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의태자/제1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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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는 죽는다[편집]

궁예왕이 죽고 왕건이 고려 태조가 된 소문은 벌써부터 서울에 전하였으나 정식으로 고려 왕 왕건의 사신이 국서(國書)를 가지고 신라 조정에 이른 것은 왕건이 궁예를 내어 쫓은 뒤 약 일 개월, 궁예가 삼방에서 죽은 뒤 약 반 개월 후이었다. 왕건도 궁예가 죽은 줄을 확실히 안 뒤에야 비로소 천허가 내 것인 줄을 믿은 것이다.

고려 왕의 국시를 가진 사신이 서울에 오매, 신라 조정에서는 이것을 받을까 아니 받을까 하여 여러 논난이 생겼다. 받지 말자고 주장하는 파이 말은 이러하였다 ————

『첫째 왕건은 감히 원(元)을 칭하고 신라에 대하여 종주국의 예를 표하지 아니하고 외람되이 대등국(對等國)의 군주로 자처하였으니 받을 수 없고, 둘째 왕건은 그 군주를 시역(弑逆)하였으니 용납치 못할 불충의 죄인이라 비로 그 죄를 다툴지언정 그 국서와 사신을 받아 일국의 왕으로 인정하여 줄 수 없고, 세째 만일 왕건을 일국의 왕으로 인정하여 대등의 예를 준다 하면 진헌에게도 이것을 허하여야 할 것이니, 이리되면 선왕이 삼국을 통일한 본의를 잃고 다시 천하가 삼국으로 나누어지는 것이라.』

함이었다.

이 의견을 극력으로 주장하는 이는 시중 유렴(裕廉)이요, 상대등 위응도 유렴의 의견을 옳이 여겼다. 위응이 유렴의 뜻을 옳이 여긴 데는 또 다른 연유가 있다. 그것은 왕건을 왕으로 허하는 것이 진헌을 노엽게 하여 반드시 무서운 후환이 잇을 것을 두려워하는 것과, 또 외응이 평소부터 진헌의 편이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이손 김성(金成)과 그의 종제 되는 아손 김률(金律)은 유렴의 의견에 반대하여 이렇게 주장하였다 ————

『지금 국력이 피폐하여 영문에는 싸울 만한 군사가 없고, 창고에는  만한 재물이 없으니, 이때에 패기 만만한 왕건을 공연히 충동하여 변경에 근심이 되게 하는 것도 득책이 아니요, 또 지금까지 시작을 안보하여 온 것은 궁예가 진헌이 쌍방에 대립하여 서로 감히 침범치 못한 까닭이니, 이제 만일 왕건을 노엽게 하여서 왕건으로 하여금 진헌과 통하게 하면, 이는 적으로 하여금 힘을 합하여 나를 치게 함과 다름이 없으니, 이것은 가장 졸렬한 계책이다. 차라리 왕건을 달래어서 진헌을 막게 하는 것이 이 이 제이(以夷制夷)의 묘책이 아닌가.』

함이었다.

두 편이 서로 논쟁하는 동안에 만조 백관은 대개 침묵하여 어느 편 바람이 이기는가를 바라보았다. 서뿔리 주둥이를 놀리다가 만일 다른 편이 이기는 날에는 자기가 설 곳이 없음을 아는 까닭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왕이 김성과 김률의 의견을 쓴다는 뜻을 표하매, 그제야 문무 제신은 과연 김성 이손의 말이 옳다고 찬성하는 뜻을 표하였다.

이때에 조부이신 효종(孝宗)의 공으로 서로 대내마(大柰麻)가 된 김충(金忠)이 나서서 비분 격렬한 어조로 왕께 아뢰었다. (김충은 후일의 마의태자다)

『대내마 신 김충이 아뢰오. 신은 나이 어리고 배운 것이 없사오나, 이제 조정에서 국가 대서를 의논하는 바를 보았건만 차마 잠잠할 수 없사옵는지라 엎디어 한 말씀을 아뢰고자 하옵나이다.』

왕이 보니 그는 표표한 한 소년이라. 얼굴이 준수하고 눈이 빛나며 목소리가 맑음이 옥을 굴리는 듯하다. 왕은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여 말하라는 뜻을 표하였다. 조신들 중에 평소부터 김충이 과격한 언론을 즐겨하는 줄을 아는 이들은 이 철없는 것이 또 무슨 소리를 하려는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그의 칼날같이 날카롭고 살대같이 곧은 말이 두려워 고개가 움츠러듦을 깨달았다. 저마다 제 속에는 건드릴까봐 맘이 오마조마하는 부스럼이 있고 김충의 말은 반드시 사정 없이 그 부스럼을 푹푹 찌를 것을 알기 때문이다.

