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마인/21장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劉探偵[유탐정]의 懊惱[오뇌]

[편집]

이상으로 오상억 변호사의 기나긴 이야기는 끝났다.

사면 문을 꼭잠근 방안에서 사람들은 후우 하고 긴 한숨을 지으면서 훤하니 밝아오는 한강 일대를 들창밖으로 바라다 보았다.

『그래 나는 해월의 총소리를 등뒤에 들으면서 부부암을 뛰어 내려왔지요.

면장의 사택과 주재소에 들려서 홍서방의 최후를 보고하고 오늘 오후 차로 거기를 떠났읍니다. 차중에서도 나는 항상 해월의 무서운 감시가운데 있는 것만 같아서 ——』

오상억은 그러면서 방안을 한번 휘 둘러 보았다.

다행이 해월은 그 경비가 심한 저택안으로 침입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러면 대체 어떻게 되나요? 해월은 그러면 나를 죽이려는 것이 아니고……』

하고 은몽이 의아스럽다는 얼굴을 지었다.

그러나 그때 오상억이 대답하기 전에 임경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렇지요 해월이가 부인을 『 . 해치겠다는 것은 말하자면 제이의 목적이고 제일의 목적은 백영호씨 일가에 대한 복수입니다.』

『그렇습니다!』

하고 오상억은 임경부의 말을 지지하며

『이것은 물론 나의 공상에 지나지 못하는 추측이지만 ── 홍서방에 의하면 해월이가 열 대여섯살 적에 ×천읍을 방문하여 백영호씨의 소식을 캐물었다는 것으로 보아서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즉 여분의 아들은 그 후 점점 자람에 따라 할머니의 입으로부터 자기 아버지 백문호를 죽이고 자기 어머니 여분을 능욕했다는 백영호의 무서운 죄악을 알자 아버지의 원수 어머니의 원수 한걸음 더 나아가서는 백씨 일가에 대한 엄씨 일가의 복수 ── 이처럼 골수에 사무치는 원을 품고 그는 해월이라는 중이 되어 조선 십 삼도를 편답하면서 원수 백영호를 찾아 다녔읍니다. 그러다가 그가 열 여덟 살 되는 해 여름, 금강산 백도사에 있던 해월은 거기서 은 몽씨와 알게 된 것입니다. 은몽씨에 대한 열렬한 짝사랑 은몽씨가 철없이 던진 한마디 동정의 말을 사랑의 표현이라고 착각한 해월, 그는 그 후 타오르는 연정을 품고 십 여년 동안이나 은몽을 찾아 다니다가 찾아 놓고 보니 그것은 해월에게 있어서 너무나 놀라운 일이었으며, 너무나 우연한 일이었읍니다. 원수 백영호의 약혼자인 공작부인(孔雀夫人) 주은몽! 무척 놀랐고 무척 기뻐했을 해월은 거기서 무엇을 생각했는가…… 오냐! 너희들을 전멸시키고야 말리라, 그러나 해월은 영리한 사나이였지요. 백영호씨 일가에 복수한다는 뜻은 추호도 밝히지 않고 단지 하나의 실연자로써 자기의 순정을 유린한 은몽씨에 대한 복수라는 것을 표면 이유로 내세웠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의 신분을 영원히 감추려는 것이었지요. 그리하여 해월은 은 몽씨에게 복수한다는 말을 내걸고 그 실은 백영호씨를 죽이고 남수군을 죽였읍니다. ──』

오상억 변호사의 이야기는 반박의 여지가 없을만큼 질서 정연하였다.

『그러면 정란이도? ──』

해월의 목적물의 하나인가를 은몽이 물었을 때

『물론!』

하고 오상억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저번 결혼식에서 정란씨가 장송곡을 치라는 해월의 명령을 거역했을 때, 해월은 뭐라고 말했읍니까?……나는 너를 위해서 장송곡을 치리라고 선언하였읍니다.』

임경부는 그 때야 비로소 아까 유불란탐정이 취한 태도의 의미를 알았던 것이다.

아까 오변호사가 경성역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유불란에게 전달했을 때, 유불란은 임경부에게 뭐라고 말했는가?……삼청동 정란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하여 경비대를 파견하라고 그러지 않았던가! 그리고 은몽 보다도 정란이가 한층 더 위험한 처지에 놓여 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오상억씨!』

하고 그때 비로소 유불란은 그 묵직한 입을 열었다.

