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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권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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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문본기(孝文本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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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문황제(孝文皇帝)는 고조의 가운데 아들이다. 고조 11년 봄, (고조는) 진희(陳豨)의 군대를 격파하고 대(代) 지역을 평정하고 (효문제를) 대의 왕으로 세우고 중도(中都)에 도읍을 정하게 했다. 태후 박씨(薄氏)의 아들이다. 즉위 17년인 고후 8년 7월에 고후가 세상을 떠났다. 9월에 여씨들과 여산 등이 반란을 일으켜 유씨를 위태롭게 하자 대신들이 함께 토벌하고 대왕을 세우는 일을 모의했다. 이 일은 「여태후본기(呂太后本紀)」에 기록되어 있다.

승상 진평과 태위 주발 등이 사람을 보내 대왕을 맞이하려 했다. 대왕이 좌우와 낭중령 장무(張武) 등에게 물었다. 장무 등이 의논하여 “한의 대신들은 모두 옛 고제 때 대장들로 군대 일에 익숙하고 모략과 속임수에 능합니다. 저들의 뜻이 이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고제와 여태후의 위세가 두려웠을 뿐이지요. 지금 여씨들을 제거하고 수도를 피바다로 만들었습니다. 저들이 대왕을 맞이하겠다는 것은 명분이고 실제로는 믿을 수 없습니다. 원하옵건대 대왕께서는 병을 핑계로 가지 마시고 변화를 살피시기 바랍니다”라고 했다.

중위(中尉) 송창(宋昌)이 나서서 이렇게 의견을 올렸다.

“신하들의 논의가 틀렸습니다. 무릇 진이 실정하자 제후와 호걸들이 일어나 하나같이 자신들이 할 수 있다고 여긴 자들이 수만이었습니다. 그러나 끝내 천자의 자리에 오른 것은 유씨였고, 천하는 희망을 접었습니다. 이것이 첫째입니다.

고제께서 자제들을 왕에 봉하실 때 그 지역들은 마치 개의 이빨처럼 단단히 물려 있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반석과 같은 종법으로 천하는 모두 그 강력함에 복종했습니다. 이것이 둘째입니다.

한이 일어나 진의 가혹한 정치를 없애고 법령을 간략하게 하고 은혜를 베푸니 사람마다 스스로 안정되어 흔들리기 어려워졌습니다. 이것이 셋째입니다.

무릇 여태후의 위엄으로 여씨를 셋이나 왕으로 봉해서 전권을 마구 휘둘렀지만 태위가 부절을 가지고 북군으로 들어가 한번 호령하자 모두 왼쪽 어깨를 드러내며 유씨 편을 들고 여씨에 반대하여 마침내 소멸시켰습니다. 이는 하늘이 주신 것이지 사람의 힘이 아닙니다.

지금 대신들이 변란을 일으키려 해도 백성들이 따르지 않을 것이니 그 일당이라 해도 오로지 하나가 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안으로는 주허후와 동모후 같은 종친들이 있고, 밖으로는 강력한 오, 초, 회남, 낭양, 제, 대가 두렵습니다. 지금 고제의 아들로는 회남왕과 대왕뿐인데, 대왕께서 나이가 많으신 데다 어질고 인자하고 효성스러움으로 천하에 알려져 있기에 대신들이 천하의 인심에 따라 대왕을 맞이하려는 것이니 대왕께서는 의심하지 마십시오.”

대왕이 태후에게 알리고 상의했으나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거북점을 쳐보니 가로로 크게 갈라지는 대횡(大橫) 괘의 조짐이 나왔다. 점괘를 풀이해보니 “가로로 또렷하게 갈라진 것은 천왕이 될 조짐이다. 하의 계(啓)처럼 빛낼 것이다”라고 나왔다. 대왕이 “과인은 이미 왕이거늘 또 무슨 왕이란 말인가”라고 하니, 점쟁이는 “이른바 천왕이란 천자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대왕이 태후의 동생 박소(薄昭)를 강후에게 보내 만나게 하자, 강후 등이 모두 박소에게 왕을 옹립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말했다. 박소가 돌아와서 “믿을 만합니다. 의심하지 마십시오”라고 보고했다. 대왕은 웃으면서 송창에게 “과연 공의 말대로이군”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바로 송창에게 함께 수레를 타게 하고, 장무 등 여섯 명은 역참의 수레를 타고 장안으로 가자고 명령했다. 고릉에 이르러 멈추고는 송장에게 먼저 장안으로 가서 상황을 살피게 했다.

송창이 위교(渭橋)에 이르자 승상 이하 모두 나와 맞이했다. 송창이 돌아와 보고했다. 대왕이 위교로 내달아 이르니 신하들이 인사를 올리려 신하로 칭했다. 대왕이 수레에서 내려 답례를 했다. 태위 주발이 나아가 “조용히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라고 했다. 송창이 “하고 싶은 말이 공적인 것이면 공개적으로 말하시고, 사적인 것이라면 대왕께서는 받아들이실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태위는 바로 무릎을 꿇고 천자의 옥새와 부절을 바쳤다. 대왕이 사양하며 “대왕의 사저로 가서 논의합시다”라고 했다.

마침내 수레를 몰아 대왕의 관저로 들어가니 신하들이 따랐다. 승상 진평, 태위 주발, 대장군 진무(陳武), 어사대부 장창(張蒼), 종정(宗正) 유영(劉郢), 주허후 유장, 동모후 유흥거, 전객 유게 등이 모두 다시 절을 올리며 “홍(弘) 등은 모두 효혜제의 진짜 아들이 아니므로 종묘를 받들 수 없습니다. 신 등은 음안후(陰安侯), 경왕후(頃王后)와 낭야왕, 종실, 대신, 열후, 2천 석 이상의 관리들이 논의하길 ‘대왕께서 고제의 장남으로 고제의 뒤를 잇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원하옵건대 대왕께서는 천자의 자리에 오르십시오”라고 했다.

