의 시장 조직 발달을 저해하였음은 물론 공업과의 유기적 관계를 맺지 못하게 하였다. 또 낮은 생산성(특히 노동 생산성에 있어서)과 농민의 전근대적 사고방식과 농업기술의 미숙 등은 농업의 확대 재생산과 농촌사회의 근대화를 방해하였으나 최근 현대식 농사법과 새로운 품종의 개발, 새로운 작물의 실험 등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쌀의 생산[편집]

-生産

한국은 아시아 몬순 기후 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세계의 주요 쌀 생산국의 하나이고 광복 전 매년 약 350만 톤을 생산(남북한 합계), 그 중 100만 톤 내외를 일본으로 수출했다. 광복 후 남한에 있어서는 전천후 농토의 개발, 수리시설의 확장, 품종과 농법의 개량, 고미가(高米價) 정책을 통한 정부의 미곡 증산 정책 등에 의하여 그 생산량이 급속히 늘어나 쌀 재배면적 약 105만 3천㏊에서 493만t(2002)의 생산량을 보이고 있다. 한때 쌀 생산은 자급하고 남은 양을 수출까지 하였으나 최근에는 매년 쌀 자급률이 감소 추세에 있다.쌀 생산은 원칙적으로 산악지방과 개마고원을 제외한 전국의 모든 지역에서 가능하나, 그 중심지는 남·서 해안에 발달된 평야 지대와 하천 유역의 평야 및 분지지역이다. 특히 호남·나주·김해·김포·안성·예당·연백·재령·박천 평야 등이 쌀 생산의 중심 지대이고, 전남·북과 경남·북 지방에 분포되어 있는 논의 면적이 남한 전체 논 면적의 60%를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쌀농사지대가 기후가 따뜻하고 강수량이 많으며 평탄한 지형과 풍부한 용수를 얻을 수 있는 하천 유역에 집중되고 있기 때문이다. 남북간의 기온의 차이에 따라 조생종(早生種)에서 만생종(晩生種)에 이르는 각종 쌀 농사 지대가 전개되어 있고, 특히 다수확 품종인 통일·유신·밀양 등의 벼가 재배되고 있다.

밭 농작물[편집]

-農作物

광복 전에는 약 400만㏊(논은 170만㏊)였고, 남한은 논(132만㏊)이 밭(83만㏊)보다 많다. 또 적지 적작에 의한 자급적 농업을 영위하므로 작물의 종류도 잡곡·두류·저류·채소·과실·특용작물 등 다채로운 것이 특색이다.그러나 쌀 농사에 비하여 토지에의 투입이 적으므로 토지 생산성이 쌀보다 낮은 것이 보통이며 쌀농사가 많은 남한에서 밭곡식 생산량은 쌀의 그것보다 적다. 1995년의 경우 채소의 재배면적은 40만 3천㏊이며 수확량은 20만 9천 톤이다. 1999년의 보리 수확량은 23만 5천 톤이며 그외 감자는 49만 톤이다. 지역간의 기후·지형·관습 등의 차는 밭곡식의 생산에 다양한 지역차를 발생시키고 있다. 즉 작물의 종류를 보면 고온다습한 남부지방에서는 쌀보리·보리·고구마·육지면·저마·감·포도·담배·배 등의 난대성 작물을, 기후가 한랭하고 비가 적은 북부지방은 봄보리·밀·조·귀리·감자·재래면·아마·사과 등의 냉대성 작물을 재배하며, 중부지방은 양 지대의 작물을 뒤섞어 재배하고 있다. 따라서 쌀보리는 호남지방, 보리는 영남지방, 밀과 조는 황해도와 평남, 감자는 관북지방과 강원도, 고구마는 제주도와 전남, 귤은 주로 제주도에서 각각 그 주산지를 이루고 있다. 또 토지 이용방식을 보면 대체로 남한이 1년 2작이나 2년 4작이 가능한데 대하여 북한은 1년 1작이나 2년 3작에 그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한편 과실과 특용작물 생산을 비롯하여 최근 대도시 주변에 발달된 원예농업은 자급적 성격이 강한 한국의 밭농사로 보아서는 특수한 농업 부문이긴 하나, 국민의 생활수준 향상과 공업과 교통·무역의 발달로 이들 상업적 농업도 착실히 발달하고 있다.

농업의 지역분화[편집]

農業-地域分化

한국 농가의 농작물 결합 양식은 대체로 주곡+두류+특용작물을 기간으로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지역에 따라서 이들 3부문의 작물 종류와 영농 방식이 상당히 다르다. 그러므로 한국은 ‘비교적 협소한 농업 공간에서 다채로운 농업 지역의 분화’를 볼 수 있는 국가로서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농업의 지역 분화를 초래하는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자급적 농업을 영위하고 있는 한국에 있어서는 일반적으로 자연조건이 특히 중요하다. 그 중 전국적 견지에서는 기후가, 남한에 있어서는 지형이 작물 분포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한국의 농업 지역은 크게 남서부의 벼농사 지대와 북동부의 밭농사 지대로 나눌 수 있는데 전자는 다시 벼농사 중심 지역과 논·밭 혼합 지역으로, 후자는 특성에 따라 고원지대·산악지대·밭농사 중심지대의 3지대로 나뉜다. 그 외의 농업지역 면적은 적지만 대도시 부근의 근교농업 지역이 여기에 추가된다.

축산업[편집]

畜産業

축산업의 진흥이 농업정책의 중요 과제가 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한국의 축산업은 지금까지 경종(耕種)농업에 부속된 영세적인 부업 형태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 실정이다. 또 이것이 한국 농업이 서양 농업과 구조적으로 다른 점이다. 이것은 한국에는 산지가 많으나 양호한 목초지가 부족한 점, 경지의 대부분이 시급한 식료작물 생산에 충당되고 있는 점, 자금부족으로 자본 회전기간이 긴 가축 사육이 어려운 점, 국민소득이 낮아 축산물 수요가 적은 점, 축산기술의 부족 등이 그 원인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수출산업 육성과 농가수입을 올리기 위한 정부의 축산장려에 의해 활발한 움직임을 보여 과잉생산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따라서 가축사육 두수의 조절과 축산물 가공시설의 확충이 시급하다.남한은 한국전쟁으로 소의 상당한 감소를 보았고 농업의 기계화로 소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떨어져 소 사육 두수의 증가는 다른 가축에 비해 적어 1986년에는 1943년의 171만 4천 마리보다 줄은 119만 3,000마리였다. 이때부터 정부의 강력한 장려책으로 1994년에는 178만 마리에 달하였으나, 쇠고기 수입개방 완료를 앞두고 사육불안 심리가 확대되면서 번식보다는 비육위주의 사육경향이 성행함에 따라 사육두수가 1998년 238만 3천 두보다 18.1%나 감소한 195만 2천 두로 한우 사육기반은 크게 약화되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2001년 쇠고기 시장개방 완료시점을 앞두고 한우 사육기반을 유지하기 위해 2004년까지 2단계 투융자계획 기간 중 축산분야 투자액 총 4조 5천억원의 50% 이상을 한우에 투자하고, 송아지생산안정제를 전국에 확대 실시하며, 한우다산장려금제 실시 및 자가 인공수정기 보급 등 종합적인 한우산업안정대책으로 1999년 6월 중장기축산발전 및 투자계획을, 1999년 11월에는 한우안정대책을 수립했다.1999년 쇠고기 소비는 39만 2.714t으로 1997년 대비 8.5%, 1998년 대비 13.7%가 증가하여 IMF 사태로 인해 급감된 쇠고기 소비가 경기회복에 따라 뚜렷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국내산 쇠고기의 소비는 환율안정과 국내산 쇠고기 가격상승으로 1998년보다 2만 349t이 줄어든 23만 9,721t인 반면, 수입쇠고기 소비는 지난 해보다 6만 5,600t이 늘어난 15만 2,993t이었다. 수입쇠고기의 소비증가로 쇠고기 자급률도 지난해 75.3%보다 14.3% 감소된 61.0%로 자급률 또한 크게 낮아졌다.돼지사육두수는 2003년 말 923만 1천 두로 2002년 말 897만 4천 두에 비하여 3% 증가하였으나 사육호수는 2003년 말 1만 5천 호로 2002년 1만 7천 호보다 13% 감소하였다. 그러나 호당 사육두수는 605두로 2002년 514두보다 17.7%나 증가되어 사육농가수는 감소추세가 지속되는 반면, 호당 사육규모는 증가추세에 있어 규모화가 크게 진전되었다. 돼지고기 연간 소비량은 75만 5,356t으로 전년보다 7.8%가 증가되었으며 1인당 돼지고기 소비량은 16.1㎏으로 전년 대비 6.6% 증가하였다. 비육돈(100㎏ 기준)의 산지 평균가격은 19만 9천원으로 전년보다 2만원이 인상되었다.닭 사육두수는 1999년 말 9,458만 7천 수로 전년말 8,584만 7천 수보다 10.2% 증가되었고 사육호수는 21만 호로 전년보다 4만 2천 호가 증가했다. 닭고기 및 계란의 산지 평균가격은 전년말 대비 각각 9.2%, 9.4% 감소되었다. 닭고기 소비량은 28만 1,400t으로 전년도 26만 400t보다 8.1% 증가되었으며, 1인당 소비량도 6.0㎏으로 전년도 5.6㎏보다 0.4㎏ 증가하였다.1999년도 육류 총 소비량은 142만 9,500t으로 전년도의 130만 6,000t보다 9.5%가 증가되었으나, 국내산은 전년도보다 11% 감소된 77%로 국내산 점유율이 크게 떨어졌다.