『그 때 엄여분이가 낳은 아이가 확실히 사내였읍니까?』

여분의 아이가 확실히 사내였던가고 묻는 유불란의 말에 오상억은 놀라며

『물론 내눈으로 보지 못했으니까 단언 할 수는 없읍니다. 그런데 왜 그런 말을 묻읍니까?』

『아니 ──』

하고 유불란은 잠깐 동안 무엇인가를 주저하는 모양이더니

『그때 여분이가 낳은 아이는 호적에 오르지 않았다니까, 그것이 계집앤지 사낸지 누가 그것을 증명합니까? 홍서방도 자기의 눈으로 직접 보지 못했으며……』

『아, 그것은 그때 약 일년동안이나 어린애에게 젖을 먹여준 홍서방의 처가 증명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홍서방의 처가 지금도 ×천읍에 살고 있읍니까?』

『아니올시다. 홍서방은 그 후 상처하고 지금은 젊은 후처를 얻어 살지요.』

『그러니까, 아아 ──』

하고 유불란은 무의식 중에 긴 한숨을 지으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여분이도 죽고, 여분의 어머니도 지금 쯤은 죽었을게고, 홍서방의 처도 죽고, 또 홍서방마저 죽어버린 지금에 이르러서……그리고 어린애는 호적에도 오르지 않고……』

『그러면 유불란씨는 해월이가 혹시 여자……?』

하고 옆에 앉은 임경부가 무심 중 물었을 때, 유불란은 황급히 머리를 흔들며

『아닙니다. 단지 나는 호적에도 없는 하나의 인물을 의심할 따름이지요.

여분이가 그때 아들을 낳았는지 딸을 낳았는지……아니 한걸음 더 나아가서 여분이가 과연 임신을 했었는지 이 모든 점을 지금에 이르러서는 증명할 사람이 한사람도 없다는 말입니다.』

유불란의 말을 듣고 나니 임경부는 어떻다고 꼭 지적할 수는 없으나 지금까지 뚜렷하게 눈앞에 떠오르던 살인귀 해월의 존재가 갑자기 몽롱해 지는 것 같았다.

해월이란 인물이 과연 실재의 인물일까? 자기가 모르는 것을 벌써부터 알고 있는 듯한 유불란이 아닌가. 은몽이 보다도 정란이가 더 위험하다는 유불란, 오상억이 멀리 ×천읍까지 찾아가서야 비로소 알고 온 사실을 유불란은 서울안에 가만히 앉아서도 알고 있지 않는가. 더구나 은몽의 말을 들으면 어렸을 때 백도사에서 만났던 애기중 해월은 그야말로 계집애처럼 어여뿐 얼굴을 가졌다고 하였다. 그러면 유불란이 의심하고 있는 것과 같이 해월은 여자였던가 임경부는 유불란이 밉기도하고 부럽기도 하였다.

『유불란씨가 이 사건에 관해서 우리들 보다 좀 더 알고 있는 점이 있다면 여기서 한번 이야기 해 보는 것이 어떻소?』

하고 유불란을 쳐다보았다.

『정말 유선생은 무엇인가 우리들 보다 좀 더 깊이 알고 계신 것 같애요.』

하고 은몽은 그것을 무척 듣고 싶어 하였다.

『네 이야기 해 보세요! 해월은 그럼 제게는 복수를 안할까요? 저를 해치진 않을까요?』

은몽은 사지를 부들부들 떨면서 애원하는 듯 유불란을 쳐다보았다.

그래도 유불란은 얼마 동안 대답이 없다가

『다른것은 모르겠읍니다만 지금 물으신 은몽씨의 물음에는 대답하여 드리지요. 해월은 ──』

하고 또 한번 말을 끊었다가

『해월은 절대로 은몽씨를 해치지 않을 것입니다!』

하는 유탐정의 말에는 힘이 있었다.

『그러세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절망의 밑바닥에서 희망의 꼭대기로 기어 올라가는 듯한 은몽의 얼굴 ── 그러나 다음 순간 은몽의 두 눈동자는 점점 어두워진다.

더구나 오상억 변호사가

『아니올시다! 저는 ──』

하고 유불란의 말에 자신있는 어조로 반대했을 때, 은몽의 얼굴은 더욱 침울해졌다.

