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탑/81장~10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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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편집]

여불없이 아사달을 데려다가 줄 듯하던 세 번째 봄도 어느덧 지나가 버렸다.

탑 둘을 혼자 맡아 짓는 데도 이태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그 말을 처음 들을 때 아사녀는 어마 싶었었다.

아무리 대공이기로 그렇게 날짜야 걸리랴. 아버지께서 내 마음을 눅여 주시느라고 일부러 멀리 잡아 말씀을 하시는 것이거니 하고 제 깐으로 날수로 잔뜩 일 년, 햇수로 이태만을 잡아들면 아사달은 돌아오리라 믿었었다.

그러던 것이 벌써 햇수로 삼 년에 들어 반 년이 지났으니 날수로 따지어도 이태 반이나 되어 가는 폭이다.

그렇게 까마득하게 멀리 잡으신 아버지의 말씀대로 한다 해도 아사달은 벌써 돌아와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로 말하면 석수 일에는 천하에 으뜸가는 어른이었으니, 그 어른의 짐작 밖에 벗어날 공사가 있을 까닭이 없다.

'그러면 병환이 나셨는가.'

그러나 아사녀는 저의 방정맞은 생각을 곧 물리쳤다.

몸은 비록 약해 보일망정 그렇게 무병한 이가, 그렇게 강단이 무서운 이가 그런 큰일을 맡았거늘 병날 리가 없을 것 같다.

암만해도 탑은 다 이룩된 것 같다. 아버지의 둘도 없는 수제자인 그이거든 그 능란한 솜씨에 입때 일이 끝나지 않을 리는 만무할 것 같다.

'그러면 아사달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이 생각은 마치 잘 드는 칼과 같이 그의 염통을 에어 내었다.

사치한 맨드리가 기름독에서 빠져나온 듯하다는 서라벌 서울 여자, 그 비싼 녹둣가루를 비누로 풀어 때를 벗겨 내고 그보담 더 비싼 은가루와 옥가루를 처덕처덕 얼굴에 바른다는 서울 여자, 먹으로 눈썹에 황을 그리고 심지어 입술에까지 주사를 올린다는 서울 여자, 울금향과 사향을 옷고름과 허리띠에 찬다는 서울 여자, 그러니 아무리 박색이라도 달과 같이 꽃과 같이 환하게 어여쁘게 보인다는 서울 여자, 십 리 밖에서도 그 그윽하고도 야릇한 향기가 사내의 마음을 호려 낸다는 서울 여자!

논다니, 활량이가 파리떼 모양으로 우글우글하다는 서라벌, 어수룩한 시골뜨기만 보면 마구잡이로 붙들어 간다는 서라벌.

그 몹쓸 계집들이 그렇게도 잘나신 아사달님을 그냥 둘까. 독사의 무리와 같이 아사달님에게 달려들지 않을까. 온몸을 친친 휘감아서 헤어나지 못하게 하지 않을까.

엿가락 늘어진 뭇 계집의 팔과 다리의 등쌀에서 빼쳐나지를 못하고 버르적거리는 안타까운 아사달의 모양이 눈앞에 얼진거린다.

그렇게 얌전한 그가, 그렇게 단단한 그가, 그렇게 나를 사랑하고 소중히 아는 그가, 백명 천명 계집이 덤빈들 빠질 리가!

스스로 아사달을 위해 변명을 해보았지만 암만해도 마음이 놓이지를 않았었다.

이런 판에 싹불의 그 말을 듣고 보니 흑! 하고 아니 넘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나날이 닥쳐오는 것이란 좋은 일, 기쁜 일은 도무지 없고, 불행한 일 악착한 꼴만 겪고 나니 인제 아사녀는 제 전정의 행운에 대한 믿음성조차 흔들리게 되었다. 이렇게 굽이굽이 알뜰살뜰히 궂은 노릇만 당하게 되니 앞으로도 좋은 운이 행여나 찾아 줄 것 같지도 않았다.

앞날의 찬란한 무지개의 한 모서리가 흐릿하게 비쳐 올 때 싹불의 한마디는 그를 천길 만길 절망의 구렁텅이에 떨어뜨리기에 넉넉하였다.

더구나 귀인 댁 따님에게 장가를 드셨다니 왜 그 좋은 호강을 마다시고 이 부여 두메로 돌아오시랴. 딸 낳고 아들 낳고 무궁한 영화를 누리려든 자식조차 없는 이 가난뱅이 석수장이 딸을 찾아올 것인가.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 금기둥 옥기둥 속에서 으리으리하게 푸근푸근하게 지내실 것을 이 오막살이 샛풀집엘 기어들 것이랴.

"안 오신다, 안 오신다. 오실 리 만무하다."

아사녀는 열이 뜬 머릿속으로 잠꼬대같이 속살거렸다.

"안 오신다, 안 오셔."

그는 곁에서 누가 굳이굳이 아사달이가 온다는 사람이나 있는 것처럼 화를 더럭더럭 내며 중얼거리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죽음의 한 길뿐이었다.

이만큼 목숨을 이어온 것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었다.

"왜 안 죽고 살았던고. 아버지 돌아가실 때 왜 따라 죽지 않고 살았던고!"

그는 긴 수건도 생각해 보았다. 푸른 물결이 넘실거리는 사자수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자결을 결행하기에도 그는 너무 기신이 없었다.

"이렇게 몹시 아프니 앓아 죽을 날도 며칠이 남았을까."

아사녀는 몸을 바수어 내는 듯한 아픔을 억지로 참으며 고대고대 숨이 끊어지기를 기다리었다.

82[편집]

제 목숨이 한시바삐 끊어지기를 바라는 아사녀이거니 팽개의 지어 온 약을 받기는 받을지언정 달여 먹을 리는 없었다.

먹지 않을 약이매 애당초부터 거절을 해버렸으면 그만이겠으되 남은 정성스럽게도 지어다 주는 것을 몰풍스럽게 물리칠 도리도 없거니와 더구나 팽개에게는 그렇지 못할 사정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첫째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느덧 반 년이 겨웠는데 이나마도 살아온 것은 온전히 그이의 덕이 아니냐. 단 한 입이니 그리 많다고는 못 할지라도 나무랑 쌀이랑 반찬거리를 그이 아니면 어느 뉘가 돌보아 줄 것인가.

더구나 만일 그이가 아니었던들 그 감때사나운 제자들을 누가 제어를 할 것인가.

우선 작지의 흉행만 하더라도 그이가 때맞추어 뛰어오지 않았더면 어느 지경에 갔을는지 모른다. 다른 것은 다 그만두더라도 이 일 한 가지만도 그는 아사녀에게는 둘도 없는 은인이 아닐 수 없다. 그나 그뿐인가. 요새 와서는 자기의 집안 일을 다 버리고 오직 스승의 따님이란 까닭으로 수직까지 와서 해주는 그 갸륵한 정성! 아무리 세상이 넓다 한들 이렇듯 고마운 이는 또다시 없으리라.

그가 무슨 일이 있어 잠시 잠깐 다녀 나가는 뒷모습을 보고 아사녀는 마음속으로 '오라버니, 오라버니' 하고 몇 번이나 부르짖은지 모른다.

뼈와 피가 섞인 친동기간이면 이보담 더 자상스럽고 곰살궂으랴.

다른 사람 아닌 그이가 지어다 주는 약인데 안 먹을 때 안 먹더라도 어떻게 거절하랴. 만약 약까지 안 먹는다면 그이는 얼마나 더 슬퍼하고 애를 켤 것인가.

"뭐 화가 뜨시고 몸살 같으니 이 약만 쓰시면 곧 낫는답니다."

팽개는 다섯 첩을 한데 묶은 약꾸러미를 내어놓았다.

"약은 왜 또 지어 오셨어요. 곧 나을 것을……."

아사녀는 펄펄 끓는 몸을 반쯤 일으키려고 애를 쓰며 미안해하였다.

"얼른 곧 달여 잡수셔야 할 텐데……."

하고 팽개는 입맛을 쩍쩍 다시었다. 약 달일 사람이 없는 것을 걱정하는 눈치였다.

"고대 달여 먹어요."

"저렇게 기동도 옳게 못 하시는 이가 어떻게 약을 달이실 수도 없고!"

팽개는 연상 걱정을 하였다.

"아녜요. 이제 한숨만 자고 나면 몸이 풀릴 것 같애요."

아사녀는 제 병이 대단치 않다는 것을 알리려 하였다.

"실없이 중환이신데 주무시고 나신다 한들……."

팽개는 미심따운 듯이 생전 처음으로 아사녀의 얼굴을 바로 보며 머뭇머뭇하였다.

"한 경만 자고 나서 곧 달여 먹을 테에요. 제가 오라버니 말씀을 거슬릴 리야……."

하고 아사녀는 팽개의 근심하는 것이 민망하여서 가까스로 웃어 보이었다.

슬쩍 아사녀의 웃는 얼굴을 쏘아보고 팽개는 다시 얼굴을 외우시며 아주 진국으로,

"그럭저럭 다 저녁때가 되었는데 주무시고 나시면 밤중이 될걸."

"그러면 내일 아침에 달여 먹어도 괜찮지 않아요."

하고 아사녀는 어리광피듯 또 한번 상그레 웃어 보이었다.

"안 됩니다, 안 됩니다. 그래 가지고는 안 됩니다. 약이란 으레 주무시기 전에 잡수셔야 된답니다. 더구나 오늘은 왼종일 잡수신 것도 없고. 첫째 무에든지 잡수셔야 될 텐데."

"왼종일 안 먹기는요, 아침도 먹었는데."

아사녀는 난생 처음으로 거짓말을 한마디하고 말았다. 거짓말을 할지언정 제 은인으로 하여금 다시 저로 말미암아 걱정은 시키기 싫었던 것이다.

"아침 지으시는 기척도 없으시던데."

팽개의 말씨는 어디까지 점잖고 어디까지 공손하였으나 그 말도 어디인지 차차 무관한 가락을 띠어 온다.

아사녀는 조금 헤벌룸해진 옷깃을 여미었다. 여자의 본능으로 경계는 하면서도 말투는 저도 모를 사이에 팽개를 닮아 갔다.

"밥 짓기가 귀찮아서 식은 밥을 데워 먹고 말았지요."

하고 제 거짓말이 차차 늘어가는 것이 무안해서 열오른 얼굴을 더욱 붉히었다.

그 순간 팽개의 눈길은 병아리를 움키려는 독수리의 눈깔처럼 이상하게 번쩍이었으나, 아사녀가 제 무안에 겨워 마주치는 눈을 돌렸기 때문에 그 무서운 눈치를 놓치고 말았다.

만일 아사녀가 그 눈치를 보았던들 지금까지 그에게 올리던 감사가 대번에 스러졌으리라. 붙던 정도 뚝 떨어지고 진저리를 쳤으리라.

"자시기는 무얼 자시어, 허허."

팽개는 한번 엄벙하게 웃고 나서 다시 얼굴빛을 바루고,

"그 큰일인데."

하고 무엇을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벌떡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간다.

83[편집]

팽개가 사랑에 나와 보니 싹불은 책상다리를 하고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고 있다.

팽개는 다짜고짜로 자는 이의 책상다리를 걷어차 버렸다.

"음, 음."

자는 이는 소태나 씹는 듯이 얼굴을 찌푸리고 입맛을 다시면서도 책상다리째 모로 쓰러질 뿐 그대로 잠을 깨지 못한다.

팽개는 베고 있는 목침을 또다시 걷어질렀다. 목침이 튕겨 나가고 머리가 쿵 하며 방바닥에 떨어지자 그제야 자던 이는,

"애쿠 아야야, 이게 웬일이야."

하고 벌떡 일어앉으며 졸아붙는 두 눈을 크게 떠서 두리번거린다.

"이 사람아, 그새 잠이 무슨 잠이람."

하고 도리어 팽개가 뇌까리자 싹불은 더럭 골딱지를 내며,

"이건 사람을 제긴 줄 아나. 왜 툭툭 발길질을 하고……."

하고 그 멀룽멀룽한 눈시울을 걷어올리며 눈알을 부라리다가 팽개의 눈초리가 사나워지는 것을 알아보고는,

"나는 누구라구, 헤헤."

농쳐 웃어 버린다.

"차판이 하판인데 자빠져서 코만 곤단 말인가."

팽개는 치밀어오른 분이 아직 덜 가라앉았는지 매우 우락부락한 어조다.

싹불은 제 상판을 두 손으로 치문지르고 내리문지르고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며,

"어디 밤잠을 자야지. 그러니 어째 곤하지를 않겠나."

그는 격에 맞지 않는 괭이 같은 간드러진 목청을 내며 거슬러진 팽개의 비위를 얼러맞추려 하였다.

"누가 자네더러 밤잠을 자지 말라던가."

"누가 자지 말란 건 아니지만 자연 그렇게 되지를 않았나."

"무슨 일이 자연 그렇게 되었단 말인가."

팽개는 시치미를 뚝 떼었다.

"아사녀를 지키자니 온밤을 집에 가 잘 수 없고, 틈틈이 가는 거라야 마누라가 바가지만 긁고, 낮잠은 자다가 또 자네에게 불호령이나 듣고, 어디 사람 살겠나."

싹불의 이 측은한 하소연에 성이 잔뜩 풍기어 부어올랐던 팽개의 볼은 슬며시 풀어졌다.

싹불은 저 먹여 살려 주는 주인의 낯빛이 풀리는 꼴을 보고 웃으며 너스레를 쳤다.

"그래 내 자는 새에 일은 다되었나. 아사녀가 약을 먹던가."

"약은 먹지 않아도 일은 되어 가는 낌새가 보이데."