김충은 왕의 윤허하심을 받아,

『지금의 국력이 피폐하와 재력과 병력이 족히 서로 진헌을 섬멸하고 북으로 왕건을 진정할 힘이 없사온 것은 과연 이손 김성의 아뢴 바와 같사옵고 왕건을 달래어서 진헌을 누르는 것이 어이 제이의 묘책인 것도 또한 김성 이손의 말과 같사오니, 하루 이틀의 구차한 편안을 도모할진댄 이만한 상책이 없을 것이오며, 또 시중 유렴이 아뢰는 바와 같이 왕건이 외람히 대등국으로 자처하는 죄와, 또 그 임금 궁예를 시역하는 죄를 나토 아 사신을 베고 국서를 물리친다 하면, 왕건이 반드시 폐하를 원망하고 진헌과 상통할 염려가 있사온 즉 이는 두 도적을 모아 한 큰 도적을 이루는 것이라. 구차한 일시의 편안을 위하여서는 이만한 하책이 없을 것인가 하나이다. 그러하므로 아직일 없기를 위하여는 이손 김성의 책을 쓰심이 마땅한가 하나이다.』

김충이 도도하게 여기까지 말을 하니, 왕이나 제신이 모두 무슨 말이 더 나오려는고 하고 김충을 바라보았다. 김충의 옥같이 흰 얼굴에는 흥훈이 돌고 눈에서는 사람의 폐간을 꿰뚫는 듯하는 광채가 발하였다. 그 넓은 대화전(大和殿)은 먼지 하나 구는 소리도 들릴이만큼 고요하였다.

김충은 더욱 소리를 가다듬어,

『그러하오나 신이 그윽히 생각하오니 나라를 다스리매, 모로미 천년 대계를 세우는 것이 선왕과 선성의 가르치심이라 하나이다. 예로부터 인과 의로써 치국 평천하의 근본을 삼았음을 들었사옵거니와, 일찍 불인과 불의를 용납하여 사직을 안보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사오니 이제 만일 왕건을 용납할 진댄 또한 진헌을 용납함이요, 또한 이 후에도 수없이 일어날 난신 적자를 모두 용납하는 것이라, 비로소 하루 이틀의 편안을 얻는다 하더라도 이는 천년 종사의 기초를 무너뜨림과 다름이 없사오니 이 일을 차마 한다 하오면 무슨 일은 차마 못하오리까.』

하고 김충의 목소리는 느끼는 듯 떨리는 듯 그 말 마디가 사람의 폐간을 푹푹 찌르는 듯하였다. 왕도 김충의 말에 점점 고개를 숙이고 김충을 비웃던 제신들도 감히 소개를 들지 못하였다.

김충은 복받쳐 오르는 가슴을 진정하여 더욱 간곡한 어조로,

『천년 종사가 만일 불의를 용허하는 고식지계로 태산반석같이 편안할 수 있다 하면, 혹은 왕건이, 혹은 진헌이 군사를 끌고 거룩한 서울을 말 발굽 밑에 밟을 날이 멀지 아니하여 이를 것을 신이 눈에 보나이다. 폐하께옵서 일월 같으신 의와 추상과 같으신 위(威)로 진헌 적과 왕건 적에 임하시오면 비록 두 도적의 마음을 화하시지 못하여 그 천하의 의인의 마음을 거두시려니와, 혹은 이 도적을 친하고 혹은 저 도적을 화하시지 못하여 그 천하의 의인이 마음을 거두시려니와, 혹은 이 도적을 친하고 록은 저도적을 화하시면 오직 하늘과 백성의 뜻을 잃을뿐더러, 또한 두 도적의 원망을 부르실 것이오니 , 이 어찌 슬픈 일이 아니오리이까. 두 도적이 비록 강하고 무섭다 하오나 천명과 민심은 그보다도 더욱 두렵고 더욱 힘있는 것이라 의로써 천명과 민심을 거둠이 국가 만년의 대계인가 하오니, 복원 폐하는 역적 왕건의 사자를 베어 의 있는 곳을 천하에 보이시고, 또 백고나 유사에게 명하시와, 진헌과 오아건과 불의로써 서로 통하기를 금하시고 널리 천하에 의인·지사를 모아 십년 생취, 십년 교훈의 지혜를 본 받아 일월 같은 대의의 왕사(王師)로 진헌·왕건 등 도적을 진멸하시고 천년 종사를 태산 반석위에 놓으심이 선명하옵신 폐하의 하오실 일인가 하나이다.』

하고 옥좌 앞을 물러나와 반열에 돌아 왔다.

