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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삼국사기/권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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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달라 이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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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달라 이사금(阿達羅尼師今)이 즉위하였다. (그는) 일성(逸聖)의 맏아들이다. 신장이 칠척(七尺)이고, 풍성한 콧마루의 기이한 상이었다. 어머니는 박씨(朴氏)로, 지소례왕(支所禮王)의 딸이고, 왕비는 내례부인(内禮夫人)으로 지마왕(祇摩王)의 딸이다.

원년(154년) 3월, 계원(繼元)을 이찬으로 삼고 군(軍)과 나라의 정사(政事)를 맡겼다.

2년(155년), 봄 정월에, 친히 시조묘에 제사를 지내고, 크게 사면하였으며, 흥선(興宣)을 일길찬(一吉飡)으로 삼았다.

3년 (156년) 여름 4월에 서리가 내렸다. 계립령(鷄立嶺)의 길을 열었다.

4년 (157년) 봄 2월에 감물(甘勿)·마산(馬山) 두 개의 현(縣)을 두기 시작하였다. 3월에 (임금이) 장령진(長嶺鎭)을 순행하여, 변방 주둔지의 병졸을 위로하였고, 각자에게 징포(徵布)를 하사하였다.

5년 (158년) 봄 3월에 죽령(竹嶺)을 열었다. 왜인이 내빙하였다.

7년 (160년), 여름 4월, 폭우(가 내려), 알천의 물이 넘쳐 인가가 표류하였고, 금성 북문이 저절로 허물어졌다.

8년 (161년), 가을 7월, 메뚜기가 곡식을 해쳤고, 바닷물고기가 많이 나와 죽었다.

9년 (162년) 사도성(沙道城)을 순행하고, 변방 주둔지의 병졸을 위로하였다.

11년 (164년), 봄 2월, 용(龍)이 경도(京都)에 나타났다.

12년 (165년), 아찬(阿飡) 길선(吉宣)이 모반하였다가 발각되었고, 참수될 것이 두려워, 백제로 도망쳐 들어갔다. 왕이 이서(移書)를 (보내), 그를 (되돌려 보낼 것을) 요구하였으나, 백제는 불허하니, 왕이 노하여 군사를 내어 이를 쳤으나, 백제는 영성(嬰城)하여 지키고 나오지 아니하여, 아군의 식량이 떨어져 되돌아왔다.

13년 (166년), 봄 정월 그믐((음력 1월 1일, 병오(丙午)일[1], 신해일(양력 2월 18일))에 일식이 있었다.

14년 (167년) 가을 7월, 백제가 나라의 서쪽 2개 성에 들이닥쳐 부수었고, 백성 일천명을 노획하여 가버렸다. 8월, 일길찬 흥선(興宣)에게 명을 내려, 병사 2만을 거느리고 이를 쳤다. 왕은 또한 기병 8천을 거느리고, 한수(漢水)로부터 그곳에 다다랐다. 백제가 크게 두려워하여 그들이 빼앗은 남녀를 되돌려 보내고, 화해하기를 빌었다.

15년 (168년), 여름 4월, 이찬 계원이 죽었다. 흥선을 이찬으로 삼았다.

17년 (170년), 봄 2월, 시조묘를 중수(重修)하였다. 가을 7월, 수도에 지진이 일어났고, 서리와 우박이 곡식을 해쳤다. 겨울 10월, 백제가 변경을 쳐들어왔다.

18년 (171년), 봄, 곡식이 귀하여 백성이 굶주렸다.

19년 (172년), 봄 정월에 구도(仇道)를 파진찬으로 삼고, 구수혜(仇須兮)를 일길찬으로 삼았다. 2월, 시조묘를 섬겼다. 수도에 큰 돌림병이 (있었다.)

20년 (173년) 여름 5월, 왜국의 여왕 히미코가 사신을 보내 내빙하였다.

21년 (174년) 봄 정월, 흙비가 내렸다. 2월, 가뭄이 들어, 우물과 샘이 말랐다.

31년 (184년) 봄 3월, 왕이 훙서하였다.

벌휴 이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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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휴(伐休)또는 발휘(發暉) 이사금이 즉위하였다. 성은 석(昔)씨이고, 탈해왕(脱解王)의 아들 구추각간(仇鄒角干)의 아들이다. 어머니의 성은 김씨(金氏)이고, 지진내례부인(只珍内禮夫人)이다. 아달라가 아들 없이 훙서하자, 나라 사람들이 그를 왕위에 세웠다. 왕이 바람과 구름을 점처, 홍수와 가뭄 및 그 해의 풍흉을 미리 알았고, 또한 다른 사람의 그릇됨과 올바름을 알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일컬어 거룩하다 하였다.