팽개는 뻥긋뻥긋 벌어지려는 입 가장자리를 억지로 여민다.

"응 그래,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아무리 철석 같은 아사녀도 별수가 없네그려. 그래 그 낌새란 건 어떻게 보이더란 말인가?"

"이 사람 자네가 왜 그렇게 열고가 나서 야단인가."

"초록은 동색이고 가재는 게 편이거든. 자네 좋은 일에 낸들 안 좋겠나."

"인제 생글생글 웃어까지 보이데……."

싹불은 팽개의 말을 가로채었다.

"뭐 아사녀가 웃어 보여? 그 빼물기만 하던 간나이가 웃어까지 보인다면야 일은 다된 일이게."

"웃기만 한 줄 아나. 옷깃을 싹 여미고 살짝 얼굴까지 붉혀 보였다네."

"응, 얼굴까지 붉히어! 흥, 바로 새색시가 새신랑을 보고 수접을 떠는 격일세그려."

"여보게 말 말게. 나도 오입 십 년에 쓴맛 단맛을 다 본 놈이지만 아사녀가 수줍어하는 근경은 처음 겪어 보았네. 그 아기자기한 재미란 하늘을 주어도 바꾸지 않을 텔세."

"흥, 자네는 인제 죽어도 여한이 없겠네."

"아사달이란 놈이 일 년 템이나 그 재미를 마음놓고 본 것을 생각하니 치가 떨리데, 치가 떨리어."

하고 팽개는 아사달이가 바로 앞에나 있는 듯이 허공을 노려보며 이를 득 갈아붙이었다.

"앗게, 아서. 그 계집만 빼앗으면 고만이지 지난 일까지 이를 갈 거야 무엇 있나."

팽개는 그 건성으로 도는 눈방울을 더욱 굴리며 펄펄 뛴다.

"그놈이, 그놈이, 그 아사달이란 놈이 내게서 아사녀를 빼앗아갔지. 내가 왜 남의 계집을 빼앗는단 말인가. 그 고생을 하고 그 공을 들이고 헌 계집 다된 것을 도로 찾아온들 그렇게 신통할 거야 무에 있단 말인가."

하고 노발대발하며 날뛰는 팽개의 꼴을 부러운 듯이 바라보고 있던 싹불은 후 한숨을 내쉬었다.

"길은 갈 탓이고, 말은 할 탓이라고 자네 말을 듣고 보니 그럴 성도 싶네마는, 아사녀 같은 아름다운 계집을 한평생 데리고 살려는 놈은 너무 욕심이 과한 놈이지. 아사녀가 열 번 시집을 가고 열한 번째 나에게 온대도 나는 하늘에 오른 것보담 더 좋아하겠네."

하며 싹불은 어느 때 흐른지 모르는 제 입 가장자리의 침을 씻었다.

84[편집]

"그런데 여보게 큰일난 일이 한 가지 있네."

하고 싹불을 바라보는 팽개의 얼굴에는 이때까지 싱글벙글하던 웃음살이 걷히었다.

"아사녀의 마음이 아무리 나에게 쏠렸다 한들 죽어 버려서야 만사가 물거품이 될 것 아닌가."

"그야 다 이를 말이겠나."

"나는 아사녀의 이번 병이 어쩐지 심상치를 않은 것 같으이."

"원 나중에는 별소리를 다 듣겠네. 그래 이번 병으로 아사녀가 죽을 것 같단 말인가. 인제 겨우 스물을 넘어설까말까 한 귀밑이 새파란 계집이 한 이틀 앓는다고 죽어, 밥을 죽이지."

"아니 그렇게 말할 것도 아니거든."

"아닌 게 다 뭐란 말인가. 제 사내가 계집을 얻었다는 바람에 깡샘을 하고 생병이 난 것인데 며칠만 꽁꽁 앓으면 툭툭 털고 일어나겠지그려. 죽어, 왜 죽어. 더구나 자네 같은 한다하는 장래 서방님이 등대하고 곕신데."

"아닐세 아니야. 하룻밤 사이에 그 옥 같은 살이 쏘옥 내리고 곁에만 가 앉아도 단내가 혹혹 나니 몸이 얼마나 더우면 그렇겠나."

"아규, 왜 안 그러리. 알뜰한 고운 님이 파리해졌으니 뼈가 저리겠지. 이 쑥아, 어허허."

하고 싹불은 두 손으로 제 허리를 짚으며 간간대소를 한다.

"그렇게 우스개로 돌릴 것만 아니래도 그러네그려. 첫째 엊저녁도 안 먹었지, 오늘도 굶었지, 약을 지어다 주어야 먹지를 않지, 그러니 큰일이란 말이거든."

"젊은 때는 하루 이틀 굶어야 아무 상관이 없는 걸세. 계집이란 독이 나면 며칠씩 예사로 굶는 걸세. 독이 풀리면 누가 권하지 않아도 제 출물에 제 손으로 밥을 지어 가지고 아귀아귀 처먹는 법이라네. 우선 내 마누라만 해도 툭하면 굶기를 밥먹듯 하는걸 뭐."

하고 싹불은 팽개의 걱정이 같잖다는 듯이 천하태평이다.

"어디 세상 사람이 다 자네 부인 같은 줄 아나. 도대체 홀아씨로 앓아 누웠으니 미음이라도 끓여 주고 약이라도 달여 줄 사람이 있어야지."

"아따 아사녀가 어느새 그런 귀골이 됩셨던고. 제 배가 고파 보게, 그 짭짤한 솜씨에 혹닥혹닥 오죽 잘 해먹을라고."

"이런 사람은, 남의 말은 도무지 귀담아듣지 않네그려. 그렇지 않다 해도 왜 자네 말만 세우려 드나. 여보게, 그러지 말고 자네 부인께서 오셔서 며칠만 봐주셨으면 어떻겠나. 미안한 말이지만."

싹불은 말도 말라는 듯이 손을 쩔쩔 내저었다.

"안 되네, 안 되네. 자네 청이니 그랬으면 좋다뿐이겠나마는 그 고집퉁이가 들어먹을 것 같지도 않네. 일전만 해도 한 경을 자고 자네 혼자 기다릴 것이 딱해서 곧 되쳐서 오려니까 이 망나니가 갖은 바가지를 다 긁네그려. 사내자식이 뭐 할 게 없어 남의 홀아씨 사랑에서 수자리를 사느냐 마느냐. 아사녀가 뭐 그렇게 예쁘길래 수박 겉핥기로 실속도 없다면서 왜 미쳐 다니느냐. 그년이 본 여편네고 내가 샛계집이냐…… 별의별 소리를 다 해서 귀가 따가워 죽을 뻔했다네."

하고 싹불은 그때 제 여편네에게 혼뗌을 당한 것을 생각하고 진저리를 친다.

"허 말씨는 모두 한뽄이로군. 우리 왈패도 걸핏하면 내가 왜 샛서방질을 하느냐. 제 사내를 어엿이 못 데리고 있고 밤참 치르듯 하느냐고 잡아먹을 듯이 들어덤빈다네."

"좌우간 어서 귀정이 나야지. 정말 살이 내릴 지경이야. 암만 중언부언을 해도 세상 사람을 놓아 주지를 않기에 나는 하는 수 없이 우리 통속을 그럴듯하게 일러주고 겨우 빠져나왔다네."

"뭐 그러면 우리 속얘기를 부인께 까바쳤단 말인가. 그러다가 말이 나면 어떡하자고, 경망스럽기는……."

"아닐세, 그것 염려 말게. 우리 무대가 입이 무겁기도 철옹성이고 내가 다지기도 여러 번 다져 놓았으니……."

"그 말이 만일 왈패의 귀에 들어가는 날이면 죽기 한사하고 덤벼들 텐데…… 응, 찍찍."

팽개는 싹불의 다짐과 그 여편네가 입이 무겁다는 것을 도무지 못 믿겠다는 듯이 혀를 여러 번 찼다.

"그건 여불없네. 여불없대도 그 사람이 자꾸 뇌네그려."

필경 싹불은 짜증까지 내었다.

"그러나저러나 아사녀의 병구완을 어떻게 한단 말인고. 자네 부인도 올 수 없고, 내 왈패는 더더군다나 말할 나위도 못 되고 다른 아주먼네를 구해 두재도 소문날 게 무섭고…… 어, 실없이 큰일인걸."

팽개는 이맛살을 찌푸리었다.

"설마 내일쯤은 일어나겠지."

싹불은 종시 아사녀의 병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85[편집]

싹불의 지레짐작과는 정반대로 그 밤을 지내고 보니 아사녀의 병은 더욱 더친 듯하였다.

팽개와 싹불이가 들어가도 인사상으로나마 몸을 일으키려는 시늉조차 못 하게 되었다.

그나 그뿐인가. 팽개의 얼굴까지 못 알아보는 것 같았다.

"아주머니, 아주머니, 팽갭니다, 팽갭니다."

하고 아무리 부르짖어도 아사녀는 흡뜬 눈으로 잔뜩 허공을 노리며 새빨간 입술을 달삭달삭 종잡을 수 없는 헛소리를 종알거리었다. 말낱은 분명히 들을 수 없으나마 여러 번 듣고 보매 이따금씩 '아사달'이란 소리만은 그럴싸하게 짐작해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사달을 그리워하는 소리인지 원망해하는 소리인지 분간은 할 수가 없었다.

"이것 큰일났네. 그럼 어떡하나. 자네와 나와 약도 달이고 미음도 끓여 보세나."

팽개는 싹불을 재촉하였다.

"별수 있겠나. 우리가 팔자에 없는 부엌데기 노릇을 하는 수밖에."

약을 달여다 주어도 물론 아사녀는 먹으려 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팽개가 숟가락으로 퍼넣어도 병자는 입을 다물고 삼키려 하지 않았다. 가까스로 서너 숟갈 퍼넣으면 반나마 흘리고 말았다.

미음 역시 입을 쪼무리고는 입술에도 대기를 싫어하였다.

그래도 간간이 정신이 돌아나는 때는 있었다. 이럴 때 팽개가 억지로 권하면,

"싫어요, 싫어요."

앙탈은 하면서도 곧잘 받기는 받았으나 입에 문 채 좀처럼 삼키지 않았다.

만일 팽개의 눈만 조금 딴 데로 쏠리기만 하면 어느 틈엔지 뱉어버리고 만다. 그래도 팽개가 지성으로 꿀떡 소리가 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면 어쩔 수 없이 넘기기는 넘기어도 소태나 먹는 것처럼 그 어여쁜 얼굴을 찡그렸다.

'이 계집애가 죽기를 결단하였구나.'

팽개도 어렴풋이 아사녀의 뜻을 짐작한 듯싶었다.

약 달이고 미음 끓이는 일도 서투른 솜씨라 수월한 노릇이 아니었거니와, 더구나 아사녀의 태도가 수상스러워서 일시 반시를 그 곁을 비워 놓을 수가 없었다.

낮에는 번차례로 번을 들고 밤에는 혼자 지키는 것도 무엇한 탓에 둘이서 꼬박이 밝히었다.

이러구러 사오 일이 지나갔다. 아사녀의 병은 겨우 웃불만은 꺼진 듯하였다. 헛소리하는 도수도 줄어지고 한번 잠이 들면 꽤 오래 자기도 하였다. 약과 미음은 여전히 먹기 싫어하면서도 이따금 냉수는 찾아서 벌떡벌떡 들이켜기도 하였다.

하룻밤은 아사녀의 잠든 틈을 타서 팽개와 싹불이가 봉당에서 약을 달이었다.

"여보게, 오늘 밤엔 집에 잠깐 다녀와야겠네."

하고 싹불은 웃으며 팽개에게 청을 하다시피 하였다.

"너무 여러 날이 되어서 그 무대가 또 무슨 소리를 할지."

"고 동안을 못 참는단 말인가. 집에 안 가보기야 내나 자네나 마찬가지지."

팽개는 제 짝패 놓치기를 꺼리었다.

"그만큼 돌렸으니 인제는 염려 없네. 잠깐만 다녀옴세, 헤헤."

"걱정은 내 왈패가 더 걱정인데……."

하고 팽개도 씩 쓴웃음을 짓는다.

"오늘 밤엔 내가 다녀오고, 내일 밤엔 자네가 다녀오게나. 하룻밤 사이에 무슨 변 나겠나, 헤헤."

싹불은 얼렁하는 웃음 소리를 남긴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힝 나가 버렸다.

"여보게, 여보게."

팽개가 몇 번 불러 보았으나 들은 척도 아니하였다.

"저런 사람 보게."

혼자 게두덜거렸으나 쫓아가서 잡아올 필요까지는 없었다.

팽개는 혼자 약을 다 달여 짜가지고 방으로 들어왔다.

병자의 방이라고 너무 불을 지핀 탓인지 방 안의 공기는 무럭무럭 찌는 듯이 더웠다.

아사녀도 더운 모양이었다.

이불 밖으로 보얀 종아리를 던져내 놓고, 풀어헤친 저고릿자락 틈으로 젖가슴이 아낌없이 내다보인다. 그 박속 같은 가슴 옴패기엔 땀이 방울방울 맺히어 누가 씻어 주기를 기다리는 듯.

손질 않은 검은 머리는 흰 베개 위에 되는 대로 흩어지고 하붓이 열린 입술은 바시시 웃는 듯하다.

팽개는 약그릇 든 손에 맥이 탁 풀리며 하마터면 약을 다 엎지를 뻔하였다.

약그릇을 다시 바로잡기는 잡았으나 팽개는 얼빠진 사람 모양으로 엉거주춤하고 선 채 얼른 앉지를 못하였다.

86[편집]

한참 만에야 팽개는 절이나 할 듯이 나붓이 아사녀의 곁에 앉았다.