『그럼 오상억씨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유불란의 물음이었다.

해월은 『 반드시 은몽씨도 해치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이유는?』

『해월이가 그것을 은몽씨에게 선언했기 때문에!』

『………』

해월이가 주은몽을 해하느냐? 안하느냐?……

이것은 실로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중대한 문제에 관하여 유불란 탐정과 오상억 변호사의 의견은 정반대로 대립하였던 것이다.

『해월은 절대로 은몽씨를 해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지금까지 생각해 왔읍니다. 그리고 그리고……』

유탐정의 얼굴에는 일종 헤아릴 수 없는 심각한 오뇌의 빛이 뭉게뭉게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마치 고무방망이로 뒤통수를 한번 얻어 맞은 것과 같은 무참한 얼굴이었다.

『참패(慘敗)!』

이와같은 두 글자가 유탐정의 얼굴에 알알이 떠올랐다.

『유불란씨가 그렇게 생각하시는 데는 물론 상당한 근거가 있을 겁니다.

나는 해월의 잔인한 성격으로 미루어 보아서 제일의 복수 ── 즉 백영호씨 일가에 대한 복수는 마치고 제이의 복수 ── 은몽씨에게 복수의 칼날을 던 지리라고 나는 생각하지요. 지금껏 해월은 자기의 선언한 바를 한번도 실행에 옮기지 않은 적은 없으니까요. ──』

『대단히 흥미있는 문제입니다.』

하고 그때 임경부가 유불란에게 얼굴을 돌리며

『해월이가 은몽씨를 절대로 해치지 않으리라는 유불란씨의 지론을 좀 더 자세히 보시면 어떻겠읍니까?』

하는 임경부의 말을 받아 은몽은 애걸하 듯

『네, 그걸 좀 똑똑히 말씀해 주세요. 정말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말 저는 목숨이 한치한치 줄어드는 것 같아서 견딜 수 없어요!』

하고 유불란을 쳐다보았다.

은몽은 언제든지 자기의 몸을 해월의 손으로부터 구제해 주는 사람에게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바쳐도 한이 없다는 ── 말하자면 생명을 유지하겠다는 일종의 본능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모든 지각을 상실한 그러한 태도였다.

미남 오상억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유불란에게 쓰디 쓴 실연의 고배를 맛보게 한 주은몽이었으나 그러나 사랑보다도 목숨이 아까웠던 것이다.

유불란은 물끄러미 은몽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는 은몽의 흑진주처럼 까만 두 눈동자를 쏘는 듯이 드려다 보다가 마침내 무슨 위대한 결심을 한 듯

『해월은 절대로 은몽씨를 해하지 않으리다! 그러나……』

이 한마디의 결론은 유불란 탐정에게 있어서는 너무도 무서운 단언이었다.

그가 지금까지 지니고 온 모든 명예를 이 한마디에 걸어 놓았다는 것을 독자제군은 멀지 않아서 깨닫을 날이올 것이다.

『그 이유는?……』

오변호사의 신날한 질문이다.

『그 이유를 나는 이 자리에서 설명할 수 없읍니다. 그 이유가 여러분 앞에 공개되는 날 사건은 무사히 해결될 것입니다. ── 임경부, 저로 하여금 사흘 동안만 여유를 갖게 하여 주십시요. 사흘 후에는 ──』

『사흘 후에는?』

『사흘 후에는 살인귀 해월을 체포하여 드리겠읍니다!』

『해월을?』

하고 놀라는 임경부를 무시하고 이번에는 시선을 옮겨

『은몽씨!』

하고 힘있게 불렀다.

『네에?』

그 어떤 격정(激情)으로 말미암아 은몽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었다.

『전 일에 있어서 은몽씨는 나의 하나 밖에 없는 애인이었읍니다!』

유불란은 무슨 이유로 사람들 앞에서 돌연 이러한 말을 꺼내는가.

은몽의 시선이 총에 맞은 참새처럼 툭하고 무릎 위에 떨어진다.

『그리고 지금도 은몽씨는 나의 하나 밖에 없는 애인일 것입니다.』

『…………』

『그리고 미래에 있어서도 은몽씨는 나의 하나 밖에 없는 애인일 것입니다.!』

『왜 그런 말씀을 갑자기……?』

은몽은 불현 듯 머리를 들었다. 오상억을 무시하고 눈물은 은몽의 종이장처럼 흰 얼굴을 주루루 흘러 내렸다.

