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인/5장
무서운 戀愛史(연애사)
[편집]이리하여 가장 호화롭던 백영호씨와 공작부인의 결혼식장은 암흑과 캄캄하고 죽엄과 같이 음침한 장송행진곡으로 말미암아 공포와 신비를 남겨놓고 일대 혼잡리에 시커먼 장막을 내렸다. 그리고 사흘 후, 백영호씨의 고문변호사 오상억은 사무실 팔거리 의자에 깊이 파묻혀 한 손으로 턱을 고이고 들창 밖 행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오상억 변호사의 사무실이 오늘처럼 한가해 보기는 처음이었다. 사무원들도 모두 점심을 먹으로 나간 모양이다.
오상억은 지금 멍하니 밖을 내다보면서 어떻게하면 십 만원이란 돈을 마련할 수 있을까를 궁리하고 있는 것이다. 작년 가을 목단강(牧丹江)유역에 약 오십 만평이나 되는 광대한 토지를 사 놓은 것은 괜찮았으나 그것을 개간하고자 하니 적어도 십 만원은 갖어야 했다.
『십만원, 십만원!』
하고 그는 중얼거린다. 십만원만 지금 수중에 갖었다면 몇 해 안되어 자그만치 십배 ── 백만원을 만들만한 성산이 그의 명석한 두뇌와 그의 능난한 수완이 확보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자기의 치밀한 머리와 튼튼한 심장을 믿었다. 그것은 그가 성대(城大)법학부를 나온지 아직 오년이 못된 오늘날 적어도 민사소송이라면 구십「퍼 ─ 센트」까지 승소에 승소를 거듭해온 그의 명성과 따라서 벌써 오십 만평이란 광대한 토지의 소유자라는 사실만으로 미루어 봐도 그가 결코 범인이 아닌 것만은 확실히 증명될 것이다.
그것도 그럴법한 것이 그의 삼십 오년 간의 생애란 실로 참담한 역사의 연쇄였다.
그의 고향은 평안복도 S읍이다. 그가 어머니의 뱃속으로 부터 생명의 충동을 이기지 못하여 발버둥치며 이 사파에 떨어져 나왔을 때 사람들은 뭐라고 수근거렸던가.
『저것이 뭘 하러 나왔노! 차라리 죽어서나 나오지!』
그러나 오상억은 자기 아버지와 달랐다. 비록 아버지는 대대손손이 물려준 생업 ── 백정(白丁)이라는 생업으로써 아들을 길렀으나 그의 아들 오상 억만은 그와같은 낙인(恪印)을 자기 자손에게 물려줄 존재는 아니었다.
그는 세상사람들의 가진 확대를 그의 독특한 수단 ── 침묵이란 수단으로서 물리치며 자랐다.
『얘이, 백당(백정)의 새끼!』
그러나 그의 조각처럼 차디찬 얼굴에는 이렇다할 반응의 빛도 보이지 않았다. 표정없는 얼굴과 말없는 입 ── 이것이 그가 타고난 유일한 무기였다.
『권력! 권력!』
권력이 그에게는 절대로 필요하다.
배워야 한다 돈을 『 ! 모아라! 그러면 너에게는 자연이 권력이 오느리라!』
그의 침묵은 항상 이렇게 부르짖었다. 그는 아버지가 도수(屠獸)하여 남긴 몇 푼 안되는 돈을 훔쳐가지고 고향을 등졌다. 평양서 어느 사립중학교를 피땀을 흘려가면서 고학으로 졸업한 오상억은 곧 서울로 올라와 성대 선과(選科)에 학적을 두고 학부 이학년 때에 고문을「파스」하였던 것이다.
『배웠다! 그러면 인제부터는 돈이다!』
이것은 졸업장을 쥐고 교문을 등질 때에 한 그의 침묵의 외침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오상억의 혈관에도 청춘은 섞여 있었다. 영문학과를 졸업한 동기생 배남수의 누이동생인 정란을 흠모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백정의 자식인 줄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옇든 그의 불타는 연정을 무시하고 작년 봄 박사논문이 통과된 문학수의 품으로 돌아가버린 백정란이다.
