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의태자/제1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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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태자[편집]

왕(이제부터는 고려 왕 왕건을 가리킨다)은 사방으로 태자의 간 곳을 수탐하였다 어디서 반란이 . 일어나면 그것은 태자의 소위로 생각 하였으나, 급기야 잡아 보면 태자는 아니었다. 이러한 소문을 듣고 신라 땅에는 태자라고 자칭하는 자도 많이 나오고, 또 어디 태자가 있더라 하고 소문을 전하는 자도 많았다. 그래서 옛 나라를 사모하는 백성들은 태자 있다는 곳으로 따라 나섰다. 이리하여 태자의 이름을 내어 세우고는 수백 수천의 군중을 모아 고려 관헌에게 반항하였다. 그러나 반항하는족족 고려 군사에게 진압을 당하였다.

그러나 한 곳에서 진압을 당하면 또 다른 곳에서 일어나서 거의 아니 일어나는 곳이 없었고 경주라고 부르는 서울에서도 십여 차나 반란이 일어나서 마침내 고려 군사는 이십만호나 되는 큰 서울에 불을 질러 버리고 말았다.

이 통에 반월성 대궐과 임해궁 대궐도 다 타버리고, 안압지(眼壓池)에 있던 새와 고기와 임해궁 내에 있던 호랑이 사자 코끼리 같은 짐승들도 무서운 소리를 내고 타 죽고 굉장한 황룡사와 아름다운 분황사조차 타버리고, 그통에 기울어진 대로 잇던 구층탑도 요란한 소리를 내고 타버리고 그 속에 잇던 석가산과 연당과 연화를 아로새긴 주춧돌만 타지 않고 남았다.

불은 사흘째 되는 날에 갑자기 뇌성 벼락이 일어나고 된소나기가 쏟아져 캄캄하게 꺼지고 말았다. 이리하여 천년 신라의 옛 터는 옛 생각을 할 물건조차 없어져 버렸다.

각처에서 쫓긴 의병은 산으로 들어 숨고 산에 든 형적이 있으면 산에다 불을 놓았다. 이 모양으로 혹은 싸와 죽고 불 타 죽고 혹은 효수를 당하여 죽은 자가, 혹은 십만이라 하고 혹은 입시 만이라 하였다. 그러나 태자는 어디 갔는가? 아무도 아는 이기 없었다. 이러한 지 오년이 지나매, 일어날 만한 신라의 지사들은 다 죽어 버리고 김 비(金朏)와 이 유(李濡)도 곰의나루 싸움에 단둘이 남았다가 죽임이 되었다.

이 모양으로 죽을 자는 다 죽고 더러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고 더러는 배를 타고 혹은 진(晋)으로 혹은 일본으로 혹은 탐라(耽羅)로 혹은 유구(琉球)로 망명하여 바리고, 인제는 국내에 아무 소리도 없게 되었다.

그제야 왕건은 마음을 놓았다. 마의태자도 어디서 싸와 이름 모르게 죽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미 삼국을 통일하여 놓고 보니, 왕건도 이미 늙고 같이 일하던 사람들도 거의 다 죽어 버렸다. 배 현경(裵玄慶)도 죽고 유 금필(庾黔弼)도 죽었다. 국사 충담(沖湛)도 죽었다. 궁예도 죽지 아니하였는가. 당나라도망하지 아니하였는가 , 더구나 천축(天竺) 승이 고려에 와서 인생의 무상함을 설할 때에 왕은 억제할 수 없는ㅍ슬픔을 깨달았다. 자기가 왕업을 이루노라고 첫째는 아버지의 유훈을 저버리고, 둘째는 은혜 있는 궁예를 저버리고, 세째는 무고한 많은 백성을 죽게 한 것을 생각할 때에 일종 후회하는 생각과 두려운 생각이 일어났다. 더구나 낙랑 공주가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 것을 볼 때에는 아비의 정으로 가슴이 쓰림을 깨달았다.

그래서 왕은 군신을 불러 불법을 숭상할 것을 말하고 국비로 각처에 절을 세우고 또 의병과 싸울 때에 불사른 절을 증수케 하고 자기도 친히 불전에 엎디어 왕업을 이루기에 죽은 무고한 생명을 위하여 빌었다.

왕은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여 친히 명산 대찰을 찾아 가 수없는 원혼을 안위하고 또 구가 만년의 운을 빌기로 결심하고 양춘 삼월을 택하여 많은 비번과 낙랑 공주를 데리고 금강산을 향하고 떠났다.

금강산에서는 왕이 오신다고 중들이 떨어나 길을 닦고 다리를 고치고 왕이 머무르실 방을 수리하고, 또 오랫 동안 지켜 오던 신라 여러 왕의 유물을 감추어 버리기에 바빴다. 그중에도 장안사(長安寺)와 표훈사(表訓寺)와 정양사(正陽寺)가 더욱 바빴다. 마하연(摩訶衍)까지도 왕이 오실는지 모른다 하여 법당과 마당을 깨끗이 치우고 만폭동(萬瀑洞) 길을 도로 쌓아 수리하였다.

왕은 가는 곳마다 고을에 들어 민정을 살피고는 반드시 그 고을 큰절에 머물러 치뇌 재를 올렸다. 왕은 특별히 길을 돌아 싯내벌 궁예왕 옛 서울에 들러 보니 불과 이십년에 청초만 나고 썩은 양을 보고 크게 재를 베풀어 궁예왕과 난영과 두 왕자를 위하여 재를 올릴 제 벌판의 어두운 봄밤에 재 올리는 화투 불길이 하늘로 올라 갔다. 옛 서울에 떨어져 살던 늙은 백성들이 모여 들어 서로 옛일을 말하였다.

왕은 싯내벌 하룻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이 새도록 전전 반측하였다.

왕은 삼방(三房)까지 가서 궁예왕의 무덤을 조상하려 하였으나 아직도 삼방 골짜기에는 궁예의 유신이 산도적이 되어 웅거한다는 말을 듣고, 여러 신하의 간함을 들어 삼방까지는 중지하고 바로 금강산으로 들어 가기로 하였다.

길에서 몇 번이나 신라 유민이라는 말 못되게 초췌한 무리를 만났다.

그들은 왕의 행차 앞에 허리를 굽히지 아니하고 뻗디었다. 왕은 좋은 말로 그들을 위로하였다.

그러나 큰 변은 없이 왕은 장안사(長安寺)에 득달하였다.

금강산에 들어 온 지 사흘만에 왕은 표훈사로 가 정양사의 헐성루 에서 만 (歇惺樓) 이천 봉의 전경을 바라보고 다시 표훈사로 내려 와 밤을 쉬었다.

밤에 왕이 표훈사에서 노승을 불러 여러 가지 기사 이적과 노승의 일생 경험 중에서 가장 재미 있는 이야기를 하라 하고, 또 금강산 안에 중이나 속인 중에 이상한 사람을 물었다.

