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론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나랏말싸미.png 이 문서는 옛 한글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옛 한글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면 위키문헌:옛 한글을 참고하십시오.   

目次

一, 開題
二, 壇君의 古傳
三, 準根本 徵憑
四, 神怪的 設相
五, 僧徒 妄談設
六, 王險城 神說
七, 成立 年代觀
八, 民族的 感情設
九, 民族的 信仰設
一○, 그 官學的 唐雁
十一, 日本人 諸說의 槪觀
十二, 僧徒, 妄談設의 檢覈
十三, 僧做論者의 錯論 範疇
十四, 王險城 檢覈

목차

일, 개제
이, 단군의 고전
삼, 준근본 징빙
사, 신괴적 설상
오, 승도 망담설
육, 왕험성 신설
칠, 성립 연대관
팔, 민족적 감정설
구, 민족적 신앙설
십, 그 관학적 당안
십일, 일본인 제설의 개관
십이, 승도, 망담설의 검핵
십삼, 승주론자의 착론 범주
십사, 왕험성 검핵


一, 開題[편집]

一, 開題

1. 개제

朝鮮이 東亞最古의 一國으로 壇君이 그 人文的始原이라 함은 朝鮮人의 오래 前부터 傳信하는 바이다 遺文이 簡約하여 그 詳을 엇기 어려우나 朝鮮民族의 淵源과 文物의 來歷을 오직 여긔 徵考할 밧게 업슬진대 獨一한 遺珠기에 더욱 그 보배로움을 볼지니 學者ー 모름지기 反覆玩索하야 그 幽光을 闡發하기에 餘力을 남기지 아니할 것이다 더욱 朝鮮은 東亞에 잇서서 支那 以外에 數千年 通貫한 國土와 文物의 唯一한 保有者이오 兼하야 그 人文地理的 位置가 正히 民族及文化遊動의 幹線에 當하야 四方의 風雨가 대개 漲痕을 여긔멈을럿스니 壇君이 어ᄶᅵ朝鮮史만의 問題며 朝鮮이 어ᄶᅵ 東洋史만의 問題랴

조선이 동아시아의 가장 오랜 나라의 하나로, 단군이 그 인문적 시초라 함은 조선사람이 오래 전부터 믿어오는 바이다. 남아있는 문헌이 간략하여 그 모습을 얻기 어려우나, 조선 민족의 연원과 문물의 내력을 오직 여기서 밝히고 살필 수 밖에 없을터인데, 유일하고 귀중한 보석이기에 더욱 그 보배로움을 볼지니, 학자는 모름지기 반복하여 깊이 생각하고 찾아서 그 숨은 빛을 드러내도록 여력을 남기지 아니할 것이다. 더욱, 조선은 동아시아에 있어서 중국 이외에는 수천년을 줄곧 국토와 문물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보유자이고, 겸하여 그 인문지리적인 위치가 바로 민족과 문화가 이동하는 주된 통로에 해당하여 사방에서 불어닥친 비바람의 흔적이 여기 머물렀으니, 단군이 어찌 조선사만의 문제이며, 조선이 어찌 동양사만의 문제인가?

대저 東洋의 文化는 人類의 歷史에 잇서서 다만 量으로 그 强半을 占할 ᄲᅮᆫ 아니라 ᄯᅩ한 質로 그 源頭를 作하는 者이어늘 進步한 學의 鍬鋤가 아직 깁히 이리로 밋지 못하야 人類의 文化史ㅣ 오히려 半弦의 그믐을 벗지 못하니 西國의 學界 東洋學의 振興에 用意를 부즈런히 함은 實로 이를 말미암음이다 그러나 東方의 文化라 하면 印度 아니면 支那를 생각하여 눈을로 그 以前과 以外에 ᄯᅳ지 못함을 成果ㅣ 항상 努力을 酬치 못하는 憾이 잇고 東洋(동양)의 學者! 또한 傳統的成見으로 支那에 對해서와 近代的學風으로 西人에 對해서의 二重의 事大精神에 繫縛되어서 支那本位的摸索에서 能히 寸步를 옴기지 못하니 이래서 眞正한 東洋學의 建立은 前途 오히려 遼遠함을 늦기게 한다

대저 동양의 문화는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다만 양으로 그 반 이상을 차지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질적으로도 그 으뜸되는 근원인데도, 진보한 학문의 가래와 호미가 아직 깊이 이리로 미치지 못하여 인류의 문화사는 완전하지 못하니 서양의 학계에서 동양학을 진흥할 뜻을 두고 부지런하게 움직이는 것은 실로, 이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나 동양의 문화라 하면 인디아 아니면 중국을 생각하여 눈을 그 이전과 이외에 뜨지 못하여 성과는 항상 노력에 미치지 못한다는 느낌이 있고, 동양의 학자는 또한 전통적으로 확고한 의견으로 중국에 대해서와 근대적 학품으로 서양인에 대해서의 이중의 사대정신에 묶여서 중국 본위적인 모색에서 몇 걸음도 옮기지 못하니, 이래서야 진정한 동양학의 건립의 앞날은 오히려 요원함을 느끼게 한다.

東洋이 본대 印度나 支那만의 것이 아니오 文化ㅣ 반드시 印度的이나 支那的이래야 할 것 아닐진대 印度又支那에 나리지 아니하는 注意가 그 以外의 方面으로도 向함이 진실로 當然하니 그러면 멘몬저 想起될 것은 印度及支那의 오랜 歷史的對手요 民族學的處女로 잇는 그 北方一帶의 여러 生活群일 것이오 한번 손을 亞細亞 北系文化의 探討에 대려 할진대, 橫으로 數萬里를 總攬하고 縱으로 累千年을 一貫하야 文化의 津梁이오 歷史의 氣流中心인 朝鮮은 正히 그 源委審明과 性質剖檢의 基準材料일 밧게 업슬것이다 이러하야 조선은 다만 東洋史上에서 ᄲᅮᆫ만아니라 人類文化의 形質을 밝히는上으로도 마챤가지 宗要로운 關鍵을 짓게 된다 그런데 朝鮮 歷史의 出發點이오 中心事實인 것이 壇君이라 하면 壇君의 學的意義(의의)와 價値가 ᄯᅩ한 重大하지 아니하냐

동양이 본래 인디아나 중국만의 것이 아니요 문화가 반드시 인디아나 중국의 것이어야 할 것이 아닐진대 인디아 또는 중국에 얼매이지 아니하는 주의(注意)가 그 이외의 방면으로도 향함이 진실로 당연하니 그러면 맨 먼저 상기될 것은 인디아 및 중국의 오랜 역사적 상대요 민족학적 불모지로 있는 그 북방 일대의 여러 생활군일 것이요. 한번 손을 아시아 북계 문화의 탐구와 검토에 대본다면, 횡으로 수만리를 총람하고 종으로 누천년을 일관하여 문화의 통로이요, 역사의 기류가 흐르는 중심인 조선은 바로 그 원류를 밝히고 성질을 샅샅이 파헤치는 기준 재료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이리하여 조선은 다만 동양사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인류문화의 형질을 밝히는 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근본이 되는 중요한 관건이 된다. 그런데 조선 역사의 출발점이요, 중심사실인 것이 단군이라 하면 단군의 학술적 의의와 가치가 또한 중대하지 아니한가?

닐은바 東方文化란 것이 무엇인가 東方文化의 主軸이라는 支那文化란 것은 어ᄯᅥ한 逕路와 因緣으로 성립된 것인가 東方文化의 內容이 支那以外又以前의 무엇을 含有하엿다하면 그 本質, 範圍, 歷史的 意義가 어ᄯᅥ한가 東方文化又亞細亞文化의 人類的關係는 그 端緖를 那邊에 求할 것인가 等 問題는 自體의 潜光과 支那의 反射로써 比較的 明白한 繼續的證迹을 가진 朝鮮에 그 門路를 차질것이니 조선의 傳說, 遺流과 밋 거긔 關한 文籍은 이 ᄯᅢ문에 特別한 細心과 虔誠으로써 處理되지 아니하면 아니될 것이다 저 壇君古傳가튼 것도 疏略하면 疏略할스록 片字隻句에 深密한 注意를 더해야 할 것이오 疑眩하면 疑眩할스록록 障翳를 헤치고 眞面을 찾기에 篤摯한 努力을 바칠것이오 설사 不幸히 그것이 架空 鑿虛한 後代의 浪說일지라도 행여 映像되엇슬가 하는 古意를 檢索하기에 可能을 다한 뒤에 말지니 壇君은 實로 茫茫한 東洋學海의 겨오 남은 一浮木으로 東方文化의 盲龜가 그 浮沈을 오로지 이에 判斷할 것이매 비록 변변치 안코 하잘것 업슬지라도 오히려 遽然히 廢擲하지 못하려든 하물며 渾然한 璞玉이 실상 寶光의 숨은 집임에랴 하물며 一篇 壇君의 簡素한 古傳이 東方文化의 全斑을 炳然히 顯揚하고 남음이 잇슴에랴 敬虔忠直한 學者良心은 이 한 구멍을 通하야 넉넉히 支那 印度 以外 又 以前의 一大 文化相을 데미다 볼 것이다

이른바 동방문화란 것이 무엇인가? 동방문화의 주축이라는 중국문화란 것은 어떠한 경로와 인연으로 성립된 것인가? 동방문화의 내용이 중국 이외 또는 이전의 무엇을 함유하였다 하면 그 본질, 범위, 역사적 의의가 어떠한가? 동방문화와 아시아문화의 인류적 관계는 그 단서를 어디에서 구할 것인가? 등의 문제는 자체의 숨은 빛과 여기에 중국을 비추어 봄으로써 비교적 명백한 계속적 증거를 가진 조선에서 그 출구를 찾을 것이니 조선의 전설, 유풍과 이에 관한 문서는 이 때문에 특별한 세심과 경건한 정성으로 처리되지 아니하면 아니될 것이다. 저 단군 고전같은 것도 꼼꼼하지 않게 요약하면 할 수록 글자 하나하나 어구 하나하나에 세밀한 주의를 더해야 할 것이요, 의심스러운 마음으로 어지러울 수록 장애를 헤치고 진면목을 찾기에 진심을 가지고 살피는 노력을 바칠 것이요. 설사 불행히 그것이 가공이나 헛된 후대의 낭설일지라도 행여 반영되었을지 모르는 옛뜻을 검색하기에 가능한 힘을 다한 뒤에 포기할지니 단군은 실로 망망한 동양학이라는 바다의 겨우 남은 뗏목 하나로, 동방문화의 눈먼 거북이[1]가 그 부침(浮沈)을 오로지 이에 의존하여 판단할 것이므로, 비록 변변치 않고 하잘 것 없을 지라도 오히려 급히 던저 버릴 수 없다면 하물며 혼연(渾然)한 박옥(璞玉)이 실상 보배스러운 빛의 숨은 집임에랴. 하물며 한편 단군의 간소한 고전이 동방문화의 전반을 비추어 드러내고 남음이 있겠는가? 경건하고 충직한 학자의 양심은 이 한 구멍을 통하여 넉넉히 중국 인도 이외의 또한 이전의 일대 문화상(文化相)을 들여다 볼 것이다.

二, 壇君의 古傳[편집]

壇君은 朝鮮人文의 肇祖로 닐컷게 된 만콤 그 傳說의 起原이 ᄯᅩ邃古에 屬하얏스리니 이는 朝鮮人의 民族的成立이 아득한 녯적임과 가치 무엇이든지 그 種姓의 榮耀를 爲하는 說話가 잇지아니치 못하얏슬것으로써도 넉넉히 짐작할 바이다 다만 前하야는 記錄의 述이 일즉 열리지 못하고 後하야는 佛敎의 實德論的融攝과 儒敎의 常識論的 斥否가 大又久하얏슴을 말미암아서 外國에서처럼 古傳說의 完形全傳이 거의 업슴은 學者로 하야곰 朝鮮의 歷史及文化의 時間的優越과 空間的雄渾을 부지중 ᄭᅡᆨ가 생각하게 함이 크지 아니치 못하였다 그러나 散珠를 收綴하고 隱形을 磨光하야 蕪穢한 史園에 向上의 一路를 通하면 朝鮮이 決코 稽古上의 貧戶가 아님을 안다 傳說일 법하야도 神話일 법하야도 아모보담도 못하지 아니한 人文起原의 어린 歷史들 가젓슴을 알면 ᄯᅩ 그것이 마찬가지의 傳說이지마는 남보담 지나는 事實的背景에 彩色되어 잇슴을 알게 된다

단군은 조선 인문의 시조로 일컫게 된 만큼 그 전설의 기원이 또 아득한 옛날에 속하였으리니 이는 조선인의 민족적 성립이 아득한 옛적임과 같이 무엇이든지 그 신분제도의 영광을 위하는 설화가 있는 것으로써도 넉넉히 짐작할 바이다. 다만 전대(前代)에는 기술(記述)이 일찍 이루어지지 못하고 후대에는 불교의 실덕론(實德論)적인 통섭과 유교의 상식론적 배척이 크고 또한 길었음으로 말미암아서 외국에서처럼 완전성을 갖춘 고전이 거의 없음은 학자로 하여금 조선의 역사 및 문화가 시간적으로 우월하고 공간적으로 웅장하여 막힘이 없음을 부지중 깎아 생각하게 함이 컸다. 그러나 흩어진 구슬을 꿰고 숨은 모습을 갈고 닦아 잡초가 무성한 역사의 정원에 향상의 길로 통하면 조선이 결코 옛적의 가난한 집이 아님을 안다. 전설일 법하여도 신화일 법하여도 어느 것에도 못하지 아니한 인문 기원의 어린 역사를 가졌음을 알면 또 그것이 마찬가지의 전설이지만 남보다 나은 사실적 배경에 채색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壇君傳의 原形 ⎯⎯ 最古態가 어ᄯᅥ한 것인지는 시방 무론 徵驗할 길이 업다 시방 우리의 가진 바 그 直接表現的 最古徵憑인 者는 高麗國 義興華山 曹溪宗 麟角寺 迦智山下 普覺國尊으로 닐컷는 一然禪師(西紀 一二〇六 ⎯ 一二八九)의 撰인 『三國遺事』에 거두운 그 一傳이니 三國遺事는 그 名과 가치 三國의 遺聞軼事를 收載한 것으로 金富軾의 『三國史記[2] (西紀 一一四五년 撰成)를 後하기 凡 百餘[3]年後의 記錄이다 三國遺事는 필시 當時 文籍의 淵叢이던 佛門傳來의 材料로써 三國史記의 闕漏를 補述하기 위하야 撰輯된 것이니 『史記』가 儒家的常識論(상식론)에 繩縛되여서 무슨 標準에 依한 劃一的 取捨를 加함에 對하야 『遺事』는 佛敎人的融通性으로써 古樸純實하게 素材를 거두어 노핫슴이 어ᄶᅵ 탐탐한지를 모를 일이다 後世의 眼으로써 古代의 事를 觀함은 三國史記의 내용을 퍽 疏略하게 만드럿지마는 佛敎方面에 流傳한 그 一部가 간혹 『遺事』의 中에 徵考됨을 우리는 못내 다행해야 할 적이 퍽 만히 잇다.

단군전의 원형 ⎯⎯ 가장 오랜 형태가 어떠한 것인지는 지금 물론 입증할 길이 없다. 지금 우리의 가진 바, 그 직접표현된 가장 오랜 증거는 고려국 의흥화산 조계종 인각사 가지산의 보각국존으로 일컫는 일연 선사(서기 1206~1289)가 편찬한 《삼국유사》에 싣은 한 편이 있으니 삼국유사는 그 이름과 같이 삼국의 흘러들은 얘기와 누락된 얘기를 수록한 것으로 김부식의 《삼국사기》(서기 1145년 편찬 완성)가 나오고 약 100년 후의 기록이다. 삼국유사는 필시 당시 문서가 총집결하던 불교계에서 전래하던 자료들을 바탕으로 삼국사기의 누락된 것을 보완하여 서술하기 위하여 편찬된 것이니, 《삼국사기》가 유가적 상식론(常識論)에 얽매어 모슨 표준을 위한 획일적인 선별을 가함에 대하여, 삼국유사는 불교도의 융통성으로서 고지식하고, 순박하며 순진하고 참되게 소재를 싣고 있음이 어찌나 탐탐한지를 모를 일이다. 후세의 눈으로서 고대의 일을 봄으로써 삼국사기의 내용을 퍽 간소하게 만들었지만, 불교 방면에 내려온 그 일부가 간혹 삼국유사 중에 밝혀지고 헤아려지는 것을 우리는 무척 다행이라고 할 경우가 퍽 많이 있다.

『遺事』는 開卷第一을 『紀異』의 編으로 하야,

叙曰, 大抵古之聖人, 方基禮樂興邦, 仁義說敎, 則怪力亂神 在所不語, 然而帝王之將興也, 膺符命, 受圖[4]籙, 必有以異於人者, 然後, 能乗大變, 握大器[5], 成大業也, 古河出圖[6]洛出書而聖人作, 以至虹繞神母而誕羲, 龍感女登而注炎[7]皇雅遊窮桑之野, 有神童, 自稱白帝子, 交通而生小昊, 簡狄呑卵而生契, 姜嫄履跡而生弃, 胎孕十四月而生堯, 龍交大澤而生沛公, 自此而降, 豈可殫記, 然則三國之始祖, 皆發乎神異, 何足怪哉, 此神異之所以漸諸篇也, 意在斯焉, 이라고 自己의 立塲을 밝힌뒤에

삼국유사는 제1권을 기이(紀異)편으로 하여[8],

"서문(序文). 대저 옛 성인(聖人)은 예악(禮樂)으로 나라를 일으키시고 인의(仁義)로 가르침을 베푸는 데 있어 괴력난신(怪力亂神)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9] 그러나 제왕(帝王)이 장차 흥할 때 부명(符命)[10]에 응하거나 도록(圖籙)[11]을 받아 반드시 범인(凡人)과 다름이 있은 연후에야 능히 큰 변화를 타고 대기(大器)를 잡고 대업(大業)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그러므로 황하(黃河)에서 도(圖)가 나왔고[12] 낙수(洛水)에서 서(書)가 나와서[13] 성인이 일어났다. 무지개가 신모(神母)를 휘어감아 복희(伏羲)를 낳았으며 용(龍)이 여등(女登)에게 감응하여 염제(炎帝)를 낳았으며 황아(皇娥)가 궁상(窮桑)의 들에서 놀다가 자칭 백제[14]의 아들이라는 신동과 정을 통하여 소호(小昊)를 낳았다. 간적(簡狄)은 알을 삼키고(契)을 낳았으며 강원(姜嫄)은 발자국을 밟고 (弃)를 낳았다. (堯)는 잉태된 지 14개월 만에 태어났으며 용(龍)이 대택에서 교접하여 패공(沛公)을 낳았다. 이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어찌 다 기록할 수 있으랴? 그러므로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이한 데에서 나온 것이 어찌 괴이하다 할 수 있겠는가? 이 기이(紀異)가 제편(諸篇)의 첫머리에 실린 것은 그 뜻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15]라고 자신의 입장을 밝힌 뒤,

古朝鮮【王儉朝鮮】

魏書云, 乃徃二千載, 有壇君王倹, 立都阿斯達(經云無葉山) 亦云白岳, 在白州地, 或云在開[16]城東, 今白岳宮是), 開國號朝鮮, 與高『堯의 避諱代用字』同時, 古記云, 昔有桓國(謂帝釋也), 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 太伯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 遣往理之, 雄率徒三千, 降於太伯山頂(則太伯今妙香山),神壇樹下,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將風伯, 雨師雲師, 而主穀主命, 主兵, 主刑, 主善惡, 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 在世理化, 時有一熊一虎 同穴而居, 常祈于神雄, 願化爲人, 時神遺靈艾一炷, 蒜二十枚曰, 爾輩食之, 不見日光百日, 便得人形, 熊虎得而食之, 忌三七日, 熊得女身, 虎不能忌而不得人身, 熊女者無與爲婚, 每於壇樹下, 呪願有孕, 雄乃假化而婚之, 孕生子, 號曰壇君王儉以唐高卽位五十年庚寅 (唐堯卽位元年戊辰, 則五十年丁巳, 非庚寅也, 疑基未實), 都平壤城 (今西京), 始稱朝鮮, 又移都於白岳山阿斯達, 又名弓(一作方)忽山, 又今彌達, 御國一千五百年, 周虎〔武의 避諱代用字〕王卽位, 己卯封箕子於朝鮮壇君乃移於藏唐京, 後還隱於阿斯達, 爲山神, 壽一千九百八歲唐輩矩傳云, 高麗本孤竹國 (今海州), 周以封箕子爲朝鮮 漢分置三郡, 謂玄莵, 樂浪, 帶方(北帶方), 通典亦同此設(漢書則眞, 臨, 樂, 玄四郡, 今云三郡名又不同何耶).

고조선 왕검조선

《위서(魏書)》에 이런 기록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단군(壇君) 왕검(王儉)이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 불렀는데 중국의 요(堯) 임금과 같은 시기였다.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옛날에 환인(桓因)-제석[17]을 말한다.-의 서자 환웅이 있었는데 [환웅은] 항상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탐내어 [다스리기를 원했다]. 아버지는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산(山)태백산(山)을 내려다보니, 인간 세계를 널리 이롭게 할 만한 곳이었다. 이에 천부인 세 개를 주어, 내려가서 세상 사람을 다스리게 했다. 환웅은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태백은 곧 묘향산[18]이다-신단수 아래에 내려와서 이 곳을 신시라 불렀다. 이분을 환웅천왕이라 한다. 그는 풍백 · 우사 ·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 · 생명 · 질병 · 형벌 · 선악을 주관하고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의 일을 주관하여 인간 세계를 다스려 교화시켰다. 이때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같은 굴에서 살았는데,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항상 빌었다. 이에 환웅은 신령한 쑥 한 다발과 마늘 스무 개를 보내며, 말했다.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 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는다면 곧 사람이 될 것이다.” 곰과 범은 이를 받아서 먹었다. 삼칠일(三七日, 21일)간 금기를 지킨 곰은 여자로 변했으나, 범은 금기를 지키지 못해 사람이 되지 못했다. 웅녀(熊女)는 혼인할 상대가 없었으므로, 항상 단수 아래에서 잉태하기를 기원했다. 환웅은 이에 잠시 사람으로 변하여 결혼하였더니, [웅녀는]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가 곧 단군 왕검이다. [그는] 당고(唐高)[19]가 왕위에 오른 지 50년이 되는 경인(庚寅)년- 당의 요(堯)임금 즉위 원년은 무진(戊辰)인즉 50년은 정사(丁巳)요 경인이 아니다. [사실이] 아닐까 의심스럽다.-에 평양성(平壤城)-지금의 서경이다.-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국호를 조선이라 불렀다. 다시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로 옮겼다. 그 곳을 궁홀산(弓忽山), -혹은 방홀산(方忽山)- 또는 금미달(今彌達)이라 불렀다. 그는 여기서 1천5백 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주나라 무왕(武王)[20]이 왕위에 오른 기묘년에 무왕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封)하니, 단군은 이에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겨갔다가, 후에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서 산신(山神)이 되었는데, 이때 나이가 1908세였다. 당나라의 《배구전(裵矩傳)》에 이런 말이 있다. 고구려는 본디 고죽국(孤竹國)이었는데 주(周)나라에서 기자(箕子)에게 봉함으로써 조선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漢)나라가 이를 삼군(三郡)으로 나누어 다스렸는데, 이 삼군이 현도(玄菟)·낙랑(樂浪)·대방(帶方) 이다. 《통전(通典)》에는 또 이런 말이 있다. 《한서(漢書)》에는 진번(眞番)·임둔(臨屯)·낙랑(樂浪)·현도(玄菟)의 사군(四郡)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서는 삼군으로 되어 있다고 하고 이름도 같지 않으니 무슨 까닭인가?

아하는 一篇을 魏滿朝鮮以下餘韓三國等의 建國說話와 한가지 收載하얏다. (引用文中의 單括弧內는 原文의 割註요, 複括弧內는 述者의 添入한 것.) 頭尾에 引用한 漢籍은 如何하얏든지 그 『古記』를 引用하매 自己의 意見은 반드시 割註로 攙入한 것만으로도 그 原文尊重의 意를 보려니와 더욱 塘堯五十年의 干支를 辨訂한 語句로써 遺事撰者의 이 篇에 대한 態度가 어ᄯᅥ케 虔肅한 것을 짐작할 것이다. ᄯᅩ 『遺事』는 그 名과 가치 三國의 그것을 採收하면 그만이오미상불 『史記』가 三國以前의 古記에 밋침이 업슴은 상포동 그 名義에 泛濫하기를 避한 것이겟지마는 『遺事』는 그대로 限定한 題號의 下에 그 以前의 모든 建國傳說ᄭᅡ지를 掇拾하엿슴도 適足히써 撰者가 다만 이것저것을 蒐羅하려한 以外에 다른 意思가 잇지 아니함을 삷힐 일이다.

라고 하는 일편을 위만조선 이하 나머지 삼국 등의 건국설화와 함께 수록하였다.(인용문 중의 단괄호 내는 원문의 할주이고, 복괄호 내는 저자가 첨가한 것.) 처음과 끝에 인용한 중국 문헌은 어쨌든지 그 《고기》를 인용하였는데 자기의 의견은 반드시 할주로 첨가한 것만으로도 그 원문 존중의 의미를 보려니와 더욱 당고 50년의 간지를 판단하고 정정한 어구로써 삼국유사의 저자의 이 편에 대한 태도가 얼마나 경건하고 엄숙한 것인지를 짐작할 것이다. 또 《삼국유사》는 그 이름과 같이, 삼국의 그것을 채록하면 그만이요, 과연 《삼국사기》가 삼국 이전의 고기에 미치지 않음은 상포동(?) 그 이름에 범람하기를 피한 것이겠지만 《삼국유사》는 그대로 한정한 제호 아래에 그 이전의 모든 건국설화까지를 수록하였음도 충분히 찬자가 다만 이것저것을 수집하려한 이외에 다른 의미가 있지 아니함을 살필 일이다.

三, 準根本 徵憑[편집]

三, 準根本 徵憑

3. 준근본 증빙

다시 準直接徵憑과 準古徵憑으로 認할者의 主要한 것을 便宜上 미리 揭出하야 두자 金富軾의 三國史記에는

다시 준직접 증거와 준고(準古) 증거로 인정할 것들의 주요한 것을 편의상 미리 살펴두자.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券第十七, 高句麗本紀第五, 東川王〕 二十一年春二月, 王以丸都城, 經亂不可復都, 築平壤城, 移民及廟社平壤者 本仙人王儉之宅也, 或云王之都王險,
〔권제17, 고구려본기 제5, 동천왕〕 21년(247년) 봄2월, 왕이 환도성(城)은 전란을 겪어 다시 도읍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하여, 평양성(城)을 쌓고 백성, 종묘 및 사직을 옮겼다. 평양은 본래 선인 왕검의 땅이다. 혹은 “왕이 왕험에 가서 도읍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의 文이 잇스니 王儉의 名이 보인 最古의 文籍이오 鄭麟趾等의 高麗史(西紀 一四五一年 撰成)에는

라는 글이 있으니 왕검의 이름이 보이는 가장 오랜 문헌이요, 정인지 등의 《고려사》(서기 1451년 편찬 완성)에는,

〔卷五十八, 志卷第十二, 地理三, 豊州〕 儒州本高句麗闕口, 高麗初改今名, 顯宗九年來屬, 睿宗元年置監務, 高宗四十六年, 以衛社功臣成均大司成柳璥內鄕, 陞爲文化縣令官, 別號始寧(成廟所定), 有九月山(世傳阿斯達山), 㽵㽵坪(世傳壇君所都, 即唐莊京之訛), 三聖祠(有檀因檀雄檀君祠)
〔권58, 지권 제12, 지리3, 풍주〕 유주는 본래 고구려의 궐구인데, 고려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 9년(1018년)에 내속시켰다. 예종 원년(1106년)에 감무를 두었다. 고종 46년(1259년)에 위사공신 성균대사성 류경의 내향이라 하여 문화현령관으로 승격시켰다. 별호는 시령이다(성종이 정함). 구월산(세상에 전하기를 아사달산이라고 한다.) · 장장평(세상에 전하기를 단군이 도읍한 곳이라고 한다. 즉, 당장경이 와전된 것이다.) · 삼성사(단인 · 단웅 · 단군의 사당이 있다.)가 있다.
〔同, 西京〕 平壤府本三朝鮮舊都, 唐堯戊辰歲, 神人降于檀木之下, 國人立爲君, 都平壤, 號壇君, 是爲前朝鮮, 周武王克商, 封箕子于朝鮮, 是爲後朝鮮, 逮四十一代孫準時, 有燕人衛滿, 亡命聚黨千餘人來奪準地, 都于王儉城(險一作儉, 即平壤), 是爲衛滿朝鮮….
〔위와 같음, 서경〕 평양부는 본래 세 조선[21]의 옛 도읍이다. 당요 무진년(기원전 2333)에 신인이 단목 아래로 내려오자 나라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세워 평양을 도읍으로 삼고 단군이라 불렀으니 이것이 전(前)조선이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상나라를 정벌하고 조선에 기자를 봉했으니, 이것이 후(後)조선이다. 그의 41대손 기준(箕準) 때에 이르러 연나라 사람 위만이 무리 1천여 명을 모아 망명해 와서 기준의 땅을 빼앗고 왕험성(王險城, 또는 왕검성이며, 곧 평양을 말한다)을 도읍으로 삼으니 이것이 위만조선이다.

의 文이 잇스니 高麗史는 高麗의 遺文을 依據한 撰述인즉 이것이 ᄯᅩ한 麗代의 舊를 承함으로 보아서 無妨한 것이오 遺事의 壇字가 檀木에 因하야 壇字로 고처젓슴을 注意할 것이며 이보담 差先하야는 太宗朝에 權近李詹河崙等이 承命 撰輯한 東國史略에

의 문장이 있으니 《고려사》는 고려의 유문을 의거한 찬술인즉 이것이 또한 고려대의 옛것을 이어받음으로 보아서 무방한 것이요, 《삼국유사》의 단(壇)자가 단목(檀木)으로 인하여 단(檀)자로 고쳐졌음을 주의할 것이며, 이보다 먼저 태종 조에 권근 · 이첨 · 하륜 등이 왕명을 받아 찬집한 《동국사략》에는

〔卷之一, 檀君朝鮮〕 東方初無君長(只有九種夷), 有神人降于太白山(在今寧邊府, 即妙香山) 檀木下, 國人立爲君(唐堯二十五年戊辰), 國號朝鮮(在東表日出之地, 故曰朝鮮索隱曰以有山水故名, 都平壤, 徙白岳, 後入阿斯達山(今九月山)爲神, 是爲檀君(名王儉, 古記[22]云, 壇君與堯幷立, 至商武丁八年爲神, 壽千四十八[23], 然權近應製詩曰, 傳世不知幾歷年曾過千, 盖傳世歷年數, 非壇君壽也),
〔권지1, 단군조선〕 동방에 처음에 군주가 없었다(단지 아홉 종의 오랑캐만 있을 뿐이었다.) 신인이 있어 태백산(지금의 재령부에 있으니, 곧 묘향산이다) 단목 아래로 내려오니 나라 사람들이 왕으로 세웠다.(당요 25년 무진) 나라 이름을 조선(동쪽의 해가 떠오르는 땅이니, 곧 조선이라 일컫는다. 《사기색은》(史記索隱)에서 이르되, 산과 물이 있음으로써 그렇게 이름 지었다고 했다. 평양에 도읍하고, 이어 백악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후에 아사달산(지금의 구월산이다)에 들어가 신령이 되었다. 이 사람이 곧 단군(이름은 왕검이다. 고기에 이르기를 단군은 요나라와 병립하였는데, 상나라 무정 8년에 신령이 되었고, 나이는 1048세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권근이 응제시에 이르되, "대대로 전해온 것이 얼마인지는 모르나, 역년은 이미 천년은 지났도다."고 하였는데, 전해 내려오는 역년이 수천에 이른다는 것이지 단군의 수명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의 文이 잇스니 이것은 그 以後의 編史者의 襲用하는 바⎯되어 近代朝鮮人의 『壇君』觀念을 構成한 要文이오 더욱 權近의 應製詩란

의 문장이 있으니 이것은 그 이후의 역사편찬자가 자주 이용하는 바가 되어 근대 조선인의 단군에 대한 관념을 구성한 중요한 문장이요, 더욱 권근의 응제시란

聞說鴻荒日, 壇君降樹邊,

位臨東國土, 時在帝堯天,

傳世不知幾, 歷年曾過千,

後來箕子代, 同時號朝鮮,

전설을 듣자니 아득한 옛날, 단군이 나무 언저리에 내려와

왕이 되어 동쪽 나라를 다스렸는데, 이는 요임금과 같은 때라네.

대대로 전해온 것이 얼마인지는 모르나, 역년은 이미 천년은 지났도다.

후로는 기자조선 시대가 오니, 동시에 조선이라 이름지었네.

은 禑王時에 明에 가서 明太祖의 檀君이란 出題에 應한 것인즉 麗末搢紳의 사이에 傳信하든 壇君의 內容을 짐작할 것이며 高麗史보담 差後하야여는 世宗實錄卷第一 百五十四의 地理志, 平壤의 條에 몬저 麗史地理志와의 同文을 揭出하고 다음에

이[시]는 고려 우왕 때에 명나라에 가서 명 태조의 단군이라는 출제에 응한 것인 바[24], 고려말 벼슬아치들의 사이에 전해지던 단군의 내용을 짐작한 것이며 《고려사》 이후에 있어서는 《세종실록》 권제154의 〈지리지〉, 평양 조에 먼저 고려사 지리지와 같은 문장을 보여준 다음에,

壇君祠, 在箕子祠南(今上十一年己酉始置, 與高麗始祖 東明王合祠, 壇君在西, 東明在東, 皆南向, 每春秋降香祝致祭
단군의 사당(祠堂)은 기자의 사당 남쪽에 있고, 1429년[25]에 비로소 사당을 세우고 고구려 시조 동명왕과 합사(合祠)하였는데, 단군이 서쪽에 동명이 동쪽에 있어 모두 남향(南向)이다. 봄·가을마다 향축(香祝)을 내리어 제사를 지낸다.

를 記(기)하고, 그 다음 靈異의 項에,

라고 기록하고, 그 다음 신령스럽고 기이함이라는 항(項)에,

壇君, 古記云, 上帝桓因, 有庶子名雄, 意慾下化人間, 受天三印, 降太白山神檀樹下, 是爲檀雄天王, 令孫女飮藥, 成人身, 與檀樹神, 婚而生男, 名壇君, 立國號曰朝鮮, 朝鮮 • 尸羅 • 高麗[26]• 南北沃沮 • 東北扶餘 • 濊與貊, 皆壇君之理, 壇君聘娶非西岬河伯之女, 生子曰夫婁, 是謂東扶餘王, 壇君與唐堯, 同日而立, 至[27]禹會塗山, 遣太子夫婁朝焉, 享國一千三十八年, 至殷武丁八年乙未, 入阿斯達爲神, 今文化縣九月山,
단군고기》에 이르기를, 상제 환인은 이라는 이름을 가진 서자가 있었는데 [세상에] 내려가 인간이 되고자 하여, 천부인 세 개를 받아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가니, 이가 곧 단웅천황이 되었다. 손녀에게 명하여 약을 마시게 하고 사람의 몸이 되니 단수의 신과 더불어 혼인하고 아들을 나으니, 단군이라 이름하였다. 나라를 세우고 조선이라 이름 지으니 조선 ‧ 시라 ‧ 고례 ‧ 남옥저 ‧ 북옥저 ‧ 동부여 ‧ 북부여 ‧ 예와 맥이 모두 단군이 다스리는 곳이었다. 단군은 비서갑 하백의 딸에게 장가 들어 아들을 낳고 이름을 부루라 하였다. 이를 동부여왕이라고 이른다. 단군이 당요[28]와 같은 날에 임금이 되고,

이라하고 그下에 『夫婁無子, 得金色蛙形兒養之, 名曰金蛙, 立爲太子』로부터 三國史記高句麗本紀東明聖王의 叙에 보인 東扶餘建國緣起와 舊三國史東明王本紀를 引하얏다는 李奎報의 東明王篇에 보인 天帝子解慕漱故事全篇을 一連謄載하야 壇君의 本支를 밝히엇스니 이것은現存한 壇君傳의 中에서 가장 形體의 具足한 者로 어ᄯᅥ케로나 注意에 値하는 것이오 그 中에서도 孫女云云, 樹神云云等의 說話的異相이 눈에 ᄯᅴ운다.

이라 하고, 그 아래에 “부루가 아들이 없어 금색 개구리 모습의 아이를 얻어 이를 키우니, 이름을 금와라 하고 세우기를 태자로 삼았다.”라는 것부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명성왕의 서장에 보인 동부여 건국의 유래와 《구삼국사》 동명왕본기를 인용하였다는 이규보의 〈동명왕편〉에 보인 천제의 아들 해모수 고사 전편을 잇달아 올려두어 단군의 줄기와 가지를 밝히었으니 이것은 현존한 단군전 중에서 가장 형체가 갖추어진 것으로 어찌 보던지 주의할 만한 것이고 그 중에서도 손녀 운운, 수신 운운 등의 설화적 상이(相異)함이 눈에 띈다.

壇君古傳의 내용은 거의 上例의 程度에 그치고, 그 以來의 文籍은 東國通鑑外紀以下가 總히 廣略이 이에 局하고 是非도 이를 準하게 되엿스니 다시 煩提할 要가 업스며 其他間接徵憑일 者는 論意의 進함을 ᄯᅡᆯ하서 必要한 곳마다 引用하기로 하자

단군 고전의 내용은 거의 상기 예시의 정도에 그치고, 그 이래의 문적은 동국통감 외기 이하가 총괄적으로 넓고 간략함이 이에 국한하고, 옳고 그름도 이를 준하게 되었으니, 다시 번잡하게 제시할 필요가 없으며, 기타 간접 증빙이 될 것은 논의의 진전함에 따라서 필요한 곳마다 인용하기로 하자.