2년 (185년), 봄 정월 시조묘에 친히 제사를 지내고, 대사(大赦)하였다. 2월, 구도(仇道)에게 파진찬(波珍飡)의 벼슬을, 구수혜(仇須兮)에게 일길찬(一吉飡)의 벼슬을 내리고, 좌우(左右)의 군주(軍主)[2]로 삼아, 소문국(召文國)을 쳤다. 군주라는 명칭이 여기에서 시작한다.

3년 (186년) 봄 정월, 주군(州郡)을 순행(巡幸)하고, 풍속(風俗)을 관찰하였다. 여름 5월 임진일 그뭄에 일식이 있었다. 가을 7월, 남신현(南新縣)이 가화(嘉禾)를 진상하였다.

4년 (187년) 봄 3월, 주군(州郡)에 명령을 내려, 토목(土木)의 일을 벌여 이로써 농사지을 시간을 빼앗는 것을 금지하였다. 겨울 10월, 북녘 땅에 눈이 크게 내려, 깊이가 한 길〔丈 〕에 (달했다.)

5년 (188년) 봄 2월, 백제가 와서 모산성(母山城)을 공격하니, 파진찬(波珍飡) 구도(仇道)에게 명하여 병사를 내어 이를 막았다.

6년 (189년) 가을 7월, 구도가 백제와 구양(狗壤 )에서 싸워 이를 물리치고, 500여급(級)을 죽이거나 붙잡았다.

7년 (190년) 가을 8월, 백제가 서쪽 경계 원산향(圓山鄕)에 들이닥치고, 또한, 다가와 부곡성(缶谷城)을 에워싸자, 구도가 굳센 기병 5백명을 이끌어 이를 쳐냈다. 백제의 병사가 거짓으로 달아나자, 구도가 쫓아가 와산(蛙山)에 이르렀으나, 백제에게 패한 바가 되었다. 왕은 구도의 실책(失策)으로 인하여, (그를) 낮추어 부곡성주로 삼았고, 설지(薛支)를 좌군주로 삼았다.

8년 (191년) 가을 9월, 치우기(蚩尤旗)가 각(角)과 항(亢)에 나타났다.

9년 (192년) 봄 정월, 국량(國良)에게 벼슬을 내려 아찬으로 삼고, 술명(述明)을 일길찬으로 삼았다. 4월, 경도에 눈이 왔는데, 깊이가 3척에 (달했다.) 여름 5월 대수(大水)가 (나서) 산이 무너진 곳이 10여 곳이었다.

10년 (193년) 봄 정월, 갑인(甲寅)일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3월 한기부(漢祇部)의 (어느) 여자가 한번에 4남 1녀를 낳았다. 6월, 왜인이 크게 굶주려 와서 먹을 것을 구하는 자가 천여명이었다.

11년 (194년) 여름 6월 을사일 그뭄에 일식이 있었다.

13년 (196년) 봄 2월, 궁실을 중수(重修)하였다. 3월에 가뭄이 들었다. 여름 4월, 궁궐 남쪽 큰 나무에 벼락이 쳤다. 또한 금성 동문에도 벼락이 쳤다. 왕이 훙서(薨逝)하였다.

내해 이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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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해 이사금(奈解 尼師今)이 즉위하였다. (그는) 벌휴왕의 손자이다. 어머니는 내례부인(内禮夫人)이고, 왕비는 석(昔)씨로서, 조분왕(助賁王)의 누이이다. 용의(容儀)가 웅위(雄偉)하고, 준재(俊才)가 있었다. 전왕의 태자 골정(骨正) 및 둘째 아들 이매(伊買)가 먼저 죽고, 장손(長孫)이 아직 어렸으므로, 이매의 아들을 왕위에 세우니, 그가 곧 내해 이사금이다. 이 해에, 정월부터 4월까지 비가 오지 않았는데, 왕이 즉위하는 날에 이르러 큰 비가 내리니 백성이 기뻐하고 경사스러워했다.

2년 (197년) 봄 정월, 시조묘를 뵈었다.

3년 (198년) 여름 4월, 시조묘 앞의 넘어진 버드나무가 스스로 일어났다. 5월, 나라의 서쪽에 큰 물이 들어, 물난리를 만난 주현(州縣)에 1년간의 조세와 징발을 면해 주었다. 가을 7월, 관리를 보내, 위무(慰撫)하고 위문(慰問)하였다.

