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삼국유사/권제1
왕력 제일
[편집]삼국유사三國遺事 | 왕력 제일王曆第一 | |||
전한 선제前漢宣帝 | 신라新羅 | |||
오봉五鳳년간(갑자甲子(기원전57년)부터 4四년간,기원전54년까지) | 제1대 혁거세성은 박이며, 알에서 태어났다, 나이 열세 살 때인 갑자년(기원전 57년)에 즉위하고, 60년을 재위하였다. [왕비는] 아이영 [또는] 아영이다. 국호를 서라벌, 또는 서라, 혹은 사라 혹은 계림이라고 불렀다. 말하기를, 탈해왕 때에 이르러 계림의 호칭을 두었다.第一赫居世姓朴卵生年十 三甲子即位在位六十年𢓛[1]娥伊英娥英國號徐羅 伐,又徐伐,或斯羅或雞林之說,至脫解王時始置雞 林之号 | |||
감로甘露년간(무진戊辰(기원전53년)부터 4四년간, 기원전50년까지) | ||||
황룡黃龍년간임신壬申(기원전49년)) | ||||
원제元帝 | ||||
초원初元년간(계유癸酉(기원전48년)부터 5五년간, 기원전44년까지) | ||||
영광永光년간(무인戊寅(기원전43년)부터 5五년간, 기원전 39년까지) | 고구려高麗 | |||
건소建昭년간(계미癸未(기원전38년)부터 5[2]년간, 기원전34년까지) | 갑신년(기원전37년)에 금성을 쌓았다.甲申築金城 | 제1대 동명왕第一東明王 갑신년에 즉위하여 팔년을 다스리고, 성이 고씨이며, 이름은 주몽 또는 추몽이라 하며, 단군의 아들이다.甲申立十一八年姓高名年蒙,一作鄒蒙,壇君之子。 | ||
성제成帝 | ||||
건시建始년간(기축己丑(기원전32년)부터 4四년 후 기원전 28년까지) |
하평河平계사癸巳4년 | ||||
양삭陽朔정유丁酉4년 | ||||
홍가鴻嘉신축辛丑4년 | ||||
제2대 유리왕또는 누리 또는 (유)류라고 한다. 동명의 아들이며, 임인년[3]에 즉위하여 36년간을 다스렸다. 성은 해(解)씨이다.第二琉璃王一作累利又(孺)留,東明子,立壬寅 理三十六年姓解氏 | 백제百濟 | |||
영시永始을사乙巳4년 | 제1대 온조왕 동명의 셋째 또는 둘째 아들이며 계묘년[4]에 즉위하여 45년을 재위하였다. 위례성(혹은 사천)에 도읍을 두었다. 지금의 두산이다. 第一。溫祚王東明第三子圭第二,癸夘(立)在位四十五年,都慰禮城,一云蛇川,今杜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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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연元延을유乙酉4년 | ||||
애제哀帝이二 | ||||
애제哀帝 | ||||
건평建平을묘乙卯4년 | 병진년[5]에 한산으로 도읍을 옮겼다. 지금의 광주(廣州)이다. 丙辰,移都漢山,今廣州。 | |||
원수元壽기미己未2년 | ||||
평제平帝 |
원시元始신유辛酉칠七년 | 신라제2 남해차차웅羅第二南解次次雄 | 고구려麗 | 백제濟 | 가락洛 |
유자孺子 | 아버지는 혁거세, 어머니는 알영이고 성은 박이며, 왕비는 운제부인이다.父赫居世,母閼英,姓朴氏,妃雲帝夫人。갑자년에 왕위에 올라 20년을 다스렸다. 甲子(在)立理二十年이 왕위 또한 거서간이라 부른다.此王位亦云居西干 | 계해癸亥년에도읍을 국내성으로 옮겼다.移都國內城또한 불내성이라고도 부른다.亦云不而城 | ||
초시初始무진戊辰2二년 | ||||
신실新室 | ||||
건국建國기사己巳5五년 | ||||
천봉天鳳갑술甲戌6六년 | 제3대 대무신왕第三大武神王이름은 무휼, 또는 미류라 한다. 名無恤,一作味留,성은 해씨이고 유리왕의 셋째 아들이다.姓解氏,琉璃王第三子。무인년에 재위에 올라 26년을 다스렸다.戊寅在位二十六年。 | |||
지봉地鳳경진庚辰3三년 | 제3대 노례第三弩禮일명 ‘노’이다.一作弩니질금尼叱今아버지는 남해 차차웅, 어머니는 운제부인이다.父南解,母雲帝,왕비는 사요왕의 딸 김씨이다.妃辭要王之女金氏。갑신년에 재위에 올라 33년을 다스렸다.甲申在位三十三年,니질금은 또한 니사금이라고도 한다.尼叱今或作尼師今。 | |||
경시更始계미癸未2二년 | ||||
후한 광무제後漢光武帝 | ||||
건무建武을유乙酉31三十一년 | 제4대 민중왕第四閔中王이름은 읍주, 성은 해씨이며 대호의 아들이다.名邑朱姓解氏,大虎之子。갑진년에 재위에 올라 4년을 다스렸다.甲辰在位四年。 | 제2대 다루왕第二多婁王온조의 둘째 아들이다. 溫祚第二子,무자년에 재위에 올라 49년을 다스렸다.戊子在位四十九(年)[6] | 가락국駕洛國또는 가야라 하고 지금의 금주이다.一作伽耶今金州수로왕首露王임인년 2월에 알에서 났다.壬寅二月卵生 | |
제5대 모본왕 第五慕本王민중의 형이이다. 이름은 애류, 또는 우이다. 閔中之兄,名愛留,一作憂。무신년에 재위에 올라 5년을 다스렸다.戊申在位五年。 | [7] | 그 달에 즉위하여 158년을 다스렸다.是月即位,在位一百五十八年,금알에서 태어났으므로 성이 김씨이다.因金卵而生,故姓金氏。《개황력》에 실린 바이다.開皇曆載 | ||
제6대 국조왕第六國祖王 | ||||
중원中元병진丙辰2二년 | 제4대 탈해第四脫解또는 토해라고도 한다一作吐解니질금尼叱今 | 이름은 궁이다. 또한 태조왕이라고도 한다.名宮,亦云太祖王,계축년에 재위에 올라 93년을 다스렸다.癸丑在位九十三年。후한전에 이르기를 처음 태어나자 눈을 떠서 볼 수 있었다 한다.後漢傳云初生開目能視,뒤에 동모(同母) 동생 차대왕에게 왕위를 넘겼다.後遜位子母弟次大王。 | ||
명제明帝 | 석씨이고 아버지는 완하국의 함달파왕 또는 화하국왕이다. 昔氏父琓夏國含達婆王,一作花夏國王。어머니는 적녀국의 딸이다.母積女國王之女,왕비는 남해왕의 따라 아로부인이다. 妃南解王之女阿老夫人。정사년에 재위에 올라 23년을 다스렸다.丁巳在位二十三年,왕이 붕어하자 말◌소정구에서 수장하고 뼈로 형체를 만들어 안동악에 〔안치하니〕, 지금의 동악대왕이다. 王崩,水葬末◌疏井丘中塑骨。安東岳,今東岳大王。 | |||
영년永年무오戊午18十八년 | ||||
장제章帝 | ||||
건초建初병자丙子18十八년 | 제5대 파사니질금第五婆娑尼叱今성은 박씨이고 아버지는 노례왕이며, 어머니는 사요왕의 딸이고, 왕비는 사초부인이다. 姓朴氏,父弩禮王,母辭要王之女妃史肖夫人。경진년에 재위에 올라 12년간 다스렸다.庚辰在位十二年。 | 제3대 사루왕 第三巳婁王,다루의 아들이고, 정축년에 재위에 올라 55년간 다스렸다.多婁子,丁丑在位五十五年。 | ||
원화元和갑신甲申3三년 | ||||
장화章和정해丁亥2二년 | ||||
화제和帝 |
영원永元기축己丑17十七년 | 신라羅 | 고구려麗 | 백제濟 | |
상제殤帝 | ||||
원흥元興을사乙巳 | ||||
안제安帝 | ||||
연평延平병오丙午 | ||||
영초永初정미丁未7七년 | 제6대 지마니질금第六祇磨尼叱今, | |||
원초元初갑인甲寅6六년 | 또는 지미라고도 한다.一作祇味,성은 박씨이고 아버지는 파사 이사금, 어머니는 사초부인이며, 왕비는 마제국왕의 딸 ◌례부인 일명 애례이며 김씨이다. 姓朴氏,父婆娑,母史肖夫人,妃磨帝國王之女。◌禮夫人,一作愛禮金氏,임자년에 왕위에 올라 23년을 다스렸다.壬子在位二十三年。그 왕대에 음질국(지금의 안강) 및 압량국(지금의 ◌山)을 멸하였다. 是王代滅音質國今安康及押梁國今◌山。 | |||
영녕永寧경신庚申 | ||||
건광建光신유辛酉 | ||||
연광延光임술壬戌4四년 | ||||
순제順帝 |
영건永建병인丙寅(126년)6六년(131년) | 제7대 일성니질금第七逸聖尼叱今, | 제4대 개루왕第四蓋婁王, | ||
양가陽嘉임신壬申(132년)4四년(135년) | 아버지는 노례왕의 형 혹은 지마왕이다. 父弩禮王之兄,或云祇磨王 왕비는 ◌례부인으로, 일지갈문왕의 딸이다.妃◌禮夫人日知葛文王之父[8]◌◌례부인은 지마왕의 딸이다. ◌◌禮夫人〔祇〕磨王之女 어머니는 이간생부인 혹은 운◌◌부인 박씨이다. 母伊刊生夫人或云◌◌王夫人朴氏。갑술(134년)에 재위에 올라 20년을 다스렸다.甲戌在位二十年。 | 사루왕의 아들이다. 巳婁子,무진(128년)에 재위에 올라 38년을 다스렸다.戊辰在位三十八年。 | ||
영화永和병자丙子(136년)6六년(141년) | ||||
한안漢安임오壬午(142년)2二년(143년) | ||||
건강建康甲申(144년) | ||||
충제沖帝 | ||||
영가永嘉을유乙酉(145년) | ||||
질제〔質〕帝 | ||||
본초本初병술丙戌(146년) | 제7대 차대왕第七次大王이름은 수이다.名遂, | |||
환제桓帝 | 동일한 어머니에서 태어난 국조왕[9]의 아우이다.國祖王母弟,병술(146년)에 재위에 올라 19년을 다스렸다.丙戌在位十九年。 | |||
건화建和정해丁亥(147년)3三년(149년) |
화평和平경인庚寅년간(150년) | 신라羅 | 고구려麗 | 백제濟 | 가락洛 |
원가元嘉년간(신묘辛卯(151년)부터 2二년을 더한 해(153년)까지) | ||||
영흥永興년간(계사癸巳(153년)부터 2二년간, 154년까지) | 제3대 아달라 니질금 第八阿達羅尼叱今 | |||
영수永壽년간(을미乙未(155년)부터 3三년을 더한 해(158년)까지) | 을사乙巳(165년)국조왕이 119세였는데, 國祖王年百十九歲 형 둘[10]이 함께 〔이복 동생인 〕새 왕[11]에게 시해되었다.兄二王俱見弑于新王 | |||
연희延熹년간(무술戊戌(158년)부터 9九년을 더한 해(167년)까지) | 또 왜국패 又與倭國梖◌◌◌◌嶺。[12]입현은 지금의 미륵대원의 동쪽 고개를 말한다.立峴今彌勒大院東嶺是也。 | 제8대 신대왕 第八新大王이름이 ◌◌인데 또는 백구라고도 한다.名◌◌一作伯句,을사(165년)년에 재위하여 14년을 다스렸다.乙巳在位十四年。 | 제5대 초고왕 第五肖古王,또한 소고라고도 한다.一作素古,개루의 아들이다. 蓋婁子。병오년(166년)에 즉위하여 15년을 그 자리에 있었다.丙午在位五十年。 | |
영강永康년간(정미丁未(167년)) | ||||
영제靈帝 | ||||
건녕建寧년간(무신戊申(168년)부터 4四년을 더한 해(172년)까지) | ||||
희평熹平년간(壬子임자(172년)부터 6六년을 더한 해 (178년)까지 | ||||
광화光和년간(무오戊午(178년)부터 6六년을 더한 해(184년)까지 | 제9대 고국천왕 第九故國川王,이름은 남호인데 혹은 이모라고도 한다. 기미년[13](179년)에 즉위하여 名男虎,或云夷謨,己◌在位 | |||
중평中平년간(갑자甲子(184년)부터 5五년을 더한 해(189년)까지 | 제9대 벌휴니질금第九伐休尼叱今 |
홍농왕과 헌제洪農又献帝 | 20년을 다스렸다.理二十年。국천 또는 국양이라 말하니 이는 곧 장지의 이름이다.國川亦曰國壞,乃葬地名。 | |||
영한永漢년간기사己巳(189년) | ||||
초평初平년간(경오庚午(190년)부터 4四년간, 곧 193년까지) | ||||
흥평興平년간(갑술甲戌(194년)부터 2二년간, 곧 195년까지) | ||||
건안建安년간병자丙子(196년)부터 | 제10대 나해니질금 第十奈解尼叱今 | 제10대 산상왕 第十山上王 | 제6대 구수왕 第六仇首王,귀수라고도 한다.초고의 아들이다. 一作貴須,肖古之子。갑오년(214년)에 즉위하여 20년을 다스렸다. 甲午立理二十年。 | 제2대 거등왕 第二居登王,수로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허황후이다.首露子,母許皇后。기묘년(199년)에 즉위하여 55년을 다스렸다. 己卯立理五十五年,성은 김씨이다.姓金氏。 |
조위 문제曹魏文帝 | ||||
황초黃初년간경자庚子(220년)부터 7七년간(226년까지) | ||||
명제明帝 | 제11대 조분 니질금 第十一助賁尼叱今, | |||
태화太[14]和년간정미丁未(227년)부터 6六년 뒤인 233년까지 | 제11대 동천왕 第十一東川王 | |||
청룡青龍년간계축癸丑(233년)부터 4四년 뒤인 237년까지 | 제7대 사반왕 第七沙泮王沙◌◌◌◌라고도 한다. 구수왕의 아들이다. 즉위하자마자 폐위되었다. 一作沙◌◌◌◌仇首之子立即廢 | |||
경초景初년간정사丁巳(237년)부터 3三년간(239년까지) |
제왕齊王[15] | 신라羅 | 고구려麗 | 백제濟 | 가락洛 |
정시正始년간(경신庚申(240년)부터 9九 뒤인 249년까지) | 제12대 이해 니질금 第十二理解尼叱今 또는 첨해왕이라고도 한다.一作詀解王 석씨 조분왕의 동모제이다. 昔氏助賁王之同母弟也。정묘년(247년)에 즉위하여 15년을 다스렸다. 丁卯立理十五年 고구려와 사신을 통교하기 시작하였다.始與高麗通聘。 | 제12대 중천왕〔第十二中川王〕[16] | 제8대 고이왕 第八古爾王,초고의 동모제이다.[17] 肖故之母弟,갑인년(234년)에 즉위하여 52년을 다스렸다.甲寅立理五十二年。 | |
가평嘉平년간(己巳기사(249년)부터 5五년 뒤인 254년까지) | ||||
고귀향高貴鄉。[18] | ||||
정원正元년간(갑술甲戌(254년)부터 2二년 뒤인 256년까지) | ||||
감로甘露년간(병자丙子(256년)부터 4四년 뒤인 260년까지) | ||||
진류왕陳留王[19] | ||||
경원景元(경진庚辰(260년)부터 4四년 뒤인 264년까지) | 제13대 미추니질금第十三未鄒尼叱今,또는 미소, 미조, 미소라고도 한다.一作味炤,又未祖,又未召,성은 김씨이며, 〔김씨로서는〕 처음 즉위하였다. 姓金氏,始立 아버지는 구도갈문왕이고, 어머니는 생호인데, 술례부인이라고도 하며, 이배갈문왕의 딸이며, 박씨이다. 父仇道葛文王,母生乎,一作述禮夫人。伊非葛文王之女,朴氏 왕비는 제분왕의 딸 광명랑이다 妃諸賁王之女光明娘。임오년에 즉위하여 22년을 다스렸다.〔壬午〕立理二十二年。 | |||
서진 호제西晉虎帝 | 제3대 마품왕 第三麻品王,아머지는 거등왕이고, 어머니는 천부경 신보의 딸, 언금정부인이다. 기묘년에 즉위하여 父居登王,母泉府卿申輔之女,言今貞夫人。己卯立 | |||
태시泰始년간(을유乙酉(265년)부터 10十년 간, (274년)까지 | 제13대 서천왕第十三西川王 이름은 약로, 또는 약우이다.名藥盧,又若友,경인년庚寅(270년) |
태강大[20]康년간경자庚子(280년)부터 10[21]년간(289년까지) | 제14대 유례니질금第十四儒禮尼叱今, | 에 즉위하여 20년을 다스렸다.立理二十年。 | 제9대 책계왕 第九責稽王, | 32년을 다스렸다.理三十二年。 |
혜제惠帝[22] | 또는 세리지왕이라고도 한다. 一作世里智王,석씨이며 아버지는 제분, 어머니는 ◌소부인이며 박씨이다. 昔氏。父諸賁母◌召夫人,朴氏,갑진년(284년)에 즉위하여 15년을 다스렸다. 월성을 보충하여 쌓았다. 甲辰立治十五年。補築月城 | [23]제14대 봉상왕 第十四烽上王,또는 一云치창왕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상부이다. 雉菖王名相夫,임자년(292년)에 즉위하여 8년을 다스렸다. 壬子立治八年。 | 고이왕의 아들이며, 책체라고도 하나 이는 오류이다. 古尒子,一作責替誤,병오년(286년)에 즉위하여 12년을 다스렸다.丙午立治十二年。 | |
원강元康년간辛亥신해(291년)부터 9九년간 (299년까지) | ||||
영녕永寧辛酉신유(301년)부터 2二년간(302년까지) | 제15대 기림니질금 第十五 基臨尼叱今, | 제10대 분서왕 第十汾西王,책계의 아들로, 무오(298년)에 즉위하여 6년을 다스렸다. 責稽子,戊午立治六年。 | 제4대 거질미왕第四居叱彌王,또는 금물이라고도 한다. 一作今勿,아버지는 마품, 어머니는 호구이다. 신해(291년)에 즉위하여 55년을 다스렸다.父麻品,母好仇,辛亥立治五十五年。 | |
태안大[24]安년간壬戌임술(302년)부터 2二년간(303년까지) | 또는 기립왕이라고도 한다.一作基立王,석씨이며 제분왕의 둘째 아들이다 昔氏諸賁王之第二子也,어머니는 아이◌부인이다. 母阿尒◌夫人。무오(298년)에 즉위하여 12년을 다스렸다. 戊午立治十二年。 | 제15대 미천왕 第十五美川王,또는 호양이라고도 한다. 一云好禳,이름은 을불 또는 우불이다. 경신(300년)에 즉위하여 31년을 다스렸다.名乙弗,又瀀弗,庚申立理三十一年。 | ||
영흥永興년간甲子갑자(304년)부터 3三년간(306년까지) | 제11대 비류왕 第十一比流王,구자의 둘째 아들이며, 사반의 아우이다. 仇者第二子,沙泮之弟也,갑자(304년)에 즉위하여 40년을 다스렸다.甲子立治四十年。 | |||
광희光熙년간丙寅병인(306년) | 정묘(307년)는 국호를 사라라 일컬은 해이다. ‘신’자는 덕업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것이고, ‘라’자는 사방의 백성[氏]을 망라한다는 뜻이다. 혹은 지증왕·법흥왕을 이어주는 조상[世]이라고도 한다. 丁卯年是國号曰斯羅。新者,德業日新,羅者網羅四方之氏云。或系智證法㒷之世 | |||
회제懷帝 | ||||
영가永嘉년간정묘丁卯(307년)부터 6六년 뒤(313년까지) | 제16대 걸해니질금 第十六乞解尼叱今 | |||
민제愍帝 | 석씨이며 아버지는 우로음 각간이며 찰해왕의 둘째 아들이다. 경오(310년)에 즉위하여 16년을 다스렸다. 이때에 백제군이 침입해오기 시작하였다. 昔氏父于老音角干即察解王第二子也,庚午立治十六年。是王代百濟兵始耒侵。 | |||
건흥建興년간계유癸酉(313년)부터 4四년 뒤(317년까지) |
기이 권제1(紀異卷第一)
[편집]머릿말. 무릇 옛 성인(聖人)이 바야흐로 예악(禮樂)으로 나라를 일으키시고 인의(仁義)로 가르침을 베푸는 데 있어 괴력난신(怪力亂神)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25] 그러나 제왕(帝王)이 장차 흥할 때 부명(符命)[26]에 응하거나 도록(圖籙)[27]을 받아 반드시 여느 사람과 다른 점이 있은 연후에야 능히 큰 변화를 타고 대기(大器)를 잡고 대업(大業)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므로 황하(黃河)에서 그림[28]이 나왔고 낙수(洛水)에서 글[29]이 나와서 성인이 일어났다. 무지개가 신모(神母)를 휘어감아 복희(伏羲)를 낳았으며 용(龍)이 여등(女登)에게 감응하여 염제(炎帝)를 낳았으며 황아(皇娥)가 궁상(窮桑)의 들판에서 놀다가 자칭 백제[30]의 아들이라는 신동과 정을 통하여 소호(小昊)를 낳았다. 간적(簡狄)은 알을 삼키고설(契)을 낳았으며 강원(姜嫄)은 발자국을 밟고 기(弃)를 낳았다. 요(堯)는 잉태된 지 14개월 만에 태어났으며 용(龍)이 큰 못에서 교접하여 패공(沛公)을 낳았다. 이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어찌 다 기록할 수 있으랴? 그러므로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이한 데에서 나온 것이 어찌 괴이하다 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신비스러운 기적이 모든 편(篇)의 첫머리에 실린 것은 그 뜻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고조선왕검조선(古朝鮮王儉朝鮮)
[편집]《위서(魏書)》[31]에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단군(壇君)[32] 왕검(王倹)이 아사달(阿斯逹)《산해경(山海經)》에 이르기를 무엽산(無葉山)이라 하였고 또한 백악(白岳)이라고도 하였으니 백주(白州) 땅[33] 또는 개성(開城) 동쪽에 있으니, 지금의 백악궁(白岳宮)[34]이 이것이다.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 나라를 세워 조선(朝鮮)이라 불렀는데 중국의 요(堯) 임금[35]과 같은 시기였다.