노승은 여러 말을 하던 끝에,

『이 산중에 무슨 아뢸 만한 일이 있사오리까마는 저 건너 돈도암(頓道庵)에 승수자 네 사람이 있사오니, 입산 하온지 오룩년이 되어도 어디서 온 줄을 알 수 없사오며 일찍 한번도 산에서 내려 온 일이 없사옵고, 그중에 젊은 승수자 하나이 무슨 일이 있으면 한 달에 한부 번 큰절에 내려 올 뿐이옵고, 혹 사람이 돈도암에 가면 항상 네 사람이 부처님 앞에 모여 앉아 합창하고 예불하는 양을 보다 하오니 외양을 보매 귀한 댁 사람인 듯하오니, 어디서 온 지 또 성씨는 누구인지 알 길이 없사오고, 또 산너머 영원동(靈源洞)에 두 행자(行者) 있사오되 다 머리를 풀어 헤치고 베옷을 입고 움을 파고 지나오되 사람을 대하여도 말이 없고 산으로 돌아다니며 풀 뿌리와 나무 뿌리를 캐어 먹사오며, 아침 해 뜰 때와 저녁 해 질 때면 반드시 저 밝은대(望軍臺) 꼭대기에 섰는 양이 보이나이다. 물어도 대답을 아니하오매, 누구인 줄도 알 수 없사오나, 산 내에서 가장 이상한 사람들이로소이다.』

하였다.

노승의 말이 끝나매, 왕은 적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이 말에 가장 놀란 이는 낙랑 공주였다.

낙랑 공주는 지금까지도 백화부인과 계영부인이 반드시 어느 산에 숨어 숭이 되었을 것을 믿고 있었다. 신라 왕이 항서를 쓰던 날에 왕후와 태자와 태자비가 밤으로 대궐을 빠져 나가 간 곳을 모른다는 말을 들을 때부터 공주는 그렇게 생각하였다. 그러면 돈도암(頓道庵)에 있다는 이가 그이가 아닌가 하고 공주는 가슴에 찔렸다.

그러면 태자도 어찌되었을까? 태자도 곰의나루에서 죽었다고도 하고 아슬라에서 죽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죽었다는 소문이 난뒤에 얼마 아니하여 반드시 태자가 어디 살아 잇다는 소문이 난 것을 공주가 안다.

그러므로 아직 아무도 태자의 거처를 아는 이가 없거니와, 공주는 결코 태자가 죽었을 것을 믿지 아니하였다. 그러면 영원동에 토글을 파고 사는 이가 태자는 아닐까? 머리를 풀어 헤치고 베옷을 입고 산으로 풀 뿌리를 캐러 다니는 양이 공주의 눈에 비치일 때에 공주는 숨이 막히도록 가슴이 답답하였다.

그날 밤에 공주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이 새이기를 기다렸다. 공주는 반월성 대궐 월정교 위에서, 밤에 태자와 만나던 것을 생각하고 지금까지 이름만 정승 김 부의 부인으로 청승스러운 슬픈 생활을 하여 오는 것도 생각하였다. 공주의 시비는 벌써 아이를 둘이나 낳았다. 김 부도 그 아이가 공주의 배에서 나오지 아니한 줄을 아나 세상은 그것이 공주의 낳은 아들로만 여겼다.

새벽 종소리가 울어난다. 왕도 일어나 법당에 들어 가 아침 예불을 하고 공주도 이날에는 특별히 전신을 냉수로 목욕을 하고 눈같이 하얀 옷을 입고 불전에 엎디어 초췌한 두 뺨에 눈물을 흘리며 태자와 왕후를 위하여 빌었다.

날이 샌 뒤에 왕은 표훈사의 노승을 불러,

『돈도암의 니승을 불러라.』

하였다.

노승은 불러서 올 사람이 아닌 줄을 알았으나, 왕명을 가역하지 못하여 사람을 보내었다.

이때에 백화부인은 팔목에 염주를 걸고 계영부인과 시월과 함께 손수 산에서 꽃을 파다가 마당에 심고 있었다. 해마다 봄이 되면 산 꽃나무를 파다가 마당에 심그거 그것이 꽃으로 피어 나는 것을 보기를 즐거워하였다.

이리하여 조그마한 돈도암은 봄에서 가을이 되도록 꽃 속에 묻히어 꿀벌과 나비 소리가 끊일 새가 없었다.

『오늘 첫 꽃이 피었어라.』

하고 누가 아뢰면, 백화부인은,

『첫 꽃이 피었나뇨, 어느 나무에?』

하고 곧 나가 보았다.

이날은 돈도암에서 한참 되는 서편 골짜기에서 계영부인과 시월이 전신에 이슬을 묻히면서 어린 목련(木蓮)과 더덕 한 뿌리를 파다가 그것을 심고 있었다.

『이것이 목련인가?』

하고 왕후는 어린 목련을 손에 들고,

『이것이 자라 꽃 피는 것을 볼까?』

하고 한숨을 지더니,

『누구나 볼 사람이 있지 아니하랴?』

하고 땅을 파고 기다리는 시월에게 목련을 준다.

호미를 들고 더덕 심을 구덩이를 파던 계영도 허리를 펴 백화부인을 본다. 백화부인의 눈에서는 눈물이 떨어진다.

시월과 계영은 들었던 호미를 떨어뜨렸다. 호미가 목현 위에 떨어져 둥그레한 어여쁜 잎사귀 하나를 끊었다.

『내 이리하려 아니하였더니.』

하고 백화부인은 소매로 눈물을 씻고 굵은 데로 지은 남복을 입고 흙 묻은 버선을 신고 계영을 바라보며,

『볼 때마다 눈물겨워라.』

하고 계영의 등을 만진다.

백화부인이 설어하는 양을 보매, 계영부인도 마음이 설었다. 언제는 슬프지 할까 하여 항상 기쁜 모양을 꾸미고 있었으나 백화부인의 눈물을 볼 때에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울고 싶어도 마음 놓고 울지 못할 신세이므로 고개를 돌리고 입술을 깨물었다. 시월도 그러하였다.

나라가 망한 것도 슬픈 일이어니와 사랑하는 남편을 이웃에 두고 만나지 못하는 것이나 세월이 뜻없이 흘러 가는 것이나 모두 다 슬픈 일이었다.

게다가 친어머니 되는 유렴 부인은 늙고 병들어 인제는 아랫목에 누워 일어나지도 못하였다.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고 믿으려 하나 가슴 속에는 슬픔만 가득 차서 부처님의 은혜도 들어 갈 틈이 없는 듯하였다.

세 사람이 정히 망연히 섰을 때에 수풀 속으로 사람 기척이 나며, 두 사람이 올라 오는 양이 보였다. 세 사람은 얼른 눈물을 씻고 나무 옮기는 일을 시작하였다.

백화부인은 잎 떨어진 목련을 집어 들며,

『아차 한 잎이 떨어졌구나!』

하고 떨어진 잎사귀를 집어 떨어진 자리에 붙이어 보나 붙지 아니하였다.

『아차!』

하고 계영부인과 시월도 그것을 보았다.

『한번 떨어진 잎은 다시 붙지를 못하는구나!』

하고 백화부인은 창연하였다.

이때에 찬란한 관복을 입은 고려 관인은 마당 끝에 서고, 표훈사 늙은 중이 웃는 얼굴로 합창하고 백화부인 앞에서며,

『나무아미타불.』

하며 허리를 굽힌다. 백화부인도,

『나무아미타불』

하고 합창하고 허리를 굽히며,

『노승님 어인 행차이시니이꼬?』

하고 공손히 물었다.

노승은 곁에 선 두 젊은 승에게도 같이 합창하고 허리를 굽히고 두 젊은 승도 합창 답례하고는 심던 나무를 심고 바가지로 물을 떠다가 뿌려 준다.

노승은 다시 백화부인 앞에 허리를 굽히며,

『대왕마마께오서 스님의 덕 높으심을 들으시고 부르라 하시와, 저기 사자를 보내시나이다.』

하고 손을 들어 마당 끝에 선 관인을 가리키었다.