대왕은 “고제의 종묘를 받드는 일은 중요한 일이오. 과인은 불초하여 종묘를 논하기에는 부족하오. 초왕을 청하여 마땅한 사람을 논의하도록 하시오. 과인은 감당할 수 없소”라고 했다. 군신들이 모두 엎드려 한사코 청하자 대왕은 서쪽을 향해 세 번을 사양하고 남쪽을 향해 두 번 사양했다. 승상 진평 등이 모두 “신이 엎드려 생각해 보았으나 대왕께서 고제의 종묘를 받드는 것이 가장 옳습니다. 천하 제후들과 만민도 옳다고 여깁니다. 신 등은 종묘사직을 위하여 생각하였기에 감히 소홀할 수 없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신 등의 청을 들어주십시오. 신 등은 천자의 옥새와 부절을 삼가 받들어 다시 절을 올립니다”라고 했다. 대왕은 “종실, 장상, 왕, 열후들이 과인만큼 마땅한 사람이 없다니 과인이 더는 사양할 수 없구려”라며 마침내 천자 자리에 올랐다.

신하들이 예에 따라 차례대로 모시면서 태복(太僕) 하후영(夏侯嬰)과 동모후 유흥거에게 궁을 청소하게 하고 천자의 법가(法駕)를 대의 저택에서 맞아들이게 했다. 황제는 그날 저녁 미앙궁(未央宮)으로 들어갔다. 이어 그날 밤으로 송창을 위장군(衛將軍)으로 삼아 남·북의 군대를 통제하도록 하고, 장무는 낭중령으로 삼아 궁전의 경비를 맡겼다. 돌아와 전전에 앉아 그날 밤으로 조서를 내렸다.

“일전에 여씨들이 권력을 멋대로 휘두르며 대역을 꾀하여 유씨의 종묘를 위협했다. 장상, 열후, 종실, 대신들 덕분에 이들을 토벌하여 모두 죗값을 치르게 했다. 짐이 이제 즉위하였으니 천하에 사면령을 내리고 인민들의 작위를 한 등급씩 올리고 여자에게는 100호마다 쇠고기와 술을 내리니 서로 모여 닷새 동안 먹고 마시도록 하라.”

효문황제 원년 10월 경술일, 낭야왕 유택을 연왕으로 봉했다. 신해일, 즉위한 황제가 고조의 사당을 알현했다. 우승상 진평을 좌승상으로 옮기고, 태위 주발을 우승상이 삼았다. 대장군 관영(灌嬰)은 태위가 되었다. 여씨들이 제, 초의 땅은 모두 다시 돌려주었다.

임자일, 거기장군(車騎將軍) 박소를 보내 대(代)에서 황태후를 맞아들이게 했다. 황제는 이렇게 말했다.

“여산은 스스로 상국이 되고 여록운 상장군이 되어 멋대로 황제의 명령을 사칭하여 관영 장군에게 군을 이끌고 제를 공격하게 하여 유씨를 대신하려 했다. 관영이 형양에 주둔하며 공격하지 않고 제후와 함께 여씨 토벌을 꾀했다. 여산이 좋지 않은 짓을 하려 했으나 승상 진평과 태위 주발이 모의하여 여산 등의 군권을 빼앗았다. 주허후 유장이 먼저 여산 등을 체포했고, 태위는 몸소 양평후 기통을 데리고 부절을 가지고 북군으로 들어갔으며, 전객 유게는 직접 조왕 여록의 도장을 빼앗았다.

태위 주발에게 1만 호를 더하고, 승상 진평과 장군 관영에게는 각각 식읍 3천 호와 금 2천 근을 내린다. 주허후 유장, 양평후 유통, 동모후 유흥거에게는 각각 2천 호와 금 1천 근을 내린다. 전객 유게는 양신후에 봉하고 금 1천 근을 내린다.”

12월, 황제가 “법이란 다스림의 원칙으로 포악함을 막고 사람들을 착한 쪽으로 이끄는 것이다. 법을 어겨 죗값을 치렀는데 죄 없는 부모와 처자를 함께 연루시켜 관의 노비로 삼으로 짐은 참으로 이를 취할 수 없으니 이 문제를 논의하도록 하라”라고 했다.

해당 관리들이 한결같이 “인민은 스스로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법으로 금하는 것입니다. 서로 연좌시켜 처벌하는 것은 마음에 부담을 주어 다시 죄를 짓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그 연원이 오래되었습니다. 그대로 두는 것이 편할 듯하옵니다”라고 했다.

주상은 “짐이 듣건대 법이 바르면 인민들이 성실해지고, 처벌이 정당하면 인민들이 따른다고 했소. 또 인민을 이끄는 목민관이라면 착한 쪽으로 이끌어야 하거늘 그렇게 이끌지도 못하는 데다 또 바르지 못한 법으로 벌을 주려 하니 이는 인민에게 해를 주는 포악한 짓이다. 어찌 (법으로) 금지할 수 있으리오? 짐은 그 편리한 점을 듣지 못했으니 좀 더 따져보길 바라오”라고 했다.

담당 관리들은 모두 “폐하의 큰 은혜와 깊은 덕은 신 등이 따를 바가 못 되옵니다. 조서를 받자와 연좌와 관련한 율령을 폐지하겠나이다”라고 했다.

