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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동명왕/제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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碧血

[편집]

『부인 앉으시오.』

대소는 몸소 손을 들어 예백 부인에게 자리를 권하였다.

『황감하오.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앉사오리까.』

예백의 아내는 이렇게 사양하고 거의 이마가 닿도록 허리 를 굽혔다.

『아니요. 그렇게 사양할 것이 아니요. 늙은이가 그렇게 허 리를 굽히고 서 있으면 나도 앉았기가 거북하지 않소? 예도 좋고 소중하지마는 예가 사람을 위하여서 있는 것이지 사람 이 예를 위하여서 있는 것이 아닌즉 사람이 괴롭도록 예를 숭상하는 것은 옳지 아니한가 하오. 나는 그렇게 생각하오.

예백, 내 생각이 어떠하오?』

대소는 매우 유쾌한 듯이 예백을 돌아본다. 예백도 손을 읍하고 허리를 굽히고 서 있다. 대소는 예백이 읍하고 선 모양이 참 점잖고 아름다움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 허 연 긴 수염이 읍한 손등에 닿은 것이 그림 같다고 생각하였다.

예백은 대소의 말에 한층 더 허리를 굽혔다가 잠간 고개를 들어 대소를 우러러 보고 다시 숙여 이마를 읍한 손으로 받 치면서, 약깐 떨리는, 심히 웅숭깊은 소리로,

『젛사오되, 동궁마마 지금 하신 말씀은 옳지 아니한가 하 오. 허리를 굽히는 것이나 고개를 숙이는 것이나 무릇 예는 몸을 약간 괴롭게 하는 것인가 하오. 편히 눕는 것을 예라 아니하옵고 또 바로 앉는 것을 예라 하옴도 예라는 데는 괴 로움이 좀 끼어야 하는 것인가 하오. 그렇다고 예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예를 위하여서 있는 것은 아니 오나, 또 예가 없으면 사람이 사람이 아니요, 짐승과 다름이 없다 하였소. 높으신 어른이 계시거든 낮은 무리 읍하여 모 심이 예이오라, 지금 동궁마마 앞에 소인의 무리 이렇게 모 시지 아니하면 예를 어지럽게 하는 것이오라, 예 어지럽고 나라를 어찌 바로 다스리오리까. 젛사오되, 동궁마마 아까 내리신 분부는 좇을 수 없는 줄로 아뢰오.』

대소는 매우 거북한 표정으로,

『예백, 예가 좋기는 좋은데 좀 귀찮아. 왜 예백은 까다로 운 한 나라 예를 자꾸 주장하시오. 그렇게 예를 너무 엄하 게 지키면 살아 가기가 힘이 들지 않소? 나는 좀더 너그러 운 예를 만들고 싶소. 너무 거북살스럽지 아니한 예를 만들 고 싶단 말이요. 예백, 그러한 예를 좀 궁리해 보시오.』

하고 다소 역정 내는 모양을 보인다. 대소는 어려서부터 예백을 스승으로 하여서 예를 배우고 익혔다. 어려서는 예 백의 말대로 순종하여서 앉음앉음이, 걸음걸이 모두 그 하 라는대로 하였다. 꼼꼼하게 앉고, 무겁게 걷고, 느릿느릿 말 하고, 눈은 똑바로 보고, 손은 읍하고, 웃어도 이를 안 보이 고, 성내지 말고, 기뻐하지 말고, 화내지 말고, 사냥을 하되 알 품은 새와 새끼 밴 짐승을 잡지 말고, 이 모양으로 수없 이 배우고 익혔으나 대소는 그것이 모두 억지요 거북스러웠 다. 그래도 예백의 잔소리에 못이기어서 그가 보는 앞에서 는 그대로 하였다.

그러나 대소는 차차 예가 귀찮아지고 따라서 예백을 보면 또 그 잔소린가 하고 진저리가 났다. 점잖을 빼다가도 예백 만 물러 나가면 얽혔다가 풀린 짐승 모양으로 막 날치고 막 굴었다. 실컷 소리를 내어 웃고 네활개 뻗고 자빠져서 팔다 리를 마음대로 버둥거려 보았다. 무겁게 걷는 것이 가깝해 서 앙감질도 하고 달음박질도 하였다. 알 품은 새는 더욱 잡기 쉽고 재미나고, 새끼 데리고 가는 노루나 사슴을 잡는 것은 더욱 재미가 있었다. 이러한 경우에도 주몽이가 꼭꼭 예를 지켜서 대소를 부끄럽게 하는 것이 미웠다.

차차 나이를 먹어 턱에 수염발이 잡히매 대소는 예백의 가 르침에 반항하기 시작하였다.

『예를 지키는 것은 섬기는 자의 일이다. 다스리는 자는 예를 만들어서 아랫 사람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는 것이다.

다스리는 자는 예의 주인이기 때문에 예를 만들 수도 있는 것과 같이 마음대로 깨뜨릴 수도 있는 것이다.』

대소는 이러한 이론을 만들어서 예백과 논쟁도 하였다. 대 소가 이렇게 대어들 때에는 예백은 대소를 바라 보며 눈물 을 흘렸다.

대소가 이러한 생각을 가지는 것은 그의 천품이라고도 하 겠으나, 그의 무예의 선생 무구(無懼)의 영향도 적지 아니하 였다. 그는 오직 힘과 재주만을 숭상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가장 미워하는 것은 예였다. 그는 그가 기운이 센 것과 칼 을 잘 쓰는 것을 자랑 삼아서 가섬벌에서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더구나 대소가 가장 사랑하여 항상 함 께 하는 사람이라 아무도 그를 거스릴 자가 없었다.

대소는 무구가 좋았고 저도 무구처럼 살고 싶었다.

대소는 하루 바삐 임금 될 날을 기다렸다. 임금이 되는 날 이면 아무도 꺼릴 것 없이 실컷 제 마음대로 살 수가 있는 것이었다.

대소의 아버지 금와왕은 성품이 인자하고 또 한 나라 글을 숭상하여서 그 문화를 사모함이 컸다. 그래서 무력을 숭상 함보다도 문화를 존중하였다. 대소는 그 아버지의 인자한 성품을 닮지 아니하고 그 우유부단한 것과 여색에 방종한 약점만을 닮았다. 대소는 제 눈에 한번 든 계집은 놓치지 아니하였다. 남의 아내라도 꺼림이 없었다. 무구는 이것도 마땅한 일이라고 권하였다.