양잠업[편집]

養蠶業

한국은 지형·기후 등 자연 조건이 알맞고 저렴한 노동력이 풍부하여 중국·일본과 더불어 세계 3대 양잠 국가의 하나로, 광복 전에는 최고 2만 톤의 누에고치를 생산하였다. 남한은 광복과 함께 양잠업이 한때 크게 쇠퇴하였으나,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과 소득 증대의 일환으로 양잠 농가가 크게 증가하였다. 그러나 대일 수출량이 크게 감소되어 그 생산량이 대폭 줄게 되었다.특히 한국의 양잠업은 국내 수요보다 대일(對日) 무역량에 의해 그 생산량이 좌우되고 있어 농가소득의 안정을 위해 다른 해외시장 개척이 요망된다. 양잠업은 전국 각 하천의 중·상류에 있는 산록지대에서 행해지나 특히 낙동강 상류인 소백산맥의 남·동 사면 지대는 남한의 대표적인 양잠지대이다.

임업[편집]

林業

한반도의 임야 면적은 전 국토의 65% 이상을 차지하는 산림국가로 2002년 현재 641만㏊이다. 또 제주도에서 개마고원에 이르기까지 약 700여 종의 수종을 구비한 난대림·온대림·아한대림이 차례로 분포하여 임업이 발달할 수 있는 기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경제적 입목지(立木地)가 매우 빈약하여 총삼림 축적량은 약 1억 1,570만㎥로 1㏊당 평균축적량은 약 13,4㎥에 불과하였으며, 광복 전 남한에 해당하는 입목 축적량은 8,870만㎥로 전국 입목 축적량의 39%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은 유령목(幼齡木)이 많아 가용 축적량은 그보다 적은 정도이고, 목재로서의 가치가 적은 잡목이 많고, 경제성장으로 목재의 수요량 증가는 매년 급속히 늘어나고 있다. 1995년도 목재 수급실적을 보면 총수요는 928만 4천㎥이었는데 이 중 수출용은 34만 5천㎥에 불과하고 대부분 내수용이었다. 공급실적을 보면 해외에서 수입된 외재가 822만 9천㎥를 점유해 국내 자급률은 11%에 지나지 않아 목재 부족량을 수입과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해외 삼림의 개발 투자에 의해 보충하고 있다.

임업지대[편집]

林業地帶

한국 제1의 임업지대는 개마고원 일대의 침엽수림 지대로서, 낙엽송·전나무·삼(杉)나무 등이 많고 이 지역에서 벌목된 임산물은 압록강과 두만강 등의 수운(뗏목으로 운반)과 혜산선·만포선 등의 삼림 철도에 의해서 소비지로 운반된다. 남한에서는 태백산맥 지역이 가장 중요한 임업지대로서 소나무·전나무·잣나무 등의 침엽수와 졸참나무·신나무·박달나무·떡갈나무 등의 활엽수를 생산하나 자원이 넉넉지 못하다. 그 외 지리산을 중심으로 소백 산지에 소규모의 임업지역이 있고, 대나무는 전남과 경남을 비롯한 남부지방에서 생산된다.

수산업[편집]

水産業

한국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국으로 그 연근해는 세계 4대어장의 하나인 북서 태평양 어장에 속하고 있어 세계적인 수산 자원의 보고를 이루고 있다. 특히 남서 해안은 해안 지형이 복잡하고, 수온이 알맞아 플랑크톤 서식에 좋으며, 동해안은 한·난류가 교류하여 어족이 풍부하다. 즉 어류는 70여 종, 조개류는 20여 종, 해조류는 18종으로 그 종류가 많아 1930년대의 정어리 전성 시대에 한국은 200만 톤의 어획고를 올려 세계적인 어업국이 된 적이 있었으나, 국토 분단과 한국전쟁으로 수산물 생산량은 크게 줄어들어 한때 그 생산량이 20만 톤에 불과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최근 원양 어업의 급속한 발전, 양식업의 확대, 증식 어업의 확장, 어업 기술의 발달 등에 힘입어 333만 톤에 이르게 되어 다시 세계적인 수산국 대열에 끼게 되었다. 수산업 인구는 2003년 현재 21만여 명으로 산업상 지위는 높다고 할 수는 없으나, 이들 수산 자원이 국민의 단백질 공급이나 외화 획득에 기여하고 있는 것은 중요하다 하겠다. 2002년 수산물 총생산량은 247만 톤이며 이 중에서 원양어업이 58만 346톤을 차지한다.

주요 어장과 문제점[편집]

主要漁場-問題點

한국의 수산업은 원양어업보다 연근해 중심의 어업이 발달되어 있다. 그 중 가장 많은 어획고를 올리는 동해 어장은 난류를 따라 북상하는 오징어·꽁치·삼치·고등어·멸치 등의 난수성 어족과 한류를 따라 남하하는 명태·대구·청어 등의 한수성 어족이 주로 잡힌다. 동해 어장 다음으로 중요한 남해 어장은 어족의 회유서식상 좋은 조건이 구비되어 멸치를 비롯하여 고등어·삼치·전갱이·도미·방어·가자미·넙치·숭어·문어 등 각종 어종이 다채롭고 연중 어획이 안정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다. 또 남해안은 완도 중심의 김과 충무 중심의 양식업이 유명하다. 한편 수심이 얕은 서해 어장은 저인망 어업의 발달에 좋으나 겨울철에 수온이 낮아져 휴어기(休漁期)가 있게 되는 결점이 있다. 주로 잡히는 어족은 조기를 비롯한 갈치·전갱이·멸치·새우·삼치 등이고 조류를 이용한 안강망 어업이 발달하였다. 특히 서해안은 조수 간만의 차가 크고 넓은 간석지가 발달되어 있어 천일제염업도 발달하였다.

제2차 산업[편집]

한국의 광업[편집]

韓國-鑛業

한국 광업의 역사는 약 2,000년 전인 삼한(三韓)시대부터라고 볼 수 있다. 당시는 금·은·철·구리 등을 개발, 일용 도구의 제조와 화폐 원료 및 무역의 매개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광업 발달은 19세기 말엽에 일본과 맺은 사금개발조례(砂金開發條例)에 의해서 광산권이 일본에게 이양된 후 외국인에 의해서 개발 발전되었다.일제하의 한국광업은 민족기업으로 성장하지 못한 채 일본 자본주의의 확립과 대륙침략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는 처지를 면할 수 없었다.광복을 맞은 우리 광업계는 중석·형석·흑연·활석·철광 등 주로 수출 광물의 일부를 개발함으로써 그 명맥을 유지해 오다가 수차에 걸친 경제개발 계획의 추진으로 특히 석탄광업을 위시해서 각종 토사광물(土砂鑛物)의 개발에 활기를 띠게 되었고, 1962년에는 「광업개발조성법」이 공포되어 영세 민영광산의 개발육성 자금의 대여로 선광 및 제련 시설을 현대화하기에 이르렀다.1980년을 불변가격 기준으로 할 때 1985년 산업 생산지수가 115.0으로 비교적 높은 성장률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그동안에 국내외의 광물 수요가 증대된 위에 지하자원 개발의 각종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대단위 탄좌개발을 위한 시설자금을 확충하고 수출광물에 대해서는 운임률을 인하할 뿐 아니라 ‘광업진흥공사’의 설립, 산업철도의 부설 등 지원정책을 적극화하였기 때문이다.광업에 걸쳐 평균 23.5%씩 감소하였으나 1980년대에 석회석 4천만 톤과 규사 100만 톤 내외, 철강과 고령토 60여 만 톤이 생산되었다.