백화부인은 속으로 놀랐으나 놀라는 빛을 보이지 아니하고,

『대왕마마시라니, 어느 대왕마마니이꼬?』

하였다.

노승은 놀라는 듯이,

『천무 이일이요 국무 이왕이라 하였사오니, 이 천하에 대고려국 대왕마마 한 어른 밖에 또 어느 대왕마마 있사오리이까?』

한다.

백화부인의 두 눈썹이 한번 움직이며,

『소승이 세상을 잊은지 오래오니 일찍 대신라 상감마마 계오신 줄을 들었거니와, 대고려 대왕마마를 듣지 못하였나이다.』

하였다.

노승은 한번 더 놀라는 빛을 보이고 다시 웃으며,

『갸륵하시어라. 어찌하면 신라 망하고 고려 된 줄을 모르시니이꼬? 예전 신라 상감마마께오서는 낙랑 공주 부마 되시와 정승으로 영화를 부리시옵고, 공주마마께오서는 벌써 두 아드님 낳으시와 어제 국재를 올리옵실 때에도 두 분 아기 수북 강녕하소서 빌었나이다. 큰 절에 가시오면 낙랑 공주마마도 보실 것이니 어서 가사이다.』

하고, 노승은 묻지도 아니하는 말을 지껄이며 손을 들어 관인을 부른다.

관인이 와서 역시 백화부인에게 허리를 굽힌다. 비록 초솔하게 차렸을망정 부인의 위엄에 눌린 것이다. 부인도 합창하고 허리를 굽혔다.

왕의 사자는 다시 백화부인에게 왕이 부른다는 뜻을 전하고 노승은 이 황송한 어의를 거스리지 말고 곧 가기를 재촉하였다.

그러나 백화부인은 엄절하게,

『소승이 세상을 잊고 산에 든 지 오랴거든 고려 대왕마마께서 소승을 알으실 리 마누하고 또 소승도 고려 대왕마마를 알 지 못하오니 부름심도 부질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아뢰소서.』

하였다 그리고는 볼일 . 다 보았다는 듯이 몸을 돌려 계영과 시월이 심어 놓은 목련 가지를 만져 발로 그 뿌리의 흙을 밟으며,

『이 나무를 잘못 심지 않았는가? 나무도 처음 만났던 방향대로 심어야 한다거든 남쪽으로 향하였던 것이 북쪽으로 향하면 살지 못한다 하거든 바로 심었는가?』

하였다.

계영은 웃으며,

『옛은 그러하였사오나, 이제는 천운이 변하여 사람들도 남으로 향하였다가 북으로 고개를 돌려야 영화를 누리고 초목도 그러하다 하나이다. 남으로 흐르는 아리나리 물도 북으로 흐른다 아니하나이까? 모든 것이 거꾸로 되는 세상이오니, 나무도 거꾸로 심었으면 더욱 번성할 줄 아오나 아쉬운 마음에 그리는 못하옵고 방향만 돌려 심었나이다.』

하였다.

시월도 웃었다. 그것을 보고 백화부인도 웃었다. 그러나 그 읏음은 무서웠다.

노승과 관인은 서로 돌아 보며,

『이상한 사람 아니이이꼬?』

『예삿 사람은 아니로다.』

하고 말없이 물러가 버렸다.

그날 저녁때에 돈도암에서는 떡을 만드느라고 절구에 쌀을 빻았다.

오늘은 백화부인의 생신이다. 이날에는 배자가 두껍쇠를 데리고 일년에 다만 한번 돈도암을 찾아 오는 날이다. 이날 하루를 기다리고 삼백 예순 날을 천년같이 고대하는 것이다.

이날이므로 식전부터 돈도암에서는 방과 마당을 소제하고 우물을 치고 기명을 깨끗이 하고 새 옷을 내어 입고, 꽁꽁 묶어 두었던 맛나는 버섯과 고비와 고사리를 내어 담그고 신선한 산채를 뜯어 오고 봉하여 두었던 꿀항아리를 내어 놓고 마당에 향토를 펴고, 또 태자와 두껍쇠를 위하여 굵은 베옷을 새로 다려 놓고 기다리는 것이다.

삼월 하순의 반쪽달이 구멍봉(穴望峰)에 비치일 때쯤 하면, 태자는 두껍쇠를 데리고 어느 길로 어떻게 오는지 모르게 마당에 발자국 소리를 내고,

『어마마마!』

하고 부른다.

그러면 안에서는 일제히 일어나,

『아아 동구마마!』

하고 나와 맞는다.

그러고는 방에 들어 가 절할 데 절하고 울고 이여기하다가 새벽에 숲속에 잡새 소리가 나고 골짜기 물소리 높아갈 때가 되면 태자는 다시 절하고,

『한 해 지난 뒤에.』

하고는, 또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어둠 속에 스러져 버린다. 아 번번이 부인이나 계영이나 이번에는 태자를 붙잡고 놓치 아니하리라. 그까지는 못하더라도 붙들고 실컷 울어라도 보리라 하나, 번번이 그리하지 못하고 밤은 줄달음을 쳐 이별 때를 당해 버리고 태자가 어둠속에 스러진 뒤에야 산을 향하여 합창하고,

『동궁마마! 동궁마마!』

하고 부르는 것이 예사다.

그러나 오늘은 근심이 없지 아니하였다. 그것은 고려 왕 왕건이 표훈사에 와 있음을 알았고, 또 사람을 보내어 부르는 것을 보니 무슨 눈치를 차렸는지 모를 것이요, 또 왕건이 신하 중에는 예전 신라 사람이 많이 잇을 것이니, 그렇다 하면 발각될 염려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태자에게 기별할 수도 없고 「설마」하는 마음으로 떡을 찌며 밤이 깊기만 고대하였다.

아랫목에 앓고 누운 유렴 부인도 번히 눈을 뜨고,

『오늘이 동궁마마 오시는 날이뇨?』

하였다.

계영부인은,

『오늘이————오늘밤이.』

하고 대답하였다.

부엌으로서는 떡 찌는 구수한 냄새가 들어 오고 물을 이 그릇에서 저 그릇으로 옮겨 붓는 소리도 들린다.

그러는 동안에도 백화부인은 불전에 앉아서 향을 피우고 일년에 한번밖에 만나지 못하는 아들을 위하여 또 불쌍한 며느리를 위하여 또 이미 자기를 잊어 버린지 오랜 남편을 위하여, 빌고는 절하고 빌고는 절한다.

딱딱 목탁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나오고 부인에 메인 다홍 빛 가사(袈裟)가 흔들리는 촛불에 음침한 빛을 발한다.

『구멍봉이 훤하였네.』

하는 시월의 소리가 들린다.

달이 뜨려는 것이다. 이 달 뜨면 태자 온다.

시월이도 인제는 우담화(優曇華)라는 이름을 가지고 백화부인도 이름을 변하여 선광니(善光尼)라 하고 계영부인은 만 타라(蔓陀羅)라는 불명(佛名)을 가지었으나, 다른 사람이 있을 때만 그렇게 부르고 식구들만 있을 때에는 옛날 대궐 안에 잇을 때와 같은 칭호를 불렀다.

『달이야 달이야!』

하는 시월의 소리가 나매, 계영부인은 얼른 일어나 창을 열었다. 과연 하얀 조각달이 잣나무 가지 사이로 비쭉 올라 오는 것이 보인다. 그렇게도 해쓱하고 맑은 달이,

『달이 떴으니 동궁마마도 오시려니 마당에 불켜라.』

하였다.