『힘만 있거든 하고 싶은 일을 다 해보시오. 따르던 짐승 이어든 잡고야 말고, 눈에 드는 계집이어든 손에 넣고야 마 는 것이 사내요, 만 사람을 죽이더라도 내 욕심을 채우는 것이 영웅이요. 예? 흥! 못생기고 힘없는 녀석들은 예를 잘 지켜서 잘난 사내들의 시종이나 들라고, 술밥 남 주고, 찌꺼 기 얻어 먹고 숫처녀 남 주고 버린 계집이나 데리고 살라고 그러오.』

이것이 무구가 대소에게 하는 훈계였다. 이런 말을 들으면 대소는 춤이라도 출 듯이 기뻤다.

『그럴 것이다. 나는 영웅이 아니냐. 임금 될 사람이 아니 냐.』

대소는 천하에 마음대로 안될 것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날은 대소는 예백과 말다툼을 하러 온 것이 아니 요, 그의 딸 예랑을 얻으러 온 것이었으므로 더 예에 대한 논쟁을 하려 아니하였다. 그래서 웃는 낯을 지으며,

『선생의 가르치심을 제자가 아니 좇을 수가 있소? 그러나 오늘은 예를 배우러 내가 댁에 온 것 아니라 딸아기와 혼인 하는 허락을 구하러 왔으니 인제는 그 말씀을 합시다. 한 나라 사람들은 혼인을 할 때에 남자의 부모가 여자의 부모 집에 중매를 보내어 청혼을 하고 이에 대하여 여자의 집에 서 허혼을 하면 남자와 여자와 본인끼리는 서로 만나 보지 도 못하고 혼인을 한다는데 이것은 어찌 하실라오? 우리 나 라에서 조상 적부터 나오는 법은 한 나라 법과는 달라서 남 자가 여자의 집에 찾아 가서 혹은 노래를 부르고, 혹은 춤 을 추고, 혹은 여러 가지 재주를 보여서 여자의 마음을 사 고, 그래서 여자가 싫다고 아니 하면 남자가 여자의 집에 가서 일을 하여 주어서 여자를 길러 내인 값을 갚은 뒤에 혼인을 하여서 딴 살림을 차리게 되었으니 예백은 어찌 하 시려오? 나도 한 나라법을 좇으리까, 우리 나라 법을 좇으 리까?』

『황송하신 분부시오.』

하고 예백은 또 한번 깊이 읍하고 나서,

『나라의 혼인은 뭇사람의 혼인과는 다르오. 위로서 네 딸 을 다오 하시면 아래로서 못하오 할 수 없으니 군신지분이 요. 그러하오나 아무리 왕과 왕후라 하여도 부부는 부부온 즉 하늘과 땅이라, 하늘과 땅이 뜻이 아니 맞고는 만물을 생육할 수 없사오니 동궁마마께오서 미천하고 미거한 소인 의 딸과 혼인을 원하시거든 소인께 물으실 것이 아니라 소 인의 딸에게 뜻을 물으심이 옳을까 하오. 그래서 소인의 딸 이 그리하오리다고 여쭈오면 그 뒤에는 예를 따라서 절차를 마련하여서 모든 백성의 본이 되게 혼인의 가례를 행할 것 인가 하오. 그리하오면 우리나라 예요 한 나라 예요 할 것 없이 저절로 천지의 예도에 합할까 하오.』

하고 유창하게 아뢰었다.

예백의 말에 대소는 무릎을 치며,

『과연 대 선생의 말씀이시오. 그러면 선생의 말씀대로 내 가 몸소 따님 아기의 뜻을 물으리다.』

하고 미소를 띄고 예랑을 바라 보니 예랑은 더욱 고개를 숙이고 그 어머니 뒤에 숨는다.

이에 대소는 자신을 얻어서,

『이미 선생의 허락을 얻었으니 내가 따님 아기와 이야기 를 하겠소. 그런데 이런 말이란 곁에 다른 사람이 있으면 묻기도 거북하고 대답하기도 부끄러운 일이요. 옛말에도 사 랑 말은 단둘이서 할 것이라 옆에 있는 바윗돌도 부끄럽다 하였으니 그러면 다들 물러가고 예랑과 나와 단둘이만 여기 남게 하여 주시오. 말이 길 것도 아니니 잠깐 동안만. 젊은 사슴 한 쌍이 놀며놀며 활 한 바탕이나 건널 동안만.』

대소의 더욱 유쾌한 빛이 그의 꾸미는 말에 보였다. 유쾌 할 때에는 말이 저절로 잘 나와서 노래까지 되고 몸이 저절 로 잘 움직여서 춤까지 된다. 하물며 마음에 드는 이성의 앞에서 거리낌 없이 그를 후리는 때랴. 웃음과 말이 많아질 근심이 있도록 흔한 것이다. 이제 주몽을 몰아 내었으니 왕 위를 겨룰 자도 없고 산과 들의 날짐승 길짐승이 모두 대소 의 것이요, 가섬벌 아름다운 처녀들의 사랑을 대소와 다툴 자도 없었다. 명예도 다 대소의 것이요, 열광도 그러하였다.

대소에게 있어서는 왕위보다도 더 크고 소중한 것이 있었으 니 그것은 예랑의 사랑을 얻는 것이었다. 주몽이 가섬벌에 있는 동안 예랑의 사랑을 제 것을 만들기는 어렵다고 대소 는 생각하고 있었다. 예랑 말고도 두어 번 그런 일이 있었 다. 대소가 눈에 여겨 어를 때에 주몽이 나타나기만 하면 그 여자의 정은 주몽에게로 쏠렸다. 번번이 대소를 위하여 서 비켜났길래망정 그렇지 아니하더면 번번이 대소는 그리 워하던 여자를 주몽에게 빼앗길 뻔하였던 것이다. 예랑에 대하여서도 그러하였다. 주몽이 나타나매 예랑의 마음은 대 소를 떠나서 주몽에게 쏠린 것으로 대소는 보았다. 주몽을 죽여 버리는 것으로 떠나 가는 예랑의 마음을 막을 수가 있 다고만 알았더면 대소는 무슨 짓을 하여서라도 주몽을 죽였 을 것이다. 그러나 대소가 주몽을 죽였다고 아는 날 예랑의 마음은 그야말로 영영 대소에서 떠나 버리고 다시 돌아 오 지 아니할 줄을 알므로 그리도 못하였다. 또 만일 예랑의 몸을 겁탈함으로 그 마음이 제 것이 될 줄만 알았더면 아무 리 나라의 충신이요 자기에게는 가장 높은 스승이라 하더라 도 예랑을 대소의 방으로 잡아 갔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하는 것이 예랑을 아주 잃어버리는 일임을 알기 때문에 대소는 그도 못하였다.