四, 神怪的 說相[편집]

四, 神怪的 說相

4. 신괴적 설상

壇君의 古傳은 이와 가치 만흔 神怪的分子를 먹음어 얼는 남의 信認을 엇기 어려움이 事實이니 古來로 常識的速斷으로써 그 事實의 誕妄을 論하는 者- ᄭᅳ치지 아니하야 甚한즉 그 主體인 壇君그이의 存在를 疑하게ᄭᅡ지 됨이 ᄭᅡ닭 업는 것이 아니다 더욱 驗證으로부터 穿鑿에 ᄲᅡ지게 된 近代의 學風에 漸染된 者는 그 虛漏한 一隅를 엿보아서 댓자곳자 抹削의 盲杖을 내두르려 함이 어ᄶᅵ 생각하면 怪異치도 아니하다 그러나 探史上에 있어서 信치 못할 것을 信함과 信할 것 을 信치 아니함과의 相距는 진실로 一髮의 동안에 지나지 아니하야 크게 學者의 戒心을 要할 者ㅡ 잇나니 특히 晦古한 事實을 文獻的으로 考究할 ᄯᅢ에는 자칫하면 苔를 보고 石을 니저버리기 쉬움을 생각지 아니치 못할 것이다 저 釋迦와 基督이 다 輕妄한 近代學者의 손에 한번식 必無를 斷하게되고 東洋으로 말하야도 堯舜禹로부터 老列ᄭᅡ지 다 實存圈外로 抛出되는 厄을 免하지 못하야 正히 古代史의 域을 왼통 天荒에 附擲하지 하니하면 말지아니하려는 槪를 示하나 『베레』의 나볼레옹 抹削論을 讀할진대 어ᄯᅥ한 심술ᄭᅮᆫ이 學者의 턱업는 勇氣라도 한번 움ᄶᅵᆯ하지 아니치 못할 것이 ᄯᅡᆨ하다 할 것이다 녯일을 말하기가 엇지 쉽다 하랴 알맹이의 잇는 일이면 말로 어ᄶᅵ 업서질 것이랴

단군의 고전은 이와 같이 많은 신괴적 요소를 머금어, 얼른 남의 신뢰와 인정을 얻기 어렴이 사실이니, 예전부터 상식적 속단으로써 그 사실의 허탄과 망령됨을 논하는 자가 그치지 아니하고 심한 즉, 그 주체인 단군의 존재를 의심하게까지 됨이 까닭없는 것이 아니다. 더욱, 검증을 통한 천착에 빠지게 된 근대의 학풍에 점점 물든 자는 그 헛점과 빈틈의 구석을 엿보아서 다짜고짜 '삭제'라는 맹목적인 장형(杖刑)을 내두르려 함이 어찌 생각하면 괴이하지도 않다. 그러나 역사 탐구에 있어, 믿지 못할 것을 믿음과 믿을 것을 믿지 못함과의 서로의 거리는 진실로 머리카락 하나 만큼에 지나지 아니하여 크게 학자의 경계심을 요할 자가 있으니 특히 감추어지고 오래된 사실을 문헌적으로 궁리하고 연구할 때에는 자칫하면 이끼는 보면서 돌은 잊어 버리기 쉬움을 생각 안하지 못할 것이다. 저 석가모니와 그리스도가 다 경망한 근대학자의 손에 한번씩 반드시 들려지게 되고 동양으로 말하여도 요나라·순나라·우나라로부터 노자와 열자(列子)까지 다 실존권 외로 내던져버리게 되는 액운을 면하여 못하여, 정말 고대사의 영역을 온통 천지개벽 때로 내던지지 아니하면 말지 하니하려는 개략을 보나, 베레의 나폴레옹 삭제론을 일어볼 진대 어떠한 심술꾼이 학자의 턱없는 용기라고 한번 움찔하지 아니치 못할 것이 딱하다 할 것이다. 옛일을 말하기가 어찌 쉽다 하랴? 알맹이가 있는 일이면 어쩌 없어질 것이랴?

시방ᄭᅡ지의 壇君傳을 傳하는 그대로 볼 양이면 아모리 두던 하야 말하야도 그것이 一神話요 一傳說이오 歷史的 信文이 아님이 毋[29]論이다 그 神怪한 話意를 가저다가 그대로 史實로 觀하고 史蹟으로 化함은 아모라도 생각할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의 봄으로는 그 神怪하야 實際스럽지 못한 點이야말로 실상 學的興味가 ᄭᅳᆯ리는 바이오 兼하야 그 自體의 年代的支柱를 지어서 적어도 그 古?古意로의 生命을 保持하게 되는 金剛座ㅡ니 시방 사람으로 보아서 밋지 못하겟다 할 것이기 ᄯᅢ문에 古人의 밋든것임이 도로혀 밝아도지고 古人의 밋든 것이기 ᄯᅢ문에 그 가운대서 어느 種類의 歷史的 遺珠, 그러치 못하야도 人類學的 民族學的 新光이 期待되는 것이다 혹시라도 이것이 홋츠로 一神話 ─古代의 一民衆詩 一原始哲學임에 그치지 아니하고 確實한 事實的 背景을 가저서 얼마만콤이라도 歷史的暗黑을 쓸어 헤치는 도움이 된다 하면 이것은 도로혀 望外의 所得이라고도 할 것이다

시방까지의 단군전을 전하는 그대로 볼 양이면, 아무리 두둔하여 말하여도 그것이 하나의 신화요, 하나의 전설이요, 역사적으로 믿을 만한 글이 아님이 물론이다. 그 신괴한 얘기의 뜻을 가져다가 그대로 역사적 사실로 보고 역사적 유적으로 만드는 것은 아무래도 생각할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그 신괴하여 실제스럽지 못한 점이야 말로 실상 학적 흥미가 끌리는 바이요, 겸하여 그 자체의 연대적 지주를 지어서 적어도 그 고? 옛뜻으로의 생명을 유지하게 되는 금강좌이니 시방 사람으로 보아서 믿지 못하겠다 할 것이기 때문에 옛사람의 믿던 것임이 도리어 밝아도지고 옛사람의 믿던 것이기 때문에 그 가운대서 어느 종류의 역사적으로 남겨진 보배, 그렇지 못하여도 인류학적 민족학적인 새로운 빛이 기대되는 것이다. 혹시라도 이것이 한낱 하나의 신화, 고대의 하나의 민중시, 하나의 원시 철학임에 그치지 아니하고 확실한 사실적 배경을 가져서 얼마만큼이라도 역사적 암흑을 쓸어헤치는 도움이 된다 하면 이것은 도리어 기대치 못한 소득이라고도 할 것이다.

神話를 觀察함에 그 法이 ᄯᅩ한 만흐니 닐은바 『어이메로스』法으로 人事的解釋을 試함도 그 한아이오 『막스뮬러』와 가치 言語的解釋을 用함도 그 한아이오 그것을 事物의 表象(比喩)으로 봄도 한아이오 儀式의 說明으로 봄도 한아이오 ᄯᅩ 最近에서와 가치 心理學的人類學的 檢討를 더함도 有力한 一方法이지마는 어ᄯᅥ한 事物의 發展及成立에든지 普遍性과 한가지 特殊相이 잇는 것이요 그 中에도 神話는 어느 一民族一時代에 잇는 最高知識의 統括的表現이기 ᄯᅢ문에 그 過程과 成立條件이 더욱 各異相不同할 것을 생각키는 것이다 그럼으로 劃一的說明의 감으로는 어ᄯᅥ한 方法이든지 完美할 수 업는 同時에 各別한 方面을 밝히는 上으로는 어ᄯᅥ한 方法이든지 適用되지 못할 것이 업슬 것이다 더욱 壇君傳과 가치 본대부터 常識的氣味가 勝하고 오랜 歷史的洗練을 經하야 事實的背景을 多分으로 包有한 者를 解釋함에는 그 本質이 홋츠로 神話가 아닌 만콤 그것을 考察하고 說明하는 方法이 특히 單純하기를 期할 수 업슬 것이다。

신화를 관찰함에 그 방법이 또한 많으니 이른바 어이메로스 법으로 인사적 해석을 시도함도 그 하나요, 막스 뮐러와 같이 언어적 해석을 사용함도 그 하나요, 그것을 사물의 표상(비유)으로 보는 것도 하나요, 의식의 설명으로 봄도 하나요 또 최근에서와 같이 심리학적 인류학적 검토를 더함도 유력한 한 방법이지만 어떠한 사물의 발전 및 성립에서든지 보통성과 한가지 특수성이 있는 것이요, 그 중에도 신화는 어느 한 민족, 한 시대에 있는 최고지식의 통괄적 표현이기 때문에 그 과정과 성립조건이 더욱 각각 다르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획일적 설명의 감으로는 어떠한 방법이든지 완전할 수 없는 동시에 각기 별도의 방면을 밝히는 이상, 어떠한 방법이든지 적용되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다. 더욱 단군전과 같이 본디부터 상식적 기준이 우세하고 오랜 역사적 단련을 거쳐 사실적 배경을 다분히 포용하여 가진 것을 해석함에는 그 본질이 홑으로 신화가 아닌 만큼 그것을 고찰하고 설명하는 방법이 특히 단순하기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요사이 日本의 學者는 壇君이라면 으례히 根據가 업스리라는 豫斷을 가진 드시 덥허노코 抹削하기에 힘을 써서 아울러 그 神話的 本質과 古傳說的 存立ᄭᅡ지를 拒否하야 許多한 證據를 우리의 압헤 提出하얏나니 만일 그 論證이 理由잇는 것이오 그리하야 壇君의 本地가 究竟은 夢幻과 가튼 것일진대 이러니저러니 虛空에 팔을 내두를 必要가 업슬 것이매 所謂抹削論의 根據如何를 檢察함이 아모것보담 압서는 일이 아닐 수 업슬 것이다 그리하야 그 存否가 判斷된 뒤라야 說明과 說明의 方法이 비로소 問題가 될 것이다 어듸 그네의 所說을 드러보자

그러나 요사이 일본의 학자는 단군이라면 으레이 근거가 없으리라는 예단을 가진 듯이 덮어놓고 말삭하기에 힘을 써서 아울러 그 신화적 본질과 고전설적 존재까지를 거부하여 허다한 증거를 우리의 앞에 제출하였으니 만일 그 논증이 이유있는 것이요, 그리하여 단군의 본지가 궁극에는 몽환과 같은 것일진대 이러니저러니 허공에 팔을 내두를 필요가 없을 것이매, 소위 말삭론의 근거 여하를 검사하고 관찰함이 아무것보다 앞서는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 존재가 판단된 뒤라야 설명과 설명의 방법이 비로소 문제가 될 것이다. 어디, 그의 주장하는 바를 들어보자.

五(오), 僧徒(승도) 妄談設(망담설)[편집]

五, 僧徒 妄談設

5, 승도 망담설

外國人으로 朝鮮의 古史에 對하야 學的檢討를 試한 者는 日本의 那珂通世로써 嚆矢를 짓는다 那珂는 日本에 잇서서 東洋史의 先覺으로 精嚴한 學風을 가진 것은 一篇의 『遺書』에 넉넉히 徵할 것이오 그 朝鮮古史考와 가튼 것도 실로 周到愼密하야 시방ᄭᅡ지 朝鮮史唯一의 好津梁을 짓는 것이다。다만 氏의 文獻偏重의 病을 材料亂備의 恨과 並하야 最大關節일 壇君에서 不慮의 麁鹵를 보이고 그것이 ᄯᅳᆺ밧게 朝鮮歷史의 出發點에 對하야 正當한 見解의 發育을 阻礙하는 因이 되다십히 한 것은 氏에게 잇서서 원통한 過誤라고도 할 것이다。 그는 古史考에서 朝鮮의 古事를 史記 以下 漢籍을 依하야 揣摩한 後, 附說 비스름히 三國遺事의 文을 引用하고 評斷을 加호대

외국인으로 조선의 고대사에 대하여 학적 검토를 시도한 자는 일본의 나카 미치요로써 효시를 짓는다. 나카는 일본에 있어서 동양사의 선각으로 정엄한 학풍을 가진 것은 일편의 《유서》에 넉넉히 나타날 것이요, 그 〈조선고사고〉와 같은 것도 실로 주도면밀하여 시방까지 조선사 유일의 좋은 나루터와 다리가 된다. 다만 그의 문헌 편중의 병을 자료 구하기 어려운 한과 함께 최대의 관절일 단군에서 사려깊지 못하고 추한 어리석음을 보이고 그것이 뜻밖에 조선 역사의 출발점에 대하여 정당한 견해의 발육을 방해하는 원인이 되다시피 한 것은 그에게 있어서 원통한 과오라고도 할 것이다. 그는 고사고에서 조선의 옛일을 《사기》 이하 중국 문헌에 의하여 헤아리고 연마한 후, 설(說)을 붙여 삼국유사의 문장을 인용하고 평가를 가하기를

壇君의 名을 王儉이라고 한 것은 平壤의 舊名인 王險의 險字를 人扁으로 改한 것이다 此傳說은 佛法 東流의 後에 僧徒의 捏造로서 出한 妄談이오 朝鮮의 古傳이 아님은 一見에 明了하다 麗紀, 東川王 二十一年, 築平壤城, 移民及廟社의 下에 『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라 한 것은 王儉은 列仙傳中의 人物로 보고 開國의 太祖라고는 보지아니한 故로 檀君之故都라고 니르지 아니하고 仙人之宅이라고 한 것이니 斟酌잇는 書法이다

단군의 이름을 왕검(-儉)이라고 한 것은 평양의 옛 이름인 왕검(-險)의 검(險)자를 사람인(人)변으로 바꾼 것이다. 이 전설은 불법 동류[30]의 후에 승려들의 날조로서 나온 망언이요, 조선의 고전이 아님은 한눈에도 명료하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동천왕 21년 조(條)의 “평양성을 쌓고 백성 ‧ 종묘 ‧ 사직을 옮겼다.”에 이어서 “평양은 본래 선인 왕검의 땅이다”라고 한 것은 왕검을 여러 선인들의 평전 중의 인물로 보고, 개국의 태조라고는 보지 아니하였으므로, 선인의 땅이라고 한 것이니 짐작할 만한 서법이다.

하고 東國通鑑이 外紀에라도 이것을 올린 것은 僧徒의 妄說을 歷史上의 事實로 看做한 것이라고 難하고, 다시 後世僧徒의 妄說에 對하야 억지로 理解를 下하려 함은 甚히 無謂한 일이라고 斷하얏스니 이는 실로 壇君이 日本의 學界에서 턱업는 除斥을 맛나든 最初의 動機요 因하야 朝鮮으로 하야금 歷史的無頭鬼를 作하게 하야 마츰내 全東亞文化의 淵源ᄭᅡ지를 오래도록 䵝昧의 域에 投케 하든 始初ㅣ니 氏의 모처럼 큰 功積도 이 錯見한아를 償할 만한지가 의심스럽다 할 밧게 업슴은 못내 遺憾스러운 일이다.[원 1]

하고, 《동국통감》이 외기(外紀)에라도 이것을 올린 것[31]은, 승려들의 망언을 역사상의 사실로 간주한 것이라고 나무라고, 다시 후세 승려들의 망언에 대하여 억지로 이해를 하려고 함은 심히 의미 없는 일이라고 단정하였으니, 이는 실로 단군이 일본의 학계에서 턱없는 배척을 당하던 최초의 동기요, 이러므로 조선으로 하여금 역사적 무두귀[32]가 되게 하여, 마침내 전 동아시아 문화의 연원까지를 오래도록 알매[33]의 영역으로 내던져 버린 시초이니, 그의 모처럼 큰 공적도 이 잘못된 견해 하나를 보상할 만한지가 의심스럽다 할 밖에 없음은 못내 유감스러운 일이다. [34]

那珂氏의 泛視輕論한 뒤를 니어서 壇君說의 無據한 것을 立證코자 한 者는 白鳥庫吉의 『朝鮮의 古傳考』ㅣ니 그는 몬저 文字以前의 口碑는 年所를 歷하는 대로 妖談怪說이 付着하야 荒誕의 團塊를 이루거나 不然하면 學者僧侶의 輩가 故意로 怪談을 지어서 古來의 傳說이라고 僞稱하고 혹은 傳來의 口碑를 자갸의 想像ᄭᅥᆺ 改纂하야 앗가운古傳이 그中에 埋沒해 버리는 例가 不少하니 그럼으로 古傳說을 硏究함에는 상심하게 事態의 黑白을 辨別하야 어ᄯᅥ한 部分이 그 古傳이오 어ᄯᅥ한 部分이 後世의 架構인것을 看破해야하지 不然하면 眞僞를 倒見하고 純駮을 誤解하야 紕繆를 千古에 傳하리라고 戒飭하고 그 適例는 朝鮮의 古傳說이오 朝鮮의 古傳說 中에서도 가장 妄誕을 極한 것이 壇君의 傳說인데 그 妄誕한 本色을 가장 환하게 窺見할 것이 三國遺事의 文이다 하고 인하야 那珂氏의 說을 引用한 뒤에

나카 미치요 씨의 멸시와 경박한 논리에 뒤를 이어서 단군설이 근거없음을 입증하고자 한 자는 시라토리 구라키치의 《조선의 고전고》이니 그는 먼저 문자 이전의 구비는 해가 갈수록 요담괴설이 더해져 황당한 덩어리를 이루거나 그렇지 않으면 학자・승려들이 고의로 괴담을 지어서 옛부터의 전설이라고 위조하여 지칭하고 혹은 전래의 구비를 자기의 상상껏 바꾸고 엮어 아까운 고전이 그 중에 매몰해 버리는 예가 적지 않으니 그러므로 고전설을 연구함에는 상심하게 사태의 흑백을 판별하여 어떠한 부분이 그 고전이고 어떠한 부분이 후세의 가공인 것을 간파해야하지 그렇지 않으면 진위를 거꾸로 보고 순수함과 얼룩을 오해하여 잘못과 어긋남을 먼 후세까지 전하리라고 경계하며 타이르고 그 적절한 예는 조선의 고전설이요 조선의 고전설 중에서도 가장 망탄[35]의 극단이 단군의 전설인데 그 망탄한 본색을 가장 환하게 몰래 엿볼 것이 삼국사기의 문장이라고 하고, 그러므로 나카 미치요 씨의 학설을 인용한 뒤에

나도 此傳說에 對하야 (那珂)氏와 見解를 한가지하는 者이다. 다만 氏는 이것을 僧侶의 妄說이 史學에 益이 업다하야 왼통 放貶해 버렷지마는 나는 이 妄說에는 妄說인만한 結構와 工夫가 잇다고 認하며 ᄯᅩ다른 傳說과 連關하야 多少의 事實을 發揮할만한 줄 信하기로 구태 穿鑿의 勞를 ᄭᅳ리지 아니한다
나도 이 전설에 대하여 나카 미치요 씨와 견해를 같이 하는 자이다. 다만 그는 이것을 승려의 망설이 사학에 이로울 것 없다 하여 온통 버리고 폄하해 버렸지만 나는 이 망설에는 망설일 만한 짜임새와 공부가 있다고 인정하며 또다른 전설과 연관하여 다소의 사실을 발휘할만한 줄 믿기로 구태여 깊이 연구할 노력을 갖추지 아니한다.

하고, 다시 張皇한 辨證을 試하얏다.[원 2] 少年氣銳만하얏지 學이나 識이 今日과는 ᄯᅡᆫ판인 성부른 當時(甲午年)의 論을 三十餘年後 시방 다시 提起함이 혹시 氏의 不屑해할 일인지는 모르겟지마는 氏의 見解는 혹 合理的으로 進展하엿슬지라도[원 3]氏의 此論이 아직도 檀君에 對한 一盲杖으로 각금씨우는터이매 그 必要한 部分을 잠시 引用하야 두자.

하고, 다시 장황한 변증을 시도하였다. [36]소년으로서의 날카로운 판단력이 있었지만 학식이 현재와는 딴판인 성부른 당시(갑오년, 1894년)의 논리를 30여년후 시방 다시 제기함이 혹시 그가 달갑게 여지기 않을 일인지는 모르겠지만은 그의 견해는 혹 합리적으로 진전하였을지[37]라도 그의 이 이론이 아직도 단군에 대한 맹장[38]으로 가끔씩 우는 터이매 그 필요한 부분을 잠시 인용하여 두자.

白鳥씨는 이르되―

시라토리 씨는 이르되,

대저 桓雄壇君의 降臨하얏다는 太伯山은 平安道에 잇는 今의 妙香山이니 妙香山은東國輿地勝覽에 『妙香山一名太伯山, 古記, 基山有三百六十庵, 李穡記, 香山在鴨綠江南岸平壤府之北, 與遼陽爲界, 山之大莫之與比而[39]長白之所分也, 地多香木冬靑, 而仙佛舊迹存焉』
대저 환웅 단군이 강림하였다는 태백산은 평안도에 있는 지금의 묘향산이니 묘향산은 《동국여지승람》에 “묘향산 일명 태백산은 고기에 이르기를, 그 산에는 360개의 암자가 있다. 목은 이색의 기행문에는 향산은 압록강 남안 평양부의 북쪽에 있고 요양과 더불어 경계를 이룬다. 산은 비할 바 없이 무지막지하게 크고 이는 장백산에서 갈라져 나왔다. 땅에는 향나무와 사철나무가 많고 도교와 불교의 유적이 있다.”
(1), 이라 하얏슨즉 넷날 佛法이 隆盛을 極하얏슬ᄯᅢ에는 堂塔伽藍이 용마름을 니어서 한참 ᄯᅥ들석하얏슬것이다。… 古記에 檀木이라 한 것은 곳 此山中에 나는 香木을 두고 하는 말이니 이것을 檀木이라 稱함은 올고지 天竺의 牛頭旃檀에 擬한것이다。牛頭旃檀은觀佛三昧海經에 『譬如伊蘭與旃檀, 生此[40]利山中三仲秋月滿, 窂從地生, 成旃檀樹, 衆人皆聞牛頭旃檀上上妙香』이라한것이니 太伯山을 妙香山이라고 稱함은 필시此香木을 産함에 因한다
(1) 라고 하였은즉 옛날 불교의 융성이 극에 달했을 때에는 전당(殿堂)과 탑묘(塔廟) 그리고 가람이 용마름을 이어서 한참 떠들썩하였을 것이다. ... 고기에 단군이라 한 것은 곧 그 산중에 나는 향기로운 나무를 두고 하는 말이니 이것을 단목이라 칭함은 올곧이 인도(印度)의 우두전단(牛頭旃檀)[41]을 빗댄 것이다. 우두전단은 《관불삼매해경》에 “이란(伊蘭)을 전단(旃檀)과 견주어 보건대, 말리산 중에서 나고 (生末利山中三仲秋月滿), 窂從地生, 전단수(旃檀樹)로 성장하니, 묻 사람들이 모두 우두전단의 향기가 오묘하다는 것을 들었다.(衆人皆聞牛頭旃檀上上妙香)”이라 한것이니 태백산을 묘향산이라고 칭함은 필시 이 향목이 나는 데서 기인한다.

하고 妙香의名이佛籍中에서집어낸것이라하야華嚴經, 正法念經, 智度論, 西域記等의 摩羅耶山旃檀香에關한文憑을列錄한뒤에

라 하고, 묘향의 이름이 불서 중에서 집어낸 것이라 하여 《화엄경》, 《정법념경》, 《지도론》, 《서역기》 등의 말라야 산 전단향에 관한 문헌을 열거하여 기록한 뒤에

因하야按하건대 此傳說은僧侶의虛誕에成한 것으로 太伯山이香木을産하기ᄯᅢ문에 이것을印度의 摩羅耶山에 比하고 그 香木을 牛頭旃檀에 擬하고 그래서 此樹下에 降한 것을 緣으로 하야 檀君이라는 架空의 人物을 案出함인 것이다。高麗史地理志에 『江華縣西摩理山頂, 有塹星壇, 世傳檀君祭天壇』이라고 한 것을 보면 누가 檀君이 本來旃檀의 精靈임을 의심하랴 牛頭旃檀은 佛菩薩에게 가장 由緣이 있는 名木이니...僧侶의 徒가 이 靈木을 神人이라 하야 開國의 始祖로 仰하얏슴도 無理는 아니다。ᄯᅩ 釋提桓因(帝釋)을 檀君의 祖父로 定한 것은 『阿毘曇』의 中에 帝釋의 李太子에 旃檀修多羅란 것이 잇슴을 여긔서는 좃금 뒤트러서 檀君이 帝釋의 孫이라 한 것이오 『遺事』의 古記에 『主穀主命主病主刑主善惡, 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라 한 것은 雜阿含經>에 『有一比丘問佛, 何故釋帝桓因, 答曰, 爲人時, 行於頓施, 堪能作主』라 한 것을 府會한 妄說로 봄이 不可치 아니할 것이다.
인하여 살피건대 이 전설은 승려의 허탄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태백산이 향목을 산출하기 때문에 이것을 인도(印度)의 말라야산에 비견하고 그 향목을 우두전단으로 간주하고 그래서 이 나무 아래에 내려온 것을 연유로 하여 단군이라는 가공의 인물을 안출한 것이다. 고려사 지리지에 『강화현 서마리산 정상에 참성단이 있으니, 세인들이 단군의 제천단이라고 전한다.』라고 한 것을 보면 누가 단군이 본래 전단의 정령임을 의심하랴? 우두전단은 佛菩薩에게 가장 由緣이 있는 名木이니...僧侶의 徒가 이 靈木을 神人이라 하야 開國의 始祖로 仰하얏슴도 無理는 아니다。ᄯᅩ 釋提桓因(帝釋)을 檀君의 祖父로 定한 것은 『阿毘曇』의 中에 帝釋의 李太子에 旃檀修多羅란 것이 잇슴을 여긔서는 좃금 뒤트러서 檀君이 帝釋의 孫이라 한 것이오 『遺事』의 古記에 『主穀主命主病主刑主善惡, 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라 한 것은 雜阿含經>에 『有一比丘問佛, 何故釋帝桓因, 答曰, 爲人時, 行於頓施, 堪能作主』라 한 것을 府會한 妄說로 봄이 不可치 아니할 것이다.

하고 다시 論步를 내켜서,

檀君의 祖先은 上來에 적엇슴과 갓거니와 ᄯᅩ 그 子孫 의 일은 三韓古記에 『檀君生子夫婁, 是爲東 扶餘王, 至禹會諸候於塗山, 檀君遣夫婁朝 焉』이라 하고 ᄯᅩ 眉叟記言에 『檀君之後, 有解夫婁, 夫婁禱於鯤淵, 得金蛙, 以類金蛙, 名曰金蛙, 悅優渤水女(禱), 感日影照身, 生朱蒙』이라 하얏스니 이것을 三國史記의 高句麗本紀에 載한 朱蒙의 傳에 照合하야 그 系譜를 考하건대 朱蒙의 養父는 金蛙요 金蛙의 養父는 夫婁요 夫婁의 實父는 檀君이 될 것이다。그러면 檀君은 朝鮮國의 祖先이 아니라 高句麗一國의 祖先임을 알 것이 다。하물며 ᄯᅩ 檀君의 降臨한 太伯山이라든지 그 都 한 平壤이라든지 그 神이 된곳인 阿斯達山이라든 지 왼통 高句麗의 領內에 잇슴을 아울러 생각해서는 더욱 그 高句麗의始祖인 줄을 넉넉히 證할 것이다, 아니 高句麗의 祖先이라고 그 나라의 僧侶輩가 假作한 人物이라고 解釋할 것이다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7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8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9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10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11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12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13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14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15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16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17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18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19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20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21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22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23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24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25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26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27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28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29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30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31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32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33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34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35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36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37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38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39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40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41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42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43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44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45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46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47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48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49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50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51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52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53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54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55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56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57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58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59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60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61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62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63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64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65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66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67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68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69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70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71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72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73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74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75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76 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77

하고 다음 朝鮮古代(조선고대)의 國祖(국조) 卵生說話(난생설화) ─ 朱蒙 (주몽) ‧ 首露(수로)등의 사적 總(총)히 佛說(불설)에 依託(의탁)한 想像談 (상상담)임을 얼른 看破(간파)하리하고 斷情(단정)하였다. 그 이유로 卵生 (난생)이 佛說四生(불설사생)의 一(일)에 있음과, 古記(고기)중에 나오는 迦葉原(가섭원) ‧ 阿蘭佛(아란불)등 名句와 金首露와 脫解가 凝聚가 되고 雀 鸇(작전)이 되어서 서로 秘術(비술)을 겨누는 一段說話(일단설화)가 總(총) 히 佛典的(불전적)인 등을 들었다.

이렇게 那珂(나가)씨는 아가미를 따고 白鳥(백조)씨는 배알을 끄집어내어, 兩大家(양대가)의 손에 속속 들이가 다 환하게 드러난 셈이 되매 壇君(단 군)이란 이를 朝鮮史(조선사)의 첫머리에 얹음은 수 없으매 箕子(기자)로써 조선의 國祖(국조)임을 그네의 東洋史(동양사)에 적게 되고, 箕子(기자)도 假想的(가상적)人物(인물)이라는 論(론)이 白鳥(백조)씨를 말미암아서 提起 (제기)된 뒤에는 史漢(사한) 兩書(양서)의 朝鮮列傳(조선열전)을 그대로 衛 滿(위만)이 朝鮮(조선)의 發見者(발견자) 비스름한 地位(지위)를 가지는 奇 觀(기관)을 呈(정)하게 되었다. 혹시 西國(서국)의 史家(사가)가 四(사)백 년 전에 日本(일본)에 航至(항지)하였던「핀토」로써 日本(일본)의 發見者 (발견자)라 하는 것을 철저히 遵守(준수)하여, 그 이후의 事件(사건)만을 역사적 사실로 대접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우습다 할는지 모르겠지마는, 日 本人(일본인)은 도리어 이웃집 조선의 역사에 이런 무식한 짓을 하려고 듦 이 그 壇君(단군)抹削(말삭)後(후)의 朝鮮史(조선사) 敍述套(서술투)이다.

六(육), 王險城(왕험성) 神說(신설)[편집]

이만하면 없앴거니 하매, 日本(일본)의 學界(학계)에 다시 壇君(단군)에 관한 考說(고설)이 나잘 까닭이 없이 한동안을 지내었더니, 朝鮮史(조선사) 를 專門(전문)으로 하는 今西龍(금서룡)이 出(출)함에 미쳐 前(전) 兩說(양 설)의 탕개를 한번 더 조지는 쐐기가 倂合(병합)이라는 북새를 機緣(기연) 으로 學界(학계)에 나타나게 되었다.

그 明治(명치) 四三(사삼)년 十日(십일)月(월) 發行(발행)<歷史地理(역사 지리)>의 朝鮮號(조선호)에 揭載(게재)한<壇君(단군)의 說話(설화)에 對 (대)하여>란 論文(논문)이 그것이다. 그는 먼저 壇君說(단군설)의 妄誕(망 탄)이 那珂(나가)씨에게 論證(논증)되고, 또 白鳥(백조)씨를 말미암아서 그 것이 어떠한 佛典(불전)을 가지고 結搆(결구)된 것이 明白(명백)하여졌거 늘, 이것을 모르고 當時(당시)의 그네 중에 壇君(단군)을 일본의 어느 神格 (신격)과 合祀(합사)하려는 妄擧(망거)가 있음을 慨嘆(개탄)하고, 좀 進步 (진보)壇君(단군)의 記事(기사)……<三國遺事(삼국유사)>에 出(출)하여 始 初(시초)니……本書(본서)의 記事(기사)는<緯書(위서)> 及古記(급고기)의 두 군데서 轉載(전재)한 것 비스름하지마는, <緯書(위서)>에는 무론이요, 다른 支那(지나)의 史籍(사적)에도 보이지 아니하였으며, 온통 朝鮮(조선) 特牲(특생)의 神話(신화)로<三國遺事(삼국유사)>는 當時(당시) 世間(세간) 에 行(행)하던 此傳說(차전설)을 錄(록)하일 것이요, 僧一然(승일연)의 創 作(창작)한 說話(설화)는 아니다.此記事(차기사)의 中(중)에 注意(주의)할 것은 題目(제목)의 注(주)에 壇君朝鮮(단군조선)이라고 하였음과 壇君王儉 (단군왕검)의 四字(사자)화니 壇君王儉(단군왕검)의 壇君(단군)은 尊稱(존 칭)이요, 王儉(왕검)은 名(명)이라고 解(해)할 밖에 없는데, 그러면 王儉 (왕검)이란 것이 무엇이냐.

고 하여, 王儉(왕검) 이 이 수수께끼의 숨은 열쇠임을 認(인)한 모양이다. 王儉觀(왕검관)은 곧 그의 壇君觀(단군관)으로, 그 見解(견해)가 이러하다. 王儉(왕검)이란 것은 地名(지명)의 王險(왕험)으로서 出(출)한 仙人(선인) 의 名(명)이니, 此事(차사)를 說(설)하자면, 먼저 地名(지명)의 王儉(왕검) 으로부터 說(설)해야 한다. 王險(왕험)은 衛氏朝鮮(위씨조선)의 都(도)의 名(명)이니,<史記(사기)>朝鮮傳(조선전)에「滿都王儉(만도왕검)」이란 것이 있고,<前漢書(전한서)>朝鮮傳(조선전)에도 「朝鮮衛滿(조선위만)……都王險 (도왕험)(李奇曰地名也(이기왈지명야))」라 한 것이 있어, 史家(사가)는 이 王險(왕험)으로써 平壤(평양)의 古名(고명)이라 하였다. 朝鮮近世(조선근 세)의 大學者(대학자) 丁若鏞(정약용)은 基箸(기저)인<我邦强域考(<아방강 역고)에「王公設險以守基國平壤之別名(왕공설험이수기국평양지별명)王險蓋 基義也(왕험개지의야)」라고 解(해)하였다.

하고, <魏書(위서)> <北史(북사)> <隨書(수서)> <史記正義(사기정의)> <通 典(통전)> 登聞(등문) 雜引(잡인)하여 平壤(평양) 即(즉) 王儉)城(왕검성) 임을 辨證(변증)한 뒤에,

高句麗(고구려) 末期(말기)에 있어서 上述(상술)함과 같이 平壤(평양)의 古地名(고지명)이라고 北韓人(북한인)에게 信(신)하였던 王險(왕험)은, 高 句麗(고구려)의 中頃(중경)에는 이미 仙(선)의 名(명)으로 變遷(변천)하였 다.

하여 仁宗(인종) 二三(이삼)년 撰(찬)<三國史記(삼국사기)>인 麗紀(여기)東 川王二日年(동천왕이일년)의 文(문)을 引用(인용)하고,

이미 丁氏(정씨)도 說(설)한 것처럼「改險爲儉旣甚穿鑿(개험위검기심천 착)」일 것이요, 檀(단)과 儃(천)과 서로 通用(통용)된 것처럼, 險(험)과 儉(검)이 通用(통용)되었을 뿐이지. 이 밖에 意義(의의)가 없다 해도 可 (가)하다. 要(요)하건대 地名(지명)의 王儉(왕검)이 仙名(선명)의 王險(왕 험)이 되었다. 곧 高句麗末(고구려말)에 國都(국도)인 平壤(평양)의 最古 (최고)名(명)으로 믿어지던 王險(왕험)이란 말이, 悠久(유구)한 歲月(세월) 과 그 地方(지방) 民衆(민중)의 流離(유리)와 變換(변환)과로 말미암아서 그 傳說(전설)이 歪訛(왜와)하고 漸次(점차)로 그 意味(의미)를 傳(전)하 여, 마침내 王險(왕험) 即(즉) 平壤(평양)이 初創(초창)한 仙人(선인)에게 付(부)하는 名字(명자)가 되었다. 仁宗王(인종왕)의 當時(당시)에 此種(차 종)의 仙人(선인)이 平壤地方(평양지방)에 尊崇(존숭)되어 있었던 것은, <高麗史(고려사)> 卷(권) 一二七(일이칠)妙淸傳及(묘청전급)<東國通鑑(동국 통감)>仁宗王九(인종왕구)년의 條(조)에 云云(운운)이라 함으로 알 것이니, 此等仙(차등선)은 佛敎(불교)도 이 人民(인민)의 胸裏(흉리)에 消際(소제) 不等(부등)한 Shamanisn의 諸神(제신)이다.

하고 妙淸(묘청)의「八聖(팔성)」으로 證左(증좌)를 삼았다. 그리고 仙人王 儉(선인왕검)이 또한 太伯仙人(태백 선인) ‧ 平壤仙人(평양선인)의 類(류) 거나 또 그중 무엇의 別名(별명)이거나를 說想(설상)하고, 壇君(단군)의 名 (명)이 <三國史記(삼국사기)> <高麗圖經(고려도경)> 等書(등서)와 西京(서 경)의 八仙人(팔선인)중에도 보이지 아니함은, 當時(당시)에 壇君(단군)의 稱(칭)이 있지 아니하고 오직 仙人(선인)王儉(왕검)있었을 따름인 故(고) 요, 王儉仙人(왕검선인)을 王險城(왕험성)의 神(신)일 따름일 것을 論(논) 하고서,

以上(이상)에 說(설)한 바를 總括(총괄)하건대, 高句麗時代(고구려시대)에 는 平壤(평양)의 古地名(고지명)으로 傳(전)했던 王險(왕험)이 高麗朝(고려 조)의 初頃(초경)으로부터 王儉仙人(왕검선인)이 되어 仙人王儉(선인왕검) 으로 傳(전)하고, 平壤(평양)開基(개기)의 仙人(선인)의 實名(실명)으로 變 (변)한 것에, 高麗朝(고려조)의 半(반)쯤 니자서 壇君(단군)이란 尊稱(존 칭)을 바처서 檀君王儉(단군왕검)이라하여 朝鮮(조선)創始(창시)의 神人(신 인)이라고 한 것이다. 李朝(이조)의 提起錄(제기록)이 온통 壇君(단군)이라 고만 쓰고 王儉(왕검)의 名(명)을 附(부)치 아니함으로부터, 마침내 壇君 (단군)의 號(호)만이 알려지고 王儉(왕검)읭 名(명)은 잊어버리게 된 것이 다.