《고기》(古記)[36]에 이르기를, 옛날에 환인(桓因)[37] 제석(帝釋)[38]을 말한다.의 서자(庶子) 환웅(桓雄)[39]이 있었는데 (환웅은) 항상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탐내어 (다스리기를 원했다). 아버지는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산(三危山)과 태백산(太伯山)[40]을 내려다보니, 인간 세계를 널리 이롭게 할 만한 곳이었다. 이에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어, 내려가서 세상 사람을 다스리게 했다. 환웅은 무리 삼천명을 거느리고 태백산(太伯山) 꼭대기태백(太伯)은 곧 묘향산(妙香山)[41]이다의 신단수(神壇樹)[42] 아래에 내려와서 이 곳을 신시(神市)라 불렀다. 이분을 환웅천왕(桓雄天王)[43]이라 한다. 그는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 · 생명 · 질병 · 형벌 · 선악을 주관하고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의 일을 주관하여 인간 세계를 다스려 교화시켰다.
이때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같은 굴에서 살았는데,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항상 빌었다. 이에 환웅은 신령한 쑥 한 다발과 마늘 스무 개를 주며, 말했다.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 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는다면 곧 사람이 될 것이다.” 곰과 범은 이를 받아서 먹었다. 삼칠일(三七日, 21일)간 금기를 지킨 곰은 여자로 변했으나, 범은 금기를 지키지 못해 사람이 되지 못했다. 웅녀(熊女)는 혼인할 상대가 없었으므로, 항상 단수(壇樹)[44] 아래에서 잉태하기를 기원했다. 환웅은 이에 잠시 사람으로 변하여 결혼하였더니, (웅녀는)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가 곧 단군 왕검(壇君 王倹)이다. (그는) 당고(唐高)[45][46]가 왕위에 오른 지 50년이 되는 경인(庚寅)년 당(唐)의 요(堯)임금 즉위 원년은 무진(戊辰)인즉 50년은 정사(丁巳)요 경인이 아니다. (사실이) 아닐까[47] 의심스럽다.에 평양성(平壤城) 지금의 서경(西亰)이다.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국호를 조선이라 불렀다. 다시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白岳山阿斯逹)로 옮겼다. 그 곳을 궁홀산(弓忽山), 혹은 방홀산(方忽山) 또는 금미달(今彌達)이라 불렀다. 그는 여기서 1천5백 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주나라 무왕(武王)[48][49] 이 왕위에 오른 기묘(己卯)년에 무왕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封)하니, 단군(壇君)[50]은 이에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겨갔다가, 후에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서 산신(山神)이 되었는데, 이때 나이가 1908세였다.
당(唐)나라의 《배구전(裵矩傳)》에 이르기를, 고구려〔高麗〕는 본디 고죽국(孤竹國)지금의 해주(海州)[51] 이었는데 주(周)나라가 기자(箕子)에게 봉함으로써 조선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漢)나라가 이를 삼군(三郡)으로 나누어 다스렸는데, 이 삼군이 현도(玄菟)·낙랑(樂浪)·대방(帶方)북대방(北帶方)이다.이다. 《통전(通典)》에는 또 이런 말이 있다. 《한서(漢書)》에는 진번(眞番)·임둔(臨屯)·낙랑(樂浪)·현도(玄菟)의 사군(四郡)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서는 삼군으로 되어 있다고 하고 이름도 같지 않으니 무슨 까닭인가?
위만조선(魏滿朝鮮)
[편집]《전한서(漢書)》 〈조선전(朝鮮傳)〉[52]에 이르기를[53], 연(燕)나라[54] 때부터 일찍이 진번(眞番)·조선 안사고(顔師古)가 이르기를, 전국(戰國) 시대에 연나라가 처음으로 이 땅을 침략해 얻었다.을 침략하여 얻었고, 거기에 관리를 두고 보루를 쌓게 하였다. 진(秦)나라가 연나라를 멸망시키자 (위만조선(魏滿朝鮮)은) 요동(遼東)의 외곽 지역에 속하게 되었다. 한(漢)나라가 일어났지만 (위만조선이) 멀어서 지키기 어렵다고 하여, 다시 요동(遼東)의 옛 요새를 고쳐, 패수(浿水)까지를 경계로 삼아 안사고가 이르기를, 패수는 낙랑군에 있다.(이를) 연나라에 속하게 하였다.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배반하여 흉노(凶奴)로 들어가자,[55]연나라 사람 위만(魏滿)이 망명하여 천여 명의 무리를 모아서 동쪽으로 요새를 빠져 달아나 패수를 건너 진(秦)나라의 빈 땅의 아래위 보루에서 살면서 진번 ·조선의 만이(蠻夷)들과 옛 연나라 · 제(齊)나라의 망명자들을 점차 복속하게 하고, 왕이 되어 왕검(王儉)[56] 을 도읍으로 삼았다.[57] 이기(李寄)가 말하기를 (왕검은) 지명이라 하고, 신하(臣下) 찬(讚)[58]이 말하기를 왕검성(王倹城)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 한다. 병사로써 위협하고 침략하며, 그 이웃의 소읍들을 항복하게 하니, 진번(真畨) · 임둔(臨屯)이 모두 와서 복속하였고 사방이 수천리였다.[59]
아들을 거쳐 손자 우거(右渠)안사고가 이르기를, 손자의 이름이 우거라 하였다.에 이르러, 진번 · 진국(辰國)이 천자를 뵈옵기 위해 글을 올리고자 하였으나, (우거가) 가로막아, 통하지 못했다. 안사고가 말하기를 진(辰)국은 진한(辰韓)을 말한다. 원봉(元封)[60] 2년(기원전 109년)에 한나라는 섭하(渉何)로 하여금 우거(右渠)를 회유하였으나, 마침내 (우거는) 조서(詔書)을 받들기를 거부하였다. 섭하가 물러나 국경에 이르러 패수(浿水)에 닿자, (섭하는) 마부(馬夫)[61]를 시켜 섭하를 전송하러 온 자인 조선 비왕(裨王)[62] 장(長)안사고가 말하기를 (장(長)은) 전송하러 온 자의 이름이다.을 찔러 죽였다. 이어서, 패수를 건너 말을 달려 요새로 들어가, 드디어 귀국 보고를 하였다. 천자[63]는 섭하를 요동 동부도위(遼東 東部都尉)[64]로 삼았다. 조선은 섭하를 원망하고, 그를 공격하여 죽였다. [65] 천자가 누선장군(樓船將軍)[66] 양복을 파견하여, 옛 제(齊)나라 땅[67]으로부터 보하이 해[68]를 건너니 군사가 5만에 달했다.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69]는 우거를 토벌하고자 요동에서 나왔다. 우거는 발병(發兵)하여 험한 곳에서 막았다. 누선장군은 옛 제나라 땅 출신의 칠천명을 거느리고 먼저 왕검(王倹)에 도달하였다. 우거는 성을 지키다가 누선(장군)의 군사가 적은 것을 알고 꾀를 내어 누선(장군)을 물리치니 누선(장군)은 패하여 달아났다. 양복은 무리를 잃고 산중으로 숨어서, (화를) 면했다. 좌장군은 조선 패수의 서쪽 군을 공격하였으나, 능히 깨뜨리지 못했다.[70]
천자는 두 장수가 유리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이내, 위산(衛山)을 보내어 군대의 위엄으로써 가서 우거를 타일렀다. 우거는 항복을 청하여 태자(太子)[71]를 보내고 말을 바쳤다. 사람들 만여 명이 무기를 들고 패수를 막 건너려 하자, 사자 위산과 좌장군은 변고가 있을 것을 의심하여 태자에게, 이미 항복했으니 무기를 소지하지 말라고〔毋〕[72] 말했다. 태자 역시 사자(使者)가 사술을 쓴 것이 아닐지 의심하여 마침내 패수를 건너지 않고 다시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천자에게 이 일을) 알리니[73], 천자가 위산의 목을 베었다.[74] 좌장군은 패수 상류의 군을 격파하고, 곧 나아가 성 아래에 이르러 그 서북쪽을 포위하였다. 누선(장군)도 역시 가서, 모여서 성 남쪽에 자리잡았다. 우거가 수개월을 견고하게 지켜내니 능히 없애지를 못했다. [75]
천자는, 오래되도록 결판을 낼 수 없자, 옛 제남(濟南) 태수(太守)[76] 공손수(公孫遂)로 하여금, 가서, 일을 맡음으로써 자의대로 그(우거)를 정벌하도록 하였다[77]. 공손수가 도착하여 누선장군을 포박하고 그 병사를 병합하여 좌장군(左[78]將軍)과 더불어 조선을 급히 공격하였다. 조선 상(朝鮮相) 노인(路人)·상 한도(相韓陶)·니계 상 참(尼谿相參)·장군 왕겹(王唊) 사고가 말하기를, 니계는 지명이므로 네 명이다.이 함께 항복을 도모하였으나, 왕이 이를 수긍하지 않았다. 한도 ‧ 왕겹 ‧ 노인은 모두 한나라에 항복하였는데, 노인은 도중에 죽었다.[79]
원봉(元封) 3년(기원전 108년) 여름, 니계 상 참은 아랫사람을 시켜 왕 우거를 죽이고 와서 항복했으나 왕검성(王倹[80]城)이 항복하지 않으니, 우거의 대신(大臣) 성기(成己)가 다시 모반하였다. 좌장군(左[81]將軍)은 우거의 아들 장(長)과 노인의 아들 최(最)를 시켜 그 백성에게 고유(告諭)하고, 모의하여 성기를 죽이니 마침내 조선을 평정하고 진번(真畨) ‧ 임둔(臨屯) ‧ 낙랑(樂浪) ‧현도(玄菟) 4군으로 하였다.[82]
마한(馬韓)
[편집](《삼국지(三國志)》의) 〈위지(魏志)〉에 이르기를, 위만(衛[83]滿)이 조선을 공격하자 준왕(準王)은 궁인과 좌우의 신하들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한(韓)나라 땅으로 남하하여, 나라를 세우고 마한(馬韓)이라고 이름지었다 한다. 견훤(甄萱)이 태조(太[84]祖)에게 올린 글에 이르기를, 옛날에 마한이 앞서고 혁거세(赫世勃)가 발흥하자 이 때에 백제(百濟)가 금마산(金馬山)[85]에서 나라를 세웠다 한다. 최치원(崔致逺)은 마한이 고구려이며, 진한(辰韓)이 신라라 한다. (《삼국사기》의) 〈본기〉에 의한 즉, 신라가 먼저 갑자(甲子)년[86]에 일어나고, 고구려가 후에 갑신(甲申)년[87]에 일어났는데, 이렇게 말하는 것은 (조선)왕 준(凖)을 두고 말하고 들은 것이다. 이로써, 동명(東明)이 일어난 것은 이미 마한을 아울렀기 때문이란 것을 알 수 있다.[88] 그러므로 고구려를 일컬어 마한이라 한다. 지금 세인들이 어떤 경우에는 금마산을 두고 마한이 백제가 된 것이라고 알고 있으나, 이는 대략적으로 잘못이며 뜬소문이다. 고구려 땅에 마읍산(馬邑山)[89][90]이 있으므로, 이름하여 마한이라 하였다.
사이(四夷) · 구이(九夷) · 구한(九韓) · 예맥(穢貊)이 있는데, 《주례(周禮)》에서 직방씨(職方氏)가 사이와 구맥(九貊)을 관장했다는 것은 동이(東夷)의 한 종족 즉 구이를 말하는 것이다. 《삼국사기》에서 이르기를 명주(溟州)는 옛 예국(穢國)인데 야인(野人)이 밭을 갈다가 예국왕(穢國王)의 도장을 얻어 이를 바쳤다 하였으며[91] 또한 춘주(春州)는 옛 우수주(牛首州)로 옛 맥국(貊國)이라 하였다. 그리고 또한 이르기를 지금의 삭주(朔州)를 맥국(貊國)이라고 하였고 또한 평양성(平壌城)도 맥국이라 하였다. 《회남자(淮南子)》의 주석(注)에서 이르기를 동쪽의 이(夷) (즉, 동이(東夷)는 아홉 종이 있다 하였고 《논어정의(論語正義)》[92]에 이르기를 구이란 첫째는 현토(玄菟), 둘째는 낙랑(樂浪), 셋째는 고려, 넷째는 만식(滿餙), 다섯째는 부유(鳬臾), 여섯째는 소가(素[93]家), 일곱째는 동도(東屠), 여덟째는 왜인(倭人), 아홉째는 천비(天鄙 )라 하였다. 《해동안홍기(海東安弘記)》[94]에 이르기를 구한(九韓)의 첫째는 일본(日夲), 둘째는 중화(中華), 셋째는 오월(吳越), 넷째는 탐라(乇[95]羅), 다섯째는 응유(鷹逰), 여섯째는 말갈(靺鞨), 일곱째는 단국(丹國), 여덟째는 여진(女真)[96], 아홉째는 예맥(穢貊)이라고 하였다.
이부(二府)
[편집]《전한서(前漢書)》(에 이르기를) 소제(昭帝) 시원(始元) 5년 (기원전 82년) 기해년(己亥)에 외부(外府) 2개를 설치하였으니, 이는 조선의 옛 땅 평나(平那) 및 현토군(玄菟郡) 등으로 평주도독부(平州都督府)를 삼고, 임둔(臨屯) 낙랑(樂浪) 등 양군(兩郡)의 땅에 동부도독부(東部都尉府)를 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이르되, 조선전(朝鮮傳)에는 진번 현토 임둔 낙랑 등 넷이다. (그런데) 지금 (이 글에서) 평나는 있으나 진번은 없으니 아마도 한개의 땅에 두개의 이름이 있는 것 같다.
칠십이국(七十二國)
[편집]《통전(通典)》의 기록을 보면, “조선에 남아 있는 백성은 모두 70여 나라로 나누어져 있는데, 각 나라 모두가 사방 백 리였다”고 했다. 《후한서》에는 말하기를, “서한(西漢)이 조선의 옛 땅에 처음에는 네 군(郡)을 두었다가 후에는 두 부(府)를 두었는데, 법령이 점점 번거로워지자 78나라로 나누게 되었고 나라가 각각 만호(萬户)였다. 마한(馬韓)은 서쪽에 있어 54개의 작은 읍을 차지했는데 모두 나라라 불렀고, 진한(辰韓)은 동쪽에 있어 12개의 작은 읍을 차지했는데 마찬가지로 각 읍을 나라라 불렀으며, 변한(卞韓)은 남쪽에 있어 12개의 작은 읍을 차지했는데 각각 나라라 불렀다”고 했다.
낙랑국(樂浪國)
[편집]전한(前漢) 때에 처음으로 낙랑군(樂浪郡)을 두었다. 응소(應邵)가 이르기를 옛 조선국(朝鮮國)이라 하였다. 《신당서(新唐書)》의 주(注)에 이르기를 평양성(平壤城)은 옛 한(漢)나라의 낙랑군(樂浪郡)이라 하였다. 《국사(國史)》에 이르기를 혁거세(赫居世) 30년(기원전 28년)에 낙랑인(樂浪人)들이 와서 투항하였고,[97] 또 (신라의) 3대 노례왕(弩禮王) 4년(27년)에 고구려의 3대 무휼왕(無恤王)이 낙랑을 쳐서 이를 멸망시키니 그 나라 사람들이 대방(帶方)북대방(北帶方)이다 (사람들)과 함께 신라에 투항하였다. [98]또 무휼왕 27년(서기 44년)에 광무제(光武[99]帝)가 사(使)를 보내 낙랑을 치고 [100]그 땅을 얻어 군현(郡縣)으로 삼으니, 살수(薩水) 이남이 한(漢)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상기의 여러 글들로 미루어보아 낙랑은 즉 평양성임이 마땅하다. 또는 이르기를 낙랑을 중두산(中頭山) 아래 말갈(靺鞨)의 경계라 하고 살수를 지금의 대동강(大同江)이라 하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 상세하지 않다. 또한 백제의 온조왕(溫祚王)이 이르기를,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곧 아마도 옛 한나라 때에 낙랑군의 속현인 땅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신라인들 또한 (스스로를) 칭하기를 낙랑이라 하였으므로 이제 본조(本朝. 즉, 고려)에서도 이로 인하여 낙랑군부인(樂浪郡夫人)이라는 명칭을 쓴다. 또 태조(太祖)가 김부(金傳)에게 딸을 시집보내면서 또한 이르기를 낙랑공주(樂浪公主)라 하였다.