『세상에 마음대로 못할 것은 한 계집의 마음이다.』

이렇게 대소는 한탄하였다. 하필 한 계집의 마음만이 마음 대로 못할 것이랴. 백성의 마음이 다 그러하건마는 대소의 마음은 이 큰 사실에 대하여서는 눈을 뜨지 아니하였다. 그 눈은 너무도 늦게 뜨려는 것인가.

『그렇지마는 인제는 주몽도 갔으니.』

하면 대소는 자신이 만만하였다. 예랑은 벌써 제 품에 든 것과 같았다.

예백 부처며 대소의 시종도 다 물어나기 전에 예백 부인이 대소의 앞에 무릎을 꿇며,

『저것이 아직 미거한 것이 높으신 앞에 무슨 버릇 없는 말이나 일을 하더라도 모두 접어 보시오. 저것이 무슨 허물 이 있든지 다 이 늙은 것을 보시와서 눌러 생각하시오.』

하고 어머니다운 걱정을 하였다.

무엇인지 모르거니와 어디 한 곳 마음 아니 놓이는 구석이 있었다.

『부인은 아무 염려도 마시오. 아기가 잘못이 있을 리도 없거니와 설혹 있다 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의 잘못은 잘못 도 사랑스럽다 하오.』

하여 대소는 웃음을 띄며 부인을 위로하였다.

대소의 너그러운 위로를 받은 예백 부인은 매우 만족한 듯 이 대소의 앞에서 물러나오다가 눈에 아니 뜨이도록 예랑의 귀에 입을 대고,

『무엇을 물으시든지 두 마디에 한 마디쯤은 대답을 해라.

너무 나불나불 말대꾸도 말고 또 너무 뚝하지도 말아. 말로 는 무엇이나 예 예 하고 순순히 좇더라도 몸을랑 새뜩하게 지켜야 해. 만만하게 보이는 여자는 사내가 싫어하는 법야.

새침이 말보다 낫고 새뜩이 웃음보다 낫다는 게야. 네가 오 죽이나 잘 알겠니? 다 잘 알아 해라.』

하고 딸에게서 물러서다가 다시 미진한 말이 있는 듯이,

『악아. 아예 주몽아기 말은 입쩍도 말아야 한다. 가고 없 는 사람을 생각도 부질없거니와, 만일 주몽아기 이름을 번 쩍 비치기만 해도 너 한 몸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집안이 온통 결단이 나는 판이다.』하고

『알아 들었니?』

하는 끝 말만을 대소에게까지 들릴소리로 한다.

『어머니!』

하고 예랑이 부르는 소리에 부인은 우뚝 서서 놀라는 듯 눈을 크게 뜨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딸을 바라본다. 그 눈 에는 「좋지 못한 소리는 말아!」하는 소리가 숨어 있는 것 을 예랑은 보았다.

『어머니, 왜 자식의 뜻을 그렇게도 몰라 주시오?』

하는 약간 짜증나는 눈치를 보고 부인은 큰일 날 말이 예 랑의 입에서 나올까 보아 그것을 틀어 막노라고 황망하게, 큰소리로,

『그래, 그래, 다 알았다. 다 알았어. 네가 오죽이나 잘 알 아 하겠느냐. 어미가 이러쿵 저러쿵 더 잔말 아니하련다. 그 럼 동궁마마 모시고 말씀 동무 잘해 드려.』

하고는 강월더러,

『강월아, 나가자. 나하고 나가. 아가씨는 여기 혼자서 동 궁마마 모시는 거야. 자 나가자.』

하며 소매를 끌었으나 강월은 움직이지 아니하며,

『마님, 소인네는 아가씨 곁을 아니 떠나겠소아요.』

하고, 예랑도,

『어머니, 강월이를 그냥 두셔요. 자나 깨나 언제나 같이 하는 강월인데 왜 떼랴고 그러셔요? 그림자는 밤에나 떨어 지지 이 자식과 강월이는 잘 때에도 아니 떨어지는 것을.

어머니, 강월이를 그냥 두고 가셔요.』

하고 팔을 들어 강월을 안는 듯 어머니에게서 뗀다.

부인은 장히 못마땅한 얼굴을 보였으나 높은 이의 앞이라 옥신각신할 수도 없을뿐더러 또 귀인의 눈에는 옆에 심부름 하는 사람이 있는 것쯤은 사람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아 니하는 것이기 때문에, 또 한끝으로는 강월이가 딸의 곁에 있는 것이 든든하기도 하여서 더 말 없이 혼자 나가 버린다.

이제 방안에는 대소와 예랑과 그리고 강월과 세 사람만이 남았다. 활짝 드높고 휑뎅그렁 넓은 방에 단 세 사람이 말 없이 마주 보고 있는 것은 어째 무시무시하였다.

집은 둥근 주추, 둥근 기둥, 둥근 서까래 오간으로되어 있 고 정청이 가운데 있어 그리로 출입문이 났으니 문의 높이 가 열 자나 되었다. 정청에서 좌우로 사람이 거처하는 방이 있어 그리로 드나드는 지게문이 있고 정청 정면에는 긴 탁 자 앞에 평상 같은 것을 놓고 그 위에 호피를 깔았으니 이 것이 대소가 좌정한 자리요, 그 평상에서 두어 자 떨어져서 좌우로 평상 둘이 있었는데 이것이 올라 앉을 수도 있고 걸 터 앉을 수도 있게 된 것이었다. 예백 이하로 지금 물러나 간 사람들은 이 걸터 앉을 평상 앉에 섰던 것이었다. 그리 고 예랑과 강월은 부인과 함께 평상 아니 놓은 박석 바닥에 서 있었으니 이때에는 부여에도 점점 한 나라 예의 문물이 들어 와서 여자는 남자의 히위에 서는 풍습이 생겼던 것이 다. 남녀가 길을 달리하도록 남녀의 별이 엄한 부였으나, 원 래는 남존여비는 아니었고 일반 민간에서는 도리어 여존 남 비인 풍습도 남아 있었다. 대소는 빙그레 웃으며 예랑더러,

『아기, 이리 가까이 와 앉으오. 아무도 없는 데서까지 그 다지 까다롭게 할 거야 있소? 그런 까다로운 예의는 할 일 없는 늙은이들에게 맡기고 우리 젊은 사람들은 젊은 사람답 게 놉시다. 나도 여덟 살부터 아기의 아버지 예백 선생에게 예를 배웠으니 십 이년인가, 십 삼년인가. 참 지긋지긋도 하 였소. 인제는 나도 나이가 이십이 넘어서 어른이 되었으니 내가 하고 싶은대로 좀 살아 보아야겠소. 아기도 그렇지 않 소. 인제는 우리들이 하고 싶은 말은 실컷 좀 해봅시다. 내 눈에 가시 같던 주몽도 인제는 멀리멀리로 달아나고 말았으 니 내 마음이 거뜬하오. 아기도 나와 같이 기뻐해 주시오.

