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수양/37
37
[편집]안평의 무이정사에 수양대군의 행차—
아무리 심복치는 않지만 그래도 형님의 행차라, 안평은 황황히 문밖에 형님을 맞았다.
수양은 가마에서 내리며 미소하며 안평의 인사를 받았다.
『오늘 사회(射會)가 있다지? 나도 좀 구경하세.』
이 형님의 말에 안평은 좀 어색한 듯이 미소하며, 정자를 돌아서 후원에 열린 사회장으로 형님을 인도하였다.
안평의 인도로 수양은 사장으로 돌아갔다. 차일 아래 남향하여 중앙에 호상(胡床) 하나가 놓여 있고, 그 좌우편으로 조금 떨어져서 문객들의 자리가 있었다. 오늘의 경기자는 청과 홍으로 나뉘어서 동서에 갈려 있었다. 하인들은 수양의 자리를 마련하느라고 돌아간다.
그 동안 수양은 위에 친 차일을 쳐다보았다. 그러고 안평을 보았다.
차일에는 미리(龍)를 수놓았다. 안평의 몸에는, 흡사히 용포와 비슷한 청포가 입혀져 있었다.
수양은 한 번 거기 눈을 스친 뒤에는, 천연스런 표정으로 준비된 자리(안평의 오른편)에 고요히 앉았다.
안평은 형님이 그 두 가지(차일과 옷)를 한 순간이나마 주목하는 것을 알고, 잠깐 재미없는 안색을 하였다.
형제는 잠자코 경기를 구경하고 있었다. 이 자리의 경기자들이며 구경하는 문객들도, 모두 뜻 안한 수양의 행차에 다 기분이 싱거워졌다. 이즈음 차차 이면적으로 불안하여 가는 세상 형편을 알므로 수양이 이 자리에 뛰쳐 들리라고는 그들도 의외였다.
수양은 표면은 아무렇지도 않은 기색으로 경기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눈을 그리로 향하고 있을 뿐이지, 경기를 구경하는 것은 아니었다. 청이 나은지 홍이 나은지 전혀 의식하지 못하였다.
수양의 마음에 지금 걸려 돌아가는 것은 안평의 옷과 차일이었다.
불쾌하였다. 아무리 자기의 문객과 겸인들만 모인 자리라 할지라도 감히 용을 수놓은 차일을 치랴? 용포를 본뜬 옷을 입으랴.
잠시 (전혀 의식을 못하면서) 눈을 경기하는 데 붓고 있다가 수양은 벌떡 일어섰다.
『활을 보니 나도 한 번 쏘고 싶군.』
차차 불쾌하여 가는 자기의 기분을 삭이기 위해서였다.
형님의 안색 때문에 안평도 내심 불안하던 차이다.
『그러세요.』
하고 하인에게 명하여 가장 센 활과 살을 가져오라 하였다.
등대 되는 활과 살을 가지고, 수양은 서너 걸음 나서 차일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옷소매도 걷는 듯 마는 듯 그러고 겨냥도 하는 듯 마는 듯, 살 다섯 대를 연하여 쏘았다. 그러고는 과녁에 맞는지 안 맞는지도 주의하지 않고 (굳은 자신이 있으므로) 활을 내던지고 돌아섰다. 돌아서서 차일 안으로 들어서서 안평의 소매를 잡았다.
『국향(菊香)이나 맡으며 좀 뒤고 돌아가 보세.』
큰 소리도 아니요 명령적 어조도 아니었다. 그러나 안평은 불복하지 못할 압력을 느끼고 따라 일어섰다.
형체는 차일 밖에 나섰다. 나서면서 수양이 또 입을 열었다.
『차일 참 좋을세. 이 차일은 대궐에 바치고 다른 것 치게.』
한 뒤에 곧 뒤를 이어,
『지금 즉시 말일세.』
하고 보태었다.
이것은 거역하지 못할 말이었다. 이 말에 거역할 수 있는 사람은 이 땅에는 없다. 안평은 얼굴이 창백하게 되며 하인에게 그대로 시켰다.
수양은 머리를 숙이고 앞서서 걸었다. 안평은 역시 머리를 숙이고 뒤를 따랐다.
형제는 뒤 산길로 나섰다. 차차 사람들의 소리도 안 들리는 데로 찾아 들어갔다.
산국(山菊)의 향내는 그윽히 코로 몰려 들어왔다. 이 국화 덤불을 헤치며 형제는 묵묵히 더 깊숙한 데로 찾아갔다.