정월, 담당관이 “일찍 태자를 책봉하는 일은 종묘를 받드는 일입니다. 태자를 세우시길 청하옵니다”라고 했다. 주상이 “짐이 부덕하여 상제와 신명께서 아직 제사를 받지 않으셨고 천하 인민들이 아직 뜻을 다잡지 못한 바가 있다. 지금 천하의 유능하고 덕 있는 사람을 널리 구해 천하를 양보하지 못할지언정 벌써 태자를 세우라 하니 이는 나의 부덕을 더 무겁게 하는 것이다. 천하에 뭐라 하겠는가? 나중에 논의해도 늦지 않다”라 했다. 담당관들은 “태자를 일찍 세우는 일은 종묘사직을 중시하고 천하를 잊지 않기 위함입니다”라고 했다. 주상은 이렇게 말했다.

“초왕은 막내 숙부로 나이도 많으시고 천하의 의리를 두루 겪어 국가의 큰 틀을 잘 아신다. 오왕은 짐에게 형님이 되신다. 은혜롭고 어질어 덕을 갖추셨다. 회남왕은 동생이지만 덕으로 짐을 보좌하고 있다. 어찌 이 분들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제후 왕들과 종실의 형제들 모두 공신이고 어질고 덕 있는 분들이 많다. 덕을 갖춘 분을 천거하여 짐이 마치지 못한 일을 잇게 하는 것이 사직과 천하에 복된 일이 아니겠는가? 지금 이분들 중에서 선택하지 않고 기어코 아들이어야 한다면 사람들은 짐이 어질고 덕 있는 분들은 버리고 자식만 생각하여 천하를 걱정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짐은 정말 받아들이지 않고 싶다.”

담당관 모두 모두가 한사코 간청하며 “옛날 은과 주가 나라를 세워 편안하게 다스리길 천 년이었습니다. 과거 천하를 가진 자로 이렇게 오래 된 경우는 없었는데 이 방법을 사용해서입니다. 후계자는 반드시 자식을 세운 바도 오래 되었습니다. 고제께서 몸소 사대부들을 거느리고 천하를 평정하여 제후를 세움으로써 태조가 되셨습니다. 제후왕들과 많은 제후들이 나라를 받아 또한 그 나라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자손이 대를 이어 대대로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야말로 천하의 대의입니다. 이 때문에 고제께서 태자를 세워 천하를 다독거리신 것입니다. 지금 세워야 할 사람은 놔두고 제후와 종실에서 골라 바꾸려 한다면 이는 고제의 뜻이 아닙니다. 바꾸자는 논의는 타당치 않습니다. 아드님 중에서 모(某)는 나이가 가장 많고 어질고 후덕하니 청하옵건대 태자로 세우십시오”라고 했다.

주상이 이를 허락했다. 이에 천하의 인민들로서 아비의 뒤를 이를 사람들에게 작위를 한 등급씩 하사하고, 장군 박소를 지후(軹侯)에 봉했다.

3월, 담당관들이 황후를 세우라고 청했다. 박태후(薄太后)는 “제후들이 모두 같은 성이니 태자의 어머니를 황후로 세우자”고 했다. 황후의 성은 두씨(竇氏)였다. 주상이 황후를 세웠으므로 천하의 홀아비, 과부, 홀로 사는 자, 곤궁한 자, 80세 이상인 자, 고아로 9세 이하인 자들에게 옷감, 쌀, 고기를 각각 일정하게 내렸다.

주상이 대 지역에서 와서 즉위하자마자 천하에 덕을 베풀고, 제후와 사방 오랑캐들을 다독거려 모두 흡족하게 했다. 이에 대 지역에서부터 따라온 공신들에게 차등있게 논공행상을 베풀었다. 주상은 “대신들이 여씨들을 토벌하고 짐을 맞이하려 했을 때 짐은 의심했고 모두가 짐을 말렸다. 오로지 중위 송창만이 짐에게 권하여 짐이 종묘를 지키고 받들 수 있었다. 송창을 위장군으로 높였지만 그를 다시 장무후(壯武侯)에 봉한다. 짐을 따른 6인은 모두 관직이 9경에 이르게 하라”라고 했다.

이어 주상은 이렇게 말했다.

“열후로서 고제를 따라 촉(蜀)과 한중(漢中)으로 들어간 68인은 모두 각각 300호를 더해주고, 2천 석 이상의 관리들로서 고제를 따른 영천(潁川) 군수 존(尊) 등 10인은 식읍 600호, 회양(淮陽) 군수 신도가(申徒嘉) 등 10인에게는 500호, 위위(衛尉) 정(定) 등 10인에게는 400호를 더하라. 회남왕의 외숙 조병(趙秉)을 주양후(周陽侯)에, 제왕의 외숙 사균(駟鈞)을 청곽후(淸郭侯)에 봉하라.”

가을, 상산국(常山國) 승상이었던 채겸(蔡兼)을 번후(樊侯)로 삼았다.

누군가 우승상 주발에게 “군께서는 여씨들을 토벌하고 대왕을 맞이하셨습니다. 지금 또 그 공을 자랑스러워하면서 큰 상을 받아 귀한 자리에 올랐으니 장차 화가 군의 몸에 미칠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우승상 주발은 병을 핑계로 사직을 청하니, 좌승상 진평이 혼자 승상 자리를 맡았다. 

