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의태자/제16장
오호 경순
[편집]경애왕은 게눈이(蟹目嶺)에 묻히고 효종은 옥에서 나오는 길로 며칠이 못되어 죽으니, 신흥대왕(新興大王)이라고 추존하고 왕의 어머니는 왕태후라 하고 부인 백화마마는 왕후가 되고 아들 김충은 태자를 봉하고 시중 유렴으로 상대등을 삼았다.
김 율은 포석정에서 도망하다가 진헌의 군사에게 잡히어 죽고, 김 성은 남별궁예서 목숨을 빌다가 얻지 못하고 산채로 껍질을 벗기어 죽여 버리고, 김 술은 포석정에 가지 안하였던 까닭에 살았으나 인산날에 백성들에게 맞아 죽고, 김 성의 식구는 사내는 진헌에게 죽고 부녀들은 진헌에게 붙들려 가고 어린것들고 계집애는 살렸으나 사나이는 다 죽여 버렸다.
새 왕이 들어 서기는 하였으나, 사람들은 진헌 난리에 죽지 않으면 잡히어 가고 남았던 사람들도 국운이 오래지 아니할 것을 보고는 혹은 세력 있는 진헌에게로 달아나고, 혹은 왕건에게로 달아나고, 간혹 나라에 충성을 가진 이는 차마 다른 임금을 섬기기를 원치 아니하여 혹은 선랑(仙郞)이 되어 폐포 파립으로 강호에 방랑하고, 혹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산에 숨어 버리고 그렇지 아니하면 전원에 돌아 가 밭을 갈고 풍월에 숨어 버리고 각색 장색조차 혹은 진헌에게 사로잡혀 가고, 혹은 항복하는 장군들을 따라 고려로 달아다니, 서울에 남은 것은 할 수 없는 백성뿐이 되었고 또 구고의 재물과 장안에 있던 모든 재물을 진헌이 몽탕 실어 가고 촌락에 있던 곡식조차 수레에 싣고 배에 실어 백제 가까운 고을에서는 백제에게 빼앗기고, 고려 가까운 고을에서는 고려에 빼앗기니, 백성의 양식도 끊어지었거든 나라에 무슨 재물이 있으랴?
게다가 새 왕이 고려와 통한다는 말을 듣고 진헌이 군사를 발하여 변읍을 치고 불을 놓고 장정과 젊은 부녀를 사로잡아 가고, 재물을 노략하고 이 꼴을 본 장군들은 다투어 진헌에게 항복하니 강주 장군 유문(康州將軍有文)이 진헌에게 항복할 것이 왕이 즉위한 이듬해 오월 일일이요, 팔월에는 진헌이 양산(陽山)을 빼앗아 그 곳에 성을 쌓고, 구월에는 진헌이 대야성(大耶城)을 빼앗고 군사를 보내어 대목고을(大木郡) 곡식을 모조리 베어 가고, 시월에는 무곡성(武谷城)을 쳐 빼앗고, 이듬해 칠월에는 진헌이 의성부(義城府)를 치니 왕이 하릴없이 고려에 청병하였으나 고려 장수 홍술(궁예의 신하로서 왕건에게 돌아가 붙은 사람)이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고 죽어 버리고 순 주장군(順州將軍)원봉(元逢)은 진헌에게 항복하여 버렸다.
이 모양으로 진헌의 군사는 도처에서 이기고 왕건의 군사는 도처에서 이기지 못하였다. 그러할 때마다 한 고을씩 또 한 고을씩 신라 고을은 진헌에게로 돌아 가 붙었다. 천하는 모두 진헌의 천하가 되는가 싶었다.
신라 조정에서는 마침내 고려를 버리고 백제로 돌아가 붙을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안하여 이렁저렁하는 동안에 마침내 큰일이 생겼다. 그것은 고창병메(古昌甁山) 싸움에 진헌이 왕건에게 대패한 일이다. 사년 동안 일찍 패하여 본 일이 없던 진헌의 군사가 여지없이 패한 것은 신라 조정에 큰 충동을 주었다.
이 싸움에 진헌이 살아 남은 군사를 끌고 완산주로 달아나매, 후백제에 속하였던 영안(永安)·하곡(河曲)·직명(直名)·송생(松生) 등 삼십여 고을이 고려에 항복하였다. 이 큰일이 정월 한달 동안에 일어난 것이다.
이월에 왕건은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진헌을 이긴 전말을 보하였다.
이렇게 진헌과 싸운 것이 모두 신라를 위하여 전왕의 원수를 갚으려 한 것임을 말하고, 끝에 신라 조정에서 은근히 진헌과 통한 자가 있다는 소문이 있음을 힐책하는 뜻을 표하였다.
왕은 왕건의 국서를 받고 군신을 불렀다. 왕건이 이제 진헌을 패하고 형세가 융륭하니 이를 어찌하랴 하는 것이 의논하는 제목이었다.
문제 중에 가장 큰 것은 왕건이 왕과 한번 서로 만나기를 청한 것이다.
김 성과 김 율이 진헌의 손에 죽으니, 왕건은 신라 조정에 믿을 만한 사람이 없게 되었다. 그러할뿐더러 상대등 유렴은 강직한 사람이라 도저히 이로나 꾀로 휘어 넣기 어려울 줄을 알므로 이번 기회에 직접 왕을 만나 왕의 마음을 휘어 보려고 생각하였다.
그러면 고려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취할까 하는 이것이 큰 문제였었다.
군신들은 이 일에 대해서도 아무 말도 아니하고 서로 눈치만 보았다.
그들은 대부분 지금까지 왕건이 믿지 못할 것을 말하여 진헌에게 붙기를 주장하던 자들이다 그러나 . 진헌이 여지없이 패하게 된 이때에 다시 진헌을 말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혀끝에 침이 마르기도 전에 오아건과 친하기를 주장할 수도 없었다. 그뿐더러 만일 다시 왕건의 세력이 서울에 들어 오는 날이면 지금까지 진헌의 편이 되기를 주장하던 사람들은 무리 장사가 날 염려가 있었다.
상대등 유렴도 한숨만 쉴 뿐이요, 아무 말이 없었다. 자기가 상대등이 된지가 사오년이 되건마는 만조한 백관은 다 썩은 무리어서 동풍이 불면 동으로 서풍이 불면 서로 이익 있을 듯한 곳으로만 쓰러지고 그뿐 아니라 서로 편당을 지어 시기하고 먹고 속이고 백성들은 벌써 마음이 풀어지어 나라에서 무슨 말을 하더라도 믿지 아니할뿐더러,
『이제는 세상이 끝났어.』
하게 되어 버리니 뜻있는 자는 산이나 술에 숨어 버리고 뜻없는 자는 혼자 살 도리만 생각하여, 피난처를 찾아 유벽한 산촌으로 찾아 들어 갔다.
그래서 군사를 모집하여 도 와서 응하는 이가 없고, 온다 하면 한들 두 달 만에 달아나 버리고 납세를 재촉하여도 낼 생각을 아니하였다.
게다가 새 왕은 등극한 후부터는 잠룡(潛龍)때에 가지던 뜻조차 잃어 버리고 젊은 계집을 구하여 들이며, 노래하는 자와 춤추는 자와 음률 하는 자를 불러 들여 밤 낮으로 연락을 일삼고, 또 남은 여승을 궐내에 불러일신 일가의 복을 빌었다.
이 모양이매, 유렴은 해보려던 일이 다 뜻대로 되지 아니할뿐더러,
『이러하다가는 망국 군주의 이름을 천추 만세에 끼치시리이다.』
하고 자주 간하는 유렴을 왕이 향기롭지 아니하게 여기게 되었다.
이리하여 유염은 여러 번 해골을 빌어 남교로 돌아 갈 것을 생각하였으나 태자요 사위 되는 김 충이,
『상대등마저 가면 나라를 어이하리.』
하고 눈물을 흘리며 붙드는 까닭에 그날 그날을 보내던 것이다.
이제 왕이 왕건을 만날 뜻을 가지니 왕건이 왕을 만나려 함은 다른 뜻을 둔 것이 분명한 줄을 아나, 이제 말하더라도 서지 못할 줄을 알뿐더러 또 말할 기운도 없는 듯하여 다만 한숨을 쉬고 있을 뿐이다.
왕은 다만 유렴을 싫어할뿐더러 태자 김 충도 귀찮게 여겼다. 그것은 김충이 바른말을 하는 것이 귀에 거스르는 까닭이다, 마침내 왕은,
『짐은 고려 왕을 만나리라.』
하고 윤음을 내려 버렸다.
그리하여 고려에 회답하는 국서를 가진 사자가 그날로 서울을 떠났다.
그리고 고려 왕을 맞기 위하여 임해궁과 안압지를 일신하게 수리하고 율객과 가희(歌姬)와 무희(舞姬)를 모으고 각 수령·방백에게 명하여 그 땅에 나는 물산 중에 가장 아름답고 진기하고 값가는 것을 성화같이 올리라 하고, 또 백성에게 부역을 명하여 곰의나루에서 서울에 이르는 길을 수레 세 체가 늘어서서 올 수 있도록 치도하기를 명하고, 또 만일 고려 왕이 오는데 대하여 요언을 돌리거나 무엄한 일을 하는 자는 엄벌할 것을 말하였다. 이리하여 큰 역사가 시작되었다.
농시 방장에 인민을 부역하여 일변 오백리 큰길을 닦고 일변 대궐과 진헌난에 말 못된 포석정을 수리하며 안압지(眼壓池)를 더 깊이 파고 드는 위에 그림 그린 배를 띄우고 오늘이나 내일이나 하고 고려 왕 왕건이 오기를 기다리니, 민원은 창천하고 국고는 경갈하여 대소 관원의 녹이 두석 달이나 밀리고, 금영 군사의 녹조차 삼사 삭을 밀리니 군사들은 달아나고 관원들은 집에 있어 밥벌이할 일을 구하는 형편이었다.
구월에는 국동 연해주(國棟沿海州)의 모든 고을과 부락이 고려에 항복하고, 재암성 장군 선필 장군도 볼 일을 다 본 듯이 왕건에게 항복하여 상보(尙父)라는 존칭을 얻고 고려 서울 송도에 큰 저택과 만석 녹과 아름다운 많은 비복을 주어 영화를 누리게 하니, 신라의 대소관원은 일찍 고려에 돌아 갈 반연 없는 것을 한탄하게 되었다.
태자 김 충이 비록 상대등 유렴과 함께 나라를 바로 잡기를 꾀하나 큰집이 무너질 때에 외기둥이 버틸 수가 없었고, 백사가 다 뜻대로 되지 안 하니 태자도 세상에 뜻이 없어 다시 술을 마시고 음률과 미회를 꾀게 되었다.
이것을 본 왕후 백화 부인과 태자비 계영 부인은 누누히 태자의 생각이 그릇됨을 말하였으나 태자는 다만 길게 한숨을 쉴 뿐이었다.
온다 온다 하고 아니 오던 왕건이 경순왕 오년 이월에 서울로 온다는 선문이 왔다. 왕건은 거느린 군사를 곰의나루에 머무르게 하고 오십 여기의 시위병만 데리고 서울에 들어 올새 왕은 백관을 거느리고서 악재(西岳峴)까지 나가 맞았다. 태자와 유렴도 왕을 따라 서악재까지 나갔다.
이날이 아직 이른 봄날이라 산 그늘에는 녹다 남은 눈조차 있건마는 백성들은 고려 왕의 행차를 보리라 하여 금척능 십리 길에 좌우로 수없이 늘어 서 있었고 장안 백성들도 남녀 노소 할 것 없이 길가에 나섰다.
길가에는 해 뜰 때부터 엿 장수와 떡 장수와 술 장수의 한 댓 가게가 벌였고 아이들은 새 옷을 입고 기뻐하였다.
문무 백관들은 찬란한 관복의 소리 좋은 패옥을 차고 긴 칼을 차고 홀을 들고 수레에 내려 길가에 늘어 서 왕건을 기다리고 왕은 맨 뒤에 자암 속에 앉았었다.
해가 낮이 기울어 바람이 바람이 솔솔 불기 시작할 때에 서쪽에서 보얗게 먼지가 일고 기치와 창검이 번쩍거리며 고려 왕의 행차가 가뭇가뭇 오는 것이 보였다 그중에 . 둥 두렷이 높은 연이 바람에 둥둥 떠오는 듯이 흔들리지도 않고 온다. 그것이 왕이 보낸 연이다.
왕건의 연이 점점 가까이 오매, 이편에서는 일시에 풍악이 일어났다.
바람결에 저편에서도 풍악 소리가 들려 온다. 천지는 온통 풍악에 찬 듯하였다.
오아건의 연은 점점 가까와지고 말 탄 군사의 얼굴이 보일 만할 때에 이편에서는 더욱 풍악을 울리고 목소리 좋은 악인으로 하여금만 세악(萬歲樂)을 부르게 하였다.
신라 천년에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태종무열왕이 백제와 고구려를 통일한 후로 이 천지에 신라 왕 밖엔 연을 타고 서울로 들어 올 이는 없었던 것이다. 하물며 그연을 타고 들어 오는 이가 경문대왕 시절에 미미한 일개 한산주 도독(漢山州都督)이던 왕률의 아들이요, 역적 궁예의 신하일 줄을 누라서 알았으랴? 이런 일을 생각하는 늙은 사람들과 유렴과 태자는 눈물이 흐름을 금치 못하였다.
그러나 왕건의 연이 앞으로 지나갈 때에 길가에 늘어섰던 신라의 왕족과 귀족과 대관들은 다투어 허리를 굽히어 이마을 땅에 대고,
『신라 이손 아무 아뢰오.』
『신라 급손 아무 아뢰오.』
하고 완건이 눈이 한번 자기 위에 떨어지기를 애걸하는 듯하였다. 그런 것을 왕건은 연 위에서 슬쩍 내려다보았다. 신라 대관들은 왕건이 지나간 뒤에도 굽혔던 허리를 펴지 아니하였다. 왕건의 신하들의 눈에는 찬 웃음이 있었다.
마침내 왕건의 연은 왕의 행재(行在)앞에 이르러 머물렀다. 왕건은 연에서 내리고 왕은 옥좌에서 일어나 서너걸음 왕건의 앞으로 나왔다.
왕건은 진평대왕이 쓰시던 왕관과 띠시던 보대(寶帶)를 띠었다. 어느 것이 진실로 신라 왕인가?
왕이 왕건을 보고 허리를 굽히려 할 때에 왕건이 먼저 허리를 굽히며, 대왕은 과인보다 연치가 『 위시니 먼저 절하심이 마땅하지 아니하신가 하나이다.』
하였다.
왕은 적이 무안한 듯이,
『대왕이 짐을 위하시와 진헌을 물리치시고 이제 또 몸소 짐의 나라를 찾아 주시니, 대왕은 짐의 은인이라 어찌민저 절함이 마땅치 아니하리까?』
하였다.
태자는 왕의 거동을 보고 심히 마음에 불쾌하여 왕건에게 절하지 아니하니 왕건이 태자를 한번 바라보고 말이 없었다.
