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수양/12
12
[편집]이월에 들면서 환후는 매우 중하였다.
이월 열엿새(경오년) 날이었다.
왕은 그 날 아침에는 예에 없이 기분이 깨끗하고 상쾌하여 이즈음 그다지 부르지 않던 소원한 신하까지 와내(臥內)에 불러들이어서 정사(政事)의 하문까지도 하여서, 왕실지친은 물론이요 외신들까지도 적지 않게 기뻐하고, 왕의 환후에 퍽 희망을 품게 하였다.
이월의 짧은 해가 툇마루 밖을 잠깐 비취고 지나갈 무렵에 왕은 옅은 잠을 풀낏 들었다.
온몸에 식은땀이 축축히 배면서 왕은 잠에서 깨었다.
이 때 용태는 갑자기 변하였다. 못된 꿈을 본 때문이었다.
깨면서 겁에 뜨인 안정을 당황히 구을릴 때에 어렴풋이 보인 것은 몇 개의 얼굴이었다. 이 「보인다」는 것을 확실히 감각하는 순간에 그 얼굴의 주인이 누구라는 것도 알아내었다. 그러나 이 얼굴의 주인과 저 얼굴의 주인이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 사람인지는 두세 번 다시 본 뒤에야 알았다.
지극히 예민한 감각과 지극히 무딘 감각의 두 가지로 활동하는 지금의 왕의 두뇌는, 지금 마주 보이는 당신의 백형 양녕대군과 맏아드님 동궁과의 상호 관계를 명백히 하려고 잠깐 눈을 감았다.
잠시는 알아낼 수가 없었다. 마음이 답답하였다. 그 마음에 못하지 않게 가슴이 답답하였다. 숨을 들이쉬면 시원하도록 들이킬 수가 없이 중도에 도로 토하게 된다. 토하다가는 답답하여 중도에 도로 들이키게 된다. 가쁘기 한량없었다. 하─ 하─ 숨찬 호흡에 시달리면서, 왕은 온머리의 힘을 집중하여 맞은편의 한 노인과 한 중년(동궁의 춘추 서른 일곱이었다)의 효상 관계를 알아내려고 애썼다.
『전하. 기흡이 어떠시오니까?』
동궁의 말이었다. 입을 놀림에 따라서 동궁의 기다란 수염이 움직이며 그 수염 뒤에 절반만큼 가리워 있던 다른 얼굴이 칠 분 가량 나타났다 도로 감취었다 한다.
그 수염 뒤의 얼굴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내면서 왕은 온 상호 관계가 한숨에 환하여졌다. 수염 뒤의 얼굴은 둘째 아드님 수양이었다.
왕의 병적 신경은 한 순간 소름 돋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야윈 뺨에 히믈히믈 경련이 일어났다. 풀솜 넣은 처네이불 위에 또 풀솜이불과 그 위에 털 이불을 써서 두껍게 덧덮인 이불을 들치려고 팔을 꺼냈다. 몸을 일으키고 싶었던 것이다.
『전하. 밀수를 뫼(가져)오리까?』
양녕이 그의 웅장한 음성을 기껏 작게 하여 여쭈어 보았다.
『아니. 좀─일어─나……』
숨찬 아래서 왕은 겨우 말하였다.
『안정해 계오시지 왜 일……』
『아니. 좀 부축……』
왕은 일어나려고 한편 팔을 이불 밖으로 간신히 꺼내었다. 꺼낸 팔을 엄습하는 지독한 냉기에 진저리를 쳤다. 그러면서도 한편 팔마저 꺼내려고 움찔거렸다. 시측하던 사람들이 어찌하여야 좋을지 알 수 없어 서로 얼굴만 보았다. 가만 방임할 수도 없는 일이요, 그렇다고 이 추운 날 중태의 왕을 일어나게 부축하기도 어렵고 그러니 왕이 이 아픈 몸을 일으키려는 것은 무슨 곡절이 있을듯해서 억지로 말리기도 힘들었다.
시측하는 사람들이 거취를 작정치 못하고 서로 서로 관망만 할 동안 왕은 양팔을 다 꺼내었다. 그러고는 누웠던 몸을 엎드리려고 다리까지 움찔움찔하였다. 갱(抗)에 불을 때기는 많이 때었지만 지독히도 일기가 매워서 방안은 서늘쩍하였다. 병인이 일어나기도 적당치 못한 온도였다.
『누구 좀……』
왕은 조력을 청하였다.
드디어 양녕이 나왔다. 양녕은 바람나지 않게 관복의 소매와 자락을 가다듬고 조심조심히 내려가서 왕의 측면으로 돌아서 왕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었다.
『전하. 어떻게 하오리까.』
존귀한 아우님의 귀에 입을 가까이 하고 은근히 물었다.
숨찬 호흡, 떨리는 사지─왕은 형님께 몸을 맡기면서,
『좀 앉게 해 줍시오.』
하고 청하였다. 양녕은 처네를 끌어 빼어 왕의 몸을 감싸면서 부축하여 일어나게 하였다.