2년 10월, 승상 진평이 죽자 다시 강후 주발을 승상으로 삼았다. 주상이 “짐이 듣기에 옛날 제후들로 나라를 세운 자가 천을 넘었다. 각자 그 땅을 지키며 때마다 조공을 올렸고, 인민은 수고롭지 않아 상하가 화합하니 덕을 해치는 일이 없었다. 지금 열후들이 장안에 대부분 살고 있어 자신들의 읍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 관리들이 물자를 나르는 데 비용이 많이 들고 힘이 든다. 또 제후들이 그 인민을 가르치고 다스릴 길이 없다. 제후들은 자기 나라로 돌아가고, 일이 있거나 조령에 따라 머물러야 할 자는 태자를 보내도록 하라”고 했다.

11월 그믐, 일식이 있었다. 12월 보름, 또 일식이 있었다. 주상은 이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짐이 듣건대 하늘이 많은 인민들을 기르고 그들을 위해 군주를 두어 기르고 다스리게 했다. 군주가 부덕하여 정치를 고르게 베풀지 못하면 하늘이 재앙을 보여주어 다스리지 못함을 경고했다. 11월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이는 마침 하늘이 경고한 것이니 이보다 더 큰 일이 어디 있겠는가! 짐은 종묘를 지키며 이 미천한 몸을 억조인민과 군왕의 위에 맡겼으니 천하의 다스림과 혼란이 짐 한 몸에 있고 몇몇 집정자들은 나의 팔다리와 같다. 짐이 아래로 중생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위로 해와 달과 별에 누를 끼쳤으니 그 부덕함이 크도다. 이 조령이 내려가면 짐의 과실을 비롯하여 짐의 식견과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바들을 두루 짐에게 알리도록 하라. 또 어질고 선량하고 반듯하여 무슨 말이든 바르게 할 수 있는 사람을 천거하여 짐의 부족함을 잡아주길 바란다. 이로써 각자 그 직책에 힘을 쏟고 요역과 지출을 아껴 인민을 편하게 하라. 짐의 덕이 널리 미치지 못하여 외부 사람이 잘못을 저지를까 걱정이니 대비를 멈출 수 없다. 지금 당장 변방의 군대를 철수할 수 없으니 시위병을 증강할 수 없다. 위장군의 군대를 해산시키도록 하라. 태복은 말들 중 필요한 수만 남기고 나머지는 역참으로 보내 보충하도록 하라.” 

정월, 주상이 “농사는 천하의 근본이니 적전을 열어 짐이 몸소 농사를 지어 종묘의 제수로 쓰도록 하겠다”라고 말했다.

3월, 담당관이 황자들을 제후왕으로 세우자고 청했다. 주상은 “조 유왕(幽王)은 감금되었다 죽었다. 짐이 그를 불쌍히 여겨 그 장자 수(遂)를 조왕으로 세운 바 있다. 수의 동생 벽강(辟彊)과 제 도혜왕(悼惠王)의 아들 주허후 유장과 동모후 유흥거는 공이 있어 왕이 될 만하다”라 했다. 이에 조 유왕의 작은 아들 벽강을 하간왕(河間王)으로 삼고, 제의 극군(劇郡)을 주허후 유장에게 주어 성양왕(城陽王)으로 세우고, 동모후를 제북왕(濟北王)으로 세웠다. 그리고 황자 무(武)는 대왕(代王), 삼(參)은 태원왕(太原王), 읍(揖)은 양왕(梁王)이 되었다.

주상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옛날 천하를 다스릴 때 조정에는 좋은 말과 비망을 올리기 위한 깃발과 나무가 있어서 소통을 위한 통치의 방법으로 누구든 와서 바른말을 올렸다. 지금 법에는 비방죄와 요언죄가 있어 여러 신하들이 그 마음을 다 드러내지 못하게 하고, 황제는 자신의 잘못을 들을 기회가 없으니 어찌 먼 곳이 어질고 선량한 자들을 오게 하겠는가? 그 법령을 없애도록 하라! 인민들이 혹 주상을 저주하고 말하지 않기로 약속했다가 후에 누군가 고발하면 관리들이 대역이라 하고, 다른 말을 하면 관리들이 또 비방이라 한다. 이는 어리석고 무지한 인민들을 죽음으로 모는 것이니 잠은 받아들일 수 없다. 지금부터 이 법을 범하는 자가 있어도 처벌하지 말라!”

9월, 군의 군수와 제후국의 승상에게 처음으로 동으로 만든 호부(虎符)와 대나무로 만든 사부(使符)를 주었다.

3년 10월 정유일 그믐, 일식이 있었다. 11월, 주상이 “일전에 조서를 내려서 열후들에게 봉국으로 가라고 했는데 구실을 대며 가지 않는 자가 간혹 있다. 승상은 짐이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니 짐을 위하여 열후들을 데리고 봉국으로 가도록 하라”라 했다. 강후 주발이 승상에서 면직되어 봉국으로 갔다. 태위 영음후(潁陰侯) 관영을 승상으로 삼으면서 태위 벼슬을 없애고 승상에 예속시켰다.

4월, 성양왕 유장이 세상을 떠났다. 회남왕 유장(劉長)이 종자 위경(魏敬)을 시켜 벽양후(辟陽侯) 심이기(審食其)를 죽였다.

5월, 흉노가 북지(北地)를 침범하여 하남에 머무르며 노략질을 했다. 황제가 처음으로 감천(甘泉)에 행차했다. 

6월, 황제가 이렇게 말했다.

“한과 흉노는 형제가 되어 변경을 해치지 않기로 약속하여 흉노에 많은 것을 보내주었다. 지금 우현왕(右賢王)이 자기 나라를 떠나 무리를 거느리고 하남 강지(降地)에 머물러 있는 것은 전에 없던 일이다. 부근 변방을 오가며 관리와 병졸을 잡아 죽이고, 변경을 지키던 만이를 몰아내서 그들의 터전에서 살지 못하게 하고, 변경 관리를 능욕하고 도둑질하는 등 그 오만함이 참으로 도를 넘었으니 이는 약속과 다르다. 변방 관리들은 기병 8만 5천을 징발하여 고노(高奴)로 보내고, 승상 영음후 관영을 보내 흉노를 공격하게 하라!”