왕도 아무 말이 없고, 제신들도 아무 말이 없다. 오직 시중 유렴이 고개를 들어 김충을 한번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지 아니하여도 더욱 칠월날에 만조 백관위 등과 이마에는 구슬땀이 흘러 떨어지었다.

그러나 김충의 충성된 말도 서지는 못하였다. 나이 많고 경험 있는 사람들은 의보다도 권모 술수(權謀術數)가 더 힘있는 줄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서 왕은 마침내 김성의 말대러 고려 왕 왕건의 국서를 받고, 받을 뿐 아니라, 포학 무도한 궁예를 치고 왕이 된 것을 하례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되기 때문에 김성이 상대등이 되어 국가의 정권을 가지게 되고 김성의 아들 김률은 아손으로 김성을 돕게 되어 신라 조정은 전혀 왕건의 편이 되어 버렸다. 따라서 지금까지 진헌의 편이던 사람들은 혹은 조정에서 물러나가고 혹은 절을 변하여 김성의 편이 되어 버렸다. 대내마 김충은 자기의 말이 서지 아니하고 역시 왕건을 이웃 나라의 왕으로 대우하는 것을 분개하여,

『아아, 의는 죽었도다.』

하고 조정에서 물러나와 버렸다.

조정이 고려와 친한다는 소문이 나매, 진헌은 얼굴이 주톳 빛이 되었다.

「응 견디어 보아라」하고 진헌은 이를 갈았다. 서울 백성들도 반드시 진헌이 가만히 있지 아니할 줄을 알고 오늘이나 내일이나 하고 백제 군사가 밀어 들어 올 것을 기다리고 인심이 흉흉하였다. 하늘에 살별이 뜬다는둥 대궐 마당에서 귀신이 울었다는둥 밤이면 백제가 있는 서쪽 하늘로서 살기가 비친다는둥, 진헌을 무서워하는 말이 민간에 돌아 갈 때에 일찍 진헌과 친하던 사람들은 하나씩 둘씩 이 핑계 저 핑계 저 죄목으로 붙들러 가서 갇히기도 하고 죽기도 하고, 그것이 두려워서 변복을 하고 살그머니 백제로 달아나기도 하였다. 김성의 미움을 가장 많이 받는 전 시중 유렴이 갑자기 간 곳을 알지 못하게 되매, 백성들 중에는 혹은 그가 김성의 자객의 손에 죽었다 하고 혹은 백제로 달아났다 하고 또 혹은 산으로 들어 가 중이 되었다고도 하였다.

이러한 말이 돌아 다닐 때에 서울에는 큰 흉조가 생겼다.

사천왕사(四天王寺) 때문에 세운 천왕의 손에 들린 활 줄이 밤중에 통하는 무서운 소리를 내고 저절로 끊어지고, 그 소리가 나자 법당 바깥 벽에 그린 개가 소리 높이 짖었다. 그밖에도 사람들은 무수한 흉조를 전하였다.

조정에서는 더욱 백제를 배척하고 고려와 화친하자는 정책을 세워 고려 서울 송도(松都)와 신라 서울과 사이에는 빈빈히 사신이 내왕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경명왕 사년 동 시월에 마침내 후백제왕 진헌은 친히 군사 일만을 거느리고 순식간에 대야성(大耶城)을 함몰하고 진례성(進禮城)으로 들어 와 바로 서울을 칠 기세를 보였다.

진헌은 신라에게 여러 번 속은 것이 분하였고, 더구나 신라 조정이 모두 왕건의 편이 되어 자기를 배척할 뿐 아니라, 자기에게 대하여는 일종 멸시하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 분하였다. 지금까지는 궁예를 두려워 감히 신라를 건드리지 못하였거니와, 이제 궁예가 이미 죽고 젖내 나는 왕건이 궁예의 나라를 빼앗았으니 아직 오아건의 날개와 발톱이 자라기 전에 신라를 무찌르고 삼국을 통일하리라 하는 것이 진헌의 맘이었다.