왕은 태자가 왕건에게 절하지 아니함을 보고 낯을 찌푸렸으나 말이 없고, 왕건의 손을 잡아 행재를 인도하여 꼭 같이 차린 자리에 인도하였다.
그러한 뒤에 먼저 왕건의 거느린 신하가 왕께 절하고 그것이 끝난 뒤에 왕의 백관들이 왕건에게 절하되 왕께 하는 예로 무릎을 끓었다.
상대등 유렴이 무릎을 끓려 할 때에 왕건은 자리에서 일어나 유렴의 팔을 붙들고,
『유렴이 아니시뇨?』
하고 물은 뒤에,
『과인이 선생의 성화를 들은 지 오래고 또 선생의 높은 덕을 사모한 지 오랜지라 관인이 선생에게 집지(執贄)하려는 뜻이 있거니 절이 당하리오.』
하고 손수 붙들어 자리에 앉히었다.
그 후에 왕건은 시신을 불러,
『낙랑 공주(樂浪公主)를 부르라.』
하였다.
이윽고 시녀의 부액을 받아 꽃같이 아름다운 왕건의 맏딸 낙랑 공주가 들어 와 왕의 앞에 섰다.
『공주는 대왕의 앞에 절하라.』
하는 왕건의 명을 듣고 낙랑 공주가 공손히 무릎을 꿇어 왕의 앞에 절하였다.
왕은 고려 왕의 낙랑 공주가 아름답다는 말을 들었고 또 이번에 같이 온다는 말도 들었으나 이처럼 아름다울 줄은 생각도 못하였었다. 공주는 이제 십 팔세다.
왕은 위선 술을 내어 고려 왕께 권하고 또 양국 백관에게 준 후에 연을 가지런히 하여 서울로 들어 와 양국 백관에게 준 후에 연을 가지런히 하여 서울로 들어 와 새로 수리한 임해전에 왕건의 숙소를 정하였다.
그날 하루을 편히 쉬게 하려고 모든 음률을 그치고 임해전 근방에 있는 민가에서는 사람이나 짐승이나 큰소리 내기를 금하고 각 절에 명하여 야반에 종 치기를 금하였다.
왕건은 왕이 위해 보내는 미희(美姬)를 물리치고 신하들께 명하여 일체 계집을 가까이하기를 금하고 또 호위군(扈衛軍)을 명하여 민가에 출입하기를 엄금하였다.
이튿날 토함산(吐含山)에 해 떠 오를 때에 장안 팔백 팔십 사에서는 일제히 종을 울려 고려 왕의 천추 만세를 축원하는 재를 올렸다. 옛날 당나라 황제를 위하여 재올리던 것과 꼭 같은 예법으로 하였으나, 중들은 신이 나지 아니하여 다만 쇠만 올리고 입은 벌리지 아니하였다.
황룡사(皇龍寺) 담 뒤 느티나무는 경문대왕 때보다 더 늙었다. 서편 쪽으로 벌었던 가지는 지난 겨울 모진 바람에 부러지고 그때 모여 앉았던 노인들의 무릎에서 놀던 아이들이 이제는 귀 밑에 백발이 보이게 되었다.
『왕건이 왜 왔지?』
하고 백성들은 가지 부러진 느티나무 밑에서 근심스러운 얼굴을 물었다.
그들의 품에도 또 어린 아이들이 안겼었다.
『황룡사 탑이 기울어지고 느티나무가 말라 죽으면 나라가 망한대.』
하고 사람들은 황룡사에서 꽝꽝 울어 나오는 쇠북 소리를 들으며 기울어진 구층탑과 거의 다 말라 버린 나무를 바라보았다.
『이 느티나무가 탈해 임금(脫解王) 말 뫼시던 나무래.』
하는 노인들의 말에 젊은 사람들은 혀를 찼다.
『금년에 또 잎이 피어 볼까? 작년에도 한 가지 밖에는 아니 피었는데.』
하며 사람들은 근심스럽게 항상 나뭇 가지를 바라보았다. 반이나 너머 썩어진 몸뚱이, 모지랑비 같은 가지 끝, 거기도 다시 잎이 필까 싶지 아니하였다.
『우리야 다 산 늙은이지마는 어린것들이 불쌍하지.』
하고 어떤 늙은이는 손에 매어 달린 손자를 굽어 보며 눈물을 떨어뜨렸다.
『오늘은 임해전에 큰 잔치가 있다는데 안 가 보려나?』
하고 젊은이 하나가 말하면,
『큰 잔키 무섭더라 —————포석정 큰 잔치나 아니 되려나?』
하고 한 젊은이가 대답하고 그러면 곁에 있던 노인이,
『쉬! 그런 소리 말아.』
하고 눈을 부릅떴다.
아침 동자하는 부녀들이 황룡사 앞 큰 우물에서 물을 길어 들고 올 때에는 이 추운 날 아랫도리 벗은 아이들이 종종 걸음으로 뒤로는 도랭이 먹은 여윈 강아지가 꼬리를 등에 바짝 붙이고 따라 온다.
그렇게도 깨끗하던 집들이 모두 다 낡았다. 새로 단장한 처녀의 얼굴과 같던 보얀 분벽(粉壁)들이 군데 군데 떨어지고 황룡사 벽까지도 쓰러지고 무너지어 그 위로 쥐들이 뛰어 다녔다.
거지 떼들이 잿밥을 얻어 먹으려고 황룡사 문 앞으로 모여 든다. 군데군데 살이 보이는 누더기에는 묵은 지푸라기가 여기 저기 달렸다. 손에는 깨어진 열바가지와 뒤웅박을 들고 두 손을 배에 대고 허리를 꼬부렸다. 그 때묻은 얼굴에서는 보얗게 입김이 오른다. 그래도 어린 것들은 좋아라고 뛰고 늙은이들은 염불을 하는 자, 입을 우물우물하며 행여 무엇이 떨어졌는가 하고 길가를 돌아 본다.
해마다 추수 때가 되면 진헌의 군사가 들어 와 곡식을 모조리 베어가므로 농민들은 먹을 것을 잃고 떼거지로 돌아 다니는 것이다. 이 거지들은 무너진 담 밑과 빈 집에서 겨울을 난 사람들이다.
황룡사 문밖에는 이백명은 모인 것 같다. 서로 앞을 다투어 발을 벋디디고, 팔을 내어 밀었다. 중들이 큰 함지박에 김이 나는 밥을 들고 서서 주먹밥을 만들어 사람들 속에 던지면 꺼멓게 때묻은 수십의 손이 하얀 밥덩어리 하나를 따라 공중에 들린다. 만일 밥덩어리가 땅에 떨어지면 우하고 수십 명의 허리가 한꺼번에 구부러져,
『아야, 아야.』
하고 부르짖는다.
한 덩어리를 집은 사람은 우선 두 볼이 불룩하도록 입에 들어 먹고 손가락마다 밥풀이 묻은 손을 또 내어 민다. 젊은 중들은 빈 함지박을 뒤집어 사람들에게 보이고 웃고 뛰어 들어간다.] 밥을 못 얻어 먹은 거지들은,
『밥 주우, 밥 주우!』
하고 열 두 층 돌 층층대로 밀려 올라 갔다.
불그레한 해가 동대문 위에 높이 솟고 장안에는 보얀 엷은 안개가 덥혔다. 피란 가는 백성들이 그리운 듯이 연해 뒤를 돌아 보며 동대문으로 나간다.
그러나 길에는 임해전 잔치에 가는 고관 대작들의 비단 장막 늘인 수레들이 소리를 내며 달렸다. 임해전 안에서는 벌써 북 소리가 둥둥 울려 나왔다.
임해전(臨海殿) 천 사람이 들어 앉는다는 큰 방에는 정면에 왕과 고려 왕이 주객의 예를 따라 동서로 갈라 앉고 정전 뒤에 있는 전내에는 왕후와 태자비와 고려의 낙랑 공주를 중심으로 높은 부인들과 젊은 아름다운 딸들이 모였다.
낙랑 공주는 태자비 계영아기와 겨를 만큼 아름다왔다. 게다가 계영아기보다 나이 어리고 아직 다 피지 못한 꽃봉오리 같아서 돌리어 더 아름다와 보였다. 공주가 아직 신라 궁정의 예법에 익숙지 못하고 또 말에 고구려 사투리가 있는 것이 도리어 귀여워 왕후는 사랑하는 딸과 같이 손을 잡고 등을 만지고 귀여워하고 다른 부인들과 아기들도 이 먼 곳에서 온 귀한 손님의 손을 한번이라도 만져 보고 말 한 마디라도 붙이어 그 억센 고구려 사투리를 들어 보려 하였다.
낙랑 공주도 왕후의 여러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것이 기뻤다. 더구나 공주는 왕후의 어머니와 같은 인자함과 태자비의 형과 같은 정다움이 큰 감동을 주었다. 그러할수록 공주의 마음은 괴로왔다. 그것은 송도를 떠날 때에 아버지 왕건이,
『너 신라 태자에게 시집 가려느냐?』
한 것을 생각한 때문이다.
낙랑 공주는 어젯밤을 내전에서 바로 왕후의 이웃 방에서 잤다. 왕후는 아들 하나 밖에 없고 딸이 없는 이이므로 공주를 딸같이 귀애하여 손수 자기 전에 자리를 만져 보고 아침에 일어날 때에도 궁녀를 보내어 먼저 문안하라 하고 아침 수라(임금에게 드리는 밥)는 한자리에 앉아 자시었다.
그런 뒤에 태자비는 자기 옷을 내어 손수 공주에게 입히고 머리 장식과 패물과 신라 일습을 다 손수 입히고 머리도 신라 궁중제로 쪽 찌게 하고 다시금 거울을 들여 다 보고 기뻐하였다.
아침 조회에 백관이 들어 오기 전에 왕과 왕후는 태자와 태자비와 함께 고려 왕과 낙랑 공주를 만나고 형제의 예로 서로 인사하였다. 왕이 왕건보다 나이 위이므로 왕이 형이 되고 왕건이 아우가 되었다.
그 자리에서 왕은 왕건의 손을 잡고,
『내 덕이 없어 나라에 환란이 끊이지 아니하여 진헌이 방자히 침노하여 창생을 도탄에 넣으되 내 어찌하지 못하니 아픔이 어찌 그지 있으리오.』
하고 눈물을 흘렸다. 이것을 보고 곁에 있던 이들도 모두 눈물을 흘리고 왕건도 소매로 눈을 씻으며, 폐하는 슬퍼 『 마옵소서. 내 있거니 진헌이 다시 어찌하오리까?』
하였다.
왕은 왕건의 이 말에 더욱 감격하여 한번 더 왕건의 손을 잡으며,
『만사를 오직 대왕께 맡기노라.』
하였다.
그러나 태자는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무슨 말을 하려고 왕을 바라보다가 머리를 흔들고 일어나 나가 버렸다.
왕은 태자의 행동이 혹 왕건을 노엽게 하지나 아니할까 하여,
『태자는 때때로 행동이 상궤를 벗어날 때가 있어 그것이 근심이라.』
하고 자탄하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왕건은 태자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왕은 듣던 바와 같이 호인이요, 태자는 듣던 바와 같이 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왕건이 낙랑 공주를 데리고 오기는 태자의 뜻을 낙랑 공주의 색으로 휘어 보려 함이었다.
『소제(小弟)가 아직 아들이 없고 오직 한 딸을 두니 잠시도 곁을 떠나지 못하여.』
하고 웃으면서 낙랑 공주를 데리고 온 변명을 하였으나 기실은 낙랑 공주는 신라라는 나라를 낚을 미끼로 데리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아침 조회에 태자의 눈이 낙랑 공주에게로 한번도 돌지 안할뿐더러 태자의 쌀쌀한 태도를 볼 때에 왕건은 잠깐 실망하였다. 그러나 그 실망은 오래 가지 아니하였다.
그것은 태자가 북풍같이 대신에 왕이 낙랑 공주에게 뜻이 깊음을 깨달은 까닭이다. 진실로 곁에서 보기가 낯이 간지럽도록 왕은 낙랑 공주를 귀애하였다. 아저씨라는 것을 핑계로 공주의 손을 잡고 등을 만지었다.
왕건은 심상히 보고 있었으나 마음에는 의외의 효과가 난 것을 기뻐하였다.
왕건은 「불인 일병(不〇一兵)」이라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지금까지 궁예나 진헌이 싸움을 일삼아 민심을 잃은 것을 생각하고 될 수만 있으면 싸울지 아니하고 삼국통일의 대공을 이룰 것을 꿈꾸었다. 궁예와 진헌뿐 아니라 신라도 병력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동일하러 하였기 때문에 비록 일시 통일의 공은 이루었다 하더라도 마침내 진헌은 백제의 유민을 거느려 신라를 괴롭게 하였고 자기는 고구려의 유민을 거느려 금일의 패를 이룬 것을 안다. 그러므로 만일 자기가 병력으로 신라와 후백제를 통일한다 하면, 반드시 백년이 지나지 못하여 혹은 시라를 빙자하고 혹은 백제를 빙자하고 일어날 자가 있음을 안다. 나라를 잃은 원한을 이백년 삼백년으로 가시지 아니함을 왕건은 알았다.
그러하기 때문에 왕건은 신라와 같이 쳔여 년이나 오랜 나라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아직 건국한 , 수십년 밖에 못된 후백제까지라도 될 수만 있으면
「불인 일병」하고 「수공 병장(垂拱平章)」하는 방법으로 통일하려 한 것이다.
그러함에는 가장 속한 길이 첫째로는 우선 인척의 관계를 맺는 것이요, 둘째로는 힘있는 사람을 자기 편으로 끌어 당기는 것이다. 선필(善弼)을 상보(尙父)로 대우하는 것은 둘째 모책이요, 낙랑 공주를 신라로 데리고 온 것은 둘째 모책이요, 낙랑 공주를 신라로 데리고 온 것은 첫 계책이다.
신라 왕이 이미 늙었으니 왕을 사위로 삼으려고는 왕건도 생각지 못하였고 태자를 사위로 삼아 후일을 가다리려 하였던 것이 아들 잡으려고 놓은 덫에 아비가 걸린 셈이 된 것이다. 왕건이 속으로 기뻐하는 것이 이 까닭이었다.
이리하여 임해전 잔치에 임한 것이다.
왕은 항상 웃는 낯으로 기쁨을 억제하지 못하는 낯으로 왕건과 이야기하고 군사들과도 이야기하였다.
『신라와 고려는 형제 국이라.』
하고 큰소리로 외치었다. 왕의 뜻을 받아 신하들은 왕건을 대할 때에 왕을 대하는 것과 같이 하였다. 그렇지 안하더라도 이때에 왕건의 눈에 들어 두는 것이 필요할 때가 있으리라 하여 여공 불급하게 왕건의 비위를 맞추려 하였다. 왕건도 왕의 체면을 잃지 아니할 만한 정도에서 극히 공손하게 손님으로 주인 집 식구에 대하는 태도로 부드러운 말과 웃음으로 대하였다.