한국의 광업과 광물[편집]

韓國-鑛業-鑛物

현재 한국에서 발견된 광물은 200여 종에 달하며 이 중에 경제적 이용가치가 있는 광물은 약 140여 종, 남한에는 약 40여 종이 알려지고 있다. 특히 세계적으로 산출이 드문 특수광, 합금재료광, 희유원소광이 많고 중석·수연·흑연·마그네사이트·석회석·운모 등은 세계적인 매장량을 가지고 있다.또한 우라늄광의 매장량도 확인이 되었으며 앞으로의 개발이 기대된다. 이들은 대체로 편마암·화강암 등의 산성 화성암과 고기층의 석회암, 알칼리화성암 등이 널리 분포된 한국의 지질구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한편 많은 종류의 광물이 부존되어 있으면서도 근대공업에 필요한 기초적인 자원이 부족하거나 거의 전무한 점이 또한 우리나라 지하자원의 현저한 특색이다. 무연탄은 품질이 우수하나 그 매장량이 많지 않고 갈탄이 약간 생산되나 코크스용 유연탄은 전혀 생산되지 않으며 석유는 전량을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처지이다. 철광은 비교적 널리 분포되어 있으나 그 매장량이 넉넉하지 못하고 품질도 낮은 편이다. 더구나 주요 지하자원의 매장이 현저하게 북한에 편재되어 있어 남북간 산업구조의 현저한 이질성을 나타내고 있다.따라서 우리의 광업은 다음과 같은 특색을 나타내고 있다. 첫째, 국내의 공업이 어느 정도 발달하기는 하였으나 광산의 가동이 해외 의존도가 강하고 광산물의 국제가격에 따라 우리의 광업은 예민하게 영향을 받고 있으며, 둘째, 많은 민영광업의 경영이 영세적이며 생산비가 높고, 셋째, 이들 영세광산은 시설의 근대화와 최신 채광기술의 도입이 늦어지고 있다는 점, 이들 영세광산의 경영에는 구한말부터 내려오는 덕대제(德大制)란 청부경영이 잔존하고 있어서 시설의 근대화를 더욱 곤란케 하고 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한국의 석탄광업[편집]

韓國-石炭鑛業

한국에 매장되어 있는 석탄은 고생대 평안계에 속하는 무연탄과 제3기층에 속하는 갈탄이 중요하다.무연탄은 품질이 좋으나 쥐라기에 일어난 습곡과 심한 지압 때문에 탄층의 두께가 일정하지 않고 분탄이어서 수송에 불편하다. 무연탄의 분포는 영월·삼척 중심의 태백산 지역, 영변·개천·덕천 중심의 평남 북부 지역에 편재하여 있고, 이 밖에 화순·문경·고원·문천 등지에서도 개발되고 있다. 총매장량은 갈탄까지를 포함해서 남한이 14억 5천만 톤, 북한이 약 50억 톤으로 알려져 있다.갈탄은 3기층의 분포가 뚜렷한 회령·아오지·영안 일대의 함북 북부 지역과 길주·명천을 중심으로 하는 함북 남부 지역, 그리고 사리원·안주·영일 부근에 소규모로 매장되어 있다.석탄광업은 1960년대 후반에 정부의 연료정책이 주탄종유(主炭從油)에서 주유종탄(主油從炭)으로 돌변하게 되자 1967년의 1,343만 6천톤의 생산을 고비로 그 양이 감소되었다. 그러나 그 후 국내자원의 개발·활용이라는 관점에서 석탄광업을 재육성시킨다는 방향으로 전환되고 1969년 「석탄광업 육성에 관한 임시 조치법」이 제정 공포되자 석탄광업은 새로운 계기를 맞게 되어 1988년에는 2,448만 5천 톤을 생산하였다. 이는 가정용 연료의 증가와 더불어 산업용의 수요가 증가함을 뜻한다. 그러나 1990년대로 들어서면서 산업체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는 비교적 위험률이 낮은 석유와 가스·전기사용, 생산비 증가로 채산성이 악화되어 석탄 생산량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정부에서도 영세한 비경제 탄광을 정비하여 1990년대 중반에는 약 30여 개로 정비했다. 나아가 폐광지역의 열악한 입지여건을 개선하기 위해 사회간접자본 확충에 오는 2005년까지 모두 3,200억원 가량을 지원키로 했다.

한국의 금속광업[편집]

韓國-金屬鑛業

우리나라에서 산출되는 철광으로 자철광·적철광·갈철광·황철광의 4종이 있으며 주요 매장지역은 개천·재령·하성·은율을 중심으로 하는 평남 및 황해도지방, 무산·회령·부령의 함북지방, 이원·북청 등의 함남지방, 그리고 양양·홍천·충주를 포함하는 태백산 지역을 들 수 있고, 이 밖에 양산·김해·울산·서산 등지에 소규모로 매장되어 있다.1972년까지 주로 대일수출에 의존해 왔던 국내 철광업은 73년 포항종합제철의 가동을 계기로 국내 공급으로 전환하여 중화학공업의 기초원료 공급원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철광자원 매장량은 약 1억 2천만 톤으로 추정되어 부존량이 빈약한 데다가 품위도 대체로 Fe 30%의 저품위이며 철광석의 생산량이 수요량을 따르지 못하여 수입의존도가 해마다 높아지고 있다. 즉 철광석의 국내 수요가 71년의 11만 4천 톤에서 73년에 77만 2천톤, 75년에는 207만, 7천톤으로 증가된 데 비하여 생산량은 75년의 경우 64만 4,300 톤에 불과하여 우리나라의 철광석 수입의존도는 71년의 27.2%에서 75년에는 71.9%로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철광석의 국내자급도를 높이는 것이 최대의 당면 과제이다.중석은 영월군 상동과 황해도 곡산군 백련광산이 유명하다. 이 밖에 달성·옥방·청양·양덕 등의 광산이 있는데, 중일전쟁이 일어난 1936년부터 활발히 채굴되었다. 광복 후에는 한·미 중석협정이 체결되어 1953년 7,441톤(70% WO3)을 정점으로 광산물 수출액의 87%를 차지하더니 70년대에는 약 4천 톤을 생산하여 그 대부분을 외국으로 수출하여 왔으나 1975년 하반기부터 가동을 보게 된 대한중석 달성제련소에서 텅스텐 제련을 하게 됨에 따라 일부는 국내공급을 하고 나머지는 수출하게 되었다.금광은 운산·대유동·구봉광산·수안의 흘동광산 등과 사금광으로는 김제·직산·성환·순안 등이 알려져 있다. 한때는 2만 7천㎏을 생산하여 세계적인 산금국이었던 때도 있었으나 1987년에는 1,072㎏을 생산, 급격히 감소되는 추세이다.이 밖에 몰리브덴은 중원군 대화광산, 망간은 금화 및 봉화, 구리는 함안·창원·달성, 납(鉛)과 아연은 봉화·영월·울진·제천 등지에서 산출된다.

한국의 비금속광업[편집]

韓國-非金屬鑛業

우리나라의 비금속광물자원 중 생산이 활발한 것은 석회석·고령토·규석·납석·활석·형석·흑연 등이다.석회석은 시멘트와 카바이드의 원료로 쓰이며 국내 시멘트공업의 성장에 따라 전량을 국내 공급하고 있다. 석회석은 조선계에 속하는 평남·황해·함남 남부·강원 남부 등지에 다른 광종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부존량이 무진장하여 지난 1975년에 확인된 매장량이 약 420억 톤에 이르고 있다.고령토는 경남 하동·산청지구를 중심으로 하여 국한된 지역에 부존되어 있으나 국내 요업원료의 공급원은 물론 수출광물로서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규석은 유리의 원료로 쓰이며 이원·백령도·연평도·서산·안면도·흑산도 등 해안과 도서지방에서 많이 생산된다.납석은 완도와 목포·경주·영월 지역에 부존되어 있다.활석은 충주·제천·이원 등지가 주산지이며 요업용이나 분재용(粉材用)으로 널리 쓰인다. 특히 충주의 동양활석 광산은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활석광산으로 우리나라 활석광산의 80% 정도를 생산하고 있다.형석은 제철의 용제(溶劑)로 많이 쓰이며 재령·봉산·고원·북청·금화·춘천·제천·금산·옥천 등에 널리 분포하고 있다.흑연은 경북의 문경·상주지구와 충북의 보은·옥천지구에 풍부히 매장되어 있는 토상흑연(土狀黑鉛)과 경기도 시흥·평택·오류동 등지의 인상흑연(鱗狀黑鉛)이 있다. 흑연은 국내공업용 원료 및 수출용으로 개발되어 오랫동안 생산되어 왔으나 해외수출 수요의 변동과 가격의 기복으로 인해서 흑연광업은 성쇠를 거듭하였고 1963년에는 약 34만 톤을 생산했는데 72년에는 약 5만 톤 정도를 생산하였다. 75년에는 인상흑연 2,339톤, 토상흑연 4만 4,893톤을 생산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에는 수입과 채산성 문제 때문에 비금속 광업도 사양화 길을 걷고 있다.