진헌의 군사가 물 밀듯 들어 오건마는 조정에서는 어찌할 도리를 알지 못하였다. 군사들도 구태여 공도 없을 싸움을 싸와 장차 천하의 주인이 될지도 알지 못할 진헌의 미움을 받을 까닭이 없이 몇 번 소리를 지르고 활을 쏘다가는 항기(降旗)를 들어 버렸다. 진헌이나 왕건의 눈에 벗어나는 것이 두려운 일이지, 나라의 눈에 벗어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로 알았다.

조정에서는 하릴없이 고려에 청병을 보내기로 하여 가장 글잘하고 말 잘한다는 어손 김률을 송도로 보낼 제 많은 보물을 여러 수레에 실어 폐백으로 보내고, 날마다 김률이 고려 군사를 끌고 돌아 오기만 고대하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진헌을 달래어 아무쪼록 싸움을 오래 끌도록 하였다.

김률은 종자 백여 인과 폐백 수십 수레를 가지고 멀리 한강과 임진강을 건너 송도를 들어 갔다.

새로 쌓은 성과 성문은 하늘에 닿은 듯하고 백모래 길은 마치 옥을 깔아 놓은 듯 빛나고 밝으며, 대도 상좌 우쪽에 새로 지어 놓은 집들에서는 아직도 송진의 향기가 나온다. 마침 겨울이라 송악의 무성한 솔밭은 흰 눈을 이어 자주 안개를 보이고 그 밑에 지어 놓은 만월에 대궐은 금시에 날아 하늘로 올라 갈 듯 장엄하고 화려하였다.

사신의 일행이 남대문을 들어 갈 때부터 만월대 대궐까지 기치와 창검이 별 곁듯하여 눈을 들어 보기가 어렵도록 으리으리하였다. 서울의 무너져 가는 성과 구백년 풍우에 꺼멓게 썩은 대궐에는 비길 수사 없었다. 강토로 말하여도 고려는 신라의 삼갑절이나 되고, 군사는 몇 십갑절이나 되거니와 새로 일어나는 고려의 기운은 옛 나라 신라의 몇 천갑덜이나 되는 듯하여 마치 조그마한 나라의 초라한 사신이 대국에 조공하어 들어 오는 듯한 느낌을 깨닫게 되었다. 모든 것이 새롭고 힘있고 컸다.

고려 왕 왕건은 신라 사신을 극진히 대접하였다. 사신 일행을 궐내에 머물게 하고 음식이나 거처를 왕이나 다름 없이 성대하고 정중하게 하였다.

더욱 김률 일행이 놀란 것은 왕의 위엄이 당당한 것이었다 높이 용상에 앉으매, 왕의 몸에서 빛을 발하여 온 방안에 있는 사람들을 누르고 비치는 듯하였다. 도저히 왕건의 위풍을 신라 왕에게 비길 수가 없다고 김률을 비롯하여 모든 사신들은 생각하였다. 그러면서도 대우하고 말도 존경하는 말을 썼다.

왕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조정의 문무 백관이 모두 씩씩하고도 공손하고 화기가 있는 중에도 범하기 어려운 위엄이 있는 듯하였다. 왕을 비롯하여 백관 유사로 아침 일찌기 일어나 날이 늦도록 정사를 보고 또 날마다 왕이 친히 나아가 군사를 조련하는 것을 살폈다. 해가 낮이 되어야 일어나서 정사들 보는 있고 아니 보는 날도 있는 신라와는 딴 판이요, 모두 시각이 바쁘게 근근자가 하는 양이 보였다. 어 통에 신라 사신들도 늦도록 자지도 못하고 또 밤이 깊도록 술을 마시고 늘지 못하였다. 그러기가 부끄러웠다.

김률은 오는 대로 곧 국서를 왕께 드렸으나 왕은 사흘 동안 청병에 관한 말은 하지 아니하고 다만 사신들을 위로하고 즐겁게만 하려 하였다. 김률이 조급해 하는 것도 왕은 짐짓 모르는 체하는 듯하였다.