하고 結論(결론)하고, 因(인)하여 壇君(단군)이란 이는 日本(일본)에 아무 關繫(관계) 없을 것을 말하였다.

七(칠), 成立(성립) 年代觀(연대관)[편집]

壇君(단군) 否認(부인)의 直接論(직접론)은 旣已(기이) 더 할 나위 없는 듯하매, 좀 壇君(단군) 이야기라도 하고 싶으면 부득불 間接(간접) 又(우) 側面(측면)으로서 덤빌밖에 없었다. 그중의 하나로 壇君傳說(단군전설)의 성립 成立( ) 年代(연대)를 보고 온 듯 하게 이야기한 이가 생기니, <歷史(역 사)와 地理(지리)> 第(제) 一(일)卷(권) 第五號(제오호) 所載(소재) 三浦周 行(삼포주행)의 <朝鮮(조선)의 建國傳說(건국전설)>이 그것이다. 가로되, 조선의 開國(개국) 傳說(전설)로는 壇君(단군)과 基子(기자)와의 그것을 擧(거)하겠는데, 대체 支那(지나)의 歷史(역사)에는 基子(기자)의 傳說(전 설)을 栽(재)하고, 朝鮮(조선)의 歷史(역사)에는 檀君傳說(단군전설)을 載 (재)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基子(기자)는 殷末(은말)의 人(인)이 지마는 壇君(단군)은 唐堯(당요)와 同時(동시)의 人(인)이라 하여 그 時代 (시대)에 非常(비상)한 懸隔(현격)이 있건마는, 一九○八歲(일구○팔세)의 壽(수)를 享(향)하여 基子(기자)의 時(시)에도 살았엇다고까지 말한다. 그 러나 神話(신화) 傳說(전설)의 怪異(괴이)에 富(부)함은 東西(동서)諸國(제 국)의 常(상)이매, 구석이 빈다하여 온통 非難(비난)할 것이 아니라, 오직 그것이 原始的(원시적)民族(민족)의 것인지, 혹시 後世(후세)의 做作談(주 작담)인지가 硏究(연구)할 問題(문제)로 생각한다.

하여 그 態度(태도)도 꽤 점잖음을 보겠으나, 그 소견은 과연 어떠한가? 대개 檀君傳說(단군전설)의 初見(초견)은 <三國遺事(삼국유사)>요, 朝鮮 (조선)에 있어서 最古(최고)의 史籍(사적)이라 하는 <三國史記(삼국사기)> 에는 실상 실리지 아니하였다. 흩으로 이 見地(견지)만으로써 말하면, <三 國史記(삼국사기)>의 編纂(편찬)된 高麗(고려) 仁宗(인종)의 二三(이삼) 년……<三國遺事(삼국유사)>가 생긴 때까지의동안에 做作(주작)된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마는, 이렇게 一(일), 二(이)記錄(기록)의 對照(대조)만으로써 檀君傳說(단군전설)의 發生(발생) 年代(연대) 를 決定(결정)함은 좀 危險 (위험)하니, 설사 後(후)에는 多少間(다소간) 形體(형체)를 變(변)하였다 할지라도 檀君傳說(단군전설) 그것은 진작 存在(존재)한 것을 記錄(기록)에 逸(일)하였다고 볼 수 없을 것도 어니다. 檀君(단군)을 載(재)치 아니한 <三國史記(삼국사기)>에도「平壤者(평양자), 本仙人王儉之宅也(본선인왕검 지택야, 或云王之都王儉(혹운왕지도왕검))」이란 것이 적혀 있다. 이것을, 檀君傳說(단군전설)은 太伯山(태백산)에 天降(천강)한 天神(천신)의 子(자) 로 王儉(왕검)이라고 일컫고, 平壤(평양)에 都(도)하여 비로소 朝鮮(조선) 의 國號(국호)를 定(정)하고, 禹(우)의 時에도 基子(기자) 扶婁(부루)란이 를 入朝(입조)시키고, 周(주)의 武王(무왕)이 基子(기자)를 朝鮮(조선)에 封(봉)한 後(후)에는 唐藏京(당장경)으로 옮겨서, 나중에는 阿斯達山(아사 달산)에 隱(은)하여 山神(산신)이 되니라고 이야기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對(대)하여는 워낙 朝鮮史家(조선사가)의 中(중)에도 荒誕(황탄)한 說(설) 이라 하여 信(신)치 아니하는 이가 없지 않지마는, 一般(일반)의 歷史(역 사)는 오히려 이것을 朝鮮(조선)의 始祖(시조)로 載傳(재전)할 뿐아니라, 此(차) 傳說(전설)의 要素(요소)에는 그 高山(고산)의 頂(정)애 天降(천강) 하였다 함이든지, 基子(기자)에게 禪讓(선양)하고 退隱(퇴은)하였다 함이든 지, 日本(일본)의 神話(신화)에 비슷한 곳도 있으므로, 近日(근일)兩處(양 처) 同祖說(동조설)을 唱(창)하는 等(등)의 사이에는 이 兩者(양자)의 連落 (연락)을 取(취)하려고 試(시)한 者(자)까지도 있다.

하고서는, 一轉(일전)하여 그네의 豫習(예습)이 차차 드러나기 비롯하여, 그러나 가만히 此(차)傳說(전설)發生(발생)의 由來(유래) 事情(사정)을 考(고)함에 미쳐서는 到底(도저)히 原始民族間(원시민족간)의 素朴(소박) 한 神話(신화)가 形相(형상)으 고쳐서 發達(발달)한 것이라고 承認(승인) 할 수 가 없다. 위선 朝鮮(조선)의 割據的(할거적) 形勢(형세)로 생각할지 라도 이러한 統一的(통일적)神話(신화)의 成立(성립)은 의심스럽다. 또 遺 蹟(유적)이라고 傳(전)하는 것에 就(취)하여 보건대, 太伯山(태백산)即 (즉) 今(금) 寧邊妙香山以下(영변묘향산이하)로 平壤(평양) 其他(기타) 一 (일), 二(이)地方(지방)에 存(존)한 것은 모두 일매지게 漠然(막연)한 것 이지마는, 그중에도 平壤(평양)은 檀君(단군)의 都(도)라고 일컬으면서 그 遺蹟(유적)의로는 겨우 檀君(단군)으로는 겨우 檀君(단군)의 祠堂(사당)으 로 奉祀(봉사)하는 崇嶺殿(숭령전)이 있을 뿐이다.

하고서, 거기 比(비)하여서는 基子(기자) 傳說(전설)이 門籍(문적)에 오른 것은 좀 오래기도하고, 그 고도의 遺蹟(유적)도 外城(외성) · 井田(정 전)과 墓(묘)· 祠(사)등 이것저것이 檀君(단군)의 比(비)가 아니라 하 고, 因(인)하여,

이때문에 日本(일본)의 學者(학자)로 檀君傳說(단군전설)의 後世(후 세) 僧侶(승려)의 附會(부회)로 認(인)하는 이도 基子傳說(기자전설)은 이것을 承認(승인)하는 傾向(경향)이 있어, 옛날 基子(기자)의 挑王(도 왕)한 朝鮮(조선)은 當時(당시)의 疆域(강역)에 있어서 필시 遼東地方 (요동지방)이었겠지마는, 그 子孫(자손)은 漸次(점차)로 南下(남하)하여 平安道(평안도)를 들어와서 基氏(기씨)의 朝鮮(조선)을 現出(현출)한 것 으로 信(신)한다. 그러나 基子(기자)의 子孫(자손)이 朝鮮(조선)을 支配 (지배)하였다는 것이 이미 疑問(의문)이매, 그 祖先(조선)으로의 基子(기 자)를 認(인)함도 마찬가지이다.

하고 , 다시 平壤(평양)에 있는 遺蹟(유적)이 미덥지 못한 것을 指摘(지적) 한 뒤에, 基子(기자)를 神(신)으로 封祀(봉사)란 자취는 高句麗時代(고구려 시대)에도 있지마는, 檀君(단군)은 그렇지 아니하여高麗(고려) 이후에 나타 나서 基子(기자)에 配享(배향)되고 祭需(제수)도 基子(기자)만 못한 事實 (사실)을 指摘(지적)하고서,

以上(이상)의 事實(사실)은 檀君(단군) 及(급) 基子傳說(기자전설)의 由 來(유래)를 暗示(암시)하는 것이라 할 것이니, 곧 基子傳說(기자전설)은 高句麗時代(고구려시대)에 發生(발생)되지 아니했다 하여도, 北鮮地方(북 선지방)에 支那(지나)의 佃民(전민)이 繁殖(번식)하여 그 文化(문화)를 移植(이식)함에 伴(반)하여 發生(발생)한 것인즉, 줄잡아도 高句麗時代 (고구려시대)에 가져가 댈수가 있거니와, 거기 比較(비교)하여 檀君傳說 (단군전설)은 훨씬 뒤져서 新羅(신라)를 代(대)하여 朝鮮(조선)을 統一 (통일)한 高麗(고려)의 時代(시대)에 發生(발생)한 것으로, 高麗(고려)가 高句麗(고구려)의 遺緖(유서)를 繼承(계승)하겠다 하는 까닭에 高句麗(고 구려)의 始祖(시조) 東明王(동명왕)까지도 檀君(단군)의 後(후)하 하였 다. 高麗(고려)에 代(대)하여 朝鮮(조선)으로 國號(국호)를 삼은 李氏(이 씨)에 至(지)하여는, 世宗(세종)의 七(칠)년 八(팔)월에 鄭陟(정척)의 獻 議(헌의)를 納(납)하여 檀君(단군)을 爲(위)하여 獨立(독립)의 祠堂(사 당)을 建(건)하게 되었는데, 東明王(동명왕)을 그 堂中(당중)에 今日(금 일)에 이르렀다.

고 하였다.

八(팔), 民族的(민족적)感情設(감정설)[편집]

三浦氏(삼포씨)는 다시 竿頭(간두)의 一步(일보)를 내켜서,

그런데 재미있는 일은 朝鮮(조선)에서 檀君(단군)崇祀(숭사)가 隆盛(융 성)한 時(시)는그 獨立(독립)自尊心(자존심)이 旺盛(왕성)한 것이다.

하고, 인하여 朝鮮人(조선인)이 古來(고래)로 支那人(지나인)에게 禮儀之國 (예의지국)이라는 待接(대접)받는 것을 조그만 자랑거리로 알았었는데, 支 那(지나)의 使臣(사신)이 京城(경성) 오는 길에 平壤(평양)을 지나다가 基 子(기자)의 墓(묘)를 찾기 때문에 그 墓(묘)도 修築(수축)하고 祠宇(사우) 도 세운것이요 朝鮮(조선)의 自發的(자발적)이 아님을 말하고,

此(차)(基子(기자) 祠堂(사당)에 檀君(단군)을 配享(배향)하게 된 後 (후)에는 基子(기자)의 神位(신위)를 北(북)에 安(안)하여 南面(남면)케 하고 檀君(단군)의 것을 東(동)에 安(안)하여 西面(서면)케 하였지마는, 어느 때는 또 檀君(단군)의 것을 基子(기자)의 것과 竝列(병렬)하여 같이 南面(남면)케 한 일도 있다. 이것은 事大主義(사대주의)로써 終始(종시) 의 上書(상서)에 鮮人(선인)에게는 어울리지 아니하는 一種(일종)의 反抗 的(반항적) 意味(의미)로서 온 것이니, 鄭陟(정척)의 上書(상서)에도 詳 細(상세)하게 這間(저간)의 消息(소식)을 말하여 있다. 檀君(단군)을 唐 堯(당요)와 竝立(병립)하여 스스로 朝鮮(조선)이라고 號(호)한 것이어늘, 基子(기자)는 武王(무왕)의 命(명)으로 朝鮮(조선)에 封(봉)을 받았고, 또 時代(시대)도 一二三○餘年(일이삼○여년)의 後(후)인즉, 朝鮮(조선) 의 立國傳世(입국전세)의 先後(선후)로 말하면 基子(기자)의 神位(신위) 를 北(북)에 置(치)하고 檀君(단군)의 것을 東(동)에 置(치)함은 當(당) 을 失(실)하였다. 설사 檀君(단군)과 基子(기자)를 竝列(병렬)하여 南面 (남면)을 시킨다 할지라도 檀君(단군)의 神位(신위)는 마땅히 上(상)에 置(치)하고 基子(기자)의 것을 그 次(차)에 置(치)함이 至當(지당)하다. 고 하였음을 말하고, 그러나 基子(기자)는 朝鮮(조선)이란 이름을 天下(천 하) 後世(후세)에 떨어뜨린 이일 뿐 아니라, 基子(기자)의 祠堂(사당)이라 하면서 檀君(단군)을 위하여 獨立(독립)의 祠堂(사당)을 建(건)하여 그 神 位(신위)를 南向(남향)케 하게 된 事實(사실)을 베풀었다.

이러한 事情(사정)으로써 推察(추찰)할지라도, 朝鮮(조선)이 北方支那 (북방지나)의 移民(이민)사이에 發生(발생)한 基子傳說(기자전설)을 採用 (채용)하여 事大心(사대심)을 表現(표현)시키면서도, 오히려 그 사이에 自不能抑(자불능억)하는 獨立(독립)自尊心(자존심)의 發作(발작)과 한가 지로 宗主國(종주국)에 對(대)한 약간한 反抗心(반항심)을 일으켜서 지궂 이 唐堯(당요)와 同時代(동시대)의 神人(신인)이라 하고, 또 스스로 朝鮮 (조선)이라고 號(호)하였다는 中(중)에도 빤히 들여다보이는 作意(작의) 와, 감추다 못한 자랑이 엿보이지 아니하느냐? 이 二種(이종)의 傳說(전 설)은 도시 支那(지나) 文化(문화)가 濃厚(농후)한 北鮮地方(북선지방) 의 것이요, 朝鮮(조선)固有(고유)의 韓民族(한민족)이 棲息(서식)하는 南 鮮地方(남선지방)은 여기 關與(관여)치 아니한다. 그런데 南鮮地方(남선 지방)에는 저절로 그 系統(계통)을 달리하는 地方傳說(지방전설)이 存在 (존재)하거늘, 그것을 閑却(한각)하고 前者(전자)만을 朝鮮(조선)의 開國 傳說(개국전설)이라 함이 不當(부당)함은 勿論(물론)이요, 그보다 훨씬 蒼古(창고)한 日本(일본)의 神話傳說(신화전설)에 가져다 매여서 牽强附 會(견강부회)의 說(설)을 弄(농)하려 함은 論外(논외)의 짓이다. 나는 이 러한 意味(의미)에서도 朝鮮歷史(조선역사)의 改造(개조)를 古調(고조)하 고 싶다.

고 줄통을 뽑았다. 老獪(노회)한 것은 이 三浦(삼포)씨의 論法(논법)이지마 는, 依然(의연)히 主觀(주관)의 줄타기요, 그 客觀的(객관적)眞實性(진실 성)을 거드리지 못하기는 前(전) 數字(수자)와 다름이 없다 할 것이다. 三浦(삼포)씨의 見解(견해)에서 民族的(민족적) 觀察(관찰)의 步武(보무) 를 다시 내켜 본 것에 稻葉岩吉(도엽암길)의 觀(관)이 있으니, 한번 어느 新聞紙(신문지)에 揭載(게재)하였다가 뒤에 支那(지나) 社會史(사회사) 硏 究(연구)의 一部(일부)를 지은<朝鮮(조선)의 文化問題(문화문제)>이 그것이 다.

九(구), 民族的(민족적) 信仰設(신앙설)[편집]

稻葉(도엽)씨는 또한 조선역사의 發端(발단)을 支那(지나)의 政治上(정치 상)의 失敗者(실패자)가 半島(반도)로 들어와 僑團(교단)을 建設(건설)함에 두고, 夫餘足(부여족) 其他(기타)가 이 漢僑(한교)의 團部(단부)를 攻破(공 파)할 때가 朝鮮(조선)이 國家(국가)로 最强力(최강력)이었었음을 말하고 서,

百濟(백제)와 高句麗(고구려)는 同一族(동일족)으로서 나은 關係上(관계 상) 東明傳說(동명전설)을 가졌었다. …… 東明(동명)이 漢字(한자)라고 支那(지나) 傳說(전설)을 受入(수입)한 것이라 함은 臆斷(억단)이다. 朝 鮮(조선)의 古代史(고대사)를 檢討(검토)해 보면, 彼等(피등)만큼 卓越 (탁월)한 國民(국민)이 다시없을 것이 누구에게든지 首肯(수긍)되거니 와, 그 根本(근본)을 생각해 보건대, 民族(민족)의 信仰(신앙)은 각각 特 色(특색)을 가지고 그것을 말미암아아서 結束(결속)되었던 것이 主要(주 요)한 原因(원인)인줄 안다. 三國(삼국)의 中(중)에서 新羅(신라)는 最後 (최후)에 現出(현출)한 民族(민족)이지마는 역시 卵生神話(난생신화)를 支持(지지)하였었다.

三國(삼국)이 거꾸러지러고 王氏(왕씨)의 高麗(고려)가 半島(반도)를 統 一(통일)하여서부터 前代(전대)의 前說(전설)은 漸次(점차)로 그 그림자 를 숨기고 그를 代(대)한 것이 基子傳說(기자전설)이다. ……傳說(전설) 을 朝鮮人(조선인)이 自由(자유)로 受入(수입)하였음에 對(대)하여는 支 那(지나)文化(문화)의 東方(동방) 傳播(전파)를 顧慮(고려)하지 않을 수 없지 마는, 主(주)되는 것은 王氏(왕씨)의 高麗(고려)가 그 國家(국가)를 支持(지지)하는 必要上(필요상)으로 支那(지나)에 附庸(부용)을 求(구)한 것이었다. 朱蒙(주몽)이나 卵生傳說(난생전설)을 가지고는 支那(지나)에 對(대)한 深交(심교)를 바라기 어려운데, 幸(행)히 基子傳說(기자전설)이 있으므로 그의 子孫(자손)이라 하는 것이 便宜(편의)로왔다. 그래서 平壤 (평양)의 西山(서산)에는 얼토당코 아니한 基子墓(기자묘)가 나오기도 하 고, 李氏朝鮮(이씨조선)이 된 뒤에는 停車場(정거장) 附近(부근)에 前代 (전대)의 都市(도시) 비스름한 遺地(유지)가 눈에 뜨이매, 그것을 基子(기 자)이 井田(정전)이라고 擬定(의정)하였다. 말하자면 此等(차등)鮮人(선 인)의 施設(시설)은 前述(전술)한 附庸(부용)의 意義(의의)를 確實(확실) 하게 하려는 運動(운동)에 不過(불과)한 것이요, 他面(타면)으로 보면 巧 妙(교묘)한 外交的(외교적) 辭令(사령)인 줄 생각되지마는, 그러나 그것 이 朝鮮人(조선인)의 全體(전체)라고 認(인)하기는 어렵다. 朝鮮人(조선 인)은 基子(기자) 傳說(전설)의 奉仕(봉사)를 支配者(지배자)階級(계급) 에 一任(일임)하고, 따로 새로이 氏族的(씨족적) 信仰(신앙)의 中心(중 심)을 欲求(욕구)하였은 듯하니, 저 檀君傳說(단군전설)이 正(정)히 그것 이다.

하고, 이 兩傳說(양전설)이 前者(전자)는 支配者(지배자) 階級(계급)의 (國 家的(국가적)) 對外的(대외적) 필요로 公行(공행)하고, 後者(후자)는 민족 적 요구로 社會(사회)의 底面(저면)에 潛行(잠행)하여 내려오다가, 근래와 서 支那(지나)의 權愈(권유)가 衰落(쇠락)하고 또 倂合(병합)에 伴(반)하여 特權階級(특권계급)이 消滅(소멸)하는 통에 檀君傳說(단군전설)이 最後(최 후)의 勝利(승리)를 얻었음을 指摘(지적)한 것까지는 관계치 않다 할지라도 至若(지약),

附庸傳說(부용전설)로서 解放(해방)되고 獨立(독립)한 民族(민족)信仰 (신앙)의 中心(중심)으로 驀進(맥진)하여 가는 朝鮮人(조선인)의 今日 금일 은 ( ) 慶賀(경하)해야 할 것이 무론이지마는, 傳說(전설)은 어디까지 든지 傳說(전설)이요 歷史(역사)가 아닌 民族(민족)의 將來(장래)를 指示 (지시)하고 그 生活(생활)을 規律(규율)함에는 不足(부족)할 것이 없을 지라도, 그것만으로는 民族(민족) 成立(성립)의 由來(유래)조차 알 수가 없을 뿐 아니라, 日本(일본) 國家(국가)의 一員(일원)이라는 理會(이회) 를 가지기 不可能(불가능)하여진다.

하여, 檀君(단군)을 믿다가는 日本人(일본인) 노릇을 못하리라는, 우리로는 얼른 想像(상상)도 못할 理由(이유)가 檀君(단군) 抹削(말삭)의 一條件(일 조건)이 됨에는 學問(학문)의 權威(권위)를 爲(위)하여 여릇한 생각을 자아 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본디부터 저네들의 檀君(단군) 抹削(말삭)의 努力(노력)이 대개 이러한 範疇(범주)로서 나옴이 많은 것이 아닌지가, 이 率爾(솔이)한 一句(일구)의 中(중)에 端倪(단예)가 된다. 하면 일변 재미가 있기보다 稻葉(도엽)씨는 다른 이 분수로는 좀 더 乾肅(건숙)한 學的(학적) 周旋(주선)을 期待(기대)하였더니, 이들만큼 그도 그로구나 하고 말기가 섭 섭하긴 하지마는, 그도 日本人(일본인)이요, 또 그는 官史(관사)編纂(편찬) 의 責任者(책임자)인 것을 생각하면 응당 그럴 일이겠지 하는 생각이 나지 않음도 아니다.

그는 다시 檀君(단군) 信仰(신앙)이 前擧(전거)한 三開條(삼개조)의 外 (외)에 己未獨立運動(기미독립운동)으로 因(인)하여 旺盛(왕성)하여졌음을 말하겠으나, 檀君(단군) 崇仰(숭앙)의 業力(업력)이 蓄積(축적)해서 獨立運 動(독립운동)에까지 간 것은 그런 대로 承認(승인)할 일이지마는 獨立運動 (독립운동) 때문에 檀君(단군) 崇仰(숭앙)이 增上(증상)하였다는 것은 本末 (본말)을 顚倒(전도)한 觀察(관찰)이요, 더욱 獨立運動(독립운동)이래로 急 進(급진)에 기울어지는 靑年(청년)의 사이에, 病(병)든 國際主義(국제주 의)(人類主義(인류주의))의 擴布(확포)와 한가지 國祖(국조)에 대한 觀念 (관념)이 어떻게 潛伏期(잠복기)로 向(향)하였는지를 생각하면, 氏(씨)의 이 論(론)이 실상 一場(일장)의 漫談(만담)으로 본디부터 雌黃(자황)을 더 할 것이 아닐는지도 모를 것이며, 더욱 그때로부터 民族(민족)中心(중심)의 傳說(전설)에 因(인)하는 歷史(역사) 宣傳(선전)이 盛行(성행)하여 民族(민 족)의 由來(유래)를 무시하는 變造的(변조적) 歷史(역사)가 出來(출래)라엿 다 하고, 그 標例(표례)로 不佞(불녕)을 指目(지목)하였음에는 아직까지 淺 學膚見(천학부견)을 부끄려 이렇다 할 條理(조리) 있는 史編(사편)을 만드 는 적이 없는 나로 애오라지 頌祝(송축)하지 않을 수가 없다. 혹시 우리의 의견 이 얼마쯤 意見( ) 參考(참고)가 되었는지 모르되, 좀 그 뒤에 발표한 다 른 文字(문자)에는 檀君(단군) 古傳(고전)의 根據(근거)에 관하여 매우 進 境(진경)이 있는 듯함은, 學(학)과 眞理(진리)를 위하여 피차 반가운 일이 아님이 아니었다.

一○(십), 그 官學的(관학적) 唐雁(당안)[편집]

日本人(일본인) 朝鮮(조선)의 權力(권력)(乃至(내지) 學政(학정))을 잡으 매, 아무 것보다 애쓴 것이 朝鮮心(조선심)에 關(관)한 方針(방침)이요, 어 떻게 하여 이것을 억제하고 翦滅(전멸)할까의 문제이었다. 民族(민족) 感情 (감정) ─ 오래 오래 浸漬(침지) 培育(배육)된 深根(심근) 大樹(대수)같은 이것이라도 權力(권력)의 一鍬(일초)면 얼른 拔除(발제)하여 痕迹(흔적) 없 이 하리라 생각하였다.

민족 감정의 基源(기원)이 歷史(역사) 及(급) 言語(언어)에 있음에 念及 (염급)한 것은 그네의 聰明(총명)으로 허락할 일이지마는, 歷史(역사)는 變 造(변조)할 수 있는 것, 言語(언어)는 絶滅(절멸)시킬 수 있는 것이므로 허 락할 수 있는 것으로 앎은 아무리 「사아벨」이 눈에 가린 그네의 일이라 해도 너무 道理(도리)를 무시함이 큼에 놀라지 아니치 못할 것이었다. 그리 하여 일변 조선인에게는 歷史的(역사적) 敎養(교양)에 관한 일체의 機會(기 회)주지 하니하는 동시에 朝鮮語(조선어)는 公的(공적)生命(생명)은 새로에 私的(사적) 存在(존재)까지에도 가능한 모든 脅威(협위)를 더하였다.

이렇게 함에는 軍人(군인)과 俗吏(속리)의 頭與手(두여수)만으로는 만만히 들어서지 아니할 줄 깨달으매, 자기네의 형편에 합당한 幾個(기개)의 學者 (학자)를 데려다가는「御用(어용)」으로 使命(사명)하려고 하였다. 가려, 言語(언어) 問題(문제) 하나만 가지고 볼지라도 波蘭(파란)에 있는 普魯西 (보로서)의 敎育制度(교육제도)같은 것을 調査(조사)하기는 그 底意(저의) 의있는 바를 얼른 짐작할 일이지마는, 言語部面(언어부면)의 傭學者(용학 자)인 金澤(금택)씨와 같은 者(자)는 意外(의외)에 朝鮮(조선) 國語(국어) 絶滅(절멸) 不能(불능)의 論(론)을 가졌으니, 그가 그만한 學殖(학식)을 가 지고 한참 그 政署(정서) 及(급) 史人(사인)의 사이에 찐 더운한 대접을 받 지 못하고, 필경 囑託(촉탁)의 소임까지 흐지부지된 것이 혹시 이러한 까닭 이 아니었을는지 모를 것이다.

歷史(역사) 편으로 말하면, 今西(금서) 以下(이하)로 더욱 多數(다수)한 사람을 傭聘(용빙)하여 爲政者(위정자)의 필요로 하는 조선 역사의 編纂(편 찬)을 企劃(기획)하니, 저 半島史編纂會(반도사편찬회)란 것은 실로 이러한 動機(동기)로서 나왔던 것이었다. 저네의 政策(정책)이란 것의 根本的(근본 적) 錯妄(착망)으로 우리는 첫째, 自己(자기)네의 主觀的(주관적) 무슨 範 型(범형)에 어찌 갔든지 朝鮮人(조선인)을 틀어넣으려 함을 指摘(지적)하는 者(자)어니와, 이 態度(태도)를 思想(사상) ‧ 學術(학술)에까지 가지고 덤빔 에는 다름이 아닌 그네의 傭學者(용학자)들도 좀 거북하였던 모양이다. 半 島史(반도사) 編纂(편찬)이란 것이 어름어름하고 말기는 經費(경비) 問題 (문제)의 밖에 學的(학적)「딜래마」에 因(인)하는 거북도 작지 아니한 理 由(이유)이다. 그러나 今西(금서)니 三浦(삼포)니 하는 이들이 드나드는 통 에, 달리는 갸륵한 功績(공적)을 드러나게 보지 못하겠으나 오직 하나 壇君 (단군) 抹削(말삭)이라는 것이 確定的(확정적)이게 된 듯함은 그네에게 있 어서 꽤 큰 벌이가 아님이 아니었다.

己未年(기미년) 三一運動(삼일운동)이후로 眼蘙(안예)가 조금 벗겨져서 온 갖 것이 다 좀 變通(변통)이 되는 통에, 조선의 歷史(역사)도 없지 않고, 새로 낸 朝鮮史(조선사) 編修機關(편수기관)은 曾往(증왕)보다 좀 學的(학 적) 正堂(정당)에 接近(접근)하려는 一發現(일발현)으로 볼 것 있는 지도 모르고, 되고 말지도 모르고, 또 모처럼 하는 노력이 필경「日本人(일본인) 의 朝鮮史(조선사) 」가 되고 말지 않기를 나는 간절히 希願(희원)도 하거 니와, 다만 朝鮮(조선) 國祖(국조)요, 朝鮮心(조선심)의 源頭(원두)요, 朝 鮮學(조선학)의 上柱(상주)인 壇君論(단군론) 에 대한 그네의 見解(견해)와 態度(태도)가 어느 정도 만큼의 改訂(개정)을 보게 될는지는, 이것이 그네 의 가장 싫어하고 거북해하는 一物(일물)인 만큼 좀 의심스럽다고도 할 것 이다.

첫째는, 저네의 생각에 朝鮮(조선)을, 朝鮮心(조선심)까지라도, 그래 朝鮮 學(조선학)까지라도 한번 마음대로 해 보리하 하는 根本(근본) 觀念(관념) 은 아직도 땡땡하여 變(변)함이 없고(爲政者(위정자)라는 이에게는 거의 癌 腫的(암종적) 痼疾(고질)이니까 말할 것도 없고 學者(학자)라는 이에게도 이것이 民族氣質的(민족기질적)으로 潛在意識(잠재의식) 비스름하게 있어서 참으로 圓轉(원전)과 灑脫(쇄탈)을 期(기)하기 어려움이, 다름 모든 것에서 와 같이 學的(학적) 領域(영역)에서도 그러하고), 둘째는 아무렇게 해서든 지 一種(일종)의 論理的(논리적) 사개를 맞추어서 錯覺(착각)이든지 望斷 (망단)이든지 여하간 抹削(말삭)은 분명 되었느니라하게 되고, 또 이것이 그네 心中(심중)의 깊이 希期(희기)하였던 것인 만큼, 아무에게든지 그만 示唆的(시사적)의 成見(성견)이 되었으니까, 이 業識(업식)을 轉(전)하여 眞如(진여)의 하늘에 自由(자유)로운 翶翔(고상)을 試(시)함은 아마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면 그네들이 들이덤벼서 갖은 애를 다 써서「오피시엘」斷案(단안)으 로 만들어 놓은 것은 어떠한가? 이것을 大正(대정) 十二(십이)년 三(삼)월 朝鮮總督府發行(조선총독부발행)<普通學校(보통학교) 國史敎授(국사교수)參 考書(참고서) 朝鮮事歷敎材(조선사력교재)>란 것에 就(취)하여 살피건대 基 子(기자)의 일을 적은 뒤에「朝鮮半島(조선반도)에서 國立(국립)한 者(자) 의 가장 예로부터 傳(전)하기는 前(전)에 적은 基子(기자)로되, 또 그 以前 (이전)에 檀君(단군)이란 者(자)가 있었음을 往往(왕왕)이 信(신)하는 者 (자)가 있기로 此處(차처)에 一言(일언)코자 한다」하고서,

대개 檀君(단군)에 關(관)한 傳說(전설)을 揭載(게재)한 最古(최고)의 書(서)는 <三國遺事(삼국유사)>云云(운운)니, 이것을 基子傳說(기자전설) 이 數千年前(수천년전)支那(지나)의 古書(고서)에 적혔음에 比(비)하건대 極(극)히 새로운 傳說(전설)이라고 하겠다. 同書(동서)의 中(중)에<檀君 古記(단군고기)>라 하는 書(서)를 引用(인용)하였지마는, 此書(차서)는 <三國遺事(삼국유사)>와 相去(상거)하기 멀지 아니한 時代(시대)의 것임 이 의심 없다. 이 傳說(전설)은 일찍 支那(지나)의 書籍(서적)에 보인 것 이 없은 즉, 朝鮮(조선)에서만 流轉(유전)된 傳說(전설)임을 알 것이다.

그러나 宣和年間(선화년간)(高麗(고려) 仁宗(인종) 元年(원년), 距今(거 금) 七九(칠구)○餘年前(여년전))에 高麗(고려)에 왔던 宋(송)의 使節(사 절)인 路允迪(노윤적)의 隨員(수원) 徐兢(서긍)의 箸(저)한 <宣和奉使高 麗圖經(선화봉사고려도경)>에 當時(당시) 高麗(고려)의 國情(국정)을 詳 記(상기)한 中(중)에 특히 「建國(건국)」의 章(장)을 說(설)하였지마는, 아주 檀君(단군)의 일을 記載(기재)치 아니하였다. 그로부터 二○(이○) 餘年(여년) 뒤에 成(성)한 <三國史記(삼국사기)>云云(운운)와 도 同頃(동 경)에 金富軾(김부식)의 撰(찬)한 <妙香山普賢寺立記(묘향산보현사입기)> 에도 조금도 보임이 없다. 그런즉, 檀君(단군)開國(개국)의 傳說(전설)은 高麗(고려)中期(중기)까지는 아직 朝鮮人(조선인)의 間(간)에 行(행)하지 아니하였음이 분명하며, 그 多少(다소)라도 行(행)하게 됨은 <三國遺事 (삼국유사)> 時代(시대) 以後(이후)에 在(재)하였을 것이다.

하여, <遺事(유사)>의 原文(원문)을 引用(인용)하고 다시 平斷(평단)을 더 하되,

古傳說(고전설) 內容(내용)의 不可思議(불가사의)요, 佛說(불설)을 섞음 이 많음은 一見(일견)에 분명한 바요, 또 該傳說(해전설)은 朝鮮(조선)의 北部(북부)에 關係(관계)를 有(유)한 것이지, 朝鮮(조선)南部(남부)의 韓種 族(한종족)하고는 아무 關係(관계)를 가지지 아니하였음은, 新羅時代(신라 시대)에 在(재)하여 檀君(단군)이란 것이 아주 尊崇(존숭)되지 아니하였음 에 보아도 분명하다. 이 傳說(전설)이 李朝(이조)의 初期(초기)에 至(지)하 여 漸次(점차)로 尊崇(존숭)됨에 미쳐서, 世宗(세종)(第四代(제사대) 十日 年(십일년)(距今(거금)四九一年前(사구일년전))에 비로서 檀君祠(단군사)를 平壤(평양)에 베풀고, 基子祠(기자사)와 한가지로 春秋二節(춘추이절)에 祭 詞(제사)를 行(행)하였다.

또 同王(동왕)의 時(시)에 尹淮(윤회)等(등)에게 命(명)하여 撰(찬)케한 <世宗實錄(세종실록)> 地理志(지리지)에는 詳細(상세)하게 檀君(단군)의 일을 揭載(게재)하고 傳說(전설)의 內容(내용)도 매우 前(전)과는 다르게 되었다. 檀君(단군)에 關(관)한 遺迹(유적)까지도 增加(증가)되고 <東國 輿地勝覽(동국여지승람)>(成宗(성종) 十二年(십이년) 成(성)) 編纂(편찬) 의 時(시)에는 그중에 收錄(수록)된것이 不少(불소)하다. 그런데 <餘地勝 覽(여지승람)과 거의 同時(동시)에 編纂(편찬)한 <東國通鑑(동국통감)> (徐居正(서거정)等(등) 撰(찬), 成宗(성종) 十五年(십오년) 成(성))에는 檀君朝鮮(단군조선) · 基子朝鮮(기자조선) · 衛滿朝鮮(위만조선)의 記 事(기사)를 外紀(외기)라 하여 卷首(권수)에 揭(게)하고, 檀君朝鮮(단군 조선)에 對(대)하여는 자못의심을 두어「姑存之(고존지), 以備後考(이비 후고)」라고 하였다.

그렇지마는 이렇게 正史(정사)에 記載(기재)되었음으로써 檀君(단군) 은 基子(기자)되었음으로서 檀君(단군)은 基子(기자)에 先(선)하여 朝鮮 開國(조선개국)의 祖(조)인 것처럼 看做(간주)됨이 많게 되었다. 以上 (이상)은 檀君(단군)傳說(전설) 進展(진전)의 槪略(개략)이다.

그런데 李朝時代(이조시대)의 有名(유명)한 學者(학자)로 該(해)傳說(전 설)의 妄誕不稽(망탄불계)하여 足(족)히 믿지 못할 것임과, 또 該(해)傳 說(전설)이 僧侶(승려)의 手(수)로써 揑造(날조)된 것임을 論(논)한 者不 少(자불소)하며, 近來(근래)日本(일본)에 있는 學者(학자)의 硏究(연구) 또한 다 同一(동일)한 結果(결과)를 보였다. 그래서 本書(본서)는 該(해) 傳說(전설)을 取(취)하지 아니하고 參考(참고)로 此處(차처)에 附記(부 기)한다.

고 하였다 . 이것을 이때까지 그네들의 檀君論(단군론)에 대한 努力(노력)의 總和(총화)로도 볼것인 동시에, 檀君(단군) 그것을 敎政上(교정상) 어떻게 대접하고, 아울러 그네가 敎職者(교직자)를 통하여 朝鮮心(조선심)의 뿌리 를 芟除(삼제)하기를 어떻게 巧妙(교묘)히 해서 보려 한 뜻을 端的(단적)히 엿볼 것으로, 꽤 注意(주의)에 値(치)하는 文字(문자)이다.