4년 (199년) 가을 7월, 백제가 변경을 쳐들어왔다.

5년 (200년) 가을 7월,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보이고, 떨어지는 서리가 풀을 죽였다. 9월 경오(庚午)일 그뭄, 일식이 있었다. 알천에서 크게 사열(査閱)하였다.

6년 (201년) 봄 2월, 가야국(加耶國)이 화친를 청하였다. 3월 정묘(丁卯)일 그뭄에 일식이 있었다. 크게 가물자, 중앙과 지방의 죄수를 조사하여, 가벼운 죄는 용서하여 주었다.

8년 (203년) 겨울 10월, 말갈(靺鞨)이 경계를 침범하였다.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피었다. 사람들(에게) 큰 돌림병이 (돌았다.)

10년 (205년) 봄 2월, 진충(眞忠)에게 벼슬을 내려 일벌찬으로 삼고, 이로써 국정(國政)에 참여하게 (하였다.) 가을 7월, 서리와 우박이 곡식을 해쳤다. 태백성이 달을 침범하였다. 8월, 여우가 금성과 시조묘 뜰에서 울었다.

12년 (207년) 봄 정월, 왕자 이음(利音)또는 내음(奈音)에게 벼슬을 내려 이벌찬으로 삼고, 지내외병마사(知内外兵馬事)를 겸하게 하였다.

13년 (208년) 봄 2월, 군읍(郡邑)을 순행하고 열흘만에 되돌아왔다. 여름 4월, 왜인이 경계를 침범하니, 이벌찬 이음을 보냈다. (이음이) 병사를 이끌고 이를 막았다.

14년 (209년) 가을 7월, 포상팔국(浦上八國)이 가라(加羅)를 침략하기를 꾀하자, 가라의 왕자가 와서 구원을 요청하니, 왕이 태자 우로(于老)에게 명하여 이벌찬 이음과 더불어, 육부(六部)의 병사를 이끌고 가서 그들을 구했다. 팔국(八國)의 장군을 공격하여 죽이고, 포로가 된 육천명을 빼앗아 그들을 되돌아가게 했다.

15년 (210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자, 관리를 보내어 군읍의 감옥(에 있는) 죄수를 조사하여, 두 가지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제외하고는 나머지는 모두 이를 용서하였다.

16년 (211년) 봄 정월, 벼슬을 내려 훤견(萱堅)을 이찬으로 삼고, 윤종(允宗)을 일길찬으로 삼았다.

17년 (212년) 봄 3월, 가야(加耶)가 왕자를 보내, 인질로 삼았다. 여름 5월, 큰 비가 민가를 떠다니게 하고 무너뜨렸다.

19년 (214년) 봄 3월, 큰 바람이 나무를 꺾었다. 가을 7월, 백제가 와서 나라 서쪽의 요차성(腰車城)을 공격하고, 성주 설부(薛夫)를 죽였다. 왕이 이벌찬 이음에게 명하니, (이음은) 뛰어난 병사 6천명을 이끌고 백제를 치고, 사현성(沙峴城)을 파괴하였다. 겨울 12월, 천둥이 쳤다.

23년 (218년) 가을 7월, 무기고의 병사 장비가 스스로 나왔다. 백제인이 와서 장산성(獐山城)을 에워싸니[3] 왕이 친히 병사를 거느리고 나가 이들을 쳐서 달아(나게 하였다.)

25년 (220년) 봄 3월, 이벌찬 이음이 죽었다. 충훤(忠萱)을 이벌찬으로 삼고, 지병마사(知兵馬事)를 겸하게 했다. 가을 7월, 양산(楊山) 서쪽에서 크게 사열(査閱)하였다.

27년 (222년) 여름 4월, 우박이 콩[4]과 보리를 해쳤다. 남신현(南新縣) 사람이 죽었다가, 한달을 지내고 부활하였다. 겨울 10월, 백제 병사가 우두성(牛頭州)에 들어오니, 이벌찬 충훤이 병사를 이끌고 이를 막았으나, 웅곡(熊谷)에 이르러 적에게 패하여, 홀로 말을 타고 돌아오니, (그의 벼슬을) 낮추어 진주(鎭主)로 삼았다. 연진(連珍)을 이벌찬으로 삼고 지병마사를 겸하게 하였다.

29년 (224년) 가을 7월, 이벌찬 연진이 백제와 봉산(烽山) 아래에서 싸워 이들을 깨뜨리고, 일천여급(級)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8월에 봉산성을 쌓았다.