『나는 그 하나 밖에 없는 나의 애인을 위하여 해월을 체포 하겠읍니다!』

그리고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창황한 걸음으로 밖으로 나가려는 유불란을 은몽은

『수일씨!』

하고 불렀다.

아아 수일(秀一)씨! 수일씨! 유불란은 지나간 그 옛날 공작 부인(孔雀夫人) 주은 몽의 입으로 부터 이 말을 얼마나 들었던가!

유불란은 「핸들」을 잡은 채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나 멎었던 발걸음은 도리킬 줄 모르고 그냥 「도어」밖으로 살아졌다.

그 길로 태평동 자기집으로 돌아온 유불란은 무서운 번민 속에서 하루를 보냈다.

『사흘 후엔 살인귀 해월을 체포 하겠노라고 나는 사람들 앞에서 단언하지 않았는가. ── 나는 과연 해월을 체포할 수 있을까?』

하룻밤을 뜬 눈으로 새운 유불란은 피곤한 몸을 침대 위에 던졌으나 통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머리는 착잡할 대로 착잡해지고 두 눈은 무섭게 충혈되었다. 그는 마치 미친 사람 처럼 물끄러미 천정을 바라다 보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러나 수상한 일이다! 서울안에서 한발자욱도 떠나지 못했을 해월이가 어떻게, 그리고 어느새 오상억을 ×천읍까지 따라가서 홍서방을 죽였을까?……』

그것은 실로 유탐정으로서는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난문제 중의 난문제였던 것이다.

이 문제만 해결될 수 있다면 유불란은 금시라도 해월을 체포할 수가 있는 것이다.

『아니다! 아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해월은 분명코 그이다! 그이다!

그러나 아아 ──』

유불란은 손으로 두 눈을 가리우며 모든 것을 잊어버리겠다는 듯이 이불을 푹 뒤집어 썼다.

이불을 뒤집어쓰자 캄캄한 망막에 나타나는 여러 인물 ── 임경부의 그 노둔한 얼굴, 오상억 변호사의 차디찬 이지적인 얼굴, 정란의 가련한 얼굴, 문학수의 유순한 얼굴, 그리고 은몽의 창백한 얼굴이 무섭게 「크로즈·엎」되어 유불란을 향하여 점점 다가온다.

『은몽이! 은몽이!』

그는 망막에 떠오른 은몽의 확대한 얼굴을 잡으려는 듯 두손을 내저었다.

은몽의 그 매섭고도 꿈꾸는 듯한 눈동자를 볼 때마다 유불란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의 실연자로서의 고배(苦盃), 부끄러움, 그리고 마침내는 「그리샤」형의 표정없는 미남 오상억에 대한 질투심이 어린애 처럼 북바쳐 오르는 것이었다.

그렇다 탐정이란 『 ! 결코 연애를 해서는 아니 된다! 연애는 모든 사물을 정확히 내다보는 시력(視力)을 빼앗는 것이다. 아아 그러나 ──』

그러나 유불란은 은몽의 그 매혹적인 눈동자를 아무리 잊고자 하여도 잊을 수가 없었다.

『은몽은 과연 나를 ── 아니, 청년화가 김수일을 참말로 사랑하였던가?

은몽은 오상억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 걸까? 은몽은 나를 통 잊어버리고 말았을까? 은몽은 은몽은……』

유불란은 그 때 손을 머리맡으로 내밀어 초인종을 눌렀다.

이윽고 젊은 서생이 들어오면서 허리를 굽힌다.

『저를 부르셨읍니까?』

『응 ── 나는 이제부터 한잠 늘어지게 잘테니까, 어떤 손님이 찾아 오더라도 없다고 그래.』

『네 ──』

『그러나 ──』

『네?』

『그러나 단 한사람 ── 이 세상에서 제일 어여쁜 부인이 찾아올지도 알 수 없으니까, 그 때는 군이 가진 모든 성의를 다해서 부인을 모셔드려야 하네! 이 세상에서 제일 어여쁜 부인일세! 알겠나?』

젊은 서생은 빙그레 웃으면서 점잖게 대답하였다.

『공작과 같이 어여쁜 부인 말씀입니까?』

유불란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다시 이불을 뒤집어 썼다.

그 후 얼마나 지났는지 유불란은 모른다.