그 조선 역사의 출발점을 흐려버리려 함에 다랍고 간지럽고 착살스러움을 不快(불쾌)하게 생각하기 전에, 모름지기 그 속에 얼마만큼이나 壇君(단군) 그것을 存在界(존재계)로서 몰아낼 만한 可能(가능)이 있는지를 冷靜(냉정) 히 考察(고찰)할 것이다. 설사 일본인은 壇君(단군)을 感情的(감정적)으로 처리하려 할지라는 그 때문에 우리의 學的(학적) 良心(양심)을 흔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밖에 壇君(단군)에 관한 見解(견해)를 發表(발표)한 者(자)에 小田省吾 (소전성오)를 들 수 있으되, 그의 所謂(소위)는 대개 前人(전인)의 諸說(제 설)을 掇拾(철습)한 것이요, 論斷(논단)은 前揭(전게)한 <朝鮮史歷敎材(조 선사력교재)>와 大同(대동)함을 보였니, 그가 오래 學署(학서)의 編修職(편 수직)을 奉(봉)하던이임으로써 그 見解(견해)의 來歷(내력)을 대강 짐작할 것이다.

다만 予(여)의 卑見(비견)으로는 日本讀(일본독)으로「タンクン」은 實 (실)로 朝鮮讀(조선독)으로「단님」이요,「단님」은 곧「달님」의 訛(와)이 다. 그 意義(의의)는 곧 山君(산군)·山主(산주) 또는 山神(산신)이다. 약 간 이것을 釋明(석명)하건대, 조선어의「님」이 君主(군주) 又(우)는 神 (신)임은 더 말할 것 없는 일이요, 次(차)에 「달」은 조선어로 山(산)의 義(의)니, 普通(보통)에는 達字(달자)로써 표시하고, 俗(속)에 陽達(양달) 이라 함은 山(산)의 向陽處(향양처)요, 陰達(음달)이란 것은 山(산)의 成陰 處(성음처)를 이름이며, 地名(지명)으로는 本(본) 高句麗(고구려)의 釜山縣 (부산현)을 古淵達(고연달), 工木達縣(공목달현)을 熊閃山(웅섬산)이라 하 며,「달」(達(달))은 또 丘(구) 혹 高(고)의 義(의)에도 통하여, 慶尙北道 (경상북도)大邱(대구)은 達勾火(달구화) 又(우)達佛(달불) 即(즉)丘成(구 성)이요, 江原道(강원도)高城郡(고성군)의 古名(고명)은 達忽(달홀) 即(즉) 古村(고촌)이다. 또 이「(達(달))을「단」으로 轉(전)하는 例(예)는 유명한 京畿道(경기도)水原(수원)의 八達山(팔달산)을 古圖(고도)에는 八呑山(팔탄 산)이라 하였고 (呑(탄)은 朝鮮音(조선음)「탄」이다), 小倉(소창) 文學史 (문학사)의 說(설)을 좇건데, 조선어의 語尾(어미) L을 N으로 轉訛(전와)하 는 일은 보통이니, 一(일), 二(이)의 例(예)를 擧(거)하면 軍那縣(군나현), 眞寶縣(진보현)은 本(본) 漆火巴縣(칠화파현)이라고 <三國史記(삼국사기)> 地理志(지리지)에는 적혔다. 故(고)로 「달님」이 「단님」으로 轉訛(전와) 됨은 결코 괴상한 것 아니다.

上述(상술)함과 같이 タンクン은 「단님」즉 山神(산신)이라고 하는 予 (여)의 說(설)이 다행히 是認(시인)된다면, 予(여)는<三國遺事(삼국유사)> 에 揭載(게재)한 壇君傳說(단군전설)은 본디 妙香山(묘향산)의 山神(산신) 起緣(기연)에 不外(불외)하는 것으로 斷(단)하려 한다. 이 山(산)에 住(주) 하는 熊(웅)이 人身(인신)을 得(득)하여 女(여)가 되고, 桓因(환인) 즉 帝 釋天(제석천)의 庶子(서자) 桓雄(환웅)과 婚(혼)하여 生産(생산)하였다 함 은 山神(산신)에 어울리는 出生(출생)이다(억지로 말하게 되면 平壤(평양) 의 古名(고명)인 王險(왕험)으로 改(개)하여 壇君(단군)의 名(명)처럼 하기 도 儉(검)이 熊(웅) 즉, 「곰」과 통하기 때문인 듯하게 생각된다).

그러면 그 山神(산신)을 왜 桓因(환인) 즉 祭釋(제석)의 庶孫(서손)이라고 도 할 것으로 만들어 놓았으냐 하면, 이것은 古來(고래)로 此山(차산)에 釋 帝桓因(석제환인)이 居住(거주)한다는 傳說(전설)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傳說(전설)이 있었음은 西山大師(서산대사)<淸虛堂集(청허당집)>중에 引用 (인용)한 新羅(신라) 古記(고기)를 依(의)하여 알 수 있은즉, 이래서 壇君 (단군)과 桓因(환인)과를 附會(부회)하였으리라 함은 진작 文學博士(문학박 사) 高矯亨(고교형)씨의 論(논)한 바이다(雜誌(잡지) 同源(동원) 第一號(제 일호)). 이것은 果然(과연) 合當(합당)한 說(설)이니, 同(동) 博士(박사)는 壇君(단군)을 山神(산신)이라 말하지 아니하였으되 이것을 妙香山(묘향산) 의 山神(산신)이라고 해야 同(동) 博士(박사) 說(설)이 適切(적절)하게 되 는 줄로 믿는다. 壇君(단군)이 妙香山(묘향산)의 山神(산신)인 것은 <三國 遺事(삼국유사)>揭載(게재)의 同(동) 傳說(전설)에 壇君(단군)이 後(후)에 阿斯達山(아사달산) 즉 黃海道(황해도)九月山(구월산)에 숨어서 그 山神(산 신)이 되었다 함에도 一致(일치)한다 함은 그의 一所見(일소견)으로 보아 줄 것이다. 그는 <朝鮮事歷敎材(조선사력교재)>를 敷衍(부연)하는 듯한 말 을 이것저것 많이 列擧(열거)하였으나, 그 要領(요령)은 平壤(평양)이 잠시 蒙古(몽고)의 有(유)가 되었을 元宗(원종) 前後(전후)에, 排外的(배외적)動 機(동기)로서 이 妙香山神(묘향산신)과 <三國史記(삼국사기)>와 <高麗史(고 려사)> (妙淸傳(묘청전))에도 보이는 平壤鮮人(평양선인)을 결합하여 平壤 (평양) 開闢談(개벽담)으로 만들어 낸 것을 그때의 一然(일연)이 <三國遺事 (삼국유사)>의 中(중)에 採錄(채록)한 것이 檀君傳說(단군전설)이라 함에 있는 모양이다. 壇君傳說(단군전설)의 성립이 온전히 高麗人(고려인)의 蒙 古(몽고) 來寇(내구)에 대한 反抗精神(반항정신)으로서 나온 것으로 그 動 機(동기)와 한 가지 成立(성립) 年代(연대)까지도 저 <大藏經(대장경)> 刻 板(각판)과 莫上先後(막상선후)할 것을 斷(단)하고, 또 李朝(이조)에서까지 도 檀君(단군)을 尊崇(존숭)하여 버리지 않기는 高麗(고려)에 대한 革命(혁 명) 手段(수단)이 온당치 못하였으므로 高麗人(고려인)의 民心(민심)을 得 (득)하려는 정책으로 그 믿는 바를 존중한 것이라 하며, 그러나, 李朝(이 조)의 學者(학자)들은 깊이 朱子學(주자학)을 重(중)이 여겨 極力(극력)으 로 佛敎(불교)를 배척한 결과로 국가에서는 檀君(단군)을 尊重(존중) ·宣 傳(선전)하였지마는 오히려 그 妄誕(망탄) 不可信(불가신)할 것을 唱言(창 언)하게 된 것이 모순임을 지적하고, 李朝(이조)의 末期(말기)에 가서 민족 적 정신이 강렬히 喚起(환기)되면서, 어느 사람이 檀君(단군)을 利用(이용) 하여 國祖(국조)라 하여 對外的(대외적)의 意味(의미)로 利用(이용)되는 것 임을 高調(고조)함이다. 과연 「亂暴(난폭)」하고 麁疎(추소)하고 버릇없는 소리지마는,이렇게 해서도 그만 될 줄로 아는 그 勇氣(용기)를 보든 동시 에, 그가 對外的(대외적) 必要(필요)로서 壇君(단군)이 생겼음을 力說(역 설) 曲證(곡증)하려고 애를 부르덩부르덩 쓰는 것 그대로에서 도리어 그네 들의 壇君(단군)抹削(말삭)의 必要感(필요감)과 「敵本(적본)」的(적) 目標 (목표)가 那邊(나변)에 있음을 알아볼 수 있음이 재미있다. 밤낮 해야 그네 들의 壇君論(단군론)은 아무리 學的(학적)假面(가면)으로 나와도, 다만 그 네의 壇君(단군)에 因(인)하는 主觀上(주관상) 脅威(협위)가 客觀的(객관 적)으로 映像(영상)되는 것일 따름의 感(감)이 있다.

十一(십일), 日本人(일본인) 諸說(제설)의 槪觀(개관)[편집]

以上(이상)에서 우리는 일본 學者(학자) 及(급) 日本人(일본인)의 壇君論 (단군론)에 대한 일반적 태도와 傳統的(전통적)정신을 보고, 또 그 歷史的 (역사적)發展(발전)이 어떻게 많이 政治的(정치적)事情(사정)과 손목 잡았 는지를 알 수 있다. 일본인의 事大精神(사대정신)이 明治(명치) 이후로 本 尊(본존)을 西洋(서양)으로 옮기면서 支那(지나) 侮蔑(모멸) ‧ 朝鮮(조선) 輕視(경시)의 風(풍)이 날로 增長(증장)하고, 이 時代精神(시대정신)이 學 術的(학술적) 探査(탐사)의 上(상)에도 微妙(미묘)한 영향을 미친 點(점)은 번거로우니까 이제 姑捨(고사)하고서, 홑으로 壇君(단군) 古傳(고전)의 本 文(본문)批評(비평) 及(급) 本質(본질) 審明(심명)에 대한 그네 공통의 學 的(학적) ‧ 論理的(논리적) 虛漏(허루)에 대하여 一瞥(일별)을 주어 보자. 일본인의 壇君論(단군론)은 대개 文獻(문헌)偏重(편중)의 弊(폐)에 빠져다 할 것이니, 그 一(일)은 記錄(기록)本位(본위)로 나타나서 <三國遺事(삼국 유사)>의 資料(자료)를 壇君(단군)의 全生明(전생명)으로 보게되었고, 또 一(일)은 字面(자면) 本位(본위)로 나타나서<三國遺事(삼국유사)>所傳(소 전)의 本文(본문)批評(비평)에도 表面(표면)의 句語(구어)(量(양)으로나 質 (질)로나)에 너무 얽매여서 도리어 記錄(기록) 그것의 性質(성질) 돋 그 ㅈ 本地(본지)와 背景(배경)과 成立(성립) 來歷(내력)등 必修(필수)條件(조건) 을 檢覈(검핵)하는 用意(용의)가 觖如(결여)하고, 甚(심)하면 古意(고의)와 私注(사주)를 混同(혼동)하여 닥치는 것 없는 팔을 내두르기도 하였다. 아 무 것보다도 이것이 그 잘못된 出發點(출발점) 又(우) 行相(행상)이라 할 것이다.

그 다음 그네의 壇君論(단군론)에는 거의 民族學的(민족학적) 又(우) 民俗 學的(민속학적)觀察(관찰)이 빠졌음을 指摘(지적)할지니, 조선인에게도 그 네 相應(상응)의 民族的(민족적) 來歷(내력)도 있고, 民族文化(민족문화)의 展開上(전개상)도 있고, 그 時間的(시간적)産物(산물)의 空間的(공간적)徵 驗(징험)도 있을 것이요, 또 有民史(유민사)이래로 허다한 里民族(이민족) 과의 挨拶(애찰)交錯(교착)이 끊이지 아니한 만큼 文化的(문화적)交涉(교 섭)의 映像(영상)도 넘나들어 있을 것이 무론이언마는, 不可思議(불가사의) 라 할 만큼 이 방면의 일은 도무지 閑却(한각)되어버렸다. 世界(세계)의 어 떠한 未開(미개)部族(부족) 單純社會(단순사회)에라도 다 있는 ─ 古古原古 的(고고원고적)으로 있는 天地開闢(천지개벽) ‧ 人文(인문) 起源(기원) ‧ 氏 族(씨족) 本源(본원)에 관한 神話(신화) ‧ 傳說(전설)내지 그것을 배경으로 하는 元始(원시) 宗敎(종교) ‧ 原始(원시) 法制(법제)가, 일찍부터 開明(개 명)도 하고 오래고 깊은 社會的(사회적) 過去(과거) 生命(생명)을 가진 朝 鮮(조선) 及(급) 朝鮮人(조선인)에게만 홀로 이것이 缺如(결여)하였다고 보 아버리는 奇現象(기현상)이 생기게 되고, 이 때문에 몇천년 전의 國祖說話 (국조설화), 극히 幼稚(유치)하다고도 하고 素樸(소박)하다고도 할 建國神 話(건국신화)가 몇천 년 뒤 다 밝은 세상에 忽然(홀연)히 特殊(특수)한 作 者(작자)의 손에 現出(현출)하여, 금시에 일반 민중의 示唆的(시사적) 盲從 (맹종)을 사게 되었다는 奇設(기설)이 성립되는 줄로 알게 됨이 신기하다면 신기한 일이다. 조선에 오랜 神話(신화)와 묵은 宗敎(종교)와 남다른 文化 的(문화적) 事實(사실)이 겉에 얼핏 눈띄지 아니함이, 아마 外國人(외국인) 인 그네로 하여금 없나니라는 速斷(속단)을 가지게 한 一原人(일원인)도 되 겠지마는, 理論上(이론상) 應有(응유)할 것이 實際上(실제상) 不有(불유)한 경우에는 考察(고찰)과 論究(논구)가 다 詳審(상심)을 要(요)할 것이요, 또 그러함이 社會的(사회적)으로 늙어서 많이 古物(고물)의 衰讚(쇠찬)을 지내 기 때문인 만큼, 累積(누적)된 밑의 高層(고층)을 掘入(굴입)하고 蒙蔽(몽 폐)된 속의 原相(원상)을 發明(발명)하기에 全的(전적) 又(우) 根本的(근본 적)의 誠意(성의)와 努力(노력)이 있을 것이어늘, 그렇지 아니하고 노닥노 닥한 시방만 보고 비단적 처음을 묵사한다든지, 늙어 골골하고 자빠진 것을 보고 호랑이 잡던 젊었을 적 있었음을 모르는 체하고 만다든지 함은, 줄잡 아도 稽考闡幽(계고천유)의 誠(성)이 있는 學者(학자)의 일은 아닐 것이다. 가령 壇君古傳(단군고전)으로 말하건대, 그것이 설사 中年(중년)의 무슨 필요에 因(인)한 創作(창작)으로 칠지라도, 白地(백지)의 맹랑한 말이 開明 (개명)한 사회에서 全民衆(전민중)의 信仰(신앙)을 살 수 없음에 鑑(감)하 여, 그 臺本(대본) 혹 依據(의거) 骨子(골자)로의 그 本生的(본생적) ‧ 前事 的(전사적) 方面(방면)에 웬만한 注意(주의)를 더함이 우리 良心(양심)의 명령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덮어놓고 없애버리는 그네에게는 傳說 的(전설적) 生命(생명)까지 제값을 찾지 못하는 터이니까, 壇君(단군)이 얼 마만큼이라도 事實(사실)의 背景(배경)을 가졌다함 같음은 당초에 문제도 될 리 없음이 무론이었다.

(요사이 며칠 동안은 校正上(교정상) 叙說文(서설문)과 引用文(인용 문)이며, 本文(본문)과 注記(주기)가 混濟(혼제)되어 文意(문의) 거 느기에 어렵게 되었음을 謝告(사고)합니다.)

古代(고대)에 있어서 어느 한 說話(설화)가 素撲(소박)으로부터 整齊(정제) 로 발달하고, 口舌(구설)로부터 文字(문자)로 固定(고정)되기까지에는 진실 로 오랜 세월을 要(요)하는 것이요, 文字(문자)가 있고 記錄(기록)이 발달 된 뒤에도 民俗(민속)의 所傳(소전)이 記錄化(기록화)기까지에는 또한 그렇 게 쉽사리 디는 것 아니었다. 그것이 全民族的(전민족적)의, 또 最近(최근) 本的(본적)의 어느 認識(인식)을 要計(요계)하는 성질을 딴 것이면 記錄(기 록)이라는 安固(안고)한 地位(지위)ᄙ 얻기가 더욱 容易(용이)하지 않고, 또 神話(신화)와 古談(고담)이 精神的(정신적)生活(생활)의 全(전)場面(장 면)을 덮어서 그 종유가 많고 내용이 어수선할 때에는, 그 속에서 文字(문 자)에 올라서 오랜 生命(생명)을 얻게 되는 者(자)는 매우 一般(일반)의 흥 미를 끄는 것, 그 凝視(응시)와 尊尙(존상)의 準的(준적)이 디는 것이 아니 면 아니 되는 것이요, 더욱 조선과 같이 說話(설화)에 관한 專門(전문) 編 纂物(편찬물)이 있는 것 아니라, 歷史(역사)라는 體制(체제)를 가진 書冊 (서책)의 中(중)에 歷史的(역사적) 事實(사실)의 一部(일부)로 參加(참가) 하는 경우에 그러한 것이다. 이 說話(설화)記錄化(기록화)이 常例(상례)를 돌보지 아니하고 壇君古傳(단군고전)의 成立年代(성립연대)를 可能(가능)以 上(이상)으로 引下(인하)하려 함은, 저네 所說(소설)의 脚跟(각근)이 또 그 만큼 부실한 點(점)임을 앙탈하지 못할 것이다.

또 記錄(기록)의 術(술)이 일반적으로 발달되지 普及(보급)되지 아니하고, 어느 특권 계급의 소에 轉官(전관)될 때에는 神話(신화)나 傳說(전설)이나 내지 原始的(원시적)歷史談(역사담)이 記錄化(기록화)됨에는 그 대 文敎(문 교) 階級(계급)의 思潮(사조) ‧ 好尙(호상) ‧ 要求(요구)에 因(인)하는 取捨 (취사)‧ 影響(영향)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니, 이는 忠實(충실)하고 公正(공 정)한 記錄者(기록자)의 손에 된것에도 어느 정도만큼은 면치 못하는 일이 다.

그러므로 오랜 기록을 상고함에는 그 시대, 그 사회의 사상적 배경과 그 필자와 또 그의 依憑(의빙)한 古記(고기)筆者(필자)의 敎權的(교권적) 所屬 (소속) 같은 것을 諒解(양해)의 一要素(일요소)로 삼지 아니치 못하는 것이 다. 더욱 記錄(기록) 大體(대체)의 意趣(의취)에 宗敎的(종교적)關係(관계) 가 있고, 더욱 宣敎上(선교상) 무슨 要求(요구)를 가진 것인 때에는 이 점 에 대한 細心(세심)의 注意(주의)와 한가지로 寬容(관용)의 態度(태도)는 가지지 아니하면, 肯定(긍정)으로나 不定(부정)으로나 다 意外(의외)의 실 패를 부르는 일이 있을 것이다.

가령 말하면 <三國遺事(삼국유사)> 같은 것은 그것이 이미 佛徒(불도)의 撰述(찬술)인 以上(이상)에, 文議(문의)와 字形(자형)이 약간 그 氣味(기 미)를 띄움이 조금도 怪狀(괴상)할 것 없고, 또 그 냉용의 大附(대부)가 佛 敎(불교) 弘通(홍통)의 事實(사실)로 成(성)하였음으로써 그 撰述(찬술)의 動機(동기)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니, 설사 그 속에 佛敎的(불교적) 영향의 보이는 것이 있을지라도 그렇다고 그것 全部(전부)를 抹削(말삭)해 던짐에 는 매우 신중한 用意(용의)를 더해야 할 것이 무론이다. <三國遺事(삼국유 사)>는 대체로 보아 國乘(국승)의 未備(미비)를 俗史(속사)의 古傳(고전)을 旁及(방급)한 것이요, 그것도 자기의 撰述(찬술)은 거의 없고 法乘(법승) ‧ 俗傳(속전) 間(간)에 總(총)히 그때 流行(유행)하는 諸宗(제종) 文字(문자) 를 대개 原文(원문)대로 이것저것 掇拾(철습)해 놓음에 그치고, 약간 自己 (자기)의 意見(의견)을 첨가하는 것은 割註(할주) 아니면 跋語(발어)로 그 形迹(형적)이 드러나게 하였으니(애초에 대단한 有意作(유의작)도 아니어니 와), 何特(하특) 壇君古傳(단군고전)만이 이 撰述方針(찬술방침)에 어기는 것일 리가 없을 것이요, 도리어 이렇게 述而不作底(술이부작저)의 忠樸(충 박 한 편찬가 ) 編纂家( )의 손에 採收(채수)되었음을 다행해할 것이니, 미상불 佛敎徒(불교도)에 歸(귀)하려 함 같음은 참으로 글을 볼 줄 아는지부터가 의심스럽다 할 것이다.

또 일변으로 僧侶(승려)의 撰(찬)인<三國遺事(삼국유사)>에란 보이지,<三 國史記(삼국사기)>其他(기타)에 記載(기재)되지 아니한 것을 말함도, 또한 記錄(기록)의 思想的(사상적)背景(배경)을 무시하는 一別例(일별례)이니, 이는 金富軾(김부식)의 史記(사기) 編修(편수)態度(태도)가 온전히 儒家(유 가)의 規模(규모)에 一依(일의)하여, 힘써 怪力亂神(괴력난신)의 科(과)에 떨어지지 아니할 양으로 努力(노력)하였음을 잊어버리기 때문이요, 同人(동 인)의 撰(찬)인 妙香山(묘향산)의 碑文(비문)에도 이것을 적지 아니하였음 은, 도리어 그가 이렇게까지 神怪(신괴)의 談(담)을 피하였음을 보임이라 할것이다. 壇君古傳(단군고전)에 대하여 일본인은 흔히 佛敎臭(불교취)의 있음을 말하나, 公平(공평)하게 보면 道敎色(도교색)이 도리어 勝(승)함 을 보고, 또 儒敎(유교)의 原始信仰(원시신앙)에도 共通(공통)함을 보나니, 그 러면 壇君古傳(단군고전)은 三敎(삼교)會同(회동)으로 성립되었다고나 할는 지? 佛敎的(불교적) 名句(명구)의 一(일), 二(이)만으로써 佛徒(불도)의 創 作(창작)으로 看做(간주)하려 함은 퍽 우스운 일이라 할것이다. 總(총)히 記錄(기록) 檢討(검토)(文句(문구)考察(고찰))上(상)에는 思想的(사상적)背 景(배경) 내지 敎權的(교권적)關係(관계)를 무시하였음을 그네 錯見(착견) 의 一因由(일인유)로 칠 것이다.

朝鮮(조선) 思潮(사조)의 大勢(대세)를 살피건대, 朝廷(조정)에 있는 사대 적 ‧ 退嬰的(퇴영적) 方針(방침)과 民間(민간)에 있는 自主的(자주적) ‧ 反抗 的(반항적) 精神(정신)의 對立(대립) 相適(상적)으로 基調(기조)를 삼은 것 은 무엇에 있어서도 한가지였으니, 基子說(기자설)이 官邊(관변)을 因(인) 하여 唱言(창언)되고, 壇君說(단군설)이 民間(민간)을 因(인)하여 支持(지 지)도었다는 見解(견해)는 어느 정도만큼 是認(시인)되고, 壇君(단군)의 說 (설)이 민족적 반항이 정신의 産物(산물)이라 함은 실로 本末(본말)을 전도 함이 심한 者(자)라 할 것이다.

壇君古傳(단군고전)의 연구와 한가지 基子東走說(기자동주설)을 검토해 보 면 兩兩相照(양양상조)하여 더욱 明瞭(명료)하여지는 일이어니와, 조선의 오랜 傳說(전설) ─ 固有(고유)한 信念(신념)에는 壇君(단군)을 國祖(국조) 로 하는밖에 아무 다른 것이 없던 것이러니, 支那(지나) 文化(문화)의 영향 과 支那(지나)交涉(교섭)의 필요상으로 발생하여 성립한 것이기 이른바 基 子(기자) 云云(운운)의 說(설)이요, 基子說(기자설)이 이용되는 대로 차차 公的(공적)機會(기회)에서 風力(풍력)이 減(감)해진 것이 壇君(단군)의 일 이니, 文字(문자) ‧ 記錄(기록)이 官府(관부)에만 行(행)하는 시기에는 正當 (정당)한 그 記載(기재)가 거기 存在(존재)하기 어려운 사정이었다. 이것은 첫째, 半島(반도)에 있는 自主的(자주적)精神(정신) 及(급) 事實(사실)의 旺盛(왕성)하던 시기의 기록은 屢次(누차)의 書厄(서액)에 蕩然(탕연)히 掃 盡(소진)되고, 시방 남아 있다는 若干(약간)文字(문자)는 總(총)히 外交的 (외교적) 必要(필요)와 儒敎的(유교적) 義理(의리)의 下(하)에 작성된 것에 그침에서도 생각할 일이니, 壇君古傳(단군고전)의 生命(생명)이 갈수록 民 間的(민간적)으로 存續(존속)됨은 이러한 사정에 말미암음이요, 그것이 多 分(다분)으로 民俗的(민속적) ‧ 傳說的(전설적) 色彩(색채)를 띠게 됨도 이 까닭으로 볼 것이요, 도리어 民俗的(민속적) 方面(방면) ─ 특히 外來(외 래) 문화의 영향이 없거나, 부당한 所以刮去(소이괄거)해 볼 수 있는 事實 (사실)에서 探跡發徵(탐적발징)해야 될 이유가 되는 것이다. 아무리 後代的 (후대적)인 記錄(기록)에 昭詳(소상)할지라도, 그 事實的(사실적) 根據(근 거)가 不實(부실)하면 遽然(거연)히 信認(신인)함이 不當(부당)하며, 동시 에 만일 民俗的(민속적)根據(근거)만 深痼(심고) 久遠(구원)한 것이 있으 면, 설사 記錄(기록)의 上(상)에는 一字(일자) 不傳(부전)이라 할지라도 遽 然(거연)히 抹消(말소)될 리 없을 것이다.

이미 朝家(조가) 傳統的(전통적) 方針(방침)이 事大的(사대적) ─ 支那同 化的(지나동화적)으로 성립한 것을 認(인)하고, 그네의 文字(문자)중에 自 主(자주)精神(정신)의 表象(표상)인 壇君古傳(단군고전)이 빠진 것을 야릇 이 생각함은 모순되는 要求(요구)라 할 것이요. 기록에 없음으로써 그 民俗 的(민속적) 存在(존재)의 事實(사실)을 무시하려 함은, 그 모순을 더욱 크 게 함이라 할 밖에없다. 조선에 있어서 儒敎(유교) 思想(사상)은 慕華館念 (모화관념) 又(우) 事大精神(사대정신)하고 三名一實的(삼명일실적)關係(관 계)로 擴布(확포) 又(우) 威癮(위은)하니,「事大(사대)」는 儒敎(유교)에 있어서 天命的(천명적)의 一德目(일덕목)을 짓다시피 한 것이요, 또 夷(이) 로부터 夏(하)로 進(진)함은 그 民族的(민족적)의 最大(최대)榮譽(영예)를 삼는 바이었다. 조선인의「事大(사대)」가 消極的(소극적)으로부터 점점 積 極的(적극적)으로 傾向(경향)하매, 무엇이든지 支那(지나)를 닮으며 아주 支那(지나)가 되어버리지 아니하면 마지않게 되니, 이것이 祖上(조상)의 뼈 다귀에와 往昔(왕석)의 지낸 자위에까지 미침에 이르러 그 弊(폐)가 極(극) 하였다.

이 弊風(폐풍)이 古代(고대)의 傳說(전설)의 上(상)에는 어떻게 影響(영 향)되었느냐 하면, 支那(지나)의 古傳說(고전설) 及(급) 傳說的(전설적) 人 格(인격)에 附會(부회) ‧ 結聯(결련)할 만한 것은, 곧 支那的(지나적)으로 된 것과 支那(지나)와의 類似性(유사성)을 가진 것은, 支那的(지나적) 觀念 (관념)의 下(하)에 畸形的(기형적) 存立(존립)을 계속하였지마는, 그 그렇 지 못한 것은 誕妄(탄망)으로 指目(지목)되어 이럭저럭 喪滅(상멸)로 돌아 갈 밖에 없었다. 이런 무서운 試鍊(시련)과 淘汰(도태)를 지내면서도 그래 도 질긴 生命(생명)을 下代(하대)에까지 保維(보유)한 者(자)는, 民族的(민 족적) 又(우) 社會的(사회적)으로 뽑으려헤 뽑을 수 없는 强靭(강인) 深固 (심고)의 本質(본질)을 가진 무엇이니, 이를테면 壇君古傳(단군고전) 같음 이 그것이다. 조선의 민족성이 神怪(신괴)를 좋아하는 一面(일면)을 가졌건 마는, 그 분수로는 대단한 神話(신화)와 古傳說(고전설)을 가지지 못한 편 이요, 그러나 그 殘片(잔편)과 變形(변형)은 무슨 種類(종류)로든지 다 있 어, 본디 不足(부족)하거나 全無(전무)하던 것 아님을 푼푼히 증명함은 그 說話(설화) 古態(고태)의 考査上(고사상)에 注意(주의)할 一條件(일조건)이 니, 이는 아무 것보다도 더 儒敎的(유교적) 風化(풍화)의 부대낌에 이아친 結果(결과)로서 볼 것임이 무론이다. 얼른 말하면, 조선은 說話的(설화적) 으로 生長(생장)한 나라가 아니라 澌滅(시멸)해 온 나라이니, 壇君(단군) 기타의 建國(건국) 傳話(전화) 같은 것이 中間(중간)에 發生(발생)성립된 것이기는 커녕, 없어지다 없어지다 못하여, 남고 없애려다 없애려다 못하여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몹쓸 복새와 困厄(곤액)을 치르고도 그만큼 또 그렇게라도 形貌(형모) 를 전해온 것만 끔찍하게 알 것이어늘, 뒤집어서 中間(중간)에 생겼거나 그 렇지 않아도 보태고 커진 것으로 보려 함은, 저네들이 아무리 애써도 壇君 (단군)뿐이지, 客觀的(객관적) 實體(실체)까지 흔들일 줄 앎은 턱없는 생각 임이 무론이다.

일본인의 壇君論(단군론)은 要(요)하건대, 偏見(편견)으로서 偏見(편견)으 로의 一圓環(일원환)을 끝없이 돌아다님에 자지 못한다. 그런데 그 偏見(편 견)은 意識的(의식적) ‧ 無意識的(무의식적)의 兩種(양종)에 나눌 수 있으 니, 무의식적 편견이란 것은 저 一般(일반)歷史(역사)에 대하여 謬妄(유망) 의 見(견)을 가졌기 때문에 그 飛沫(비말)이 壇君(단군)에까지 미쳐 옴 따 위이다.

文化(문화)의 本質論(본질론)에 一種(일종)의 成心(성심)을 가져서, 支那 (지나)周圍(주위)의 민족에는 自發的(자발적)又(우) 固然的(고연적) 文化 (문화)를 허락하지 아니하고, 그네 독특한 문화적 전통을 무시하기 때문에, 지나 문물 이 支那( )文物( ) 들어가기 이전의 일은 억지로 묵살하여 함도 그 하 나요, 支那(지나)의 記錄(기록)에 絶對(절대)한 權威(권위)를 認(인)하고, 그 一時(일시) 過客(과객)의 見聞隨錄(견문수록)을 詳審(상심) 周到(주도) 한 探檢錄(탐검록)처럼 보아서, 支那(지나)의 門籍(문적)에 全無(전무)하거 나 있어도 異形(이형)인 것은 얼른 事實(사실)의 存在(존재)를 肯定(긍정) 하지 아니하려 함도 그 하나요, 半島內(반도내)의 歷史的(역사적)民族(민 족)을 억지로 兩彙(양휘)에 나누어서, 扶餘(부여)는 北種(북종)이니 韓(한) 은 南種(남종)이니 하여 截然(절연)히 딴 것만 여겨 가지고, 壇君古傳(단군 고전)이 있을지라도 北方(북방)에나 있던 것이지 南方(남방)하고는 本不相 干(본불상간)이라 하는 것 따위도 그 하나이니, 朝鮮的(조선적)으로 볼 壇 君(단군)을 支那眼(지나안)으로 보려들고 自主的(자주적)으로 볼 것을 割異 的(할이적)으로 보려 들 때에 과녁이 틀리는지라, 眼前(안전)의 實物(실물) 도 깜빡 錯過(착과)해버리는 것들이 甚(심)히 딱하다 하겠다.

羅珈(나가)씨 같은 이, 白鳥(백조)씨 같은 이가 당초에 壇君(단군)을 抹削 (말삭)하기는, 혹시 단순한 觀察(관찰)로 權假(권가)로 評斷(평단)한 것이 미에 불과했던 것이겠지마는, 이것이 일본인 일반의 무의식적 一欲求(일욕 구)에 投合(투합)하여 편겨이 편견물을 낳다가 마침내 定說(정설) 비스듬한 결과를 본 것은 作俑者(작용자)의 도리어 意外(의외)라 할 發展(발전)일는 지도 모를 것이다. 처음에는 그럴사해서 몇 마디 무엇이라 해 본것을 後人 (후인)은「미상불 그렇다」로부터「꼭 그런 것이야」로 들어가다가,「변통 없이 그렇다」로까지 나아가는데, 이 進行(진행)의 지팡이로 쓰인 것은 실 상 正鵠(정곡)을 비켜서 가는 偏見(편견)이었다. 古記(고기) ‧ 古傳(고전)의 不備(불비) ‧ 不實(부실)한 것만 골라서 不確(불확) ‧ 不定(부정)한 一時(일 시)의 斷見(단견)을 더한 것이 그네들 시방까지의 壇君論(단군론)이니, 그 虛(허)를 衝(충)하고 그 弱(약)을 乘(승)해 무슨 奇兵(기병)을 잠시 써 본 다 해도, 本營(본영)과 그 中軍(중군)이 아주 뜬뜬하여 難攻不落(난공불락) 일진대, 百工百勝(백공백승)이라도 그래도 失敗(실패)일 밖에 무엇하는 것 이랴.

어어간 일본인의 사이에는 成心(성심)과 先入見(선입견)이 하나 서서 있 어, 자기네 스스로 變通(변통)하기는 姑捨(고사)하고 남이라도 좀 異說(이 설)을 세우면 얼른 귀도 기울이지 아니하게 됨이 실상 우습게 딱한 일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일본 역사에 있어서의 自尊心(자존심) 擁護(옹 호)와, 조선 역사에 대한 反動的(반동적)關係(관계) ─ 일본이 조선에 比 (비)하여 年代上(연대상) 後輩(후배)가 아니라 하고 싶은 心理(심리)에 기 밀한 관계를 가진 만큼, 이 깐깐스러운 偏見(편견)을 저네에게서 拔除(발 제)함은 쉬운 일이 아닐 듯하다. 다만 壇君古傳(단군고전)에는 그네의 생각 하는것 같은 虛漏(허루) ‧ 空疎(공소)한 것만이 아니라, 그보다 월등한 眞實 (진실) 充足(충족)이 있어서 탈이다.

그 意識的(의식적)의 偏見(편견)은 첫째, 學的(학적) 良心(양심)과 政略的 (정략적)要求(요구)의 葛藤(갈등)이 自己(자기)네들이 抹削(말삭)한다고 客 觀的(객관적)의 抹削(말삭)이 成就(성취)되고 아니됨은 如何(여하)하든지, 하면 되거니 하고 한 번 憑河(빙하)의 勇(용)을 뽐네 보는 것이다. 저 朝鮮 督署(조선독서)의 祿米(녹미)를 타 먹는 이는 職分(직분)으로도 그러할 것 이어니와, 그렇지 아니한 이까지도 덩달아 굿 한 거리를 춤춤은 또한 一種 (일종)의 時代意識(시대의식)에 끌리는 것이다. 특히 보기에도 낯가지러운 것은 이곳 官學的(관학적) 斷案(단안)에 드러난 얇게 沒廉(몰렴)한 것이니, 그 壇君(단군)에 대한 態度(태도) 같아서야 高等批評(고등비평)의 見地(견 지)에선 秋霜(추상)같은 態度(태도)가 사람으로 하여금 소름이 쭉쭉 끼치게 함이 있지마는, 이 嚴格(엄격)한 學的(학적)「메스」가 어째서 朝鮮(조선) 의 ─ 事實(사실) 壇君(단군) 같은 것에만 向(향)하, 壇君(단군)하고도 同一而語(동일이어)할 수 없는 日本(일본) 古代(고대)의 事實(사실)에는 도 리어 古傳(고전) 俗說(속설) 以上(이상)의 朦朧(몽롱) ‧ 模糊(모호)를 잘 베 었는지 그 洋刀(양도) 並用(병용)의 기막힌 솜씨야 못내 탈복한 것이 있다. 위선 神功皇后(신공황후)란 분의 三韓(삼한) 來侵(내침) 같은 것만 하여 도, 그네의 歷史家(역사가)벌서부터 國民說話(국민설화)로 치는 것이요, 더 욱 이것이 成質王(성질왕)으로 朝鮮人(조선인)에게 쓰는 課本(과본)에는 매 우 신중히 고려하여 處置(처치)할 것 이어늘, 도리어 아무 것보다 誇張(과 장)한 筆致(필치)로 적어 넣었으니, 마찬가지 政略(정략)이겠지마는 여기는 어째 이리 또 寬容(관용)한지? 不當(부당)한 當然(당연)이로되 또한 當然 (당연)한 듯한 不當(부당)아닐 수도 없을 것이다. 본디 편견으로 한 것을 새삼스럽데 편견이다 하고 덤빔이 진실로 無用(무용)의 일이려니와, 그네의 壇君論(단군론) 心理(심리)를 살피는 一助(일조)로 이것을 잠깐 건드릴 따 름이다.

