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권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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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경본기(孝景本紀)[편집]

효경황제(孝景皇帝)는 효문제의 차남이다. 어머니는 두태후(竇太后)이다. 효문제가 대 지역에 있었을 때 전 왕후에게 세 아들이 있었다. 두태후가 총애를 받으면서 전 왕후가 죽고 세 아들도 잇따라 죽음으로써 효경제가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원년(기원전 156년) 4월 을묘일, 천하에 사면령을 내렸다. 을사일, 인민들에게 작위를 한 등급씩 내려 주었다. 5월, 경작하는 땅에 대한 세금을 반으로 줄였다. 효문제를 위해서 태종 사당을 세우면서 신하들에게는 조정에 들어와 축하의 예를 올리지 못하게 했다. 흉노가 대 지역을 침입하자 화친을 약속했다.

2년 봄, 예전에 상국을 지냈던 소하(蕭何)의 손자 소계(蕭係)를 무릉후(武陵侯)에 봉했다. 남자 나이가 스무 살이 되면 호적에 등록하게 하였다. 4월 임오일, 효문태후가 세상을 떠났다. 광천왕(廣川王)과 장사왕(長沙王)이 모두 봉국으로 돌아갔다. 승상 신도가(申屠嘉)가 죽었다. 8월, 어사대부 개봉후(開封侯) 도청(陶靑)을 승상으로 삼았다.

혜성이 동북쪽에 나타났다. 가을, 형산(衡山)에 우박이 내렸는데, 큰 것은 다섯 치나 되었고, 두 자나 쌓였다. 화성이 역행하여 북극성에 자리를 틀었다. 달이 북극성 사이에 나타났다. 목성이 천정(天廷)을 역행했다. 남릉(南陵)과 내사(內史)의 관할지인 대우(祋祤)를 현으로 했다.(또는 남릉을 현으로 하고, 내사를 좌우로 나누는 한편 대우를 현으로 했다.)

3년 정월 을사일, 천하에 사면령을 내렸다. 장성(혜성)이 서방에 나타났다. 번개가 쳐서 낙양 동궁의 대전과 성루가 불탔다. 오왕(吳王) 유비(劉濞), 초왕(楚王) 유무(劉戊), 조왕(趙王) 유수(劉遂), 교서왕(膠西王) 유앙(劉卬), 제남왕(濟南王) 유벽광(劉辟光), 치천왕(菑川王) 유현(劉賢), 교동왕(膠東王) 유웅거(劉雄渠)가 모반을 일으켜 군대를 서쪽으로 출동시켰다. 천자는 이 일로 조조(晁錯)를 죽이고 원앙(袁盎)을 보내 이를 알렸지만, 모반한 그들은 멈추지 않고 서쪽 양(梁)나라를 포위했다. 주상은 곧 대장군 두영(竇嬰)과 태위 주아부(周亞夫)를 보내 병사를 이끌고 토벌하게 했다.

6월 을해일, 달아난 반란군과 초 원왕(元王)의 아들 유예(劉蓺) 등 반란을 꾀했던 자들을 사면했다. 대장군 두영을 위기후(魏其侯)에 봉하고, 초 원왕의 아들 평륙후(平陸侯) 유례(劉禮)를 초왕으로 세웠다. 황자 유단(劉端)을 교서왕으로 삼고, 황자 유승(劉勝)을 중산왕(中山王)으로 삼았다. 제북왕(濟北王) 유지(劉志)는 치천왕으로 옮겼다. 회양왕(淮陽王) 유여(劉餘)를 노왕(魯王)으로 삼고 여남왕(汝南王) 유비(劉非)를 강도왕(江都王)으로 삼았다. 제왕(齊王) 유장려(劉將廬)와 연왕(燕王) 유가(劉嘉)가 모두 세상을 떠났다.

4년 여름, 태자를 세우고 황자 유철(劉徹)을 교동왕으로 삼았다. 6월 갑술일, 천하에 사면령을 내렸다. 윤달 9월, 역양(易陽)을 양릉(陽陵)으로 바꾸었다. 관문과 나루에 다시 초소를 두어 통행증을 사용하여 출입하도록 했다. 겨울, 조(趙)나라를 한단군(邯鄲郡)으로 삼았다.