31년 (226년) 봄에 비가 많이 와 가을 7월까지 계속 비가 왔다. 백성이 굶주리니 창고의 구호미를 베풀어 구휼해 주었다. 겨울 10월, 중앙과 지방의 죄수를 조사하여, 가벼운 죄는 용서하여 주었다.

32년 (227년) 봄 2월, 서남(西南)의 군읍을 순수(巡狩)하였다. 3월에 돌아와 벼슬을 내려 파진찬 강훤(康萱)을 이찬으로 삼았다.

34년 (229년) 여름 4월, 뱀이 남쪽 창고에서 사흘을 울었다. 가을 9월 지진이 일어났다. 겨울 10월, 눈이 많이 와서 깊이가 오척에 (달했다.)

35년 (230년) 봄 3월, 왕이 훙서(薨逝)하였다.

조분 이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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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분 이사금(助賁 尼師今)이 즉위하였다. 또는 제분(諸賁)[5]이라고도 한다. 성은 석(昔)씨이고, 벌휴 이사금(伐休尼師今)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골정(骨正)또는 홀쟁(忽爭)이다. 갈문왕(葛文王)이고, 어머니는 옥모부인 김씨(玉帽夫人 金氏)인데, 구도 갈문왕(仇道 葛文王)의 딸이다. 왕비는 아이혜부인(妃阿爾兮夫人)으로, 내해왕(奈解王)의 딸이다. 전왕(前王, (내해왕))이 곧 죽으려 때, 사위인 조분이 왕위를 계승하라고 유언하였다. 왕은 키가 크고 태도가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으며), 일에 임할 때는 명쾌하고 결단력이 있었으므로, 나라사람들이 그를 경외하였다.

원년((230년)) 연충(連忠)에게 벼슬을 내려 이찬(伊飡)으로 삼고 군사와 국사를 맡겼다. 가을 7월 시조묘를 뵈었다.

2년((231년)) 가을 7월, 이찬 우로(于老)를 대장군으로 삼아 감문국(甘文國)을 쳐서 깨뜨리고 그 땅을 군(郡)으로 삼았다.

3년((232년)) 여름 4월, 왜인이 갑자기 와서 금성(金城)을 에워싸니, 왕이 친히 전쟁에 나아가, 적들이 흩어져 달아났다. 경기병(輕騎兵)을 보내어 그들을 뒤쫓아 치고, 1천여급을 죽이거나 붙잡았다.

4년((233년)) 여름 4월, 큰 바람이 지붕의 기와를 날아가게 했다. 5월, 왜병(倭兵)이 동쪽 변경을 쳐들어왔다. 가을 7월, 이찬 우로가 왜인과 사도(沙道)에서 싸웠는데, 바람을 타고 불을 놓아 배를 불사르니, 적들이 물에 뛰어들어 모두 죽었다.

6년((235년)) 봄 정월, 동쪽으로 순행(巡行)하여 위무하고 구휼하였다.

7년((236년)) 봄 2월, 골벌국(骨伐國)의 왕 아음부(阿音夫)가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니, 저택과 사유 경작지를 하사하여 그를 편안하게 해 주고, 그 땅은 군(郡)으로 삼았다.

8년((237년)) 가을 8월, 메뚜기가 곡식을 해쳤다.

11년((240년)) 백제가 서쪽 변경을 침략하였다.

13년((242년)) 가을에 대풍년이 들었고, 고타군(古陁郡)이 가화(嘉禾)를 진상하였다.

15년((244년)) 봄 정월, 이찬 우로에게 벼슬을 내려 서불한(舒弗邯)으로 삼고, 지병마사(知兵馬事)를 겸하게 하였다.

16년((245년)) 겨울 10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략하니, 우로가 병사를 이끌고 나아가 이를 쳤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 마두책(馬頭柵)을 지켰다. 그 밤은 괴롭고 추웠는데, 우로가 사졸(士卒)을 위로하고, 몸소 땔감을 태워 그들을 따뜻하게 해 주니, (그 사졸) 무리의 마음이 감격하였다.

17년((246년)) 겨울 10월, 동남쪽에 흰 기운(氣運)이 있었는데 마치 한 필의 명주(明紬)와도 같았다. 11월에 경도(京都)에서 지진이 났다.

18년((247년)) 여름 5월 왕이 훙서(薨逝)하였다.

첨해 이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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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해 이사금(沾解尼師今)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조분왕(助賁王)의 이복 동생이다.