나흘째 되던 날 김률은 왕의 앞에 나아가,

『무도한 후백제 왕 진헌이 까닭 없이 군사를 몰아 대야성을 무찌르고 이미 진례성에 들어 온 것을 본 지 벌써 보름이 넘사오니, 서울의 안위가 목첩에 다렸사온즉, 북원대왕께서는 곧 군사를 보내시와 천년 종사를 안보하게 하시옵소서.』

하고 간절히 청하였다.

왕건은 웃으며,

『철기 삼천(鐵騎三千)이 벌써 한강을 건넜으니 염려 놓으라.』

하였다.

김률은 놀래었다. 지금까지 삼사일이나 두고 아무 말도 없을 것을 보고 왕건의 심사를 의심하여 마음이 자못 초조하던 김률은 이 말에 너무도 감격하여 왕건의 앞에 꿇어 엎디어 한참은 일어나지도 못하였다. 그때에 너무 감격한 서슬에 김률이 왕건에게 대하여 신라를 물을 때에 소국(小國)이라고까지 되었으나, 급한 때에 청병하여 온 공으로 그 허물은 감추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아무리 청병이 중하다고 하더라도 왕건의 앞에서 「소국」이라고 자청한 것은 여간 큰 실태가 아니라 하여 두고두고 말썽이 되었다. 그러나 그 말 한마디가 왕건의 마음을 흡족케 한 것은 여간이 아니었다. 다만 왕건은 그것을 당연히 여기는 듯이 현어 사색은 아니하였다.

왕건은 아무쪼록 신라 사신 일행을 오래 머물게 하고 여러 가지로 관대도 하며 새로 일어난 고려의 힘도 보였다. 사신 일행 중에는 김률이 너무 왕건의 앞에 공손하여 신라의 위엄을 손상케 하는 것을 불쾌하게 여기는 이도 있건마는 대개는 왕건의 관대를 기쁘게 받았다. 더구나 밤마다 손님의 잠자리를 모시게 하는 북망이 미인이 그들의 마음에 들어 차마 송도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봉명 사신으로 너무 오래 지체할 수도 없어 칠팔일을 묵어 송도를 떠났다. 떠날 때에도 왕건은 사신들에게 많은 물건을 주고 잠자리에 모시던 북방 미인들도 선물로 주었다. 김률 이하 모든 사신들은 감지 덕지하여 자기네 임금에게 하는 예로 왕건의 앞에 하직하는 예를 하였다. 참다 못하여 일행 중에 가장 꼬장꼬장하기로 유명한 사관(史官) 대내마 간직(間直)은 소리를 높여,

『오, 고려의 충신들이여!』

하고 왕건에게는 절도 아니하고 뛰어 나왔다. 그러나 왕건은 그것을 책하지도 아니하였다.

고려 군사 삼천 기가 구원병으로 온다는 말을 듣고 진헌은 군사를 거두었다. 물론 지헌이 왕건의 삼천기를 두려워서 군사를 거둔 것은 아니다. 만일 왕건의 군사와 싸운다 하면 부질 없이 왕건과 적을 지을 것이요, 왕건과 적을 지으면 신라와 고려가 하나가 되어 자기를 적으로 할 것이니, 이것이 득책이 아닌 줄을 아는 까닭이다. 궁예는 비록 우직하여 자기와 합할 길이 없었다 하더라도, 왕건은 제 임금을 내어 쫓고 나라를 빼앗을 만한 사람이니 반드시 의리에 굳어 고집 불통하지 아니하고 무슨 변통이 있으리라고 진헌은 생각하였다.

진헌이 생각에도 될 수 있으면 신라와 합하여 자기가 신라의 종실을 붙드는 격으로 고려와 겨루는 것이 좋은 줄을 아나, 암침에 간에 붙고 저녁염통에 붙어 요리 붙었다. 그뿐더러 왕건이 고려 왕이 된 뒤로 신라 조정의 대세는 왕건에게로 기울어지어 여간해서 그것을 자기에게로 끌어들일 수가 없을 듯하였다. 그리고 본즉, 이제 또 왕건의 코를 찔러 북배를 적을 받을 까닭은 없는 일이요, 차라리 왕건과 화친한 체하면서 서서히 신라 조정을 자기의 손에 집어 넣을 꾀를 씀만 같지 못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하기 때문에 진헌은 고려 군사가 온다는 말을 듣고 곧 군사를 거두고 도리어 왕건에게 사신을 보내어 새 서울이 이룬 것을 하례하고, 또 지리산 대살(竹節)과 탐라(耽羅)의 준마(駿馬)를 예물로 보내었다.