『이런 기쁜 날이 또 있으랴.』
하고 왕은 가끔 말을 내어 흥을 돋우었다.
『진실로 기쁜 날이로소이다.』
하고, 신하들은 왕의 말씀에 화답하였다.
남창 여창의 노래가 나오고 남무 여무의 춤이 나왔다. 반년을 두고 고르고 고르고 익히고 익힌 노래요 춤이요 장단이라, 그야말로 부절을 맞추는 것과 같이 똑똑 맞아 들고 부르는 소리, 춤추는 소매, 줄 타는 손가락 이 모두다 가락이 있고 법제가 있어 가슴에 다른 뜻을 품은 왕건조차 이 신선의 풍악에 가끔 정신을 이로는 듯이 망연한 빛을 보였다.
그러다가는 이래서는 안되겠다 하고 꿈에서 깨는 듯이 한번 몸을 움직이고는 빙그레 웃었다.
풍악이 점점 가경에 들어 가니 사람들은 모두 취한 듯 정신을 잃은 듯하였다.
그러나 왕의 눈에는 낙랑 공주의 모양이 아른거렸다. 그의 넓으레한 입은 맛나는 음식을 대한 입 모양으로 벌어져 닫힐 줄을 몰랐다. 오십이 넘고 육십이 가까와 머리에 센 터럭이 희끗거리는, 하늘 아래 제일 높은 왕으로서도 낙랑 공주의 색에 정신을 잃어 버린 것이다. 왕건은 이것을 알아 기뻐하였고 유렴은 이것을 알아 슬퍼하였다. 태자는 실신한 사람 모양으로 혼자 중얼거리며 왔다 갔다하였다.
태자가 실신한 모양으로 중얼거리고 돌아 다녀도 아무도 그를 돌아 보는 이가 없다. 다만 태자가 술 취한 듯이 비틀거리고 올 때에 사람들은 그를 위하여 길을 비킬 뿐이었다.
자치가 질탕하여 갈수록 태자는 점점 미친 사람과 같이 되었다. 그는 닥치는 대로 아무나 붙들고,
『이봐라, 오늘이 뉘 죽은 날인고?』
하였다.
『동궁마마 이 무슨 말씀이시니까? 오늘이 나라의 큰 잔치에 늘 죽은 날이 무슨 죽은 날이니이꼬?』
하고, 신하늘이 대답하면 태자는 울어 나오는 풍악 소리에 이윽히 귀를 기울이다가,
『이봐라, 어떤 사람이 죽었기로 저다지 통곡들을 하는고————흉한 소리를 하는고? 』
하였다.
『동궁마마 어이한 일이시니까? 풍악 소리를 통곡 소리로 들으시니 딱하여라.』
『내 딱함이 아니라 네가 딱함이로다. 통곡 소리를 풍악 소리로 듣는 네가 딱하지 아니하면 뉘 딱한고? 제 딱한 줄 모르는 딱한 무리들만, 장마 개천의 올챙이 떼와 같이 옥시글거리니 딱함도 딱한지고.』
하고 태자는 신하들을 비웃었다.
신하들은 태자의 태도와 말에 놀래어 서로 돌아 보며,
『그 뉘 죽은고 하시니, 죽기는 뉘 죽으리 딱하시어라.』
하고 서로 수근거린다.
태자는 신하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들은 체 만 체 눈을 감고 무엇을 생각하는 모양이더니 잊어 버렸던 것을 생각 낸 듯이 고개를 번쩍 들고 손으로 무릎을 치며,
『옳거니 옳거니 죽기는 죽었거니! 큰 것이 죽었거니, 모두 다 울어라 죽을 때까지 울어라.』
하고 소리를 지르고는 신도 신지 아니하고 나가 버린다.
태자의 부르짖는 소리에 놀래어 왕이,
『이 무슨 소린고?』
하고 물었다.
『동궁마마께옵서 어이한 일이신지?』
하고 좌우는 어떻게 이를 바를 모른다.
왕은 얼굴을 찡기며,
『술이 과하였는듯하니, 동궁으로 돌아 가시라 하여라.』
하였다.
그러나 왕도 태자의 이상한 부르짖음을 들을 때에는 무슨 흉한 일이 생기는가 싶어 마음이 괴로왔다. 왕도 태자의 심사를 모르는 바가 아니요, 또 자기가 신라의 왕으로서 왕건에게 대하여 하는 행동이 마땅하지 아니한 줄을 모르는 바도 아니다. 그러나 왕은 이렇게 밖에 더할 도리가 없는 줄을 안다. 그래서 태자를 철없는 젊음 사람이라고 돌려 보내려고 애쓰나, 그래도 어느 구석에 태자가 두려운 듯하고 불쌍한 듯한 생각도 났다.
왕건도 왕의 마음을 알아 아무쪼록 왕의 눈을 피하고 가만히 풍악에 귀를 기울이는 태도를 보였다.
왕은 뒷간에 가는 듯이 가만히 일어나 방에서 나와 종용한 방에서 태자를 불렀다. 태자는 여전히 실신한 사람 모양으로 왕의 앞에 읍하고 섰다.
왕은 좌우를 물리고 태자더러,
『어찌하여 동궁은 불평한 빛이 있는가?』
하고 물었다.
태자는 물끄러미 왕을 보며,
『도리어 용안에 길치 못한 그림자가 보이오니, 아마 나라에 상스럽지 못한 일이 아니한가 하나이다.』
하였다.
왕은 깜짝 놀래다가 그 빛을 가리고,
『나의 괴로움은 동궁으로 말미암음이라.』
하였다.
태자는 웃으며,
『자고로 성군은 자비로우시거니와, 또 성군은 만민을 위하여 슬퍼하시되 한낱 아들이나 한낱 이웃 나라 공주를 위하여 슬퍼하지 아니하신다 하였나이다.』
하고 풍악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어허 시끄러운 『 , 통곡 소리여……하기는 나라가 죽으려 하거니, 새 짐승인들 통곡하지 아니하랴, 울어라 울어라.』
하고 태자도 우후후후하고 소리를 내어 운다.
왕은 소매로 낯을 가리며,
『물러나라, 물러나라.』
하고 손을 내어 두른다.
태자의 말은 언언 구구가 왕의 가슴을 찔렀다. 차마 태자의 말에 견디지 못하여 물러나라고 손을 내어 두른 것이다.
『물러나라 하시면 신은 물러나리이다마는, 폐하의 마음이 물러나지 아니하시니 괴로움은 면치 못하시리이다. 천년 사직을 등에 지시니 폐하의 약하신 등이 휘어 굽으시는가 하나이다. 아니 지시었더면 피차에 좋았을 것을 국운과 가운이 모두 불길하여 폐하께서 높으신 자리에 오르시니, 완손으로 오랑캐를 불러 들이고 오른손으로 역적의 발에 매어 달리는 변변치 못한 재주를 부리시게 되었나이다. 신이 듣사오니, 북한주 도독 왕륭의 아들이 이미 천하에 군림(君臨)하고 이전 신라 왕은 새 왕의 공주의 치맛 자락에 싸여 헤어나지를 못한다 하나이다. 왕은 왕건의 손을 핥고 신하들은 왕건의 발을 핥을 새 어리석은 김 충이 홀로 아니하려 하오니, 신하들은 김 충을 미쳤다 하고, 폐하는 신더러 물러나라 하나이다. 폐하의 아들로 태어난 신도 전생의 죄 크려니와, 신을 아들로 두신 폐하도 금생의 죄 적지 아니하신가 하나이다. 나라가 망하거니 가슴을 치고 통곡함이 마땅하려든, 소리는 무슨 소리며 춤은 무슨 춤이니꼬?』
하고 태자는 꺼리는 바 없이 울며 웃으며 팔을 두르며 발을 굴으며 말하였다.
『물러나라, 물러나라!』
하고 왕은 견디지 못하여 벌떡 일어나 태자를 버리고 방에서 나가 버린다.
태자는 왕의 나가는 것을 바라보며,
『가엾은 늙은이!』
하고 고개를 숙여 버린다.
그러나 이 모양으로 잔치는 계속되었다. 밤 낮으로 한 달을 계속하였다.
왕은 태자가 잔치에 참례하기를 금하고 동궁예 가두어 버렸다. 유렴은 병이 났다 칭하고 집에 드러나지 아니하였다. 그 밖에도 다소간 뼈가 굳은 이는 혹은 병탈로, 혹은 친환을 빙자하고 집에 숨기도 하고 시골로 내려가기도 하였다.
왕은 날이 갈수록 체면을 유지하지 못하였다. 왕건은 어느 때나 위의를 잃지 아니할 때에 왕의 모양은 너무도 창피하였다. 처음에는 신하들의 마음에 부끄러움도 있었으나 마침내는 신하들의 마음은 왕건에게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왕건은 신라 조정의 대관들과 친히 알게 됨을 따라, 혹은 금덩어리를, 혹은 은덩어리를, 혹은 값가는 보물을 선물로 주고, 단둘이 대할 때에는 마치 친구를 대한 것과 같이 겸손하고 친밀하게 하였다.
대관들은 다투어 왕건을 찾았다. 왕건은 악발토포(握髮吐哺)로 그 사람들을 맞았다. 찾는 자가 뒤를 이었다. 처음에는 아무쪼록 남의 눈을 피하였으나 이십여 일 넘은 뒤에는 마음 놓고 왕건을 찾았고 도리어 그것을 자랑으로 알게 되었다.
대관들은 진헌의 손에 죽고 남은 사람들이라, 모두 경험도 없고 식견도 없고 꾀조차 없는 무리들이었다. 그 사람들이 영웅 왕건과 서로 대할 때에 손에 주물리고 손을 빼일 것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왕건은 많이 듣고 적게 말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어리석은 대관들은 왕건을 자기의 손에 집어 넣을 수 있는 것같이 생각하였다.
왕건은 속으로 웃었다. 만사가 너무도 힘 안 들게 뜻과 같이 되는 것을 도리어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왕은 갈수록 더욱 낙랑 공주에게 장신을 빼았겼다. 더구나 왕건이 나라 떠난 지 오랜 것을 말하고 칠팔일이 지난 뒤부터 돌아 갈 것을 말하기 때문에 왕의 마음은 더욱 초조하였다. 그러다가 하루하루 붙드는 것을 이십여 일을 붙들었으나, 왕건은 더 오래 머물지 못할 것을 말하고 돌아 갈 행장을 수습하게 되매, 왕의 마음은 더욱 초민하였다. 그래서 기회만 있으면 낙랑 공주를 만나기를 꾀하였다. 차마 어찌하지는 못하고 오직 하루 이틀 오래 머물게 할 생각만 하였다.
그러나 왕건이 서울에 온 지가 벌써 한 달이 가깝고 또 왕건이 하려던 또 왕건이 하려던 일도 다히였다. 하려면 일이란 별것이 아니요, 첫째 신라의 힘을 알고, 둘째 신라 조정의 대관들의 마음을 사고, 세째 신라 왕이나 태자의 마음을 사로 잡는 것이었다. 이 일은 한 달 동안에 다 되어 버렸다.
처음 왕건이 서울에 온다는 말을 들을 때에는 왕이나 조정 제신은 반드시 왕건이 무슨 어려운 문제를 끌어 내려니 하여 그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왕건은 일갓집에 온 손님처럼 또 구온 한 우객처럼 그저 유쾌하게 놀고 정답게 이야기할 뿐이요, 국사에 대하여서는 아무러한 말도 하지 아니하였다. 그는 마치 천하사에 대하여서는 야심이 없는 것 같았다.
이것을 보고 더러는 왕건이 음흉한 것이라고 하였으나 왕을 머리로 하여 대관들은 왕건의 덕과 성의를 믿어 버리고 말았다. 낙랑 공주는 아주 왕과 왕후에게 맡겨 버리고 일체 찾지도 아니하였다. 공주는 항상 왕후와 같이 있었고 그 때문에 왕은 전에 없이 왕후궁예 자주 출입하였다.
왕은 태자가 낙랑 공주에게 가까이하기를 엄금하였다. 왕자는 여전히 실신한 사람으로 대궐안에서 이라 저리로 거닐고 가끔 노래도 부르고 울기도 하였다. 어떤 날에는 밤이 깊도록 어원(御苑) 속으로 거니는 모양을 보았다.
하루는 초어스름에 태자가 월정교(月精橋) 위로 거닐다가 역시 궁녀의 옹위를 받아 월정교로 오던 낙랑 공주를 만났다. 태자는 돌로 연 꽃을 아로새긴 난간에 기대어 외면하였다.
궁녀들은 그것이 태자인 줄을 알고 합창하고 허리를 굽히며,
『동궁마마!』
하고 불렀다. 낙랑 공주도 합창하고,
『동궁마마, 누이를 몰라 보시나이까?』
하고 고개를 숙였다. 궐내에서는 왕과 왕건이 형제지의를 맺었으므로 이렇게 촌수를 찾은 것이다.
태자는 하릴없는 듯이 고개를 돌려 낙랑 공주에게 답례하고,
『낙랑 공주시니까? 부왕이 근일에 새로 총첩(寵妾)을 들이셨다 하기로 나는 그 사람으로 알고.』
하였다.
낙랑 공주는 태자의 말 뜻을 알아 듣는다. 태자는 자기를 대할 때마다 공주는 괴로왔다. 그것은 공주의 눈에 태자가 말할 수 없이 불쌍함을 깨다고 또 알 수 없는 힘이 자기의 마음을 태자에게로 끌어 붙이는 것을 깨달은 때문이다. 그것은 다만 오라비 없이 자라난 처녀의 외로움뿐만 아니었다.
낙랑 공주는 태자가 있는 서울을 떠나 고려로 돌아 갈 생각이 슬펐다.
왕이 자기를 귀애할수록 왕에게 대하여서는 점점 반감이 생기고 태자가 자기를 배척할수록 태자에게 대하여서는 더욱 애착하는 생각이 났다.
그래서 비록 잠시라도 태자의 낯을 대하기로 원하였고 태자의 낯을 대할 때마다 잠시라도 더 오래 같이 하기를 원하였다.
공주는 태자의 곁으로 한걸음 가까이 가며,
『동궁마마, 사흘을 지나면 고려로 돌아 간다 하나이다.』
하고, 왕건에게서 들은 말을 태자에게 전하였다.
태자는 한걸음 공주에게서 비켜 서며,
『사흘 후에 가신다?』
하고 놀래는 빛을 보였다.
『아이 사흘 후에! 사흘 후에는 북방 나라 고려로……아직 버들 눈도 안 트는 고려로…….』
하고 공주는 슬픈 듯이 한숨을 쉬었다.
『오늘 밤에 떠나시더면 좋을 것을————사흘 안에 또 무슨 흉한 일이 생길 줄 알고————사흘은 멀어라, 사흘은 멀어라.』
하고 몸을 돌려 두어 걸음 가다가 태자는 다시 돌아 보며,
『공주여 아비를 섬길지어다. 어는 아비나 아비를 섬길지어라.』
하고 유심히 공주를 바라보며,
『공주 후생에라도 망국하는 왕의 아들로 태어나지 말 것이, 천하에 욕심둔 왕의 딸로도 태어나지 말 것이————나를 형이라 부르시니 부디 이 부탁 잊지 말 것이.』
하고 또 몸을 돌려 다리 저편으로 건너 가려 한다.