한국의 공업[편집]

韓國-工業

우리나라의 근대공업 발전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6단계로 구분된다. ① 경술국치 이후 1919년까지는 개항장을 통해 일본의 사업자본이 침투함으로써 전통적인 한국의 가내수공업이 점차적으로 붕괴되면서 일본에 의한 식민지형 근대공업이 토착화되던 시기, ② 1920년에서 1929년까지는 산미증산계획(産米增産計劃) 및 통일관세의 시행 등 일련의 식민지적 수탈정책을 통해서 정미·양조·섬유공업 등 식민지형 농산 가공업을 확충하던 시기, ③ 1930년 이후 광복까지는 만주사변이나 중·일전쟁을 통해서 한국을 대륙침략의 병참기지로 삼고 각종 지하자원 및 전력자원을 적극 개발함과 동시에 군수산업을 비롯한 중화학공업을 확충하던 시기, ④ 1945년에서 1952년까지는 광복의 혼란과 한국전쟁에 의한 공업의 쇠퇴 내지 파괴기, ⑤ 1953년 휴전성립 이후 1961년까지는 전쟁 후의 복구와 각종 소비재 조달을 위한 공업재건기로서 주로 섬유류와 건설재 공업이 입지하던 시기, ⑥ 1962년 이후 1981년까지는 수차(數次)에 걸친 경제개발계획의 수행을 통해 중·화학공업의 주도하에 고도성장을 이룩하는 구조개편기이다.일본 자본주의의 한국에 대한 식민지적 지배의 주요 목적은 공업제품의 시장을 확보하고 식료와 공업원료를 수탈할 뿐 아니라 대륙진출을 위한 경제적·군사적 기지를 육성함에 있었으므로 자연히 한국공업의 지역적 구조는 남·북의 균형을 잃은 기형적 상태를 면할 수 없었다. 더욱이 공업에 필요한 기초적 자원이 거의 북부지방에 편재하여 있는 현실하에서 남북은 분단되고, 게다가 전쟁을 통해서 기존시설마저 거의 이용할 수 없게 된 처지를

거쳐 오늘에 이른 것이 우리의 공업이다.그러나 1960년대 이후 우리의 공업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해 왔다. 경제개발계획이 실시된 이래 제1차 기간에 연평균 14.8%, 제2차 기간에 21.5%, 그리고 72

75년에는 연평균 19.3%의 높은 성장을 이룩함으로써 전체 국민경제의 성장을 주도하여 왔으며 공업의 구조도 크게 바뀌어가고 있다. 1962년에 부가가치생산(경상가격)에서 차지하는 중공업의 비중은 31.4%에 불과하였고 따라서 우리나라의 제조업은 노동집약적인 경공업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67년에는 중화학공업의 비중이 37.3%로 크게 확대되었고 71년에는 39.2%로 또다시 향상되었다.1973년부터는 정부의 중화학공업 우선시책에 따른 석유화학공장 및 종합 제철공장 대 조선소 등의 건설·가동으로 중화학공업의 비율이 매년 확대되어 중공업 대 경공업 비율은 중공업의 비중이 점점 늘고 있는 추세이다.이러한 높은 성장과 구조개선은 비료의 자급을 위시해서 시멘트·전기기계·정유공장 등의 건설로 수입대체가 현저히 이루어졌고 공업생산품의 수출이 늘어난 때문이다. 특히 대규모의 종합제철공장과 석유화학 계열공장의 준공 및 세계수준의 조선소 등의 건설로 중화학 부문의 비중은 더욱 확대되었다.

한국공업의 특색과 문제점[편집]

韓國工業-特色-問題點

우리나라의 공업은 역사적 발전의 특수성과 자원의 부족 등에 따라서 몇 가지의 특색으로 요약된다. ① 최근에 이룩한 고도성장의 이면에는 1960년대 중반기부터 외국으로부터 받아들인 차관의 영향을 무시할 수가 없다. ② 기본 원자재의 자급률이 매우 낮다. 1960년대 이후 우리나라의 공업이 상당한 정도의 수입대체 효과를 올리고 있으나 원면·양모·원유·원목·고무·원당·철광석 등의 해외 의존은 절대적이다. ③ 소수의 초 현대적 공장과 더불어 이들과는 관계없는 소규모의 노동집약적 공업이 저임금에 의존하면서 공존하는 이중구조(二重構造)의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종업원 규모 200인 이하를 중소공업으로 본다면 공장수에 있어서는 57%, 종업원수 구성비에 있어서는 40%, 생산액의 구성비에 있어서는 26%가 중소공장의 몫이 되는데 결국 제조업 총 고용원의 약 40%가 총 공업생산액의 불과 26%를 생산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현상은 중소공업에 있어서 시설의 후진성과 겹쳐 노동 생산성의 저하의 요인이 되고 있다. ④ 경제개발계획의 시행 이후로 공업의 고도성장을 주도한 부문은 물론 중화학 부문이다. 그리고 중화학 부문의 비중이 경공업의 비중보다 커졌다.그러나 아직도 우리나라 공업에서 차지하는 식품·섬유공업의 비중은 각각 18%, 22%에 이르고 이에 반해 중화학 부문에서 소득탄력성(所得彈力性)이 큰 기계공업 부문의 비중은 불과 16%이다. 이것도 내구소비재(耐久消費財) 위주의 전자공업 생산이 그 대종을 이루고 있으며 자본재 산업의 성격을 띤 기계공업의 비중은 아직도 미약한 상태이다. ⑤ 우리나라의 공업은 임해공업단지·내륙공업단지의 조성으로 국토 전역에 분산 입지하고 있으나 아직은 수도권을 비롯한 대구·부산·마산·울산 등의 주요 도시에 집중하여 있으므로 해서 균형있는 지역발전을 저해하고 있다. ⑥ 모든 공장들이 원칙 없이 건설되어 있어, 총 공장 용지 85,4㎢ 가운데서 단지에 모여 있는 것은 불과 27%뿐이다.

한국의 주요 공업[편집]