5년 3월, 양릉과 위수에 다리를 만들었다. 5월, 사람들을 모아 양릉으로 이주시키고 20만 전을 주었다. 강도(江都)에 서쪽으로부터 큰 폭풍이 몰아쳐 성벽 12장을 무너뜨렸다. 정묘일, 장공주(長公主)의 아들 진교(陳蟜)를 융려후(隆慮侯)에 봉하고 광천왕을 조왕(趙王)으로 옮겼다.

6년 봄, 중위(中尉) 위관(衛綰)을 건릉후(建陵侯)에 봉하고, 강도의 승상 정가(程嘉)를 건평후(建平侯)로, 농서(隴西) 태수 혼야(渾邪)를 평곡후(平曲侯)로, 조나라의 승상 소가(蘇嘉)를 강릉후(江陵侯)로, 전직 장군 난포(欒布)를 유후(鄃侯)로 삼았다. 양왕과 초왕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 윤달 9월, 치도(馳道)의 가로수를 난지(蘭池)에 옮겨 심었다.

7년 겨울, 율태자(栗太子)를 폐하여 임강왕(臨江王)으로 삼았다. 11월, 말일에 일식이 있었다. 봄, 양릉을 만든 죄수와 노예들을 사면했다. 승상 도청을 면직시켰다. 2월 을사일, 태위인 조후(條侯) 주아부를 승상으로 삼았다. 4월 을사일, 교동왕의 태후를 황후로 세웠다. 정사일, 교동왕을 태자로 세우니 이름은 철(徹)이다.

중원(中元) 원년(기원전 149년), 전직 어사대부 주가(周苛)의 손자 주평(周平)을 승후(繩侯)로 봉했고, 전직 어사대부 주창(周昌)의 손자 주좌거(周左車)를 안양후(安陽侯)에 봉했다.

4월 을사일, 천하에 사면령을 내리고 작위를 한 등급씩 하사하는 한편 금고령(禁錮令, 궁중 출입 금지령)을 폐지하였다. 지진이 일어났다. 형산과 원도(原都)에 우박이 떨어졌는데 크기가 한 자 여덟 치나 되었다.

중원 2년 2월, 흉노가 연(燕)지역을 침입하여 마침내 화친이 깨졌다. 3월에 임강왕을 도성으로 불러들이자 중위부(中尉府)에서 자살했다. 여름, 황자 유월(劉越)을 광천왕으로, 유기(劉寄)를 교동왕으로 삼고, 네 명의 후를 봉했다. 9월 갑술일, 일식이 있었다.

3년 겨울, 제후국의 어사중승(御史中丞)을 폐지했다. 봄, 흉노의 왕 2인이 무리를 거느리고 항복하니 모두 후에 봉했다. 황자 유방승(劉方乘)을 청하왕(淸河王)으로 삼았다. 3월, 혜성이 서북에 나타났다. 승상 주아부를 면직시키고, 어사대부 도후(桃侯) 유사(劉舍)를 승상으로 삼았다. 4월, 지진이 일어났다. 9월 말 무술일, 일식이 있자 동도문(東都門) 밖에다 군대를 주둔시켰다.

중원 4년 3월, 덕양궁(德陽宮)을 지었다. 메뚜기떼로 큰 피해가 있었다. 가을, 양릉을 조성한 죄수들을 사면했다.

5년 여름, 황자 유순(劉舜)을 상산왕(常山王)으로 삼았다. 10명의 후를 봉했다. 6월 정사일, 천하에 사면령을 내리고 작위를 한 등급씩 하사했다. 천하에 큰 물난리가 났다. 제후국의 승상을 ‘상(相)’으로 바꾸도록 명령했다. 가을, 지진이 일어났다.