十二(십이), 僧徒(승도), 妄談設(망담설)의 檢覈(검핵)[편집]

理想(이상) 列擧(열거)한 것과 같아서 壇君(단군) 否認(부인)의 共通的(공 통적) 又(우) 根本的(근본적) 이유는, 그것이 佛敎的(불교적)임이요 佛典 불전 ( )으로서 탈화한 佛者(불자)의 做作(주작)이라 함에 있다. 壇君(단군) 古傳(고전)의 진실성이 의심받던 始初(시초)와 그 虛構(허구) ‧ 假冒(가모) 의 斷案(단안)을 받게 된 結末(결말)이 한결같이 佛敎的(불교적) 結構(결 구)라 하는 一点(일점)으로써 眼目(안목)을 삼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보는 이유는 무엇인고 하면 첫째는 그 用語(용어)가 佛典 (불전)에 通須彌四天王(통수미사천왕)의 天王(천왕)에 檀君(단군)의 檀(단) 이 牛頭(우두)旃檀(전단)의 檀(단)의 關係(관계)하는 것으로 說(설)하는 類 (류)이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條理(조리) 있는 見解(견해)며, 근거있는 議論(의논)일까? 먼저 檀君(단군) 民族(민족)의 本原(본원)과 朝鮮(조선) 人文(인문)의 淵源(연원)이라 하여 <三國遺事(삼국유사)>에 전하는 것이 「桓國(환국)」이니, 桓國(환국)이 곧 天(천)을 의미하는 것임을 古傳(고 전) 全體(전체)의 大意(대의)로써도 理會(이회)되는 것이요, 다른 同流(동 류)說話(설화)의 比較(비교)로써 더욱 명要(요)하건대, 壇君古傳(단군고전) 의 大意(대의)가 上天(상천)으로부터 人間(인간)으로 降(강)하여 神市(신 시)로부터 國家(국가)로 化(화)하였다는 三段(삼단)으로 結構(결구)되고, 桓國(환국)은 그중의 第一段(제일단)인 天上(천상)에 當(당)하는 것이니, 桓(환)은 칠시 朝鮮(조선)古語(고어)의 무엇에 譯對(역대)한 字(자)일 것이 요, 시방 國語(국어)에 天(천)을「한울」이라 함으로써 그 古刑(고형) 혹 變形(변형)혹 類語(유어)인 줄로 살피기 어렵지 아니한 것이다. 특히 桓 (환)을 一國土(일국토)로 적었음은 우리가 注意(주의)해 둘 점이니, 이는 宇宙(우주) 三界(삼계)(곧 天上國(천상국) ‧ 人間國(인간국) ‧ 地下國(지하 국))의 觀念(관념)을 가진 東北亞細亞(동북아세아) 古信仰(고신앙)의 通則 (통칙)에 照(조)하여, 그것이 과연 잘 古意(고의)를 承受(승수)함임을 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순진하게 壇君古傳(단군고전)을 대하는 이의 平正 (평정)한 觀察(관찰)이어니와, 어째 꼬부장하게 생각이 들고, 어째 佛敎(불 교)의 影像(영상)을 幻覺(환각)한 者(자)는 이러한 桓(환)을 桓因(환인)의 桓(환)에 比擬(비의)하고, 이 臆見(억견)을 强(강)케 하기 위하여<三國遺事 (삼국유사)>에 분명히 「桓國(환국)」으로 板刻(판각)된 것을 「桓因(환 인)」이라고 妄意(망의) 改竄(개찬)하기를 사양치 아니하니까지 하였다. 미상불 桓因(환인)은 具稱(구칭)하면「釋迦(석가) 提桓(제환) 因陀羅(인타 라)」(Sakra devanam Indra)로 「能天主(능천주)」라 譯(역)하고, 略轉(약 전)하야 「天帝的(천제적)」이라 하는 것이, 桓(환)은 天(천)을 의미 하고 因(인)은 主(주)를 의미한 것인즉, 이것이 天(천)을 國土(국토)로 하고 天 王(천왕)을 位號(위호)로 하는 壇君古傳(단군고전)에 比擬(비의)됨은 바이 무리 無理( )도 아닐 것이요, 더욱 一然(일연)과 같은 佛者(불자)로는 그 너 무 교묘한 符合(부합)과의 아울러 그 佛門(불문) 攝入(섭입)의 풍부한 가능 성에 未曾有(미증유)를 嘆(탄)하여 얼른 桓國(환국)의 下(하)에 「謂帝釋也 (위제석야)」라는 注脚(주각)을 添(첨)하였음이 또한 無謂(무위)라 못할 것 이며, 다만 添注(첨주)하는 정도에 止(지)하고 아주 天改(천개)해버리지 아 니함에서 도리어 그 古刑(고형)의 다치지 아니하였음을 다행으로 알 것이 다.

그러나 桓國(환국)의 桓(환)이, 字(자)는 혹시 帝釋(제석)에서 借來(차 래)한 것일는지 모르겠지마는, 그것이 無據(무거)한 것을 전수 假冒(가모) 함일진대, 그야말로 아직 桓因(환인)을 襲用(습용)하였겠지桓國(환국)이라 고 고쳤을 필요가 없을 것이요, 더욱 人土(인토)를 相混(상혼)하여 竺傳(축 전)의 人物(인물)인 것을 구차히 器界(기계)로 化(화)하였을 理由(이유)가 없으리니, 설사 桓字(환자)는 帝釋(제석)의 名號(명호) 중에서 摘來(적래) 임을 擬想(의상)하면서도 附疑(부의)에 止(지)하는 것은, 첫째는 外形(외 형)은 여하간에 說話(설화)의 根原(근원)이 다른 것을 숨길 수 없고, 또 오 랜 새월과 많은 民衆(민중)의 觀念(관념)에 印存(의존)하고 耳目(이목)에 布在(포재)한 바에, 全然(전연)히 佛敎(불교)로 融攝(융섭)해버리지 못할 關係(관계)가 있기 때문이 아닐 수 없을 것이며, 그것은 무론 古傳(고전)의 명확한 指稱(지칭)으로 「桓(환)」字(자)의 根本(근본)이 된 무슨 一觀念 (일관념) 一名句(일명구)일 것이다. 國祖(국조)의 天降說(천강설)이 古(고) 로 부터 繼續(계속)하고 또 他(타)에도 普遍(보편)하여, 적어도 조선 민중 의 氏族(씨족) 本院(본원)에 대한 傳統的(전통적) 觀念(관념)이 어떠한 줄 만을 信認(신인)할지라도, 桓國(환국) 즉 天國(천국)으로 扶餘(부여) ‧ 高句 麗(고구려) ‧ 新羅(신라) ‧ 駕洛(가락)등 古傳(고전)에서 보는「天(천)」그것 과 語形(어형)네지 換骨(환골)이 一致(일치)함을 앙탈하지 못하리니, 그러 므로 桓國(환국)의 桓(환)에 同符(동부)함을 큰 秘密(비밀)이나 찾은 것처 럼 알기 전에, 본디 어째 桓字(환자)로써 比對(비대)함이 마땅하던 그 所以 (소이)를 밝힘이 學者(학자)當然(당연)의 任務(임무)가 될 것이다.

한번 생각이 이렇게 들면 桓(환)이 곧 「한울」(혹 그 類語(유어))의 對音 (대음)임을 想到(상도)할 것이요, 또 조선의 古語(고어)에 天(천)을 別(별) 로 「」이라 하기도 하여, 光明(광명)을 天(천)의 德(덕)으로 觀念(관념) 한 證迹(증적)이 있음에 照(조)하면 「환」(곧 光明(광명)의 義(의))로 통 할 이유가 있음을 首肯(수긍)할 것이며, 그렇지 아니하고라도 桓(환)의 古 音(고음)에 ㅗ ㅏ 複母音(복모음)뿐 아니라, ㅏ의 單母音(단모음)인 形(형) 도 있음과 시방 國語(국어)의 嶺南音(영남음)이 ㅗ ㅏ 를 많이 ㅏ로 發音 (발음)함으로써 較量(교량)하면 「한울」의 音韻的(음운적) 關係(관계)에 悟入(오입)함이 있을 것이다. 桓國(환국)을 어째서 桓因(환인) 그것이라 하 랴(여기 대하여는 年前(연전) 獄中(옥중)에서 草(초)한 <朝鮮建國傳說(조선 건국전설)의 硏究(연구)>중에 細論(세론)한 것이 있으므로, 여기는 略擧(약 거)에 止(지)하기로 한다.)

이미 氏族(씨족)의 本原(본원)을 天(천)에 系(계)하매, 이 天人相應(천인 상응)으 標記(표기)는 저절로 여러 방면에 드러나게 될 것이니, 예로부터 자갸의 民族(민족)을 「한」(譯者(역자)로 韓(한) ‧ 馯(한) ‧ 韓(한) ‧ 鴈 (안))이라 일컬음이 이미 그것이요, 支那人(지나인)의 東邦人(동방인)을 부 르는 이름인 「夷(이)」가 실상 天人(천인)을 의미함도 그 有力(유력)한 一 證左(일증좌)라 할 것이다. 天人(천인)의 國(국)은 天國(천국)일 밖에 없고 天國(천국)의 王(왕)은 天王(천왕)일 밖에 없을지니, 무릇 天孫傳說(천손전 설)이 行(행)하는 地(지)에서는 主權者(주권자)를 天(천)의 子(자)로써 일 컬음이 通例(통례)임은 진실로 이러한 出處(출처)를 가진 것이요, 天子(천 자)가 主權的(주권적) 意義(의의)를 强(강)하게 된 뒤에 天君(천군) ‧ 天帝 (천제)等語(등어)가 생기에 된 것이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이 系統(계통)의 文化(문화)及(급)人民(인민)의 中(중) 에서는 「임금」이라는 抽象的(추상적) 名號(명호) 가 생기기 전에는, 天子 (천자) 혹 神人(신인)(곧 靈格者(영격자))이라는 具象的(구상적)稱謂(칭위) 만이 그 主權者(주권자)의 記號(기호)가 되었음은 듯하니, 가령 말하면,고 구려에서는 加(가)(내지 古雛大加(고추대가))가 생기지 아니하여서는「天帝 者(천제자)」가 곧 그 王號(왕호)요, 신라에서는 麻立干(마립간) ‧ 尼師今 (이사금)이 생기기 전에 次次雄(차차웅) ‧ 居瑟邯(거슬감)이 그 王號(왕호) 이었음의 類(류)가 그것이다.

<漢書(한서)>(卷九四上(권구사상) 匈奴傳(흉노전)에「單于姓攣鞮氏(선우성 련제씨), 基國稱之曰撑犁孤途單于(기국칭지왈탱리고도선우), 匈奴謂天爲撑 犁(흉노위천위탱리), 謂子爲孤途(위자위고도), 單于者廣大之貌也(선우자광 대지모야), 言基象天單于然也(언기상천선우연야)」라 한 것이 있고, 일본의 古語에 王位를 「天(천) つ日嗣(일사)」, 軍長(군장)의 子(자)를 「日嗣(일 사)の御子(어자)」란 것이 있고, 또 大月氏(대월씨)의 古碑(고비)에 그 軍 長(군장)을 提婆弗怛羅(제바불달라)(Deva putra, 梵語(범어)로 天子(천자) 의 義(의))라 한 것이 있고, 蒙古(몽고)의 古記(고기)에도 Tegrain KÖbÖgÜn (天(천)의 子(자)란 義(의))라 名(명)이 나오고, 또 南北朝時代(남북조시 대)의 北人(북인)의 國(국)인 夏(하) ‧ 燕(연)등에서도 王號(왕호)를 많이 天王(천왕)이라 하고, 그것이 많이 氏族(씨족)의 本原(본원)에 關係(관계) 를 가지기도 하였으니, 君主(군주)를 天子(천자)로써 하는 觀念(관념)이 北 方(북방) 民族(민족)의 間(간)애서도 어떻게 由來(유래)가 오래고 分布(분 포)가 넓음을 짐작할 것이다.

震域(진역)에 관한 다른 古傳(고전)을 들츠어 보아도 後漢(후한) 王充(왕 충)의<論評(논평)>(卷二(권이) 吉驗傳(길험전)의 東明傳(동명전)에「從天而 下(종천이하)」니 「天子(천자)」니 하는 語(어)를 적었고, 廣開土大王(광 개토대왕)의 碑文(비문)에「天帝之子(천제지자)」의 句(구)가 보이고, <三 國史記(삼국사기)> 東明王(동명왕)本紀(본기)에「天帝遣太子降遊扶餘王故都 (천제견태자강유부여왕고도)」니 「從天而下(종천이하)」니 「我是天帝之子 (아시천제지자)」니 하는 句(구)가 가 있고 <三國史記(삼국사기)> 東明王本 紀(동명왕본기)에 「自言天帝子(자언천제자)」니 「我是天帝之子(아시천제 지자)」의 句(구)가 있고 <三國遺事(삼국유사)> 新羅始祖(신라시조) 赫居世 王傳(혁거세왕전)에「詩人爭夏曰(시인쟁하왈), 今天子已降(금천자이강)」云 云(운운)의 語(어)가 있고, 同(동) 駕洛國記(가락국기)에 留天干(유천간)‧ 五天干(오천간)등 의 이름과 한가지로 「皇天所以命俄者(황천소이명아자), 御是處(어시처), 惟新家邦(유신가방), 爲君后(위군후), 爲玆故降矣(위자고 강의)」니 「紫繩自天垂而着地(자승자천수이착지)」云云(운운)이니 하는 文 (문)이 있으니, 이는 다 君主(군주)의 稱謂(칭위)(혹 別名(별명) 혹 觀念 (관념))의 中(중)에 天子(천자) ‧ 天帝子(천제자)의 義(의)를 含存(함존)한 證迹(증적)이요, 이 天子(천자)(天帝子(천제자)) 가 곧<舊三國史(구삼국 사)> 東明王本紀(동명왕본기)의 「朝即廳事(조즉청사), 暮即升天(모즉승 천), 世謂之天王郞(세위지천왕랑)」이라 한 天王郞(천왕랑)이요, 東明說話 (동명설화)의 天王郞(천왕랑)과 壇君古傳(단군고전)의「桓雄天王(환웅천 왕)」이 그 說話的(설화적) 地位(지위)를 한가지로 함도 살피기 어려운 일 이 나니다.

支那(지나)에도 古(고)로 부터 天子(천자)의 稱(칭)이 있고, 또 그것이 얼 마만큼 氏族(씨족)關係(관계)로부터 온 듯도 하지마는 北方(북방)民族(민 족)처럼 顯著(현저)하지 아니하고, 東北系(동북계) 人民(인민)의 天子(천 자) ‧ 君王(군왕)의 觀念(관념) 又(우) 事實(사실)은 차라리 특수한 人文起 源(인문기원) 信念(신념)에 의한 自存的(자존적)의 物(물)로 봄이 可(가)하 니, 壇君古傳(단군고전)에 나오는 天王(천왕)도 要(요)하건대 이러한 一名 謂(일명위) 不外(불외)함이 의심 없거늘, 이것을 帝釋(제석)의 外裝(외장) 인 四天王(사천왕)의 그것에 比擬(비의)하려 함은 퍽으나 억지라 할 밖에 없다. 많이 天帝(천제)라 한 것이 壇君古傳(단군고전)의 中(중)에는 帝(제) 가 王(왕)으로 變(변)한 것쯤 뿐일 것이다. 天王(천왕)의 本質(본질)을 밝 힐 적극적 설명은 뒤에 미룬다.

壇君(단군)이 佛家(불가)으 做出物(주출물)이란 說(설)을 確立(확립)한 者 (자)는 白鳥(백조)씨요, 氏(씨)의 이 論(론)을 확립한 依據(의거)는 특히 一字(일자)에 있는 듯하니, 그것이<與地勝覽(여지승람)의 妙香山記文(묘향 산기문)과 <觀佛三昧海警(관불삼매해경)>의 牛頭旃檀記文(우두전단기문)을 比對(비대)할 적에, 前者(전자)의 香木(향목)은 後者(후자)의 檀木(단목)에 當(당)한다 하고, 妙香(묘향)의 名(명)부터가 佛典(불전) 中(중)으로서 出 來(출래)하였음을 擬想(의상)한 것임은 前文(전문)에 引錄(인록)함과 같 다.(本論(본론) 第五(제오) 參照(참조)).

그러나 壇君(단군)의 壇子(단자)가 본디 檀(단)이라 할지라도 檀(단)이 반 드시 檀木(단목)의 檀(단)일 까닭과, 더구나 栴檀(전단)의 檀(단)에 附合 (부합)될 까닭이 없으며, 또 香木(향목)이 檀木(단목)에 限(한)할 것도 아 니며, 또 栴檀(전단)이 白鳥(백조)씨의 說(설)한 것처럼 佛菩薩(불보살)에 가장 因緣(인연) 잇는 名木(명목)도 아니며, 더욱 帝釋桓因(제석환인)에게 는 이렇다 할 聯想(연상)의 舟梁(주량)을 가지지 아니한 것이다.

대개 朝鮮(조선)에서 香木(향목)(향나무)으로 稱(칭)하는 者(자)는 大(대) 한 松杉科(송삼과)에 속하는 圓栢(원백)이요, 小(소)한 것은 杜松(두송)의 類(류)를 가리킴이 通例(통례)이며 檀木(단목)(박달나무)이라는 者(자)는 樺木科(화목과)에 속하는 一木(일목)으로 본디부터 香木(향목)하고 風馬牛 (풍마우)인 者(자)니, 香山(향산)의 香木(향목)이 당초에 檀木(단목) 그것 으로 더불어 干涉(간섭)이 없는 것이매, 이제 香木(향목)을 구태여 檀木(단 목)이라 하고 栴檀(전단)이라 하는 것이 이미 無謂(무위)에 속하는 것이요, 摩羅耶山(마라야산) 云云(운운)으 擬說(의설)은 장황할수록 그대로 수고스 러운 鑿虛(착허)일 따름이다.

또 古記(고기)에는 壇君(단군)의 聖地(성지)를 太伯山(태백산)이라 하였을 뿐이요, 妙香(묘향)이 그니라 함은 一然(일연)의 添注(첨주)임이, 저 桓國 (환국)의 下(하)에 帝釋(제석)을 注(주)함과 同一(동일)한 것이어늘, 짐짓 太伯(태백)의 古(고)를 놓고 문득 妙香(묘향)의 名(명)을 붙들어서, 妙香 (묘향)과 檀木(단목)과 神樹思想(신수사상)과의 不能相離(불능상리)할 契機 계기 를 지음은 진실로 ( ) 생떼에 가까운 일이라 할 것이니, 그로 인하여 古 記(고기)의 本義(본의)야 언제 일찍 一毫(일호)의 損減(손감)을 입을 것이 랴. 이렇게 저네들의 論證(논증)이 매양 己見(기견)을 세우기에 바빠서 原 義(원의)를 돌아봄이 不足(부족)함에 坐(좌)함은 퍽 애달픈 일이 하나이다. 이미 檀(단)이 帝釋(제석)에도 닿은 것 아니요. 佛典的(불전적) 根據(근 거)랄 것도 薄弱(박약)하다 할진대, 壇君古傳(단군고전)의 眼目(안목)이라 고도 할 이 檀(단)은 과연 어떠한 詸體(미체)일까? 虛空(허공)을 摸索(모 색)하는 눈을 一轉(일전)하여 古記(고기)의 文字(문자)를 實檢(실검)할 때 에 意外(의외)의 事實(사실)이 意外(의외)의 光明(광명)을 짝지어 나타나음 을 보나니, 무엇이냐 하면 壇君傳(단군전)의 아직 동안 根本的(근본적) 徵 憑(징빙)인<三國遺事(삼국유사)>의 文(문)에 壇君(단군)의 壇(단)이 木偏 (목편)의 檀木(단목)이 아니라 분명히 土偏(토편)의 壇(단)으로 적혀 있음 이다. 高麗(고려) 末葉(말엽)으로부터 壇君(단군)의 壇(단)이 문득 檀(단) 으로 변하여, 李朝(이조) 이후에는 오직 檀君(단군)으로만 文字(문자)에 오 르고, 또 이러한 門籍(문적)만이 傳(전)하게 된지라, 壇君(단군)의 壇(단) 이 드디어 檀(단)으로 確定(확정)하는 勢力(세력)을 이루어, 이것이 눈에 익고, 이렇게 마음에 박이고, 더구나 檀字(단자)에 因(인)하는 「東方初無 君長(동방초무군장), 有信人(유신인), 降于太白山檀木下(강우태백산단목 하), 國入爲君(국입위군)…… 是爲壇君(시위단군)」이라는 第二次的(제이차 적) 傳說(전설)을 構成(구성)한 이후로는, 構字(단자)가 마침내 요지부동의 地位(지위)를 얻었지마는, <三國遺事(삼국유사)>의 時代的(시대적) 權威(권 위)를 무시할 이유가 생기기 전까지는 土偏(토편)이 그 原形(원형)임을 認 (인)치 아니치 못할 것이요, 설사 調和的(조화적) 態度(태도)로써 臨(임)할 지라도 壇君(단군)의 字形(자형)에 二種(이종)이 있고, 그중에서도 壇(단) 이 最古(최고)함을 認(인)할 것이다. 어떠한 이유와 經路(경로)로써 土偏 (토편)의 檀(단)이 木偏(목편)의 檀(단)으로 轉(전)하였는지, 또 壇(단)은 무슨 意味(의미) 語(어)인지가 다 꽤 흥미 있는 문제겠지마는, 이제 姑捨 (고사)하고 다만 <遺事(유사)>의 壇字(단자) 관한 視野(시야)가 한번 새로 이 一大展開(일대개)를 이루는곳에 시방까지의 天錯萬雜(천착만잡) 이 문득 一椎(일추)에 擊碎(격쇄)되는 感(감)을 누루지 못할 것이다. 檀子(단자)에 單一性(단일성) 없는 것 하나만으로도 (또, 檀木(단목) 云云(운운)이 더 後 代幻滅(후대환멸)치 아니치 못함이 快(쾌)하다 할 것이다.

우리가 처음 壇君(단군) 硏究(연구)를 손대기는 실로 三(삼)〇여 년 以前 (이전)의 事(사)에 속하고, 최초에는 羅珈(나가) ‧ 白鳥(백조)씨 등의 抹削 論(말삭론)에 대한 懷疑(회의)로서 출발하니, 저네의 佛典(불전) 依憑(의 빙)이 妄造(망조)라 하는 論(론)을 折破(절파)함에는 그 一要婁(일요루)인 檀子(단자)의 原狀(원상)을 摘發(적발)함이 喫緊事(끽긴사)이었건마는, 先 人(선인)의 見(견)에 가려서 <遺事(유사)>의 壇字(단자)가 土偏(토편)임을 一(일)○년 이상 모르게 지내었음은 시방까지 깊이 愚麁(우추)함을 自憐(자 련)하는 日事(일사)이다. 우리가 壇字(단자) 復舊論(복구론)을 唱(창)한 지 이제 一(일)○여 년 이요, 近來(근래)읭 文字(문자)에는 퍽 많이 實現(실 현)도 되었거니와, <三國遺事(삼국유사)>의 文(문)을 몇 十百(십백) 次(차) 나 摩挲(마사)하면서 어째 이 점을 놓쳤던지는 거짓말 같은 괴상한 일이요, 저네들이 또한 그러하엿음에서 讀書心理(독서심리) ‧ 記憶心理(기억심리)의 一奇例(일기례)를 얻을 듯하다. 뒤에 注意(주의)하니까 <東史綱目(동사강 목)>에 이미 여기 대한 注意(주의)가 있고, 더욱 申旅庵(신여암)의 <疆界志 (강계지)> (卷之六(권지육)) 三朝鮮條夏(삼조선조하) 같은데는 勇敢(용감) 스러운 壇字(단자) 復舊(복구)의 論(론)이 있는 것을 尋常(심상)히 看過(간 과)하였다.

壇君(단군)의 壇(단)을 後代的(후대적)의 檀(단)으로만 알고 考察(고찰)한 오랫동안의 多少(다소)所得(소득)이 그대로 壇君論(단군론)의 一部(일부)를 짓게 되기는 하였지마는, 檀子(단자) 만 붙들고 답답해하던 過程(과정)을돌 아볼 적마다 덤벙이는 罰(벌)의 過重(과중)함을 탄식치 하니치 못함이 있 다. 여하간 壇君(단군)의 壇(단)이 본디 (또 반드시) 檀(단)이 아닌 다음에 는, 다시 字義的(자의적) 閑葛藤(한갈등)을 袈疊(가첩)할 要(요)가 없고 莫 妄想底(막망상저) 一喝(일갈)이 壇君性月(단군성월)을 朗照(낭조)케 하기 에 足(족)할 줄 알거니와, 아직도 구태여 檀子(단자) 를 固執(고집)하여 가 지고 云云(운운)의 說(설)을 옮겨서, 壇君(단군)으 後世的(후세적) 또 佛典 的(불전적) 突現(돌현)인 憑據(빙거)를 삼는 者(자)가 끊이지 아니함에는 놀라다 못하여 자빠질 것이 있다.

이렇게 觀來(관래)하건대, 저네의 壇君(단군) 僧造論(승조론)의 理由(이 유)가 意外(의외)에 薄弱(박약)한 것을 가리지 못할 것이 분명하거니와, 그 以外(이외)의 名句(명구)를 가지고 佛敎的(불교적) 關係(관계)를 말하고자 할 이가 다시 나지 말할 법도 없을 것이다. 이를테면 天符印(천부인)의 符 印(부인)을 神符(신부)의 符(부)와 印契(인계)의 印(인)에 牽合(견합)하고, 神壇(신단)의 壇(단)을 漫茶羅(만다라)의 壇(단)과 呪願(주원)의 呪(주)를 陀羅尼(타라니)의 呪(주)에 投託(투탁)시켜서 捲土重來(권토중래)로 一陣 (일진)을 다시 배포할 모르고, 이렇게 佛敎(불교) 중에서도 특히 密敎的(밀 교적) 名相(명상)에 近似(근사)를 가짐이 高麗時代(고려시대), 특히 <三國 遺事(삼국유사)> 撰述(찬술) 時代(시대) 전후의 密佛敎(밀불교) 盛行(성행) 과 아울러서, 壇君說話(단군설화)의 密敎的(밀교적) 構成(구성)을 論(논)할 者(자)가 出來(출래)할지도 모를것이다. 그러나 미리 말하여는 두는 것이어 니와, 누구든지 이러한 擬想(의상)을 하기전에, 모름지기 먼저 符瑞觀念(부 서관념)과 標印(표인)의 尊像(존상)과 呪力(주력)의 信仰(신앙)이 原始時代 (원시시대)及(급) 民族(민족)의 사이에 어떻게 古遠(고원)하고 普遍(보편) 한 事實(사실)임을 보고, 또 壇君古傳(단군고전) 중의 이것들이 어떻게 분 명한 東方的(동방적) 特色(특색)을 가졌음을 注意(주의)하라 할 것이다.기 어이 佛敎(불교)에다가 붙들어매려 하기 전에, 獨立(독립)한 說明(설명)의 可能(가능) 如何(여하)를 살피고, 또 獨立(독립)으로 解釋(해석)하는 편이 좀더 順便(순편)하고 온당할 것에 깨달음이 있으라 하고 싶다.

떼장이 論者(논자) 또 혹 말하기를 名句(명구)야말로 반드시 佛敎的(불교 적)이라고 할 理由(이유)가 확실치 아니하거니와, 이는 차라리 作者(작자) 의 深妙(심묘)한 用意(용의)에 말미암는 것이요, 그 結構(결구)의 意匠(의 장)과 內容(내용)의 骨筋(골근)이(아니 그「힌트」와 暗示(암시)가) 불교에 서 왔을 듯하다 할는지 모를 것이다. 그러나 成心(성심)을 버리고 實體(실 체)를 대할 때에, 어느 모를 어떻게 뜯어 보든지 그것이 도리어 너무 比佛 敎的(비불교적)임을 앙탈할 수 없음이 딱할 지경이다.

첫째 壇君古傳(단군고전)에서는 佛敎的(불교적)으로 一貫(일관)한 命題(명 제)도 볼 수 없고, 따라서 佛敎的(불교적)의 統一(통일)한 說明(설명)을 더 해 볼 수 없음이다. 桓國(환국)을 帝釋(제석)이라고 볼지라도, 說話(설화) 전체를 通貫(통관)한 本迹論的(본적론적) 意趣(의취)가 드러나지 아니하니, 이 說話(설화)의 佛敎的(불교적) 成立(성립)의 必要(필요)와 動機(동기)를 말할수 없고, 또 佛敎的(불교적)으로 結構(결구)를 한다 하면 神話(신화) 傳說上(전설상)으로 世界(세계)의 最大(최대) 源泉(원천)이 되다시피 하는 竺典(축전)을 臺本(대본)으로 하는 바에, 어떠한 편으로든지 좀 더 實話的 (실화적) 技巧(기교)를 부릴 수 있을 것이어늘, 壇君傳(단군전) 같은 것은 미상불 단순하고 素撲(소박)한 변변치 못한 一話相(일화상)을 면치 못하는 것이니, 이르테면 帝釋神話(제석신화)에서 脫化(탈화)해 오기로 말하여도 國土(국토) 莊嚴(장엄)이나 事實(사실) 按排(안배)에 神摸影借(신모영차)도 쌔고쌘 好材料(호재료)가 많은데, 하나도 이런 分子(분자)가 섞이지 아니하 고, 빼빼 말라 바삭바삭하는 桓國(환국)이니 帝釋(제석)이니 하는 一名字 (일명자)만을 借來(차래)함으로 滿足(만족)하였다 함은 얼른 말이 어울리지 아니하는 일이며, 또 國民說話(국민설화) 특히 建國神話(건국신화) 같은 것 을 남을 依倣(의방)하여 做出(주출)한다 하면 대개 同種說話(동종설화)로 注意(주의)가 먼저 가고, 또 國內(국내)의 類話(유화)에도 아무쪼록 扞格 (한격) 작을 것을 取(취)하여 民衆(민중)의 信認(신인)을 얻기에 편토록 하 려 할 것이어늘, 竺典(축전) 중에 있는 허다한 民族起原說話(민족기원설화) ─ 더욱 震域(진역)의 다른 建國神話(건국신화)하고 아주 親近性(친근성)을 가진 幾多(기다)의「日種(일종)」說話(설화) ‧ )卵生說話(난생설화)에 모조 리 一瞥(일별)도 주지 아니하고, 神話的(신화적)으로는 꺼덕치기 짝이 없는 시방의 壇君古傳(단군고전) 같은 것을 짐짓 만들었다 함은 상상하기도 해석 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이것저것을 다 不計(불계)하고 덮어놓고 論者(논자)의 壇君(단군) 出處(출 처) 佛敎說(불교설)을 용납 하여 보려 하자. 그러나 說話(설화)의 갈피를 잡을 수 없음과 그 依支點(의지점)의 무엇임을 알 수 없음은, 이렇게 하려 는 때의 첫째 만나는 障碍(장애)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帝釋(제석) 中心 (중심)의 說話(설화)라 하자니, 桓(환)과 天王(천왕)이란 名字(명자)밖에는 帝釋的(제석적) 分子(분자)가 다시 없고, 또 摩羅耶山(마라야산)과 그 栴檀 (전단)이 잘 附着(부착)되지도 아니하며, 栴檀(전단) 中心(중심)의 生成(생 성)으로 보자니 佛典(불전)의 中(중)에도 許多般(허다반)한 寶樹(보수) ‧ 般 王(수왕)의 中(중)에 하필 檀木(단목)을 取用(취용)하엿는지가 설명되지 아 니하며, 더구나 壇君(단군)의「단」이 檀(단)이 아니고 壇(단)일 바에는 이 것을 萬茶羅(만다라)의 壇(단)이라 하자면 壇君傳(단군전) 全體(전체)의 密 敎的(밀교적) 說明(설명)을 成立(성립)시켜야 할 것이니, 만일 이것은 여기 서, 그것은 저기서, 줄무더기로 떼어 왔다 하여, 說話(설화)成立(성립)의 主軸(주축)과 또 모든 分子(분자)의 連絡(연락) 關係(관계)를 밝힐 수 없을 진대, 그만큼 論者(논자)의 말이 모호해진다. 할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데, 여기 대한 說明(설명)이 돋우고 뛰어도 白鳥(백조)씨의 以上(이상)에 出(출)할 수 없거늘, 白鳥(백조)씨의 說明(설명)의 至離滅裂(지리멸렬)이 저와 같음은, 滿足(만족)히 그 所說(소설)의 確實(확실)한 依據(의거)(統一 的(통일적) 基礎(기초))를 얻기 어려움을 환하게 나타낸 것이라 할 것이다. 字句(자구)의 符合(부합)과 거기 因(인)한 漫然(만연)한 附會(부회)야 하 특 佛典(불전)에서만 可能(가능)할 것이랴. 佛典(불전)보다도 道敎(도교)의 文字(문자)에 더욱 密邇(밀이)도하다 할 것이요, 또 漢文(한문)과 같이 雜 多(잡다)한 音形(음형)과 한가지 풍부한 含蓄(함축)을 가진 文字(문자) 又 (우) 門籍國(문적국)으 故事成語(고사성어)에는 어디 무엇에 그 牽强(견강) 할 수가 있을 것이며, 하자고 하면 埃及(애급) ‧ 猶太(유태) ‧ 希臘(희랍) ‧ 羅馬(라마)의 古傳說(고전설)에서도 近似(근사)한 名義(명의)를 찾아 내기 어렵지 않을 것이니, 이래서야 學的(학적) 信賴(신뢰)를 여기 가질 수 없음 이 무론이다. 이렇게 佛(불) 같고 佛(불)도 아니요, 仙(선) 같고 仙(선)도 아니요, 아무것하고 비슷하되 아무것도 아님에서, 마땋히 虛形(허형) 假名 (가명)을 버리고 바로 그 核心(핵심)을 건드려야 할 것임을 깨달을 것이다. 文字(문자)에 求(구)할 것 아니라 事實(사실)에 徵(징)할 것임을 알 것이 다. 壇君(단군)의 古傳(고전)이 佛典(불전)에 관계를 가졌다 가졌다 하면 서, 그것이 마침내 散異名別(산이명별)한 字句上(자구상) 類似(유사)에 그 치고, 내용상 連絡(연락)과 및 그 心理的(심리적) 說明(설명)을 缺(결)함은 아무것보다 잘 名句(명구)나 字形(자형)의 背面(배면)(近處(근처)에) 그 本 體(본체)가 되어, 加衣(가의)를 입고, 本幹(본간)이 되어 接枝(접지)를 받 은 一物(일물)이 存在(존재)함을 가리다 못해 나타냄이니, 이것이 딴 것 아 니라(설사 壇君傳(단군전) 중의 名句(명구)를 佛典中(불전중) 借來(차래) 로 認(인)하고하도), 하고 많은 世界(세계) 中(중)에 帝釋(제석)을 끌어내 고, 하고 많은 位階(위계) 中(중)에 天王(천왕)을 빌어 오고, 하고 많은 名 物中(명물중)에 檀木(단목) 을 데려오게 된 그 本地(본지) 實質(실질)일것이다. 自來(자래)의 地質(지 질)이 있는 자에 佛典(불전)에 대하여 字音(자음)이나 語義(어의)의 類同 (유동)은 있을 수 있거니와, 說話(설화) 全體(전체)의 名實(명실) 兩面(양 면), 首尾(수미) 一貫(일관)의 一致(일치)야 도저히 기대하기 어려움밖에 없는 것이아니라, 둘이 다 꼼짝 없이 桓字(환자) ‧ 檀子(단자)를 써야 할 所 以(소이)가 있었기 때문이니, 만일 壇君古傳(단군고전)에 기어이 佛敎的(불 교적) 影響(영향)을 認(인)하겠다 하면, 그럴수가 佛敎(불교)에 依據(의거) 한 改換(개환)이 신통 변변치 못함에서 도리어 그 古傳的(고전적) 確實性 (확실성)을 더함이 있다고 볼 것이다.

十三(십삼), 僧做論者(승주론자)의 錯論(착론) 範疇(범주)[편집]

朝鮮(조선) 古代(고대)의 文字(문자)에 佛敎(불교)의 영향이 있음은 사실 이지마는, 그것은 日本(일본) 古代(고대)의 史籍(사적)에 百濟的(백제적) 影響(영향)과 한가지 道敎的(도교적) 臭味(취미)를 많이 섞였음이, 당시 文 史(문사)의 權(권)이 道敎(도교) 崇尙(숭상)하던 百濟人(백제인)手(수)에 存(존)하였었기 때문인 것처럼, 朝鮮(조선)上世(상세)의 文字道(문자도)가 佛敎(불교) 中心(중심)으로 있었으미과, 또 同一(동일)한 文字(문자)라도 他處(타처)의 것은 얼른 散亡(산망)하였으되 山門(산문)의 것은 비교적 壽 傳(수전)이 된 까닭일 따름이다.