자 이리 좀 가까이 와 앉으오.』

하고 제자리를 좀 비켜 호피 위를 가리킨다. 누른 바탕에 검은 무늬, 비록 마른 가죽이나마 범의 위엄이 남아 있다.

예랑은 읍한 두 손을 이마에 올려 대고 허리를 굽히며,

『동궁마마 황송하오. 어찌 천한 신하의 몸으로 둘째로 높 으신 동궁마마 곁에 앉을 도리가 있사오리까. 앉으라 하시 면 이곳에 앉겠소.』

하고 평상 한 끝에 걸터 앉는다. 고개를 고부슴하고 등을 휘움하게 굽힌 모양이, 그 부드러운 획이 그림과도 같았다.

대소의 눈에는 예랑의 모으로 앉은 양이 보였다. 칠 같은 머리를 뒤에서 반으로 갈라 느슨느슨 땋아 관자놀이에서 여 러 번 꺽어 겹쳐서 검은 댕기로 줄어들라 옥 같은 뺨 위 귓 문이 약간 가리워질 만큼 막겪하게 늘여진 것이 참으로 아 름답게 예랑의 얼굴을 돋보이게 하였다. 고운 콧마루의 위 에는 내려 깐 눈썹이, 아래는 주홍 같은 입술이 보였다. 얼 굴과 몸이 풍후하면서도 뚱뚱하거나 질둔한 맛이 없어서 어 찌 보면 날씬하면서도 묵직한 예랑의 몸이었다. 교태를 머 금은 것도 아니요, 수심을 띤 것도 아니요, 그저 의젓한 예 랑이었다.

평상 끝에 앉는 예랑의 뜻을 굳이 휘어서 제 곁에 가까이 앉히려는 대소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대소는 예랑을 마음대 로 할 수 없다고 생각한 까닭이었다. 이미 예랑의 부모의 허락까지 받았으니 예랑은 벌써 내 것이 다 되었다고 대소 는 생각하였다. 대소가 팔을 벌린 때에 그것을 막을 여자가 이 부여 천하에야 어디 있으랴. 만일 대소가 오라고 불러서 오지 아니하는 여자가 있다 하더라도 대소에게는 그것이 큰 문제가 아니었다. 안 오거든 오게 하는 힘이 있는 것이었다.

산이나 들에 날짐승 길짐승은 임금님의 맏아드님이 어떻게 높으신지 알 줄을 몰라서 대소의 살에 잘 맞지 아니하거니 와, 만일 조금이라도 지각이 있다 하면 꿩이나 사슴이 다투 어 대소의 살촉 앞으로 달려들 것이다. 그러므로 대소는 예 랑이나 다른 어떤 여자에게든지 사랑을 달라고 청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주니 황송하게 받아라 하고 명하는 것이었다.

『예랑!』

대소는 아름다운 예랑의 용모에 이윽히 황홀하였다가 은근 한 소리로 부른다.

『예. 예 있소.』

하고 예랑이 소스라쳐 놀라듯 일어나 공손히 읍한다.

『아기 앉으오. 내 앉으라 하니 앉으오. 그렇게 내가 말할 때마다 번번이 일어나지 말고 앉아 말하오.』

예랑이 주저하다가,

『황송하오.』

하고 앉는다.

『아기.』

『예.』

이번에는 예랑은 일어나지 않은 채로 읍하였다.

『아기는 어찌 그리도 어여쁘고도 얌전한고. 그리고는 복 상스러운고. 이몸이 상을 볼 줄은 모르거니와 아무리 보아 도 아기는 천생 큰 임금의 아내요, 큰 임금의 어미 될 상이 라, 당대에 하나 밖에 날 수 없는 사람일시 분명하오.』

예랑은 말없이 고개만 깊이 숙인다. 그리고 상과 손금 보 는 마누라가 저를 보고 「큰 임금의 어머니」라고만 부르고

「큰 임금의 아내」라고 아니한 것을 회상하여서 제 앞길에 어떤 어두운 그림자를 보면서 가엾게 한숨을 지웠다.

대소는 혼자 흥이 나서 말을 계속한다.

『예랑! 아기는 어떤 남자를 위하여 그 짝이 되려고 저대 도록 아름답게 나신고? 지금 저 울렁거리는 아기의 가슴 속 에는 어떤 남자의 그림자가 비취어 있는고? 내 그 남자 되 고지고. 진실로 내 그림자가 아기의 가슴속에 안겼을진댄 내 무엇을 더 바라리, 무엇을 아끼리. 아기, 나더러 네 이 나라를 버려라 하더라도 서슴치 않고 버릴 것이요, 버리고 말고. 아기, 예랑, 내 말이 참말이요. 조금도 거짓이 없어.

만일 내 말이 거짓말이라면 이몸이 마른 하늘에 벼락을 맞 겠소.』

하고 무릎으로 평상을 쾅 구른다. 맹세한다는 뜻이다.

<아뿔싸 동궁마마.>

하고 예랑은 체면도 잊고 고개를 번쩍 들어 대소를 바라본 다. 대소의 눈에는 정욕의 빛이 흘렀다. 그 눈에 타는 정욕 이 무엇으로 화하여서 예랑의 위에 내릴꼬 하면 예랑은 오 싹 소름이 끼쳤다. 그러나 그보다도 임금의 아드님이 그런 무서운 맹세를 하는 것이 너무도 방정맞아서 무시무시하였 다. 집에서 아버지 예백에게,

『나보다 나라 먼저.』

의 가르침을 받아 왔기 때문이었다.

예랑의 놀라서 크게 뜬 눈과 반쯤 벌린 입은 대소에게 새 로운 충동을 주었다. 천진스럽달까, 어쩔지 모르는 예랑의 표정은 평시에는 얻어 볼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아기, 무얼 그리 놀라오?』

하는 대소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뜩 풀어져 흩어져 있었다.

『맙소사, 벼락으로 맹세를 하시니, 무섭고 두려워라. 동궁 마마는 홀몸이 아니신데, 장차 이 나라 이 백성을 맡으실 고작 높은 어른이신데, 그러한 무서운 맹세를 하시다니, 벼 락을 불러 맹세하시다니, 아우마, 무섭고도 두려운지고. 동 궁마마 지으신 허물은 이몸이 대신 받아지이다.』

하고 예랑은 하늘을 우러러 손을 비벼 빌었다. 「나보다 나라 먼저」의 정신이었다.