흉노가 물러가자 중위(中尉)의 특수부대 재관(材官)을 위장군에 소속시켜 장안에 주둔하게 했다.

신묘일, 황제가 감천의 고노에서 내친 김에 태원으로 행차하여 옛 신하들을 만나 전부 상을 내렸다. 공을 거론하여 상을 내렸는데, 여러 마을에 소고기와 술을 내리고, 진양(晉陽)과 중도(中都)의 인민들에게는 3년의 요역과 부세를 면제해주었다. 태원에서 열흘 넘게 마물렀다.

제북왕 유흥거가 황제가 대(代)로 흉노를 공격하러 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반란을 일으켜 군대를 동원하여 영향을 습격하려 했다. 이에 조서를 내려 승상의 군대를 철수시키고 극포후(棘蒲侯) 진무를 대장군으로 삼아 10만을 거느리고 가서 치게 하였다. 기후(祁侯) 증하(繒賀)를 장군으로 삼아 형양에 주둔하게 했다. 7월 신해일, 황제가 태원에서 장안으로 돌아와서 담당관에게 조서를 내려 이렇게 말했다.

“제북왕이 덕을 저버리고 주상에게 반역하였다. 관리와 인민을 속여 대역무도한 짓을 저지르게 했다. 제북의 관리와 인민들로서 군대가 도착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 잘못을 바로잡은 자와 군대나 땅 그리고 성읍을 가지고 투항하는 자는 모두 용서하고 관직과 작위를 회복시켜 줄 것이다. 제북왕 유흥거와 왕래한 자들 역시 용서할 것이다.”

8월, 제북의 군대를 격파하여 제북왕을 사로잡고, 제북왕을 따라 반란을 일으킨 관리와 인민들은 사면했다.

6년, 담당관이 회남왕 유장이 선대 황제의 법을 폐하고, 천자의 명을 듣지 않고, 거처를 멋대로 하고, 출입이 천자에 버금가고, 법령을 제 마음대로 하면서 극포후의 태자 진기(陳奇)와 반란을 꾀해 민월(閩越)과 흉노로 사람을 보내어 그들과 함께 군대를 출동시켜 종묘사직을 위협하려 한다고 아뢰었다. 

신하들이 논의하여 모두 “유장은 목을 베어 조리를 돌려야 마땅합니다”라고 했다. 황제는 차마 회남왕을 법대로 조치할 수 없어 그 죄를 용서하고 왕이라 칭하지 못하게 폐했다. 신하들이 회남왕을 촉 지역의 엄도(嚴道)와 공도(邛都)로 조처할 것을 청하자 황제가 이를 허락했다. 유장이 처소에 이르지 못하고 가는 도중에 죽으니 주상이 이를 가엾게 여겼다. 그 뒤 16년에 회남왕 유장에게 여왕(厲王)이란 시호를 내리고, 그 아들 셋을 회남왕, 형산왕(衡山王), 여강왕(廬江王)으로 세웠다.

13년 여름, 주상이 “대개 하늘의 도를 들으니 화는 원망에서 일어나고, 복은 덕과 연계되어 일어난다고 한다. 백관의 잘못은 당연히 짐에게서 비롯된다. 지금 제사를 담당하는 비축(祕祝) 관리들이 (짐의) 잘못을 아래로 돌려 나의 부덕을 드러나게 하고 있으니 짐은 정말 원치 않는 바이다. 이를 없애도록 하라”라고 했다.

5월, 제나라의 태창령(太倉令) 순우공(淳于公)이 죄를 지어 처벌을 받게 되어 그를 잡아 장안의 감옥으로 압송했다. 태창공은 아들이 없고 딸이 다섯이었다. 태창공이 압송되면서 그 딸들에게 “자식을 낳되 아들을 못 낳으니 급한 일이 있어도 도움이 안 되는구나”라고 욕을 했다. 그 막내딸 제영(緹縈)이 슬피 울며 그 아비를 따라 장안에 와서는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소첩의 아비는 괸리로서 제나라에서는 다들 청렴하고 공평하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지금 법에 연루되어 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소첩이 가슴 아픈 것은 사형을 당한 자는 다시 살아 올 수 없고, 육형을 당한 자는 다시 이어 붙일 수 없으니 잘못을 고치고 새사람이 되고자 해도 길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소첩이 관비가 되어 아비의 죄를 대신하겠사오니 아비가 새사람이 될 수 있게 하옵소서.”

이 글을 천자에게 아뢰니 천자는 그 뜻이 가련하다 하여 곧 이렇게 조서를 내렸다. 

“대개 듣자하니 옷이나 모자에 다른 표시를 하거나 다른 복장을 입게 하는 벌 정도를 내렸을 뿐인데도 인민들은 법을 어기지 않았다고 한다. 어째서인가? 다스림이 지극해서이다. 지금 법에는 육형이 세 가지나 있는데도 간사함이 그치질 않으니 그 잘못이 어디에 있는가? 바로 짐의 덕이 박하고 교화가 밝지 못하기 때문 아니겠는가? 내가 참으로 부끄럽다. 그러니 무릇 교화의 방법이 불순하면 어리석은 인민이 (죄에) 빠지는 것이다. <시>에 ‘다정하고 자상한 군자여, 백성의 부모로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인민들이 잘못을 하면 교화도 하지 않고 벌부터 가하니 행동을 고치고 착한 사람이 되려고 해도 길이 없다. 짐은 이것이 몹시 안타깝다. 팔다리가 잘리고 피부와 근육이 상하면 다시는 자랄 수 없으니 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부덕한가? 그러니 이것이 어찌 인민의 부모된 자의 뜻이라 하겠는가? 육형을 없애도록 하라!”