적지 않게 갔다. 인적 끊인 꽤 깊은 곳까지 이르렀다.
앞서서 가던 수양이 걸음을 멈추고 홱 돌아섰다. 양팔을 길게 폈다.
이 갑작스런 행동에 안평은 소스라쳤다. 부르짖음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
『아이 아!』
그때 수양은 팔을 펴서 안평의 관복이 흉배(용을 수놓은)를 나꾸어 뜯었다.
『기린(麒麟) 흉배 있겠네그려?』
비교적 고요한 음성이었다. 그러나 안평은 대답지 못하고 몸만 와들와들 떨었다.
『좀 앉아 쉬세.』
수양은 어떤 바위에 걸터앉았다. 그러고, 그냥 몸만 떨고 서 있는 안평에게 앉기를 권하였다.
수삼차의 권고에 안평이 간신히 앉자, 수양은 한 마디씩 한 마디씩 생각해 가면서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내 신분이 왕자이니 괜찮으리라고 심상히 여기고 하는 일이겠지만, 남의 이목도 있으니 삼가게.』
다른 때 같으면 형님에게 이런 말을 들으면 무슨 톡 쏘는 대답을 할 안평이었다. 그러나 직전에 겪은 두 가지의 일은 안평으로 하여금 아무 대답도 못하게 하였다.
수양도 한참을 아무 말도 없이 있었다.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자네, 이즈음 절재(節齋: 김종서)와 너무 자주 왕래한다고 항간에 말이 많데. 자네도 절재의 위인을 짐작치 않나? 예전 절재가 헌묘(獻廟: 태종)께 대해서며 영묘(英廟: 세종)께 대해서 양녕 백부를 얼마나 참소했는지 자네도 알 걸세그려. 양녕 백부가 무슨 흠절이 있는 분인가? 청풍명월 같으신 영녕 백부의 기백이야 천하에 모를 사람이 없는데, 절재인들 그걸 몰랐겠나? 그러면서도 참소 또 참소, 그 더러운 심사를 생각하게. 아첨해서 고임받기 위해서 남을 참소한다, 죽을 구덩이에 집어 넣는다─ 양녕대군을 죽입시다, 죽입시다. 얼마나 참소했는가? 자기가 고임 받자고 남을 참소─ 참소도 죽이자는 참소를 하는 그런 마음보를 가진 사람과 가까이 상종하는 건 이롭지 못한 일일세.』
수양은 여기서 말을 끊었다. 그러고 안평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표정에 좀 다른 움직임이 있기를 바라고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안평은 입을 뾰로통하니 비꼬고 눈을 푹 내리깐 채─ 입으로 대답은 안 하나 마음으로 여전한 불복의 표정이었다.
수양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고 말일세, 자네가 지금 절재와 가까이 상종한다 하나, 그 사람됨이 그런 이상엔, 언제 자네를 해하려고 참소하고 모해할지 어찌 알겠나? 사람의 천성은 바꾸지 못하는 법이라, 지금 자네와 상종하는 게 잇속이 있을 듯싶으니 상종하지, 장차 다른 사람과 상종하는 편이 이로울 것 같으면, 그때는 자네를 배반할 건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만 눈치, 지각은 자네도 있음직하이그려.』
그냥 안평의 얼굴을 보면서 말하였다. 그러나 안평의 얼굴은 여전히 뾰로통한 채로 변함이 없었다.
수양은 또 입을 열었다.
『또─ 또 다른 일을 생각해 보세. 우리 돌아가신 아버님(수양은 「세종」이라지도 않고 「영묘」라지도 않고 아버님이라 하였다)의 단 외꼭지 장손 되시는 우리 조카님, 우리 전하─ 그분이 잘 되셔야 우리 문중(종중이라 하지 않았다)이 창성하고, 그분이 복 누리셔야 우리 문중이 영화로울 것 아닌가? 그분께 불행이 계시면 우리 문중의 불행이요, 그분께 불길한 일이 생기면 우리 문중의 고난이야. 우리 문중이 합력해서 그분 잘되시도록, 그분께 복 내리시도록 해 올려야 할 것일세. 이 점도 서로 잘 알아서……』
그 뒷말이 좀 힘들었다. 하기 매우 어려운 말이었다. 한 순간 주저한 뒤에, 천천히 뒤를 꺼내었다.
『남의 농락에 속아서 자멸지도를 밟지 않도록, 남에게 속아 화를 스스로 사지 않도록……』
과연 안평에게서 대답이 튀어져 나왔다. 맞서는 말이었다.