태자가 다리를 거의 다 건너 간 것을 보고 공주는 참다 못하여 서너 걸음 태자의 뒤를 따라 가며,
『동궁마마, 동궁마마!』
하고 불렀다. 공주는 가슴에는 타오르는 정열을 누를 수 없는 듯이 숨이 찼다. 월정교 밑 깊은 물에는 별 빛이 비치이고 임해궁예선 벌써 밤 잔치의 풍악 소리가 울어 왔다.
태자는 공주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도 못 들은 체하고 어원을 향하고 걸어갔다. 태자의 움직이는 그림자가 어둠 속에 어른거리는 것이 보인다.
공주는 잠깐 멈추었다가 다시 몇 걸음을 나가며,
『동궁마마! 동궁마마!』
하고 한번 더 불렀다.
공주를 모시던 궁녀들은 다리에 서서 가만히 바라보았다.
『가엾으시어라!』
하고 한 궁녀가 말하면 다른 궁녀가,
『뉘 가엾으신고.』
한다.
『동궁마마 가없으시어라.』
『어이하여 가엾으신고?』
『그처럼 총명하시고 인자하시더니 근래에 정신이 없으신 듯하니.』
또 한 궁녀가,
『공주도 가엾으시어라. 동궁마마와 짝이 되실건댄.』
『그러하건마는.』
이러한 말을 하고 있다. 입 밖에 내서는 말하지 아니하더라도 꽃 같은 공주가 왕의 손에 꺾이는 것이 아까운 듯이 생각하였다.
태자는 공주가 부르는 소리에 우뚝 섰다.
공주는 빠른 걸음으로 태자의 곁으로 가서,
『한 말씀만……』
하고 말이 막혔다.
『무슨 말씀이니꼬……내 길이 바쁘니.』
하고 태자도 고개 숙인 공주를 굽어 보았다.
『바쁘시다 하시니 이 밤에 어디로 가시나이꼬?』
하고 공주는 고개를 들었다.
『귀신을 만나러 가는 길.』
하고 태자는 남산을 가리키었다.
『누구를 만나시려?』
하고 공주는 놀랐다.
『귀신을! 죽은 사람들의 혼백을.』
공주는 태자의 말씀이 무서운 듯이 입을 벌리고 말이 없었다.
태자는 웃으며,
『귀신이 산 사람보다는 사귀기 좋으니————귀신은 믿을 수도 있나니———— 그중에도 목 잘려 죽은 귀신이 가장 의리 있고 절개도 높으니————충신·열사를 귀신이 아니고 어디서 찾아 보리————열녀는 귀신 아니고 어디서 찾아 보리? 귀신도 아니면 내 누구더러 말을 하리? 남산에는 귀신이 많아 밤이면 모여 서울을 바라보고 통곡하나니, 나도 그 자리에 참례하러 가는 길이 바쁘거니와.』
하고, 정신 없는 사람이 혼자 중얼거리는 모양으로 말하다가 문뜩 공주가 앞에 있는 것을 깨달은 듯이,
『아————낙랑 공주시오? 고려의 누이시오? 나를 불러 무슨 말씀이니꼬?』
하였다. 그 말소리는 심히 은근하였다.
공주는 소매를 들어 눈물을 씻었다.
『눈물을 흘리시나뇨?』
공주는 느끼며,
『자연 비감하여지어!』
하고 태자를 우러러 보았다.
태자도 비창하게 고개를 숙이며, 고려에는 아직도 『 눈물이 남았던가? 우리 신라는 너무 오랜 나라라 사람들의 눈에 눈물이 마른 지 오래여라……가끔 눈물을 흘리는 이 있더라도 그 눈물은 맹물이요, 짠 맛이 없어라……그러나 무슨 말씀이신고?』
하였다.
임해궁 풍악 소리가 은은히 울려 오고 어느 절에서 저녁 재를 울리는지 우렁찬 쇠북 소리 들려 온다.
공주는 태자가 비록 이렇게 횡설 수설하더라도 그 말에는 다 깊은 뜻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태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더욱 깊어지고 또 자기도 태자와 같이 슬픔을 나누고 싶은 마음도 간절하였다.
공주는 손을 들어 태자의 소매를 조금 잡으며,
『동궁마마! 이몸이 불원 천리하고 온 것이 무슨 일인 줄을 아시나이꼬?』
하고 물었다.
『아는 듯도 하고 모르는 듯도 하여이다.』
『그러면 무슨 일로?』
하고 공주는 태자의 소매를 약간 끌었다.
『아마 황룡사 기울어진 탑을 보려고, 그럴지 아니하면 남산에서 우는 귀신의 소리를 들으려고, 또 그도 아니면 공연이 하품을 보려고 ————요사이는 고양이도 잡아 먹을 쥐 없으므로 하품을 먹고 사나니 하품이 피 없으매, 고양이 입은 언제 보아도 희더이다.』
한다.
공주는 한숨을 쉬며,
『그것도 아니나이다.』
태자는 한손을 들어 다리를 치며,
『옳거니 알았도다. 공주 오신 것은 궁 우물의 늙은 구렁이를 낚으러 오신 것이어니, 옛날 당나라 사람이 부소(扶蘇) 서울에 백마를 미끼하여 용을 낚았다거든 그러나 용은 낚었어도 백마는 잃었다거든, 신라 늙은 용을 낚는 미끼로 공주는 너무도 아름다운 미끼가 아닐까? 내 바로 알지 아니하였는가?』
하고 고개를 들어 바라보며 웃는다.
태자의 말은 마디마디 공주의 마음을 찔렸다. 전신에 소름이 끼치고 등에 찬 물을 내려 붓는 듯하였다.
『그것도 아니로소이다.』
하고 공주는 더욱 고개를 숙였다.
『그것도 아니라?』
하고, 의아한 듯이 태자는 공주를 보았다. 푹 수그린 공주의 태도는 바람만 잠깐 불어 와도 금시에 땅에 쓰러질 듯이 연연하여 보였다.
『그덧도 아니라 하면, 그 무엇일까? 어허———— 미친 사람의 정신이 희리 바람처럼 돌아 감이여, 하늘이 땅이 되고 땅이 하늘이 되는구나.』
하고 문득 남산을 바라본다. 남산에서는 사람의 불인가 귀신의 불인가 파란 불이 반짝반짝하고 어원에서는 잠자다가 무엇에 놀란 새가 지저귄다.
궐내에 야순(夜巡) 돌던 군사들이 등불을 들고 오다가 태자와 공주가 섰는 것을 보고 도로 뒤로 물러간다. 공주는 잠깐 뒤로 물러섰다가 다시 태자의 곁으로 오며,
『이몸이 불원 천리하고 온 연유를 모르시거든 이 몸이 말씀하리이다.』
하고, 말하려는 하는 것을 태자가 한걸음 뒤로 물러서며,
『내 길이 바쁘니 짧은 말이어든 하시되 긴 말이어든 후생에 만나서 하 사이다.』
하고 갈 뜻을 보인다.
공주는 황황히 태자의 소매를 따라 잡으며,
『소매를 잡기로 이몸을 허물하시거든 허물하소서. 짧은 말로 오직 한마디 말로 아뢰나이다.』
한다. 태자는 하릴없이 공주에게 소매를 븥들려 우뚝선다.
공주는 죽어도 안 놓치려는 듯이 두 손으로 태자의 소매를 잡으며,
『이몸이 오옵기는, 이몸이 오옵기는.』
하고 차마 말을 못하여 맥맥할 때에 어디서,
『동궁마마를 따라! 동궁마마를 따라!』
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것은 다리 위에 섰던 궁녀들의 소린인지 공중에서 나는 소리인지 모르거니와 공주는,
『오, 그 누구뇨? 그 누구뇨? 이몸이 하려고 생각하는 말을 한 이는 그 누구뇨? 그러하나이다. 이몸이 오옵기는 동궁마마 따라 동궁마마 따라 길이 천리 아니라, 만리라도 양길의 딸 난영이 궁예왕을 따르듯이 동궁마마 따라.』
하고, 두 손을 태자의 어깨에 걸고 매어 달린다.
이때에 궁녀 하나가 태자와 공주 있는 곁으로 뛰어왔다. 공주는 태자에게서 물러났다.
궁녀는 황망하게,
『동궁마마! 상감마마 행차시니이다.』
공주는 놀랐으나 태자는 태연히,
『네 그릇 보았도다. 임해궁 잔치에 가신 상감마마께오서 아직 초어스름이어든 오실 리가 있으랴. 네 다시 보라.』
궁녀는 당황하게 다리 저편에 오는 등불을 가리킨다. 거기는 과연 초롱한 쌍이 앞을 인도하고 불빛에 보이는 이는 용포에 금관을 쓰고 흰 수염을 늘인 왕이 분명하다. 궁녀는,
『분명히 상감마마 아니시이까?』
하였다.
태자는 가리킨 곳을 바라보며,
『아니다. 남산에서 나를 기다리던 귀신들이 나를 찾아 오모이로다.
그렇지 아니하면 지하에 계신 선왕의 혼령이 내게 하실 말이 있어서 발동함이로다.』
그 등불이 다리에 가까이 오는 것을 보고 태자는 웃으며,
『오, 아니로다 아니로다 상감마마의 혼령이시로구나.』
『아이 어인 말씀이신고? 살아 계신 상감마마시니 혼령이 다니시료?』
하고 궁녀가 태자를 본다.
태자는 여전히 웃으며,
『아니로다, 아니로다. 상감마마의 영혼이 아니시면 상감마마의 몸이로구나. 근래에 상감마마는 마음이 미치신 곳이 계시어 혼과 몸이 떨어져 다니신다 하더니, 그 말이 허사 아니로구나. 임해전에 몸을 두시고 혼이 여기 오시였거나 임해전에 몸을 두시고 혼이 여기 오시었거나 임해전에 혼을 두시고 몸이 여기 오심이로다. 아무러나 괴이한 일이로다.
네 가서 혼이시어든 날지 말게 하고, 몸이시어든 쓰러지지 말게 하옵소서 하여라. 괴이한 일이로다.』
하고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궁녀는 태자의 앞을 막아 서서 불빛이 태자에게 비치지 않도록 하면서,
『동궁마마, 잠깐 피하옵소서. 동궁마마 공주마마와 같이 계심을 보시오면 이 일을 어찌하리————아아, 이 일을 어찌하리, 동궁마마, 동궁마마.』
하고 궁녀는 발을 동동 구른다.
이때에 왕은 다리에 다다라 낙랑 공주 모시던 궁년가 다리 위에 선 것을 보고,
『낙랑 공주 어디 계시뇨?』
하고 사방을 둘러 보았다.
궁녀들은 대답할 바를 몰라 두리번두리번하다가,
『낙랑 공주마마는 잠깐 저편에.』
하고는 말이 막혔다.
왕은 낯빛이 변하며,
『잠시도 공주를 떠나지 말라 하였거든.』
하고 엉성을 높이어,
『동궁은 어디 계시뇨?』
하였다.
궁녀는 일부러 먼 곳을 바라보며,
『동궁마마는 아까 저 남산으로———상원(上苑)으로 돌어가셨사오니…….』
하고는 또 말이 막혔다.
왕은 더 말하지 아니하고 다리로 건너 간다.
이때에 태자는 궁녀가 원하는 대로 몸을 피하여 길가 늙은 행나무 뒤에 몸을 숨긴다. 태자는 마무에 머리를 기대고 멀리 하늘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숙인다.
왕이 오시는 것을 보고 공주는 읍하여 왕을 맞으며,
『상감마마 임해전 잔치는 벌써 파하였나이꼬?』
하고 묻는다.
왕은 손을 들어 공주의 어깨에 얹고 웃는 낯으로,
『잔치는 지금 시작이어니와, 잠시 공주를 대하고 싶어 왔노라. 공주는 어이하여 오늘 잔치에 참례하지 아니하였던고? 어이하여 아직 밤 바람이 차거든 이곳에 오래 머무는고?』
하고, 더욱 공주의 곁으로 가까이 가 공주의 등을 만지며 등불 든 시신과 궁녀들을 보고,
『잠깐 자리 저편으로 물러가라.』
하고 좌우를 물려 버렸다.
왕의 명대로 모시던 사람들은 다 이편으로 물러 왔다. 다 무슨 큰일이 있을 것을 겁내는 듯이 말은 못하고 서로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다 물러간 것을 보고 왕은 공주의 허리를 안으며,
『공주는 모레 떠나가려 하나뇨?』
하고 은근히 물었다.
『부왕께서 가자 하시면.』
하고 공주는 읍하고 대답하였다.
왕은 손을 들어 공주의 머리를 쓸며,
『갈 줄이 있으랴. 가지 말지어다. 신라에 있으라.
와 같이 신라에 있으라. 신라에 있을진댄, 무엇은 공주의 것이 아니랴?
왕관까지도 공주의 것일 것을———가지 말라. 공주 가면 나는 어찌하리오.
그래도 가려는가? 가지말라. 부왕이 가자 하시어도 아니 간다 하라. 그래도 가려는가? 아니 간다 하라. 지금 대답하라. 임해전 갈 길이 바쁘니 지금 대답하라.』
하고, 왕은 손으로 공주의 머리를 쓸었다.
공주는 왕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더니, 몸을 돌려 왕의 손에서 빠져 나가며,
『있으라 하시니 황감하여이다.』
하고 냉랭하게 대답하였다.
왕은 다시 손을 내밀어 공주의 어깨를 잡으며,
『그러면 아니 가는가? 그러면 나와 같이 신라에 있으려 하는가?』
하고 기뻐하였다.
공주는 다시 왕의 손에서 빠져 나가며,
『가고 아니 가기는 동궁마마의 뜻에.』
하였다.
왕은 깜짝 놀라 몸을 흠칫하였다. 그리고는 이윽히 공주를 바라보더니 다시 웃으며,
『공주는 몰랐도다. 동궁은 미친 사람이다. 미친 사람이 무슨 말을 하랴.
겉으로 보면 번뜻하거니와, 벌써 미친 지 오랜 사람이라. 비록 태자를 봉하였거니와, 공주 만일 아들을 낳으면 태자로 봉할 것이라……태자의 말에 속지 말라. 태자는 미친 사람이라. 공주는 언제 태자를 보았나뇨?
태자는 미친 사람이니 만나지 말라. 해를 받을까 두려워하라.』
하였다.
공주는 노염을 발하는 듯이 왕께 외면하고 돌아 서며,
『상감마마 다시 생각하시옵소서. 아들을 헐어 말씀하시는 아버지를 믿기 어려워라. 동궁마마 미쳤다 하니 그 어느 미치신고?』
하였다.