주상이 “농사는 천하의 근본으로 이에 힘쓰는 것보다 큰일은 없다. 지금 열심히 일해도 세금의 부담이 있으니 이는 근본과 말단에 차이를 두지 않았기 때문이고, 또 농사에 힘쓰게 하는 방법도 미비하기 때문이다. 농지에 대한 세금을 없애라”라고 했다.

14년 겨울, 흉노가 변경을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려고 조나(朝那) 요새를 공격하여 북지의 도위(都尉) 손앙(孫卬)을 죽였다. 주상이 곧 세 장군을 보내 농서(隴西), 북지(北地), 상군(上郡)에 주둔시키고, 중위 주사(周舍)를 위장군으로 삼는 한편 낭중령 장무를 거기장군으로 삼아 위수(渭水)의 북쪽에 주둔하게 했다. 전차 1천 승에 기병 10만이었다.

황제가 몸소 군대를 위문하여 사열하고 훈령과 함께 장병들에게 하사품을 내렸다. 황제가 몸소 흉노를 공격하려 했다. 신하들이 말렸으나 한사코 듣지 않다가 황태후가 한사코 말리자 황제가 그제서야 그만 두었다. 이에 동양후(東陽侯) 장상여(張相如)를 대장군으로, 성후(成侯) 동적(董赤)을 내사(內史)로, 혁포(奕布)를 장군으로 삼아 흉노를 치니 흉노가 달아났다.

봄, 주상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짐이 희생과 폐백을 바치며 상제와 종묘를 섬긴 지 14년이다. 이 긴 시간 동안 현명하지도 못한 채 오랫동안 천하에 군림했으니 짐이 참 부끄럽다. 제사 장소를 넓히고 폐백도 늘리도록 하라. 지난 날 선왕들께서는 멀리까지 베푸시면서도 보답을 바라지 않으셨고, 산천에 제사를 드리면서도 복을 기도하지 않았다. 어진 사람을 가까운 사람보다 높이셨고, 자기 몸보다 인민이 먼저였으니 지극히 영명하셨다. 지금 내가 듣자하니 제사관들이 백성은 위하지 않고 모든 것을 짐을 위한 복으로 돌린다고 하니 짐이 참으로 부끄럽다. 대저 짐이 부덕한 데도 그 복을 혼자 누리고 백성들은 받지 못하니 이는 나의 부덕을 더 무겁게 하는 것이다. 제사관에게 공경을 다해 제사를 받들되 (짐을 위해 복을) 빌지 않도록 명하라.”

이때에 북평후(北平侯) 장창이 승상이 되어 비로소 율력(律曆)을 밝혔다. 노나라 사람 공손신(公孫臣)이 황제에게 글을 올려서 오덕(五德)이 순환하는 일을 아뢰었는데, 바야흐로 지금은 도덕의 시대로 토덕은 황룡이 나타나야만 하니 달력의 첫 달과 복장의 색깔에 관한 제도를 고쳐야 한다고 했다. 천자가 이 일을 내려 보내 승상과 논의하도록 했다. 승상이 따져보니 지금은 수덕이라 10월을 첫 달로 삼고 검은색을 앞세워야 한다며 그 말이 옳지 않으니 없던 일로 해야 한다고 아뢰었다.

15년, 황룡이 성기(成紀)에 나타나자 천자는 노의 공손신을 다시 불러들여 박사로 삼고 토덕에 관한 일을 밝히게 했다. 이에 주상은 조서를 내려 “특이한 사물의 신이 성기에 나타났으나 이민에게 해가 없고 풍년이 들었다. 짐이 몸소 상제와 신들에게 교 제사를 올릴 것이니 의례를 맡은 관리들은 짐이 힘들까 하여 숨기느 일이 없도록 하라”고 했다.

담당관과 의례를 맡은 관리들이 하나 같이 “옛날 천자들은 여름에 몸소 교외로 납시어 상제께 제사를 올렸기 때문에 교 제사라 했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천자가 처음으로 옹(雍)으로 행차하여 오제에게 제사를 드려 초여름 4월에 답례했다. 조나라 사람 신원평(新垣平)이 천기를 잘 살핀다며 주상에게 위수 북쪽에 오제의 사당을 세우면 주나라의 세발솥과 아름다운 옥이 나타날 것이라고 했다.

16년, 주상이 몸소 위수 북쪽의 오제 사당에 교 제사를 지내고 여름에 답례했으며, 붉은색을 받들었다.

17년(기원전 163년), 옥으로 된 잔을 얻었는데 “인민의 주인이 장수하리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이에 천자는 이 해를 원년으로 바꾸고 천하에 모여서 술 마시는 것을 허락했다. 그해에 신원평 사건이 발각되어 삼족을 멸했다. 