진실로 불교는그 汎神的(범신적) 敎義(교의)와 普門的(보문적) 同化力(동 화력)으로써, 그 所到處(소도처)마다 또 所接物(소접물)마다 圓融無礙(원융 무애)한 料理(요리) 變通(변통)을 행하기도 하거니와, 故意(고의)가 아니고 도 國故(국고)의 口碑(구비)를 文籍化(문적화)하는 際(제)에는 結構(결구) 와 字句(자구)가 저절로 慣識習用(관식습습용)하는 자갸네의 藥籠中(약롱 중)에서 나올 밖에 없으니, 朝鮮(조선)의 古記(고기)란 것이 약간은 佛敎臭 (불교취)를 含帶(함대)함도 이 까닭이요, 그렇다 해서 얼른 하면 後人(후 인)의 心證(심증)을 害(해)하기 쉽게 생김도 이 까닭일 뿐이다.

만일 字形(자형) 혹 文面(문면)의 佛敎的(불교적)임으로써 該(해)事物(사 물) 存立力(존립력) 喪失(상실)의 이유를 삼는다 하며, 伽倻(가야)의 字 (자)로 因(인)하여 伽羅(가라)도 幻攻(환공)될 것이요, 琉(유)(瑠(류))璃 (리)의 名(명)으로 因(인)하여 類利(유리)도 抹削(말삭)될 것이요, 기타 比 佛敎的(비불교적) 記錄例(기록례)가 確立(확립)하기전의 人物事件(인물사 건)은 대개 이러한 운명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미상불 前出(전출)한 白鳥 (백조)씨의 說(설)에는<高句麗本紀(고구려본기)> 第一(제일) 東明聖王(동명 성왕)의 事跡(사적) 中(중)에 나오는 阿蘭弗(아란불)과 迦葉原(가섭원)등은 取(취)하여 東明傳(동명전)을 一括(일괄)하여 佛說(불설)로써 脫化(탈화)에 혼 一證(일증)을 삼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阿蘭弗(아란불)만 하여도 字面 (자면)은 혹시 阿蘭藥(아란약)의 阿蘭(아란)에 통할지 모르되, 一(일), 은 人名(인명)이요 一(일)은 處名(처명)인 것이 이미 相反(상반)하여 마찬가지 做出(주출)하기로 마하면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沸流(비류)를 저지를 리 없 을 것이요, 또 그런 줄 알고 쓴 것이라 하면, 그는 무론 阿蘭(아란)이란 音 (음)을 놓지 못할 必然的(필연적)理由(이유)가 있음에 말미암음이라 할지 니, 우리는 이것을 그대로 뒤집으면 저네 壇君(단군) 僧做說(승주설)의 思 考(사고) 範疇(범주)를 깨뜨리는 一助(일조)가 될 것을 생각한다.

대개 阿蘭弗(아란불)이란 것은 北扶餘王(북부여왕) 解夫婁(해부루)의 國相 (국상)으로, 天絳(천강)을 받아서 王(왕)을 效(효)하여 國道(국도)를 迦葉 原(가섭원)으로 옮기고, 故土(고토)를 天帝子(천제자)解慕漱(해모수)에게 王與(왕여)케 한 說話的(설화적) 人格(인격)이니, 國相(국상)이란 것은 漢 語的(한어적) 名稱(명칭)이어니와, 要(요)하건대 一種(일종)의「매직」으로 써 神話(신화)을 받아서 國家(국가)의 大事(대사)를 對導(대도)하는 積分者 (적분자)임은 그 文意(문의)에서 환하게 알 바요, 古代(고대)의 民俗的(민 속적) 事實(사실)로써 이러더한 일이 常例(상례)로 행하였을 것도 살피기 어렵지 아니한 거처럼, 阿蘭弗(아란불)은 要(요)하건데 당시의 一師巫(일사 무)에 不外(부외)한 것이요, 그것도 어느 個人(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실 상은 그 職位(직위)의 汎稱(범칭)임이 다른 說話的(설화적) 名謂(명위)에서 와 같은 것이다. 이것을 類例(유례)에 徵(징)하건대, 事實(사실)로는 北扶 餘(북부여)의「阿蘭(아란)」은 正(정)히 <新唐書(신당서)>高句麗傳(고구려 전)의 遼東城(요동성) 朱蒙詞(주몽사)의「巫(무)」에 比(비)할 것이요, 名 號(명호)의「阿蘭(아란)」은 <三國史記(삼국사기)> 祭祀志(제사지)의 始祖 廟(시조묘) 奉齋者(봉재자)인 「阿老(아로)」에 同(동)한 것이니, 新羅(신 라)의 「閼英(알영)」(阿利英(아리영)), 百濟(백제)의 「於羅(어라)」(於陸 (어륙)) 등과 한가지로, 阿蘭弗(아란불)은 즉 是祭政一致期(시제정일치기) 의 一台輔(일태보)로, 무론 事實的(사실적) 根據(근거)의 확고한 것이다.

이것을 그는 다만 阿蘭(아란)의 字形(자형)과 또 阿蘭(아란) ‧ 迦葉(가섭)演 說(연설)하기에 恰好(흡호)한 一文憑(일문빙)있음을 幸(행)흐오 하여, 아울 러 그 事實的(사실적) 方面(방면)까지를 抹去(말거)하려 한 것이니, 시방의 白鳥(백조)씨는 아마 이렇듯 沒分揀(몰분간)한 짓을 아니 하겠지마는, 이러 한 天賦(천부)한 考察(고찰)이 不幸(불행)히 一種(일종)의 學風(학풍)을 짓 고, 더욱 不幸(불행)히 그것이 편벽되이 壇君(단군)의 考察上(고찰상)에 怪 祟(괴수)를 지어서 애꿋은 壇君(단군)이 애매한 매도 많이 맞게 돔이 딱하 다 하겠다.

朝鮮(조선) 古代(고대) 文字(문자)가 佛典(불전)의 영향을 받음은 阿老(아 로)의 類語(유어)를 阿蘭(아란)으로 變(변)함 만큼 確實(확실)한 일이로되, 그러나 變(변)함에는 변하는 實體(실체)를 가짐이 대개 阿蘭(아란)에는 阿 老(아로) 類語(유어)의 밑절미가 있음처럼 的實(적실)하며, 또 古說話(고설 화) 全體(전체)의 中(중)에는 간혹 佛典(불전)으로서 借來(차래)하여 竄入 (찬입)하는 九丹(구단)이 없지 아니하되, 그것도 또한 그것을 招邀(초요) ‧ 誘致(유치)할 만한 本素(본소)가 있어서 되는 것으로, 대개 固有體(고유체) 와 遊離分子(유리분자)으 界限(계한)이 분명히 나타나는 것들임을 注意(주 의)치 아니하면, 아무리 攷說妙解(고설묘해)를 試(시)하여도 그대로 曲辯難 言(곡변난언)에 墜(추)할 따름이다. 조선의 古傳(고전)을 箔(박)하기라도 하겠다 하면서, 불교 이전에도 民俗的(민속적)事實(사실)이 있었을 일조차 염량하지 못한다 하면 이는 太孟浪(태맹랑)이라 할 것이요, 염량 못하는 것 아니로되 짐짓 모른는 체한다 하면 이는 더구나 不成說(불성설)이라 할 것 이다.

十四(십사),王險城(왕험성) 檢覈(검핵)[편집]

壇君(단군)의 古傳(고전)이 實質上(실질상)에서 佛典(불전)하고 아무 關 涉(관섭)이 없음은 밝힐수록 밝은 일이다. 설사 字句上(자구상)의 冒襲(모 습)이 있음을 假認(가인)할지라도 文面(문면)때문에 話質(화질)이 損傷(손 상)을 받을 이유는 毫末(호말)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一然(일연)과<三國遺 事(삼국유사)>와 그 引用(인용)한 古記(고기)를 흔드는 것이, 그대로 壇君 (단군)을 부수는 所以(소이)로 알아서 이러니저러니 胡亂(호란)의 言(언)을 弄(농)하고, 甚(심)한즉 親道(친도)하였거나 그렇지 않아도 物的(물적) 證 據(증거)하도 분명한 것을 붙잡은 듯이 그 成立(성립) 年代(연대)까지를 말 함은, 진실로 엄청난 暴勇(폭용)이 아니랄 수 없다. 壇君(단군)의 傳(전)이 아무리 剝落(박락) 殘缺(잔결)이 甚(심)하고 變裒(변부) 舞曲(무곡)이 重疊 (중첩)하였을망정, 원체 고갱이가 있는바에 그렇게 터무니없이 幻滅(환멸) 될 까닭이 없으매, 이네들의 어방없는 猛杖(맹장)도 가끔 가다가 탁 거치고 콱 막히는 것 있음을 깨닫지 않지 못하였다. 先入之見(선입지견)으로 壇君 (단군)은 僧徒(승도)의 筆端(필단)에서 産出(산출)되었거니 해 놓고도, 바 이 그렇기만 한 것을 같지도 아니한 듯한 片鱗(편린)이 눈 앞에 어른거림을 숫제 看過(간과)해보릴 수는 없었다. 自己(자기)의 믿는 바를 反逆(반역)하 는 이런 部分(부분)이 밉기는 미워도, 이미 있는 것을 아주 모르는 체할 수 는 없었다. 얼른 眞理(진리)의 良順(양순)한 종도 되지 못하고, 現實(현실) 로서 오는 脅迫(협박)을 시원히 消却(소각)하지도 못할 때에, 抹削論者(말 삭론자)의 마음에는 根與境(근여경)의 矛盾(모순)에 因(인)하는 一種(일종) 으이 煩悶(번민)이 없을 수 없었다. 이것이 그네들의 中(중)에 없다고 손을 홰홰 내어젓는 일변으로 壇君(단군)으로는 없는 것이지마는 樹神(수신) ‧ 山 神(산신) 혹 城神(성신)같은 것으로는 무슨 근거가 있다고 그물의 一面(일 면)을 터 놓지 않지 못하게 한 所以(소이)이다. 이렇게 依違遷就(의위천취) 하는 것이 사나이답지 못하다면 사나이 답지 못하기도 하지마는, 당초에 壇 君(단군)을 抹削(말삭)하자 함이 말답지도 일답지도 아니함에 比(비)하면, 오히려 그 純撲(순박)한 心情(심정)을 알아줄 것이 있다 할 것이다. 그러나 此岸(안)이래서 妄執(망집)인 것이 아니라 魁岸(괴안) 中流(중류)도 다 마 찬가지이니, 壇君(단군)의 正體(정체)를 알려는 이는 모름지기 舊迅一番(구 신일번) 으로 다시 이 棘叢(극총)에서 脫出(탈출)하기를 생각할 것이다. 앙탈하는 이의 一迷執(일미집)은 壇君(단군)의 名(명)이란 王儉(왕검)에 대한 曲解(곡해)로서 생겼다. 今西(금서)씨 같은 이는 <三國遺事(삼국유 사)>의 壇君傳(단군전)이 그 下(하)의「箕子朝鮮(기자조선)」이란 題目(제 목)과 같지 아니하고「王儉朝鮮(왕검조선)」이라고 題(제)한 것에 의심을 품어, 壇君(단군)이란 것이 대개 高句麗時代(고구려시대)에 平壤(평양)의 古地名(고지명)으로 알던 것이, 후에 原義(원의)를 잊어버림으로 하여 麗初 (여초)쯤서부터 平壤(평양)의 開拓者(개척자)인 이의 仙人(선인) 實名(실 명)으로 傳(전)하고, 中葉(중엽)에 가서 一戰化(일전화)를 遂(수)하여 朝鮮 元朝(조선원조)인壇君王儉(단군왕검)을 지었음을 斷(단)하여다(前文(전문) 「七(칠)參照(참조)」. 이것도 要(요)하건데, 壇君(단군) 을 抹削(말삭)학 기 위하여는 이러한 상상을 할 수 있다는 一例論(일예론)에 그친다 할 것이 니, 王儉(왕검)을 釁端(흔단)잡아서 否認(부인)한 그 論(론)을 우리는 도로 王儉(왕검)을 方牌(방패)로 하여 肯定(긍정)의 길을 일어주게 됨이 재이있 다.

王儉(왕검)의 地理的(지리적) 考證(고증)은 저절로 論外(논외)에 속하니, 우리는 史漢(사한)의 文(문)으로써 그것이 衛滿(위만)의 都(도)요, 이것은 箕氏(기씨)의 舊(구)를 襲(습)한 것이요, 최근의 연구로써 역시 시방의 平 壤(평양)(但(단) 大同江(대동강) 南岸(남안))임을 알면 그만이다. 여기서의 문제는 본디부터 王儉(왕검)과 王險(왕험)과 및 여기 관려되는 壇君(단군) 의 名字(명자) 如何(여하)에 있는 것이다. 王儉(왕검)의 名(명)은 무론<史 記(사기) 朝鮮傳(조선전)의 衛滿(위만)이 「超役屬眞番調鮮蠻夷及故燕齊亡 命者王之(초역속진번조선만이급고연제망명자왕지) 都王儉(도왕검)」이란 文 으로 始見(시견)을 삼으니, 그 명칭은 무론 箕氏王朝(기씨왕조)이래의 것으 로, 반드시 震域(진역) 最古(최고) 都邑(도읍)의 一(일) 이요, 그 명칭의 起原(기원)이 또한 古(고)로 부터 承傳(승전)된 것일니지, 衛滿(위만)을 말 이암아 改(개) 或(혹) 設定(설정)된 證迹(증적)이 있지 아니하기까지는 固 有(고유)한 이름으로 봄이 진실로 마땅하다. <漢書(한서)> 地理志(지리지) 의 四郡(사군) 屬縣(속현)의 地名(지명)에 就(취)하여 驗(험)한건대, 그 字 面(자면)으 雅(아)를 尙(상)함과 아무쪼록 二字(이자)로 縮約(축약)한 形迹 (형적)은 있으되, 大體(대체)는 本土(본토)의 原音(원음)을 그냥 比對(비 대)한 것인 듯하니, 이는 東方(동방)의 다른 部族(부족) 及(급) 基(기) 住 民(주민)에 곤한 驛名(역명)고 또 他(타) 外邦(외방)의 地名(지명) 記載(기 재) 通例(통례)엥 準(준)하여 대개 의심 없을 일이다.

이 王險(왕험)도 대개는 이 通例(통례)에 의하는 土語(토어)의 驛音(역음) 일지니,「王公設險(왕공설험)」云云(운운)으로부터 來(래)한 平壤(평양)읭 別名(별명)이라 함은 실로 堅强(견강)의 說(설)임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혹시 같은 字音(자음)중에서 특히 王險(왕험) 兩字(양자)를 取(취)한 이유 가 여기 있었을 는지는 모르지마는, 王險(왕험)이란(혹 이 비슷한 무슨 音 (음))명칭 그것이 易文(역문)에서 나왔다 봄은 또한 本末(본말) 主客(주객) 을 顚倒(전도)한 妄想(망상)일 따름이다. 대체 무슨 한 名稱(명칭)과 그 字 面(자면)이 漢文(한문)내지 佛典的(불전적) 原據(원거)를 가졌음직한 때에, 그 來歷(내력)과 裏許(이허)함을 審察(심찰)치 아니하고, 문득 이것이 그리 로서 나온 것이라고 推定(추정)하는 동시에, 어째 그것이 이의 稱謂(칭위) 가 되었는지, 그 原由(원유)를 버리고 묻지 아니함이 시방까지 古典(고전) 批評家(비평가)으 通弊(통폐)요, 허다한 閑葛藤(한갈등)이 많이 이 一端(일 단)에서 생겼났으니, 우리더러 말하라하면 王險(왕험) 云云(운운)의 說(설) 도 무론 그중의 一件(일건)이다.

王險(왕험)이 이미 故都(고도) 이러진대 都邑(도읍)인 표시가 그 音義(음 의)의 中(중)에 들었을 듯도 하다. 震域(진역) 古邦(고방)의 都邑(도읍)의 名號(명호)를 考(고)하건대, 위선 箕子(기자) 南天(남천)의 都邑(도읍)은 金馬(금마)라 하고 新羅(신라)의 故都(고도)는 金城(금성)이라 하고, 百濟 (백제)의 初都(초도)는 慰禮城(위례성) ‧ 漢城(한성)이나, 南遷(남천) 후에 는 熊川(웅천)(公州(공주))이라하고, 高句麗(고구려)에는 그 故都(고도) 「國內(국내)」稱(칭)이 또한 여기 가까우니, 이로써「금」(혹 곰)ㅇ 都邑 (도읍)(혹 首都(수도))稱謂(칭위)되는 무슨 因緣(인연)이 있지 아니한가를 생각하겠는데,<梁書(양서)>에 百濟(백제)에서는「呼所治城曰固麻(호소치성 왈고마)」라고 하고, 新羅에서는 「呼所曰建牟羅(호소왈건모라)」라 하였음 으로써 그것이 果然함을 알며, 漢城(한성)의 古號(고호)에 關(관)(閣(각)) 彌(미)의 稱(칭)이 있었음직함과, 國傳(국전)으 金馬(금마)가 漢籍(한적)으 健馬(건마)일 듯함과 漢(한)나라 關彌(관미)가 다 古語(고어)에 大(대)를 意味(의미)함과 健牟羅(건모라)가 大邑(대읍)의 義(의)로 首都(수도)으 稱 (칭)에 合(합)함 등은 우리의 이 推定(추정)을 퍽 有力(유력)하게 支持(지 지)해주는 感(감)이 있다.

대개「々」는 國語(국어)에 古(고)로부터 最高級(최고급)의 意(의)를 表 (표)하는 語(어)니,「大(대)」를 主義(주의)로 하고, 堅固(견고)(굳) ‧ 正直 (정직)(고드) ‧ 元首(원수)(고수)등의 從義(종의)를 가지며, 電磁(전자)하여 는 「々」「々」의 形容語(형용어)로부터 「」(乃至(내지) )의 名詞形 (명사형)을 取(취)하여 大者(대자)내지 神聖者(신성자)의 의미를 가지게 되 었다. 시방 金(금) ‧ 建(건) 等子(등자)는 이「」의 譯對字(역대자)로 古 代(고대) 震方人(진방인)의 都邑(도읍)의 稱(칭)으로 例用(예용)하는 語 (어) 又(우) 字(자)이니, <梁書(양서)> 所云(소운)의 百濟(백제)「固麻(고 마)」는 저 新羅古傳(신라고전)의「金(금)」과 한가지로 다이 古義(고의)를 傳(전)함일 것이다. 이제 王險(왕험)은 漢籍(한적)의 上(상)에는 險(험)으 로 傳(전)하고 國乘(국승)에는 儉(검)으로 見(견)하여 어는 것이 더 正(정) 한 것을 말하기는 어려우나, 이미 寫音(사음)의 符(부)요 險(험) ‧ 儉(검)이 音(음)이 古(고)에는 서로 통하여 字(자)를 混用(혼용)하기도 한것인 즉 아 무 것으로라도 「」의 譯對(역대)하 하기에 불편이 없으니, 이로써 王險 (왕험)(儉(검))의 險(험)(儉(검))이 곧 都邑(도읍) 表示(표시)의 古語(고 어)인「」임을 想像(상상)할 수 있다. 震域古代(진역고대)의 地方區劃的 (지방구획적) 名稱(명칭)을 査(사)하건대, 대개 地的(지적) 狀態(상태) 혹 等級(등급)의 表示(표시)는, 基準的(기준적) 日語(일어)가 있어가지고 그 上(상)에 特定的(특정적) 表示(표시)가 添加(첨가)됨이 常例(상례)니, 「불」(弗(불) ‧ 伐(벌) ‧ 扶里(부리) ‧ 내지 扶餘(부리))이란 基準語(기준 어)가 있어가지고 무슨 「불」이란 것이 여기저기 있기를 小(소)하게는 新 羅(신라)으 弗(불)과 百濟(백제)의 扶里(부리)와 같이 하고, 大(대)하게는 夫餘(부여)로 化(화)하여 東(동) ‧ 南(남) ‧ 北(북) ‧ 卒本(졸본) 등의 扶餘 (부여)가 있었으며,「갈」(加羅(가라)내지 伽倻(가야))이란 基準語(기준어) 가 있어가지고 (大韓(대한))이란 基準語(기준어)가 있어가지고 馬(마) ‧ 辰 (진) ‧ 弁(변) 등의 區別(구별)을 붙들었음들이 다 이 類例(유례)이다.

이 밖에 고구려의 忽(홀)이니, 백제의 只(지)(혹 支(지))니, 신라의 啄 (탁)이니, 하는 것이 다 이 類(류)에 속하는 것이다. 이 모든 말은 要(요) 하건데 어느 한 지방이 어느 정도의 발달을 遂(수)하였다는 ㅍ시가 되는 것 으로, 처음에는 漫然(만연)히 다만 한 「夫餘(부여)」혹 한 伽倻(가야) 등 이라고만 일컬어졌었지마는 뒤에 허다한 夫餘(부여)나 加羅(가라)니 하는 種目(종목)이 서게 되었으며, 그러나 便宜上(편의상)으로 單(단)히 夫餘(부 여)나 加羅(가라)가 성립디매 비로소 各異(각이)한 標別(표별)을 붙일 필요 가 生(생)하여 무슨 (부여) ‧ 加羅(가라) 등으로 부르는 버릇은 依然(의연) 히 남아 있어서(특히 그 根本部(근본부)랄 것에 그러하여서), 夫餘(부여)라 고만 하여도 北夫餘(북부여)의 稱(칭)이 되고, 駕洛(가락)이라고만 하여도 金官加羅(금관가라)를 부르는 말이 되었다. 대저 이 痛懲(통징)(類例(유 례))을 앎은 王險(왕험)의 險(험)(儉(검))이 대개 金城(금성) ‧ 金馬(금마) 등의 金(금)과 한가지로 大都(대도) ‧ 上京(상경)의 意(의)를 가짐으로 볼 것일진대 , 王(왕)이란 冠語(관어)를 필요로 하고 固着(고착)하게 되었는지 를 알게 되는 端緖(단서)가 오로지 이 通則(통칙)에서 나온다.

우리가 다른 여러가지의 考察(고찰)로써 아는 바를 據(거)하건대, 上世(상 세)의 震域(진역)은 진실로 部落的(부락적) 小國家(소국가)의 集合(집합)이 었지마는, 粟散各主(속산각주)하여 全然(전연)히 不相干(불상간)한 者(자) 이었더냐 하면, 그런 것이 아니라 一種(일종)의 通俗關係(통속관계)가 있었 으니, 그것은 곧 宗敎的(종교적) 信仰的(신앙적)의 階級(계급)(hierarchy) 이었다. 前出(전출)한 五加羅(오가라)가 金官加羅(금관가라)로 宗主(종주) 를 삼음이나, 諸韓(제한)이 馬韓(마한)으로 宗主(종주)를 삼음이나, 그것은 다 金官加羅(금관가라)와 馬韓(마한)을 他者(타자)가 hierarch한 關係(관 계)이었다. 그러나, 가령 金官(금관)은 加羅(가라)에서 宗主(종주) 노릇을 하되, 韓(한) ‧ 濊(예) ‧ 貊(맥) ‧ 餘(여)를 全統(전통)하는 至上(지상) 宗主 (종주)가 있어 最高(최고)의 권위를 발휘하였었다. 이 狀態(상태)와 關係 (관계)는 여기 詳說(상설)할 겨를도 없고, 또 後文(후문)에 다시 약간 論及 (논급)할 기회도 있겠으니까 아직 생략하거니와,「朝鮮(조선)」곧 箕氏(기 씨)의 王朝(왕조)는 줄잡아도 半島(반도) 北方(북방)에 있는 그 總攬者(총 람자)이었다. 그런데, 上世(상세)에 있는 首都(수도)란 것은 대개 어느 한 地域(지역)의 안에 서 있는 信仰的(신앙적) 中心地(중심지)를 짓는 것이니, 필시 金城(금성)의「金(금)」등에는 이러한 神城地(신성지)란 의미를 포함 하였을 것이며 이것은, 古語(고어)에 神(신)을 「검」이라 함에도 較量(교 량)할 것이다.

이로써 推險(추험)하건대 朝鮮(조선)이 震域(진역) 全體(전체)으 敎權的 (교권적) 中心(중심)인 동시에, 그 首都(수도)는 저절로「金(금)」중의 「金(금)」일 밖에 없으리니, 이러한 最上神都(최상신도)에는 무론 거기 相 應(상응)한 旗號(기호)가 없지 못할 것이다. 이에 王儉(왕검)이란 稱(칭)이 생겼음이리니,「王(왕)」이란 것은 무론 대개 至上(지상) 最高(최고)를 의 미한 무슨 말의 對字(대자)일 것이다. 대저 全震域(전진역)으로 보면 「金 (금)」으로써 號(호)한 城邑(성읍)이 여럿이로되, 각각 一區劃(일구획)씩으 로보면 一區(일구) 一(일) 「金(금)」에 限(한)하여 다른 「弗(불)」(夫里 (부리))이나 「忽(홀)」과 같지 아니함음「金(금)」이 最高(최고)으 區劃 (구획)인 者(자)로 一處(일처)에 兩個(양개)부터를 許容(허용)할 性質(성 질)의 것이 아님에 말미암는 것이어니와, 더욱 最上(최상)의 「金(금)」으 로 말하면 全域(전역)을 통하여 唯一(유일)絶對(절대)일 밖에 없으니, 이는 唯一(유일)한 王儉(왕검)이 「朝鮮(조선)」(곧 平壤(평양))에 存在(존재)한 所以(소이)이며, 아울러 王儉(왕검)의 王(왕)이 어떠한 關係(관계)로 생겼 났음을 짐작케 하는 一端緖(일단서)이다.

그러면 王儉(왕검)의 王(왕)은 어떠한 의미를 가진 것인가? 金富軾(김부 식)은 <三國史記(삼국사기)>에 「或云王之都王險(혹운왕지도왕험)」이란 一 說(일설)을 적어, 대개 險(험)에 都(도)의 義(의)를 認(인)하는 동시에, 王 (왕)을 君王(군왕)의 王(왕)으로 看做(간주)하는 一例(일례)를 지었고, 그 후의 「王公設險(왕공설험)」의 文(문)을 云云(운운)하는 者(자)는 막비 이 類(류)에 속하는 者(자)들이어니와, 우리는 다른 모든 古記上(고기상)의 名 句(명구)를 대개 土語(토어)의 音譯(음역)으로 認(인)하는 것처럼, 또 險字 (험자)를 이미 그렇게 解釋(해석)한 것처럼, 王字(왕자)가 또한 이런 종류 의 日語(일어)일 것으로, 무론 王字(왕자)를 比對(비대)하게 된 무슨 音 (음)일 것을 생각한다.

震域(진역)의 古語(고어)에 무릇 尊重(존중) ‧ 主要(주요)한 것을 「엄」 「얼」로써 일컬었으니 母(모)를「엄이」라 하고, 손가락에서도 가장 큰 것 을 「엄」이라고 하고 形容語(형용어)에도 超特(초특)한 것을「엄청」이라 함 등은 前者(전자)의 數例(수례)요, 옛날에 君主(군주)를「얼」이라하고 물건에도 碩大(석대)한 것은 「얼」이라 함 등은 後者(후자)의 數例(수례) 이다. 조선어에 尊丈(존장)을「얼은」이라 하고, 上昇(상승)을「올으」라 하고, 顔部(안부)를「얼」이라 하고 核心(핵심)을 「알」이라 하고, 日本語 (일본어)에 偉大(위대)를 エラ라 하고 麁荒(추황)을 アラ라 하고, 靈驗(영 험)을 アラ(タカ)라 하고, 宮殿(궁전)을 アラカ라 하고, 主人(주인)을 アル ジ라 하고, 主重(주중)을 オモ라 하고, 重視(중시)를 オモン이라 하고, 顔 面(안면)을 オモ라 하고 母(모)를 또한 オモ라 하고, 天(천)을 アマ혹 ア メ라 하고, 海(해)를 또한 アマ라 하고 滿洲語(만주어)에 山(산)을 「아 린」이라고 하고, 魄(백)을「오른」이라 하고, 氣息(기식)을 「알건」이라 하고 蒙古語(몽고어)에 親(친)을 「우룩」이라 하고, 脊(척)을 「아루」라 하고, 尊貴(존귀)를 「얼긴」이라하고, 島(도)를「아랄」이라 하고, 氣息 (기식)을 「아미」라 하고, 唐古特語(당고특어)에 上(상)을「얄」이라 하 고, 回語(회어)에 大(대)를 阿里(아리)라 하고, 마갸르語(어)에 主夫(주부) ‧ 家長(가장)을 「얼」이라 하고, 오스티악 語(어)에 主君(주군) ‧ 貴人(귀 인)을 「울눌」이라하고,「핀」語(어)에 夫(부) ‧ 武士(무사)를 「우로호」 「우루」「울호」「우로」라 함 등은 다 國語(국어)「얼」과 「엄」의 同根 語(동근어) ‧ 支生語(지생어) ‧ 類語(유어)로 볼 것이다. 王險(왕험)의 王 (왕)이 대개 이 「얼」(又(우)「엄」)의 對字(대자)가 아닐까?

詩(시)하여 이것을 古代(고대)의 典則地的(전직지적) 名(명)의 上(상)에 摸索(모색)하건대, 첫째 國都(국도)의 襟帶(금대) 혹 一國(일국)의 大動脈 (대동맥)이요, 일변 原始腎仰(원시신앙)의 一對象(일대상)을 지었던 江河 (강하)의 의례히「알」혹 「엄」의 名號(명호)를 帶(대)한 것이 눈에 뜨인 다. 朝鮮(조선)의 列水(열수), 夫餘(부여)으 奄利水(엄리수), 高句麗(고구 려)의 鹽亂水(염난수) ‧ 鴨綠江(압록강), 百濟(백제)의 郁利水(욱리수) 新羅 (신라)의 閼川(알천) 등은 다 域內(역내) 諸水(제수)으 原長(원장)이란 의 미로 붙인 이름일 것이요, 滿洲(만주)의 斡木알목하), 蒙古(몽고)의 斡難河 (알난하)도 다 이 說話的(설화적) 脈絡(맥락)을 引(인)함일 것이다. 山(산) 에도 一方(일방)의 標幟(표치)되는 者(자)는 또한「엄」「얼」의 號(호)를 帶(대)하니, 그 가장 현저한 例(예)로 擧(거)할 者(자)는 시방도 俗語(속 어)에「어머니」山(산)으로 見稱(견칭)하는 智異山(지리산)이요, 기타 國中 (국중)의 母后(모후) ‧ 母岳(모악) ‧蛾嵋(아미) 등으로 稱(칭)하는 自見母主 (자견모주), 智異山(지리산)의 天主性母(천주성모), 松岳山(송악산)의 東神 聖母(동신성모), 國祖(국조)說話(설화) 중의 山神(산신)등이 女神(여신)으 로 母(모)의 稱(칭)을 帶(대)함은, 무론 그 山(산)을 「엄」으로 視(시)하 는 證迹(증적)이 되는 女神(여신)되는 것이며, 저 白頭山(백두산)에도 古 (고)에 또한 聖母傳說(성모전설)이 있었음을 듯함은 그 白衣觀音(백의관음) 의 信仰(신앙)이 智異山(지리산)의 「白衣女(백의녀)」神(신)과 한가지 聖 母(성모)으 餘韻(여운)일 것임으로써 짐작되는 바이다.

이렇게 常套的(상투적)地位(지위)를 占(점)하는 山女水(산여수)가 의례히 「엄」(혹「얼」)의 名(명)을 함은 억지가 아니하 할지니, 王險(왕험)은 대 개 이러한 내용을 가진 명칭으로 推斷(추단)된다. 이에 관하여 智異山(지리 산) 中(중)의 一邑(일읍)으로이 神山(신산)의 齋邑(재읍)같은 성질을 가진 雲峯(운봉)이 新羅時(신라시)에 母山縣(모산현)으로서 景德(경덕)이란 一名 (일명)과 한가지 阿英城(아영성) ‧ 阿莫城(아막성) 곧「얼」城(성) 「엄」城 (성)의 別號(별호)를 가져서, 城邑(성읍)에도「얼」「엄」이 名用(명용)되 는 實證(실증)이 있음과, 一方(일방)의 神山(신산)인 紺岳山(감악산)을 가 진 積城(적성)이 古(고)에 阿未城(아미성)이라 일컬었음과 또 震系(진계)의 古民邦(고민방)이 國勢(국세)의 發展(발전)을 隨(수)하여 京(경)이란 大邑 (대읍)을 置(치)하되, 여러 京(경)의 中(중)에서 上頭(상두)인 者(자)를 「上京(상경)」으로 稱(칭)함이 通例(통례)어늘, 이는 오랜 古風(고풍)을 大同(대동)으로 承襲(승습)하여 오는 것인 듯함의 旁證(방증)이 있음 등은 王險(왕험)이「엄검」(阿莫金(아막금)) 곧 上京(상경)의 義(의)임을 倡言 창언 하는 ( ) 우리의 퍽 큰 기댐이 되는 바이다. 이밖에도 域內(역내)에 王山 (왕산)이라고 부르는 것이 여럿인 중에 특히 大邱(대구)의 王山(왕산)은 山 中(산중)에 高壇壝(고단유)인 듯한 石臼(석구)가 있어 靈畤(영치)의 感(감) 을 生(생)케 함으로써 王對(왕대)「엄」의 一暗示(일암시)를 지음이 있으며 더욱 慶州(경주)에서 豆豆里(두두리)라는 俗信(속신)의 祀封地(사봉지)를 王家藪(왕가수)라 함은 有力(유력)한 「얼그」의 一用例(일용례)를 얻음으 로 볼것이다.

다시 눈을 둘러서 音韻(음운)의 通則(통칙)을 밟힐 때에 王(왕)을「엄」혹 「얼」「언」의 對字(대자)로 볼 妥當率(타당률)이 크게 늚을 안다. 대저 支那人(지나인)이 外國(외국)의 語音(어음)을 寫繹(사역)할 때에는 반드시 嚴密(엄밀)히 原音(원음)을 倣(방)하는 것만 아니라, 그 主觀的(주관적) 要 求(요구)에 依(의)하는 多少(다소)의 變改(변개)가 行(행)함이 많으니, 혹 은 雅化(아화)를 因(인)하며, 또 많이 音義(음의) 雙表(쌍표)의 必要(필요) 를 因(인)하여서도 그러하며, 이밖에 近音相通(근음상통)의 音韻的(음운적) 理由(이유)에서 나오는 것도 적지 아니하다. 그중에도 ㅏ與(여)ㅓ와, ㅗ與 (여)ㅓ와, ㅡ與(여)ㅜ등의 母音相通(모음상통)과, ㄴ與(여)ㅁ 등의 子音相 通(자음상통)은 그것이 發音器官(발음기관)의 사소한 移變(이변)에 不過(불 과)하는 것임과, 또 音韻變幻(음운변환)의 격심한 支那(지나)인 만큼 퍽 흔 한 現像(현상)이었다. 이제 國故(국고)에 보인 古音(고음)數例(수례)를 王 者(왕자) 關係(관계)편으로 들어 보건대, <三國志(삼국지)>에 辰韓(진한)으 方言(방언)을 적되「名國爲邦(명국위방)」이란 邦(방)은 伐(벌)의 對字(대 자)이니, 이는 ㄹ 과 ᅌ 의 轉變(전변)이요, <鷄林類事(계림유사)>에 高麗 (고려)의 國語(국어)를 적되,「鞋曰盛(혜왈성)」이라 한 盛(성)은「신」의 對字(대자)이니,이는 ㄴ 과 ᅌ의 轉派(전파)며 <三國史記(삼국사기)> 地理 志(지리지) 所載(소재)의 地名(지명)중에「述川郡(술천군) 一云省知買(일운 성지매)」는 述與省(술여성)의 通用(통용)이요,「上忽(상홀) 一云(일운)車 忽(차홀)」은 上與(상여)「술」의 通用(통용)이요, 「楊口那一云要은忽次 (양구나일운요은홀차)」와「楊岳今安岳郡(양악금안악군)」은 다 ᅌ 與(여) ㄴ의 互通(호통)이니, 이렇게 ㄹㅁ 與(여)ㄴᅌ 의 相混(상혼)은, 理論(이 론)은 어찌 갔든지 實例(실례)의 퍽 많은 音韻現像(음운현상)으로, 支那(지 나) 古今(고금) 載籍(재적)의 中(중)에도 허다한 證本(증본)을 붙잡을 수 있는 것이다. 이로써 말하건대 그렇지 않아도 上京(상경)을 意味(의미)하는 「엄검」의 譯者(역자)도 王險(왕험)의 字(자)를 用(용)함은 조금도 抑勒 (억륵)히 아니니, 우리의 이 見解(견해)가 과히 妄推(망추)만이 아닐 것이 며 다만 많은 , 字類(자류)에서 이 兩字(양자)를 집어쓰기는, 아닌게 아니라 易(역)의「王公設險(왕공설험)」에 意味(의미)의 連關(연관)을 保(보)케 하 려 하는 微意(미의)에서 나왔을 것이니, 이것도 그대로 王險上京說(왕험상 경설)이 一支(일지)持点(지점)으로 돌라 쓸 수 있음이 무론이다.

以上(이상)에서 우리는,

(1) 平壤(평양)은 震域(진역)最古(최고)의 都邑(도읍)으로, 반드시 오랜 名號(명호)를 가졌을 것.

(2) 平壤(평양)은 當時(당시) 最高(최고)의 都邑(도읍)으로, 그 名稱(명 칭)에는 대개 이 意味(의미)가 包含(포함)되었을 것(더욱 宗敎的(종교적)理 由(이유)에 依(의)하여).

(3) 그것이 漢文化(한문화)輸入(수입) 以前(이전)의 事實(사실)이겠음으로 써, 그 名稱(명칭)은 固有(고유)한 民俗(민속)에 의한 本土語(본토어)로 되 었을 것.