왕건도 신라의 마음을 사기 위하여 삼천 철기를 구원병으로 보내기는 하였을망정, 새로 나라를 세워 아직 힘이 충실하기도 전에 오래 뿌리가 박힌 진헌과 혼단을 일으키기는 원치 아니하였다. 그래서 진헌이 보낸 예물을 받은 회답으로 솔메의 인삼과 북원의 녹용과 평야의 미인을 답례로 보내고 또 간곡하게 글을 지어 보내되 진헌을 나이로나 나라를 세운 연대로 나 형이라 하여 형의 예를 불렀다.

고려 군사 삼천은 진헌이 물려갔다는 말을 듣고도 여전히 서울을 향하고 행군하였다. 처음에는 군사를 급히 불렀으나 곰의나루에 이르러서부터는 하루에 이십리, 하루에 삼십리 구경 삼아 행군하고 큰 고을에서는 고려 군사를 맞노라고 소를 잡고 닭을 잡고 술과 떡을 몇 백석으로 하고 불시에 민간에 추렴까지 거두어 할 수 있는 좋은 대접을 하였다. 그러하는 동안에 고려 군사들은 지나는 곳 호총(戶總)과 인총(人總)까지 자세히 적간(摘奸)하였다. 창자 있는 도독이나 장군들은 이것을 밉게 생각하였으나 어찌할 수 없었다. 게다가 고려 군사들은 신라 지경에 들어 와 날이 갈수록 점점 교만하여지고 방탕하여져서 연로(沿路)에 행패가 자심하였다. 그러나 청해 온 군사라 이 모든 것을 다 받을 수 밖에는 없었다.

고려의 삼천 철기가 서울로 들어 오는 날에 서울 백만 백성들은 모두 나와서 바라보았다. 바라보는 백성들의 마음에는 모두 무서운 생각이 났다.

개국한 지 천년에 아직 한번도 다른 나라 군사가 밟아 보지 못한 서울에 삼천이나 되는 북쪽 군사가 의기 양양하게 들어 오는 것이 아무리 하여도 상서로운 일 같지는 아니하였다. 그래서 늙은이들은,

『응, 말세야.』

하고 고개를 돌리고 가 버렸다.

서울에 들어 온 고려 군사들은 제 땅 같이 백만 장안으로 행행 활보를 하였다 아무도 그들을 . 막을 사람이 없었다. 그뿐더러 삼천명 군사와 삼천필 말을 먹이느라고 날마다 쌀이 백섬에 피가 백섬, 소가 백 마리, 술이 삼십 독으로 당해 낼 재주가 없었다.

<차라리 진헌에게다 고을 하나를 떼어 줄 것을>

하는 생각을 조정에서나 백성들이나 다 같이 하게 되었다. 하루바삐 고려 군사가 물러가기를 바라나 좀체로 물러가지는 아니하고 그렇다고 제발 빌고 청해 온 군사를 어서 가라고 물리칠 염체도 없어서 꿍꿍 앓을 뿐이었다.

봄이나 되면 가려니, 여름이나 지나만 가려니, 추풍이나 나면 가려니 하고 아무리 기다려도 고려 군사는 갈 생각을 아니하고 날마다 먹고 마시고는 말을 달려 장안 대도상으로 시끄럽게 돌아 다녔다.

고려 군사가 이렇게 머물러 있는 것은 물론 놀기가 좋아서 있는 것은 아니었다. 혹은 신라의 사정도 염탐하고 혹은 신라의 벼슬아치들의 마음도 사고, 이번 기회에 신라에 뽑히지 아니할 세력을 심으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신라 대관들은 혹은 대낮에 위의를 갖추어, 혹은 밤에 은밀히 고려 영문에 출입하였다. 대관들이 출입을 하면 작은 벼슬아치들도 출입을 하게 되었다. 김률은 벼슬이 아소에 불과하건마는 고려 영문에 등을 대고 도리어 상대등 김성보다도 세력이 많았다. 또 제일 먼저 왕건과 통한 재암성 장군 선필(載岩城將軍善弼) 같은 이는 임지인 재암성에는 잠깐 잠깐 다녀 올 뿐이요, 거의 일년 내내 서울에 있어서 고려 장군 홍술(弘述)의 충성된 염탐군이요, 심부름군이 되었다.