왕은 가쁜 숨을 괴롭게 쉬며 몸을 떨며 간신히 일어나 앉았다. 그러고 뒤에서 부축하는 형께 몸을 기대고 왼쪽 팔은 사방침에 의지하며, 힘없는 안정을 들어 동궁을 건너보았다.
『동궁, 좀 이리로……』
동궁은 어찌할 바를 모르는 듯, 구원을 청하는 것같이 얼른 백부 양녕을 보고 곧 동생 수양을 돌아보았다.
『저하(邸下). 어서 복명하세요.』
수양도 동궁을 권하였다.
동궁은 부왕께 가까이 내려가 부복하였다. 그러나 왕이 동궁을 부른 것은 마주 대하여 무슨 분부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저 보(寶=玉璽)를……』
왕은 옥새를 당신의 무릎 앞에 갖다 놓게 하였다. 그러고 이 국가와 국왕의 존엄을 대리하는 장중한 물건이 들은 함을 굽어보았다.
수양 이하 모두 조용하였다. 왕의 숨소리만 가쁘게 정숙을 깨뜨렸다.
왕이 잠깐 앉았다가 곧 다시 누을 줄 알았더니 그럴 것 같지 않으므로 내관이 양녕을 대신코자 가까이 오는 것 같지 않으므로 내관이 양녕을 대신코자 가까이 오는 것을 왕은 금하였다. 그리고 숨찬 가운데서 간신히 정승을 와내(臥內)로 불러오기를 명하였다. 그런 뒤에는 당신의 분부가 시행 되기까지,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여, 눈을 굳게 감고, 양녕께 몸을 의지한 채 묵묵히 기다렸다.
정승들이 들어왔다. 조심스러이 들어와서 제 대군(諸 大君)의 뒤에 부복하였다.
정승들이 들어왔는데도 왕은 아무 말도 없으므로 뒤에서 왕을 붙안고 있던 양녕이 조금 목을 앞으로 빼어 왕의 측면을 보니, 왕은 잠시 들었다.
중태의 왕을 깨우지 않으려고 모두 죽은 듯이 조용하였다.
왕의 가쁜 호흡성만 들리었다.
왕은 오래 자지 않았다. 얼마를 기다리지 않아서 왕은 한 번 진저리를 치면서 눈을 떴다. 뜨고는 둘러보았다.
『동궁.』
동궁을 불렀다. 이번의 음성은 전번보다 적이 명료하였다.
『네이.』
『이리로─이─이리로.』
왕은 안정을 굴려서 동궁의 앉을 자리를 지시하였다. 몇 번을 다시 지시하고 다시 지시해서 동궁이 왕의 뜻에 합하는 자리에 갔는데, 그것은 왕의 오른쪽 곁으로서, 즉 왕과 나란하여 앉아서 제 대군, 군이며 정승들과 상대하게 되는 것이었다.
동궁을 곁에 앉힌 뒤에 왕은 잠깐 숨을 돌리고 이번은 다시 눈을 적이 굴리어 안평숙(安平 叔)의 곁에 앉아있는 세손(世孫)을 보았다.
『이리로 나오너라.』
세손을 앞으로 불렀다. 세손이 나와서 부복할 동안 왕은 머리를 틀어서 반만큼 형 양녕께 돌렸다─
『형님. 팔 피곤하시지요.』
『아니올시다.─전하 왜 이렇게 가벼우십니까. 칠팔 세 소아나 다름없습니다.』
『잠깐만 더 붙들어 주세요.』
왕은 형께 향했던 안정을 동궁 쪽으로 돌렸다. 가뜩이나 약하던 위에 부왕의 환후 시측하느라고 근래 더 형지없이 피골이 상접한 동궁. 안면은 수염에 감취어서 그다지 모르겠지만 두 손은 장작개비같이 핏기 없고 살 없었다. 몸이 약할 뿐 아니라 마음 또한 지극히 약해서 지금 뭇 왕실 지친과 정승들에게 남면(南面)하여 앉은 것이 매우 거북한 모양으로, 눈이 부신 듯이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이편 세손을 건너다보니 아홉 살 난 소년에게 소년다운 활기보다 어른다운 기색만 풍부히 보였다.
(국가를 조리하기에 너무 약하구나!)
왕은 팔을 펴서 무척 애를 써서 옥새를 끌어당겨 동궁 쪽으로 밀어 놓았다. 그리고 당신의 몸도 많이 애를 써서 옥새를 끌어당겨 동궁 쪽으로 밀어 놓았다. 그리고 당신의 몸도 많이 애를 써서 동궁을 향하여 돌아 앉았다.
몸을 돌리고는 양팔을 펴서 방바닥을 찾었다. 차차 차차 머리를 수그리다가 푹하니 엎드려 버렸다.
동궁과 양녕이 깜짝 놀라서 붙들어 일으키려 하매 왕은 엎드린 채 그냥 두라는 뜻으로 머리를 약간 저으며
『저하(邸下)─전하(殿下)─휼민(恤民)합쇼. 무겁소이다. 곤하오이다.』
차차 듣기 힘들도록 옥음은 작아갔다.
동궁은 망지소조하여 몸을 와들와들 떨고만 있었다.