韓國-主要工業 경공업은 제분·제당·통조림·주정·면방직·소모(梳毛)방직·화학섬유·제사·메리야스·의류·합판·잡화공업 등으로 나눌 수 있다.그 중에서 우리나라 전통적 섬유산업인 면방직 공업은 1918년 부산의 조선방직회사를 효시로 영등포·인천·안양·수원·천안·대전·대구·광주 등지에 많은 공장이 섰으며 비교적 풍부했던 잉여 노동력을 배경으로 하여 일찍부터 우리나라의 공업화 과정에서 선도적 역할을 담당해 왔다. 60년대 전반에는 국내시장을 중심으로 한 수입대체 산업으로 외화절약에 기여했으나 68년 이후에는 수출 산업으로 전환되었고 각국의 수입규제 조치, 개발 도상국간의 치열한 수출경쟁에도 불구하고 매년 30% 이상의 수출신장률을 유지하면서 70년대에는 제품의 70% 이상을 수출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1974년 면방직 공업이 산업상 차지하는 비중은 전체 제조업 생산액의 3.3%, 섬유공업 생산액의 15.0%를 차지했다.소모방직은 일찍부터 밀양·마산 등지에 입지하였으나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부산·대구·서울 등지에 대규모 공장이 건설되었고 1·2·3차 경제개발계획 중에도 계속적인 발전을 하여 1972년 말의 소모방직 총 시설 규모는 62만 3,356추에 달했으며, 그 생산은 96,228톤에 이르렀다. 그 후 생산량이 급격히 증가하여, 1987년에는 모사 6만 2천 톤과 직물류 5만 8천㎞를 생산하여 수출액이 1억 58만 달러였다. 화학섬유 공업에는 재생섬유인 인조견과 반합성섬유인 아세테이트·레이온 및 합성섬유인 나일론·폴리에스텔·폴리프로필렌 섬유공업 등이 포함된다. 1950년대 전반까지만 하더라도 국내 화학섬유공업은 발달하지 못하였으나 1959년 미진화학(현 동양비닐론)의 비닐론 공장이 건설되었고 63년에 대구에서 한국 나일론 공장이 건설·가동된 것을 비롯해서 울산·마산·동래·안양·수원·서울 등지에 많은 공장이 건설되었다. 66년에는 비스코스인견사와 폴리프로필렌 섬유공장이, 67년에는 아크릴릭 섬유공장, 68년에는 폴리에스텔 및 아세테이트 섬유공장이 각각 가동되었다. 70년대에 이르러서는 더욱 시설 능력이 확대되어 75년 말에는 일일생산 766톤의 능력을 갖추었으며 전체 생산의 2/3 이상을 수출용으로 공급하였다.전체 제조업의 부가가치에서 차지하는 화학섬유공업의 비중은 같은 기간에 0.6%에서 24.2%로 증가하였다. 그런데 화학섬유 공업의 원료는 석유화학 계열 제품으로 되어 있어 원료의 대부분을 해외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며 따라서 수륙교통의 결절지(結節地)에 지향하는 경향이 있다.우리나라의 제사공업은 한때 일본인들이 큰 관심을 갖던 공업으로 대구·상주·춘천·원주·청주·전주·광주 등 잠견 집산이 용이한 지방도시에 입지하였다. 광복 후 사양의 길을 걷다가 60 70년에는 활기를 띠기도 했다.우리나라의 중화학공업으로는 제지·기초화학·석유화학·화학비료·도자기·합성수지제품·화약·의약품·유지·비누·판유리·시멘트·도자기·철강·비철금속·기계·전자·자동차·조선공업 등을 들 수 있다.우리나라의 기초화학공업은 60년대 초만 하더라도 보잘것이 없었으나 60년대 후반부터 기간산업으로 지정하여 중점 육성한 결과 근대적인 산업으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기초화학 제품은 크게 산(酸) 공업계와 알칼리 공업계로 나눈다. 산 공업계의 대종인 황산(黃酸)은 1957년 일산(日産) 10톤 규모의 공장으로부터 출발하였으나 그 후에 제3·4비료공장의 준공으로 생산이 확대되어 지금은 25개 회사에서 연산 203만 톤을 생산하고 있다.원료는 수입유황, 제련폐가스가 활용되고 있다. 알칼리 공업계의 대종인 소다회와 가성소다의 생산은 각각 25만 톤, 23만 톤으로서 몇몇 기업체가 독점 생산하고 있으며 원료는 국내산 석회석과 수입용 공업용 염이 쓰이고 있다.정유공업은 우리나라 국민경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에너지 소비패턴이 고체에서 유체로 변화하는 세계적인 추세와 국내적으로는 경제개발 계획의 추진에 따른 에너지 수요 증대에 힘입어 정유공업은 60년대에 들어와서 매년 큰 성장을 보여왔다. 1964년 수입대체산업으로 울산 정유공장이 가동되었을 때는 3만 5,000 BPSD(Barrel Per Stream Day)에 불과했던 정유공업의 생산 능력은 1984년에는 79만 2,000 BPSD에 이르러 약 23배 이상의 성장을 이룩하였다. 원유는 외국과의 계약에 의해서 중동지방에서 수송되고 있으며 주요제품은 연료용 벙커C유·경유·휘발유·나프타 등이다. 정유공장은 석유화학 계열공장과 접근 입지함으로써 고도의 생산효과를 올릴 수 있기 때문에 이들 관련 공장이 포함되는 넓은 공업지가 필요하고 많은 용수를 쉽게 구득할 수 있는 곳, 그리고 대형 유조선의 출입이 용이한 항만 조건을 가진 곳이어야 한다. 따라서 한국의 정유공장은 걸프(Gulf)와 합작에 의한 일산 21억 5천 BPSD의 울산공장을 효시로 하여 칼텍스(Caltex)와 합작에 의한 여천 공장, 그리고 유니온(Union)과의 합작에 의한 일산 1만 6천 BPSD의 경인공장이 있다.석유화학공업이라 함은 석유·천연가스 또는 정유 폐가스를 화학적으로 처리하여 에틸렌·프로필렌·부타디엔 등의 저급 탄화수소류 또는 벤젠·톨루엔·키실렌 등의 방향족(芳香族) 탄화수소류와 석유 및 천연가스 또는 정유폐가스를 원료로 하여 합성수지·합성고무·알코올류 등과 합성섬유·합성세제 등의 원료를 제조하는 공업을 말한다.우리나라의 석유화학공업은 1960년대 초반까지는 생산도 없었고, 수요도 극히 미비한 상태였으나 1968년부터는 석유화학제품의 수요가 신장되기 시작하였다. 석유화학공업이 우리나라에서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은 1966년 11월 정부에서 석유화학공업개발계획을 제2차 5개년 계획의 핵심사업으로 확정하면서부터이다. 그후 1972년 울산정유화학 공업단지 내에 나프타 분해공장, 7개 계열공장 및 지원공단의 준공으로, 또 1974년 카프로 락탐공장, 에탄올 및 아세트 알데히드공장 등의 준공으로 주요 석유화학제품에 대한 자급의 길을 마련하게 됨으로써 수입대체산업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993년 현재 석유화학공업 생산 시설은 에틸렌 기준 연산 325만 5천 톤의 나프타 분해시설을 비롯하여 17개 이상 제품의 계열제품 생산 공장이 가동하고 있고, 1979년에는 여천 석유 화학 콤비나트가 완공되었다. 석유화학공업은 정유공장-나프타 분해공장을 정점으로 하여 기초소재 생산-각종 제품 생산으로 연결되는 일관된 계열공업으로서 산업구조를 고도화함에 있어서는 종합제철업과 더불어 핵심공업을 이룬다.화학비료공업은 1930년 흥남 질소비료공장이 건설됨으로써 시작되었다. 1961년에 충주, 1963년 나주에 요소비료 공장을 세웠고, 그후 울산·진해에서 요소와 복비를 생산하게 되고, 장항·인천에서 인산질비료, 삼척에서 석회질비료를 생산함으로써 화학비료의 자급률도 크게 향상되었다.질소비료는 현재 완전 자급이 가능하며 67년부터는 수출이 시작되었고 완전 자급이 가능하며 약 10만 톤 이상 수출을 하고 있다. 다만 가리비료는 75년의 자급 비율이 58%였으나, 77년에 남해화학이 준공됨으로써 자급이 가능해졌다(생산 22만M/T, 소비 19만M/T, 1985년). 요소비료는 암모니아 합성을 위해 중유나 나프타(naphtha)가 원료로 쓰이고 있으며, 대량의 용수가 소요되기 때문에 용수 취득이 용이하고 정유공장 근처에 입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시멘트공업은 1919년 승호리(勝湖里)의 공장을 효시로 고무산(古茂山)·천내리(川內里)·해주·삼척 등에 건설되었다. 우리나라는 석회암 지역이 널리 분포되어 있고 부근에 탄전이 인접하여 있어 시멘트 공업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남한에는 1961년까지 문경과 삼척에서 72만 톤의 생산량을 내고 있었으나 경제개발계획이 실시된 지난 1960년대와 70년대 초에 걸쳐서 단양·영월·삼척·제천·장성·부천 등에 대단위 공장을 만들어 시멘트공업의 급속한 성장을 이룩하게 되었다. 85년의 시멘트 생산 능력은 2,041만 톤이나 되어 61년도의 22,2배나 확장되었고 64년부터 시멘트 수출이 시작된 후 해마다 수출량이 크게 늘어 75년부터 247만 톤을 수출하여 해외 시멘트 시장에서도 유력한 수출국이 되었다.시멘트 공업이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국민 경제의 총 출산액 중 시멘트의 투입액비는 63년에 0.2%였던 것이 66년에는 0.3%, 70년에는 0.7%로 증대되었다. 제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 역시 63년의 3.23%에서 66년 4.63%, 70년에는 6.29%로 점차 신장되었다.철강공업은 50년대까지는 미미한 상태였으나 60년대 들어서면서 급속한 성장을 하였다. 1962년에 14만 톤에 불과했던 철강제품 생산은 70년에 128만 톤으로 증가하였으며 제조업의 부가가치 생산에서 차지하는 철강공업의 비중은 68년의 3.3%에서 73년에는 6.7%로, 그리고 생산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동기간에 4.6%에서 7.6%로 크게 증대되었다.철강공업의 질적인 면에서는 60년대까지는 소규모 영세적이던 것이 1973년에 포항종합제철 제1차 설비의 준공으로 제선(製銑·제강(製綱)·압연(壓延)의 일관 생산 체제를 갖추게 되었고 철강공업이 비로소 본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76년에는 포항제철의 제2차 설비를 준공함으로써 조강(粗鋼)기준 시설 능력이 연산 260만 톤으로 확장되었고 1982년까지는 850만 톤 규모로 시설규모가 확장되었다. 87년 광양제철소 준공으로 철강공업은 수출전략 산업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철강공업은 금속제품을 비롯한 각종 기계공업 및 건설업의 기초소재 내지는 중간재를 공급하게 됨으로써 전방관련 효과가 클 뿐 아니라 철광석 및 석탄 등을 원료로 사용하기 때문에 후방관련도도 높아서 근대 공업에서 핵심부문을 이루고 있다. 제철의 소재로 쓰이는 철광석은 포항제철 공장의 경우 약 70%를 인디아·호주·칠레·브라질 등에 의존하고 있으며 코크스용 석탄은 전량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포항제철공장은 이들을 수입하기에 용이한 항만 조건을 갖춘 수륙교통의 요지에 입지가 선정된 셈이다. 철강공업의 조강생산능력은 92년 말 3,215만 1천M/T에 달하며 양적 자급기반 확립과 질적 고도화도 기할 수 있게 되었다.기계공업은 70년대에 접어들어 중화학공업의 필요성이 제기됨에 따라 그 육성방안이 강구되었다. 70년을 기준으로 한 산업생산지수를 보면 75년에 전산업이 267.6, 제조업이 283.5인데 비해 기계공업은 517.5나 되어 5배 이상의 성장을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생산 증가는 업종별로 나누어보면 전기기기와 자동차 공업이 대종을 이루고 있다.1970∼1974년간의 실적을 보면 전체 기계공업 생산액이 3배 증가한 데 비해 전기기기는 4.5배, 수송용 기기는 2.4배 증가했는데 일반기계 부문은 1.5배 정도 증가하여 생산구조의 불균형을 말해 주고 있다. 일반 산업기계의 해외 의존도가 큰 것은 무역수지역조의 중요 원인이 되고 있으므로 산업기계의 국산화문제는 무엇보다도 시급하다. 한국에 있어서 중요 기계공업의 입지는 서울·마산·대구 등 대도시의 주변을 주로 하여 구미의 전자공업, 부산과 울산·부천의 수송기계공업, 전주의 농업용 기계공업이 괄목된다.전자공업은 1958년 주식회사 금성사가 슈퍼헤테로다인 방식의 진공관 라디오를 처음 생산해냄으로써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였고 62년에 3,600대의 트랜지스터를 첫 수출하였다. 60년대 전반까지만 해도 라디오 중심의 단순 생산에 머무르던 것이 60년대 후반에는 TV·트랜지스터·축전기·저항기·앰프 및 트랜시버 등 제품의 다양화가 이루어졌을 뿐 아니라 70년대에는 직접회로 발광 다이우드, 숫자표시판, TV튜너, 수상기 등의 고도정밀 부품의 생산이 가능해졌다. 수출액도 66년에 360만 달러였던 것이 85년에는 18억 2,600만 달러로 증가하는 등 1990년대 이후 반도체를 중심으로 우리 경제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전자산업수출이 총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70년의 6.6%에서 88년의 25%로 제고되면서 국내 제1의 수출산업이 되었고, 생산면에서도 제조업 전체 생산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70년의 3.2%에서 88년의 17.7%로 증가되었다. 그러나 선진국의 기술보호주의, 노사분규와 임금상승, 외국인 직접투자의 자유화 등 국내외 경제환경의 변화로 인하여 기존 성장품목에 바탕을 둔 성장전략이 한계에 부닥치면서 전자산업은 구조조정을 위한 전환기에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국내 전자산업은 기술집약적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산업구조를 재조정함으로써 전자산업의 위치를 확립해야 한다.자동차공업은 철강·기계·금속제품·전기기기 및 화학제품 등 중화학공업 제품의 종합조립산업으로서 이들 관련 산업에 대한 파급효과가 크고 또한 고도의 기술과 정밀도를 필요로 하는 중추전략산업이다.우리나라의 자동차공업은 1962년부터 65년 사이의 중간 부품 수입에 의한 단순조립 생산시기를 거쳐 1966년부터 72년까지는 완전 분해부품 수입에 의한 조립 생산시기로 접어들었고 73년에서 75년 사이에는 국산 고유모델의 소형 승용차 생산체제로 돌입하였다. 1985년 자동차 생산규모는 연간 38만 대에서 91년 150만 대로 증가했다.한편 87년도의 경우 수출량은 54만 6,310대로 전체 생산량의 55%를 차지하였으며 내수(內需)도 전년도에 비해 45.7%가 늘어난 42만 48대를 기록하였다. 1998년도의 경우에는 총 195만 4,000대를 생산했으며, 1999년에는 215만 7천 대를 생산했고, 2000년 상반기에 이미 120만 대 생산을 돌파했다.컴퓨터 제조업은 84년 컴퓨터를 생산하기 시작한 후 매년 2배에 가까운 높은 성장률을 지속하였다. 컴퓨터 산업이 전자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83년에 3.7%, 86년 8.3%, 87년에는 8.9%였다. 수출에 있어서도 83년의 3.8%에서 87년에 11.3%로 크게 신장되었다.조선공업은 개개의 수요에 의존하는 주문 생산공업인 동시에 조선대·조선용 독·대형 크레인 등 종합공장으로서의 각종 설비를 구비해야 하며 고도의 각종 기술이 집결된 노동집약적인 종합공업으로서 기계·전기·금속 등 수십 종의 관련공업과 수백 종의 자재를 필요로 하는 공업이다. 우리나라 조선공업의 기반은 1960년대에 와서 확립되었다.경제개발 계획에 따라 해운업·수산업의 개발 발전이 적극화되고 선박건조 규모도 1962년에 200톤급 선박 건조에 불과하던 것이 73년에는 26만 DWT급 선박을 건조하기에 이른 것이다. 1998년 수주 실적은 999만 9,000t으로 우리나라가 일본에 이어 세계 제2위의 조선국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정부의 적극적인 조선공업 육성시책에 힘입은 결과이다.