약그릇을 조심조심 머리맡에 놓고 두 손길을 무릎 위에 공손히 올려놓은 다음에 돌부처처럼 몸을 꼼짝도 아니하고 숨소리까지 죽이며 어느 때까지 어느 때까지 자는 이의 얼굴과 가슴패기에 박은 눈을 깜짝이지도 않았다. 조금만 바시럭거려도 제 눈앞에 벌어진 이 애 졸이는 근경이 부서지는 것을 두리는 듯. 눈 한 번만 깜짝여도 고새나마 이 자릿자릿한 흐무러진 맛을 못 볼 것을 아끼는 듯…….

팽개의 숨길은 갈수록 거칠어 간다. 속에서 불덩이 같은 무엇이 치밀어 올라와 뚤뚤 말리며 목구멍을 꽉 틀어막아서 숨도 제대로 못 쉬게 한다.

'안 된다. 안 된다. 그러면 정말 십년공부 아미타불이다.'

팽개는 목구멍에 치받친 무엇을 밀어 넣는 듯이 침을 꿀떡꿀떡 삼키었다. 그러자 덜덜 뭉친 그 덩어리가 탁 터지며 온몸이 확확 달았다.

'싹불이도 제 집에 가고 없지 않느냐. 이 방 안에는 너와 아사녀와 오직 단둘뿐이 아니냐. 저번 작지의 경우와 또 달라서 아사녀는 깊은 꿈속에서 헤매고 있지 않느냐. 벽에 귀가 있느냐, 눈이 있느냐.'

아무리 누르고 또 눌러도 그 꿀을 담아 붓는 듯하는 속살거림은 끊이지 않았다.

팽개는 한뼘 두뼘 민그적민그적 자는 이의 옆으로 밀고 들어갔다.

"아주머니!"

필경 팽개는 물에 빠지는 사람 모양으로 허전거리며 불러 보았다.

자는 이의 쌔근쌔근하는 숨길이 그 말에 대답할 뿐.

"아주머니!"

이번에는 아까보담 좀 크게 불러 보았으나 잠 오는 귀에는 들리지도 않는 듯.

"아주머니!"

손까지 잡아 가만히 흔들어 보았건만 그 손에 촉촉히 밴 땀과 호끈호끈하는 온기가 제 손으로 옮겨올 따름이었다.

"아주머니!"

아까 잡은 손을 놓지도 않고 또 한 손으로 그 어깨까지 가볍게 만지었다.

자는 이는 살짝 양미간을 찌푸리며,

"응, 응."

그윽한 소리를 내었다. 팽개는 덴겁을 하고 한 걸음 물러앉으며 재빠르게 지껄이었다.

"아주머니, 어서 잠을 깨십시오. 약을, 약을 자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자는 이는 반듯이 바로 누웠던 몸을 앞으로 갸우뚱하게 모지게 누으며 한 다리를 온통으로 끌어내어 이불 위에 얹고는 몇 번 하하 숨을 내쉬다가 그대로 내처 자버린다. 가벼운 코고는 소리까지 나는 것을 보면 아까보담 더 깊은 잠에 떨어진 것 같았다.

팽개는 아사녀가 잠을 깨이는가 하고 겁을 집어먹었으나, 아사녀는 자면서도 아리알심을 부르는 양 아까보담도 더 보기 좋도록 돌아누워 준 듯하였다.

한번 아사녀의 땀과 온기가 옮은 그의 손은 좀이 쑤시는 것같이 인제 더 참으려야 참을 수가 없었다.

자는 이의 머리도 짚어 보고 어깨도 쓰다듬어 보았다.

아사녀는 잠결에 모른다는 것보담도 차라리 자는 체하고 저 하는 대로 내맡기는 것 같았다.

그럴싸하고 보매 딴은 그 얼굴도 눈만 감았다뿐이지 정말 자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저 입술이 왜 더도 벌어지지 않고 덜도 쪼무러지지도 않고 천연 방글방글 웃는 것 같으랴.

'만일 그렇다면 이 밤 이때야말로 다시 없는 좋은 기회가 아니냐.'

벌써 눈이 뒤집힌 팽개는 제 어림없는 헛생각을 참사실로 믿어 버리려 하였다.

팽개는 아주 대담스럽게 아사녀의 옆에 눕고 말았다.

이때였다. 싹불이가 부랴사랴 제 집으로 뛰어가느라고 그대로 열어 놓은 사립문으로 소리를 죽이는 발자취가 사푼사푼 걸어들어왔다.

팽개는 처음에는 꽤 동안을 떼어놓고 누워서 인제는 저도 자는 체를 하고 눈을 꽉 감은 다음에 슬며시 제 다리를 아사녀의 내놓은 다리 위에 얹어 보았다.

그래도 아사녀의 말신말신한 다리는 지그시 눌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옳지 되었구나.'

하고 팽개는 제가 도리어 잠투세를 하며 굴러 들어가 한 팔을 내어던지듯 아사녀의 가슴 위에 떨어뜨려 보았으나 역시 아무 동정이 없었다.

팽개는 서슴지 않고 자는 이를 껴안으며 그 염소수염을 흔들고 막 자는 이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가려는 순간이었다.

그의 등뒤에서 칼날 같은 소리가 그의 귀를 오려 내었다.

"아니 이게 병구완이오."

그는 허둥지둥 아사녀에게로 굴러 들어가느라고 제 여편네가 살그머니 방문을 열고 들어와 서 있는 것도 몰랐다.

87[편집]

저와 아사녀와 단둘이만 있는 줄 알았던 방 안에서 난데없는 딴 사람의 말소리를 듣고 팽개는 벼락이 뒷덜미를 치는 것처럼 깜짝 놀랐다.

뒤를 힐끈 돌아본 순간 조금 꼬리가 들린 눈썹을 꼿꼿이 세우고 포르쪽쪽한 입술을 바르르 떨며 제 계집, 소위 왈패가 독사처럼 노려보고 서 있는 데는 아 벌린 입을 다물 수도 없었다.

"아니 이게, 병구완이오. 끼고 누워서 입을 마주 비비대는 것이 병구완이오."

왈패의 말소리가 변으로 종용종용한 것이 팽개에게는 더욱 소름이 끼치었다. 이것은 닥쳐올 폭풍우가 얼마나 사나울 것을 알리는 전조다.

"아니 이게, 그 알뜰한 스승의 외동따님을 돌보아 주는 법이오. 이게 멀리 간 친구의 아낙네를 싸고 도는 법이오. 왜 말이 없으시오."

하고 왈패는 발을 한번 구른다. 그 서슬에 팽개는 후닥닥 일어앉았다.

왈패는 한껏 오른 독이 차차 터져나오기 시작한다. 고개를 치흔들고 내리흔들며,

"왜 말을 못 해, 왜 대답을 못 해. 다른 제자들은 다 아사녀에게 마음을 두어서 믿지 못한다고 그랬지, 짐승만도 못한 놈들이라고 그랬지. 그래 그놈들 하는 것은 개 돼지만도 못하고 너 하는 짓은 이게 성인군자의 할 짓이냐. 왜 말을 못 하느냐. 그 꿀을 담아 붓는 듯이 나를 얼렁뚱땅하던 말솜씨는 다 어디 갔느냐. 왜 말을 못 해. 아사녀 입을 맞추다가 입이 붙어 버렸느냐. 이 능글능글한 도적놈아."

왈패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가 숨을 돌리느라고 잠깐 말을 끊었다.

그 틈을 타서 팽개는 쑥스럽게 웃어 보이며,

"여보 마누라, 인제 고만두오, 고만두어."

슬쩍 어리눙쳐 보았다. 이 웃음과 말은 불길에 기름을 부은 것이나 진배없었다.

"이놈이 웃는다. 허, 이것 봐라, 누구를 또 속이려고 웃어. 이 사람을 날로 잡아먹을 놈아. 내가 또 속을 줄 아느냐. 내가 쓸개빠진 년이지, 매친 년이지. 수상히 여기기는 여겼지만 그래도 남편이라고 믿었구나. 딴 년을 품고 온밤을 고스란히 희희낙락하는 줄을 모르고 이건 샛사내나 보듯이 꾸벅꾸벅 오기를 기다렸구나. 아이 분해. 아이 분해애."

왈패는 악을 악을 쓰며 저고리를 풀어헤치고 제 손으로 제 가슴을 북 치듯 마구 뚜들긴다.

조금 아까 잠이 깬 아사녀는 웬 까닭인지 몰라 어리둥절하게 이 광경을 바라보다가 이때에야 질겁을 하고 일어났다.

팽개는 아사녀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쩔쩔매며 제 여편네를 향하여,

"이게 무슨 상없는 짓이란 말이오. 글쎄 고만두래도 왜 이 야단이오. 그건 마누라가 백주에 하는 소리지."

왈패는 더욱 펄쩍 뛴다.

"내 가슴 내 치는 게 상없는 짓이냐. 뭐 두호를 한답시고 병구완을 한답시고 잠든 친구 여편네를 끼고 자빠져서 마구 입을……."

팽개는 힐끈힐끈 아사녀의 눈치를 엿보아 가며, 제 계집의 입을 막으려고 애가 말랐다.

"무슨 종작없는 소리를."

"종작없는 소리? 흥, 오 저년이 듣는다고, 저 육시를 할 아사녀란 년이 듣는다고, 염려 마라, 염려 말어. 네까짓 놈이야 곱다랗게 아사녀 저년한테 물려줄 테다. 너같이 표리부동하고 능갈친 놈은 헌신짝 팔매치듯 저 따위 년한테나 갖다 앵길 테다. 산전수전 다 겪은 나다. 엄숭이 밤숭이 다 헤쳐 본 나다. 세상에 서방이 씨가 말랐느냐. 너 같은 놈을 데리고 살게. 어이 더러라, 어이 더러라, 튀 튀."

하고 왈패는 팽개의 상판에 침을 뱉었다.

팽개는 소맷자락으로 제 얼굴의 침을 씻고 제 계집의 목을 잡아끌며,

"이게 무슨 짓이오. 자, 나갑시다, 나가요."

왈패는 잡힌 손을 뿌리치며,

"가기야 간다. 안 가고 왼밤 새울 줄 아느냐. 나도 노는 가락을 아는 년이다. 내어줄 거야 선선히 내어주다뿐이냐. 그렇지만 이년 아사녀 들어 봐라. 네년도 팔자가 사나워서 홀아범도 잡아먹고 소위 사내란 걸 천리 밖에 보내었지만 어디 사내가 없어서 제 애비 제자만 돌라 가며 행투를 낸단 말이냐."

팽개는 힘을 우쩍 써서, 제 계집을 떠다박질렀다.

"저리 나가, 저리로 나가래도."

하고 처음으로 소리를 버럭 질렀다.

"내가 팽개놈을 네년한테 뺏겨서 분해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 싹불이 계집에게 다 들어 알았다. 세상에 속 모를 놈은 이놈이니라. 이놈의 손아귀에 들었다가는 네년의 신세도 볼일은 다 보았다. 싹불이하고 두 놈이 짜고 무슨 꿍꿍이속을 하는지 네년은 모를 게다."

팽개는 제 계집의 목고개를 바싹 틀어안아 제 가슴으로 그 입을 틀어막으며 간신히 끌고 나갔다.

88[편집]

"안 끌어도 간다. 놓아라, 놓아."

사립문 밖으로 나가면서도 악을 바락바락 쓰는 팽개의 여편네의 소리가 아직도 얼떨떨한 아사녀의 귓결을 울리었다.

아사녀는 저도 모르게 한동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행길에 나간 뒤에도 왈패의 쇠된 목청이 쨍쨍하게 들려 오고 웅얼웅얼 무에라고 달래는 팽개의 소리도 섞이어 나더니 이윽고 감감하게 아무 기척도 없어졌다.

그렇게 호된 싸움도 부부끼리 다툼은 칼로 물 베기라, 흐지부지 풀리고 말았는지 또는 그들의 발자취가 아무리 떠들어도 들리지 않을 만큼 멀어졌는지 모른다.

들레던 뒤끝에 휘젓한 적막은 다시 돌아왔다.

아사녀는 어지러운 머리를 도사리며 오늘 밤에 일어난 일을 되새겨 보았다.

팽개가 제 자는 동안에 저에게 무슨 볼품 사나운 짓거리를 한 것 같고 그것을 그 아낙네에게 꼭 들킨 것만은 대강 짐작을 할 수가 있었다.

팽개가 작지 모양으로 그런 해참한 시늉을 하였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으나 아무튼 망신은 더할 나위 없는 망신이었다.

새록새록이 닥치는 무참한 변이었다.

"나는 앓아 죽을 팔자도 못 되는구나."

한탄하자 누가 뺨을 치는 듯이 눈물이 쏟아졌다.

그러나 울고도 있을 때가 아닌 것을 언뜻 깨달았다. 한 시각이 바쁘다, 한 순간이 바쁘다.

그는 부랴부랴 새옷을 갈아입고 허전허전하는 걸음거리로 방문을 열고 나왔다.

가까스로 마당에 내려와 사립문을 나서려 하매, 제가 나고 자라고 시집가고 한 정든 이 집이 다시 돌아다보여지고 또 돌아다보이었다.

삽사리가 제 주인이 나가는 걸 보고 어디선지 오르르 내달았다. 아사녀는 삽사리를 보매 또 눈물이 앞을 가리었다. 펄쩍 주저앉아서 몇 번 삽사리의 대강이를 어루만져 주고는,

"삽사리야, 잘 있거라. 따라오지 마라."