『형님. 지금껏 잠자코 듣고 있으니까, 형님은 혼자서 올려 치고 내리치고 별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마는, 난 온 무슨 말씀인지 한 마디도 못 알아듣겠소이다. 절재가 어쩌니 참소가 어쩌니 무슨 말씀인지……』
수양은 곧 대답하였다.
『스스로 마음에 묻게.』
『물어야 그렇지. 절재는 우리나라 육진 개척의 영웅, 용흥지지(龍興之地)를 회복해서 우리 땅으로 만든 은인이 아닙니까?』
『그게 영묘의 공적인가, 절재의 공적인가?』
『영묘의 분부로 절재가 한 일이지요.』
『여보게. 말을 가지고─ 말재간을 가지고 말다툼을 하려는 게 아닐세. 내가 한 말이 마음에 짚이는 데가 있으면, 재고 삼고하란 말일세.』
『재고 삼고는커녕, 십고 이십고를 해야 그렇지요.』
수양은 눈을 번쩍 들었다. 노염에 불붙는 눈치가 나타나려 하였다. 그러나 즉시로 그것을 삭였다.
한 순간 주저하고 입을 열었다.
『다른 말은 그만 두고, 절재는 만고의 흉물, 더욱이 게다가 불측한 심사까지도 품은 듯싶은 점이 많아. 그래서 근근 주상께 계청해서 군측에서 제거할까 하는데, 자네가 그냥 절재와 가까이 사귀다가는 공연한 화가 자네게까지 미칠지도 모르겠기에 미리 말해 두는 걸세. 나라의 집안으로 그런 사람과 친근한 때문에 결련이 되었다면, 말대까지의 치욕이니 그만치만 알아두게.』
어떻게 보자면 몹시 경망한 말과도 같은 이 말이지만 수양은 이 말까지 하면 혹은 안평도 내심 저퍼하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 달라지지 않을까 해서 이 말을 한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수양은 속으로 울고 싶었다. 아무런 말을 할지라도 안평의 뾰로통한 마음은 달라지는 것 같지가 않았다.
수양은 해가 저물어서야 무이정사를 나섰다.
전혀 허사였다.
안평을 달래어 보기도 하였다. 위협적 언사도 써 보았다. 의리와 인정으로서 효유해 보기도 하였다. 동정도 빌어보았다. 그러나 안평은 끝끝내 자기는 아무 것도 모르고, 따라서 수양의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하겠다는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민망하였다.
설사 다른 별짓이 없다 할지라도 김종서는 국가 쇄신상 국가 확청상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될 사람이다. 하물며 수양 자기를 배척하는 위에, 자기를 배척하기 위해서 더 무서운 마음까지 품었음에랴.
이 절재를 제거하려매 안평은 왜 함께 덧묻으려 하는가?
그만치 알아듣도록 타이르고 책망까지 하다시피 했는데, 그냥 붙어 떨어지지 않으려는 것은 웬 셈이냐?
안평의 심사는 얄미웠다. 수양 자기에게 반항하려는 심사라든지, 또는 더 높은 데를 반항하려는 심사든지를 생각하면 얄미웠다.
그러나─
문득 생각났다. 어렸을 적에 아버님의 품안에서 어머님의 품안에서 함께 놀고 함께 자라던 그 정애, 대궐의 후원을 손목을 잡고 나비를 잡으려 돌아다니던 그런 추억─
어렸을 적부터도 비꼬아진 성격이 없는 바는 아니었지만 한 부모의 아래서 함께 자라던 그 정애가 무럭무럭 상기되어, 장차 실행될 확청 행동에 있어서 안평이 덧걸려 들어간다 하면 그것은 참지 못할 일이었다.
『손을 놓아라!』
『떨어져라!』
그만치 말하는데 왜 그냥 붙어 있으려 하느냐? 이것을 떼는 재간은 없을까? 몹시 기분이 무거웠다.
언짢은 기분, 불쾌한 기분, 걱정스런 기분, 노여운 기분─ 가지가지의 나쁜 기분이 마음속에 뒤서리어 돌아갔다.
이런 좋지 못한 기분 때문에 마음 불편할 때는 언제든 양녕 백부를 찾고 싶은 생각이 저절로 일어나는 수양이었다. 수양은 행차를 백부의 댁으로 가자고 분부하였다.