주요 공업지역[편집]

主要工業地域

면적당 공업생산의 부가가치가 어느 정도인가를 따져서 한국의 공업지역을 분류할 수 있다. 공업의 집적도(集積度)가 높은 곳은 대도시와 그 주변지역인데, 이들을 크게 나누어 보면, ①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수도권 공업지역, ② 동남 임해공업지역, ③ 내륙공업지역, ④ 태백산지구 공업지역, ⑤ 호남공업지역을 들 수 있다.한편, 북한에는 평양·남포 중심의 관서공업지역, 흥남과 청진 중심의 관북공업 지역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수도권 공업지역은 서울·인천을 축으로 해서 부천·안양·성남·수원이 포함되는 곳으로 대량의 수준 높은 수요와 노동력, 자본을 배경으로 각종 공업이 다각적으로 발달하고 있는 곳이다. 동남임해공업 지역은 수출입에 유리한 항만조건과 대량의 수요를 배경으로 한 곳으로, 부산·마산을 연결하는 축과 울산·포항·여천을 포함하며, 부산은 조선·목재·식품·화학·금속 등 다각적 성격을 띤 공업, 포항은 제철공업, 울산은 석유화학·조선공업, 진해는 비료공업, 마산은 섬유·기계공업, 여천은 석유화학공업으로 특화되어 있다.내륙공업 지역으로는 대구의 섬유, 구미의 전자 공업을 필두로 대전·충주가 포함된다. 태백산지구 공업지역은 단양·제천·삼척이 포함되는 곳으로, 풍부한 석회석과 무연탄 등의 자원을 배경으로 시멘트·카바이드·석회질 비료 공업으로 특징지어진다. 호남공업지역은 본래가 농업지역으로서 공업의 낙후지역이었으나 1980년대 이후 점차 활기를 띠고 있다. 군산·전주를 잇는 곳은 섬유·제지·합판공업, 광주와 목포에는 섬유·자동차·식품·비료공업이 일어나고 있다.

제3차 산업[편집]

한국의 3차산업[편집]

韓國-三次産業

3차산업은 주로 인간에게 서비스를 제공하여 주는 것으로 교통·상업·국제무역·관광업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일반적으로 경제·문화 수준이 높은 선진국에서는 3차산업이 2차산업과 균형 있는 발전을 하고 있으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아직 3차산업이 2차산업에 비하여 높은 비율을 나타내고 있는 파행적 경제 구조를 이루고 있다.

한국의 육상교통[편집]

韓國-陸上交通

철도교통[편집]

鐵道交通육상교통의 왕자로서 철도교통이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된 것은 1899년 노량진

인천간(31㎞)의 경인철도이다. 이를 시발점으로 하여 철도가 교통상의 대변혁을 가져오게 되었고, 산업경제의 동맥으로서 국토개발에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일제시대의 철도 건설은 대륙진출의 군사상 목적과 일본공업에의 원료공급을 위한 자원개발 공업제품의 수송을 위해서 경의선(1905)·경부선(1906)·호남선(1914)·경원선(1914)·함경선(1928)을 부설함으로써, X자형 간선철도가 이루어졌으며 이를 중심으로 각 지방에 많은 지선이 개통되어 세계적으로 상위에 속하는 철도밀도를 가지게 되었다. 호남지방의 전라선·광주선·영남 지방의 진주선·동해남부선·대구선·경북선, 중부지방의 장항선·수인선·충북선·안성선·경춘선·수려선 등의 여러 지선과 제2 종관선으로서의 중앙선은 우리나라 수송의 원활을 위하여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광복 후에도 철도가 계속 부설되었으며, 특히 남한 각 지역의 산업개발을 목적으로 한 영동선(영암선·황지선·동해선)·함백선·문경선·정선선·영월선 등의 태백산지구 산업선과 서울교외선·진삼선·남포선, 경전선 등이 개통되었다.한편 철도교통의 신속화 및 근대화를 위하여 경부선·경인선·호남선 등의 복선화와 경인선·태백선·망우선 등의 전철화에 이어 중앙선·영동선·경부선 등도 전철화 사업이 진행되고 있으며, 2002년말 현재 철도의 총연장은 6,845km이며, 하루 평균 열차운행 횟수는 여객열차만 2,664회이다.그러나 철도 부설, 동력디젤 일원화 등에도 불구하고 인구증가와 산업발전에 따른 철도 수송량이 격증되고 있어 우리나라의 철도교통은 수송시설의 확장, 선로의 개·보수, 스피드화 등 많은 문제점이 있었다. 그리하여 정부에서는 우리 국토를 남북으로 종단하는 경부고속철도 건설사업을 92년 6월 30일 착공하여 21세기 첨단 고속교통시대를 여는 대역사가 시작됐다.경부고속철도는 1일 최대 52만 명을 수송할 수 있어 수송능력이 고속도로의 2배에 달하고 기존 경부선철도를 화물 위주로 전환하는 효과를 가져와 컨테이너 수송능력이 현재보다 8.6배나 높아지므로 물류비 절감을 통한 우리 산업의 경쟁력 향상이 크게 기대된다.그러나 서울

부산 426.2㎞를 최고시속 300㎞로 주행하게 될 경부고속철도 건설은 많은 기술상의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99년말 일부 구간이 시험주행에 들어갔으며, 2010년경 전구간 완공될 예정이다.