대소는 또 한 가지 못 보던 것을 보았으니 그것은 예랑이 무릎을 꿇고 하늘에 비는 모양이었다. 비록 잠시 동안이지 마는 비는 예랑의 태도와 표정이 어떻게 엄숙하고 정성스러 운지 대소의 눈에 흐르던 젖은 웃음이 스러지고 저도 모르 게 대소도 두 손을 모아 가슴에 대었다. 그 순간 대소의 눈 에 예랑은 높으신 신명이 하강하신 것 같아서 감히 똑바로 그 얼굴을 바라볼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 로 일순간이었다. 예랑이 비는 자세를 거두고 다시 평상에 걸터 앉은 한 처녀에 돌아 가자마자 대소의 예랑에 대한 애 욕은 더욱 타 올랐다.

대소는 제 콧김이 불 같음을 깨달으면서 약간 허둥지둥하 는 어조로,

「아기, 예랑, 아기, 고마워라. 이몸을 대신하여 천벌을 받 으려 하시니 이런 사랑이 또 어디 있겠소? 애기와 같이 착 한 이와 내외 되어 살진댄 이몸이 무슨 허물을 짓기로 벌을 받겠소? 세상에 고작 큰 복은 좋은 아내를 가짐이라 하더니 참으로 이몸은 복이 큰 사람이요.」

하고 벌떡 호피 자리에서 일어나 녹피 신을 신고 예랑이 앉은 곁으로 오니 예랑이 황망하게 일어나서 두어 걸음 뒤 로 몸을 피하여 강월의 곁에 선다. 여전히 두 손으로 팔짱 껴 읍하고 고부슴하였으니 예랑의 몸은 금시에 날개가 돋쳐 서 날아 오를 듯하였다. 흰 웃옷에 검은 단, 누런 치마 다홍 단이 모두 힘과 정신을 잃어서 예랑의 몸에 가까이 오는 모 든 것을 물리치려고 대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의 맺힌 마음은 옷에까지도 나타나는 것이었다.

예랑이 일어나 비켜나는 것은 처녀로서 당연한 일이라 하 더라도 그 놀라고 무서워하는 태도가 대소를 불안하게 하였 다. 수삽해서 피하는 것은 좋으나 무서워서 달아나는 것은 불쾌한 일이었다. 대소는 여러 여자를 얼어 보았으되 이렇 게 싫어서 비키는 듯한 모양은 처음 보았다.

<정말 내가 싫어서 피하는 것일까? 단지 수삽하여 저러는 것일까. 내 지위가 높으니 두려워서, 어려워서 저러는 것일 까?>

하고 대소는 잠시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설마 예랑이 동궁 이요, 또 잘난 사내인 자기를 마다하랴 하는 자존심이 있으 면서도 한 구석에 어두운 그림자, 불길한 조짐이 보이는 것 을 덮을 길이 없었다.

대소는 약간 무료한 빛을 띠고 팔장을 끼고 서면서,

「아기. 그렇게 어려워할 것이야 있나? 검은 머리 파뿌리 가 되도록 백년을 같이 살 우리들이 아니요? 아기와 나와 높아도 같이 높고, 무서운 권세를 가져도 함께 가질 것인데, 내 앞에 무릎을 꿇는 천하 만민은 아기의 앞에도 무릎을 꿇 을 것이어든. 비록 아직 혼인의 가례는 아니하였다 하더라 도 하늘이 이몸을 내실 때에 이몸의 고운 짝으로 아기를 내 셨으니 두 몸이 한몸 아니요? 그렇게 어려워할 것은 없어.

예백의 따님이라 예를 지키는 게지마는 너무 그러면 내가 무안하지 않소? 하기는 그리워하던 숫사슴이 곧 웅장한 뿔 을 흔들며 가까이 올 때에 암사슴은 고개를 숙이고 피하는 법이라, 그래야 숫사슴이 더욱 못 견디어 암사슴을 따르는 것이어든. 숫사슴의 빠른 걸음이 무엇에 쓰자는 게요. 달아 나는 암사슴을 따르는 데 쓰자는 것이라. 그럼 이 몸도 아 기를 따라 볼까?」

하고 두 팔을 벌리고 평상을 뛰어 넘어 예랑을 붙들려 한 다. 예랑은 아니 잡히려고 날쌔게 비킨다. 강월을 가운데 두 고 대소와 예랑은 비키거니 따르거니 한다. 대소의 허리에 찬 칼이 흔들리고 누런 비단에 주홍 단을 단 웃옷이 펄럭거 린다.

『동궁마마. 이몸을 따르지 마시오. 잡히자니 무례하고 비 키자니 황송하오. 제발 이몸에 손을 대지 마시오.』

하고 예랑이 손을 모아서 애원한다. 예랑은 얼굴이 상기가 되고 가슴은 숨이 차서 들먹인다.

『예랑 닫지 마오. 예랑이 안 달리면 이몸도 안 따르리라.

그러나 예랑이 달리면 이몸은 하늘 닿은 끝까지라도 아니 따르고는 말지 아니하겠소.』

이렇게 말하는 대소의 얼굴에는 살기가 떴다. 예랑은 무릎 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동궁마마. 제발 자리에 돌아 가 앉으시오. 소인이 말씀으 로 아뢰오리다. 마마께서 만인을 힘으로 죽이실 수는 있더 라도 한 계집의 뜻을 힘으로 앗으신다고는 생각지 마시오.

동궁마마는 세찬 남성이시고, 이몸은 잔약한 계집이오니 이 렇게 이몸을 쫓으시면 필경은 이몸을 붙드시겠으나 그때에 는 이몸은 벌써 송장일 것이니 제발 자리에 돌아 가셔서 이 몸의 아뢰는 말씀을 들으시오.』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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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랑의 용모와 음성에는 애원하는 부드러움 속에도 늠름한 기상이 있었다. 그 부드러움은 대소에게 그리움을 주고 늠 름함은 무서움을 주었다. 대소는 예랑의 명령에 복종하는 듯이 자리에 돌아 가 앉았다.