백화부인도 기도를 마치고 일어나 떠 오르는 달을 바라보고 합창하며,

『나무 월광보살(月光菩薩)!』

하고 그 빛이 아들의 앞길을 비치기를 빌었다.

시월은 마당 한복판에 있는 둥근 돌등대(石燈臺)에 잘결은 솔깡을 한 아름 놓고 불을 질러 놓았다. 잘 마른 솔깡 향기는 발하여 호박 빛 불길을 내었다.

부엌에서 음식 냄새 나는 것을 맡고 다람쥐가 서너 마리 모여 와 시월의 방을 따라 다닌다.

그리고는 늘 하는 법대로 사람들은 모두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 버린다. 이것은 태자의 청이다. 무슨 까닭인지 모르거니와, 태자는 마당에 사람이 있으면 들어 오지 아니하고 사람들이 방안에 들어 간 뒤에야 모양을 나타낸다.

『어서 들어 오라.』

하여, 시월이까지 방으로 부러 들인 뒤에 마당에서는 솔깡 불만 혼자 타고 있었다.

방안에서는 네 사람이 숨도 크게 쉬지 아니하고 귀를 기울여 태자의 발자국 소리만 기다렸다. 돌을 넘어 떨어지는 시냇 소리는 잠깐 높았다. 또 잠깐 낮아지면 안 부는 듯 부는 바람이 풍경을 흔들어 딸랑딸랑 소리를 낸다. 이따금 밤새 소리가 들린다.

x xx x 사자가 돌아 가 왕께 백화부인의 말을 전하니 좌우 제신은 그 무례함을 책하려 하였으나 왕은 고개를 흔들며, 천하는 앗을지라도 『 한 사람의 뜻은 앗지 못하나니, 뜻을 지키는 자를 허물하지 말라.』

하고 도리어 주지승을 불러,

『매년 돈도암에 백미 오십석을 부치되어 이름 모르는 시주로부터 보낸다 하라.』

는 하교를 내렸다.

이날 밤에 낙랑 공주는 자연 심서를 진정지 못하여 홀로 침음하다가 마침내 두 시녀와 길 인도하는 중 하나를 데리고 은밀히 절에서 나와 등을 들리고 돈도암에서는 마당에 불을 피울 때였다.

공주는 지팡이로 길을 더듬어 우거진 잣나무 숲길로 깎아 세운 듯한 산비탈을 올라 간다.

『이 어두운데.』

『이 험한 길에.』

하고, 시녀들은 공주가 험한 길을 걷는 것이 황송하여 공주를 붙들었다.

그러나 공주는 이 길이 모든 죄악과 모든 괴로움을 벗어나는 해탈(解脫)의 정로(正路)와 같이 생각되고 한번 이 길을 올라 가면 다시 내려 오지 못할 것 같았다. 서울로 가면 구중 궁궐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다 무엇이냐/ 색 밖엔 아무 것도 모르는 늙은 김 부를 생각만 하여도 진저리가 나고 또 아들(神劒)의 원수를 갚노라고 왕건의 군사를 빌어 제 나라인 후백제를 떨하고 제 혈육의 자식을 혹은 죽이고 혹은 섬으로 귀양 보내고 마침내 서도 회한(悔恨)을 이기지 못하여 등에 큰 종기가 나서 죽은 진헌을 생각하거나, 혹은 신라의 혹은 백제의 구신(舊臣)들이 제 나라도 다 잊어 버리고 가정 고려에 충신인 체하여 불의의 부귀와 쾌락을 부리는 것이나, 그러한 무리 속에 높이 올라 앉은 아버지 왕건이나 모두 우습고 시끄럽고 더러운 것만 같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강산, 이렇게 깨끗한 밤, 이렇게 만고에 한결 같은 물소리와 바람 소리, 하늘엔 만고에 변함없이 반짝거리는 별, 무슨 생각은 있고도 말은 아니 하는 듯한 늙은 나무와 바위————이러한 것은 홍진 만장의 서울이나 구중 궁궐 속에서는 꿈도 못 꾸던 신기로운 이경이다.

그러한 속으로 말할 수 없는 슬픔을 품고 조그마한 등불이 비치는 길을 찾아 두 걸음에 한번 세 걸음에 한번 쉬엄쉬엄 가는 공주 자기의 몸까지도 이 세상을 떠난지 오랜 사람 같았다.

『아아! 제도(濟度)할 수 없는 중생(衆生)!』

하고 공주는 김 부를 생각하였다. 그가 술 취한 얼굴로 허연 수염을 너슬거리고 공주의 손목을 끌고 음탕한 웃음을 웃던 것을 생각하고 또 자기 몸 대신 김 부의 잠자리를 모시게 하던 시비가 아기를 낳은 뒤로는 도리어 공주에게 시기하는 빛을 보이고 버릇 없어지는 양을 보이던 것을 생각하였다 . 그러나 그 모양도 다 우습고 더러운 것 같았다.

하늘에 별빛이 있었으나 수풀 속은 캄캄하였다. 캄캄한 수풀 속에 한 줄기 등불 빛이 비치어 검은 그림자가 길게 짧게 우물거린다.

얼마를 이 생각 저 생각 하며 올라 갓을 때에 눈앞에는 환한 불이 보였다. 공주는,

『저 어인 불인고?』

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도솔암 뜰에 피워 놓은 불이로소이다.』

하고 길 인도하던 중이 읍하고 대답한다. 그 불은 바로 머리 위에 있는 듯하였다. 그러나 그 불이 숨었다 나왔다, 컸다 작았다 하여 좀처럼 가까와지지 아니하였다.

마침내 공주는 도솔암 마당에 올라 섰다. 솔깡 불빛이 공주의 얼굴과 몸 모양을 비친다.

노승은 가만가만히 암자 앞을 걸어 가,

『선광 스님! 선광 스님!』

하고 불렀다.

안에 있던 사람들은 놀랐다. 이 밤에 기다리던 태자는 아니 오고 그 누가 와서 찾는고? 시월은 문고를 잡고 열지는 아니하고,

『그 누구시뇨?』

하고 대답하였다.

『큰절에서 왔나이다.』

『이 깊은 밤에 무슨 일로 오신고 나아가 여쭈어 보아라.』

하고 백화부인이 시월에게 명한다.

시월이 문을 열고 나선다. 안에 있는 사람들은 무슨 큰일인나 아니 나는가 하고 귀를 기울인다.

시월은 노승을 이상히 바라보고 합창하며,

『어두운 길에 무슨 일로 오시니이꼬?』

하였다.

노승은 웃는 낯으로 합창하며,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도솔암에 오래 서기 비치옵더니, 오늘밤에 낙랑 공주 이곳에 임하시이다,』

하였다.

『낙랑 공주?』

하고, 시월은 옛날 서울에서 뵈옵던 것을 생각하고 반가운 듯이 소리를 질렀으나 아까 왕의 사자가 왔던 것을 생각하고 얼른 흥분한 빛을 감추며,

『아니 낙랑 공주라시니 누구시니이꼬?』

하였다.

노승은 손을 들어 가리키며,

『저기 왕림하와 계시옵거니와, 금상마마의 따님이시옵고 이전 신라 상감마마 지금 낙락왕 정승 김 부(樂浪王政丞金傅)마마의 부인이시니이다.

선왕 스님의 덕을 들으시옵고, 밤길을 마다 아니하시옵고 이에 임하시니이다.』

하고 또 합창하고 허리를 굽힌다.