그 때「테이블」위에 놓인 전화기가 요란하게 사무실을 울리었다. 오상억은 명상에서 깨어나 수화기를 잡았다.
『오상억이 올시다. 아, 선생이십니까?』
뜻하지 않은 백영호씨의 목소리다.
『……백선생 그 동안 재미 많이 보시지요? 신혼의 단꿈 ── 하‘하’
하……』
오상억의 목소리는 수화기 앞에서 아주 쾌활하게 웃어 보이었으나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보이지 않는다. 인형이 입을 벌린 것 같았다.
『그런데 신부께서 몸이 좀 불편하시다는 말을 들었는데 지금은 좀 어떠시오? 괜찮으셔요? 암, 그렇구말구요. 누구든지, 더구나 부인네들이야 오죽 놀랐겠읍니까! 결혼식장에서 그런 봉변을 당했으니……네, 네, 뭐? 의논할 일이 있읍니까? 아니올시다. 너무 한가해서…… 그럼 곧 가 뵙겠읍니다.
네, 네 ──』
오상억은 수화기를 놓으면서
『무슨 일이 생겼노?』
하고 잠시 주저하다가 마침내 관철동 사무소를 나섰다.
백영호씨의 저택은 삼청공원 바로 입구에 자리 잡고 있는 삼층 양옥이다.
높은「콩크리트」담장과 드높은 정원과 그리고 꽃화분이 가득 놓인 「베렌다」는 이 집 주인의 호화로운 생활의 일면을 말하는듯이 오고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번씩 빼았는 것이다.
오상억은 잠깐 발걸음을 멈추고 중얼거렸다.
『백만원!』
선망과 질투와 그리고 자기를 덮어 누르는 그 어떤 압박에 저항하려는 듯이 그의 손 끝은 성난 사람처럼 푸르럭 거리면서 초인종을 억세게 눌렀다.
찌르릉 하고 초인종을 울리는 소리가 안으로부터 어렴풋이 들린다. 그 때 계단 저 편에서
『어멈 누가 오셨어요.』
하는 정란의 목소리가 굴러 나왔다. 오상억의 얼굴에는 일순 긴장의 빛이 핑 떠돌았다.
이윽고 현관 문이 열리었다. 어멈은 어디로 갔는지「핑크」색「원·피스」
를 입은 정란의 얼굴이 기웃한다.
『아, 오선생 ──』
가벼운 놀라움이 정란의 빨간 입술 위에 올라앉았다 사라진다.
『백군, 집에 있읍니까?』
표정없는 오상억의 물음이다.
『오빠는 지금 외출하고 없읍니다. 들어 오시지요.』
『백선생은……』
『이층 서재에 계셔요.』
오상억은 서슴치 않고 구두를 벗은 후 정란보다 앞서서 이층으로 올라갔다. 서재까지 안내하려던 정란은 그만 우뚝 발걸음을 멈추고 층계를 묵묵히 올라가는 오상억의 뒷모양을 조금 세침한 낯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다음 순간, 뜻하지 않았던 가벼운 동정이 그의 발과는 정반대로 오상억의 뒤를 따라 이층으로 기어 올라가는 것이다.
『어여쁜 부처님!』
정란은 마음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오상억을 따라 이층으로 올라가려는 자기의 야릇한 감정을 억지로 끌어내리곤 끌어내리곤 하면서 아무일도 없었던 듯이 공작부인의 침실로 들어갔다.
공작부인 ── 아니, 지금은 정란의 젊은 어머니 주은몽은 사흘 전 부민관 결혼식장에서 그 쩌릿쩌릿한 악마의 얼굴을 본 후부터 밤이나 낮이나 자기의 신변을 헤매이고 있는 듯한 악마의 환영을 머리에 그려보고 부르르 몸을 떨곤하였다.