홍술이 「이 사람을」하고 천거하는 사람은 대개 벼슬에 붙었고 그와 반대로 「아무는」하고 눈쌀을 찌푸리면 그 사람은 곧 벼슬에서 떨어지었다. 이리하여 신라 조정은 홍술의 손에 쥐어 지내었다.

이 모양이 되니 변방에 있는 장군들은 다투어 왕건에게 돌아 가 붙었다.

강주 장군 윤웅(康州將軍閏雄)이 맨 처음으로 고려에 붙은 뒤로부터 오늘은 누구, 내일은 누구 하고 하나씩 둘씩 제가 지키던 고을을 끌고 왕건에게로 돌아 붙었다. 그러면 왕건은 그를 극히 우대하여 높은 벼슬과 많은 상과 미인을 주었다. 이것을 보고 나도

『일 없으니 물러가라.』

할 용기가 없다. 그랬다가 만일 고려 군사가 성을 내면 당장에 큰일이 날 줄을 아는 까닭이요, 둘째 조정에 있는 왕건의 패를 물리칠 길이 어렵다.

그들을 물리치려 다가는 도리어 왕이 물러나야 될는지 모를 것이다.

이리하여 왕은 김충의 말을 옳게는 여기면서도 그대로 행하지는 못하고 다른 계책을 써보려 하였다. 그것은 당나라에 의뢰하여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에 벌써 당나라는 망하고 후당(後唐)이라는 것이 생겼다.

당나라와는 오랫 동안 친한 의도 있었으므로 진헌이나 왕건보다도 신라와 인연이 깊건마는 후당이라 하면 이름은 당이라 하여도 신라와는 아무 관계가 없을뿐더러, 벌써 진헌과 왕건이 먼저 사신을 보내어 통호한 뒤였다. 「그래도」하고 왕은 창부 시랑 김악(倉部侍郞金岳)을 당으로 보냈다. 보낼 때에 왕은 은밀히 김악을 불러 진헌과 왕건의 흉악 무도함을 말하고 옛날의 의를 생각하고 신라를 돕기를 빈다는 뜻을 전하라고 신신 부탁하였다. 창부 시랑 김악은 김충의 종형이었다.

김악이 당나라를 향하여 서울을 떠난 것은 경명왕 팔년 유월이었다. 왕은 김악을 당으로 보내고 그가 돌아오기만 고대하였다. 그리고 가끔 김충을 불러 말로 듣고 그 말대로 해보려고 힘도 써 보았으나 워낙 깊이 박힌 왕건의 세력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러다가 김악도 돌아 오기 전에 그해 팔월에 그만 승하하고 왕의 아우 위응(魏膺)이 즉위하여 경애왕이 되었다. 왕은 본래 진헌을 친하던 편이었다. 그러나 왕의 자리를 빼앗기기를 두려워 왕건의 편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즉위하는 길로 곧 사신을 고려에 보내이 왕건과 대등의 예로 서로 호(好)를 통하고, 왕건도 사신과 폐백을 보내어 일변 경명왕을 조상하고 일변 경애왕이 보위에 오른 것을 하례하였다.

이것을 본 진헌은 왕과 왕건에서 대하여 절치 부심하었다. 경애왕의 마음이 변한 것도 분하거니와, 왕건이 자기를 배반하는 경애왕과 한편이 되는 것이 더욱 분하였다. 그뿐 아니라 진헌도 벌써 나이 육십이 되었으니 앞날이 멀지 아니할 것을 알고 일거에 고려와 신라를 멸하고 생전에 삼국을 통일할 생각을 내었다. 진헌의 아들 되는 신검(神劍)·양검(良劍)·용검(龍劍)·금강(金剛) 등도 발발한 예기에 아버지를 권하여 크게 싸움을 일으키려 하였다. 그중에 네째 아들 금강이 더욱 힘써 말하였다.

진헌은 마침내 군사를 움직여 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루기로 결심하고 위선 삼천 병마를 몰아 질풍같이 고려의 조물성(曹物城)을 들이쳤다.