노승이 허리를 굽히는 것을 보고 공주는 좌우에 시녀를 세우고 가만가만히 걸어 온다.

시월은 잠깐 공주를 바라보고 방에 들어 가 노승이 말하던 대로,

『낙랑 공주 이에 임하시다 하나이다.』

하였다.

백화부인이 일어나 나오니 계영도 따라 나온다. 백화부인은 시월과 계영의 부액을 받아 나오며,

『노신이 산에 들어 온 지 오래매, 천하사를 모르거니와 공주 오신다 하오니 아니 나와 맞으랴. 공주 어디 계신고?』

하며 신을 신고 마당에 내려 선다.

불은 활활 타 오른다.

부인은 공주를 향하고 공주는 부인을 향하여 서로 바라보며 점점 가까이 가더니, 공주는 부인의 모양이 신라 왕후와 같음을 보고 깜짝 놀라는 듯이 우뚝 서며 한걸음 뒤로 흠칫 물러선다.

부인도 공주를 보고는 아무리 억제하려곤 하면서도 놀라는 빛을 아니 보일 수 없고 계영도 그러하였다. 그러나 부인은 곧 태연하게 합창하고 허리를 굽히며,

『어느 나라 공주시완대, 이 깊은 밤에 이렇게 임하시이니이꼬?

나무아미타불.』

하였다.

그제야 공주도 합창하고 무릎을 땅에 대며,

『어느 나라 공주도 하지 마옵소서. 나는 죄많은 여인으로 노사(老師)의 덕을 흠모하여 이곳에 임하였거니와.』

하고 고개를 들어 부인과 계영과 시월을 한번 둘러 보고,

『노사(老師)는 제가 십년 전 신라 서울에서 뫼시던 왕후 아니시니이까?』

하였다.

부인은 웃으며,

『노신을 왕후라 하시나뇨? 오아후는 아마도 전생의 일인가, 노신은 산에 들어 세상을 잊은 지 오랜 수도승이 로소이다.』

하고 시월을 보고,

『우담화야, 공주마마를 붙들어 일어나시게 하고, 만타라야 공주마마를 모시어 누추하나마 방에 들여 모시라.』

하고 다시 공주를 향하여,

『공주마마 무릎을 꿇으시니 황송하도소이다. 죄많은 소승이 어찌 감당하리오? 일어나 누추한 방에 드시옵소서.』

하였다.

공주는 시월에게 붙들려 말없이 기운 없이 방으로 끌려 들어 갔다.

공주는 약간 의심이 없지 아니하였으나 설마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줄은 몰랐다. 아무리 세월이 가고 또 머리를 깎고 변복을 하였더라도 왕후와 태자비를 몰라 볼 리가 있으랴? 공주는 정신이 황홀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고 방에 들어 오는 길로 부처님 앞에 합창하고 엎드려 버렸다.

부처님 앞에 엎드린 공주는 일어날 줄을 몰랐다. 그의 등이 들먹거리는 것을 보아 우는 것을 알았다. 백화부인이나 계영부인이나 시월이나 우두커니 보고만 있었다.

비록 모든 것을 잊고 또 늘기도 한 백화부인이란 처음 낙랑공주를 대할 때에 마음이 편안할 수가 없었다. 남편이요 신라 마지막 왕이던 이를 생각하여도 마음이 불쾌하고 또 낙랑 공주가 그 남편의 새 아내가 되어 두 아들까지 나았다는 것을 생각할 때에는 질투하고 생각도 났었다. 그뿐 아니라 왕건은 신라의 원수가 아니냐? 낙랑공주는 원수의 딸이 아니냐?

왕건은 근 십년을 두고 태자와 왕후의 거처를 수탐하지 아니하였느냐? 지금 왕건이 여기서 바로 지척인 표훈사에 와 있지 아니하는가? 만일 왕후와 태자가 여기 있는 줄을 알면 무슨 일을 할지도 모를 것 아니냐? ————이러한 것도 무슨 흉계가 숨어 있는지 모를 것이다. 더구나 그가 왕건을 따라 서울(지금은 경주라고 부른다)에 온 것도 왕과 태자를 호리려 한 것이 아니냐? 그렇다 하면 부처님 앞에 엎드려 우는 양을 하는 것도 무슨 흉계인지 알 수없는 것이다. ————이 모양으로 백화부인도 생각하고 계영부인도 생각하였다.

그래서 계영부인은 시월을 밖으로 불러 내어 귓속마로,

『동궁마마, 오시더라도 밖에서 기다리시게 하라. 행여 방으로 들어오시어 왕건의 집에 알리게 말라.』

하였다.

이렇게 마음을 작정하고는 백화부인과 계영부인은 처음에 설레던 마음도 다 가라앉고 냉정하게 공주가 하는 양만 바라보았다.

마침내 공주는 일어났다. 세 번 불전에 합창 배례하고 나서도 이윽히 부처님을 바라보았다. 그 부처님은 대궐에 봉안하였던 관음상(觀音像)이다.

신라 국보(新羅國寶)의 하나로 왕후 침전에 봉안하였던 것을 공주는 기억한다. 한 달 동안이나 거기서 왕후를 모시고 숙식하였으니, 이 관음상을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 그 인자하고도 맑은 얼굴이며 산 사람의 용모는 몰라 볼이만큼 변하였을 망정, 관음상은 예나 이제나 다름없이 금빛을 놓고 있다. 공주가 얼굴을 대고 있던 다홍 방석은 눈물에 젖고 그 얼굴에도 눈물이 줄줄이 번쩍거렸다. 눈물에 젖은 얼굴은 더욱 해쓱하고 맑아서 그 가슴 속에는 티끌만한 흐린 마음도 있을 것 같디 아니하다.

공주는 불전에서 물러나 마치 오래 떠났던 딸이 그 어머니에게 매아 달리는 모양으로 백화부인 옷자락을 잡고 매아 달렸다.

『왕후마마! 나를 속이지 못하시리이다. 저 관음보살님은 분명 경주 서울서 뵈옵던 용모시니 마마께옵서 이미 삭발 위승하옵시고 용모는 변하셨다 하더라도 한 달동안 자모(慈母)같이 뫼시옵던 낙랑을 곡이지 못하시리이다.』

하고 운다.

백화부인도 부지 불각에 눈물이 핑 돌았다. 과연 그렇게도 애통하는 낙랑 공주의 마음에는 한점 죄악의 구름도 머물까 싶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백화부인은,

『공주 일어나소서. 이몸은 세상을 잊고 산중에서 늙은 죄인이어니 공주 반드시 이몸을 잘못 보신 것인가 하나이다. 무슨 연유로 겨오신지 모르거니와 진정하소서.』

하였다.

이 말에 동주는 고개를 들어 백화부인을 바라보고 다시 계영을 바라보았다. 계영의 그 꽃같이 아름답던 얼굴이 어떻게나 초췌하였으랴?

공주는 마치 죄 지은 사람이 살려 주기를 비는 사람 모양으로 손을 들어 계영부인의 손을 잡으려 하였다.

계영부이의 눈에도 눈물은 있었다. 그러나 백화부인이 공주의 손을 잡고 아노라 하기까지 자기가 먼저 손을 잡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공주의 손을 뿌리치고 옛 정과 피차의 신세를 생각하여 돌아 서서 울었다.

낙랑 공주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공주는 하릴없이 일어나 백화부인을 보며,

『나를 모르신다 함도 마땅하도소이다.』

하고 한번 하직하는 절을 하고 시녀를 데리고 밖으로 나아갔다.