신혼의 단꿈도 꿀새없이 주은몽이 지나간 날의 행월이와 자기 사이에 벌어졌던 악몽으로 말미암아 오뇌와 뉘우침으로 날을 보냈다.
지금도 주은몽은 침대에 누워서 그 파리한 얼굴로 천정을 멍하니 바라보며 정란과 더불어 그 백도사의 애기중 해월이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있던 참이었다.
자아 어서 이야기를 『 , 계속하세요. 그래 그 악마가 어머니를 죽이겠다고까지 결심한 동기를 자세히 이야기 해 보세요.』
정란은 침대 옆으로 다가와 앉는다. 그러나 독자 제군이여! 우리는 주은 몽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무서운 연애사를 듣기 전에 이층 서재에서 백영호씨와 그의 고문변호사 오상억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벌어졌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오상억이 이층 서재로 들어가자 백영호씨는 그를 기다리고 있던 듯이
『이거참 오시느라고 수고가 많았소.』
하고 반가이 맞아 드렸다.
『안녕하셔요.』
오상억은「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백영호씨와 마주 앉으며
『요즈음 재미가 어떻습니까? 아주 얼굴에 화기가 도시고…… 십년 쯤은 젊어진 것 같읍니다. 하, 하, 하.』
그러나 백영호씨는 다만 빙그레하고 한번 웃어 보일뿐이고 아무런 대답도 없다. 백영호씨의 그 빙그레하고 웃는 웃음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숨어 있었다는 것을 오상억은 모르리라.
결혼한지 벌써 사흘이나 되었으나 그는 아직 신부와 잠자리를 같이 해보지 못했다는 쓸쓸한 심정과 그 쓸쓸한 심정을 이리뒤척 저리뒤척 해보는 초조한 마음을 스스로 웃어보는 웃음이었다.
신혼의 행복을 즐기기 보다도 먼저 그 해월이라는 도승 ── 바람과 같이 나타났다 바람과 같이 자취를 감춘 악마의 칼날로부터 자기의 목숨을 건지려는 마음이 한층 더 바빴던 젊은 아내의 심정을 백영호씨는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내의 흥분된 마음이 진정되기를 기다리며 침실로 바로 옆방인 「아뜨리에」서 오는 유월 상순에 열릴 미술전람회에 출품할 『여인 군상(女人群像)』이라는 석고상을 만드는 것으로 자기의 쓸쓸한 마음을 달래며 오늘날까지 지내왔던 것이다.
백영호씨는 그 때 안색을 가다듬으며
『오늘 일부러 오군을 청한 것은 ──』
하고 오상억을 바라보았다.
『네, 무슨 말씀입니까?』
하고 오상억은「테이블」에 상반신을 내 밀었다.
『다른 것이 아니라, 이번 여러가지로 생각한바가 있어서 ──』
『네 말씀을 하십시요.』
오군도 아시다싶이 『 지금 우리 사학계(私學界)는 적지 않은 역경의 길을 밟고 있거던.』
『네 그렇습니다.』
『아시다싶이 조선사학계의 은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장로교에서 모두 손을 떼고 저처럼 은퇴하는 이상, 오직 남아있는 길은 우리의 손으로 우리의 사학을 유지할 수 밖에는 없단말이지 ──』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순전히 우리의 손으로 경영하던 혜성전문학교 ── 내일이라도 교문을 닫아버리지 않으면 안될 혜성전문학교를 위하여 사재 칠십 만원을 내놓을 의사를 가지고 교장 황세민(黃世民)씨와도 여러번 교섭을 하였는데 ── 여기에 대해서 오군의 의견도 들을겸 법적수속이라던가 기타 여러 가지로 군의 수고를 좀 빌셈으로 오라고 한 것이네. ──』
『그렇습니까? 그것 참 장쾌한 일입니다!』
하고 오상억은 먼저 고문변호사로의 찬의를 표하는 한편
『그래 부인께서도 물론 그것을 승락하셨겠지요?』
하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승락이 있었지!』
하는『물론』에 백영호씨는 유달리 힘을 주었으며 그 힘있게 말하는 백영호 씨의 어투로 미루어보아 백만원의 재산과 결혼한 것이라고 세평을 받는 공작 부인에 대한 인식을 새로히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오상억이었다.