후원 2년, 주상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짐이 영명하지 못해 멀리까지 덕이 미치지 않아 주변 다른 나라들이 간혹 편치 못했다. 또 사방 변경 밖이 생업이 불안하고 나라 안의 생활도 편치 않았다. 이 두 가지 잘못은 모두 짐의 덕이 박하여 멀리까지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 계속 흉노가 변경을 침범하여 관리와 인민을 많이 죽인데다, 변방 관리와 장병들이 나의 속뜻을 깨우치지 못해 나의 부덕을 더 무겁게 했다. 오래 병란이 계속되니 나라 밖의 나라가 어찌 편하겠는가? 지금 짐이 새벽에 일어나고 밤늦게 자면서 천하를 위해 애를 쓰고 만민을 위해 고심하면서 늘 불안하여 하루도 마음에서 잊은 적이 없다. 그러나 사신을 보내되 의관과 수레 지붕이 서로 바라보고 길에 바퀴자국이 가득할 정도로 보내서 선우에게 짐의 뜻을 알렸던 것이다. 이제 선우는 옛날의 길로 돌아가 사직의 안전과 만민의 이익을 따져 짐과 더불어 서로의 잘못을 잊고 화목하게 함께 큰길로 나아가 형제의 의를 맺음으로써 천하의 만민을 보전키로 했다. 화친이 성사되었으나 금년부터 시행하도록 하라.”

후원 6년 겨울, 흉노 3만이 상군을 침입했고, 3만은 운중(雲中)에 침입하였다. 중대부령(中大夫令) 면(勉)을 거기장군으로 삼아 비호(飛狐)에, 초의 승상이었던 소의(蘇意)를 장군으로 삼아 구주(句注)에, 장군 장무는 북지에, 하내(河內) 군수 주아부(周亞夫)는 장군에 임명하여 세류(細柳)에, 종정 유례(劉禮)도 장군으로 삼아 패상(覇上)에, 축자후는 극문(棘門)에 주둔시켜 흉노에 대비하도록 했다. 몇 달 뒤에 흉노가 물러가자 역시 철수시켰다.

천하에 가뭄이 들고 메뚜기 피해가 있었다. 황제는 은혜를 베풀어 제후들이 조공을 바치지 않게 하고, 산과 못에 대한 금지를 풀고, 의복과 마차, 애완동물 등의 규모를 줄이고, 수행원도 줄였다. 창고를 열어 빈민을 구제하고 인민들이 작위를 팔 수 있게 했다.

효문제가 대 지방에서 와서 즉위한 지 23년, 궁실, 원유, 애완동물, 의복, 마치가 늘지 않았다. 불편한 일이 있으면 바로 규제를 풀어 인민을 이롭게 했다. 일찍이 노대(露臺)를 지으려고 장인을 불러 계산하게 했더니 금 100근이 든다고 했다. 주상이 “금 100근이면 보통 인민 열 집 재산에 해당한다. 내가 선제의 궁실을 물려받아 쓰면서 늘 욕되게 하면 어쩌나 두려웠는데, 노대를 지어 무엇하리오”라고 했다. 

주상은 늘 소박하게 옷을 입었고, 총애하는 신부인(愼夫人)에게도 옷을 땅에 끌지 않도록 했으며, 휘장에 수를 놓지 않게 하는 등 천하에 앞장서서 도탑고 소박하게 보였다. 패릉(覇陵)을 세울 때는 와기를 사용하고 금, 은, 구리, 주석으로 장식하지 못하게 했다. 비용을 줄이고 인민을 번거롭게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남월왕 위타(尉佗)가 무제(武帝)로 자립했지만 주상은 위타 형제를 불러 귀하게 대하는 등 덕으로 갚으니 위타가 마침내 황제 칭호를 버리고 신하로 칭했다. 흉노와 화친했으나 흉노가 약속을 저버리고 침입해도 변경만 지키고 군대를 깊이 들여보내지 않았다. 백성을 번거롭고 수고롭게 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오왕이 거짓으로 병을 핑계대고 조회하지 않자 탁자와 지팡이를 하사하여 위로했다. 신하들 중 원앙(袁盎)처럼 대놓고 말해도 늘 받아들였다. 장무 같은 신하들이 돈 등을 뇌물로 받다가 들켰지만 주상은 궁중 창고의 금전을 하사하여 그 마음을 부끄럽게 했지 처벌하지 않았다. 오로지 덕으로 인민을 교화하는 데 힘을 쏟으니 천하가 부유해지고 예의가 크게 일어났다.

후원 7년 6월 기해일, 황제는 미앙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유언은 다음과 같았다.

“짐이 듣기에 천하 만물로서 싹이 자라 죽지 않는 것은 없다고 했다. 죽음은 하늘과 땅의 이치요, 사물의 자연스러움이니 어찌 그리 슬퍼할 바냐. 지금 세상은 모두가 삶을 좋다 하고 죽음은 싫어하여 장례를 거창하게 치르느라 생업까지 파괴하고 상복을 너무 오래 입어 산 사람이 상하기까지 한다. 나는 정말 이렇게 할 수 없다.

또 짐이 부덕하여 백성에게 도움을 주지 못했다. 지금 죽음을 앞두고 또 계절이 몇 번 바뀌도록 상복을 입어 집안의 아비와 아들을 슬프게 하고, 나든 사람이나 젊은이의 뜻을 상하게 하며, 그들 음식에 손상이 가고 귀신에게 드리는 제사가 끊어지게 하여 나의 부덕을 더 무겁게 한다면 천하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 짐이 종묘를 얻어 보전하며 보잘 것 없는 몸을 천하 군왕의 자리에 맡긴 지 20년이 넘었다. 천지 신령과 사직이 복에 힘입어 나라 안이 안녕을 찾고 군대를 일으키는 일이 없었다. 짐이 또 영민하지 못하여 늘 잘못된 행실로 선제께서 남긴 덕을 부끄럽게 만들면 어쩌나 두려웠고, 또 시간이 지날수록 끝이 안 좋으면 어쩌나 겁이 났다. 지금 다행히 천수를 누리고 고조의 사당에서 제사를 받게 되었다. 짐이 영명하지 못한데도 잘되었으니 슬퍼할 일이 무엇인가?