북대방(北帶方)
[편집]북대방(北帶方)은 본래 죽담성(竹覃城)이다. 신라 노례왕(弩禮王) 4년(기원전 27년)에 대방인들과 낙랑인들이 함께 신라에 투항했다.[101] 이는 모두 전한(前漢) 때에 설치한 두 군의 이름인데, 그 후에 주제넘게도 ‘나라’라고 부르다가 이제 항복한 것이다.
남대방(南帶方)
[편집]조위(曹魏) 때(220~265년)에 처음으로 남대방군(南帶方郡)지금의 남원부(南原府)이다을 두었기 때문에 (남대방이라) 불렀다. 대방의 남쪽으로 바닷물이 1천리인데 이를 한해(澣海)라 한다후한(後漢)의 건안 때(196~220년)에 마한 남쪽의 황무지를 대방군으로 삼으니 왜(倭)와 한(韓)이 이에 속했다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
말갈또는 물길과 발해(靺鞨一作勿吉渤海)
[편집]《통전(通典)》에 이르기를 발해(渤海)는 본래 속말말갈(栗未靺鞨)이다. 그 추장 대조영(大柞榮)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를 진단(震旦)이라 하였다. 선천(先天) 년간당 현종(玄宗)의 임자(王[102]子)년(712년)에 말갈의 칭호를 버리고 오직 발해라고 칭하기 시작하였다. 개원(開元)[103] 7년기미(己未)년(719년) 대조영이 죽으니 시호를 고왕(高王)이라 하였고 세자가 세습하여 왕위에 오르니 명황(明皇)[104]이 왕위 계승의 책문(冊文)〔典冊〕을 내려 왕위를 세습하게 하였으나, 사사로이 연호를 고치고 마침내 해동성국(海東盛國)이 되었다. (그) 땅에는 5경(五京) · 15부(十五府) · 62주(六十二州)가 있었다. 후당(後唐) 천성(天成)[105] 초년(926년)에 거란(契丹)이 이를 부수고 그 후 거란의 통제하는 바가 되었다.《삼국사기》에 이르기를 의봉(儀鳳) 3년 고종(高宗) 무인(戊寅)년(678년)에 고구려의 남은 자손이 한데 모여 북쪽으로 태백산(太伯山) 밑을 의지하여 국호를 발해라 하였다. 개원(開元) 20년(732년)에 명황은 장수를 보내어 이를 토벌하였다. 또한 성덕왕(聖德王) 33년(734년) 현종(玄宗) 갑술(甲戌)년[106]에 발해말갈이 바다를 건너 당나라 등주(登州)를 침범하니, 현종이 이를 토벌하였다고 하였다. 다시 《신라고기(新羅古記)》에 이르기를 고구려의 엣 장수 조영(柞榮)의 성은 대씨(大氏)이고, 패잔병을 모았다. 태백산 남쪽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발해라 하였다. 위 여러 문서에 의하면 발해는 곧 말갈의 별종(別種)이다.
단지, 개국과 합병〔에 관한 내용이〕 같지 않을 뿐이다. 《지장도》(指掌圖)[107]에 의하면, 발해는 만리장성 동북쪽 모서리 바깥에 있었다. 가탐(賈耽)[108]의 《군국지》(郡國志)에 이르기를 발해국의 압록·남해·부여·추성(鴨淥·南海·扶餘·橻城) 4부(部)는 더불어 고구려의 옛 땅이고, 신라 천정군(泉井郡)지리지(地理志)에, 삭주(朔州)에 속한 현에 천정군(泉井郡)이 있다. 지금의 용주(湧州)이다.에서 추성부(橻城府)에 이르기까지 39역(驛)이 있다고 하였다. 《삼국사기》에 이르기를 백제 말년에 발해·말갈·신라가 백제의 땅을 나누었다. 이에 의하면, 말갈과 발해가 또한 나뉘어 두 나라가 되었다. 신라인들이 말하기를, “북쪽에는 말갈, 남쪽에는 왜인, 서쪽에는 백제가 있으니, 이것이 나라의 해악이다. 또한 말갈은 아슬라주(阿瑟羅州)에 접한다.”라고 하였다. 또한, 《동명기》(東明記)에 이르기를 “졸본성(卒本城) 땅은 말갈혹은 지금의 동진(東真)과 붙어 있다”고 하였다. 신라 지마왕(祇麻王) 14년을축(乙丑)년(125년) 말갈 병사가 크게 북쪽 국경을 넘어, 대령책(大嶺柵)을 습격하고, 니하(泥河)를 건넜다. 《후위서》(後魏書)는 말갈을 물길(勿吉)이라 하였다. 《지장도》에 이르기를 파루(挹屢)와 물길은 모두 숙신(肅慎)이다.
흑수와 옥저(黑水沃沮)
[편집]소동파(蘇東坡)의 《지장도》(指掌圖)에 의하면 진한(辰韓)의 북쪽에 남·북흑수(黑水)가 있는데, 동명제(東明帝)[109]에 의하여, 즉위 10년(기원전 27년)에 북옥저(北沃沮)를 멸하였다. 온조왕(溫柞王) 42년(서기 24년) 남옥저(南沃沮)의 20여 가호(家戶)가 와서 투항하였다. 신라, 또한, 혁거세(赫居世) 53년[110](기원전 5년) 동옥저(東沃沮)가 와서 좋은 말〔馬〕을 바쳤다. 즉, "동옥저"도 있는 것이다. 《지장도》는 흑수가 장성(長城) 북쪽에 있고, 옥저가 장성 남쪽에 있다 한다.
이서국(伊西國)
[편집]노례왕(弩禮王)[111] 14년(서기 37년)에 이서국(伊西國) 사람이 와서 금성(金城)을 공격하였다. 운문사(雲門寺)에 예로부터 전하는 《제사납전기(諸寺納田記)》에 이르기를 “정관(貞觀) 6년 임진년(壬辰年, 631년)에 이서군의 금오촌(今郚村) 영미사(零味寺)의 납전(納田)”이라 했는데, 금오촌은 지금의 청도(淸道) 땅이니 곧 청도는 옛날의 이서군이다.
오가야(五伽耶)
[편집]《가락기찬》(駕洛記贊)에 이르기를 한가닥 자줏빛 노끈을 드리워, 여섯 개의 둥근 알을 내리니, 다섯 개는 각 읍으로 귀속하고, 한 개는 이 성(城)에 있으니 곧, 그 하나는 수로왕(首露王)이 되었다. 나머지 다섯 개는 다섯 가야(伽耶)의 왕이 되었다. 금관이 다섯이라는 숫자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본조(本朝) (곧, 고려) 《사략》(史略)에 또한, 금관(金官)을 숫자로 헤아려 창녕(昌寧)으로 함부로 기록함은 잘못이다.
아라(阿羅)또는 아야(阿耶)가야지금의 함안(咸安)이다·고녕(古寧)가야지금의 함녕(咸寧)이다·대(大)가야지금의 고령(高靈)이다·성산(星山)가야지금의 경산현벽진(京山玄碧珍)이다·소(小)가야지금의 고성(固城)이다이다. 또한, 본조(本朝) 사략(史略)에 이르기를, 태조(太祖)가 천복(天福)[112] 5년(940년) 경자(庚子)년에 오가야(五伽耶)의 이름을 고쳤으니, 첫째가 금관(金官)김해부(金海府)가 된다, 둘째가 고녕(古寧)가리현(加利縣)이 된다, 셋째가 비대(非大)지금의 창녕(昌寧)이란 것은 고령(高靈)을 와전한 것 같아 두렵다, 나머지 둘이 아라(阿羅)·성산(星山)전과 같이, 성산은 혹은 벽진(碧珍)가야이다.이다.
북부여(北扶餘)
[편집]《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전한(前漢) 선제(宣帝) 신작(神爵) 3년 임술(壬戌)년(기원전 59년) 4월 8일에 천제(天帝)가 흘승골성(訖升骨城)대요(大遼) 의주(醫州) 경계에 있다에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내려왔다. 그 곳에 도읍을 정하여 왕이라 일컫고 국호를 북부여(北扶餘)라 하고, 스스로 이름을 해모수(解慕漱)[113]라 하였다.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扶婁)[114]라 하고 해(解)를 성(姓)으로 삼았다. 왕(해부루)은 후에 상제(上帝)의 명령으로 동부여(東扶餘)로 도읍을 옮겼다. 동명제는 북부여를 이어받아 졸본주(卒本州)에 도읍을 정하고 졸본부여(卒本扶餘)를 이룩하니, 곧 고구려의 시조이다.
동부여(東扶餘)
[편집]북부여(北扶餘)의 왕 해부루[115]의 재상 아란불(阿蘭弗)의 꿈에 천제(天帝)가 내려와 이르기를, 장차 내 자손을 보내어 여기에 나라를 세울 것이니, 너는 이를 피하라이르되 동명(東明)이 장차 흥할 징조이다.. 동해의 바닷가에 가섭원(迦葉原)이라는 땅이 있어 토양이 기름지니, 도읍을 세우기에 좋다고 하였다. 아란불은 왕에게 그 곳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권하였고, 국호를 동부여라 하였다. 부루는 늙도록 아들이 없었다. 하루는 산천에 제사를 지내어 후사를 구하였다. (부루가) 탄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러, 큰 돌을 마주하고 의기롭게 우는 것을 보았다. 왕이 이를 기이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그 돌을 굴리게 하니, 어린 아이가 있었는데, 금빛 개구리 모양이었다. 왕이 기뻐하여 말하기를, “이것은 하늘이 나에게 내려준 자식이로구나!” 하였다. 이에 맡아서 그를 키웠다. 이름하여 금와(金蛙)[116]라 부르고 그가 장성하자 태자로 삼았다. 부루가 붕어하였고, 금와가 후사를 이어 왕이 되었다. 그 다음에는 태자 대소(帶素)[117]에게 왕위를 전했다. 지황(地皇) 3년 임오(壬午)년(서기 22년)에 이르자, 고려왕 무휼(無恤)[118]이 그를 토벌하여 왕 대소를 죽이자, 나라가 없어졌다.
고구려(高句麗)
[편집]고구려는 즉 졸본부여(卒本扶餘)이다. 혹은 지금의 화주(和州) 또는 성주(成州) 등이라 하나 모두 오류이다. 졸본주는 요동(遼東) 경계에 있었다. 《삼국사기》 〈고려본기〉(高麗本記)에 이르기를, 시조 동명성제(東明聖帝)의 성은 언(言)[119]씨이고 휘(諱)는 주몽(朱蒙)이다. 이보다 앞서 북부여왕 해부루가 이미 그 땅을 피하여 동부여로 갔다. 또한 부루가 붕어하고, 금와가 후사를 이었다. 이때에 (금와는) 태백산(太伯山)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한 여자를 얻어, (사연을) 물으니 (그 여자가) 대답하기를 “저는 하백(河柏)의 딸이고 이름은 유화(柳花)입니다. 여러 자매들과 함께 놀러 나왔습니다. 이 때에 한 남자가 있어, 스스로 말하기를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 하였습니다. (그가) 저를 유혹하여, 웅신산(熊神山) 아래 압록강변에 있는 방(房) 중에서 사귀다가 가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단군기》(壇君記)에 이르기를, (단)군이 서하(西河) 하백의 딸과 함께 사랑을 이루어, 아이를 낳으니 이름을 부루라 하였다. 지금 이 기록에 의한 즉, 해모수는 하백의 딸을 사사로이 취하여, 뒤에 주몽을 낳았다 한다. 《단군기》에 이르기를 아이를 낳아 이름을 부루라 하였다. (그러므로) 부루는 주몽과는 이복 형제이다. “어버이께서 저를 질책하기를 중매도 없이 , (외간) 사람을 따랐다 하니, 마침내 여기에 귀양와 살게 되었습니다.”라 하였다. 금와가 이를 괴이하게 여기어 방 속에 (그 여자를) 가두고 닫았다. (그런데) 햇빛이 (그 여자를) 비추어 , (그 여자는) 몸을 움직여 이를 피하였다. 햇빛이 다시 따라가, 비추어, 이로 인하여 잉태하여 알 하나를 낳았다. 크기가 다섯 되쯤 되었다. 왕이 이를 개·돼지에게 버렸으나 모두 먹지 않았고, 또 길 가운데 버렸으나 소와 말이 피하였고, 들에 버렸더니 새와 짐승이 덮어주었다. 왕이 이를 쪼개고자 하였으나 깨뜨리지 못하고 이내 그 어미에게 돌려 주었다. 그 어미가 이를 물건으로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아이가 있어 껍질을 깨고 나왔는데 골격과 외모가 뛰어나고 기이하였다. 겨우 나이 일곱 살에 철이 들어 남달랐고,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니) 백발백중이었다. 그 나라의 속어(俗語)에 활 잘 쏘는 이를 주몽(朱蒙)이라 하므로, 그것이 이름이 되었다. 금와(金蛙)에게 일곱 아들이 있었는데 언제나 주몽과 더불어 놀았으나 그 재주가 능히 (주몽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 맏이 대소(帶素)가 왕께 말하여 이르되, “주몽은 사람에게서 나지 않았으니 만약 일찍 도모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려우니 그를 제거해 주소서.” 라 하였다. (그러나) 왕이 듣지 않고 그로 하여금 말을 기르게 하였다. 주몽이 준마(駿馬)를 알아내어 먹이를 줄여 여위게 만들었고, 둔하고 느린 말을 잘 길러 살지게 하였더니 왕이 살진 놈은 자신이 타고 여윈 놈은 주몽에게 주었다. 여러 왕자들이 여러 신하 장수들과 더불어 그를 죽이려고 꾀하였으나 주몽의 어머니가 이를 알아채고 알려 이르되, “나랏사람들이 장차 너를 해치려 한다. 너의 재주와 꾀로써 어느 곳인들 갈 수 없겠느냐? 마땅히 재빨리 그것을 꾀하라.”하였다. 이에 주몽은 오이(烏伊) 등 세 사람과 벗이 되어서 지엄수(至淹水)지금은 상세하지 않다.에 이르러 물에게 이르되, “내가 천제(天帝)의 아들, 하백(河伯)의 외손이오. 오늘 달아나고 있는데, 쫒는 자들이 거의 다가왔으니 어찌하리오?”라 하였다. 이에 물고기와 자라〔鱉〕가 떠올라 다리를 이루어 (주몽은) 건널 수 있었고 다리는 흩어져, 쫓아오던 기병들은 건널 수 없었다. 졸본주(卒本州)현토군(玄葂郡)의 경계이다.에 이르러 나아가 도읍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미처 궁실(宮室)을 지을 겨를이 없어 다만 비류수(沸流水) 위에 임시거처를 짓고 거기에 머물러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 하였는데 이는 고(高)씨를 성으로 삼았기 때문이다.본래 성은 해(解)이다. 지금 스스로 말하기를 천제의 아들이라 한다. 햇빛을 받아 태어났기 때문에 스스로 고씨라 하였다. 이 때 나이는 스물 두살, 한 효원제(孝元帝) 건소(建昭) 2년 갑신(甲申)년(기원전 37년)이었다. 고구려의 전성기 때, (가구수는) 21만508호(戶)였다. 《주림전》(珠琳傳) 제21권에 실린 바, 일찍이 영품리왕(寧稟離王)의 시녀가 임신을 하자, 점쟁이가 점을 쳐 말하기를 (아이가 태어나면)“귀인이 되어 반드시 왕이 될 것이오”라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내 자식이 아니니 반드시 그를 죽이리라” 하였다. 시녀가 말하기를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온지라 제가 임신을 하였사옵니다”라 하였다. 이윽고 아들을 낳자, 상서롭지 못하다고 이르고는 (돼지)우리에 (아이를) 버리자 돼지가 입김을 불어 (넣어 따뜻하게 해 주었다. 말)우리에 (아이를) 버리자 말이 젖을 먹였다. 이에 죽지 않게 되었고 마침내 부여(扶餘)의 왕이 되었다. 이는 곧 동명제(東明帝)가 졸본부여(卒本扶餘)의 왕이 되었다는 말이다. 이 졸본부여는 또한 북부여의 별도의 도읍이므로, 곧 부여왕이라고 한 것이다. 영품리는 부루왕(夫婁王)의 다른 호칭이다.
변한(卞韓) 백제(百濟)
[편집]또한 남부여(南扶餘)라고도 하니, 즉 사비성(泗泚城)이다.
신라시조 혁거세 즉위 19년 임오(壬午)년((기원전 39년))에 변한 사람이 나라를 바쳐 항복해 왔다. 《신·구당서》(新舊唐書)에 이르기를 변한의 먼 후손들은 낙랑(樂浪) 땅에 있다 한다. 《후한서》(後漢書)에 이르기를 변한은 남쪽에, 마한은 서쪽에, 진한(辰韓)은 동쪽에 있다 한다. 최치원(崔致遠)이 이르기를 변한은 백제라 한다. 《본기》(本記)에 의하면 온조(溫祚)가 홍가(鴻嘉) 4년 갑진(甲辰)년((기원전 17년))에 일으켰으므로, 혁거세·동명의 세대보다 40여년 늦은 것이다. 그런데, 《당서》(唐書)에 이르기를 변한의 먼 후손은 낙랑의 땅에 있다고 하는데, 이는 온조의 계통이 동명에서 나온 것이기에 이렇게 이른 것일 뿐이다. 혹은 어떤 사람이 낙랑의 땅에서 나와 변한에 나라를 세웠고, 마한 등과 더불어 대치한 것은 온조 이전에 있었던 것이고, 낙랑의 북쪽에 도읍을 삼은 바는 아니었다. 혹자는 함부로 구룡산(九龍山)이 또한 변나산(卞那山)이라고 지칭한다고 하여 고구려를 변한으로 보는데, 이는 대개 잘못 본 것이다. 마땅히 옛 현인의 말씀이 맞는 것이다. 백제의 땅에는 변산(卞山)이 있었으므로 변한(卞韓)이라 일렀다. 백제의 전성기 때에 (가구 수는) 십오만이천삼백 호였다.