이 세상을 마지막 떠나는데 작별인사를 할 데는 오직 삽사리 한 마리뿐이었다. 삽사리는 꼬리를 설레설레 흔들고 제 주인의 하는 것이 수상하다는 듯이 킹킹 하고 치맛자락 냄새를 맡으며 발길에 휘감기어 좀처럼 떼칠 수가 없었다.

"삽사리야 들어가거라, 들어가."

하고 때리는 시늉을 해보이니 삽사리는 주춤 걸음을 멈추고 멍하게 제 주인의 눈치를 살피다가 아사녀가 돌아서 가면 슬근슬근 뒤를 밟아 온다.

"들어가, 들어가."

아사녀는 또 돌쳐서며 개를 쫓는 소리는 목이 메이었다. 제가 이 세상에서 받아 보는 참된 정은 오직 저 개뿐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삽사리는 얼마쯤 따라오다가 텅 빈 집 안이 궁금한지 다시 돌아서 쏜살같이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사녀의 발길은 사자수의 강둑에 다다랐다.

스무날 가까운 다 이지러진 달은 넘실거리는 푸른 물결에 빛깔 없는 흰 얼굴을 둥둥 띄웠다.

사방엔 개미 그림자도 없고 쏴 하고 이는 강바람에 귀에 익은 물소리만 출렁출렁할 뿐.

아사녀가 막 굽이치는 물결을 향해 몸을 번드쳐 떨어지려는 순간, 문득 그의 입에서는,

"아사달님!"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그의 아물아물한 눈앞에는 아사달의 모양이 번개같이 번쩍 하였던 것이다.

아사녀는 앞으로 쏠리려는 몸을 주춤하고 바로잡았다.

아사달! 아사달! 아사달의 얼굴을 다시 한번 못 보고는 죽으려야 죽을 수 없다. 딴 계집을 얻었거나 말았거나 자식을 낳았거나 말았거나 그이는 둘도 없는 내 남편 내 임자가 아니냐. 그에게 알리지 않고 그의 말을 들어 보지 않고는 끊으려도 끊을 수 없는 이 목숨이 아니냐.

다시 생각하면 그이가 첩을 얻었다는 것도 종작없는 소리인지 모르리라. 싹불이가 헛들은지 모르리라. 계집을 얻었든지 자식을 낳았든지 내 눈으로 보아야 한다.

아까 들은 왈패의 소리가 띄엄띄엄 잉잉 귓가에서 운다.

"이 표리부동한 놈, 이 능글능글한 놈…… 병구완을 한답시고 잠든 친구 여편네를 끼고 자빠져서 마구 입을…… 싹불이하고 두 놈이 짜고 무슨 꿍꿍이속을 하는지 네년은 모를 게다……."

아사녀는 반짝반짝 새 정신이 나는 듯하였다. 새 눈이 뜨이는 듯하였다. 그러면 오늘날까지 팽개의 지나친 친절과 공손이 도무지 불측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던가.

'서라벌, 서라벌!'

아사녀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서라벌로 가자! 서라벌로 가자. 서라벌이 아무리 멀다 해도 보름 가고 한 달 가면 못 갈 리가 있느냐. 죽기를 결단한 목숨이거니 무슨 고생을 하더라도 설마 죽기밖에 더하랴.

아사녀는 입때까지 서라벌 갈 생각을 염두에도 못 낸 것이 기가 막히었다. 진작 이런 생각을 하였던들 그 곤욕을 당하지도 않을 것을.

집에 들러 행장이라도 꾸려 볼까 하였으나 지니고 갈 만한 것도 없거니와 집에 들렀다가 혹시 팽개한테나 들키면 말썽만 스러울 듯하여 빌어먹으며 갈지라도 나선 김에 길을 떠나기로 하였다.

89[편집]

빨갱이는 저녁 공양을 먹고 나서 여러 중들과 한동안 잡담을 하다가 땅거미가 어슬어슬 든 뒤에야 제 처소로 돌아왔다.

처소라고 해야 조그마한 방 한 간이 후미진 산기슭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었다.

그는 제 방에 돌아오면 늘 하는 버릇으로 성가신 듯이 칡베 장삼을 벗어던져 버리고 홀가분하게 몸단속을 차린 다음에 벽에 걸어 둔 긴 환도를 떼어 들고 나섰다.

총총하게 늘어선 나무틈을 비집고 발이 푹푹 잠기는 우거진 풀을 헤치고 한동안 올라가면 산허리 채 못 미쳐서 펀펀한 터전이 나타난다.

호랑할미꽃과 떡갈나무가 겅성드뭇한 사이에 여기저기 주춧돌이 나동그라진 것을 보아 아마 옛날 암자가 들어앉았던 자리인 듯.

빨갱이는 산이 쩡 하고 울리도록 큰기침을 한번 하고 나서 칼을 쓱 뽑아 든다.

어둠침침한 가운데 칼날은 마치 한 가닥 얼음과 같이 번득인다.

엄지와 식지로 서슴지 않고 칼날을 잡아 쭉 훑어 보아 날과 이가 빠지거나 상하지 않은 것을 가늠하고 만족한 듯이 머리 위에 빗겨 든다.

그의 석후의 기운부림, 곧 검술공부가 시작된 것이다.

빨갱이의 본명은 용돌(龍乭)로 무슨 까닭이 있어 입산을 하였을망정 언제든지 화랑시대가 그리웠다.

비호같이 말을 달리며 산으로 들로 사냥을 다닐 때 귓결에 울며 지나치던 바람은 얼마나 시원하였던가. 활쏘기 칼겨룸에 목숨을 내던지는 싸움은 얼마나 호장하였던가. 주사청루를 휩쓸고 뛰고 굴리던 맛은 얼마나 통쾌하였던가.

나는 소리도 무대 같은 목탁을 두들기는 것도 신풍영스럽고 손끝에 몬틀몬틀한 염주를 헤이기는 더구나 고리타분하였다. 옷까지 몸에 척 어울리지를 않고 따로 돌아, 장삼 소매는 아무리 휘저어 보아도 거추장스럽기만 하였다.

하루에도 몇 번을 중생활을 그만두고 산을 뛰어나갈까 하였지마는 그래도 제가 맡은 소임이 무거움을 생각하고 꿀꺽꿀꺽 참노라니 심사가 절로 나서 불가에서 대기하는 소위 진심이 불길처럼 일어났다.

그러나 한해 두해 지나는 사이에 기가 꺾이고 또 꺾이고 결이 삭고 또 삭아서 요새 와서는 그리 못 견딜 지경은 아니로되 그래도 이따금 치받치는 울화를 걷잡을 길이 없었다.

심심하고 쾌쾌하고 울적한 빨갱이 곧 용돌의 일상생활에 오직 한개의 낙은 이 검술공부였다. 입산 수도하는 사람이 칼이란 천부당만부당한 것이로되 자기 집 대대로 내려오는 보검이요, 또 그가 애지중지 차마 놓지 못하는 칼이기 때문에 기어코 지니고 온 것이었다.

칼만 들고 나서면 모든 시름과 울화가 가뭇없이 스러지고 몸은 훨훨 나는 듯이 가뜬하다.

처음에는 사지를 풀 겸, 그는 관창(官昌)이 검무를 추어 고구려 왕을 죽이던 본을 떠서 칼춤부터 추기 시작한다.

한바탕 늘어지게 춤을 추고 나면 온몸에 땀은 비 오듯 하고 팔과 다리가 허뭇하게 풀어진다.

그 다음에는 칼겨룸을 시작하고 적진을 지쳐 들어가는 시늉, 적장의 머리를 가슴을 뜻대로 마음대로 이리 찌르고 저리 찌르고 마지막엔 한창 신이 오르면 칼을 휘두르는 손길은 번개와 같고 그의 온몸은 송두리째 칼빛에 휩싸이어 마치 한 덩어리 푸른 무지개가 바람에 휘날리는 것과도 같았다.

뒤로 물러섰다, 앞으로 내달았다, 저 멀리 외로이 선 늙은 소나무를 바라보고 풍우같이 몰아가기도 하였다.

오늘 밤에도 한창 신이 나서 칼을 잽싸게 휘두르며 애꿎은 그 늙은 소나무를 향하여 줄달음을 쳐 들어갔다.

문득 그 소나무 뒤로부터 검은 그림자가 얼진하는 듯하더니 난데없는 칼이 쨍그렁 하고 제 칼에 와서 마주친다.

용돌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기는 섰으니 검술공부한 보람이 있어 그래도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다.

"누구냐?"

소리를 가다듬어 물으면서도 이 뜻밖의 적수를 만난 것을 도리어 심심파적으로 기뻐하였다.

"……"

저편은 아무 대꾸도 없이 칼을 겨루며 한 걸음 들어선다.

"그래 나와 겨뤄 볼 테냐. 흥, 잘 만났다."

용돌은 코웃음을 치고 자신 있게 칼 끝을 그 검은 그림자의 가슴 언저리를 겨누고 날려 보았다.

저 칼과 이 칼이 한데 부딪치며 불이 번쩍 흩어지는데 저편의 칼이 너무 세차서 맞닿은 용돌의 칼이 퉁겨나며 칼자루 잡은 손목이 휘청 하고 제쳐지는 듯하였다.

그럴 사이에 저편의 칼은 수없이 용돌의 목과 가슴을 지나가건만 이상스럽게도 찌르지는 아니하였다.

90[편집]

용돌은 저편의 검기에 눌리어 한 걸음 두 걸음 뒤로 물러서면서도,

"건방지게 누구를 놀리느냐."

하며 이를 갈았다. 저편에서 몇 번이나 자기를 찌를 기틀을 일부러 놓치는 것이 그에게 못마땅하고 아니꼬웠다. 그것은 검객으로 찔려 죽을 때 찔려 죽는 것보담 더 분한 노릇이었다.

"어디 견디어 봐라."

용돌은 용을 버럭 쓰며 있는 재주를 다 부려 보았건만 철옹성같이 막아 내는 저편의 칼 틈을 버르집을 수가 없었다.

용돌은 차차 기운이 지쳐지며 칼 쓰는 법이 어지러워졌다. 그러나 저편에서도 적이 힘이 빠진 듯 바늘 한 개 꽂을 만한 빈틈도 없던 저편의 방비도 점점 허술해지고 목과 가슴을 송두리째 내어주기도 하였다.

"그러면 그렇지!"

용돌은 아까보담 백배의 용기를 가다듬어 쩍말없이 찌를 데를 찔렀건만 저편에서 용하게도 그러나 가까스로 받아 내는 듯하였다.

이편의 신이야 넋이야 하는 공격이 한동안 불꽃을 날리었으나 마침내 아무런 보람도 없었다.

"내 검술을 떠보려고 일부러 허수하게 제 몸을 내어맡기는구나."

언뜻 용돌이가 이렇게 깨달을 겨를도 없이 별안간 온몸의 기운이 빠져 달아남을 느끼었다.

이편의 칼 든 손이 허전거리기 시작하자 저편에서는 서서히 수세(守勢)에서 공세(攻勢)로 옮기어 갔다.

용돌은 가쁜 숨을 미처 돌려 쉬지도 못하고 방비에 쩔쩔매었다.

저편의 칼바람이 선득선득하게 몇 번을 이편의 목덜미와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그럴 적마다 용돌의 등에는 찬 소름이 솟았으되 그래도 신기하게 막아 낼 수는 있었다.

저편의 검기는 갈수록 억세고 여무지고 재빨라졌다.

"이거 큰일났구나. 이거 막아 낼 수가 없구나."

용돌의 칼은 허공만 치며, 더욱 허둥지둥하는데 저편의 칼은 더욱 신이 오른 듯하였다. 가슴을 막으려면 머리에 번득이고 머리를 피하면 목을 겨누어 어느 것을 어떻게 방비를 해야 옳을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게 되었다. 아물아물한 용돌의 눈에는 수없는 칼날이 서릿발을 날리며 이편의 얼굴, 목, 가슴, 배 할 것 없이 거의 한꺼번에 지쳐 들어왔다. 제 몸뚱어리의 요긴한 자리란 자리는 일시에 저편의 칼이 곤두선 듯하였다.

용돌은 제 목숨이 위기일발에 걸린 줄도 잊어버리고 하도 어이가 없어 제 칼은 놀려 보지도 못하였다.

문득 저편에서 칼을 거두었다.

"용돌이 검술이 무던히 늘었네그려. 허허."

우렁차고 걸걸한 음성이 웃는다.

용돌은 귀에 익은 그 음성을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그는 그 자리에 칼을 던지고 엎드리었다.

"어규, 서방님 언제 오셨습니까."

"일어나게, 일어나. 거친 풀에 찔리리."

"그러기에 아무리 어둠 속이라도 칼 쓰시는 게 범상치를 않아 기연가미연가 의심은 했습니다만."

하고 용돌은 몸을 툭툭 털고 일어섰다.

"자네의 검술도 늘기는 많이 늘었네마는 아직도 마음을 가라앉히는 법이 조금 미흡한 듯하네. 벌써 도를 닦은 지 삼 년이 지났거든 하마하면 그 거치른 마음 자리도 잡혔을 것 같은데."

"뵈올 낯이 없습니다만 산중에 이렇게 있으니 도리어 울화만 나고 마음이 더 거칠어지는 듯합니다."

"산중이고 성중이고 마음이란 가질 탓, 어둠 속에서 난데없는 칼이 나와도 놀라지 않는 걸 보면 그만큼 마음 공부가 착실해진 표적이 아닌가."

"뭘요, 검객이란 어느 때라도 방심을 하지 말라 하였거든 비록 심심풀일망정 칼 가지고 검술공부를 하러 나온 사람이 칼을 보고 그렇게 놀라기야 하겠습니까."

용돌은 저편이 추는 바람에 한번 뽐내 보고,

"그런데 서방님께서는 언제 행차를 하셨습니까. 댁에서 바로 이리 오셨을 리는 없고 무슨 특별한 볼일이나……."

