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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양/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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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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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 열 나흘─

그 해는 더위가 일찍 와서, 오월 십일 경에는 찌는 듯 꽤 무더웠다.

근일 왕의 환후는 갑자기 중하여졌다. 시름시름 눈에 뜨이지 않게 조금씩 중하여 가던 용태가 오월 십일 경에는 갑자기 중하여졌다.

열 나흗날 아침에 국을 한술 마셨다. 그러고 한참 있다가 갑자기 숨채기를 시작하였다.

의관(醫官)들이 황급히 달려 왔다. 달려 와서 진맥을 하였으나, 이 급작스런 변화에 응할 방책이 없었다. 물러 나와서 서로 의논하였다. 그러나 갑자기 대책이 없었다. 그러는 동안 왕은 정신을 잃었다.

의관들이 협의한 결과 무슨 탕약을 한 주발 들여올 때 왕은 약간 정신을 수습하였다.

이때야 대령하고 있던 승지들은 약간 두서를 차렸다.

『정승─ 정승은 들어왔느냐?‖

모기 소리와 같은 왕의 옥성이었다.

내관이 대청의 승지에게 정승 입직 여부를 물었다.

『이리로 불러라─음, 종친─더욱이, 수양은 부르지 말아라.』

중관은 왕명을 받고 빈청으로 달려나갔다.

그 때 수양은 빈청에서 영의정 황보인과 함께 왕의 환후를 근심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 전날 밤도 내전 대청후를 근심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 전날 밤도 내전 대청에서 밤을 새우고, 왕이 조금 안돈되는 듯하여서 나와 기다리던 것이었다.

내전에서 중관이 달려 나왔다.

『입직한 정승과 판서 듭시라오.』

어명에 불리운 사람들은 옷깃을 바로 하며 중관의 뒤를 따랐다. 수양도 당연히 불리운 줄 알고 함께 일어났다. 그러나 중관은,

『수양대군은 좀 뒤에 듭시라는 분부요.』

하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내전으로 가버렸다.

일어섰던 수양은, 싱겁게 우뚝 서 버렸다. 물론 들어갈 수 없었다. 우두커니 서 있기도 싱거웠다.

홱 노염이 폭발하려 하였다. 괄괄한 성미로 참기 힘들었다.

그러나 수양은 꾹 참았다. 어명이었다. 어명에 거역할 수 없었다.

『열 번 참아 안 되면 스무 번 참고 스무 번 참아 안 되면 서른 반 참고, 참고, 참고 또 참겠습니다.』

일찍이 부왕께 맹세한 이 말이 문득 생각났다.

『아─아, 형왕께서는 왜 그리도 괴벽하시나?』

과거를 돌아보아도 그 말에서든 행동에서든 손톱눈만큼도 불공하거나 불쾌한 생각을 품어본 적이 없거늘, 왜 이다지도 괄시를 하시나.

『형님!』

눈물이 솟았다.

창피며 체면은 둘째 문제다. 아마도 보매 임종이시다. 임종이면 필시 고명이시다. 고명에 수양 자기만을 뽑아 치우는 것은 웬 일일까.

지금 자기는 이 종실의 가장 어른이 아니냐. 여섯 대군(大君)과 열 군(君)이 휘돌아 가는 이 왕실에서 자기 같은 억센 사람이 있어서 눌러 놓지 않으면 장차를 어떻게 수습하려는가.

왕실도 그렇거니와, 대신으로 볼지라도, 황보인, 김종서, 정본, 누구, 누구, 모두 아무 능도 없는 사람들─누가 위에 있어서 그들을 지휘하고 지도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하지 못할 위인들이다. 세종 말년 수년간을, 정사를 방임하였고, 이 임금 이 년간 역시 복상이라 하여 무위히 보내서 해이하고 문란한 이 정부를, 이제부터라도 바로 잡아야 할 터인데, 불행히 형왕 승하하고 소년 조카가 등극하여, 선왕의 고명이라 하여 늙고 무능한 신하들 이 정권을 잡고 무위한 세월만 보내면 나라의 꼴이 무엇이 되랴.

태조와 태종의 정력을 다 모아서 국가를 건설하고 세종의 지식과 박학으로서 기초를 잡아 놓은 이 방토는, 이러다가는 다시 꺼질 밖에는 도리가 없을 것이다.

분하다기보다 억울하다기보다, 기가 막혀서 수양은 움쩍도 못하고 그 자리에 못 박힌 듯이 서 있었다.

어이없고 기가 막혀서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 있을 때에 누가 어깨를 치므로 돌아보니 백부 양녕이 들어온 것이었다.

백부를 보매 지금껏 참고 있던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백부님!』

『오오. 한데 너 울기는 왜 우느냐?』

『임종이십니다.』

백부는 눈이 둥그렇게 되었다.

『아, 그럼 너는 왜 여기 있느냐, 어서 들어가자.』

『들지 말라는 분부올시다.』

양녕은 수양의 얼굴을 보았다. 눈치채었다.

『누구누구가 들어갔느냐?』

『영상, 좌우상, 좌우상찬성, 이, 호, 예, 병조판사, 기타 수 삼인이올시다.』

『지금 고명이시구나.』

『그렇습니다.』

『네나 내나 모두 못 불리기야 일반이니라, 여기서나마, 자!』

양녕은, 손을 읍하고 북향하여 길이 절하였다. 수양도 백부를 따라 절하였다.

안평 이하 대군이며 군들도 차차 들어왔다.

고명이 끝난 뒤에야 왕은 삼촌과 동생들을 와내에 불렀다.

『길지 못한 생애를 폐만 많이 끼쳤구나, 어린 조카 의지할 데 없는 동궁이니, 숙(叔)들이 잘 보좌해서 장차 현철한 군주가 되도록 지도해 주게.』

뭇 동생에게 어린 세자를 부탁하였다.

『동궁. 좀 이리로.』

가까이 불러 앉히었다. 초췌한 용안─더욱이 어린 세자를 이 어지러운 판국에 남겨놓고 떠나는 왕은 못내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매우 힘들이어 세자 쪽을 바라보고 다시 뭇 대군 쪽을 바라보고 하였다.

『백부님!』

양녕도 찾았다.

『하도 백부님 연노하셔서 뒷일을 부탁한다는 건 사체가 되지 않았습니다만, 백부님 생존 중에는 끝끝내 어린 동궁을 보호해 줍시오.』

『분부가 안 계실지라도 조금인들 소홀히 생각하리까. 안심하소서.』

고명, 부탁, 다 끝나고 그날 저녁 왕은 잠자는 듯이 고요히 이 세상을 떠났다. 임신년 오월 십사일.

수 삼십 구. 경오년 이월에 즉위하여 재위 이년 석 달이었다.

묘호(廟號)를 문종(文宗)이라 하였다.

이 왕의 외아드님(후일의 단종)이 그 뒤를 이어 보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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