『자, 애기 말대로 자리에 돌아와 앉았으니 한다는 말을 하여 보오. 여러 말 다 원하지 아니하니 꼭 한 마디 나를 따라 백년을 같이 산다 하시오. 청실로 홍실로 우리 두 놈 찬찬 감고 북향하고 검님 앞에 가지런히 서서 두 몸 한 몸 되어지라, 천년만년 살아지라, 아들낳아 딸을 낳아 백자 천 손 하여지라, 이렇게 혼인 맹세한다 하시오. 그 밖엣 말은 이몸이 듣기 싫소. 자 어디 말해 보시오. 내 본대 성미가 급 급하거니와 아기의 요모 조모에 홀딱 반하여서 정신 차릴 수 없고 더 참을 수 없소. 아기, 어디 속 시원히 말해 보시 오.』

하고 대소는 예랑이 아까 앉았던 자리에 돌아 와 옷깃을 여미고 치맛자락을 모으고 두 손을 팔짱껴 읍하고 고부슴 고개를 숙이고 앉는 양을 젖은 눈으로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대소의 말과 같이 요모 조모, 앉은 모양, 놀라는 것, 겁내는 것, 새뜩 성내는 양, 시무룩 근심하는 양, 어느 하나 마음을 끌지 않는데가 없었다. 더구나 새침하고 앉아 아직 몸도 입도 고요한 모양이 못 견디게 고와서 그 몸이 한번 움직이면 전신에 꽃이 활짝 피고 그 입술이 한번 열리면 향 기로운 음악을 품긴 바람이 천지를 채울 것만 같았다.

『어쩌면 저대도록 잘 생겼을까.』

대소는 새삼스럽게 예랑의 아름다움에 놀랐다. 그러고 그 예랑이 제 아내가 될 것이 기뻤다. 지금까지 본 모든 여자 들은 모조리 빛을 잃어 다시는 거들떠 볼 수도 없는 추물이 되어 버리는 것 같았다. 대소는 이 순간 제가 태자인 것도 잊었다. 아름다운 예랑의 앞에 서서 그 사랑을 비는 한 거 지와 같았다. 예랑의 사랑을 얻기 위하여서는 무엇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 사랑은 예랑의 처분에 달린 것이지 대소의 권력이나 완력으로 빼앗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예랑은 대소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백성의 한 몸이라 하는 생각은 아까 생각이었다. 대소의 앞에 무릎을 꿇 자가 예랑이 아니요, 예랑의 앞에 무릎을 꿇 자가 대소라고 하는 것이 지금의 생각이었다. 예랑의 높은 아름다움이 대소의 마음을 높인 것이었다. 이 침묵의 순간이 고대로 얼어 붙었 으면 얼마나 아름다우랴. 그러나 그것은 무지개보다도 더 짧은 동안이었다.

이러한 고요함 속에서 예랑은 최후의 비장한 전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의 마음에 비추인 대소는 시각이 지날수록 검은 빛을 띠었다. 그는 벌써 높으신 동궁은 아니요, 예랑을 노리는 추하고 악한 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나라의 한 처녀 로서 욕심없이 젊은 동궁을 사모하던 그 고운정을 깨뜨리지 아니하면 아니 되는 것이 예랑에게는 슬펐다.

11

[편집]

예랑은 될 수만 있으면 이 일을 순탄하게 해결하고 싶었 다. 대소 편에서는 왕자로서의 위신을 떨어뜨리지 말고 예 랑으로서는 신하로의 예절을 잃지 말고서 제 몸을 온전하게 하고 싶었다. 그리하자면 대소의 마음을 돌리는 길 밖에 없 었다. 대소의 마음 속에 불같이 일어나는 정욕과 교만을 돌 려서 연약한 처녀 예랑의 뜻을 꺾지 않고 그것을 이루게 하 여 주겠다는 점잖은 생각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 대소가 이 러한 인자한 마음을 내는 것은 안될 일은 아니었다. 만일 이 순간에 대소의 마음이 한번 인자한 방향을 취하여서 움 직였다면 예랑은 까닭 없는 고생을 아니하여도 좋았고, 애 매한 사람의 피가 아니 흘러도 좋았고, 대소는 와석 종신하 고 제 나라를 보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소는 그러한 사람으로 태어나지 못하였다. 남보다 뛰어나게 잘난 그의 몸과 마음의 어느 구석에는 그를 망할 길로 끌고 가는 검은 힘이 있었다. 그것은 교만과 성급하다는 형태로 나타 나 그의 성격을 지배하게 되어 있었다. 제가 높은 자리에 있는 것을 두렵게, 부드럽게 생각하는 것이 그 높은 자리를 잃지 않고 지니고 비결이요, 제 손에 큰 권세가 있는 것을 어렵게 미안하게 하는 것이 그 권세를 오래 누리는 길이어 늘, 대소의 마음에는 그러한 생각이 용이히 일어나지 아니 하였고, 혹시 일어나더라도 곧 풀어져 버렸다. 어려서는 예 백에게 배운대로 어렵고, 두려운 마음 공부를 하였지마는, 인제 수염이 나고 제멋대로 행동하게 된 뒤에는 그러한 공 부는 다 빠져 나가고 세상에 두려울 것, 어려울 것이 없다 는 자존심이 그의 행동을 지배하게 되었다.

무구의,

『두렵다니? 두려운 건 약한 자의 일이요, 어렵다니? 어려 운 건 못난 자의 일이요. 임금님의 아드님으로 잘나신 대장 부로 무엇이 어렵단 말씀이요? 그저 무에나 하고 싶으신 대 로 다 하시오. 늙어지면 못하나니 젊으신 동안에 다 하시오.

죽어지면 쓸 데 있소? 살아 생전 하고싶은 노릇 다 하시 오.』

하는 말이 더욱 귀에 폭폭 박혔다.

예랑에 대하여서는 권력이나 완력을 쓸 생각은 없었다. 그 래서는 맛이 없는 것이었다. 대소가 가장 바라는 것은 예랑 이 한참 싫다고 피하다가 마침내 못 견디는 체하고 제 품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호랑이도 사랑에만은 폭력을 아 니 쓰고 부드러운 정으로 하는 것이 아니냐.

『예랑, 어서 말하오. 왜 말을 아니하오. 두려울 것도 없소.

내 앞에서 무슨 말은 못하리. 아무런 말이나 하시오. 아기 입으로 나오는 말이면 내 귀에 약 아니 되는 것이 없어─자 어서 말하오.』

대소는 예랑의 고요한 옆 모습을 보는 동안에 일시 분했던 것도 다 풀리고 또 몸에는 따스한 기운이 돌았다. 진실로 예랑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성내지 아니할 것 같았다.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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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랑의 고부슴한 고개가 사르르 돌렸다. 귀불에 달린 옥고 리가 가볍게 흔들렸다. 마치 고요한 호수에 잔 물결이 일고 밤에 잠자는 수풀에 나뭇잎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과 같았다.

예랑은 사르르 일어나 두 팔 높이 들어 읍하고 가만히 무 릎 꿇며 바닥에 이마 대어 엎드려서 말하였다.

『동궁마마께 아뢰오. 젛사오되 이몸 높으신 뜻 못 받자오 니 죽여 주시오.』

예랑은 말을 끝내고도 고개를 들지 아니하고 엎드려 있었다.

예랑의 말에 대소의 깊은 눈썹이 흠칫 움직이며 눈초리가 올라 갔다.