나아가면서도 다시금 백화·계영 두 부인을 돌아 보고 또 관음상을 돌아 보았다.

백화부인은 문까지 따라 나가며,

『이러한 누추한 곳에 귀하신 손님은 오래 머무르지 못하나이다.』

하고 냉랭하게 인사하였다.

공주는 혼잣말로,

『나도 이 옷을 벗고 머리를 깎고 노사를 따를까?』

하고 혼잣말 모양으로 중얼거렸다.

마당에 피인 솔깡 불은 기월이가 새로 놓은 관솔이 새로 타오른다.

공주는 그 빛에 늙은 잣나무 뒤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번쩍하는 것을 보였다. 태자는 두껍쇠와 같이 돈도암으로 오다가 시월의 손짓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확 피어 오른 불빛이 자기의 낯을 비치임을 까달을 때에 태자는 얼른 몸을 나무 그늘로 숨겨 버렸다.

바로 신을 신고 마당에 내려 서려던 공주는 태자를 번쩍보았다. 그 헙수룩한 머리와 섬거적인가 의심하는 옷! 그러나 공주는 그것이 태자인 줄을 알고 놀라는 빛으로 우뚝 섰다.

<내 허깨비를 본가?>

하고 공주는 다시 태자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무엇을 보시니이꼬?』

하고 시녀 하나가 공주의 보는 곳을 바라보며 물었다.

공주는 손을 들어 가리키며,

『분명 저 잣나무 그늘에 사람의 얼굴을 보았건마는 다시 보니 없소라.

분명 보았거든 없소라!』

하고 공주는 그리로 향하고 간다.

『불빛에 허깨비를 보심이 아닌가?』

하고 한 시녀가 뒤를 따른다.

백화부인과 계영부인은 가만히 서서 공주이 하는 양을 본다.

공주는 서너 걸음이나 태자있던 곳을 향하고 가더니 그 자리에 무릎을 꿇며, 동궁마마 동궁마마 『 ! ! 돌아 가셨다 하더니 혼이 계셔 내 눈에 보이신가?

혼이라 하더라도 어찌 한번만 보이신가?』

하고 합창하고 바라본다.

『이 무삼 말씀이시니이꼬? 깊은 산, 깊은 빰에 어느 동궁마마 겨시료가 사이다.』

하고 시녀가 공주를 붙들어 일으키려 한다.

공주는 몸을 흔들며,

『나를 두고 너희들은 가라! 나는 이곳에 머물러 돌아 가지 아니하리라.

둥궁마마 살아 겨오시거든 혼이라도 다시 뵈울 때까지 나는 돌아 가지 아니하리이다. 나도 머리를 깎고 굵은 베옷을 입으리라 ———너희는 가라.

가서 아바마마께 그 연우를 아뢰어라.』

하였다.

두 시녀는 공주의 말에 놀라 뒤로 물러섰다.

이때에 잣나무 그늘로서는 태자가 나타났다. 그 초췌한 얼굴로————이 세상 사람 같지 아니한 얼굴로 가만가만히 나타났다.

공주는 두 팔을 들고 태자를 바라보았으나 태자는 공주를 잠깐 바라보고, 백화부인 앞으로 나아가 말없이 무릎을 꿇어 절하고 그러한 뒤에 다시 낙랑공주 앞으로 와서,

『낙랑 공주 아니시뇨?』

하고 물었다.

공주는 다만,

『동궁마마!』

하고 말이 막혔다.

태자는 이윽히 낙랑 공주를 바라보더니,

『모두 한바탕 꿈이던가 ————꿈이라면 그리고 원한 깊은 꿈이로다.』

하고 고개를 숙인다.

공주는 태자를 우러러 보고 다만 느껴 울었다. 그러나 태자의 눈에는 눈물도 없었다.

『열 두번이나 돌아 가셨다는 동궁마마를 오늘 뵈오니 생시인가 꿈인가 혼령이신가?』

하는 공주의 말에 태자는, 열 두 번 죽으려도 『 죽지 못하고 살아 있는 내 몸이 부끄러워라. 가슴에 굳게 맺힌 원한이 내 목숨을 붙들어 죽지고 못하게 하고 살지도 못하게 하고 반은 죽고 반은 살아 반은 사람 모양으로 반은 귀신 모양으로 낮이면 숨고 밤이면 나와 다니노라. 죽지 못해 사는 신세는 나를 두고 이르는 말……그런데 낙랑공주는————낙랑부인이라던가 ————어디로 가는 길에 길을 잘못 들어 이리로 오신고? 크게 길을 잘못 들었쎄라.』

하니 공주는 태자를 우러러 보며,

『날더러 길을 잘못 들었다 하신난고? 십년 동안 헤매고 찼던 길을 오늘이야 찾았다고 하소서. 분명 동궁마마는 살아 계시었던가? 진실로 이것이 금강산 깊은 밤의 꿈은 아니었던가? 살아 계시가 하소서————곰의나루와 아슬라성에서 활을 맞아 돌아 가신 것은 아니라 하소서. 이것이 꿈이 아니라 하소서————꿈이 아니라 오랜 꿈이 깨었다 하소서.』

태자는 하늘을 우러러 한숨지며,

『깰 수 있는 열은 꿈일진대 그 아니 다행이랴. 천만겁(千萬劫)에 깨져 못할 슬픈 꿈이니 그것이 설워라. 사람으로 세상에 살자 하니 사람이 부끄럽고, 죽어서 황천에 가자 한들 무슨 낯으로 선왕(先王)을 대하리.

엉거주춤하고 죽도 살도 못하여 산에 숨어 있으나 초목이 부끄럽고 말 못하는 바위와 흘러 가는 물이 부끄럽고 날고 기은 새 짐승이 부끄러워라.』

하고 눈물을 흘린다.

『가엾으시어라! 인생을 모두 한바탕 꿈으로 아실진댄, 어이하여 수도 성불(修道成佛)하실 뜻을 두지 아니하시난고?』

하는 공주의 말에 태자는,

『수도 성불! 수도 성불이라는 하시나뇨? 하늘에 사무친 원한과 뼈마디 마디마다 감긴 원한이 나를 지옥으로 끌어 들이거든 성불을 바라리. 비록 석가모니 불이 몸소 나를 끌어 극낙으로 가자 하시더라도 나는 아니 가리라. 이 슬픔과 이 원한을 품고는 차라리 땅 속 깊이 깊이 파고 들어가 숨는 무엇이 되리라 ————안 가리라 안 가리라.』

하고 머리를 흔든다.

『어이하여 그런 말씀을 하는고? 나라 망한 것이 동궁 탓이 아니어든 어이 그리 원한이 깊으신고? 그리 생각을 마라 잊으라! 잊으라! 우리 다 잊지 아니하려나뇨?』

하고 백화부인이 태자의 곁으로 걸어 와 그 어깨에 손을 없는다.

『잊을까? 잊어질까?』

하고 태자는 고개를 숙인다.

『잊으소서 안 잊은들 어이하리?』

하고 계영도 태자의 곁으로 온다.

『동궁마마! 이 모든 원한이 이몸의 아바마마 탓이라 하면 이몸으로 그 죄를 지지는 못하리이까? 이몸이 지옥도(地獄道)에 떨어지거나 축생도(畜生道)에 떨어지거나 동궁마마의 슬픔과 원한을 풀지 못하리이까?