『그럼 남수(南樹)군도 물론 찬성이겠지요?』
『아 정란도 좋다고 하는데 애만이……』
하고 잠깐 주저한 후에
『그러나 이미 나의 의사는 결정된바라 남수가 불찬성해도 하는 수 없는 일이지. 그래 거기에 대한 모든 수속을 오군께 위임할 셈으로 이렇게 일부러 오시라고 한것이네.』
이리하여 오변호사가 백영호씨와 이층 서재에서 칠십만원 제공 문제를 토의하고 있을즈음 아랫 층 침실에서는 정란과 은몽이 저 보이지 않는 악마도 승 해월이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젊은 어머니의 기구한 연애사(戀愛史)는 어떠했는가.
행복해야 할 결혼이며 희망에 빛나야할 신혼생활이지만 공작부인 주은몽의 아름다운 공상은 그것이야말로 일장춘몽의 꿈조차 꿀 새도없이 그림자처럼 자기의 뒤를 따라다니는 악마 ── 저 백도사의 애기중이던 해월로 말미암아 여지없이 짓밟히고야 말았다.
어린 시절에 철없이 저질러 놓은 조그만 실수는 주은몽의 화려한 생활도로 하여금 원망과 (生活圖) 저주와 복수의 칼날이 번득거리는 암흑의 빛으로 물들이게 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더구나 해가 지면 삼천동공원 일대의 우거진 숲과 드넓은 정원의 캄캄한 장막은 쥐죽은 듯 고요하다. 그 캄캄한 장막을 슬그머니 헤치고 복수의 악귀로 변해버린 도승 해월이가 어느때 어디서 주은몽을 해치려고 달려들런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은몽은 숲을 스치는 바람 소리만 들어도 무서워 하였다. 개만 짖어도 온몸은 부들부들 떨렸다.
『어째 그런지 저는 그 해월이가 우리집 근방을 헤메이고 있는 것 같아서 못 견디겠어요.』
어떤날 밤 은몽은 무서움에 찬 눈동자로 남편 백영호씨를 똑바로 쳐다 보면서
『옛적부터 하는 말이 중은 심심산골에 들어 앉아서 오랫동안 도를 닦으면 신선이 되어서 하늘로 올라갈 수 있다는데 아마 그 놈은 오랫동안 도를 닦아서 요술을 배웠는가 봐요.』
그런 것을 어린애처럼 새삼스럽게 묻는 아내가 백영호씨는 무척 애처러웠다.
『은몽, 무엇을 그리 두려워 하는게요? 아무 걱정 말고 마음을 편하게 가져야 합니다. 내가 이처럼 옆에서 지키고 있질 않소? 이층에는 남수와 정란이가 있고……』
그러나 은몽은 위로하는 남편의 말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는 듯이
『그래도, 그래도……』
하면서 좀처럼 마음을 놓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사실은 백영호씨도 입으로는 아내를 위로하면서도 뭔가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공포에 자기 자신도 사로잡혔던 것이다.
첫째로 저번날밤, 가장무도회에서 은몽을 해치려 하던 어릿광대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일이라던가 이선배란 화가가 태평동 막다른 골목에서 땅으로 숨은 듯이 없어진 일이라던가 결혼식장에 나타났던 해월이가 눈깜짝할 사이에 자취를 감춘 것들을 다시금 연상해 볼 때 이 모든 사건은 실로 커다란 신비인 동시에 커다란 무서움이 아닐 수 없었다.