"뭐 이렇다할 만한 볼일도 없지만 시골구석에만 노 처박혀 있자니 답답도 하고 여러 친구도 찾아볼 겸 올라왔네. 자네 형편을 들어 보아 중생활이 좋다면 얼마쯤 같이 있어서 마음공부나 해볼까……."

"말씀도 마십시오. 주리난장을 맞아도 소위 중생활처럼 좀이 쑤시고 쓸쓸하지는 않겠지요."

"그게 마음공부란 것 아닌가."

"마음공부고 뭐고 서방님은 아예 그런 생각을랑 염두에도 내지 마시오. 그러면 서울 오신 일이 단지 그 일 한 가지뿐이신지."

"자네 만나 볼 일이 첫째지만 또 한 가지 신신치 않은 성가신 일이 있어서……."

"신신치 않은 성가신 일? 그건 무슨 일이게요."

"뭐 얘기할 거리도 못 되는 일."

하고 그 검은 그림자는 빙그레 웃었다.

이 아닌밤중에 용돌을 찾아온 손님이야말로 금량상의 아우 경신으로 주만의 아버지가 세상에 으뜸가는 사윗감으로 골라 놓은 인물이었다.

91[편집]

용돌과 경신은 나이로 말하면 용돌이가 위지만 문벌로 보든지 재주로 보든지 더구나 낭도(郎徒)의 지위로 보든지 경신이가 훨씬 높기 때문에 용돌은 경신을 서방님이라고 깍듯이 위하고 경신은 용돌에게 하게를 하였지만 두 사람이 다 같이 국선도를 숭상하는 동지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누추하나마 제 처소로 들어가 보실까."

용돌은 던진 칼을 다시 주워 들고 그대로 제 바지에 쓱쓱 문질러 칼집에 꽂고는 경신을 쳐다보았다.

"여길 왔다가 자네 처소에 아니 들르고 어디를 간단 말인가."

경신은 친구끼리의 무관한 투를 말씨에도 나타내며 용돌의 뒤를 따라섰다.

"다녀가신 지가 벌써 이태가 되셨는데 그래도 용하시게 제 있는 데를 찾아오셨군요."

"자네 방에 들러 보아 없으면 으레 그 자리로 검술공부하러 간 줄 알지. 설마 젊은 기억에 이태 전 일을 그새 잊으려구."

"그 캄캄한 생소한 산길을 찾아내신 것은 정말 어려우신 노릇인데."

"뭘 자네가 시근벌떡거리고 칼 휘두르는 소리가 산 발치에서도 들리던걸 뭐, 허허."

"그렇게 멀리 들렸을까. 원 서방님은 귀도 밝으시군. 그래 한번 겨뤄 보실 생각이 나셨군요."

"나도 칼 써본 지가 하도 오래고, 또 자네 검술이 얼마나 늘었나 꼬나보았지."

움펑진펑한 산비탈을 그들은 평지를 걷는 것보담 더 수월하게 내려오며 주거니 받거니 수작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칠 줄을 몰랐다.

"그런데 아까 말씀한 신신치 않은 성가진 일이란 무슨 볼일입니까."

용돌은 예사로 던진 경신의 말이 다시금 궁금한 듯이 잼쳐 물었다.

"뭘 자네는 아랑곳할 일도 못 되는 걸세, 허허."

경신은 쾌활하게 웃어 버리고 종시 그 성가시다는 볼일을 바로 가르쳐 주려고 하지 않았다.

"저한테 감추실 일이 무엇일까요. 갈수록 궁금하군요."

"원 그 사람은 다심도 하이. 자차분한 중살이를 하더니만 사람까지 잘게 되는 모양일세그려."

"어느 건 흉기스럽긴 중이라고 산중생활이 하도 심심하니까 자연 갖은 꿍꿍이속을 다 꾸며 내고 제한테 상관없는 일에도 괜히 마음이 키어요."

"허, 자네도 인제 찰중이 되어 가는 모양일세그려."

얘기는 어느결엔지 딴 데로 쏠리고 만다.

"왜 검술을 쓸 때처럼 슬쩍슬쩍 몸을 피하시오. 성가시다는 게 암만해도 무슨 좋은 일 같은데."

"허, 그 사람은 기어코 메주알고주알 캐려만 드네그려. 아따 왜 저 유종 이손이 계시지 않나."

"녜, 이손 유종 알고말고. 지금 조정에 남은 오직 한 분의 우리와 같은 뜻을 가지신 어른 말씀이지요."

"자네도 아네그려. 그 어른이 좀 만나자고 해서……."

"그러면 무슨 중난한 일거리가 생겼나요."

어두운 가운데도 용돌은 눈을 크게 떠서 경신을 바라보았다. 조정에 서 있는 단 한 사람인 국선도의 우두머리와 청년 낭도를 대표하는 인물이 서로 만나자고 할 적에는 심상치 않은 일이 분명하다. 바라고 기다리던 풍운은 인제야 일어나려는가. 거추장스러운 장삼을 영영 벗어던질 날도 얼마 남지가 않았구나. 용돌은 제 지레짐작에 어깨가 저절로 으쓱해짐을 느끼었다.

그러나 경신의 대답은 의외였다.

"아니야, 그렇게 큰일은 아니야. 신신치도 않은 가간사야. 형님께서 어서 올라가서 뵈라고 성화같이 독촉을 하셔서!"

"조그마한 가간사?"

용돌이가 의아해하며 뇌자 경신은 단도직입적으로 내던지듯,

"그이에게 딸이 있대!"

"오, 옳지 그러면 혼담이 있어서 올라오셨군, 어허허."

용돌은 거침없이 너털웃음을 내놓았다.

"어떡하나. 형님이 자꾸 가보라시니, 허허."

경신도 따라 웃으며 스스로 저를 변명하듯,

"그야 꼭 그 일 때문만이야 아니지. 오래간만에 서울 형편도 좀 살펴보고 여러 친구들도 만나 보고……."

"그러면 선을 보러 오셨소, 선을 보이러 오셨소."

"보기도 할 겸 보이기도 할 겸. 그야말로 겸사겸살세, 허허."

"아무튼 태평성대군요. 천하영웅이 색시 선이나 보러 다니니, 으흐흐."

용돌은 아무에게라도 빈정빈정하는 제 입버릇을 버리지 못하였다.

그들의 발길은 어느덧 용돌의 처소에 다다랐다.

용돌은 먼저 제 방으로 성큼 들어와서 벗어던진 장삼과 가사를 주섬주섬 주워서 똘똘 말아 한옆으로 치우고 소리를 쳤다.

"자 서방님, 어서 들어오십시오. 제 사는 꼴은 이 모양이랍니다."

92[편집]

주객은 좌정을 한 다음에 경신은 다짜고짜로 물었다.

"그래 이곳 중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그 녀석들이 생각이 무슨 생각이오. 삼시로 밥이나 때려누이고 몇 번 염주나 세고 나면 낮잠이나 자빠져 자고……."

용돌은 평일에 품었던 불평과 불만을 쏟아 놓을 자리를 만났다는 듯이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그 중에도 돈냥이나 있는 놈들은 아랫마을로 살살 다니면서 계집질이나 하고 몰래 술들이나 퍼먹고……."

"그야 많은 중 가운데 그런 자도 더러 있겠지. 자네는 남의 결점과 단처만 보는 버릇이 있느니……."

"더러가 다 뭐요. 그놈이 다 그놈이지. 출가란 빈말뿐이요 어떻게 무섭게 돈을 아는지 던적맞기 짝이 없다오. 어디 재 한번 불공 한번 더 얻어걸리겠다고 이건 대가나 부잣집 아낙네만 얼진하면 치마꼬리에 매어달리듯 졸졸 쫓아다니고 그 비위를 맞추기에 곱이 끼었으니 그것들을 데리고 무슨 일을 할 수가 있겠단 말씀이오."

"생기는 것 좋아하는 거야 인정이니까 그것만 가지고 험담할 거야 있는가."

하고 경신은 휘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때는 좋은 때건마는."

혼자말같이 중얼거리었다.

"무슨 때가 그렇게 좋다는 말씀이오."

"여보게 생각을 해보게. 당명황이 안록산에게 쫓기어 멀리 촉나라 두메로 달아났으니 이때를 타서 대군을 거느리고 지쳐 들어갔으면 중원을 다 차지는 못할망정 고구려의 옛 땅이야 다시 찾아오지 못하겠나."

용돌은 무릎을 탁 쳤다.

"옳습니다, 옳습니다. 과연 서방님 말씀이 옳습니다. 조정에서야 어떡하던 우리의 힘으로나마 군사를 일으켜 보시는 게 어떠하실까요. 온 천하에 흩어진 낭도를 긁어모으면 그래도 몇만 명은 될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안 되네, 안 되어. 나도 게까지 생각은 해보았네마는 암만해도 될 성싶지를 않네. 첫째로 그만한 큰일을 하자면 신라 온 나라의 힘을 기울여야 성사가 되겠거든. 소위 당학파들이 잔뜩 조정을 움켜쥐고 있으니 까딱 잘못하면 역적의 누명이나 쓰고 말 거란 말이지. 촉나라까지 쫓겨난 당명황에게 꾸벅꾸벅 문안사신까지 보내는 판이니 그자들에게 정당론(征唐論)을 끄집어내어 보게. 천길 만길 뛸 것 아닌가. 기가 막힐 노릇이지."

"그러면 이번 기회에 중원은 못 들어치더라도 그 원수엣놈의 당학파들이나 모조리 해내 버렸으면 어떨까요. 설마 당나라에서 구원병이야 못 보낼 것 아닙니까."

"자네 말도 그럴싸하네마는 그러면 골육상쟁으로 형제끼리 피를 흘리게 될 것 아닌가. 그러니 그것도 못 하겠고 더구나……."

하고 경신은 이윽히 무엇을 생각하였다.

용돌은 경신의 말이 나오기를 기다리다 못하여,

"더구나 또 무슨 상치되는 일이 있단 말씀입니까."

"더구나 안 될 일은 전국에 흩어져 있는 명색 낭도가 우두머리가 없고 소위 무장지졸로 뿔뿔이 헤어져 있는 것일세. 개중에도 일치 단합이 못 되고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으니 큰일이야 큰일. 위로 임금님께서는 연만하시어 어느 날 어떻게 되실지 모르는 형편이고 태자가 어리고 약하시니 신기(神器)를 엿보는 자가 있는지도 모르겠단 말이어."

"서방님 말씀이 옳습니다. 나같이 미련한 생각에도 오래지 않아 나라에 무슨 변이 날 듯 날 듯싶으단 말씀이오. 그러니 만일 난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막아 내실 작정이신지!"

"그거야 미리 어떻게 정해 놓을 수야 있나. 그때 당해 보아 어떡하든지. 있는 힘과 정성과 재주를 다할 뿐이지."

"그래도 미리미리 준비를 해두셔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러기에 말일세. 자네도 미리 준비를 해야 된단 말일세. 취모멱자로 중들의 해자만 뜯지 말고 슬근슬근 승군(僧軍)도 만들어 놓아야 될 것 아닌가."

"몇은 안 되지만 젊은 중들을 더러는 모아 봅니다마는 아까 말씀과 같이 뜻대로 안 되고 화증만 더럭더럭 나서……."

"일한다는 사람이 화증을 내어 쓴단 말인가. 첫째 기단해서는 못쓰는 거란 말일세."

오래간만에 만난 두 동지의 담화는 어느 때까지 어느 때까지 그칠 줄을 몰랐다.


93[편집]

경신은 피로한 듯이 팔을 베고 누워서 한동안 무슨 생각에 잦아졌다가 다시 말허두를 돌리었다.

"그래 이 몇 해 동안에 이 절에서 생긴 가장 큰 일이 무슨 일인가."

"가장 큰 일?"

용돌은 눈을 멀뚱멀뚱하며 얼른 생각이 나지가 않는 모양이었다.

"뭐 이렇다할 만한 큰 일이 없는 듯한데……."

"중들끼리 옥신각신이 생긴다든지 하다못해 불전을 새로 이룩한다든지……."

"가끔 저희들끼리 찢고 뜯고 하다가 우리네 같으면 막상 목이 오고 갈 무렵쯤 되어 흐지부지해 버리기가 일쑤니 큰 싸움이 날래야 날 수가 없고……."

"그러면 소위 당학파들이 한퇴지(韓退之)의 본을 떠서 불도를 비방한다고 울근불근한 일도 없단 말인가. 다른 절에서는 꽤 말썽이 되는 모양이던데 이 불국사도 이를테면 몇째 안 가는 대찰이 아닌가."

"그런 문제를 이렁성거릴 만한 학식을 가진 이는 오직 주지스님 아상노장 한 분뿐이신데 워낙 연만하시어 그런 문제를 들고 일어날 만한 근력도 없는 듯하고 그 외에는 다들 무식도 하거니와 제 실사퀴 장만하는 데만 눈이 빨개져서 야단이니……."

"흥, 서울 근처 중들이 더 타락이 되다니 참 한심한 노릇일세그려."

"한심하다뿐입니까. 그것 뭐 사람의 씨알머리라고도 할 수 없지요."

용돌은 경신이가 제 말을 찬성하는 데 신이 나서 또다시 승려 공격의 화살을 쏘았다.

"그건 너무 과도한 말일세. 유독 승려들만 나무랄 수야 있는가. 깊은 산으로 들어가면 정말 수도하는 고승 대덕이 많겠지만 여기쯤은 너무 서울이 가까우니 중노릇을 무슨 돈벌잇속으로 아는 모양일세그려."