진한(辰韓)
[편집]진한(辰韓, 또는 진한(秦韓))
《후한서》(後漢書)에 이르되, “진한(辰韓)의 어르신들이 스스로 말하기를, 진(秦)나라의 망명자들이 한국(韓國)으로 들어오니, 마한이 동쪽 경계의 땅을 나누어 이를 그들에게 주었다. 서로를 부를 때 ‘도(徒)’라고 하니, 이는 진(秦)나라 말과 비슷한 점이 있었으므로, 또는 그것을 이름하기를 진한(秦韓)이라 하였다. 열두개의 작은 나라가 있었고, 각 1만 가구였으며, 나라라고 칭하였다.” 라 하였다. 또, 최치원이 말하기를, “진한(辰韓)은 본디 연(燕)나라[120] 사람이 피신한 곳이다. 그러므로, 탁수(涿水)의 이름을 취하여, 거주하는 고을과 마을의 이름으로 불렀다. 이르되, 사탁(沙涿)·점탁(漸涿)등이다.”신라 사람의 방언은 탁(涿)을 ‘도’(道)라는 소리로 읽는다. 그러므로 지금 또는 사량(沙梁)이라 한다. 양(梁)또한 도(道)라고 읽는다. 신라의 전성기 때, 서울에는 17만 8936 가구(家口)였고, 1360 방(坊), 55리(里), 35채의 금입택(金入宅)부유하고 윤택한 큰 저택을 말한다.이 있었다. 그것은 남택(南宅)·북택(北宅)·우비소택(亐比所宅)·본피택(本彼宅)·양택(梁宅)·지상택(池上宅)본피부(本彼部)에 있다·재매정택(財買井宅)김유신(庾信) 공(公)의 조종(祖宗)이다.·북유택(北維宅)·남유택(南維宅)반향사(反香寺)의 하방(下坊)·대택(隊宅)·빈지택(賓支宅)반향사(反香寺)의 북쪽[121]〔〕·장사택(長沙宅)·상앵택(上櫻宅)·하앵택(下櫻宅)·수망택(水望宅)·천택(泉宅)·양상택(楊上宅)양(梁)의 남쪽·한기택(漢岐宅)법류사(法流寺)의 남쪽·비혈택(鼻穴宅)위와 같다·판적택(板積宅)분황사(芬皇寺)의 상방(上坊)·별교택(別教宅)천북(川北)·아남택(衙南宅)·금양종택(金楊宗宅)양관사(梁官寺)의 남쪽·곡수택(曲水宅)천북(川北)·유야택(柳也宅)·사하택(寺下宅)·사량택(沙梁宅)·정상택(井上宅)·이남택(里南宅)우소택(亐所宅)·사내곡택(思內曲宅)·지택(池宅)·사상택(寺上宅)대숙택(大宿宅)·임상택(林上宅)청룡지사(青龍之寺)의 동쪽에 못〔池〕이 있다.·교남택(橋南宅)·항질택(巷叱宅)본피부(本彼部)·누상택(樓上宅)·이상택(里上宅)·명남택(椧南宅)·정하택(井下宅)이다.
또 계절따라 노니는 저택
[편집]봄에는 동야택(東野宅), 여름에는 곡량택(谷良宅) 가을에는 구지택(仇知宅) 겨울에는 가이택(加伊宅)이다. 제49대 헌강대왕(憲康大王) 때, 성 안에 초가가 하나도 없었고, 구석이 닿아 있고, 담장이 연이어 있었다. 노랫 (소리)와 피리부는 (소리)가 길에 가득 차서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
신라시조 혁거세왕
[편집]신라시조 혁거세왕(新羅始祖 赫居世王)
진한(辰韓)의 땅에는 옛날 여섯 마을이 있었다. 첫째는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이니 그 남쪽은 지금의 담엄사(曇嚴寺)이다. 촌장을 알평(謁平)이라 일컫으며 처음에 표암봉(瓢嵓峯)에 내려왔으니, 이가 곧 급량부(及梁部) 이씨(李氏)의 조상이 되었다. 노례왕(奴礼王)[122] 9년((서기 32년))에 급량부(及梁部)라는 이름의 부(部)를 두었는데 본조(本朝)[123]의 태조 천복(天福)[124] 5년 경자년(庚子年, 940년)에 이름을 고쳐 중흥부(中興部)라 하였다. 파잠(波潛)[125]·동산(東山)·피상(彼上)·동촌(東村)이 여기에 속한다. 둘째는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이니 촌장을 소벌도리(蘇伐都利)라 일컫으며, 처음에 형산(兄山)에 내려왔으니 사도부‘梁’을 ‘도(道)’로 읽는다. 또는 ‘涿’이라 쓰지만 역시 음(音)은 ‘도(道)’이다. [126] 정씨(鄭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남산부(南山部)라 일컫는데 구량벌(仇良伐) · 마등오(麻等烏) · 도북(道北)· 회덕(迴徳) 등 남촌(南村)이 여기에 속한다. ‘지금은 ~라 일컫는다’고 하는 것은 태조가 설치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아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셋째는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이니 촌장을 구례마(俱禮馬 또는 仇禮馬)라 일컫는다. 처음에 이산(伊山, 개비산(皆比山)이라고도 한다)에 내려왔으니 이는 점량부(漸梁部 또는 漸涿部)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장복부(長福部)라 일컫는데, 박곡촌(朴谷村) 등 서촌(西村)이 여기에 속한다. 넷째는 취산진지촌(觜山珎支村)빈지(賔之), 빈자(賔子) 또는 영지(氷之)라고도 한다이니, 촌장을 지백호(智伯虎)라 일컫는다. 처음에 화산(花山)에 내려왔으니, 이는 본피부(夲彼部) 최씨(崔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통선부(通仙部)라 일컫는데, 시파(柴巴) 등 동남촌이 여기에 속한다. 최치원(致逺)은 곧 본피부 사람이니 지금 황룡사(皇龍寺) 남쪽과 미탄사(味呑寺) 남쪽에 옛 집터가 있어 이는 최후(崔侯, 최치원)의 고택이라 하니 아마도 명백한 것 같다. 다섯째는 금산가리촌(金山加里村)지금 금강산(金剛山) 백률사(栢栗寺)의 북쪽 산이다이니, 촌장을 기타(祗沱)지타(只沱)라고도 한다라 일컫는다. 처음에 명활산(明活山)으로 내려왔으니, 한기부(漢歧部 또는 韓歧部) 배씨(裴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가덕부(加徳部)라 일컫는데, 상하서지(上下西知)·내아(乃兒) 등 동촌(東村)이 여기에 속한다. 여섯째는 명활산 고야촌(明佸山 髙耶村 )인데, 촌장을 호진(虎珎)이라 일컫는다. 처음에 금강산으로 내려왔으니, 습비부(習比部) 설씨(薛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임천부(臨川部)인데, 물이촌(勿伊村)·잉구미촌(仍仇旀村)· 궐곡(闕谷)갈곡(葛谷)이라고도 한다 등 동북촌(東北村)이 여기에 속한다. 위의 글을 살펴보면, 이 육부(六部)의 조상은 모두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 같다. 유리이사금 9년(서기 32년)에 비로소 육부(六部)의 이름을 고치고, 또한 여섯 성(姓)을 주었다. 지금 풍속에서 중흥부(中興部)를 어머니로 삼고 장복부(長福部)를 아버지로 삼고 임천부(臨川部)를 아들로 삼고 가덕부(加徳部)를 딸로 삼으니 그 까닭은 상세치 않다. 전한(前漢) 지절(地節)[127] 원년 임자(壬子)년, 서기전 69년) 고본(古本)에 이르기를 건호(建虎)[128]원년(25년)이니 건원(建元)[129] 3년(서기전 138년)이니 한 것들은 다 잘못이다. 3월 초하룻날 6부의 조상들이 각각 자제들을 거느리고 다 함께 알천(閼川) 언덕 위에 모여 의논하기를 “우리들이 위로, 백성들을 다스릴 만한 임금이 없어, 백성들이 모두 방종하여 제멋대로 놀고 있으니 어찌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내어 그를 군주로 세워 나라를 창건하고 도읍을 정하지 않을 것이랴!” 하였다.
이때에 높은 곳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楊山) 아래, 나정(蘿井) 옆에 번개와 같이 이상한 기운이 땅으로 뻗고, 흰 말 한마리가 무릎을 꿇고 절하는 형태로 있었다. 이를 살펴보니, 자줏색 알 하나 또는 푸른 색 커다란 알이라고도 한다가 있었다. 말이 사람을 보더니 긴 울음소리를 내며 하늘로 올라갔다. 그 알을 잘라, 얼굴과 자태가 단정하고 아름다운 사내 아이를 얻었다. 놀랍고도 이상하여 아이를 동천(東泉)동천사(東泉寺)는 사뇌벌[詞腦野] 북쪽에 있다.에서 씻기니[130], 몸에는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모여 춤을 추며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청명했다. 이에, 이름을 혁거세왕(赫居世王) 아마도 향언일 것이다. 또는 불구내왕(弗矩內王)이라고도 하니 이는 광명(光明)으로써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서술자가 말하기를 “이는 서술성모(西述聖母)가 낳은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인이 선도성모(仙桃聖母)를 찬양하는 글에 ‘어진 인물을 임신하여 나라를 창건하라.’라는 구절이 있으니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는 계룡(雞龍)이 상서(祥瑞)로움을 나타내어 알영(閼英)을 낳았으니, 또한 서술성모의 현신(現身)이 아니겠는가!라 하고 왕위를 거슬한(居瑟邯) 혹은 거서간(居西干)이라고도 하니, 이는 [그가] 처음 입을 열 때에 자칭, 알지거서간(閼智居西干)이 크게 일어난다 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자칭에 따라 이렇게 불렀으니 그때부터 임금의 존칭으로 되었다.이라 하니 당시 사람들이 다투어 축하하여 말하기를 “지금 천자가 이미 이 땅에 내려왔으니 마땅히 덕이 있는 여군(女君)을 찾아 배필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 날, 사량리(沙梁里) 알영정(閼英井)또는 아리영정(娥利英井)이라고 한다 주변에서 계룡(雞龍)이 나타나서 그 왼쪽 옆구리에서 어린 아이가 태어났다.또는 용이 나타나서 죽고는 그 배를 갈라 그를 얻었다고도 한다 (아이의) 자태와 용모가 뛰어나게 예뻤다. 그런데 입술이 닭 부리를 닮았으므로 월성 북천(月城北川)에서 목욕시키니 그 부리가 떨어져 나갔다. 그러므로 그 개울의 이름도 발천(撥川)이라고 하였다. 궁실을 남산 서쪽 기슭지금의 창림사(昌林寺)에 짓고는 두 신성한 아이를 모시고 길렀다. 사내는 박〔瓠〕과 같이 생긴 알에서 나왔고, 향인들은 박을 박(朴)이라 이르므로, 그 성을 박으로 하였다. 계집은 그 아이가 나온 우물이름으로써 두 성스러운 이의 이름을 지었다. 나이가 열세 살 (오봉(五鳳) 원년 갑자년)에 이르자, 사내아이는 왕위에 오르고 계집아이는 왕후로 삼았다. 국호를 서라벌 또는 서벌 지금 세속에서 경(京)자의 뜻을 서벌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또는 사라(斯羅), 사로(斯盧)라 하였다. 처음에 왕이 계정(雞井)에서 났으므로 또는 계림국(雞林國)이라고도 하였다. 이는 계룡이 상서로움을 나타났기 때문이다. 일설에는, 탈해왕(脫解王) 시기에 김알지(金閼智)를 얻을 때에 숲 속에서 닭이 울었으므로 국호를 계림(雞林)으로 고쳤다 한다. 후세에는 신라(新羅)의 국호를 정했다. 나라를 61년 동안 다스렸다. 왕이 하늘로 올라가 7일 후에 유체(遺體)가 부서져 땅으로 떨어지고, 왕후 역시 죽었다 한다. 나라 사람들이 합장하려고 하였는데 큰 뱀이 있어서 (사람들을) 쫒아내고 못하게 하므로, 오체(五體)를 각기 장례지내고 오릉(五陵)으로 삼았다. 역시 이름을 사릉(蛇陵)이라고 하니 담엄사(曇嚴寺) 북쪽 릉이 이것이다. 태자 남해왕(南解王)이 왕위를 이었다.
제이 남해왕(第二南解王)
[편집]남해 거서간(南解居西干) 또는 차차웅(次次雄)이라고도 한다. 이는 존장(尊長)의 칭호이니 오직 이 왕만 이렇게 불렀다. 아버지는 혁거세, 어머니는 알영부인(閼英夫人), 왕비는 운제부인(雲帝夫人)또는 운제(雲梯)라 하며, 지금의 영일현(迎日縣) 서쪽에 운제산 성모(雲梯山聖母)가 있는데, 가뭄에 기도를 하면 응답이 있다이다. 전한 평제(前漢平帝) 원시(元始)[131]4년 갑자년(서기 4년)에 즉위하여 21년동안 다스리다가 지황(地皇)[132] 4년 갑신년(서기 24년)에 이르러 붕어하였다. 이 왕을 삼황(三皇)의 첫번째[133]라고 부른다. 《삼국사》[134]에 의하면, 신라는 왕을 칭하기를 거서간이라 하는데, 진한 말로 왕(王)을 뜻하며, 혹은 존귀한 사람을 뜻하기도 한다. 또는 차차웅(次次雄) 또는 자충(慈充)이라고도 한다. 김대문(金大問)이 이르기를, “차차웅은 방언으로 무당을 이른다. 무당은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주관하는 까닭에 세상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고 공경하여 마침내 큰 어른을 일컬어 자충(慈充)이라 하였다.”라고 하였다. 또는 이사금(尼師今)이라 하는데 이는 치(齒)로써 다스린다는 뜻이다. 처음에 남해왕이 죽고 그 아들 노례(弩禮)가 왕위를 탈해(脫解)에게 양보하였다. 탈해가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성스럽고 지혜로운 사람은 이〔齒〕가 많다고 한다’ 하였다. 그러므로, 떡을 씹어서 시험하였다 한다. 예로부터 전하는 바가 이와 같다. 혹은 이르기를 마립간(麻立干)또는 마수간(麻袖干)이라고도 한다.이라 하였다. 김대문이 이르기를, ‘마립’이란 방언으로 ‘말뚝’을 일컫는다. 말뚝 표지를 직위에 따라 설치하므로, 왕의 말뚝이 주(主)가 되고, 신하의 말뚝이 그 아래에 늘어선다. 이로 인하여, 이렇게 이름지었다.
사론(史論)하자면, 신라는 거서간(居西干)이라 칭하는데, 차차웅이 그 하나요, 이사금이 열여섯이요, 마립간이 넷이다. 신라말의 유명한 유학자 최치원이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을 지었는데, 모두 어느 왕(王)이라고 칭하였지, 거서간 등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어찌 그 말이 천박하다 하여 이를 칭하기에 부족하다 하는가? 이제 신라의 일을 기록하는 것이니, 방언을 갖춘 것은 또한 마땅하다. 신라인들이 무릇 추봉(追封)하는 자를 갈문왕이라고 칭하는데, (그 까닭은) 확실하지 않다. 아 왕대에 낙랑국 사람이 금성(金城)을 쳐들어 왔으나 이기지 못하고 되돌아갔다. 또한, 천봉(天鳳) 5년 무인(戊寅)년((서기 18년)), 고구려에 복종하는 일곱 나라가 와서 투항하였다.
제삼 노례왕(第三弩禮王)
[편집]박노례(朴弩禮) 니질금(尼叱今) 또는 유례왕(儒禮王)이다이 처음에 매부(妹夫) 탈해(脫解)에게 왕위를 양위하려 하자, 탈해가 이르기를, ‘무릇 덕이 있는 자는 치아가 많다고 하니, 치아의 무늬로서 그것을 시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이에 떡을 씹어 그것을 실험하였더니, 왕의 치아가 많았다. 그러므로 먼저 왕위에 올랐고, 말미암아 이질금이라 이름하였다. 이질금의 호칭은 이 왕대에서 시작한다. 유성공(劉聖公) 경시(更始) 원년(元年) ((서기 23년)), 계미(癸未)년에 즉위하여 (《삼국사기》의) 연표(年表)에 이르기를, 갑신년((서기 24년))에 즉위하였다 한다. 육부의 이름을 개정(改定)하였고, 이에 육성(六姓)을 하사하였으며, 비로소 도솔가(兜率歌)를 지었는데, 차사(嗟辭)와 사뇌격(詞腦格)이 있었다. 밭을 가는[135] 보습·장빙고(藏氷庫)·수레를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건무(建武)[136]18년((서기 42년)), 이서국(伊西國)을 쳐서 이를 멸하였다. 이 해에, 고려의 군사가 침략해 왔다.
제사 탈해왕(第四 脫解王)
[편집]탈해(脫解) 니질금〔齒叱今〕또는 토해 니사금(吐解尼師今)은 남해왕 때, 고본(古本)에 이르는 바, 임인년(壬寅年, (42년 또는 기원전 19년))에 도착하였다는 것은 오류가 있다. (임인년으로서) 가깝기로는 노례왕이 즉위한 초기보다 뒤의 것((42년))인데, 양위를 놓고 다투는 일은 없었다.[137] 앞선 것((기원전 19년))이라면 혁거세의 치세에 있는 것이다.[138] 그러므로, 임인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駕洛國海中有船來泊。
其國首露王與臣民鼓譟而迎。將欲留之。而舡乃飛走。至於雞林東下西知村阿珍浦今有上西知下西知村名時浦邊有一嫗。名阿珍義先。乃赫居王之海尺之母。
望之謂曰。此海中元無石嵒。何因鵲集而鳴。孥舡尋之。鵲集一舡上。 배 속에 함(函) 하나가 있었는데, 길이는 이십척에 너비는 십삼척이었다. 曳其船置於一樹林下。而未知凶乎吉乎。向天而誓爾俄而乃開見。 어느 단정한 남자와 칠보(七寶), 노비가 그 속에 가득 실려 있었다. 供給七日廼言曰。나는 본래 용성국(龍城國) 사람이다. 亦云正明國。或云琓夏國琓夏或作花廈國。龍城在倭東北一千里 我國嘗有 二十八龍王從人胎而生。自五歲六歲繼登王位。教萬民修正性命。而有八品姓骨。
然無棟擇。皆登大位。時我父王含達婆娉積女國王女為妃。오랫동안 자녀가 없었으므로 기도하여 자식을 바랬다.