중원 6년 2월 기묘일, 옹(雍)으로 행차하여 5제에게 제사를 올렸다. 3월, 우박이 내렸다. 4월, 양의 효왕(孝王), 성양(城陽)의 공왕(共王), 여남의 왕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 양 효왕의 아들 중 유명(劉明)을 제천왕(濟川王)에, 유팽리(劉彭離)를 제동왕(濟東王)에, 유정(劉定)을 산양왕(山陽王)에, 유불식(劉不識)을 제음왕(濟陰王)에 봉하니 양나라는 다섯으로 나뉘었다. 네 명의 후를 봉했다. 정위(廷尉)를 대리(大理)로, 장작소부(將作少府)를 장작대장(將作大匠)으로, 주작중위(主爵中尉)를 도위(都尉)로, 장신첨사(長信詹事)를 장신소부(長信少府)로, 장행(將行)을 대장추(大長秋)로, 대행(大行)을 행인(行人)으로, 봉상(奉常)을 태상(太常)으로, 전객(典客)을 대행(大行)으로, 치속내사(治粟內史)를 대농(大農)으로 개명하였다. 대내(大內)를 2천석(二千石)으로 하고, 좌우 내관(內官)을 두어 대내에 소속시켰다. 7월 신해일, 일식이 있었다. 8월, 흉노가 상군을 침입했다.

후원 원년(기원전 143년) 겨울, 중대부령(中大夫令)을 위위(衛尉)로 개명하도록 했다. 3월 정유일, 천하에 사면령을 내리고 작위를 한 등급씩 하사했다. 중이천석(中二千石)과 제후국의 상에게 우서장(右庶長) 작위를 주었다. 4월, 천하 사람들이 모여서 술을 마실 수 있게 했다. 5월 병술일, 지진이 있었고, 그날 아침 식사 무렵에 다시 지진이 있었다. 상용(上庸)에서는 22일 동안 땅이 흔들리고 성벽이 부서졌다. 7월 을사일, 일식이 있었다. 승상 유사(劉舍)가 면직되었다. 8월 임진일, 어사대부 위관을 승상에 임명하고 건릉후에 봉했다.

후원 2년 정월, 하루에 땅이 세 번 흔들렸다. 질장군(郅將軍)이 흉노를 공격했다. 닷새 동안 모여서 술을 마실 수 있게 했다. 내사군의 말들에게 곡식을 먹이지 못하도록 하고, 이를 어기면 관에서 (말을) 몰수했다. 죄수와 노예에게는 칠종포(七緵布)라는 상복을 입게 했다. 말을 이용하여 곡식을 찧지 못하게 했다. 수확이 좋지 않아 천하에 내년 수확까지 식량을 다 먹지 못하게 금했다. 열후를 줄이고 자기 봉지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3월, 흉노가 안문(雁門)을 침입했다. 10월, 장릉(長陵)의 땅을 경작할 수 있게 빌려주었다. 큰 가뭄이 들고, 형산국(衡山國), 하동군(河東郡), 운중군(雲中郡)에 전염병이 돌았다.

후원 3년 10월, 해와 달이 닷새 동안 붉은 색으로 나타냈다. 12월 말, 우레가 치고, 해가 보랏빛이 되었다. 오성(五星)이 거꾸로 돌아 태미원(太微垣) 자리에 접근하였고, 달은 천정을 뚫고 지나갔다.

정월 갑인일, 황태자의 관례(冠禮)를 치렀다. 

갑자일, 효경황제가 세상을 떠났다. 제후왕에서 인민에 이르기까지 아비의 뒤를 이은 사람에게 작위를 한 등급씩 하사하고, 천하의 집집마다 100전을 내리라는 유조가 있었다. 궁중 궁인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일체의 세금과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태자가 즉위하니 이가 바로 효무황제(孝武皇帝)이다.

3월, 황태후의 동생 전분(田蚡)과 전승(田勝)을 각각 무안후(武安侯)와 주양후(周陽侯)로 봉했다. (경제를) 양릉에 안장했다.

사마천의 논평[편집]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한(漢)이 흥해 효문황제가 큰 덕을 펼치자 천하는 제왕의 덕을 흠모하며 안정되었다. 효경제에 이르러 성이 다른 제후들을 다시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으나 조조가 제후들에게 각박하게 하자 마침내 7국이 함께 일어나 합종하여 서쪽으로 쳐들어왔다. 제후들이 크게 번성했는데도 조조가 점진적으로 대처하지 않아서이다. 주보언의 말에 따르니 제후들이 약해지고 마침내 안녕을 찾았다. 안정과 위기의 낌새가 어찌 모략에 달려있지 않으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