하고 경신은 말을 뚝 끊어 버린다.

칠월도 어느결에 그믐이 가까워 조석으로 생량하는 서늘한 바람이 벌써 우수수하게 창에 부딪힌다.

바람결을 따라 찡찡 하고 돌 쪼는 소리가 그윽이 들려 온다.

경신은 귀를 소스라치며,

"이 밤중에 저게 무슨 소리인가. 천연 돌 쪼는 소리 같으니."

"저번 오셨을 적에 내가 말씀을 여쭈지 않았던가요. 부여에서 석수장이를 불러다가 다보탑과 석가탑을 짓게 되었다고. 그 부여 석수장이가 아직도 일을 하는 모양입니다."

"이렇게 캄캄한데 어떻게 일을 할 수 있을까."

"그 석수장이란 녀석이 어떻게 성미가 괴벽스러운지 낮에는 별로 일에 손을 대지도 않고 꼭 밤, 새벽으로 저렇게 일을 하지요."

"허 그건 참 명공일세그려."

"명공은 무슨 명공입니까. 아무라도 손에 조금 익게만 되면 어둡다고 일을 못 할까요. 우리네가 밤에 칼을 쓰는 것이나 다를 게 없을 것 아닙니까."

하고 용돌은 울대에 피를 올리며 매우 못마땅해하는 눈치였다.

"자네 왜 그 석수장이하고 무슨 틀린 일이 있나. 그렇게 티를 뜯게, 허허."

"그래 서방님은 분하지 않으시오. 부여놈 따위가 아주 내노라 하고 서라벌 대찰에 하나도 아니요 둘 템이나 탑을 이룩하니 기막힐 노릇이 아니란 말씀이오."

"원 그 사람은 별것이 다 기가 막히네그려. 부여 석수가 서라벌 와서 탑을 이룩하기로 분할 게 무에란 말인가."

"그래 서라벌 사람이 부여놈 따위에게 비록 조그마한 일엘망정 지다니 말이 되느냐 말씀이야요."

"어 이 사람, 그게 무슨 좁은 생각인고. 거기 지고 이기고 할 까닭이 무엇 있단 말인고. 자네는 아직도 삼한통일 이전 생각을 가지고 까닭 없는 적개심을 품고 있네그려. 그때 서로 싸운 것도 생각해 보면 뼈가 저릴 노릇인데 지금도 그런 감정을 품고 있어서야 될 말인가. 아예 그런 생각을랑 버리고 객지에 외로울 테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네가 돌보아 주게나. 앞으로 큰일을 하려면 그네들과 손을 마주잡고 한 덩어리가 되어야 될 것 아닌가. 생각을 해보게나."

경신의 한마디 한마디에 용돌의 고개는 차츰 차차 숙어졌다.

"옳습니다. 서방님 말씀이 옳습니다. 여태 저는 옥생각을 하였습니다. 앞으로는 그런 생각을 버리겠습니다."

"그런데 그 탑 둘은 다들 완성이 되어 가나."

"다보탑은 벌써 다 되었고, 석가탑도 아마 거의 다 지어 가는 모양입니다."

경신은 울려 오는 돌 쪼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밤에 돌일을 한다는 게 하도 신기하니까 어디 우리 구경을 좀 가볼까."

94[편집]

번개와 벼락이 때려붓고 폭풍우가 쏟아지는 밤, 아사달과 탑 위에 단둘이 앉아서 불을 뿜는 듯한 사랑을 하소연한 후 주만은 격렬한 제 정에 지치기도 하였거니와 밤비를 노박으로 맞은 탓에 며칠은 된통으로 앓기까지 하였다.

앓으면서도 잠꼬대에도 아사달의 푸념이요 헛소리도 아사달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무병하던 외동딸이 앓으매 사초부인은 머리맡을 떠나지 않았고 이손 유종도 조정을 들고 날 적마다 별당을 들러 갔다.

주만이가 헛소리를 하고 딴청을 부릴 때마다 털이 혼자서 혹시나 아사달과의 비밀이 탄로될까 보아 애간장을 졸이기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디까지 딸을 믿는, 믿느니보담 자기 딸에게 그런 비밀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는 늙은 부모는 다행히 그런 눈치를 채지 못하고 예사 헛소리로 흘려들어 버렸다.

그러나 주만의 병이 차차 소복이 될수록 아사달 그리운 정이 불같이 일었건만 밤늦도록 사초부인이 자리를 떠나지 않기 때문에 아사달을 찾을 수 없는 것이 가장 아찔이었다.

주만은 아직도 몸이 찌뿌드드해서 쾌하지를 아니하였으되 일부러 쾌활한 체를 하고 인제 병은 아주 멀리 갔다는 듯이 툭툭 털고 일어났지만 그래도 사초부인은 노상 마음을 놓지를 아니하였다.

"어머니께서는 염려도 너무 많으시어. 인제 다 나았다는데두 왜 성가시게 자꾸 머리만 짚으세요, 글쎄."

나중에는 머리 짚는 어머니의 손을 떠다밀며 주만은 짜증까지 내었다.

"얘가 무슨 소리냐, 아직도 속머리가 더운데 나은 게 다 뭐란 말이냐. 괜히 방정을 떨고 오늘도 바람을 쏘이더니만 기예 병을 덧치는가 부다."

하고 어머니는 구박맞는 손으로 굳이굳이 딸의 머리를 만지며 걱정을 마지않았다.

"원 어머니는 괜찮대도 웬 걱정이시어. 머리가 눌리어 안 아픈 것도 되아프겠네."

주만은 역시 제 머리에 닿은 어머니의 손을 떼느라고 애를 썼다.

"어미의 손이 그렇게 싫으냐. 왜 말을 안 듣고 네 고집만 세우느냐. 그럼 네 손으로 만져 보려무나. 이게 더운가 안 더운가."

"어디 더워요, 싸늘하기만 한데."

"그래 이게 덥지를 않단 말이냐. 괜히 약 먹기가 싫으니까 나중에는 생판 거짓말까지 하는구나."

하고 모녀끼리 말다툼까지 하게 되었다. 어머니의 눈에는 언제든지 철부지의 어린 딸이었다.

주만은 앓는 것보담 어머니의 극진한 간호가 도리어 병이 되었다. 그다지도 아사달이 그리웁고 몸을 빼쳐 나갈 수 없는 것이 심술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여름해야 길기야 길지마는 어쩌면 이렇게 지리할까. 일각이 삼추 같다 함은 이를 두고 이름이리라.

이렇듯 긴 하루를 가까스로 다 보내 놓고 어둑한 땅거미가 내리는 걸 보면,

"오늘 밤에야 설마 빠져나갈 수 있으려니."

하였다가 역시 뜻을 못 이루고 그 밤을 고스란히 밝히게 되매, 오뉴월 단열밤도 가을밤 뺨치게 길었다. 아무리 정열에 뜬 주만이기로 어머니가 주무신 후 자정이 넘어서야 장근 이십 리가 되는 길을 갔다가 돌쳐올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러구러 열흘나마를 보내노라니 앓고 난 몸살쯤은 오히려 뒷전이요 정말 살이 내릴 지경이었다. 남의 눈을 꺼리는 사랑이 얼마나 어렵고 고된 것인 줄 주만은 뼈에 사무치도록 절절이 느끼었다.

파리한 딸의 얼굴은 가뜩이나 어머니의 발길을 자주 머무르게 하였다.

그래도 필경 기회는 오고야 말았다. 하루는 큰 손님이 드셨다고 집안이 벅적 괴고 주안상 준비에 사초부인은 눈코를 못 뜨게 되었다.

"이번에 오신 손님은 이만저만한 손님이 아니신가 봐요. 대감님께서 들락날락하시며 마님께 분별이 장히 바쁘시고 음식간에도 숙수를 둘씩이나 불러 대어 바로 무슨 큰 잔치나 하시는 것 같은뎁쇼."

털이가 갔다가 오더니 아주 호들갑을 떨었다.

"그럼 손님이 많이 오신대."

"아녜요, 단 한 분이시래요."

하고 털이는 의미 있게 웃어 보인다.

"단 한 분, 그래 손님은 누구시라든."

"쇤네보다 아가씨께서 더 잘 아실걸입쇼."

"매친 것, 내가 가보기를 했니, 어떻게 안단 말이냐."

"금량상 대감이시라나 누구시라나 장래 아가씨 시아주버님 되실 분이래요."

"응!"

하고 주만은 놀랐다. 제 혼인이 정말로 굳어지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아사달 만나기가 더욱 급하지 않으냐.

95[편집]

"손님이 드셨으니 오늘 밤에는 마님이 못 오시겠구나."

주만은 오래간만에 빠져나갈 기회가 온 것을 몰래 기뻐하였다.

"혹시 오실지 누가 알아요. 더구나 오신 손님이 아가씨 시댁 어른이시라니 아가씨를 불러 보시게 될는지도 모르지 않아요."

털이는 벌써 주만의 속을 들여다보고 미리 방패막이를 하려 들었다.

"그 애는 별소리를 다 하는구나. 시집도 가기 전에 시댁 어른이 다 무에냐."

"그래도 서두시는 걸 보아서는 정혼이 꽉 된 듯싶은뎁쇼."

"정혼이 되었기로 설마 장래 시아재비 될 어른을 날더러 보라고야 하시겠니. 더구나 앓고 나서 얼굴이 반쪽이 된 나를."

"아가씨 말씀도 그럴 성싶지만 혹시 찾으실지 모릅지요."

"얘, 그런 염려는 작작 하고 말과 초롱이나 미리 준비를 해두어라. 오늘 저녁에는 세상없어도 불국사엘 가야겠다."

"에구 거길 또 가시鲳쇼. 저번 때 그렇게 혼이 나시고도. 그야 말짝으로 물에 빠진 새앙쥐 꼴이 되고 그 먼길을 오는데 쇤네는 하마터면 죽을 뻔을 했는뎁쇼. 아가씨께서는 말경에 병환까지 나시고……."

"얘, 누구는 모르느냐. 왜 또 지절거리느냐.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나 하려무나. 소풍차로 휘 한 바퀴만 돌아 올 테니……."

"그럼 오래는 걸리지 않을깝쇼. 오늘도 어째 일기가 흐린 듯한뎁쇼."

"오래가 다 무에냐. 잠시 갔다가 선길에 돌아올 텐데."

실상 주만이도 불국사에서 오래 얼무적거리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흉중에 맺히고 서린 것은 저번에 다 털어놓았으니 그이를 만난다 한들 이젠 할 말도 없거니와 할 일도 없지 않으냐. 안타까운 그이의 모양을 한번 힐끈 보기만 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언제쯤 서라벌을 떠단다는 것만 알면 그만이다.

밤 들기가 무섭게 주종의 말머리는 불국사로 향하였다.

찌는 듯하던 더위도 들 밖엘 나오니 선선하게 누그러지는 듯하였다.

어둑한 비탈길을 말을 채쳐 달리매 주만은 훨훨 날듯이 몸이 가뜬해짐을 느끼었다. 아직도 끈적끈적하고 남아 있던 감기 기운도 씻은 듯 사라지고 말았다. 화하게 트인 코 안으로 신선한 공기는 물처럼 들어왔다.

한참 신이 나게 말을 채쳐 달리다가 산모퉁이를 돌아서는 목장에서 땀을 드리우며 뒤떨어진 털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촛불을 켜도 좋을 만큼 어둡기는 어두웠지만 지나치는 사람을 잘 아는 사람이면 모습으로 어슴푸레하게 짐작은 할 수 있는 어둠이었다.

그때 헙수룩한 행인 하나가 마주 내려온다.

무심코 주만의 앞을 슬쩍 지나치다가 그 행인은 별안간 무엇을 생각한 듯 어둠 속에 외따로 말을 세우고 있던 주만을 수상쩍다는 듯이 치훑고 내리훑고 보고 또 보았다.

'도적이나 아닌가.'

주만은 언뜻 이런 생각을 하고 등에 찬 소름이 쭉 끼쳤으나 저는보행이요 나는 말을 탔으니 사불여의하면 그대로 달려가면 그만이라고 마음을 작정하고 세상 오지 않는 털이를 그대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 행인은 기연가미연가하는 듯이 고개를 기우뚱기우뚱하고 있는데 주만이도 어쩐지 그 행인의 모습이 어디서 한번 본 듯싶었으나 얼른 생각이 잘 돌아나지를 않았다. 그 무렵이었다.

"아가씨! 애규, 애규."

하고 털이의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아직도 서너 간통이나 떨어져서 털이가 쌔근발딱거리며 쫓아오는 꼴이었다.

그러자 그 행인은 문득 주만의 말머리 앞으로 다가서며 굽실 하고 절을 하였다.

"소인이 눈이 무디어 죽을 죄를 졌삽니다. 여쭙기 황송하오나 구슬아가씨가 아니시온지."

주만은 후미진 길에서 수상한을 만나 마음이 적이 오그라붙는 판인데 저를 안다는 것이 얼마쯤 다행한지 몰랐다.

"그래 자네는 뉘 댁에 있는가."

주만은 그 말투와 행동으로 보아 아는 집 하인인 줄 짐작하고 이렇게 물어 보았다.

"녜, 언젠가 한번 뵈온 적도 있습니다마는, 소인은 금지 금시중 댁에 있사옵고 천한 이름은 고두쇠라 부르옵니다."

주만은 속으로 옳거니 하였다. 금성이가 담을 넘으려다가 톡톡히 망신을 당하던 때에 데리고 왔던 하인인 줄 인제야 깨달았다.

"이 어두운 밤에 어디로 행차를 하옵시는지."

고두쇠는 눈알을 두리번두리번 굴리며 주만의 가는 곳을 물었다.