원년((247년)) 가을 7월, 시조묘를 뵙고, 아버지 골정을 세신 갈문왕(世神葛文王)에 봉하였다.

사론: 한(漢)나라 선제가 즉위할 때, 어떤 벼슬아치가 아뢰기를,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입후(入後)하는 자는 그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부모를 낮추고 제사를 지낼 수 없으니, (이것은) 조종(祖宗)을 받드는 법도(法度)입니다. 그러므로, 황제는 그 생부를 친(親)이라 칭하고, 시호(諡號)를 도(悼)라고 하였고, 모친은 도후(悼后)라 일렀습니다. 제후(諸侯)나 왕(王)과 상응하게 (해야 합니다.)”하였다. [6] 이것이 경전(經典)의 뜻에 부합하니, 만세(萬世)의 법이 되었다. 그러므로 후한의 광무제(光武帝)와 송나라의 영종(英宗)은 이를 본받아 행하였다. (그런데) 신라(에서는) 왕의 친척으로서 입궐하여 대통(大統)을 이은 군주가 그 아버지를 왕으로 칭하여 높이고 추봉하지 아니한 바가 없었다. 특히 이와 같을 뿐만 아니라, 그 장인을 추봉하는 일까지 있었는데, 이는 예법이 아니다. 이로써 법도를 삼는 것은 진실로 불가하다.

2년((248년)) 봄 정월, 이찬 장훤(長萱)을 서불한으로 삼아 이로써 국정에 참여하게 하였다. 2월에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강화(講和)를 맺었다.

3년((249년)) 여름 4월, 왜인이 서불한 우로를 죽였다. 가을 7월, 궁 남쪽에 남당(南堂)또는 도당(都堂)이라고도 한다을 짓고, 양부(良夫)를 이찬으로 삼았다.

5년((251년)) 봄 정월, 남당에서 청정(聽政)을 시작했다. 한기부(漢祇部) 사람 부도(夫道)라는 자는 집이 가난하나 아첨하지 아니하고, 글쓰기와 셈을 잘 하여 그 때 저명하였다. 왕이 그를 불러 아찬으로 삼고, 물장고(物藏庫)로서 사무를 맡겼다.

7년((253년)) 여름 4월, 용이 궁궐 동쪽 못에 나타났다. 금성 남쪽의 넘어진 버드나무가 스스로 일어났다. 5월부터 7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시조묘[7]와 명산(名山)에 빌고 제사지내니, 비로소 비가 내렸다. 굶주린 해여서, 도적이 많았다.

9년((255년)) 가을 9월, 백제가 침략해 오니, 일벌찬 익종(翊宗)이 귀곡(槐谷) 서쪽에서 맞서 싸웠으나, 적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겨울 10월, 백제가 봉산성(烽山城)을 공격하였으나, 항복하지 않았다.

10년((256년)) 봄 3월, 나라 동쪽 바다에서 큰 물고기 세 마리가 나왔는데, 길이가 세 길이고, 높이가 한 길 두 자였다. 겨울 10월 그뭄에 일식이 있었다.

13년((259년)) 가을 7월, 가뭄과 메뚜기로 그 해는 흉년이 들었고, 도둑이 많았다.

14년((260년)) 여름 큰 비가 와서 산이 사십여 군데 무너졌다. 가을 7월, 살별이 동쪽에 이십오일을 (머물다가) 사라졌다.

15년((261년)) 봄 2월, 달벌성(達伐城)을 쌓고, 나마 극종(奈麻克宗)을 성주로 삼았다. 3월, 백제가 사신을 보내 화해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겨울 12월 28일, 왕이 갑자기 병이 나서 훙서하였다.

미추 이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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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추 이사금(味鄒尼師今)이 왕위에 올랐다.또는 미조(味照)라고도 한다. 성은 김씨이다. 어머니는 박씨로 갈문왕 이칠(伊柒)의 딸이다. 왕비 석씨 광명부인(光明夫人)은 조분왕의 딸이다. 그((미추 이사금))의 선조는 알지이다. 계림(雞林)에서 나와 탈해왕(脱解王)이 그를 얻어다가 궁중에서 키웠다. 뒤에 벼슬을 내려 대보(大輔)로 삼았다. 알지는 세한(勢漢)을 낳고, 세한은 아도(阿道)를 낳고, 아도는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는 욱보(郁甫)를 낳고, 욱보는 구도(仇道)를 낳으니, 구도가 즉 미추의 돌아가신 아버지이다. 첨해가 자식이 없어 나라 사람이 미추를 옹립하니, 이는 김씨가 나라를 가진 시초이다.