양녕은 수양의 마음이며 사람됨을 잘 안다. 아버님 세종대왕과 백부 양녕대군의 두 분은 수양의 입장을 잘 알며, 수양의 심경을 잘 이해하며, 수양의 고충을 늘 동정하는 것이었다. 「울분」이라고 형용하고 싶은 지금의 심경을 백부의 앞에 피력하였다.
『백부님! 안평과 김종서를 떼어낼 수가 없겠습니까?』
안평과 절재의 새세 특별한 관계가 있고, 그 결합된 관계가 목적하는 바 목적까지 설명한 뒤에 수양은 이렇게 하소연하였다.
『백부님도 무론 잘 아시겠지만 안평은 누가 뒤에서 줄잡아주는 자가 없으면 겨자씨만한 일 한 가지도 하지 못하는 위인이 아니오니까? 종서와만 떼면 안평은 손가락 하나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제 판단은 못 가질 위인이 아니오니까? 떼고 싶어요. 아니 떼고 싶을 뿐 아니라. 꼭 떼어야겠어요. 그런데 제게는 뗄 방침이 생각나지를 않습니다그려.』
『너뿐 아니라 영묘가 계셔도 그 방책은 생각해 내지 못하리라. 김종서는 스스로는 떨어지지 않을 위인이고, 안평은─ 안평도─ 둘 가운데 하나이 이 세상에서 없어지기 전에는─ 안타깝기로 앞이 딱 막힌 위인이고, 멧돼지 같이 완미하고도 음흉한 위인이고……』
백부는 안평을 지극히 미워한다. 뭇 조카님 가운데 선왕(문종)과 안평은 양녕이 진심으로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 가운데 선왕을 싫어한 것은 선왕의 마음이 왕자다운 긍휼심이 없고, 장자다운 관대심이 없고, 대인다운 활달이 없고 유자(儒者)다운 훈계성이 없고 한낱 시정의 여편네 같이 투기심 많고 의심 많고 배타심(排他心) 많은 점을 싫어한 것으로서, 요컨대 일국의 국왕으로서의 기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안평을 싫어한 것은, 안평의 모든 사람됨을 다 밉게 보기 때문이었다. 비꼬아지고, 남을 긁기 좋아하고, 깊은 꾀도 없이 음모를 좋아하고, 게다가 주접대고 주착 없고 그 위인의 일에서 십까지를 죄 싫어하고 미워하였다.
그런지라, 일찍이 아우님 되는 세종대왕께도 늘, 만약 장차 동궁(문종)이 누구를 의심하려면 안평이야말로 의심할만한 사람이라고 아뢰고 하였다. 성격상으로도 양녕과 온갖 점에 있어서 정반대였다. 이것이 더욱 양녕으로 하여금 안평을 싫어하게 한 큰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던 안평이, 이전 양녕 자기가 예언한 바와 같은 일을 하는 형적이 분명하다고 할 때에, 양녕은 자기의 예언이 불행히도 적중한 데 탄식하였다.
『그러나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물론 종서는 없애버려야 할 게지. 이건 내 사사 원혐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마는, 종서의 위인이 이전 영묘께 대해서 얼마나 이 나 양녕을 없애 버리자고 야단을 쳤느냐? 종서인들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나를 없애잔 게 아닌 건지도 알 게지. 내왕(乃王)께 영합하고자 제 더러운 소인의 마음으로 성인(聖人) 영묘(세종)의 마음을 촌탁해서, 나를 없애자는 게 내왕께 고임 받는 방도라고 생각하고 애매한 나를 죽이자고 야단을 하다가 도리어 영묘께 엄책을 듣지 않았느냐? 심사 이런 인물이 국가에 재상으로 있으면 나라의 꼴이 무에 되겠느냐? 이번의 흉심은 차치하고라도 그런 인물이 국정을 맡아보았다가는 나라를 망칠 일이니 없애버려야지. 하여간 평생을 노안(怒顔)을 나타내 보지 않은 황정승(황희)도 늘 절재에게는 책망이 지엄했고, 중인의 앞에서도 치욕을 늘 주고 했구나.』
『네, 저도 잘 압니다. 문제되는 것은 안평이올시다. 절재 만약 법에 엎드리게 된다면 그 심술이 저 혼자 당할 게 아닙니다. 반드시 안평을 끌고 들어갈 겁니다. 그것을 어떻게 합니까. 지(智) 없이 용(勇) 있고, 의(義) 없이 욕(慾) 있는 위인이오라 이모저모 한 모도 쓸데는 없지만, 안평을 끌고 들어가면 이 일을 어쩝니까?』
여기서 수양의 우울한 얼굴을 들여다보며 양녕은 파안일소하였다.