왕은 공주의 손을 잡아 끌며, 동궁 『 미친 줄을 천하가 다 아나니, 벌써 미친 지 오래거든.』
할 때에 나무 그늘에서,
『천하는 다 미치거늘 나 홀로 께었는가? 나 홀로 깨었거든 천하는 다 미치었는가? 성상이 나를 미쳤다 하니 미친 줄로 여길 것인가? 깨인 정신으로 차마 못 볼 세상이니, 차라리 미쳐서 보기 싫은 세상을 잊어 버릴까?』
하고 슬슬 왕의 곁으로 나오는 것은 태자다.
왕은 깜짝 놀라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서며,
『누구뇨? 누구뇨? 설마 동궁은 아니려든.』
하며 어두운 빛에 태자를 바라본다.
왕은 한번 더 놀라며,
『태자……태자?』
한다.
『아직 새 왕후께오서 아들을 아니 낳으시니 태자인가 하나이다.
그러하오니 태자 이미 미친 지 오래오니 태자 아닌가도 하나이다. 태자쯤 미친 것이야 큰일 될 것도 아니오나 하늘이나 미치지 아니하는가? 그것이 그것이 염려로소이다.』
하고, 태자는 별이 총총한 그믐 밤의 하늘을 바라보더니,
『하늘이 분명히 미친 듯하여이다. 북진(北辰)이 자리를 떠나 남으로 달아나고 또 듣사온즉, 오늘 해가 동에서 떠서 서쪽으로 가다가 길을 잃어 버리고 저 북문 밖으로 들어 가더라 하오니, 하늘이 미친 것이 분명하오며, 하늘이 미쳤길래로 땅 위에 왕이 나라를 잊고 아비가 아들을 잊는 것인가 하오며, 아무려나 세상은 오늘 밤 닭 울기 전으로 결단이 날 듯하여이다.
큰일이로소이다.』
하고 고개를 끄덕거린다.
태자가 하늘을 바라보고 이상한 몸짓을 하며 횡설 수설하는 것을 보고 왕은 적이 안심하는 모양으로 다시 위엄을 수습하여,
『동궁아, 뉘 앞에서 무슨 말을 하나나뇨?』
하고 꾸짖는 모양으로 소리를 높였다.
태자는 왕과 공주를 번갈아 보며,
『미친 사람이 누구의 앞을 분별하리이까마는 생각컨댄, 고려 일등 공신 낙랑 공주의 앞인가 하나이다. 보오니 머리에 금관을 쓰시고 몸에 용포를 입으시니 아마 밤에 사람이 없는 틈을 타시와, 엤날에 입으시던 것을 한번 입어 보신 것이 아닌가 하나이다. 그러하옵길래 쓰시고, 입으신 것이 모두 어울리지를 아니하여 남의 것을 얻어 입으신 듯하옵고, 또 백발이 성성하시되 철없는 젊은 사람의 모양을 하시는가 하나이다.』
하고, 태자의 말이 그칠 줄을 모르니 왕이 참지 못하여 칼 자루에 손을 얹으며,
『충아, 이것이 임금에게 하는 말이며 아비에게 하는 말이뇨? 아무리 미쳤다 하기로 충효의 길을 잊어 버렸나뇨?』
하고 어성을 높인다.
태자는 웃고 남산을 가리키며,
『충효라 하시오니 천하에 충이 죽은 지 이미 백년이옵고, 효도 죽은 지 벌써 십년이라. 다시 무슨 충효 있사오리까? 지금의 충은 진헌이 힘 있을제 진헌의 앞에 하리를 굽히고, 오아건이 힘있으면 왕건의 앞에 머리를 숙이고, 낙랑 공주 자색이 아름다우면 공주의 허리에 팔을 두르는 것이라 하나이다. 폐하 홀로 충효를 겸하시오니 신자(臣子)들이 가질 충효는 남음이 없다 하노이다.』
하였다.
왕은 칼을 빼어 둘러 메며,
『불효 불충한 놈아, 그 입을 닫쳐라 칼로 네 혓줄기를 끊으리라. 하고 태자를 노려 보았다.』
태자는 태연히 손을 내밀어 왕의 칼날을 만지려 하며,
『그 칼을 보여 주소서. 완악하고 죄많은 목숨은 잘 드는 칼이 아니고는 베어지지 아니한다 하오니 이 칼이 더 날카로울까 하나이다.』
하고, 자기의 허리에 찼던 칼을 떼어 왕에게 두 손으로 받들어 드리며 비장한 어조로,
『아깝지 아니한 이 목숨 천년 사직이 망하여 버리고 거룩한 서울이 쑥밭이 되는 꼴을 보기 전에 폐하께서 낳으신 목숨이니 폐하께서 끊어 주시옵소서.』
하고 우후후 소리를 내어 울었다.
왕은 빼어 들었던 칼집에다 도로 꽂으며,
『어지어 내 일이어! 이지어 내 일이어!』
하고 두 번 탄식하고 몸을 돌려 다리를 건너 간다.
태자는 칼을 두 손에 든 체로 물끄러미 비슬비슬 다리를 건너 가는 왕을 바라보다가 손에 들었던 칼을 땅에 떨어뜨리니 사르릉하고 칼날이 칼집 속에서 운다.
공주는 얼른 땅에 떨어진 칼을 집어 손수 칼끈을 태자의 허리에 둘러 채운다.
왕의 등불이 점점 떨어져 어느 모퉁이에 이르러 아니 보이게 된 때에 태자는 낙랑 공주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공주여 가라 『 ! 신라에 머물지 말고 고려로 가라! 하루 바삐 가라!』
하였다.
공주는 소매를 들어 눈물을 씻으며,
『동궁마마! 가라 하시면 가리이다. 그러나 이몸은 공주도 귀치 아니하고 왕후도 귀치 아니하오니 동궁마마 곁에 있게 하여 주실 수는 없으리이까?』
하고 운다.
『공주의 뜻을 아노라. 그러나 공주도 내 뜻을 알라!』
하고는 걸음을 빨리 하여 어두운 상원(上苑)속으로 가 버린다.
공주는 두어 걸음 따라 가며,
『동궁마마! 동궁마마!』
하고 불렀으나 대답이 없고 얼마 있다가 슬픈 목소리로,
『공주여 내 뜻을 알라!』
하는 한 마디가 어둠 속에 울려 왔다.
공주는,
『동궁마마! 동궁마마의 뜻은 아나이다.』
하고 길가 나무에 울며 쓰러진다.
마침내 왕건이 서울을 떠날 날이 왔다. 그날은 삼월에도 삼질날 제비들이 오는 날이었다.
왕건이 서울에 들어 올 때에는 단촐하게 오십기(五十騎)만 데리고 왔었으나 서울을 떠날 때에는 신라 삼보(新羅三寶) 중에 하나인 순금으로 만든 장륙 존상(丈六尊像)을 선두로 하고 대대로 내려 오는 옥좌(玉座)며 진헌이 가져가고 남은 각색 보물이며 각색 장색이며 학자며 이러한 것을 백여 차를 실려 일행이 십리에 연하였고, 신라가 몇 날 남지 아니한 것을 지레 짐작하고 고려로 따라 가려는 대관과 부자들의 값가는 보화와 가장집물도 백여 차나 되었다. 그 사람들은 위선 세간을 고려로 옮겨 두었다가 때가 오면 몸만 살짝 빠져 달아나자는 것이었다. 왕건은 그러한 사람들을 후히 대접하여 고려에서 편안히 살 땅을 주기를 허락하였다. 그러나 그 사람들도 몸까지 따라 가기는 꺼리어 서울에 남아 있었다.
왕은 낙랑 공주를 서울에 두고 가기를 왕건에게 누누이 권하였으나 왕건은 공주가 떨어져 있기를 원치 아니한다는 핑계로 거절하고 다시 정식으로 통혼이 잇기를 바라는 뜻을 비치었다.
그리하고 왕건은 태자를 고려로 데려 가기를 꾀하였으나 되지 아니할 줄을 알고 유렴을 국사(國師)라는 명의로 고려로 데리고 가기를 왕께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왕건은 유렴의 인물을 존경하여 그의 계책을 받으려는 뜻도 있거니와, 신라 조정에 유렴을 남겨 두는 것은 호랑이를 들에 놓는 것되 같이 생각하였으므로 유렴 하나를 손에 넣는 것보다 큰일인 것을 안 것이다. 그러나 왕은 유렴을 쳐버리는 것이 옆구리를 겨누고 있는 칼을 쳐버리는 것같이 시원하게 여겼다. 유렴 한 사람만 없어지면, 누라 왕의 귀를 거스르는 말을 하랴? 누가 왕의 하고자 하는 바를 거스르랴?
아니 간다는 태자를 억지로 고려로 보내기는 민심도 두렵거니와 유렴을 보내기는 가장 쉬운 일이다 ————그것은 유렴이 왕명이면 세 번 간하여 듣지 아니하면 울고 좇는 유렴의 충성을 아는 까닭이다. 유럼은 여러 번 왕께 말하였으나 왕이 듣지 아니하므로 마침내 왕명을 좇아 고려로 가기로 하고 부인과 태자비 되는 외딸 계영아기와 영 이별을 하고 왕과 왕후에게도 금생에 다시 만나지 못할 뜻으로 영원한 하직을 하였다. 마지막으로 태자를 보고,
『신은 왕명으로 고려로 가나이다.』
할 때에 태자는 유렴의 눈에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보고,
『좋은 나라로 가거든 왜 우나뇨?』
하였다.
유렴이 더욱 울며,
『금생에는 다시 상감마마와 동궁마마께 뵈옵지 못하리이다.』
하는 것을 태자는 손을 내어 두르며,
『나를 다시 볼 날이 없으려니와, 상감마마는 불원에 고려에서 서로 대할 날이 있으리라. 그러나 그것이 무슨 큰일이요? 신라를 다시 대할 날이 없을 것을 설어하라.』
하였다.
유렴은 어색하여 다시 말은 못하고 다만 눈물 어린 늙은 눈으로 태자의 초췌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태자가 분명히 미친 사람이 아닌 것을 알고 적이 안심하는 듯이,
『동궁마마 내내 천만 보중하옵소서.』
하고 물러 나왔다.
유렴은 신라의 관복을 다 벗어 집 사람을 주며,
『내 고려에서 죽었다 하거든 이것을 묻어 나의 무덤을 삼으라. 내 죽어 혼이 잇거든 고려에 있는 몸을 버리고 신라에 둔 옷에나 와서 접하리라.』
하였다.
『진헌이 왔다 갈 제시중 하나 두고 가데 왕건이 다녀 갈 제 시중마자 가져가노.』
하고, 백성들은 시중의 수레가 서울거리로 마지막 지나갈 때에 수레를 붙들고 울었다.
유렴은 초졸한 선비의 북색으로 수레에 단정히 앉아 차마 눈을 들어 좌우를 돌아 보지 못하는 듯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유렴 시중이 운다.』
하고 백성들은 더욱 울었다.
웬일인지 유렴이 상대등이 된 뒤에도 백성들은 시중이라고 불렀다. 그 이름이 더욱 정다왔던 까닭인가.
왕은 구무제(穴城)까지나 왕건을 전송하였다. 고려까지 따라라도 가고 싶은 것을 그도 못하고 구무제에 머물러 왕건과 공주의 수레가 멀어 가는 것을 바라보고 자못 창연하였다. 왕건을 따라, 고려로 가고 싶은 사람은 왕뿐이 아니었다. 대관들 중에도 몸은 신라에 남고 마음은 왕건의 수레바퀴를 따라 고려를 향하였다.
길가에는 백성들이 구경을 나왔다. 백성들까지도 왕의 거동 구경을 나온 것보다 왕건의 거동 구경을 나온 셈이었다.
왕건이 다녀 간 뒤로 왕은 전사에 뜻이 없고 주야로 낙랑 공주만 생각하였다. 노인이 색에 미친 꼴은 차마 못 보겠다고 사람들이 비웃을이만큼 심하였다. 그래서 왕은 한달에도 몇번씩 편지를 써서 고려로 보내고는 무슨 회답을 기다렸다.
고려에서는 세 번 편지에 한번 회답이 나왔다. 왕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신하들도 나라 일에는 뜻이 없고 어찌하면 왕건의 뜻에 들까, 어찌하면 다만 한푼이라도 돈을 더 벌어 고려에 미리 보내어 집과 땅을 구하여 놀까 이러한 생각만 하고 있는 듯하였다.
<대하 장경(大廈將傾)에 나 혼자 그러면 별 수 있나.>
하고 저마다 제 실싸퀴(실속)나 하기를 도모하는 듯하였다.
강토는 다 없어지고 민심은 이만하고 조정에는 나라를 근심하는 이가 하나도 없으니, 구고는 마르고 대궐 안에는 도적과 귀신들만 편안한 날이 없이 난동하였다.
그중에서 옛날 김 성·김 율의 세도를 한손에 잡은 이는 시랑(侍郞) 김봉휴 였다 (金封休) . 왕건이 서울에 와 있는 동안에 여러 사람이 다투어 왕건의 마음에 들려 하였으나 그중에 가장 왕건의 신임을 받은 이는 아직 삼십이 넘을락말락한 김 봉휴였다.
김 봉휴는 일찍 당나라에 유학하여 문명이 높고 재주가 과인하며 구변이 좋고 또 모략이 있는 사람이다.
왕건은 한번 보매, 그 사람을 알아 보았다. 알아 본다 함은, 첫째 그의 재주와 구변이 능히 신라 조정을 휘두르고 또 그의 뜻이 능히 명리(名利)로 유혹할 수 있음을 본 것이다.
김 봉휴는 본래 가난한 사람이었으나 왕건이 다녀 간 후로 벼슬은 갑자기 사람에 오르고, 오는 곳 모르는 재물이 흥성하여 문객이 날마다 저자를 이루고 왕도 돈을 쓰려 할 때에는 김 봉휴에게 말하였다.
김 봉휴는 누구의 무슨 청이나 아니 듣는 것이 없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그에게는 재주도 끝이 없고 재물도 한량이 없는 듯하였다. 왕도 무슨 원하는 일이 잇을 때에 김 봉휴에게 말하면 반드시 그 일이 이루었다.
그러나 김 봉휴의 세도에는 뜻대로 안되는 사람이 있었다. 그것은 김봉휴와 같이 당나라에 다녀 오고 가위 죽마 고우라 할 만한 시랑 김비(金朏)와 사빈경(司賓卿)이유(李儒)다. 김 비와 이 유는 유렴의 계통이다. 그들은 대의(大義)를 내세우고 옥으로 부서질지언정 질그릇으로 온전하기를 원하지 않는 김 봉휴 편으로 보면 고집 불통하는 무리들이었다.
수효가 많지는 아니하나 김 비‧이 유를 따르는 이도 있어 그들은 모두 태자의 편이 되었다.
그러나 태자는 이제 와서는 벌써 나라를 바로 잡을 뜻을 잃어 바리고 거짓 미친 것이 참 미친 것과 같이 되어 버렸다. 태자는 사람을 만나는 대로 미친 사람 모양으로 풍자와 회학으로 일삼고 그렇지 아니하면 눈물을 흘렸다.
태자가 아직 태자 되기 전에 사귀던 무리들도 다 흩어지어 버렸다.