원년((262년)) 봄 3월, 용이 궁궐 동쪽 못에 나타났다. 가을 7월, 금성 서문이 불타고, 잇달아 인가(人家) 삼백여 구(區)를 태웠다.

2년((263년)) 봄 정월, 이찬 양부(良夫)에게 벼슬을 내려 서불한으로 삼고, 지내외병마사(知内外兵馬事)를 겸하게 했다. 2월, 친히 국조묘(國祖廟)에 제사를 지내고, 대사(大赦)하였다. 돌아가신 아버지 구도(仇道)를 추봉(追封)하여 갈문왕으로 삼았다.

3년((264년)) 봄 2월, 동쪽으로 순행하고 바다를 (바라보며) 망제(望祭)를 행하였다. 3월에 황산(黄山)으로 거둥하여, 고령자와 가난하여 스스로 존립할 수 없는 자를 방문하고, 이들을 진휼하였다.

5년((266년)) 가을 8월, 백제가 봉산성(烽山城)을 침략해 오자, 성주 직선(直宣)이 장사(壯士) 200명을 거느리고 나아가 이들을 치니, 적이 패하여 달아났다. 왕이 이를 듣고, 직선에게 벼슬을 내려 일길찬으로 삼고, 사졸(士卒)들에게 후하게 상을 내렸다.

7년((268년)) 봄과 여름에 비가 내리지 않아, 여러 신하들을 남당에 모아, 친히 정치와 형벌의 성공과 실패를 묻고, 또한, 관리 다섯 명을 보내 둘러보게 하여, 백성의 괴로움과 근심을 물었다.

11년((272년)) 봄 2월, 명령을 내려, 무릇 농사에 해를 주는 것이 있으면, 일체 이를 없애라고 하였다. 가을 7월, 서리와 우박이 곡식을 해쳤다. 겨울 11월 백제가 변경을 침략하였다.

15년((276년)) 봄 2월, 신료(臣寮)들이 궁실(宮室)을 다시 지을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께서는 심히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이라며) 따르지 않았다.

17년((278년)) 여름 4월, 폭풍이 나무를 뽑았다. 겨울 10월, 백제 병사가 와서 귀곡성(槐谷城)을 포위하니, 파진찬 정원(正源)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막았다.

19년((280년)) 여름 4월, 가물자, 죄수를 조사하여 (살폈다.)

20년((281년)) 봄 정월, 홍권(弘權)을 이찬으로 양질(良質)을 일길찬으로, 광겸(光謙)을 사찬으로 (각각) 벼슬을 내렸다. 2월, 시조묘를 뵈었다. 가을 9월, 양산(楊山) 서쪽에서 크게 사열(査閱)하였다.

22년((283년)) 가을 9월, 백제가 변경을 침략하였다. 겨울 10월, (백제가) 귀곡성(槐谷城)을 포위하니, 일길찬 양질에 명하여 병사를 이끌고 이를 막았다.

23년((284년)) 봄 2월, 나라 서쪽 여러 성을 순행하고 위무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훙서(薨逝)하여 대릉(大陵)또는 죽장릉(竹長陵)이다에 장사지냈다.

유례 이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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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례 이사금(儒禮尼師今)이 즉위하였다.고기》(古記)(에 의하면) 제3대 및 제14대 두 임금의 휘가 같아, 유리(儒理) 또는 유례(儒禮)라 이르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지 못한다. 조분왕(助賁王)의 장자이고, 어머니는 박씨(朴氏)이며 갈문왕 나음(奈音)의 딸인데, 일찍이 야행하다가 성광(星光)이 입에 들어가니, 임신하였다. (유례 이사금이) 태어난 저녁에 이향(異香)이 만실(滿室)하였다.

2년(285년) 봄 정월, 시조묘를 뵈었다. 2월 이찬 홍권(弘權)에게 벼슬을 주어 서불한(舒弗邯)으로 삼고, 기무(機務)를 맡겼다.

3년(286년) 봄 정월, 백제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였다. 3월 가뭄이 들었다.

4년(287년) 여름 4월, 왜인이 일례부(一禮部)부(部)는 군(郡)의 오기인 듯 하다.에 들어닥쳐 종화(縱火)하여 이를 불사르고, 일천명을 사로잡아 가버렸다.