연기처럼 틈만 있으면 어디서든지 기어드는 해월이! 그는 과연 사람인가 귀신인가?
백영호씨가 이층 응접실에서 오상억 변호사와 이야기할 때 아랫층에서는 은몽과 정란이가 도승 해월이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럼 『 어머니가 바로 열 여섯 살 나던 여름이로군요?』
『그렇지. 열 여섯 살에 무슨 철이 있어?』
『그래도 어머니 열 여섯 살이면 뭐……』
정란은 제입으로 내 뱉은 이「어머니」란 말이 처음에는 무척 어색하기 짝이 없었으나 뭐 그럴 것 없다고 자기 감정을 어루만져가며 한번 두번 부르는 사이에 지금은 도리어「어머니」라는 말투에 새 감정을 느끼는 정란이다.
침대 위에 누은 은몽의 해말쑥한 얼굴에는 차츰차츰 어두운 빛이 떠돌기 시작한다.
『열 여섯 살이라도, 뭐 난 정말 아무 것도 몰랐어.』
『그래 그 해월이란 애기중과 무슨 언약이 있었우?』
『있긴 뭐가 있어. 내년 여름에 또 오라기에 오겠다고 그랬을 뿐이지. 그럴 걸 그이가 무슨 큰 약속이나 한것 같이 믿고……아이 참, 사람이라니 어디서 어떤 실수를 저지를런지 알 수 없어. 아이 무서워! 그 지긋지긋한 중놈이 언제 또 나를 죽이려고 달려 들런지……』
은몽은 몸을 부르르 떨며 들창 밖을 내다보았다.
정란은 그 애기중과 이 젊은 어머니 사이에 얽혀져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그 어떤 기구한 「로맨스」의 실마리를 끄집어낼 셈으로 의자를 바싹 침대 옆으로 당겨 놓으면서
『그래도 어머니, 그이가 언젠가 어머니께 한 편지에, 그러나 나는 너의 육체의 비밀을 알고 있다. 애기중 해월이의 아내였던 사실을 알고 있다 ── 이런 말이 씌어 있었다면서 뭐?』
정란은 약간 귀밑을 붉히며 은몽을 바라 보았다.
『…………』
은몽은 아무 대답이 없다. 천정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그의 눈에는 지나간 시절의 회상과 그 회상에서 벌어져 나오는 후회, 어두움, 절망, 공포 ── 그런 것들이 알알이 떠오르는 것 같이 보이었다.
은몽은 길게 한번『후』하고 한숨을 지으며 마치 한탄하듯이 입을 열었다.
『아아 어여쁜 악마! 정란이 그것이 만일「로맨스」라면 그것은 너무도 무서운 「로맨스」야. 공포에 찬 아름다운「로맨스」, 애기중 해월은 그 때 벌써 한개의 소악마(小惡魔)였었어. 뱀 앞에 개구리 모양으로 나는 그 악마에게 나의 철없는 정열을 전부 바쳐버렸단 말이야……어여쁜 소악마!』
그리고 은몽은 무엇을 생각했는지 갑자기 침대 위에 일어나 앉으며 정란이 내 전부 이야기 『 , 할께 응? 나는 정란이를 누구보다 믿어. 나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해 줄 수 있는 정란인줄 알아!』
흥분에 찬 은몽의 목소리와 함께 그의 싸늘한 손가락이 무심 중 정란의 손목을 부여잡았다.
『자아, 내 이야기를 좀 들어 봐!』
『어머니!』
정란은 그 때 불길처럼 타오르는 어머니의 양볼과 무섭게 충혈된 두 눈을 발견하고 그렇게 불렀다.
『어머니! 뭘 그리 흥분하세요?』
그러나 그 너무나 열정적으로 돌변한 은몽의 태도와는 정반대로 정란의 손목을 잡은 그의 두손은 어름덩이 같이 싸늘하다.