그러나 왕에게서 떨어진 백성의 마음은 그래도 태자에게 붙어 있어 태자가 미복으로 거리로 나와 다닐 때에 백성들은 반가운 듯이 합창하고 허리를 굽히고,
『동궁마마 동궁마마.』
하였다.
그리고는 태자가 지나간 뒤에는,
『아이 가엾으시어라.』
하고 늙은이들은 태자를 위하여 눈물을 흘렸다.
백성들도 태자에게 큰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태자가 불쌍하였던 것이다.
삼년의 세월은 이렁저렁 지내 버렸다. 왕의 마리에는 백발이 더 늘고 나라의 강토는 더욱 줄어 들었다.
왕이 늙고 나라가 줄도록 더욱 느는 것은 시랑 김 봉휴의 세력뿐이었다.
대궐이 갈수록 퇴락하는ㅍ대신에 김시랑의 집은 갈수록 커지고 화려하여 지었다. 대소 관원은 김 봉휴의 뜻대로 내고 들었다.
인제는 신라의 사직을 들어 고려 왕에게 바칠 기운은 익었다. 하려고 하면 오늘도 하고 내일도 할 듯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감히 먼저 그 말이 나오기만 고대하였다.
이 말을 먼저 내이지 못하는 이유는 또 하나 있다. 그 것은 왕건이 서울을 다녀 간 뒤에 진헌이 일길찬(一吉粲) 상귀(相貴)를 보내어 바로 고려를 습격하여 예성강까지 올라 가 염백정(鹽白貞) 세 고을을 노략하고 저산도(猪山島)에 먹이는 말 삼백필을 빼아서 가고, 또 그해 시월에는 해군장(海軍將) 상애(尙哀)를 보내어 고려의 대우도(大牛島)를 칠 때, 왕건이 대광(大匡) 만세(萬歲)를 보내어 막으려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따옥이 섬에 정배 보내었던 유금필(庾黔弼)을 다시 불러서 겨우 큰일을 면하였다.
이 모양으로 진헌은 일변 해군으로 고려를 침략하여 고려가 평안한 날이 없을 뿐더러, 또 일변 신라에 사람을 보내어 만일 고려와 더욱 가까이 하면 대군을 몰아 서울을 엄살할 뜻을 위협하였다.
이 때문에 신라 조정에서도 주저하지 아니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세를 움직일 대사건이 생겼다. 그것은 진헌이 아 불이(阿弗鎭)를 침범한 것이다. 아불이는 서울에서 서으로 백리도 못되는 요해저다.
신라는 크게 놀래어 고려에 구원을 청하지 아니치 못하였다. 왕건은 곧 유 금필(庾黔弼)을 정남 대장군(征南大將軍)을 삼아 군사 삼천을 주어 아불이로 보내었다.
그러나 유금필의 군사는 아불이 싸움에 거의 다 죽고 겨우 삼백인이 살아 남았다.
금필은 살아 남은 군사를 끌고 때나루(槎灘)에 이르러 잠시 진헌의 군사를 피하였다. 밤에 금필은 살안 남은 군사들을 앞에 세우고 이렇게 달하였다.
『삼천 대둔을 거느리고 진헌을 치려 하다가 이제 싸움에 패하여 군사를 잃었으니 내 무슨 면목으로 돌아 가 상감마마께 뵈오리오. 나는 단신으로 백제 군중에 들어가 신검(神劍)과 자웅을 결할 터이니, 너희들은 마음대로 각각 살 길을 도모하되 나를 따를 자는 나루 이쪽에 머물고 살아 돌아가기를 원하는 자는 이 배를 타고 나루를 건너라.』
하고 눈물을 흘렸다.
금필의 만에 군사들은 모두 울고 나루를 건느지 아니하는 자가 팔십 명이 남았다.
금필은 살아 돌아 가려고 배에 오른 자들을 향하여,
『너희 만일 무사히 고려에 돌아 가지든 우리 팔십명은 왕명을 받을 어때 나루에서 죽더라 하여라.』
하고 팔십명 장사를 거느리고 밤에 신검의 진을 엄습하였다.
신검의 진에서는 이날 싸움에 이긴 것을 기뻐하며 술을 마시고 늦도록 놀다가 깊이 잠이 들었던 길이나.
밤에 불의의 습격을 당하여 오천 대군은 산야로 흩어지어 버리고 백제 통군(百濟統軍) 신검도 겨우 몸을 빼어 달아나 버렸다. 그러나 이 싸움에 금필은 또다시 사십인의 장사를 잃어 버리고 나머지 사십명 군사를 끌고 서울로 들어 갔다.
서울에서는 패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상하가 물 끓듯하던 차에 불의에 금필이 피묻는 군사 사십인을 끌고 서울로 들어 오는 것을 보고 서울 백성들은 죽은 귀신이 들어 오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왕은 계하에 내려 금필을 마자 그 손을 잡고 울며,
『대광(大匡)이 아니었으면 신라는 어육이 될 뻔하였도다. 상국(上國)의 은혜를 무엇으로 갚으랴.』
하고 크게 잔치를 베풀어 금필을 위로하였다.
신검(神劍)은 금필에게 패하여 잠시 몸을 피하였다가 금필에게 군사가 많지 아니함을 알고 흩어진 군사를 모아 금필이 돌아 오는 길을 기다려 이불이 원수를 갚으려 하여 자도(子道)의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금필은 서울에서 돌아 올 때에 서울에 있던 고려 군사와 또 서울을 지키던 신라 군사 이천을 데리고 오다가 자도에서 신검의 복병을 만나 싸움을 싸운 끝에 신검의 군사를 깨뜨리고 백제 장수 일곱을 사로잡고 머리 천여급을 베어 가지고 고려로 돌아 갔다.
신검이 두 번이나 금필에게 패하매,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백제에 돌아와 아비 진헌에게 오천 군사를 주면 고려의 원수 갚기를 청하였으나, 진헌은 신검이 두 번이나 패한 연유로 신검의 말을 물리치고 또 금필의 재주를 두려워하여 아직 고려와 화친을 하기를 꾀하였다.
신검은 이것이 다 아우 금강(金剛)이 늙은 아버지를 꾀어 자기를 물리치려 하는 꾀로만 여겼다.
그렇지 아니하여도 평소에 아버지 진헌이 네째 아들 금강을 특별히 사랑하는 것을 시기하던 차에 이 일이 있음으로부터 금강을 미워하는 마음이 더욱 심하였다.
마침 왕건이 대병을 몰아 운주(運州)를 엄습하려 하였다. 이때에 신검은 한번 더 자기의 군사를 주어 고려 군사를 물리치고 송도까지 일거에 들어갈 것을 말하였으나, 진헌은 신검을 믿지 아니하고 금강에게 오천 군사를 주어 운주를 지키라 하였다.
금강은 오천 군사를 거느리고 운주에 이르러 아버지 뜻대로 왕건에게 글을 보내어,
『兩軍相鬪勢不俱全恐無知之卒多被殺宣結和親各保封境(두 군사가 서로 싸우면 피차에 온전한 길이 없으니 점하신대 불쌍한 군졸만 많이 죽을 것이라, 마땅히 서로 화친 맺어 각각 제 땅을 안보하자.)』
하는 뜻을 전하였다.
왕건도,
『男盡從戎婦猶在役 不忍勞苦瘡痍之民豈豫意哉(남자는 다 싸움에 나가고 부녀도 군사가 되어 노고를 참지 못하니, 이 백성을 괴롭게 함이 어찌 나의 뜻이랴.)』
하여 아무쪼록 싸우기를 피하려 하였다.
그러나 금필이 아뢰기를,
『이제 진헌이 화친을 원함은 진실로 화친의 뜻이 있는 것이 아니요, 신검이 두 번 패하여 수천의 군사를 잃으니, 서서히 잃은 힘을 회복하려 함이오니 어찌 진헌의 괴휼한 말을 믿으시려 하나이까? 이제 진헌을 치지 아니하면 장차 더 큰 후환이 잇을 것이오니, 금일의 형세 오직 싸움에 잇는지라 원컨댄 대왕은 신등이 적을 깨뜨림을 보소서.』
하고 싸우기를 주장하였다.
왕은 금필의 충성과 재주를 믿고 막지 못하여 싸우기를 명하였다. 고려도 건국 이래로 하루도 평안한 날이 없어 백성들의 원성이 자못 높았을 때라, 왕건은 혹 각처로 순행하여 백성을 위로하고 혹은 부세를 경감하여 민심을 사려 하였다. 만일 이번 금강(金剛)과 싸와 패한다 하면 왕건의 운명도 어찌될지 몰랐을 것이다. 더구나 금강은 재주 있고 용력 있기로 천하가 두려워하는 장수요, 또 그 군중에는 풍운 조화를 마음대로 부린다는 술사 (術師) 종훈(宗訓)과, 살 맞은 자리와 칼 맞은 자리를 순식간에 고친다는 의사 훈겸(訓謙)과 백전 백승하여 한번도 싸움에 져 본 적이 없다는 용장 상달(尙達)·최필(崔弼)이 있으니, 왕건이 생각하기에는 아무리 금필의 재주와 무용으로라도 백제 군사를 대적하기가 어려울 듯하였던 것이다.
금강은 왕건에게 사자를 보내고 회보가 돌아 오기를 기다리며, 밤이 깊도록 제장을 모아 술 먹고 놀다가 고려 군사가 백제 사자의 목을 베어 앞에 들고 물 밀 듯 들어 온다는 기별에 갑자기 당황하게 응전하였으나, 마침내 견디지 못하여 금강은 삼천군을 잃고 달아나고 상달·최필 등은 칼을 던지고 항복하고, 풍운 조화를 부린다는 종훈과 의사 훈겸은 어찌할 줄을 모르고 헤매다가 금필에게 사로잡혔다.
금강이 운주(運州)에서 패하였단 말을 듣고 진헌의 맏아들 신검은 진헌을 잡아 금산사(金山寺)에 가두고 군사를 보내어 길에 매복하였다가 패하여 돌아 오는 금강을 잡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금강을 미워한 것은 신검뿐이 아니었다. 강주 도독(康州都督)으로 있는 양검(良劍)과 무주 도독(武州都督)으로 있는 용검(龍劍)도 그 형 신검과 같이 아우 금강이 아비의 총애를 혼자 받아 장차 왕위를 이으러 하는 것을 미워하였다.
그러다가 금강이 운주에서 패한 소문을 듣고, 신검의 뜻을 살핀 이찬(伊粲)·능환(能奐)은 양검·용검에게 사람을 보내어 진헌을 패할 뜻을 통하고 파진찬(波珍粲) 신덕(新德)과 영순(英順)과 같이 짜고 신검을 권하여 이일을 일으킨 것이다.
이때에 진헌은 아직 어린 첩 고비(姑比)를 끼고 자리에 있어 자는데 문득 문 밖에서 요란한 고함 소리가 들리므로 놀래어 깨니, 군사들이 무엄히 왕의 침소에 들어 와 일어나기를 재촉하고 그 뒤로 능환·신덕·영순 세 사람이 들어 와 읍하였다.
왕은 어이 없어,
『어인 일고?』
하고 물은 즉 능환은,
『상감마마께오서 늙으시오니 맏아드님 신검마마께오서 왕이 되시옵기로 하례를 드리나이다.』
하고 허리를 굽혔다.
진헌은 진노하여 칼을 들어 서안을 치며,
『뉘 신검을 왕이라 하더뇨? 신검을 부르랴. 금강은 어디 있나뇨?』
하고 호령을 하였다.
능환은 다시 읍하고,
『금강아기는 금필에게 잡히어 죽었나이다.』
하였다.
금강이 죽었단 말과 신검이 왕이 되었단 말에 진헌은 가슴을 치고 통곡하였다. 그럴 때에 군사들이 달려들어 왕을 가마에 담아 금산사에 가두고 파달(巴達)에게 삼십명 장사를 주어 이를 지키게 하였다. 파달은 주먹으로 바위를 바순다는 이름 있는 장사다.
진헌은 금산사(金山寺)에 유폐되어 말째 아들 능예(能乂)와 딸애복(哀福)과 첩 고비(姑比)를 데리고 수십일을 지내엇다.
진헌을 유페하여 금강을 죽인 신검은 백제 왕이 되어 극내의 모든 죄인을 대사하고,
『대왕(진헌)이 신무(神武) 뛰어 나시고 영모(英謨) 고금에 으뜸되시는 어른으로 쇠게(衰)를 만나서 스스로 경륜으로 맏으시고 삼한을 쫓으사, 백제를 회복하사 도탄을 확정하시니 백성이 평안히 모여 춤 추며 즐기고 먼 데 무리 또한 따라 오는지라. 중흥의 공업이 거의 이룰러니, 생각을 그릇하사 어린 아들을 지나치게 사랑하실새 간신이 권세를 잡아 크신 임금을 진혜(晋惠)의 어둠에 이끌고 자비하신 아비를 헌공(獻公)의 혹함에 빠지시게 하여 대보(大寶)로써 완동(頑童)에게 주려 하시어늘, 다행히 상세 강충(降衷)하사 군자(君子) 허물을 고치사 맏아들로 하여금 이 나라를 맡아 다스리게 하시는지라. 돌아 보건댄, 내 진장지재(震張之才) 아니라 어찌 임군지지(臨君之智) 있으리오마는, 긍긍 율률(兢兢慄慄)하여 얼음과 못을 밟는 듯하여 불차(不次)의 은(恩)을 미루어서 유신(維新)의 정(政)을 보이려 하노라.』
하고 하교(下敎)하였다.
그러나 장수들과 백성 중에는 신검이 아비 진헌을 폐하고 아우 금가을 죽이고 또 금강의 처첩과 자녀까지 다 죽이고 대위(大位)를 찬탈한 것을 불평히 여겨 은근히 금산사에 유폐된 진헌을 끌어 내려는 이도 있었다.
이러한 때를 타서 신검이 즉위한 지 한달 후 사월에 왕건은 금필로 도통 대장군(道通大將軍)을 삼아 해군을 주어 예성강(禮成江)으로 내려 가수로로 나주(羅州) 사십여 고을을 치게 하였다.
금필의 군사는 힘 안 들이고 나주에 들었다.
진헌은 고려 군사가 나주에 들었단 말을 듣고 가만히 사람을 금필에게 보내어 자기가 고려로 갈 뜻을 말하였다. 금필은 나주까지 오기를 진헌에게 청하였으나 진헌은 금산사를 빠져 날 도리가 없었다.
하루는 진헌이 파달(巴達)과 지키는 장사 삼십을 불러 잔치를 베풀고 굴을 먹었다. 밤이 깊도록 술을 먹어 파달과 삼십명 장사가 취하여 이리저리 쓰러진 틈을 타서 진헌은 아들 능예(能乂)와 딸 애복(哀福)과 첩 고비(姑比)를 데리고 사능을 넘어 금산사를 빠져 민가에 들어 가 농부의 옷을 바꾸어 입고 낮에는 산에 숨고 밤에는 길을 걸어 천신 만고로 나주성에 다다랐다.