7년후 큰 알 하나를 낳았다. 그리하여 대왕은 군신(群臣)들을 모아놓고 물었다. 人而生卵。古今未有。殆非吉祥。乃造樻置我。并七寶奴婢載於舡中。浮海而祝曰。任到有緣之地。立國成家。便有赤龍護舡而至此矣。言訖。그 동자(童子)는 지팡이를 끌어당겨 率二奴登吐含山上作石塚。留七日。望城中可居之地。見一峰如三日月。勢可久之地。乃下尋之。即瓠公宅也。乃設詭計。潛埋礪炭於其側。詰朝至門云。此是吾祖代家屋。瓠公云否。爭訟不決。乃告于官。
官曰。以何驗是汝家。童曰。我本治匠乍出鄰鄉。而人取居之。請堀地檢看。從之。果得礪炭。乃取而居為。이 때 남해왕은 탈해가 슬기로운 사람이란 것을 알았다. 以長公主妻之。是為阿尼夫人。一日吐解登東岳。迴程次令白衣索水飲之。白衣汲水。中路先嘗而進。其角盃貼於口不解。因而嘖之。白衣誓曰。爾後若近遙不敢先嘗。然後乃解。自此白衣讋服。不敢欺罔。今東岳中有一井。俗云遙乃井是也。及弩禮王崩。以光虎帝中元六年丁巳六月。乃登王位。以昔是吾家取他人家故。因姓昔氏。或云。因鵲開樻。故去鳥字姓昔氏。解樻脫卵而生。故因名脫解。在位二十三年。建初四年己卯崩葬疏川丘中。後有神詔。慎埋葬我骨。其髑髏周三尺二寸。身骨長九尺七寸。齒凝如一。骨節皆連瑣。所謂天下無敵力士之骨。碎為塑像。安闕內。神又報云。我骨置於東岳。故令安之一云崩後二十七世文虎王代。調露二年庚辰三月十五日辛酉。夜見夢於太宗。有老人貌甚威猛。曰我是脫解也。拔我骨於疏川丘。塑像安於工含山。王從其言。故至今國祀不絕。即東岳神也云
김알지(金閼智) 탈해왕대(脫解王代)
[편집]永平三年庚申一云中元六年。誤矣。中元盡二年而已八月四日。瓠公夜行月城西里。見大光明於始林中一作鳩林有紫雲從天垂地。雲中有黃金樻。掛於樹枝。
光自樻出。亦有白雞鳴於樹下。以狀聞於王。駕幸其林。開樻有童男。臥而即起。如赫居世之故事。故因其言。以閼智名之。閼智即鄉言小兒之稱也。抱載還闕。
鳥獸相隨。喜躍蹌蹌土擇吉日。태자의 지위에 책봉하였다. 後讓故婆娑。不即王位。因金樻而出。乃姓金氏。閼智生熱漢。漢生阿都。都生首留。留生郁部。部生俱道一作仇刀道生未鄒。鄒即王位。新羅金氏自閼智始。
연오랑(延烏郎)과 세오녀(細烏女)
[편집]제8대 아달라왕 즉위 4년 정유(丁酉)년(157년),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과 세오녀가 있었다. 부부는 동거하고 있었다. 하루는 연오가 바다에 가서 미역을 따는데, 갑자가 어느 바위 하나또는 물고기 한마리라 한다.가 (그를) 싣고는 일본으로 갔다. 나라 사람들이 이를 보고 말하기를, “이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라 하였고, 이에 (그를) 왕으로 세웠다.《일본제기(日本帝記)》에 따르면, 처음부터 끝까지 신라인이 왕이 된 바는 없다. 이는 곧 변방 고을의 소왕(小王)을 말하는 것이지, 진짜 왕이 아니다. 세오녀는 지아비가 돌아오지 않는 것을 괴이하게 여기고 그를 찾아나서, 지아비가 벗어놓은 신발과 마주쳤다. (세오녀) 역시 그 바위에 오르니, 바위가 또한 전처럼 (일본으로 그를) 싣고 가자, 그 나라 사람들이 놀랐다. 奏獻於王。夫婦相會立為貴妃。是時新羅日月無光。日者奏云。日月之精。降在我國。今去日本。故致斯怪。왕은 사신을 보내 두 사람을 구했다. 延烏曰。我到此國。天使然也。今何歸乎。雖然朕之妃有所織細綃。以此祭天可矣。仍賜其綃。使人來奏。依其言而祭之。然後日月如舊。
그 앏은 비단을 어고(御庫)에 보관하고 국보로 삼았다. 名其庫為貴妃庫祭天所名迎日縣。又都祈野。
末鄒王 竹葉軍
[편집]第十三末鄒尼叱今一作末祖又末古金閼智七世孫赫世紫纓仍有聖德。受禪于理解始登王位(今始稱王之陵為始祖堂。蓋以金始始登王位。故後代金氏諸王皆以末鄒為始祖。宜矣)。在位二十三年而崩。陵在興輪寺東。第十四儒理王代。이서국(伊西國) 사람이 와서 금성(金城)을 쳤다. 我大舉防禦。久不能抗。忽有異兵來助。皆珥竹葉。與我軍并力擊賊破之。軍退後不知所歸。但見竹葉積於末鄒陵前。乃知先王陰隲有功。因呼竹現陵。越三十六世惠恭王代。大曆十四年己未四月。忽有旋風。從廋信公塚起。中有一人乘駿馬如將軍儀狀。亦有衣甲器仗者四十許人。隨從而來。入於竹現陵。俄而陵中似有振動哭泣聲。或如告訴之音。其言曰。臣平生有輔時救難匡合之功。今為魂魄鎮護邦國。攘災救患之心暫無渝改。往者庚戌年。신(臣)의 자손은 죄도 없이 베어죽임을 당하였습니다. 君臣不念我之功烈。臣欲遠移他所。不復勞勤。願王允之。王答曰。惟我與公不護此邦。其如民庶何。公復努力如前。三請三不許。旋風乃還。王聞之懼。乃遣工臣金敬信。就金公陵謝過焉。為公立功德寶田三十結于鷲仙寺。以資冥福。寺乃金公討平壤後。植福所置故也。非末鄒之靈。無以遏金公之怒。王之護國不為不大矣。是以邦人懷德。與三山同祀而不墜。躋秩于五陵之上。稱大廟云。
내물왕또는 나밀왕이라고도 한다 김제상
[편집]제17대 나밀왕(那密王)이 즉위한 36년 경인(庚寅)년(390년)에 왜왕(倭王)이 보낸 사신이 내조(來朝)하여 말했다. “과군(寡君)께서 대왕(大王)이 신성(神聖)하다는 말을 듣고 신(臣) 등으로 하여금 백제(百濟)의 죄를 대왕께 아뢰게 하는 것입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왕자(王子) 한 분을 보내서 과군께 성심(誠心)을 표하게 하십시오.”이 때 왕은 셋째 아들 미해(美海)또는 미토희(未吐喜)라고도 한다.로 하여금 왜국에 사절로서 방문하게 하였다. (이때) 미해는 열 살이었다. 언사(言辭)와 동지(動止)가 아직 구비(具備)되지 못했으므로 내신(內臣) 박사람(朴娑覽)을 부사(副使)로 삼아 딸려 보냈다. 왜왕은 (이들을) 30년 (동안이나) 억류하여 돌려 보내지 않았다. 눌지왕(訥祗王)이 즉위한 3년 기미(己未)년(419년)에 이르러, 고구려(高句麗) 장수왕(長壽王)이 보낸 사신이 내조(來朝)하여 말했다. “과군께서 대왕의 아우 보해(寶海)가 빼어나고 지혜로우며 재예가 있다고 듣고 더불어 상친(相親)하기를 원하여 특히 소신(小臣)을 보내어 간청하는 바입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행심(幸甚)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화해하고 소통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아우 보해에게 명하여 고구려로 가게 하고, 내신(內臣) 김무알(金武謁)[139]을 보좌(補佐)로 삼아 그를 보냈는데, 장수왕도 (그들을) 억류(抑留)해 두고 돌려 보내지 않았다. (눌지왕) 10년 을축(乙丑)(년(425년))에 이르러 왕은 군신(群臣)들과 나라 안의 협객(俠客)들을 소집하고 친히 어연(御宴)을 베풀었다. 술을 따르고 마시기를 권하기를 세번 행하고, 모든 음악이 울려퍼지자 왕은 눈물을 흘리면서 여러 신하들에게 말했다. “옛날 우리 아버님께서는 성심껏 백성의 일을 생각하신 까닭에 사랑하는 아들을 동쪽 멀리 왜국(倭國)까지 보내셨다가 마침내 다시 만나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또 내가 왕위(王位)에 오른 뒤로 이웃 나라의 군사가 몹시 강성(强盛)하여 전쟁이 그칠 사이가 없었다. 그런데 유독 고구려만이 화친하자는 말이 있어서 나는 그 말을 믿고 아우를 고구려에 보냈던 바, 고구려에서도 또한 억류해 두고 돌려 보내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내 아무리 부귀(富貴)를 누린다 해도 일찍이 하루라도 이 일을 잊고 울지 않는 날이 없었다. 만일 이 두 아우를 만나 보고 함께 아버님 사당에 뵙게 된다면 온 나라 사람에게 은혜를 갚겠다. 누가 능히 이 계교를 이룰 수 있겠는가.” 이 말을 듣자 백관(百官)이 입을 모아 아뢰었다. “이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반드시 지혜와 용맹이 겸한 사람이라야만 될 것입니다. 신 등의 생각으로는 삽라군(歃羅郡) 태수(太守) 제상(堤上)이 가할까 합니다.” 이에 왕은 제상을 불러 물었다. 제상은 두 번 절하고 대답했다. “신이 듣기로는, 임금에게 근심이 있으면 신하가 욕을 당하며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는다고 합니다. 만일 일의 어렵고 쉬운 것을 따져서 행한다면 이는 충성스럽지 못한 것이옵고 또 죽고 사는 것을 생각한 뒤에 움직인다면 이는 용맹이 없는 것입니다. 신이 비록 불초(不肖)하오나 왕의 명령을 받아 행하기를 원합니다.” 왕은 매우 가상히 여겨 술잔을 나누어 마시고 손을 잡아 작별해 보냈다. 제상은 왕의 앞에서 명령을 받고 바로 북해(北海)길로 향하여 변복(變服)하고 고구려에 들어가 보해가 있는 곳으로 가서 함께 도망할 일자(日字)를 약속해 놓았다. 제상은 먼저 5월 15일에 고성(高城) 수구(水口)에 와서 배를 대고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한 날짜가 가까워지자 보해는 병을 핑계하고 며칠 동안 조회(朝會)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밤중에 도망하여 고성(高城) 바닷가에 이르렀다. 고구려 왕은 이를 알고 수십 명 군사를 시켜 쫓게 하니 고성에 이르러 따라가게 되었다. 그러나 보해는 고구려에 있을 때에 늘 좌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왔기 때문에 쫓아온 군사들은 그를 불쌍히 여겨 모두 화살의 촉을 뽑고 쏘아서 몸이 상하지 않고 돌아올 수가 있었다. 눌지왕은 보해를 만나 보자 미해(美海)를 생각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한편으로는 기뻐하고 한편으로는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좌우 사람들에게 말한다. “마치 한 몸에 팔뚝이 하나만 있고, 한 얼굴에 한 쪽 눈만 있는 것 같구나. 비록 하나는 얻었으나 하나는 잃은 대로이니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느냐.” 이때 제상은 이 말을 듣고 말을 탄 채 두 번 절하여 임금에게 하직하고 집에도 들르지 않고 바로 율포(栗浦) 갯가에 이르렀다. 그 아내가 이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 율포까지 쫓아갔으나 남편은 이미 배에 오른 뒤였다. 아내는 간곡하게 남편을 불렀다. 하지만 제상은 다만 손을 흔들어 보일 뿐 배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왜국(倭國)에 도착해서 거짓말을 했다. “계림왕(鷄林王)이 아무 죄도 없는 우리 부형(父兄)을 죽였기로 도망해서 여기 온 것입니다.” 왜왕(倭王)은 이 말을 믿고 제상에게 집을 주어 편히 거처하게 했다. 이때 제상은 늘 미해를 모시고 해변(海邊)에 나가 놀면서 물고기와 새를 잡아다 왜왕에게 바치니 왜왕은 매우 기뻐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어느 날 새벽 마침 안개가 자욱하게 끼었는데 제상이 미해에게 말했다. “지금 빨리 떠나십시오.” 미해는 “그러면 같이 떠나십시다”했으나 제상은 말한다. “신이 만일 같이 떠난다면 왜인(倭人)들이 알고 뒤를 쫓을 것입니다. 원컨대 신은 여기에 남아 뒤쫓는 것을 막겠습니다.” 미해가 다시 말한다. “지금 나는 그대를 부형(父兄)처럼 여기고 있는데 어찌 그대를 버려 두고 혼자서만 돌아간단 말이오.” 제상은 말한다. “신은 공의 목숨을 구하는 것으로, 대왕의 마음을 위로해 드리면 그것으로 만족할 뿐입니다. 어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그리고는 술을 부어 미해에게 드렸다. 이때 계림(鷄林) 사람 강구려(康仇麗)가 왜국(倭國)에 와 있었는데 그를 딸려 호송(護送)하게 했다. 제상은 미해의 방에 들어가서 이튿날 아침까지 있었다. 미해를 모시는 좌우 사람들이 방에 들어가 보려 하므로 제상이 나와서 말리면서 말했다. “미해공은 어제 사냥하는 데 따라다니느라 몹시 피로해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녁때가 되자 좌우 사람들은 이상히 여겨 다시 물었다. 이때 제상은 대답했다. “미해공은 떠난 지 이미 오래 되었소.” 좌우 사람들이 급히 달려가 왜왕에게 고하자 왕은 기병을 시켜 뒤를 쫓게 했으나 따르지 못했다. 이에 왕은 제상을 가두고 물었다. “너는 어찌하여 너의 나라 왕자를 몰래 돌려 보냈느냐.” 제상이 대답한다. “나는 계림 신하이지 왜국 신하가 아니오. 이제 우리 임금의 소원을 이루어 드렸을 뿐인데, 어찌 이 일을 그대에게 말하겠소.” 왜왕은 노했다. “이제 너는 이미 내 신하가 되었는데도 계림 신하라고 말하느냐. 그렇다면 반드시 오형(五刑)을 갖추어 (너에게 쓸 것이다.) 만일 왜국 신하라고만 말한다면 후한 녹(祿)을 상으로 주리라.” 제상은 대답한다. “차라리 계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가 되지는 않겠다. 차라리 계림의 형벌을 받을지언정 왜국의 작록(爵祿)을 받지 않겠다.” 왜왕은 노했다. 제상의 발 가죽을 벗기고 갈대[蒹葭]를 벤 위를 걸어가게 했다. 今蒹葭上有血痛俗雲提上之血 그리고는 다시 물었다. “너는 어느 나라 신하냐.” “계림의 신하다.” 왜왕은 또 쇠를 달구어 그 위에 세워 놓고 다시 물었다. “어느 나라 신하냐.” “계림의 신하다.” 왜왕은 그를 굴복시키지 못할 것을 알고 목도(木島)라는 섬 속에서 불태워 죽였다. 미해는 바다를 건너 돌아왔다. 그는 먼저 강구려(康仇麗)를 시켜 나라 안에 사실을 알렸다. 눌지왕은 놀라고 기뻐하여 백관들에게 명하여 미해를 굴헐역(屈歇驛)에 나가서 맞게 했다. 왕은 아우 보해와 함께 남교(南郊)에 나가서 친히 미해를 맞아 대궐로 들어갔다. 잔치를 베풀고 국내에 대사령(大赦令)을 내려 죄수를 풀어 주었다. 또 제상의 아내를 국대부인(國大夫人)에 봉하고, 그의 딸은 미해공의 부인을 삼았다.
이때 의론하는 사람들은 말했다. “옛날에 한나라 신하 주가(周苛)가 형양(滎陽) 땅에 있다가 초(楚)나라 군사에게 포로로 잡힌 일이 있었다. 이때 항우(項羽)는 주가를 보고 말하기를, ‘네가 만일 내 신하 노릇을 한다면 만호후(萬戶侯)를 주겠다’했다. 그러나 주가는 항우를 꾸짖고 굴복하지 않으므로 그에게 죽음을 당했다. 그런데 이번 제상의 죽음은 주가만 못하지 않다.” 처음에 제상이 신라를 떠날 때 부인이 듣고 남편의 뒤를 쫓아갔으나 따르지 못했었다. 이에 망덕사(望德寺) 문 남쪽 사장(沙場) 위에 이르러 주저앉아 길게 부르짖었는데, 이런 일이 있었다 하여 그 사장을 장사(長沙)라고 불렀다. 친척 두 사람이 부인을 부축하여 돌아오려 하자 부인은 다리를 뻗은 채 앉아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곳을 벌지지(伐知旨)라고 이름지었다. 이런 일이 있은 지 오래 된 뒤에 부인은 남편을 사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鵄述嶺)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고 통곡하다가 죽고 말았다. 그래서 그를 치술신모(鵄述神母)라고 하는데, 지금도 그를 제사지내는 사당(祠堂)이 있다.
제18대 실성왕
[편집]義熙九年癸丑。平壤州大橋成(恐南平壤也。今楊州)王忌憚前王太子訥祗有德望。
將害之。請高麗兵而詐迎訥祗。高麗人見訥祗有賢行。乃倒戈而殺王。乃立訥祗為王而去。
射琴匣
[편집]第二十一毘處王(一作炤智王)即位十年戊辰。幸於天泉亭。時有烏與鼠來鳴。鼠作人語云。此烏去處尋之(或云神德王欲行香興輪寺。路見眾鼠含尾怪之而还占之。明日先鳴烏尋之云云。此說非也)王命騎士追之。南至避村(今壤避寺村在南山東麓)。兩豬相鬥。留連見之。忽失烏所在。徘徊路旁。時有老翁自池中出奉書。外面題云。開見二人死。不開一人死。使來獻之。王曰。與其二人死莫若不開但一人死耳。日官奏云。二人者庶民也。一人者王也。王然之開見。書中云射琴匣。王入宮見琴匣射之。乃內殿焚修僧。與宮主潛通而所姧也。二人伏誅。自爾國俗每正月上亥上子上午等日。忌慎百事。不敢動作。以十五日為烏忌之日。
以糯飯祭之。至今行之。俚言怛忉。言悲愁而禁忌百事也。命其池曰書出池。
지철로왕(智哲老王)
[편집]제22대 지철로왕(智哲老王)의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지대로(智大路)또는 지도로(智度路)이다. 시호(諡號)를 지증(智澄)이라 한다. 시호가 여기서부터 비롯한다. 又鄉稱王為麻立干者。自此王始。王以永元二年庚辰即位或云辛巳則三年也王陰長一尺五寸。難於嘉耦。發使三道求之。使至牟梁部。冬老樹下見二狗嚙一屎塊如鼓大。爭嚙其兩端。訪於里人。有一小女告云。此部相公之女子洗澣于此。隱林而所遺也。尋其家檢之。身長七尺五寸。具事奏聞。王遣車邀入宮中。封為皇后。群臣皆賀又阿瑟羅州今溟州東海中。便風二日程有亐陵島今作羽陵周迴二萬六千七百三十步。島夷恃其水深。憍傲不臣王命伊喰朴伊宗將兵討之。宗作木偶師子。載於大艦之上。威之云。不降則放此獸。島夷畏而降。賞伊宗為州伯。
진흥왕(真興王)
[편집]제24대 진흥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 나이가 15세였으므로 태후(太后)가 섭정(攝政)을 했다. 태후는 법흥왕(法興王)의 딸로서 입종(立宗) 갈문왕(葛文王)의 비였다. 왕은 임종에 즈음하여 머리를 깎고 법의(法衣)를 입고 있다가 운명했다. 승성(承聖[140] 3년(554년) 9월에 백제의 군사가 진성(珍城)에 와서 침범하여 남녀 39,000명과 말 9,000필을 빼았아 갔다. 이보다 먼저, 백제가 신라와 더불어 군사를 합하여 고구려를 치자고 먼저 말했었다. 이때 진흥왕이 말했다.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으니, 만약 하늘이 고구려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내가 감히 어떻게 고구려의 멸망을 바라겠느냐.” 또한 이 말을 고구려에 전했다. 고구려는 이 말을 듣고 감격하여 신라와 서로 평화롭게 사귀었다. 그러나 백제는 이로써 신라를 원망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그렇게 된 것이다.