"응, 나는 잠깐 볼일이 있어 가네마는, 자네는 어디를 갔다가 이렇게 저물게 오는가."

"불국사에까지 갔다가 다녀오는 길입니다."

"불국사!"

하고 주만의 가슴은 뜨끔하였다.

96[편집]

주만은 불국사 가는 길에 금성의 하인 고두쇠에게 들킨 것도 뜻밖이거니와 고두쇠도 불국사엘 갔다 온다는 말에 적지 않게 가슴이 울렁거리었다.

"불국사에는 무슨 일로 갔다가 오는고."

주만은 조금 다심스럽다 싶으면서도 아니 물어 볼 수 없었다.

"네, 다름이 아니오라, 서방님께서 모레 유두놀이를 불국사 연못에서 차려 보시려고 지금 그 형편을 알러 갔다가 오는 길입니다."

"응, 그런가."

주만은 안심의 숨을 돌리었다.

그때에야 털이의 말이 화화 가쁜 숨을 내뿜으며 들이닥치었다.

털이는 고두쇠를 힐끈 보자 주춤 발을 멈추며 대뜸 힐난조로 호령을 하였다.

"웬 사람이관대 총총하신 아가씨와 말이 무슨 말이야."

"허허, 털이아가씬가. 자네를 또 만나는 것도 적지 않은 연분일세 그려."

털이의 눈은 대번에 호동그래졌으나 말씨만은 총알 같았다.

"이 녀석이 웬 녀석이기에 이게 무슨 말버르장머리야. 아가씨가 계신데 무엄하게."

"녜, 녜, 아가씨께는 황송합니다, 헷헤."

털이는 주만을 돌아보며,

"이 녀석이 대관절 웬 녀석입시오."

"왜 저 금시중 댁 하인 고두쇠 아니냐."

"네, 그럽시오. 쇤네 눈은 정말 발새 티눈만도 못한뎁시오. 그 녀석을 못 알아보다니."

고두쇠는 오늘도 얼근하게 주기를 띤 모양으로 털이의 말을 받으며,

"왜 아니 그렇겠니. 알뜰한 내님을 몰라보다께. 자네 눈도 말씀이 아닐세그려."

"이 녀석이 입때도 그 버릇을 못 고쳤구나. 오늘 저녁에는 또 뉘 댁 담을 뛰어넘다가 졸경을 치고 달아나는 길인고, 으흐흐."

털이는 깔깔거리며 놀려먹었다.

"왜 내가 담을 뛰어넘었느냐. 앗게 아서. 자네는 날 보고 그러지 못하느니라. 사람의 연분은 모르는 게니라. 자네가 또 내 마누라가 되어 고 조그마한 몸뚱어리로 얼마나 아양을 떨지 아니."

"어규 이 녀석아, 모기내 다리 밑에 거지서방을 얻을 값에 너 같은 도적놈의 계집이 될 내가 아니란다."

"어디 두고 보자. 아가씨가 우리 댁으로 시집을 오시면 넌 갈 데 없이 묻어 올 거고 그러면 여불없이 내 계집이 되었지 별수가 있느냐. 그때는 누룽지를 치마꼬리에 차고 영감 영감 이것 잡슈 하며 발길에 밟히도록 나를 졸졸 따라다닐 것이."

"행여나 이 녀석아."

고두쇠가 철철 늘어놓는 바람에 털이는 미처 말을 빚어 내지 못하고 욕지거리만 한마디하고 말았다.

"행여나 그렇게 되면 좀 좋겠느냐 말이지. 사내란 낫살이 지긋해야 쓰느니라. 구수하고 알씸 있고……."

"쓸데없는 소리들 그만두고 어서 가자꾸나."

주만은 털이를 재촉하여 말을 채쳐 가던 길을 가려 하였다.

고두쇠는 주만이 앞에 와서 절을 또 한번 굽실 하고 얼마만큼 지나쳐 가다가 다시 돌쳐서서 씨근벌떡 뛰어온다.

"아가씨, 구슬아가씨, 소인이 잊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도 주만의 주종은 들은 체도 아니하고 그대로 달려가노라니 고두쇠는 연신 주만을 부르며 허둥거리는 다리로 죽을 판 살 판 쫓아온다.

주만은 필경 말을 멈추었다.

"그까짓 녀석 따라오거나 말거나 왜 말을 멈춥시오."

털이는 상판을 찌푸리었다.

고두쇠는 거의 구르는 듯이 줄달음질을 쳐서 대어 선다.

"어유 후, 후, 숨차……."

"누가 저더러 뛰어오랬나, 쩟."

털이는 외면을 하며 혀를 찼다. 고두쇠에게 말은 모자라고 놀린 것이 분해서 견딜 수 없었다.

고두쇠는 연방 숨을 후후 내쉬며 주만의 발 옆에 와서,

"여쭙기 황송하오나 이번 유두놀이에 아가씨께서도 꼭 행차를 해줍시사고 서방님께서 분부가 계셨습니다. 내일 소인이 청 쪼으러 올라가겠습니다만 뵈온 김에 미리 여쭈어 드리는 것입니다."

"글쎄 마침 가게 될지 보아야."

"아닙시오. 꼭 오셔야 하십니다. 소인 댁 아가씨도 가실 테고 여러댁 아가씨들도 많이들 오신다니 꼭 오셔야 됩니다."

주만은 딱 거절을 해버리자니 고두쇠의 잔소리가 듣기 싫고 그렇다고 마음에 없는 일을 승낙도 할 수 없어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무튼 꼭 오실 줄 알고 소인은 물러갑니다."

의외에 고두쇠는 선선히 물러갔다.

"그런 귀찮은 소리나 들으시려고 아가씨는 왜 말을 멈춥시오."

털이는 주만을 원망하였다.

"아니다, 그냥 자꾸 가면 그자가 불국사까지 따라올 것 아니냐. 아무튼 그자가 우리의 행색을 눈치를 채었을 테니 앞으로 성가신 일이나 생기지 않을지."

주만의 얼굴은 불길한 예감에 흐리어졌다.

97[편집]

아사달은 역시 석가탑 위에 있었다. 일을 한창 바쁘게 하느라고 주만과 털이가 탑 가까이 왔건마는 까맣게 모르는 듯하였다.

달무리한 흐릿한 달빛이건만 공사가 놀랄 만큼 일자리가 난 것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며칠 안 되는 그 동안에 아사달은 무서운 공과 힘을 들인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뭘 하십쇼."

털이가 소리를 쳤건만 정소리에 들리지 않는 듯.

"여봅시오, 여봅시오."

털이는 연방 소리를 쳤다. 그제야 아사달은 뒤를 돌아 보아 주만과 털이가 온 줄을 알고 정과 마치를 놓고 탑 가장자리로 걸어나왔다.

그는 무엇이 무안이나 한 듯이 빙그레 웃으며 아무 말이 없다.

두 눈길이 마주치는 찰나 주만이도 고개를 숙여 버렸다. 자기 가슴속 깊이 품은 비밀을 다 알려 바친 그이어니 전보다 몇 곱절 더 무관하고 살뜰할 줄 알았더니만 정작 딱 마주치고 보매 새삼스러운 부끄러움이 앞을 가리어 차마 바로 보기가 면난스러웠다.

아사달도 어쩔 줄 모르는 것처럼 멍하니 서 있을 뿐.

남의 눈에 유표하게 뜨일 것을 꺼리어 지니고는 왔지만 불도 다리지 않은 사초롱을 휘휘 돌리며 털이는,

"그럼 쇤네는 또 차돌이한테나 갔다 올 터예요. 아가씨는 이 사다리로 또 탑 위에나 올라가시고."

라고 재잘거렸다.

의미 깊은 '또'란 털이의 말에 아사달과 주만은 그제야 마주보며 괴롭게 웃었다.

그 말을 남긴 채 털이는 제 아가씨의 명령도 기다릴 것 없다는 듯이 휘적휘적 제 갈 데로 가버리고 주만은 하는 수 없이 탑 위로 올라갔다.

마주앉은 두 사람은 얼굴만 이따금씩 바라볼 따름이요, 피차에 아무런 말이 없었다.

침침한 광선 가운데도 아사달의 모양이 너무도 수척한 것이 눈에 뜨이었다. 눈썹이 유난히 검어 보이는 것은 눈두덩이 꺼진 탓이리라. 가뜩이나 깊숙한 눈자위가 더욱 기어들어갔는데 그 다정스럽던 눈매도 어쩐지 날카로워진 듯하였다. 본래도 여윈 뺨이지만 더욱 쭉 빨리어 광대뼈가 내밀고 관자놀이도 누가 살을 우벼간 듯하다. 전번 혼절을 하고 앓아 누웠을 적보담도 더 살이 내린 것 같았다.

'아아, 내가 그를 너무 괴롭게 하였구나.'

주만은 속으로 부르짖고 그의 앞에 그대로 엎드려 사과라도 하고 싶었다. 저만 골머리를 바수어 내는 듯한 무서운 고민으로 몸둘 곳을 모르는 줄 알았더니 그이도 저만 못하지 않게 뼈와 살을 저며 내었구나.

주만은 억색하여 더욱 굳게 말문이 막히었다. 그렇듯 괴로워하는 그이에게 다시 무슨 말을 할 것이랴.

"구슬아기님, 많이 파리하셨습니다그려."

마침내 아사달이 그 무거운 입을 열었다. 그 음성은 어쩐지 처량한 가락을 띠었다.

"저야 괜찮습니다마는 아사달님 신관은 정말 말 못 되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말은 또다시 끊어졌다. 그린 듯이 마주앉아서 애연한 눈초리로 한동안 피차에 여윈 자죽을 어루만지고만 있었다.

"저렇게 수척하신 것은 너무 공사를 서두시는 탓이 아녜요. 병환이 쾌히 소복도 되시기 전에 또 지치시면……."

이번에는 주만이가 침묵을 깨뜨렸다.

"서둘지 않고 어떡합니까. 한시가 급합니다."

'저도 한시가 급해요.'

주만은 입 밖에까지는 내지 않았으나 속으로 맞방망이를 쳤다. 이 지긋지긋하고 위태위태한 경우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아사달보다도 주만이가 더 급하였다. 금량상이 찾아까지 왔으니 이 딱한 혼인도 금일금일 작정이 될 모양이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치이는 그 파란의 날이 오기 전에 하루바삐 이 서라벌을 떠나야 한다.

"아무리 급하시기로 만일 병환이 또 나시면 늦어질 것 아닙니까."

주만은 진정으로 걱정을 하였다. 아사달을 위하는 것도 물론이지만 자기를 위해서도 이 아슬아슬한 고비에 아사달이 덜컥 병이 나면 그야말로 큰일이다

"염려 마십시오. 일을 손떼기 전에는 병이 날 리가 만무하니까요."

아사달은 힘있게 대답하였다.

"일을 끝내시고 떠나실 때에는 꼭 저를 데려가셔야 합니다."

또 한마디 다져 두려다가 저 때문에 저렇듯 살이 내린 그에게 그런 말로 또 괴롭게 하기는 차마 못 할 일이었다.

'내가 자주만 오면 설마 그의 떠나는 날을 모를까. 내일부터 하루에 한 번은 꼭 와야…….'

주만은 속으로 단단히 결심하였다.

98[편집]

그 후로 주만은 하루에 한 번씩은 어려웠지만 이틀을 거르지 않고 불국사에 드나들었다. 대개는 털이를 데리고 다녔지만, 번번이 같이 다닐 수도 없어 혼자라도 곧잘 말을 달리었다. 길새가 익으매 아무리 어두운 밤이라도 촛불 없이도 서슴지 않고 길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주만의 지레짐작이 그대로 들어맞아 금량상의 이번 걸음은 그의 운명을 꽉 작정하고 말았다. 팔월 스무날로 혼인날까지 정하였다. 유월 유두도 벌써 지났으니 혼인날까지 두 달도 올곧게 남지 않았다. 집안은 벌써부터 혼인 준비에 야단법석이다. 밤늦도록 일새를 분별하느라고 별당을 찾는 사초부인의 발길도 드물었다. 그러니 집을 빠져나올 기회는 전보담 많았지만 날짜가 부둥부둥 달아나는 것이 주만의 애를 졸이게 하였다.

바작바작 명줄을 태워 들어가는 듯하였다.

아사달과 만나서도 별로 할 말도 없었다. 날마다 얼마쯤이라도 일자리가 나는 것을 보는 것이 주만에게 오직 한 가지 기쁨이요 재미였다.

"어서어서 공사가 끝이 나지이다. 하루바삐 이 서라벌을 떠나게 되어지이다."

이것은 주만의 끊임없는 바람이요 축원이었다.

저와 마주앉아 단 몇 시각이라도 일손을 쉬게 되는 것이 아깝고 원통하였다.

"어서 일을 하세요. 나 있다고 일 않으실 게 무어예요."

그는 아사달을 재촉하고 정말 제자나 된 듯이 마치도 집어 주고 이어차이어차 용을 쓰며 겨누도 들만져 주었다. 쪼아 낸 자국을 수건으로 툭툭 털어서 정질하기에 편하도록 만들기도 하였다.

어느덧 유월이 지나고 칠월이 되었다.

공사는 거진거진 끝이 나 갔다.

보통 사람의 눈으로 보아서는 거의 손을 떼게 되었다.

"인제 거의 다 되지 않았어요. 인제 부여로 훨훨 갈 날도 얼마 남지를 않았군요."

하고 주만이가 오래간만에 방그레 웃으며 아사달을 쳐다보았다.

"웬걸요, 아직도 멀었습니다. 지금도 잔손질을 하려면 한이 없습니다마는!"

"그러면 팔월 한가위로도 끝을 못 내시게 될까요."