금필은 눈물을 흘리며 진헌을 맞아 위로하고 왕으로서 대접하고 이 뜻을 왕건에게 장계하였다.
왕건은 곧 대광(大匡) 만세(萬歲)로 정사를 삼고 원보(元甫)·향예(香乂)·오담(吳談)·능선(能宣)·충질(忠質) 등으로 하여금 병선(兵船) 삼십척을 거느리고 해로로 진헌을 맞아 송도에 이르렀다.
진헌이 송도에 들어 올 때에 왕건은 궐문 외에서 진헌을 맞았으나 진헌은 왕의 앞에 엎디어,
『과인으로 하여금 대왕께 신이라 일컫게 하옵소서. 대왕의 성덕이 아닐질댄, 실국 여생이 천하에 어디 지접할 곳이 있사오리까?』
하고 눈물을 흘렸다.
왕건은 친히 진헌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
『대왕은 과도히 설어 마소서.』
하고, 인하여 궐내에 불러 들여 그날 하루는 진헌을 왕으로 대접하고 진헌이 재삼 칭신하기를 청하매, 진헌을 상보(尙父)라 부르고 벼슬을 백관 위에 있게 하고 남궁(南宮)을 주어 진헌의 지블 삼게 하고 양주(楊州)를 주어 식읍을 삼고 많은 금백(金帛)과 남종 사십과 여종 사십과 말 열 네 필을 주고 이전에 진헌의 신하로 있다가 먼저 항복한 신강(信康)으로 아관(衙官)을 삼아 일변 진헌의 살림을 맡아 보게 하고 일변 진헌의 행동을 지키게 하였다.
고려가 나주 지경을 차지하고 또 진헌이 고려에 가 있다는 말은 신라 조정에 큰 동요를 주었다. 진헌이 고려에 간 뒤에 후백제에는 평안하 날이 없었다. 안으로 신검·양검·용검 삼 형제간에 싸움이 끊일 날이 없고 밖으로는 고려 군사가 설렘을 따라 민심이 이산하였다.
왕건은 짐짓 서경(西京)에 순행하여 패수(涓水) 여러 고을을 돌고 다시 황해주(黃海州)에 순행하면서 가만히 금필로 하여금 신라의 연해주(沿海州)에 군사를 나오게 하였다. 금필의 군사가 가는 곳에 저항하는 자가 없어 불과 일삭 내에 신라 연해주 삼십여 고을이 고려에 항복하였다 항복하는 . 대로 그 도독과 장군을 송도로 불러 벼슬을 주고 집을 주어 후대하였다.
신라 조정에서는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김 봉휴는 속히 고려에 항복하여 후환을 면하기를 주정하고 이 유(李濡)는 이를 반대하였으나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할 즈음에 시월에 이르러 금필의 군사가 아슬라에 들어 왔다는 장계가 왔다. 아슬라는 궁예가 웅거하였던 곳이다. 아슬라에서 서울은 지척이다. 이틀 안에 서울은 금필이 손에 들 것이다.
왕은 군사를 백관과 늙어 물러간 백관이 다 모여 날이 맞도록 의논하였으나 결정을 못하던 차에, 고려 군사가 아슬라 성을 떠나 서울을 향하고 올라 온다는 기별이 왔다. 이것은 밤이었다. 조정에서는 창황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다. 모였던 대관 중에는 피난할 것을 근심하여 슬슬 빠져 나가는 이조차 있었다. 밤은 깊어가고 백성들은 대궐 문밖에 모였다.
금필의 군사는 서울을 향하고 부쩍부쩍 들어 왔다. 무엇하러 들어 온단 말은 없으나 밤이 되어도 행군하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이러한 소문이 들어 올 때마다 궐내에 모인 백관들은 당황하였다. 그래도 아무도 먼저 항복하자는 말을 바로 내지는 못하였다.
이때에 고려에서 사신이 들어 왔다는 기별이 들어 왔다. 밤이 깊었건만는 사신은 곧 궐내로 들어 오게 되었다.
그 사신은 예전 재암성 장군(載岩城將軍)이요, 지금 고려의 상보(尙父)이던 선필(善弼)이었다.
고려 사신이 온단 말에 왕은 당황히 일어나 별실에 나가 김 봉휴와 다만 세 사람이 만났다. 왕은 왕의 위엄도 잊어 버리고 계하에 뛰어 내려 선필의 손을 잡으며,
『상국 상보 어찌 깊은 밤에 임하시나이꼬?』
하였다. 선필은 대국 사신다운 태도를 가지고 왕을 대하였다. 선필은 마치 신라 왕고 자기와 동등인 것같이 행동하였다. 왕은 마음에 선필이 옛날 신라의 신하이던 것을 잊어 버린 듯한 행동이 미웠으나 어찌할 수 없이 다만 선필의 뜻을 거스르지 안하기를 힘썼다.
선필은 고려가 신라를 위하여 백제와 여러 번 싸운 뜻을 말하고, 만일 고려 왕의 호의가 아니었던들 서울은 벌써 진헌의 손에 무찔렀을 것을, 진헌이 비록 고려를 대항하였으나 고려 왕의 성덕으로 진헌을 후대하여 상보를 삼아 벼슬이 백관 위에 있음을 말하고, 나중에 신라 왕께 대하여서는 진헌에게 한 것보다 더 후대를 줄 것을 말하고 비록 신라 나라를 고려에 바치더라도 왕의 칭호를 변치 아니할 것을 말하고, 끝에 만일 이때를 넘기면 천라 백성이 평안하기를 위하여 부득이 금필의 군사가 서울에 들어 올 것이니, 그리되면 화단을 면치 못할 것을 말하고, 자기는 고려 왕의 성의를 받자와 마지막으로 왕에게 취할 길을 가르친다는 뜻을 말하고,
『대군이 지척에 임하였으니, 닭 울기 전에 결단하소서.』
하고 선필은 입을 다물었다.
본래 왕건은 유렴을 먼저 항복받아 유렴의 입으로 왕에게 항복을 권하고 신라의 백관에게 고려에 돌아 오기를 권하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삼년을 두고 유렴을 달래어도 보고 위협도 하여 보았으나, 유렴은 듣지 아니하고 도리어,
『왕 장군은 금성태수(金城太守)를 생각하라.』
하고 왕건을 꾸짖었다. 금 성 태수라 함은 물론 왕건의 아버지 왕륭(王隆)을 가리킨 것이다.
유렴은 결코 왕건을 대왕이라고 부르지 아니하고 「왕 장군」이라고 부르고 자기를 신이라고 칭하지 아니하고 「나」라고 불렀다. 그러할 때마다 좌우에서 유렴을 협박하였으나 왕건은,
『두라 충신의 이름을 남기게 하라.』
하였다.
한번은 왕건이 선필을 보내어 대세가 이미 기울었으니 혼자 고집하더라도 아무 효력이 없을 것이요, 도리어 일신에만 해로울 것인즉, 차라리 지금에 왕건에게 항복하여 영화를 누리고 또 새 나라의 건국 원훈이 되기를 권하려 하였다. 선필이 유렴을 둔 집에 이르러,
『상보 왕 선필이 온다 하라.』
하고 통하였더니 유렴은,
『상보 왕 선필이란 자를 내 안 일이 없노라.』
하고 집에 들이지 아니하였다. 선필은 하릴없이,
『재암성 장군 선필이 온다 하라.』
하고 마침내 신라 벼슬을 말하였다. 왕 선필이라는 왕(王)성은 왕건에게 받은 성이다.
『재암성 장군 선필이라면 들라 하라.』
하여 선필을 불러 들였다.
선필은 들어 가는 길로 상대등에게 대한 예로 먼저 유렴에게 절하였다.
그러나 선필이 왕건의 시킨 뜻을 말할 때에 여러 말없이,
『이놈을 몰아 내치라.』
하고 유렴이 호령을 하여 선필이 얼굴이 흙빛이 되어서러나와 버린 일이 있었다.
선필이 유렴에게 「이놈 몰아 내치라」는 호령을 듣고 물러나온 후, 왕은 유렴에게 대하여 절망하여 버리고 말았다. 살을 점점이 빼어 내고 뼈를 부지르더라고 유렴의 마음을 휘지 못할 줄을 안 까닭이다.
이에 마지막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금필로 하여금 일변 대군을 끌어 신라의 조금 남은 땅 마저 점령하게 하고, 일변 선필을 보내어 신라 왕을 달래기로 한 것이다. 이라하여 불인 일병(不〇一兵)하고 신라 왕이 자진하여 나라를 고려에 바치게 하려 함이 왕건의 뜻이다. 이리하여 선필이 온 것이다.
왕은 「왕이라 부르기를 허락한다」는 말에는 안심이 되나 그래도 나라를 들어서 남에게 내어 주고 만승의 지위에서 갑자기 떨어지어 왕건의 밑에 들리라 하면, 그래도 마음이 슬프기도 하고 신세가 스스로 가엾기도 하였다. 그러나 밖으로 진헌과 왕건에게 쪼들리고, 안으로는 아무 힘없이 나라를 맡아 가지고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세상을 잊고 아름다운 낙랑 공주와 즐거운 꿈을 맺을 일이 기쁘기도 하였다.
『낙랑 공주는 어떡하신고?』
하고 왕은 선필에게 물었다.
『공주는 불원에 성례하신다 하나이다.』
하고 선필도 웃음을 참지 못하였다.
왕도 다소 무안하여,
『서울에 왔을 때는 공주 나를 따르더니?』
하고 성례란 말이 근심이 되어,
『뉘 부마 되니이꼬?』
하고 물었다.
선필은 뜻 있는 듯이 웃고 대잡하지 아니하였다. 왕은 한편으로 안심도 되고 또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하여 얼른 말을 돌려,
『지금 백관이 모여 있으니 가서 의논하리다.』
하고 선필을 머물게 하고 정전으로 나왔다.
백관은 무슨 일이 있는고 하고, 왕의 얼굴을 한번 바라보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왕은 옥좌에 올라 앉으며, 들으라 『 , 짐은 나라를 받들어 고려 왕께 바치려 하노라.』
하고 말을 내리었다.
이 말에 백관은 벼락을 맞은 듯이 깜짝 놀랐다. 비록 평소에 고려에 붙기를 마음으로 원하는 자들까지도 왕의 이 말에는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백관 중에는 아무도 말하는 이가 없고 오직 잠잠하였다.
이때에 태자가 어디선지 모르게 뛰어 나와 옥좌 앞에 섰다. 당돌히 왕을 바라보며,
『폐하! 지금 내리신 말씀을 거두소서. 천년 사직은 폐하 한 사람의 것이 나니오니 망녕된 말씀을 거두소서. 나라의 흥망이 반드시 천명이 있을 것이니, 충신·의사로 더불어 민심을 수합하여 죽기로써 지키다가 힘이 다하면 말지언정 어찌 일천년 사직을 들어 남에게 내어 주리이까?
못하리이다. 못하리이다.』
하고 피눈물을 뿌렸다.
태자가 옥좌 앞에 나서는 무서운 양을 보고, 또 태자가 하는 말을 듣고 왕은 겁이 나서,
『태자는 참으라. 낸들 어찌 망국의 임금 되기를 바라오마는 강장(彊場)은 날로 줄어 나라 형세 이러하니 온전하기를 바라지 못할지라.
이미 강할 줄을 모르고 또 약할 줄을 몰라 무고한 백성으로 하여금 간뇌도지(肝腦塗地)하게 함이 나의 차마 못할 바라. 』
하고 왕도 눈물을 흘렸다.
이때에 대궐 마당에서 고함하는 소리 들리매, 백관들은 놀라 고개를 돌리고 왕도 옥좌에서 일어나 떨었다.
태자만 홀로 태연히 백관을 돌아 보며,
『천년 신라에 오직 한 충신이 나단말가?』
하였다.
이때에 금군 도독이 들어 와 왕의 앞에 나와,
『어떤 놈이 몽둥이를 들고 궐내에 들어 와 수십 명 지키는 군사를 때려 죽이고 고려 상보를 범하나이다.』
하였다.
금군 도독의 말이 끝나기 전에 정전 정문으로 두껍쇠가 선필의 상투를 끌고 들어 와 옥좌 앞에 엎어 놓고 몽둥이를 들어,
『이놈 역적 선필아, 네 오늘 하늘이 무심치 안하신 줄을 안다. 내 몽둥이로 네 골을 바숴 천하 역심 품은 놈들에게 징계할 바라를 보이리라.』
하고 몽둥이로 선필의 , 머리를 갈기니 요란한 소리가 나며 선필의 머리가 깨어지고 붉은 피가 전내에 흩어진다.
이 광경을 보고 왕은 실색하여 비틀거리며 옥좌 난간을 붙들고 쓰러지고 백관은 서로 밀치고 구석으로 들이 밀린다.
태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몽둥이를 거두라!』
하고 두껍쇠에게 명하였다.
두껍쇠는 피 묻은 몽둥이를 둘러 메고 한번 백관을 돌아 보며,
『누구든지 고려에 항복하려는 놈은 다 이몽동이로 때려 죽이리라.』
하고, 호통을 빼고는 왕과 태자께 절하고 우우하게 밖으로 나가 버린다.
두껍쇠는 김 충이 태자된 후로는 태자의 말구종으로 동궁예 있었다.
그러면서도 가끔 대궐 밖에 나가 힘쓰고 날 파람 있는 무리를 모아 가지고 밤이면 사람 없는 곳에서 몽둥이와 칼 쓰기를 익히고, 또 가끔 나라를 팔아 먹는 대관의 집을 습격하여 재물을 빼앗고 버들골 청루를 설레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 충이 태자고 된 뒤에는 서로 만나 이야기할 기회도 적었다.
삼년 전 왕건이 서울에 왔을 때에 두껍쇠는 패당과 함께 왕건을 따라 온 선필을 때려 죽이려 하여 그 뜻을 후환을 끼치리라 하여 모솨리라고 금하였다. 그러나 점점 국세가 그릇되어 가슴을 볼 때에 두껍쇠는 왕건까지 죽이지 못한 것을 후회하였다. 그러다가 오늘 밤에 다시 선필이 고려 왕의 사신으로 왔단 말을 듣고 태자의 앞에 가서,
『동궁마마, 이번에는 그놈을 때려 죽이려 하나이다. 만일 이번에도 못 때려 죽이면 이 몽동이로 이 머리를 때려 바수려 하나이다.』
하고 몽둥이로 두껍쇠 자기의 머리를 가리키었다.
태자는 말이 없이 들어 가 버렸다.
그 길로 두껍쇠는 몽둥이를 끌고 고려 사신 숙소로 가서 지키는 군사들을 때려 쫓고 선필 있는 곳이 달려 들어,
『이놈 역적 선필아, 두껍쇠 몽둥이 맛을 보라.』
하고 선필에게 대들었다. 선필도 칼을 빼어 몽둥이를 막았으나, 두껍쇠의 몽둥이를 당할 길이 없어 두껍쇠에게 목덜미를 붙들렸다.