『그 놈의 칼에……그 놈의 칼에 나는 죽을 것 같애! 아아, 그 구렁이 처럼 추근추근한 돌중놈의 칼에 나는 언젠가는 죽을거야! 아아, 그 지긋지긋한 구렁이! 구렁이!』
『어머니 어머니! 마음을 진정하세요. 의사도 그러지 않았어요! 될 수 있는 대로 마음을 편안히 가져야한다고 ── 그리고 흥분하면 안된다고…』
『글쎄 내 말을 들어봐. 나도 참 철이 없지 ── 백도사(百道寺)의 적적한 생활, 하루 종일 가야 누구하고 말 한마디를 해볼까……매미 소리, 벌레 소리, 개울을 흐르는 물소리 ── 그 처럼 쓸쓸한 내 앞에 미소년 해월이가 나타났어. 나는 그를 처음보는 순간 ──』
은몽은 애기중 해월을 처음 보는 순간, 계집애 처럼 아리따운 그의 용모가 어린 은몽의 가슴 속에 아름다운 공상의 날개를 불어 넣었다.
이 공상의 날개는 해월이의 가슴에도 돋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해월을 바라보는 은몽의 눈동자가 천진하고 난만한 것과는 정반대로 은몽을 쳐다보는 이 애기중의 얼굴은 어느 때나 흐리고 침침하고 어두웠다.
그러나 그 침침하고 어둠속에 독사처럼 불타고 있는 정열이 숨어 있을 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어떤날 오후, 나는 참 이상한 사실을 발견했어.──』
은몽은 어떤날 오후, 해월이와 산골짜기를 싸돌아다니다 돌아와서 땀에 젖은 「샤츠」와 양말을 맞은편 담밑 양지쪽에 피어있는 봉선화 잎에다 널어 놓고 방으로 들어와 있노라니까 거기에 해월이가 슬그머니 나타나서 은몽의 양말을 한짝 걷어가지고 뒤뜰로 돌아갔다.
『그때 하도 이상해서 뒤를 따라가 보질 않았겠어? 그랬더니 그이가 그 땀에 젖은 양말을 개처럼 쭐쭐 핥고 있겠지! 아이 참 더러워!』
『양말을 핥아요?』
『그러게 말이지! 처음에는 양볼에 대고 부벼보더니 그 담에는 입에다 넣고 쭐쭐 빨아 보는 거야.』
『아이 더러워! 짐승처럼 빨긴 왜 또 빠는 거예요? 그게 정말이유 어머니!』
정란은 손으로 입을 가리우며 눈쌀을 찌프렸다.
『그림 내가 거짓말을 할까.』
『아이 참 별일도 다 있어! 그래 어떻게 했어요?』
『그래 나는 그것을 본 순간 왜 그런지 보아선 안될 걸 본것 같아서 얼굴이 화끈하겠지. 지금 같으면 못 본척하고 방으로 뛰어 들어왔을 테지만 그래도 그땐 아직 어리지 않아? 그래 나는 에이 더러워 너 남의 양말은 왜 핥는 거야? 하고 소리를 쳤더니 후다닥 놀라서 이편을 힐끗힐끗 돌아다 보며 멋적은 얼굴로 빙글빙글 웃는거야.』
『그래서……?』
『그래 그 빙글빙글 웃는 낯작에다 침을 탁 뱉고 싶은 생각이 나질 않겠어? 어째 그런지 그런 충동을 받았어. 그래 에이 더럽다! 하고 아직도 손에 들고 우물거리는 양말짝을 잡아 당겼을 때는 땀내가 나고 발고린내가 나는 내 양말짝 보다도 그 양말에 번질번질 발라 놓은 그 자식의 침이 몇 곱절 더러워 보이는거야. 화가 바짝 치밀겠지. 개한테 얼굴을 할키운 것 같아서 못견디겠는 걸 어떻게!』
『그래 어떻게 했어요?』
『그래 양말을 도로 그의 낯작에다 던지면서 깨끗이 빨아오라고 그랬더니 그만 머리를 푹 숙이고 양말을 든채 개울로 내려가는 거야.』
은몽의 두 눈이 양말을 들고 머리를 푹 숙이고 기운없이 개울로 내려 가는 애기중의 뒷 모양을 바라보는 듯이 몽롱해지는 것을 정란은 보았다.