왕자와 정승들 틈에서는 느껴 우는소리가 들렸다.
왕은 엎드린 채 다시 일어날 기력이 있어서 몸을 지탱하던 팔꿈치도 넘어지고, 가슴까지 방바닥에 대어버렸다.
양녕이 내관과 협력하여 왕을 다시 자리에 누였다. 동궁과 세손은 왕의 분부로 그냥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기동(起動)하기 때문에 생겼던 피곤을 한참 삭힌 뒤에, 왕은 수양을 어전에 불러내었다.
『유야! 내가 임종이야. 나 없은 뒤에는 동궁 저하를 나로 알고 지성껏 섬겨라. 저하는 선비(士)라 도덕 높고 착하기 한량없으시지만 눈이 미처 못 믿는 데가 있을지도 몰라. 그런 때엔 네가 잘……』
『분부 안계실지라도 생각 믿는껏 섬기고 보좌하오리다.』
왕은 잠시 숨을 돌려 가지고 이번은 안평을 불렀다.
『너도 힘을 합해서 저하께 충성해라.』
『수양 형 계신데 신 같은 어리석은 자야 있으나 없으나 일반이겠습니다.』
왕은 입맛을 다시고 좀 쉬어서 다시 말을 하였다.
『너는 매사에 수양 형께 투심(妬心)을 품어. 형제 화목해라.』
왕은 왕자들을 차례로 어전에 불러서 유훈을 하였다. 그 뒤에는 형 양녕대군께 모든 조카들은 잘 감독해서 나라에 충성되고 형제 화목토록 지휘해 달라고 당부하였다.
마지막에는 정승들을 불러서 국사와 왕실에 대하여 한결같이 진충갈력하기를 부탁하였다.
왕자와 대신들에게 뒷당부를 한 뒤에 왕은 동궁을 물러가게 하고 그 자리에 세손을 불러 앉히었다.
눈을 감고 세손의 손을 잡았다.
임종을 눈앞에 놓고 이 어린 손자님의 장래를 생각하매 한량없이 근심되었다.
왕에게는 동궁이 장수치 못할 것 같이만 생각되었다. 이전에 당신의 형 양녕께는 동궁이 단명하고 세손이 영특하면 좋겠다고 말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 어느 날인가, 왕이 우연히 자선당(동궁처소) 뒤로 돌아갈 때에, 동궁이 어린 아드님(세손)을 훈시하던 그 말─삼촌을 삼가라. 수양숙(首陽 叔)을 삼가라. 무서운 사람이다─하던 말을 들은 이래로 왕은 새로운 큰 근심 때문에 늘 번뇌하였다.
세손이 만약 어렸을 때부터 아버님되는 동궁께 그런 교훈을 받고 자라면 장차 영구히 수양숙과는 화목하게 지낼 수가 없을 것이다. 지금 이 반조(半造)의 국가를 완성시킴에 있어서는 절대로 수양의 힘을 빌지 않을 수가 없다. 동궁이 나약하여 인군(人君)은 될지언정 명군(明君)은 될 가망이 없는데, 동궁의 아드님인 세손도 또한 그러하다. 지금껏 아버님인 동궁의 아래서 무엇보다도 삼촌 공포 관념만 길러왔다. 인제부터 비로소 그 사람됨을 만들어야 할 터이다. 이제 당신 세상 떠나고 보면 그것도 가망 없고 장차로 볼지라도 동궁과 같은 착한 선비는 될지언정 왕자(王者)의 금도와 배포는 없고 배울 수 없고─배우려면 수양을 믿고 수양을 본떠야겠는데, 수양에게는 반항심과 공포심만 품은 세손이라, 한심하고 딱하였다.
태조 시대에 무력(武力)으로서의 개국(開國)이 되었고 정종, 태종, 두 대에 민심 수습을 간신히 끝내어 이 어수선한 국가를 당신이 그 뒤를 받아 삼십 년간, 다듬고 깎고 갈고 닦아서 인제는 국가로서의 기초는 만들어 놓았다.
당신의 손으로 꽃까지 찬란히 피우고 싶었다. 불행히 하늘이 수(壽)를 빌리지 않아 중도에 손을 떼게 됨에 하다 못해 마음 놓이는 후계자에게 뒤를 맡기로 싶다.
『국가 태평시에는 맏(昆)을 사(嗣)로 하고 국가 어즈러울 때는 공(功)있는 자를 사로 한다.』는 원칙에 따라서 당신이 이렇듯 수(壽)가 짧을 줄은 모르고 지금은 태평시라 보고 말을 취하였더니, 급기 임종이 눈앞에 당도하고 보니 아직 태평시가 못 되었다.
그러나 인제는 다시 바꿀 수가 없는 노릇이다. 당신의 형님 양녕대군같은 현인이면 모르지만 그렇지 못하고는 지금 바꾸었다가는 더 큰 화란이 미칠 것이다.
일이 이미 이렇게 된 이상에는 동궁의 도량과 수양의 진충갈력을 기다릴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사랑하는 손자님의 손을 잡고 눈을 감고 있을 동안 왕의 눈 좌우에서는 눈물이 한없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