그러할 도리는 없사오리이까?』

하고, 공주는 합창한 손을 땅에 대고 이마를 그 손에 대어 정례(頂禮)를 한다. 사람들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는 모두 눈물이 있었다.

솔깡 불은 그믈그믈한다.

시월은 사람들 뒤에서 두껍쇠의 어깨에 매어 달려 울고 있고 두껍쇠는 태자를 바라보고 눈물을 흘린다.

낙랑 공주를 따라 왔던 시녀들과 노승은 영문을 모르고 대여섯 걸음 뒤에 떨고 섰다.

달은 높이 올라 오고 시냇물 소리는 점점 높아 가는데 돈도암 마당에서는 사람들의 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벌써 새벽이 되었는가? 아래 큰절에 쇠북소리 우렁차게 들린다.

태자는,

『일어나라!』

하고 공주를 붙들어 일으키었다.

이튿날 아침에 공주는 벌써 구름 같은 머리를 깎고 먹물 들인 베옷을 입은 승이 되었다. 공주에게 대한 모든 오해는 풀리어 백화부인은 공주를 붙들고 울었다.

『이몸을 딸과 같이 일생을 곁에 뫼시게 하소서.』

하는 공주의 청을 백화부인은 여러 번 물리쳤으나 마침내 허락하였다.

표훈사에서는 안과 밖의 발깍 뒤집혔다.

『공주 어디 가신고?』

하고 횃불을 들고 사방으로 두루 찾았으나 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

『공주 어디 계신지 아무리 찾아도 가신 곳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고 총섭(總攝) 노승이 왕께 아뢸 때에 왕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늘이 있었다.

왕은 낙랑 공주를 위하여 근래에 심히 슬퍼하게 되었다. 오직 왕업을 위하여 사랑하는 딸의 일생을 희생하여 버린 것이 왕이 더욱 늙을수록, 낙랑 공주의 슬픔이 더욱 클수록 뉘우쳐지었다.

신라에 다녀 온 뒤로 공주가 얼마나 태자를 그리워하였고 또 김부에게 시집을 보낼 때에 얼마나 공주가 슬퍼한 것을 왕은 다 안다. 그러나 왕은 신라 왕과 인척 관계를 맺고 자기도 신라 왕의 질녀를 왕후로 맺는 것이 왕업을 이루는데 필요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첫째로 공주를 신라 왕에게 시집 보내고, 둘째로 내조의 공이 많은 유씨 왕후의 슬퍼함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김시를 맞아 아들을 나았다. 본래 기승하던 유씨 부인도 그 때문에 성병하여 원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렇지마는 신라 백성의 마음을 사려면 고려 왕실에 신라 왕실의 피를 흘려 넣는 것을 필요로 생각하였다.

이리하여 왕업은 이루었거니와, 유씨 부인의 원혼과 낙랑 공주의 슬픔은 무엇으로 위로할 길이 없었다. 더구나 왕이 늙어가고 눈이 어두워지고 귀도 멀어지고 몸이 전과 같이 기운차지 못하게 되매, 인생의 무상(無常)한 것을 점점 깨닫고 천축승(天竺僧)의 설법을 들으매, 그 마음은 더욱 괴로와졌다.

왕은 가끔,

『흥, 왕업은 다 무엇이고? 모두 흘러 가는 물과 같고 떠 가는 구름과 같지 아니한가? 있을 때에 있는 듯하여도, 다시 보면 없지 아니한가.』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었었다.

천하를 다 내 마음대로 할 지존(至尊)의 지위에 있다는 것도 다 헛꿈이 아니냐? 어두워가는 눈, 멀어가는 귀, 쇠하여가는 몸을 어찌하지 못하고, 딸 낙랑 공주의 한번 깨어진 기쁨을 다시 어찌할 수 없지 아니하냐? 몇 만 사람의 다시 못 올 청춘과 다시 얻지 못할 생명과 다시 회복할 수 없는 기쁨을 희생하고, 이 왕업인고? 한번 숙어지면 패한 궁예나 흉한 왕건이나 모두 한 줌 흙이 아닌가? 게다가 만일 이생에서 지은 업이 내 생의 과보(果報)로 돌아 온다 하면, 수십만의 생명을 죽이고 수백만의 마음을 아프게 한 자기는 어찌될 것인고? 이러한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왕의 눈에 비치는 것은 옛날의 왕위도 다 내어 던지고 삼계 중생(三界衆生)을 제도(濟度)하기로 대원을 세운 석가모니 불의 자비뿐이다. 그래서 절을 세우고 그래서 금강산에를 왔다.

그러나 공주에게는 기쁨이 없었고, 왕에게도 마음의 평안함이 없었다.

도리어 낮에는 눈에 피 오른 신라 태자의 독한 비수가 눈에 어른거리는 듯하고, 밤이면 삼십년 병전(兵戰)에 죽은 사졸(士卒)과 신라의 충혼들이 어둠을 타고 모여 드는 듯하였다. 베옷 입은 중들이 코를 골고 자는 양을 볼 때에 황포 입은 왕은 알 수없는 무서움에 밤을 새운 것이다.

『공주는 어디 간고?』

하고 늙은 왕의 눈에는 눈물이 맺히었다. 그때에 어떤 중이 들어 와,

『밤이 깊은 뒤에 돈도암 길로 등불 하나 올라 가는 것을 보았사오나.』

하고 아뢰었다.

왕은 고개를 끄떡였다.

왕은 돈도암으로 사람을 보내려 할 때에 공주를 모시고 갔던 중이 돌아와서 어젯밤 공주를 모시고 돈도암에 갔던 일과 돈도암에서 생긴 여러 가지 일을 허둥지둥 동이 닿지 않게 아뢰었다. 왕은 그 중을 가까이 불러,

『그 베옷 입고 머리 헙수룩한 사람은 누구더뇨?』

하고 물었다.

『그 사람은 석이(石耳) 따는 사람들이 가끔 만난다는 영원동(靈源洞) 벙어리 처사(處士)인 듯하오나, 말이 청산 유수 같음을 보매 벙어리는 아닌 듯하오나, 누구인지 알 수 없사오며, 공주마마께서오서는 그 사람을 동궁마마라고 부르시오나 어찌된 일인지 알 수 없사오며, 또 돈도암에 있는 승들도 혹은 왕후마마라 하옵고 혹은 아니라 하옵고 갈피를 잡을 수 없사오며, 아무리 생각하여도 꿈속만 같고 미친 것도 같사옵고 아마 소승이 미친가 하나이다.』

하고 땅에 엎드린다.

『공주는 어디 계신고?』

하고 왕은 다시 물었다.

『공주마마께옵서는……』

하고 중은 흩어진 정신을 모으는 듯이 한참 주저하다가,

『공주마마께오서는 돈도암에 계오신 듯하나, 또 안 계신 듯도 하나이다.』

하고 중얼거린다.

『그 무슨 말인고?』

하고 왕은 놀라는 듯이 어성을 높인다.

『소승이 꼭 길목을 지키고 있었사오니 어디로 아니 가신 것은 분명하오나 방안을 들여다 뵈옵든지 나와 다니시는 양을 뵈옵든지 머리 있는 이는 한 분도 아니 계시오니, 소승이 잠깐 꼬빡 조는 동안에 어디로 가신 것은 아닌가? 모두 꿈 같사와 갈피를 잡지 못하나이다.』

하였다.

왕은 마침내 참지 못하여,

『몸소 돈도암애 가리다.』

하고 말을 내렸다.