꼭 다물은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금시에 전신이 공중으로 솟아 오를 듯 몸이 팽팽하더니 문득 다시 풀리며,

『애기, 무에라고? 지금 무에라고 했지?』

할 때에는 눈에 웃음까지 떴다. 그러나 그것은 달리는 구 름 사이로 삐끔삐끔 보이는 햇발과도 같아서 금시에 스러졌 다. 자리 잡지 못하는 마음의 허둥대는 그림자였다.

『젛사오나 동궁마마 높으신 뜻 못 받자오니 죽여 주오.』

예랑은 아까와 똑 같은 소리를 뇌며 이마를 조아렸다.

『무엇이? 뜻을 못 받으니 죽여 주오?』

『예. 높은 뜻을 못 받자오니…….』

『뜻을 못 받아?』

대소의 눈은 뼈로 깎아 박은 것과 같았다.

『예. 못 받자오니…….』

『무에라고? 내 뜻을 받는다고? 내 뜻을 못 받는다고? 이 바라.』

하고 강월을 눈으로 부른다.

『지금 너의 아가씨가 무에라고 하셨느냐? 내 뜻을 받는다 고 하였느냐, 못 받는다고 하였느냐? 너의 아가씨 말에 내 귀가 웅하고 머리가 띙하여, 내가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분 명치 아니하니 어디 네가 좀 말해 보아라. 너는 무에라고 들었느냐? 내 뜻을 받는다고 들었느냐, 못 받는다고 들었느 냐?』

강월은 무엇을 미리 느꼈는지 예랑의 곁에 바싹 다가서서 굴복하여 아뢴다─.

『하늘 아래 둘째로 높으신 동궁마마, 아뢰이라 하시니 똑 바로 아뢰오. 소인네 아가씨는 높으신 뜻을 못 받자오니 죽 여 주오 하고 사뢴 줄로 아뢰오.』

강월의 말은 싸늘하고도 침착하고도 힘이 있었다.

『이바라. 분명 그러하냐?』

『예, 분명 그러하오.』

『분명 내 뜻 못 받는다 하더냐?』

『예. 분명 동궁마마 뜻 못 받잡는다 한 줄로 아뢰오.』

『그러면 내 귀가 헛 들은 것이 아니었더냐. 그러면 그대 로였더냐. 고 발락거리는 가슴에서 고 주홍을 문 어여쁜 입 에서 내 뜻을 못 받는다는 말이 나오더란 말이냐. 에익! 태 자의 몸으로 한 계집에게 하룻밤 잠자리를 구하다가 거절을 당해도 못할 일이어든 혼인을 청하다가 그 뜻 못 받겠소 하 는 말을 듣고 내가 가만히 있을 듯 싶으냐. 그 목숨을 그냥 살려 둘 듯싶으냐?』

하고 칼을 쭉 빼어 들고 일어나는 대소는 비틀거렸다.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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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소가 시퍼런 칼을 들고 예랑 쪽을 향하고 한 발을 내어 딛는 것을 보고 강월은 벌떡 일어나 예랑의 몸을 덮어 안으며,

『아가씨, 아가씨!』

하고 황망하게 불렀다. 그러나 예랑은 꼼짝 아니하고 엎드 려 있었다.

대소는 내디딘 발을 다시 뒤로 끌어 들이고 칼을 도로 집 에 꽂으며,

『죽이기야 언젠들 못하리. 우선 왜 못 받나, 무슨 까닭에 내 뜻을 못 받나, 이야기나 들어 볼까.』

하고 누그러진 모양을 짓고 빈정거리는 소리를 지으나 눈 썹은 더욱 씰룩거리고 입과 눈은 더욱 초리를 길게 뽑아서 가슴이 터지려는 분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예랑아, 어디 말해 보아라. 내 뜻을 못 받는 네 까닭을 말해 보아라. 그 말이 다 끝날 때까지 네 목숨을 살려 주 마.』

예랑은 고개를 들어서 대소를 바라보았다. 대소의 눈에 성 난 불길이 있고, 예랑의 눈에는 슬픈 눈물이 빛났다.

『동궁마마, 젛사오되 이몸은 벌써 달리 허한 사람이 있소.

한번 허한 몸이니, 동궁마마께 드릴 몸이 없소. 이래서 뜻을 못 받잡는다 함이요.』

대소는 몸이 뒤로 젖혀지고 말문이 막히도록 놀랐다.

한참 지나서야, 대소는,

『몸을 허하였다?』

하고 간신히 말을 아물었다. 예랑이 대답 없는 것을 보고,

『몸을 허하였다? 흥, 예백의 딸이 예도 안 이루고 어떤 사내에게 몸을 허하였다? 그것이 옳은 일인가? 대관절 그놈 이 어떤 놈이란 말이냐. 내가 오래 두고 노리던 예랑을 나 보다 앞질러 버려 준 그놈이 어떤 놈이란 말이냐. 그놈의 이름을 대어 보아라. 필시 무지한 도적놈이거나 음탕한 오 입장일 것이다. 그런놈은 살려두어 소용없으니 한 칼로 베 어 버릴 것이야. 아니, 아무런 놈이라도 예랑의 몸에 손을 댄 놈이 있다 하면, 그냥두지 아니할 테다. 그놈이 어디로 달아났다면 땅 끝까지라도 찾을 것이다. 만일 그놈이 죽었 다면 무덤 속에 묻힌 송장을 파 내어서 개 밥을 만들 것이 다. 예랑아 어서 대어라. 그놈이 누구냐? 나보다 앞질러 네 살에 손을 댄 놈이 누구냐 말이다. 왜 빨리 말을 못할까. 그 놈이 어떤 흉악한 놈이란 말이냐.』

하고 한 마디 또 한 마디 말을 하면 할수록 대소는 기가 올랐다.

낯은 주홍빛이 되고 목소리를 찢겼다, 앉았다 일었다, 호피 위로 자꾸 몸을 옮기고 비벼 그 털이 다 닳아지고 말 것 같 았다. 대소의 가슴 속에서는 질투의 불과 분노의 바람이 날 쳤다.

예랑은 성화 같은 대소의 재촉에 대답을 아니하면 아니 되 었다. 그러나 무에라고 어떻게 대답할까. 예랑은 이때에 제 목숨이 왔다갔다함을 느꼈다. 그러나 제가 죽고 사는 것보 다도 예랑은 이 경우에 주몽과 및 친정 가문에 욕을 아니 돌릴 것을 생각하였다.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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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랑은 생각하였다, 대소가 성이 나면 그 칼로 예랑을 죽 일 것이라고. 지금에 예랑으로서는 거짓말로 대소를 달래는 것 밖에, 그것을 면할 길은 없었다. 몸을 허하였다는 것은 거짓이다. 대소를 따르겠다 하기만 하면 아무일도 없을 것 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예랑의 뜻이 아니었다. 비겁한 거짓 말로 구구히 목숨을 구한다는 것은 예랑의 성미가 아니었 다. 앞에 남은 것은 큰 임금의 어머니답게 죽는 것이었다.