『가엾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은몽은 시선을 정란에게로 돌리며
『응! 그렇게 생각한 나의 어린 감상이 도대체 잘못이었어. 내몸을 망치게 된 동기가 그 부질 없는 「센티멘탈리즘」때문이었지. 그의 뒤를 따라 부리나케 개울로 뛰어내려 갔을 때는 벌써 양말을 깨끗이 빨아서 양지쪽 바위 위에 널어 놓고 그 옆에 주저 앉아서 양손으로 턱을 고이고 소리없이 흐르는 개울물을 물끄러미 드려다보고 있겠지. ── 너 화났니? 하고 등뒤에서 그의 얼굴을 기웃하고 드려다 보았더니 그 때야 바위에서 일어서면서 말없이 빙그레 웃었어. 발고린내 나는 양말짝보다 그 계집애처럼 빨간 입술을 가진 그의 침이 더 더러울리는 만무하지. 양말짝을 핥고 있는 그를 발견한 순간, 나는 아까 얼굴이 화끈함을 깨달았다고 그랬었지. 그의 침이 한량없이 더럽다고 생각한 것은 그 다음 순간이었어 ── 그것은 결국 성(性)에 대한 자각(自覺)이 너무도 갑자기 나를 습격한 때문이 아닐까?』
정란은 얼굴이 간지러운 모양이다. 잠깐 머리를 숙였다가 다시 들면서 이야기를 재촉하였다.
『나는 그 때 어린애와 입 맞추는 어머니들을 불현 듯 연상하였어. 그리고 그에게 대한 미안한 생각도 나고해서 ── 침이 왜 더러워? 침이 왜 더러워…… 하고 마음 속으로 외치면서, 아니 그렇게 외쳤을 때는 벌써 ──』
그렇게 외쳤을 때는 벌써 애기중 해월의 침이 결코 더럽지 않다는 증거를 은몽의 입술이 너무나 명백히 증명하였을 때였다.
해는 비로봉을 넘어 뉘엿뉘엿 넘어간다. 고요히 흐르는 냇물에 거꾸로 비치는 두개의 그림자, 감격된 영혼과 애달픈 입술을 싣고 두개의 그림자는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떨어질 줄을 모르는 듯 물결 위에서 넘실거렸다.
『굳센 듯 하면서도 모래처럼 연약한 처녀성의 신비 ── 해가 지고 황혼을 헤치면서 다시 절간으로 올라올 때는 나는 한번도 그의 얼굴을 못 쳐다 봤어. 그러나 아아 저주 받은 그 일순간!……』
은몽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들창 밖에 서 있는 고향나무 그림자가 어느 듯 두자나 동쪽으로 길어 졌으니 해는 벌써 북악산 봉우리를 넘으려는 것이다.
정란은『후!』하고 가느다랗게 한숨을 지었다. 젊은 어머니의 연애사는 아직도 계속된다.