『내 분한 마음을 보아서는 너를 죽이기 시각이 바쁘다마는 얼 빠지 만조 백관의 징나 삼으려고 만조 백관 모인 중에서 네 골을 바수고 배를 가라 역적놈의 뱃속에 오장이 있나 없나 보리라.』
하고 선필을 끌고 정전으로 들어 간 것이다.
왕은 겨우 정신을 진정하여 옥좌에 바로 앉았다. 그러나 두껍쇠에 쫓기어 구석으로 들어 박힌 백관들은 수족이 떨려 어찌할 줄을 모르고 둥그렇게 뜬 눈들만 휘황한 촛불에 반짝거렸다.
왕은 김 봉휴(金封休)를 찾았다. 그러나 그는 간 곳이 없었다. 왕은 황황하게,
『시랑 봉휴는 어디 갔는고?』
하였다. 이미 고려 사신을 죽게 하였으니, 이 일을 어찌하랴? 왕은 오직 김봉휴만를 믿고 찾는 것이다.
그제야 봉휴가 바로 옥좌 밑으로 기어 나왔다. 봉휴의 낯빛은 까맣게 질렸다.
왕은 봉휴를 바라보며,
『이 일을 어찌하료? 시랑아, 이 일을 어찌하료?』
하고 왕은 한숨을 지었다.
봉휴는 옥좌 앞에 꿇어 엎디어 한참이나 몸이 떨려 말을 이루지 못하다가,
『항복 항복 항복.』
하고는 다시 말이 없었다.
김 비(金朏)와 이 의(李儀)는
『항복은 김시랑이 하라. 우리는 싸워 죽으리라!』
하고 소리를 높였다.
왕은 또 두껍쇠나 아니 들어 오는가 하여 사방을 둘러 버며,
『항복인가? 싸움인가?』
하고 말하기를 주저하였다.
『항복 아니면 도륙이로소이다. 뉘 고려 군의 도륙을 막을 것이니이꼬?』
하고 봉휴의 말은 또렷또렷하다.
『차라리 도륙을 당할지언정, 살아서 이 무릎을 굽히지 못하리라.』
하고 김 비·이 유는 다투었다.
마침내 왕은,
『봉휴여 항서를 쓰라!』
하였다.
「항서를 쓰라!」하는 왕의 말씀에 백관 중에서는 통곡 소리가 일어났다.
그러나 통곡 소리 중에는 김 봉휴의 항서 쓰는 붓이 움직였다.
태자는,
『천년 종사가 오늘에 망하는가?』
하고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고 비씰비씰 문밖으로 뛰어 나갔다.
전내에서 곡성이 나는 것을 보고 또 태자가 통곡하고 나오는 것을 보고 대궐 안에 모두 곡성이 진동하였다.
태자는 나온 길로 어머니요 , 왕후 되는 백화부인이 계신 대로 들어 갔다.
거기는 백화 왕후와 태자비와 유렴 부인이 모여 앉아 나라 일이 어찌되는 것을 근심하고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유렴 집 종 시월도 태자를 모시는 궁녀가 되어 이곳에 모시고 있었다. 전내에는 수색이 차고 시중드는 궁녀들도 기운 없이 걸음을 옮겼다.
이때에 태자가 두 뺨에 눈물을 흘리며 들어 와 왕후의 앞에 절하며,
『소자는 가나이다. 이제 나라이 망하오니 백성과 산천을 대할 낯이 없이 소자는 가나이다.』
하고 느껴 울었다.
왕후는 무슨 일인지 안 듯이 채자에게 더 묻지도 아니하고 다만,
『나라이 망하였나뇨?』
하고는 엎어지어 기절하였다.
태자비와 시중 부인과 궁녀들은 왕후를 붙들어 일으키었다.
이윽고 왕후는 눈을 떠 태자를 보며,
『어디로 가려느뇨?』
하였다.
『망국 여생이 정처가 있사오리이까?』
하고 태자는 고개를 들어 왕후를 바라보고 다시 고개를 돌려 태자비 계영아기를 보았다. 계영아기도 오랜 동안 근심에 얼굴에 핏기가 없고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 내렸다.
『나를 대신하여 늙으신 어머니를 뫼시라.』
하고 다시금 계영아기를 바라보았다.
백화부인은 무엇을 생각하는 듯이 이윽히 침음하더니,
『나도 태자를 따르리라. 나를 두고 가지 말라.』
하며 궁녀를 불러,
『이곳에 우리 오래 있지 못하리니 너희는 각각 민가에 내려 유자 생녀하고 인간 복락을 누리라.』
하였다.
궁녀들은 왕후의 앞에 엎드리며,
『어디를 가시옵거나 따라 뫼시리이다.』
하고 울었다.
태자는 궁녀들을 보며, 너희는 어디를 『 따르러 하느뇨? 정처 없는 행색이 어디로 갈 줄이나 알관대, 나라도 없고 집도 없이 뿌리 없는 부평초 모양으로 떠돌아 다닐 우리 신세를 어디를 따르러 하나뇨?』
하였다. 궁녀들은 더욱 울며,
『정처 없이 가시면 정처 없이 따르리이다. 뿌리 없는 부평초같이 떠도시면 뿌리 없는 부평초같이 따르리이다. 이몸이 어느 우로 중에 길리웠기로 뒤에 떨어질 줄이 있사오리이까?』
하고, 찬란한 궁녀의 옷을 벗어 버리고 미리부터 준비하였던 평민의 옷으로 갈아 입고 나섰다.
왕후는 태자를 보고,
『가자. 따르는 이로 하여금 마음대로 따르게 하라. 이미 나라이 아니어니 시각을 지체하랴. 가자.』
하고 태자를 재촉하였다.
그 길로 왕후와 태자비와 궁녀 사오인과 태자가 두껍쇠는 대궐 옆문을 열고 빠져 나왔다. 모두 서인(庶人)의 옷을 입고 짚신을 신었다. 두껍쇠가 몽둥이와 등불을 들고 앞장을 서고 태자는 백화부인을 부액하였다. 때아닌 발자국 소리에 동네 개들은 무심히 짖었다.
김 봉휴가 왕의 항서를 가지고 서울을 떠나려 할 때에 금군은 반란을 일으키고 서울 백성들이 이에 응하여 김 봉휴의 길을 막았다. 나라에서는 군사를 풀어 이것을 진압하려 하였으나 군사들이 영을 듣지 아ㅣ할뿐더러, 도리어 반군과 합하여 형세가 자못 위급하였고 수십만 군중이 반월성(半月城)과 임해궁을 에워 싸고 통곡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 통에 왕은 미복(微服)으로 몸을 황룡사에 피하고 김 봉휴도 간신히 몸을 피하여 황룡사에 숨었다.
백성들은 왕과 김 봉휴가 황룡사에 숨은 줄을 알고 그리로 밀려 갔으나 이때에는 벌써 금필이 거느린 고랴 군사가 서울에 들어 와,
『감히 소동하는 자는 효수하리라.』
하는 방을 방방 곡곡에 붙이며, 군사를 놓아 대궐과 황룡사를 에워 싼 반군과 백성을 흩였다.
이날에 길가에 주검이 낙엽같이 쌓이고 골목 골목에 피가 흘려 발을 들여놓을 틈이 없었다. 사방에서 불이 일어나고 시랑 김 봉휴의 집은 백성의 손에 겁략을 당하였다. 그러나 고려 군사의 위풍에 사흘이 못되어 서울은 잠잠하였다. 그러나 가게는 모두 닫히고 길에 사람의 그림자가 끊이고 오직 밤낮으로 길로 달리는 고려 군사의 말 발굽 소리만 요란하였다.
김 봉휴는 고려 군사의 호위를 받아 가지고 고려를 향하여 떠났다.
그리고 고려 군사는 이 일이 모두 태자의 농간이라 하여 엄중히 태자의 거처를 수색하였으나 마침내 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
이때에 태자 일행은 전부터 잘 아는 백률사(栢栗寺)에 잠깐 숨어 모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등에 바랑을 메고 누더기를 입고 둘씩 셋씩 떨어져 동냥을 하며, 북으로 향하였다.
백률사의 노승이 앞길을 잡았다.
태자는 밤에 산을 넘을 때에 마지막으로 화광이 충천한 서울을 바라보고 세 번 절하고 통곡하였다. 두껍쇠는 몽둥이를 두르며 한바탕 서울을 설레어 역적의 머리를 모조리 바수지 못함을 한하였으나, 태자는 머리를 흔들어 만류하였다.
왕건은 김 봉휴가 가지고 온 신라 왕의 항서를 받고 곧 시중 왕철(王鐵)과 시랑 한 헌응(韓憲邕) 등을 서울로 보내어 왕을 불렀다.
왕은 한 잘 동안 고려군 중에 숨어 있다가 십 일월 바람 찬 날에 왕을 따르는 백관을 데리고 서울을 떠났다. 벌써부터 고려에 항복하여 집과 땅을 준비하여 두었던 자, 새로 왕을 따라 항복하는 자, 합하여 왕을 따라 고려로 가는 자가 삼백여 명이나 되었다. 천년 동안 지켜오던 서울 떠나가 산 즙물을 수레에 싣고 늙은이와 부녀들과 어린것들을 데리고 고려를 향하여 서울을 떠날 때에 서울 백성들은 울고 소리를 지르고 돌을 던졌다.
그러나 창검을 번뜻거리는 고려 군사들은 우짖는 서울 백성들을 때리고 찔렀다.
어떤 이는 고려로 가는 아비를 버리고 울고 떨어지고, 어떤 이는 고려에 가는 아들을 보고,
『내 자식이 아니다.』
하고 통곡하고, 어떤 이는 고려로 가는 남편을 바리고 가지각색의 비극이 일어났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 고려 군사에게 붙들려 옥에 집어 던짐이 되었다.
왕의 일행이 수레와 말과 아울러 삼십리에 뻗으니 길가에는 백성들이 나와 통곡하여 보내고, 혹은 고개에 큰 나무를 가로 놓아 길을 막고, 혹은 개천의 다리를 무너뜨리고, 혹은 길가 우물에 더러운 것을 넣어 왕의 일행에게 물을 아니 주려 하고, 혹은 수백명 백성이 떼를 지어 길에 엎디어,
『못 가시리이다.』
하고 길을 막아 쫓아도 가지 아니하고 죽여도 가지 아니하여,
『상감마마는 잠시 다녀 오신다.』
는 뜻을 말하여 겨우 물리치기도 하였다.
하늘도 나라의 운수를 아는 양하여 왕이 서울을 떠난 뒤로 유난히 일기가 불순하여 어떤 날은 북풍에 눈이 날리고 어떤 날은 동풍에 궃은 비 뿌리고 어떤 날은 난데 없는 우뢰가 울고 낮이면 떼까마귀가 행차를 따라 울고, 밤이면 여우가 행궁(行宮)에 와서 울었다.
왕이 고려 서울에 이를 때 고려 왕은 의장을 갖추어 교외에 나와 맞되 이웃 나라 임금의 예로써 하고, 왕을 유화궁(柳花宮)으로 맞아 들이고 왕을 따라 온 백관도 각각 집과 비복을 주었다.
왕이 송도에 들어 오매 고려 왕은 곧 날을 택하여 낙랑 공주를 왕에게 허하였다. 공주는 슬퍼하여 울었으나 부왕의 명을 거역하지 못하여 왕에게로 시집 갔다. 혼인 하던 날에 왕은 공주의 손을 잡고 오래 막혔던 정회를 말하였으나 공주는 울며,
『나의 마음은 이미 태자께 바치었사오니, 폐하께 바칠 마음이 없나이다.』
하였다.
이 말에 왕은 놀래고 슬퍼하였다. 그러나 왕은 공주를 곁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공주는 밤낮으로 울며 왕을 모시나 왕과 자리를 같이 하기를 워니 아니하여 밤이면 시비 부용으로 왕의 자리를 모시게 하였다. 술이 취한 왕은 부용을 공주로만 알았다. 원래 부용은 공주와 용모가 흡사하다 하여 특히 공주의 시비로 택함을 받았었다. 이리하여 낮이면 공주가 모시고 밤이면 부용이 왕을 모시었다.
왕은 송도에 온 후에 심히 평안하였다. 하루는 왕이 고려 께 상소를 하기를,
『本國久經亂亂曆數己窮無復望保基業願以臣禮見(우리 나라가 오래 난리를 지나 운수 이미 다하여 다시 기업을 안보하기를 바라지 못하울지니, 원컨댄 신의 예로써 뵈옵게 하소서.』
하여 칭신하기를 청하였다. 고려 왕은 허락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고려 왕은 왕을 대하기를 여전히 왕의 예로써 하였다.
이때에 일대 문장 김 봉휴(金封休)가,
『天無二日地無二王一國二君何以堪願廳基請(하늘에 두해 없고 땅에 두 임금 없으니, 한 나라의 두 임금을 백성이 어찌 견디리오? 원컨대 그 청을 들으소서.)』
하고 다시 상소를 지어 신라에서 따라 온 여러 신하들이 연명으로 고려 왕께 올렸다.
김 봉휴는 유렴에게 이 상소에 이름 두기를 청할새 유렴은,
『역적아, 물러나라!』
하여 봉휴를 물리치고,
『이제 내 목숨이 끊일 때를 당하였도다.』
하고 준비하였던 약을 마시고 동을 향하여 세 번 절하고 자진하였다.
왕이 고려에 온 후에 유렴은 오직 한번 왕을 대하여,
『원컨댄 폐하는 서울로 환행하소서.』
하고, 한 마디를 아뢰고는 다시 왕을대하지 아니하였다.
고려 왕은 유렴의 장례를 후히 하고 충절이라는 시호(諡號)를 주고 유렴의 집터에 충절사(忠節詞)를 세우기를 명하고 김 봉휴로 하여금 문을 찬하게 하였다.
그러나 김 봉휴 등의 상소를 받고 고여 왕은,
『민심이 그러할진댄 막지 아니하리라.』
하여 천덕전(天德殿)에서 군신을 모으고,
『脫興新羅血同盟庶幾兩國永好各保宗社 今羅王固請稱臣〇等 亦以爲可脫心〇傀衆意難違(짐이 신라로 더불어 피를 마시어 서로 맹세하되, 두 나라가 길이 좋아 각각 종사를 안보하기를 바라더니 이제 신라 왕이 굳이 신이라 일컫기를 청하고 경들도 또 옳이 여기니, 짐이 마음이 비로 부끄러우나 뭇 뜻을 어기지 못할지라).』
하고 왕을 불러 정견지례(庭見之禮)를 행하였다. 이것을 보고 고려 군신은 소리를 질러 칭하하며 그 소리가 망월대를 울렸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칭하하는 높은 소리를 친 이는 신라 백관 중에서 김 봉휴 밖에 없었고 다른 서럼들은 등에 땀이 흘렀다.
이날부터 왕은 다시 김 부(金傅)가 되어 관광 순화위국 공신 상주국 낙랑왕 정승(觀光順化衛國功臣上柱國 樂浪王政丞)이 되고 식읍 팔천호를 주고 위는 태자의 위에 잇게 하고, 신라 나라를 경주(慶州)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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