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수양/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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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임신년 봄도 다 간 어떤 날.
왕은 그날 울울한 심회를 금할 수가 없었다. 특별히 무슨 일이 생긴 것이 아니라, 공연히 울울하고 심난하였다. 그 사이 정사가 하도 밀렸으므로, 며칠을 강잉히 시무를 하였더니 그 탓인지, 옥체도 과히 피곤한 위에 이즈음 상기하는 도수도 매우 잦았다. 몸을 일으킬 때마다 정신이 아뜩하여 무엇을 붙들거나 그렇지 않으면 다시 한 번 앉았다가 일어나고 하였다. 내관에 부액을 받고도 온몸을 내관에게 맡기지 않고는 스스로는 걸어 다니기가 힘들만큼 쇠약하였다. 구미는 하나도 없어서 미음이나 육즙을 조금씩 마시어서 해갈이나 겨우 하는 것이었다.
그날은 더욱이 심기가 불평하여, 생명에 대한 위협을 많이 받았다.
이러다가는 불시에 어떤 일이 생길는지 예측을 할 수가 없었다.
영외에는 내관이 국궁하고 대령하고 있고 왕의 곁에는 소년 세자가 혼자서 무슨 글을 외우고 있었다.
『야!』
왕은 소리쳐 내관을 불렀다.
『유신들 가운데 누구 있는가 나가 보아라.』
동궁 시절의 학우(學友)요, 장차 이 국가의 큰 기둥이 될 학사들을 불러보고 싶었다.
왕은 유신(儒臣)들을 편전으로 부르라 하고 당신도 의대를 정제하고 내관의 부액으로 편전으로 나갔다. 어린 동궁도 배행하였다.
한각경쯤 뒤에는 거기서는 군신간에 연회가 열렸다. 아직 복상중이라, 여약이며, 음률은 없었지만, 왕은 몸소 떨리는 손으로 술을 부어 신하들에게 행주를 하였다.
『범옹이(신숙주), 근보(성삼문). 옛날 함께 글 배우던 생각이 나는가?』
『전하. 신들이 죽기 전에야 그 때 영광을 왜 잊사오리까?』
『옛날일세.』
왕은 신하들을 위하여 술을 따랐다. 부왕의 투철한 안목으로 뽑아 낸 이 명신들─
당년에 그렇게도 능란하고 그렇게도 명민하던 이 신하들이, 당신 재위 이 년간에 무엇을 하였나? 무위무능하게 이 년간을 보냈다. 그들이 갑자기 무능하게 되었다. 혹은 당신이 신하를 제 기능에 따라서 시킬 줄을 알지를 못했다.
『자. 근보. 마시게.』
『황공하옵니다.』
『범웅이도 마시게.』
『황공무지로소이다.』
『임금이 주는 술이니 마음놓고 먹게. 혹은……』
왕은 말을 끊었다. 끊고 뒷말은 계속하지 않고, 얼마를 더 술을 돌렸다.
적지 않게 술이 돌았다. 술이 돌고, 그래도 정신 잃지는 않으리만큼 되었다. 그 때 왕은 약간 자세를 바로 하며 돌던 술잔을 멈추고, 세자의 손목을 끌어서 앞으로 나오게 하였다.
왕은 고요히 입을 열었다.
『내 수가 얼마 남지 않았다.』
두선거리는 기색이 있었다. 왕은 말을 끊으려는 눈치도 있었다. 좌석은 일시에 조용하여졌다.
『여러 말 안 하마. 단 한 마디 내게 충성된 것과 일반으로 이 어린 세자에게도 충성되게. 긴말은 쓸데없고 단 한 가지의 부탁일세. 세상 떠나도 눈감지 못할 일─세자의 장래만 잘 보아주겠다면 다른 부탁은 아무 것도 없네.』
『전하!』
『딴 말은 말고 세자만……』
『전하!』
취기가 일시에 깨었다. 숙주가 먼저 푹 머리를 숙였다. 뒤따라 삼문, 팽년, 모두 머리를 숙였다.
흐득흐득 느끼는 소리가 그들 사이에서 났다.
세자는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자네네 같은 현신이 있으니 뒷일을 무엇을 근심하리. 다만, 세자가 하도 연천해서 그게 마음에 걸리는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