천하의 관리와 인민들은 조령이 내려가면 사흘만 곡을 하고 상복을 벗도록 하라. 며느리를 맞고 딸을 시집보내고, 제사를 지내고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 일을 금하지 말라. 상을 맡고 있거나 상복을 입고 곡을 해야 하는 이들은 맨발로 땅을 밟지 않도록 하라. 상복의 허리띠는 세 치를 넘지 말 것이며, 수레와 병기를 진열해 놓지 말라. 남녀를 징발하여 궁전에서 곡하지 않도록 하라. 궁전에서 곡을 해야 하는 이들은 모두 아침저녁 열다섯 번만 하고 예가 끝나면 그만해라. 아침저녁으로 곡을 할 때가 아니면 마음대로 곡하지 않도록 하라. 안장이 끝나면 대공은 15일, 소공을 14일, 섬은 7일만 입도록 하라. 

조령에 포함되지 않은 일들도 모두 이 조령을 기준으로 삼아 따르도록 하고, 천하에 포고하여 짐의 뜻을 분명하게 알려라. 패릉의 산천은 바꾸지 말고 원래 모습대로 두라. 후궁은 부인 이하 소사까지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라.”

중위 주아부를 거기장군으로 삼고 속국(屬國) 서한(徐悍)을 장둔장군(將屯將軍)으로 삼았다. 낭중령 장무를 복토장군(復土將軍)으로 삼고, 가까운 현에서 병졸 1만 6천, 수도 안에 병졸 1만 5천을 징발하여 땅을 파고 흙을 메우는 일을 장군 장무에게 속하게 하였다.

을사일, 신하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효문황제라는 존호를 올렸다.

태자가 고조 사당에서 즉위하였다. 정미일, 자리를 이어받아 황제라 칭하였다.

효경황제(孝景皇帝) 원년(기원전 156년) 10월, 어사에게 조서를 내렸다.

“대개 옛날에는 ‘조(祖)’자는 공이 있는 분께, ‘종(宗)’자는 덕이 있는 분께 올렸고, 예악의 제정도 다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들었다. ‘가(歌)’는 덕을 드러내고, ‘무(舞)’는 공덕을 밝히는 것이라 했다. 고조 사당에 술을 올릴 때는 ‘무덕(武德)’, ‘문시(文始)’, ‘5행(五行)’의 춤을 연주했고, 효혜제께 술을 올릴 때는 ‘문시’, ‘5행’의 춤을 연주했다.

효문황제께서 천하에 임하시어 관문과 다리를 여시어 먼 곳을 차별하지 않으셨으며, 비방죄를 폐지하고 육형을 없애셨고, 나이 든 사람에게 상을 내리고 홀로 사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며 뭇 생명들을 기르셨다. 좋아하고 하고 싶은 것을 줄이고 조공을 받지 않았으며, 사사로운 이익을 꾀하지 않으셨다. 죄인의 죄를 연좌시키지 않으셨고,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일이 없었다. 궁형을 없애고, 후궁들이 궁을 나갈 수 있게 했으며, 사람들의 자손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셨다.

짐이 영민하지 못하여 다 알지 못한다. 이 모두가 상고시대에는 미치지 못하겠으나 효문황제께서는 몸소 행동으로 옮기셨다. 하늘과 땅처럼 후덕하셨고, 이로움과 혜택을 천하에 베푸시니 그 복을 입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해와 달처럼 밝으셨지만 그에 걸맞는 종묘 예악이 없으니 짐이 정말로 송구스럽다. 효문황제의 사당을 위하여 ‘소덕(昭德)’이란 가무를 만들어 큰 덕을 밝히도록 하라. 그런 연후에 조종의 공덕을 죽백에 기록하여 만세토록 전하여 영원무궁토록 한다면 짐이 참으로 기쁘겠다. 승상, 열후, 중 2천석, 예관들은 모두 합당한 예의를 만들어 올리도록 하라.”

승상 신도가(申徒嘉) 등이 말했다.

“폐하께서 길이길이 효도하는 마음에서 ‘소덕’이란 가무를 만들어 효문황제의 성스러운 덕을 밝히시려는 일은 신 신도가 등이 어리석어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삼가 논의한 바를 아룁니다. 

세상에서 공이라면 고황제보다 큰 분이 없고, 덕이라면 효문황제보다 가득 찬 분이 없습니다. 고황제의 사당은 마땅히 황제들 중 태조 사당이 되어야 하고, 효문황제의 사당은 마땅히 태종 사당이 되어야 합니다. 천자는 대대로 조종의 사당에 제사를 올려야 하고, 군국의 제후들은 각각 효문황제를 위하여 태종 사당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제후왕과 열후들은 사자를 보내 천자를 모시고, 해마다 조종의 사당에 제사를 올려야 합니다. 이를 죽백에 기록하고 천하에 선포하시옵소서!” 황제가 “좋다”하여 칙명을 내렸다.

사마천의 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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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사공은 말한다. “공자는 말하기를 ‘한 세대가 지나야 어진 정치가 나온다. 선한 사람이 나라를 100년을 다스려야 폭정과 살육을 없앨 수 있다’고 했다. 정말 옳은 말씀이다. 한나라가 일어나 효문제에 이르기까지 40년이 넘어서야 덕이 지극해졌다. 서서히 역법과 복색을 고치고 봉선을 지내는 일까지 나아가야 하나 겸양 때문에 지금까지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아, 이 어찌 어질다 아니 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