『선생님, 선생님!』

하는 소리에 눈을 번쩍 떠 보니 방안은 어둑어둑한 황혼으로 가득 찼다.

『선생님 이 세상에서 제일 어여쁜 부인이 찾아 오셨읍니다.』

선생은 그리고 벽을 더듬어 「스윗취」를 눌렀다.

유불란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모셔 들여!』

그것이 이 세상에서 제일 어여쁜 부인인가 아닌가는 여기서 갑자기 단정할 수는 없으나 과연 유탐정의 추측은 들어 맞았다.

서생이 손님을 모시러 다시 밖으로 물러간 후, 유탐정은 거울 앞으로가서

「넥타이」와 흩으러진 머리를 고친 다음 무섭게 긴장된 자기의 얼굴을 물끄러미 드려다 보면서 유불란 아니 『 ── , 탐정 유불란! 네게 있어서 가장 귀중한, 그리고 가장 의의있는 시간은 왔다!』

장엄한 어조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두 눈을 감고 서너번 심호흡을 한 유탐정은 마침내 침실을 나와 응접실을 향하여 천천히 걸어갔다.

『유불란 탐정! 너는 언제든지 너 자신을, 그리고 너 자신만을 믿어야 한다!』

그것은 그가 응접실 「도어」를 열면서 자기자신에게 들려준 가장 의미 깊은 충고의 말이었다.

응접실 안에는 한 흑장(黑裝)의 여인이 주인을 기다리며 저 편쪽을 향하고 의자에 걸터 앉아 있었다. 깊은 명상에나 감겨 있던 듯 여인은 발자욱 소리에 놀라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이 쪽을 향하여 머리를 돌렸다.

『아, ……』

그때야 비로소 여인은 썼던 모자와 얼굴을 가리웠던 그물 「베일」을 벗었다.

『은몽씨,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어서 앉으십시요.』

그리고 유탐정은 들창을 활짝 열어 젖힌 후에 은몽과 마주 앉았다.

유불란의 집을 방문한 것은 오늘이 처음인 은몽은 잠깐 동안 방안을 돌아다 보고 모든 것이 꿈과 같다는 표정이었다.

주인도 말이없고 손님도 말이 없다. 그러나 그 처럼 묵묵히 마주 앉아있는 것이 도리어 그러한 때에 있어서는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은몽은 무엇을 생각하고 유불란은 또 무엇을 생각하는가?……

『두 사람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서 얽히고 또 얽히고 —— 그러나 시선을 먼저 무릎 위에 떨어뜨린 편은 은몽이었다.

『저는 언젠가 한번은 은몽씨께서 저를 꼭 찾아주실줄 믿었읍다.』

은몽은 다시 시선을 들어 유불란의 얼굴을 뚫어질 듯이 바라보았다.

『저도 언젠가 한번은 수일씨를 꼭 찾아 뵈오려고 했었어요. ──』

『나는 유불란 입니다.』

『아녜요, 수일씨예요!』

두 사람은 거기서 또 말이 끊겼다. 서로서로의 표정을 더듬어 보면서 터져 나오려는 감정의 불꽃을 눌러 보려는 듯 싶었다.

『나를 유불란이라고 불러 주세요.』

얼마 후 유탐정은 한번 더 그렇게 다짐을 했다.

『수일씨라고 부르겠어요!』

『은몽씨!』

하고 유불란은 힘있게 불렀다.

은몽씨는 아마 오늘밤 『 나를 괴롭히러 오셨나 봅니다. 지금 와서 새삼스럽게 나를 수일이라고 부르겠다는 은몽씨의 마음을 통 헤아릴 수가 없읍니다.』

독자제군이여! 유불란이 뱉은 이 한마디를 기억해 두라!

『은몽씨도 가만히 생각해 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백만장자 백영호씨와 결혼함으로서, 숨진 한 청년 김수일을 절망의 밑바닥으로 밀어넣은 은몽씨 자신을 생각치 못하십니까?』

『…………』

『그리고 미남 오상억 변호사와 사랑을 속삭임으로서 은몽씨가 지금 그의 이름을 부르고 싶어하는 김수일 ── 절망의 밑바닥에서 간신히 기어 올라오려는 김수일을, 은몽씨는 무정하게도 그 진흙 묻은 구두발로 짓밟아 버리지 않았읍니까?』

저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의 말이 점점 열을 띄어 오는 것을 유불란은 무척 두려워하였다.