6년(289년), 여름 5월, 왜병이 온다는 것을 듣고, 주즙(舟楫)을 정리하고 갑병(甲兵)을 고쳤다.

7년(290년), 여름 5월, 대수(大水)가 나고, 월성(月城)이 무너졌다.

8년(291년), 봄 정월, 말구(末仇)에게 이벌찬의 벼슬을 주었다. 말구는 충정(忠貞)하고 지략이 있었으므로, 왕은 늘 (그를) 만나 시정(施政)의 요강(要綱)을 물었다.

9년(292년), 여름 6월에 왜병이 사도성(沙道城)을 공함(攻陷)하니, 일길찬 대곡(大谷)에게 명하여 병사를 이끌고 이를 구하고 지키게 하였다. 가을 7월, 가물고 메뚜기가 (극성이었다.)

10년(293년), 봄 2월, 사도성(沙道城)을 개축하여, 사벌주(沙伐州)의 호민(豪民) 팔십여 가구를 옮기게 했다.

11년(294년) 여름, 왜병이 와서 장봉성(長峯城)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가을 7월, 다사군(多沙郡)이 가화(嘉禾)를 바쳤다.

12년(295년), 봄, 왕께서 신하에게 전하셨다. :"왜인이 우리 성읍을 자주 침범하여, 우리 백성(百姓)은 평화롭지 아니하다. 짐은 백제(百濟)와 동맹을 맺고, 바다를 항해해서 적을 공격하고싶다, 어떠한가?서불감(舒弗邯)홍권(弘權)對曰,우리는 수전(水戰)에 익숙하지 않다. 긴 여정엔 많은 불확실한 위험이 있고, 백제도 속임수가 많습니다. 또한, 언제나 우리나라를 점령하고 싶어하니, 아뢰옵게 송구하오나, 백제를 우리 동맹으로 만들긴 어려울것입니다. 왕께서 “좋다” 말씁하셨다.

14년 춘정월에 지량(智良)을 이찬으로, 장흔(長昕)을 일길찬로, 순선(順宣)을 사찬(沙飡)으로 삼았다. 이서고국(伊西古國),來攻금성(金城), 우리는 크게 거병하여 방어하였다. 우린 그들을 멈출수 없다. 적군이 갑자기 쳐들어왔고, 그들의 수는 셀 수 없었다.사람들이 모두 죽엽을 끼우고 있다.우리군으로 적들을 헤치웠다. 다음에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사람들이 또는 죽엽 수만개가 죽장릉(竹長陵)에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 由是,국인(國人)이 이르기를, 선왕이 신병(神兵)으로써 전쟁을 도왔다고 하였다.

15년 춘2월에 경도(京都)에 안개가 짙어 사람을 분별할 수 없었는데, 5일이 (지나서) 비가 그쳤다. 겨울 12월 왕이 훙서하였다.

기림 이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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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림(基臨)또는 기립(基立)이라 한다.이사금이 즉위하였다. 조분이사금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걸숙이(乞淑伊)또는 걸숙(乞淑)이라 한다. 조분의 손자이다. 性寬厚,人皆稱之

2월 봄 정월, 장흔에게 이찬(伊飡) 겸 지내외병마사(知内外兵馬事)의 벼슬을 주었다. 二月,祀始祖廟

3년, 봄 정월, 왜와 교류를 섭렵하였고, 비렬홀에 방문하여, 나이 지긋한 자와 가난한자를 만나서 다른양의 곡식을 공급했다. 3월, 우두주(牛頭州)에 이르러, 태백산에서 망제(望祭)를 지냈고, 낙랑(樂浪)・대방(帶方)두 나라는 신라에게 항복하였다.

5년, 봄 여름 가물다.

7년,秋八月,여덟번째 달, 샘이 범람가 났다. 아홉번째 해, 수도에 지진이 나서 백성들의 집이 파괴되고, 백성들이 피해를 입었다.

10년,가을신라(新羅)라는 국명을 재사용하게 되었다.

13년, 여름 5월, 왕이 많이 편찮으셨고, 안과 밖의 모든 죄수들을 석방하셨다. 여섯번째 해, 왕이 운명하셨다.