도로교통[편집]

道路交通

한국의 전통적인 도로는 고래로 역원제의 실시에 따라 발달한 것으로 신라·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와서는 전국에 41개 선, 540여 개의 역으로 구성된 교통망이 수도 서울을 중심으로 방사상으로 통하였다. 그 중에서도 경부·경춘·의주·경원·함경·목포·진주·평원·영동·해주 공로가 유명하였으나 대체로 도로의 정비가 불량하였다. 이것이 일제시대부터 근대적 도로로 개수 또는 신설하여서 도로를 1등도로·2등도로·3등도로·등외 도로의 4종으로 구분하였으며, 이와 같은 새 도로를 신작로(新作路)라고 불렀다. 이렇게 하여 일제말 전국 도로 총연장은 약 2만 7천㎞에 달하였으며 그 중 남한의 것이 1만 5천㎞였다.광복 이후 자동차 교통의 급격한 발달로 도로 건설에 일대 혁신을 초래케 하였다. 특히 한국전쟁을 계기로 많은 군사도로의 건설과 확장을 보게 되고 더욱이 1960년대 이후의 고도 경제성장에 따른 경제 활동권의 확대로 인하여 현재 한국의 도로는 총연장이 남한만으로도 5만 8천㎞에 달하게 되었고, 국도·특별시도·지방도로 나뉘고, 국도는 다시 1급도로와 2급도로의 2종으로 구분되어 있다.일반적으로 도로의 발달은 지형 기타 자연상태에 좌우되기도 하나, 산업 발달 정도와 인구밀도에 크게 좌우되므로 한국의 도로밀도는 인구가 조밀한 서부와 남부 평야지대가 높고, 동부산지는 낮다. 간선도로는 척량산맥이 편동되어 있기 때문에 남북 종관선은 상당히 발달되어 있으나 서해안과 동해안을 연결하는 횡단선은 발달이 뒤떨어져 있다.그러나 한국전쟁을 계기로 횡단선도 많이 건설되었다. 우리나라의 도로교통 혁명은 고속도로 개통이라 할 수 있다. 1968년 12월 최초로 경인고속도로가 개통되었고, 1969년 12월 경부고속도로, 그 뒤를 이어서 호남고속도로·영동고속도로·남해고속도로·88고속도로가 개통되어 전국을 1일 생활권으로 축소시키고, 원활·신속한 수송의 효과를 꾀하여 각종 산업과 인구의 지방 분산을 촉진하고 연변지역을 골고루 발전시켜 도시와 농촌간의 지역격차를 해소할 뿐만 아니라 국방상으로도 큰 공헌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이 도로교통은 철도교통의 보완을 넘어서서 원거리 교통기능을 수행함으로써, 바야흐로 우리나라는 자동차 교통시대가 도래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수상교통[편집]

韓國-水上交通

내륙교통[편집]

內陸交通한국의 철도와 자동차 교통이 발달하기 전까지는 내륙수로가 중요한 교통 수단이었다. 특히 대동강은 보산포, 한강은 춘천·충주까지, 금강은 부강, 영산강은 영산포, 낙동강은 안동까지 배가 왕래할 수 있었으므로 내륙지방과 해안지방과의 물자교류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철도 교통과 자동차 교통이 발달된 이후부터는 내륙 수로의 교통이 자연 쇠퇴했다.

해상교통[편집]

海上交通

우리나라는 반도국으로서 동부아시아의 중앙부에 위치하고 해안선이 길고 출입이 많아 대소의 좋은 항구가 발달하여 해운발달에 좋은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해안에 따라서는 안개가 짙고, 조차가 심할 뿐더러 암초까지 있는 곳이 많아 큰 난점도 지니고 있다. 조선시대 말까지는 바다의 이용이 그다지 발달하지 못하였으나 1876년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부산·원산·인천이 개항됨으로써 비로소 대외적인 해운이 시작되었으며 이어서 목포·군산·여수·마산·포항·남포·다사도·성진·청진·나진·웅기 등이 무역항으로 등장하게 되어 광복 전까지는 주로 일본과 중국에 한정된 교역이었다.해안에는 대소 1,365개의 항만을 가지고 있으며, 그 중 14개 개항장을 비롯하여 약 40개의 항구가 있으나 1만 톤급 대형선박의 접안이 가능한 항만은 부산·울산·진해·목포·인천·비인뿐이었다. 최근의 항만 개발 종합계획에 의하면 부산·인천·묵호·삼척·마산·군산·목포·여수·제주·삼천포 등 10대 항은 상공항으로, 울산·포항·삼일포는 공업항으로 개발하기 위한 항만 시설 확충을 도모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항로는 현재까지도 연안 항로가 우세하며 국제항로의 발달은 현저하지 못하였으나 동남아 항로는 발달되어 부산을 중심으로 정기선이 취항하고 있다. 더욱이 1970년대 이후부터는 우리나라도 중화학 공업의 발달과 더불어 조선 사업의 급속한 발달에 힘입어 해운업도 이제 대외적인 해운으로 크게 비약하여 국제 해운업계의 주목을 끌고 있다.1999년말 현재 우리나라의 항만은 모두 50개 항이며, 무역항이 28개, 연안항이 22개이다. 또 연간 하역실적은 총 7억 101만 톤이고, 국적 선복량은 총 톤수 기준 1,198만 1천 톤이다.

한국의 항공교통과 통신[편집]

韓國-航空交通-通信

항공교통[편집]

航空交通

항공사업은 1929년 4월 일본 항공사에 의해 시작되었으나, 대한민국으로서는 1952년 12월에 국제 민간항공기구(ICAO)에 가입되어 1958년 김포공항이 국제공항으로 등장된데 이어 근래에는 김해공항도 국제공항으로 발전했으며 대형 여객기를 비롯하여 초음속 제트기마저 등장하고 있다.항공교통은 신속한 데에 장점이 있으나 운임이 비싸고 많은 화물을 수송하기 곤란한 난점이 있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발달과 국민소득의 증대로 항공기 이용자가 늘어남으로써, 항공교통은 급속도로 발달하여 2002년말 현재 항공기 보유대수는 모두 295대이며, 국제항공 노선수는 대한항공 28개국 70개 노선, 아시아나 16개국 58개 노선이다.우리나라에는 대한항공사(KAL)와 아시아나 항공사가 있어 국내 및 국외선의 일부를 운항하고 있으며 부정기적으로 극동항공·세기항공이 국내의 지방 도시간을 운항하고 있다. 국내에 왕래하는 외국항공으로는 미국의 NWA·FTL, 중국의 CAT, 홍콩의 CPA, 일본의 JAL, 싱가포르의 SIN, 프랑스의 AF, 영국의 PA 등이 있어 막대한 수입원을 외국항공사에 빼앗기고 있는 실정이다.한편 국제공항 건설을 위해 인천광역시 중구 운서동 영종도와 용유도 사이 간척지에 1,435만 평의 부지를 조성해 24시간 운영가능한 동북아 중심공항으로 키워갈 예정인 인천국제공항 건설사업이 92년 11월 12일 착공되었다. 2000년 여객터미널 등 공항 기본시설이 준공되었으며, 2001년 3월 29일 개항하였다.

통신[편집]

通信

통신시설은 인체의 신경과 같아서 국가의 산업발달은 물론이고 사회·문화나 개인 상호간의 자유로운 의사 소통을 도와 지역간의 상호부조와 친밀도를 높여 주는 수단이 된다. 통신기관은 그 이용 목적에 따라 특정인을 상대로 한 대인통신과 일반대중을 상대로 하는 매스미디어로 구분된다.2002년 우리나라의 우체국 수는 3,709개 소이며, 국내우편물은 11억 3,638만 통이다.현재는 먼거리까지 전화가 자동으로 되어 농어촌까지 전화시설이 확충되었다. 2001년 말 전화 가입자는 2,273만 명을, 2003년 말 가입된 이동전화는 3,320만 대를 넘어섰으며, 초고속인터넷 가입자수는 1,132만 명을 돌파했다.또한 매스미디어로는 공영방송과 민영방송이 전국에 방송망을 펼치고 있다.