『너는 용도 없고 지도 없구나? 선참 후주해 버리려무나.』
『네?』
『못 들었으면 그만 둬라.』
못 들을 까닭이 없다. 그리고 양녕도 참으로 못 들은 줄 알았으면 다시 한 번 말해 주었을 것이었다. 들었겠기에 흐려버리고 만 것이었다.
과연 세상을 더 오래 살았으니 만치, 양녕의 의견은 수양이 생각도 못하였던 것을 암시하여 주었다.
흐르던 물이 동에 막혀서 못 흐르다가, 동이 터지기 때문에 한꺼번에 흐르듯─ 안평의 문제 때문에 해결방책이 막혀 있던 것이 이 한 마디로 한꺼번에 다 해결되었다.
『그런 탐욕 하나밖에는 아무 것도 없는 위인이 어떻게 육진 개척의 위업을 성취하였는지, 내 원 참.』
『그러기에 말이로다. 영묘가 사람을 알아보시는 안목은 귀신 이상이었느니라. 도대체 다른 일보다도 영묘께서 제삼자(子)로서 사위(嗣位)에 오르시기를 수락하신 그 놀라운 안목을 보아라. 남을 알아보기도 힘들지만, 사람이란 자기 스스로를 알아본다는 건, 대 성인이 아니고는 못하는 법이니라. 본시 내가 장자(長子)이니만치 순서대로 내가 먼저 사위에 섰다가, 헌묘(獻廟)의 뜻이 나를 폐하고 제 삼자를 택하시고자 하실 때, 만약 영묘께서 당신 스스로를 잘 아시지 못하면─ 당신이 이 나, 장자보다 낫다고 스스로 굳게 믿으시지 않았으면 그 의리 굳으신 마음에, 내가 폐사(廢嗣)되고 당신이 대위(代位)하시겠다고 승낙을 하셨겠느냐? 당신이 이 맏아들 되는 나보다 썩 나으시다고 굳게 믿으셨기에 대위를 승낙하셨지, 그렇지 못하고서야 그 굳으신 의리로써 한사코 거절하시지 승낙하셨겠느냐? 당신 스스로를 그만치 아시는 분이니까, 남을 알아보시는 안목이야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
『영묘, 육진 개척의 큰 뜻을 품으시고, 만조의 백료 중에서 골라내신 것이 절재, 김종서가 아니고는 이 일을 시킬 사람이 없고, 절재 아니고는 이 일을 치를 사람이 없다 하신 말씀─ 삼공육경에서 비롯해서 미관말직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건 못할 일이라고 반대하는 가운데서, 김종서를 골라내서 종서에게 시키셨구나. 모두 깜짝 놀랐지. 그 지혜라는 건 약에 쓰려도 없는 위인이 어떻게 이 큰일을 감당하랴 하고— 그랬더니 뒤에 보니, 놀라운 안목, 지혜 있는 사람이면 이 일을 감당을 못해. 도저히 못할 일이라고 겁이 앞서고 겁이 앞서면 될 일도 안 되는 법이니라. 지혜 없기 때문에 부임을 했고, 그 막하에 꾀 있는 사람들을 속하게 해서, 멧돼지 같은 밸과 막료의 지혜로 앞을 당하고, 영묘는 서울 계시면서 세밀한 점까지 모두 친히 지휘하시고─ 그때 그 세밀한 지휘는 나는 대개 잊었지만, 정원일기를 뒤져보면 알리라. 절재에게 대하여 이렇다 저렇다─ 뇌물을 즐겨합니다, 너무 국탕을 남용합니다, 연해 올라오는 참소를 모두 깔아 버리시고 연해 칭찬만 하시고, 칭찬 뒤로 지휘를 겸하셔서 이 지혜는 없는 절재의 마음을 흡족히 해주시고, 색북 생활에 만족하도록 해 주시고, 과연 영묘 아니면 이 일을 시키지 못하고 절재 아니면 그 임에 당하지 않고─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게다. 육진 개척은 이렇게 해서 됐구나. 국가에 대해서 공적이 크기도 하지.』
『저도 그 공적을 압니다. 그 공적을 가지고 노후만 더럽히지 않았으면 그 공적을 죽백에 새기게 될 것을……』
『현묘(文宗)의 실수니라. 유난히 괴벽한 고명을 하셔서 종서의 자긍심을 길러 주신 게 실수니라.』
수양은 머리를 숙였다.