그리운 주몽을 다시 대하지 못하고 죽는 것도 슬픈 일이어 니와 뱃속에 든 애기(큰 임금일 줄 믿었던)의 얼굴도 못 보 고 마는 것이 원통하였다. 그것을 생각하면 예랑은 주몽의 어머니 유화가 금와왕을 따라서 주몽을 기른 것처럼 저도 일시 대소의 말을 들어서 뱃속에 든 아기를 기를 생각도 아 니 난 것은 아니었으나, 예랑의 매운 마음이 그것을 허하지 아니하였다. 죽고 사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뜻이라, 모든 구 차한 생각을 다 버리고 옳다고 믿는 바를 따르자. 사랑하고 사모하는 주몽의 품에 안겼던 몸을 더럽히지 말고 그가 끼 친 씨를 안은 채로 깨끗이 가자, 하고 결심할 때에 예랑의 마음은 편안하였다. 그래서 예랑은 고개를 들어 정색하고 이렇게 대소에게 말하였다.

『동궁마마. 이몸은 벌써 남의 아내요. 비록 겉으로 이루지 못하였으나 천지 신명이 용납하실 줄 믿소. 이몸의 지아비 는 목숨의 위험을 무릅쓰고 이몸과의 언약을 지켰소. 이몸 의 지아비는 도적놈도 아니요, 흉악한 놈도 아니요, 잘나고 용맹 있고 그러고도 한 여자와의 언약을 목숨을 내어 놓고 지키는 사람이니, 필시 천하 백성이 우러름을 받을 사람인 가 하오. 동궁마마께오서는 만 백성의 아버지 되실 어른이 시니, 연약한 한 아내의 뜻을 세워 주시오. 이몸은 죽어서 넋이 되어서라도 크신 은혜를 갚사오리다.』

하고 예랑은 엎드려 머리를 조아린다.

『핑계가 아니라, 정말이란 말이냐? 마음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몸까지 주었단 말야?』

하고 대소가 소리를 질렀다.

『그러하오.』

『그게 핑계가 아니고 정말이야? 정말 네가 그 사내하고 살을 마주 대었단 말이야? 동침을 하였단 말이야?』

『정말이오.』

『거짓말이라고 하여라! 그런 일 없다고, 핑계로 한 말이라 고 해!』

『거짓말을 아뢰일 수 없소. 이 뱃속에 그 사람의 씨까지 들어서 자라고 있소. 천지 신명이 다 아시는 일을 어떻게 높으신 어른을 속이오. 정말이요.』

『아이까지 배었다?』

『예.』

『빤빤스럽게 그런 소리를 해?』

『젛사오나 그러한 것은 그러하다고 아뢰오.』

『그 사내라는 것이 설마 주몽은 아니겠지? 설마 주몽은 아니겠지?』

예랑은 잠잠하였다.

『설마 주몽은 아니겠지? 주몽은 아니라고 하여라!』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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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예랑은 잠잠하였다.

『왜 말이 없어? 주몽은 아니겠지?』

하는 대소의 얼굴은 해쓱하고 부르쥔 두 주먹은 떨렸다.

『그놈이, 그 사내가, 네 뱃속에 들었다는 새끼의 아비가 주몽만 아니라면 용서하마. 예랑, 너도 살려 주고 그 사내놈 도 살려 주마. 예랑아, 바로 말하여라, 그놈이 주몽은 아니 지? 네 뱃속에 든 것이 주몽이놈의 새끼는 아니지? 설마 그 럴라고? 설마 주몽일라고? 으흑! 왜 말을 아니해? 주몽은 아니라고 왜 말을 아니해? 거짓말로라도 주몽은 아니요 하 여라. 어떻게도 주몽이놈은 나와 이렇게도 원수일까. 어떻게 하나님은 나를 내고 주몽을 함께 내었을까. 그것이 하나님 의 심사라면, 나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련다. 하나님과 싸우 고 하나님을 죽이련다. 그러나 그렇지는 아니할 것이다. 그 놈이 주몽은 아닐 것이다. 예랑아, 왜 말이 없어? 제발 주몽 은 아니요 하려무나!』

대소의 얼굴은 막 찌그러지도록 비틀렸다.

예랑은 이 자리에서 주몽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었다. 대 소의 앞에서, 천지 신명의 앞에서 제 지아비는 주몽이요, 뱃 속에 있는 아기의 아비는 주몽이라고 크게 외치지 않는 것 은 큰 죄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예랑은 꿇었던 자세에서 일어나, 대소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여무진 소리로 선언하였다.

『이몸의 지아비는 주몽아기요, 이몸의 뱃속에 든 아기는 주몽아기의 씨요. 햇님·달님·별님이 증명하시오.』

예랑의 소리가 쇳소리와 같이 방안에 울릴 때에 천지도 함 께 울리는 것 같았다. 「훅!」하고 맹수가 볼을 구르는 소리 가 나더니, 칼을 빼어든 대소가 예랑을 향하고 상에서 뛰어 내려왔다. 예랑은 그것을 못 본 듯이 그린 듯 서 있었다.

대소의 칼끝과 예랑의 가슴과의 거리가 한 자나 남았을 듯 한 때에 강월이 그 사이로 뛰어 들어 대소의 칼을 대신 받고,

『아악!』

하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대소의 어깨에 두 팔을 걸고 매어 달리니, 강월의 목에서 나는 붉은 피가 대소의 앞가슴 을 적시고 방바닥에 흘렀다.

대소가 황망하게 뒤로 물러서니, 강월의 몸이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이때에 문 밖에 있던 예도가 문을 열고 쑥 들어 와서 예랑과 대소의 사이를 막아 섰다.

『동궁마마, 칼을 집에 꽂으시오.』

하고 명령하는 어조로 힘있게 말하였다.

대소는 피묻은 칼을 땅에 떨어뜨리면서,

『예도, 내가 사람을 죽였다. 네 누이 예랑을 죽인다는 것 이 애매한 딴 사람을 죽였다.』

하고 무안한 듯, 겁이 난 듯 두 팔을 늘이고 고개를 숙였다.

『용감한 사냥군이 범이나 곰을 잡듯이 동궁마마는 연약한 여자를 죽였소.』

하고 벌써 숨이 끊어진 강월의 몸을 굽어 보았다.