도화녀 비형랑(桃花女 鼻荊郎)
[편집]第二十五舍輪王。諡真智大王。姓金氏。妃起烏公之女。知刀夫人。大建八年丙申即位古本云。十一年己亥。誤矣。 御國四年。政亂荒婬。國人廢之。前此。
沙梁部之庶女。姿容豔美。時號桃花娘。王聞而召致宮中。欲幸之。女曰。女之所守。不事二夫。有夫而適他。雖萬乘之威。終不奪也。王曰。殺之何。女曰。
寧斬于市。有願靡他。王戲曰。無夫則可乎。曰可。王放而遣之。是年。王見廢而崩。後二年其夫亦死。浹旬忽夜中王如平昔來於女房曰。汝昔有諾。今無汝夫可乎。女不輕諾。告於父母。父母曰。君王之教。何以避之。以其女入於房。留御七日。常有五色雲覆屋。香氣滿室。七日後忽然無蹤。女因而有娠。月滿將產。
天地振動。產得一男。名曰鼻荊。真平大王聞其殊異。收養宮中。年至十五授差執事。每夜逃去遠遊。王使勇士五十人守之。每飛過月城。西去荒川岸上(在京城西)率鬼眾遊。勇士伏林中。窺伺鬼眾。聞諸寺曉鍾各散。郎亦歸矣。軍士以事來奏。王召鼻荊曰。汝領鬼遊信乎。郎曰然。王曰。然則汝使鬼眾成橋於神元寺北渠(一作神眾寺。誤一云荒川東深渠)荊奉敕。使其徒鍊石。成大橋於一夜。
故名鬼橋。王又問。鬼眾之中。有出現人間。輔朝政者乎。曰有。吉達者可輔國政。王曰與來。翌日荊與俱見。賜爵執事。果忠直無雙。그때 각간(角干) 임종(林宗)이 자식이 없자, 王敕為嗣子。林宗命吉達創樓門於興輪寺南。每夜去宿其門上。故名吉達門。一日吉達變狐而遁去。荊使
鬼捉而殺之。故其眾聞鼻荊之名。怖畏而走。時人作詞曰聖帝魂生子鼻荊郎室亭飛馳諸鬼眾此處莫留停鄉俗帖此詞以辟鬼。
天賜玉帶
[편집]清泰四年丁酉五月。正承金傅獻鐫金粧玉排方腰帶一條長十圍。鐫銙六十二。曰。是真平王天賜帶也。太祖受之。藏之內庫
第二十六白淨王。諡真平大王。金氏。大建十一年己亥八月即位。身長十一尺。駕幸內帝釋宮亦名天柱寺。王之所創踏石梯。□石並折。王謂左右曰。不動此石。以示後來。即城中五不動石之一也。即位元年。有天使降於殿庭。謂王曰。上皇命我傳賜玉帶。王親奉跪受。然後其使上天。凡
郊廟大祀皆服之。後高麗王將謀伐羅。乃曰。新羅有三寶不可犯。何謂也。皇龍寺丈六尊像一。其寺九層塔二。真平王天賜玉帶三也。乃止其謀。讚曰雲外天頒玉帶圍辟雍龍袞雅相宜吾君自此身彌重准擬明朝鐵作墀
善德王知幾三事
[편집]제27대 덕만(德曼, 또는 德万)의 시호(諡號)는 선덕여대왕(善德女大王)이다. 성은 김씨이고, 아버지는 진평왕(真平王)이다. 以貞觀六年壬辰即位。御國十六年。凡知幾有三事。初唐太宗送畫牧丹三色。紅紫白以其實三升。王見畫花曰。此花定無香。仍命種於庭。待其開落。果如其言。二於靈廟。寺玉門池。冬月眾蛙集鳴三四日。國人怪之問於王。王急命角干閼川弼吞等。鍊精兵二千人。速去西郊問女根谷必有賊兵。掩取殺之。二角干既受命。各率千人問西郊。富山下果有女根谷。百濟兵五百人。來藏於彼。並取殺之。百濟將軍亐召者藏於南山嶺石上。又圍而射之殪。又有後兵一千二百人來。亦擊而殺之。一無孑遺。三王無恙時。謂群臣曰。朕死於某年某月日。葬我於忉利天中。群臣罔知其處。奏云何所。王曰。狼山南也。至其月日王果崩。群臣葬於狼山之陽。後十餘年文虎大王創四天王寺於王墳之下。佛經云。四天王天之上有忉利天。乃知大王之靈聖也。當時群臣啟於王曰。何知花蛙二事之然乎。王曰。畫花而無蝶。知其無香。斯乃唐帝欺寡人之無耦也。蛙有怒形兵士之像。玉門者女根也。女為陰也。其色白。白西方也。故知兵在西方。男根入於女根則必死矣。以是知其易捉。於是群臣皆服其聖智。送花三色者。蓋知新羅有三女王而然耶。謂善德真德真聖是也。唐帝以有懸解之明。善德之創靈廟寺。具載良志師傳詳之別記云。是王代。鍊石築瞻星臺。
진덕왕(真德王)
[편집]제28대 진덕여왕(真德女王)은 즉위하자 스스로 태평가(太平歌)를 지었다. 織錦為紋。命使往唐獻之一本命春秋公為使往。仍請兵。太宗嘉之。許蘇廷方云云者。皆謬矣。現慶前春秋已登位。現慶庚申非太宗。乃高宗之世。定方之來。在現慶庚申。故知織錦為紋。非請兵時也。在真德之世。當矣。蓋請放金欽之時也唐帝嘉賞之。改封為雞林國王。其詞曰大唐開洪業巍巍皇猷昌止戈戎威定修文契百王統天崇雨施理物體含章深仁諧日月𢪑軍邁虞唐幡旗何赫赫錚鼓何鍠鍠外夷違命者剪覆被天殃淳風凝幽現遐邇競呈祥四時和玉燭七曜巡方方維嶽降輔宰維帝任忠良五三成一德昭我唐家皇王之代有閼川公。林宗公。述宗公。虎林公慈藏之父。廉長公。庾信公。會于南山亐知巖議國事。時有大虎走入座間。諸公驚起。而閼川公略不移動。談笑自若。捉虎尾撲於地而殺之。閼川公膂力如此。處於席首。然諸公皆服庾信之威。新羅有四靈地。將議大事。則大臣必會其地謀之。則其事必成。一東曰青松山。二曰南亐知山。三曰西皮田。四曰北金剛山。是王代始行正旦禮。始行侍郎號。
김유신(金庾信)
[편집]호력(虎(武)力)[141] 이간(伊干)의 아들 서현(舒玄) 각간(角干) 김씨의 장자는 유신(庾信)이며 아우는 흠순(欽鈍)이다. 윗누이는 보희(寶姬)이며 어린 시절의 이름은 아해(阿海)이다. 누이동생은 문희(文姬)이며 어린 시절의 이름은 아지(阿之)이다. 유신공(公)은 진평왕(真平王) 17년 을묘년(595년)에 태어났다. 稟精七曜。故背有七星文。又多神異。年至十八壬申。修釰得術為國仚。時有白石者。不知其所自來屬於徒中有年。郎以伐麗齊之事。日夜深謀白石知其謀。告於郎曰。僕請與公密先探於彼。然後圖之何如。郎喜。親率白石夜出行。方憩於峴上。有二女隨郎而行。至骨火川留宿。又有一女忽然而至。공이 세 낭자와 즐거이 말하고 있을 때, 娘等以美果餽之。郎受而啖之。心諾相許。乃說其情。娘等告云。公之所言已聞命矣。願公謝白石而共入林中。更陳情實。乃與俱入。娘等便現神形曰。我等奈林穴禮骨火等三所護國之神。今敵國之人誘郎引之。郎不知而進途。我欲留郎而至此矣。言訖而隱。公聞之驚仆。再拜而出。宿於骨火館。謂白石曰。今歸他國忘其要文。請與爾還家取來。遂與還至家。拷縛白石而問其情。曰。나는 본래 고구려 사람이다.고본(古本)에는 백제라고 이르나, 오류이다. 추남(楸南)은 곧 고(구)려 남자이다. 또한, 음양에 역행하는 것 역시 보장왕(寶藏王)이 한 일이다. 我國群臣曰。新羅庾信是我國卜筮之士楸南也고본에는 춘남(春南)이라 하나, 틀린 것이다.國界有逆流之水或云雄雌。尤反覆之事使其卜之。奏曰。大王夫人逆行陰陽之道。其瑞如此。大王驚怪。而王妃大怒。謂是妖狐之語。告於王。更以他事驗問之。실언한 것이라면 중형을 가하겠다. 乃以一鼠藏於合中。問是何物。其人奏曰。是必鼠。其命有八。乃以謂失言。將加斬罪。其人誓曰。吾死之後。願為大將必滅高麗矣。即斬之。剖鼠腹而視之。其命有七。於是知前言有中。其日夜大王夢楸南入于新羅舒玄公夫人之懷。以告於群臣。皆曰。楸南誓心而死。是其果然。故遣我至此謀之爾。이에 공은 백석을 살해하였다. 備百味祀三神。皆現身受奠。金氏宗財買夫人死。葬於青淵上谷。因名財買谷。每年春月。一宗士女會宴於其谷之南澗。于時百卉敷榮。松花滿洞府。林谷口架築為庵。因名松花房。傳為願剎。至五十四景明王。追封公為興虎大王。陵在西山毛只寺之北東向走峰。
태종춘추공(大宗春秋公)
[편집]제29대 태종대왕(大宗大王)의 이름은 춘추(春秋)이며 성은 김씨이다. 용수(龍樹)또는 용춘(龍春〉)이라고도 한다 각간(角干)으로 추봉(追封)된 문흥대왕(文興大王)의 아들이며, 돌아가신 어머니는 진평대왕(真平大王)의 딸인 천명부인(天明夫人)이다. 왕비는 문명황후 문희(文明皇后文姬)이니 곧 유신공(公)의 막내누이이다. 처음에 문희의 언니 보희(寶姬)가 꿈에서, 서악(西岳)에 올라가 오줌을 누었는데 경성(京城)에 (오줌이) 가득 넘쳤다. (다음 날) 아침, (보희가) 누이동생와 함께 꿈 얘기를 하니 문희가 이를 듣고 이르기를, “내가 이 꿈을 살께요.”라 하였다. 언니가 이르기를 “어떤 물건을 줄건데?”라 하자, (문희가) 말하기를 “비단 치마를 팔아도 좋을까요?”라 하였다. 언니가 허락한다고 말하고 (문희가) 치마를 펼쳐 이(꿈)를 받으니, 언니가 이르기를, “주석(疇昔)의 꿈을 네게로 보낸다.” 하였다. 누이동생이 치마로 값을 치르고 난 열흘 뒤, 김유신이 춘추공(春秋公)과 함께 정월 상오 기일(上午忌日)앞서 보았듯이 사금갑(射琴匣)조(條)의 일로서, 최치원의 견해이다 김유신의 집 앞에서 축국(蹴鞠)신라인들은 공놀이를 축국이라고 하였다.을 하게 되었고, (김유신은) 일부러 김춘추의 옷깃을 밟아 옷고름이 찢어지게 하고 자신의 집에 들어가 꿰메자고 권하니, 춘추공이 이를 따랐다. 유신은 아해(阿海)[142]에게 명하여 옷고름을 달아드리게 했다. 아해는 "어찌 사소한 일로 가벼이 귀공자를 가까이 할 것인가요?" 라며, 이를 사양했다. 고본(古本)에 이르기를 병을 핑게로 나아가지 않았다 한다. 이에 아지(阿之)[143]에게 명하였다. 춘추공이 유신의 뜻을 알고 마침내 아지와 사랑을 나누었다. (춘추공이) 이후 자주 왕래하였다. 유신은 (아지가) 임신한 것을 알고 이를 책망하여 말하기를 “네가 부모에게 알리지도 않고 임신을 하였으니 무슨 까닭이냐?” 하고 이윽고 온 나라에 선언하기를 그 누이를 불태워 죽이겠다 하였다. 어느날, (김유신은) 선덕왕(善德王)이 남산(南山)에 거둥할 때를 기다렸다가, 뜰에 땔나무를 쌓아 놓고 불을 지르니 연기가 일어났다. 왕이 이를 바라보고 무슨 연기인지 묻자, 좌우에서 아뢰기를 “장차 유신이 누이를 불태우려는 것 같습니다.” 하였다. 왕이 그 까닭을 물으니, (좌우에서) 아뢰었다. “그 누이가 지아비도 없이 임신하였습니다.” 왕이 이르기를 “그것은 누가 한 짓이냐?”고 물었다. 때마침, (춘추)공이 친히 왕을 모시어 앞에 있다가 안색이 크게 변했다. (그것을 보고) 왕이 말하기를 “이는 너의 소행이니 얼른 가서 그 여자를 구하도록 하여라.” 하였다. 춘추공이 왕명을 받고 말을 달려 왕명을 전하여 이를 막았다. 그 뒤, 그 자리에서 혼례를 올렸다. 真德王薨。以永徽五年甲寅即位。御國八年。龍朔元年辛酉崩。壽五十九歲。葬於哀公寺東。有碑。王與庾信神謀戮力。一統三韓。有大功於社稷。故廟號太宗。太子法敏。角干仁問。角干文王。角干老旦。角干智鏡。角干愷元等。皆文姬之所出也。當時買夢之徵現於此矣。庶子曰皆知文級干車得令公馬得阿干。并女五人。王膳一日飯米三斗。雄雉九首。自庚申年滅百濟後。除晝膳。但朝暮而已。然計一日米六斗。酒六斗。雉十首。城中市價。布一疋租三十碩。或五十碩。民謂之聖代。在東宮時。欲征高麗因請兵入唐。唐帝賞其風彩。謂為神聖之人。固留侍衛。力請乃還。時百濟末王義慈乃虎王之元子也。雄猛有膽氣。事親以孝。友于兄弟。時號海東曾子。以貞觀十五年辛丑即位。耽婬酒色政荒國危。佐平百濟爵名成忠極諫不聽。囚於獄中。瘦困濱死。書曰。忠臣死不忘君。願一言而死。臣嘗觀時變。必有兵革之事。凡用兵。審擇其地。處上流而迎敵。可以保全。若異國兵來。陸路不使過炭峴一云沈峴。百濟要害之地水軍不使入伎伐浦即長嵒。又孫梁。一作只火浦。又白江據其險隘以禦之。然後可也。王不省。現慶四年己未。百濟烏會寺亦云烏合寺有大赤馬。晝夜六時遶寺行道。二月。眾狐入義慈宮中。一白狐坐佐平書案上。四月。太子宮雌雞與小雀交婚五月。泗泚扶餘江名岸大魚出死。長三丈。人食之者皆死。九月。宮中槐樹鳴如人哭。밤에 귀신이 궁궐 남쪽 노상에서 울었다. 五年庚申春。二月。王都井水血色。西海邊小魚出死。百姓食之不盡。泗泚水血色。四月。蝦蟆數萬集於樹上。王都市人無故驚走。如有捕捉。驚仆死者百餘。亡失財物者無數。六月。王興寺僧皆見如舡楫隨大水入寺門。有大犬如野鹿。自西至泗泚岸。向王宮吠之。俄不知所之。城中群犬集於路上。或吠或哭。移時而散。有一鬼入宮中。大呼曰。百濟亡百濟亡。即入地。王怪之。使人掘地。深三尺許。有一龜。其背有文。百濟圓月輪。新羅如新月。問之。巫者云。圓月輪者滿也。滿則虧。如新月者未滿也。未滿則漸盈。王怒殺之。或曰。圓月輪盛也。如新月者微也。意者國家盛而新羅浸微。乎王。喜太宗聞百濟國中多怪變。五年庚申。遣使仁問請兵唐。고종(高宗)이 조서를 내려 좌무위대장군(左武[144]衛大將軍) 형국공(荊國公)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행책총관(神丘道行軍策總管)으로 삼아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유백영(劉伯英), 우무위장군(右武[145]衛將軍) 풍사귀(馮士貴),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방효공(龐孝公) 등을 거느리고 군사 13만 명을 통솔하여 와서 정복하게 하고 鄉記云軍十二萬二千七百十一人。舡一千九百隻。而唐史不詳言之。 신라왕 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總管)으로 삼아, 그 나라의 병사를 거느리고 그들(당나라 병사)과 세력을 합하였다. 소정방이 병사를 이끌고 성산(城山)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우리) 나라 서쪽의 덕물도(德物島)에 이르렀다. 신라 왕은 장군 김유신(金庾信)을 보내 정예 병사 5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에) 다다르게 하였다. 의자왕이 이를 듣고, 군신(群臣)들을 모아 싸움과 지킴의 계책을 물었다. 佐平義直進曰。唐兵遠涉溟海不習水。羅人恃大國之援。有輕敵之心。若見唐人失利。必疑懼而不敢銳進。故知先與唐人決戰可也。達率常永等曰不然。唐兵遠來。意欲速戰。其鋒不可當也。羅人屢見敗於我軍。今望我兵。勢不得不恐。今日之計。宜塞唐人之路。以待師老。先使偏師擊羅折其銳氣。然後伺其便而合戰。則可得全軍而保國矣。王猶預不知所從。時佐平興首得罪流竄于古馬祚知之縣。遣人問之曰。事急矣。如何。首曰大概如佐平成忠之說。大臣等不信。曰興首在縲絏之中。怨君而不愛國矣。其言不可用也。당병이 물결을 따라 백강(白江)(곧, 기벌포(伎伐浦))으로 들어오게 하여 배를 나란히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낫습니다. 羅軍升炭峴。由徑而不得並馬。當此之時。縱兵擊之。如在籠之雞。罹網之魚也。王曰然。又聞唐羅兵已過白江炭峴。遣將軍偕伯帥死士五千出黃山。與羅兵戰。四合皆勝之。然兵寡力盡竟敗。而偕伯死之。進軍合兵。薄津口。瀕江屯兵。忽有鳥迴翔於定方營上。使人卜之。曰必傷元帥。定方懼欲引兵而止。庾信謂定方曰。豈可以飛鳥之怪違天時也。應天順人。伐至不仁。何不祥之有。乃拔神釰擬其鳥。割裂而墜於座前。於是定方出左涯垂山而陣。與之戰。百濟軍大敗。王師乘潮。軸轤含尾鼓譟而進。定方將步騎。直趨都城。一舍止。城中悉軍拒之。又敗死者萬餘。唐人乘勝薄城。王知不免。嘆曰。悔不用成忠之言以至於此。遂與太子隆或作孝誤也走北鄙。定方圍其城。王㳄子泰自立為王。率眾固守。太子之子文思謂王泰曰。王與太子出。而叔擅為王。若唐兵解去。我等安得全。率左右縋而出。民皆從之。泰不能止。定方令士起𡍕立唐旗幟。泰窘迫。乃開門請命。於是王及太子隆。王子泰。大臣貞福。與諸城皆降。定方以王義慈。及太子隆王子泰。王子演。及大臣將士八十八人。百姓一萬二千八百七人送京師。其國本有五部。三十七郡。二百城。七十六萬戶。至是析置熊津。馬韓。東明。金漣德安等五都督府。擢渠長為都督剌史以理之。命郎將劉仁願守都城。又左衛郎將王文度為熊津都督。撫其餘眾。定方以所俘見上。責而宥之。王病死。贈金紫光祿大夫衛尉卿。許舊臣赴臨。詔葬孫皓陳叔寶墓側。并為豎碑。七年壬戌。命定方為遼東道行軍大總管俄改平壤道。破高麗之眾於浿江。奪馬邑山為營。遂圍平壤城。會大雪解圍還。拜涼州安集大使。以定吐蕃。乾封二年卒。唐帝悼之。贈左驍騎大將軍幽州都督。諡曰莊(已上唐史文)新羅別記云。文虎王即位五年乙丑秋八月庚子。王親統大兵幸熊津城。會假王扶餘隆作壇。刑白馬而盟。先祀天神及山川之靈。然後歃血。為文而盟曰。往者百濟先王迷於逆順。不敦鄰好。不睦親姻。結托句麗。文通倭國。共為殘暴。侵削新羅。破邑屠城。略無寧歲。天子憫一物之失所。憐百姓之被毒。頻命行人。諭其和好。負險恃遠。侮慢天經。皇赫斯怒。恭行弔伐。旌旗所指。一戎大定。