『수양은 들지 말라!』
현묘 고명 때의 억울하던 회상이 획 마음을 스쳤다. 수양 자기를 꺼리면 하다못해 양녕 백부께라도 고명을 하셨던들, 김종서로 하여금 유아독존의 만심을 품게 하지 않았을 것을—
『백부님, 저는 이즈음 매일 용안을 우러릅는데, 우러르면 우러를수록 애연해요. 영묘 승하사신 이후로는 누구 한 번 머리를 쓸어 올린 분도 없이, 귀염 한번 못 받아 보시고─ 백부님, 저 어렸을 적에 늘 절 보시고는 요 녀석 요 녀석 하시고, 좀 자란 뒤에는 이 녀석, 이 녀석하고 하시지 않으셨어요? 근년 제가 자라고 보니, 그런 말씀 그런 호령 안 하십니다그려. 그게 제겐 쓸쓸해요. 요놈하고 한번 꾸중하시는 걸 듣고 싶어요. 어린애의 응석─ 우리 전하는 그런 재미 한 번 못 보시고, 보수 겨우 열 셋에 벌써 노숙한 분 같으신 데가 많이 뵈어요. 우리 어렸을 적과 왜 그렇게도 다르겠습니까? 제 뜻대로만 할 수가 있다면 우리 전하는 강녕전으로 들여 모시고, 장발하시기까지 단 일 이년간이라도 보통 소년들과 같으신 자유로운 생활을 하시도록 해 드리고 싶어요. 어렸을 적에 이런 재미 하나를 못보고 겉늙고, 장발하시면 일생에 무엇 하나 잃어버린 것 같지 않을까요? 그 재미 한번 드려 보고 싶어요.』
『네 성미가 내 성미와 비슷해서 그런 생각을 하느니라. 나도 본시 세자로 책봉되어 까다롭고 결박된 생활을 하다가, 문득 영묘께 사위를 물려 드리고자 일부러 차차 난행(亂行)을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일부러 시작한 노릇이지만 그 길에 발을 들여놓고 보니, 인간지락이 거기 있어. 그 재미를 맛보고 보니, 왕후장상이 다 무에냐. 인간 수효 억조창생이라 해도 나만치 복 있는 사람 없으리라.』
수양은 백부를 우러러보았다. 일국의 세자라는 존귀한 위를 헌신같이 차 던지고, 그 여생을 산수간에 자유로이 돌아다니며 호활 노락히 보내는 이 노인—
그 견식이 부족하랴, 학식이 부족하랴? 그러나 그것은 그런 듯이 내세우지 아니하고, 부귀와 영화만을 누리고 인간 세계의 군잡스런 문제에서는 멀리 떠나서 지내는 이 존귀한 노인—
백부는 수양 자기에게,
『너는 나를 닮아서……』
라 한다. 물론 호활 노락하고 작은 절에 구애되지 않은 점은 닮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자기는 속세의 속무에 연연하여 이 백부와 같이 모든 잡된 사무에서 초연할 수는 없었다. 돋는 달, 지는 해나 즐기며, 천하를 도외시하고 지내기에는 자기는 속세에 너무 집착이 크다.
─어떻게 해서든 이 국가를 더 훌륭하고 좋은 국가로 만들어 보자.
그의 마음에는 이 생각이 강력히 자리잡혀 있어서, 이것만은 버릴 수가 없다. 신분으로 말하자면 자기나 이 양녕 백부나 꼭 같다. 왕의 지친으로 그 지위든 부귀든 백부와 추호 다른 데가 없다. 자기도 세상 잡무를 내던지고 산수간에 놀면, 어디 조금도 백부와 다른 데가 있으랴. 활쏘기에 능하고 사냥을 즐겨하고, 호활히 놀기를 즐겨하고, 술을 즐겨하고─ 이런 성벽까지도 흡사하다.
그러나 자기는 백부와 같이 산수간에 놀자면, 국사가 근심 되고, 좋은 친구와 술상을 대하려면 정치담이 먼저 나오고─ 요컨대 인선(人仙)이 될 수는 도저히 없음을 어찌하랴.
수양은 길이길이 탄식하였다. 이 자기의 정치와는 도저히 끊을 수 없는 집착성과, 양녕 백부의 신선 같은 심경과 및 안평의 헛된 욕심─ 이 세 가지를 비교하는 생각이 마음속에 뒤서리어, 마음은 여전히 무겁고 어지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