은몽은 머리를 포옥 숙으린채 인형처럼 꼼짝도 안한다.

눈물이 한방울 톡 —— 하고 무릎 위에 은선을 그으면서 떨어지는 것을 유불란은 보았다.

그러나 은몽의 눈물은 단 한방울, 그것 뿐이었다.

이윽고 은몽은 머리를 들었다. 은몽의 그 새침하니 쳐다보는 얼굴을 유불란은 마음의 손으로 가만히 애무하여 보았다.

『아아, 저 어여쁜 눈동자! 저 매혹적인 입술!』

긴 눈썹 밑에서 요성(妖星)처럼 반짝이는 두개의 눈동자가 언제까지나 유불란의 얼굴에서 떠날줄을 모르는 것이다.

오늘밤은 유달리 짙은 화장을 한듯 싶은 은몽의 앵도알처럼 빨간 입술, 타오르는 정열 속에서 영원히 꿈꾸려는 저 입술!

유불란은 오늘처럼 자기의 직업을 미워해 본 적은 없었다. 아니, 그는 은 몽과 단둘이 있을 때면 반듯이 자기의 직업을 경멸하는 습관을 배웠다.

지나간 시절 ── 김수일과 은몽이 사랑을 속삭이던 그 어떤날, 두 사람의 대화가 우연히 탐정소설에 미쳤을 때, 은몽은 무엇이라고 말하였던가……

『저는 탐정이란 직업을 이 세상에서 제일 경멸해요.』

그때 부터 유불란은 은몽을 볼 때 마다, 은몽을 생각할 때마다 자기 자신을 얼마나 경멸하였던가.

은몽이 경멸하기 때문에 자기도 무조건 경멸하지 않을 수 없었던 자기의 그 소박한 생각을 그 후 여러번 비웃어 본 유불란이 아니었던가.

그러한 유불란이 은몽의 그 꿈꾸는 듯한 입술을 눈앞에 보자, 한 때는 비웃어까지 보았던 자기의 그 소박한 감정을 오늘밤 다시 되풀이하지 않을 수 없으리만큼 은몽의 존재는 연애인 유불란에게 있어서는 너무나 위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밤 유불란은 전날처럼 무조건 자기의 직업을 경멸하지는 않았다. 유불란은 지금 자기의 직업을 한없이 미워할 뿐이었다.

『저 눈! 저 입술!』

유불란은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외쳐 보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유불란은

『「크라이시스(機危[기위])」!』

하고 절규하였다.

그때, 은몽은 유불란의 얼굴로부터 딴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그럼 저는 이 순간부터 김수일이란 이름을 영원히 잊으려고 노력하겠읍니다. 그러나……그럼 유선생은 어째서 아까 아침에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저를 하나 밖에 없는 애인이라는 말을 하셨어요?』

하고 일단 옮겼던 시선을 다시 상대편으로 돌리었다.

『별다른 이유라고는 없읍니다. 단지 나의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였을 따름이지요!』

하고 이번에는 좀 더 힘있는 어조로 말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마음을 ── 나의 가장 심각한 오뇌(懊惱)를 은 몽씨에게 피력하는 동시에, 아니 그 보다도 좀 더 깊은 의미에 있어서 특히 임 경부와 오상억씨에게 피력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지요.』

『무슨 의미의 말씀인지, 저는 잘 알아듣질 못하겠어요. ──』

하고 의아스러운 표정을 짓는 은몽에게

『알기쉽게 말하자면, 탐정 유불란은 해월의 칼날 아래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은몽이란 한사람의 여인을 자기의 생명보다도 더 귀중하게 여겨왔다는 사실을 임경부와 오상억 변호사에게, 아니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일반사회에 선언하였을 따름입니다. ──』

이 한마디를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뱉어버린 자기자신을 유불란은 무척 신뢰하였다. 그는 점점 침착해지는 자신을 깨닫고

『위기(包機)는 넘어 섰다!』

하고 마음속으로 고함쳤다.

『무슨 말씀인지……그것을 사회일반에게 선언할 필요는 어디 있어요?』

『있읍니다!』

『무슨 이유로?』

『유불란은 탐정이기 때문입니다!』

『탐정이기 때문에……』

『그리고 탐정은 절대로 사건중의 이성과 연애를 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