좌우는 간지 하였으나 (諫止) 듣지 아니하고 왕은 시종을 데리고 중으로 길을 인도케 하고 절에 쓰는 조그마한 연을 타고 돈도암으로 향하였다.

신하들은 왕의 몸을 근신하여 은밀히 군사를 풀어 왕의 눈에 띄지 아니하도록 먼저 돈도암으로 보내어 숲에 숨어서 왕을 호위하게 하였다.

왕의 연이 돈도암 가까이 임하였을 때는 태자와 두껍쇠가 길을 떠나려고 마당에 나와 서서 앓는 유렴 부인을 제하고는 개로 머리를 깎은 공주까지도 뜰에 나와 이별을 아낄 때였다.

태자는 공주에게 이상한 사람들이 영원동에 움을 묻고 산다는 말을 들었다는 말을 듣고, 인제는 영원동을 버리고 비루봉을 넘어 다른 골짜기에 숨을 생각을 하였다.

『어디로 가든지 해마다 날 하루는 와 뵈오리이다.』

하고, 백화부인께 하직하고 물러나려 할 때에 사람들이 다 눈물을 흘리고 섰을 때에, 수풀 속으로서 문득 사람의 소리 들리며 왕의 연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놀랐다.

태자는 본능적으로 몸을 피하려 하였으나 그럴 것이 없음을 생각하고 허리에 숨긴 단도 자루에 손을 대었다. 그 칼은 아무 때나 한번 쏠 듯하여 시퍼렇게 갈아 몸에 지니고 다니던 것이다.

<오늘은 쓸까? 왕건을 찌를까?>

하는 생각이 번개같이 태자의 머리로 지나간다.

태자의 눈치를 엿보던 두껍쇠도 손에 들었던 마가목 지팡이를 꼭 쥐었다.

태자의 입에서 한 소리만 떨어지면 태자의 칼이 가기도 전에 두껍쇠의 몽둥이가 늙은 왕을 후려 갈길 것이다.

연에 앉은 왕은 뜰에 모여 선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연에서 내려 섰다.

낙랑 공주는 그 앞으로 달려 가서 꿇어 앉으며,

『아바마마!』

하고 불렀다.

왕은 머리를 깎고 먹물 들인 옷을 입고 합창하고 앞에 꿇어 앉은 낙랑 공주를 이윽히 바라보더니 눈에 눈물이 고이며,

『이 어인 일고? 뉘 이리하라 하더니꼬? 네 분명 낙랑 공주뇨?』

하고 추연한 빛을 보였다.

공주는 고개를 돌리고 손을 들어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딸이 머리를 깎고 먹을 들인 옷을 입는 것이 무삼 그리 노라운 일이리이꼬? 일천년 옛 나라의 왕후마마와 동궁마마도 저 모양이시어든.』

하고 백화부인과 태자를 향하여 한번 합창한다.

『왕후마마? 동궁마마?』

하고 왕은 눈물 들어 백화부인과 태자를 바라본다. 사람들은 모두 외면한다.

태자는 또 한번 칼자루를 만지었다. 그러나 왕의 늙은 눈엔 눈물이 번쩍거리는 것을 볼 때에 칼자루를 잡은 태자의 손은 스르르 힘이 풀려 버렸다.

왕도 돈도암과 영원동 「벙어리 처사」말을 들을 때에 혹시나 하는 의심이 없지 아니하였지마는「설마」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야 그것이 사실인 것을 알았다. 왕은 한번 더 왕후와 동궁을 바라보았다. 비록 십여 년이 지나고, 모양과 복색은 뱐하였다 하더라도 옛모습을 차장 볼 수가 있는 듯도 하였다.

『그러면 태자 살았던가?』

하고 왕은 혼잣말로 모양으로 중얼거렸다.

『동궁마마께오서는 죽으려 하여도 죽지 못하고 살려 하여도 살지 못하여, 반은 사람으로 반은 귀신으로 하늘에 사무친 원한을 품고 사람을 꺼리고 초목 금수도 꺼리고 흐르는 물까지 꺼리면서 돌아다니신다 하나이다.』

하고 공주가 아뢰었다.

왕은 공주의 말을 듣고 고개를 숙이고 이윽히 침음하더니 태자의 겉으로 걸어 갔다. 왕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보고, 태자는 또 한번 칼자루를 쥐었다.

왕이 앞에 다다라도 태자는 돌로 깍은 사람과 같이 가만히 서 있었다.

왕은 눈물 고인 눈으로 태자를 바라보며,

『태자는 나에게 원한이 있나뇨?』

하고 부드럽게 물었다.

『원한이 있노라. 내 머리카락 올올이 왕건을 원망하는 원한으로 떠는 것을 못 보나뇨?』

하고 태자는 왕건을 노려 보았다.

『원한이 있거든 원한을 풀라.』

하고 왕건은 한걸음 더 가까이 태자의 앞으로 갔다.

태자는 오른손에 서리 같은 칼을 빼어 들었다 —————

『이 칼을 품은 지 십년에 오늘이야 나의 원수, 나라의 원수를 만났도다.

그러나 왕건을 이 칼로 찌르는 것만으로 이 원한을 풀 것 같지 아니하니 어찌하랴.』

하고 칼을 왕건의 가슴에 겨누었다.

이 광경을 보고 수풀 속에 숨어 있던 군사들이 고함을 치고 대들었다.

두껍쇠는 참나무 몽둥이를 들고 나섰다.

그러나 왕은 손을 들어 태자를 향하고 모여 드는 군사를 제지하며, 태자는 마음대로 『 원한을 풀라! 아무도 태자를 막을 자 없으리라.』

하고 태연히 태자를 바라보았다.

백화부인은 태자의 팔을 잡으며,

『살생을 말라, 살생을 말라.』

하고 낙랑 공주는 태자의 앞에 엎드려 합장하고 태자를 우러러 보며,

『동궁마마 그 칼로 나를 죽이소서.』

하고 울었다.

태자는 말없이 손에 들었던 칼을 땅에 던지고 두껍쇠를 보며,

『가자 모든 일이 끝났도다! 원한도 다 끝났도다!』

하고 수풀 속으로 들어 간다.

『동궁마마! 동궁마마!』

하고 공주가 허둥지둥 태자의 뒤를 따르는 것을 시녀들이 붙든다. 공주는 소리를 내어 운다. 백화부인도 울고 계영부인도 운다.

왕은 태자의 간 뒤를 이윽히 바라보더니,

『이 모든 슬픔이 다 나로 하여 생김인가?』

하고 고개를 숙인다.

이윽고 한 골짜기 건너 편 바윗등에 태자의 손 든 모양이 보이며,

『잘 있으라! 나는 가노라!』

하는 소리가 울려 온다.

사람들은 일제히,

『동궁마마!』

하고 불렀으나 다시는 대답이 없고 태자의 모양도 어디 간 줄을 몰랐다.

그 후에 가끔 산 뫼타는 사람들이 혹은 불정대(佛頂臺)에서 태자의 모양을 보았다 하고, 혹은 일출봉(日出峰)에서 보았다 하고, 혹은 삼성동(三聖洞)에서 보았다 하나 알지 못하였다.

삼성동에는 지금도 태자의 무덤이 있어 해마다 산 뫼 타는 사람들이 정성으로 벌초를 하고 「벙어리 처사」있던 곳을 웃대궐 터 아랫대궐 터라 하여 지금도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물을 자아낸다.

(一九二六年五月十日~一九二七年一月九日 《東亞日報》所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