흘해 이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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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해 이사금이 왕으로 즉위하셨다. 그는 내해 이사금의 증손자이자, 그의 아버지는 삭산석우로였다. 어머니는 명원부인(命元夫人)으로, 조분왕(助賁王)의 딸이다. 으로는 그의 왕을위해 많은 업적을 성취하였고, 서발한(舒弗邯)이 되었다. 그는 흘해의 장막순리함과 총명하고 순수하였으며, 평범하지 않은 일을 하였다. 그리고 제후(諸侯)에게 말하였다: “우리가족에게 위대함을 줄 자는 바로 이 아이다.” 이때에 이르러, 기림(基臨)이 훙서하였는데, 아들이 없었다. 제후(諸侯)는 상의후에 말하였다, “흘해는 어리나 성인의 성숙함을 지녔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왕의 자리로 지지하였다.

2년 봄 정월, 급리(急利)를 아찬으로 삼고 시정(施政)의 요강(要綱)을 맡기고, 그와 지내외병마사(知内外兵馬事), 二月, 왕께서 조상의 신전에서 자신을 희생하셨다.

3년 봄 3월, 왜국 왕이 사신을 보내 아들을 위해 구혼하므로, 아찬 급리(急利)의 딸을 그에게 보냈다.

4년 가을 7월, 가뭄과 메뚜기로 (인해), 백성이 굶주리니 관리를 보내 그들을 구휼하였다.

5년,정월,옥급이를 이찬으로 승급하였고. 2월, 왕께서 궁궐을 재건하셨다.

8년, 봄과 여름, 가뭄이 있었다. 왕은 죄수들의 기록을 조사한다음, 많은 이들을 석방하였다.

9년, 봄이월, 그는 명령을 내리셨다: “지금까지 가뭄과 재앙으로 수확이 순탄치 못하고 성숙하지 못하였다. 오늘, 우린 토양을 비옥하게 하고, 농업을 복돋우어야 한다.

21년, 비로소 벽골지(碧骨池)를 열었는데, 둑의 길이가 일천팔백 보(歩)였다.

28년, 봄이월, (왕) 그는 사절단을 백제로 보내었다. 3월, 비가 내렸고 우박이 내렸다. 여름, 4월, 빙결이 졌다.

35년 봄이월, 왜에서 사절단을 보내 그의딸과 결혼을 청했다. (왕은) 그는 그의 딸이 (다른자와) 결혼에 임박하여 거절하였다. 여름 4월에 폭풍이 궁 남쪽의 큰 나무를 뽑았다.

36년, 봄정월, 강세를 이벌찬으로 승급하였다. 2월, 왜가 절교하였다.

,三十七年, 왜의 적군이 풍도에 갑자기 나타나서 해변의 가족들과 마을들을 소탕질 하였다. 그리고, 금성에서 전투를 벌였다. 왕은 병사를 보내어 공격을 명했다. 지벌찬이 말하길, “저 도둑들은 멀리서 왔고, 지쳤을 겁니다. 그들을 지치게 기다리는것은 어떠합니까?” 왕은 동의하고, 문들을 닫아서 절대 나가지 않았다.

39년, 궁궐의 정수(井水)가 갑자기 넘쳤다.

41년 春三月,황새들이 월성 구석에 앉았다. 여름 4월에 큰 비가 열흘간 내려, 평지의 물이 삼,사척에 (달하고,) 중신들과 백성의 집이 떠내려갔다. 열세개의 산이 붕괴되었다.

47년,왕이 운명하셨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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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원문은 이를 신해(辛亥)일로 기록하고 있으나, 당시의 일식 기록을 대조해 볼 때, 음력 1월 1일, 양력 2월 18일에 일식이 있었고, 이 날은 병오일이므로 바로잡는다. List of solar eclipses in the 2nd century 참조.
  2. 위키낱말사전: 신라 때 각 주(州)의 으뜸 벼슬. 급벌찬에서 이찬까지의 벼슬 중에서 임명되었는데, 지증왕 6년(505)에 처음으로 설치하여 문무왕 원년(661)에 총관(摠管)으로 고쳤다. 이러한 설명은 이미 벌휴 이사금 때에 군주를 두었다는 본 조의 기사와 맞지 않는다.
  3. 圍.원문에 ‘國’이라고 적었으나 명백히 오기이다.
  4. 옥산서원본에는 윗 부분이 𥫗 아랫 부분이 叔으로 되어 있으나, 유니코드에서 이러한 글자를 찾을 수 없고, 콩을 뜻하는 글자로 보인다. 국사편찬위원회의 데이터베이스에서도 이 글자를 菽(콩 숙)으로 처리하였다.
  5. 원문은 貴이나, 오자로 보인다.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집필자: 신종원) 참조.
  6. 한서》(漢書) 〈권063〉여태자(戾太子) 거(據) 조(條) 참조.
  7. 옥산서원본에는 "시"(始)자가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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