주만의 얼굴엔 대번에 웃음빛이 사라지고 심각한 고민으로 가득 찼다.

"글쎄올시다. 한 달만 더 애를 쓰면 손을 떼게 될지."

"세상없어도 한가위 안으로는 끝을 내주세요. 그때 끝이 나야만 팔월 스무날 안으로는 서라벌을 떠나게 될 터이니까요."

주만은 팔월 스무날이야말로 모든 것이 파탄이 되는 제 혼인날이라고는 차마 아사달에게 알리지 못하였다. 만일 그런 말을 했다가 그가 일부러 공사를 질질 끌고 어엿한 자리로 시집을 가라고 권하는 날이면 정말 큰일이 아닌가.

"공사가 끝난 다음에야 그 이튿날로라도 길을 떠나겠지만 마치 그때까지 끝을 내게 될는지요."

"이렇게 서두시는 다음에야 그때까지 안 끝날 리 만무할 것 아녜요. 내가 이렇게 오는 것이 방해가 된다면 지금 곧 돌아가도 좋아요."

"글쎄올시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곁에 계시면 암만해도 일이 손 잘 잡히지를 않습니다. 까닭 없이 가슴이 울렁거리고 손이 허전허전해지니까요."

아사달은 속임 없이 제 마음을 털어내 놓고 미안한 듯이 쓴웃음을 웃었다.

"그러면 지금 당장이라도 나는 가요."

하고 주만은 사다리 있는 데로 걸어나왔다.

"내 말이 귀에 거슬리십니까."

아사달은 제 말이 너무 무뚝뚝한 것을 못내 뉘우치는 모양이었다.

"아녜요, 바른 대로 말씀을 해주시는 게 얼마나 든든하고 고마운지 몰라요. 첫째 공사가 하루바삐 끝이 나야 될 것 아닙니까. 까딱 잘못하면 그야말로 만사가 물거품이 될 것이니까요."

하고 주만은 사다리를 내려온다. 아사달은 굳이 말리지도 아니하였다.

주만이가 사다리를 내리어 탑 가장자리까지 나온 아사달에게 눈으로 작별인사를 하고 막 돌아서다가 저편 그늘에 흰 그림자가 얼씬하는 것을 보았다.

초생달의 약한 빛줄이라 분명치는 않았지만 그 흰 그림자는 주만의 시선을 피하는 것처럼 그늘 속으로 후닥두닥 숨어 버리는 듯하였다.

주만이가 마굿간 앞까지 걸어나와 말을 타고 절문을 나올 때 언뜻 뒤를 돌아보니까 그 흰 그림자가 슬근슬근 뒤를 밟아 오다가 돌아다보는 주만의 눈길에 들킨 것을 매우 당황해하며 비슬비슬 몸을 옆으로 피하였다.

'누구일까?'

주만은 속으로 생각하였다. 그림자가 분명히 자기의 뒤를 밟아 오는 데는 틀림이 없었다.

99[편집]

주만은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몇 번을 뒤를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산기슭에 부유스름하게 깃들인 달그림자만 보아도 대담하던 주만이답지 않게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하였다.

누구에게 쫓겨나 가는 듯이 허둥지둥 말을 달려 가다가도 슬근슬근 제 뒤를 밟는 인기척이 나는 듯 나는 듯하여 오마조마하는 마음을 진정하려야 진정할 수 없었다.

벌써 몇 달 동안 거의 수없이 아사달을 방문하였건만 털이와 차돌을 빼놓고는 다행히 아무에게도 들킨 적이 없거늘 오늘 밤따라 뜻밖에 나타난 그 수상쩍은 그림자는 과연 무엇일까.

제 방에 들어오자 문을 겹겹이 닫고 잠갔건만 울렁거리는 가슴은 좀처럼 가라앉지를 않았다. 웃옷을 벗는데 땀이 어떻게 흘렀는지 속옷에서 웃옷에까지 친친하게 배어 나와 옷고름을 끄르는 대로 김이 물씬물씬 올라왔다. 아래옷자락은 몸에 휘감기어 처근처근한 것이 불유쾌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그 이상한 그림자가 제 몸에 휘감기어 따라온 것과도 같았다.

'내가 마음이 어려서 헛것을 보았나.'

주만은 흔들리는 제 생각을 스스로 물리치며 이렇게도 고쳐 생각해 보았으나 불전 그늘에서 이쪽을 노리던 양이 역력히 머리에 살아오고 더구나 제 뒤를 따라오다가 흠칫하며 몸을 피하던 광경은 더욱 분명하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헛것을 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그 괴상한 그림자는 과연 누구일까.

그 정체를 알려야 알 수가 없는 것이 더욱 궁금하고 더욱 마음에 키이었다.

자기의 사랑과 행복을 노리는 무서운 눈이 어둠 속에서 번쩍이고 있는 것만 같다. 인제 한 달 정도만 곱다랗게 넘기면 만사가 귀정이 날 이 아슬아슬한 고비에 심술궂은 야차는 기어이 헤살을 놀고야 말 것 같다.

주만은 불길한 예감에 몸서리를 쳤다.

집안 사람들의 눈만 피하면 마음놓고 알뜰한 님을 찾아갈 수 있었지만 인제는 경계할 일이 또 한 가지 늘게 되었다. 집안 사람을 피하기는 오히려 쉬웠으되 이 정체 모를 괴상한 그림자를 피하기는 여간 어려운 노릇이 아니다.

어느 산기슭, 어느 목장에서 그 괴물이 숨어 있는지 모른다. 불전의 그늘, 어둑한 숲속에 그 괴물의 은신할 곳은 얼마든지 있었다.

이것을 피하자면 집에서 나가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아사달을 만나지 않는 것이 제일이다. 그러나 아사달을 만나지 않고 견딜 수 있는가. 그의 얼굴을 그리고도 배길 수 없는 일이거니와 더구나 공사가 얼마쯤 되어 갔는지 궁금하여 참을 수가 없다.

이틀, 사흘, 나흘, 닷새! 주만은 이제 더 참을 수가 없었다. 무슨 변을 어떻게 당하고 무슨 버력을 어떻게 치르더라도 불국사엘 아니 가든 못 하게 되었다.

그래도 미심다워서 오늘 저녁은 털이를 데리고 가기로 하였다.

처음에는 둘이 나란히 말을 달려 갔지만 나중은 역시 주만의 말이 앞서고 털이는 뒤떨어지고 말았다.

"아가씨, 아가씨, 구슬아가씨."

등뒤에서 나는 털이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지만 주만의 마음은 너무 급하였고, 또 길거리에서 머뭇거리는 것이 도무지 불길한 듯해서 주만은 그대로 말을 달리었다.

"아가씨, 아가씨, 저걸 좀 봅시오. 저걸 좀 보아요. 아가씨, 아가씨, 제발 좀 같이 가요."

털이가 물에나 빠진 듯한 소리를 떨기 때문에 주만은 하는 수 없이 말을 멈추었다.

털이는 쌔근쌔근 죽을 판 살 판 달려와서 숨이 턱에 닿은 목소리로,

"아가씨, 저, 저걸 좀 봅시오. 저 등불을!"

하고 손가락으로 제가 달려온 길 쪽을 가리키었다.

"응, 등불이?"

주만은 깜짝 놀라며 털이의 손가락질하는 곳을 바라보니 과연 장고등 등불 한 개가 반짝반짝하며 줄달음질을 쳐 달아나는 것이 보이었다.

"그래 저 등불이 어떡했단 말이냐."

주만의 목소리도 허전허전하였다.

"왜 언젠가 고두쇠란 놈을 만나신 길목장이가 있지 않습니까. 아가씨는 먼저 달려가시고 쇤네가 뒤쫓아오려니깐 그 등불이 그 목장에서 반짝반짝하고 있다가 아가씨가 휙 지나치시니까 그때 그 불이 탁 꺼져 버리겠습죠. 그러더니 쇤네가 올 때는 그 등불이 다시 켜져 가지고 저렇게 달아를 납니다. 암만해도 수상치가 않아요."

주만의 가슴은 뜨끔하였다. 저번에 본 그 수상한 그림자가 오늘 밤엔 또 등불로 나타난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100[편집]

금시중 집 작은사랑에는 헙수룩한 위인들이 여남은 주안상을 가운데 놓고 죽 둘러앉아 있다.

으리으리한 자단향 교자상에 번쩍이는 금기명 은기명부터 이 으시시해 보이는 손님들과 걸맞지를 않았다. 더구나 모양과 본새를 차릴 대로 차린 음식은 볼품도 없이 그들의 염치 코치 없는 입 안으로 아귀아귀 사라졌다.

큼직한 구자틀에 거들먹하게 찼던 건더기는 어느결엔지 가뭇도 없어지고 맨 말국만 바지짓바지짓 마지막 비명을 올리고 있다. 통으로 삶아 놓은 아저(어린 돼지) 한 마리도 살이란 살은 감빨고 홈빨아 한 점 붙어 있지 않고 앙상한 뼈다귀만 가로세로 지저분하게 흩어졌다.

일부러 그들의 비위를 맞추어 만든 듯한 두툼한 방자고기도 두 양푼이나 내어 온 것을 눈 한번 깜짝할 사이에 들어 내고 말았다.

어떤 위인은 생전복회가 매끄러워서 젓가락으로 잘 집히어지지를 않으니까 접시째 들어다가 손가락으로 마구 훔켜 넣기까지 하였다.

짝짝 쩝쩝, 울겅 볼강, 후루룩 꿀떡! 씹고 마시고 입맛 다시는 소리로 온 방안의 공기는 어수선하게 흔들리었다.

말하는 사람은 물론 없었다. 말은커녕 먹기에 걸신이 들려서 숨쉴 여가조차 없는 듯하였다.

휘휘 젓는 술총이 끈끈하게 걸리도록 뻑뻑한 막걸리라야만 제 격에 맞을 그들이거늘 기름같이 맑은 소흥주와 눈알만한 옥잔은 입술도 채 추기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따금 침묵을 깨뜨리는 것은 주인 금성의 호령이었다.

"술을 더 내오너라. 안주를 더 내오너라."

"녜, 녜."

하고 놀이는 쩔쩔매며 거행에 눈코를 못 떴건만 술이며 안주가 내어오는 대로 날개가 돋힌 듯 달아나 버렸다.

인제는 김치 말국까지 말라들어 갔다. 교자상 위의 그릇은 말 그대로 씻은 듯 부신 듯하게 되었다.

"어 무던히들 먹는군."

안주라고는 몇 저름 집지도 않고 술만 들이켜서 벌써부터 얼근해진 금성은 늘 겪는 일이지만 이 훌륭한 제 친구들의 무서운 식욕에 새삼스럽게 놀라며 감탄하였다.

"허 출출도 한 판이지만 자네 집 음식은 언제 먹어 보아도 천하진미거든."

주독이 올라서 잔등이가 시뻘겋게 벗겨지고 엄청나게 넓은 콧구멍을 벌룸벌룸하는, 좌중에 제일 낫살이 든 듯한 위인이 장국물이 번지르르하게 묻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인사 비스름하게 금성의 말대꾸를 하였다.

"코벌룸이 말이 하던 중 잘 하였네. 산해진미니 진수성찬이니 말은 들었지만 이런 맛난 음식은 생후 처음인걸."

거무스레한 얼굴이 얽둑얽둑 얽은 곰보가 지금까지 맛나게 빨고 있던 돼지 발톱을 배앝으며 맞장구를 친다.

"이런 대접만 받고 우리의 할 일을 못 하니 주인께 미안하기 짝이 없는 일이야."

이번에는 강파르게 마르기는 말랐지만 톡 불거진 눈알맹이 하며 모질디모질게 생긴 위인이 말참견을 하며 금성을 바라본다. 이 중에 누구누구 해도 정말 너를 위해 일할 사람은 나 하나뿐이니라 하는 듯하였다. 그는 '샛바람'이란 별명을 가졌다.

"아따 그 사람 급하기는 우물에 가서 숭늉 달라겠네. 설마 일거리야 생기겠지그려. 한가한 동안에 이렇게 얼근하게 먹어 두는 게 말하자면 기운을 기르는 것이거든, 헛허."

코밑과 뺨과 턱이 온통 구레나룻과 수염으로 뒤덮이어 겨우 눈과 코 언저리만 빤하게 보이는 텁석부리가 수염 속에 파묻힌 입을 떡 벌리고 너털웃음을 웃어 보인다.

"옳아, 옳에. 텁석부리 말이 옳에, 허허."

좌중은 모두들 찬성을 하고 껄껄댄다.

샛바람은 그 불거진 눈을 더욱 까뒤집으며,

"이녁들은 얻어먹기만 하고 볼일은 안 생겨도 좋단 말이지, 이 걸신들아."

하고 못마땅한 듯이 텁석부리를 노려본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네. 어디 자네는 안 먹고 배를 쪼루룩쪼루룩 소리가 나도록 굶겨 가지고 일만 좀 해보게나, 에헤헤."

텁석부리가 빈정거린다.

"어헛허."

좌중은 샛바람을 놀리듯 한바탕 웃어 대었다.

샛바람은 새뚝하게 성이 치받쳐 올랐으나 여럿이 욱대기는 바람에 대항거리도 못 하고 입술만 발발 떤다.

"여러분이 그렇게 웃을 것도 아니거든. 암 일을 해야지. 일을 해야 되고말고."

코벌룸이가 샛바람을 두둔하는 척을 하고 나서,

"대관절 이 고두쇠란 놈은 한번 가더니 어째 감감소식이람."

하고 금성을 바라본다.

"그 녀석도 어디 가서 술이나 처먹고 자빠진 게지."

샛바람은 빗대 놓고 한마디를 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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