(4) 王險(왕험)(儉(검))을「」(혹「」)으로 볼 때에는 그 條件(조 건)이 이에 合(합)할 뿐 아니라, 아울러 民俗的(민속적)類例(유례)와 音韻 上(음운상) 通則(통칙)에 相當(상당)한 根據(근거)가 있는것.

(5) 따라서 王儉(왕검)을 <易(역)>의 文句(문구)로서 脫化(탈화)한 줄로만 봄은 無謂(무위)한 일이요, 설사 字面(자면)이 그렇다 할지라도 그는 本土 (본토)의 古稱(고칭)을 寫出(사출)하기를 이 文字(문자)로써 하였음에 不外 (불외)할 것.

(6) 古地名(고지명)의 漢譯例(한역례)를 보건대, 可能(가능)한 데까지는 (音(음)을 약간 枉曲(왕곡)하여 가면서라도) 寫音(사음)과 한가지 表義(표 의)를 兼(겸)하여 하였으니, 이제 王險(왕험)이란 字(자)로써 譯對(역대)한 그것이 이미, 거기가 본디 王國(왕국)의 城邑(성읍)(혹 日域(일역)의 上都 (상도))이란 것쯤 되는 意味(의미)를 가졌음을 反映(반영)한 것을 보암직한 것.

(7) 통틀어 말하면, 王險(왕험)은 地名的(지명적)으로 오랜 來歷(내력)과 분명한 근거를 가진 것임을 약간 考察(고찰)한 것이다.

더욱, 王險名不古說(왕험명불고설)의 大支柱(대지주)를 짓는 <易(역)>의 「王公設險(왕공설험)」一段(일단)으로 말하면 여기 다시,

(1)「王公設險以守基國(왕공설험이수기국)」의 文(문)이 일부러 짓는 上 (상)으로 말하면, 邊邑(변읍)이면 모르되 王都(왕도)의 名(명)으로는 본디 부터 適切(적절)한 것 아님.

(2) 支那(지나)의 地名(지명)에는 險者(험자)를 쓴 일이 거의 없고, 쓰는 것은 그 形勝(형승)의 喩語(유어)에나 限(한)함.

(3) <易(역)>이 본디 天則(천즉)으로써 人事(인사)를 準(준)하여그 吉凶 (길흉) ‧ 易險(역험)의 端(단)을 보이려 한 文字(문자)어니와, 險(험)이란 字(자)는 실상 凶字(흉자)의 別用(별용) 같아서, 가갸네가 <易(역)>에 의하 여 이름을 짓는다 하면 구태여 이런 字句(자구)를 銓選(전선)하였을 리 없 을 것.

(4) <易(역)>에는 저절로 險字(험자)를 많이 썼고, 또 王險(왕험) 兩字 (양자)가 一處(일처)에 並會(병회)한 것만 하여도 師(사)의 彖傳(단전)에 「師衆也(사중야), 貞正也(정정야), 能以衆正(능이중정), 可以王矣(가이왕 의), 剛中而應(강중이응), 行險而願(행험이원),以此獨天下(이차독천하), 吉 (길), 又何咎矣(우하구의)」라 한 것처럼, 어느 의미로는 坎掛(감괘)의 彖 文(단문) 以上의 適句(적구)를 들수 있고, 따라서 白鳥(백조)씨 이상의 切 論(절론)을 세울 수 있을는지 모르겠지마는, 失體(실체)를 비워 놓고 幻影 (환영)을 좇음은, 巧(교)하나 拙(졸)하나 한가지 戱論(희론)에 墮(타)하는 것임을 말하여, 客(객)짓 하는 이에게 苦言(고언)으로 주겠다.

우리의 이 古說(고설)이 많이는 推論(추론)에 止(지)하여 아직 學的(학적) 斷案(단안)을 만들기에 不備(불비)와 不實(부실)이 있음은 사실이요, 더 硏 究(연구)를 내켜보면 우리 스스로 어ㄸ한 新視野(신시야)와 新論點(신논점) 을 발견할는지도 모르겠지마는,

(1) 마찬가지 獨斷的(독단적) 假定(가정)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見解(견해) 가 더 많은 實際性(실제성)을 含在(함재)한 것.

(2) 저네들의 孤立的(고립적)論據(논거)와 豫斷的(예단적) 見法(견법)이 어떻게 위룽뒤룽한 발바닥에 버티어 있는 것.

(3) 따라서, 저네들의 所論(소론)이 설사 약간의 巧妙(교묘)를 가졌을지라 도, 決(결)코 그 論理的(논리적) 鬼面(귀면)에 威嚇(위혁)되는 일 없이 眞 相(진상)으로위 直性(직성)으로써, 自立的(자립적)探究(탐구)에 힘쓸 필요 와 아울러 興味(흥미)의 있음을 이것으로써, 약간 嶺會(영회)케 하였다고 할진대, 우리는 아직 이것만으로도 만족하려 한다.

地名(지명)인 王險(왕험)은 그렇게 볼 수 있다고 치고, 그래 人名(인명)인 王儉(왕검)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한 王儉(왕검)으로써 <三國史記(삼국사 기)>는 가로되 仙人(선인)의 이름이라 하고, <三國遺事(삼국유사)>는 가로 되 國祖(국조)의 이름이요 壇君(단군)의 이름이라 하니, 두 말에 어느 것이 옳을까? 혹시 仙人(선인)이 그대로 朝鮮(조선)의 國祖(국조)이어서 실상으 니 두 말이 각각 一面(일면)씩 만을 傳(전)하는 것으로, 어느 말이고 다 옳 은 것이 아닐까 ? 그렇다고 하면 仙人(선인)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仙 人(선인)과 壇君(단군)은 어떠한 관계를 가지는 것일까? 이에 壇君(단군) 問題(문제)는 비로소 微妙(미묘)한 消息(소식)을 건드리게 되지마는, 詳細 (상세)는 뒤에 미루고 여기는 王險城(왕험성) 神(신)인 與否(여부)를 辨白 (변백)하기에 필요한 정도 만큼 약간 그 眞相(진상)을 들추어보기로 하자.

便宜上(편의상) 먼저 仙人(선인)이란 것을 생각해 보건대, 거기는 무릇 세 方面(방면)의 視野(시야)가 있음을 본다. 첫째는 宗敎的(종교적)의 그것 이니, 이것이 다시 道敎的(도교적)과 佛敎的(불교적)의 둘로 나누인다. 佛 敎(불교)가 東來(동래)하기 전에 이미 仙思想(선사상)이 東洋(동양)에 있었 음은 秦漢(진한)의 際(제)에 이미 仙(선) 追求(추구)의 事實(사실)이 文籍 (문적)에 載在(재재)함으로써 알 것이요, 또 그것이 이미 多少(다소)의 宗 敎的(종교적)色彩(색채)를 띠었음은, 이미 方士(방사)라는 특수한 祭司職 (제사직)과 꽤 복잡한 祭儀(제의)와 聖殿(성전)을 갖추어 가졌음으로써 짐 작할 것이다.

後代(후대)의 道敎(도교)가 仙(선)인 淵源(연원)을 말하매 老山(노산)을 끌어내었다가, 황제를 말하였다가, 다시 廣成子(성자)니 누구니 ㅁ하는 純 (순) 說話的(설화적) 人格(인격)을 만들어서, 稀微(희미)한 事實(사실)과 한자지 渺漠(묘막)한 年代(연대)를 말함에 이르렀음은, 要(요)하건대 그 起 原(기원)의 오래였음을 나타내려 함에 不外(불외)함일 것이다.

대저 道敎(도교)와 仙思想(선사상)은 어떠한 契機(계기)로써 抱合(포합)된 것이며, 어떠한 관계를 가진 것일지 퍽 거부살스러운 문제일시 분명하거니 와, 보는 방법를 따라서는 仙思想(선사상)의 宗敎的(종교적) 延長(연장)이 곧 道敎(도교)라고도 할 것이며 그렇지 않고 仙(선)과 道敎(도교)는 원래 다른 來歷(내력)을 가진 各別(각별)의 一物(일물)로, 偶然(우연)으 機會(기 회)혹 必然(필연)한 事勢(사세)에 끌려서 連結(연결)合一(합일)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支那(지나)에 있는 仙(선)의 오랜 信念(신념)을 상고 하건대, 仙字(선자)를 본디 僊(선)으로 作(작)하여 升高(승고)의 人(인)을 意味(의미)하니, 後漢時代(후한시대)의 文籍(문적)을 據(거)하면 그는 長生 (장생)(혹 老而(노이))不死(불사)하는 者(자)요 山上(산상)에 居住(거주)하 는 者(자)라 하였다. 僊字(선자)의 一形(일형)에 仚(선)과 仙(선) 등이 있 음은 곧 그가 山岳(산악)으로 더불어 떠날수 없는 관계를 가진 표적으로 볼 것이요, 또 그 音(음)이 遷(천)과 通(통)함도 일변 僊(선)이 超現實的(초현 실적) 高擧(고거)를 나타내었음으로 볼 것이다. <莊子(장자)> 外篇(외편)의 天地(천지)에 「成人鶉居而彀食(성인순거이구식), 鳥行而無彰(조행이무창), 天下有道則與物皆昌(천하유도즉여물개창), 天下無道則修德(천하무도즉수 덕), 就閒千歲厭世(취한천세염세), 去而上僊(거이상선), 承彼白雲(승피백 운), 至於帝鄕(지어제향), 三患莫至(삼환막지), 身上無殃(신상무앙)」이라 하고, <列子(열자)> 上(상)의 黃帝(황제)에 「列故射山(열고사산), 在海河 州中(재해하주중), 山上有神人焉(산상유신인언), 吸風飮露(흡풍음로), 不食 五穀(불식오곡), 心如淵泉(심여연천), 刑如處女(형여처녀), 不偎不愛(불외 불애), 仙聖爲之臣(선성위지신), 不畏不怒(불외불노), 愿慤爲之使(원각위지 사)……」라 함등으로써, 僊(선)이란 觀念(관념)이 대략 春秋時代(춘추시 대)에 있었을 相見(상견)할 것이니와, 이것이 哲學者(철학자)으 想像(상상) 과 詩人(시인)의 詠嘆(영탄) 등, 槪思的(개사적) 感興(감흥)에서 升進(승 진)하여 生活相(생활상) 一欲求(일욕구)와 宗敎的(종교적) 一對像(일대상) 을 짓기는, 대개 戰國(전국)의 末傾(말경)에 燕祭地方(연제지방)으로서 비 롯하여 秦漢(진한)에 際(제)에 王者(왕자)와 威稜下(위릉하)에 불끈 그 사 회적 세력을 增長(증장)한 것이었다. 다시 이것이 內陸方面(내륙방면)으로 侵漸(침점)하면서, 일변 老莊思想(노장사상)에 論理的(논리적) 根據(근거) 를 得(득)하고, 일변으로는 古來(고래)의 種種(종종) 民間(민간) 信仰(신 앙)을 抱合(포합)하여 宗敎的(종교적) 基礎(기초)가 점점 囦廣(연광)을 더 하다가, 마침내 後漢(후한) 末境(말경)에 이르러 張道陵(장도릉) 輩(배)의 손을 빌어 一宗門(일종문)의 成立(성립)을 보게 된 것이 이른바 道敎(도교) 란 것이다.

우리의 본디 추상적 存在(존재)를 짓는 觀念的(관념적)基礎(기초)에 선 物 質的(물질적)의 것이요, 老莊思想(노장사상)은 본디 抽象的(추상적)存在(존 재)를 짓는 觀念的(관념적)의 것으로 根據(근거)에는 섞지 못할 一物(일물) 이 있다 하겠건마는, 그것이 超現實的(초현실적) 一現實(일현실)을 欣求 (흔구)한다는 一契機(일계기)가 있음으로써, 어느 틈엔지 接近(접근) ‧ 結 着(결착)이 行(행)하여 道敎(도교)라는 鎔爐中(용로중)에서 渾然(혼연)히 一體(일체)를 지었다 할 것이다. 그런데 이 仙觀念(선관념)과 老莊思想(노 장사상)의 差別相(차별상)은 南北(남북) 兩系(양계)의 地方的(지방적)特色 (특색)을 나타낸 것으로 볼 것이려니와, 우리는 여기 대하여 仙(선)이란 것 이 支那人(지나인)에게 있어서는 東方(동방)의 異種族(이종족), 이른바 夷 人(이인)에게로부터 流入(유입)한 外來思想(외래사상)인 것을 指摘(지적)하 고 싶다. 燕祭(연제)의 間(간)에 東夷(동이)의 敎團(교단)이 所在(소재)에 相望(상망)하고, 따라서 특색있는 그 文物(문물)의 形迹(형적)을 시방도 많 이 指摘(지적)할 수 있거니와, 아마 仙(선)의 道(도)란 것이 속하는 것이러 니, 夷漢(이한)의 民族的(민족적) 障壁(장벽)이 戰國末境(전국말경)으로부 터 減撤(감철)되면서 文化(문화)의 雜䋴(잡유)가 行(행)하기 비롯하고, 다 시 一進(일진)하여 그 長生久視(장생구시)라는 中心(중심)事實(사실)이 秦 始皇(진시황) ‧ 漢武帝(한무제) 같은 人間的(인간적) 慾望(욕망)의 極亢擭得 者(극항화득자)에게 超人間的(초인간적)一(일) 刺戟(자극)을 주매, 그 勢位 (세위)와 風力(풍력)을 仗(장)하여 금시에 天下(천하)를 靡然(미연)케 하는 端(단)이 열리게 된 것이리라 함이 우리의 仙道(선도) 淵源(연원)에 대한 私信(사신)이다.

仙道(선도)의 來歷(내력)을 詳考(상고)함에도 그 文字的(문자적)材料(재 료)를 主(주)로 하여야 할 것이 上代(상대) 支那(지나)의 다른 모든 文化 (문화) 考察(고찰)에서와 같으니, 왜 그러냐 하면 道敎(도교) 所立(소립) 후의 그중에 對說(대설)되는 仙道(선도)歷史(역사)란 것은 통히 觀念的(관 념적) 又(우) 粉飾的(분식적)의 것으로, 하나도 取信(취신)할 것이 없으미 에 反(반)하여, 도리어 文字(문자) 그것에는 그 文字(문자) 行用(행용)하던 시대의 거기 대한 觀念(관념) 혹 事實(사실)이 속일 수 없는 情狀(정상)으 로 들어 있기 때문이다. 通例(통례)에 照(조)하여 먼저 字形(자형)의 上 (상)으로부터 觀察(관찰)하건대, 僊(선)은 諧聲(해성)으로 會意(회의)를 兼 (겸)한 者(자)로, (?) 은 義(의)로 한번 升高(승고)를 表(표)하고, 音(음) 으로 다시 遷化(천화)의 義(의)를 支持(지지)하는 것이니 要(요)하건대 (?)이란 動作(동작)을 人格名詞化(인격명사화)한 것이 僊(선)임에 不外(불 외)하다.

다시 音(음)만으로써 僊字(선자)를 보건대, 上代(상대) 支那(지나)에 있는 神聖語(신성어)의 主音(주음)으로 볼「ㅅ」系(계)의 一字音(일자음)으로 示 (시) ‧ 紳(신) ‧ 生(생) ‧ 修(수) ‧ 視(시) ‧ 純(순) ‧ 舜(순) ‧ 神(신) ‧ 醇(순) ‧ 禪(선) ‧ 襚(수) ‧ 聖(성) ‧ 上(상) ‧ 至(지) ‧ 眞(진) 등의 類語(유어) 又 (우) 派生語(파생어)임이 의심 없고, 더욱 仙聖(선성) ‧ 神仙(신선) 등으로 熟(숙)하여 그 意義(의의)도 高(고)에는 神(신) 혹 聖字(성자)와 無間(무 간)하였던 듯하니, 上方(상방)에 引(인)한 葬列(장렬)의 文(문)에 쓴 僊字 (선자)도 실상 後代(후대)의 仙子(선자)와는 크게 逕庭(경정)이 있는 바이 며, 또 洗(세) ‧ 雪(설) ‧ 蛻(세) ‧ 蟬(선) ‧ 晨(신) ‧ 乘(승) ‧ 髓(수) ‧ 腎 (신) ‧ 新(신) ‧ 鮮(선) ‧ 善(선) 등과 通(통)함에서 改換(개환) 化成(화성) 의 義(의)가 있음을 짐작하리니, <廣雅(광아)>(釋誥(석고) 三(삼))에 「先 匕也(선비야)」라 함이 또한 까닭 있음을 알 것이다. 이렇게 說問的(설문 적) 觀察(관찰)의 上(상)으로는 形(형) ‧ 音(음) ‧ 義(의)가 總(총)히 (?)을 依據(의거)로 成立(성립)하여 輕揚(경양) ‧ 高擧(고거) 내지 神變(신변) ‧ 起 異(기이)를 意味(의미)함에 그치고, 古(고)에는 실상 後世(후세)와 같은 長 生久視(장생구시)의 里人(이인)을 의의 擴充(확충)을 經(경)하여 <說文(설 문)> <釋名(석명)> 등 漢代(한대)의 書(서)에 長生不死(장생불사)의 里人 (이인)을 의미하고, 또 字形(자형)에도 人(인)이 山上(산상)에 在(재)하거 나 或(혹) 人(인) 이 山芳(산방)에 居(거)함을 從(종)하게 되기는, 진실로 仙敎(선교) 發展(발전)의 科程(과정)에 있어서 중대한 變化(변화)가 되는 것이니, 그 轉機(전기)를 이루는 것이 곧 戰國時代(전국시대) 支那(지나) 文物(문물) 大要藍期(대요람기)의 東夷(동이) 信仰(신앙)의 播傳(파전) 感 化(감화)라고 우리의 말하는 것이다.

이제 朝鮮(조선)에 떨어져 있는 東夷系統(동이계통) 文化(문화)의 宗敎觀 念(종교관념)을 살피건대, 그 속에 「」로써 일컫는 一法相(일법상)이 있 어 꽤 중요한 地位(지위)를 차지하였으니, 필시 生命(생명) ‧ 生活(생활) ‧ 創造(창조) ‧ 建立(건립) 등 觀念(관념)의 神秘化(신비화)내지 神格化(신격 화)로 古人(고인)의 소중히 알던 것이요, 더욱 이것은 그 實踐的(실천적) ‧ 修行的(수행적) 方面(방면)을 代表(대표)하는 명칭은 것은 위선 地名(지명) 과 및 그 附隨(부수) 說話(설화)의 中(중)애서 약간 揣摩(췌마)할 수 잇다. 조선에 있어서 옛날의 宗敎的(종교적) 對象(대상)이 된 듯한 山岳(산악)의 名號(명호)를 檢討(검토)하건대, 「」과 또 그 轉(전)인 「」이 그 主 要(주요)한 一種(일종)이 되었으미을 보니, 위선 金剛山(금강산) 古名(고 명) 霜岳(상악)의 霜(상)이 이미 「」의 驛(역)이어니와,

音譯(음 역) ─ 修理(수리) ‧ 蘇來(소래) ‧ 所羅(소라) ‧ 沙羅(사라) ‧
薛列(설렬) ‧ 首陽(수양) ‧ 首龍(수룡) ‧ 舍羅(사나) ‧ 水
落(수락) ‧ 水精(수정) ‧ 修道(수도) ‧ 俗離(속리) ‧ 神留
(신류) ‧ 神林(신림) ‧ 神興(신흥) ‧ 神勒(신륵)
義譯(의 역) ─ 甑(증)(王(왕)시루) ‧ 鷲(취)(靈鷲(영취))
音義雙擧譯(음의쌍거역) ─ 霜(상) ‧ 難(난) ‧ 松(송) ‧ 仙(선) ‧ 禪(선) ‧
聖(성) ‧ 新(신) ‧ 神(신)
雅化譯(아화역) ─ 西山(서산) ‧ 瑞山(서산) ‧ 善山(선산) ‧ 星山(성산) ‧
西林(서림) ‧ 少林(소림) ‧ 雙嶺(쌍령) ‧ 栖雲(서운) ‧
上院(상원) ‧ 瑞麟(서린) ‧ 瑞龍(서룡) ‧ 淸凉(청량)
轉變形(전변형) ─ 三聖(삼성) ‧ 三方(삼방) ‧ 三峯(삼봉) ‧ 三日(삼일) ‧
三郞(삼랑) ‧ 侍郞(시랑) ‧ 舍人(사인) ‧ 聖居(성거) ‧
聖住(성주) ‧ 大聖(대성)

등 地名(지명)의 대개는「」系統(계통)에 붙이는 것이요, 그것은 대개 古 代(고대)의 聖地(성지)특히 宗敎的(종교적) 修練(수련)의 靈場(영장)이던 것이다. 이 이름을 가진 山岳(산악)들에는 시방까지 仙人說話(선인설화)를 전해오는 것이 많고, 그것이 대개 朝鮮(조선) 古道(고도)의 修行者(수행자) 에 不外(불외)하고, 그 修行(수행)이란 것이 실상 山岳的(산악적) 修煉(수 련)임으로써,「」그 變(변)인「」山(산)의 名(명)과 「」行(행)의 實 (실)의 相關(상관)을 알 것이니, 그 一(일), 二(이) 實例(실례)로 南(남)에 서는 智異山(지리산)의 上院庵(상원암), 西(서)에서는 茂長(무장)의 禪雲山 (서운산), 東(동)에서는 高城(고성)의 三日浦(삼일포), 北(북)에서는 平壤 (평양)의 大聖山(대성산)을들 수 있다.

智異山(지리산)의 上院(상원)은 五寶高仙人(오보고선인)의 隱修地(은수지) 로 이름 있는 곳이니, 실로 智異山(지리산) 中(중)에서 가장 濃厚(농후)한 傳說的(전설적)雰圍氣(분위기)를 가졌다. <三國史記(삼국사기)>의 전하는 바로는 五寶高(오보고)란 이가 一個(일개) 琴師(금사) 비스름하지마는, 그 가 貴人(귀인)의 子(자)로 入山(입산)을 決行(결행)하여 終身(종신)토록 音 樂(음악)의 行者(행자)가 된 것은 대개 宗敎的(종교적) 動機(동기)에서 나 온 것이요, 또 그것이 그때에 있어서 흔히 행하는 信順生活(신순생활)의 一 形相(일형상)이었으니, 그는 실로 이러한 山嶽(산악) 修行者(수행자)의 一 人(일인)으로 그 棲遲(서지)의 地(지)를 이곳에 가림이었다. 그를 仙人視 (선인시)하는 說話(설화)가 後世(후세)까지 많이 流轉(유전)하고, 七子(칠 자) 成佛(성불)따위의 宗敎的(종교적) 說話(설화)가 그를 圍繞(위요)하여 내려옴은 실로 까닭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의 遺迹(유적)을 시방은 七佛 庵(칠불암)이라 일컫고, 古(고)에는 運上院(운상원)이라 일컫고, 一名(일 명)은 金輪寺(금륜사)라 불렀음은 여러 記錄(기록)과 같고, 시방까지도 玉 寶臺(옥보대)란 것이 七佛庵(칠불암)의 뒷등에 高平(고평)하게 遺存(유존) 하여 있다.

우리의 硏究(연구)를 디디건대, 이 玉寶臺(옥보대)란 것이 실상은 古祭(壇 (고제단) 혹 靈場(영장)의 一(일)로, 北(북)으로는 般若(반약)의 峯(봉)을 負(부)하고 南(남)으로는 花開(화개)의 谷(곡)을 控(공)하여, 仙聖行者(선 성행자)의 一大福地(일대복지)이었음이 분명하니, 岳陽(악양)으로부터 花開 (화개)를 經(경)하고, 雙溪(쌍계)를 歷(역)하여 梵王(범왕)에 至(지)하기까 지 四(사), 五(오)○里(리) 長谷(장곡)이, 智異山(지리산)에서도 古來(고 래)로 가장 많이 仙聖說話(선성설화)를 包藏(포장)한 것이 또한 偶然(우연) 함이 아니었다. 이제 地名(지명)의 古義(고의)를 더듬어 보아도 가장 오래 고 또 本形(본형)대로 남아 있는 듯한 金輪(금륜)이란 것에는 분명히 古面 目(고면목)의 그림자가 머무는 듯하니, 金輪(금륜)이 얼른 보면 佛典(불전) 으로서 나왔을 듯도 하지마는, 山中(산중)의 一蘭若(일란약)에 金輪(금륜) 의 稱(칭)이 實(실)로 無謂(무위)에 屬(속)한다 하겠음으로써 대개 오랜 무 슨 名號(명호)의 轉變(전변)일 것을 想像(상상)하겠는데, 우리는 <三國遺事 (삼국유사)> 帝王(제왕)의「眞智王(진지왕)名金輪(명금륜), 一(일) 作舍輪 (작사륜)」의 例(예)로써 金輪(금륜)은 舍輪(사륜)의 字形的(자형적) 小變 (소변)이요, 舍輪(사륜)은「」의 寫音(사음)일 것을 대개 의심치 아니하 며, 進(진)하여는 雙溪寺(쌍계사)의 雙溪(쌍계)가 시방까지의 傳信(전신) 과 같이 兩水(양수)의 合襟(합금)으로서 얻은 이름이 아니라, 실상 催告雲 (최고운)같은 이의 손에 「골」의 雅轉(아전)된 것이 아닐까지를 생각한 다. 내가 前(전)에 玉寶臺(옥보대)를 登臨(등림)하였을 적에도, 그 崇邱(숭 구)으 形(형)과 山中(산중)의 位置(위치)로 보아서 그것이 智異山(지리산) 南谷(남곡)에 있는 最大(최대) 宗敎的(종교적) 遺緖地(유서지)일 것을 믿고 山嶽道(산악도) 一方(일방)의 中心地(중심지)로 이른바 仙人(선인)의 발자 취가 여기서 떠난 적이 없을밖에 없을 것을 생각하면서, 이곳이 玉寶高(옥 보고)갈 하필 琴樂(금락)을 마음껏 享用(향용)하려 하여 이곳을 찾아온 것 아니라, 사실은 이「」터의 祭司(제사)에 玉寶高(옥보고)란 一人(일인)이 있고, 그 供神(공신)의 要件(요건)에 琴曲(금곡)이 본디 따르는데, 玉寶高 (옥보고)라는 이는 특히 이 神樂(신악)에 秀技(수기)를 가졌던 것쯤 되는 것을, 說話的(설화적) 變造(변조)로 <三國史記(삼국사기)>의 云云(운운)과 같이 됨일것을 생각하여, 그런데 仙人(선인)이란 것은 要(요)하건대 이러한 玉寶高(옥보고)의 類(류)가 아닐는지?

茂長(무장)의 禪雲山(선운산)은 西韓(서한) 一帶(일대)의 有數(유수)한 名 山(명산)이요, 禪雲(선운)이란 古大刹(고대찰)이 있으므로 들렸거니와, 山 中(산중)에는 허다한 暗窟(암굴) ‧ 石柱(석주) ‧ 奇峯(기봉) 등 古敎(고교)相 應(상응)의 天然物素(천연물소)오 한가지로, 國師(국사)니 天王(천왕)이니 將軍(장군)이니 彌勒(미륵)이니 天門(천문)이니 龍門(용문)이니 滿月(만월) 이니 百濟(백제)니 하는 古神道的(고신도적) 名句(명구)를 流轉(유전)하여 그것이 어떻게 古神道(고신도)의 중요한 靈場(영장)이던 것을 高聲(고성)으 로 외친다. 그런데 後代(후대)와서는 禪雲(선운)이란 名義(명의)에 대하여 佛敎(불교)에 附會(부회)한 種種(종종)의 詮議(전의)를 세우고, 특히 禪 (선)이란 字(자)가 본디부터 僧禪(승선)의 禪(선) 같은 것처럼 말하였지마 는 禪雲(선운)은 一(일)에 仙雲(선운)이라고 하기도 하여 실상 字義(자의) 에는 관계 없는 一寫音(일사음)이니, 이 山(산)의 성질상으로 보아서 禪 (선)(禪(선))雲(운)이 대개 「」의 驛對(역대)임을 容易(용이)히 說想 (설상)할 수 있다. <兜率懺堂禪雲寺局內周回記錄(도솔참당선운사국내주회기 록)> 등 古文蹟(고문적)에 나오는 水落村(수낙촌) ‧ 音聲峯(음성봉) ‧ 鷲峯 (취봉) ‧ 射利峙(사리치)등이, 필시 總名(총명)이던 의 分派(분파) 又(우) 碎散的(쇄산적)으로 流轉(유전)함일 것은, 이 名號(명호) 地(지)들이 다 仙 雲(선운)의 主峰(주봉)을 拱揖(공읍)하는 位置(위치)에 當(당)함으로써 짐 작할 것이다. 이렇게 생긴 禪雲山(선운산)이 예로부터 挨丹仙人(애단선인) 의 種種(종종) 傳說(전설)이 있고, 특히 그 開泰寺(개태사)는 挨丹(애단)의 鍊心(연심)하는 道場(도장)임을 傳(전)함은 실로 偶然(우연)이 아니니, 仙 雲(선운)의 挨丹(애단)은 대개 上院(상원)의 玉寶高(옥보고) 따위일 것이 다. 新羅(신라) 이래로 禪雲山(선운산)이 차차 佛敎徒(불교도)으 獨占(독 점)으로 돌아가서 古敎(고교)의 遺蹟(유적)이 佛敎(불교)의 法相(법상)에 攝化(섭화)되매, 禪雲(선운) ‧ 兜率(도솔) ‧ 法華(법화)의 名號(명호) 改換 (개환)과 한가지 挨丹仙人(애단선인)은 黔丹禪師(검단선사)로 化(화)하여 禪雲山(선운산)의 開山祖(개산조)가 되고, 靈嶽(영악) 巡禮(순례)로 來臨 (내림)하엿던 듯한 新羅(신라)의 眞興王(진흥왕)이 어느덧 禪雲開山(선운 개산)의 助演者(조연자)로 化(화)하게 되고, 天柱(천주)니 立岩(입암)이니 하던 古道(고도)의 神物(신물)이 佛敎的(불교적) 說話(설화)의 一物素(일물 소)로 監齋使者(감재사자)의 化石(화석)을 짓게 되었다.

우리의 考察(고찰)을 좇건대, 古道(고도)의 靈場(영장)으로 가장 뿌리 깊 은 者(자)로 오랫동안 葛藤(갈등)과 紛糾(분규)의 攝收(섭수)를 입은 곳에 는, 대개 勝者(승자)인 佛敎(불교)의 손에, 크면 驅龍(구룡)이요, 작으면 逐盜(축도)의 說話(설화)가 成立(성립)하였음을 본는데, 그 說明(설명)의 가장 典型的(전형적)으로 생긴 것이 禪雲山(선운산)에 驅龍說話(구룡설화) 가 있고, 또 그것이 퍽 長時(장시)에 亘(긍)한 激爭(격쟁)임을 나타내었음 은, 禪雲山(선운산)이 어떻게 오래고 큰 古敎(고교)의 道場(도장)임의 밝 은 證據(증거)요, 그럴진대 이 山(산)에 託迹(탁적)한 仙徒(선도) 또한 적 을 수 없으리니, 挨丹(애단)은 무론 그중의 一人(일인)이요, 또 그와 한가 지 傳(전)하는 疑雲禪師(의운선사)란 이도 밑을 캐어보면 山岳行者(산악행 자)의 流(류)가 아닐 지 모를 것이다. 禪雲山(선운산)부터 있는 戊長縣(무 장현)은 高麗(고려)의 茂松(무송) ‧ 長沙(장사) 兩縣(양현)을 合(합)하고 그 頭字(두자)들을 取(취)하여 지은 이름이요, 禪雲山(선운산)은 長沙(장사)에 屬(속)하였는데, 長沙(장사)는 百濟(백제)의 上老縣(상로현)을 新羅(신라) 에서 고친 이름이니, 이 上老(상로)도 대개는 禪雲(선운)으로 더불어 語原 (어원)을 한가지하는 것으로 「」혹 「」이 一對字(일대자)로 볼 것 인가 한다.(茂松縣(무송현)의 百濟名(백제명)인 松彌知(송미지)」도 또한 一原(일원)에 分派(분파)된 것일지 모를 것이다.) 대체 禪雲山(선운산)이 「」의 語原(어원)과 한자지로 仙人(선인)이 무엇이거니, 三日浦(삼일포) 는 四仙(사선)과 永郞仙(영랑선)의 傳說(전설)을 가진 곳이니, 이 이른바 三日(삼일)의 語原(어원)에 대하여 古文(고문)의 傳(전)하는 바에는 「昔四 仙遊此而三日不返故得是名(석사선유차이삼일불반고득시명)」이라고 하였으 나, 우리의 考究(고구)에는 이는 실상 望文假托(망문가탁)한 後代的(후대 적) 地名(지명) 起源說話(기원설화)일 따름이요, 실상은 다른 깊은 來歷(내 력)을 가진 것이니, 대개 三日(삼일)은「사흘」의 驛字(역자)요, 「사흘」 은「」의 訛傳(와전)인 것으로, 聖地(성지)를 의미함이었다. 古代(고대) 에 있어서 金剛山(금강산)이 山岳崇拜(산악숭배)의 一大(일대)對象(대상)으 로 國家的(국가적) 醇謹(순근)을 받았음은 後文(후문)에 論及(논급)할 기회 가 있으려니와, 이 三日浦(삼일포)가 당시에 金剛山(금강산)의 一眷屬(일권 속)으로 쳤던지 獨立(독립)한 一聖地(일성지)로알렸었던지는 시방 究明(구 명)하지 못할 일이나, 여하간 그것이 國仙(국선) 巡禮(순례)의 一地點(일지 점)인 것은 시방도 傳來(전래)하는「永郞徒(영랑도) 南石行(남석행)」의 崖 脚(애각)으로써 알 것이요, 四仙(사선)의 仙(선)이 또한 國仙(국선) ‧ 仙郞 (선랑)의 仙(선)일 것으로써도 짐작할 것이다. 松廣山(송광산)과 鴟落臺(치 락대)와 三日庵(삼일암)이 다 본디는 「」의 異驛(이역)인 例(예)로써 推(추)하여, 三日浦(삼일포)의 三日(삼일)이 대개 同一(동일)한 語原(어원) 에서 나왔음을 짐작할지니, 여기서도 「」과 仙(선)의 相關(상관)에 관한 一類例(일유례)를 얻는다 할 것이다.

平壤(평양)의 大聖山(대성산)은 그 神道的(신도적) 地位(지위)가 正(정)히 慶州(경주)의 西鳶山(서연산), 松都(송도)의 松岳山(송악산)에 當(당)하는 居民(거민) 古神仰(고신앙)의 對象(대상)이던 곳이니, 그 上(상)에 「皇帝 (황제)마누라」의 神堂(신당)이 있어 平壤人(평양인)이 每(매)春節(춘절)에 나 新穀(신곡)이 날 때에 一年(일년) 一次(일차) 이상은 酒食餠果(주식병 과)로써 「山(산)마지」를 來享(내향)하고, 몸이 가지를 못하면 乙密ㅊ(을 밀대) 같은 데서 「山(산)바라기」라 하여 반드시 聖祭(성제)라도 해야 하 는 줄 아는 尊崇地(존숭지)이다. 여기는 東明仙人(동명선인) 對(대) 鹿足夫 人(녹족부인)의 유명한 神話(신화)를 傳(전)하니, 鹿足夫人(녹족부인) 云云 (운운)은 무론 佛敎(불교)傳說(전설)과의 融合(융합)에서 생긴 것이려니와, 이 「皇帝(황제)마누라」가 新羅(신라)의 敍述聖母(서술성모) 같은 고구려 의 國母的(국모적) 神的(신적)으로, 이른바 仙聖(선성)의 儔(주)이었을 것 은 說話(설화)의 中(중)에 餘痕(여흔)이 오히려 있는 바이다. 그런데, 大聖 山(대성산)(與覽(여람)에는 聖(성)을 城(성)으로 作(작)함)의 聖(성)이 대 개 「」의 一驛字(일역자)일것은 다른 데의「」山(산)이 만히 聖字 (성자)로 驛寫(역사)되었음으로써 類推(유추)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主 要(주요)한 神池(신지)를 「술못」이라하고 그 舞殿(무전)을「가승당」이라 함에, 古形(고형)이 그림자를 머루른 듯 함으로써 이 山(산)에「」의 稱 (칭)이 있었던 것을 다시 한번 짐작하겠다. 아마도<三國志(삼국지)> <後漢 書(후한서)> 등에 적은 高句麗(고구려) 國東(국동)의 襚神(수신)이란 것과, 시방 平壤地方(평양지방) 巫祝(무축) 對象(대상)의 一大神(일대신)인「설」 이란 것이 다 여기 關涉(관섭)되는 것일 것이요, 大聖山(대성산)을 一(일) 에 大聖九龍山(대성구룡산)이라 하는 九龍(구룡)과, 大聖山城(대성산성)의 東北(동북)에 있는 고구려의 長安(장안)과, 大聖山(대성산) 근처에 두었던 고구려의 大花宮(대화궁)도 그 名稱(명칭)이 因由(인유)가 또한 이것과 서 로 ㄸ나지 못함이 있을 것이다. 저 神堂(신당)의 앞에 세운 「大聖山(대성 산)神堂事跡碑(신당사적비)」에「神堂亦古也(신당역고야), 昔者壇君時(석자 단군시), 至于今數千年來(지우금수천년래), 香火不絶者(향화부절자), 槩神 基最靈之致也(개신기최령지치야), 不但兩西之人(부단양서지인), 亦東京之人 (역동경지인), 內祭者(내제자), 不知其數也(부지기수야)」라 함이, 비록 下 代(하대)의 漫言(만언)일망정 바이 因由(인유) 없는 말도 아닐 듯하다.( 저 東明聖王(동명성왕)의 聖(성)도 대개는 東明仙人(동명선인)의 仙(선)과 같 은 原語(원어)의 譯者(역자)로 다「」의 類語群(유어군)에 屬(속)함일 것 이다.)