『그런 일이 있은 후부터 그는 마치 나를 무슨 여왕으로 섬기겠지. 그리고 자기는 노예가 되어서 나를 위하는 거야. 나는 어린마음에 정말 여왕이나 된 듯이 교만한 태도로 그를 대하기 시작하였어. 그는 내 말이면 무엇이든 싫다는 말 한마디 해본적이 없었어. 언제가는 내가 일부러 어떻게하나 보려고 네길이나 되는 위태로운 벼랑 아래 핀 도라지꽃을 뜯어 오라고 명령을 했더니 말이지, 그는 아무 말도 없이 법당으로 올라가서 오랏줄을 가져다가 그것을 붙잡고 내려가서 꽃을 따가지고 올라 오는거야. 보니 오랏줄을 잡고 미끄럼질을 하면서 내려간 그의 양손에서 새빨간 피가 뚝뚝 흐르겠지. 그래도 그는 아프다는 소리 한마디 없이 잠자코 꽃을 내 손에다 쥐어줬어. 그러나 나는 그것을 별로 애처롭다고도 생각하지 않고 ── 아니 사실은 애처로웠지만 그 순간 잔인한 마음이 나의 가슴에 떠오르겠지. 오냐 네가 얼마나 나를 위하나 보자? 그렇게 생각하면서 도라지 꽃을 다시 벼랑 밑으로 던지질 않았겠어 그리고 다시 . 가져오라고 명령 했더니 그는 잠깐 나의 얼굴을 들여다 본 후에 또 다시 묵묵히 오랏줄을 잡고 미끄러져 내려갔다 꽃을 쥐고 기어올라 오겠지.……』
『어머니도! 어쩌면 그리!』
그 순간 정란은 어머니가 끝없이 미웠다. 그러나 은몽은 빙그레 웃으면서
『그래 그것은 물론 나의 잘못이었어. 그러나 나를 그렇게 교만하게 만들고 잔인하게 만들어 준 죄는 모두 그 악마에게 있었다고 나는 생각해. 그 계집애 처럼 어여쁜 얼굴, 기쁨도 모르고 슬픔도 모르는 것 같은 마치 인형처럼 생긴 얼굴 밑에 무엇이 숨어 있었는줄 알아? 아 생각하만 해도 온몸이 저릿저릿하게 무서운 계획이 그 표정없는 얼굴 밑에 있었던거야! 그는 나를 나를 죽이려고……』
『옛? 죽이려고?』
정란은 몸을 부르르 떨면서 그렇게 부르짖었다.
『죽이긴 왜 죽여요? 어머니를 그렇게도 사랑하고 있었다면서……』
『사랑하기 때문에 죽인다는 것이 그 무서운 계획의 동기였어. 어떤 소설에 이런 이야기가 있지않아? ── 어떤 과학자가 어떤 여자를 무척 사랑한 끝에 여자를 영원히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커다란 수통(水桶)에다 여자를 집어 넣고 거기다가 냉각장치(冷却裝置)를 해서 수통의 물을 냉각시킨 후에 수통을 벗겨 놓았다고 얼음기둥(氷柱)속에 꽃처럼 잠자고 있는 구원의 애상(愛像)!』
어느새 옅은 어둠이 방안을 점령한다. 정란과 은몽은 숨길만 높다. 말 없이 쳐다보는 시선과 시선 ──
『애기중 해월이도 나를 영원히 놓치지 않을 생각으로 내년 여름에 또 다시 온다는 나의 말이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어 ── 내가 백도사를 떠나는 바로 전날 밤, 달빛이 희미하게 비치는 밤이었어. 나와 해월이 저번 날 도라지꽃을 따던 벼랑 위에 걸터 앉아서, 그는 내년에도 꼭 오라거니 나는 꼭 온다거니, 그런 이야기를 주고 받던 때야. 내가 문득 달빛에 어린 그의 얼굴이 무섭게 변한 것을 보고 마음이 섬뜻해서 바위 위에서 벌떡 일어서는 순간, 아아, 무서워! 그의 두손이 나의 목을……』
은몽은 다음 말을 못잇는다. 지나간 날의 공포가 다시금 그를 습격하는 모양이다.
『그래 어떻게 했어요?』
『그래 나는 힘껏 그를 떠밀고 미친사람 모양 절로 뛰어 올라왔어 ──』
이리하여 주은몽의 무서운 연애사가 바로 끝났을 때, 정란의 오빠 백남수가 한장의 편지를 들고 흥분한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