한국의 상업[편집]

韓國-商業

시장[편집]

市場

상거래가 이루어지는 특정장소를 시장이라 하는데 시장은 정기시장, 상설시장 특설시장의 세 가지로 크게 나눌 수 있다.정기시장은 전근대적 시장으로서 1년 중의 특정일 또는 1개월 중에서 특정일만 열리는 시장으로 우리나라에는 5일장이 있다. 5일장은 지방도시를 중심으로 교통이 편리한 촌락에 분포되어 있다. 최근 농수산부는 5일장의 폐지를 서두르고 있다.상설시장은 상시로 열리는 시장이며 장날 이외에도 거래한다. 즉 상점이 독립하여 연일로 거래하는 것이다.

상설시장은 도매와 소매를 겸하는 경우가 많은데, 지금 시·읍에만도 약 400개 소의 상설시장이 있다. 서울을 비롯한 부산·대구 등의 대도시에 있는 거대한 상설시장은 전국 각지에서 고객이 모여든다.한편 우리나라 대도시의 상설시장의 형태도 근대화되어 백화점·전문점·체인 스토어·슈퍼마켓·쇼핑센터 등이 등장하게 되고 또한 농산물·수산물·청과물 등의 전문화된 공판장이 있어 유통을 원활하게 하고 있다.특설시장은 특수상품을 거래하는 시장으로 서울·부산·인천·여수·군산 등에는 어시장이 있고 서울·대구·수원에는 가축시장이 있으며 옛날에 지방의 특산물을 배경으로 하여 열린 것으로는 대구의 약령시, 서천의 저포시, 안동의 마포시, 안성의 유기시, 경주의 부시, 길주의 우시 등이 유명하였다.한편 90년대 들어 해외시장 전면 개방과 더불어 95년말로 81년 이래 단계적으로 추진해 온 유통시장 개방 계획에 따라 96년 1월부터 유통시장이 전면 개방됐다. 개방과 함께 외국 유통기업의 직접진출이 이루어져 1월에 네덜란드계 회원제 도매클럽(MWC)인 한국마크로가 1호점을 개점했다. 6월에는 한국까르푸가 외국인 단독투자로 1호점을 개점함으로써 MWC 디스카운트 스토어에 이어 하이퍼마켓이 저가지향형 신업태로 등장했다.

산업도시[편집]

産業都市

시장이 설치된 곳은 많은 사람들이 정주하여 취락을 형성한다. 교환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이러한 취락에는 많은 상점이 설치되어 상거래가 이루어지므로 취락은 도시로 발전하여 상업을 주된 기능으로 하는 상업 도시를 형성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서울·부산·대구와 같은 대도시에는 중심부에 상가가 발달하는데 중심 상가에는 업무 중심가·번화가·환락가로 구분되고 있으며 대개 도시규모가 클수록 상가의 범위가 넓고 같은 종류의 상점이 한 곳에 모인다. 도심지를 벗어나면 주택지 부근이나 내외 교통이 빈번한 곳에 인근 상가가 발달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상가보다 시장을 더 많이 이용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상업도시는 서울과 부산인데 이에 따라 서울과 부산의 2대 상권이 있고 각 지방도시를 중심으로 소규모의 지방 상권이 있다. 도시의 상권에는 판매권과 구매권이 있으며 이들의 범위는 항시 변하고 있다.

한국의 국제무역[편집]

韓國-國際貿易국제간의 거래를 무역이라고 한다. 무역은 세계 각 지역의 인구밀도의 차, 자원의 편재, 각국의 정책의 차이, 경제 발전의 방향 및 단계의 상이 등에 의하여 성립된다. 현대적 의미를 가진 외국과의 통상관계는 1876년 강화조약에 의한 부산·원산·인천의 3개항이 통상지로서 개항된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19세기 말까지는 지리적 관계로 인천항의 상권을 청국 상인이 잡고 부산항의 상권은 일본상인이 차지하여 주로 농산물·광산물·수산물 등을 수출하고 구미 잡화를 수입하였다.일제시대의 무역은 일본이 독점하여 한국을 그들의 식량 및 원료공급지화하는 한편 공업제품의 사장화를 꾀한 식민지 산업체제로 규제하여 수출품은 쌀·콩·어류·광산물 등을 주로 하고 수입품을 공업제품 특히 면직물과 생활용 제품이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광복 후 현재에 이르는 동안 우리나라의 무역은 복잡한 과정을 걸어왔는데 그 성격상으로 보아 전기(1945∼1959년), 후기(1960년 이후)로 나누어 볼 수 있다.전기는 종래의 불균형적인 식민지 산업체제와 사회적 혼란으로 경제발전을 할 여유가 없었는데다가 한국전쟁으로 대부분의 산업시설마저 파괴되어 그 피해는 막심하였다. 그래서 초기에는 식품 수입 무역이 주였으나 차츰 완제품 수입으로 변천하였고 경제재건을 위한 건설자재 수입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휴전 후는 전화의 복구, 경제재건을 위한 많은 건설자재와 공업원료의 수입이 크게 요청되어 불균형적인 수입초과 무역구조를 나타내었다.주요 수출품은 중석을 비롯한 광산물·농산물·수산물 등의 원시산업 생산물이 대부분을 차지하여 공업제품은 극히 적었으며, 수입품은 1948년까지는 식품·의류, 기타의 소비재가 위주였으나 휴전 후에는 건설자재·기계·원료재 수입의 비중이 증대되었다. 무역의 대상지역은 인근 아시아 지역인 홍콩·일본·대만과 미국이 주가 되었다.후기는 공업의 기초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원료를 외국에서 수입 가공하여 수출하는 가공 무역이 발달하였다. 특히 제1차,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의한 공업화의 결과 우리나라의 수출무역은 비약적으로 발전되어 공업제품이 수위를 차지하여 수출구조에 큰 변화를 일으켜 공업국가적 성격으로 바뀌게 되었다.수출 품목을 보면 섬유제품을 비롯하여 저임금 노동력으로 생산된 잡화적 성격을 띤 상품이 대부분이었다. 다시금 제3차, 제4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의하여 확대되어가는 경제규모와 수출규모를 뒷받침하고 고수준(高水準)의 자립화를 촉진하기 위해서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공업구조를 전환하게 되었다.(중화학 공업률 약 40%) 이에 따라 수출도 종래의 경공업제품 중심에서, 단일품목 수출가액이 큰 조선·기계 철강·화학·전자 등의 중화학공업 제품 중심으로 바뀌고 플랜트 수출까지 하게 되어 획기적인 수출증대를 기하여 2000년 상반기에는 1,488억 달러 수출을 달성하게 되었다. 수출시장도 종래에는 주로 인근 아시아 지역 특히 일본과 미국에 의존하였으나 최근에는 유럽·중동·아프리카·남미·캐나다 등 세계 각 지역으로 확대되어 가고 있다. 한편 수입품목도 종래 소비재 중심이었던 것이 공업의 성장에 따라 원자재와 시설 중심의 수입구조로 전환되었다.

한국의 관광업[편집]

韓國-觀光業

관광업은 관광객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업으로서 우리나라 관광 사업법(1976. 7. 1 시행)으로는 여행 주선업, 관광 숙박업, 관광객 이용 시설업의 3종으로 구분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삼천리 금수강산’이라는 말이 있듯 명승·고적지가 많아 관광자원이 풍부하다. 특히 자연풍경과 문화재 보존상 가치 있는 고도 경주를 비롯하여 지리산·계룡산·설악산·한라산·가야산·내장산·북한산·한려수도 등의 국립공원이 정해져 있고 그 외 해운대·동래·온양·유성 등의 온천과 경포대·대천·만리포·비인·해운대·광안리 등의 해수욕장 및 내장사·송광사·화엄사·갑사 법주사·마곡사·해인사·불국사 등의 수많은 사찰들과 같은 각 지방의 관광자원이 개발되고 있다.우리나라의 관광산업은 1975년에 국가 전략산업으로 지정되었으며 비약적인 성장을 이룩하여 78년에 외국 관광객이 100만 명을 돌파하였으며, 정부의 각종 지원 시책에 힘입어 호텔 등 관광객 이용시설도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다. 그러나 관광계절의 기후적 국한성, 구미 지역과의 지리적 원격성, 일본시장에의 편중성, 체재일수의 단기성 및 관광 심볼의 결여, 관광 서비스 수준의 미흡 등 극복해야 할 문제점을 안고 있다.또한 최근 10년간의 우리나라 관광객 증가율이 약 72%나 되어 1985년에는 87만 8천명에 달하는 해외 관광객을 유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80년대 이후 내국인의 해외여행이 늘어나면서 95년도에 외국 관광객이 우리나라에서 지출한 여행수입은 56억 달러로 94년 대비 46.8% 증가했다. 한편 내국인의 해외여행 지출은 94년 대비 44.4% 증가한 59억 달러를 기록함으로써 3억 달러의 여행수지적자가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