왕건도 군사를 내어 막으려 하였으나, 명장 금강(金剛)을 당할 수고 없어 곧 글을 보내어 진헌을 형이라고 부르고, 또 볼모로 왕건의 당게 되는 왕건을 진헌에게 바치고 또 신라 서울에 있는 삼천 철기를 불러 올 것과, 이로부터는 진헌과 미리 의논하지 아니하고는 다시 신라에 간섭하지 아니하기를 맹세하였다. 그리고 그 말대로 곧 서울에 있는 군사를 북한 주로 물러오게 하였다.

왕건이 조물성 싸움에 패하여 진헌에게 항서(降書)를 써 바치었다는 말을 듣고, 또 고려 군사가 서울서 급히 물러가는 것을 보고 신라 조정에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이 놀래었다. 진헌이 왕건보다도 더욱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될 때에 김성·김률 등 왕건의 세력을 믿던 패는 물론이요, 짐짓 진헌을 버리고 왕건과 화친하려는 태도를 보이던 왕도 진실로 망치 소조하였다. 조정뿐 아니라 백성들도,

『인제 진헌이 원수를 갚으러 들어 올껄.』

하고 밤에 개만 콩콩 짖어도 진헌이나 아닌가 하여 깜짝 깜짝 놀래게 되었다.

왕은 연하여 사신을 보내어 왕건을 움직이려 하였다.

『진헌은 반복 다사(反覆多詐)하여 불가 화친(不可和親)이라.』

하여 속히 치는 것이 좋은 뜻으로 누누이 말하였으나, 왕건은 다만 고개를 끄덕이고 사신을 후대하여 돌려 보낼 뿐이요, 신라의 말대로 가벼이 움직이지 아니하였다.

왕건은 백성들이 오랜 난세에 싸움을 피하려 하였다. 그뿐더러 신라는 족히 대적될 것도 없고 후백제사 아직은 강하나 진헌이 이미 늙고 또 그 아들들이 서로 아비 죽은 뒤에 임금 될 것을 다투는 줄을 알므로 진헌만 죽으면 후백제는 아들들끼리 싸와 불공 자파(不攻自破)할 줄을 안다.

그러하디 때문에 왕건은 아무쪼록 자증하여 일변 어진 정사로 민심을 수습하고 일변 군사를 길러 삼국 통일의 대준비를 하기로 한 것이다.

진헌의 편으로 보면, 아직 왕건의 날개가 돋기 전에 때려 잡는 것이 득책이언마는 네 아들(다른 아들은 다 어렸다) 이 사이가 좋지 못하고 그중에 맏아들 신검이 야심이 발발하여 항상 아비의 자리를 엿보는 눈치가 있으므로 진헌도 마음 놓고 왕건과 싸울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주물성에서 왕건이 항복하고 그 당제 왕신을 불모로 보낸 것을 기회로 하여 자기도 사위 진호(眞虎)를 고려에 불모로 보내어 아직 화평을 유지하면서 아들 신검(身檢)부터 먼저 처지하기로 한 것이다.

진헌과 왕건이 서로 볼모를 바꾸고 화친을 맺은 뒤로 부터는 신라 조정은 돌아 갈 바를 몰라 부질없이 서로 다투고 원망하기로 일을 삼았다.

그러는 동안에 고려에 가까운 고을들은 고려로 가 붙고, 후백제에 가까운 고을들은 진헌에게 가 붙고 신라의 강역은 날로 졸아 들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신라는 반은 고려로 반은 후백제로 뜯겨 버리고 서울 하나만 댕그렇게 남을 것 같다.

이러한 위태한 때를 당하여 조정에 아무 계책도 없고 다만 오늘 하루만 무사히 지나면 그만으로 알고 대관들은 제 집에 들어 앉아서 술을 마시고 아름다운 고려 계집을 희롱하기로 일을 삼았다. 그중에 가장 충성이 잇다는 시중 유렴까지도 병이라 칭하여 조정에 나아가지 않고 남교(南郊) 별서(別墅)에 들어 앉아 시를 읊고 거문고를 희롱하며 세상을 잊으려 하였다.

김충도,

『차마 짐승들의 무리에 섞일 수 없다.』

고 소리 치고 벼슬을 내어 던지고 전과 같이 허름한 옷을 입고 주자 청루로 돌아 다니며 비분 강개한 소리를 하며 혹은 울고 혹은 꾸짖었다.

제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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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