百濟(백제) 一靈畤(일영치)로 認(인)되는 稷山(직산)의「慰禮城(위례성)」 있는 곳이 聖擧山(성거산)인데, 그 齋邑(재읍)이었은 듯한 곳에 시방도 「侍郞里(시랑리)」의 名(명)이 전하고, 成骨將軍(성골장군)의 傳說(전설) 을 가진 開城(개성)의 聖擧山(성거산)이 일변 平羅(평나) ‧ 九龍(구룡)의 一 名(일명)을 가지고, 大興洞(대흥동) 朴淵(박연)의 地名(지명)을 包存(포존) 하고, 馬韓(마한)의 一靈畤(일영치)이던 益山(익산)의 彌勒山(미륵산)에는 上峯(상봉)에 將軍(장군)의 名(명)과 한가지 上臺(상대)의 稱(칭)이 있고, 域內(역내) 最古(최고) 靈畤(영치)의 一(일)로 傳(전)하고 후에 祀仙(사선) 의 要壇(요단)이 된 江華(강화)의 摩尼(마니)에는 塹星壇(참성단) ‧ 三郞城 (삼랑성)이 竝存(병존)한데, 三郞(삼랑)은 一(일)에 鼎足(정족)이라 하여 一(일)은 訓(훈)으로 한 가지 「」을 表(표)하는 등, 古代(고대)의 祭壇 (제단)이던 곳에 「」(그 轉(전)인「」)의 名稱(명칭)과 아울러 仙人 (선인)(내지 將軍(장군))의 傳說(전설)(내지 故事(고사))을 가진 것을 거의 支不(지불)勝數(승수)하겠으나 번거로우닌 낱낱이 들추지 말기로 하자. 震域(진역)의 古神道(고신도)에 있는 「」이란 것이 어떠한 성질의 것임 은 앞으로 많은 考察(고찰)을 지낸 뒤에 審明(심명)될 것이려니와, 대저 「」는 첫째 生命(생명)表示(표시)의 語(어)니, 生存(생존)을 「살으」 라, 生活(생활)을「살림」이라, 呼吸(호흡)을 「숨」이라, 凶門(흉문)을 「숫구멍」이라 하는 등이 是(시)요(漢文(한문)의 生(생) ‧ 壽(수) 등을 參 互(참호)할 것), 「」는 또 變化(변화) 表示(표시)잉 語(어)니, 更新(갱 신)을 「새」라, 始初(시초)를「숫」이라, 鮮麗(선려)를 「산」(듯)이라, 衰白(쇠백)을「세」라, 腐變(부변)을「석」이라「쉬」라 하는 등이 是(시) 요(漢文(한문)의 新(신) ‧ 鮮(선) ‧ 衰(쇠) ‧ 像(상) 등을 參互(참호)할 것), 「」는 또 開明(개명) 表示(표시)語(어)니, 밝는 날을 「새는날」, 밝은 녘을 「샐녘」, 밤이 「새」인다, 날이 「새」인다, 「새벽」「새ㅅ별」등 이 是(시)요 (漢文(한문)의 曙(서) ‧ 晨(신) 등을 參互(참호)할 것), 「」 는 또 生命方(생명방)이요, 日出方(일출방)이요, 仁善方(인선방)으로 아는 東方(동방) 表示(표시)의 語(어)니, 東風(동풍)을 「새ㅅ바람」이라 하고, 東韓(동한)은 辰韓(진한)이라 하는 등이 是(시)요(漢文(한문)의 震(진)을 參互(참호)할 것), 「」는 또 「샘」(泉(천))이라, 「솟」(湧(용))이라 함에서 生生(생생)의 義(의)를 볼 것이요 「서」(立(립))라, 「세」(强 (강))라,「심」(力(력))이라 함에서 活動(활동)의 義(의)를 볼 것이요, 「수」(幸運(행운))이라 「사망」(吉利(길리)이라 함에서 神佑(신우)의 義 (의)를 볼 것이다. 神山(신산) ─ 宗敎的(종교적) 靈場(영장)이던 山嶽(산 악)의 「」()이란 이름은 대개 이러한 語義(어의)에 관련될 것이다. 以上(이상)에서 우리는,

(1) 震域(진역) 古神道(고신도)의 靈畤(영치)에는 「」의 名稱(명칭)을 帶(대)한 者(자) 많음.

(2) 그 高處(고처)엔 대개 仙人傳說(선인전설)이 시방까지도 粘着(점착)하 여음.

(3) 그 仙人(선인)은 대개 樂舞(악무) ‧ 修煉(수련) ‧ 覲禮(근례)의 者(자) 이었음.

(4) 古(고)의 「」()의 山(산)은, 뒤에 佛敎(불교)의 名覽(명람) 으로 化(화)하여, 變態(변태)의 生命(생명)을 持續(지속)하거나 不然(불연) 하면 崇嚴(숭엄)한 神地(신지)로 依然(의연)히 居民(거민)의 信仰(신앙)을 繫有(계유)함.

등을 아는 동시에, 震域(진역) 古神道(고신도)의 「」이란 修行(수행)이 대개,

(1)祈禱的(기도적) 方面(방면)에 있어서는, 高山(고산) 絶頂(절정)을 靈畤 (영치)로 하여 山神(산신)내지 天神(천신)을 虔事(건사)함.

(2) 그 行驗的(행험적) 方面(방면)에 있어서는, 深山(심산)幽谷(유곡)을 道 場(도장)으로 하여 鍊形(연형) 즉 修心(수심)으로써 天地(천지)의 生命(생 명)에 合一(합일)을 求(구)함.

(3) 故擧遐想(고거하상)으로 塵俗(진속)을 斷棄(단기)하고, 天柱(천주) ‧ 天 門(천문) 天悌(천제) 같이 생각하는 高山(고산)의 上(상)에서, 具象的(구상 적)의 反朴還原(반박환원)의 行(행)을 累積(누적)하던 것임을 짐작할 수 있 으니, 대개 이렇게 薦奉齋(천봉재)와 한가지 山岳(산악) 受驗(수험)을 兼攝 (겸섭)한 古敎(고교)의 道人(도인)을 「」이라 하고, 그것을 後世(후 세)에 音義(음의) 雙擧(쌍거)로 驛(역)하기를 仙人(선인)이라 한 것이었다. 震域(진역)의 古神仰(고신앙)은 下文(하문)에 祥及(상급)할 것처럼, 太陽 (태양)을 天主(천주)로 하고 高山(고산)을 天地(천지)로 하여 自己(자기)네 의 生命(생명) 及(급) 門物(문물)의 淵源(연원)이 這裏(저리)로서 出發(출 발)하였음을 信(신)함이니, 그 修行(수행)이 山岳(산악)을 道場(도장)으로 하게 됨은 곧 生命(생명)의 本源(본원)인 神(신)에게로이 接近(접근)을 의 미함이었다. 그는 무론 太陽(태양)을 禮拜(예배)하였으며, 또는 禮拜(예배) 를 爲(위)하는 壇場(단장)을 필요로 하였으니, 「」山(산)이란 것은 要 (요)하건대 居常(거상) 혹 一(일) 時期(시기)의 曙日祗迎(서일지영)의 神域 (신역)이었으며, 從(종)하여 이에 관한 第四階級(제사계급)이 生(생)하여 一種(일종)의 靈力(영력)의 權能者(권능자) 노릇을 하게 되니 이것이 곧 「」이란 것이요, 「」의 職務(직무)가 처음에는 祭祀(제사) ‧ 供犧 (공희)에 그쳤었을는지 모르지만, 太陽(태양)에의 禮拜(예배)가 어느덧 觀 念的(관념적)分子(분자)를 加米(가미)하게 되고, 그것이 더욱 理論的(이론 적)發展(발전)을 成遂(성수)하여 服氣煉形(복기연형)이라는 事實(사실)을 誘發(유발)하게 되면서, 「」行(행)은 人生(인생)에 緊切(긴절)한 具象的 (구상적) 傾向(경향)을 取(취)하게 되고, 그 끝이 마침내 長生不死(장생불 사) ‧ 高飛昇天(고비승천) 등 理想的(이상적) 生長(생장)을 보게까지 되었이 「」轉(전)하여「」法(법)은 이 文化系統共通(문화계통공통)의 것이겠 지마는 山岳團(산악단)인 半島(반도)에서 퍽 많은 生長(생장)을 遂(수)하였 음은 自然(자연)한 勢力(세력)이었다. 이것이 大同江(대동강) 流域(유역)과 山東半島(산동반도) 間(간)의 文物交通(문물교통)이 빈번함을 따라서 支那 (지나)에 있는 僊道(선도)의 淵源(연원)이요, 이 僊(선)이 戰國(전국)으로 秦漢(진한)을 歷(역)하여 宗敎的(종교적) 色彩(색채)의 濃厚(농후)와 人格 的(인격적)成立(성립)의 明瞭(명료)를 要求(요구)하는 勢(세)를 因(인)하 여, 字(자)는 仙(선)을 從(종)하게 되고, 義(의)는 山中(산중)의 修煉(수 련)을 攝(섭)하게 되고, 이로부터 仙聖(선성)과 神仙(신선)이 점점 尋常(심 상)한 神聖(신성)의 義(의)를 떠나서 一種(일종)이 宗敎的(종교적) 靈格者 (영격자)를 意味(의미)하게되었다.

震域(진역) 古敎(고교)의 「」行(행)을 仙(선)으로 驛(역)하고 그 行者 (행자)를 仙人(선인)이라 稱(칭)함은, 설사 支那(지나)의 仙(선)과 此方(차 방)의 「」과의 一源的(일원적)관계가 없는 셈 치고라도, 自學的(자학적) 이유로 아주 適當(적당) ‧ 緊切(긴절)한 것임은 무론이다. 道敎(도교) 편 ‧ 支那思想(지나사상)편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佛敎(불교) 以外(이외)의 道行(도행) 높은 이를 Rsi라 하는데 漢譯(한역)에 仙(선)으로 作(작)하니, 그는 대개 入山修行(입산수행)하여 道果(도과)를 얻은 이이기 때문이다. 그 러므로 佛敎(불교)은 一種(일종)이 仙人(선인)이니, 古敎(고교)와 그 行者 (행자)를 仙(선)으로써 稱(칭)함은 아마 佛敎(불교) 以後(이후)에 一層(일 층)의 鮮明(선명)과 普遍(보편)을 加(가)하였을는지도 모를 것이다. 다시 한번 民俗的(민속적) 方面(방면)으로 보건대(地名(지명)의 餘痕(여 흔)과 傳說(전설)의 微意(미의)는 上來(상래)에 略述(약술)도 하였거니와), 東明王編(동명왕편)에 나오는 天王郞(천왕랑) 解慕漱(해모수)가 雄心山(웅 심산)을 中火站(중화참)으로 하여, 天上人間(천상인간)으로 乘降自在(승강 자재)하는 事實(사실)과 및 그 威儀(위의)가 어떻게 神仙的(신선적)으로 생 긴 것은 아무의 누니에도 띄우는 일이니, 그 이른바 天王郞(천왕랑)이 後世 (후세)의 이른바 仙郞(선랑)으로, 漢文的(한문적)으로는 神仙(신선)에 행당 하는 것이요, 또 解慕漱(해모수)라는 樹(수)가 또한 「」系(계)의 一名字 (일명자)로 볼 것일지도 모르며, 그런데 그 사실이 함빡 神仙的(신선적)이 면서 神仙(신선)의 이름이 보이지 아니하고 天帝子(천제자)(혹 天王郞(천왕 랑))으로 일컬음에 이 傳說(전설)의 鄕土的(향토적) 本質(본질) 特色(특색) 이 나타나 있으미을 본다. 東明(동명)을 따로 仙人視(선인시)하는 話形(화 형)도 있고, 後世(후세)의 文學(문학)이 仙聖(선성)의 儔(주)로 대접함도 실로 우연한 것 아니다.

저 古來(고래)의 民間信仰(민간신앙)을 의거하여 做出(주출)한 것으로 볼 妙淸(묘청)의 「八聖(팔성)」이 대개 仙人(선인) ‧ 神人(신인) ‧ 天仙(천선) ‧ 天女(천녀)로 稱(칭)하는 者(자)요, 仙人(선인)이라 한 것 三者中(삼자중) 에 兩者(양자)나 平壤(평양)에 屬(속)하였음은, 어떻게 平壤(평양)이 神仙 傳說(신선전설)의 有緣地(유연지)임을 짐작케 함이 있다. 記錄(기록)의 語 形(어형)에 別(별)로 神人(신인) ‧ 聖人(성인)으로 稱(칭)하는 者(자)가 震 域(진역)의 山岳說話(산악설화)(特(특)히 建國說話(건국설화)에 자주 고개 를 내미니, 爲先(위선)「八聖(팔성)」중의 甑域嶽神人(증역악신인)이란 것 도 그 一(일)이어니와, 伽倻山神正見母主(가야산신정견모주)에 대한「天神 夷毗訶(천신이비가)」와, 智異山(지리산) 天王星母(천왕성모)에 대한「嚴川 和尙(엄천화상)」과, 漢拏山(한라산)의 三神人(삼신인) 등이 그것이니, 이 것이 外號(외호)는 各殊(각수)하되 內實(내실)은 一物(일물)임은 <駕洛國記 (가락국기)>의 七聖(칠성)이란 것이, 다른 文籍(문적)에는 七點山(칠점산) 仙人(선인)으로 見(견)하고, <三國史記(삼국사기)>의 仙人王儉(선인왕검)이 後世(후세)의 記載(기재)에는 神人(신인)으로 出(출)하는 등으로써 짐작할 것이다. 역사상의 實跡(실적)으로 보아도 新羅(신라)의 國仙(국선)이 당시 宗敎團體(종교단체)의 首領(수령)이요, 高麗(고려)의 仙風(선풍)이 外來宗 敎(외래종교)에 대한 固有信仰(고유신앙)의 名號(명호)이었으며, 시방까지 도 그 遺風(유풍)이 松都(송도)의 「仙官(선관)」이란 것에 남아 있으니, 이렇게 此方(차방) 文籍上(문적상)에 있는 仙字(선자)의 用例(용례)와 아울 러 그 本地(본지)가 된 民俗的(민속적) 事實(사실)을 合(합)하여 非量(비 량)하면, 古傳說(고전설)(古記錄(고기록))에 나오는 「仙人(선인)」이란 것 이 대개 어떠한 것임을 알 것이요, 더욱 시방 民間信仰(민간신앙)에 있는 「선앙」이란 것과 내지 山神(산신) ‧ 山王(산왕) ‧ 獨聖(독성)이란 것을 較 量(교량)할 때에, 그것이 어떻게 根柢(근저) 깊고 보편성을 가진 古神道的 (고신도적) 事實(사실)임을 밝히 짐작할 것이다.

또 一方(일방)으로 同系(동계) 文化(문화)의 民俗的(민속적)事實(사실)에 比較(비교)를 試(시)하건대, 東亞(동아)神道(신도)의 總名(총명)이 되ㅓ다 시피한 Shaman으로부터 滿洲語(만주어)에 무당을 「사만」, 굿을「삼담 비」, 寺院(사원)을「스」, 妖精(요정)을「심누」, 蒙古語(몽고어)에 寺院 (사원)「수머」, 도깨비를「포쌘」, 日本語(일본어)에 神慮(신려) 審察者 (심찰자)를 サニハ, 一種(일종)의 女巫(여무)를 サルナ라 함등은 다「」 系(계)의 類語(유어)일 것이요, 또 日本(일본)서 世世(세세)로 神祇(신기) 의 都提調(도제조)를 仕(사)하는 一家(일가)가 シラカハ의 氏(씨)를 冒(모) 함과, 事神(사신)의 要具(요구)인 領(령)을 スズ라 함 등도 또한 「」에 인연 因緣( )이 있음일 것이며, 一論者(일논자)의 말마따나 新羅語(신라어)에 巫(무)를 次次雄(차차웅)이라 함과, 日本(일본)의 一大神(일대신)인 スサノ ヲ란 것이다 한가지 Shaman에 原(원)한 말로 또한「」系(계)에 歸屬(귀 속)할 것일지 모를 것이다.(スサノヲ神(신)의 女(녀)로 オホニヌシ神(신)의 嫡妻(적처)가 되었다는 スセリヒメ란 이도 語原(어원)은 또한 「」의 一 眷屬(일권속)일 것 같다). 東夷(동이)으 古俗(고속)으로 支那人(지나인)이 傳承(전승)한 듯한 가장 중대한 祭天(제천)의 儀式(의식)에 「禪(선)」이란 것이 있어서, 秦(진) 以(이) 來(래)로 王者(왕자) 耀功(요공)의 一大盛典 (일대성전)을 지었거니와, 이「션」도 본디는「」이란 行法(행법)의 轉化 (전화)에 不外(불외)함일 것은, 그 名與實(명여실)에 한가지 表證(표증)된 다 할 것이다.

또 日本語(일본어)에 天祖(천조)와 主上(주상)에 관계되는 事物(사물)에 冠(관)하여 尊敬(존경)의 意(의)를 표하는 語(어)에 スメ(又(우) スメラ)가 있어「スメ神(신)」「スメ親(친)」등으로 慣用(관용)하고, 皇上(황상)을 單 (단)히 スメラギ(スメロギ)로 稱(칭)하기만도 하니, 시방까지의 學者(학자) 는 그 語原(어원)을 統率(통솔)을 意味(의미)하는 말인 スベ에 두나, 그 本 末(본말) 關係(관계)는 꼭 모로되, 우리는 이것이 또한「」系(계)와 風馬 牛(풍마우) 아닐 것을 注意(주의)할 것이다. 또「알」ㅁ 을 意味(의미)하는 シラ(ロ)란 語(어)에 예에는 領有(영유) 又(우) 統治(통치)의 義(의)가 있 어 神祇(신기) 又(우)帝王(제왕)은「天(천)ノ下知(하지)シ食(식)ス」의 者 (자)라 하였는데, 國語(국어)에는 知(지)를 「알」이라 訓(훈)하여 シロ와 語形(어형)은 같지 아니하나「알안곳」「알은체」에는 關與(관여) 내지 參 知(참지)의 義(의)가 있으며, 따로 治理(치리)를「다리」라 함에서는「シ ロ」와 「(다)리」에 語形的(어형적) 一致(일치)의 있음을 본다 (漢文(한 문)에도 作之君(작지군)作之師(작지사)란 師(사)가 師巫(사무)란 師(사)임 을 注意(주의)할 것), 또 解慕漱(해모수)의「朝則廳事(조즉청사), 暮則升天 (모즉승천), 世謂之天王郞(세위지천왕랑)」(東明王篇注(동명왕편주)와 桓雄 天王(환웅천왕)의「將風伯雨師雲師(장풍백우사운사), 而主穀(이주곡), 主病 主刑(주병주형), 主善惡(주선악), 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범주인간삼백육십 여사), 在世理化(재세이화)」란 古傳(고전)의 意(의)에서 그 證迹(증적)을 엿보기도 할 것이다. 더욱 桓雄天王(환웅천왕)의 神壇政治(신단정치)에서는 神(신)과 禪(선)對(대)「」法(법)의 連鎖的(연쇄적) 關係(관계)를 살필 수 있다.

또 한 가지 震域(진역)의 古神道(고신도)와 元始(원시) 仙道(선도)와의 사 이에 있는 觀念的(관념적) 共通(공통)의 一面(일면)을 볼 것이 있다. 그것 은 死(사)에 대한 觀念(관념)에서니, 國語(국어) 죽음의 別稱(별칭)에 「돌 아가」와 한 가지 「올라가」란 것이 있음은 둘이 다 오랜 信仰(신앙)으로 부터 온 死生觀(사생관)일 것인데,「돌아가」다 함은 곧 자갸네의 朝鮮(조 선)이요 生命(생명)의 本源(본원)인「한울」로 歸去(귀거)함을 의미함이요, 「올라가」다 함은 곧 돌아가는「한울」은 위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며, 또 一面(일면)으로 하늘로 올라감에는 天梯(천제) 혹 天門(천문)인 域內(역내) 高山(고산)의 頂上(정상)을 經由(경유)한다 함에 말미암았다.

그러므로 死者(사자)가 있으면 그 送終(송종)의 中心事實(중심사실)인 것 이 다른 것 아니라, 아무쪼록 山(산)으로와 하늘로의「올라감」을 順利(순 리)하게 함이니, 저 鮮卑(선비)가 冥途(명도)의 資糧(자량)을 붙여서 護送 (호송)함과 辰韓人(진한인)이 死者(사자)의 神魂(신혼)이 잘 飛揚(비양)하 라고 大鳥羽(대조우)를 얹어 送終(송종)함 등은 이 觀念(관념)의 具象化(구 상화)로 볼 것이다. 저 高句麗(고구려)의 東明聖王(동명성왕)이 終焉(종언) 에 黃龍(황룡)을 타고 升天(승천)하였다 함과, 新羅(신라)의 赫居世(혁거 세)가 또한 升天(승천)한지 七(칠)일에 五體(오체)가 散落(산락)하였다 함 과, 乃至(내지)壇君(단군) 以下(이하)로 끝에는 入山爲神(입산위신)하였다 는 이가 많음 등의 古義(고의)가, 다 이 죽음을 오라감으로 본 說話上(설화 상) 投影(투영)이라 할 것이다. 또 高句麗(고구려)의 大神(대신)의 一(일) 登高(등고)(혹 高登(고등))란 것이 있으니 이것도 무론 土語(토어)의 音寫 (음사)이려니와, 그 字(자)를 登高(등고)로 取用(취용)함은 內容(내용)을 字意的(자의적)으로 表現(표현)함으로도 볼 것이니,「울음」이란 것이 古 (고)「」道神學(도신학)의 上(상)에서 매우 중요한 一法相(일법상)임은 여러 가지로 알 수 있는 일이다. 發展(발전) 仙道(선도)에 있어서 還元(환 원)이니 復朴(복박)이니 하는 것이 아무리 高尙(고상)하고 微妙(미묘)한 것 이라 하여도, 실상 이「돌아가」라는 苦觀念(고관념)의 長成(장성)에 不外 (불외)한 것이요, 羽化(우화)니, 跣蛻(선세)니, 高擧(고거)니 上升(상승)이 니 하는 것이, <列仙傳(열선전) 以後(이후)와 葛洪(갈홍) 以降(이강)에는 어떠한 槪念(개념)을 갖게 되었든지, 그 原始形態(원시형태)는 一種(일종) 의 世界觀念(세계관념) ‧ 魂魄觀念(혼백관념)에 因(인)「올라가」라는 단순 한 思想(사상)이던 것이다.

僊字(선자)의 義(의)가 본디 升高(승고)를 의미함에 그침에서도 그 古義 (고의)를 분명히 짐작할 것이요, 支那(지나)에 있어서도 仙人(선인)을 古 (고)에는 神人(신인)으로 稱(칭)하고 聖人(성인)으로 銅管(동관)하고, 또 軍師(군사)의 師(사)나 한가지로 古(고)로부터 師巫(사무)를 熟用(숙용)하 고, 後世(후세)에도 女巫(여무)를 師娘(사낭)이라 하고, 그런데, 神巫(신 무)는 山中(산중)에서 靈(영)을 받는줄로 앎 등을 여기 較量(교량)할 것이 다.

上來(상래)의 考證(고증)을 다시 한번 要約(요약)하여 보건대,

(1) 조선의 古神道(고신도)에는 事神(사신)의 一行法(일행법)에「」 (「」)이란 것이 있었음 (仕神(사신)을「섬기다」라 하고, 告辭(고사)를 「외」라 함 등을 參互(참호)할 것).

(2) 이「」行(행)을 勤修(근수)하는 이를「」이라 일컫고,「」 이 略(략)하여 「」이라고 하게도 됨.

(3) 靈力第一(영력제일)의 古代(고대)에는「」이 사회적 ‧ 정치적으로 一種(일종)의 優越者(우월자)로 존경과 신뢰를 받았음.

(4)「」은 처음에 단순한 太陽(태양) 禮讚(예찬)을 中心(중심) 事實(사 실)로 하는 天神(천신) 封齋(봉재)이었으나, 旱天(한천) 禮日(예일)의 形式 (형식)이 轉(전)하여 一種(일종)의 呼吸運動(호흡운동)이 生(생)하고, 이것 이 차차 理論(이론) ‧ 實際(실제) 兩方(양방)으로 發達(발달)을 遂(수)하여 養生煉形(양생연형)의 道(도)로 展開(전개)하여 갔음.

(5) 그리 되기까지에는, 맨 처음에 魂魄(혼백)은 遊離(유리)하는 것이라 함과, 자갸네의 生本(생본)은 天(천)이라 하는 兩觀念(양관념)이 抱合(포 합)되어서, 차차 死後(사후)의 靈魂(영혼)은 天上(천상)으로 還歸(환귀)한 다 하게 되고, 또 邪鬼(사귀) 妖精(요정)의 觀念(관념)이 생기면서 安魂(안 혼) 慰想的(위상적)으로 一轉(일전)하여 升天(승천)이니 飛行(비행)이니 仙 化(선화)니 하는 信念(신념)을 鍾毓(종육)해 내었음.

(6) 이것에는 一(일)은「」의 道場(도장)이 高山(고산)의 頂上(정상)에 있었으미과, 一(일)은 그네의 古信念(고신념)에 高山(고산)은 天(천)의 關 門(관문) 혹 步階(보계)하 함이 있음이 助緣(조연)이 되었음.

(7) 이 山岳道(산악도)인「」法(법)이 支那(지나)로 流入(유입)하여 帝 王家(제왕가)에는 禪禮(선례)로 容入(용입)되고, 宗敎家(종교가)에는 僊道 (선도)로 奉持(봉지)되어 仙神僊(선신선)으로 차차 發展(발전)하였음. (8) 점차로 漢文學(한문학)이 輸入(수입)되고 그 思想(사상)이 流布(유포) 됨을 隨(수)하여「」의 固有(고유) 事實(사실)과 仙(선) 外來(외래) 명칭 의 間(간)에 接近(접근)과 着結(착결)이 行(행)하게 되었음.

(9) 그러나 처음에는 이「」을 漢譯(한역)하는 이름이 區區(구구)하 여, 혹 神人(신인)이라 하기도 하고, 혹 天神(천신)이라 하기고 하였으니, 후에는 오로지 宗敎的(종교적)인 仙子(선자)를 取用(취용)하게 되었음.

(10) 이렇게 仙(선)이라 稱謂(칭위)하게 됨으로 인하여 그것이 支那的(지 나적 神仙(신선)하고 混同(혼동)을 致(치)하게 되고, 또 朝鮮(조선) 古典 (고전)에 나오는 仙人(선인)이 필시 支那(지나) 仙說(선설)의 輸入(수입) 혹 模倣(모방)같이 보이게 되었으나, 그 民族學的(민족학적) 淵源關係(연원 관계)는 여하간에, 後代的(후대적) 事實(사실)에 있어서는 震土(진토)의 「」法(법)과 支那(지나)의 仙說(선설)과는 스스로 別件物(별건물)에 屬 (속)하는 것(그러므로 唐代(당대)에 支那的(지나적) 仙風(선풍)이 流行(유 행)한 뒤로부터는, 國仙(국선)이라는 標號(표호)를 붙여서 支那(지나)의 그 것과의 혼동을 피하게 된 것은 下文(하문)에 따로 적을 기회가 있을 것) (11) 震土(진토)의 「」法(법)은 그 元始態(원시태)로 말하면 본시 神山 (신산)에 入處(입처)하여 靈力(영력)을 感得(감득)하는 修行(수행)이니, 곧 시방의 智異山(지리산) ‧ 德物山(덕물산) 등에서 巫術(무술)을 感受(감수)하 는 것과 비슷한 것이었음.

(12) 「」의 靈場(영장)이던 故地(고지)에는 그 證迹(증적)이「」語彙 (어휘)를 冒(모)한 山名(산명)에 遺傳(유전)되었음.

(13)「」名(명)을 가진 名山(명산)에는 대개 仙人傳說(선인전설)을 가 진 것이 그 民俗的(민속적)背景(배경)과 說話的(설화적) 本質(본질)을 분명 히 일러 줌.

等(등)을 나타낸다 한 것이다. 아직 例證(예증)이 넉넉지 못하여 論者(논 자) 透徹(투철)하지 못한 憾(감)이 있으나, 이만하여도 朝鮮(조선) 古記(고 기)에 나오는 이른바 神人(신인) ‧ 仙人(선인)이란 것이 어떠한 내력과 성질 의 것임을 약간 밝혔을 줄로 안다.

그리하여 仙人王儉(선인왕검)의 仙人(선인)도 다른 대 혹 神人(신인)이라 고도 하는 것처럼 분명한 出處(출처)가 있는 것이지 백판 맹랑한 것 아님을 알며, 따라서 一部(일부) 論者(논자)의 이 仙人(선인)을 <列仙傳(열선전)> 의 그것에 比擬(비의)하여 云云(운운)하는 것이 타당하달 수 없음을 깨닫는 다. 과연 仙人(선인)에 王儉(왕검)이란 이가 있었던지, 또 그이가 壇君(단 군)이란 이였던지는 저절로 別個(별개)의 문제에 속할 것이려니와, 줄잡아 도 此方(차방) 古代(고대)의 神代的(신대적) 事實(사실)의 中(중)에는, 後 年(후년)에「仙人(선인)」으로 驛(역) 할 만한 무슨 事實(사실) 又(우) 稱 謂(칭위)가 있었던 것만이 이로써 약간 증명되었으면 그만이다.

筆者(필자)로서 讀者(독자)께

처음에 <壇君論(단군론)>을 四○回(사○회)의 預定(예정)으로 그 要略(요 약)을 述(술)하려 하였으나, 曲辯相仍(곡변상잉)의 餘(여)와 群疑轉滋(군의 전자)의 除(제)에, 文獻(문헌)과 民俗(민속)의 兩方(양방)으로 吾人(오인) 立論(입론)의 根據(근거)를 示(시)함이 또한 緊要(긴요)할 것을 思(사)하여 이렇게 煩碎(번쇄)와 張皇(장황)을 무릅쓰게 된 것이라, 一般(일반) 讀者 (독자)의 厭苦(염고)를 살는지는 모르되, 壇君(단군)의 學的(학적) 破顯(파 현)과 合理的(합리적) 護持(호지)가 어떻게 吾人(오인) 當面(당면)의 大事 件(대사건)임을 생각하면 多少(다소) 原諒(원양)하심이 있으리라 합니다. 이제 白頭山(백두산) 參覲(삼근)을 위하여 앞으로 잠시 續論(속론)을 停休 (정휴)치 아니치 못함은 더욱 罪悚(죄송)한 일이나, 聖蹟(성적)의 踏驗(답 험)은 本論(본론)의 上(상)에도 多少(다소)의 새로운 色味(색미)를 期待(기 대)할 듯합니다.

王險城(왕험성) 神設(신설)은 아직 人名(인명)으로의 王險(왕험)에 對(대) 한 考察(고찰)이 남았으며, 이것이 畢(필)하면 妙香山(묘향산) 神設(신설) 에 對(대)하여 약간 檢覈(검핵)을 試(시)하여 抹削論(말삭론)의 銓量(전양) 을 마치고 비로소 本論(본론)에 入(입)하여 우리의 見解(견해)를 披瀝(피 역)하게 됩니다. ▩

원주[편집]

  1. 史學雜誌第五編二八三頁以下(第四號四一頁), 又『遺書』中『外交繹史』七三頁以下(第八章朝鮮樂浪帶方考)
  2. 史學雜誌第五編九五○頁以下, (前年末의 學習院輔仁會雜誌에 別로 檀君考의 詳論이 잇다함)
  3. 十許年前의 京城日報日曜附錄에 白鳥氏의 談이라하야 揭載한 檀君說은 高句麗人의 樹木精靈崇拜思想으로서 脫化하야온것이란것이잇스니 이는 傳說考當時의 見解와는 약간 遺就한 자최를 볼 것이다.

주석[편집]

  1. 맹귀부목(盲龜浮木, 눈먼 거북이 물에 뜬 나무를 만났다는 뜻으로, 어려운 지경(地境)에 뜻밖의 행운(幸運)을 만나 어려움을 면하게 됨을 이르는 말)이라는 고사성어를 참조할 것.
  2. 원문은 ‘紀’이나, 오자임이 명백하다.
  3. 원문은 ‘許’이나, 오자임이 명백하다.
  4. 삼국유사 원문은 "圗"
  5. 삼국유사 원문은 "噐"
  6. 삼국유사 원문은 "圗"
  7. 동아일보 원문에는 "注(生?)炎"라고 되어 있으나, 삼국유사 원문에 따라 수정하였다.
  8. 삼국유사 권1에는 기이편 외에도 왕력 편도 있다.
  9. 논어》(論語) 〈술이(述而)편〉 七之二十 참조.
  10. 하늘이 제왕(帝王)이 될 만한 사람에게 내리는 상서(祥瑞)로운 징조(徵兆). 임금의 명령(命令)
  11. 도참(圖讖). 미래(未來)의 길흉(吉凶)에 관(關)하여 예언(豫言)하는 술법(術法)이나, 또는 그러한 내용(內容)이 적힌 책(冊). 미래기ㆍ정감록 따위
  12. 하도(河圖). 옛날 중국(中國) 복희씨(伏羲氏) 때에 황하(黃河)에서 용마가 지고 나왔다는 쉰 다섯 점의 그림. 우 임금 때의 낙서(洛書)와 함께 주역(周易) 이치(理致)의 기본(基本)이 되었다.
  13. 낙서(洛書).중국(中國) 하(夏)나라의 우왕(禹王)이 홍수(洪水)를 다스렸을 때, 낙수(洛水)에서 나온 영묘(靈妙)한 거북의 등(等)에 쓰여 있었다는 글. 《서경》(書經)의 홍범구주(洪範九疇)의 원본(原本)이 되었다하며, 팔괘(八卦)의 법도 여기서 나왔다 함
  14. 백제는 중국 고대 전설 중의 오제(五帝)의 하나이다. 천하의 서방(西方)을 관장한다.
  15. 《삼국유사》 〈권제1〉
  16. 동아일보 원문은 關이나 삼국유사 원문에 따랐다.
  17. 제석(帝釋) 또는 제석천(帝釋天, 산스크리트어 शक्र,Śakra)은 범왕(梵王)과 함께 불법(佛法)을 지키는 신(神)이다.
  18. 일연의 이러한 견해에도 불구하고, 현대 역사학계는 태백산이 곧 묘향산이라고 보고 있지는 않다. 태백산 참조.
  19. 중국 신화의 오제(五帝) 중 하나인 요(堯) 임금을 말한다.
  20. 서주 무왕 희발(西周 武王 姬發, ? ~ 기원전 1043년?)은 주나라(周)의 초대 군주로서, 성(姓)은 희(姬), 이름은 발(發)이다.
  21. 전조선(前朝鮮 : 단군조선), 후조선(後朝鮮 : 기자조선), 위만조선(衛滿朝鮮)을 통칭한 것이다.
  22. 동아일보에는 ‘紀’라고 기재되어 있으나 이는 오자이다.
  23. 동아일보에 四千十八라고 기재된 것을 바로잡았다.
  24. 권근은 1396년 9월 15일에 <왕경작고 王京作古> 등 8수, 9월 22일에 <시고개벽동이주 始古開闢東夷主> 등 10수, 10월 27일에 <청고가어내빈 聽高歌於來賓> 등의 6수를 지었다. 이에 대하여 명제는 어제시(御製詩) 3수를 지어 권근에게 내려 주었다. 응제시주 참조.
  25. 여기서 금상(今上)은 곧 세종을 뜻하므로, 금상 11년 기유년은 1429년이다.
  26. 지리지〉 원문에는 ‘高禮’라고 표기되어 있다.
  27. 동아일보에는 ‘至’가 누락되어 있다.
  28. 당요, 요 또는 제요(帝堯)는 중국의 신화 속 군주이다. 중국의 삼황오제(三皇五帝) 신화 가운데 오제의 하나이다.
  29. 원문은 ‘母’이나, 오자임이 명백하다.
  30. 인도의 석가모니불이 제자 마하가섭에게 부촉한 正法眼藏이 西天 28祖와 중국의 6祖를 거쳐 한국의 승려에 의해 해동으로 전래되어 한국이 석가불 正法의 主處라고 자임한 전승을 불법동류설이라고 한다. (朴胤珍, 〈신라말 고려초의 '佛法東流說'〉《한국중세사연구 제21호》(2006.10) 222쪽 참조.
  31. 동국통감의 〈외기〉에 단군조선 條가 들어 있다.
  32. 목이 잘려 죽은 귀신
  33. 사실(事實)을 갈피 잡아 알아내기 힘듦
  34. 원주 1: 사학잡지 제5편 288쪽 이하(제4호 41쪽), 또한 [나카 미치요의] 《유서》 중 《외교역사》733쪽 이하(제8장 조선 낙랑 대방 고)
  35. 허망하고 터무니없음
  36. 사학잡지 제5편 950쪽 이하, (전년말의 학습원 보인회 잡지에 별도로 단군론의 상론이 있다 함.)
  37. 10여년전의 경성일보 일요부록에 시라토리 씨의 담화라 하여 게재한 단군론은 고구려인의 수목정령 숭배사상으로서 탈바꿈하여 온 것이라느 것이 있으니 이는 단군고 당시의 견해와는 약간 차이점을 볼 것이다.
  38. 장님용 지팡이
  39. 동아일보에는 ‘面’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40. 동아일보에는 ‘此’라고 표기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말라야(Malaya)산를 뜻하는 것이므로 ‘末’이 타당하다.
  41. 향나무의 일종이다. 산스크리트어로 gośīrsa-candana.

<一九二六(1926)년 三月三日(3월 3일) ~七月二五日(7월 25일) 東亞日報(동아일보)>

라이선스[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