固可瀦宮污宅。作誡來裔。塞源拔本。垂訓後昆。懷柔伐叛。先王之令典。興亡繼絕。往哲之通規。事心師古。傳諸曩冊。故立前百濟王司農正卿扶餘隆為熊津都督。守其祭祀。保其桑梓。依倚新羅。長為與國。名除宿憾。結好和親。恭承詔命。永為藩服。仍遣使人右威衛將軍魯城縣公劉仁願。親臨勸諭具宣成旨。約之以婚姻。申之以盟誓。刑牲歃血。共敦終始。分災恤患。恩若兄弟。祗奉綸言。不敢墜失。既盟之後。共保歲寒。若有乖背。二三其德。興兵動眾。侵犯邊陲。神明鑒之。百殃是降。子孫不育。社稷無宗。禋祀磨滅。罔有遺餘。故作金書鐵契。藏之宗廟。子孫萬代。無或敢犯。神之聽之。是享是福。歃訖。埋弊。帛於壇之壬地。藏盟文於大廟。盟文乃帶方都督劉仁軌作按上唐。史之文。定方以義慈王及太子隆等送京師。今云會扶餘王隆。則知唐帝宥隆而遣之。立為熊津都督也。故盟文明言。以此為驗又古記云。總章元年戊辰{*|若總章戊辰則李勣之事而下文蘇定方誤矣。若定方則年號當龍朔二年壬戌來圍平壤之時也}}國人之所請唐兵屯于平壤郊而通書曰。急輸軍資。王會群臣問曰。入於敵國至唐兵屯所。其勢危矣。所請王師糧匱而不輪其料。亦不宜也。如何。庾信奏曰。臣等能輸其軍資。請大王無慮。於是庾信仁問等率數萬人入句麗境。輸料二萬斛乃還。王大喜。又欲興師會唐兵。庾信先遣然起兵川等一人問其會期。唐帥蘇定方紙畫鸞犢二物迴之。國人未解其意。使問於元曉法師。解之曰。速還其兵。謂畫犢畫鸞二切也。於是庾信迴軍。欲渡浿江。今日後渡者斬之。軍士爭先半渡。句麗兵來掠。殺其未渡者。翌日信返追句麗兵。捕殺數萬級百濟古記云。扶餘城北角有大岩。下臨江水。相傳云。義慈王與諸後宮知其未免。相謂曰。寧自盡。不死於他人手。相率至此。投江而死。故俗云墮死岩。斯乃俚諺之訛也。但宮人之墮死。義慈卒於唐。唐史有明文又新羅古傳云。定方既討麗濟二國。又謀伐新羅而留連。於是庾信知其謀。饗唐兵鴆之。皆死坑之。今尚州界有唐橋。是其坑地按唐史不言其所以死。但書云卒。何耶。為復諱之耶。鄉諺之無據耶。若壬戌年高麗之役。羅人殺定方之師。則後總章戊辰何有請兵滅高麗之事。以此知鄉傳無據。但戊辰滅麗之後。有不臣之事。擅有其地而已。非至殺蘇李二公也王師定百濟。既還之後。羅王命諸將追捕百濟殘賤屯次于漢山城。高麗靺鞨二國兵來圍之。相擊未解。自五月十一日至六月二十二日。我兵危甚。王聞之。議群臣曰。計將何出猶豫未決。庾信馳奏曰。事急矣。人力不可及。唯神術可救。乃於星浮山。設壇修神術。忽有光耀如大瓮。從壇上而出。乃星飛南北去因此名星浮山。山名或有別說云。山在都林之南。秀出一峰是也。京城有一人謀求官。命其子作高炬。夜登此山舉之。其夜京師人望人皆謂。怪星現於其地。王聞之憂惧。募人禳之。其父將應之曰官奏曰此非大怪也。但一家子死父泣之兆耳。遂不。行禳法。是夜其子下山。虎傷而死。漢山城中士卒怨救兵不至。相視哭泣而已。賊欲改急。忽有光耀。從南天際來。成霹靂。擊碎砲石三十餘所。賊軍弓箭矛戟籌碎皆仆地。良久乃蘇。奔潰而歸。我軍乃還。太宗初即位。有獻豬一頭二身八足者。 議者曰。是必并吞六合瑞也。是王代始服中國衣冠牙笏。乃法師慈藏請唐帝而來傳也。神文王時。唐高宗遣使新羅曰。朕之聖考得賢臣魏徵李淳風等。協心同德。一統天下。故為太宗皇帝。汝新羅海外小國。有太宗之號。以僭天子之名。義在不忠。速改其號。新羅王上表曰。新羅雖小國。得聖臣金庾信。一統三國。故封為太宗。帝見表乃思。儲貳時。有天唱空云。三十三天之一人降於新羅為庾信。紀在於書。出撿視之。驚懼不已。更遣使許無改太宗之號長。
春郎 罷郎一作羆
[편집]初與百濟兵戰於黃山之役。長春郎罷郎死於陣中。後討百濟時。見夢於太宗曰。臣等昔者為國亡身。至於白骨。庶欲完護邦國。故隨從軍行無怠而已。然迫於唐帥定方之威。逐於人後爾。願王加我以小勢。大王驚怪之。為二魂說經一日於牟山亭。又為創壯義寺於漢山州。以資冥援。
三國遺事 卷第一
저본
[편집]역주
[편집]- ↑ 俅라 기재된 판본도 있다.
- ↑ 六은 오기로 보인다.
- ↑ 기원전 19년을 말한다.
- ↑ 기원전 18년을 말한다.
- ↑ 기원전 5년을 말한다.
- ↑ 년(年)자가 다음 페이지에 있다.
- ↑ 원문에는 이 칸에 ‘년’(年)이 있다. 해석의 편의를 위해 앞 페이지로 옮겨 적는다.
- ↑ ‘女’의 오기로 보인다.
- ↑ 고구려 태조대왕을 말한다.
- ↑ 국조왕와 차대왕을 말한다.
- ↑ 신대왕을 말한다.
- ↑ 탈자로 인하여 해석이 불가하다.
- ↑ 광화년간에 기(己)로 시작되는 해는 기미년밖에 없다.
- ↑ 원문은 大이나 太가 맞다.
- ↑ 조방(曹芳, 231년 ~ 274년)은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제3대 황제이다. 폐위된 뒤에 제왕(齊王)으로 강등당했다.
- ↑ 원전에는 빠져 있다.
- ↑ 고이왕은 초고왕이 사망(214년)한지 20년이나 지나 왕위에 올랐고, 다시 50년을 재위하였기 때문에 개루왕의 아들이나 초고왕의 동생으로 보기 어렵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 ↑ 조위 폐황제 조모(曹魏 廢皇帝 曹髦, 241년 ~ 260년)는 중국 삼국 시대 위나라의 제 4대 황제(재위 : 254년~260년)이다. 황제가 되기 전에는 고귀향공(高貴鄕公)이었고, 시해되어 시호가 없다.
- ↑ 조위 원황제 조환(曹魏 元皇帝 曹奐, 246년 ~ 303년)은 중국 삼국시대 위의 최후이자 제5대 황제이다.
- ↑ 大는 太의 이체자로도 본다.
- ↑ 원문 十一. 오기로 보인다.
- ↑ 서진의 제2대 황제이다.
- ↑ 원문에는 백제의 왕을 기재할 행에 잘못 기재되어 있는 바, 이를 바로잡는다.
- ↑ 大는 太의 이체자로도 본다.
- ↑ 《논어》(論語) 〈술이(述而)편〉 七之二十 참조.
- ↑ 하늘이 제왕(帝王)이 될 만한 사람에게 내리는 상서(祥瑞)로운 징조(徵兆). 임금의 명령(命令)
- ↑ 도참(圖讖). 미래(未來)의 길흉(吉凶)에 관(關)하여 예언(豫言)하는 술법(術法)이나, 또는 그러한 내용(內容)이 적힌 책(冊). 미래기ㆍ정감록 따위
- ↑ 하도(河圖). 중국 복희씨(伏羲氏) 때에 황하(黃河)에서 용마가 지고 나왔다는 쉰 다섯 점의 그림. 우 임금 때의 낙서(洛書)와 함께 주역(周易) 이치(理致)의 기본(基本)이 되었다.
- ↑ 낙서(洛書).중국 하(夏)나라의 우왕(禹王)이 홍수(洪水)를 다스렸을 때, 낙수(洛水)에서 나온 영묘(靈妙)한 거북의 등[背]에 쓰여 있었다는 글. 《서경》(書經)의 홍범구주(洪範九疇)의 원본(原本)이 되었다하며, 팔괘(八卦)의 법도 여기서 나왔다 함.
- ↑ 백제는 중국 고대 전설 중의 오제(五帝)의 하나이다. 천하의 서방(西方)을 관장한다.
- ↑ 현재의 《삼국지》 중 〈위서〉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여기서 인용한 위서는 이와는 별개의 문헌으로 추정된다.
- ↑ 《제왕운기(帝王韻紀)》와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평양 조(條)에서 인용된 《단군고기(檀君古記)》에는 ‘檀’(박달나무 단)으로 표기되어 있다.
- ↑ 백주는 현재의 황해도 배천(白川)이다. 이와 같이 일연은 백악을 구월산으로 여기고 있지만, 백악이라는 지명은 반드시 여기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 ↑ 백악궁은 경기도 장단군에 있던 고려시대의 궁전이다.
- ↑ 원문에는 ‘髙’라 하는데, 이는 고려 3대 임금인 定宗의 이름인 堯를 피휘하였다.
- ↑ 《고기》(古記)라는 것이 그저 일반 용어인지 아니면 신라의 고문헌들인 《해동고기》・《삼한고기》・《신라고기》를 가리키는 것인지가 명확하지 않다. 한편, 조선 정조 때 안정복은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고기》는 《단군고기》(檀君古記)의 약칭으로서 단군의 사적을 기록한 문헌으로 보았다. 《고기》 참조. 《제왕운기》(帝王韻紀)와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평양 조(條)에서 인용된 문헌 이름도 《단군고기》(檀君古記)이다. 《제왕운기》에는 이 기사가 《구삼국사》(현존하지 아니함.) 〈본기〉에도 있음을 지적한다.
- ↑ 원문 囯. 이 글자의 조작설 및 그에 대한 반론이 있다. 《삼국유사》 참조.
- ↑ 제석(帝釋) 또는 제석천(帝釋天, 산스크리트어 शक्र,Śakra)은 범왕(梵王)과 함께 불법(佛法)을 지키는 신(神)이다. 상세한 것은 ‘환인’ 참조.
- ↑ 《제왕운기(帝王韻紀)》와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평양 조(條)에서 인용된 《단군고기(檀君古記)》에는 ‘桓’자가 없고, 단지 ‘雄’으로 표기되어 있다.
- ↑ 서울대규장각본에는 大로 되어 있다.
- ↑ 일연의 이러한 견해에도 불구하고, 현대 역사학계는 태백산이 곧 묘향산이라고 보고 있지는 않다. 태백산 참조.
- ↑ ≪제왕운기(帝王韻紀)≫와 ≪세종실록(世宗實錄)≫지리지에서 인용한 ≪단군고기(檀君古記)≫에는 檀으로 되어 있다.
- ↑ ≪제왕운기(帝王韻紀)≫와 ≪세종실록(世宗實錄)≫지리지에서 인용한 ≪단군고기(檀君古記)≫에는 桓자가 없다.
- ↑ ≪제왕운기(帝王韻紀)≫와 ≪세종실록(世宗實錄)≫지리지에서 인용한 ≪단군고기(檀君古記)≫에는 檀으로 되어 있다.
- ↑ 중국 신화의 오제(五帝) 중 하나인 요(堯) 임금을 말한다.
- ↑ 원문 髙. 고려 3대 임금인 定宗의 이름인 堯를 피휘하였다.
- ↑ 원문 未. 서울대규장각본과 만송문고본에는 末로 되어 있다.
- ↑ 서주 무왕 희발(西周 武王 姬發, ? ~ 기원전 1043년?)은 주나라(周)의 초대 군주로서, 성(姓)은 희(姬), 이름은 발(發)이다.
- ↑ 원문 虎. 고려 2대 임금인 혜종(惠宗)의 이름인 武를 피휘하였다.
- ↑ ≪제왕운기(帝王韻紀)≫와 ≪세종실록(世宗實錄)≫지리지에서 인용한 ≪단군고기(檀君古記)≫에는 檀으로 되어 있다.
- ↑ 서울대규장각본은 마멸되어 판독하기 어렵다.
- ↑ 서남이양월조선전(西南夷兩粵朝鮮傳)을 말한다.
- ↑ 일연은 한서를 인용한다고 적었다. 그러나, 위만조선에 관한 기사는 한서보다 앞선 사마천(기원전 1세기)의 《사기》에서도 볼 수 있으므로, 아래 편집주에서는 사기를 인용하기로 한다.
- ↑ 서울대규장각본에는 '燕'이 누락되고, 빈 칸으로 되어 있다.
- ↑ 노관은 한 고조의 친구로 고조의 통일 전역에 종군하였고 친분에 의지하여 연왕이 되었으나 회의하고 모반하여 흉노에 투항했다.
- ↑ 《사기(史記)》 〈卷一百一十五 朝鮮列傳 第五十五〉에는 “險”으로 되어 있다.
- ↑ 사마천(기원전 1세기),《사기》〈권115 조선열전(朝鮮列傳)〉 “朝鮮王滿者,故燕人也。自始全燕時嘗略屬真番、朝鮮,為置吏,筑鄣塞。秦滅燕,屬遼東外徼。漢興,為其遠難守,復修遼東故塞,至浿水為界,屬燕。燕王盧綰反,入匈奴,滿亡命,聚黨千餘人,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渡浿水,居秦故空地上下鄣,稍役屬真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王之,都王險。” (조선왕 위만(衛滿)은 원래 연(燕)나라 사람이다. 연나라 전성기때부터 일찍이 진번(眞番)·조선을 약탈하고 복속시켜, 관리(官吏)를 두고 보루와 요새를 쌓았다. 진(秦)나라가 연나라를 멸망시키자 위만조선은 요동(遼東)의 외곽 지역에 속하게 되었다. 한(漢)나라가 일어났지만 위만조선이 멀어서 지키기 어렵다고 하여,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고쳐, 패수(浿水)까지를 경계로 삼아 이를 연나라에 속하게 하였다. 연왕 노관(盧綰)이 배반하여 흉노로 들어가자, 위만(魏滿)이 망명하여 천여 명의 무리를 모아서 상투를 틀고, 만이(蠻夷)의 의복을 입고 동쪽으로 요새를 빠져 달아나 패수를 건너 진(秦)나라의 빈 땅의 아래위 보루에서 살면서 진번·조선의 오랑캐들과 옛 연나라·제(齊)나라의 망명자들을 점차 복속하게 하고, 왕이 되어 왕검(王險)을 도읍으로 삼았다.)
- ↑ 《사기삼가주(史記三家註)》 〈卷一百一十五 朝鮮列傳第五十五〉에는 “瓚”으로 되어 있다.
- ↑ 사마천(기원전 1세기),《사기》〈권115 조선열전(朝鮮列傳)〉 “때마침, 효혜(孝惠)·고후(高后)때 천하가 처음으로 안정되자, 요동태수(遼東太守)는 곧, 위만과 약속하였으니, 위만이 외측의 신하〔外臣〕가 되어, 요새(要塞) 바깥의 만이(蠻夷)를 보호하고, 변방이 도적질당하지 않도록 하였다. 여러 만이(蠻夷)의 군장(君長)들이 들어와 천자(天子)를 뵙고자 하였으니, 이를 금지(禁止)할 수 없었다. 이를 듣고, 천자는 이를 허락하였다. 이런 이유로, 위만은 군사(軍事)의 위엄과 재물을 얻어, 그 이웃의 소읍들을 침략하여 항복하게 하니, 진번(真畨) · 임둔(臨屯)이 모두 와서 복속하였고 사방이 수천리였다.” / “會孝惠、高后時天下初定,遼東太守即約滿為外臣,保塞外蠻夷,無使盜邊;諸蠻夷君長欲入見天子,勿得禁止。以聞,上許之,以故滿得兵威財物侵降其旁小邑,真番、臨屯皆來服屬,方數千里。”
- ↑ 원봉(元封)은 중국 전한(前漢) 무제(武帝)의 여섯 번째 연호이다. 기원전 110년에서 기원전 105년까지 6년 동안 사용하였다.
- ↑ 원문 馭. 문맥상, “馳”가 타당하다.
- ↑ 裨王: 관직명이다.
- ↑ 여기서 천자는 곧 전한 무제를 말한다.
- ↑ 원문 遼東之部都尉.사마천(기원전 1세기),《사기》〈권115 조선열전(朝鮮列傳)〉과 《한서》(漢書) 〈卷九十五 西南夷兩粵朝鮮傳第六十五〉에는 之가 아니라, “東”으로 되어 있다. 문맥상, “東”이 타당하다.
- ↑ 사마천(기원전 1세기),《사기》〈권115 조선열전(朝鮮列傳)〉“아들을 거쳐 손자 우거(右渠)에 이르러, 한(漢)나라의 망명자를 점점 더 많이 꾀어들였고, 아직 들어가 임금을 뵙지 않았다. 진번(真番) 옆의 여러 나라들이 글을 올려 천자(天子)를 뵙고자 하였으나, 또한, 우거가 가로막아 통하지 못하였다. 원봉(元封) 2년(기원전 109년), 한나라는 섭하(渉何)를 보내 우거를 꾸짖고 회유하였으나, 마침내 우거는 조서(詔書)을 받들기를 거부하였다. 섭하가 물러나 국경에 이르러 패수(浿水)에 닿자 마부(馬夫)를 시켜 섭하를 전송하러 온 자인 조선 비왕(裨王) 장(長)을 찔러 죽이고 즉시, 강을 건너 말을 달려 요새로 들어가, 드디어 천자에게 귀국 보고를 하기를, ‘조선의 장수(將帥)를 죽였나이다’라 하였다. 천자는 그 명분이 좋다고 여긴 즉, 꾸짖지 아니하였고, 섭하를 요동 동부도위(遼東 東部都尉)로 삼았다. 조선은 섭하를 원망하고, 병사를 내어 섭하를 공격하여 죽였다.” / “傳子至孫右渠,所誘漢亡人滋多,又未嘗入見;真番旁眾國欲上書見天子,又擁閼不通。元封二年,漢使涉何譙諭右渠,終不肯奉詔。何去至界上,臨浿水,使御刺殺送何者朝鮮裨王長,即渡,馳入塞,遂歸報天子曰「殺朝鮮將」。上為其名美,即不詰,拜何為遼東東部都尉。朝鮮怨何,發兵襲攻殺何。”
- ↑ 원문은 樓舡. 舡은 船의 오기(誤記)로 보인다. 이하 오기에 대한 지적을 생략한다.
- ↑ 원문은 그저 “齊”라고만 되어 있으나, 이 제나라는 기원전 1046년부터 기원전 221년까지 존속한 나라이므로, 옛 제나라 땅이라고 풀이했다.
- ↑ 보하이 해, 즉 발해는 제나라 땅이던 산동반도와 요동반도 사이에 있는 바다이다. 곧, 산동반도에서 요동반도로 건너갔다는 뜻이 된다.
- ↑ 순체(荀彘)는 좌장군(左將軍)이었던 바, 원문의 “尤”는 “左”의 오자일 가능성이 있다.
- ↑ 사마천(기원전 1세기),《사기》〈권115 조선열전(朝鮮列傳)〉“天子募罪人擊朝鮮。其秋,遣樓船將軍楊仆從齊浮渤海;兵五萬人,左將軍荀彘出遼東:討右渠。右渠發兵距險。左將軍卒正多率遼東兵先縱,敗散,多還走,坐法斬。樓船將軍將齊兵七千人先至王險。右渠城守,窺知樓船軍少,即出城擊樓船,樓船軍敗散走。將軍楊仆失其眾,遁山中十餘日,稍求收散卒,復聚。左將軍擊朝鮮浿水西軍,未能破自前。” (천자는 죄인을 뽑아 조선을 쳤다. 그 해 가을,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을 파견하여, 옛 제(齊)나라 땅으로부터 보하이 해〔渤海〕를 건너니 군사가 5만에 달했다.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는 우거(右渠)를 토벌하고자 요동(遼東)에서 나왔다. 우거는 군사를 풀어 험한 곳에서 막았다. 좌장군의 졸정(卒正) 다(多)가 요동(遼東)의 병사를 이끌고 먼저 방종(放縱)하다가, 패하여 흩어지고, 다(多)는 달려서 되돌아오니, 법에 따라 참수되었다. 누선장군은 옛 제나라 땅 출신의 병사 칠천명을 거느리고 먼저 왕검(王險)에 도달하였다. 우거는 성(城)을 지키다가 누선장군의 군사가 적은 것을 알고 꾀를 내어 누선장군을 물리치니 누선장군은 패하여 달아났다. 장군 양복은 무리를 잃고 산(山) 속에서 십여일을 숨었다가, 점차, 흩어진 병졸을 구하고 거두니, 다시 갖추어졌다.좌장군은 조선 패수의 서쪽 군을 공격하였으나, 능히 깨뜨리지 못했다.)
- ↑ 서울대규장각본에는 “大”로 되어 있다.
- ↑ 서울대규장각본에는 “母”로 되어 있다.
- ↑ 원문 報 앞에 《사기》(史記)에는 山還, 《한서》(漢書)에는 山자가 있다.
- ↑ 사마천(기원전 1세기),《사기》〈권115 조선열전(朝鮮列傳)〉“천자는 두 장수가 유리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이내, 위산(衛山)을 보내어 군대의 위엄으로써 가서 우거를 타일렀다. 우거는 사자(使者)를 뵙고 우거는 머리를 땅에 닿도록 꾸벅이며 사죄하여 말하기를, “항복을 원하였으나, 두 장수께서 사술을 써서 저를 죽이실까 두려웠습니다. 지금 믿을 만한 징표를 뵈옵고, 항복하기를 청하나이다.” 하였다. 태자(太子)를 보내어 입조(入朝)하여 사죄하고, 말 오천필을 바쳤고, 또한 군량(軍糧)를 보냈다. 람들 만여 명이 무기를 들고 패수를 막 건너려 하자, 사자 위산과 좌장군은 변고가 있을 것을 의심하여 태자에게, 이미 항복했으니 사람들이 마땅히 무기를 소지하지 말라고 말했다. 태자 역시 사자(使者)와 좌장군이 사술을 써서 그를 죽이지 않을지 아닐지 의심하여 마침내 패수를 건너지 않고 다시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위산이 돌아가 천자에게 이를 알리니, 천자가 위산의 목을 베어 죽였다.” / “天子為兩將未有利,乃使衛山因兵威往諭右渠。右渠見使者頓首謝:「願降,恐兩將詐殺臣;今見信節,請服降。」遣太子入謝,獻馬五千匹,及饋軍糧。人眾萬餘,持兵,方渡浿水,使者及左將軍疑其為變,謂太子已服降,宜命人毋持兵。太子亦疑使者左將軍詐殺之,遂不渡浿水,復引歸。山還報天子,天子誅山。”
- ↑ 사마천(기원전 1세기),《사기》〈권115 조선열전(朝鮮列傳)〉 “좌장군은 패수 상류의 군을 격파하고, 곧 나아가 성 아래에 이르러 그 서북쪽을 포위하였다. 누선장군도 역시 가서, 모여서 성 남쪽에 자리잡았다. 우거가 마침내 수개월을 견고하게 지켜내니 능히 없애지를 못했다.” / “左將軍破浿水上軍,乃前,至城下,圍其西北。樓船亦往會,居城南。右渠遂堅守城,數月未能下。”
- ↑ 원문 太. 서울대규장각본에는 大로 되어 있다.
- ↑ 원문 將. ≪사기(史記)≫와 ≪한서(漢書)≫에는 得으로 되어 있다.
- ↑ 서울대규장각본에는 ‘尤’로 되어 있으나 오자로 보인다.
- ↑ 사마천(기원전 1세기),《사기》〈권115 조선열전(朝鮮列傳)〉 “이러한 까닭에, 천자는 이를 바로잡게 하려고 제남(濟南) 태수(太守) 공손수(公孫遂)를 보내어, 편의(便宜)를 가지고 이로써 일을 맡기에 이르렀다. [...] 좌장군은 그 후 얼마되지 아니하여 양군(兩軍)을 아우른 즉, 조선을 급히 쳤다. 조선 상(朝鮮相) 노인(路人)·상 한음(相韓陰)·니계 상 참(尼谿相參)·장군 왕겹(王唊)이 함께 일을 꾸며 이르기를, “당초에 누선에게 항복하고자 하였으나, 누선은 지금 잡혀있고, 홀로 좌장군이 아우르고 거느리니, 전쟁은 점차 급해지고 있고, 더불어 싸우지 못할까 두려운데, 왕은 또한 항복을 들어주지 않고 있다. ”하였다. 한음·왕겹·노인은 모두 도망쳐 한(漢)나라에 항복하였다. 노인은 도중(道中)에 죽었다.” / “以故久不決。使濟南太守公孫遂往(征)[正]之,有便宜得以從事。 [...] 左將軍已并兩軍,即急擊朝鮮。朝鮮相路人、相韓陰、尼谿相參、將軍王唊相與謀曰:「始欲降樓船,樓船今執,獨左將軍并將,戰益急,恐不能與,(戰)王又不肯降。」陰、唊、路人皆亡降漢。路人道死。”
- ↑ ≪사기(史記)≫에는 險으로 되어 있다.
- ↑ 서울대규장각본에는 ‘尤’로 되어 있으나 오자로 보인다.
- ↑ 사마천(기원전 1세기),《사기》〈권115 조선열전(朝鮮列傳)〉“원봉(元封) 3년(기원전 108년) 여름, 니계 상 참은 아랫사람을 시켜 왕 우거를 죽이고 와서 항복하였다. 왕검성(王險城)이 항복하지 않으니, 고(故)로, 우거의 대신(大臣) 성기(成己)가 또한 모반하여, 다시 벼슬아치를 공격하였다. 좌장군은 우거의 아들 장항(長降)과 노인의 아들 최(最)를 시켜 그 백성을 하소연하고 타일러, 성기를 죽이니 이로써 마침내 조선을 평정하고 사군(四郡)이 되었다.” / “元封三年夏,尼谿相參乃使人殺朝鮮王右渠來降。王險城未下,故右渠之大臣成巳又反,復攻吏。左將軍使右渠子長降、相路人之子最告諭其民,誅成巳,以故遂定朝鮮,為四郡。”
- ↑ 원문 魏. 《사기(史記)》, 《한서(漢書)》, 《삼국지(三國志)》에는 衛로 되어 있다. 문맥상, ‘魏’는 ‘衛’의 오자(誤字)임이 명백하다.
- ↑ 서울대규장각본에는 大로 되어 있다.
- ↑ 전라북도 익산시에 있는 산이다.
- ↑ 기원전 57년(혁거세 1년)을 말한다.
- ↑ 기원전 37년(동명성왕 원년)을 말한다.
- ↑ 마한이 곧 고구려라는 주장은 동명이 마한을 아울렀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박인호, 〈전통시대의 고구려ㆍ발해인식〉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3집》 (2004.12) 359쪽.
- ↑ 평양 부근에 있는 산 이름이다.
- ↑ 원문 邑山. ≪삼국사기≫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馬邑山으로 되어 있다.
- ↑ 《삼국사기》 〈권제일〉 “南解次次雄... 十六年 春二月 北溟人耕田 得濊王印獻之 (남해차차웅...16년(서기 19년) 봄 2월에 북명(北溟)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예왕(濊王)의 인장을 얻어 [나라에] 바쳤다.)”
- ↑ 북송 시대의 형병(邢昺, 932~1010)이 지은 논어의 주석서,《논어 주소》(論語注疏)를 가리킨다. 이는 위(魏)나라의 하안(何晏, 193? ~ 249년)의 주(注), 북송(北宋)의 형병(邢昺, 932~1010년)의 소(疏)를 합한 것으로 모두 20권으로 이루어졌다.
- ↑ 《이아》(爾雅) 이순(李巡)의 注에는 索으로 되어 있다.
- ↑ 신라 진평왕대의 승려 안홍(安弘)과 관련된 기록이다. 이 기록이 안홍의 일대기를 기록한 전기인지, 아니면 안홍이 지었다고 전하는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를 일컫는지 확실하지 않다(신종원, 《신라 최초의 고승들: 원광·안홍·자장》, 민족사, 1998 ).
- ↑ 《삼국유사》 〈권제삼〉, 탑상(塔像) 황룡사구층탑(皇龍寺九層塔)조에는 ‘托’(탁)으로 되어 있다. 뜻은 같다.
- ↑ 《삼국유사》 〈권제삼〉, 탑상(塔像) 황룡사구층탑(皇龍寺九層塔)조에는 ‘狄’으로 되어 있다.
- ↑ 김부식(1145), 《삼국사기》 〈권제1〉 혁거세 거서간 條에는 “三十年 [...] 樂浪人將兵來侵 見邊人夜戶不扃 露積被野 相謂曰 此方民不相盜 可謂有道之國 吾儕潛師而襲之 無異於盜 得不愧乎 乃引還” (30년(기원전 28년)[...] 낙랑인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침범하려다가 밤에도 집의 문을 잠그지 않고, 노적가리를 들에 그대로 쌓아둔 것을 보고는 서로 말하였다. “이 지방 백성들은 서로 도둑질을 하지 않으니 도(道)가 있는 나라라 할 만하다. 우리들이 몰래 군사를 거느리고 습격한다면 도둑과 다름이 없으니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군사를 이끌고 되돌아갔다.)라고 되어 있어 낙랑이 신라를 공격하려 했다고 기술하였다.
- ↑ 김부식(1145), 《삼국사기》 〈권제1〉 유리 이사금 條에는 “十四年 高句麗王無恤 襲樂浪滅之 其國人五千來投”(즉위 14년(37년) 고구려 왕 무휼(無恤)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그 나라 사람 5천 명이 와서 투항하였다.)라고 하고 있어 시기에 차이를 보이고 있다.
- ↑ 원본 虎. 고려 2대 임금인 혜종(惠宗)의 이름인 武를 피휘하기 위하여 호(虎)로 썼다.
- ↑ 김부식(1145), 《삼국사기》 〈권제14〉 대무신왕 條 27년(44년)조에는 광무제가 사람을 보낸 것〔遣使〕이 아니라 병사를 보낸 것〔遣兵〕으로 기록하여 차이를 보이고 있다.
- ↑ 김부식(1145), 《삼국사기》 〈권제1〉 유리 이사금 條에는 “十四年 高句麗王無恤 襲樂浪滅之 其國人五千來投”(즉위 14년(37년) 고구려 왕 무휼(無恤)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그 나라 사람 5천 명이 와서 투항하였다.)라고 하고 있어 시기에 차이를 보이고 있다.
- ↑ ‘壬’의 오기이다.
- ↑ 개원은 당 현종 때의 연호로서 713년 ~ 741년이다.
- ↑ 당 현종의 별호이다.
- ↑ 천성(天成)은 후당(後唐)의 명종(明宗)인 이사원(李嗣源)의 치세에 쓰였던 오대(五代)의 연호(年號)로서 926년 5월에서 930년 2월까지 쓰였다.
- ↑ 갑술년은 734년이고 성덕왕 33년이다. 원문에는 32년으로 되어 있다.
- ↑ 송대(宋代)의 지도인 《역대지리지장도》(歷代地理指掌圖)를 가리킨다.
- ↑ 가탐(賈耽, 730년 ~ 805년)은 중국 당나라의 정치가이다. 창주(滄州) 남피(南皮) 사람으로 자를 돈시(敦詩)라고 했다. 13년간 재상을 맡아 국정을 운영했다. 지리학을 좋아해 지도 〈해내화이도(海內華夷圖)〉와 지지(地誌) 《고금군국현도사이술(古今郡國道懸四夷述)》 40권 등을 남겼다.
- ↑ 고구려 동명성왕을 말한다.
- ↑ 원문은 52년이라 되어 있으나, 《삼국사기》의 혁거세 거서간 조(條)를 기준으로 하여, 53년으로 고쳐서 해석하였다.
- ↑ 유리 이사금을 말한다.
- ↑ 천복(天福)은 후진(後晉)의 고조(高祖)인 석경당(石敬瑭)의 치세에 쓰였던 오대(五代)의 연호(年號)로서 936년 11월에서 944년 6월까지 쓰였다.
- ↑ 해모수왕(解慕漱王, ? ~ ? )는 부여 및 고구려의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천신(天神) 또는 천신의 아들이다. 부여의 신화에 따르면, 해부루왕의 아버지이며, 고구려의 신화에서는 주몽의 아버지이다.
- ↑ 해부루(解夫婁, ? ~?)는 부여의 왕이다. 해모수의 아들이며, 금와왕의 아버지이다.
- ↑ 해부루(解夫婁, ? ~기원전 60년경)는 부여의 왕이다. 해모수의 아들이며, 금와왕의 아버지이다.
- ↑ 금와왕(金蛙王, ? ~기원전 24년 재위:기원전 60년경~기원전 24년경)은 부여의 왕으로 성은 해(解), 이름은 금와(金蛙)이다.
- ↑ 대소왕(帶素王, 기원전 59년이전 ~ 22년 2월, 재위: 기원전 24년 ~ 서기 22년 2월)은 부여의 왕으로 성은 해(解)이고 이름은 대소(帶素)이다.
- ↑ 대무신왕(大武神王, 4년~44년)은 고구려의 제3대 왕(재위 : 18년~44년)이다.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이라고도 한다. 왕후는 갈사왕의 손녀인 해씨부인(解氏夫人)이고, 성은 고(高), 휘은 무휼(無恤)이고, 추모왕의 손자이자 유리명왕의 셋째 아들이다.
- ↑ 다른 판본에는 고(高)로 되어 있다.
- ↑ 연나라(燕國)는 중국 춘추 시대의 주나라 제후국이자, 전국 시대의 전국 칠웅 가운데 하나이다. 기원전 222년에 진시황제에 의하여 멸망하였다.
- ↑ 원문 犯인데, 北의 오기로 보이다.
- ↑ 신라의 3대왕 유리 이사금을 말한다.
- ↑ 본조는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할 당시의 왕조(王朝), 즉 고려를 뜻한다.
- ↑ 천복(天福)은 후진(後晉)의 고조(高祖)인 석경당(石敬瑭)의 치세에 쓰였던 오대(五代)의 연호(年號)로서 936년 11월에서 944년 6월까지 쓰였다.
- ↑ 규장각본에는 ‘替’
- ↑ 일연은 이와 같이 발음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일연(1281),《삼국유사》〈권제1 진한條〉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다.
- ↑ 지절(地節)은 중국 전한(前漢) 선제(宣帝)의 두 번째 연호이다. 기원전 69년에서 기원전 66년까지 4년 동안 사용하였다.
- ↑ 고려 2대 임금인 혜종(惠宗)의 이름인 武를 피휘하였다.
- ↑ 건원(建元)은 중국 전한(前漢) 무제(武帝)의 연호이다. 중국 최초의 연호이며 무제의 첫 번째 연호이다. 기원전 140년에서 기원전 135년까지 6년 동안 사용하였다.
- ↑ 원문은 俗이나, 의미상 浴으로 해석될 수 밖에 없다.
- ↑ 원시는 중국 전한 평제의 연호이다. 서기 1년에서 5년까지 5년 동안 사용하였다.
- ↑ 지황(地皇)은 중국 신(新) 왕망(王莽)의 세 번째 연호이자 신의 마지막 연호이다. 20년에서 23년까지 4년 동안 사용하였다.
- ↑ 원문은 弟. 문맥상 ‘第’를 뜻한다.
- ↑ 원문에 按三國史云. 이라고 되어 있다. 동국이상국집의 《구삼국사(舊三國史)》, 대각국사문집의 《해동삼국사(海東三國史)》와 같은 이전의 원사료를 가리킬 수 있으므로, 삼국사기 권 제1 신라본기 제1 赫居世居西干 조에 유사한 내용이 있다하여 함부로 '삼국사기'로 옮겨서는 안된다. 원문 按三國史云. 新羅稱王曰居西干, 辰言王也, 或云呼貴人之. 稱或曰次次雄或作慈充. 金大問云 “次次雄方言謂巫也. 世人以巫事鬼神尚祭祀故畏敬之, 遂稱尊長者爲慈充. 或云尼師今言謂齒理也.”
- ↑ 원문은 黎(검을 려)인데, 犂(밭 갈 리)의 오기로 보인다.
- ↑ 고려 혜종(재위: 943~945년)의 휘(諱), 무(武)를 피휘하여 원문에서는 호(虎)라 표기하였다.
- ↑ 노례왕, 곧, 유리이사금이 즉위한 것은 서기 24년이고, 즉위 이후 처음 도래하는 임인년은 서기 42년이다. 그런데, 유리이사금이 즉위한 지 18년이나 지났는데도 양위를 놓고 다투었다는 것은 오류라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 ↑ 기원전 19년은 혁거세 즉위 39년이다.
- ↑ 규장각본에 무(武)가 아니라 정(㱏: 正의 이체자)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 ↑ 양梁 원제元帝의 연호
- ↑ 원문 虎. 고려 2대 임금인 혜종(惠宗)의 이름인 武를 피휘하였다.
- ↑ 아해는 보희의 아명이다.
- ↑ 문명왕후 김문희의 아명이다.
- ↑ 원문 虎. 고려 2대 임금인 혜종(惠宗)의 이름인 武를 피휘하였다.
- ↑ 원문 虎. 고려 2대 임금인 혜종(惠宗)의 이름인 武를 피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